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반공산주의 소요에 대한 내용은 1953년 동독 봉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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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 시절인 1967년 7월 8일 발생한 간첩 조작 사건. 동백림(東伯林)은 동베를린의 한자 음차이기 때문에 '동베를린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상세
당시 중정은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가운데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음악가 윤이상,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화가 이응노가 간첩으로 지목되었으며 시인 천상병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고문을 당했다.중정 요원들이 해당 인물들을 다짜고짜 한국으로 납치하여 심문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나 서독 연방 정부와 외교적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67년 12월 3일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34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간첩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고 단순 대북 접촉으로 판단되었다. 이후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까지 1970년 광복절 특사를 통해 사면했는데 서독 및 프랑스와의 외교 마찰 해소 차원에서 그랬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이후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에 불만을 품은 김종필을 굴복시킬 목적으로 동백림 사건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던 김종필계 김규남 의원과 김규남의 대학 동문 박노수 교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국회 의석을 2/3 이상 끌어올리려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는데 이에 반발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벌어지자 사회적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사람들을 납치했다. 이 사건의 실행을 주도한 서독 대사 최덕신은 6.25 전쟁 때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책임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고[1]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승승장구한 인물이었다. 이 사건이 국제적 외교 문제로 비화되면서 서독의 단교 위협 등 국제적인 항의에 직면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버림받고 반정부 성향으로 기울어지면서 한국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2] 월북했다.
50년 가까이 지난 2016년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요 사안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서 이 사건이 다시 언급되었는데 블랙리스트에 이응노 화백과 관련이 있는 이지호(고암문화재단 대표 겸 이응노미술관장) 및 윤이상평화재단이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 서유럽 교민이 타겟이 된 이유
당시 일부 유학생들이나 재독인사들이 동독의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접촉한 사실은 분명히 있었다. 윤이상은 동베를린을 거쳐서 북한을 방문한 사실도 있으며 금품이나 향응, 난수표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난수표가 담긴 봉투를 뜯어 보지도 않고 귀국하거나 아예 간첩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첩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에게 얻어먹기만 하고 실제로 북한을 돕는 등의 일은 없었다.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고 북한은 국력이 대한민국보다 나은 편이었다. 이에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줬고 유학생들은 밥 한 끼 얻어 먹는 게 별일인가 싶어서 얻어먹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서베를린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만난 것은 단순한 접촉에 불과할 뿐 간첩을 목적으로 한 통신 및 회합에 해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 경에 유학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남북분단은 물론 북한이 적국(敵國)이라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멸공이 국시로 등장하고 본격적으로 전국민이 남북분단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다.[3] 물론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북한에 대한 반감은 당연히 존재했지만 동시에 분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오히려 남북관계에 대한 급진적인 생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즉, '곧 있으면 통일 되겠지' 내지는 '원래 한 나라인데 좀 다녀오는 게 뭐가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큰 거리감 없이 접촉한 것이다. 이들의 대부분이 예술인들이어서 정치·사상적으로 다소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한 몫 했다. 한 예로 윤이상은 북한에 가서 친구를 만나고 남포의 강서대묘를 방문해 고구려 고분벽화인 사신도를 보고 왔는데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보러 갔다. 지금 생각하면 허탈할 정도로 안이한 행동이긴 했다.
그들은 동서 분단을 마주했던 독일도 그 시절까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왕래가 자유로웠으니 북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덕분에 본국에 소환되어서 중정 직원들이 "당신은 왜 동백림을 통해서 북한에 방문했는가"라고 묻자 "어? 다녀오면 안 돼요?"라고 오히려 되묻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4. 혐의자 명단
- 임석진(명지대 조교수 · 철학박사)
- 정하용(경희대 조교수 · 철학박사)
- 조영수(전 동국대학 및 외대 강사)
- 천병희(서울대 사대 전임강사 · 독문학석사)
- 황성모(서울대 문리대 부교수 · 철학박사)
- 최창진(전북대 문리대 조교수)
- 강빈구(서울대 상대 조교수 · 법학박사)
- 김중환(서울대 의대 조교수 · 한일병원 피부과 과장)
- 강하이드른(서강대 전임강사)
- 김종대(프랑크푸르트대 강사)
- 정규명(프랑크푸르트대 이론물리과 재학)
- 강성종(미국 노트르담대 화학연구소 연구원 · 이학박사)
- 주석균(농업문제연구소장)
- 장덕상(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 이응노(재불 화가)
- 윤이상(재 서독 음악가 · 전 서독 한인회장)
- 박민종(재 서독 음악가 · 전 서독 한인회장)
- 이희세(재불 화가)
- 공광덕(오 잘츠부르크 대학생)
- 노봉유(재불 유학생)
- 조상권(재불 유학생회장)
- 박협(재불 변호사)
- 이순자(국회도서관 직원 · 정하용 처)
- 어준(현대계장회사전무)
- 김광옥(동양 카프로락탐 기술과장)
- 정성배(정박 · 재불)
- 방준(재불 TWA 항공회사 근무)
- 김옥희(공무원)
- 어원(외기노조 오산지구 상무)
- 천상병(시인)
5. 최종심/재상고심 판결
- 사형: 정규명, 정하룡
- 무기징역: 조영수
- 유기징역
- 어준, 임석훈: 15년
- 천병희, 강빈구, 윤이상, 최정길: 10년
- 김중환, 정상구 등 6명: 7년 이하
- 집행유예: 7명
- 선고유예: 1명 (천상병)
- 면제: 3명
6. 재심
서울고법 형사5부(서승렬, 안승훈, 최문수 부장판사)는 2023년 5월 12일 유족들의 청구를 받아들여 윤 씨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2020재노25). 재심이 청구된 지 3년 만이다. 법률신문[1] 최덕신은 자신을 비롯해 독립운동가 집안이었고 6.25 전쟁에도 사단장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주요 요직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뿐이다.[2] 최덕신은 광복군 출신으로 6.25 전쟁에도 직접 장교로 참전하였고 중장으로 전역하여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 및 서독대사까지 역임한 인물이었지만 같이 일을 도모해 놓고 막상 곤란해지니 자신을 버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친북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3] 하지만 이 주장도 맞지 않는데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전후 얼마 안된 상황이라 반공심리는 상당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의 1950년대면 꼭 나라에서 반공주의를 주창하지 않아도 전쟁의 고통을 겪은 대부분의 국민들 사이에서 빨갱이라면 치를 떨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