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2:26:15

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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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황
太上皇 | Retired Emperor
한자문화권 제국 太上皇
한자문화권 왕국 太上王(태상왕)
영어 Retired Emperor
Emperor Emeritus[1]
일본어 오오키스메라미코토([ruby(太上天皇,ruby=おほきすめらみこと)])
오리위노미카도([ruby(下,ruby=お)]り[ruby(居,ruby=ゐ)]の[ruby(帝,ruby=みかど)])

1. 개요2. 의의와 문제점3. 역사
3.1. 중국3.2. 한국3.3. 일본3.4. 유럽3.5. 베트남
4. 비유적 의미5. 사례
5.1. 한국5.2. 중국5.3. 일본5.4. 베트남5.5. 부탄
6. 유럽
6.1. 네덜란드6.2. 벨기에6.3. 스페인6.4. 영국6.5. 덴마크6.6. 노르웨이
7. 시호 태상황

[clearfix]

1. 개요

太上皇, Retired Emperor[2]

제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황제를 높여 가리키는 칭호로, 상황(上皇), 태황제(太皇帝), 태상황제(太上皇帝)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아버지아들에게 황제자리를 세습하기 때문에 태상황을 현 황제의 아버지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따지면 틀린 표현. 일반적으로 부자지간일 가능성이 가장 높기는 하나, 정종태종처럼 형제간[3]일 수도 있고, 전 황제가 아들을 일찍 잃은 후 손자를 황태손으로 세웠다가 양위했다면 조손간일 수도 있다. 단종세조처럼 상왕이 조카고 금상이 숙부였던 경우도 있다.

한국사에서는 왕 버전으로 태상왕(太上王) 혹은 상왕(上王)이라 불러온 관계로 상왕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태상왕이 상왕보다 격이 높은 호칭이다. 조선사에서 태조정종처럼 상왕이 복수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상왕간의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 격이 높은 호칭으로서 태상왕이 사용되었다.[4] 반면 세조예종의 경우에는 양위하여 물러난 상왕을 높이기 위한 표현으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대원군과는 다르다. 상왕은 '양위하고 물러난 왕'이고 대원군은 '본인은 왕이었던 적이 없는, 재위 중인 왕의 친아버지'[5]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비슷한 이미지가 형성이 되어 있다. 한국에서 상왕 노릇으로 유명한 사람이 조선 태종, 대원군 노릇으로 유명한 사람이 흥선대원군인데 두 사람 모두 어마어마한 위세를 떨치고 군권 등 중요한 권력을 휘어잡고 직접 국정 운영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인 듯.[6] 수렴청정과도 대강 비슷한 느낌으로 통하는 듯.

북제고위는 본인이 상황일 때, 당대 황제인 아들 고항도 양위 후 상황이 되어 그와 구별하여 무상황(無上皇)이라 칭한 바 있다. 이는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인데, 그나마 비슷한 경우라면 정종이 상왕이 될 당시 태조 이성계가 살아있어 태조가 태상왕으로 불렸고, 다시 태종 이방원이 상왕이 될 당시에도 정종이 살아있어 정종은 노상왕으로 불렸다.[7]

부탄왕축 왕조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면서 65세가 되면 퇴위해야 한다는 헌법을 제정했다.

현대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는 평균 수명이 늘어나다보니 선대 군주가 굳이 죽을 때까지 왕위에 남지 않고 생전에 미리 후계자에게 양위한 뒤 상왕으로 물러나는 사례가 많아졌다. 하지만 생전에 양위하는 것이 무책임의 상징이라는 비난을 죽을 때까지 수도 없이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예: 에드워드 8세), 엘리자베스 2세처럼 죽을 때까지 왕위를 지킨 군주도 있다. 결국은 각자의 선택에 달린 것.

2. 의의와 문제점

태상황이 되는 경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선대 국왕이 어떤 이유로든 물러나야지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이유를 구분해보면 크게 자의로 퇴위하는 경우와 강제로 퇴위'당'하는 경우가 있다.

태상황 제도의 의의는 아무튼 물려난 선대 국왕이 현 국왕의 아버지라면 유교적 관점에 따라 아버지가 아들보다 낮을 순 없으니 만들어진 지위이기 때문에 명목상 태상황이 현직 국왕보다 높다.

그래서 역사속 몇몇 국왕들은 꽤 여러 이유로 다음 국왕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그 중에 많은 이유는 국왕의 보좌, 자기가 물러나고 아들이 즉위해도 얘가 잘 할지 모르겠으니까 일단 왕위를 넘겨줘서 잘 하는지 보고 못 하는게 있으면 가르쳐주고 보좌해준다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승계이다. 왕보다는 태상황이 위고 그래서 승계에 있어선 태상황이 왕보다 위라서 다다음 왕이 누가 될 지 정하기 위해서 물러나기도 하고 자기 후계자의 지위가 불안정하니 일단 물려줘서 자기 권위로 지위를 안정시켜주기 위해서 물러나기도 한다.[8]
自夏禹傳子之後 父崩子繼 兄歿弟承 永爲常法. 陳氏家法 乃異於是 子旣長 卽使承正位 而父退居聖慈宮 以上皇稱 同聽政 其實但傳大器 以定後事 備倉卒爾 事 皆取決於上皇 嗣主 無異於皇太子也.
하나라우임금아들에게 세습한 뒤부터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잇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음이 늘 지켜온 법이다. 진씨는 집안 법이 이것과 다르니 아들이 이미 어른이고 곧 정통성이 있게 제위(帝位)를 세습해도 아비가 성자궁으로[9] 물러나 머무르면서 상황으로 일컫고 (금상과) 같이 정사(政事)를 들으니[10] 그 실상은 다만 제위를 전해서 후사를 정하고 갑작스러움을 대비할 뿐이라서[11] 일은 모두 상황이 맡아서 처리하고 금상은 황태자와 다를 바가 없다.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Vol 5.』, 「진기(陳紀)」, 오사련(吳士連)

그러나 태상황 제도는 단점도 명확했다. 태상황이 있게 되면 명목상 그래도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왕/황제인데 그 위인 태상황이 있게 되니 위계질서가 좀 꼬이게 된다. 왕/황제와 태상황이 잘 협의하여 역할을 분담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한쪽에 너무 쏠려버리면 문제가 된다. 왕/황제가 너무 강하면 태상황은 병풍이 되어 버리고[12] 태상황이 너무 강하면 반대로 왕/황제가 약해져 오히려 태상황이 실질적인 군주, 왕/황제는 세자/태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실제로 고대 일본에서 천황이 자꾸만 상황으로 은퇴하여 천황은 쩌리가 되고 이에 반발한 천황과 상황의 대립, 천황의 권력독점 등으로 천황가가 위축되어 결국 가마쿠라 시대가 열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것을 인세이라고 한다. '상왕 노릇'이라는 관용어에 가장 부합하는 게 바로 인세이였다.

3. 역사

3.1. 중국

기원은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아들 혜문왕에게 양위하고 자신을 군주의 아버지라는 뜻에서 '주부(主父)'라고 자칭한 것이다. 태상황이라는 표현은 진시황에 의해 추존된 장양왕이 첫 사례이며[13], 살아서 태상황이 된 최초의 인물은 한고제의 아버지로, 보통 유태공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유방이 결국 승리했지만 과거 초한전쟁 당시 아버지에게 미안한 일이 좀 있어서[14] 깍듯하게 대했다. 기록의 표현에 따르면 황제와 그 아버지의 관계가 아니라 일개 평민의 부자 관계처럼 편하게 대하였단다. 이를 본 유태공의 신하가 '아무리 아버지이어도 상대가 황제이신데 위아래란 게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간언했고, 유태공도 이를 받아들여서 이후부터 유방을 만날 때는 황제에 대한 예를 갖췄다. 그러자 유방은 '그럼 아버지가 황제보다 더 높으면 될 거 아냐'라며 즉석에서 태상황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간언을 한 신하에게는 따로 상을 내렸다. 이에 대해 안사고는 한서의 주석에 '천자의 아버지이므로 황()이라 불렀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제()라고 하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황제라는 칭호에서 '황'보다는 '제'가 실권을 가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후대의 태상황 가운데서 황제를 대신해 실권을 갖고 정사를 돌본 경우 태상황이 아니라 태상황제(太上皇帝)라고 칭했다. 보통 태상황은 원래 황제였던 사람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하여 황제 자리를 내놓는 게 대부분이지만 유태공의 경우는 유일하게 황제 자리를 거치지 않고 태상황의 자리에 오른 케이스이기도 하다.

남북조시대 북제에서는 고담이 제위를 아들 고위에게 물려주고 고위가 다시 자기 아들 고항에게 제위를 물려줘서 할아버지 고담과 아버지 고위가 동시에 태상황으로 존재하기도 했다. 본래 태상황이었던 고담은 스스로를 무상황(無上皇)이라 칭하고 고위를 태상황이라 했다.

당나라의 초대 황제 고조는 건국에 공이 많은 이세민 대신 장자인 이건성을 태자로 세웠으나, 결국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이 태자와 동생까지 살해하자 왕위를 이세민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현종은 말년에 암군으로 전락하면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성도(청두)로 피난을 갔는데, 분조를 황태자와 함께 이끌던 신하들이 태자를 추대했다. 그러자 현종은 상황파악을 하고 순순히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반면, 명나라 정통제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생포되어 인질이 되었는데, 당시 명 황실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강제로 태상황 자리에 올랐다.

3.2. 한국

고구려태조대왕이 동생 혹은 장남인 차대왕에게 양위하고 별궁에서 기거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태조대왕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소 논란이 있다). 100세를 훌쩍 넘겨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수명을 비롯한 정황에서 상식적으로 삼국사기보다 중국 후한서의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이는데, 후한서의 경우는 태조왕이 죽고 나서 차대왕이 즉위한 것으로 쓰고 있다.

신라진성여왕효공왕에게 양위하고 반 년 동안 태상왕으로 있었던 적이 있다.

고려헌종, 명종, 신종, 희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우왕 9명의 사례가 있는데 무신정권과 뒤이은 원 간섭기를 겪으면서 그 수가 대폭 늘었다.

헌종은 작은아버지 계림공에게 옥좌를 반 강제로 양위하고 전왕(前王)으로 불렸다. 명종은 최충헌에 의해 옥좌에서 끌려 내려 왔는데 동문선에 기록된 명종 애책문엔 명종이 태상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신종은 태자 희종에게 스스로 선위하였다. 희종은 최충헌을 죽이려 했다가 실패하고 명종처럼 선위라는 명목하에 폐위당했지만 일단 태상왕의 칭호와 대접은 받았다. 원종은 임연에게 협박당해 태상왕으로 밀려나 용암궁에 유폐되었다가 원나라의 압력으로 임연이 한 발 물러서면서 겨우 복위했다.

원 간섭기에 재위한 충렬왕, 충숙왕은 아들에게 양위했다가 복위했고, 충선왕은 두 번째 재위기[15]에 아들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눌러앉은 사례라 국왕 재위 순서가 좀 꼬여있다.(원종충렬왕충선왕→ 다시 충렬왕→ 다시 충선왕→ 충숙왕충혜왕→ 다시 충숙왕→ 다시 충혜왕→ 충목왕) 우왕은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에게 실권을 잃고 퇴위 후 강화도에 유배되고 아들 창왕이 즉위하자 상왕이 되었지만 말이 상왕이었지 사실상 폐위나 다름없었고 창왕이 폐위되자 상왕 신분마저 박탈당하고 처형된다.

조선에선 태조 · 정종 · 태종이 살아서 왕위를 물려줬다.[16] 태종 재위 기간에 태조와 정종이 공존했고, 세종 치세엔 정종과 태종이 공존했다. 태조는 상왕으로 2년·태상왕으로 8년을, 정종은 상왕으로 18년·노상왕으로 1년을, 태종은 상왕으로 3년·태상왕으로 1년을[17] 보냈다. 정종의 기록은 한국사에서 가장 긴 기록이다.

정종이 사망할 때까지 신하들은 일상적으로 정종을 '노상왕'으로, 태종을 '상왕'으로 칭했으며, 정종이 사망한 뒤인 1421년 태종을 성덕신공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높이기도 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여 상왕이 됨에 따라 조정 신료들은 당연히 상왕인 정종 이방과를 태상왕으로 부를 것을 주청하였지만, 왕이 된 세종은 태종보다 나이가 더 많으시니 노상왕(老上王)이라 부르면 충분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이듬해 정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아버지 태종을 태상왕으로 격을 올렸다. 원래 상왕과 그 선임자가 함께 공존할 때 태상왕이 되는 것이었지만, 세종은 아버지의 격을 (정종보다) 높여드리기 위해 이같이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단 상왕이 되려면 후임왕에게 선위를 해야 가능한데 조선 전기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이런 경우가 나왔지만 이후 유교적 덕목인 충효가 강화되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왕이 살아있는데 선위를 받는 것 자체가 불충이고 불효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래서 몇몇 임금들은 이른바 '선위 파동'을 일으켜 세자 및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본인의 권위에 대한 재신임을 받아 정당성을 확보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선조영조. 따라서 세자와 신료들은 선위를 그냥 넙죽 받아들이면 반역이니 석고대죄하고 선위를 거두어 달라고 빌어야 했다. 그렇다고 선위의 뜻이 정말 확고하면 그걸 지나치게 거부하는 것도 불충이라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그나마 상왕 제도가 가장 잘 작용한 건 태종-세종의 사례. 태조, 정종과는 달리 일체의 압박 없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상왕이 되었으며 세종의 후견인으로서 잘 도와주다가 편히 눈을 감았다.

3.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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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유럽

유럽에는 본래 상왕이라는 개념이 없다. 오히려 퇴위한 국왕은 종전보다 격하된 프린스공작 칭호를 받는 것이 원칙이다. 유럽에서 왕호나 작호는 영토에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권을 양위한 자는 더이상 군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국에드워드 8세, 네덜란드빌헬미나, 베아트릭스가 그러한 경우다. 한자문화권의 상왕 제도는 군주는 나라의 누구보다도 높은 인물이지만 아버지는 아들보다 높아야 한다. 아버지로서는 아들보다 높지만 군주가 아니라면 자신의 아들보다 낮아지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퇴위한 군주가 아들을 섬기는 모순을 방지하기 위해 명목상으로만 군주보다 높은 군주 칭호를 준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높은 인물인 것이 그리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는 금상 시절 왕호를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바티칸의 군주(Princeps sui iuris Civitatis Vaticanae)에 해당하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퇴임 후에도 추기경이 아니라 명예 교황(Pope Emeritus[18])이라 불리며, 성하 경칭이나 교황을 상징하는 흰색 수단 등의 예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의전과 예우 역시 현임 프란치스코와 동등하게 되고 있다.[19] 정작 베네딕토 16세 본인은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그냥 주교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벨기에알베르 2세스페인후안 카를로스 1세, 덴마크마르그레테 2세 역시 퇴위 후에도 국왕의 칭호를 유지했다.

다만 퇴위를 하면 재임 중에 했던 칭호가 변경되기도 한다. 예컨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경우 스페인 국왕 폐하(Su Majestad el Rey de España)에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폐하(Su Majestad el rey don Juan Carlos)로 칭호가 변경됐다. 왕위나 작위는 영토에 따라오는 것이므로 '스페인 국왕'은 오로지 현 군주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단지 옛날에 왕이었으니 개인 자격으로 왕 대우를 주는 것이라는 관념을 엿볼 수 있다.

3.5. 베트남

쩐 왕조에서 태상황 제도를 많이 활용해서 대부분의 시기에 상황이 1명 정도는 있었다.

4. 비유적 의미

요즘에는 전직 국가원수/최고권력자가 후임자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퇴임한 후에도 배후에서 실세로 군림하는 처사를 일컬어 '상왕 노릇' 한다는 말을 흔히 쓴다.[20] 그러나 막상 한국사를 살펴보면 막후 권력을 행사했던 상왕은 끝까지 병권을 놓지 않은 조선태종 단 한 사람뿐이고, 그 외에는 그냥 '살아있는 전직 왕'으로 여생을 보내야 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국에선 사실상 '상왕 노릇'이란 건 없었던 셈이지만 태종의 이미지가 워낙 크고 인지도도 높아서 상왕의 이미지가 이렇게 형성되었다.

한국 정계는 군사독재 정권이 종식된 1988년 이후 30여 년간 5년 단임의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해왔기에 레임덕에 극히 취약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이 여야를 불문하고[21] 대부분 현 정부/지도자와의 단절, 차별화를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펼쳐나가서 전임자의 상왕, 막후 실세 노릇은 어림반푼도 없는 상황이다. 1988년전두환이 물러나면서 전직 대통령이 수장인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이상한 조직을 헌법에 박아놓고[22], 퇴임 직전에 군 인사를 단행해 전두환계 군인들을 대거 군부 요직에 박아놓아 노태우에 대한 배후 조종을 시도했으나, 노태우는 올림픽 개막식 참석 금지와 백담사 유배로 반격했다.[23]

그나마 '3김'의 일원이었던 김영삼김대중의 경우, 퇴임 후에도 막후 영향력이 작지 않았고 현직 정치인들과의 접촉도 매우 활발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상징성과 명분의 문제였지, 두 사람이 퇴임 후에도 공천권과 같은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김종필 역시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단순히 정계 원로 인사로서의 상징성만 가졌지 실질적인 권력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기에 전 대통령보단 현 정권의 실세들이 상왕 타이틀을 다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노무현 정부 시절의 노무현의 형 노건평과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의 형 이상득의 영향력이 굉장해서 상왕이라고 야당에서 마구 깠었다.[24] 이 경우 상왕 대원군 수렴청정 구분 없이 막 갖다써도 뜻이 통하기 때문에 김기춘이나 우병우는 대원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쪽은 '비선' 문서에도 내용이 나와 있다. 19대 대선에서는 안철수 후보의 네거티브 문구로 철수를 으면 지원이 상왕 된다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해찬이 그렇게 불렸으나 엄연히 따지면 이해찬은 문재인을 돕거나 문재인이 만들던 시스템을 유지하기보단 이재명을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상왕의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일본 정치내각제인데다 자민당일당 독주가 오래 지속되며 그 기간 동안 착실히 의원 세습이 이루어지다 보니, 굳이 총리직을 앞세워 전면에 나설 필요 없이 계파 연합만 꽉 잡고 당내 실권 및 공천권만 쥐고 있으면 당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해도 되는 수준이다. 당연하지만 정치적 실권은 실권대로 갖고 정부 실패의 책임도 현직 총리에게 뒤집어씌우고 갈아버리면 그만이다. 이 때문에 원래도 모든 일본 정치인들의 로망인 히카루 겐지 같은 삶을 살기 위해 총리감이라 불리는 일본 정치판의 성골 정치인들은 정치경력 2~30년 이상 활동하다가 총리는 길어야 2~3년 한 뒤 자기 휘하의 파벌 수장자리를 차지한 뒤 이들의 수를 가지고 자민당 당권을 평생 쥐고 죽을 때까지 막후 실세로 군림하기 위해 정치력을 파벌 확대와 당권 투쟁에 쏟아붓는다. 그래서 일본 정치가 '흑막',야합,막후 교섭이 등장하기 좋은 구조인 것.[25] 상황과 인세이가 판을 쳤던 헤이안 시대 일본의 모습과 흡사하다. 실제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수반들이 헌법에 따라 보장받는 임기가 못해도 4~5년인데, 현재 일본 국회 출범 이후 만 5년 이상 재임했던 총리는 약간 못미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포함해 7명밖에 되지 않으며, 그마저도 연임과정에서 많으면 3번 이상의 중의원 해산 후 총선을 거치는 등 책임총리와는 거리가 먼 리더십 불안에 늘상 시달린다.

중국에서는 퇴임 후 핵심권력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하나 가지고 상왕이 되거나 절반 이상의 정치국 상무위원을 자신의 심복들로 배치하면 끝이다. 실제로 덩샤오핑장쩌민이 그 예시인데 덩은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를 겸임하지 않고 자신의 심복들에 배치하고, 장쩌민은 퇴임 뒤 2년 동안 군사위 주석을 지키면서 후진타오의 상왕 노릇을 하고 자신이 속한 상하이방의 출신들을 절반 이상 배치해놨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가 상왕 노릇을 하여 선임장관과 고문장관이라 하여 내각총리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국의 국가원로자문위와 국가정책자문위와 비슷하지만 사실상 실세로 말이 장관이지 사실상 부총리급이다.

러시아에서 푸틴도 대통령직의 8년 임기를 마친 후에도 인기가 최상위였지만 더 연임하면 독재자라고 하여 언론에서 떠드니 차라리 대통령직을 건너뛰고 자신의 심복이자 후배인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에 세웠고 자신은 4년 동안 총리통합 러시아당 당수를 겸임해 실세 상왕이라 불릴 정도로 권력이 강력했다.

카자흐스탄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도 대통령직을 중도에 사퇴하고 여당 당수와 군부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안전보장회의 의장을 겸임하여 인사권과 국방권을 쥐고 상왕노릇을 했다가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로 인해 물러나기도 했다.

프랑스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한 만큼 이를 견제하고자 헌법상 상왕의 등장을 유도(?)하는데 전직 대통령에게 한국의 헌법재판소격인 헌법위원회 종신 위원의 자격을 준다. 다만 현재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 중 헌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베트남에선 공산당의 서열 1위인 총비서국가주석이 분리되어 응우옌푸쫑이 3년동안 국가주석과 총비서를 겸임하였는데 2021년에 국가주석에서 물러나서 당 총비서직만 가지고 2024년 사망 전까지 상왕노릇을 했다.

그리고 독재국가에서 자식에게 최고권력자를 세습하고 상왕이 되는 경우도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구르반굴리는 대통령을 자기 아들인 세르다르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원의장으로 역임해 막후에서 조종하고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센도 자기 아들인 훈 마넷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집권당 당수와 왕실최고자문위원장을 역임하여 막후에 상왕노릇을 할 예정이다.

위에 열거하듯이 장기집권하거나 성공한 권력자가 나이가 들어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핵심권력을 틀어쥔 채 막후에서 실세 노릇을 하고 있지만 상왕노릇을 하는 권력자의 끝은 좋지 않다. 후임자는 자신이 국가 지도자인데 위에 실세로 군림하는 상왕이 껄끄럽고 권력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여 상왕 권력자에게 불만과 갈등이 표출하고 국민들은 아무리 정치를 잘했어도 똑같은 정치스타일로 통치하여 식상하고 질릴대로 질려버리는 등 실정을 하거나 선거에서 패배하거나 국민들이 시위하면 현 권력자는 민심을 다독여야하고 정치쇄신을 해야 한다며 상왕에게 자리를 물러나라 요구한다. 그리고 상왕노릇을 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할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에서 장기 집권한 아베 신조가 정치적 스승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처럼 정계를 은퇴하지 않고 사임한 후 2년동안 스가 요시히데기시다 후미오 현직 총리위에 상왕 노릇을 하다가 2022년에 참의원 선거 유세중 암살당한 사례가 있듯이 상왕정치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5. 사례

5.1. 한국

[[파일:1px 투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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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고구려 태조대왕 차대왕 146.12 165.03 18년 3개월 165.(118세) 진위여부 논란 있음[26]
신라 진성여왕 효공왕 고모 897.07.04.
(진성11.06.01.)
897.12.31.
(효공01.12.04.)
5개월 27일 897.(30대?)
고려 헌종 숙종 1095.11.07.
(헌종01.10.07.)
1097.11.06.
(숙종02.윤02.19.)
2년 1097.(13세)
신종 희종 1204.02.07.
(신종7.02.07.)
1204.02.15.
(희종01.02.15.)
8일 1204.(59세)
충렬왕 충선왕 1298.03.02.
(충렬24.01.16.)
1298.09.13.
(충렬24.08.18.)
6개월 11일1308.(73세) 재즉위(1298.)
충선왕 충숙왕 1313.04.20.
(충선00.03.10.)
1325.05.13.
(충숙00.05.13.)
n개월 n일1325.(49세)
충숙왕 충혜왕 1330.02.18.
(충숙17.02.10.)
1332.03.21.
(충숙후1.02.24.)
2년 32일 1339.(46세) 재즉위(1332.)
우왕 창왕 1388.07.12.
(우왕14.06.08.)
1389.12.31.
(공양01.12.14.)
1년 172일 1389.(24세)
조선 태조 정종 1398.10.14.
(태조07.09.05.)
1408.06.18.
(태종08.05.24.)
9년 250일 1408.(74세)
태종
정종 태종 형(양부) 1400.11.28.
(정종02.11.13.)
1419.10.15.
(세종01.09.26.)
18년 325일 1419.(63세) [27]
세종 백부
태종 세종 1418.09.09.
(태종18.08.08.)
1422.05.30.
(세종04.05.10.)
3년 264일 1422.(56세)
단종 세조 1455.07.25.
(세조01.윤06.11.)
1457.07.12.
(세조03.06.21.)
1년 353일 1458.(17세) 세손-세자--상왕-폐위-복권
세조 예종 1468.09.22.
(세조14.09.07.)
1468.09.23.
(예종즉위.09.08.)
1일 1468.(52세)
중종 인종 1544.11.28.
(중종39.11.14.)
1544.11.29.
(인종즉위.11.15.)
1일 1544.(57세)
고종 순종 1907.07.20.
(융희원년.07.20.)
1910.08.29.
(융희04.08.29.)
3년 41일 1919.(68세)대한제국 태황제
1910.08.29.
(명치43.08.29.)
1919.01.21.
(대정08.01.21.)
8년 147일 조선 덕수궁 이태왕

5.2.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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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장양왕 시황제 - - - BC247.(35세) 추존
전한 유씨[28] 고제 BC201. BC197. 4년 BC197.(?) 고제가 존봉
서진 혜제 사마륜 질손 301.02.03.
(영강02.01.09.)
301.05.30.
(영녕01.04.07.)
3개월 27일 301.(?) 복위(301.)
후량 태조 은왕 399. 399. 며칠 399.(63세)
북위 헌문제 효문제 471.09.20.
(연흥01.08.20.)
476.07.20.
(승명01.06.13.)
4년 305일 476.(23세) 모친에게 독살
북제 무성제 후주 565.06.08.
(천통01.04.24.)
569.01.13.
(천통04.12.10.)
3년 220일 568.(32세)
후주 유주 577.02.04.
(승광01.01.01.)
577.02.28.
(승광01.01.25.)
24일 578.(21세)
북주 선제 정제 579.04.01.
(대상01.02.19.)
580.06.22.
(대상02.05.24.)
1년 83일 580.(21세)
양제 공제 조부 617.12.18.
(의녕01.11.15.)
618.04.11.
(의녕02.03.11.)
2개월 24일 618.(50세) 명목상의 태상황
대성조 선천태상제 - - - 미상 추존황제의 추존 태상황
현종 추존
고조 태종 626.09.04.
(무덕09.08.09.)
635.06.25.
(정관09.05.06.)
8년 294일 635.(71세)
측천무후[29] 중종 705.02.21.
(신룡01.01.23.)
705.12.16.
(신룡01.11.26.)
9개월 23일 705.(81세)
예종 현종 712.09.08.
(선천01.08.03.)
716.07.13.
(개원04.06.20.)
4년 36일 716.(54세)
현종 숙종 756.08.01.
(지덕01.07.01.)
762.05.03.
(보응01.04.05.)
5년 264일 762.(78세)
순종 헌종 805.08.31.
(영정01.08.04.)
806.02.11.
(원화01.01.19.)
5개월 12일 806.(45세)
소종 덕왕 900.12.04.
(광화03.11.10.)
901.01.24.
(광화04.01.02.)
1개월 20일 904.(37세) 복위(901.)
북송 휘종 흠종 1126.01.18.
(선화07.12.23.)
1135.06.04.
(소흥05.04.21.)
9년 139일 1135.(54세)
남송 고종 효종 양부 1162.07.24.
(소흥32.06.11.)
1187.11.09.
(순희14.10.08.)
25년 153일 1187.(81세)
효종 광종 1189.02.18.
(순희16.02.02.)
1194.06.28.
(소희05.06.09.)
5년 130일 1194.(68세)
광종 영종 1194.07.24.
(소희05.07.05.)
1200.09.17.
(경원06.08.08.)
5년 266일 1200.(54세)
서요 야율직로고 굴출률 장인 1211. 1213. 2년 1213.(?)
서하 신종 헌종 1224. 1226. 2년 1226.(64세)
영종 대종 1449.09.22.
(정통14.09.06.)
1457.02.11.
(천순01.01.17.)
7년 142일 1464.(38세) 복위(1457.)
고종 인종 1796.02.09.
(가경01.01.01.)
1799.02.07.
(가경04.01.03.)
3년 4일 1799.(89세)

5.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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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4.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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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리(李) 혜종 소황 1224. 1226. 3년 1226.(33세)
쩐(陳) 태조 태종 1226. 1234. 9년 1234.(?) 재위한 적 없음[30]
태종 성종 1258. 1277. 20년 1277.(58세)
성종 인종 1278. 1290. 3년 1290.(51세)
인종 영종 1293. 1308. 16년 1308.(51세)
영종 명종 1314. 1320. 7년 1320.(55세)
명종 헌종 1329. 1357. 29년 1357.(58세)
유종
예종 예종 1372. 1395. 24년 1395.(75세)
간황 백부
순종
순종 소제 1398. 1399. 2년 1399.(22세)
호(胡) 국조 호한창 1401. 1407. 7년 1407.(72세)
후 쩐(後陳) 간정제 중광제 숙부 1409. 1414. 6년 1414.(?)
막(莫) 태조 태종 1529. 1541. 13년 1541.(72세)
헌종 조부
후 레(後黎) 신종 진종 1643. 1649. 7년 1662.(56세) 재즉위(1649.)
희종 유종 1705. 1716. 12년 1716.(54세)
유종 후폐제 1729. 1731. 3년 1731.(53세)
의종 현종 숙부 1740. 1759. 20년 1759.(41세)

5.5. 부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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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왕축 지그메 싱계 왕축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1972.07.24. 2006.12.09. 32년 139일

6. 유럽

6.1.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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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오라녀나사우 빌럼 1세 빌럼 2세 1815.03.06. 1840.10.07. 25년 203일 71세
빌헬미나 율리아나 1890.11.22. 1948.09.04. 57년 285일 82세
율리아나 베아트릭스 1948.09.04. 1980.04.30. 31년 239일 94세
베아트릭스 빌럼알렉산더르 1980.04.30. 2013.04.30. 33년

6.2. 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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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벨기에 레오폴드 3세 보두앵 1934.02.23. 1951.07.16. 17년 143일 81세
알베르 2세 필리프 1993.08.09. 2013.07.21. 19년 346일

6.3.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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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보르본 후안 카를로스 1세 펠리페 6세 1975.11.22. 2014.06.19. 38년 209일

6.4.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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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윈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1936.01.20. 1936.12.11. 326일 77세

6.5. 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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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글뤽스부르크 마르그레테 2세 프레데리크 10세 1972.01.14. 2024.01.14. 52년

6.6.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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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조 군주 후임자 관계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사망(나이) 비고
베르나도테 오스카르 2세 호콘 7세 작은외할아버지 1872.09.18. 1905.06.07. 32년 262일 78세

7. 시호 태상황

태상황(太上皇)이란 시호로 추존(존봉)된 군주.
성명 시호 묘호 재위기간 비고
영자초(嬴異人) 장양태상황제(莊襄太上皇帝) - BC 250 ~ 247 시황제 추존
유씨(劉氏) 태상황(太上皇) - BC 201 ~ 197 한태조 존봉
왕씨(王氏) 태상황(太上皇) - 403 왕시 존봉
이경(李敬) 선천태상황(先天太上皇) - - 당현종 추존
안녹산(安禄山) 태상황(太上皇) - 751 ~ 757[31] 안경서 존봉
탁씨(卓氏) 태상황(太上皇) - 945 탁엄명 존봉
진승(陳承) 건섭국정위태상황(權攝國政爲太上皇) 태조(陳太祖) 1226 ~ 1234 진태종 존봉

[1] 일본에서 퇴위한 아키히토를 위해 새롭게 만든 호칭이며# 가톨릭 역사상 600년 만에 생전 퇴위한 베네딕토 16세도 Pope Emeritus(명예교황)이라는 명칭을 받았다.[2] 원래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은퇴한 군주는 금상(현임 군주)보다 한 단계 떨어진 칭호를 쓰지만, 현재는 대부분 금상 시절의 칭호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600년 만에 생전 퇴위한 베네딕토 16세는 Pope Emeritus로서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과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마찬가지로 생전 퇴위한 아키히토에 대해서도 Emperor Emeritus, 미치코 상황후는 Empress Emerita(Emeritus의 여성형)라고 칭한다.[3] 단, 혈연상의 이야기고 태종은 정종의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로서 즉위하여 명목상으로는 부자 세습이었다. 사실 왕이 왕세제를 세운다는 건 "과인은 고자로다."라고 광고하는 꼴이라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왕세제로 책봉된 왕은 영조밖에 없었다. 사신들이 왕세제 책봉을 받으러 청나라로 갔더니 강희제가 "왕(경종)이 아직 젊은데 뭐하러 동생을 후계자로 삼는가."라고 의문을 품자 신하들이 대놓고 "왕이 고자라 아들 못 낳아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임사화 이전까지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4] 여담으로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정종이 생존했기에 상왕이 둘이었다. 세종은 부왕이기도 한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이고자 했으나 태종이 사양하고, 정종 역시 사양했기에 두 상왕 모두 태상왕으로 존숭하진 않았다. 편의상 정종을 늙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경칭이기도 했던 노(老) 자를 붙여 노상왕이라고 했으나, 정종 사후에야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였다. 태종이 정치적으로 정종을 어느 정도 이용한 것도 있긴 하지만, 태종이 왕일 당시 정종에게 장난을 치고 둘이 술자리를 같이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우애가 좋았으니 서로 겸양해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5] 조선의 대부분의 대원군들은 왕위에 오른 자신의 아들을 선왕의 양자로 보냈기 때문에 생물학적 친아버지이지만 호적상 아버지는 아니다. 단, 반정으로 왕으로 추대된 정원군의 아들 인조는 선왕의 양자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다만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목대비에 의해서 인조가 왕으로 등극할 때에는 양자였다.(선조의 서장자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다음 후계는 선조의 적손(嫡孫)이나 다른 아들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인조는 선조의 아들 정원군의 장자로 계승 순위자체가 가능하지가 않다.) 또한 정원군은 대원군이 되었다가 훗날 원종이라는 묘효를 받은 추증왕이 되었다.[6] 그래서 한국에서는 '상왕 노릇'이라고 하면 '바지사장을 앉혀 놓고 막후에서 실세로 행세한다' 정도의 뜻이 되는데, 정작 한국사에서 '상왕 노릇'을 제대로 한 상왕은 태종 하나뿐이다. 다른 상왕들은 실권을 누리지 못했다. '대원군 노릇'도 마찬가지. 조선에 대원군은 4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3명은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 이미 죽은 뒤여서 사후에야 대원군 칭호를 받았고, 살아생전에 위세를 누린 건 한 명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왕 노릇'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곳은 일본의 인세이 시대였다.[7] 다만 태상왕/노상왕으로서 태조나 정종의 사례는 고위처럼 아들과 함께 손자의 치세에도 살아있는 태상황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종은 (생물학적으로는) 태종의 형이었기 때문이다.[8] 그러다 보니 태상황이 많은 경우는 그만큼 왕조가 불안했다는 의미도 된다. 왕위계승이 순탄하면 굳이 상황이 있을 필요도 없기 때문. 조선도 개국 초기에는 태조-정종-태종 연속으로 퇴위를 하였고, 조선조에서 죽을 때까지 왕위를 지킨 것은 세종이 최초였다.[9] 성자는 임금이 베푸는 은혜# 또는 임금이나 후비(后妃)의 어짊을 강조하려고 높여 부르는 말#인데 성자궁은 맥락상 선동어소다.[10] 대리청정이니 수렴청정이니 하는 말에서 알겠지만 옛날에 정치에 쓰던 움직씨는 하다()가 아니라 듣다()였다.[11] 그러니까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만으로 후계 구도가 불안해서 아예 양위해서 굳힌다는 것이니 인세이와 뜻이 같다.[12] 물론 단순히 은퇴의 의미로 양위를 해버리면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하진 않다. 그런 경우 태상황은 그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고 일은 아들이 하면 되기 때문.[13] 다만 후세에서는 이런 케이스를 태상황이 아닌 추존황제로 쳐준다.[14] 팽성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챙기지 못하기도 했고, 광무대치 시기엔 항우가 태공을 인질로 '네 아비가 삶아지는 걸 볼 테냐'라고 협박하자 '우리가 의형제의 연을 맺었으니 우리 아빠가 네 아빠다. 네 아비 국물맛이 참 궁금하니 꼭 한사발 보내다오'(...)로 받아쳤다. 물론 이는 진심이 아니라 아버지가 인질로 잡혔다고 해서 휘둘리지 않을 것이란 의지 표명과 항우의 치졸한 행위를 비판하는 의미였다.[15] 첫 번째 재위기는 양위가 아니라 원나라에 의한 폐위였다. 충선왕이 조비를 총애하는 것에 불같이 투기한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 조정에 이걸 일러바쳐 즉위 8개월 만에 원나라로 강제 소환됐었다.[16] 세조, 중종도 그랬지만 딱 하루 뒤 사망하여 예외. 또 연산군하고 광해군도 예외. 그리고 또 단종의 경우도 예외. 상왕으로 있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고 사후 복권되었기 때문이다.[17] 이쪽은 아들인 세종에 의해 격상되었다.[18] emeritus는 '명예'라는 뜻으로 명예교수 직함에도 이 단어가 쓰인다. 다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 단어를 '전임교황'으로 번역했다. 베네딕토 16세 외에는 일본의 아키히토 상황미치코 상황후가 각각 Emperor Emeritus(명예 황제), Empress Emerita(명예 황후, emeritus의 여성형)로 불리고 있다.[19] 세속 왕국의 군주들은 혈연 관계라 한 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이므로 부모가 자식보다 격이 낮아져도 군주인 자녀가 부모를 계속 예우할 수밖에 없지만 교황은 선거군주제라 퇴위한 전임 교황은 현임 교황과 남남이므로 전임 교황을 다시 추기경으로 격하하면 현임 교황이 전임 교황을 예우할 명분이 사라진다. 게다가 교황은 일국의 군주인 동시에 천주교라는 세계 종교의 지도자 역할도 겸하기 때문에 전임 지도자를 현임 지도자보다 낮게 대우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가 함께 경당에서 기도할 때에도 베네딕토 16세는 현임 교황에의 존경 표시로 프란치스코에게 상석을 권했으나 프란치스코는 우리 모두 형제라며 베네딕토 16세를 상석에 나란히 앉게 하기도 했었다.[20] 비슷한 경우로 재벌기업에서 총수가 자신의 후임자(주로 직계 자녀)에게 회장직을 넘겨준 후에도 '명예회장' 직함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의 별명이기도 했던 '왕회장'이 여기서 유래했다.[21] 87년 이후 모든 차기 대통령 선거 당내 경선에 나온 여당 후보들이 현직 대통령과 반대되는 계파 소속이었고 경선에서 치열하게 정치공방을 벌였다.[22] 1989년에 관련 법이 폐지되어 현재는 설치가 불가능하다.[23] 또한 그보다 앞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에 대한 개인비리 수사를 통해, 전두환으로부터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 사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24] 이들은 대통령의 형이라는 점 때문에 왕자에 비견하여 각각 봉하대군, 영일대군이라고도 불렸다. 봉하는 노무현 일가의 고향 봉하마을, 영일은 이명박 일가의 고향인 영일군(=포항시)을 의미한다.[25] 87년 이후 한국 정치에서 이런 구도를 만들려다가 끝내 실패했던 마지막 상징같은 정치인이 허주(虛舟) 김윤환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 한국 정치인들은 내각제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26] 삼국사기 기록 근거. 다만 태조대왕의 재위기간과 수명에 대해서는 중국 기록 후한서에서는 좀 다르게 전하고 있으며, 일단 현실적인 인간의 수명을 지나치게 상회하고 있어 삼국사기 기록의 사실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27] 공식적으론 가장 오랫동안 상왕으로 군림.[28] 정사에 태공(太公)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보통 유태공이라고 불리는데, 태공은 이름이 아니라 존칭이다.[29]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후궁, 황후, 황제, 태상황을 거친 여성이다.[30] 쩐태조는 실제 국왕으로서 재위한 적이 없다.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자기는 상황 노릇했다.[31] 사망한 시점이였으나 안경서가 이 사실을 은폐하고 살아있던 것처럼 태상황으로 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