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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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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대숙청
Большой террор | 大粛清
시기 <colbgcolor=#fff,#1f2023> 1937년 ~ 1938년
주동자 이오시프 스탈린(소비에트 연방 최고지도자)
위치 소련 전역
사망자 681,692명(사형 집행자)
약 950,000 ~ 1,200,000명(사형 이외까지 모두 합해서 추산)
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강화 및 소련의 대대적 개혁 시도
결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강화 성공(권력 중앙화),
소련군 지휘관 및 정치인 대거 사망 및 교체[1]
소련 전 지역에서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
영향 소련군 지휘관의 공백으로 인한 소련군 약화[2]

1. 개요2. 역사3. 양상
3.1. 대숙청으로 사망한 인물들3.2. 소수민족 박해와 학살
3.2.1. 폴란드인과 라트비아인3.2.2. 고려인
4. 원인 분석
4.1. 전통주의적 시각
4.1.1.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
4.2.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4.2.1. 군부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4.2.2. 수정주의에서 민간인들은?
5. 대숙청 허구설6. 여담7. 관련 어록8.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 Большой террор

1937년부터 1938년[3] 사이의 기간 동안 소련의 정치, 경제, 국방, 행정, 사법, 언론, 문화예술, 과학기술, 교육, 농업, 산업 등 전 분야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체제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조리 숙청당한 사건.

이오시프 스탈린이 기획하였으며 이를 주도적인 위치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한 것은 니콜라이 예조프였다.[4] 대숙청은 숙청 대상에게 대부분 스파이 혐의 등으로 사형을 판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수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 사례로 꼽힌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와 기록에 의하면 1937년~1938년에 걸쳐 사형이 집행된 인원은 681,692명이며 굴라크에서 강제 노역 중 질병, 고문 등으로 인해 사망한 인원은 136,520명이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망자의 숫자를 950,000명에서 1,200,000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다.

러시아어볼쇼이 테로르(Большой террор)[5]이며 주도적인 위치를 담당한 니콜라이 예조프의 이름을 따 예좁시나(Ежовщина), 치스트카(чистка)로도 불린다. 영어로는 Great Purge, Great Terror, Stalin's Purge, Stalin's Terror, Great Cleaning 등으로 불린다. 러시아어 'террор'나 영어 'Terror'는 모두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는 동원어로,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정부의 공포정치에서 기원한 것이다.

2. 역사

우리는 그런 적들을 모조리 없애 버릴 겁니다. 설사 그들이 옛 볼셰비키라도! 우리는 그들의 일족, 그들의 가족까지 없애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으로 (그렇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우리 사회주의 국가의 통일을 해치는 자는 모두 가차없이 처단할 것입니다. 그들은 물론 그들의 일족까지 모든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1937년 11월 8일, 스탈린의 연설
1934년 12월 공산당 고위 정치인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이후 소련에서는 반혁명분자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과거 스탈린의 반대파에 선 적이 있는 많은 고위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고, 1936년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처형되면서 금기시되었던 '고참 볼셰비키 혁명동지'들에 대한 처형의 문이 열렸다. 1937년 봄에는 고위 공산당원들뿐만 아니라 군부와 사회 전 분야로 숙청이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숙청의 해일, 즉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당 내의 스탈린 반대파들이 걸려들었다. 레닌이 사망한 이후에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와 권력투쟁을 벌이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가 먼저 처형당했고 이후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고참 볼셰비키들이 대부분 처형되거나 체포되기 전에 자살했다.[6] 이들과 연계된 당과 행정부의 중간 간부들이 끌려가기 시작했고 점점 퍼져나가서 학계와 언론, 문화예술계를 거쳐 결국에는 민간인을 포함한 온 사회로 확산되었다. 대숙청이 절정을 이루던 1938년에는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소련군까지 숙청의 파도에 휩싸여서 장교단의 상당수가 희생되었다.[7] 이처럼 스탈린 시대 초기에는 탄압의 칼날이 주로 사회주의의 회색 지대에 위치한 쿨라크와 같은 농민계급이나 인텔리겐차를 겨냥한 정책적 선택의 성격이 강했다면 대숙청 당시에는 스탈린의 통치체제를 위협할 소지가 있는 모든 개인과 집단으로 대상이 무차별적으로 확대되었다. 당내 숙청의 경우 스탈린 집권 초기엔 주로 해당 인물의 당직 해임 정도에 그쳤으나 대숙청 당시에는 대상자에게 고문과 처형이 가해졌다.

3. 양상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며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1956년 2월 25일, 제20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 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잡힌 게 누구 때문이지?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때, 부됸늬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단단하다......' 이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때문이냐고......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리는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빨치산 연락병 발렌티나 예브도키모브나 엠-바의 증언. 뒤의 성은 증언자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잘라냈다. 그의 남편 바네치카는 전쟁 발발 직후 스몰렌스크에서 독일에 포로로 잡혀 죽을 고생을 하다가 자력으로 탈출했고,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독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군이 돌아오자 공식적으로 현역 복귀하여 여러 차례 수훈을 받았다. 그러나 종전 직후 그의 포로 이력을 문제삼은 NKVD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어 7년간 시베리아의 콜리마 굴라그에 수용되었다. 그동안 아내 발렌티나와 그의 아들은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전쟁 전 교사였던 발렌티나는 자신들에게 지워진 부당한 평가로 인해 직업을 잃고 공사판에서 벽돌을 날라야 했다.[8]

대숙청은 말 그대로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공포 정치이자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대학살극이었다.[9] 반혁명분자로 고발당하거나 공안기관의 의심을 사면 바로 비밀경찰이 닥치는 대로 끌고 와 고문하면 죄가 없어도 자기의 죄를 불고 약식재판[10]을 거쳐 처형되거나 시베리아굴라크로 끌려갔다.

대숙청 희생자 중 50% 이상이 이미 1930년대 초부터 홀로도모르 등으로 탄압당하던 부농과 지주 등 농민들이었지만 이들은 농촌에 숨거나 저항하기라도 했는데 도시에 거주하던 희생자들은 대다수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결백이 밝혀지리라 믿거나 자포자기해서 저항이나 도주 없이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러나 운 좋아도 사형만 면하고 굴라크행이었지 무죄로 인정받는 일은 없었다.[11] 이렇게 비밀경찰이 닥치는 대로 고문해서 자백을 받고 총살해 1937년 여름부터 1938년 가을까지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700,000명 이상이 처형되었고 2,000,000명 이상이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했다. 공식적인 희생자는 총 68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950,000에서 1,200,000명이 처형당하거나 감옥에서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거기에 죽지는 않았지만 고문이나 시베리아 유형 등으로 고통받은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12] 예조프가 벌인 마구잡이 숙청은 많은 인재를 유실시켜 소련의 국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고 예조프는 이 때문에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실각당하고 처형되었다.
파일:external/f0b6de689ffee4ace3da30dc4ac575305a2f37aad024f58f83b579402258c1ba.jpg
대숙청 당시의 희생자들의 사진
파일:Great_Purge_Resolution_of_Central_Committee.jpg
스탈린, 몰로토프가 서명한 대숙청 당시 숙청 대상자 목록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숙청당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oroshilov%2C_Molotov%2C_Stalin%2C_with_Nikolai_Yezhov.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mmissar_Vanishes_2.jpg
니콜라이 예조프 숙청 전후 사진
왼쪽부터 보로실로프 원수[13], 몰로토프[14], 스탈린, 예조프.[15]

심지어 숙청을 주도한 NKVD의 수장부터 두 명이나 숙청당했다. 초기 대숙청을 주도했던 겐리흐 야고다는 1937년에 체포돼 1938년 처형되었고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예조프도 1938년 11월 실각한 이후 1년 만에 체포돼 1940년 2월 처형당한 데다 각종 기록과 사진에서 지워졌다. 물론 장관들만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전임 요원들의 대부분이 숙청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숙청자는 내일의 시체가 되었던이다. 그나마 피라미 요원들은 굴라크에 이송돼서 짧게 형을 살다가 굴라크 간수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평생 거기서 썩어야 한다는 점에서 좌천 및 귀양이라고 봐도 된다. 물론 고위 인사는 얄짤없이 총살형이었다. 오죽하면 나중에는 NKVD에서도 인력이 부족해서 당원이 아닌 사람을 데려다가 썼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군부는 카렐리야 지협(Isthmus)에 있는 핀란드의 방어선, 이른바 만네르헤임 선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설명하면서, 정보기관에 대한 비난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결국 하나의 주된 비난으로 모아졌는데, 이는 바로 보로실로프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국방인민위원이었으니 말이다. 엄밀히 말해 군사적 실패에 대해 비난받을 사람이 그 외에는 없었다. 적어도 스탈린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책임은 보로실로프에게 있었다. 그는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고, 철저히 준비하지 못했으며, 이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샤포슈니코프가 참모총장이었다. 그의 참모들이 핀란드에 대한 작전 계획을 세우는 일을 맡았고, 우리 군 내 주요 직책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샤포슈니코프는 유능한 전문가로 평가받았지만,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문 역할에 머물렀다. 군사 문제는 그 당시 적군을 대표하는 보로실로프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 스탈린은 비공식적인 대화에서 우리 군부와 국방인민위원부, 특히 보로실로프를 자주 비판했다. 때로는 모든 책임을 보로실로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서 스탈린에게 동의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보로실로프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기간 국방인민위원의 자리에 있었으며, "보로실로프 사수(Voroshilov marksmen)"[16]라는 이름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보로실로프의 자만심은 우리 인민의 경계를 무디게 하고 긴장감을 낮췄다. 그러나 책임이 온전히 보로실로프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우리가 모스크바 근처 스탈린의 다차에 방문했을 때를 기억한다. 스탈린은 화가 난 상태로 보로실로프를 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격앙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보로실로프를 호되게 꾸짖었다. 이에 보로실로프도 분노하여 얼굴이 붉어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스탈린의 비판에 대항하여 이렇게 외쳤다. "이 모든 것은 당신 책임입니다. 군 간부들을 파괴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어요!" 스탈린은 이에 적당히(appropriately) 대답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삶은 새끼 돼지가 담긴 접시를 집어 들어 테이블에 내리쳐 깨뜨렸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사건은 단 한 번뿐이었다.
Memoirs of Nikita Khrushchev vol. 1

스탈린은 1940년 핀란드에 대한 승리 속에서도 패배의 요소가 숨어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매우 위험한 패배로, 우리 적들이 소련을 '진흙 발을 가진 거인'으로 확신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그로 인해 국제적 정치 결과가 매우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소련군도 숙청을 피할 수 없어서 많은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많은 능력 있는 장교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장교가 되어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이 추태를 보이는 데 기여했다. 게다가 대숙청 이전에도 소련군 장교단의 질이 그렇게 높지 않았는데 이는 장교의 숫자를 부족하게 만들어 질적 저하를 더 심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는 소련군의 경직을 불러와 독소전 초반에 독일의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스탈린의 트롤링은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17]

소련 국외로 도피한 자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NKVD는 국외로 도피한 인물들도 집요하게 추적하여 요원을 파견해 암살 공작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레프 트로츠키가 이렇게 암살당했으며 예브헨 코노발레츠(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지도자), 만주국으로 도피한 친일 러시아인들 등 러시아 내전 후 해외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의 상당수와 민족주의자들도 이들에게 암살당했다. 대숙청 이전의 일이긴 하지만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였던 보리스 사빈코프 역시 NKVD에 의해 소련으로 유인, 체포되어 옥사했다.

3.1. 대숙청으로 사망한 인물들

나무위키위키백과에 개별 문서가 등재된 저명한 인물로 등재바람.

3.2. 소수민족 박해와 학살

소련 각지에 산재해 있던 소수민족들도 상당수 박해받았다. 체첸인, 인구시인, 폴란드인, 유대인, 라트비아인 등을 비롯한 수많은 소수민족이 당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생판 만날 일이 없는 체첸인우크라이나인고려인위구르인들이 가까운 동네에 사는 일도 벌어졌다.

이러한 소수민족 탄압과 강제이주 정책 탓에 민족 분포가 강제적으로 변경되었고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볼가 독일인과 체첸인, 크림 타타르인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등의 일도 벌어졌다. 흐루쇼프 때 스탈린이 격하되면서 상당수의 소수민족들이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스탈린 시기에 정착했던 사람들을 다시 내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죄다 복귀시키지는 않았고 이는 소련 붕괴 이후 영토 분쟁 등의 수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3.2.1. 폴란드인과 라트비아인

피살률이 가장 높은 민족은 폴란드인라트비아인이었다. 미국 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스탈린의 폴란드인 숙청을 "폴란드 박멸 작전"이라고 칭할 정도다. 소련 건국 초기에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는 소비에트의 서진을 가로막았는데 이후 대숙청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소련 정부는 폴란드인들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었다. 폴란드식 성씨를 가지고 있거나 폴란드어를 쓰거나 폴란드 관련 서적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폴란드 간첩'으로 몰렸으며 내무인민위원부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받거나 처형당할 수 있었다. 폴란드계 러시아인 782,334명(1926) 중 111,091명이 사살되었는데 이는 7명 중 1명 꼴로 죽은 것과 같다. 이것은 NKVD 문서에 따라 가장 보수적으로 잡은 숫자이며 일부 폴란드 역사학자는 최대 250,000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가령 키예프 외곽 지역의 비키브냐에는 도합 10,000명이 넘는 폴란드인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되었다. 대숙청 이후에도 폴란드인 학살은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오히려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스탈린과 소련 정부는 독립적인 폴란드 민족 문화와 지도층을 말살하고자 시도했으며 그 결정체는 바로 카틴 학살이었다. 서쪽에서도 독일에 의한 폴란드인 민족 말살 정책이 추진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은 대숙청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체카의 고위직에 대거 분포했는데 체카의 설립자인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이 사실은 폴란드 위협론의 실제 증거로 간주되어 폴란드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정당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여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회의 프세볼로트 발리츠키였다. 그는 폴란드인들의 군사 조직이 소련 내부에서 사보타주를 일삼는다는 음모론을 살포했는데 증거는 없었다. 물론 폴란드군 정찰조직이 활동한 바는 있었으나 이미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 종전 이후 소련이 안정화되며 전부 소탕된 상태였다. 하지만 다수의 폴란드인들이 체카를 비롯한 소련 고위층에 분포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제 간첩으로 간주되는 이유로 작용했다.

결국 스탈린은 폴란드인이 집중거주하는 벨라루스 SSR에서 폴란드인들을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죽여 버렸다. 1926년부터 1939년까지 소련 인구는 1억 4,700만에서 1억 7,000만으로 늘어났는데 재소 폴란드인은 오히려 627,000명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저서 "피에 젖은 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소련 내의 폴란드인이 사망할 확률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40배나 높았다. 라트비아인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에 소련이 라트비아를 병합하기 전부터 소련에 살던 151,410명(1926)의 라트비아계 러시아인들 중 16,573명이 사살되었다. 이는 9명 중 1명 꼴로 죽은 것과 같다. 이것도 NKVD 문서에 따라 가장 보수적으로 잡은 숫자이며 희생자 수는 소련 내 라트비아인의 절반이었던 74,000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이는 라트비아인들이 1년 후 벌어진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에 적극 부역하는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3.2.2. 고려인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와 전소(全蘇)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정 No. 1428-326cc

1937년 8월 21일

원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와 전소연방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원동지방에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한다.

1. 전소연방 공산당 원동지역 지방집행위원회, 원동지역 내무인민위원부는 원동지방 국경부근 지역들, 즉 포시에트, 몰로도프, 그로데코보, 한카이, 하롤, 체르니고프, 스파스크, 슈마코보, 포스트이셰프, 비킨, 뱌젬스키, 하바롭스크, 수이푼, 키롭스키, 칼리닌, 라조, 스바보드느이, 블라고베셴스크, 탐보프카, 미하일로프, 아르하라, 스탈리노, 블류헤르에서 모든 고려인 주민들을 내보낸 후 남카자흐스탄주, 아랄해 구역, 발하쉬호 구역과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주시킬 것을 지시한다. 이주 작업은 그로데코보에 인접해 있는 구역들과 포시예트 지구에서부터 개시한다.
2. 이 작업은 즉시 착수하여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
3. 이주 시 고려인들은 자기 소유물, 농기구, 가축 등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
4. 이주민들이 두고 가는 동산, 부동산 및 파종지의 미수확 작물에 대한 가격을 산정하여 그들에게 보상한다.
5. 이주대상 고려인이 출국을 원하는 경우 국외로 떠날 수 있게 하고, 간소한 국경 통과절차를 적용하여 출국을 방해하지 않는다.
6.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이주와 관련하여 고려인들 사이에서 발생 가능한 폭력과 무질서를 제압할 수 있는 조치들을 강구한다.
7.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 내각들은 이주민들의 거주 지역을 즉시 확정하며 그들이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고 지도할 의무를 갖는다.
8. 인민교통위원부는 고려인 이주민들과 그들의 소유물을 원동지방에서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으로 이송하는 데 있어 원동지방 집행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적시에 차량을 공급할 의무를 갖는다.
9. 전소연방 공산당 원동지방위원회와 원동지방 집행위원회는 3일내에 이주대상 가구와 인원수를 산출하여 통지할 의무를 갖는다.
10. 이주의 진행 상황, 출발 구역에서 떠난 인원, 정착지역에 도착한 인원, 국외출국이 허락된 인원 숫자에 대하여 10일 단위로 전문 보고한다.
11. 고려인을 이주시키는 구역들에 대한 국경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국경수비병력 3000명을 증원한다.
12. 고려인들이 떠난 건물에 국경수비대원들의 배치를 허락한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 의장
V. 몰로토프
전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I. 스탈린

연해주에 거주하던 재러한인(고려인)들은 폴란드인과 라트비아인처럼 절멸의 대상은 아니었으나 주된 타겟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37년~1938년에 이뤄진 고려인 강제이주사건으로, 연해주 등 소련 여기저기에서 거주하던 17만 명의 고려인을 무차별적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반항하는 고려인 2,500명을 총살했다. 이주 계획은 1937년 8월에 일본 첩자의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의 침투를 막는다는 구체적인 목적[18]과 함께 시작되었다. 1937년 9월에서 10월까지 소련 당국은 극동 러시아로부터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수만 명의 고려인을 이주시켰다. 172,0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계획적인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 국경으로부터 이주되었다.

법적 근거는 구소련 인민 위원회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공동 법령(#1428-326сс)인 〈극동 러시아 국경 한민족의 이주에 대한 건[19]〉이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내무인민위원회(NKVD) 간부였던 겐리흐 류시코프(Генрих Люшков, 1900년 ~ 1945년 8월 19일)[20]가 로스토프로부터 전임되었다. 고려인들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보통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을 지날 때마다 시체가 쌓였다고 한다.

대숙청 기간에 희생된 재러한인(고려인) 독립운동가들도 꽤나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무장 항일 투쟁의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김경천 장군과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선구자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진순 등을 비롯해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고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던 김단야와 그의 아내 주세죽도 이 시기 일본의 첩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김단야의 아내 주세죽은 원래 박헌영과 결혼한 뒤 소련으로 망명하여 박헌영은 국제 레닌대학(당시 국제 혁명가들을 양성해 내는 최고의 대학),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당시 국제 혁명가 및 활동가를 양성해 내는 대학)에 다닌 뒤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에 대한 지시를 받고 상하이로 이주했다. 상하이에는 김단야가 먼저 와 있었고 이 세 명은 상하이 조계지를 근거로 활동했지만 얼마 안 가 일본 밀정에 의해 박헌영이 검거되었다. 박헌영이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을 버는 사이 김단야와 주세죽은 상하이를 탈출하여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때가 1933년이었다. 김단야와 주세죽은 박헌영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재혼했지만 바로 몇 년 뒤 대숙청에 휘말려서 김단야는 사형, 주세죽은 모스크바 추방 및 카자흐스탄 5년 유배에 처해졌다. 시인이었던 조명희도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그 외에도 고려인 강제이주에 휘말린 홍범도 등 휘말린 사람이 결코 적지 않다.

1937년 10월 25일 니콜라이 예조프는 고려인의 극동 지역으로부터의 강제 이주가 종료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총 171,781명의 36,442 가구가 이주되었다는 것이다. 캄차카에 남아 있는 고려인 어부들, 사업차 여행 중인 이들은 11월 1일 열차로 이송되었다고 전해진다. 2022년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발표한 스탈린 대숙청 시기 한인 집단희생 연구 자료에 따르면 10,478명의 한인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 중 남자가 9,288명, 여자가 1,190명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해당 연구 자료의 부록으로 이 1만 명의 고려인 피해자들 전원의 인적정보와 그들이 어떻게 잡혀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도 공개하였다.

4. 원인 분석

4.1. 전통주의적 시각

전통적인 해석은 두 방향이 존재하는데 각각 한나 아렌트 이래로 시작한 "전체주의론"[21]에 입각한 대숙청 해석과 소련 공산당에서 내놓던 관제 역사 서술이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통주의적 시각은 대체로 전체주의론의 시각을 의미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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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키로프
(Сергей Киров, 1886년 3월 27일 ~ 1934년 12월 1일)
전통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대숙청은 스탈린의 과격한 정책이 빚어낸 사회 모순으로 발생한 불만 세력을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스탈린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분쇄하고 절대권력을 구축하고자 한 시도로 평가된다. 이에 따르면 농업정책 실패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스탈린의 인기가 땅에 떨어졌고 그 대안으로 떠올랐던 인물이 레닌그라드 공산당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키로프였다. 세르게이 키로프는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 1934년 당 대회의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에서 나온 반대표가 단 3표[23]일 정도로 원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탈린파였지만 스탈린에게 몇 차례 산업화 속도를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고,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키로프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수도인 모스크바가 아니라 레닌그라드에 머물게 하였다.

키로프는 이렇게 레닌그라드 당사의 자신의 사무실에 머물다가 그 해 암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이를 공산당 내의 파시스트들과 연결돼 있는 제5열[24]의 소행이라고 선전하여 당내 첩자들의 색출 작업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 같은 반(反) 스탈린파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제외한 10월 혁명의 원로들과 경쟁자들, 최종적으로는 반(反) 공산주의 계층들까지 모두 쓸려나가 버려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스탈린 절대지배체제가 확고히 수립된다.

세르게이 키로프의 보안 문제에 스탈린이 직접 간섭하는 등[25] 키로프의 암살을 전후해 석연치 않은 문제가 있어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설이 있었다. 실제로는 키로프의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벌어진 치정극이라는 설부터 반소련 음모, 스탈린이 손수 사주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니키타 흐루쇼프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스탈린의 사주설을 주장했다.

사실 스탈린은 혁명 후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경고하면서 대숙청 10년 전에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불구대천의 원수 레프 트로츠키를 처형하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이후에 대부분의 동지들이 처형된 것과는 달리 외국 추방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그렇게 인정이 많을 리가 없었고 이후 멕시코로 망명한 트로츠키가 자신을 계속 까대자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레닌 시절의 볼셰비키는 제정을 무너뜨린 같은 혁명동지였으나 방법론 차이로 갈라졌던 멘셰비키들을 처형하지 않고 대체로 망명을 허용할 정도로 혁명 동지들에 대한 처형은 매우 자제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축출한 스탈린이 농업을 집단화시키고 과격한 산업화를 추진하자 당 내에서는 그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다. 당시만 해도 스탈린보다 경력이 화려한 혁명가들이 당 내에 있었던지라 만약에 중앙위원회에서 불신임 투표라도 당하면 그는 그대로 정권을 잃고 정치계에서 묻힐 판이었다. 그래서 당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뿌리뽑아서 자신의 정책을 추인하는 거수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게 농업집단화였는데 농민들이 자기 땅을 빼앗기고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이 동원되었는데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과정이 정말로 참혹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은 윈스턴 처칠에게 독소전쟁보다 이 시기의 반란 진압이 더 참혹했다고 했다. 인민을 위한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탄압하니 장교들이 스탈린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원이었던 몇몇 장교들은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에게 용감하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하였다. 더욱이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러한 집단화 정책 실패와 자연재해가 겹쳐 대기근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이 아사하였는데(홀로도모르) 이 책임은 모두 무리한 산업화를 밀어붙인 스탈린이 져야 할 판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또한 여기서 산업화를 중지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독선을 가졌는데 이건 스탈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가졌던 생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계속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봐도 당시 만약에 산업화를 포기했으면 몇 년 후 일어났을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생각이 스탈린 독재와 대숙청을 합리화했으며 결국 이는 실존하는 반대파 또는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서 대숙청 후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를 기소하면서 넣은 죄목 중에 양성애[26]와 변태 성향을 포함할 정도로 새디스트 성향이 있는 예조프가 숙청을 감독하면서 막장으로 치달았다. 웃기는 것은 사실상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베리야도 로리콘 성향이며 새디스트였다는 것.

1937년 봄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가 체포되며 군부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러시아 내전 중 양성된 노련한 장교들을 누명을 씌워 정치적 혐의로 숙청해서 처형하거나 NKVD의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굴라크로 보내거나 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소련군은 몇몇 장성을 제외한 훌륭한 군인들의 씨가 말라 버렸다고 알려졌다. 때문에 독소전이 개전하자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린 소련은 그때까지 죽지 않은 장교들을 다시 불러와서 복귀시키는 조치가 취해졌고 죽은 사람 중에는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 같이 유능한 장교들도 많았으며 대독승전의 주역 중 한 명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는 숙청 전에도 소장이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발가락이 다 뭉개지고 이빨도 절반이나 날아갔다가 독소전쟁 때문에 살아났다. 주코프는 실제로 숙청 리스트에 올라갔다가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름이 슬그머니 빠졌으며 이반 코네프는 인맥줄을 잘 타 스탈린의 술친구인 보로실로프 원수 라인으로 들어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현대전에서 정말 무능했을지는 알 수 없는 셈이다. 무능한 장교들이 싹 쓸려나갔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당장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원수 2명이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니다. 둘 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에게 뼛속까지 처발린 다음 다시는 일선에 나서지 못했다. 대숙청 직후 벌어진 소련-핀란드 전쟁만 봐도 결과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독소전 초반 소련군을 반신불수로 만든 것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이 심했다.[27]

군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독일 방첩대(SD)가 소련군의 고위장교들이 독일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문서를 흘렸고 거기에 위조된 투하쳅스키 원수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걸 본 스탈린이 "헐, 이 새퀴들이 내 뒤통수 깔 준비하고 있던 거야? 용서할 수 없다!"면서 예조프와 함께 고위장교들을 줄줄이 쳐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NKVD가 일부러 군의 고위장교들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는 설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의심 잘하는 스탈린에게는 효과 직방이었을 것이다. 세번째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역정보를 스탈린이 간파하였음에도 오히려 이를 숙청의 구실로 삼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떤 이유든 간에 실제로 스탈린이 군에까지 대숙청을 옮기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들은 꽤나 있는 편이다. 실제로 1937년 초까지는 민간에 대한 숙청은 많았어도 군대만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위의 이유들로 인해 스탈린이 군대에 슬슬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소련군은 고도의 기계화와 함께 신속한 기동력을 갖는 기동군을 창설하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군 지휘관들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고 당의 감시역인 정치장교 제도를 없애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위에 언급된 누명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된 것이다. 기동전 구상 자체는 스탈린도 동의한 것이지만 하필이면 굉장히 안 좋은 시기에 찍히기 쉬운 짓을 스스로 벌이고 있었다. 대숙청 이전의 소련군이 킹왕짱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후사정이 어찌됐든 그나마 육성되기 시작한 장교들을 대거 제거한 것도 그렇고 장교들이 숙청에 대한 강한 공포감을 갖게 만들어 몸 사리게 만든 것도 소련군의 전투력이 내려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극단적으로 몸을 사린 결과 자기 판단대로 창의적으로 지휘하지 못하고 전투교범 등에만 매달리는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덕분에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이 감청한 유명한 대화도 나왔다.
"우리는 포격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들 미친 거냐! 왜 암호로 보고하지 않는 거냐! 암호로 다시 보고해라!"
이미 공격을 받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다시 보고하라는 것도 어이없지만 더 큰 문제는 보고를 받은 쪽, 그러니까 지휘관 쪽에서 통신보안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 중 하나인 이중송신[28] 금지를 무시하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숙청 직후의 붉은 군대가 얼마나 막장 상태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지경이니 우라돌격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29]

이 숙청의 규모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소련에서 불과 다섯 명뿐이었던 원수들이 두 명만 남고 몽땅 처형되었다는 것만 언급해도 충분할 정도다. 미하일 투하쳅스키[30]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가 이 기간 동안 '반혁명 분자', '독일/일본의 첩자' 등 말도 안 되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비밀재판을 거쳐 목숨을 잃었다. 좀 어이없는 것은 예고로프와 블류헤르가 투하쳅스키의 비밀재판을 맡았던 군사재판장이었다는 사실이다. 블류헤르는 만주에서 일본군의 도발을 쳐부수는 승리를 거둔 바가 있으며 장제스의 고문으로 파견되어 그와 몇 년간 일하며 우정을 쌓은 꽤 준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건만 봉소전쟁에서 소련군이 큰 피해를 입고 이겼다는 이유로 눈 밖에 났고 결국 투옥 후 18일만에 사망했다. 예고로프는 결국 두 경쟁자를 가지쳐내는데 성공했지만 그도 서기장 동지의 싸늘한 눈초리는 결국 피하지 못했다.[31]

결국 살아남은 원수는 위에서 언급했듯 무능하기 그지없는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보로실로프보다는 유능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니뿐. 여기에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술 친구이기도 할 만큼 개인적으로 스탈린과 친했기에 살아남았고[32] 보로실로프와 친하거나 그가 보호해준 장교들 상당수가 살아남아 독소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런가 하면 부됸니는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 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대 인물들에겐 숨이 턱 막히겠지만 후대 인물들에겐 나름 재밌게도 정보기관의 체포에서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렇게 땡깡을 부리는 것이었다. 자기에겐 죄가 없으리라 확신하고 순순히 체포되는 사람들은 못해도 10년 형씩은 받았지만 길거리로 뛰쳐나가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고 소리지르고 난동 부리는 사람들은 요원들이 당황해서 체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적어도 달아날 틈은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원수급 이하 수많은 장성들, 영관급 장교들도 이 풍파에 쓸려나갔는데 투하쳅스키의 추종자였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폴란드 스파이 활동 등의 혐의로 NKVD에 끌려가 발가락들이 전부 쇠망치로 짓이겨지고 아홉 개의 치아가 부러질 정도로 극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독소전이 시작되고 무능한 장성들이 전사 혹은 해임되기 시작하자 임시로 소장 계급을 부여받고 군적에 되돌려졌다. 이후 군단장이 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역관광을 펼치면서 원수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금속제 틀니를 하고 살았고 금속 발가락이 내장된 부츠를 신고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했다고 한다.

대숙청은 다섯 원수 중 3명, 11명의 부(副)국방 인민 위원 전원과 모든 군관구 사령관, 16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에서 14명, 67명의 군단장 중에서 60명, 199명의 사단장 중에서 136명, 397명의 여단장 중에서 221명, 모든 연대장의 50% 이상을 포함한 전체 장성들의 90%, 영관급 지휘관의 80%를 골로 보내 버렸고 그 희생자는 35,000명에 달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보직해임으로 그쳤지만 1만 명 가량은 NKVD에 끌려가 수감, 고문, 심하면 처형되었다. 특히 전투부대 지휘관으로서의 영관급 장교는 대부분 심해야 굴라크 수감으로 그쳤지만 경험을 어느 정도 쌓은 참모장교 및 장성들은 총살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1941년이 되자 해임된 이들은 80% 가량 복직되었지만 조직관리 및 대부대 지휘통제 경험자가 거의 괴멸한 피해를 복구하기엔 턱도 없는 상황이었다. 특이한 것은 후일 소련군 최고의 명장으로 거듭나는 게오르기 주코프는 예조프의 숙청 리스트에는 들지 않았지만 베리야가 실권을 잡은 뒤 숙청 리스트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할힌골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자 베리야는 슬그머니 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웠다.

당연하지만 이 숙청의 칼날은 육해공 병종을 전혀 가리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육군 외에도 소련 공군과 해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공군에서는 스페인 내전 참전 등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조종 장교와 지휘관들이 대거 수감, 사형을 당했고 설계국의 주요 기술자들은 사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수감당했다. 해군에서는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파촘킨 반란 사건 등 러시아 혁명 과정에 깊이 관여해서 숙청을 피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마찬가지로 주요 장교단이 대거 숙청당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등 일부 고위 지휘관들이 숙청 대상자들의 신원 보증을 해주며 저항했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 숙청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지 소련 해군의 경우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이전부터 듣보잡 수준의 전력을 가져서 상대적으로 그 피해가 적어 보이는 것 뿐이다. 해군이나 공군은 설계/정비 기술자나 조종사 등 숙련된 인적 자원의 비중이 더욱 컸기 때문에 그 피해는 육군에 비해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대숙청으로 인해 붉은 군대의 지휘체계가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의 소련군은 정규군인 붉은 군대만이 아니라 바로 저 숙청을 주도한 NKVD 산하 준군사조직마저 숙청의 후유증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연대대위소령[33]이 지휘하는 게 당연하다시피 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때문에 대령 사단장이 속출했으며 여단장[34] 계급으로 군단을 지휘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것도 저 계급이 부족한 간부를 충당하기 위해 쾌속 진급시킨 계급이었다. 어떤 때는 1938년에 참모학교를 졸업하고 대위가 되어 사단 참모장교로 배치되고 보니 사단장부터 예하 연대장들까지 전부 숙청당한 상태라 대위가 사단 최선임자여서 월 단위로 진급을 거듭한 후 부임 2~3개월차에 대령으로 사단장이 된 경우도 흔했다. 더 불쌍한 건 사단장이 되고 나서 숙청의 칼날에 걸린 자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 참모였을 때 잡혀갔으면 수감으로 끝날 것을 사단장으로 잡혀가는 바람에 뒤통수에 바람구멍이 뚫린 사람도 꽤 많다고...

여담이지만 스탈린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는 군부 대숙청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프로이센군 출신 장교단이 자신의 말을 잘 안 따라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스탈린처럼 군부의 고집불통 짬밥들을 모조리 숙청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그처럼 군부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을 텐데..."[35]라고 스탈린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히틀러의 망상과 달리 실제로는 독일 육군이 승승장구한 이유 중 그 군부 고위 장교들의 높은 숙련도 덕분이 굉장히 컸으니[36] 숙청을 따라했으면 더 빨리 패망했겠지만...

스탈린이 시시콜콜 간섭했던 독소전쟁 전반기와는 달리 후반기엔 간섭을 자제하여 소련군이 창의성 있게 잘 움직여 나간 건데 히틀러는 정반대로 해석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는 정말로 그를 따라했다.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고 여겨진 장교들이 전선에서 소환되어 과장되거나 짜맞춘 결론으로 처형되었다. 그런 숙청재판을 주재한 재판관 롤란트 프라이슬러를 히틀러는 "프라이슬러는 우리의 비신스키[37]다"라며 스탈린 식으로 숙청할 것을 주문했다.

결국 군부에서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연히 수많은 유능한 군인들이 좌천되거나 처형당하고 살아남은 장교들도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하게 되면서 소련군의 급격한 약체화를 불러와 겨울전쟁독소전쟁 초기에 신나게 얻어터지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다 이 숙청은 군인뿐 아니라 소련 각계각층의 인사와 민간인까지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파장이 대단히 컸다. 고위층 장교 한 명 잡아 없애기 시작하니 가족 관계며 친분 관계까지 사다리 타고 계속 내려오는 걸 거의 다 가지쳤을 정도다. 부모가 잡혀가면 남은 아이들은 대체로 인민의 적의 자식들을 수용하는 고아원으로 이송되었고 성인이 된 뒤에는 사실상 유형지나 다름없는 시베리아의 도시들에서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약받은 채로 살아가야 했다. 니콜라이 예조프의 딸도 숙청당한 뒤 이 테크를 탔다. 그러나 흐루쇼프 시대에 숙청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졌을 때 이들에게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거주권을 발급해 주는 보상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투하쳅스키 원수는 아내와 형제들까지 모두 처형되는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딸은 고아원으로 갔다.

역사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대숙청 직전인 1934년 17차 전당대회 참석자 명단에 실린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1000명 이상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38] 당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위원 139명 중 110명이 처형당하거나 자살 또는 의문사했다. 당시 모스크바의 당 간부용 아파트 단지에서 대숙청 종결 때까지 가장이 무사히 남아 있던 가구는 겨우 두 가구에 불과했다는 소름끼치는 전설이 있다.

반혁명 즉결 재판을 통해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만 해도 겨우 2년 동안 1,345,000명에 달한다. 게다가 정확한 숫자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소련이 멸망한 뒤 공개된 비밀해제 문서들을 통해 각 마을과 시마다 인구비율당 체포 할당량을 주기까지 한 것이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와 종전 후에도 별의 별 꼬투리를 다 잡혀서 끌려간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희생자 숫자는 더 많아지는데 대전 후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킬링필드 등과 함께 일당독재 국가가 막장 테크를 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인 셈이다. 다만 흔히 알려진 2000만 명이 죽었다[39]는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 대숙청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6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로 보고 있으며 90만에서 130만 명 사이로 보는 게 정설이다.

아무튼 이런 막장행위를 주선한 스탈린도 인재 부족에 대한 인식+예조프에 대한 견제의식+그외 잡다한 생각으로 인해 이 숙청을 완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1938년 '스탈린의 개새끼' 예조프를 자르고 NKVD 장관에 '스탈린의 힘러' 라브렌티 베리야를 임명했다. 예조프가 스탈린의 눈 밖에 난 결정적인 사유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NKVD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예조프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양 행세했고 그때 참석한 스탈린은 이를 보고 그의 정치적 야심을 의심해 숙청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결국 1940년 스탈린은 예조프를 처형했다. 즉 숙청 담당자가 너무 숙청했다고 숙청당한 것으로 이 대숙청은 대미를 장식한다. 물론 대숙청의 후폭풍은 별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숙청이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1939년 발트 3국이 소련에 합병되자 그곳에 있던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베리야에게 숙청되었다.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을 대거 처형한 카틴 학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참고로 대숙청을 감독한 이가 베리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베리야는 실제로는 예조프가 남긴 후유증을 뒷수습했다. 물론 그렇다고 베리야가 착한 놈은 절대로 아니며 전쟁 기간 동안 베리야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은 예조프와 맞먹을 지경이다. 스탈린식 정치는 베리야조차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노선을 폐기하는 정책을 폈지만 결국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이렇게 예조프가 토사구팽당한 이유는 대숙청의 여파가 소련에서 얼마나 심각했던지 누구든 이 책임을 져야 했고 이는 곧 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돌아올 판이었다. 베리야는 취임 후 솔직히 공안기관의 오버를 인정하면서도 그걸 모두 예조프 탓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베리야는 막장으로 치달아 국가에 큰 해를 끼친 대숙청의 책임론에 대해 스탈린에 대해 실드를 쳐 준 건데 예조프를 임명한 것은 스탈린이기 때문에 스탈린이 그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다.

대숙청이 가져온 가장 큰 불행한 유산은 소련인들을 모두 명령과 규범에만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로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상부 지시 없이 훈련을 했다는 이유로 장교가 숙청되는 막장스러운 상황에서 다들 살아남기 위하여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런데 혁신적인 아이디어, 자발적인 도전 등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어떤 분야든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피드백이 계속돼야 하는데 모두 상관의 입만 쳐다보고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에서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4.1.1.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

전통주의적 관점에서 대숙청의 원인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전체주의적 통제사회를 건설하고 스탈린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는 절대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숙청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대숙청이 벌어진 30년대 후반 이전까지 소련에서 스탈린이 가진 권력은 40~50년대의 스탈린이 가졌던 절대권력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193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를 보더라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려 300표 가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고 독소전쟁 발발 직후 패닉에 빠진 스탈린이 관저에 은둔해 있는 상태에서 몰로토프를 비롯한 심복들이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냐며 일하라고 끌어내려 쳐들어오자 자신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는 절대권력이 공고해진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의 스탈린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점이나 암살이나 테러는 두려워할지언정 공개적인 탄핵이나 체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분명 스탈린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만하다. 즉, 대숙청과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스탈린이 설령 소련의 최대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권력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견제나 도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스탈린의 권력 획득 과정을 살펴본다면 일단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1인자가 된 것은 20년대 중반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것을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25년 무렵에 트로츠키는 정치적인 권한을 거의 상실하고 실각하게 되지만 정작 트로츠키가 국외로 추방당한 것은 1929년의 일이었다. 최대의 정적이자 정치적 위험요소인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도 4년간이나 해외로 쫓아내지도 못하고 국내에 머물도록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기간동안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국외 추방을 실행했을 때 사람들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도록 소문을 미리 퍼트리는 등 다양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트로츠키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지노비예프의 제안에 대하여 스탈린이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예로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은 트로츠키를 처형했을 경우 돌아올 정치적 부담과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만약 정말로 순수하고 동지를 죽이기 싫어서 처형하지 않았던 거라면 실각시킨 후 바로 해외로 추방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었을 것이며, 국내에 계속 머물도록 할 경우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장 스탈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스탈린의 잔혹성이 두드러진 2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스탈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위기에 몰린 트로츠키를 염려한 군대 내 추종자들이 트로츠키를 권좌에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를 자발적으로 제의할 정도였고[40] 굴라크에서 살아 돌아온 행운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스로를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부르던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이 40년대 후반까지도 수용소에 남아있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대했다.

1929년에 트로츠키를 국외 추방함으로써 최대의 정적을 일단 제거한 후에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을 비롯한 나머지 정적들을 제거하는 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30년대 초반 내내 각종 누명과 음모로 이들의 당원 자격을 여러 차례 빼앗기까지 했지만 자아비판 등의 절차를 거친 뒤 다시 돌려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이들을 본격적으로 투옥하고 처형한 것이 바로 대숙청 기간인 30년대 후반이며 추방당한 상태인 트로츠키를 암살한 것은 대숙청이 분수령을 넘은 1940년의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종합해 본다면 권력 획득 이후 대숙청 이전까지 10여년의 기간은 소규모 숙청과 음모로 다른 경쟁자들의 권력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그만큼씩 스탈린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독재 태동기였으며 대숙청이 시작된 193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쟁 관계의 다른 권력자들을 압도할만한 권력이 스탈린에게 집중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막강한 권력을 얻은 다음에 굳이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느냐는 것인데, 이 역시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이전까지는 대규모 숙청을 벌일 힘이 없었고 권력을 얻은 이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숙청한 것이다.

여기서는 스탈린이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 당 지도자, 소위 말하는 '고참 볼셰비키' 중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혁명 과정에서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잉여 찐따라는 이야기는 스탈린을 디스하기 위한 다른 볼셰비키 당 지도자(주로 트로츠키)들이 퍼트린 악평이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름대로 공적이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오만방자와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잘난 척을 주된 정체성으로 삼는 트로츠키 같은 인물이라면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일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정도다. 스탈린이 주로 활동한 영역은 사무작업이나 자금 마련(= 강도질) 같은 부분인데 문필가로서 독일에까지 알려진 명성을 제외하더라도 10월 혁명 당시 적위대를 이끌고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주도하고, 이후에는 붉은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조직하여 반혁명군을 상대로 한 승리를 주도한 트로츠키에 비한다면 확실히 화려함이 크게 떨어진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해외 인물들조차 10월 혁명 이후의 볼셰비키 정권을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정부라고 부를 정도니 트로츠키는 그냥 못 이긴다고 치더라도 그 외의 다른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도 스탈린의 경우는 화려함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부하린 같은 경우 뛰어난 이론가이면서 특히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전문가라는 명성과 함께 레닌에게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인망도 높은 인물이었으며 지노비예프는 일개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인 스탈린에 비해 명목상 전 세계 모든 공산주의 정당의 상위조직인 코민테른의 집행위원장이자[41] 벽촌인 캅카스 지방에서 활동한 스탈린과는 달리 주요도시인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바 있었고 카메네프 역시 수도인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탁월한 이론가+연설가 스킬을 기본 장착한 위 인물들에 비해 스탈린은 민족 문제에만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러시아어도 어눌한 편이었다.

결론적으로 문화대혁명이나 킬링필드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독재자들이 일종의 '이념적 세탁'을 위해 대규모의 학살과 숙청을 자행하곤 하는데 스탈린의 대숙청도 이러한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 스탈린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반대자나 잠재적 반대자, 반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포로 압도하여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숙청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1) 소련 공산당의 정치국원들이 몰살당한 것처럼 권력조직 내부에 대한 숙청이 외부에 대한 숙청보다 더 심했다는 점과
2) 영관급 장교의 80%, 장성의 90%가 숙청당한 것에서 보듯 군대에 대한 숙청이 몹시 두드러졌다는 점, 그리고
3) 특정한 집단에 대한 숙청이 아니라 별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핑계로 삼은 무작위성이 강한 숙청이었고 특히 엘리트 계층에 대한 숙청이 심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이 역시 위 맥락에 따라 많은 부분이 설명 가능하다.

1) 소련 공산당 내부에 대한 숙청이 특별히 더 지독했던 이유는 위에 설명된 바와 같이 스탈린이 당 내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보다 잘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는 쉽지만 남보다 딱히 잘난 점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자기와 동급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다 무력화시켜야 하니까.

2) 대숙청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고급 장교 숙청일 텐데 붉은 군대의 지휘 구조를 파탄지경에 몰아넣은 이 숙청 역시 스탈린의 입장에서 군대가 잠재적 위험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권력투쟁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행정부장관과 국방부장관 사이의 권력투쟁이니까. 더구나 그 국방부 장관이 보통 장관도 아니고 건군의 아버지라면? 당연히 정권을 잡은 행정부장관으로서는 군대가 꺼림칙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줄 근거가 하나 있다. 군 내에서 주 숙청 대상인 영관~장성급의 고급 지휘관들이라면 대략적인 연령은 40대~60대 정도였을 것이다. 소련의 건국이 1917년, 군부 대숙청이 1937년이니 이들 고급 지휘관의 대다수는 소련이 건국될 당시 이미 20~40대의 나이로 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 붉은 군대의 고급 지휘관의 주류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는 뜻이다. 혁명 직후 한 번 군대에서 추방당했던 이들 러시아 제국군 출신자들을 다시 군대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다. 요컨대 당시 붉은 군대 고급지휘관의 상당수는 트로츠키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군 지휘관 중에서 가장 아까운 사례로 꼽히는 투하쳅스키를 보더라도 귀족 태생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트로츠키에 의해 발탁된 것에 가까운 입장이었고[42] 내전기에는 트로츠키의 지휘 아래서 눈부신 공적을 쌓아 최고위직까지 승진한 입장이었다. 덤으로 폴란드 전선에서의 패배 문제로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쁘기까지 했지만... 투하쳅스키 자신은 군인으로서의 입장에 충실한 것인지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총참모장에 취임하여 자기 책임을 다했지만 이 역시 3년만에 보수파 장성들의 반대에 밀려 해임되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투하쳅스키 개인에게 스탈린과 트로츠키 둘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트로츠키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쪽이 오히려 더 적절하게 보일 정도이다. 이런 상황은 투하쳅스키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붉은 군대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였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군대를 적으로 돌리고 무사할 수 있는 독재자는 없다.

3) 이 문제도 붉은 군대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당시 군대 내에서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세력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진짜 트로츠키파 자체야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미리 숙청해 버렸지만 트로츠키에게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지휘관은 그냥 장교의 대다수이고 오히려 스탈린파가 일부 계파에 불과한 상황이았다. 그나마 이 비교에서는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의 경우에 한정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몹시 오만한 성격과 애초부터 주류 볼셰비키가 아니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상 트로츠키파는 차라리 특정해내기가 쉬운 상황이었고,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부하린 같은 유명한 고참 볼셰비키의 경우 그들의 지지자가 곧 볼셰비키 지지자였던 상황이었다. 스탈린 역시 고참 볼셰비키였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러시아어도 고등학생 수준으로밖에 구사하지 못하고, 생긴 게 멀끔한 것도 아니고, 성실하고 꼼꼼하긴 하지만 특출나게 똑똑한 것도 아닌 데다가 성격까지 음침한 스탈린을 다른 지도자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듯. 결국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명백한 스탈린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스탈린의 권력이란 볼셰비키 당이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볼셰비키 당을 정략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지, 그 권력에 상응하는 지지를 기반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독재권력을 얻기를 포기하고 말겠지만 어떻게든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국 스탈린보다 다른 지도자를 더 선호하는 다수집단 전체를 숙청해야 하는데 다수의 집단을 특정해낸다는 건 의미가 없으니 결국 남은 길은 무작위 숙청뿐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반대파 전체를 물리적으로 제거했다기보다는 감히 반대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드는 방법으로 스탈린은 절대권력을 얻었다. 특히 엘리트 집단에 대한 숙청이 잔혹했던 이유 역시 이들이야말로 스탈린이 평범한 당 지도자 중 1人이었던 과거를 잘 기억하고 있을 테니 그만큼 위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숙청이 없었다면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은 탄생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스탈린도 그것을 잘 알고 의도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실제로 레닌 시대만 해도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은 꽤나 공공연하게 행해졌지만 최소한 당 내에서는 레닌에 대한 비판이나 레닌의 입장에 대한 반대가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혁명 이후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볼셰비키에 멘셰비키 또는 사회혁명당원들을 받아들여줬던 것이나, 과거 부하린과 레닌 사이의 논쟁에 비추어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르는 레닌으로선 논쟁을 통한 비판에 대해 자유롭게 받아들였다.(단지 혁명 이전에 혁명에 대한 비관론등은 철저하게 비판했지만)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 가입 공화국에게 전면적인 자치권과 독립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고 가입 공화국이 탈퇴를 원한다면 자유롭게 탈퇴해야 한다고 본 반면 스탈린은 중앙집권적으로 접근하여 제한된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레닌과 스탈린의 "비판에 대한 입장"에 대한 일화로 당 회의 때 한 당원이 스탈린을 비판하자 스탈린이 한 말은 "전 레닌 동지와 다릅니다." 였을 정도니... 그 정도로 레닌과 스탈린은 자유의 폭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4.2.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한편 이런 전통주의적 시각의 틀 안에서 공부를 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1970년대부터 소련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를 연구하던 사학자들이 자신들의 방법론으로 스탈린 체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대숙청도 이런 새로운 분석을 피해갈 수 없었다. 2차대전 시기에 독일군이 노획하였던 스몰렌스크 문서고와 같이 서방권에서 가용할 수 있던 소련 내부 자료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각각의 수많은 사회집단들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했으며 대숙청에서 대규모 대중참여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요약하자면 수정주의에서는 대숙청은 본질적으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소비에트 연방과 스탈린이, 중앙당 및 지역당의 기율 와해 상태를 바로 잡아내기 위해 수행한 몇가지 노력들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대폭발을 한 것에 가깝고, 흔히 생각하는 키로프 암살에서 예좁시나까지 이어지는 스탈린의 거대 계획이라는 것이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43] 비유하자면, 난장판이 된 집을 청소하려고 손을 댔더니 쓰레기더미가 제멋대로 기우뚱거리다가 스스로 붕괴된 사고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우선 1929년과 1933년 숙청[44]을 진행하고 당원들의 현황을 조사하면서 스탈린과 중앙당은 지역당의 한심한 실태를 알게 된다. 소련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특권을 보장해 주는 당원증부터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당 사무실에서 이름이 비어 있는 당원증을 뭉텅이로 빼돌려서 폴란드에 팔아 넘긴다든지, 당원이 죽었는데 가족들은 당원증을 계속 갖고 있어 배급 특전을 계속 받아먹는다든지, 비리나 횡령으로 출당되었는데 당원증만 갖고 다른 동네로 가서 당원 행세를 하고 그 지역 요직에 다시 올라 있다든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전반적인 당원의 질도 굉장히 안 좋았다.[45]

특히 5개년 계획을 거치며 엄청나게 팽창한 소련 관료제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혁명에 한 몫 했던 안 했던 일단 행정업무들을 처리할 능력은 있던 어중이떠중이를 받아서 일을 시켰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숫자놀음만 하면 끝날거라고 생각한 경제 문제에 천착하느라 다른 조직적인 일, 즉 정치적인 일에서는 아예 개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로 정치와 곧장 이어진 경제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조차도 어려워했다. 심지어 대놓고 중앙정부에 거짓 보고서를 올리는 것마저도 일상이었다. 이를테면 우랄에서는 우크라이나와의 제철소 수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지질조사국을 갈아 버리면서까지 없는 탄광, 없는 광맥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고 보고서 조작에 생산 장부 조작 등 온갖 막장스러운 일들을 하기도 했다.[46] 한편 지방을 통제할 당원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몇몇 집단농장에는 맡아서 관리하는 당원들이 하나도 없거나 한 명 있으면 많은 정도의 개판이었다. 러시아에 붙어있다는 스몰렌스크가 이 정도였으니 당시든 지금이든 소련-러시아 영토에서 후미진 시골 지역인 중앙아시아나 극동 지역의 부정부패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군인들이 장갑차로 자기 자녀들을 통학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당원과 관료들의 질이 형편없었던 이유는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소수계층을 빼면 전반적인 교육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기존의 식자층인 귀족과 신부, 부르주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거 해외로 탈출하거나 전쟁 도중에 죽는 경우가 허다했고 새로이 기용된 이들은 고급지식은커녕 키릴 문자나 조지아 문자, 아르메니아 문자, 라틴 문자, 아랍 문자, 몽골 문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비롯한 기초적인 지식에 무지한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며 자질이나 인성도 양아치 수준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능력도 인성도 있지만 기득권의 벽에 부딪친 지식인들도 있기는 했겠지만 그보다는 그냥 동네에서 힘 좀 쓰는 양아치 수준인 무학자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47] 기존 관료층이 혁명으로 쓸려나가고 그 감투를 쓰게 된 동네 양아치들의 수준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인수인계는 못 받았고 경험은 없고 할 일은 넘쳐나는 상황이니 유능한 이들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업무환경에 아무리 문맹 퇴치 교육으로 글을 읽고 쓰는 기초적인 교육을 시켜서 기껏 기용시켰다고 한들 말 그대로 기본적인것만 교육받은 수준인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인재들을 대량으로 배치한 부작용이 소련 관료제의 부정부패였다. 여기에 부채질을 한 것은 공산당의 태생이었다. 공산당 지도층조차 제대로 된 관료가 없었는데 러시아의 공산당은 혁명 이전까지는 지하조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소련 공산당에게는 관료제를 이끌 능력 자체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다.[48]

1934년에 당원 관리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드러났는데 출당을 당해서 이제 당원도 아닌 자가 레닌그라드 당 사무소의 경비를 반납하지 않은 당원증으로 속여먹고 세르게이 키로프를 암살해 버렸다. 안 그래도 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확인 조치에 들어가려고 했던 공산당 중앙 정부는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잠깐, 키로프 암살 사건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에서는 키로프 암살이야말로 스탈린 숙청의 결정적인 전기이며, 스탈린이 이를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정주의 입장에서 키로프 암살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숙청을 연구해 온 학자 게티에 따르면 우선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전제해 온 "온건한 키로프" 모델이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실제로 트로츠키를 비롯한 스탈린의 정적들은 그를 온건하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키로프 본인은 집단화와 산업화를 최전선에서 이끈 스탈린의 충복이었고, 실제로 키로프가 레닌그라드 지역당을 맡았을 때 그가 파괴한 정교회 성당은 전임자인 카메네프와 후임자인 즈다노프보다도 많다. 키로프가 온건파라고 알려진 근거로 인용되곤 하는 1934년의 당대회 연설에서도, 키로프는 좌익 및 우익 반대파에 대해 조소로 일관했고 비밀경찰의 강제노동 활용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가 온건파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스탈린은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자기와 사소한 의견 충돌이나 개인적인 갈등만 있어도 자주 피를 보는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회고록을 보면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스베틀라나는 스탈린과 키로프의 개인적 신뢰 관계를 언급하며 스탈린이 그의 죽음으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키로프가 온건파가 아니었고 스탈린과의 관계 또한 좋았을지라도 높은 인기로 스탈린에게 위협이 되었을 수는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대중적 인기를 가진 충신이 숙청당하는 사례는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로프 위협설의 중요한 정황증거로 인용되는 1934년 중앙위 선거도 근거가 그리 확실하지는 않다. 중앙위 선거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설은 당시 투표 집계를 진행했던 사람 중 하나인 베르호비흐가 1960년에 증언한 것을 그 시초로 한다. 베르호비흐는 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 나지만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123표였나 125표 정도 나왔다고 말했고 지도부를 당혹스럽게 한 투표함은 폐기된 뒤 조작된 공식 통계가 발표되었다고 말했다.[49] 그러나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그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고 후에 소련 정부에서 추가적으로 1934년 투표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베르호비흐의 증언을 확인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166표 가량이 비기는 했는데 이것이 단순히 투표에 불참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그 중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몇이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로프의 인기에 대해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나중에 언론인 펠릭스 추예프와의 인터뷰에서 추예프가 스탈린이 수백표의 반대표를 받았고 키로프는 아무 반대표도 받지 않은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자신과 스탈린은 2~3개 정도의 반대표를 받았고, 키로프가 반대표를 하나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지만, 자신의 기억엔 퍄트니츠키를 제외하곤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키로프가 스탈린보다 높은 권위를 누렸기 때문에 스탈린이 그를 시기했다는 말에는 크게 화를 내며 키로프를 당정의 지도자가 아닌 듣보잡 선동가 정도로 폄하했다.
몰: 터무니없는 소리! 당대회 속기록을 읽어보시오! 누가 더 큰 권위를 누렸나? 스탈린인가 아니면 키로프인가? 키로프의 논문 및 연설집을 읽어봐. 거기에 뭐가 있나? "나는 스탈린 같이 거대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이 말은 키로프가 말한 걸 기억나는 대로 인용한 거요. 그런데 거기 어디에 지도적 성격의 정치적 지시가 있는가? 그는 요구하지 않았소. 그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야. (...) 키로프는 1917년 당시 당 조직 그 어디에도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소. 그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거요. 그는 지방 신문사에 앉아 있었어.... 그런데 키로프를 서기장으로 밀려고 했다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야! 그것은 그자들의 근시안적인 사고를 말해주는 거요, 불쌍한 인간들! 키로프도 그들을 비웃었어!
추: 혹자는 키로프가 당시 서기장이 되지 못한 게 당의 최대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몰: 누가 그렇게 말을 해? 마음대로 말하라고 해. 정치적 지도라는 시각에서 키로프에게 뭔가 가치 있는게 있는가? 그럼 가치로써, 유용성으로써 구별되는 그의 사상이 과연 있는지, 있으면 말해보라고 해! 어디에도 없어! 그 독창성으로서가 아니더라도, 스탈린이 말한 것과 뭔가 구별되거나 아니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충한 것이라도 있나? (...) 동무들이 키로프가 더 좋았다거 하는데, 그럼 키로프에 관해 무엇을 아시나? 그가 무슨 일을 했지? 스탈린에 관해서는 그의 저작과 논문들, 그리고 그가 어디에서 일했는지도 우린 다 알고 있소. 그런데 키로프는? 그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거의 일하지 않았소. (...) 그는 대중운동가요. 그런 사람도 매우 필요해. 어떤 경우엔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필요했어, 자기 자리에서 말이오. 반면 더 굵직한 일에 대해서는 그의 능력이 많이 부족했소. 이론적으로 준비된 게 없었어. 그런 강고함도 없었고. 확실히 그런 사람이 국가를 혁신하고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은....

키로프 암살이 소련인들 입장에서도 굉장히 의문스러운 점이 많은 미스테리 사건이었기 때문에 스탈린 사후 정치국 차원에서도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한 바 있으며 특히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 암살범인 니콜라예프의 일기도 나왔는데 그 일기를 들여다보면 그가 정신적 질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위대한 혁명적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등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적혀 있다. 키로프 암살이 탄압의 전기라고 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건 마찬가지인데 왜냐면 지노비예프는 키로프가 암살되기 이전부터 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로프 암살을 분명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암살 자체를 스탈린이 사주했다고 의심해볼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심을 표할 만한 근거도 충분히 많다. 판단은 알아서.

하여튼 공산당은 1935년 프로베르카(Проверка)[50]라고 불리는 작업을 시행했는데 바로 신규 당원의 입당을 막아버리고 각 지역에서 당원 명단을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근무태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지연되었다.[51] 그리고 확인해 보니 더 가관인 모습들이 나타났다. 당원 목록에 명단은 올라가 있는데 지역에서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고, 기존 문서의 한심한 관리 상태가 또 다시 드러났던 것이다. 중앙당에서는 이와 동시에 당원을 확인하면서 출신 계급을 속인 자, 비리, 횡령, 과음, 근무태만 등의 사유를 보이는 자들을 또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당의 상급 당원들이 자기들끼리 뭉쳐서 내부의 잘못은 쉬쉬하고 하급 당원을 제물로 보내버리는 정황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역의 NKVD도 같은 패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이 과정에서 일반 하급 당원이 지역의 상급 당원들과 간부급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1936년 구 당원증을 신규 당원증으로 교체하는 작업까지 수행한다.

관료제 내부의 무능을 잡으려고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급진파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기용한다. 즈다노프는 지금 관료제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개판인 건 당원들이 정치와 당의 역사에 대해 개념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지역당 조직 내부가 대중들과 유리되어 있어서 민주적인 참여가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당시 공산당에서는 "님 뭔 소리 하시는 거죠?" 라고 통할 만한 급진적인 주장을 하였다. 즈다노프는 심지어 당 조직 내부에서 상급자를 비밀선거로 뽑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는데, 스탈린은 이에 흡족해하면서 당원들을 이 수단으로 통제하고자 노력하며 각지에 "님들 정치교육 빨리 좀 돌리셈." 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그리고 즈다노프와 스탈린의 합작품으로 나온 것이 바로 1936년의 스탈린 헌법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하여 스탈린의 교시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붉은 군대 사관학교 연설에서 행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라는 말이었다.[52] 즈다노프는 지금 당 내에서 중요한 건 비판과 자아비판이며 자유로운 비판의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야말로 당 관료조직의 일이 효율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지역당의 자치권을 억제하기 위하여 지역의 독자적인 경제 및 재정권한, 사형을 핵심으로 하는 사법권한을 은근슬쩍 박탈한 상태였다.

한편 중앙당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스탈린 파벌 내부에서의 싸움이 격화되는 중이었다. 트로츠키, 부하린에 대한 강경한 처벌과 산업생산에서의 급진적 움직임을 지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이들 당 내 반대파들에 대한 유화적인 해결책과 온건한 산업투자를 지지했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의 다툼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로토프는 당시 소련의 정부부처라고 할만한 인민위원회들의 회의를 주관하는 소브나르콤[53]의 의장으로 있었고, 오르조니키제는 5개년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모든 국가자원을 먹어치우고 있었던 중공업인민위원이었는데,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의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오르조니키제 개인의 인망과 중공업인민위원회가 갖는 막대한 권력으로 둘의 다툼은 관료제 내부까지 스며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몇몇 당원들이 어설프게 일을 벌이다가 잡히는 일이라던가, 트로츠키가 소련 내부의 지지자와 사적으로 연락하던 게 걸리는 일 등이 발생하였고 결정적으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이 벌어짐에 따라 온건파의 입지는 굉장히 취약해졌다. 이 시기에 스탈린이 매우 상징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바로 겐리흐 야고다를 내리고 니콜라이 예조프를 NKVD 위원장으로 앉힌 일이었다. 니콜라이 예조프는 반대파들에 대한 색출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야고다는 그에 반대하고 적당히 몇 놈 잡아서 족치는 수준에서 끝내자고 치워버린 것. 야고다는 우편인민위원회라는 엄청난 중책(...)을 떠맡게 되고 공산당 중앙위 산하 당통제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예조프가 그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처음에 한 일은, 과거 트로츠키파의 일원으로 현재 오르조니키제의 충실한 부하로 변신한 퍄타코프를 숙청하는 일이었다. 몰로토프는 오르조니키제가 공격받는 것에 신나서 그를 극딜했으며, 퍄타코프는 투옥되었고 오르조니키제는 얼마 안 가서 자살한다. 이게 자살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공산당 내 온건파는 이를 기점으로 몰락한다.[54] 러시아의 여러 비극들이 그러하듯, 급진파가 온건파를 압도해버리는 시나리오가 결국 벌어진 것이었고 이때부터 NKVD의 무자비한 지역당원 숙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예조프가 올라가자마자 한 일은 NKVD의 조직개편과 조직장악을 실시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NKVD는 각 지역의 지부들이 지역 당 조직과 사실상 협력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정보가 뜨면, 지역의 NKVD 위원장이 나서서 감사 정보를 흘려주는 막장스러운 일도 많았다. 예조프는 야고다 체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유착관계와 업무태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잔혹한 조직개편 및 숙청을 실시하였다. NKVD 지부들의 상부 인원들을 싹 다 교체하고 체포하였으며 기존 야고다와 연줄이 있는 그룹은 다 갈려나갔다. 사라토프 주의 NKVD 의장인 로만 알렉산드로비치 필랴르를 소환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예조프 : 인민의 적을 체포하는 데 왜 이리 안일하게 일하시는지?
필랴르 : 우리는 체포될 필요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했습니다.
예조프 : 그렇소, 그러나 그들은 고립된 개인일 뿐이었지.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위협을 제기하는 이들은 아니오. 여기, 이 리스트를 읽어보시오.
필랴르 : 제가 알기로 이 사람들이 국가적대행위에 가담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아니, 당과 정부와 붉은 군대의 중요 직책을 차지한 공산주의자들을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체포한단 말입니까?
예조프 : 어떤 근거가 없다고?
필랴르 : 법적 근거 말입니다.
예조프 : 이 리스트를 받아가시오. 삼일 주겠소. 당신 일을 체크할 테니.

필랴르는 3일 후 체포되었고 그의 자리는 예조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55] 이제 NKVD는 지역당과 공조하는 관계가 아니라 철저하게 지역당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많은 지역당의 수뇌부가 멘붕을 겪게 된다.[56]

동시에 스탈린이 교묘하게 진행한 것이 바로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자리바꿈한 것이었다. 제1서기는 대충 주지사 정도 되는 위치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의 최상급 당원이자 전체 관료제 내부에서 중급 정도에 위치하는 이들의 막강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1936년에서 1937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지역의 많은 제1서기들의 부임지를 싹 셔플링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의 권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었던 측근들을 같이 데리고 이동하는 것을 금지시켜버렸다. 손발이 잘린 상태에서 완전 타지로 옮겨가게 된 이들의 권력기반은 많이 취약해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대숙청에 기여한 것은 1936년부터 줄곧 이어진 소련의 경제위기였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대숙청으로 유능한 관료진이 썰려나가면서 경제가 악화된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경제위기가 대숙청을 불러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몇 년 안정되었다가 또 다시 1936년 안 좋았던 날씨로 인한 작황 현황, 가뭄으로 수로가 말라붙으면서 생긴 수송 문제의 악화, 그로 인한 철도 체제의 과부하, 농업생산의 추락, 목재 생산 및 석탄 생산의 위축으로 인한 연료 수급 문제의 악화 및 건설의 둔화, 노동력 공급의 심각한 부족 등등 온갖 문제가 다 겹쳤으며, 설상가상으로 파시스트 국가들인 나치 독일일본 제국의 부상으로 군비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었던 것.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잔뜩 들여놓은 신기술과 기계들을 운영 인력들의 미숙한 운영으로 다 말아먹는 것도 주효했다. 지역의 경제주체들이 계획된 대로 예산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일단 추가집행 해놓고 더 달라고 하면 주겠지 하는 식의 방만한 예산 운영도 국가의 재정에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런 경제의 종합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타하노프 운동을 비롯한 각종 자구책들이 입안되었고 실행되었으나, 오히려 소련에 존재하던 사회적 긴장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국과의 국교 단절과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에 그 뒤를 이은 좌익 숙청, 그리고 극동 지역에서 행해진 일본군의 꾸준한 도발같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소련이 곧 있으면 일본, 영국, 독일 등지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 돌입할 지도 모른단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 몇 년까지만 해도 잘만 돌아가던 경제가 갑자기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분명 외부의 누군가가 소련을 괴롭히려고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소련을 지배했고, 그 생각은 반절이 맞았다. 그에 대해서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1937년 2월, 17차 당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아주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스탈린보다 즈다노프와 몰로토프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당대회였던 것이다. 그간 스탈린의 모호하면서도 치밀한 행보로 이들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즈다노프는 주로 당 내 민주주의의 확대, 일반당원과 간부당원의 긴밀한 연결 및 협조, 경제 문제에만 천착하지 말고 정치와 교육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말을 주로 했고 몰로토프는 반대파 놈들 족쳐야 한다는 말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스탈린은 여기에 추임새를 넣으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지지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당원 그룹의 리더십 대신에, 평화롭게 살고자 신중하신 당원들로 구성된 가까운 친구들의 자그마한 파벌들을 잘 이해하고 있소. 그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빨래를 말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칭찬의 노래나 불러댔고, 그리고 이따금 구역질나고 알맹이 없는 '성공'의 보고서나 보내왔소."
이에 대해 대부분의 당원은 당연히 자신들을 저격하는 것이라고 직감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와중에 부하린과 리코프가 출당되어 반대파 사냥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회가 끝나고 몇 달 뒤까지도 아무나 잡고 반대파라고 하는 일은 많이 없었다. 흔히 생각하는 대숙청의 모습은 지나가던 사람 붙잡고는 NKVD 요원들에게 끌고가선 "얘 트로츠키주의자래요. 숙청해 주세요." 인데, 1937년 6월까지도 그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지역당에 대한 장악을 위한 숙청이 이때까지는 명백히 구분되던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전국적인 대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직속 상관이라고 공개비판으로 까기를 두려워했던 일반 당원들이 자아비판과 비판을 중요시해야한단 것을 보곤 탄력받아서 프라우다의 즈다노프 사설을 인용하면서 상급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로 폭격을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폭로가 진실로 이어진 수 많은 간부들이 갈려나갔고, 설상가상으로 제2차 5개년 계획이 신통치 않게 끝날 기미를 보이자 간부당원 사이에서의 연대도 무너지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몇몇 지역당들은 완전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대숙청에서 지역 행정기구의 숙청은 제1차 5개년 계획 때부터 뿌려져 있던 씨앗이었다. 지역 지도자들은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막대한 중앙 투자를 받기 위한 열정으로 넘쳤을 때 사기친 것들이 걸려나왔던 것이었다. 지역 지도부가 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지역중심적 행정이었으나 스탈린이 그걸 허용할 리가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그를 위해서 자신들의 제도적 이점을 활용해 중앙정부를 속여왔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거짓으로 장부를 작성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탄전을 있다고 속이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명령-행정 시스템"이 진화해가면서 모스크바는 계속되는 지역당들의 '성과 저조'와 그에 대비한 '야심찬 계획'에 분노하고 있었다. 지역도 이런 현상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그들은 중앙당의 통제로 받아낼 수 있는 투자를 받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권한을 넘겨받으면서, 그리고 권한을 실행할 능력을 갖추면서 모스크바는 더 이상 지역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없어졌다. 이제 중앙 내부에서의 갈등도 사라져서 트로츠키주의자, 부하린주의자같은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모두 경쟁에 패배하여 소련에 떠나거나 죽어 없어졌다. 이제 그들의 세력을 쳐내기 위해 지역당의 협조를 받을 필요도 없어졌다. 이미 계획을 만드는 것은 완벽히 성숙해진 중앙 정부 부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모스크바는 지역에 대한 대규모 테러에 가까운 지역당 숙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역 간 결탁이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어떤 범죄적 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지역 지도자들이 행한 중앙 정책에 대한 저항이나 조작된 보고서를 올려보내는 일들이 문제가 되었다. 위기가 심해질 때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 희생양들을 찾았고 희생양들을 모스크바에 올려보냄으로써 무마했으나, 성숙해진 모스크바는 더 이상 지역당의 기만이 속일 상대가 아니었다. 수 많은 사건들이 겹치며 이러한 관행으로도 버티지 못 할 임계점에 도달하자 물결이 바뀌고 말았다.

사실 희생양을 찾아서 모스크바에 제물로 헌납하는 전략은 자기파괴적인 전략이었다. 경제와 정치 간의 상호연결성 때문에, 만약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같이 죽어야만 했고, 이러한 것은 죽음의 물결이 예고되었다. 경제 전반에 걸친 위기가 지소되자 긴장과 갈등과 불만이 모두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지역 지도자들은 이 물결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는 하부 단위에서의 상호 비방과 기소의 물결을 촉진시키며 모가지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계산은 적중했다.

그러나 그들도 예상 못한 건 그간의 희생양 만들기 관행이 빚어낸 화학적 결합이었다. 즈다노프가 만들어낸 이 상황에서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예조프와 몰로토프의 작품이었다. 3월 지역당 회의에서 시작된 거센 비판의 물결을 버티고, 심지어 얼마 안 가 시행된 선거에서도 상당 수의 지역당 산하의 간부들이 그대로 살아남자,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6월 지역당 회의에서 일반 당원들이 트로츠키주의자와 파시스트 첩자라는 레토릭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꾸준히 지역당원들은 보고서에 자신들의 성과 저조를 사보타주, 외국 첩자, 반대파, 인민의 적같은 존재조차 의문스러운 적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모두 망쳐버렸다는 거짓말을 하던 관행이 이 폭발적 비난의 물결과 맞물려 버린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동시에 진행되기 시작하였던 군부 대숙청의 불길이 지역당에 옮겨붙기 시작한다. 소련군은 군관구 체제라 군관구 장이 지역당 회의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는데[57] 이들이 파시스트 첩자로 몰려서 숙청당하는 동안 "니들 이런 첩자를 당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시켰냐?" 라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기 때문. 스탈린은 지역당원들이 줄줄히 잡혀가서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해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겠지만, 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을 염려하면서 카가노비치와 말렌코프와 같은 그의 심복을 지방 당 대회에 참관시켜 적절한 교통정리를 시행하는 동시에 모든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갈아버렸다. 말렌코프는 벨로루시로 갔고,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로, 베리야는 그루지야로, 미코얀은 아르메니아로 갔다.[58] 그와 동시에 이제 숙청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대숙청의 가장 과격한 형태인 예좁시나였다.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대숙청의 모습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소하고, 10년 전의 생각 없이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와 동료들에게 했던 사소하고 작은 말과 행동들이 낱낱이 밝혀지며 비판받고, 출신 계급이 어디냐에 따른 충성도 체크가 이루어지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공포정치가 막을 올린 것이었다. 소련 사회 구석구석까지 숙청의 칼날이 기어들어왔는데 가장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곳은 지역당의 수뇌부였다. 고참 볼셰비키는 그들의 명망이 높아서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예조프의 당 지도부 타격 계획이 이뤄지던 때에 지도부에 들어가 있어서 걸린 것에 가까웠다. 한편 중앙당의 스탈린 측근들은 이 대혼란을 기회로 조직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지도부는 이 비난의 물결을 아래로 돌려서 자신들의 곤경을 피하려고 하였고, 일반 당원들 사이에서도 공포정치의 확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소련은 당시 국가 내부에 만연해 있던 사회적 긴장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다. 이것이 예좁시나 때 터져나왔던 것이다. 관료제 내부의 무능이나 도덕적 오류들은 있는 현실 그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첩자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음모로 치부되었었고 이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적대관계가 폭발하고 표면화되자 서로가 서로를 진지하게 트로츠키주의자나 파시스트 첩자의 음모라고 생각하며 고발해 댔던 것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1936년 경제위기로 소련의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 훨씬 극심해진 상황에서 이런 공포의 물결이 지속되자 상급 당원들은 하급 당원들이 자신들을 없애서 소련을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믿었고, 하급 당원은 상급 당원들이 외국 첩자와 결탁하여 국가를 내부에서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소련군이 붕괴에 가깝게 속수무책으로 털려나가자, 모든 사람들은 이 믿음이 결국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독일군 측에서 진행한 NKVD 포로 심문 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당장 스탈린조차 이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고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독일군에게 항복, 전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숙청 기간 동안 저 간첩이 왜 체포되지 않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당무의 상당부분이 줄곧 대혼란이었던 것처럼 이 예좁시나도 계획된 공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조직들이 죄다 당원 관리도 안 되고 지리멸렬한 상태인데 숙청기관인 NKVD만 빠릿빠릿한 기율로 움직이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누구를 숙청해야 하나부터 어디까지 숙청해야 하나, 이 사람 숙청해도 되는 건가에 대해 전반적인 가이드라인이나 합의가 없이 숙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59] 또한 즈다노프와 예조프의 두 노선이 별개로 진행되다가 37년에 갑자기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대혼란을 촉발하는데, 스탈린이 이 둘의 화학반응을 예측하고 완전 의도적으로 두 노선을 멱살 잡고 하드캐리한 건지, 아니면 스탈린도 예측 못한 상태에서 두 노선이 결합하며 예좁시나가 터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머리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현대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이든 정황상 스탈린이 이걸 무작정 확대해서 통제하지도 않고 전부 박살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건 확실하다.[60] 6월에 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서 "일반당원님들, 우리 조금만 속도 줄이죠. ㅎㅎ" 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사설이 실리고 은연 중에 스탈린 본인이 과도한 비난 드라이브는 삼가자는 신호를 여러 방면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특히 즈다노프 노선에 따른 소비에트에 대한 비밀선거 및 자유로운 입후보는 1937년의 하반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후퇴하였다. 모스크바 중앙당이 농촌지역에서의 반대표를 감당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 더하여, 스탈린의 예조프에 대한 태도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변화하게 된다. 대숙청을 지휘하면서 NKVD가 너무 많은 힘을 쌓았기 때문이다. 예조프와 NKVD에 대한 온갖 찬양이 언론을 뒤덮었고, 레닌훈장이 NKVD 인사들에게 뿌리듯 수여되었으며 심지어 예조프의 이름을 딴 도시마저 생겼다. 마침내 10월, 예조프는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예조프의 승승장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누가 피에 굶주린 미친 개를 좋게 보겠는가?[61]

위에서는 이런 스탈린의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볼쇼이 극장에서 치러진 NKVD 20주년 행사라고 서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맞지 않다. 그 전에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국 고위 위원들이 그 해 12월 선거에서 최고 소비에트에 진출하게 된 것에 대한 취임연설이었다. 13명의 국원들이 연설을 했는데, 이 중 7명의 국원들은 NKVD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 한 번 언급이라도 해준 반면, 스탈린, 몰로토프, 즈다노프, 칼리닌, 보로실로프, 미코얀은 예조프와 그의 부하들에 대한 공치사를 한 마디도 던지지 않았다. 예조프에게는 매우 불길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더 불길한 징조가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연설 중 일부가 검열당해 출판되었던 것이다. NKVD 20주년 행사는 그 얼마 뒤에 있던 일이었고, 이때 스탈린은 그의 치밀한 정치술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일단 행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NKVD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아나스타스 미코얀으로 박아놓은 것이 1타였고, 더 중요한 2타는 참석을 안 해버린 것이었다.

사실 행사 다 끝나고 음악 콘서트 때에 참석을 하기는 했다. 프라우다는 스탈린이 음악 들으러 왔다는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이를 보도했는데, 프라우다의 편집을 감독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모를 리가 없던 예조프는 점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촉박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스탈린이 그 이전에 집단농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축하하는 자리, 최고 소비에트 투표장 등의 행사에도 참석한 걸 생각하면, NKVD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중간에 음악 들으러 왔다고 둘러댄 이 행보는 예조프를 버릴 것이란 경고이고, 후에 있을 토사구팽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예조프의 팔을 잘라놓는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의 부관들은 임업인민위원회나 우편통신인민위원회 등으로 전출되었고, 그의 부하들을 따라 그도 몰락하게 된다.

예조프는 이런 움직임에 위기를 느끼면서 자신을 방어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게 된다. 특히 예조프식 숙청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즈다노프를 비롯한 당 내 스탈린의 측근들이 공개적으로 당원에 대한 과도한 숙청을 비판하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이 이끄는 기관들도 과도한 숙청으로 조직력에 타격을 심대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예조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숙청을 더욱 심하게 진행하는 자충수를 두었으나, 내부 단속에 실패하였다. NKVD 극동 지부에서 예조프가 일본 파시스트들과 연계 되어 있다는 증언이 나와버린 것. 예조프는 더욱 초조해져서 최고 소비에트에서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라고 바꿔야 한다!" 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그냥 한 큐에 거부해 버렸으며 예조프는 자신이 스탈린으로부터 얼마가지 않아 버려질 것이란 것을 체감하게 된다.

특히 결정타는 몰로토프와의 갈등이었다. 위에서 몰로토프-오르조니키제 갈등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숙청 막바지에도 여전히 소브나르콤 의장이었던 몰로토프는 산하 기관의 장이었던 예조프에 대해 또 질책을 가했다. 정보기관이 왜 장관회의 의장 밑인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 NKVD의 정식 명칭은 '내무인민위원회'였다. NKVD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식 정부부처였고 예조프는 장관급이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NKVD 또한 각 인민위원회들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인민위원회 회의(소브나르콤)의 산하기관이었고 일단은 예조프도 오르조니키제도 서열상으로는 몰로토프의 아래였다. 여하튼 그걸 듣고 예조프는 그동안 느껴왔던 위기의식이 폭발해서 폭탄 발언을 던졌다.
"내가 당신 자리에 있다면 말입니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나는 유능한 기관에 그런 종류의 질문은 하지도 않을 겁니다. 소브나르콤의 전 의장[62]이었던 알렉세이 리코프도, 내 집무실을 거쳐 갔다는 걸 잊지 마시지요. 그리로 향하는 길은, 심지어 당신일지라도 닫혀 있지는 않습니다."[63]

몰로토프는 이 어이없는 협박을 듣고 '저 새끼가 돌았나.' 라고 생각해 이를 스탈린에게 보고한다. 어쨌든 몰로토프는 소브나르콤 의장으로 인민위원에 불과한 예조프의 직속상관이었고, 당내 직위도 정치국 위원으로 후보위원인 예조프보다 높았다. 거기에 이 시점에서는 스탈린의 둘도 없는 최측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몰로토프는 1922년, 카잔의 집행위원이었던 예조프를 마리주의 책임비서로 승진시킬 것을 중앙위원회에 건의하여 그의 출세길을 열어준 은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조프의 당시 정신 상태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상태였다. 정말로 온 나라안에 간첩이 가득하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고, 스탈린의 줄어드는 총애 속에서 안달복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로토프가 자꾸 시비를 걸자 앞뒤 안가리고 이빨을 드러낸 것이었다. 예조프 입장에선 자기 옆 자리의 요원 목을 폴란드나 독일 첩자라면서 바쳐야했던 상황이었으니 결국 그런 공포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이 전술된 몰로토프에 대한 공격이었다. 어찌되던 자신의 출세길을 열어줬던 상관에게 "너도 나한테 깝치면 숙청시켜 버린다!" 라는 엄포를 질러놓은 것을 묵과할 정도로 스탈린이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64] 몰로토프의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예조프를 불러서 몰로토프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명령했다. 예조프는 묵묵히 사과하였고 다른 데서 계속 숙청을 진행하였으나 이제 스탈린의 강철 빗자루를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예조프의 기세는 한 풀 꺾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다 1938년 1월, 예조프는 NKVD 자리를 유지하는 한편 수로운송인민위원회라는 아주 중요한 직책(...)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 당원들에 의한 무자비한 너 고소를 억제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잠재적 반대파들을 살려두는 안일한 일은 하지 않았다. 곧이어 니콜라이 부하린의 재판이 뒤따랐고, 1937년 2월에 그가 "한쪽 극단에서 벗어나서 다른쪽 극단으로 벗어나는 일을 여러분들은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듯이, NKVD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약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NKVD의 중심인 예조프만큼은 철저히 찍어눌렀다. 1939년 1월 이후, 그의 이름은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 예조프의 심복들도 제거되었고 그들은 베리야의 심복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1939년 3월, 18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이 모든 이야기를 그의 정치적 의도하에 정리하는 연설을 한다. 제1차 5개년 계획 이래로 너무나 많은 당원들이 들어와 조직이 혼란스러워졌으며, 그들이 관리가 안 된 상태였고, 그 이후에 일어난 키로프 암살 사건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1935년의 당 문서 확인 작업, 1936년의 당 문서 교체 작업의 지연, 그리고 예좁시나까지 포괄하는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 우리의 당에서, 당원의 수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더 좋습니다. 이것은 큰 성취입니다.
'당원 교육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숙청으로 해결하려 한다.' 는 이유로 애초부터 예조프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았던 즈다노프는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희생이 있었다며 탄식하나, 스탈린은 당대회에서 즈다노프에게 "분명 무고한 희생이 우리 예상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 작업은 어차피 했어야 하는 일이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했다." 는 식으로 그를 다독였다. 마침내 소련 전 지역에 대해 강철같은 규율을 부과하려던 스탈린의 시도는 소련 모스크바의 중앙당이 막지 못 할,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던 대혼란으로 종결되었던 것이다.

결국 수정주의적 시각에서의 대숙청은 (적어도 '대숙청의 기원'을 쓴 존 게티의 입장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영향력이 확대된 지역당을 제압하고 중앙당의 관료제적 상하관계에 입각한 통제를 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 개인의 휘하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그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조직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규율 같은 것도 없는 개판의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앙-지역의 갈등 뿐만 아니라 중앙당 내부에서의 몇몇 명망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사태를 혼란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즉, 당 내부의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숙청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이 존재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증거들은 모두 스탈린 시대마저도 일사불란한 규율로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수정주의 측에서는 키로프 암살부터 예좁시나와 예조프의 숙청으로 이어지는 스탈린의 엄청나게 기나긴 계획이 과연 있었는가, 그리고 그 본질적인 목표가 과연 스탈린의 정치-사상적 반대파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또한 아래의 문단에서 언급되는,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으로 대숙청이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의문도 던진다. 물론 대숙청은 스탈린 개인의 권력을 인류 역사에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드높여주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을까? 흔히 대숙청하면 언급되는 키로프 암살과 이어지는 카메네프-지노비예프에 대한 재판은 아주 자극적이고, 과거의 혁명동지들을 암살 혹은 처형하여 스탈린 본인의 절대 권력을 수립한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으로 시야를 넓히면, 관료제 기율의 전국적 확립과 중앙당과 지역당의 위계설정이 스탈린에게는 더 중요한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다. 베버가 말한 "폭력의 독점체"로서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스탈린의 시도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숙청은 소련 사회의 거대한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 있는 문제로, 단순히 권력에 미친 독재자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숙청에 대한 스탈린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를 테면 단순히 젊은 세대들이 윗 세대를 쳐내고자 한 운동에 스탈린이 편승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그렇다. 몰로토프, 즈다노프, 예조프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결코 작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스탈린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수준이라고 평해지던 신흥 관료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끝내는 팽해버리는 모든 과정을 지휘한 자가 스탈린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보자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 마왕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 사실 대숙청의 키 플레이어이자 당내 급진파의 양대 노선의 대표라고 할만한 즈다노프와 예조프, 모두 스탈린과 목표를 공유하는 측면은 분명 있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철저하게 스탈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다가 결국 스탈린에게 정치적 위협이 될 수준이라 평가받을 시기에 대책 없이 폭주하여, 국가적 공포의 '책임'을 물은 스탈린의 손에 '처단'당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예조프는 말할 필요도 없이 토사구팽 당한 것으로 이를 보여주었고, 즈다노프는 살아남긴 했으며 예조프의 노선에 줄곧 반대했으나, 결국 예조프의 사업에 엄청난 버프를 걸어준 셈이 되었다. 키로프 암살 이후 즈다노프와 함께 당원 정치교육 사업을 같이 맡아서 그를 핵심 지도부에 끌어온 자도 스탈린이었고, 1937년 2월에 다분히 지역당 지도부의 부패와 유착 관계들을 공격하는 연설로 이 혼란을 촉발시킨 자도 스탈린이었으며, 야고다를 경질하고 예조프를 올린 자도 스탈린이었고, 끝내 예조프를 죽이는 것을 결정한 자도 결국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한된 자료로 인하여 스탈린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였는가를 파악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대숙청의 책임을 스탈린 개인의 비인간성과 권력 욕구, 소련 체제와 공산주의 사상의 특수성 등에서 찾는 전통주의적 입장과는 달리 수정주의적 입장은 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나치 독일이 그러했듯 일상화된 국가 폭력, 전국가적 공포로 상징되는 세기에 남을 비극은 단순 통치자 혹은 지배자 개인의 비인간성, 당시 공산주의 체제의 특수성 등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 정부와 중앙 정부, 상급 관료와 하급 관료같은 수 많은 인물들을 걸쳐 복잡하게 얽힌 이해 관계, 습관화된 부패,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야심을 가진 지도자, 위기가 임박했다는 국가의 공포같은 여러 조건이 겹치면 어떤 형식으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전 소련에서 행해진 대규모의 국가 폭력을 옹호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는 있으나, 대숙청의 수정주의적 시각이 귀결하는 결론은 결국 대숙청 같은 규모의 국가 폭력은 단순 스탈린과 소련 사회주의 체제에서만이 아닌, 어느 시기, 어느 국가, 어느 체제에서든 발생할 수 있단 것이다.

여담으로,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게 스탈린은 결코 자기보다 지위가 높고 나이도 많았던 멘셰비키-볼셰비키 분당 이전(1912년 이전)의 최고위급, 최고참 혁명가들은 '대숙청 때는' 건드리지 않았다. 대숙청이 오기 한참 전에 사망해버린 보그다노프와 플레하노프 등을 제외하더라도, 막심 고리키, 마르틴 리아도프 등은 스탈린이 죽인게 아니며, 스탈린 정권때 죽은 최고참 볼셰비키인 솔로몬 로좁스키는 독소전쟁이 끝난 뒤 유대반파시즘위원회 누명 사건 때 숙청당해 사망하였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옐레나 스타소바, 로잘리야 제믈랴치카[65]같은 여성 혁명가들도 살아남았으며 심지어는 사회혁명당 좌파의 대표로 무장봉기까지 일으켰던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도 '대숙청 때' 죽은 것은 아니다.[66] 소련 대백과사전을 제작한 글렙 흐르지자놉스키[67], 보건상을 역임한 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도 살아남았다. 결국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죽였다'에도 반증이 존재하는 셈이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중장까지 오르고 후일 소련 공군 소장을 한 알렉산드르 사모일로 장군은 1944년까진 공산당원도 아니었는데도 건드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스탈린은 10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 트로츠키와 함께 유일하게 레닌을 독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봉기를 반대하다 레닌의 눈 밖에 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나 보그다노프의 이론을 따라가던 부하린 등은 인기와 명성은 있었을지 몰라도 당내 지지도에서 정말로 스탈린을 앞섰을지에 대한 여부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정말로 스탈린이 보잘것없었다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몰아내기 위해 '연합'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스탈린이 그 둘을 손쉽게 쳐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코민테른 서기장을 하는 부하린을 스탈린 개인의 힘으로 쳐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말로 스탈린에게 위협이 되는 경쟁자는 1917년부터 1940년까지 트로츠키였고, 결국 스탈린이 승리하였다.

이러한 스탈린의 권력과 그 안정성이 턱없이 저평가되고 이를 넘어 대숙청의 원인이라 잘못 평가되는 이유는 서방 학자들과 대면할 수 있는 인적 요인의 불균형 때문이었다. 대숙청 이전, 혹은 대숙청 과정 중 소련에서 미국, 영국 등지로 망명한 공산당원들과 소련 공산주의자들은 당연하게도 숙청당하거나 도망친 부하린, 트로츠키 등의 유명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지지자들이었고, 이러한 이들이 스탈린의 권력 우세와 안정성을 객관적으로 마주할 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의 대숙청은 그들의 시각에 의해 왜곡되어 복잡한 인과관계가 묻혀버린 채, 피에 굶주린 지도자의 잔혹한 권력약탈과 폭압으로만 각인되었던 것이다.

4.2.1. 군부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본고는 군부 숙청 직전인 1936년 적군 기병에서 복무하고 있던 199명의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분석대상으로 하여, 이들의 인적정보 및 경력 정보를 기반으로 군부 숙청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정하, 1930년대 소련 군부 숙청의 원인 ― 적군(赤軍) 기병 지휘관의 이력 분석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2019, vol., no.59, pp. 364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는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된 1990년대부터 활발하게 등장하였으나, 군부 대숙청에 대해서는 수정주의적 시각에 관한 연구는 그보다 훨씬 늦게 등장했다. 아마 1940년 겨울전쟁이나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초창기 소련군이 보여준 무능한 모습, 정치권력을 의식하는 소극적 장교진 등을 이유로 대숙청의 부정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것이 너무나 상식적이었으며, 권력의 중추인 무력집단으로서 군부에 대한 숙청은 '스탈린의 개인적 권력 강화'라는 전통주의적 시각과 굉장히 잘 부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존 러시아 사회의 봉건적 구조 위에서 혁명과 내전, 스탈린 혁명 등의 급진적이고 폭력적 변화를 겪기 시작한 소련의 근대화 과정과 그에 수반되는 사회갈등에 주목하는 수정주의적 연구 경향은 최근 들어 초기 붉은 군대의 형성과 발전을 바라보는 데도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에 따른 연구 결과들도 마찬가지로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즉, 수정주의에 따르면 군부 대숙청 또한 나머지 사회에서 벌어진 대숙청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군부 대숙청을 폭넓은 시야에서 이해하려면 군과 군부가 소련에서 가졌던 위상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경험한 파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총력전 체제를 감당할 수 없는 러시아 제국의 후진적 시스템은 전쟁 말기에 총체적으로 파탄났고 이미 국가는 기능부전 상태에 들어갔다. 무질서가 전 러시아를 휘감았고, 혁명은 그런 무질서 상태에서 빚어진, 어느 정도 높은 개연성을 가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나서도 당연하게도 혼란은 더욱 심해졌는데, 수정주의 문단에 잘 나와 있듯이 애초에 지하정당이던 볼셰비키는 은행을 털고 파업을 종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 거대한 관료기구를 통솔하는 데는 역량을 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이어지는 러시아 내전에서 전쟁 승리를 위해 볼셰비키는 구 제국군 장교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군부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 일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유토피아주의와 정권을 살리고자 하는 현실론의 불가피한 타협이었다. 특히 1920년대 신경제정책 시기를 거치며 소련에서는 "전문가들(Spetsy)"이 부상해 관료 집단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후 탄생한 소련 정권은 러시아 제국의 미비한 관료제를 철저한 근대 국가의 치밀한 관료제로 재편하고자 하였고 이는 엄청난 신규 인력 수요를 발생시켰다. 그렇게 들어온 이들은 어중이 떠중이들로, 극단적 혼란기를 이용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다수였다.

형성 과정에서 이런 상이한 인적그룹을 안게 되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공산당은 구세대들을 점차 신세대로 교체했다. 따라서 30년대쯤 가면 붉은 군대에서는 이런 신세대들이 거의 상위 직급에 올라섰다. 하지만 이 혁명 세대들은 근대 국가의 관료제 안에 포섭되어 있었지만 그 사회적 구성이나 행동양태는 전근대에 더 가까웠다. 대체로, 붉은 군대의 상당수 병력은 트로츠키가 주도하는 무자비한 징집제와 처형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지만 많은 수는 현지의 자발적인 세력 형성으로도 충원되었다. 이는 러시아 내전의 주요 전장이었던 광활한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마을 별로 청년들이 토지개혁을 이뤄내기 위해서 자경단과 민병대를 조직하고 백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파르티잔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파르티잔들은 주로 기병으로 조직되었는데, 지리적 특성과 당시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발전 수준 상, 광활한 남러시아-우크라이나의 초원지대에서는 전략 기병과 타찬카(기관총 포대를 단 마차)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모스크바를 노리던 백군 주력을 막아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지휘관들은 이런 이유로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파르티잔 출신의 기병대 지휘관들인 경우가 잦았다.

문제는 이 지휘관들은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끌며 소련 국가 탄생에 기여하였지만, 소련 국가가 안정되고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붉은 군대의 중요한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첫째, 이들은 시작부터 강력한 규율과 정치적 통제를 전제하고 모집된 병력이 아니라 상당히 자율적인 사회집단이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 내의 이익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였고 이는 어느 정도 내전기를 통해 배태되었다. 둘째, 수정주의 문단에 설명된 것처럼, 이런 힘을 통제할만한 근대적 규율 체계가 당시 소련 공산당이나 국가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는 조직적이고 합리적 시스템의 논리보다는 개인의 비공식적 관계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하부 집단에 대한 상부 집단의 일관된 통제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었다. 통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 카리스마 혹은 후견-피후견 관계에 입각한 거래를 통해서 채워졌던 것이다.

이미 내전기부터 파르티잔 계통의 부대에서 이런 문제는 표면화되고 있었다. 예컨대 당이 약탈을 금지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 심한 경우 상급 당조직에서 정치위원이 파견되어 이를 분명히 경고하였고 심한 경우 처벌까지도 갔으나 몇몇 집단에서는 이에 대해 반란으로 대항하기도 하였다. 분명히 같은 공산주의를 추구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소비에트 정권이 추구했던 것은 계급이 사라진 '진정한 공산주의'보다는 근대 국가로의 전 사회적 전환이었다.

여하튼 1920년대에 소련 국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 군부 또한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자체적인 이익집단으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내전 때 방대하게 팽창했던 군은 굉장히 많은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먹는 하마나 다름 없었다. 당은 군축안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나, 군 조직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당지도부의 골머리를 썩혔다. 또한, 이해관계와 인적네트워크로 엮여 오염된 당시의 감사체계는 소련 군 내부의 비리를 방지할만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일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러시아 내전 당시 어디서 활약했는가를 두고 내부의 파벌이 자리잡았고 이것이 분파주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스크바 정치국의 상황을 반영했다. 전쟁의 주 무대가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였던 만큼 파벌도 이 둘로 갈렸다. 우크라이나는 독일 및 폴란드와 접경한 곳이자 민족주의적 반군도 있던, 전략적으로 복잡하고 중요했던 곳이니 만큼 당시 군사인민위원회를 맡았던 트로츠키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한편 남러시아의 경우 볼가강의 수운 네트워크를 통해서 모스크바에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이곳이 뚫린다면 또한 모스크바가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붉은 군대는 캅카스와 남러시아에 자리잡은 데니킨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야 했다. 볼가강 변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그라드로 알려지게 되는 도시가 이곳에서 중심적인 지휘부가 되었다. 이곳에 부임한 정치위원이 트로츠키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던 스탈린이었고, 보로실로프나 부됸니 같은 군인사들이 이 때 스탈린과 중요한 인연을 쌓았다.

내전의 경험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트로츠키와 인맥을 형성한 그룹과 남러시아를 중심으로 스탈린과 인맥을 형성한 그룹이 병립해서 소련 군부 내에서 강력한 양대 파벌을 형성하게끔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군부의 파벌화 경향은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중앙 정치에서의 갈등과 맞물렸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형성된 파벌이 트로츠키가 숙청당하자 30년대 내내 군부 내부를 통일된 조직으로 만드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한 것이 가장 중요했다. 트로츠키의 후원을 받던 군 인사들은 통수권자로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를 극히 불신했고, 그들을 소련의 통수권자가 아니라 특정 파벌의 대표 정도로나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탈린의 후원을 받은 집단 또한 당중앙의 의도와 배치되는 행동을 이어갔는데 이는 그들이 중앙 정계와의 끈을 믿고 규율을 따르고 통제를 받아야 하는 그들의 위치를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갈등은 1934년 나히모프 사건, 투하쳅스키를 주축으로 한 장군들이 보로실로프를 몰아내려고 하던 계획의 적발 등으로 이어졌고, 2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면서 점차 심화되던 소련의 당-국가 시스템의 진화와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었다. 행정과 집행 권력을 중앙으로 일원화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의도는 당원에 대한 정기적인 관리와 주기적인 숙청[68]으로 구현되었다. 군부는 소련 정권의 특성과 파시즘의 발호로 가중되는 안보적 위협 때문에 필히 당중앙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정리가 되었어야 했고, 스탈린은 이를 정리했다.

따라서 군부 대숙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하였듯 근대 국가는 "폭력의 독점체"고, 근대 국가라면 군은 자율적 활동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필요에 의해 다스려지는 객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련 군부는 내전기 파르티잔 활동으로 형성되어 자율적으로 행동하고자 한 경향이 강했으며, 더욱이 소련 성립 이후 사회 전반에 나타난 파편화와 혼란으로 인해 정치권력의 단일한 도구로 기능하지 않았다. 소련 군부는 각자의 출신과 직급 등으로 파벌화 되어 있었고, 이들은 자율적 주체로 자신들의 이익을 정치적인 수단과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종종 드러냈다. 이런 그들의 "노력"은 파벌 갈등, 독직, 비리, 횡령 등을 포함하곤 했다. 하지만 당-국가는 자신들의 손아귀에 폭력을 절대적으로 독점하도록 만들고자 했고, 이 충돌이 결국 군부 대숙청으로 이어졌다.

이하 살펴볼 실제 군부 대숙청에 희생된 군인들의 다양한 숙청 사유는 당시 소련 군부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추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일반적으로 숙청은, 아무 맥락 없이 "이 자는 트로츠키주의자" 또는 "파시스트 첩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체포, 고문을 거쳐 형식적 자백이 동반되는 약식재판이 이어지고, 그 뒤 처형이나 수용소행이 이어진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숙청 사유'가 낯설게 들릴 수도 있다. 물론 위의 일반적 이미지는 어느정도 진실을 담고 있으며, 특히 수십만의 무고한 소련 시민에 대한 "대규모 작전(Massovaya Operatsiya)" 약식재판과 처형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합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간부 당원 및 군부에 대한 숙청은 이런 단순한 이미지보다는 조금 복잡한 양태를 띤다.

실제 숙청의 양태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료는 소련이 남긴 다양한 행정서류들이다. 관료국가를 지향했던 소련답게 숙청에는 흔히 숙청 명령서가 동반된다. 명령서에는 다종다양한 숙청 사유들이 동시에 기재 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사유는 그 수많은 사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유들이 결국 붉은 군대와 소련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으니 숙청 대상자는 결국 소련 내부에 침입한 첩자이자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1.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군관구에 대한 숙청
예로님 우보레비치[69]와 이오나 야키르는 군부 내 스탈린의 핵심 측근들이다. 기존의 통설은 이들이 군부 내의 "기갑파"를 대표하며 보로실로프와 부됸니의 "기병파"와 갈등했기에 숙청당했다는 것이지만, 보로실로프는 오히려 기갑군을 적극 지지했던 것으로 밝혀져서 이 가설은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스탈린은 오히려 이들을 신용하여 각각 벨로루시 군관구와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군관구 장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지역 군관구에 들어가서 스탈린의 친분을 무기로 군관구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군관구 내부에서 본인들의 파벌을 만들었으며, 스탈린은 이들이 자신의 통제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의도적인 인사 정책을 실행했다. 이를테면 다른 군관구와의 인원을 주기적으로 교환하게끔 한 것이나, 야키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군관구를 키예프와 하리코프의 두 군관구로 분할한 것이 그렇다.
하지만 이 문제는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우보레비치는 자신의 지역 영주 같은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부대 내의 장갑차를 사적 유용하여 자녀의 등교를 지원하도록 했고 부대의 유류 보급품을 횡령해서 외국에 밀매하기여 착복하기도 했다.[70] 이에 대해 군최고통수권자인 스탈린은 야키르와 우보레비치에게 모스크바 중앙군의 보직을 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야키르는 와병을 핑계로 오지 않는 등 인사변동에 저항했다. 우보레비치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이들에게 기회를 줬으나, 계속하여 보직변경에 응하지 않자 명령 거부를 근거로 숙청했다.
2. 우크라이나 분파(친 트로츠키)에 대한 숙청
러시아 내전 당시 트로츠키와 인적 신뢰를 쌓고 군부 내에서 활약한 인사들은 필연적으로 스탈린에 불신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이 갈등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졌다. 프리피야트 늪지를 지나 측면이 과도하게 노출되었을 때 붉은 군대는 폴란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는데[71], 이 중 북부에 있던 우크라이나계와 남부에 있던 남러시아계는 책임을 서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권의 갈등까지 반영하게 되었다.
결국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스탈린이었고, 따라서 스탈린의 비호를 받을 수 있던 남러시아계 분파가 군 조직 내부에서도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정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는 1935년 보로실로프가 주축이 되어 붉은 군대에 계급을 수여할 때 가장 극심해졌다. 트로츠키계 군인들은 러시아 내전에서 유사한 활약을 했어도 스탈린계 군인들에 비해서 낮은 계급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보로실로프는 이에 대해서 어떤 편향성이나 불공정함이 당연히 있을 것이고, 이는 최선을 다해서 교정하겠다고 해명했으나 군부 내의 특정 그룹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실제 소장 계급을 부여받은 이가 멋대로 별을 하나 더 붙여 중장 계급이라고 강변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은 어떻게 못해도 군행정가로서 보로실로프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우크라이나 파벌 안에 생겨났다. 하지만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의 위임을 받은 국방장관을 끌어내리려는 음모는 결국 군에 대한 문민통제에 반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크라이나 파벌의 반발은 트로츠키의 정치적 몰락이 가시화되면서 예견된 것이었다. 중앙위원회 회기 당시 스탈린 파벌이 트로츠키를 격렬히 비판해 승기를 거머쥐었을 때에도 일화가 있었다. 당시 트로츠키 계파였던 붉은 군대 소속 중앙위원이던 슈미트는 군도를 빼들고 스탈린에게 겨눈 뒤 "죽여버린다"는 식의 엄포를 놓기도 했었다.
3. 남러시아 분파(친 스탈린)에 대한 숙청
하지만 스탈린은 자신과 친분이 있다고 하여 남러시아에서 같이 싸웠던 군인들의 행동을 무한정 용인해주지는 않았다. 스탈린과 친분이 있던 우보레비치나 야키르가 숙청당했듯, 러시아 내전 때 스탈린과 함께 활약했던 군인들 또한 숙청의 대상에서 피해갈 순 없었다. 그들의 피해가 전반적으로 트로츠키계보다는 적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의 사례는 가장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다. 그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부상한 갈등은 군부 내의 균열을 드러내준 인물이었다. 스탈린과 친분이 있었고 같이 차리친에서 활약한 예고로프 원수는 당연히 보로실로프, 부됸니와도 친했다. 예고로프는 자신들의 실책을 계속 비판하는 투하쳅스키와 우크라이나계 파벌들을 적대시 했고, 1930년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투하쳅스키와 우크라이나계 파벌의 실책을 비난하는 굉장히 공식적인 문서가 될 수 있었다. 예고로프는 출간 전에 지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같은 파벌에 있던 보로실로프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보로실로프는 "우리는 이미 붉은 군대의 중책을 맡고 있고, 다른 당사자들 또한 그렇다. 우리가 날카로운 역사가가 결코 될 수 없고 객관적인 시야로 저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라고 답했다. 기분이 상한 예고로프는 스탈린은 당연히 지지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의 헌사를 스탈린에게 바쳤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고 잠시 묻혀 있던 갈등은 이 회고록 때문에 표면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통일된 당지도부 아래에서 군의 통합을 추구했던 스탈린이나 보로실로프가 용납할 수 없는 독단행동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즉시 예고로프를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이 나오고서도 8년 동안 기다린 뒤, 1938년 숙청이 막바지에 이르자 그때서야 예고로프를 공식적으로 비판했다. "불만이 있으면 중앙위원회에 나와서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제기해야하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예고로프는 곧 투옥되고, 감옥에서 죽었다.
최종적으로 숙청당하지는 않았지만, 숙청 위기까지 몰렸던 부됸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부됸니 역시 스탈린, 보로실로프와 친했으나, 기병대는 사실상 부됸니의 군대라 인식되었고 부됸니 또한 그 생각을 어느 정도 긍정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부됸니는 자신의 기병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군기문란이 심했다. 이러한 것들은 숙청의 잠재적 사유로 꼽혔고, 숙청 직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4. 군기문란
이상의 군인들은 파벌문제도 그렇고 군기문란 문제도 매우 심각하였다. 우보레비치, 야키르, 투하쳅스키는 서부의 국경지대를 맡던 핵심 인물이다보니 많은 지원을 받았다. 특히 그들의 기갑군 구상은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이에 외국 인사들까지 초청한 소련 내의 대규모 기동훈련을 열게 되고 이는 소련의 항공전력과 기갑전력을 과시해서 산업화의 성과를 홍보하고자 하는 국가적 행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훈련을 감독하던 군관들은 훈련이 보여주기 행사를 위해서 조작된 정황을 엄청나게 많이 포착하였다. 이 '기동훈련 사건' 또한 후에 숙청 사유로 등장했다.
훈련을 수행하지 않고 훈련시간으로 등록한 일과 같은 사소한 서류 조작은 매우 흔했다. 횡령도 다반사여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자바이칼스크 군관구에서 건축자재를 횡령하여 발각되기도 했고, 이는 그의 숙청 사유 중 하나가 되었다.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는 몽골에 파견 되었을 때 그의 병사들을 거의 관리하지 않았다. 어떤 병사들은 몽골의 불교 사찰에서 금박을 긁어내서 털어갔고, 다른 병사들은 라마승을 강간하고 부대 옆에 주도적으로 집창촌을 만들어 이 같은 일들이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군부 대숙청이 단순히 스탈린의 폭정에 저항한 유능한 장교진에 대한 탐욕스러운 권력욕으로 이루어졌다는 통설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지방당이나 여타 기관에 대한 숙청과 마찬가지다. 군부 대숙청은 스탈린의 권력을 늘려주었고, 군을 경직화시켰다. 이는 히틀러가 초기에 소련을 침공했을 때 재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 대숙청 이후 소련이 확보한 군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고려한다면, 군부 대숙청 없이 다가오는 전쟁에서 소련이 생존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스탈린의 전략적 오판과 전술적 실책들, 무능하고 타격받은 장교진들은 분명 재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대숙청이 없었다면 독소전쟁 당시도 붉은 군대의 각급 부대는 지휘관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간직한 채 러시아 내전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독자적 행동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숙청 없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62군의 추이코프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볼가 강변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천왕성 작전의 미끼로 던져지는 과감한 구상을 실현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키예프 방어전에서 스탈린이 위치를 고수하라는 어리석은 명령들로 쓸데없는 손실이 발생했다고 후세인은 쉽게 욕할 수 있지만 상부 명령 없이 퇴각하는 일이 대규모 발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대숙청의 부작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된 겨울전쟁에서 오히려 숙청의 필요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에 한 장군이 참모본부를 이탈하여 며칠 동안 행방불명 된 일이 있었는데, 후에 NKVD가 그를 발견 하였을 때 그는 다차(별장)에서 여자들 5명과 보드카 병을 낀 만취상태였다. 이 해프닝은 37년의 대숙청이 군 내에서 이런 인원을 전부 제거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나, 대숙청이 벌어지지 않았을 경우 이후 전쟁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또한 가늠하게 해준다. 대숙청이 없었다면 독일과의 전쟁에서 기율문란은 훨씬 많았을 것이며, 코네프와 주코프의 갈등은 훨씬 더 큰 스케일로 벌어졌을 것임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 또한 어느 정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대규모 행정 프로젝트가 스탈린의 정치적 카리스마와 능력에 과도하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즉, 스탈린이 이룩한 많은 업적이 그랬듯 군부에 대한 통제 역시 스탈린이 죽자 철저히 관리 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주코프를 비롯한 후세대 군인들은 스탈린에게 숙청된 군인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야키르는 기동전 이론가, 우보레비치는 말리놉스키와 주코프의 스승으로 추앙받았고 이들의 능력 자체가 정말로 무능했다곤 볼 수 없다. 문제는 예고로프가 그랬고 많은 군인들이 소련의 당대 정치인, 즉 봉건영주처럼 행세했다는게 문제였다. 이런 붉은 군대를 통제해야 할 군내 정치부(정치장교를 관리하는)는 안토노프오브셴코, 부브노프를 비롯한 트로츠키의 최심복이 수장으로 앉았었고 이후에도 소련체제 자체를 의심하던 얀 가마르니크가 수장이었다. 스탈린은 가마르니크가 자살한 뒤 표트르 스미르노프를 앉혀 예조프와 마찬가지로 군내 숙청을 하게 한다음 스미르노프도 숙청시켰고, 이후 군사적으로는 극히 무능했으나 스탈린에게 충성한 레프 메흘리스로 군을 완전히 장악한다.

메흘리스가 스탈린과 같은 해인 1953년에 사망하고 주코프와 여러 장성들은 흐루쇼프의 복권에 동참해 우보레비치와 야키르 등을 복권시키고 그들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장점을 치켜세우는 만큼이나 그들의 단점 또한 물려받았던 후기 장성진과 소련군은 소련의 새로운 건국신화가 된 대조국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새롭게 당면한 거대한 과제인 냉전을 거치면서 다시 엄청난 이익집단으로 부상했고 그 안에서는 새로운 파벌들이 만들어졌다. 대조국전쟁과 냉전은 소련에서 둔중하고 어마무지한 자원과 인력을 잡아먹는 군산복합체를 탄생시켰다. 이 군산복합체는 당과 군을 횡단하는 거대 이익집단이 되어 소련의 경제개혁과 체제개혁을 가로막았으며 1970년대 정보기술혁명을 놓치게 되어 서방 국가들에 끝내 뒤처지게 되는 궁극적 원인을 제공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에 크게 기여했다. 소련 말기가 되자 누구도 거대한 국방예산이 어디로 들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전반적 그림조차 그릴 수 없었다. 결국 군비에만 돈을 쏟던 소련은 마침내 붕괴하고 만 것이다.

4.2.2. 수정주의에서 민간인들은?

수정주의는 분명 기존에 퍼졌던 대숙청의 결과물에 대해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하지만 위의 설명에서 보듯, 대숙청 당시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설명해 주지만, 이 대숙청이 왜 민간으로 광범히하게 퍼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당시 피해자중의 수치에서 당원 피해만 있는것이 아니며, 오히려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한 것인데 수정주의적 설명에서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적다.

5. 대숙청 허구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숙청 허구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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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 파일:너 숙청.jpg
    대숙청으로 인해 스탈린은 이런 이미지로 패러디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도 당연히 나온다. 최신작인 4편에선 NSB(no step back) DLC로 스탈린의 정치적 편집증이 추가되었는데, 편집증 게이지 관리를 빡세게 잘 하면 중점으로 날려야 하는(안 날리면 반란 확정) 군인들 빼면 아무도 굴라그에 보내지 않고 대숙청을 끝낼 수 있다.숙청없는 대숙청

7. 관련 어록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할 사람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Лучше пусть пострадают десятки невинных, чем пропустить одного шпиона. Лес рубят – щепки летят».
"한 명의 스파이를 놓치는 것보다 수십 명의 무고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것이 더 낫다. 숲을 베어내다 보면 나무조각이 튀기 마련이다."
니콜라이 예조프[72][73]
"1937년은 불가피했소. 우리가 혁명 후에 좌우로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들의 온갖 잔당이 존재하고 있고 파시즘의 공격 위험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파시즘과 연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1937년은 불가피했소. 전쟁 중 제5열이 없었다는 사실로써 우리는 1937년에 대해 빚을 진 거요. 지금 문서들이 감춰져 있으나, 시간이 가면서 진실이 밝혀질 거요. 그들은 적의 첩보기관과 연계되어 있었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74]
"인성의 모든 근본적인 결점과 부도덕 ― 최악의 모습인 사적인 욕심 ― 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는 구나. 거의 성공할 뻔 했던 소련 정부를 전복시킬 음모의 윤곽이 재판을 통해 밝혀진단다."
조셉 데이비스[75]

8. 참고 문헌

  • The Great Urals: Regionalism and the Evolution of the Soviet System
  • Origins of the Great Purges: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 The Anatomy of Terror: Political Violence under Stalin
  • Stalinist Terror: New Perspectives
  • The Great Fear: Stalin's Terror of the 1930s[76]
  • 1930년대 소련 군부 숙청의 원인 : 적군(赤軍) 기병 지휘관의 이력 분석을 중심으로
  • 'We are the Red Cavalry! (My-Krasnaia kavaleriia!)': A Collective Biography of the Red Cavalry Commanders, 1918-1938
  • 진실이 밝혀지다[77]
  • 러시아 혁명 1917-1938
  • Mission to Moscow[78]

[1] 친 스탈린, 스탈린의 지지자들[2] 겨울전쟁 당시 소련의 군사적 실패와 독소전쟁 초기 소련의 연이은 패배[3] 1936년에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레프 카메네프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처형되었기 때문에 1936년에 대숙청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1936년 당시에는 최고위층 정적 몇 명만 본보기로 인해 처형당한 것이었고 숙청과 공포 정치가 온 사회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는 피바람이 불지는 않았기 때문에 1936년의 숙청은 대숙청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1937년 늦봄에서부터 초여름까지의 기간을 대숙청의 시작 시기로 본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1936년 시작설을 서술하고 있지만 러시아어 위키백과에서는 대숙청이 1937년에 시작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다.[4]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열심히 일한 예조프도 훗날 스탈린에 의해 처형당하고 기록말살형을 당했다.[5] 영문 번역칭은 'Great Terror', 한문 번역칭은 대략 '대폭정' 즈음이 된다.[6] 이들의 상당수는 레닌 사후에 스탈린과 손잡고 트로츠키를 실각시키는 데 가담했다. 하지만 공통의 적인 트로츠키가 밀려나자 스탈린은 이들 하나 하나를 한직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각개격파했고 결국은 대숙청을 일으켜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7] 미하일 투하쳅스키 같은 명장도 숙청을 피하지 못했다.[8]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507-508p[9] 보통 숙청이라는 것은 일부 주동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정치적인 생명만 끝장내고 귀양이나 투옥, 수용소행이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다수였다.[10] 사실 이것조차 생략한 경우가 많다.[11] 1934년의 제17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했던 1827명의 대표들 중에서 1939년의 제18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생존자는 37명이었다.[12]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때 나온 거니 대체로 축소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으나 흐루쇼프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당장 NKVD가 굴라크 등의 문제와 엮여 있었고 대숙청 기간의 소수민족 박해를 인정하면 소수민족 간의 분란이 있을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걸러서 발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굴라크에 끌려간 사람은 수백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13] 당시 국방장관이라고 할 만한 국방인민위원[14] 당시는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후에는 외무장관이라고 할 만한 외무인민위원.[15] 위 사진은 '인민의 에어브러시질'로 가장 유명한 사진이지만 4명이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스탈린 혼자 남은 사진이 된 사례보다는 양호한 편이다. 사진은 좌측부터 니콜라이 안티포프, 스탈린, 세르게이 키로프, 니콜라이 슈베르니크. 사실 이 중에서 대숙청으로 사망한 사람은 안티포프 하나뿐이긴 하지만 말이다.[16] 보로실로프 문서에 있듯이 보로실로프처럼 사격실력을 높이자는 운동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17] 소련은 이때 독일에 비해 전쟁 준비가 거의 안 됐기 때문에(스탈린 본인부터가 1943년은 돼야 혹시 독일이 쳐들어와도 안전하게 막아내리라 봤다)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더라도 독일의 파상 공세를 온전히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18] 조선인 출신 일본 밀정들이 소련에서 활동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19] О выселении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из пограничных районов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края[20] 1938년 6월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고 선전 및 첩보에 활용되었으나 소련의 참전 이후 류시코프가 소련으로 재망명하는 것을 막으려는 관동군에게 살해되었다.[21] 나치 독일과 스탈린 시절 소련을 전체주의 사회라는 맥락에서 비슷한 사회로 보는 입장이다.[22] 참고로 전통주의적 시각은 사회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다.[23] 스탈린의 경우 반대표가 292표를 넘었다.[24] 진격해오는 정규군에 호응하여 적국 내에서 각종 모략 활동을 하는 조직적인 무력집단.[25] 대숙청과 전혀 무관한 부됸니나 볼로쇼프 혹은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보안 문제 간섭이나 숙청과 무관한 병사 내지는 사고사에 대한 보안 문제를 봐서 이 설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26] 10월 혁명으로 허용되었던 동성애낙태는 스탈린 집권 후 다시 범죄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는 사실 차르 체제와 다름없는 보수적인 체제였다. 이전까지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건 뭐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유도 제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27]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으로 단련되고 임무형 지휘체계 등의 우수한 시스템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된 독일 육군, 루프트바페 등의 공격으로 흩어져 있던 소련 육군은 각개격파를 당해 분쇄되고 공군은 수천기의 비행기가 박살나 버려 제공권을 장악당해 초반에 수백만이 갈려나가 버렸다.[28] 동일한 내용을 도·감청이 가능한(= 암호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회선을 통해 평문과 암호문 모두로 송신하는 행위. 사실상 적군에게 암호를 갖다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대한민국 국군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대에서 엄히 금지하고 있다.[29] 물론 우라돌격은 단순 돌격보다는 포병, 공군, 전차 등이 동반된 공격이었다. 반자이 어택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위에 나온 상황 같은 독소전쟁 초기에는 우라돌격보다는 참호, 대전차포 등을 사용한 방어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쟁 중반이 되어 가면서 제대로 된 우라돌격 교리가 완성되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군이 반자이 어택 수준의 돌격을 한 것은 정치장교의 선동으로 인한 것이 주류였고 그 이외 상황에서는 진지에서 죽거나 도망칠지언정 반자이 어택 수준의 막장까지는 가지 않았다.[30] 투하쳅스키의 경우는 실제로 반(反) 스탈린 음모를 꾸몄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투하쳅스키와 스탈린은 러시아 내전 당시 사령관-정치장교의 관계 때문에 이후에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으며 투하쳅스키가 러시아 제국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산당 내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인물이었다.[31] 예고로프는 1939년 2월 22일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재판 직후 즉결 처형당한 투하쳅스키에 비하면 낫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 기간에 당연히 극심한 고문이 있었으리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하여간 옥사로 끝난 것으로 보아 투하쳅스키보다는 죄가 덜하다고 판단되었던 모양. 참고로 투하쳅스키는 1937년 8월에 처형당했다.[32] 보로실로프는 스탈린과 굉장히 친해서 그와 접시를 던지며 싸웠다고도 하고 같이 뱃놀이를 갔는데 스탈린이 농담으로 "너 영국 스파이지?" 하니까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뺨을 때렸다고도 한다. 추가로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들이 접시 싸움을 하는 걸 구경했다고 한다. 물론 보로실로프는 사적으로는 스탈린과 대거리를 하며 맞먹을지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충실하게 스탈린의 발 밑에서 앞잡이 노릇을 했다.[33] 영어로 Major라고 쓰니 소령으로 번역하는 게 맞지만 당시 소련군의 계급 분류에 따르면 대위부터가 영관급을 가리키는 선임장교에 속했고 Major는 대령의 바로 아래 계급에 해당했다. 소련군에 중령 계급이 분화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3년이다.[34] 당시 소련 장성 계급은 지휘 가능한 부대 수준으로 표기되어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 야전군 사령관(2급 군사령관, 대장급), 전선군 사령관(1급 군사령관, 원수급)으로 구분되었다.[35] Ich hätte gut daran getan, vor Jahren alles hören offiziere liquidieren zu lassen, Wie Joseph Stalin!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영화 몰락에서 나온다.[36] 몇몇 장군은 1차대전식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긴 했지만, 대부분 다른 나라들보단 훨씬 혁신적인 교리 연구 및 이해에 충실했고 유능했다.[37] 모스크바 재판의 수석검찰관.[38] 17차 전당대회 이후 5년 뒤 열린 제18차 전당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37명 밖에 없었다.[39] 경우에 따라서는 4000만까지도 간다.[40] 물론 그 염려라는 게 진짜 트로츠키를 염려한 것인지, 자신들의 후견인이니 지도자가 실각하면 자신들도 피해를 볼 것을 염려한 것인지야 알 수 없지만... 트로츠키가 저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볼 때 자발적으로 제안했다는 것은 맞다.[41] 물론 코민테른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소련이었으니 스탈린을 '일개'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으로 보는 것은 다소 반박의 여지가 있긴 하다.[42] 정확히 따진다면 이후 트로츠키가 대거 영입한 구 제국군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투하쳅스키는 미리 제 발로 입대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제국군 출신자를 군대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레닌이나 다른 혁명가들의 주장에 트로츠키가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43] 참고로 수정주의는 전통주의와 달리 개인이 아니라 다른 기타 요인에 초점을 둔다.[44] 러시아어에서 숙청을 뜻하는 Chistka(Чистка)는 정기적으로 질이 안 좋은 당원을 솎아내는 개념에 가깝다. 청소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만큼 단순 자격 박탈 혹은 일시 정지부터 심하게는 처형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형태로 이뤄졌다. 특히 폴란드나 독일 등지에 당원증을 팔아 넘기는 행위는 비단 소련뿐 아니라 비공산권 국가에서도 얄짤없이 사형까지 갈 수 있었던 간첩 행위다.[45] 1929년 숙청 당시 출당 대상자들의 37%가 과음이 사유였다. 그러니까 '러시아 기준'으로도 과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소련-러시아의 술 소비량은 많았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목표였던 당시 소련 입장에선 자기 통제 없이 술에 취해서 일을 그르치던 지역당원들의 모습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46] 공교롭게도 자원 없는 곳에 세워진 이 공장들은 독소전쟁 때 쏠쏠하게 쓰인다.[47] 이는 기존 사회의 모든 것들을 깨부수는 혁명의 특성으로 인해 가진 것 많은 상류층과 적어도 본인과 가족들 먹여살릴 재산은 나름대로 존재하는 중산층&서민층은 자기들이 가진 것들이 다 날아갈 위험 때문에 기존 체제에 충성하면서 반혁명적 태도를 보이는 반면 하류층 이하에 속한 사람들이나 범죄자, 어중이떠중이들은 어차피 재산이나 명성, 신뢰와 같은 유무형의 자산을 매우 적게 쌓았거나 아예 안 쌓은 경우가 부지기수인라 잃을 게 없다는 심정으로 혁명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당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상부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자신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하급자들에게 보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과거가 구린 이들도 혁명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권력을 받으면서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48] 실제로 소련 건국 초기를 다룬 풍자성 농담 가운데 하나가 어느 지역의 지방당에서 개최한 10월 혁명을 기념 집회에서 지방당 총비서가 연설했던 내용 가운데 혁명 전에는 가난한데다 문맹이긴 했어도 평범한 사람이었던 마리아와 이반 안드레예프는 혁명 이후 빈민층에서 벗어나 서민층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그쳤지만 성격과 행실이 나쁜 건달 트로핌 세메노비치 알렉세예프는 혁명 이후 군당비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일이 소련의 지방당에서 비일비재했던 것이다.[49] 공식적으로 스탈린은 당시 1,059표 중에서 3표의 반대표를 받았다.[50] 사실 뭐 엄청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검사, 점검 정도의 뜻이다.[51] 사실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다. 5개년 계획으로 다들 맡아야 했던 업무의 양이 엄청 무거웠던 건 분명한 사실. 게다가 이때 중앙당에서는 생산량을 맞추라고 맨날 닦달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사라토프와 같은 지역에서는 아예 제대로 하지도 않고 금방 끝내고 치워버렸으며 후에 즈다노프는 이를 보고 매우 어이없어했다.[52] 이는 간부가 결정권을 독점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이제 산업화 열심히 해서 최신 기술 많이 들여놨는데 기술을 쓰는 간부들의 상태가 노답이다. 그러니 이제 간부의 숙련도가 소련이라는 국가를 다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였다. 규율을 철통같이 강조해야 할 사관학교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스탈린이 이 말을 한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낸다.[53] 소련 장관회의의 전신.[54]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오르조니키제의 장례식이다. 이 날 얄궂게도 몰로토프가 장례식 연설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엔 오르조니키제를 엄청 칭찬하다가 그가 퍄타코프와 같은 불순분자를 중용한 건 매우 큰 실수였다고 디스했다. 오죽 서로 안 좋았으면 장례식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겠는가. 여담으로 오르조니키제가 죽기 직전 중공업인민위원회는 몇 개의 소위원회로 차츰 분리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오르조니키제가 죽자 완전히 공중분해되어버린다.[55] 애초에 필랴르가 폴란드 귀족 출신이었던데다가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기 전에 멘셰비키에 몸담은 이력이 있었던 것 때문에 숙청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라고 현재 생각된다. 1937년 5월 16일에 체포된 필랴르는 4개월도 채 되지 않은 9월 2일에 반역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즉시 총살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스탈린 사후인 1957년에 복권되었다.[56] 이를테면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당 제1서기인 카바코프는 숙청 당시 NKVD가 진행한 심문에서 "지역 NKVD 대표 레셰토프가 교체되고 새로운 대표인 드미트리예프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소. 우리 발 밑의 땅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나는 곧바로 나와 나의 동료들의 일들이 밝혀지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소"라고 털어놓았다.[57] 이를테면 벨로루시 군관구 장인 예로님 우보레비치는 스몰렌스크가 수도인 자파드나야 주의 당회의에 참여하였다.[58] 재밌는 건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출신, 베리야도 그루지야 출신, 미코얀도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강제로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 셈[59] 다만 이 문단에서 상당부분 참고한 '대숙청의 기원'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기 이전에 쓰여진 80년대 말의 책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은 관련한 연구의 진척도가 상당히 높을 것이다.[60] 스탈린 본인의 성격이 모든 것을 통제 하에 두고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 사람이었다. 모든 관료제가 예좁시나로 파괴되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61] 아마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에서 최초로 목이 날아간 사람이 라브렌티 베리야인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이다. "야, 그래도 우리들끼리는 같이 스탈린 밑에서 개고생했으니 죽이지는 않겠는데, 쟤는 안 될 것 같지 않냐?"하는 심리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흐루쇼프의 승리 이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말렌코프는 한직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나름 천수를 누렸는데, 베리야는 짤없이 죽었다.[62] 인민위원 회의. 즉 훗날의 장관회의에 해당하는 내각이다. 따라서 그 의장은 수상이다.[63] 리코프는 부하린파의 일원으로 예조프가 그의 숙청을 담당했다.[64] 아닌게 아니라 레닌이 세운 민주집중제의 원칙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절대복종하는 철저한 규율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조프식 막나가는 패악질은 공산당 기율 체계에서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패악이었고 이러한 행태는 스탈린 시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선군시대 북한에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막장 행각이었다.[65] 부수상까지 올랐다.[66] 혁명가로써의 입지가 워낙에 거대했기에 수감만 시켰지만, 독소전쟁 발발 후 죄수들을 이송할 수 없었던 NKVD가 스탈린의 승인 하에 결국 사형을 집행하였다.[67] 흐르지자놉스키는 레닌과 같은 세대의 최원로, 최고참 혁명가 중 한명이었다. 흐르지자놉스키, 마르토프, 레닌 등이 1895년 만든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은 러시아 두번째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이었다.[68] 가벼운 처벌부터 출당과 때로는 투옥, 이어서 사형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징계[69] 리투아니아계였으며, 리투아니아식 이름은 예로니마스 우보레비추스(Jeronimas Uborevičius)였다.[70] 그리고 알다시피 이런 행위는 공산권이 아닌 민주주의 자유진영에서도 숙청감이다.[71] 당시 폴란드 전선은 크게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서부전선군과 예고로프가 지휘하는 남서전선군으로 나뉘었는데,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중간에 자리잡은 거대한 프리피야트 늪지 때문에 두 전선군 간의 연결이 약해진 상태에서 각자 폴란드 영내로 진공했다가 서부전선군은 바르샤바 전투에서 박살이 나버렸고, 남서전선군은 르비우를 두들기다가 서부전선군이 파멸한 직후 마찬가지로 박살이 나버렸다.[72] 막상 예조프도 스탈린과 베리야의 음모로 누명을 쓰고 숙청되었고, 베리야도 스탈린 사후 숙청되었다.[73] 여담으로 보도연맹 학살 사건 당시 이승만 정부의 논리가 이것과 소름끼치게 똑같았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걸 잘 보여주는 예시.[74] 몰로토프 말에 의하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은 적국 첩보기관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투하쳅스키는 1937년 6월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고 한다.[75] 주 소련 미국 대사. 부임중 부하린 반역 재판을 보고 딸에게 남긴 편지 중. 그는 재판과정 전부를 지켜본 인물이다.[76] 대숙청의 원인에 전통주의 시각과 수정주의 시각의 결합을 시도한 서적이다.[77] 스웨덴의 사회활동가 마리오 소사가 쓴 책이다. 다소 감정적인 부분도 있고, 전문 연구서적은 아니기는 하나, 국내에 나온 책들 중에서 대숙청의 수정주의적 연구를 반영한 책은 이 책과 쉴라피츠패트릭 외에는 찾기 힘들다. 다만 마리오 소사는 스탈린주의적인 입장에서 책을 서술했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학계의 수정주의적 입장이라 보기는 힘들며, 논조에 있어서도 쉴라 피츠패트릭과 큰 차이를 보인다. 다만, 책에 아치게티를 포함한 수정주의적 연구 흐름을 반영했다. 대숙청 관련한 부분은 번역본 제2장에 있다.[78] 당시 주 모스크바 미국 대사로 부임하고 있던 조셉 데이비스가 쓴 책, 부하린 반역 재판 모두를 현장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