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영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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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구열
손자인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성군으로 유명한 세종, 성종, 정조와 같이 학문을 좋아하고 경연에 성실히 임한 왕이었다. 그리고 왕권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나이에도 죽기 직전까지 학업에 열중한 군주이기도 하다. 태종이나 세조도 똑똑한 축에 속했지만, 왕위에 올라 웬만큼 기반을 다진 후에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면서 경연을 때려쳤고[2], 반면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광해군도 여러 옥사 이후로 왕권이 강해지자 경연을 매우 게을리했다.[3] 영조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말년까지도 경연에 열중했으니 천성이 공부를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4]
2. 애서가
영조는 소설과 잡기를 즐겨 읽었는데 이는 손자 정조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영조 말년인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기록하고 있다.비망기(備忘記)로 심상운에게 전교하시길:
아! 금년의 혹심한 가뭄은 팔순 나이에 처음 보는 것이라, 애태우고 근심하노니 이 또한 헐후어(歇後語)로다. 고인이 말하길,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옛 한나라의 근 100년 기업(基業)은 삼로동공(三老童公)에서 비롯되었으니, 비록 연의(演義)이기는 하나 서한연의의 한 제목인 '부로(不老)를 논하여 한왕이 덕을 펼치다.'에서 그 모습을 그리게 했고, 또 말하기를 '황구(黃耉)에게 조언의 말을 구해야지 이를 놓아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로(耆老)가 어찌 전폐(殿陛)에 오를 수 있으랴? 내 오늘 지영처(祗迎處)에서 마땅히 볼 것이니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가히 치신(致身)할만한 자들을 모두 오게 해 기다리게 하라.
하셨다.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
아! 금년의 혹심한 가뭄은 팔순 나이에 처음 보는 것이라, 애태우고 근심하노니 이 또한 헐후어(歇後語)로다. 고인이 말하길,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옛 한나라의 근 100년 기업(基業)은 삼로동공(三老童公)에서 비롯되었으니, 비록 연의(演義)이기는 하나 서한연의의 한 제목인 '부로(不老)를 논하여 한왕이 덕을 펼치다.'에서 그 모습을 그리게 했고, 또 말하기를 '황구(黃耉)에게 조언의 말을 구해야지 이를 놓아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로(耆老)가 어찌 전폐(殿陛)에 오를 수 있으랴? 내 오늘 지영처(祗迎處)에서 마땅히 볼 것이니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가히 치신(致身)할만한 자들을 모두 오게 해 기다리게 하라.
하셨다.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
실제로 영조 50년에는 큰 가뭄이 들어서 죄인을 방면하고 지맥을 살펴보는 등의 조치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인다. 그런데 영조는 그런 상황에서 평소 즐겨읽던 소설인 서한연의의 한장면을 떠올렸던 것 같다. 재밌게도 해당 내용을 떠올리고 신하들에게 지나가듯이 언급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소설 속의 한고조에 이입하여 직접 소설 속의 모습처럼 신하들에게 가뭄에 대한 대책과 조언을 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는 하루 차이로 영조가 신하들에게 가뭄에 대한 대책과 조언을 구했다는 기사가 있기도 하다.
사실 승정원일기에서 영조와 신하들의 문답, 혹은 경연 내용을 보면 영조가 심심치 않게 서한연의, 삼국지연의, 동한연의[5]를 언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때 사도세자에게 자기가 소싯적에 어떤 부녀자가 삼국지연의를 읽는 모습을 보았는데, 맥성에서 관우가 패하고 죽는 장면에서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걸 보있다고 말한적도 있다.
나는 번저(藩邸)[6]로부터 입승하여 비록 사사로이 여항(閭巷)의 일을 알았으나 부모님의 병환을 보살필 때가 많았던 까닭에 또한 두루 알지 못하였다. 너는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러한 곳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러하다면 비록 부녀자가 언서(諺書)[7]를 읽을 때에도 시비(是非)와 현우(賢愚)의 나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싯적에 어떤 부녀자가 삼국지를 읽다가 맥성의 일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27년 3월 2일
승정원일기 영조 27년 3월 2일
거기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아플 때는 병석에서 낮잠으로 시간을 죽이지 말고 소설이나 잡기류를 권장하는걸 보면 영조란 인물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던 것 같다. 심지어 신하들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어명을 내린적도 있었던 듯.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중에 소일(消日)하는 방법으로는 혹은 소설이 있고, 혹은 잡기가 있으니, 나는 이 두가지를 하지 않고서는 과연 소일하기가 어렵다. 유신(儒臣)에게 읽도록 명하여 이를 들으면 오히려 낮잠을 자는 것 보다 나으니 침전에서 인접하여도 또한 무방하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길:
이 또한 반드시 무방한 것은 아니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22년 6월 27일
병중에 소일(消日)하는 방법으로는 혹은 소설이 있고, 혹은 잡기가 있으니, 나는 이 두가지를 하지 않고서는 과연 소일하기가 어렵다. 유신(儒臣)에게 읽도록 명하여 이를 들으면 오히려 낮잠을 자는 것 보다 나으니 침전에서 인접하여도 또한 무방하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길:
이 또한 반드시 무방한 것은 아니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22년 6월 27일
손자인 정조가 소설이나 잡기류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던걸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면모라 하겠다.[8]
3. 성품
이와 같이 학구적인 면과는 다르게 성격은 매우 옹졸하며 급하고 감정에 기복이 심했으며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9] 입도 더러워 실록에는 영조의 말을 차마 들어담아 적지 못할 말씀이라고 쓴 일이 여러번 나온다. 그러니까 육두문자 욕을 조정 중신들 앞에서 대놓고 갈겼단 것이다. 특히 영조의 손자였던 정조 또한 욕을 달고 사는 매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성격은 영조의 형인 경종이나 아버지인 숙종,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영조의 할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그러나 영조의 무서운 면은 이와 같이 격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에는 끝간데 없을 만큼 냉정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조 시대의 정치사 전반에서 잘 드러나는 편인데, 특히 사도세자를 죽여버릴 당시에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고, 사도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며 후속 조치를 내리는 모습은 대단히 치밀하고 신중한 모습이다.
참고로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등장하는 피휘 사건을 보면 상당히 대인배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영조의 이름에 들어가는 밝을 금(昑)은 백성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만약 임금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백성들이 피휘를 하느라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개명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영조는 40여년 동안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물론 어찌어찌 이름이 알려졌는지, 어느 날 승지가 영조 앞에서 상소문을 읽던 중 금(昑)자를 발견하고 머뭇거리자, 괜찮다고 허가한 후, 피휘 적용 범위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다만 근거가 야사이고 애초에 개명하는 방법이 있는데 피휘 적용 범위를 논하는 것을 보면, 실화는 아닐 가능성이 있다.
4. 정치
철저한 정면돌파형으로 잔수보다는[11] 정공법을 선호했기에 걸리게 되면 말 그대로 박살내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자료 준비를 철저히 하고[12] 명분도 다지고 최후 수단도 강구해놓은 다음 정면 돌격하는 스타일이라 막기도 힘들고 막아낸다고 해도 피해가 큰 경우. 이건 세제 시절인 경종 치세 때부터 확립된 경우다. 신축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개박살나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태롭게 되자 이런 정면 돌파를 통해 입지를 다지며[13] 군주까지 오른 사람이라 왕이라는 위치에서 정공법 펴면 당하는 신료나 당파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하는 짓이 벽서 등으로 음해하거나 반란 같은 수밖에는 없었다.한편 아버지 숙종처럼 신하들을 거의 노예 수준으로 취급하는 타입이기도 했는데[14], 성격의 변덕이 심하고 강퍅하며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 신하들은 쫄쫄 굶는데 자기 혼자서 식사때가 되면 바로 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15]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16]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17] 과거에서 이현필이라는 선비가 "전하께서 궁녀를 너무 많이 뽑으시는 거 아닙니까?"라는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걸 본 영조가 "내가 임금인데 궁녀도 맘대로 못 뽑냐?"라고 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현필 사건은 당대에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왕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18] 영조 13년, 실록에는 한 신하가 이현필을 처벌하라고 간언하면서 "과거 급제에 눈이 멀어서 왕을 능멸한 역적을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몇 달을 끌다가 영조가 그냥 봐주고 합격시키는 선에서 끝났는데, 지방의 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합격이 취소되다가 결국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야(영조 40년) 벼슬이 다시 회복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정조에게 힘을 실어줄 때는 무력을 쓰겠다고 화를 내고 협박하기도 했다. 전례가 있다며 중대하지 않은 건은 세손에게 전부 맡기고 중대한 건은 세손과 같이 처리하겠다고 발언하자, 홍인한을 비롯한 대신들이 크게 반대했다. 특히 홍인한은 승지의 앞에 서거나 영조의 발언을 대놓고 곡해하는 등, 처절하리만큼 문자 그대로 온몸을 던져 막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화를 내며 욕을 퍼붓다가,[19] 끝내 성질을 못 이기고 전례가 무엇인지 직접 설명한 후, 이래도 정말로 깨닫지 못한다면 조금 쉬어야겠다며 미리 대기시켜놓은 상협련군[20] 을 들여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후에 신하들에게 호령하자, 홍인한을 비롯한 신하들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는지 모두 굴복하여 전례가 있는 줄 정말로 몰랐다고 변명한다.
5. 장수
영조는 조선 역대 국왕들 중 가장 통치 기간이 길며(52년) 또 가장 장수한 왕(81세)이기도 하다.조선 임금들의 수명은 대체로 (사회적 지위를 감안하면) 영 길지 못한 편이었다. 주 원인으로는 혹사 수준의 업무량과 빡빡한 일정[21], 상대적으로 부족한 운동량, 과도한 식사량과 (고려말에 유목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육식 위주로 편중된 식단, 현대보다 부실한 의료[22] 등 여러 가지가 종합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탓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오늘날 사람들보다 탄수화물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섭취했다. 그 당시의 밥그릇 크기는 지금의 국사발보다도 훨씬 컸는데, 하층민이야 무지막지한 육체노동과 신선한 부식류의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지배계급인 양반을 넘어 무려 나랏님조차도 푸짐한 식사량을 고집했다. 오히려 이런 대식 문화가 수라상에는 더욱 심해져서, 하루에 올라오는 수라만 해도 무려 5끼에 달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사무를 봐야 하는 왕에게는 건강을 해칠 만큼의 식사량이었다. 가령 세종대왕은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무조건 고기를 외치는 육류 애호가로 하루라도 수라상에 고기가 없는 날이 없었는데, 비만과 당뇨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불과 54세에 승하하였다.
이에 비해 영조는 간결하고 적은 양을 최대한 맛있게 먹는 것을 선호했다. 다른 왕들이 5끼를 먹던 것과 달리 하루 2-3끼만 먹는 등 식사횟수를 줄인데다 양 또한 매우 적었다.
김흥경이 아뢰기를“수라의 양을 신들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평상시 드시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조금 많이 먹을 때도 있지만 밥 2홉(合) 남짓에 불과하다."하였다. 김흥경이 아뢰기를“드시는 양이 너무 적은데 전부터 이와 같았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평상시에 과식을 경계하였다. 그래서 음식을 절제하던 것이 그대로 습관이 되어 이렇게 되었다.”하자 이진순이 아뢰기를“쌀 2홉이더라도 밥을 하면 너무 적음을 면치 못하는데 밥 2홉은 두세 술이 될 듯합니다. 드시는 것이 이처럼 적으니 아랫사람들의 마음에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6월 25일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6월 25일
조선시대 2홉이면 종이컵 1컵이 채 되지 않으므로 현대인 기준에도 확실한 소식가다.[23] 밥은 현미와 콩을 섞은 잡곡밥을 즐겨먹었으며, 반찬도 매우 단순했고 입맛을 돋우는 간결한 진미 한두 종류를 곁들인 정도였다. 심지어 여름에는 물밥, 고추장, 굴비만으로 구성된 식단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조선 국왕들의 식단에 비해 육식이 적고 채식[24]의 비율이 매우 컸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오히려 왕이 먹는 수라상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닐까 항상 염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제법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냈다고.
무엇보다 영조가 선호한 "단순한 진미"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음식들이었던 것 또한 그의 장수에 큰 기여를 했다. 역대 조선의 왕들은 기름기가 많고 맛이 풍성한 민어를 즐겼으나, 영조는 기름기 없이 꾸덕꾸덕하게 말린 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영조가 말년에 좋아했던 식재료로는 송이버섯, 전복, 새끼 꿩 등이 있었는데[25], 이것들은 귀한 음식들이지만 역대 조선 국왕들이 즐긴 수라 반찬들에 비하면 비교적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음식들이다. 그 외에도 영조는 고추장[26][27]을 좋아했는데, 말년에는 고추장 없이는 입맛이 안 돈다고 할 정도였다. 고추장은 영조의 간결한 식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입맛을 돋우기 위한 다른 복잡한 반찬이 없어도 고추장 하나면 해결되니, 조선 국왕의 고질적인 과식 완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영조는 빠듯한 국왕의 하루 일과로 인한 부담을, 하루 생활을 매우 규칙적으로 보냄으로써 극복했는데, 그중에서도 식사의 경우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만 했다. 신하들과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거나, 심지어 강연을 하던 중에도 식사 시간이 되면 신하들을 내버려두고 식사를 하러 갔던 것도 그 때문이다.[28] 게다가 영조는 젊은 시절부터 나름대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운동을 즐긴 탓을 즐기기도 했다. 타고난 체질 자체는 매우 약한 편인데 이를 자기관리로 극복한 케이스.[29] 영조는 나이 70이 넘어서도 하얗게 센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나 회춘했다!"라고 좋아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30] 즉, 식단 조절과 운동 등의 철저한 건강 관리가 있었기에 그만큼 장수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6. 외모
영조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꽤 꽃미남 임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외모를 계집스러워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고 한다. 영조의 초상화를 보더라도 호리호하고 곱상한 외모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으며 길쭉한 눈매 메부리코이긴 하나 오똑한 콧대와 갸름한 얼굴형이 당대보다는 현대 기준의 미남형 조건에 부합한듯하다. 이러한 외모는 어머니의 영향이 큰 듯하다.[31]7. 인간성
공적으로 봤을 때는 좋은 편인게 연잉군 시절 생계 목적으로 소를 훔치다 걸린 백성을 보고 선처를 베풀어줄 것을 부탁하고[32]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는 등 기본적으로 약자에게 관대했다. 또한 박문수와 같은 측근이 함께 역모를 저질렀다고 고발당했음에도 믿지 않고 오히려 무고(誣告)임을 자백받는 등 의리가 있는 성격이었다.[33] 기본적으로 당파 간 일어나는 보복을 경계하며 타협와 온건한 조치를 선호하는 경향의 군주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덕이 있다', '관대하다'는 언급이 꾸준히 나오는 이유.그러나 사적 부분이자 한 개인으로는 정반대로 호불호에 대한 표현이 강하고 다혈질이며 고집이 있는 성격으로 제대로 눈밖에 나면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잦았다. 특히 가족의 경우 이로 인한 피해자가 많은 편.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34] 후계자인 사도세자의 행동이 만족스럽지 않자 정서적 학대를 일삼다가 끝내 종사를 위한다며 아들을 뒤주에 가둬죽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가정사가 엉망이라는 것. 이로 인해 대중에게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다만 영조가 저렇게까지 냉혹한 인물이 된 이유는 살아온 환경이 큰 악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어느정도 감안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영조가 한 가족의 끼친 패악질과 유교국가의 군주로서 모범이 되지 못한 것을 감안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 아무튼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가 천한 출신으로 역대 왕들 중에서 정통성이 제일 약했던데다가 세자 시절 형인 경종과 정치적 대립으로 목숨을 건지는 것도 버거울 정도였으며[35] 즉위한 뒤에도 수십년 동안 온갖 직접적인 역모나 미수에 그친 역모 모의들에 본인의 정통성을 폄하하는 온갖 괘서 사건에 시달렸다. 심지어 반대세력에 의해 효장세자마저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니 정말 정신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왕이라는 자리에 앉은 이상 언젠가는 필히 냉혹해지고도 남는 인간성의 상실을 겪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치와 연관되어[36] 몇번이고 목숨이 왔다갔다하다보니[37] 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걸로 보이는데, 이러한 삶이 성격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을 줬다. <한중록>에서는 이인좌의 난과 신임사화때문에 정신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실록에서도 박문수가 영조에게 '지나치게 멀리 예측하고 불안해한다'고 말하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현안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었던 것에 비해 실권 없는 일개 왕자에 불과했던지라 숙종이 죽자마자 대신에게 심하게 무시당하기도 했다.[38] <권력과 인간>에서는 영조가 겪었던 고난이 영조의 성격을 철저히 허물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7.1. 아버지 영조
그야말로 최악의 막장부모다.사도세자 건만 해도 이미 한국사 최악의 아버지라는 평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지경. 사실 아버지가 아들을, 왕이 왕자를 죽인 사건 자체는 왕조 국가에서 그리 희귀한 일은 아니다.[39] 그런데 왕자를 좁디좁은 뒤주에 가둬 죽이는 일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유례가 없는 엽기적인 사건이다.[40]
결국 자식을 대놓고 차별하고, 신하들 보는 앞에서까지 정서적으로 심하게 학대해서 미치게 만들어 놓고는 아들을 잔혹하게 살해한[41] 영조는 유교의 가르침인 삼강오륜을 어긴 막장부모이자, 패륜 군주임에 틀림없다. 사도세자의 사도라는 시호가 영조가 아들을 죽인 후에 슬퍼하여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 임오화변 시점의 사도세자는 심각해진 양극성장애[42] 탓에 살인까지 저지르고 다닌 상황이었는지라 왕이 되면 안 될 인물은 맞다. 이는 그의 생모 영빈 이씨와 친아들 정조조차도 인정했던 부분. 문제는 멀쩡한 자기 아들을 미치광이 살인마로 만든 건 그 누구도 아닌 영조였다는 것이다. 애초에 사도세자는 역사상의 몇몇 군주들처럼 선천적으로 잔혹한 성향을 타고났거나 사이코패스였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 일, 이년도 아니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십수년을 처절하게 핍박당했는데 사도세자가 신화속의 영웅도 아니고 인간인 이상 미치는 것이 당연했다.[43][44]
더 큰 문제는 그렇다고 아들을 끔찍하게 굶겨 죽였어야 했냐는 점인데, 옹호 측에서는 이 방식을 고른 것은 그냥 죽여버리자니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여 사약이나 참수 같은 공식적인 사형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에 자결을 강요했으나 이것도 신하들이 막아 불가능했고,[45] 그렇다고 감옥에 가두면 세자의 어머니 영빈과 여동생 화완옹주[46], 세자빈, 신하들이 몰래 음식을 갖다줄게 뻔하니 결국 죽음을 유도하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사도세자가 끔찍하게 죽어야 했던 이유는 왕실이라는 입장이 만든 비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영조가 자그마치 8일이나 가둬 죽였다는 점에서 사도세자를 죽이는 과정에서 영조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거기에 처음부터 뒤주에 가둬 죽일 것을 고려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자결로 처리하려고 했다가 일이 틀어지자 뒤주로 급하게 바꾼 건데 그런데도 자그마치 8일을 가둬 죽여버린 것을 생각하면 편집증적인 행태가 가장 극명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드러났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몇몇 딸들은 매우 아꼈지만 아들인 사도세자나 딸인 화협옹주에겐 참으로 비정하고 못난 아버지였다.《한중록》의 묘사에 따르면, 자녀들 중 몇몇은 지나치게 미워하고(ex. 사도세자, 화협옹주) 어떤 자식들은 매우 귀여워했다고(ex. 화평옹주, 화완옹주) 한다.[47]
영조의 자식 차별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어 잠시 한방에 있었는데, 그걸 영조가 보고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서 사도세자에게 생난리를 쳐댔고, 사도세자는 기겁하여 창문을 통해 달아나야 했다. 싫어하는 자식과 좋아하는 자식이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견디지 못한 것. 그렇다 하더라도 영조의 반응은 지나친 데가 있기에 둘이 근친상간 관계였고 이를 영조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가 하는 썰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후 기록에서 영조가 예전처럼 화완옹주는 아끼지만 사도세자는 필사적으로 갈구고 구박하는 모습을 보면 이 둘이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중록에서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라는 기록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이는 단순히 남매인 두 사람이 질펀하게 술자리를 가진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영조는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했으나, 그에 비해 화완옹주와 화평옹주는 무척이나 아꼈다. 상술했다시피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노발대발했던걸 볼 때 차별의 수준이 평범한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는 걸 한번에 알수 있다. 추가로, 영조는 때만 되면 귀를 씻은 물[48]을 싫어하는 자식들이 사는 쪽으로 흘려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종의 강박증세도 있었던 셈이다.
사도세자가 눈병에 걸려 책을 마저 읽지 못했다고 하자, 오히려 꾀병을 부린다며 아들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혼냈다. 허나 화완옹주와 화평옹주에겐 자그마한 일로도 지극히 정성을 다해 직접 병문안까지 갈 정도였다.
실록과 한중록을 교차 검증해 볼 때 아들에 비해 딸들을 지나치게 아꼈다. 아내 정성왕후 서씨가 죽은 날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죽자, 신하들이 결사반대 했는데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을 정도였다. 화평옹주가 죽었을 때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파주의 민가 100여채를 사들여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 화순옹주가 남편이 죽고 따라 죽기 위해 곡기를 끊었을 때도 친히 행차해서 말렸다.[49] 다만 이때 영조가 미음을 먹으라고 명령하자, 억지로 마셨다가 곧 토해버려서 영조는 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탄식하며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화순옹주는 단식 14일 만에 죽었는데, 배신감을 느꼈는지 정려[50]하자는 신하들의 제안에 '불효요 불충이다'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은 것도 비슷한 시기라 이 시점에서 화순옹주를 정려하면 화완옹주도 순사(殉死)를 하라는 뜻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화순옹주는 결국 정조 대에 정려된다. 딸 중에서는 미워했다던 화협옹주도 위독했을 때는 한걸음에 달려가 밤을 새워 딸의 곁을 지켰고, 결국 그녀가 죽었을때는 크게 슬퍼하며 죽은 뒤에도 밤늦게까지 환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51] 뿐만 아니라 평소에 대간, 대신들이 "출궁한 옹주의 사저로 납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만류해도 무조건 "닥쳐"로 일관해가며 딸 사랑을 표현했다. 가장 사랑했던 화평옹주는 시집 보내고 나서도 아예 궁에서 살게 했다.
사도세자는 광증이 생기기 전에는 양녕대군급 인간말종까진 아니었지만, 유학 공부를 썩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52]영조는 세자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여러차례 실망을 드러냈고, 아들이 공부를 할 때 영리한 면모를 보이면 매우 기뻐했다. 영조가 아들을 꾸짖고 닦달하기 시작한 시기도 사도세자가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부터이다. 영조 자신부터가 선왕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최고 정적으로서 왕세제 시절부터 소론측과 대립했고,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자랐는데다, 다른 남자 혈족들 또한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였을 터라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로 본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53] 그러나 머리는 좋아 보이지만 학업을 멀리하는 아들이 정적으로 보이긴 어렵고[54] 그냥 사도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에, 영조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결부되면서 차차 발전하여 나중에는 죽일 정도로 미워진 것일 가능성도 크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성향도 잘 맞지 않았다. 영조가 몰아붙여도 사도세자는 자기 변호도 하지 못했다.
영조가 아들 교육에 조급했던 것은 사도세자가 늦둥이였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 왕들은 환갑(60세)을 넘기기 힘들었는데 사도 세자는 영조가 40세가 넘어서야 태어났다. 영조가 다른 왕들처럼 50대에 죽으면 세자는 10대에 왕이 되는 것이니,[55] 영조는 세자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길 기다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사도세자의 후계자 교육에 열을 올리며 그를 과하게 몰아붙였으나 세자는 총명한 머리에 비해 공부에 대한 열의가 모자랐다. 이를 영조가 이해하지 않고 몰아붙이기만 하면서 결국 세자는 정신병에 걸리고, 영조는 그런 자식을 계속 학대하다가 결국 살해하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다만 그 모든 속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사도세자를 공식적인 처벌이 아니라 이런 정신나간 수단을 써서 처리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훗날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긴 해도 생부가 역적이자 서인으로 남을 순 없으니 죽기를 기다렸다가 즉각 사도란 시호를 내려서 사도 세자가 미쳐서 그런 거지 역적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었고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도 단순히 폭발하여 날뛴 것 치곤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졌다. 순전히 정조에게 '죽어 마땅한 죄인의 아들' 이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않기 위해서.
사도세자 사후 몇년 뒤 약간은 기분이 풀렸는지 혹은 세손인 정조를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현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44년인 1768년 5월에 효장세자와 의소세손의 묘에서는 신하들이 예를 행했으나 사도세자의 묘에서만은 예를 행하지 않아 크게 분노해 신하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에도 관련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신하들이 수은묘(사도세자의 무덤 즉 사도세자를 뜻한다)를 10년 동안 섬긴 신하들이 많은데 의소세손이 누구의 아들이고 손자냐며 무심함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냐고 크게 분노했다. 다만 실록의 기록에서는 신하들이 압존(壓尊)때문에 효장세자의 무덤에 절하지 않아서 효장세자에게 예를 다하지 않았다고 폭발한 후 덤으로 언급한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자기 아들에 한해서는 극심한 강박 증세를 보였다는 건 확실하다. 지금까지도 현대 사람들에게 까이는 대표적인 오점인 임오화변 덕에 영조는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로서는 자격 미달인 인물로 여겨진다. 영조가 열심히 국정에 임했고 여러가지 업적이 많음에도 평가가 엇갈리는 건 이 탓인 듯. 사실상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음에도 그 아들을 잘해주지 않고 핍박하다가 죽음으로 내몰 때 보인 태도는 상당히 완고했다.
사도세자를 끝내 사사한 일로 아들을 미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정작 정빈 이씨 소생인 장남 효장세자는 총애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조숙하고 총명한 모습을 보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효장세자가 갑작스런 병으로 10세에 요절했을 때 몹시 애통해했다고.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태도 변화를 감안하면 효장세자 역시 사도세자처럼 장성했을 경우 영조의 그에 대한 총애가 한결같았을지는 미지수이다.[56]
현대 한국의 부모들도 자신의 자녀에게 영조처럼 공부를 과하게 강요하고, 자녀의 역량보다 기대치를 높게 잡으면서 학대하다가 자녀의 인생, 더 나아가 부모 스스로의 인생까지 모조리 망쳐버리는 사례가 상당히 빈번하기 때문에 영조의 가정사는 반면교사로 자주 언급된다. 교육학적으로도 자녀가 스스로 교육에 대한 흥미와 긍정적 감정을 가지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중요하지, 자녀가 공부를 못 한다고 욕하고 압박하기만 하면 오히려 공부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서 더 상태가 안 좋아지기 마련이다.
7.2. 할아버지 영조
자식들도 저렇게 차별했는데 당연히 손주들이라고 공평하게 사랑했을 리는 없다. 의소세손이나 정조[57][58]를 비롯한 혜경궁 홍씨를 어머니로 둔 적손들에게는 엄청난 사랑을 주었지만, 사도세자의 후궁 소생인 서손들에게는 그 어떤 사랑조차 주지 않았고 오히려 박대했다.예를 들자면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난 은언군과 은신군이 사소한 잘못을 했을 뿐인데도[59][60]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린 손자들을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결국 이들 중 한명인 은신군은 유배지에서 죽어버렸고 은언군은 재위 말년에 가서야 신하들의 상소로 마지못해 풀어준다.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에서 난 청근옹주의 경우에도 부마가 확정됐음에도 길례를 3년이나 미루다가 겨우 치러주었다. 오죽하면 사도세자의 정실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후궁과 그 소생들에게 질투하지 않는 이유를 한중록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인이 그것이라도 손자라 하시며, 영조나 선희궁께서 약간이라도 봐주시거나 또는 경모궁께서 이것에게 혹하시면, 내 비록 도량이 있다 해도 부녀자의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리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서 영조와 선희궁께서 알은체 않으시고, 경모궁께서는 겁만 내셔서 어찌할 줄 모르시니, 그 와중에 나까지 투기하면 경모궁께서 황겁하신 중 근심하셔서 병환이 몇 층이나 더하실 줄 알리오.
요약하자면 사도세자의 후궁들을 영조와 사도세자가 너무 심하게 박대해 본처인 혜경궁이 동정심을 가지고 챙겨줄 정도로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은언군이 태어났을 때 혜경궁 홍씨에게 '왜 너는 투기조차 하지 않느냐? 그러고도 여자냐?'라고 따로 혼내기까지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숙빈 임씨가 자신의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가 두려워서 어떻게든 임씨의 아이를 지우려고 발버둥쳤다.
유난히 아들의 서자녀들에게만 가혹했던 이유는 그 생모들이 전부 다 양반가 규수출신의 간택후궁이 아니라 미천한 신분이여서 정을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후궁들은 죄다 궁녀 아니면 평민/천민 출신이었으며, 간택후궁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영조가 서손들을 그 정도로 싫어한 것은 그 아이들이 결국 사도세자가 저지른 비행의 결과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영조 본인의 어머니 신분이 천하다는 컴플렉스가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는 심리로 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람은 자신과 닮은 대상에게 공감을 느끼고 잘 챙겨주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 사람이 자신과 닮은 부분이 자기가 혐오하고 감추고 싶은 자신의 컴플렉스에 해당한다면 오히려 그 대상에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보편적인 심리 행태이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후궁과 아이들을 챙긴 건 정조였다. 특히 정조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매번 역모에 휘말려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음에도, 단식 투쟁까지 하면서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지키려고 애썼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한번 동침하고 잊어버린 궁녀도 다시 찾아내 시호까지 부여했을 만큼 아버지의 가족들을 지키려 들었다.
다만 사도세자가 왕세자 신분임에도 궁녀를 함부로 건들여서 후궁으로 삼고 임신시킨 건 매우 큰 일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후궁이 낳은 왕손의 탯줄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조정에서 의논할 정도였다.[61][62]사도세자가 두려워하고 영빈 이씨가 돌봐주지 않은 데는 이러한 배경의 영향이 크다. 게다가 반복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영조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영조가 단순히 감정 때문에 서손들을 박해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됐건 사도세자는 죄인었으며 마찬가지로 원칙상 사도세자의 아들들 또한 아비의 악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처지였다. 그나마 정조는 법적으로 효장세자의 아들로 이적했지만 사도세자의 서손들은 그대로 남게 되었고, 여기에 둘은 위에서 언급대로 본인의 입지를 망각하고 교만하게 굴었고 심지어 사치를 일삼는다는 고발까지 들어왔다. 이미 사도세자가 생전 연회와 아랫사람들에게 주는 하사품 구입 등에 많은 돈을 쓰는 등 사치와 유람에 세자궁(동궁)의 예산이 바닥나 시전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리고는[63] 갚지 않아서 결국 이를 안 영조가 세자를 질책하고 국고로 돈을 대신 탕감했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니 왕의 권위에 집착하던 영조에게 있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실제로 벽파와 정순왕후 역시 영조 사후, 정조에게 서손들의 죄를 이유로 참해야 한다며 압박을 여러번 넣기도 했다.
일단 자기 아들을 이해할 생각도 안하며 미친듯이 몰아붙이기만 하여 광증을 앓게 만들고 신하들이 강력 반대했음에도 뒤주에서 굶겨죽인 사람이니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아마도 강박증이나 편집증 증세가 심각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64], 만일 이 증세가 조금만 더 심했으면 정조도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있다. 만약 정조가 처신을 개판으로 했으면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정조의 이복 형제들이자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형제가 폭발한 영조에 의해 모조리 유배를 가서 은신군이 귀양지에서 병으로 죽고 은언군은 영조가 죽는 날까지 풀려나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 이면에는 풍산 홍씨 일가와 경주 김씨 일가의 대립이 있었고 경주 김씨 측이 왕손들과 친한 풍산 홍씨를 공격하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 자기 친손자들이 처신을 엉망으로 했단 이유로 이렇게나 엄벌하여 고생시키고 죽게 만들 정도면 정조라고 마냥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학업에 열중하고 효심까지 보여주는 등 영조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했고 훗날 영조가 죽기까지 십수년 간 총애를 받으며 꾸지람이나 질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80살쯤 노환으로 앓아눕고 치매로 추정되는 상태까지 이르렀음에도 정조에 대한 신뢰만은 굳건했을 정도.
야사에선 실제로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고 전해지는데[65]《맹꽁이 서당》에서는 정조가 읽고있는 책 내용에 영조가 싫어하는 내용[66][67] 있었는데 정조가 얼떨결에 거짓말로 그 부분만 가렸다고 말하자 영조가 확인차 가져와보라고 했고 이를 가져다 주려던 홍국영이 무언가 이상한걸 느껴서 그 부분만 가리고 가져다 주어서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68] 물론 어디까지나 야사일뿐, 이미 영조 자신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인 시점에서 정조를 죽였다간 정통성이 있고 유능한 후계자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정조가 약간의 실수를 한다고 실제로 죽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사료를 종합적으로 확인해보면 정조가 행동을 잘못했을 경우 위험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과장에 가깝다.[69] 영조는 정조가 태어났을 때부터 정조를 이뻐하였으며[70] 죽을 때까지 정조를 아꼈다. 김귀주가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홍봉한을 공격할 때 정조까지 연루된 적이 있는데[71] 그때도 영조는 정조가 먼저 이야기하길 기다렸고 정조의 말을[72] 믿어주었다. 또한 영조는 정조를 가르칠 때는 사도세자때와는 달리 칭찬을 주로 하며 과도한 공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조가 쓴 <일성록>에는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우니 더 깊게 가르치지 말라고 딱 자르는 영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사도세자와 달리 조기교육도 시키지 않았다. 이때문에 사학자들은 영조가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사도세자 교육에 대해서 반성하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정조를 교육한 것 아니냐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사도세자를 죽인 일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를 잃은 정조에게 미안해하거나 안쓰러워하는 기색은 여러 번 보인 일이 있다. 손자 앞에서 '네 아빠를 죽인 건 대의를 위해서다. 문제 있냐?'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그랬는지 홍계희, 김상로가 나쁜 놈이라고 은근슬쩍 말을 돌리기도 했는데[73] 정작 사도 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는 영조가 홍계희, 김상로 보고 세자를 옹호한다고 벌을 주었고 실제로 그들이 사도세자를 압박한 정황은 없다. 게다가 그런 발언은 정조가 훗날 내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죄없이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나중에 남인이 이게 다 노론 때문이다!를 외치는 도화선이 되었고 훗날의 이덕일 음모론의 최고 떡밥이 되었다.
한편 정조 외에도 적손녀인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는 상당히 총애한 편이었다. 가령 청연공주의 경우엔 태어날 당시 "백여 년 만에 군주(郡主)가 처음 나니 귀하다" 라며 기뻐했고, 청연공주가 혼인하여 출가한 뒤에도 사저를 직접 찾아간 사례가 있다.
영조는 정조에게 있어 자신의 친아버지를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결국 스스로 죽인 할아버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세손을 지켜준 후견인이자 보호자이며 은인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쁨받았으며 유년시절부터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길었기때문에[74]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75] 사도세자 사후 혜경궁 홍씨의 집안과 정조의 사이가 악화되면서[76],정조는 영조에게 자신의 신변을 전적으로 의지했다. 사실상 정조의 가장 큰 버팀목[77].이때문에 정조가 고난을 겪은 시기 또한 영조의 건강이 악화되어 국정을 돌보지 못한 2년이었다. 정조는 그런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흠모를 꾸준히 드러냈다.[78]
영조와 정조의 관계가 괜찮았단 걸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몇가지 있는데 대표적으로 잠화(簪花)에 관련된 일화다.[79] 영조의 장수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을 때[80], 영조는 사치를 경계해 연회에서 잠화(簪花)[81]를 꽂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명령을 어기고 잠화(簪花)를 꽂은 채 참석했는데 그 모습을 본 영조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네 할아비는 잠화를 꽂지 않았는데 너만 유독 잠화를 꽂았으니, 네 마음에 편안하니?”그 물음을 들은 정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다면 소손을 위하여 성상께서도 잠화를 꽂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 답을 들은 영조가 웃더니 세손을 위해서 잠화(簪花)를 꽂는 것을 허락했다고 .
7.3. 시아버지 영조
영조의 며느리로는 장남 효장세자의 정실 현빈 조씨, 차남 사도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 측실인 숙빈 임씨와 경빈 박씨가 있는데, 정실부인은 아꼈으나 사도세자의 비행으로 들인 측실은 홀대했다.영조는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14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 현빈 조씨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두 자식[82] 중 한 명이라고 하고, 현빈의 사망 이후에도 생일을 챙길 정도로 매우 아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경우 정실이기도 하고 원해서 간택한만큼 혜경궁을 아껴주었다.[83] 임씨와 박씨는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는데[84], 사도세자가 저지른 비행때문에 사도세자의 후궁들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경빈 박씨가 사도세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되자, 경빈 박씨를 '강직하다'라고 평가하는 등 사람 자체를 나쁘게 보진 않았다.
7.4. 남편 영조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도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정성왕후를 유달리 박대했다. 영조는 2비 4후궁을 두었는데, 후궁은 자신이 원해서 들인만큼 대체로 총애하였고 정순왕후와의 관계도 괜찮았지만 정성왕후를 유독 박대했다.7.4.1. 정성왕후
정실인 왕비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부부 금슬이 아예 최악이었다. 영조와 정성왕후 부부의 사이가 최악인 건 적어도 궁궐 내에서는 공공연했고,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정성왕후를 제대로 대우해주고 따른건 아들인 사도세자[85]와 그의 친모인 후궁 영빈 이씨였다.[86]야사에는 결혼 첫날 밤에 정성왕후가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첫날 밤 영조가 "손이 참 곱습니다."며 감탄했는데 무심코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 이게 그렇게나 소박맞을 일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녀의 이 발언을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숙빈 최씨는 궁녀인지 무수리인지 현대까지 논란이 분분할 정도로 출신이 불분명하며,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외모와는 달리 손마디도 굵고 손이 참 거칠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연잉군(당시)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 그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서덕수는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1명이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라고 발언하기도 했다.[87] 영조는 서덕수 덕분에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정성왕후는 죽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증 가지고 엄살부린다"며 씹어버렸고 그녀의 병세와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대전 내시에게 대신 보고하여 영조가 진찰 내용을 간접적으로 보고받을 정도였다. 영조는 심지어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 때도 찾아오지도 않으며 파토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 게 한이 맺혀 시름시름 앓다가 단명했을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로는 정성왕후도 나름 장수했는데 1757년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만 65세였다.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요즘 기준으로도 단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724년에 왕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바꿔 말하면 그 오랜 세월을 비정한 남편한테 철저하게 무시당하면서 살았고 최후까지도 남편이 박대했으니 더욱 불행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위의 손 일화는 야사에 불과하지만 정성왕후와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아내의 장례는 내팽개치고 사위의 문상을 먼저 갔다는 걸 보면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영조 본인은 느릿느릿 와서는 사도세자더러 "네 옷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명색에 일국의 국모이자 조강지처의 죽음은 본체만체 하고 일개 서녀에 불과한 옹주의 남편을 우선시하는 행태에, 신하들과 대간들까지 경악하며 행차를 결사반대했지만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며 강행했다.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가 정순왕후 김씨의 눈치를 본 탓이다.[88] 영조는 오히려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려고 빈 자리를 마련했다.[89]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거기는 원래 효종이 매장되었다가 파묘된 자리였다.[90]
죽은 이후의 행보도 비극적이었는데 영조가 자신의 계획을 위해 그녀의 죽음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임오화변 당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명분으로 가져온 것이 "5년 전에 죽은 정성왕후의 혼령이 사도세자의 변란을 알려줬다"는 명분으로 사도세자를 몰아세웠으며 이후 뒤주형도 당시 정성왕후의 위폐가 있던 휘령전(창경궁 문정전)앞에서 이루워졌다. 앞서 언급됐듯이 사도세자가 생전 정성왕후를 친모처럼 따랐던 것을 생각하면 영조가 단순히 정성왕후를 박대한 게 아니라 뭔가 심각한 악감정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7.4.2. 정빈 이씨
영조의 첫사랑으로 추정되는 궁녀출신의 후궁이다.[91] 영조와는 동갑으로 화억옹주와 효장세자 그리고 화순옹주를 낳았다. 영조가 직접 쓴 치제문이 남아있는데, 읽어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제문에 따르면 8살에 처음 만났으며,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영조가 연잉군때 묻히길 바랐던 묘지에[92] 묻혀있다.7.4.3. 숙의 문씨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나온 후궁 숙의 문씨가 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한테 대들며 말대꾸를 하는 장면은 놀랍게도 <현고기>[93]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 왕실의 후궁들 중에서도 으뜸인 빈의 지위에 앉은 영빈 이씨에게 일개 숙의 따위가 대든다는 것은 내명부의 위계 질서를 완전히 흐트리는 짓이다. 숙의 문씨의 오만방자한 짓거리에 분노한 당시 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벌로 그녀의 회초리를 때렸다고. 다만 <한중록>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이를 원인으로 일어났다는 소동도 당파싸움이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어 가능성이 낮아보인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도 숙의 문씨가 악랄한데 영조만 못 알아차리고 숙의 문씨를 총애했다는 점은 언급되며, 정조는 숙의 문씨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숙의 문씨는 정조가 즉위한 뒤에 폐서인이 되어 처형당하고 만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봤을 때 국왕인 영조의 총애만 믿고, 주변을 죄다 적으로 돌린 숙의 문씨의 처신이 그만큼 엉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7.4.4. 영빈 이씨
궁녀 출신에 당시로서는 혼기가 지난 나이에 왕비를 제치고 영조의 가장 많은 자녀와 세자까지 낳은 후궁.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죽은 후 신하들에게 후계자를 생산할 것을 압박받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옹주만 낳는 영빈 이씨를 총애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후궁을 찾기 시작해도 영빈 이씨는 나름 대우를 해줬으며 영빈이씨가 죽자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묘지문을 지어주고, 혜경궁과 정조가 장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대우했다. 첫사랑이었던 정빈 이씨와 함께 가장 사랑했던 여성이 아닐까 추측된다.7.4.5. 정순왕후 김씨
영조는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았다.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는 주위에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 경악할 일이지만 왕비가 죽으면 지존을 내조할 내명부의 수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반드시 정실을 들여야 했고 왕이 늙었다고 왕비 후보들이 왕 나이에 맞춰서 늙어있을리는 없기 때문에 왕은 초혼이든 재혼이든 10대 중후반의 배우자를 맞아야 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나이 많은 남성이 어린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금기시되거나 뒷말이 나올 행위는 아니었으며 그래서 왕의 어머니 뻘인데 왕보다 어린 경우[94]도 종종 있었다.[95] 숙종 이전의 왕들 중에서는 문종-현덕왕후, 성종-정현왕후, 중종-장경왕후처럼 후궁을 왕비로 책봉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경력이 좀 되고 출신과 배경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후궁을 뽑아 왕비로 승격시키면 안 되는 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영조 시기는 숙종이 후궁의 왕비 책봉을 금지한 이후였으므로 불가능했다. 다시 고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아주 예전 임금도 아니고 영조의 부왕인 숙종이 내렸던 조치였으니 영조로서도 법을 바꾸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영조의 후궁들 중에는 왕비에 오를 만한 배경을 갖춘 간택후궁이 없었는지라 후궁의 왕비 책봉 금지법이 없었더라도 영조는 계비를 새로 간택해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몇백년만에 친잠례를 열어서 정순왕후가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직접 주관하게 하는 등 정순왕후의 입지를 나름 신경을 써준 것으로 보인다.7.5. 동생 영조
동생이자 세제로서의 영조에 대한 평가는 조금 애매한 편이다. 우선 당시 상황만 놓고 보면 형 경종과 동생 영조는 도저히 친하게 지낼 수가 없는 사이였다. 당장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왕이고,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어 경종이 거의 반강제로 세제로 책봉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죽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다름아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였다. 심지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있는 등, 정치적 상황만 보면 오히려 철천지 원수나 정적에 가까워 보였다.게다가 경종과 영조가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건이 있기도 했는데, 신축환국 직후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연잉군이 '환관과 궁녀 중 나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사해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자, 경종은 이를 거부했다. 연잉군이 거듭 요구하자 경종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게다가 뒤에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해 영조가 역적 수괴로까지 몰릴 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종이 연잉군 시절 영조에게 단풍 잎사귀를 가지고 장난치는 등의 일화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경종은 동생을 끝까지 보호하며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영조 역시 뒤에 계속해서 그를 황형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하고 회상하는 듯한 기록이 실록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설령 불편한 관계였더라도 서로 존중이나 우애가 아예 없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1] 자양분도 많고 맛도 좋음을 의미하는 말로, 현대어 '재미'의 어원이다.[2] 다만 태종은 이미 고려 시절에 과거에 급제했을 정도로 학업의 최고의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3] 사실 조선왕들 중에서 가장 경연에 게을렀던건 광해군으로 재위기간이 15년인데 경연을 한 횟수가 15번이 안 된다. 반면 경연을 게을리했을 것 같은 연산군은 의외로 세자릿수다. 이는 연산군이 무오사화 전까지는 국정을 정상적으로 굴렸고 대중적으로 흔히 폭군의 이미지이자 막장왕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인 듯하다. 연산군이 본격적으로 막나간 시점은 갑자사화 이후부터이다.[4] 그러나 영조를 대단히 싫어하고 조선 자체를 혐오하는 북한에서는 영조를 자식을 살해한 봉건적이며 악랄하고 악마같은 반동 전제군주라고 맹렬히 까며 인민을 전혀 돌보지 않은 간악무도한 왕이라는 엄청난 악평을 남기고 있다.[5] 동한 세조 광무제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6] 유력자의 저택. 잠저인 창의궁 시절을 말한다.[7] 언문으로 된 글.[8] 그러나 자신의 눈밖에 난 아들이 소설과 잡기류에 흥미를 보이자 노발대발한 모습들을 보이는데 아무래도 손자인 정조가 소설 잡기류를 부정적으로 보고 문체반정이란 문화적 쇠퇴를 부른 것도 결국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트라우마 때문인것으로 보인다.[9] 눈물을 무기로 삼기도 했다. 숙종, 경종과 관련된 곳만 갔다 하면 숙종과 경종이 그립다고 울었으니 수신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건 매우 좋은 프로파간다였다.[10] 조선은 '나'(予)의 것이니 노론도 소론도 모두 식물정당으로 전락하는 것이 곧 탕평이라는 영조의 정치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11] 이처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신하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는걸 선호한 왕은 세종이 대표적이고, 반대로 막후에서 정치적 공작을 더 많이 썼던 왕으로는 중종, 선조 등을 들 수 있다. 태종의 경우 두가지를 병행했다.[12] 한 사례를 들자면, 노론 이의연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 측 인사들을 죄주라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해 영조와 소론이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소론 이거원이 이의연을 죄줄 것을 청하면서 "논어에 이르기를,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의연의 죄를 명백하게 다룬다면 차후로는 절로 이런 흉소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영조는 "공자가 말하기를, ‘덕으로 이끌고 예로 가지런하게 하며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고 하였으니, 덕과 예가 위이고 법과 형벌은 그 다음이다."라고 응수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얘기는 논어 위정편에 나온 것으로서 이거원이 문장의 일부만 가지고 와서 얘기할 때, 영조는 문장 전체를 예시로 들었다. 또한 공자는 이 문장 이전에 "형벌로써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덕치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따라서 영조의 주장은 근거와 출처가 확실하고, 덕치를 중시하는 유학자의 입장까지 고려한다면 소론 측의 주장보다는 영조의 주장이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의연은 이 일로 절도에 유배당했으나, 소론은 이광좌, 조태억 같은 영수들과 사헌부, 사간원이 죄줄 것을 청하고서야 유배를 보낼 수 있었다.[13] 다만 삼수의 옥이 터져 역적 수괴로 몰리자 그때는 그야말로 데꿀멍했다. 바로 거적을 깔고 "나같은 놈이 세제라니 어림없는 일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페세제를 청했다. 경종의 보호로 왕위를 잇게 되긴 하지만.[14] 재위기 내내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을해옥사 이후 절대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신하들을 무시,압박하면서부터다.그 전 시기에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타협적인 군주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원인 중 하나는 장수로 뽑는데 또래 혹은 더 나이가 많은 신하들이 다 죽는 바람에, 아들뻘 손주뻘의 신하들의 간언이 영조에게 와닿지 않았고 경험의 차이도 컸다.[15] 매 끼니를 제때 챙겨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와전된 게 아닐까 의심된다 본인부터가 공부가 끝나지 않았다면 식사를 굶는 일이 잦았다.[16] 정확히는 무강(武講)[17] 동시대 인물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당시 뜸을 들인 초관인 홍건이란 자가 몰라서 그런거다 지레짐작하고 볼기를 쳤는데, 후에 홍건이 넌지시 영조의 답이 진작에 틀렸으나 일부러 모른 척 했다고 일러주었다. 신하들 앞에서 망신을 살 뻔한 영조는 그의 배려에 감동해 지방 수령으로 올려주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기서 영조가 금주령 기간에도 몰래몰래 술을 마신 증거가 나오는데, 저 당시 송절다를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기술돼있다.[18] 나중에 영조는 근검절약을 위해 궁녀의 수를 줄였다. 단순히 궁녀를 더 데리고 있고 싶어서의 문제가 아니다.[19] 실록에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라고 표현되었지만, 영조의 성격, 실록의 완곡한 표현, 그리고 전례 등을 감안하면 욕설로 보인다.[20] 상협련군(廂挾輦軍) : 상군(廂軍)과 협련(挾輦)의 준말. 상군은 임금의 거둥[96] 때 호위하는 군사이며, 협련은 훈련 도감에 딸린 군대로 임금의 연(輦)[97] 을 호위하는 군사.#1 #2[21] 수면시간이 평균 5시간 정도였다.[22] 실록을 보면 왕이 종기 때문에 고생하거나 끝내는 승하했다는 기록이 제법 나오는 편인데, 종기의 원인은 대부분 하나로 못박기 어려운 다양한 감염성 질환인 경우가 많은지라 말 그대로 '기타 등등'이다. 그러나 당대의 위생 및 의학적 한계와, 과로와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약해지기 쉬움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일이 유난히 많다 보니 유전적으로 면역 계통에 결함이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23] 조선시대 1홉은 60cc고 당시 성인남자들은 7홉정도를 먹었다. 영조의 식사량은 당시 어린 아이들의 식사량과 비슷한 수준이다.[24] 사실 신선한 고기라는 것이 현대와 같이 유통과 냉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에는 상당히 귀한 것이었기에, 귀족이나 왕족이 아니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것이었다. 헌데 조선 국왕의 수라는 지나치게 화려한 나머지 오히려 채소가 희귀한 문제가 있었다.[25] 이때문에 검소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어폐가 있다. 애초에 신하가 더 올리겠다고 하자 원래 올라오는 만큼만 먹겠다며 바로 거절했다는 게 실록의 기사다. 이는 영조의 검소함을 칭송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 영조의 통치이념이자 핵심개혁의 기조라고 뽑는 것 중 하나가 '계사치' 즉 사치를 경계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영조는 진상되는 공물을 대폭 줄이고 잘못된 관습을 고치는 공물진상개혁을 단행했다.[26] 균형잡힌 식사를 했으며, 영조가 앓아 누웠을 때 사도세자가 구해 온 고추장에 감격한 것을 계기로, 이후 고추장을 매우 즐겨 먹었다고 한다.[27]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고추장을 바쳤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28] 다만 <승정원일기>를 보면 식사를 거르거나 늦게까지 자지 않으며 야대를 하다 서명균을 비롯한 신하들이 이를 문제삼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 노년기에는 그랬거나 아니면 좀 와전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대목[29] 오래 살아서 영조는 건강했을 거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 허약한 체질이다. 소화를 잘 못하고 손이나 팔이 마비되는 증상을 빈번하게 보이는 등 평생 잔병치레를 하고 살았다. 영조 뿐 아니라 아버지인 숙종 형인 경종 모두 공통적으로 허약했고 소화기능도 떨어지는 양상을 보이는 모습을 볼 때 유전으로 보이는 부분. 정조와 사도세자도 소화기관은 약했다.[30] 실제로 장수하는 노인들은 검은 머리가 다시 나거나 이가 다시 나는 사례가 드물지만 종종 보인다고 한다.[31] 숙빈 최씨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게 없지만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음에도 숙종이 후궁으로 삼을 것을 보면 빼어난 미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2] 집에 돌아와보니 세제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머물렀던 검암 주정소에 정조가 세운 치적비가 있다.[33] 영조 31년 5월 20일, "여러 해 동안 벼슬한 신하를 만약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역적으로 의심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믿고 나를 섬기겠는가?"[34] 영조는 군사(君師), 즉 임금이 만백성을 이끌 수 있는 스승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기절제와 공부를 중요시여겼다.[35]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 경종에게 폭언과 욕설을 들었다고 한다.[36] 숙빈 최씨가 첫째 아들(영아일 때 죽었다)을 낳자 남인이 점을 쳤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당시 숙종과 여성들 그리고 자식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는 치열했다. 인현왕후가 복귀한 갑술환국자체가 서인이 인현왕후 복귀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남인의 고발과 임신한 숙빈 최씨(당시는 숙원)를 독살하려고 한다는 서인의 맞고발로 시작되었다. 이때 숙빈 최씨가 서인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숙빈 최씨가 임신하고 있던 아이가 영조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셈[37] 세제 시절 때 목숨의 위협을 느낀 사건만 해도 신축옥사, 박상검 사건, 임인옥사 세번이다. 영조어제에 수록되어 있는 시를 보면 노년기에도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읽다보면 전형적인 PTSD 환자 같은 느낌을 준다.[38] 일찍이 경자년575) 대상(大喪) 뒤에 전도(前導) 없이 대궐로 가다가 길에서 대신(大臣)을 만났는데, 앞에 있으면서 끝내 길을 비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뒤따라 가지 않으려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갔었다. 내가 왕자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영조실록>,9년 11월 7일[39] 가장 유명한 것이, 차르가 직접 황태자를 때려죽인 이반 4세가 있다. 다만 조선에 한정해서 보면 희귀한 일이 맞다.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 적자이든 서자이든 왕자를 죽인 왕은 단 두 명 뿐이다. 복성군을 죽인 중종, 그리고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이다.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인조를 포함해도 세 명이다.[40] 이때의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확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국가 공식적인 죄인으로써 죽게하는 것보다 그냥 편법으로 죽여서 정조의 정통성 시비 논란을 최대한 덜려고 한 정치적 목적이 있다.[41] 영조가 사도세자를 비정상적으로 학대한 것은 실록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42]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사도세자는 양극성장애가 유력하다. 한중록을 보면 아주 교과서적인 조울증 증상을 보인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들도 사도세자가 양극성장애라는 논문을 내기도 했다.[43] 양극성장애는 매우 유전력이 강하므로, 의학 논문에서는 유전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가계도를 확인하고 있다. 그 결과 경종과 영빈 이씨, 그중에서도 경종이 특히 의심된다고. 단순히 학대만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유전력과 영조의 계속된 학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러한 결과를 낳은 듯 보인다.[44] 다만 사도세자는 이로 인한 화증을 약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풀었던 강간, 폭행, 고문 살인마다. <한중록>에서도 아랫 사람들을 때리고 다니는 와중에도 영조나 대신들 앞에서는 멀쩡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직접 죽이고 싶다고 발언까지 한 대신은 임오화변 이후 병사하지만, 만만한 환관, 궁녀들은 거리낌없이 해쳤다.[45] 사실 영조 입장에서는 자결이 성사되는 것이 베스트였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자결하여 명예는 지켜진 것이니 정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신하들 입장에서 그런 영조에게 순순히 따라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명색이 신하인데 조선의 유교법상 왕이 죽을 죄가 없는 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걸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것도, 그런다고 진짜 자살하려는 세자를 말리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된다.[46] 당시 사도세자의 형제들은 화완옹주만 제외하고 모두 사망한 뒤였고,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와 우애가 깊은 사이였다.[47] 다만 한중록에서는 영조가 화협옹주를 미워했다고 묘사하나, 저자가 시누이들을 싫어했던 혜경궁 홍씨라 신뢰성이 의심받기도 한다. 당장 화협옹주가 위독할 때 친히 달려갔다는 기록도 있으며, 결국 화협옹주가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죽자 슬퍼하긴 했다. 설령 미워했더라도 아들만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자세한 건 화협옹주 참고.[48] 영조는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귀를 닦았다고 전해진다.[49] 남편을 따라 순사해야한다는 왜곡된 유교 의식을 따른 건 아니고, 친어머니 정빈 이씨를 어릴 적에 여읜 것 때문에 가족에 대한 정을 느끼지 못하고 외로움을 타던 차에, 하필 남편까지 죽어버리자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서 그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50] 효자나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에 문을 세우는 것. 효자문이나 열녀문 등이 있다.[51] 문제는 정작 그런 화협옹주가 죽은지 1달도 안되어 선위 파동을 일으켜 화협옹주와 우애가 깊었고 그녀의 죽음에 상심이 컸던 사도세자를 빈사 상태에 몰아넣는 짓거리를 하였다.[52] 또래보다 똑똑하고 또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기는 10대 이전에서 끝이 난다. <한중록>에서도 우회적으로 공부를 싫어했다는 걸 지적하는 기록이 있고, <승정원일기>를 확인해보면 "1년에 한 두번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사도세자와 실망하면서도 "솔직해서 좋다"며 사도세자에게 화를 내지 않는 영조의 모습이 보인다.[53] 선조와 광해군의 경우도 그러하듯 정통성이 부족한 왕과 세자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긴장관계는 있다.[54]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공부를 해서 끝내 신하들을 가르칠 경지에 올랐는데, 자신이 이렇게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공부를 하는 와중에 해야할 학업을 멀리하는 아들이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에는 왕 혹은 왕세자가 잡기에 눈이 팔려 해야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영조만 해도 왕자시절 그림을 매우 잘 그리기로 유명했는데, 즉위 초에 공부해야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안된다는 신하의 간언으로 이후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55]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은 47세정도다. 영조가 평균이상으로 살지 않았으면 10살도 되지 않은 사도세자가 왕에 올랐을 것이다. 탕평정치라는 것 자체가 충역시비로 변질되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던 사림정치를 왕이 억누르고 중재하는 형태였던 만큼 당시에는 왕의 역할과 학문적 소양이 매우 중요했다. 이를 직접 겪었던 영조로서는 굉장히 조바심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가 어린 아들을 두고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벽파와 시파의 정치보복이 다시 시작되고 끝내 시파 및 외척들이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귀결된 이유가 있다.[56] 다만 가능성은 낮은데 효장세자는 공부를 좋아했고 영조 또한 사가에서 태어나 기른 효장세자에 대한 정이 지극했다. 임오화변이라는 비극 자체가 영조에게 너무 늦게 아들이 다시 태어났다는 것도 한 요인으로 뽑히고 있는 만큼 효장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사도세자가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강요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57] 사실 의소세손은 가장 사랑했던 딸 화평옹주의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도중에 기뻐하는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달갑지 않았던 듯.다만 화평옹주의 환생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매우 이뻐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58] 정조도 의소세손의 상중에 태어나서 좋아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한중록>의 내용과 다르다. 혜경궁은 영조가 의소세손을 잃고 슬퍼하다가 정조가 태어나자 매우 예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경궁에게 이런 아이를 낳은 것은 조상들의 덕택이며 정조를 낳은 것으로 혜경궁이 지대한 공을 세웠다며 칭찬했다고. 정조는 태어나자마자 사랑받기 시작한 걸로 보인다.[59] 이유는 있었다. 공홍파와 부홍파가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영조는 홍봉한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그 와중에 은언군 형제의 수하가 백성을 착취했다는 사실이 고발되는데, 수하인 황경룡은 은언군과 은신군의 유모의 형제로 홍봉한과 관련되어 있었다. 홍봉한이 구해준 유모가 양인 신분인 것 또한 문제가 되었다. 왕실의 유모는 양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60] 은언군의 일생을 연구한 논문에서는 이러한 영조의 행동을 홍봉한이 다른 왕손을 추대하려고 한다 의심했다고 언급한다. 사도세자의 추숭이 불가능하고 정조가 양자로 입적되어 종법상으로 연이 끊긴 상황에서 혜경궁이 대비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은언군 형제가 왕이 되는 것이다. 혜경궁이 대비가 된다면 홍씨 집안은 왕의 사적인 외가가 아니라 공적인 외가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한중록>에서 은언군 형제와 홍봉한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건 이러한 사건에서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함이다.[61]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002011_002[62] 애초에 왕세자가 궁녀를 건드리는 것 자체가 드물다.그냥 전례가 없는 수준[63] 말이 빌린거지 위계를 통한 갈취다.[64] 영조는 스스로 왕으로써의 업무 수행이나 건강 관리, 유교적 군왕의 모습을 보이는데에 있어서도 병적으로 철저했다. 강박적인 성격이 무조건 부정적이라고 보긴 힘들고 좋게 발현된 부분과 안 좋게 발현된 부분이 매우 뚜렷한 것.[65] 채제공의 <번암집>에 있는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정조가 분노한 영조에게서 신하를 구해준 일화다.[66] 사기 노중련 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네 어미는 종이었다."(叱嗟 爾母婢也)라고 하는 부분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 출신이었다.[67] 영조가 이 부분을 싫어하게 된 건 영조 12년에 '질차이모비야(叱嗟 爾母婢也)'를 인용해 상소를 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가치관상 이는 영조를 여종의 자식이라고 모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68]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한층 더 과격한 연출을 했다. 영조는 화완옹주에게서 세손(정조)이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일기장을 가져오게 했으며, 홍국영은 세손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구절이 있는 부분을 아예 찢어내 버린 것. 영조는 일기장을 펼쳐들고 찢어낸 자국이 많은 것을 의아해하다가 '할바마마의 옥체 미령하시어(할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걱정이 많다'는 구절을 읽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화완이, 그 못된 것이 모함을 한 게야"라는 말을 곁들여 정조를 물러나게 한다. 정조가 동궁으로 돌아오자 홍국영은 일기장을 사사로이 보고 훼손한 죄를 청하기 위해 한나절 동안 정조의 눈치를 보며 문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이후는 다 아시는 대로 정조와 홍국영의 약속이 오간다.[69] 혜경궁과 정조가 영조의 눈 밖에 날까봐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수는 있지만 영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70] 영묘께서 의소를 잃고 슬퍼하시다가 다시 왕세손(정조)를 얻고 기뻐하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한중록>[71]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추숭해야한다고 정조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정조가 이를 정순왕후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순왕후가 그 사실을 자신의 친정에게 말했고 그 발언이 홍봉한을 탄핵하는데 쓰인 것[72] 정조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즉위 후에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망발이긴하나 사적으로 아무 생각없이 한 것인데 죄를 주기는 문제가 있으며 어찌 그런 이야기를 영조에게 말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냐는 입장이다.[73] 다만 이 발언이 정말로 영조가 한 것인지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영조가 '김상로가 네 원수다'라고 말했다 주장한 건 정조인데 정조는 헌륭원 지문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이었던 평양유람을 도적퇴치를 위한 외출 그리고 홍계희의 모반을 막기 위한 귀환이라고 조작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조와 김상로는 잠깐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말년에는 봉조하가 될 것을 허락하고 시호도 주는 등 관계가 회복된 기록이 남아있다.[74] 영조 36년부터 시작되는 <일성록> 초반부를 보면 영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75] 물론 애정이 있는 것과 별개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만큼 영조에게 가진 감정 자체는 꽤 복잡했을 것이다.[76]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관계가 악화된 원인을 기생집을 출입하는 정조를 자신의 부탁으로 아버지가 막았고 정조가 이를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정조가 외척이 함부로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는 것이 정설이다.[77] 전하께서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될 지 모르겠다.<존현각일기> 11월 30일[78] 문집인 홍재전서에 영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정조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떼어놓지 않은 물품이 영조에게 받은 '효손은인'이다.[79] <조선왕조실록>,영조 41년 10월 4일[80] 이 연회 자체도 영조가 계속해서 거부하자 정조가 식음을 전폐하여 관철해낸 것이다.[81] 인공적으로 만든 꽃, 궁중연회에 쓰이는데 비단이나 밀랍을 써서 매우 비싸다.[82] 다른 한명은 화평옹주.[83]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혜경궁이 유일하게 영조에게 질책받았던 일도 혜경궁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후궁을 도와준 일 때문이었다.[84] 특히 경빈 박씨의 경우 정식 후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종 6품 수칙 (守則)에 머물렀다.사도세자가 또 궁녀를 건드린데다 인원왕후의 상중에 인원왕후의 궁녀를 건든 것에 매우 분노했기 때문이다. 다른 궁녀를 경빈 박씨로 속이는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이 영조에게 들키자 홧김에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고.[85] 사도세자의 적모로서 사도세자를 영조의 학대로부터 보호하고 그를 잘 대해주었기에 사도세자 역시 정성왕후에게 의지하며 사이가 좋았다.[86] 영조는 정성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영빈 이씨는 매우 총애했다.[87] 이 말을 세상에 알린게 영조이므로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88] 다만 정순왕후의 눈치를 본 이유는 정조가 정순왕후를 두려워해서 그런게 아니라 죽기 직전에 정순왕후를 찾을 정도로 그녀와 친밀해서 그랬을 것이다.[89] 그래서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 봉분은 중앙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왼쪽의 빈 공간이 바로 영조가 묻힐 예정이던 자리.[90] 다만 침수 때문에 파묘한 것은 아니며 석물이 무너진 원인은 부실공사로 추정된다. 하지만 다시 봉안하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장되었다.https://sillok.history.go.kr/id/kra_11404019_001[91] 궁녀임에도 별 소란없이 일개 왕자의 첩이 되었기때문에 왕실어른 중 정빈 이씨를 내려준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92] 수길원, 숙빈 최씨의 소령원 근처다.[93] 박함원(朴涵源)이 쓴 임오화변의 전말에 대한 책, 소론 준론의 당론이 강하게 반영되어있다.[94] 예컨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 등.[95] 계비를 안 들였을 경우 유력 왕족에 의한 피바람이 발생될 확률이 높다. 명목상 왕실 어른이 있으면 유교 국가인 조선상 경거망동을 하기 힘든데 광해군이 폐위된 가장 큰 이유가 폐모살제라는 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계비를 안 들였다 피를 본 조선의 왕은 다름아닌 세종과 문종인데 2명 중 1명이라도 계비를 들였다면 단종이 무기력하게 쫒겨날 확률이 적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종 때 일어났던 이른바 '황표정치'나 계유정난 등도 다 왕실에 어른이 하나도 없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수렴청정을 통해 어린 왕을 보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작해야 혜빈 양씨나 안평대군 정도가 다였다. 혜빈 양씨는 후궁에 불과했고, 안평대군도 수양대군과 대립했을 뿐 수양대군의 동생이라 항렬상 별 차이도 없다. 괜히 정순왕후 김씨가 최근에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