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이름은 옥정(玉貞)[1]으로 성은 장(張),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659년(효종 10) 기해생(己亥生)으로 역관 장형(張烱)과 계실 윤성립(尹誠立)의 딸 파평 윤씨 사이 막내딸로 태어났다.[2] 그녀의 이복형제 장희식[3]과 동복형제 장희재와 장녀(김지중의 처)가 있다.인동 장씨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었다.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통문관지』에 ‘품격이 우아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으며, 문필에 능하고 중국 말을 잘하여 비록 탐오한 중국 사람이라도 감히 함부로 요구하지 못하였다.’[4]고 그 행적이 기록될 정도로 선조 때 유명한 역관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특히 종백부 장현(張炫)[5]은 인조 때부터 숙종 때까지 활동한 이름난 역관이었다. 그는 동생 장찬(張燦)과 함께 삼화(蔘貨) 등 사무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6] 이로 인해 조정 내에서 갑부로 통했다.
외조부 윤성립 역시 왜학 역관으로 생전 최고 관작이 사역원 3등작인 종4품 첨정에 이르렀고, 외조모 초계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한 변승업의 당고모로 변승업의 아버지이자 『허생전』의 ‘변 부자’로 등장하는 변응성의 사촌누이다. 외숙부 윤정석은 육의전 면포 상인이었는데, 면포는 당시 화폐 대용이라 오직 육의전 면포상에서만 취급할 수 있었던 물품이었으므로 그 부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다.[7] 따라서 친가와 외가 모두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음을 알 수 있다.
2. 궁녀 입궁
2.1. 배경
장옥정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신분은 중인에 불과하였다. 혹자는 그녀의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처갓집 여종이었다는 실록의 자료를 근거[8]로 종모법에 따라 그녀 역시 여종 처지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9][10]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이자 『숙종실록』의 총재관인 민진원은 개인 저서인 『단암만록』에서 ‘(장)형이 일찍 죽어 그 처(其妻)가 가난이 심해 품팔이(傭)를 하였으며, 이웃에 사는 조사석 집에 수시로 출입하여 조사석 부인에게 빌어먹었다(丐食)’고 썼다. 그러나 민진원이 쓴 이 문장은 윤씨가 장형의 첩이 아닌 처였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해당 문장에 쓴 여종(婢)이 신분제 상의 노비 신분을 뜻한 것이 아니었음을 본의 아니게 후세에 증명해 버리고 말았다.[11]
종백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라 할 정도로 부자였지만, 역시 중인 신분이었다. 역관은 ‘역상(譯商)’이라고 불리며 사회적으로 낮잡아 보는 처지였다.[12][13] 그는 중국과 조선을 오고가며, 고위직 관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역관의 신분을 활용해 사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당시 집권 남인 세력과 친분 관계를 쌓았다. 이 당시 그는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과 그 아들들인 복창군과 복선군 및 남인의 영수 허적 등과 청나라 사신으로 갈 때 자주 동행해 친분도 맺게 되었다. 이는 “장현의 父子는 일찍이 이정·이남에게 빌붙은 자이겠습니까? 그의 마음가짐이나 하는 일들이 國人에게 의심을 받아온 지가 오랩니다.”[14]라고 말한 데서 확인된다.
유복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장옥정이 언제 어떠한 이유로 궁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옥산부원군 신도비에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가 성장한 뒤 비빈의 자리에 올라 원자를 길렀다’[15]고 하거나 왕비로 책봉하는 숙종의 전지(傳旨)에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16]라고 한 사실을 통해 어린 나이에 궁중에 뽑혀 들어온 궁녀였음을 알 수 있다.[17][18] 또한 궁녀는 보통 지밀은 네다섯 살, 침방과 수방은 예닐곱 살, 그 밖의 처소는 열두 살 안팎에 선발하였으므로 성인이 된 뒤에 궁녀가 될 수는 없었다. (김용숙,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 일지사, 1987.)
11세인 1669년(현종 10) 1월에 부친 장형이 47세의 나이로 죽으면서 가정형편을 입궁 이유로 볼 수도 있겠지만, 부유한 중인층 집안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어려움보다 정치적인 의도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 세력과 인연을 맺은 장현이 현실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종질녀 장옥정을 궁녀로 입궁시킬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는 이미 본인의 딸을 궁녀로 입궁시켜 내수사의 내패(內牌)를 이용해 이득을 취한 적도 있었다.[19]
처음 장옥정이 배속 받은 곳은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처소였을 것이다. 장렬왕후는 숙종의 법적 증조모로, 당시 대왕대비였다. 왕실의 가장 웃어른께 임금이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니, 숙종의 눈에 띄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그 외에 수표교와 관련된 야사가 전해진다. 숙종이 수표교 건너 영희전(또는 종묘)에 참배하러 갔다가 수표교 근처 여염집에서 행차를 지켜보던 장옥정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래서 증조모인 장렬왕후에게 부탁하여 궁녀로 삼아 사랑의 결실을 보았다는
2.2. 출궁 과정
전에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獄事)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 경신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왕후(明聖王后)가 곧 명(命)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아내 신씨(申氏)가 기화(奇貨)로 여겨 자주 그 집에 불러들여 보살펴 주었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장옥정이 숙종을 모신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경신년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라거나,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서 여러 날 동안 사라지지 않는 이변이 있었는데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때가 이 무렵이다.’[21][22]라고 한 사실에서 인경왕후가 죽은 이후로 추측할 뿐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22세였다.
장옥정은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 당한 뒤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법적 며느리이자 친정 외질녀인 숭선군 부인 신씨의 도움을 받았다. 실록의 찬자는 ‘신씨가 기화(奇貨)로 여겨’[23] 보살펴 주었다고 하지만 계비 간택을 장렬왕후가 아닌 명성왕후가 주도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장렬왕후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24][25] 명성왕후가 건재한 이상 재입궁은 요원한 일이었다.
명성왕후는 인경왕후가 죽은 지 3개월 만에 언서(諺書)를 내려 새 왕비를 간택할 뜻을 비쳤다.[26] 이 이례적으로 빠른 계비 간택과 장옥정의 출궁은 연관성이 있다. 우선, 관찬사료인 『숙종실록』이 장옥정을 ‘장형의 딸’이 아니라 ‘장현의 종질녀’라고 쓰고 있다는 점과 경신환국에서 장옥정의 친정이 피해를 보았다는 점에서 남인과의 정치적인 연계성을 의심받았을 것이다. 또한 경신년 전에 윤휴·허목 등 남인이 친잠[27]을 이유로 후궁을 들일 계획[28][29]을 한 적이 있고, 인경왕후 생전에 연달아 세 번의 임신[30]을 하였으나 불행히 후사가 없어 국본(國本)이 없다는 점은 명성왕후의 불안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특히 ‘여수(麗水) 신녀(辛女) 사건’[31]은 명성왕후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숙종의 계비가 된 인현왕후가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미안한 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며 청하자, 명성왕후는 “내전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며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명성왕후가 말하기를,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궁인 장씨(張氏) 비로소 후궁에 참예하여 희빈(禧嬪)을 봉(封)하시니, 간교하고 민첩혜힐(敏捷慧黠)하여 상의(上意)를 영합하니 상께서 극히 총애하시니라.
작자 미상, 전규태 주해, 『인현왕후전』
작자 미상, 전규태 주해, 『인현왕후전』
그리고 『인현왕후전』에서 장옥정을 “민첩혜힐(敏捷慧黠)하여 상의(上意)를 영합하니 상이 극히 총애하시니라.”라고 하며 '눈치가 빠르고 약삭빠르며 임금의 뜻을 알고 아첨하며 좇다'라고 묘사하였다. 이는 명성왕후가 내전(인현왕후)에게 장옥정이 숙종의 감정[32]을 조종하여 국가의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3. 후궁 생활
3.1. 재입궁
명성 왕후가 승하한 후에 내전이 다시 임금을 위해 그 일을 말하였고, 자의전(慈懿殿)도 또한 힘써 그 일을 권하니, 임금이 곧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총애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대전(大殿)의 춘추(春秋)가 장차 30세가 될 것인데도 아직 저사(儲嗣: 세자)를 낳을 희망이 없자, 중궁전에서 이를 근심하여 대전에게 깊이 권면하니, 이에 장씨를 받아들였다.
大殿春秋將滿三十, 尚無儲爾之望, 中宮殿用是憂憫, 深勸大殿, 仍納張氏.
이문정,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수문록』
大殿春秋將滿三十, 尚無儲爾之望, 中宮殿用是憂憫, 深勸大殿, 仍納張氏.
이문정,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수문록』
1686년(숙종 12) 2월 3일 명성왕후의 담제(禫祭: 상제 뒤 1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까지 숙종은 자식이 없어 매우 근심하는 처지로 술가(術家)들의 말[33]을 믿고 따를 정도였다. 이에 인현왕후가 장옥정의 재입궁을 권면하고 장옥정을 각별히 아꼈던 장렬왕후가 힘써 주선한 끝에 6년 만에 궁중으로 돌아왔다.
장옥정은 궁궐에 다시 들어오자 곧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비록 직첩은 받지 못했지만, 숙종의 총애와 장렬왕후의 신임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입지와 위세는 당당하였다. 이때부터 장옥정은 서인 세력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여러 차례 후궁을 들일 것을 종용하였는데[34] 이것은 장옥정을 향한 숙종의 총애를 분산시키려는 의도로[35] 서인 세력의 목표와 부합되는 행보였다. 때마침 간택 절차를 거쳐 뽑힌 후궁이 당시 18세였던 청양 현감 김창국의 딸이다. 후일 영빈이 되는 숙의 김씨는 인현왕후와 인척 관계[36]에 있는 명문세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영빈은 임신이 어려울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고[37] 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인은 더욱 본격적인 장옥정 축출 운동에 나선다. 윤4월 20일 소대(召對)에서 이이명이 한 성제의 말로를 거론하면서 여색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의 종조부 김수항도 장옥정 축출에 가담하였다. 6월 13일 역관 장현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역적(譯籍: 역관 명단)에 올라 사행(使行)에 참여하고 있는데 복창군 형제의 심복이었던 죄를 물어 대역죄로 처결하기를 요구한 것이다.[38] 장현이 대역죄인이라면 연좌율에 따라 장옥정도 출궁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숙종의 강력한 비호 아래 실패한다.
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一日, 上欲戲之]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내전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숙종이 장옥정을 사랑한 것은 젊음 때문이 아니었다. 숙종이 1661년 (현종 2), 인현왕후가 1667년(현종 8), 장옥정이 1659년(효종 10)에 태어났으니 그녀는 숙종보다 2년, 인현왕후보다 8년 연상이다. 대신 실록에서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하였으므로 눈에 띄는 뛰어난 미인이었을 것이다.
인용문은 명성왕후가 죽고 다시 입궁한 장옥정이 ‘왕이 자신을 희롱하려고 하는데 자신을 살려주라‘고 요청하며 왕비에게 승인을 얻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서 자신이 먼저 왕을 유혹한 것이 아님을 왕비에게 알리고 앞으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39] 이러한 장옥정의 모습은 마치 자신보다 나이 어린 왕비를 시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40]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인해 마치 연인 사이의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한 것처럼 오해받는데, 이 문장에서 희롱은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원문에서 보이는 한자 ‘戲’는 놀이의 뜻으로 불꽃놀이나 수박희 같은 유희 거리에도 쓰지만, 성행위를 말할 때도 쓴다는 것[41]에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또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근족(近族)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 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상처를 받는 길이 많아지고 나면 병을 조심하려는 뜻이 늦추어지기 쉽고, 말을 받아들이는 계제가 바르지 않으면 참소의 길이 쉽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께서 절실히 경계하고 두려워 하셔야 될 바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장현의 부자(父子)는 일찍이 정(楨)·이남(李枏)에게 빌붙은 자이겠습니까? 그의 마음가짐이나 하는 일들이 국인(國人)에게 의심을 받아온 지가 오랩니다. 이제 만약 그들의 근족을 가까이하여 좌우에 둔다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화란이 다 여총(女寵)으로 말미암고, 여총의 화근은 대개 이러한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알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은 바라건대, 성상께서 장녀(張女)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7월 6일 무자 1번째기사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7월 6일 무자 1번째기사
7월 6일 이징명은 숙종에게 자연의 재이(災異)를 두려워할 것과 수성(修省)에 힘쓸 것을 권유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외간의 말을 빌려 재입궁한 장옥정에 대한 우려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출궁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이징명의 상소는 단순히 장옥정에 대한 총애만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남인 재집권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이징명이 파직되고 상소를 봉입한 승지 신필·김두명까지 하옥되었다. 오히려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총애와 대우는 더욱 심해지고 융숭해졌다.
9월 5일 이국화·원진택·이덕성[42]이 천재(天災)가 거듭 일어나[43] 백성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궁중의 건축을 중단하기를 청하였다. 당시 궁궐에서는 별당을 짓고 있었는데 이 별당이 장옥정을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공사는 비밀리에 진행되어 목재를 실어 오고 목수를 불러들이는데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하여 외부가 알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숙종은 “전해 들은 것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공사를 중지하지 않았다.[44] 9월 13일에도 영빈의 종숙부 김창협이 “관어(貫魚)를 순서대로 할 수 있게 하여 종사(螽斯)의 경사가 있게 하라.”는 내용으로 상소하였다. 여기서 ‘관어’는 궁인 거느리기를 물고기를 엮듯이 순서가 있게 해야 한다는 뜻이고, ‘종사’는 메뚜기나 여치 등의 곤충이 한 번에 99개의 알을 낳는 것을 비유하여 부부가 화합하여야 자손이 번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왕은 내전과 후궁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여 자손이 번성하여야 한다는 말이니 장옥정에게 숙종이 내린 총애가 지나치다고 경계한 것이다. 이들 대다수가 인현왕후나 영빈과 가깝거나 먼 일족으로 하나같이 들은 소문이라 주장하면서 장옥정 축출을 도모하였다.
12월 10일 숙종은 서인 세력의 항소를 일소에 부치듯 장옥정을 숙원(淑媛)으로 봉작하였다. 숙원은 내명부 종4품에 해당하는 가장 말단 후궁이지만 사가의 첩실과 다르며, 내명부 관원이자 왕실의 일원으로서 궁방(宮房)을 운영하며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적(趙賊)’으로 불리는 귀인 조씨 수준의 죄를 짓지 않고서는 인현왕후가 함부로 쫓아내거나 죽일 수도 없게 되었다. 여기에 숙종은 특별히 백 명의 노비까지 하사하였다.[45]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궁인(宮人)들은 왕족(王族)들과 체결(締結)하고, 왕족들은 사대부(士大夫)들과 결탁하여 갖가지로 아첨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捏造)하며 음흉한 소문을 지어내어 군주를 모함하는 습관은 진실로 매우 통탄할 일이다. 지금부터 이와 같은 일은 드러나는 대로 효시(梟示)하는 것을 영갑(令甲)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의 전교 가운데 왕족(王族)은 대체로 제공주(諸公主)들을 가리킨 것으로서, 익평 공주(益平公主)의 집이 더욱 의심을 받았다. 나중에 대신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환수(還收)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4일 갑자 4번째기사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4일 갑자 4번째기사
당시 사간원 정언 한성우(韓聖佑)[46][47]는 “장씨에게 봉작을 더해 주시는 전하의 거조에 과연 추호도 사사로운 뜻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48]라고 하면서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 때문이며, 전하가 장씨를 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나갔다. 숙종은 “모욕을 당했다.”고 분노하면서 한성우를 체직하였다. 여기서 왕족과 체결한 궁인은 인현왕후나 영빈 김씨 또는 두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사대부와 결탁한 왕족은 주가(主家: 공주가)로 특히 익평위 홍득기(숙안공주의 남편)의 집이 의심받았다. 그러나 승정원과 홍문관이 일제히 한성우를 두둔하고,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이단하의 진언[49]으로 숙종의 전교는 회수됐다. 대신 숙종은 의빈(儀賓)의 정사 참여를 다시 국법대로 금지하고 지난번 해창위 오태주(명안공주의 남편)가 진청한 일[50]은 앞으로의 폐단이 될 수 있다며 들어주지 않았다. 즉 오태주를 통해 경고 조처를 한 것이다. 실록의 찬자는 이날 기사에 ‘여러 공주들은 다 장씨(張氏)에게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태주가 이러한 엄한 교지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 썼는데, 숙안공주·숙명공주·숙휘공주·명안공주는 모두 서인 가문 며느리로 인현왕후, 영빈과 인척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인현왕후 복위운동에 가담하여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3.2. 유언비어 사건
5월 1일 숙종은 조사석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동평군을 혜민서 제조에 임명하였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소생인 숭선군 이징의 아들이고, 조사석은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재종동생이다. 조사석은 숭선군의 처당숙으로, 숭선군의 아내이자 조사석의 오촌 조카의 아들이 동평군이다. 장렬왕후는 숭선군 부인에게 이모였다. 더구나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와 조사석이 내연의 관계였다[51]는 노론 측의 억측이 있을 정도로, 두 집안은 친밀한 관계였다. 심지어 장옥정이 다시 궁에 들어왔을 때의 정황을 묘사하는 데에서 ‘자의전(장렬왕후)은 이징의 아내를 믿고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하여 중전 민씨와 소원하였다’[52]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장옥정은 장렬왕후, 숭선군 내외, 조사석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당시 홍문관 부교리 민진주(인현왕후의 사촌)가 숙종이 직접 재상을 임명한 행위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궁중 안에서는 숙명공주가 “그 사람이 재주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숙안공주도 “조사석이 좋은 명정(銘旌) 감을 얻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비난을 쏟아냈다. 동평군 역시 조정의 거센 반발로 4개월 후에야 출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53] 그 후 조사석은 여러 번 사직을 청하고, 숙종은 허락하지 않는 일이 계속되었다.[54] 이러한 때에 김만중이 “후궁 장씨의 청탁으로 정승이 되었다.”며 유언비어를 언급하는 바람에 처벌받았다.[55] 물론 숙종이 장옥정에 대한 총애나 청탁으로 조사석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우의정 임명에 대해 세간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장씨의 위세를 추측할 수 있다.
장(張)의 어미가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란 것은 전연 허황한 말이고, 사통(私通)했다는 말은 더욱 무리(無理)한 말이다. 적(賊)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은 진시로 조사석과 지친(至親)이고, 조사석은 또한 이미 탁룡(濯龍)에게서 수계(受戒)한 사람이고 보면, 궁중(宮中)에서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함은 당초부터 일찍이 길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이제야 유독 동평군 항에게만 의지하게 되었겠는가?
숙종실록보궐정오 18권, 숙종 13년 6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숙종실록보궐정오 18권, 숙종 13년 6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한편 소론이 주도하여 수정한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 이 사건은 모함으로 정정된다. 또한 1689년(숙종 15) 김만중의 아들 김진화의 공초 내용인 “후궁(後宮)의 어미는 예전에 조 정승의 집과 같은 방(坊: 동네)에서 살았는데, 근일(近日)에는 발걸음을 끊고 왕래하지 않는다.”[56]는 장옥정의 어머니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기에 조사석과 친분이 있었던게 아니라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던 것을 시사한다. 더욱이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 장씨와의 연줄 덕이라는 소문을 지어낸 자가 숙안공주의 외아들이자 영빈의 이모부 홍치상이라는 사실은 이 유언비어의 신빙성을 떨어트린다.[57]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홍치상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숙명공주에게 들은 말’[58]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진범이 어느 쪽이든 이쪽 역시 장옥정과는 척을 진 관계로 증언의 순수성이 의심된다.
3.3. 옥교 사건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실록은 ‘왕자가 탄생하였으니 소의 장씨가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59] 왕자를 낳을 당시 장옥정은 종4품 숙원에서 정2품 소의(昭儀)로 품계가 높아졌다. 이같은 숙종의 지극한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소원하던 왕자를 낳은 것이다. 이 왕자가 바로 20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경종이다. 숙종이 재위 14년 만에 얻은 맏아들이었다. 이때 숙종의 나이 28세, 장옥정의 나이 30세였다.장옥정이 왕자를 낳자,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서 어머니가 윤씨가 지붕이 있는 가마인 8인 옥교(屋轎)를 타고 궁중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사헌부 지평 이익수·이언기는 사헌부의 금리(禁吏)를 시켜 옥교를 메고 왔던 노비를 치죄하고 옥교까지 빼앗아버렸다. 또 천인(賤人)이 옥교를 탔다고 하면서까지 그 무엄함을 규탄하기도 하였다.[60]
이에 숙종은 사헌부와 형조에 문목(問目)을 보내 출입패인 동패(銅牌)에 ‘입(入)’자를 쓰고 나갈 때는 ‘출(出)’자를 써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모두 왕명에 따라서 했고, 연전에 귀인(영빈 김씨)의 모친이 출입할 때에 사헌부에서 이와 같이 모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후궁의 산실은 으레 궁중에 만들기 때문에 후궁의 본가로 하여금 들어와서 간호하고 교자를 타고 출입하도록 허가한 것은 지금 새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해 오는 옛 규례이며, 궁중의 시녀들은 한 천인에 불과하나, 직품이 상궁에 오르면 법에 의하여 교자를 타게 된다며 반박하였다. 숙종은 지평 이익수와 이언기를 곧바로 파직하였으나 승정원의 간쟁으로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61]
당연히 원칙대로 한다면, 윤씨는 지체가 낮아 지붕이 있는 옥교를 탈 수 없다. 본래 옥교는 당상관의 부인이나 며느리나 되어야 탈 수 있지만, 영빈의 어머니도 당상관의 부인이 아닌데 옥교를 타고 궁중을 출입하였다. 하지만 조사석이 지적하듯 “장 소의의 어미는 여항의 천인”이고 “영빈의 내외족당은 여러 대에 걸쳐 중요한 벼슬을 한 집안”이니 같지 않았고, 또 윤씨가 탄 옥교는 8인이 메는 옥교로써 공주나 옹주가 탈 법한 “만든 모양이 매우 사치하고 참람함이 지나친 것”이었다.[62]
3.4. 원자 정호 사태
1689년(숙종 15) 1월 10일 숙종은 장옥정이 낳은 맏아들(후일의 경종)을 원자로 정호(定號)[63]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신들의 뜻은 “중궁께서 생남(生男)의 경사가 없으면 국본(國本)은 자연히 정해질 것”[64]이라는 데 있었지만, 숙종은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라는 말로 원자 정호를 완전히 못 박는다. 곧바로 1월 15일에 종묘사직에 고묘(告廟)하고, 생모 장옥정을 희빈(禧嬪)으로 삼아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였다.[65] 또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는 좌의정을 추증[66]하여 원자 외가의 격을 높여 주었다.[67]“오늘날에 저으기 듣건대, 제신(諸臣)중에서 위호(位號)가 너무 이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철종(哲宗)은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는 가왕(嘉王)·기왕(岐王) 두 왕의 혐핍(嫌逼)이 있었는데도 이와 같이 천천히 한 것은, 제왕(帝王)의 큰 거조(擧措)는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혐핍의 염려가 있지도 않음이겠습니까? 제신(諸臣)들이 ‘정후(正后)께 경사(慶事)가 있을 때’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대개 사전(事前)에 주밀(周密)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2월 1일 기해 1번째기사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2월 1일 기해 1번째기사
“송시열(宋時烈)은 산림(山林)의 영수(領袖)로서 나라의 형세가 고단하고 약하여 인심(人心)이 물결처럼 험난한 때에 감히 송(宋)의 철종(哲宗)을 끌어대어 오늘날의 정호(定號)를 너무 이르다고 하였으니, 이런 것을 그대로 두면 무장(無將)의 무리들이 장차 연달아 일어날 것이니, 마땅히 원찬(遠竄)하여야 할 것이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2월 1일 기해 1번째기사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2월 1일 기해 1번째기사
2월 1일 봉조하 송시열이 왕비가 아직 젊은데 원자로 정호하는 일이 너무 이르다는 뜻으로 2본의 소(疏)를 숙종에게 올렸다. 숙종은 군신 간의 분의(分義)가 이미 정해진 일[68][69]을 다시 논하는 송시열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예치(禮治)를 통한 유교적 이상세계를 지향했던 조선사회에서 ‘종법(宗法)’의 핵심은 직계의 종가(宗家)를 이을 ‘종자(宗子)’를 영속적으로 세워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종법상 가계계승 원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적장자 계승의 원칙이었다. ‘적장계승(嫡嫡相承)’, 즉 적자(嫡子)에서 적손(嫡孫)으로 계승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가의 계승방식으로 여겼다.[70] 그러나 왕실에서는 적장계승을 현실세계에서 실현시키기가 쉽지 않았다.[71] 숙종은 이러한 환경에서 후계자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우선 ‘후궁 소생 서자’라는 타이틀을 세탁하고자 하였다. 즉 원자 정호는 장옥정의 아들을 단순한 서자가 아닌 ‘장자(長子)’로 삼아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정통성을 부여하는 정치 행위였다. 그렇기에 송시열을 문외출송 및 삭탈관직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사(賜死)까지 한 건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송시열 문도들이 원자 정호에 반발할까 우려해서다. 그를 따르는 문도들이 계속해 이의를 제기하면 정호가 번복될 수 있고 원자의 정통성이 훼손될 수 있었다. 결국 송시열의 상소는 서인 축출과 남인 등용의 계기가 되었다.
3.5. 기사환국
병인년 희빈(禧嬪)이 처음 숙원(淑媛)이 될 때부터 귀인(貴人)에게 당부(黨付)하였으며,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內殿)[72]과 귀인(貴人)[73]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淑媛)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액정(掖庭)에 있게 되면 경신년에 실각(失脚)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1689년(숙종 15) 4월 21일 숙종은 사헌부 관원들과 청대하는 자리에서 불쑥 궁중의 내전에서 자신이 당한 변괴(變愧)를 이야기하였다. 이 자리는 송시열의 죄상과 형률을 논하는 자리였는데, 숙종은 청대를 시작할 때부터 “단지 송시열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궁위 사이에도 변괴가 있으니, 대간이 다 논진(論陳)한 다음 말하겠다.”고 하며 운을 떼었다. 그 변괴는 인현왕후가 선왕과 선후의 말을 가탁하여 장옥정에게 아들이 없을 것이라는 간교한 말을 한 사실이었다. 사실 그동안 인현왕후는 “숙원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태어난 것”이라거나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성관계 중의 노동과 피로함) 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직접적으로 장옥정을 쫓아 낼 것을 권유해왔다.
승지 이시만과 목창명 이하 사헌부 관원들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혹스러워 하였다. 이들은 숙종이 너그럽게 용서하고 참아서 수신제가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인현왕후가 선왕과 선후의 말까지 끌어다가 속인 만큼, 이러한 마음을 가진 인현왕후가 원자를 자기 자식처럼 아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원자가 탄생한 뒤에 더욱 불평하고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여자가 쓰는 모자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남자의 모자를 쓴다니 실로 뜻밖이다.’하고, 궁인들 중에도 왕자가 탄생한 것이 의외의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몇이 있으니,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국본(國本)을 일찍 정한 본의가 이것이다.” 《기사유문(己巳遺聞)》
연려실기술 제35권 /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연려실기술 제35권 /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 하였다.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숙종은 후궁 소생 왕자를 원자로 정호하여 ‘장자(長子)’의 지위를 명확히 하였다. 그렇지만 원자의 생모인 장옥정은 여전히 후궁이었으므로 원자의 정통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74][75][76] 그런 와중에 인현왕후는 원자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기는커녕 불만을 터트리며 매우 불온한 언동을 일삼았다. 이러한 인현왕후의 태도는 장옥정 모자(母子)에게 매우 위협적이었다. 다시 말해 경종이 숙종의 씨가 아니며, 장옥정이 어디서 씨가 다른 자식을 데려와 바꿔치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면서 “후사(後嗣)에게 화(禍)를 끼치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과궁(寡躬)의 실덕(失德)을 감수하겠다.”[77]라는 발언이 괜히 나온 발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이러한 인현왕후의 언행은 갑술환국을 기점으로 일부분이 삭제[78]되었으나 『기사유문』의 존재는 남아있었던 탓에 『연려실기술』을 통해 전해지고 말았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폐위에 앞서 귀인 김씨를 먼저 폐출, 그 죄상을 쓴 비망기를 내렸다.[79] 또 숙종은 인현왕후를 책비(冊妃)할 때 내려준 교명(敎命)과 책보(冊寶), 장복(章服)을 불태운다. 이로써 인현왕후는 왕비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였다.[80] 조선의 왕비는 사대부가의 여성으로 왕실의 일원이 될 때 교명과 책보를 받아 국왕의 배위의 지위를 갖게 된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고명(誥命)을 받아 제후국의 왕비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므로 교명·책보를 소각한 것은 제도적으로도 왕비의 지위를 박탈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월 4일 폐비 교서를 반포하였다. 5월 13일, 장옥정의 명호를 정하여 비(妃)를 삼고, 종묘와 사직, 효사전에 고했다. 그날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해 줄 것을 허락받기 위해 청나라에 보내는 주청사는 동평군으로 정하였다. 다만 장렬왕후의 국상 중이었으므로 책례는 이듬해인 1690년(숙종 16) 10월 22일에 치러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왕실의 훈척이거나 또는 훈척에 가까웠던 서인계 인물들이 희생되었다. 인현왕후 폐출에 반대하는 오두인·박태보·이세화 등 81명의 상소[81]에 숙종은 밤새도록 친국하였고, 이 중 오두인과 박태보는 심한 국문으로 압송 도중 사망하였다. 또 상소에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혐의가 있다고 하여 인현왕후의 형제들인 민진후·민진원을 국문하고, 해창위 오태주(명안공주의 남편), 민정중(인현왕후의 백부) 등을 삭탈관직하였다. 이에 반해 남인은 원자 정호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견이 없었으며, 인현왕후 폐출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권대운 등은 ‘임금이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은 희빈(禧嬪)의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인 것’이라면서 장옥정의 친정을 위하여 역관 장현에게 상을 내릴 것을 청하여 대신의 은례(恩例)에 따르게 하였고, 또 장희재를 무신(武臣)의 극선(極選)인 무고(武庫: 군기시)와 태복(太僕: 사복시)의 자리에 올려놓았다.[82] 민종도는 빈청에서 큰 소리로 “지금 임금께서 내전(內殿)을 폐출하려 하니, 신하들은 마땅히 예에 따라 논집(論執) 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강력히 간쟁하여 기어이 절의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숙종의 뜻을 적극 봉행하였다.[83]
4. 왕비 생활
4.1. 5년의 왕비 생활
1690년(숙종 16) 6월 7일 산실청이 설치되었고[84] 7월 19일 대군 성수(盛壽)를 낳았다. 당시 숙종은 산실청에 참여한 의관 김유현(金有鉉)과 권유(權愉)를 가자(加資)하도록 명했다가 불가하다는 반대로 김유현에게 수령직을 제수하고, 권유에게 숙마 1필을 하사할 정도로 기뻐하였다.[85] 그러나 출산한 지 두 달여가 지난 9월 16일, 대군이 죽고 말았다. 대군의 사망 원인은 자세한 정황이 나오지 않아 추측하기 어려우나 사망일에 대한 기록이 충돌한다. 우선 『숙종실록』에서는 “장씨(張氏)가 낳았는데, 낳은 지 겨우 열흘이었다.”[86]고 나오는데, 『승정원일기』에서는 대군이 7월에 태어나 약방이 문안하고 중궁의 기후에 대해 묻고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87] 따라서 대군이 생후 열흘 만에 죽었다는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 실록 편찬 과정에서 잘못되었거나 의도적인 누락으로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비록 둘째아들을 잃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왕세자의 생모이자 국모인 왕비였고 총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증거로 이듬해 1691년(숙종 17) 진선 정시한이 상소하여 폐출된 인현왕후를 별궁에 살게 하고 늠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바로 삭탈하고, 차후 폐비에 대해 말하는 자는 중벌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였다.[88] 반면 부원군이 된 장형의 사당을 나라에서 지어주기로 하였다. 사당의 규모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고, 역사에 충당하라고 은 1,000냥을 특별히 하사하기도 하였다.[89] 또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고 시호를 내려주었다. 원래 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으면 연시(延諡)라고 하여 집안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숙종은 그녀의 친정에 이 잔치 비용까지 보내주고 삼정승을 비롯한 조정의 관리들을 모두 참석하게
1693년(숙종 19)은 확실히 불우한 해였다. 이해 2월 1일, 수일 전부터 왕세자의 왼쪽 뺨과 턱 아래가 부어올라 약간 붉고 열이 나면서 만지면 아픈 증상이 나타났다.[91] 그런데 아들에게 종기가 생기자마자 장옥정도 종기가 생기더니 2월 21일에는 숙환(宿患)인 담화(痰火)가 재발한다.[92] 이 담화를 한의학에서 담(痰:가래)으로 인해 생긴 화(火)라고 설명하는데, 사실 경종도 어린 시절부터 담화를 앓았다. 경종의 이러한 증상은 화병과 흡사하였다. 장옥정도 이와 같았다면, 하나뿐인 아들이 잘못되면 왕비 지위도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오는 심리적인 압박, 즉 스트레스로 설명할 수 있다.
장옥정의 새로운 연적 숙빈 최씨의 등장도 이때였다. 숙빈은 4월 26일 숙원 봉작을 받으면서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해 10월에 왕자 영수(永壽)를 출산하므로 숙원으로 봉작될 때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이 사실을 장옥정의 숙환과 연결한다면, 담화가 1693년(숙종 19)과 1694년(숙종 20)에 재발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비의 지위에서 후궁으로 강등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무렵이기 때문이다. 『인현왕후전』에서도 숙종의 변심이 묘사된다.[93] 남인 측도 숙종의 변심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 예로 당시 숙원이었던 최씨가 왕자를 낳자 이현일이 숙종에게 적서의 분별을 엄정히 해야 한다고 아뢰는 일이 있었다. 이는 왕세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새로 태어난 왕자는 서자임을 주지시키는 발언이었다.
이현일이 아뢰기를, 국가의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는 실로 바라고 기다리는 가운데 큰 경사입니다. 다만 예로부터 적서(嫡庶)의 구분은 엄정함이 엄연히 엄하여 지금 왕세자가 점점 장성해지는데, 이처럼 어렸을 때에 때때로 서로 만나 엄격한 구분을 알게 하고, 그로 인해 습성이 더불어 자라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끝없는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유신이 아뢴 바가 참으로 좋으니, 각별히 유념하겠다고 하였다.
玄逸曰, 國家螽斯之慶, 實出於喁俟之際, 慶莫大焉。第自古以來, 嫡庶之分, 截然有嚴, 卽今王世子, 漸至長成, 及此蒙幼之日, 時時相見, 使知截然之分, 以之習與知長, 則是乃無疆之休也. 上曰, 儒臣所達誠好, 各別留心焉.
승정원일기 18책 (탈초본 354책) 숙종 19년 10월 13일 계미 20/32 기사
玄逸曰, 國家螽斯之慶, 實出於喁俟之際, 慶莫大焉。第自古以來, 嫡庶之分, 截然有嚴, 卽今王世子, 漸至長成, 及此蒙幼之日, 時時相見, 使知截然之分, 以之習與知長, 則是乃無疆之休也. 上曰, 儒臣所達誠好, 各別留心焉.
승정원일기 18책 (탈초본 354책) 숙종 19년 10월 13일 계미 20/32 기사
불행 중 다행히 이 왕자는 태어난 지 두 달여 만에 죽었다.[94] 그러나 최씨가 연달아 두 번째 임신을 한 상태여서 궁중 내 입지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중궁(희빈 장씨)의 숙환이 담화(痰火)이며, 이미 고질병이 되었다[95]고 말했다. 즉 장옥정은 숙종의 총애가 다른 여성에게 옮겨가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야사에 의하면 장옥정이 평소에 숙빈 최씨를 가혹하게 구박하였다고 전하고 있고 어느 날 숙종이 낮잠에 들다 비몽사몽간에 후원에 있는 항아리 밑에서 나오려는 용한 마리가 보였는데 용은 나오려다가 못나오고 거의 죽어가고 있어 숙종은 화들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고 이상히 여기어 후원으로 가보았는데 장옥정의 혹독한 매질의 최씨가 실신하여 숙종이 이를 구해냈다고 한다.
4.2. 갑술환국
1694년(숙종 20)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함이완의 고변을 숙종에게 아뢰었다. 고변의 요지는 소론인 한중혁과 노론인 김춘택 등이 금품을 모으고 사람들을 길러 환국을 도모한다는 것으로, 소론 한중혁은 주로 상인들로부터 김춘택은 주로 역관들로부터 거사 자금을 갹출하여 상당량의 은화를 모집하였다.[96] 특히 김춘택은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로 권모술수에 능하여 궁인의 동생을 매수해서 첩으로 삼아 궁궐과 통했고, 심지어 장희재 처와 간통까지 하면서 남인을 정탐하였다.[97] 민암 등은 이 기회에 반대당 노론계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암의 계획과는 달리 6일 만에 김인의 역고변이 터지면서 숙종은 오히려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을 함부로 죽인다[愚弄君父 魚肉搢紳].”고 민암을 질책하여 처벌했다.[98] 남인인 영의정 권대운을 비롯하여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보내고 대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의 소론으로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이와 같은 갑술년의 환국은 숙원 최씨의 독살 사주 혐의를 전해들은 숙종의 순간적인 결단에 의하여 단행되었다고 보인다.[99] 김인의 고변에 따르면, 장희재 측이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최씨의 해산 무렵의 생일날에 독약을 넣은 음식을 가지고 입궐하게 하여 독살할 작정이었다고 한다.[100] 현재로써는 독살 음모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설령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주목되는 것은 숙종이 최씨의 말만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인의 고변이 있던 직후, 단 하루 만에 정국을 뒤바꾸었던 숙종의 모습에서 확인된다.
숙빈이 기사환국 이후에 장희빈으로부터 크게 시기를 당해서 거의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이 인경왕후의 본방과 친밀하였는데, 갑술환국 때에 세상 사람들이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해서 숙빈에게 계책을 만들어서 남인의 정상(情狀)을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그래서 큰 처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按淑嬪承恩在己巳之後, 大被猜毒於張氏, 殆不得保其性命, 肅宗乳母稱奉保夫人者與仁敬妃本房親密, 甲戌飜局時, 世多言金鎭龜之子春澤, 因奉 保設策於淑嬪, 以南人情狀詳, 聞于上前, 致有大處分云, 故南少輩, 便指淑嬪, 爲金家私人矣.”
민진원, 이희환 옮김, 『단암만록』
“按淑嬪承恩在己巳之後, 大被猜毒於張氏, 殆不得保其性命, 肅宗乳母稱奉保夫人者與仁敬妃本房親密, 甲戌飜局時, 世多言金鎭龜之子春澤, 因奉 保設策於淑嬪, 以南人情狀詳, 聞于上前, 致有大處分云, 故南少輩, 便指淑嬪, 爲金家私人矣.”
민진원, 이희환 옮김, 『단암만록』
인용문은 김춘택이 고모 인경왕후와 봉보부인과의 인연을 이용하여 숙원 최씨와 연결해서 환국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이다. 이는 갑술환국이 이루어진 후에 노론 측에서 “춘택의 공이 있었으니, 그의 부친 김진구(金鎭龜)로 대장을 삼아서 그의 공을 갚는 것이 마땅하다.”[101]고 하였는데, 이 말은 환국의 직접적인 원인이 최씨를 배후에서 조종한 김춘택의 노력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남인과 소론들은 최씨를 가리켜 ‘김씨들의 사인(私人)’[102]이라고 하였다.
5. 후궁 강등
1694년 4월 1일 숙종은 폐인(廢人: 인현왕후)·홍치상·이사명 등을 위하여 변명, 구원하는 자는 역률(逆律)이나 중률(重律)로 엄히 다스리겠다고 지시하며 환국을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숙종은 4월 9일 폐인을 어의궁에 옮겨 거처하게 하는 예우를 논의하더니 4월 12일 폐인(廢人)이 아닌 전비(前妃)라고 일컫으며 서궁(西宮)의 경복당(景福堂)으로 들어오게 했다.[103] 이때까지 장옥정은 왕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내 오히려 곤위(坤位)에 잇거늘 폐비 민씨 어찌 문안치 아니하느뇨. 크게 실례하며 방자함이 심하도다."
『인현왕후전』
『인현왕후전』
이튿날 정전(正殿)에 나아간 뒤에 임금이 비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경덕궁(慶德宮)에 이처(移處)하고 내가 몸소 가서 맞이하면, 바로 예(禮)에 맞고 경에게도 빛이 있을 것인데, 살펴 생각하지 못하여 큰일을 너무 갑작스레 처리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숙종실록』 숙종 20년 4월 12일
『숙종실록』 숙종 20년 4월 12일
그러므로 《인현왕후전》에서 드러나는 장옥정의 요구는 일견 타당해보인다. 인현왕후도 폐비의 신분으로 돌아왔기에 왕세자와 조정의 문안을 받지 않으려고 했고, 왕세자 앞에서 앉아있을 수 없다며 일어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이날 장옥정의 거처를 별당으로 옮기게 하고, 왕비 새수를 거두고,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주되 왕세자 경종이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지하지 않도록 조치했다.[104]
6. 무고의 옥
6.1. 전개 과정
1701년 9월 24일 숙종이 제주에 유배 가 있는 장희재를 처형하라고 비망기를 내렸다. 비망기의 내용은 '지위가 강등된 뒤, 장희빈은 울분의 나날을 보내며 숙종과 인현왕후에게 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시 중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게다가 인현왕후를 중궁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민 씨'라고 부르면서 요사스러운 여자라고 욕했다. 인현왕후가 시름시름 앓자,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으면 자신이 다시 왕비가 될 것이라 믿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 뒷쪽 별채에 무녀들을 불러들여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였다. 또한 무녀들에게 인현왕후 초상화에 활을 마구 쏘라고 시켰다고 한다.[105]무고의 옥은 숙빈 최씨가 취선당의 신당과 인현왕후 저주를 고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고변으로 숙종은 취선당 궁인들에 대한 국문을 하며 형벌을 실시하였다. 실제로, 중궁전인 통명전 동물 사체들이 발견됐다. 취선당에 설치되었던 신당에서도 여성의 옷을 입은 인형이 발견되었다. 숙종은 장씨 휘하 궁인들도 친국하였고 취선당 궁인들은 신당을 왕세자의 두창이 치유되길 기원하기 위해 1699년 설치한 것으로 자백했다. 그러나 1701년까지도 취선당의 신당을 치워지지 않았고 이에 대한 의혹을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제공한 것이다. 이에 장씨 휘하 궁인들은 신당을 치우면 령이 노해 왕세자에게 해가 갈까 치우지 않은 거라 증언했으나 가혹한 고문을 못 이긴 궁인들이 추가 증언으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빌었다고 자백하여 결국 희빈 제거가 결정되었다. 신당을 차려 치성을 드리는 일부터가 무속 신앙을 천대하였던 당시 사회에서 큰 허물이 될 수밖에 없다.[106] 인현왕후도 죽기 전 '취선당의 궁인들이 대조전을 함부로 드나들고 자신의 몸이 아픈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인현왕후 본인도 생전에 장희빈의 저주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선당 궁인들의 자백대로 1699년에 신당이 설치되었고 1701년까지 유지되었다면 궁궐 내에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6.2. 예정된 죽음
9월 25일 장옥정의 운명이 결정되었다.[107] 이날 숙종이 비망기에서 한나라의 무제가 구익부인[108]을 죽인 일을 언급할 때부터 그녀의 죽음은 예정된 일이었다. 왕세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론 대신들의 반대가 이어졌지만, 숙종은 동부승지 윤지인, 가주서 이명세 등을 파직 및 삭출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였다.[109] 심지어 죄상을 밝히겠다고 연일 관련자들을 친국하는 중에 세 번이나 차자를 올리면서 옹호한 최석정을 중도부처하기까지 하였다.[110]왕세자가 상소를 올렸다. “신이 올해 14세이지만 제 어머니의 악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청컨대 어머니와 함께 죽여주십시오.”
王世子疏略曰, “臣今年十四, 其母爲惡, 必無不知之理, 請與母同死云云.”
남하정, 원재린 역주, 『동소만록』, 「王世子疏」
王世子疏略曰, “臣今年十四, 其母爲惡, 必無不知之理, 請與母同死云云.”
남하정, 원재린 역주, 『동소만록』, 「王世子疏」
이때 세자의 나이 열세 살이었는데,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신의 어미가 죄를 지었는데 신이 몰랐다고 할 수 없으니, 같이 죽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또 궁문 밖에 거적을 깔고 여려 신하들에게 울면서 하소연하여 말하기를, “내 어미를 살려주십시오.” 하였다. 좌의정 이세백은 옷깃은 뿌리치고 피하였는데, 최석정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감히 죽음으로 저하에게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時世子年十三, 上書言: “臣母為非, 臣不應不知, 請同死.” 且席藁宮門外, 泣訴諸臣日“願活我母”. 左相李世白拂衣而避之,錫鼎泣曰“臣敢不以死報邸下?”
이건창, 김용흠 역해, 『당의통략』
時世子年十三, 上書言: “臣母為非, 臣不應不知, 請同死.” 且席藁宮門外, 泣訴諸臣日“願活我母”. 左相李世白拂衣而避之,錫鼎泣曰“臣敢不以死報邸下?”
이건창, 김용흠 역해, 『당의통략』
왕세자도 생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상소를 올렸다. 자신은 어머니의 잘못을 모르지 않는 나이이므로, 어머니와 함께 죽기를 청한다는 간절함을 담았다. 다만 경종의 상소는 관찬 자료인 『숙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수록된 바 없고, 남인계 당론서인 『동소만록』과 소론계 당론서인 『당의통략』에서만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왕세자의 효성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빈어(嬪御)가 후비(后妃)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게 하라.”[111]고 하교하는 한편, 10월 8일 다시 한 번 자진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면서 종묘사직과 왕세자를 위해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임을 강조하였다.[112]
“네 대역부도를 짓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요. 죽는 것이 옳거늘 요악한 인물이 행여 살까 하고 안연(晏然)히 천일(天日)을 보고 있으니 더욱 사죄(死罪)로다. 세자의 낯을 보아 형체나 온전히 하여 죽음이 네게는 영화라. 어서 죽으라.”
작자미상, 정은임 교주, 『인현왕후전』
작자미상, 정은임 교주, 『인현왕후전』
임금이 하교하기를, “장씨(張氏)가 이미 자진(自盡)하였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장(喪葬)의 제수(祭需)를 참작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0일 계해 2번째기사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0일 계해 2번째기사
10월 10일 장옥정은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에서 자진하였다. 처음 자진하라는 비망기가 나오고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인현왕후전』이나 노론계 당론서인 이문정의 『수문록』 등에는 장옥정이 사약을 받은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장옥정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빨리 먹이라.”며 사약을 연달아 세 그릇을 부어버리거나 한 그릇의 약으로도 오장육부를 다 녹일 수 있는데 세 그릇을 함께 부으니 짧은 시간에 두 귀, 눈, 코와 입으로 검은 피가 솟아나 땅에 고였다거나 죽은 뒤에 시신이 다 녹았다는 이야기는 『인현왕후전』에서만 볼 수 있다.[113][114]
장옥정의 경우 사약이 안들어 사약을 여러 사발 부어 죽였거나 다른 방식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희빈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로, 서양에서 청산가리 등 맹독을 들여와 사약 한 그릇에 죽는 일이 흔해지던 시기였다. 조선 전기라면 모를까 희빈이 받았던 사약에도 맹독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을 텐데도 한 그릇에 죽지 않아 세 그릇을 연달아 부은 뒤에야 내장이 녹아내리며 끔찍하게 죽었다? 숙종도 사람인 이상 충분히 경악할 만하다. 희빈이 세자의 생모라 후폭풍이 두려워 실제 최후는 강제로 사사시킨 것이지만 그녀의 죽음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누락하고, 자진이라고 처리했을 수도 있다.
다른 경우로는 장옥정이 처음에는 애원을 했다는 것을 보면 아직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심히 안되어 있으며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매우 두렵고 무섭고 긴장된 상태에서 결국 사약을 안 먹을려고 인간힘을 썼거나 오랫동안 뜸을 들이자 숙종이 못마땅히 여겨 사약을 연달아 세 그릇을 부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총애하여 왕비로까지 만들었던 남자가 폐비에 이어 사약을 내리며 자신을 비난하니 그 반발심으로 끝까지 사약을 거부하며 발악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숙종 또한 처음에는 세자를 생각해 장옥정과 장희재 남매, 그 관련인만 죽이고 끝낼 생각이었으나 사약을 받고도 패악을 부리는 희빈에게 분노하여 장옥정의 친정까지 멸문을 시켜버린 듯하다.[115] 역모를 꾸민 역적들조차도 임금이 사약을 내리면 북향사배를 하고 사약을 마시는데 희빈이 사약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솟을 법도 하다.[116] 『숙종실록』을 비롯한 관찬 자료에서 장옥정의 죽음은 자진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방식은 확인할 수 없다.[117] 따라서 사약같은 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장옥정의 자진과 관련하여 숙종은 사약을 언급하였으나 당시 판중추부사 서문중·우의정 신완·이조판서 이여 등이 왕세자를 낳아서 기른 사람에게 유사(攸司: 관청)의 형벌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승정원에서 국왕의 전지(傳旨)를 받아 집행하는 공식적인 절차없이 진행되었다. 이는 성종 때 폐비 윤씨의 죽음과 연산군의 복수를 거울삼아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118] 다만 1729년(영조 5) 대사성 이덕수가 신사년의 일을 말할 때 “辛巳年禧嬪張氏賜死.”라고 하였으므로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사사(賜死), 즉 사약을 받은 것이다. 사실 자진을 명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지, 확실히 희빈이 자진 명령을 따랐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자진한 건지 자진 명령을 거부한 끝에 두손 두발 다 들고 사약을 내려 강제로 사사시킨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이덕수의 언급을 보면 후자, 즉 자진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다가 결국 사약을 받은 듯하다. 숙종의 성격과 당시 숙종의 왕권을 생각하면 신하들이 왕세자의 생모에게는 유사의 형벌을 쓸 수 없다, 사약을 내리려면 궁 밖으로 내보낸 뒤 사약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하더라도 결국 숙종이 관례를 모두 깨고 궁 안에서 사약을 내려 사사형을 집행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119]
숙종은 처음부터 사약을 내리고 싶어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자진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기도 하거니와 희빈이 자진 명령을 거부하자 이때다 싶어 “봤지? 니들 의견대로 자진을 명했는데 희빈 본인이 거부한다. 그럼 사약을 내려야겠다.” 라며 사약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120]
희빈이 죽는 순간에 세자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든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마지막에 세자를 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가 숙종이 희빈의 마지막 소원마저 매정하게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발악을 했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드라마에서는 주로 희빈이 사약을 받고 끝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패악을 부리다가 숙종과 궁녀들에 의해 강제로 사약이 들이부어지며 사망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록에는 희빈이 사약을 거부했다는 기록은커녕 그녀의 죽음에 관한 그 어떤 자세한 기록도 없어 실제로 희빈이 사약을 거부하며 패악을 부렸는지는 불명이다. 일각에서는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은 낭설이며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약을 받아 죽은 희생양이라 하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인현왕후의 처소에 흉물을 묻은 것, 궁녀를 시켜 인현왕후를 스토킹한 것 모두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실제 사실이다. 굿 자체는 세자를 위해서 한 것이라 쳐도 의도적으로 인현왕후의 처소에 흉한 물건을 묻어두고 인현왕후를 스토킹한 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꼼짝없이 사형당한 것이다. 흉물을 묻어두거나 인현왕후를 스토킹하지만 않았어도 증거 불충분으로 숙종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121]
희빈이 죄를 자복한 날에 말하기를, “세자를 한 번 보고 난 후에 주상의 명을 따르겠다.” 하였다. 어미와 자식의 정리로 보아서 금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므로, 주상이 세자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렇다면 희빈으로서는 마땅히 눈물을 흘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악독한 말을 쏟아내면서 그 독수를 뻗쳐서 세자의 아랫도리를 침범하였다. 세자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가 잠시 뒤에 깨어나니 궐 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세자가 이 이후로 기이한 질병에 걸려서 용모도 점점 수척해지고, 정신이 때때로 혼미해졌다.
이문정,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수문록』
그렇다면 희빈으로서는 마땅히 눈물을 흘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악독한 말을 쏟아내면서 그 독수를 뻗쳐서 세자의 아랫도리를 침범하였다. 세자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가 잠시 뒤에 깨어나니 궐 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세자가 이 이후로 기이한 질병에 걸려서 용모도 점점 수척해지고, 정신이 때때로 혼미해졌다.
이문정,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수문록』
장옥정이 사약을 받을 때,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못 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수문록』에 실려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기 힘든 야사에 불과하다.[122] 이 약남인계 당론서인 『동소만록』은 경종의 건강 상태에 대해 다르게 서술하였다. [123] (남하정, 원재린 역주, 『동소만록』, 혜안, 2017.) ]하는 데다가 경종이 나중에 자식을 보지 못한 걸 가지고 조작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승정원일기』에서 신하들이 경종의 안위를 위해서 잇따라 상소하는 대목을 보면 경종이 생모를 만날 수 있는 상태조차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9월 28일 『승정원일기』 기사에 신하들이 세자가 경통(驚痛)으로 손상되는 바가 있으니 숙종이 마음을 바꿔주길 바라고 있었고, 10월 1일 『숙종실록』 기사에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당시 경종은 잠을 잘 못 이루고 있었으며,[124] 생모가 사사된 날 피부에 홍반이 생겨 치료에 들어갔다.[125]
7. 죄인의 사후 상장례
10월 10일 밤, 흰색 휘장인 소금저(素錦褚)로 덮힌 장옥정의 시신은 창경궁 선인문의 협문을 통해 정릉동 본궁[126]으로 보내졌다. 이때 시신이 통과하는 문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취선당이 건양현(建陽峴)[127]과 명정전 사이에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건양현을 지나거나 동쪽으로 명정전의 어로(御路: 왕이 다니는 길)를 지나는 것은 모두 미안하다는 점에서 선인문의 협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장옥정의 상례 절차는 정릉동 본궁에서 거행하였고, ‘희빈’ 대신 ‘장씨’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128] 따라서 『장희빈상장등록(張禧嬪喪葬謄錄)』에 “장씨는 바로 희빈이다”라는 설명이 세주로 수록 되었다. 비록 ‘장씨’로 호칭하되, 그 상장례는 생시의 후궁 지위에 따라 예장(禮葬)으로 거행될 수 있었다. 다만 죄인으로 죽었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숙종은 상·장·제수를 수송하겠다는 호조의 계사에 대해, “단지 제수(祭需)만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관곽을 포함한 상장의 물품을 제한하여 일반적인 예장보다 등급을 낮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왕세자와 세자빈의 거애(擧哀)와 복제(服制)가 정해졌다. 거애는 창경궁 숭문당에서 이루어졌고, 복제는 『의례』의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을 입는다.”라는 예문을 근거로 3개월의 시마복을 입되, 단 3일 만에 벗어야 했다.[129]
원래 장옥정의 장지는 광주의 다소미(多所味)로 12월 22일이 발인이었다. 이렇게 사망 3개월째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일반적인 상례 절차와 동일하다. 그러나 11월 21일 우의정 신완이 장지에 하자가 많다고 주장하면서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양주 인장리, 지평 수동, 수원 용봉리, 광주 하도의 땅 이렇게 4곳의 산론(山論)을 검토하여 새로운 장지는 양주의 인장리[130]로 정해졌다. 이처럼 발인이 4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은 그만큼 장지 선정이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풍수지리상 길지를 정하기 위해 장지가 재검토되면서, 『가례』의 3개월 장례 규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조상과 자손은 기(氣)를 같이한다는 성리학 이념에 따르면, 조상의 체백이 온전하고 신령이 편안해야 자손이 번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생모의 묘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왕세자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장지 선정에 신중을 기한 것은 왕세자와 희빈의 혈연관계가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장씨(張氏)를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장사지냈는데, 발인과 하관(下棺)할 때 세자와 빈궁(嬪宮)이 금중(禁中)에서 망곡(望哭)하였다. 이보다 앞서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돈(李墩)과 종실(宗室) 금천군(錦川君) 이지(李榰)가 지관(地官)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다니며 장지(葬地)를 고르다가 이곳을 얻어 장사지낸 것이다.
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1월 30일 임자 2번째기사
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1월 30일 임자 2번째기사
1702년(숙종 28) 1월 30일 발인과 하관이 진행되었고 왕세자와 세자빈이 망곡의(望哭儀)를 행하였다. 이 망곡의를 끝으로 왕세자와 세자빈의 의례가 마무리되었고 이후 우제, 졸곡, 연제, 상제 등의 주요 상례 절차는 『장희빈상장등록』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왕세자는 적모(嫡母)인 인현왕후 국상에서 상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장옥정의 발인이 4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은 ‘왕비’로 대우한 것이 아니다.
1717년(숙종 43) 12월 7일 강릉 유생 함일해는 양주 인장리 묘소가 불길하다고 상소하였다. 숙종은 함일해가 ‘희빈묘소’로 지칭한 것을 문책하였으나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조태채의 주장으로 지관을 파견하여 묘자리를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쉽게 결정할 수 없었고 길흉의 의견이 엇갈렸으나 왕세자가 원한다는 이유로 천장이 결정되었다. 이후 광주, 장단, 교하 등의 간심하면서 새로운 장지를 찾았는데 10개월여 만인 12월 22일 광주 진해촌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천장 과정에서 기존의 묘자리가 무탈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천장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았다.
장희빈의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있었지만 1969년에 고양시 서오릉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이를 대빈묘(大嬪墓)라고 부른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에 모셔졌다.
[1] 민진원 지음, 이희환 옮김, 『丹巖漫錄』, 민창문화사, 1993, 12쪽.[2] 仁同張氏大同譜編纂會編, 『仁同張氏大同譜』 권1, 1998, 232~234쪽.[3] 부친 장형이 초취한 제주 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그와 장옥정은 나이 차이가 무려 19년이다. 1657년(효종 8) 역과 식년시에 장원을 하고 종7품 직장(直長)을 제수받았지만, 후사 없이 일찍 죽었다.[4] 『통문관지』 권7, 「인물」 <장응인>. “張應仁仁同人 風流豪俠 且能文筆解華語 每於天使 及差官之來 以差備官善爲說辭 雖華人貪慾者 亦不敢濫索焉.”[5] 1639년(인조 17) 역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1637년(인조 15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심양에서 6년을 머물며 청의 사정을 파악하였다. 귀국해서는 효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역관의 우두머리로 40년간 30차례 북경을 다니며 국사를 도맡아 주선하였다. 후일 노론조차 그를 가리켜 '명 역관'이라고 할 정도로 거물 역관이었다.[6] 『효종실록』 권11, 효종 4년 7월 27일(경인); 『효종실록』 권11, 효종 4년 윤7월 4일(정유).[7] 육의전은 중국 비단을 취급하는 비단전, 무명과 은을 취급하는 백목전, 국산 명주를 취급하는 면주전, 모시류를 취급하는 저포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 어물을 취급하는 어물전 등 여섯 종류의 물품을 취급하는 가게들을 통칭한다. 1791년(정조 15)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신해통공이 이뤄지나 육의전은 이 대상에서 제외된 덕분에 개항전까지 그 특권적 지위가 유지되었다.[8] 『숙종실록』 권18, 숙종 13년 6월 16일(임술). “初後宮張氏之母 卽趙師錫妻家婢也.” 그러나 『숙종실록보궐정오』의 기사에는 ”張母之爲師錫妻婢 專是謊說私 通之言 尤爲無理”이라고 쓰였다.[9] 장옥정의 동복오빠 장희재의 관력을 살펴보면, 일찍이 무과 급제하여 1680년(숙종 6) 당시 내금위에 종6품에 상당한 품작으로 재직 중이었다.[10] 당시까지 내금위는 오직 전현 의관(衣冠)의 적자들만 입대가 가능했다.[11] 종(奴·婢)엔 사전적 의미 외에도 사용자의 인성에 따라 고용인(雇傭人: 보수를 받고 기술이나 노동,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사람) 혹은 지위나 무력 등으로 인한 입장상의 약자를 폄훼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면 ○○나 다름없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 진실이다.’ 식의 언어유희가 소론이 이를 갈았던 민진원의 주특기이다.[12] 실록 등의 관찬사료와 개인 문집에서 ‘역상(譯商)’이라는 호칭을 볼 수 있다. 역상은 역관의 임무와 상인의 임무가 기계적으로 결합된 단어라기보다는, 역관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과 상행위에 대한 천시에서 기인한 사계층의 가치판단이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13] 이옥의 『심생전』에 나오는 당시의 사회상을 통해서도 중인의 처지를 알 수 있다. 『심생전』에서 사족인 심생이 중인 집안 처녀와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었다. 애초에 처녀는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어 혼인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정인인 심생마저 처녀의 신분을 천하게 여겨 부모에게 야단맞을 것을 염려하는 모습에 비탄하여 자진하는 내용이다. 마치 『춘향전』과 흡사한 구도로 『심생전』이 훨씬 현실적인 결말을 맺는 차이가 있다.[14]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7월 6일(무자).[15] 『張烱神道碑』 “王妃殿下弱年選入 宮及長由妃嬪進位 坤極育我 元子生有聖質實我東方無疆之休猗.”[16] 『숙종실록』 권21, 숙종 15년 5월 6일(신축). “禧嬪張氏 毓充慶令家 歸自結髮 仁孝恭儉 德著後宮可以母儀一國.”[17] 흔히 드라마에서는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잃은 남인이 미인계로 그녀를 입궁시킨 것으로 그리지만 경신환국 당시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측이다.[18] 궁녀 출신 후궁인 명빈 박씨가 9세, 정빈 이씨가 8세, 영빈 이씨가 6세, 귀인 조씨가 10세에 궁녀로 입궁하였으므로 장옥정의 입궁 나이도 10세 전후로 이들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9] 1701년(숙종 27) 10월 16일 장희재의 처 자근아기의 공초에서 ‘장 상궁(張尙宮)이 그 동생 장천한(張天漢)과 더불어 재산을 분배하는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어 화목하지 못한 일’을 언급한다. 여기서 장천한은 장현의 아들이다. 즉 효종 때 궁녀로 입궁한 장현의 딸이 숙종 때까지 살아서 상궁까지 되었음을 알 수 있다.[20] 김용관,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인물과 사상사, 2012.[21] 『숙종실록』 권10, 숙종 6년 11월 1일(병진). “是時 國哀已出於彗未發之前 是異之現 莫知徵應之何在. 其後張女以嬖幸進 卒至簒陞壼位 流禍波漫 而其始承寵 實在是時 於此可見上天垂象之不偶然矣.”[22] 1680년, 즉 숙종 6년 11월에 C/1680 V1, 키르히 혜성, 뉴턴 혜성이라 불리는 대혜성이 출현했다.[23] 기화(奇貨)는 기화가거(奇貨可居)로 좋은 기회 또는 물건을 뜻한다. 『사기』의 「여불위전」을 보면, 여불위가 자초를 보고 “이는 기화(奇貨)라. 가히 취할 만하다(可居).”라고 판단하는 대목이 나온다. 즉 조나라의 인질로 가 있던 자초처럼 장옥정이 지금은 대단치 않지만 나중에는 큰 가치를 지니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저평가 우량주[24] 일례로 1651년(효종 2) 장렬왕후에게 왕대비의 존호를 올리고 진하(陳賀)하는 예식에 외명부 및 모든 옹주, 왕자 부인 등이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으려 한 일이 있었다. 효종은 이들에게 진하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종친부와 의빈부의 낭청을 모두 파직하였다. 일찍부터 장렬왕후는 형식상으로도 왕실의 웃어른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25] 또 『신한첩』을 보면 숙명공주, 숙휘공주와 장렬왕후가 주고받은 한글 편지에서 장렬왕후가 공주들에게 해라체가 아닌 하게체를 쓰고 있다. 효종보다 장렬왕후가 다섯 살이 어리지만, 왕실의 항렬로 따진다면 두 공주의 할머니인데도 말을 편하게 하지 않는 데서 어려운 처지를 짐작할 수 있다.[26] 『숙종실록』 권11, 숙종 7년 1월 3일(정사).[27] 親蠶: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는 의식[28] 임금이 친경(親耕: 왕이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하면 왕비는 으레 친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왕비가 친잠을 하려면 육궁(六宮: 후궁)을 거느려야 하기 때문에 당시 ‘오정창의 딸이 자색이 있었으므로 후궁으로 만들어 임금의 사랑을 받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29] 오정창은 오단(吳端)의 아들로 인평대군의 처남이자 복창군 형제의 외숙이 되는데, 오정창은 경신환국이 일어나면서 유배, 처형된다.[30] 인경왕후가 앞서 1677년(숙종 3), 1679년(숙종 5)의 두 번의 임신에서 얻은 공주들은 모두 어려서 죽었고, 1680년(숙종 6)의 세 번째 임신은 유산 징후가 있어서 약을 의논하였으나 곧 사산하였다.[31] 김석주가 우연히 허견의 편지를 얻었는데, 편지에 “여수(麗水) 신녀(辛女)를 제거한 뒤에야 도모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었다. 천자문의 ‘금생여수’에서 따와 ‘금(金)’을 은어로 여수(麗水)라고 하고, ‘신녀(辛女)’는 신축년(1661년)에 태어난 여자를 가리킨다. 즉 신축년에 태어난 김씨 성의 여자(인경왕후)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다.[32] 숙종 스스로도 성격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승정원일기』 324책, 숙종 13년 9월 13일(무자). “사람의 성품은 각기 다르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포용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못하여 남의 잘못을 보면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낸다.”[33] 『여흥민씨가승기략』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왕비에 책봉된 지 3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까지 임신하지 못하자 숙종은 인현왕후의 생모 은성부부인의 묘가 자손에 불리하다는 여러 술가(術家)들의 말을 듣고 죽산에서 여주 초현으로 묘를 옮기게 하였다. 민유중도 인현왕후가 임신하지 못하자 1686년(숙종 12)부터 자신이 죽는 1687년(숙종 13)까지 여러 명당을 찾게 하였다. 현재 묘가 위치한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이 가장 좋다고 해서 민유중과 두 부부인을 합장하였는데 그 결과는 알다시피(…) 풍수지리는 소용없다는 증거[34]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2월 27일(신해). “時上久無儲嗣 上下莫不憂之 喪期旣畢 群望愈切 中宮又屢勸 上置嬪御.”[35] 민진원 지음, 이희환 옮김, 『丹巖漫錄』, 민창문화사(1993), 28쪽. “而上春秋已迫三十 尙無儲嗣欲得名族淑女 選入後宮以廣求嗣之道 以分張氏之寵.”[36]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는 민통수(閔通洙)와 민계수(閔啓洙)를 매개로 한 사돈 간이다. 민통수는 인현왕후의 친오빠 좌의정 민진원의 아들로, 영빈 김씨의 종백숙부 김창집의 둘째 사위였고, 민계수는 사촌오빠 우의정 민진장(閔鎭長)의 아들로 김창집의 첫째 사위였다. 이들은 각각 인현왕후의 친조카와 5촌 조카이고 영빈 김씨에게는 6촌 제부(弟夫)들이 된다. (金濟謙, 『安東金氏世譜』 권16, 1833, 藏MF35-2083~85, 天~玄).[37] 1686년(숙종 12) 3월 23일(정축). 영빈의 종조부 김수항은 영빈이 간택되자 “어릴 적부터 배를 크게 앓아서 경후(經候)가 고르지 못하다 하니, 이는 참으로 후사(後嗣)를 구함에 있어 크게 꺼리는 바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한 적 있다. 그러나 숙종은 영빈의 나이가 장성하고 얼굴에 병색이 없을 뿐 아니라 그녀를 간택한 것이 우연한 뜻이 아니라며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영빈의 질환 유무는 현재로써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영빈이 병이 있는데도 후궁으로 간택했다면 숙종에게 어떠한 정치적 진의가 있었을 것이다.[38] 『승정원일기』 16책, 숙종 12년 6월 13일(을축).[39] 정은임, 『인현왕후전 연구』, 국학자료원, 2014, 180쪽.[40] 『한중록』에 영조의 승은 궁녀로 이 상궁이 등장하는데, 이 상궁은 평소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조정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는 김귀주가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말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영조에게 썼다. 그러자 이 상궁이 정순왕후에게 “댁에서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하리오. 물 떠다가 급히 편지를 씻어버리소서.”라고 말하였다. 비록 정식 봉작을 받지 않았지만 먼저 왕을 모신 연상의 후궁이 나이 어린 왕비 앞에서 자못 위세가 당당하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하물며 인목왕후도 19살에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하니 후궁들이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인빈 김씨만이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는 『공사견문록』의 기록이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새로 들어온 나이 어린 상전 앞에서 순종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41] 실제로 실록에서 희롱이라는 단어로 찾아보면, 위계를 이용하여 강간하거나 남녀가 서로 좋아 화간을 해도 희롱이라고 썼고, 기생과 어울려 놀아도 희롱이라고 썼다. 또 명성왕후가 대신들 앞에서 복창군 형제가 궁녀와 사통한 일을 알릴 때도 “복평이 말하기를, ‘번번이 차를 찾으면 어찌하여 친히 가져오지 않느냐?’ 하고는 손을 잡아 희롱하자”라고 말하였다.[4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득보(得甫)이다.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李厚生)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이후영(李後英)이다. 8세의 나이로 부모를 모두 잃고 숙부인 이정영 슬하에서 자랐으며, 영빈 김씨의 5촌 외당숙이 된다.[43] 실제로 숙종 즉위년인 1674년부터 계속하여 흉년이 반복되었고, 나라 곳곳에서 홍수,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있어서 각 고을의 군포·역역(力役: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요역)·전세(田稅: 경작지 면적에 비례해 부과된 토지 생산물)·대동미(大同米: 대동법 시행 후 토지에 부과된 곡식) 등의 감세를 명한 적이 있으며, 반복되는 천재지변으로 구휼과 감세, 절약에 대한 언급이 실록에 꾸준히 나온다.[44]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9월 5일(병술).[45]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12월 14일(갑자).[46]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윤(汝尹)이다.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에 대한 장렬왕후의 복상 문제로 송시열 등이 관직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자 180인의 유생들과 더불어 상소하여 송시열의 무고함을 주장한 인물이다.[47] 한성우의 처족은 인현왕후, 영빈과 연혼관계를 이루고 있다. 한성우의 처조카 이섭은 영빈의 종조부인 김수항의 사위였고, 한성우의 처숙부 홍처윤의 장인은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이다. 또 한성우의 처남 홍수헌은 이숙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이 이숙의 딸이 인현왕후의 형부 이만창의 누이이다.[48]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12월 14일(갑자).[49]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12월 16일(병인).[50] 금창부위 박태정(경녕군주의 남편)은 품계(2품)는 높지만 그 품계보다 낮은 직위(3품)에 있었다. 그래서 12월 11일 해창위 오태주가 이 문제를 시정해달라 진청하니 숙종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날에 이르러 해창위 오태주의 진청을 들어주지 않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결국 숙종 15년 금창부위 박태정은 죽은 뒤에 직위가 오른다.[51] 『숙종실록』 권18, 숙종 13년 6월 16일(임술). “初後宮張氏之母 卽趙師錫妻家婢也 師錫少時私通及爲張家妻後 猶時時往來師錫家.”[52]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12월 10일(경신).[53] 이같은 분위기는 당시 노론이 국왕의 인사권 행사를 제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형상(刑賞)과 출척(黜陟)은 임금의 큰 권한인 것이다. 이에 있어서 한 번 흔들리게 된다면 장차 어디에 수족(手足)을 쓰게 되겠느냐?”라는 숙종의 말에서 장차 벌어질 기사환국의 단초를 볼 수 있다.[54] 조사석은 숙종 13년 5월 1일 우의정으로 임명된 후, 5월 7일, 5월 25일, 5월 26일, 6월 13일, 6월 15일, 6월 21일, 7월 24일에 사직의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5] 『숙종실록』 권18, 숙종 13년 9월 12일(정해).[56]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2월 28일(병인).[57]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윤3월 7일(갑진).[58]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2월 28일(병인).[59] 『숙종실록』 권19, 숙종 14년 10월 27일(병인).[60] 『숙종실록』 권19, 숙종 14년 11월 12일(신사).[61] 『숙종실록』 권19, 숙종 14년 11월 13일(임오).[62] 『숙종실록』 권19, 숙종 14년 11월 15일(갑신).[63] 정호(定號)는 정명호(定名號)의 약자다. 그 명호는 단순히 名과 號가 아이라 원자로서의 작호(爵號)를 의미하며 세자 책봉을 사실상 내정한 것이다. 그래서 유생 유위한의 상소에서 “원자(元子)라고 하는 것은 직접 세자(世子)로 봉(封)하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을 숙종이 원자가 나이가 차면 자연히 이루어지는 일이라면서 “국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일축해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64]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1월 10일(무인). “南龍翼曰 殿下之問 及於意外 臣未知所對也 中宮春秋方盛 他日事 不可知 而遽議此擧 豈不太急乎 惟殿下愼之.”[65]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1월 15일(계미); 『승정원일기』 17책, 숙종 15년 1월 17일(을유).[66]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2월 2일(경자).[67] 원래 이 경우에는 품계를 한 급씩 낮추어 의정·찬성·판서 순으로 추증해야 맞는데, 숙종이 장옥정의 친가 삼대를 전부 의정으로 추증했기 때문에 전례없는 사건이었다. 왕비 집안에도 베푼 적 없는 은혜이고, 더더욱이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나 원종의 어머니인 인빈 김씨 집안도 이런 특혜는 받아본 적이 없다.[68] 당시 원자 정호는 종묘사직에 고묘한 일로, 현대로 치환하면 입법하여 발효한 것이다. 이는 국왕이라도 번복하지 못하는데 신하인 송시열이 옳지 못하다고 언급하였으니 군약신강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숙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다.[69] 특히 송시열이 상소에서 언급한 송 철종은 신종의 여섯째 아들로 덕비 주씨의 소생이다. 먼저 태어난 형제들이 모두 요절하였으므로 태자로 책봉할 수도 있었지만, 번왕의 지위에 두었다가 신종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선인태후의 동의를 얻어 비로소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니 숙종이 “10년을 기다렸다고 한 것은, 반드시 고명(顧命) 할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말까지 한 것이다.[70]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26쪽.[71] 1661년(현종 2년) 숙종이 태어났을 때 100년 만에 원자가 탄생한 것으로 숙종의 지문에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라고 특별히 강조해서 기록할 정도였다. 조선 왕조는 시작부터 적장계승을 지키지 못했지만 15세기 말, 연산군은 맏아들인 원자가 태어났을 때 “적장(嫡長)으로 계승하는 것이 순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왕실에서도 적장계승을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72] 당시 내전의 주인이었던 인현왕후를 말한다.[73] 당시 귀인이었던 영빈 김씨를 말한다.[74] 폐비 윤씨는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죽고 난 이후, 임산부 상태에서 계비가 된 후에 원자(연산군)를 낳았고, 정현왕후도 폐비 윤씨가 폐출된 이후에 계비의 지위에서 중종을 낳았다. 하물며 현덕왕후도 세자빈으로 승격된 이후에 단종을 낳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처가 죽거나 폐출되어 공석인 상황에서 적처의 지위로 승격된 다음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75] 그러나 장옥정이 낳은 경종은 사정이 달랐다. 장옥정은 이전 시기의 그녀들에 비해 신분도 낮은 데다가 왕비의 생존 시에 후궁의 지위에서 서자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인현왕후에게 사속(嗣續)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후궁이 낳은 서자를 미리 계승자로 지명한 것은, 명분상의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비 소생의 왕자가 출생할 경우 정통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76] 물론 서자를 계승자로 세운 상태에서 적자가 태어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한 배제하기 위해 『당률』의 「호혼(戶婚)」 및 『대명률』의 규정이 있었지만,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 원종을 추숭하거나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를 추숭하는 것처럼 국왕의 정통성은 중요한 문제였다.[77] 『숙종실록』 권21, 숙종 15년 5월 4일(기해).[78] 『승정원일기』 17책, 숙종 20년 10월 13일(정미). “第當初坤殿出宮時, 備忘記未安之敎, 尙未有刪去之命, 此雖出於未遑之致, 而若無及今刊改之擧, 則書諸史冊, 傳之後世, 終有歉於大哉之王言, 其貽累於聖上維新之德者, 當如何也? 請令政院考諸日記, 其時聖敎中未安之語, 倂皆刪改, 以彰示中外. 上曰, 依啓.”[79] 『승정원일기』 335책, 숙종 15년 4월 24일(경인). 이때 김씨의 죄목은 입궁 후 질투를 일삼았고, 김수항 등 사가와 연락하며 국왕의 동정을 살피고 궁중의 일을 누설하였다는 것이었다.[80] 마찬가지로 장옥정이 왕비의 지위에서 후궁으로 강등될 때도 같은 방법으로 교명과 장복 등을 불태우고 부수도록 하는 명령이 떨어진다.[81] 『숙종실록』에서 전 사직 오두인 등 86인이라고 하였으나 오두인 외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추안급국안』에서 관직과 이름이 모두 기재되어 있는데 총 81인이므로 후자를 취하여 81인으로 본다.[82]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윤3월 13일(경술).[83] 『숙종실록』 권20, 숙종 15년 4월 26일(임진).[84] 『승정원일기』 숙종 16년 6월 7일(병인). “護産廳醫官, 以都提調意啓曰, 中宮殿産室廳排設吉日, 以今月初七日辰時, 推擇啓下矣.”[85] 『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27일(병진). “傳曰, 金有鉉, 守令除授, 權愉, 熟馬一匹面給.”[86] 『숙종실록』 권22, 숙종 16년 9월 16일(계묘).[87] 『승정원일기』 18책, 숙종 16년 7월 19일(무신).[88] 『숙종실록』 권23, 숙종 17년 1월 28일(갑인).[89] 『숙종실록』 권23, 숙종 17년 3월 22일(무신).[90] 『숙종실록』 권23, 숙종 17년 10월 2일(계미).[91] 김동율, 김태우 and 차웅석. (2012). 景宗의 病歷에 대한 연구Ⅰ - 『承政院日記』 藥房 기록을 중심으로 -. 한국의사학회지, 25(1), 11-22.[92] 『승정원일기』 18책, 숙종 19년 2월 21일(을미).[93] 『인현왕후전』에서 “민후의 원억하심을 알으시고 장빈의 요음 간악함을 깨치사 의심이 가득하시니 기색이 전과 다르시고”라는 대목과 모후인 명성왕후가 숙종의 꿈에 나타나 “중궁은 동국의 성녀요, 과인이 사랑하는 바이거늘 폐출하고, 요사스럽고 악한 천인을 중전의 자리에 올린 것은 종묘사직에 욕이 되니, 제사를 지내더라도 내가 받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94] 『숙종실록』 권25, 숙종 19년 12월 13일(임오).[95] 『승정원일기』 18책, 숙종 20년 1월 25일(계해). “上曰, 本來痰火, 已成痼疾, 難以時月, 冀其祛根, 而昨今兩日, 稍似向愈矣.”[96] 정석종, 『조선 후기 사회 변동 연구』, 일조각, 1983.[97] 이건창, 김용흠 역해, 『당의통략』, 아카넷, 2020, 335쪽.[98] 『숙종실록』 권26, 숙종 20년 4월 1일(무진).[99] 이희환, 「갑술환국과 숙종」, 『전북사학』 11·12, 전북대 사학회, 1989.[100] 『숙종실록』 권26, 숙종 20년 3월 29일(정묘).[101] 이건창, 이덕일·이덕영 역해, 『당의통략』, 자유문고, 193쪽.[102] 민진원, 이희환 옮김, 『단암만록』, 민창문화사, 1993, 143쪽.[103] 당시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모두 서궁(西宮)의 경복당이라고 쓰고 있다. 단순히 서쪽에 있는 궁궐로 해석하면 경희궁으로 오인할 수 있으나 효종 때에 조성된 창덕궁 만수전 영역을 서원(西苑), 또는 서궁(西宮)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 서궁의 경복당은 동궐도에서 확인되는 창덕궁 경복전 터가 맞다.[104] 정치적 이용 가치도 사라졌고 남인의 세력이 너무 커진 탓에 왕권에 위협이 될까봐 희빈과 남인을 쫓아냈다는 게 정설이다.[105] 숙종실록 숙종 27년 9월 28일 임자 2번째 기사[106]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와 중전인 인현왕후 역시 무속 신앙에 기대어 숙종이 쾌차하는 것을 기도한 일이 있긴 했다. 공식적으로 천대받았을 뿐 실제로 조선시대 여인들은 무속 신앙에 많이 의존하였다.[107] 『숙종실록』 권35, 숙종 27년 9월 25일(기유).[108] 한무제의 후궁으로 소제의 어머니이다. 성은 조씨(趙氏)로 품계가 첩여(婕妤)였기 때문에 조첩여(趙婕妤), 또는 그녀가 거주한 궁전이 구익궁(鉤弋宮)이라서 ‘구익부인(鉤弋夫人)’이라고 불렸다. 무제가 소제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면서 별다른 죄가 없는 구익부인을 죽이며 “어린 임금에게 젊은 어미가 있으면 폐단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109] 『숙종실록』 권35, 숙종 27년 10월 3일(병진).[110] 『숙종실록』 권35, 숙종 27년 10월 1일(갑인).[111] 『숙종실록』 권35, 숙종 27년 10월 7일(경신).[112] 『승정원일기』 숙종 27년 10월 8일(신유).[113] 인현왕후전, 노론계 당론서인 이문정의 수문록 기록 중 '사약을 연달아 세 그릇을 부어버렸다' 이 서술을 볼 때 장옥정은 사약의 약발이 들지 않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대부분 사약을 처음 먹는 순간 오장육부를 다 녹여 결국 사망에 이르는게 원칙인데 사약이 사람 몸 체질에 따라서 잘 안드는 경우도 은근 있었다는 여러 사례가 있었다. 연산군 시절 영의정 윤필상 경우 처음에는 사약을 먹었지만 죽지 않아 결국 목을 메어 사망하였고, 이 외에도 중종 시절 권신 이항 또한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아 목이 졸려 죽임을 당했고, 명종 2년 왕과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벽서가 붙어 많은 문인들이 누명을 씌고 죽게 된 정미사화 때 임형수도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는데 이때 임형수가 마신 사약이 무려 16사발 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끄떡도 없고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자 독주 2잔을 더 마셨지만 이 또한 몸에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114] 그리고 숙종 시절 송시열도 사약 한 사발로 안 죽어 결국 3사발을 먹은 뒤 사망하였다.[115] 장옥정 사후에도 경종을 보고 “누구의 자식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라고 구박하거나 심지어 노론과 공모하여 세자 교체까지 의논했던 기록을 보면 장옥정에 대한 분노는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장옥정이 사약을 받으면서까지 끝까지 발악하고 패악을 부린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116] 인현왕후전에서만 기록되는 내용이긴 하지만 시체를 버렸다는 것도 처음에는 희빈의 행동에 분노하고 희빈이 혐오스러운 나머지 시체마저 궁 밖으로 버렸다가, 나중에야 세자의 생모이니 장례라도 치러준 것이라고 끼워맞추면 되긴 하다. 인현왕후전의 기록대로 죽자마자 시체가 금방 썩어 냄새가 진동한다면 본능적으로 시체를 버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도 하고. 다만 이 기록은 인현왕후전에만 있고, 인현왕후전은 사료로써의 가치가 부족하므로 진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117] 다만 희빈이 왕세자의 생모이기 때문에 제대로 기록할 수 없었을 뿐, 실제로는 자진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희빈의 성품이 온건하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실제로 희빈이 임금이 자진을 명한다고 하여 바로 따를 정도로 온건한 성품일지조차도 의문이다. 사도세자도 처음에는 자진을 명받았으나 거부하여 뒤주에 갇혀 죽은 것이다. 실록에 관련 기록이 없다고 하여 사실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본래는 사약을 거부하다가 강제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실록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경종 때 임금의 친어머니라 하여 기록을 세초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관해 기록이 없다고 해서 순순히 자결했을 거라고 함부로 단정짓는 것 또한 위험하다. 실제로 사약을 받은 뒤 “나를 죽이려거든 내 아들(세자)부터 죽이라.” 라고 폭언하는 걸 궁녀들이 강제로 붙잡아 숙종이 사사시킨 듯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에 국본인 세자를 죽이라고 폭언을 내뱉으며 발악한 죄까지 추가되어 연좌제가 적용되어 그녀의 친정마저 멸문한 듯하다.[118] 김윤정, 『장희빈張禧嬪 상례와 추보追報 논의의 성격』, 국학연구, 2022.[119] 『영조실록』 권24, 영조 5년 12월 25일(을축); 『승정원일기』 38책, 영조 5년 12월 25일(을축).[120] 이때는 신하들도 희빈이 자진을 거부하는 것을 본 상태라 사약을 내리는 것에 찬성했을 것이다. 아무리 세자의 생모에게 유사의 형벌을 쓸 수 없다지만 본인이 자살하기 싫다는데 사약으로 죽일 수밖에 없기도 하고. 숙종이 ”니들 의견을 따라줬는데 희빈이 거부한다. 지가 자살하기 싫다는데 세자의 친모라고 해도 사약을 내려야지 어쩌겠나.“ 라고 주장했고, 신하들도 지쳐서 유사의 형벌이고 나발이고 그냥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에 찬성했을 것이다.[121] 그리고 정황상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만을 하지는 않았고 숙빈 최씨와 귀인 김씨, 연잉군에 대한 저주도 함께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22] 이 얘기를 예전에 설민석이 어쩌다 어른에서 언급했다가 역사 전공자들에게 대차게 까였었다.[123] 을해년(1695) 8살에 관례(冠禮)를 치르고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목소리가 갖추어졌으며, 모든 행동거지가 예의에 맞았다. 당시 성균관에 있는 많은 유생들이 우러러 보았다. 입시했던 의관들이 또한 전하는 말에 따르면, ‘혈맥이 크고 장전하여 마치 새끼줄 같아 보통사람 보다 두 배나 특수했다.’ 하였다.[124] 『승정원일기』 숙종 27년 10월 8일, “藥房, 王世子入診後, 口傳啓曰, 入診諸醫等以爲, 脈度虛數, 而不至大段, 寢睡煩轉, 比前頗減, 姑無用藥之事云矣, 敢啓” 번역하면 이렇다. "약방이 왕세자를 입진한 후에 구전으로 아뢰었다. '입진한 여러 의원들이 이르기를 맥도가 허약하고 촉급하지만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고, 주무실 때 자주 뒤척이는 것이 전에 비해 제법 줄었으니 일단은 약을 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125] 『승정원일기』 숙종 27년 10월 10일, “自昨夕背腹部, 多發紅斑, 時覺搔癢, 而四肢稀少,”[126] 한성부 서부 황화방 정동(貞洞)으로 국초에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이 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장옥정의 신주를 정동의 사저로 보냈다고 하고, 정동이 정릉동을 부르는 다른 말이므로 정릉동 본궁이 곧 희빈방(禧嬪房)으로 추측된다.[127] 건양현은 창덕궁·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죄인은 건양현을 넘을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건양현을 피하는 경로를 마련하여 장옥정의 시신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128] 죄인이기 때문에 후궁으로서의 작호가 아닌 성씨로만 호칭했다. 공식적으로 희빈의 신분을 빼앗아 폐서인 시키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죽을 때 신분은 서민으로 강등되어 희빈이 아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129] 성복일은 12일(『장희빈상장등록』)과 13일(『승정원일기』)로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장희빈상장등록』의 「왕세자성복의」에 “4일째(第四日)” 행한다는 세주가 첨부되어 있고 시마복에 따른 만3일의 공제일이 16일이라는 점에서 13일을 성복일로 추정할 수 있다.[130] 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