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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핵개발을 시도한 나라중 하나였으나 2차대전이 고착화됨에 따라 연구 내용이 미국에 이관되었고, 전후 미국의 맥마흔 법에 의해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자 1952년 호주와 협력해 자력 개발에 성공했다. 이 문서는 영국의 핵개발 과정을 전체적으로 다뤘다.2. 튜브 앨로이스
자세한 내용은 튜브 앨로이스 문서 참고하십시오.1932년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과 1938년 오토 한의 우라늄 인공 핵분열 실험을 바탕으로, 브래그와 톰슨을 주축으로 한 영국 물리학자들은 핵분열시 나오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무기화에 고무되었다. 채드윅과 티자르[1]를 위시로한 대부분의 영국 물리학자들은 회의적 시각을 보냈으나, 브래그와 톰슨은 영국 정부와 접촉해 영국 정부가 우라늄 광산의 획득과 핵개발의 타당성을 검증하도록 건의했다.
1939년 6월 타당성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파이알스와 프리슈가 임계질량에 도달해 연쇄 핵분열을 성공시키자, 정부는 MAUD를 발족시켜 핵개발에 대한 연구를 6곳의 연구소에서 진행했다.
3. 맨해튼 프로젝트
1943년 처칠과 루즈벨트의 협상으로 튜브 앨로이스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쳐짐에 따라, 기존에 튜브 앨로이스에 참여하고 있던 19명의 물리학자는 자동적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되었다.4. 하이드파크 협정과 맥마흔 법
1944년, 미국은 영국과 하이드 파크 협정이라는 비밀협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영국에게 핵무기 관련 기술 지원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쟁이 끝이 보이는 1945년 7월경 영국은 하이드 파크 협정을 거론하며 핵무기 기술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에는 협정문의 사본이 있지만 미국에는 없다는 기묘한 상황을 맞이했고. 1946년 미국은 맥마흔 법안[2]을 통과시켜 핵물질 및 핵기술의 국외 이전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면서 영국에게 엿을 먹였다.[3]튜브 앨로이 프로젝트의 엄청난 자료를 주고도 핵무기 최종기술이라는 자료 대금을 떼먹힌(...) 영국은 매우 분노했고[4] 그 해 마침내 호주의 협조 아래 독자 핵개발을 시작하기로 결의한다.
5. AERE의 발족
1946년, 영국 정부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존 콕크로프트가 요청하여 설립한 원자력 연구 기관(Atomic Energy Research Establishment, AERE)에서 핵무기 연구를 하기 시작했으며,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영국인들을 모두 귀국시키는 강수를 둠과 동시에 타 국적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을 뒷구멍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소련의 스파이인 클라우스 푹스도 참가해서 결과적으로 영국의 핵개발 상황을 소련에 유출하게 되지만, 푹스가 영국에 유출해줬던 팻 맨과 폭축렌즈 설계도, 핵실험 데이터, 우라늄 생산법은 영국의 핵무장에 상당한 도움이 됐었다. 1947년 군사용 원자로에서 뽑은 핵연료를 재처리하기 위해 셀라필드 원자력 단지를 건설하였다. 그후 1946년부터 윌리엄 페니 경[5]의 감독하에 Atomic Weapons Establishment를 운영하게 된다. 1948년 영국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6. 허리케인 작전
1952년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에 수소폭탄의 실험에 성공하면서 영국은 성공적으로 핵클럽에 가입, 소련보다는 늦긴 했지만 영국도 세번째 핵 보유국이 되면서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외교를 할 위치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호주에게서 핵무기 원료 물질들을 대량 확보했으며, 호주 정부로부터 광활한 면적의 핵실험지와 핵실험 재료[6]들을 빌릴 수 있었다.[7] 대표적인 핵실험 장소로는 마랄링가, 에뮤 필드, 몰든 섬, 크리스마스 섬[8], 몬테벨로 섬 등이 있다. 호주 땅에서 핵실험을 진행하다가 1958년 영국과 미국이 상호 핵무기 개발 조약을 맺고 미국 땅에서 핵실험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 후 이 관계는 매우 돈독해져, 1960년대 미국의 폴라리스 미사일을 구입하게 되었다.
[1] 당시 임페리얼 칼리지의 총장이었다.[2] 비밀리에 진행된 맨해튼 계획이 있는 줄도 몰랐던 미국 의회가 원자폭탄이 존재함을 알게 되자, "아니, 이렇게 좋은 무기를 왜 다른 놈들하고 나눠가져? 이건 오로지 미국만 가져야 함!"이라고 외치며 만든 법이다. 즉, 외교 관계 따위는 싹 말아먹고 의원님네들의 근시안만으로 만들어진 법. 하지만 당시의 반공 분위기도 한몫했다. 사실 소련에게 넘어가는 걸 더 우려한 법안이라... 그리고 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3] 반면 영국에 핵기술을 넘기지 않은 이 조치가 공산주의 진영으로 핵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지연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이미 영국은 구식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원심식 제트엔진을 기술제휴랍시고 소련에 넘겨준 사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롤스로이스가 자신들의 제트엔진을 소련에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처칠에 비하면 소련에 온건한 입장이었고 소련의 기술적 역량을 과소평가했던 애틀리 정부가 이를 승인했던 것이다 . 그런데 소련은 그렇게 엔진을 받아서 라이센스한 다음 라이센스 비용을 그대로 떼먹었다(...). 물론 비군사용으로 넘겼다고는 하지만 어떤 바보가 제트엔진이나 되는 물건을 비군사용으로만 놀리겠는가? 덕분에 2차 대전 당시의 Me-262 수준에서 놀던 소련 공군기들은 단숨에 MiG-15라는 괴물이 되어 많은 미군기를 바닥에 쳐박았다.[4] 학자들은 1940년부터 2010년까지 아마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이렇게 험악해진 것은 이때가 유일하리라고 평한다.[5] William Penney. 영국 물리학자로, 영국의 핵무장에 매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인해 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6] 대표적으로 핵 피폭시 전차의 생존성을 알아보기 위해 호주군 소속 센추리온 전차를 핵실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당시 센추리온 전차는 핵실험에서 생존했으며, 이후 제독 과정을 거쳐 1980년대까지 현역으로 사용되다 퇴역 후 보관 중이다.[7] 물론, 알더마스턴의 핵무기 연구소 과학자들이 본토 안에서 자리를 찾아보니, 요크셔 스킵시(Skipsea)가 최적이어서 2차 원폭 실험을 하려 했지만, 근처 방갈로 등에 피해간다고 결국 계획이 취소된다.[8] 현재는 키리바시의 키리스마스섬(Kiritimati)으로 불린다. 나중에 미국도 여기서 핵실험을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