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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성장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씨로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라는 고귀한 신분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날이 단오였는데 당시 단오날에 아기가 태어난 것은 매우 불길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인 빈어(嬪御, 후궁 작호 중 하나)였는데, 장보고의 딸이 과거 문성왕의 왕후로 거론되다가 미천한 신분 탓에 거부당한 이후, 나중에 헌안왕에 오르게 될(즉, 아직 즉위하기 전인) 김의정의 첩이 되어 궁예를 낳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설의 요지는 바로 궁예와 장보고(본명 궁복, 장보고는 본인이 당나라에서 일할 때부터 사용한 중국식 성명이다.)가 모두 궁(弓)씨로도 언급되는 것에 기원한다.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자라나 있었다. 신생아에게서 비정상적으로 이가 빨리 나는 것은 비교적 드물지만, 출생시 치아가 이미 존재하는 선천치(natal teeth)와 출생 후 1개월 이내에 나는 신생치(neonatal teeth)가 있다. 즉 선천치는 영유아 시기의 치아 문제 중 하나일 뿐 불길함과는 당연히 전혀 관계가 없다. 게다가 집 위로 흰 빛이 하늘에 뻗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있어 높은 곳에서 던져 죽이려는 것을 유모가 가까스로 받아 데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이때 유모가 떨어지는 아기 궁예를 받을 때 실수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점 때문에 궁예는 애꾸눈인 인물들 중 가장 어릴 때 애꾸가 된 사례로 기록되었다. 한편으로는 유모가 어린 궁예를 품에 안고 담을 넘다 넘어지면서 눈을 찔렀다는 전승도 있다.
이런 기록, 전승들을 그대로 따른다면 궁예의 출생지는 옛 신라의 왕성이었던 경주시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궁예의 초기 활동 지역이 남한강 유역이었다는 점, 청주 사람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았다는 점 등을 보건대 실제로는 경주시에서 태어났지만 그 후에 옛 서원경인 충청북도 청주시나 그 부근인 현재의 진천군, 증평군, 괴산군, 음성군 중 한 곳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더 높다.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의 궁예 벽화 |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린 소년 시절때부터 성격이 괄괄한 탓에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큰 후 유모가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자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세달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의 배경이기도 했지만 후삼국시대 이후 어느 시점에 폐사돼 사라졌는데,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2012년 영월군에서 세달사터를 발견했으나, 그 외에 경기도 개풍군, 경상북도 영주시 등지에 있었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일부러 왕건과 궁예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개풍군 설을 채택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부식이 살았던 시기에는 흥교사(興敎寺)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법명을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궁예전> 원문에 自號善宗이라고 되어 있다. 이 법명은 진골 출신의 신라 고승이었던 자장율사의 속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장성할 때까지 세달사에서 지냈는데, "계율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 담기(膽氣)가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이후 세달사에서 나와 도적인 기훤의 부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곳에 있으면서 무술을 더 단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궁예는 수계도, 법명도 제대로 받지 않고 스스로 선종이라 이름을 지은데다가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승려라고 하기에는 어려우나, 장성할 때까지 사찰에서 생활했기에 승려가 아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칠장사에서 13세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도 치안이 나쁜 혼란기에는 종교인이라도 무장을 하고 전쟁 수단을 마련하는 건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고, 종교 창시자들도 의외로 무력 쪽으로 한가닥했다는 기록도 쉽게 볼 수 있다. 공자는 전차를 이용한 전쟁법은 물론 그 자신도 전차를 타고 싸우는 전술에 뛰어났고, 석가모니도 젊은 시절에는 무술대회에서 우승을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목수로 일했던 적이 있기에 약하지 않았다. 모세도 한때는 목동이였던만큼 강인했으며, 무함마드는 탄압을 받게 된 이후로 메디나로 가 세력을 일으키고 메카 세력을 제압하며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군사 조직 중 하나인 소림사가 있으며, 일본에서는 자경단급의 수준을 훨씬 초월해 일부는 마피아나 야쿠자, 테러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전쟁 용병으로까지 활약했던 승병 군사조직 소헤이가 있었다.
유럽도 마자르족이나 바이킹과 같은 이민족의 침공과 군웅할거로 어지럽던 중세 초기의 경우를 봐도, 외딴 수도원들은 어지간한 요새 저리가라 할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져 유사 시에 방어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고, 수도자들도 기회만 되면 철퇴로 바이킹이나 벤트족, 마자르족의 뚝배기를 잘만 까부수고 다녔다. 교황이 "제발 수도자들은 살생을 자제하시오."라고 여러 번 명령을 해도, 현지 사정이 너무 험악하다보니 씨알도 안먹혔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해인사 묘길상탑기>에는 도적의 침입에 맞서다 많은 승려들이 희생되었다는 언급이 있고, 고려시대까지 전쟁과 군사적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역이나 원을 관리하는 사찰의 경우 아예 성벽을 둘러 군사 요새화하기도 해 김제 금산사에는 아직도 주변의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삼국시대 성터가 남아 있다.
야사에 따르면 육식도 서슴지 않고 했으며, 심지어 다른 동료 승려에게까지 강제로 먹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궁예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평소에 궁예로부터 골탕을 먹었던 승려들이 모여서 그에게 복수를 하려고 궁예 몫의 밥을 뭉쳐 방바닥에다 버렸다. 그 후 궁예가 돌아와 밥을 찾자 바닥에 떨어진 밥을 먹으라고 했는데, 궁예는 의외로 화내지 않고 말없이 도로 방을 나서더니 우물에 가 물을 한 두레박 퍼다가 다짜고짜 방바닥에 들이부었다. 경악한 승려들이 따지고 들자, 궁예는 태연하게 "물에 밥 말아 먹는다."고 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 승려들은 다시는 궁예에게 찍소리 한번 못했다고 한다.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때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바리때에 까마귀가 떨어뜨리고 간 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산가지 4개를 떨어뜨려 그것이 王자를 그렸다거나, 왕 자가 쓰인 자갈을 떨어뜨렸다는 버전도 있다. 이에 궁예는 자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줄을 예감했다고 한다.
2. 미륵정토를 꿈꾸다
진성여왕 대에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다.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자 궁예는 891년 세달사에서 나와 죽주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세달사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으로 추정되는데, 궁예가 더 가까운 북원(강원도 원주시)의 양길 대신 굳이 멀리 기훤에게 찾아간 걸 보아 궁예가 몸담을 당시에는 기훤이 양길 이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듯하다.그러나 기훤은 궁예의 재능과 인물됨을 잘 알아주지 않았다. 궁예는 더 이상 그의 휘하에 있어봤자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궁예는 함께 기훤의 밑에서 활동하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몰래 친분을 맺고, 892년에 기훤을 떠나 북원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길에게 투항했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이를 각색해서 원회와 신훤이 주도하여 폭압적인 행태를 일삼던 기훤을 제거하고 궁예를 새 우두머리로 추대했으나 세력에 한계를 느끼고 그 세력 그대로 더 큰 세력이었던 양길의 부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왔다. 아무튼 기훤의 부하였던 신훤이 훗날 양길의 부하로 나오는 점을 볼 때 기훤의 세력이 양길 세력에 흡수된 것은 정황상 실제 역사에서도 맞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했다. 궁예가 어떻게 민심을 얻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평무사한 궁예의 행보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을 것이다.
양길의 부하가 된 궁예는 양길의 병력을 이끌고 892년까지 치악산 석남사에 머물면서 신라의 주천, 나성[1], 울오, 어진 등 10여개의 군현을 공략했다. 이 중 어진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동해 연안까지 강원도 지역을 정복한 셈이다. 여러 성을 정복한 궁예는 견훤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실제로는 892년의 견훤은 아직 후백제의 왕을 칭하지는 않았고 내부적으로만 왕이라 자칭하며, 외부로는 아직 신라의 신하라고 주장했다. 공공연히 후백제 왕을 칭한 것은 900년이다. 견훤의 소식을 들은 궁예는 자신도 자립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여 2년만인 894년에 대관령을 건너 명주(강릉시)의 귀부를 받아냈다. 이 때 궁예를 따라가는 무리가 3천 5백 명이었다고 하니, 기훤에서 양길로 갈아탈 때처럼 양길군의 세력 일부를 흡수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명주의 성주는 순식으로 918년 왕건의 정변으로 궁예가 몰락하고 고려가 건국되었는데도 순식은 무려 10년을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928년 1월에 가서야 투항하고 보답으로 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순식이 된다. 당시 궁예의 실력으로 명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왕순식이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신 명주를 궁예에게 바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왕순식이 명주를 근거지로 삼았던 태종무열왕계인 강릉 김씨의 김주원의 후손이라는 설이 도는데 왕순식이 그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없고 김씨였다는 기록도 없다. 자세한 건 왕순식 항목 참조.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한때 주군이었던 양길로부터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 3천 5백 병력을 14개 부대로 정비하고 금대, 귀평, 장일, 검모, 흔장 등을 장수로 삼아 저족(猪足, 인제군), 성천(狌川, 화천군), 부약(夫若, 김화군), 금성(金城, 김화군), 철원(鐵圓) 등 강원도 북부 지역의 성들을 정복했다. 이후 지금은 휴전선으로 막혀있는 철원-토산군 방면 가도를 통해 패서 (개성시 및 황해도) 지방으로 진출하자, 아직 각 지역별로 하나하나 작은 세력에 머물고 있던 패서의 호족들은 이미 강원도의 넓은 땅을 차지한 궁예의 큰 세력을 보고 대부분 순순히 항복했다. 이 시기에 항복한 패서지방의 호족은 박지윤, 황보제공, 유천궁 등이 있었고 특히 훗날 고려 태조가 되는 왕건의 아버지 왕륭도 있었다.
다만 궁예에 맞서 싸우려는 호족들도 일부 있었는데, 염주(鹽州, 연안군)의 호족 유긍순이 이름이 남아있고 그 외에 승령현(僧嶺縣, 연천군), 임강현(臨江縣, 장단군), 공암(孔巖, 서울 강서구), 검포(黔浦, 김포시), 혈구(穴口, 강화군)등의 성들이 궁예에 대항했다. 이 성들에 있던 세력이 도적인지 토착 호족인지 고립된 통일신라 지방관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궁예는 이 지역들을 하나하나 공격해 무너트렸는데, 특히 이 중에서 유긍순은 궁예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는지 유긍순을 간신히 멸망시킨 궁예는 과거 유긍순의 부하였던 자들을 사병으로 격하시키는 보복을 했다. 이렇게 사병(私兵)으로 전락한 자들 중 훗날 왕건의 심복이 되는 태평도 있었고, 윤선은 발해의 쇠락으로 말갈족의 땅이 된 동북방 삭정군(朔庭郡, 안변군)으로 달아나서 궁예가 망할 때까지 방어했다.
궁예는 897년 왕륭의 영토인 송악을 수도로 정했고, 그의 아들 왕건을 2인자격으로 중용하기 시작한다. 북원의 양길은 궁예의 독자 행보에 분노해 국원 등 경기 남부, 충청 지역의 30여 성의 병력을 동원해 궁예를 습격하려 했지만 궁예가 이를 예견하고 선제 공격을 가해 양길을 깨트렸다. 그리고 나서 899년에는 본격적으로 양길과 대립하기 시작하더니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듬해 900년에는 왕건을 지휘관으로 삼아 청주ㆍ충주에 있던 양길군 잔당 청길(淸吉), 신훤(莘萱) 등을 토벌해 소백산맥 이북의 영역을 거의 장악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한다.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먼저의 고려나 훗날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궁예가 살던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 고려를 세운 궁예는 개성에 해당하는 송악을 수도로 삼았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송악을 비롯한 경기도 북부 지역과 황해도를 아우르는 패서 지역 호족과 백성들은 옛 고구려 남부 지역으로, 고구려 유민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년 전인 서기 900년에 남쪽에서는 견훤이 백제 계승을 주장하며 후백제 왕에 올랐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모방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리고 그 시절 사실상 고구려계 호족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왕건은 이 시절 승승장구해 나갔다.
3. 현실의 한계에 부딪힌 자칭 미륵
그런데 904년, 궁예는 돌연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정했다. 이듬해인 905년, 적잖은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다.[2] 그리고 청주 지역 사람들을 1천 호, 즉 수천 명을 철원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다만 철원은 철도가 등장하고 토목기술이 발달한 근대 이후에는 나름대로 한반도의 중심 지역으로서 괜찮은 입지일수도 있으나 후삼국시대 기준으로는 한 국가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다. 철원은 바다에서 먼데다 분지 지형에 생각보다 평야도 좁고, 토질 또한 당시엔 농사 짓기에 척박한 땅이다보니 수도다운 인구 부양력을 가지려면 대하의 진입이 필수이다. 하지만 철원을 흐르는 한탄강의 경우 수량이 너무 적은데다 건/우기에 따른 유량 편차도 심하고, 주변이 현무암 지대이다보니 암초가 곳곳에 튀어나온데다 야트막하다고는 해도 폭포까지 형성되어 있어 작은 나룻배면 몰라도 대선이 진입할만한 강이 못 된다.
또한 강 주변 지형이 "주상절리" 라고 부르는 절벽 지대여서 경치는 좋을지 몰라도 중간 기착지나 하역지로 쓸만한 강 주변의 넓은 평지가 매우 부족하다. 그나마도 중상류에 해당하는 전곡 일대까지는 어찌저찌 몸 비틀면 들어올 수 있는데 철원이 위치한 상류 지역은 강폭이 더 좁아지고 강바닥 지형도 더 거칠어 화물선이 유의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강이 아니다. 이 때문에 수운을 통해 각지의 조세를 받는 것이 어렵고 농업용수 조달도 힘들었고 결과적으로 전근대에 수도로 삼기에는 많이 무리한 지역이었다. 자세한 것은 태봉국 철원성, 철원군과 한탄강 문서를 참조.
왜 궁예가 건국 3년 만에 철원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국호와 연호까지 싹 갈았는지에 대해선 저마다 의견이 나뉘지만, 대체적으로는 왕건을 필두로 한 고구려계의 패서 호족들의 군사 세력이 건국과 초기에는 강력한 지지가 되었을지 몰라도 몇 년이 지나자 궁예의 왕권 강화 정책에 강력한 적대 세력으로 군림하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 의식이 없거나 희박한 철원 지역으로 천도를 시행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마진이란 국명 자체가 불교 용어 '마하진단'(摩荷震檀)의 준말로 추정된다. 마하를 거대 국가로, 진단을 동방으로 해석하면 동방의 거대한 국가라는 의미가 있다. 태조 왕건에서 채택한 가장 유명한 설이다. 또는 마한, 진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궁예는 국호를 변경함으로써 고구려계의 느낌에서 탈피하는 동시에 패서 지역의 강력한 고구려계 군사 호족들의 입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천도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 가는 행동이었다.
철원에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철원에 거주할 인구를 청주에서 끌고와 옮겼다고 되어있는데, 즉 원래 철원이 인구가 많은 지역도 아니었고 구 고구려보다는 구 백제에 가까운 청주 출신 외지인을 많이 들이고 수도로 삼아서 고구려 일변도의 분위기를 희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단지 궁예가 수도로 옮긴 곳의 입지가 그다지 좋지 않았을 뿐..
또한 고(구)려는 옛 삼국 중 북방에 군림하던 강력한 군사강국의 국명이라 이 정체성을 너무 강조한다면 청주시, 충주시, 나주시같이 옛 진짜 고대 백제가 차지한 지역과, 아직 정복하진 못했지만 옛날부터 원래 신라였던 지역들에서 호의적인 지지와 단일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백제와 신라까지 공통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더 넓은 의미의 불교적이고 추상적인 이름인 마진으로 국명을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의 태봉 역시 그 의미에서 삼국 중 하나가 아닌 모두를 포괄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훗날 고려 왕조는 이 궁예에 대한 반동으로 성립된 국가이기 때문에 일단 국호에 있어서는 객관성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삼국 중 가장 군사력이 강력한 고려라는 이름을 선택했지만, 과거 통일신라 정권이 만든 삼한일통 논리를 계승해서 삼국 통일 의식을 포괄하기 위해 애썼다. 그 흔적은 국가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나 또다른 시각에서 작성된 삼국유사에서도 공통적으로 신라가 일단 삼한을 통일했음을 인정하고, 그것이 도중에 무너지자 고려가 다시 삼한을 통일했다는 논조에서 찾을 수 있다.
궁예는 야심찬 이상주의자로서 자신과 백성들의 이상향이 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과로 인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해버린 것이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패서 고구려계 군사 호족의 협조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는데, 그들은 이상향보다 자신들의 군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단지 재산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궁예에게 협조하고 그의 정통성에 힘을 보태고 있지만 진심으로 궁예를 따른 것이 아니었고 패서 지역의 지지도 딱히 궁예에게 복종적이지 않았다. 언제든 궁예가 빈틈을 보이면 뒤에서 칼을 꽂을 수 있도록 군사적으로 궁예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궁예의 정책 중 호족의 이익과 상반되는 것에는 여과없이 제동이 걸렸다.
그가 카리스마와 동시에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평생을 승려로 살았던 궁예는 백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오히려 지배층들을 포섭하는 데 필요한 정치력은 갖추지 못했다.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귀부해 온 신라인들을 첩자로 의심하여 족족 살해한 것이 한 예다. 신라의 폐위된 왕자 출신이었던 궁예가 신라를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증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시 신라 지배층 출신이었고, 중앙에서 배제된 지배층이나 골품제의 제한에 절망한 6두품, 일반 백성 정도는 쉽게 포섭할 수 있었을 텐데도 무조건적으로 감정 만을 앞세워 양날의 검이 되고 만 것이다.
한편 궁예의 신라 귀순자 학살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궁예가 부석사에 걸린 신라 국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어버린 것이나, 신라를 '멸도'라고 칭하며 적대시한 것은 정사에도 기록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적대한 대상은 신라 국왕과 왕가, 진골 귀족, 즉 신라 지배층에 한정되었다는 이야기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소위 4기장 중 신숭겸 장군과 복지겸 장군을 제외하면, 홍유와 배현경은 옛 신라 지역의 자유인 출신으로 태봉의 장군이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홍유의 경우 경북 의성 출신이고, 배현경의 경우는 경주시 출신이다.
각설하고 궁예의 급진적인 고구려 색깔 제거 정책에 대해서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군사 호족들이 막후에서 은근히 저항했을 것은 당연지사이고, 궁예는 자신의 새로운 정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 큰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궁예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고구려계 호족들의 근거지를 떠나 새로운 수도의 백성과 친위 병력을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궁예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901년에 보였던 친고구려적 성향을 철원에 천도하면서부터 완전히 버렸다. 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이던 청주 주민들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아지태를 위시한 백제계 호족인 청주 세력들을 적극 등용한 것 등은 궁예가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궁예의 이런 군사적, 정치적 활동들은 결국 철원 지역의 자유민들을 피폐하게 했고, 국토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오히려 약화시켰으며, 많은 국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진행되어가던 북진정책에 당위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고구려 색깔을 전면 부정하면서 패서 호족들의 반발이 더욱 더 강력해지는 결과를 발생하고 만다.
4. 몰락 징후
궁예는 처음 거병한 890년대부터 꾸준히 주변과 전쟁하며 영토를 팽창해 나갔지만, 911년부터는 점점 더 내부적으로 내전과 군사반란이 발발할 징조들이 보이자 영토 팽창을 위한 정복전쟁들을 잠시 중단하고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911년경부터 국내 호족들의 군사적 반란과 내전 단속과 중앙 집권화에 강력히 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속설에 따르면 오행설에 근거한 것으로 금생수(金生水)의 원리로 금의 기운으로 일어난 신라의 금덕을 이기겠다는 의도에서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더하여 만세는 천자에게 부르는 찬양 어구이기 때문에 은연 중에 자주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덤. 공교롭게도, 강력한 중앙 집권으로부터 기반하는 엄격한 법치를 이상향으로 대제국을 통치하던 진시황도 수덕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한다. 이 즈음부터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대강 유추해 본다면 모두 왕권을 갑작스레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미륵'으로 칭한 것은 혼란한 후삼국시대에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미륵신앙을 활용해 자신을 신격화하여 제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고 관심법은 거기에 더해 딴 마음 안 먹고 절대 복종하도록 호족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미륵신앙은 6세기경 백제 웅진성 일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해 퍼진 것으로 보이는데 혼란한 후삼국시대에 들어 대히트를 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궁예의 무리하고도 성급한 왕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 신앙을 활용해 자신의 왕권을 전제화하려던 생각은 당시 미륵 신앙의 총본산인 법상종 교단과 갈등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법상종은 앞으로 세계를 구하러 올 미륵불을 주불로 삼는 종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상한 젊은 외눈박이 중놈이 나타나서 미륵을 자칭하면 "아, 그렇군요. 미륵이시군요. 미륵 부처님 만만세"하고 따를 리가 없다. 궁예 또한 순순히 뜻을 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결국 자기 신격화 목적의 '미륵 신앙 왜곡'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법상종의 거두 석총을 백주 대낮에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극단적인 수를 두기까지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쓰인 기록에 따르면, 궁예가 20권의 불경(경전)을 손수 지었는데 이게 요망스러운 불쏘시개여서 이 불경을 주제로 한 강설을 듣던 석총[3]이 "이런 해괴한 이야기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철퇴를 맞고 끔살당했다고 한다. 궁예가 제멋대로 지었다는 경전의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용이 어쨌건 대놓고 경전을 제멋대로 저술한 것은 불교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궁예의 관심법은 호족들에게는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공포 정치로까지 확대돼 보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궁예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호족들에게 조차도 거침없었는데 호족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가 하면 왕권 강화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황후 강비를 잔인하게 처형시켰다. 이를 말리던 아들 신광과 청광까지 살해하는 잔혹한 짓까지도 벌였다. 고려사는 이를 궁예의 광기로 규정했지만 아마도 궁예는 옛 고구려계 호족인 신천 강씨 출신의 딸로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강비가 제위 계승권을 가진 자신의 아들을 앞세워 궁예를 죽여서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나, 아니면 더 나아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강비와 두 아들들까지 처형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기록처럼 강비가 궁예의 폭군 정치에 직언을 많이 해서 강비는 물론이고 황후의 두 아들까지 모두 죽인다는 것은 궁예가 제정신이라는 가정 하에 논리적으로 볼 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강비의 충격적인 처형 이후 패서의 고구려계 호족들은 궁예가 조만간에 자신들에게까지 칼을 겨눌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들의 우려는 그간 왕건만은 건드리지 않았던 궁예가 왕건마저도 군사 반란을 했다며 죽이려 드는 사건을 통해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건은 호족 중의 1인자로 태봉에서 궁예 다음 가는 군사 실권자였다. 그런 왕건마저 죽이려 하는 궁예를 보고 호족들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분노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 것은 민생 면에서도 큰 오판이었다. 한반도에서 전근대의 주요 물자 이동 수단은 수운과 해운이었던 만큼, 도성이라면 원활한 전쟁 물자 수급을 위해 응당 배가 다닐 수 있는 큰 강이나 항구를 끼고 있어야 했다. 철원은 근처에 큰 강도 항구도 없는 내지이기 때문에 교통이 너무나 불편했다. 한탄강은 그다지 큰 강이 아닌데다 고저차가 심하고 물살이 세서 수운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한탄강이 남한에 몇 군데 없는 래프팅(급류타기)의 명소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폭포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구간도 많은데, 그러면 수상 운송은 못 한다. 게다가 내륙이라 추워서 얼음이 일찍 얼고 늦게 풀린다. 멀지 않은 곳에 임진강이 있기는 하지만 임진강 수계의 수운은 임진강 본류에서만 가능하다. 경기도에서 발간한 나루터·포구 일람을 보면 연천군의 포구들이 모두 구 임진강변에 몰려있고 한탄강 수계인 전곡 이동으로는 전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원이 교통의 요지가 된 것은 근대에 들어 경원선이 깔려 원산항과 서울 간 대규모 물류운송이 가능해졌을 때이다. 이는 철원군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물론 철원에는 '철원 평야'라는 꽤 풍요로운 곡창 지대가 있다. 아마 궁예도 철원 평야의 부양력을 믿고 천도를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원 평야 자체의 생산력만으로 수도의 경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한탄강의 유량으로는 농업용수 정도나 공급할 수 있었던 곳에 도성을 지어 생활용수 수요가 폭증하자 농업용수 공급이 엉망이 되어 풍요로운 들판까지 황무지화되었다. 이 때문에 농업용수가 귀해져셔 다른 지역이 평작일 때조차도 유독 철원의 중하층 농가에만 매년 흉작이 반복되었다.
수도의 쌀값이 폭발적으로 치솟아 대지주와 대상인은 폭리를 취한 반면 백성들의 반감은 계속 커졌다. 고려사 태조 원년(918) 8월 신해의 기록에 '가는 포 1필로 쌀을 5되밖에 살 수 없었다'는 표현이 있다. 조선시대에 옷 값이 대략 1필 당 20-40되 남짓이었는데, 농업생산력의 변화를 감안해도 당시 철원의 물가는 심각하게 높았다. 게다가 농업용수가 고갈될 정도로 물을 끌어대어도 생활용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는 대체로 큰 강을 끼고 있으며, 이는 교통과 산업이 크게 발달한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많은 인구가 매일 배출하는 막대한 하수를 처리하고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선 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평양, 개성, 경주, 서울, 공주, 부여 등 주요 왕조의 수도였던 곳 치고 배산임수 지형이 아니었던 곳이 드물다. 방어와 교통 양자에 모두 유리해야 비로소 수도의 요건을 갖추지만, 철원은 방어는 몰라도 교통은 별로인 곳이었다. 패서 호족들을 견제한다는 목적은 좋았지만 좋은 입지를 가진 송악(개성)을 버린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다.
한 가지 야사가 있다.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길을 가던 중 오른손에 큰 거울을, 왼손에 도마 3개를 들고 있는 늙은 거한을 만났는데, 거한이 왕창근에게 쌀 2말이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거울을 팔고자 했다. 예사로운 거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왕창근은 제의를 수락하여 거울을 샀는데, 그 거한은 그 쌀을 저잣거리의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거울이 햇빛을 받으니 글씨가 나타나는데,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ruby(三水中四維下, ruby=삼 수 중 사 유 하)] [ruby(上帝降子於辰馬, ruby=상 제 항 자 어 진 마)] [ruby(先操鷄後縛鴨, ruby=선 조 계 후 박 압)]
세 물길 가운데에 네 바가 내리고,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리셨으니 그가 먼저 닭을 잡은 후에 오리를 잡을 것이다.
[ruby(於巳年中二龍見, ruby=어 사 년 중 이 룡 현)] [ruby(一則藏身靑木中, ruby=일 즉 장 신 청 목 중)] [ruby(一則現形黑金東, ruby=일 즉 현 형 흑 금 동)]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미르가 나타나리니 한 마리는 푸른 나무 뒤에 잠시 몸을 숨겼고, 한 마리는 검은 쇠의 모습으로 동쪽에서 나타날 것이다.
세 물길 가운데에 네 바가 내리고,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리셨으니 그가 먼저 닭을 잡은 후에 오리를 잡을 것이다.
[ruby(於巳年中二龍見, ruby=어 사 년 중 이 룡 현)] [ruby(一則藏身靑木中, ruby=일 즉 장 신 청 목 중)] [ruby(一則現形黑金東, ruby=일 즉 현 형 흑 금 동)]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미르가 나타나리니 한 마리는 푸른 나무 뒤에 잠시 몸을 숨겼고, 한 마리는 검은 쇠의 모습으로 동쪽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었는데, 괴이히 여긴 왕창근은 이 거울을 왕궁에 가져가 궁예에게 바친다. 궁예는 왕창근과 함께 사람을 풀어 이 거울을 판 거한을 찾게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도저히 나라 전체를 뒤져도 이 사람은 고사하고 지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잠시 쉬고자 한 허름한 절간에 들어간 왕창근 일행이 벽에 걸린 탱화를 보니, 놀랍게도 치성광여래의 좌우에 있는 수호신 중 하나의 모습이 그 거한의 모습, 도마 세 판을 들고 있는 것까지 정확히 일치하였다. 보고를 받은 궁예는 '이는 하늘의 계시다'라 여겨 송함홍, 백탁, 허원 등의 궁내 박사들을 시켜 거울에 적힌 말을 해석하라 명하는데...
먼저 '세 물길(三水)'은 '태(泰)'의 파자이므로 태봉을 뜻하고, '네 바(四維)'는 '라(羅)'의 파자이니 신라를 뜻한다. '진마'란 '진한'과 '마한'을 뜻하며,[4] '두 마리 용'은 2명의 영걸,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므로 송악을 뜻하는 것이고, 그 뒤에 숨은 용은 송악 출신의 왕건, '검은 금'은 쇠를 뜻하니 철원이며, 동쪽에서 나타난 용은 동쪽의 신라 출신이자 철원에 천도한 궁예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닭'은 계림(鷄林), 즉 신라,[5]를 뜻한다. '오리'는 압록강이므로 오리를 잡는다는 것은 즉 북쪽으로 그 세력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철원에 자리잡은 궁예를 피해 송악에 숨어있던 용손 왕건이 곧 일어나 신라와 백제를 차례로 손에 넣게 된다는 예언이었다. 그러나 죽고싶지 않고서야 그 미치광이 상태의 궁예에게 이런 내용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으므로, 박사들은 적당히 궁예에게 아부하는 말로 날조하여 보고했다고 한다. 일명 '고경참문 사건'.
고경참문 사건은 당년 6월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켰을 때 이 경문을 인용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왕건 세력이 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보는 의견이 강세이다.
5. 최후, 태봉 멸망
정개 5년인 918년 6월, 왕건이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하고 고려를 건국하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이 주도하여 선봉장이 되어 궁예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 공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학계에 알려져 있지만, 정작 고려사에서 왕건이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고려를 건국한 이후 논공행상을 베풀었을 때 군공을 받은 호족들의 명단을 보면 의외로 패서 지역의 옛 고구려계 대호족들은 거의 없고 군사 정변에 가담한 호족들의 숫자도 터무니없이 적은 점에서 오히려 사병을 가진 호족들의 발호가 일반적이던 중세답지 않게 관군이 주축이 되어 벌인 현대식 군사 정변에 가까웠다는 해석 또한 존재한다.[6]그 근거로 개국공신 목록을 보면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대호족들인 박지윤, 황보제공, 유천궁이나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군공을 세운 후삼국시대 최대의 명장인 평주의 유금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궁예의 태봉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왕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신이였던 최응, 고경참문 사건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송함홍, 백탁, 허원 같은 궁예의 궁 내부의 왕건 지지 세력도 전혀 보이지 않고, 왕건의 명을 받아 훈요 10조를 받아적은 박술희, 왕건의 주요 세력 기반중 하나인 나주 호족, 그리고 왕건의 처가댁 호족 세력들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를 개국한 군사 정변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개국 1등 공신과 2등 공신으로 임명된 공신들의 명단은 개국 1등 공신에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이며 2등 공신에 견권, 능식, 염상, 김락, 연주, 마난이 보일 뿐이란다. 고려사 환선길 열전을 보면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환선길과 그의 아우 환향식이 왕건을 죽이기 위해 암살 모의를 했다. 환선길이 군인 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왕건에게 다가가자 왕건은 태연하게 "짐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이 비록 너희들 덕분이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겠느냐?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이럴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환선길은 왕건이 복병을 숨겨놓은 것으로 오인해 도주하다가 동생과 더불어 왕건의 추격병들에 의해 사망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환선길 형제도 왕건의 고려 건국 정변에 가담했지만 곧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이 행적으로 인해 공신 명단에서 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사 태평 열전을 보면 태평은 궁예 시절부터 왕건을 위해 일했고, 왕건의 정변 때 공을 세웠다고 쓰여 있어 태평도 왕건의 고려를 건국한 정변 공신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 고려사 견권 열전을 보면 견권은 청주 출신이지만 왕건을 지지한 호족으로 같은 청주 호족이지만 재경 청주인들인 김근겸, 김관준, 김언규 등을 제거할 것을 왕건에게 권고한다. 그러나 왕건은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과 같이 싸운 호족들이라며 거절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볼 때 김근겸, 김관준, 김언규도 공신으로 포함시킬 수 있겠으나 포함시킬지라도 왕건의 고려 건국 개국공신 수는 현재까지 확인이 되는 수가 17명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숫자는 조선왕조건국 당시의 개국공신 수인 52명과 세조의 계유정난 정난공신 43명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수이고, 더군다나 박지윤, 황보제공, 유천궁 같은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대호족들이 명단에 전혀 없는 것을 보아서 실제 이들이 궁예의 숙청을 예견해 선제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부실한 편이다.
오히려 하현강이나 정청주, 조인성 같은 궁예에 호의적인 학자들의 말대로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당연히 존재했지만, 패서 지역 호족들을 등에 업은 궁예의 황후 강씨의 사태가 진압된 후 큰 충격을 받은 궁예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친위세력들을 잘 이용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한 관계로 이들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 뿐만이 아니라 기타 왕건을 지지하는 반궁예세력들이 왕건의 정변 때까지 제대로 결집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꽤 근거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궁예는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연히 사병을 보유한)패서호족을 왕건만 빼고 매우 경계하게 되었고 때문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청주 호족들을 이주시켜 친위세력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강비에게 역모죄를 씌워 처형시킨 점에서 패서호족의 거병을 매우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따라서 당시 패서호족들은 작당하여 근거지에서 사병을 모아서 철원으로 진군하고 싶어도 전혀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토록 패서호족의 반란을 경계하고 청주파 친위세력까지 육성해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궁예가 양길 밑에서 거병하여 명주성에 입성했을 때부터 궁예를 모셔왔던 원조 친위세력인 소위 '미륵부처님의 거룩한 군대' 출신으로 구성된 태봉국 병부 직할 중앙군이 모조리 배신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원래 궁예는 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고생하며 상벌을 내림에도 공평무사하였었지만, 황제로 등극한 궁예의 정치적 삽질에 따른 민생 파탄과 공포 분위기에 결국 이들마저도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후 고려사에 기재된 내용들을 요약해 보면, 궁예는 믿었던 왕건마저 통수를 쳐버린 것에 충격을 받았고, 그나마 본인의 곁에 약간 남아 있던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변복을 입고 군사 쿠데타 현장에서 황급히 빠져나가 부양 산골현으로 도망쳤다가 너무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몰래 먹고 있었다.[7][8]
궁예는 이렇게 굶주림에 이삭을 먹으면서 처참해지고 거지꼴이 된 본인의 신세를 한탄하던 중 그 지역에 거주하는 한 백성에게 들켰고, 이내 그 백성은 그가 궁예라는 걸 곧바로 알아챘다. 이후 안 그래도 폭정에 몹시 분노한 상태였던 그는 물론 그 지역 동네사람들에게 단체로 다구리를 처참하게 당한 끝에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궁예는 여러 기록들에서 공통적으로 동쪽으로 도망친 것으로 나오는데, 양길군에서 독립한 궁예의 첫번째 기반 지역이기도 했던 명주(강원도 영동 지역)의 지배자 순식은 왕건이 즉위한 이후에도 10년간 왕건을 적대할 만큼 중견 세력+친궁예파였기 때문에 만일 궁예가 이 곳으로 도주 후 합류에 성공했다면 왕건의 처지는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다.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폐위된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하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다.
그 해 6월 을묘에 기병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비밀히 짜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왕공이 벌써 의기(義旗)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헤일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다 글렀다.”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그는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부터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부양(斧壤)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고려사》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왕공이 벌써 의기(義旗)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헤일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다 글렀다.”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그는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부터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부양(斧壤)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고려사》
한편 궁예의 최후에 대해선 기록이 여러 부분들로 갈리고 있다. 다만 어느 쪽 사료에서나 공통적으로 백성들의 칼에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우선 《삼국사기》나 고려사에서는 철원에서 탈출해 산골로 숨었다가 부양(斧壤, 오늘날의 북한 강원도 평강군)에서 배고픈 나머지 보리 이삭을 주워먹던 중 신민들에게 정체가 탄로나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산이씨소고》에 따르면 궁예가 측근과 군인 몇명을 거느리고 평강(平康) 방면으로 퇴각하던 중 수풀 속에 매복해있던 백성들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삼방협이라는 지명으로 유명한 곳. 강원도 세포군) 땅에 이르러 말 위에서 전사하였으나 생시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왕건이 달려와 조문하나 유해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부득이 직립한 채로 입관케 하여 석축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를 만들어 군주의 명예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연 1회 향사를 올렸다고 전한다.[9][10]
태조 왕건 120화에선 명성산에서 왕건을 마지막으로 만난 후 은부에게 스스로 최후를 맞은 걸로 각색되었고 은부와 금대도 뒤를 따라 죽은 걸로 처리되었다.
궁예는 훗날 왕건에게 나라를 스스로 바치고 망국의 군주로 기록된 경순왕, 겨우 귀부한 이후 조용히 말년이 끝난 견훤과는 달리 왕릉이 만들어지기는 커녕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으며, 시호도 받지 못했다. 미천왕에게 옥좌를 빼앗긴 봉상왕,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한 영류왕 등 폐위당하거나 시해당하더라도 쫓겨난 다른 군주들조차도 사후에 시호는 지어 주어서 정식 군주라고 인정은 받았지만, 궁예는 그런 것도 없었다. 궁예 사후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긴 견신검도 궁예처럼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으며, 덤으로 시호도 받지 못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싸운 궁예와 신검 둘 다 죽은 후에도 비참한 취급을 받았으니 비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현재 강원도 세포군 삼방리에 궁예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었지만, 6.25 전쟁 이후 소재 불명 상태이며, 또한 그게 진짜 궁예의 묘소인지도 불분명하다.
[1] 궁예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세달사가 있는 곳이다. 일종의 금의환향?[2] 고려사 태조총서에 의하면 천우 2년(905년) 을축 궁예가 철원으로 환도했다(天祐二年乙丑 裔還都鐵圓.)고 기록하고 있는데, 왕륭의 건의로 송악으로 근거지를 옮기기 이전에는 895년에 점령했던 철원을 근거지로 삼은듯하다.[3] 참고로 석총은 일개 승려 A 수준이 아니라 당대 미륵 신앙의 총본산인 법상종의 이름 높은 고승이었다.[4] 정확히는 고대국가 시절에 진한이 신라, 마한이 백제로 발전했으므로 진마가 곧 신라, 백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5] 이때는 영남지역이 아니라 통일신라의 영역, 즉 후백제를 포함한 후삼국 전체를 의미한다.[6] 대표적으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러한 해석을 선보였다.[7] 고려사 관련 학습만화나 태조(왕건) 위인전을 보면 궁예가 고구마를 함부로 먹었다가 그 지역 신민들한테 정체가 탄로나서 칼에 찔리거나 베어 죽었다고 나오는데, 당시 시대 상황과 이 동네의 기후를 고려해 보면 고구마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고구마는 이로부터 한참 뒤인 조선시대에야 한반도에 들어왔고, 이 때는 고구마가 등장하기 한참 전의 중세시대이다. 게다가 추운 지방에서도 재배가 가능한 감자와 달리(그래서 강원도가 한반도 최대의 감자 산지가 된 것이다.) 고구마는 추운 지역에서는 재배가 절대로 안 되는 작물인데, 철원은 매우 추운 지역이라서 고구마 생산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영토이므로 시대 상황이나 지역 상황을 고려해 봐도 고구마는 완전 틀린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근데 만화나 위인전만 보고 여지껏 고구마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된다.[8] 하지만 만화적 연출로는 보리 같은 조그마하고 별 맛도 없는 곡물보다는 껍질은 갈색, 속은 노랗고 크고 탐스러우며 맛도 있고 하나만 먹어도 어느 정도 든든한 고구마가 훨씬 더 임팩트가 있다. 어차피 역사가 아니라 이야기의 측면에서 고구마냐 보리냐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도 아니므로...[9] 그 외 포천군 지역에는 궁예가 군사를 이끌고 한 차례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주하여 패주하는 길에 궁예가 울어서 울음산(명성산), 궁예가 한탄해서 한탄강 등의 전설이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으나, 만일 궁예가 강릉을 바라보고 동진했다면 사실 부합하지 않는 전설이라 후대의 민담일 가능성이 높다.[10] 많은 기록들에서 백성들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는데, 이는 후대의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패전한 다이묘 및 병사들을 '사냥'하던 지역 농민들과 겹친다. "패망한 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추격해오는 적이 아닌 전황을 관망하던 일반 백성이다"라는 당시 일본의 속담을 떠올리게 되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