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06:01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대보단
건무문 광지문 수문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옥청문
농포
소요암 옥류천
소요정 수문
취한정
수복방 신선원전 진설청
괘궁정 취규정
재실
능허정
의효전 사가정 청심정 천향각
몽답정 산단
백운사
천성동 태청문
청연각
존덕정
외삼문 폄우사 척뇌당
관람정
한려청 반도지
승재정
부군당
반빗간 태일문
통벽문 우신문 농수정
연경당 선향재
국출신직소 수인문 장양문
장락문
창덕궁 애련정 수궁
어수당 애련지
불로문
석거문 금마문 영춘문
운경거 의두합
희우정 천석정
서향각 주합루
어수문
사정기비각 부용지 영화당 춘당대 서총대
부용정
요금문 수문장청 서소 개유와 열고관
창송헌 수정전 가정당
수궁 습취헌 집상전
영모당
생물방 경복전 경훈각 징광루 함원전
소주방 청향각
숙경재 의풍각 융경헌 대조전 흥복헌
수랏간 관리합
만수전 태화당 재덕당 정묵당 요휘문 경극문 창경궁
경추문 수문장청 보경당 선평문 양심합 여춘문 병경문
함양문
서북 진설청 내재실
선원전
서남 진설청 동남 진설청
만수문 건중문 희정당 자선재 영안문
양지당 만안문 관광청 선정전 유덕당 건인문
책고 인정전 관물헌 석유실 어휘문
봉모당 억석루 연경문 만복문 향실 선정문 성정각 보춘정 양성재 중희당 칠분서 해당정 수방재 연영합 평원루 취명문
운한문 영의사 예문관 서방색 소주방 선화문 자시문 삼삼와 승화루 한정당 보화문
숭범문 선전관청 장방 영현문 전의사 취운정 협문
훈국초관인직소 이문원 검서청 약방 내삼청 광범문 대전장방 내반원 낙선재 석복헌
훈국초관인직소 홍문관 당후(승정원)문서고 궁방 사옹원 등촉방 대은원 수강재
훈국군파수직소 정청 육선루
악기고
승정원 상서성 연영문 협양문 무예청 장락문 주명문
남소
위장청
인정문 +양사(사간원) 공상청 사알방 누국
수문장청 금천교 진선문 숙장문 건양문 일영대
금호문 결속색
정색
내병조
(창덕궁관리소)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금위군번소 패장직소 별감방 전루 문기수번소 저승전 낙선당
무비사
의장고
전설사 빈청
(어차고)
진수당 장경각 계방
수문장청돈화문 수문장청 교자고 상의원 치미각 시민당 군옥재 춘방 등룡문
원역처소 수문장청 전루 별감방 등촉방 배설방 훈국군번소 사주문
단봉문 종묘북신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한국 정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궁원 宮苑
누원 樓苑 임해전
성동동 전랑지
용강동 원지 유적
구황동 원지 유적
부여 궁남지
익산 금마저 왕궁 후원
안학궁 정원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향원정
조선
창덕궁 서총대
원림 苑林 만월대 금원
경복궁 북원
창덕궁 비원
조선
경희궁 후원
조선
인경궁
조선
자수궁
화계 花階 경복궁 아미산
창덕궁 낙선재
왕실누정 王室樓亭 망원정
용양봉저정
낙천정
조선
탕춘대
관원 官苑
누원 樓苑 장대 將臺 촉석루
영보정
방화수류정
연광정
통군정
인풍루
수항루
객사 客舍
동헌 東軒
군영 軍營
세검정
환아정
영남루
군자정
한벽루
지수당
죽서루
백상루
성천
강선루
육승정
함흥
칠보정
관덕정
감영 監營 영주관
부용당
오순정
명승 名勝 광한루
항미정
채미정
망양정
월송정
쌍수정
경포대
청간정
총석정
부벽루
칠성정
풍패루
해월정
사원 私苑
별서 別墅 정원 庭苑 석파정 ·
서울
옥호정 ·
서울
백석동 별서 · 성북동 별서 ·
서울
무계동 별서 ·
반계 윤웅렬 별서 · 운림산방 · 서석지 · 귀래정 · 독락당 ·
다산초당 · 함안 무진정 · 남간정사
원림 苑林 부용원 · 소쇄원 · 식영정 · 환벽당 · 면앙정 · 송강정 ·
명옥헌 · 독수정 · 임대정 · 부춘정 · 백운동원림 · 초연정 ·
용호정 · 요월정 · 심원정 · 초간정 · 용계정 · 만휴정
임천원 臨川苑 효사정 ·
서울
압구정 ·
서울
천일정 · 서벽정 · 농월정 ·
거연정 · 요수정 · 용암정 · 월연대 · 선몽대 ·
청암정 · 침수정 · 위양지 완재정
향원 鄕苑 영보정 · 무기연당 · 선교장 · 오죽헌 ·
방해정 · 쌍산재 · 진주 용호정원
사원 寺苑
정림사 연지 · 미륵사 쌍지 ·
남원
실상사 지당 · 송광사 계담 ·
수선사 정원 ·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경주
불국사 구품연지 · 청평사 고려선원 · 낙산사 의상대 ·
대흥사 무염지 · 통도사 구룡지 · 봉선사 화계 · 봉정사 영산암
기타
금장대 · 태화루
현대정원
진해루 · 월화원 · 외도 보타니아 · 별빛정원 · 황산불빛정원 · 39-17 마중 ·
발리정원 · 섬이정원 · 아름다운정원 화수목 · 생각하는 정원 · 남이섬 · 원생정원
수목원 · 국가정원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현존하지 않는 건축물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763호 1764호 1765호
창덕궁 부용정 창덕궁 낙선재 서산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1764호
창덕궁 낙선재
昌德宮 樂善齋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2012년 3월 2일
제작시기 조선 시대, 1847년 창건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changdeok13.jpg
<colbgcolor=#bf1400> 낙선재 일곽
파일:창덕궁_낙선재_전경.jpg
낙선재 원경[1]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1. 개요2. 이름과 현판3. 역사4. 구조5. 부속 건물
5.1. 석복헌5.2. 수강재5.3. 평원루5.4. 취운정5.5. 한정당
6. 여담7.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창덕궁의 주거 건물이다. 전반적으로 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이다.

창덕궁창경궁의 경계 부분에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헌종 때는 창덕궁이었고, 고종 시기에는 창경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다시 창덕궁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위치도 창덕궁 주요부와 꽤 떨어져있고 오히려 현재 창경궁과 훨씬 가깝다.

낙선재라 하면, 낙선재 건물 한 채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 부른다. 좁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만을 말하며 넓게는 건물들 뒷편의 화계와, 그 위 너머로 있는 상량정 · 한정당 · 취운정까지 통틀어 낙선재 권역이라고 한다.

대한제국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궁궐 전각들 중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 이름과 현판

'낙선(樂善)' 뜻은 '선을 즐긴다'이다. 《맹자》에 나온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樂善) 게으르지 않는 것(不倦)을 천작(天爵)[2]이라고 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파일:2[0].jpg
<colbgcolor=#bf1400> 낙선재 현판[3]
현판 글씨는 청나라 문인 섭지선(葉志詵, 1779 ~ 1863)의 글씨이다. 단, 집자[4]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파일:보소당.png
<colbgcolor=#bf1400> 보소당 현판[5]
정면 쪽 툇마루 안쪽 오른쪽 칸에는 '보소당(寶蘇堂)' 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헌종의 당호이기도 하며 '소식(軾, 소동파)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헌종이 소식을 많이 흠모했던 듯 하다.

3. 역사

1847년(헌종 13년)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이 지었다.

낙선재 영역 언저리엔 원래 동궁 중 하나인 낙선당이 있었는데, 1756년(영조 32년) 불타고서도 재건하지 않고 그냥 철거해버렸다.

그 후 90여 년 뒤 비슷한 자리에[6] 이름이 같은 낙선재와 그 주변 건물을 지었는데 낙선당의 복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만 딴 새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동궁에 살 세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건립 이유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경빈 김씨도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헌종은 낙선재에,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수강재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붕어했고 경빈 김씨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이 잠시 이 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했다.# #

1907년(융희 1년) 황제 순종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7]한 후엔 황태자였던 영친왕일본에 볼모로 유학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종이 이 곳에 가끔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접견했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 이후 내전을 재건할 때까지 여기서 거주했다.

순종 붕어 직전에는 순종의 어진을 이 곳에 모시기도 했고# 순종 사후 한 달 뒤에는 대조전에 머물던 순정효황후가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1929년 3월에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했다.

그렇게 20여 년 넘게 잘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며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임시로 머물렀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파일:FB_IMG_1474742176563.jpg
<colbgcolor=#bf1400> 낙선재로 들어오는 순정효황후와 상궁들[8]
이후 1962년 덕혜옹주가, 1963년엔 의민태자(영친왕)이방자귀국하면서 낙선재 권역에서 순정효황후와 함께 살았다. 이 때 낙선재 본채는 의민태자 - 이방자 부부[9], 석복헌은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사용했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이방자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10] 낙선재는 마지막 조선 왕족이 살았던 곳이 되었다.
파일:낙선재 서행각.png
파일:낙선재 서행각 외경 2.png
파일:1982년 낙선재.png
파일:낙선재 출입.png
<colbgcolor=#bf1400> 근현대에 달라졌던 낙선재 풍경. 윗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 오른쪽은 낙선재 서행각 현관,
아랫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에서 바라본 서행각, 오른쪽은 정문 장락문이다.[11]
근래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았으니 당연히 조선 시대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1990년대 들어서 낙선재의 증축한 부분들을 철거하고 조선시대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2005년 7월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사망하자 빈소를 이 곳에 설치하여 조선 왕실 - 대한제국 황실 최후의 빈소로 기록에 남았다.

2012년 3월에 문화재청에서 보물 제1764호로 지정했다.

이후 (명목상) 이구양자인 황사손[12] 이원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방안을 문화재청에 제안한 적이 있으나 문화재청 측에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4. 구조


파일:창덕궁_낙선재_근경.jpg}}} ||
<colbgcolor=#bf1400> 낙선재 본채[13]
기본 몸체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나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2칸 더 나있어 실제로는 15칸이다. 겹처마 양식공포는 이익공,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제일 아랫 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계단 3개를 조성했다. 누마루의 하단은 화강석을 길게 깎아만든 주초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했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했으며 양반가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기에 잡상은 놓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파일:보물_제1764호_창덕궁_낙선재(2012년_국보,보물_지정보고서)1.jpg}}} ||
<colbgcolor=#bf1400> 낙선재 누마루 내부[14]
서쪽 끝에 누마루가 정면 1칸, 측면 2칸의 2칸이 나있고 그 뒤로 온돌방이 있으며 마루와 온돌방 사이엔 둥근 모양으로 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차례로 대청 2칸, 온돌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창고가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놓여있다. 동쪽의 온돌방과 마루방 북쪽엔 위에 적었듯이 온돌방이 2칸 더 나있는데 《동궐도형》에 따르면 이 덧댄 온돌방을 통하여 석복헌과 실내로 연결되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파일:창덕궁_낙선재_내부_창살모양.jpg}}} ||
<colbgcolor=#bf1400> 낙선재 내부 창살 모양[15]
특이하게 창호가 각 마다 다른데 만(卍)자 살, 아(亞)자 살, 정(丁)자 살을 비롯하여 당초무늬, 박쥐무니, 마름모고리무늬 등으로 상당히 개성있고 아름답게 꾸몄다.
  • 정면 동쪽 끝에는 작은 나무 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서편에 또 다른 문이 있는데 양쪽 기둥을 전벽돌로 쌓고 거기에 판장문을 달았다. 이런 양식은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든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낙선재 뒤뜰의 화계를 볼 수 있다.
  • 낙선재 동남쪽에 작은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행랑이 보이며 이 행랑에 난 문을 지나 좌측으로 들어가면 석복헌이 나온다.

파일:창덕궁_낙선재_후원_화계.jpg}}} ||
파일:보물_제1764호_창덕궁_낙선재(2012년_국보,보물_지정보고서).jpg}}} ||
<colbgcolor=#bf1400> 낙선재 화계[16]
파일:창덕궁_낙선재_후원에서_본_낙선재_근경.jpg}}} ||
화계 위에서 내려다 본 낙선재[17]
건물 뒤편에 계단 정원인 화계가 있다. 풍광이 굉장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전돌로 쌓고 장식한 담장, 굴뚝, 괴석, 석지(石池) 등을 세웠다.

5. 부속 건물

5.1. 석복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석복헌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2. 수강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수강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3. 평원루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평원루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4. 취운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취운정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5. 한정당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한정당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여담

  • 2015년 문화재청에서 낙선재 권역을 객실로 개방하는 이른바 '궁 스테이(宮 Stay)'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정확히는 보물로 지정된 낙선재 본채는 놔두고, 부속 건물인 석복헌과 수강재를 수리하여 개방하려 했던 것. 그러나 하루에 300만 원 씩 받는 금액 논란에다 화재 위험 때문에 계획을 무산시켰다.#
  • 가끔 문화 행사들도 열리는데, 특이하게도 고려 시대 문화 행사를 열기도 했었다.#
  • 영친왕일본에 있을 때 고국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고 한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한다.

파일:창덕궁_낙선재_야경.jpg}}} ||
<colbgcolor=#bf1400> 낙선재 야경[18]
〈창덕궁 달빛기행〉 코스 중 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달빛감상을 주로 이곳에서 한다.

7. 매체에서

  • 1990년 KBS1 광복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영친왕(서인석 분)의 추억이 서린 곳으로 나왔다. 임종 직전의 영친왕이 들 것에 실려 낙선재로 옮겨진 뒤, 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일:명성황후 낙선재.png}}} ||
<colbgcolor=#bf1400> 〈명성황후〉에 나온 낙선재
2001년 방송된 KBS2 드라마명성황후〉에서 수렴청정을 거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가 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견제로 나머지 들과 함께 머무는 곳으로 등장했다. 이 때 신정왕후는 '할 일 없는 과부 셋(신정왕후 조씨, 효정왕후, 철인왕후)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라며 비꼬았다. 다만, 실제 낙선재는 지나가는 배경 화면으로만 나왔고 실제 촬영은 경복궁함화당에서 했다. 아니 실제 낙선재에서 찍지 굳이 왜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2] 남에게서 존경을 받을 만한 타고난 덕행.[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낙선재 권역 1》.[4] 集字. 글자를 모아 작품 하나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5] 사진 출처 - 카카오맵.[6] 연구자들은 낙선당과 낙선재의 자리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7] 移御. 쉽게 말해 임금이사하는 것.[8] 맨 앞줄이 순정효황후, 그 뒤로 성옥염 상궁.[9] 영친왕은 혼수상태라 귀국 직후 인근의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낙선재와 한남동 일반주택을 오가며 생활했다.[10] 둘 다 같은 해 4월에 사망. 덕혜옹주가 4월 21일에 사망하고, 이방자가 9일 뒤인 4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11] 사진 출처 - MBC Archive.[12] 皇嗣孫. '황실의 적통을 잇는 자손'이란 뜻이다.[1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4]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6] 첫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1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0 (이전 역사)
문서의 r640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