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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대의 국내외 대중음악을 다루는 문서.2. 국내
자세한 내용은 대중음악/1990년대/국내 문서 참고하십시오.한국 대중음악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아이돌과 힙합이 한국 음악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한국 가요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는 누가 뭐라 해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활동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1992년 난 알아요를 통해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기성세대 대신 X세대와 같은 당대 신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음악 속에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았던 탓에 검열을 당하기도 했으나 극복해내고 검열 철폐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96년 초 창작의 어려움을 이유로 활동을 중단했지만, 한국 아이돌과 K-POP의 탄생에 큰 기여를 했다. 같은 해 SM엔터테인먼트에서 1세대 보이그룹인 H.O.T.를 데뷔시킨 것을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의 아이돌이 데뷔하며 1세대 아이돌(1996~2002)의 시대가 열렸다.
당시 아이돌 기획사는 SM과 대성기획(現 DSP미디어)의 양강 구조였고, 가수 박진영이 JYP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하고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 양현석이 YG엔터테인먼트를 창립했다.
솔로 가수 중에서는 김건모와 박진영 등이 큰 인기를 끌었고 듀스 등의 힙합 그룹도 나타났다.
3. 해외
무너진 흑백장벽과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가속화된 장르화와 계속된 크로스오버가 더욱 강해지며, 1990년대는 대중음악의 황금기를 맞이한다.3.1. 역사
특히 1990년대에는 '세계 3대 디바'로 불리는 대형 여가수를 필두로 여성 아티스트들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는 머라이어 캐리,[1] 자넷 잭슨,[2] 가스 브룩스,[3] 보이즈 투 멘,[4] 셀린 디옹,[5] 마돈나,[6] TLC,[7] 휘트니 휴스턴,[8] 마이클 볼튼,[9] 토니 브랙스턴,[10] 마이클 잭슨,[11] 너바나[12] 등이 있다. 빌보드 선정 19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는[13] 1위 머라이어 캐리, 2위 자넷 잭슨, 3위 가스 브룩스, 4위 보이즈 투 멘, 5위 셀린 디온, 6위 마돈나, 7위 TLC, 8위 휘트니 휴스턴, 9위 마이클 볼튼, 10위 토니 브랙스턴이었다.[14]1980년대를 이어서 U2, 메탈리카, 건즈 앤 로지스, 본 조비, 에어로스미스 등이 인기를 끌었으며, 또한 기존의 록 음악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 헤비 메탈이 저물고, 너바나를 필두로 얼터너티브 록이 새롭게 부상하며 대중음악계에 충격을 몰고 온다. 이로 인해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부상과, 기존의 메탈계에서도 변화가 왔는데, 글램 메탈이 저물고 새로이 뉴 메탈, 얼터너티브 메탈 등이 떠오르고, 기존의 메탈 밴드들과는 다른 얼터너티브 록을 주류로 하는 록 밴드들이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사운드가든, 스톤 템플 파일럿츠 등이 그렇다. 이전부터 활동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도 전성기를 보낸다.
너바나로 시작된 그런지 열풍은 포스트 그런지를 낳았으며, 후바스탱크, 니켈백, 푸 파이터스 등이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 너바나, 펄 잼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록/그런지에 대항하여 언론들이 60, 70, 80년대를 바탕으로 한 소위 영국색 짙은 음악들을 띄워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브릿팝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 브릿팝은 오아시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버브 등이 이끌었다. 또한, 침체기에 머물고 있던 펑크 록 계열도 얼터너티브 록으로 인하여 네오 펑크(팝 펑크)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대표적으로 그린 데이가 있다. 네오 펑크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수많은 빅스타들을 등장시킨다.
소프트 록에서도 또한 1990년대 초반기에 큰 히트작들을 몰고 왔는데, 미스터 빅, 제네시스, 익스트림, 에릭 클랩튼 등의 곡들이 그랬다.
이외에도 정말 수많은 가수들이 90년대 중후반에 메인스트림에 등장하였는데,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NSYNC, 스파이스 걸스, 백스트리트 보이즈, 98 Degrees 등의 10대 취향의 가사와 댄스를 내세운 틴 팝 아티스트들, 브랜디, 모니카, 알리야, 몬텔 조던, 어셔 등의 신생 R&B 가수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힙합 음악 분야에서도 훗날 레전드로 등극하는 에미넴과 JAY-Z, 스눕 독, 로린 힐 등이 등장하였다. 알리야와 브랜디는 1994년부터, 모니카와 몬텔 조던은 1995년부터 전성기를 누렸고, 틴 팝 아티스트 중 대부분과 어셔는 1990년대 후반부터[15] 전성기를 맞아 이 중 몇몇은 2000년대 초반이나[16] 중반까지[17] 큰 인기를 끌었으며, 몇몇은 2010년대까지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롱런하기도 했다.[18]
장르로는 1980년대 중후반에 전성기가 시작된 컨템퍼러리 R&B가[19] 1990년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를 기점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 앨범 "Mariah Carey"는 1990년 6월 12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11주 연속 1위,[20] 1990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2위, 1991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앨범은 1991년 9월 13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21] 1994년 9월 27일까지 8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22]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첫 싱글 "Vision of Love"는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23]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6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Love Takes Time"는 핫 100 3주 연속 1위,[24]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6위,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9위, 세번째 싱글 "Someday"는 핫 100 2주 연속 1위,[25]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3위, 네번째 싱글 "I Don't Wanna Cry"는 핫 100 2주 연속 1위,[26]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6위를 기록했다.
80년대 중후반부터 대중화가 되어가던 힙합은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 완전히 음악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황금기를 맞게 된다. 1990년 MC 해머가 발매한 Please Hammer Don't Hurt 'Em이 전 세계적으로 1,870만 장 팔리면서 힙합의 시대를 알렸고 뒤이어 바닐라 아이스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 2월 12일에 발매된 MC 해머의 3집 앨범 Please Hammer Don't Hurt 'Em은 빌보드 200에서 21주 비연속 1위,[27] 1990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 1991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7위를 기록했고 1991년 4월 15일까지 미국에서 1,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28] 앨범의 세번째 싱글 "U Can't Touch This"는 빌보드 핫 100에서 8위,[29][30]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5위를 기록했고 네번째 싱글 "Have You Seen Her"는 핫 100에서 4위,[31]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7위를, 다섯번째 싱글 "Pray"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2위를 기록했다.[32]
뉴 에디션의 멤버 리키 벨, 마이클 비빈스, 로니 디보는 1989년에 벨 비브 디보(Bell Biv DeVoe)를 결성했는데 이들의 싱글 "Poison", "Do Me!"가 1990년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 두 곡이 수록된 이들의 데뷔 앨범 "Poison"은 1990년 3월 20일에 발매되어 1990년 12월 18일까지 미국에서 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전 시대에 인지도를 올려온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1991년 발매한 앨범 Blood Sugar Sex Magik으로 크게 성공한다. 해당 앨범의 트랙 Under the Bridge은 얼터너티브 록 역사상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가장 성공한 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해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도 8위라는 성적을 거둔다.[33]
이 시기에 소프트 록도 빅 히트를 한다. 당시 최고의 세션맨들로 구성된 슈퍼 밴드였던 미스터 빅의 2집 "Lean into It"에서 마지막 트랙, To Be with You가 큰 성공을 거둔다. 빌보드 핫 100에서 1위,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2위를 거두었다. 그리고 앞서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도 크게 성공하며,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위에 올랐었다. 이 곡은 빌보드 핫 100 올타임 차트/1958년-2018년에 296위에 올라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에릭 클랩튼의 Tears in Heaven도 1991년에 발매됐다. 에릭 클랩튼의 네 살 난 아들 코너 클랩튼의 죽음에 대해 쓴 곡이다. 1991년 3월 20일, 코너 클랩튼은 맨해튼에 있는 아파트 침실에 열린 창문 사이로 떨어져서 추락사했는데, 무려 53층의 높이였다. 그리고, 에릭 클랩튼과 친하게 지낸 스티비 레이 본이 1990년 8월 27일,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죽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헬리콥터를 원래 에릭 클랩튼이 타려고 하다가 양보한 것을 타고 가던 길에 죽은 거였다. 에릭은 스티비의 명복을 빌며 이 노래를 작사, 작곡을 준비했는데 어린 아들이 저런 참사를 당하여 더더욱 노래가 애절하게 되었다.
해당 곡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2위,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6위에 올랐다. 그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영국 싱글 차트에서 5위에 올랐으며 전 세계 20개 이상의 국가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그래미에서는 최고의 남성 팝 보컬,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를 차지하였다.
마이클 잭슨의 8집 앨범 "Dangerous"는 1991년 11월 26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1위,[34] 1992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위,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8위를 기록했고 1992년 1월 21일까지 미국에서 400만 장,[35] 1994년 9월 29일까지 600만 장,[36] 2000년 5월 30일까지 7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37]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앨범의 첫 싱글 "Black or White"는 빌보드 핫 100에서 7주 연속 1위,[38]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4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Remember the Time"은 핫 100 4주 비연속 3위,[39]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9위, 세번째 싱글 "In the Closet"은 핫 100 6위,[40]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6위, 네번째 싱글 "Jam"은 핫 100 26위, 다섯번째 싱글 "Who Is It"은 핫 100 14위, 여섯번째 싱글 "Heal the World"는 핫 100 27위, 여덟번째 싱글 "Will You Be There"는 핫 100 3주 비연속 7위,[41]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7위를 기록했다.
한편, 너바나는 마지막 록의 아이콘이자, 시대의 아이콘 중 하나를 가진 밴드라 평가된다. 너바나는 상업성과 매너리즘에 찌든 당시 록 씬을 60년대의 순수성으로 초기화시킨 밴드이자, 모든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은인으로 꼽히며, 너바나는 당시 매너리즘에 찌들어 위기에 처해있던 록 씬을 개혁하고 록 음악의 수명을 훨씬 연장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당대 록 음악의 가장 큰 문제는 주류 장르였던 헤비 메탈, 특히 글램 메탈 같은 장르가 제대로 음악적 변혁을 이루지 못하고 너무 오래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42]
그리고 1980년대에 잉베이 말름스틴의 등장 이후 헤비 메탈씬에서는 클래식의 작법이 거의 완전하게 메인스트림에도 녹아들고, 그 영향을 받은 하위 장르들인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스케일이 다른 록 사운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등장한 고민이 갈수록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록 음악에 대한 문제였다. 더이상 1960~70년대 개러지 록 시대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서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점점 고도의 테크닉과 정확도, 조화에 신경쓰다보니 마치 현대의 클래식 음악처럼 점점 '록 음악은 하는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당시 정체에 힘입어 록의 대항마들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가장 급부상한 장르는 다름아닌 힙합으로, 이 신생 장르는 흑인들의 거리 음악으로 시작해 록 음악의 영역이었던 공격적인 사운드와 록의 정신이라고 일컫는 '자유', '저항', '퇴폐' 같은 시대정신의 대변이라는 장점을 빼앗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록 위기론은 슬슬 정설이 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글램 메탈 밴드들이 점차 추락하기 시작하고, 고유의 음악색을 유지하며 호평을 받던 메탈리카와 퀸스라이크 같은 메탈 밴드들이 기존작에 비해 훨신 대중적으로 타협한 작품 Metallica와 Empire를 발매했다. 이는 밴드에게 전에 없던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 주지만 메탈 팬들에게는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점차 시대가 바뀌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 9월 24일, Nevermind가 발매되었다.[43] 세계를 바꾼 신호탄이었다.
처음에는 인디 음반다운 지극히 미미하게 시작됐으나, 시간이 지나며 사태는 점차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 앨범과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단일곡 중 하나인 리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44]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큰 신드롬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약 4개월간의 역주행 끝에 1992년 1월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이어 빌보드 200 2주 비연속 1위를 차지한다.[45] Nevermind의 총 판매량은 미국에서 1,000만 장,[46] 전 세계적으로 약 3,000만 장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 사건은 시대를 바꾸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불리는 Nevermind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수많은 밴드들이 너바나를 이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대중들은 이 새로운 록 밴드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록 음악의 쇠퇴설"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국에서는 훗날 너바나와 함께 90년대 최고의 록 밴드로 기록될 라디오헤드가 시애틀 그런지의 영향을 받아 데뷔 앨범 Pablo Honey를 발표했으며, NME 등 영국 인디씬은 그런지 열풍에 대항해 국가 단위로 블러, 오아시스 등의 브릿팝을 육성해냈으며 펑크 록이 네오 펑크로 부활했고 그런지의 큰 인기는 포스트 그런지가 이어갔다. 순식간에 수많은 록 음악의 하위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메탈 역시 이에 반응해 시대에 밀려난 기존 메탈을 대신할 얼터너티브 메탈, 뉴 메탈과 같은 하위 장르들이 탄생해서 인기를 끌었으며 이에 맞서는 기존 메탈 층에서는 데스 메탈, 블랙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들 기존 메탈 장르는 뛰어난 음악적 성과를 얻기는 했으나 대중적인 지지는 얻지 못하고 과거의 예측대로 듣는 사람만 듣는 매니악한 장르로 남았다.
얼터너티브 록은 '얼터너티브'라는 모호한 용어 아래에서 기존의 관습적인 록 장르를 거부하고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여 새로운 음악의 흐름을 창출해냈으며, 여기에 더해 대중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음악적, 상업적으로 다시금 록 음악을 도약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얼터너티브 록 혁명은 다른 장르에도 영향을 끼쳐, 주류 팝 시장은 잠깐 주춤하며 인디 음악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되었고, 일렉트로닉 음악은 이들의 실험을 받아들여 또다시 변화했으며, 힙합은 JAY-Z가 언급했듯이 얼터너티브 록의 전성기로 인해 성장을 멈추고 '잠시' 기다려야 했다. 너바나로 인해서 얼터너티브 음악이라는 형태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너바나가 Nevermind를 발매한 해에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도 loveless라는 걸작을 발매한다. 슈게이징이라는 장르를 상징하는 명반이자, 포스트 록의 시발점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피치포크 미디어의 경우에는 이 앨범을 90년대 최고의 앨범 1위에 올리기도 하는 등 앨범이 나올 당시보다 현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앨범이다. 아방가르드 록의 Pet Sounds라는 평을 받았다.
휘트니 휴스턴과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은 영화 보디가드의 사운드트랙 앨범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은 휘트니 휴스턴과[47] Various Artists가[48] 맡은 앨범이다. 1992년 11월 17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20주 비연속 1위,[49]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 199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7위, 빌보드 2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고 1993년 11월 3일까지 미국에서 1,000만 장,[50] 1995년 7월 31일까지 1,500만 장,[51] 1999년 11월 1일까지 1,700만 장이 팔렸다.[52] 앨범의 첫 싱글인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는 빌보드 핫 100에서 14주 연속 1위,[53]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세번째 싱글로 발매된 휘트니의 "I'm Every Woman"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4위,[54]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9위, 네번째 싱글로 발매된 휘트니의 "I Have Nothing"은 핫 100에서 5주 연속 4위,[55]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0위를 기록했다.
MC 해머와 바닐라 아이스는 대중성 짙은 랩 장르인 팝 랩 아티스트였는데 이 흐름은 1992년 12월 15일에 발매된 닥터 드레의 The Chronic으로 인해 완전히 깨진다.
더 크로닉의 성공으로 팝 랩은 침체되었고 G-funk 장르의 웨스트 코스트 갱스터 랩이 힙합 씬의 주류가 되었다. 서부 힙합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투팍 샤커, 스눕 독, 워렌 G, 네이트 독, 아이스 큐브, 이지 이, 닥터 드레가 이 흐름을 이끌었다.
특히 1993년 11월 23일에 발매된 닥터 드레가 프로듀싱한 스눕 독의 데뷔 앨범 Doggystyle은 빌보드 200에서 3주 비연속 1위[56]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위를 기록했고 1994년 1월 11일까지 미국에서 300만 장,[57] 1994년 5월 31일까지 400만 장,[58] 총 700만 장, 전 세계적으로 1,100만 장이 판매되며 서부 힙합 전성기를 대표한다.
한편으로 힙합의 본고장인 뉴욕에서도 주권을 되찾고 있었는데 1993년 발매된 우탱 클랜의 데뷔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를 시작으로 1994년 나스의 데뷔 앨범 Illmatic과 The Notorious B.I.G.의 데뷔 앨범 Ready to Die, 1996년 JAY-Z의 데뷔 앨범 Reasonable Doubt과 버스타 라임스의 데뷔 앨범 The Coming 등이 발매되며 동부 힙합 역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1993년 5월 18일에 발매된 자넷 잭슨의 5집 앨범 "janet."은 빌보드 200에서 6주 연속 1위,[59]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4위, 199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8위, 199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70위를 기록하고 1993년 12월 17일까지 미국에서 500만 장,[60] 1994년 4월 12일까지 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61]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앨범의 첫 싱글 "That's the Way Love Goes"는 빌보드 핫 100에서 8주 연속 1위,[62]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If"는 핫 100 2주 연속 4위,[63][64]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9위, 세번째 싱글 "Again"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65]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4위,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2위를, 네번째 싱글 "Because of Love"는 핫 100 10위,[66][67]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8위, 다섯번째 싱글 "Any Time, Any Place"는 핫 100 2위,[68][69]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0위, 일곱번째 싱글 "You Want This"는 핫 100 8위,[70][71]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4위를 기록했다.
머라이어 캐리의 3집 앨범 "Music Box"는 1993년 8월 31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8주 비연속 1위,[72]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40위, 199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위, 199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24위를 기록하고 1994년 6월 29일까지 미국에서 700만 장,[73] 1995년 1월 19일까지 800만 장,[74] 1997년 11월 5일까지 1,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75] 앨범의 첫 싱글 "Dreamlover"는 빌보드 핫 100에서 8주 연속 1위,[76]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8위, 두번째 싱글 "Hero"는 핫 100 4주 연속 1위,[77]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위, 세번째 싱글 "Without You"는 핫 100에서 3위,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6위, 네번째 싱글 "Anytime You Need a Friend"는 핫 100 12위,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7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그린 데이의 2번째 정규 앨범 《Kerplunk》가 미국에서만 5만 장이 팔리며 언더그라운드 등지에서 히트를 치자, 메이저 레코드 회사들은 그린 데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4년 그린 데이는 메이저 레코드 회사들 중 'Reprise Records'와 계약을 맺게 된다.
3주 간의 레코딩 작업 이후 1994년 2월 1일, 그들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이자 메이저 레이블 데뷔 앨범 《Dookie》가 발매된다. 이 앨범으로 그린 데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데, 미국 내 1190만 장 이상 판매, 앨범 발매 5년만에 RIAA 인증 Diamond, 전 세계 2,500만 장 이상 판매를 한다. 이렇게 대성공을 거두며 그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수록곡 Basket Case는 팝 펑크(네오 펑크) 대표작 중 하나로, 현재 세계적으로 10억회 이상 스트리밍된 곡 중 하나이다.
컨템퍼러리 R&B와 힙합 음악의 결합이라는 장르적 실험은 90년대 초부터 TLC, 메리 제이 블라이즈를 통해 서서히 시도되다가 90년대 중반에는 퍼프 대디의 음반사 배드 보이 레코드와 머라이어 캐리, SWV, Xscape, 브랜디, 모니카, 몬텔 조던에 의해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90년대 말이 되면 이는 대중음악계의 보편적인 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1994년 11월 15일에 발매된 TLC의 2집 앨범 CrazySexyCool은 빌보드 200에서 3위, 199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 199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2위를 기록했고 1996년 6월 26일까지 미국에서 1,000만 장,[78] 1999년 7월 2일까지 1,100만 장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79] 앨범의 첫 싱글 "Creep"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80]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 두번째 싱글 "Red Light Special"은 핫 100 3주 연속 2위,[81]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8위, 세번째 싱글 "Waterfalls"는 핫 100 7주 연속 1위,[82]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위, 네번째 싱글 "Diggin' on You"는 핫 100 3주 연속 5위,[83] 199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5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미국이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열풍으로 들썩이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로 록의 재구성이 일어났다. 이러한 90년대 영국 록의 주류를 브릿팝이라고 부른다. 브릿팝은 미국의 그런지와 마찬가지로 얼터너티브 록으로 분류되기는 한다. 그러나 묘하게 유행한 시기만 같았을 뿐, 영국의 브릿팝 열풍은 미국의 그런지와 거의 개별적으로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90년대 초 미국의 그런지 열풍이 휩쓸었을 때에, 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브릿팝이라는 음악이 유행했다. 이 음악은 60~70년대의 비틀즈와 킹크스를 비롯한 록 음악과, 파워 팝 같은 기타 팝 음악을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가까이는 80년대 영국 인디 밴드인 더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장르적 특징으로는 기타와 멜로디 중심의 편곡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오아시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네 밴드가 브릿팝의 대표 주자로 뽑힌다. 브릿팝은 90년대 초 유행하던 미국의 록 음악의 대항마로서 영국 매스미디어의 의해 발굴되어 큰 푸쉬를 받았으며, 브릿팝 전쟁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낳았다.
오아시스는 1994년에 Definitely Maybe를 발매한다. 전 세계적으로 1,500만장이 팔렸으며, 이 앨범은 매드체스터의 영향이 아주 강하게 반영된 음반이다. 사운드적으로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 강하여, 보통 인디 록, 펑크 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슈게이징의 영향이 느껴지는 노이지한 기타 사운드 또한 이후 앨범들과 구분되는 특징.
'Supersonic', 'Shakermaker', 'Live Forever' 등의 싱글이 연달아 흥행한 다음 이 앨범이 발매되었는데, 1994년 발매 당시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데뷔앨범이라는 기록을 얻었으며, 후에 이 기록은 만 18살에 데뷔한 괴물 신인 악틱 몽키즈의 2006년 데뷔 앨범 Whatever People Say I Am, That's What I'm Not에 의해 깨지게 된다. 그리고 1994년, 같은 해에 블러가 발매한 Parklife은 대중들과 평론가 모두를 사로잡으며 블러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1995년에는 오아시스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84][85]라는 명반을 발매하며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Don't Look Back In Anger, Wonderwall 등이 수록된 앨범이다. 특히 Wonderwall은 영국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영국에서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Spotify에서 90년대 곡들 중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된 곡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20세기 곡들 중 2번째로 많이 스트리밍 된 곡이다.[86] 20세기에 가장 많이 재생된 곡 1위는 영국의 록 밴드 퀸의 Bohemian Rhapsody이다.
동일 1995년에, 펄프는 Common People를 발매한다. 서민들처럼 되고 싶어하지만 서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잣집 소녀를 서민인 화자가 신랄하게 디스하는 곡이다. 이 곡은 코커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학교[87]에서 영화 공부할 때 만났던 조각 전공 여학생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코커 본인 말로는 별일 없었고 단지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런던 이스트엔드[88]에서 살고 싶다."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NME 선정 90년대 최고의 곡 1위, 피치포크 미디어 에서 뽑은 90년대 명곡 순위에서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브릿팝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1996년에는 스웨이드의 Beautiful Ones, 그리고 1997에는 버브의 명곡 Bitter Sweet Symphony가 발매된다. Bitter Sweet Symphony는 곡 내내 반복되는 아름다운 현악기 반주와 씁쓸한 가사가 인상적인 곡으로 발매 이후 각종 매체에서 매우 호평하였다. 펄프의 Common People, 오아시스의 Wonderwall 등과 함께 브릿팝[89]을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오아시스와 블러, 이 두 밴드의 관계는 브릿팝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크게 대립했다. 그러던 중 발매된 오아시스의 3집 Be Here Now는 상업적인 면에서는 크게 성공했지만, 오아시스 찬양 일색이던 언론들 마저도 혹평할 정도였고, 블러 또한 브릿팝 전쟁에 지친 나머지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미국 음악으로 눈을 돌리면서 짧지만 찬란했던 브릿팝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96년 6월 18일에 발매된 토니 브랙스턴의 2집 앨범 "Secrets"는 빌보드 200에서 2위, 199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3위, 199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9위를 기록했고 미국에서 1997년 4월 16일까지 500만 장,[90] 2000년 10월 3일까지 8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91]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앨범의 첫 싱글 "You're Makin' Me High"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92] 199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위,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8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Un-Break My Heart"는 핫 100에서 11주 연속 1위,[93] 199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81위,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위, 빌보드 핫 1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서 4위를, 세번째 싱글 "I Don't Want To"는 핫 100 2주 연속 19위,[94]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9위를 기록했다.
서부의 투팍, 동부의 비기가 사망한 후 미국 힙합씬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는데, 퍼프 대디로 대표되는 동부의 팝 랩, 마스터 P의 노리밋 사단으로 대표되는 남부 힙합이었다. 이 둘을 통해 대중음악계에서 힙합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고, 이는 00년대 초중반의 힙합 최전성기로 이어진다.
퍼프 대디의 데뷔 앨범 "No Way Out"은 1997년 7월 22일에 발매되어 199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0위, 1998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3위를 기록했고 1997년 12월 19일까지 미국에서 400만 장,[95] 1998년 12월 21일까지 600만 장,[96] 2000년 9월 7일까지 7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97]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다. 첫 싱글 "Can't Nobody Hold Me Down"은 빌보드 핫 100 6주 연속 1위,[98]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위, 두번째 싱글 "I'll Be Missing You[99]핫 100에서 11주 연속 1위,[100]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 빌보드 핫 1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서 10위를, 세번째 싱글 "Been Around the World"는 핫 100 2주 연속 2위,[101] 199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9위, 네번째 싱글 "Victory"는 핫 100 19위,[102] 199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8위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Californication를 발매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1,5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은, 멤버들의 결혼, 그리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점에서 이전 앨범보다 성숙한 음악세계를 보여주었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286위에 랭크되었다. 라우드니스 워 논란의 시발점이 된 앨범이다. 정말 뛰어난 앨범이지만 음량이 지나치게 크다는 비판이 있다. 수록된 모든 곡에서 소리의 뭉개짐과 클리핑이 발생했고, 비전문가의 귀로도 명백하게 음량이 과하게 높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니켈백도 같은 해에 그들의 2집 앨범, "The State"가 큰 흥행을 몰고온다. 그들의 이름을 메인스트림에 올라오게 해준 앨범으로, 다음 해에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앨범의 초석이 된다.
1998년에는 셰어의 히트 싱글 "Believe"가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발매 이후 이 노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 또한 셰어는 52세의 나이로 차트 정상에 올라 빌보드 핫 100 역사상 여성 최연장자 1위 기록을 갱신했다. 이 노래는 199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선 1위, 빌보드 핫 1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선 31위를 기록했다.
커지고 커지던 음악 시장은 1999년에 절정을 맞았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해이다.
3.2. 199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9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 90년대를 주름잡던 세계 3대 디바 중 한 명으로, 1990년대를 상징하는 여가수로서 여러 매체와 시상식에서 디케이드 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 최고의 가수임을 인정받았다. 93년 《Music Box》발매 이후부터, 96년 《Daydream》활동 시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90년대 중반을 휩쓸었다. 이외에도 91년 《Mariah Carey》앨범, 94년 《Merry Christmas》앨범, 97-98년 《Butterfly》앨범 등 90년대 전반에 걸쳐 꾸준히 히트작을 만들어내었고 이 10년 동안 15개의 빌보드 1위 곡을 배출해내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1위였다.[2] 90년《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앨범 시기부터 93년《janet.》활동 시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앨범의 7개 싱글이 모두 빌보드 Top 5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97-98년《The Velvet Rope》앨범 등으로 90년대 전반에 걸쳐 인기를 누렸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2위였다.[3]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3위였다.[4] 92년 "End of the Road" 활동 시기부터 96년 "One Sweet Day" 활동 시기까지 싱글들 위주로 90년대 초중반 큰 인기를 끌었다. 단 5개의 곡으로 빌보드 1위 총합 50주를 달성했다. 이외에도 91년 《Cooleyhighharmony》앨범 등으로 인기를 누렸다. 90년대 가장 인기있었던 R&B 남자 그룹으로 꼽히며 빌보드 기준 90년대에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4위였다.[5] 90년대를 주름잡던 세계 3대 디바 중 한 명으로, 96년 《Falling into You》발매 이후부터 98년 "My Heart Will Go On" 활동 시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90년대 후반을 휩쓸었다. 이외에도 94년 《The Colour of My Love》앨범, 95년 프랑스어 앨범 《D'eux》등으로 꾸준히 높은 인기를 누렸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5위였다.[6] 명실상부한 팝의 여왕으로, 92년 《Erotica》이후부터 침체기를 겪었지만 95년에 히트곡 "Take A Bow"를 배출했다. 이후 98년에《Ray Of Light》앨범 이후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90년대 후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에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6위였다.[7] 싱글 "Waterfalls"로 활동하던 95년《CrazySexyCool》부터 "No Scrubs"로 활동하던 99년《Fanmail》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90년대 중후반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당시 가장 인기있는 여자 그룹이었으며, 이외에도 92년《Ooooooohhh... On the TLC Tip》앨범 등 90년대 전반에 걸쳐 인기를 끌었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에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7위였다[8] 90년대를 주름잡던 세계 3대 디바 중 한 명으로, 92-93년 《The Bodyguard OST》및 "I Will Always Love You"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90년대 초중반을 휩쓸었다. 이외에도 91년 《I'm Your Baby Tonight》앨범, 99년 《My Love Is Your Love》앨범 등으로 90년대 전반에 걸쳐 꾸준히 높은 인기를 누렸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8위였다.[9]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9위였다.[10] 90년대 초반에 데뷔하여 96-97년 싱글 "Un-Break My Heart"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싱글이 속한 앨범《Secrets》역시 세계적으로 1,500만 장 넘게 팔리며 인기를 얻었다. 이외에도 93년 셀프타이틀 앨범《Toni Braxton》으로 인기를 끌었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과 함께 세계 4대 디바로 불리기도 했다. 빌보드 기준으로 90년대에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10위였다[11] 명실상부한 팝의 황제로, 비록 80년대만은 못했으며 93년에 아동 성추행 논란에 처하기도 했으나, 90년대에도 전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92년 앨범《Dangerous》 로 전 세계 3,2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으며 이 앨범의 타이틀곡인 "Black or White"도 상당한 화제성을 가지면서 전세계적인 신드롬급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아동 성추행 논란을 벗어난 후 95년 앨범《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으로 전 세계 2,0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꾸준히 큰 인기를 누렸다.[12] 90년대를 상징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다. 91년에 발매한 너바나의 두번째 앨범 《Nevermind》는 전 세계의 대중음악 시장을 강타하고 판도를 바꿔버린 명반으로 평가받으며, 너바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이 앨범의 수록곡 Smells Like Teen Spirit의 리프는 안다. 너바나의 정규 앨범은 총 3장인데 사실상 《Nevermind》 하나로 인해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제치고 2020년 스핀 매거진 선정 지난 35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1위,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90년대 아티스트 1위로 선정된다.[13] 싱글/곡 차트 빌보드 핫 100과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의 차트 성적을 기준으로 선정되었다.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Billboard.html?id=9w0EAAAAMBAJ (YD-18 페이지)[14] 10명 중 6명이 R&B 아티스트였다. (1 ~ 2위, 4위, 7위 ~ 8위, 10위)[15] '97년 ~ '98년[16] '00년 ~ '02년[17] '03년 ~ '06년[18] 에미넴, JAY-Z, 어셔, 브리트니 스피어스, 스눕 독 등[19] 휘트니 휴스턴의 데뷔 앨범 Whitney Houston과 2집 앨범 Whitney, 자넷 잭슨의 3집 앨범 Control과 4집 앨범 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 바비 브라운의 2집 앨범 Don't Be Cruel의 대성공[20] 1991년 3월 첫째 주부터 5월 둘째 주까지[21] RIAA 6x 플래티넘 레코드 (1991년 9월 13일에 기록)[22] RIAA 8x 플래티넘 레코드 (1994년 9월 27일에 기록)[23] 1990년 8월 첫째 주부터 넷째 주까지[24] 1990년 11월 둘째 주부터 넷째 주까지[25] 1991년 3월 둘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26] 1991년 5월 넷째 주부터 6월 첫째 주까지[27] 1990년 6월 둘째 주부터 넷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 1990년 7월 첫째 주부터 11월 둘째 주까지 18주 연속 1위[28] RIAA 다이아몬드 레코드 (1991년 4월 15일에 기록)[29] 1990년 6월 셋째 주[30] 1990년 5월 넷째 주부터 6월 둘째 주까지 3주 연속 9위, 1990년 6월 넷째 주에 9위를 기록했다.[31] 1990년 9월 셋째 주[32] 1990년 11월 둘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33] 앤서니가 외로움을 느끼며 써내려간 가사라는 것을 보여주듯, LA를 본인의 유일한 친구라고 말하기도 하며[103] 당시 본인이 느꼈던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가사에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 가사를 막 쓴다며 앤서니의 작사를 까는 사람들도 이 노래의 가사 만큼은 인정할 만큼 훌륭한 가사를 가진 노래이다.[34] 1991년 12월 둘째 주부터 1992년 1월 첫째 주까지[35] RIAA 4x 플래티넘 레코드 (1992년 1월 21일에 기록)[36] RIAA 6x 플래티넘 레코드 (1994년 9월 29일에 기록)[37] RIAA 7x 플래티넘 레코드 (2000년 5월 30일에 기록)[38] 1991년 12월 첫째 주부터 1992년 1월 셋째 주[39] 1992년 3월 첫째 주부터 둘째 주까지 2주 연속 3위, 1992년 3월 넷째 주부터 4월 첫째 주까지 2주 연속 3위[40] 1992년 5월 다섯번째 주[41] 1993년 9월 둘째 주에 7위, 1993년 9월 넷째 주부터 10월 첫째 주까지 2주 연속 7위[42] 거의 10년간 별다른 변화 없이 주류 장르가 유지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해오던 당시까지 록의 역사에선 굉장히 이례적이었고, 자연스레 대중들의 반발과 외면을 유발했다. 1970년대 후반에 디스코가 주류 장르로 오른 지 3년 만에 디스코 폭파의 밤을 맞으며 밀려났던 것을 생각하면 장르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43] 9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강타하고 판도를 바꿔버린 명반이다. 음악 시장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음반은 네버마인드를 포함해서 얼마 안되는데, 그중에서도 이 앨범은 Meet the Beatles!,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The Dark Side of the Moon, Never Mind the Bollocks, Thriller 와 같은 전설적인 앨범들과 동등하거나,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44] 현 시점 가장 잘 알려진 20세기 대중음악 곡 중 하나로 꼽힌다. 너바나의 다른 모든 곡들을 다 합쳐도 이 노래의 인지도에 도달할까 말까이며, 너바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대중음악의 문외한이더라도 이 곡의 리프를 들려주면 거의 누구나 안다.[45] 1992년 1월 둘째 주에 1주 1위, 1992년 2월 첫째 주에 1주 1위[46] RIAA 다이아몬드 레코드 (1999년 3월 24일에 기록)[47] 1번 트랙 ~ 6번 트랙[48] 7번 트랙 ~ 13번 트랙[49] 1992년 12월 둘째 주부터 1993년 3월 첫째 주까지 13주 연속 1위, 1993년 4월 첫째 주에 1주 1위, 1993년 4월 셋째 주부터 5월 첫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 1993년 5월 셋째 주부터 다섯번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50] RIAA 다이아몬드 레코드 (1993년 11월 3일에 기록)[51] RIAA 15x 플래티넘 레코드 (1995년 7월 31일에 기록)[52] RIAA 17x 플래티넘 레코드 (1999년 11월 1일에 기록)[53] 1992년 11월 넷째 주부터 1993년 2월 넷째 주까지[54] 1993년 2월 셋째 주부터 넷째 주까지[55] 1993년 4월 첫째 주부터 5월 첫째 주까지[56] 1993년 12월 둘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 1994년 1월 셋째 주에 1주 1위[57] RIAA 3x 플래티넘 레코드 (1994년 1월 11일에 기록)[58] RIAA 4x 플래티넘 레코드 (1994년 5월 31일에 기록)[59] 1993년 6월 첫째 주부터 7월 둘째 주까지[60] RIAA 5x 플래티넘 레코드 (1993년 12월 17일에 기록)[61] RIAA 6x 플래티넘 레코드 (1994년 4월 12일에 기록)[62] 1993년 5월 셋째 주부터 7월 첫째 주까지[63] 1993년 9월 둘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64] 1993년 8월 둘째 주부터 1993년 10월 넷째 주까지 11주 연속 빌보드 핫 100의 10위권(Top 10)에 머물러 있었다.[65] 1993년 12월 둘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66] 1994년 3월 셋째 주[67] 1994년 2월 둘째 주부터 1994년 4월 다섯번째 주까지 12주 연속 빌보드 핫 100의 20위권(Top 20)에 머물러 있었다.[68] 1994년 6월 넷째 주[69] 1994년 6월 둘째 주부터 1994년 8월 셋째 주까지 11주 연속 빌보드 핫 100의 10위권(Top 10)에 머물러 있었다.[70] 1994년 12월 넷째 주[71] 빌보드 핫 100의 10위권(Top 10)에 7주 동안 머물러 있었다. (1994년 11월 셋째 주부터 1994년 12월 넷째 주까지 6주 연속 Top 10, 1995년 1월 첫째 주에 1주 Top 10)[72] 1993년 12월 넷째 주부터 1994년 1월 둘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 1994년 1월 넷째 주부터 2월 첫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 1994년 3월 첫째 주부터 둘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73] RIAA 7x 플래티넘 레코드 (1994년 6월 29일에 기록)[74] RIAA 8x 플래티넘 레코드 (1995년 1월 19일에 기록)[75] RIAA 다이아몬드 레코드 (1997년 11월 5일에 기록)[76] 1993년 9월 둘째 주부터 10월 다섯번째 주까지[77] 1993년 12월 넷째 주부터 1994년 1월 셋째 주까지[78] RIAA 다이아몬드 레코드 (1996년 6월 26일에 기록)[79] RIAA 11x 플래티넘 레코드 (1999년 7월 2일에 기록)[80] 1995년 1월 넷째 주부터 2월 셋째 주까지[81] 1995년 4월 셋째 주부터 다섯번째 주까지[82] 1995년 7월 둘째 주부터 8월 셋째 주까지[83] 1995년 12월 다섯번째 주부터 1996년 1월 둘째 주까지[84] 미국에서 400만 장이 팔렸다. RIAA 4x 플래티넘 레코드 (1996년 11월 8일에 기록)[85] 전 세계적으로 무려 2,200만 장 이상이 팔렸다.[86] 2024년 3월 기준 19억 400만회이다. 두번째로 조회수가 높은 Don't Look Back In Anger와는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87] 영국 예술학교 중에서는 알아주는 대학교다.[88] 영국의 대표적인 노동자 밀집 거주지역.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동명의 드라마도 존재한다.[89] 다만, 대체로 희망적이고 즐거운 멜로디와 가사가 주를 이루는 브릿팝 특성상 1997년 이후에 나온 우울한 가사의 곡들은 소위 '포스트 브릿팝' 으로 불릴 때도 많고, 보통 이 곡이 브릿팝의 마지노선으로 인식된다. 같은 해에 나온 우울한 앨범인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나 OK Computer 수록곡들은 확실하게 브릿팝이 아니다.[90] RIAA 5x 플래티넘 레코드 (1997년 4월 16일에 기록)[91] RIAA 8x 플래티넘 레코드 (2000년 10월 3일에 기록)[92] 1996년 7월 넷째 주[93] 1996년 12월 첫째 주부터 1997년 2월 셋째 주[94] 1997년 5월 다섯번째 주부터 6월 첫째 주까지[95] RIAA 4x 플래티넘 레코드 (1997년 12월 19일에 기록)[96] RIAA 6x 플래티넘 레코드 (1998년 12월 21일에 기록)[97] RIAA 7x 플래티넘 레코드 (2000년 9월 7일에 기록)[98] 1997년 3월 넷째 주부터 4월 넷째 주까지[99] 1980년대의 발매된 더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를 무단 샘플링한 곡이었다.*[100] 1997년 6월 둘째 주부터 8월 넷째 주까지[101] 1998년 1월 첫째 주부터 둘째 주까지[102] 1998년 5월 둘째 주
[103]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자주 등장하는 '캘리포니아'나 '시티 오브 에인절'의 초석이나 다름없는데, 이 때문인지 캘리포니아나 로스앤젤레스가 RHCP를 대표하는 밈으로도 쓰인다(...) 본격 LA를 사랑하는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