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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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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07대 황제
로마노스 4세
Ρωμανός Δ΄
파일:Romanus_IV_coin_crop.pn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로마노스 디오예니스
Ρωμανός Διογένης
출생 1030년
동로마 제국 카파도키아
사망 1072년 (향년 42세)
동로마 제국 프로테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068년 1월 1일 ~ 1071년 10월 24일 (3년 9개월)
전임자 콘스탄티노스 10세
후임자 미하일 7세
부모 아버지 :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어머니 : 아르기오사
배우자 불가리아의 안나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자녀 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레온 디오예니스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종교 기독교(정교회)
1. 개요 2. 즉위 이전3. 즉위의 배경4. 치세
4.1. 1차 원정4.2. 2차 원정4.3. 수도에서의 활동4.4. 3차 원정과 대실패4.5. 폐위와 내전
5. 평가6. 가족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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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642655176487.png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107-1대 황제이자, 두카스 왕조의 제3대 황제.

카파도키아 군부의 대표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중 여론과 이에 따른 원로원의 지지로 일순간에 반란 수괴에서 황제로 극적인 변신을 한 인물. 그러나 국내 정치의 측면에서 두카스 왕실과 계속 불화를 일으켰으며 대외적으로는 나날이 가속화되는 중동 정세의 급변에 제대로 대응하는데도 실패하고, 1071년에 벌어진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아나톨리아를 상실하고 말았다.

덤으로 제국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영토를 완전히 상실한 시기가 이 때이기도 하다.

2. 즉위 이전

카파도키아 지방 출신의 전통적인 군인 가문인 디오예니스(Diogenes) 가문의 사람. 바실리오스 2세와 함께 불가리아 전쟁에 참전했던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의 아들이다. 아버지 콘스탄티노스는 발칸 방면에서 전선군을 지휘하는 최고위직까지 승진하였으나 반란 첩보가 중앙 정부에 접수됨에 따라 로마노스 3세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조사를 받던 중 투신 자살하였다. (1032년) 따라서 로마노스는 아버지를 접하지 못한 채 자라났다.

로마노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군부 관료로 성장했다. 기록에서 나타나는 등장은 그가 34세이던 1066년이 처음으로, 유럽의 서부군 지역에서 지휘관을 맡고 있던 로마노스는 전선군 지휘관을 맡아 페체네그족의 남침을 저지하고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그 직후에 반란을 도모하였고, 이를 우려한 직속 관리들이 수도에 밀고함으로써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1066년에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미하일 아탈리아티스(Michael Attaleiates)와 같은 법관들이 주재한 가운데 미하일 프셀로스 의장이 관장하는 원로원은 로마노스의 사형을 언도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론은 로마노스에게 점차 호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3. 즉위의 배경

1066년 ~ 1067년 당시는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치세 말기였다. 콘스탄티노스는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에서 드러나듯이 반란이 우려되는 금군(禁軍 : Tagmata)을 억제하고 지방 군대인 향군(鄕軍 : Themata)을 국방의 기본으로 삼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지방에 배치되어 있는 금군들은 경제적으로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심지어 일부는 제대 처리되기도 했다. 반면 1058년도에 금군이 부재한 상태에서도 성공적으로 유목민들의 침입을 격퇴한 향군이 이제 국방의 중심으로 오랜만에 대두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1050년대 중반 이후 파티마 왕조의 힘이 급격히 기울고 셀주크 제국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국제 정세의 급변이 감지되는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3국의 균형을 맞추는 무게추 역할을 해왔던 알레포 토후국의 내전은 콘스탄티노스 10세 시절의 동로마군과 셀주크 유목민 일부가 개입한 끝에 종료되었지만, 그 결과로 집권하게 된 마흐무드 미르다스(Mahmud Mirdas)는 알레포 국가 안에 있던 친 파티마 세력을 숙청한 뒤 셀주크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셀주크 제국은 이집트로 진격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셀주크 제국은 1064년에 아니(Ani) 공략을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의 동부 국경을 엄습했다. 이후 1067년에는 카파도키아까지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1057년 이사키오스 1세쿠데타1058년 초까지의 유목민 침공으로 입었던 피해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던 유프라테스 강 상류 동쪽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지방은 이 조직적, 대규모 침공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아니를 자급자족의 방어형 지역으로 재건하겠다고 계획했던 절도사 바그라트(Bagrat)는 테오도시오폴리(Theodosioupolis)로 후퇴한 뒤 카르스(Kars)에 이르는 동북 지역의 방어를 계속했지만 제국의 중심 방어선 자체는 유프라테스 강 자체로 후퇴해버렸다.

1067년 5월에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죽었고 아내인 에브도키아와 아들 미하일 7세가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1067년 후반부터 시작되는 대규모 유목민 침공에 유프라테스 강 방어선도 뚫리고 말았다. 중심 기지인 멜리티니는 고립되었고 현지 병력들은 궤멸되었다. 수효가 많은 향군들은 기동성이 높은 유목민들을 상대로 방어와 농성전에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뚫린 곳으로 침투한 유목민들은 카파도키아의 세바스티아(Sebasteia), 케사리아로 이어지는 협로를 따라 노략과 파괴를 계속하였고 이코니온 평원 일대를 분탕질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시민들은 마침 그 때 반란 기도로 사형 언도까지 받은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에 대하여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기 시작했다. 입지가 위태로워진 에브도키아 역시 디오예니스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다. 그 뒤에 그는 형집행이 정지되었을 뿐 아니라 원로원에 의해 사면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저택도 받게 되었다. 에브도키아는 이때 디오예니스를 접견하였는데 이 때 아마 대강의 사정을 언질하였을 것이다.

결국 1067년 12월, 에브도키아는 상원[1]의 표결을 통해 로마노스 디오예니스를 황제로 선임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의 협의 끝에 재혼 상대를 찾지 않겠다는 전 남편과의 맹세로부터 자유로워졌음도 인정받았다. 원로원 의장인 프셀로스조차 이 사실을 12월 31일 저녁에 통보받았을 정도로 이 일은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미하일 7세는 그 뒤에 이 사실을 알았다.

4. 치세

1068년 1월 1일, 로마노스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그의 치세는 사실상 세 차례의 동방 원정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세 원정을 짚어보자.

4.1. 1차 원정

첫 원정은 1068년에 실시되었다. 알레포의 마흐무드가 셀주크 유목민들을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 본거지를 제공하다시피 한 상황이 되었는데 이 유목민들은 동로마령 시리아를 집요하게 약탈하고 공략했다. 이 때문에 안티오히아 도독부는 가뜩이나 부족한 군사력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방어에도 급급하고 있었고, 로마노스는 병력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또 다른 유목민 세력이 북방의 방어선을 뚫고 폰토스를 공략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로마노스는 병력 중 기병대 일부를 차출하여 후퇴하는 유목민들을 추격했다. 산악을 집요하게 타넘은 끝에 로마노스의 군대는 국경인 유프라테스와 가까운 테프리키(Tephrike)에서 유목민을 공격할 수 있었다. 적군 다수는 살아남았지만 포로와 재물 상당수는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로마노스는 타우로스 산맥의 위험한 협곡을 건너 시리아로 향했던 본대와 합류했다. 이 군대는 알레포 토후국을 압박하였으며 마침내 이에라폴리(Hierapolis. 현대 시리아 Manbij)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아지즈(Aziz)나 알레포를 향한 공격은 만족스럽지 않아서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이어졌다.[2] 결국 로마노스는 수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귀환에 올랐다. 도중에 대규모 유목민의 또 다른 부대가 다시 유프라테스를 넘어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미 유목민 부대가 이코니온에 이르는 깊숙한 지역까지 약탈한 뒤 한참 후퇴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로마노스는 병력을 해산하고 수도로 귀환했다.

4.2. 2차 원정

2차 원정은 1069년에 있었는데 출발부터 여러가지 사건이 얽히면서 실패로 귀결되기 시작했다. 최전방 지역 중 하나인 에데사에 배치되었던 금군 중 용병대가 봉급 미지불 문제 때문에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의 폭주로 아르메니아코스 지역 일대가 피해를 입었다. 가까스로 이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선수를 친 유목민들이 다시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와 카파도키아와 케사리아 인근을 공격했다. 로마노스는 가까스로 이들을 격퇴하는데는 성공하였고 원 계획대로 유프라테스 방어선을 강화하기 위해 출진했다.

강변에 이르러서 전략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대다수의 군인들과 관료들은 강을 넘어 폐허가 된 옛 영토를 수복, 강화할 것을 지지했다. 오직 미하일 아탈리아티스만이 이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한 지역을 포기하고 유프라테스 강의 방비를 굳힐 것을 주장했다. 로마노스는 여기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아탈리아티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결정을 번복하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강을 건너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러면서 정작 전투는 가급적 피하려고 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이런 방식으로 동로마군은 로마누폴리(Romanoupolis)를 거쳐 반 호수 근교까지 진출했다.

문제는 바로 그 때 일어났다. 동로마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유목민들은 동로마군 본대를 외면하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달려온 것이다. 당시 이곳은 황제가 방어를 위임한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 사령관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병력[3]은 제대로 적을 저지하지 못한 채 붕괴되어 타우로스 산기슭으로 도주해버렸다. 텅 비어버린 카파도키아로 유목민들이 다시 쏟아져 들어왔고, 이번에도 재차 이코니온 평원이 쑥대밭이 되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중앙 아나톨리아의 중심지인 이코니온 자체도 함락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군한 로마노스는 유목민들이 본대를 피하여 킬리키아를 통해 알레포로 퇴각하리라고 예측하여 안티오히아 도독에게 길목을 틀어막고 적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과연 유목민들은 황제의 예측대로 기동했다. 안티오히아 도독은 이를 영격하였는데 역시 기동력을 앞세운 유목민들은 노획물들을 포기한 채 빠르게 알레포 방면으로 도주해버렸다. 갈구하던 대승전의 기회를 놓친 로마노스는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4.3. 수도에서의 활동

1069년, 원정을 끝내고 귀환한 로마노스는 이후 1071년 초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국내의 일들을 처리했다. 물론 군사적인 업무는 여전했다. 우선 서쪽에서는 1068년에 현지 동로마군을 지휘하던 아르이로스(Argyros)와 절도사 아불하레(Abulhare)[4]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탈리아 통제영(Katepan of Italy)이 급속도로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최근에 탈환했던 타란토(Taranto), 브린디시(Brindisi) 등이 다시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제는 통제영 본부가 위치한 바리(Bari)까지 포위되었다. 바리 시민들은 급히 콘스탄티노플로 연락을 취해 구원을 요청했다.[5] 이에 로마노스와 에브도키아는 디라히온 절도사에게 병력과 함대를 주어 구원하도록 지시했다.

구원 함대는 급히 바다를 건너 진군하였는데 바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모노폴리(Monopoli)에서 노르만 군대의 공격을 받아 수송선 7척을 격침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어쨌든 바리로 입성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1070년에 있었던 야전에서 동로마군은 노르만군에게 완전히 패배하였고 바리 역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071년 4월 15일, 기스카르의 군대는 바리로 입성하였으며 동로마령 이탈리아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1070년에는 동쪽의 문제도 여전했다. 또 한 무리의 대규모 유목민들이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온 것. 황제는 내년에 있을 대규모 원정 준비에 바빴으므로 다른 지휘관을 선임하기로 하였다. 당시 25세였던 마누일 콤니노스[6]가 그 대상이었다. 마누일의 병력은 조심스럽게 케사리아까지 진군한다. 그러나 이 곳에서 호루즈(Khourdj)라는 셀주크 지휘관의 대군과 맞닥뜨렸고 압도적인 병력 앞에 그대로 패배했으며 마누일 자신도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셀주크의 술탄인 알프 아르슬란과 대립하면서 국외를 돌아다니고 있던 호루즈는 이를 기회로 동로마 제국과 결탁을 결심했다. 이에 로마노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호루즈와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로써 현재도 셀주크 국내의 정치적 위협거리인 반란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강화하고 통제권을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아르슬란으로서는 대단히 위협적인 것이기도 했다. 코카서스에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그의 의도 역시 알레포를 중심으로 삼국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동로마 제국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아르슬란은 1070년에 알레포 토후국의 종속국 요청을 받아들인 뒤 아르메니아로 진군, 만지케르트와 아르체스(Arches) 등 반 호수 인근의 영지들을 점령하였으며 거기서 남하하여 유프라테스 강 중상류의 에데사 근교를 집요하게 약탈하였다. 이곳의 방위는 에데사 도독인 바실리오스 알루시아노스가 맡고 있었다. 다행히 에데사는 포위를 버텨냈으나 더 이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7]

중동 3대 강대국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파티마 왕조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시리아가 무너지게 되면 수니파를 수호하는 셀주크가 곧 이집트로 밀고 들어오리라는 공포도 존재했다. 당시 파티마 왕조는 연이은 기근과 정치 혼란, 베르베르 출신과 튀르크 출신의 유목민 군대가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어 이 직면한 위기를 당해낼 힘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파티마는 동로마와 누차에 걸쳐서 외교를 진행하였고, 이러한 행동이 동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시리아의 후방인 아르메니아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런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작전이 불가피한 상태였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내정에서도 불안한 조짐은 계속해서 축적되었다. 로마노스가 전쟁 일변도로 모든 국력을 쏟아붓다보니 관료들의 임금이 대거 삭감된 것은 물론이고 전 지역의 시민들에 대한 세금도 가혹하게 부과되었다. 거기에 보통의 황제들이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고 의견을 청하는 소통로인 각종 행진,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대경기장에서 열곤 하는 전차 경주와 같은 유흥거리도 시행되지 않았다. 궁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임금 삭감은 물론, 독선적으로 자신의 권력 강화와 행사에만 신경쓰는 그의 행동에 관료들과 강한 지지대가 되어줄 수 있는 두카스 왕실까지 적으로 돌려세우고 말았다. 군대 역시 병력은 계속 모여들었고 조련도 진행되었으나 로마노스 자신은 군대와 점점 심리적으로 격리되었을 뿐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판단으로 인해 사기 저하에 일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만지케르트 전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4.4. 3차 원정과 대실패

1071년 1월 19일부터 3월 말까지 아르슬란의 군대는 유프라테스 유역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며 많은 재화를 노략했다. 한동안 동로마군의 반격이 없으리라고 판단한 셀주크 군대는 용병들의 임금 체불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불과 반년 전에 충성을 자처했던 알레포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알레포의 군주인 마흐무드는 결국 버틸 수 없게 되자 배상금을 지불하고 다시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까지 복종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가 문제가 되어 재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 4일에야 힘에 부친 마흐무드가 다시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아르슬란의 반년에 걸친 긴 원정은 마무리되었다.

셀주크 군대가 아직 알레포에서 전쟁 중에 있던 3월 13일. 로마노스는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건너왔다. 그의 목표는 단언컨대 아르메니아, 특히 반 호수의 방위 요새들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셀주크 제국이 동로마 제국의 외방 번국의 역할을 해왔던 마르완 토후국과 알레포 토후국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콘스탄티노스 9세가 완성하고 콘스탄티노스 10세에 이르기까지 유지해왔던 외부 방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는 만지케르트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동로마 제국이 입었던 큰 타격이었다. 유프라테스의 방어선 역시 이 무렵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서 1070년 셀주크 제국군의 별동대가 침투했을 때 별 피해도 없이 소아시아 깊숙이 진출하여 노략질을 하고서는 자유로이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티오히아로부터 에데사,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위협을 저지하고 무너지고 있는 힘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서는 원정이 불가피해 보였다.

로마노스는 최대한의 병력을 통솔한 채 세바스티아까지 진군한다. 하지만 로마노스는 술탄의 군대가 오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지만 아르슬란은 동로마의 후방 공격을 항상 경계하였기에 해당 소식을 빠르게 파악한 뒤 서둘러 만지케르트를 향해 진군했다. 이하의 진행에 대해서는 만지케르트 전투 항목을 참고할 것.

4.5. 폐위와 내전

만지케르트 전투의 자세한 정황은 확인하기 어렵다. 누가 배신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훈련이 부족한 향군들이 갑작스런 후퇴 신호에 스스로 무너졌던 것인지도 분별하기 어렵다. 너무 와해된 나머지 후방의 진영에 있던 원로원 고위급 의원들이나 군인들 몇이 병력을 규합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고위급 정치가들마저 이 와중에 셀주크 군대의 추격에 휘말려 사망하기까지 했다. 황제도, 병력도 없게 된 원로원 의원들 일행은 결국 바다를 통해 수도로 귀환한다.

회전의 대패를 보고받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발칵 뒤집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황제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급한대로 의장인 프셀로스는 원로원 회의를 즉각 소집한다.[8] 그간 로마노스에 대한 반감도 축적되어 있던 원로원은 표결을 통해, '도시와 시민의 이름으로' 로마노스를 폐위하고 미하일 7세를 선임 황제로 다시 선포했다. 로마노스가 뒤늦게 살아있음이 알려지자 잠시 동안 도시 전역에 공황이 일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혼란을 진정시킨 뒤 미하일 7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로마노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제위를 포기하고 지휘관으로 봉직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로마노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양 세력은 아르메니아코스에 위치한 도키아(Dokeia)에서 격돌한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지휘하는 관군은 로마노스의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 때 정부는 안티오히아의 도독인 카타투리오스(Chatatourios)에게 명령을 내려 진압군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카타투리오스는 로마노스에 의해 임명되었던 만큼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고 결국 로마노스가 패배로 몰리게 되자 용병대장인 프랑크인 크리스핀(Crispin)의 기사대와 함께 그를 데리고 자신의 관할지인 킬리키아로 후퇴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킬리키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멀어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동시에 빠르게 수도를 점령해야 할 반란군으로서는 시간을 잃는 선택이기도 했다. 결국 정부는 빠르게 군세를 재정비한 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지휘에 힘입어 기습적으로 타우로스 산맥을 통과했다. 카타투리오스와 크리스핀은 뒤늦게 출격했으나 관군 소속의 기사대가 연이어 펼친 파상적인 돌격으로 궤멸하고 말았다. 방치되어버린 타르소스는 곧장 관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안드로니코스는 로마노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호송하게 했다.
황제로서, 나는 당신에게 150만의 몸값을 약속했었소. 폐위되었고, 곧 남들에게 좌지우지될 상황에서 나는 감사의 뜻으로 당신에게 내가 소유한 모든걸 보냅니다

항복하기 전 로마노스가 수중에 모을 수 있는 돈을 끌어모아 술탄 아르슬란에게 보내며 첨부한 편지

황제 미하일 7세는 이 시점에서도 로마노스를 완전히 제거할 마음은 없었고 그를 실각시키는 정도의 조치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노스의 실각에 앞장섰던 원로원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원로원의 결의로 황제의 조치도 거부한 채 로마노스에게 실명의 형벌을 내리도록 결정했다. 황제의 강력한 안전 보장을 믿고 코티에온(Kotyaion)까지 북상하여 관청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로마노스는 원로원의 명령이 떨어진 뒤 실명 형벌에 곧바로 처해졌다. (1072년 6월 29일) [9] 이는 신체적 안전을 보장했던 두카스의 약속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 직후에 자신이 건축을 후원했던 프로티 섬의 수도원으로 하야했다. 아주 짧은 수도사 생활을 거친 뒤, 로마노스는 실명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8월 4일) 그의 장례는 전 아내인 에브도키아의 후원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5. 평가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는 비극적인 인물을 표상한다. 그는 그의 나라를 구해내기 위해 용맹하게 노력했으며, 그의 정적들이 자신의 권력 하에 놓였을 때에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그들에 의해 배신당했다.
― 앤서니 칼델리스

만지케르트라는 파국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들을 법도 하지만, 로마노스 4세에 대해서는 동정론이 적지 않다. 그는 반란 수괴로 처단당할 처지였으나, 시운의 변화를 잘 타고나 원로원 대중 정치의 수혜자로 거듭나게 된 행운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동시에 세심한 여론 관리가 필요한 11세기 체제에 맞지 않는 독불장군식의 군인형 태도는 그의 국내 정치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중동 정세에 개입해야 할 필요가 있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서는 좋지 못한 자세이기도 했다. 결국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셀주크 제국의 이탈 세력들에게 제국 자체를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데 상당한 일조를 하고 말았으며 심지어 본인조차 원로원의 강력한 혐오를 불러와 자기 일신조차 건사하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6. 가족

자식으로는 콘스탄티노스(Konstantinos), 레온(Leon), 니키포로스(Nikephoros)를 두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첫 부인인 불가리아 공주[10]와의 자식이었고, 레온과 니키포로스는 두 번째 부인인 에브도키아와의 자식이었다. 장남 콘스탄티노스는 알렉시오스 1세의 누이인 테오도라와 결혼해 딸 한 명을 두었고, 아버지가 폐위당한 후에도 동부군의 장성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1073년 처남이자 당시 안티오히아 총독이었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함께 안티오히아 일대를 침범한 튀르크족에 맞서다 전사했다. 테오도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이후 세르비아의 주판 우로슈 1세와 결혼했다. 차남과 삼남 둘 역시 아버지를 잃은 뒤에도 살아남았고 알렉시오스 1세의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 레온은 페체네그 전쟁 당시인 1087년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으며 니키포로스는 알렉시오스 1세를 살해하려다가 실명의 형벌을 받았지만 1094년경까지도 기록에 출현하였으며 정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기하학에 빠져들어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7. 참고 문헌

Alexander Daniel Beihammer, Byzantium and the Emergence of Muslim-Turkish Anatolia, ca. 1040-1130, Routledge, 2017.
Michael Attaleiates, Tr. by Anthony Kaldellis,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Michael Psellos, E. R. A. Sewter Tr., Chronographia, Yale University Press, 1952.


[1] 상원-high senate에 대해서는 원로원 항목을 참조할 것[2] 한 기록으로는 어떤 전투에서 동로마군이 3천명씩이나 전사하기도 했다[3] 아마 향군이었을 것이다[4] 아라비아계 출신으로서 추정되는 원음은 아폴라파르 정도로 보인다[5] 당시 이탈리아 통제사(Katepano)는 공석이었고 바다 건너 디라히온 절도사가 겸직하여 대행하고 있었다.[6] 이사키오스 1세의 동생인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첫째 아들. 알렉시오스 1세의 맏형이다.[7] 당시 셀주크 제국은 용병들의 임금 체불 문제가 심각하여 이미 재정 위기 직전에 놓여 있었고 이 때문에라도 번번이 주변 지역을 약탈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때 에데사와 근교 하란 일대를 약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셀주크 군대는 다시 임금 체불로 인해 반란 직전까지 치달았다. 아르슬란은 결국 이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에게 종속해온 알레포 토후를 공격하게 된다. 그 와중에 발생한 것이 2차 만지케르트 전투.[8] 원로원은 황제 유고시에 임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9] '숙련되지 않은 유대인'이 형을 맡아 3번의 시도 끝에야 형이 집행될 수 있었다고 ..[10] 이름 미상으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왕자 알루시안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