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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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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의 삼만
우남 이승만 검은 정순만 우성 박용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박용만
朴容萬 | Park Yong-man
파일:external/search.i815.or.kr/047_003.jpg
출생 1881년 음력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
(現 강원도 철원읍 중리)#
사망 1928년 10월 17일 (향년 47세)
중화민국 베이징 (암살)
본관 밀양 박씨
학력 네브래스카 대학교/링컨 캠퍼스 (졸업)
이명 박용필(朴容弼), 박용만(朴容晩)
우성(又醒, 宇醒)
종교 개신교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신천지 계획4. 비극적인 최후
4.1. 암살의 배후
5. 기타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옌시산 계열의 국민혁명군 참의(參議)로 활동했다.[1]

2. 생애



1904년, 일본에 황무지 개간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이승만정순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2]
석방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 주립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1년부터 임시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해외에서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무장 훈련을 하고, 독립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 이 당시 하와이에는 이미 5천여 명의 한인이 이주하여, 하와이로 건너가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인 국민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이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며 자리잡자 하와이 교포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런 와중 일본 군함이 하와이에 정박할 일이 생기자 박용만은 해당 군함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 군함이지만 미국 땅에서 폭파를 하게 되면 큰 외교문제가 되어 미국에서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에 오히려 악영향을 줄 것이라 여긴 이승만이 이를 미국 정부에 고발하여 박용만의 해당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박용만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밀려나 1918년 남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조선 독립단을 창설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 부총장에 선임되어 주로 중국에서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임정에 실망을 느껴 임정 반대자로 바뀐다. 그 뒤 무장 투쟁론을 버리고 새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이 신천지 계획이다.

3. 신천지 계획

현재의 조선 반도는 지역이 협애하여 도저히 독립군으로 만들기 부족하다. 구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추구하여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하게 할 것이다. [3]

조선 반도는 독립 국가로 만들고 지키기엔 땅이 너무 좁아 대신 시베리아, 몽고, 만주를 고조선의 땅이라 주장하며 거기서 독립군 기지를 세우자는 사상이다. 그러기 위해 1925년에 하와이로 가서 동포들을 설득하려 한다. 자신이 조사한 만주를 설명하며 동북아 대륙은 땅이 넓은데 인구가 적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한 민족이 영주하고 토착하여 자손의 발전을 꾀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땅인 것을 의심한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실제 발언을 보면 독립군 기지를 만들자는거지 한인 국가로 지배하자는 주장을 한 적은 없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일본 첩보원이 미국 내의 한인들에게 들은 내용을 요약한거라 정확한 인용도 아니다.

4. 비극적인 최후

1923년 말 비밀리에 한국에 다녀온 이후 변절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 때 실패했고 국내와 국제 문제 때문에 대부대를 동원하는 출병은 하기가 어려우니 내놓은 대안) 나의 우견으로 볼 때 일본은 오히려 조선 인민을 지휘하여 움직여 정노의 임무를 맡겨 시베리아의 동부를 숙청하는 것이 제일의 양책", "즉시 전위전초의 첨병이 되어" 싸울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물론 이건 조선 총독부와 접촉하기 전에 편지를 보낸 것[4]이니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총독부를 만나는데 항일을 주장하면 당연히 잡혀들어간다. 그리고 해당 편지를 인용해놓은 일본 문서에선 박용만을 분명히 불령선인이라 서술했다.[5] 만약 진짜 변절했으면 박용만을 불령선인이라 적을리 없다.

결국 1928년 다른 독립운동가의 손에 암살당했다. 한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규준은 20살의 나이로 병사하는데 박용만이 사망한 때는 이규준이 사망한지 1년 후이다.[6]

실제로는 의열단원 이해명이[7] 일방적으로 박용만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단죄한답시고 그를 암살한 것이다. 그러나 이해명의 암살에 대해선 뒷말이 많은 편으로 다른 이야기에선 이해명과 이규준, 박인식 등이 박용만을 찾아와 독립 운동 자금 1천원을 요구했는데 박용만이 이를 거부하자 설전이 벌어졌고 이에 격분한 이해명이 암살한 것이란 말도 있다.

이해명은 임정 내의 박용만 정적들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이들을 통해 중국 고위층과 연결된 덕분인지 "의분에 의한 살인"으로 인정되어 징역 5년만 살고 나왔다고 한다.

미주에서 이승만에게 밀려났고, 김구의 임정에서도 비토당하다 의열단원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8]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권이 수없이 바뀌는 와중에도 좌우 어느쪽의 지지도 받지 못해 인지도가 낮다.

4.1. 암살의 배후

1927년 10월 16일, 두 남자가 박용만의 집을 찾아와 조선혁명사업에 쓰겠다며 1,000달러를 요구하였다. 박용만이 이를 거절하자 두 사람 가운데 한명이 총을 들어 박용만을 사살하였다. 이해명은 수사관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은 박인식이라 밝혔는데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원으로 그의 상관은 공산주의자 김시현이다.[9] 김원봉이 이에 대해 직접 증언을 하였는데 박용만이 밀정이었다고 모함하는 내용이다.[10]

5. 기타

  •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이 미국에 유학한 동안 부친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일한은 박용만과 대립한 이승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당시 미주 지역의 인식처럼 박용만 암살의 배후가 김구의 임시정부라고 여겨 임시정부에도 협력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승만은 박용만이 의열단에게 암살당하자 의열단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6. 대중매체

  • 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대한인국민회에서 주인공 김유진과 처음 만나며 든든한 지지자가 된다. 이후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거꾸로 박용만이 거부가 된 김유진 집안으로부터 임정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으며 광복군을 통솔한다. 광복 후에는 주인공이 군정사령관을 맡은 미군정에서 설치한 군정 자문위원회 위원직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하고 농촌 근대화 사업에 투신했다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뒤 장관이 된다. 워낙 어릴 적부터 잘 알고 다녔기 때문에 전간기에 김유진이 일본과 내통하는 것 아니냐고 임시정부 내에서 욕을 먹을 때 '내가 그놈을 업고 다녔다!' 라고 일갈하는가 하면 광복 후 군정사령관과 야인 신분으로 대면했을 때도 군정사령관인 유진의 지위가 객관적으로는 훨씬 높음에도 박용만이 말을 높이자 '왜 저를 호로자식으로 만드시려고 그러십니까' 라면서 극동 군정사령관으로써 도쿄에서 히로히토를 만났을 때 삥뜯은 일본 본토 대공습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일본 황실의 명주 컬렉션을 따서 단둘이서 대작 하는 등 사실상 유사가족 관계로 묘사되며, 한국계라는 혈통과 2차대전의 영웅이며 미군 제복군인 최선임자, 극동 군정사령관이라는 지위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목줄을 채웠다지만 친미파가 정권을 잡게 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둘 모두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만들기로 했다는 것에 씁쓸하게 웃으면서 이해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 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대한민국 첫번째 대통령 조지원의 비서실장으로 활약하나 관동 대지진 당시에 주인공이 일본에 바이오 테러를 저지르려고 하자 주인공에게 크게 실망하여 "인간이 되길 기다린다"라고 글을 남긴뒤 비서직을 그만둔다. 그후 등장이 없다가 마지막화에서 등장. 조지원을 "기다린 보람이 없는 분"이라며 대차게 깐다.
  • 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역사의 변화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대한의 외교관이 되고 군대에도 관심 많아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군인 생활을 잠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타 잇키의 저작, 유럽 제국주의의 위선, 아시아주의 등등이 겹쳐서 대한제국의 첫번째 파시스트가 된다. 위의 신천지 계획을 그대로 말하면서 고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골 땅을 되찾자는 주장을 한다. 그의 친우 였던 이승만은 기겁하고 그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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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8년 초, 옌시산이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총사령에 임명된 후 8월, 옌시산의 부하인 제3 집단군 제26사 사장 장잉우(張英武)은 위임장을 써 박용만을 국민 혁명군 참의(參議)로 임명되게 하였다. (한애라. 박용만의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민족 운동, 학위 논문(석사) - 상명대학교 일반 대학원: 사학과 2015년 8월, 64쪽)[2] 그리하여 세간에선 이들을 3만이라 불렀다.[3] 최용호(하와이 주립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 강좌 47집 132)[4] 참고 논문: 최용호(하와이 주립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강 좌 47집 126 ~ 127)[5] 같은 논문 확인[6] 당시 임정에서는 박용만이 변절했다고 여겨 그의 죽음을 정당화한 반면, 미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임정을 박용만 암살의 배후라고 여겨 임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특히 박용만의 정적인 이승만김구로부터 박용만은 변절자가 맞으니 미주 지역을 달래 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나 단칼에 부정하며 임정을 비판하는 데 동참했다.[7] 본명이 이구연이다.[8] 방선주, 在美韓人의 獨立運動, 한림대학교 출판부, 1989년: 한애라. 박용만의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민족 운동, 학위 논문(석사) - 상명대학교 일반 대학원 사학과 2015년 8월 참고[9] 서대숙, 박용만과 그의 혁명과제 = Pak Yong-man and his Revolutionary Career, 한국민족학 연구, Vol.- No.4, 1999, 의열단이다.[10]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 2015,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