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전 야구 선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프로 입단 전
요코하마 고교 시절 고시엔에서 투구하는 모습.
요코하마 고교 시절에는 엄청난 초고교급 유망주로 최고 152km/h의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구사하는 순수 실력과 더불어 고시엔에서 역대급 활약을 하며 헤이세이의 괴물(平成の怪物)이라는 칭호와 함께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1]
특히 1998년 고시엔 야구대회 준준결승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야구 명문인 오사카부의 PL학원고등학교를 상대로 연장 17회까지 무려 250구를 던지며 완투승을 기록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2] 거기다 바로 다음날인 메이토쿠기쥬쿠 고교와의 준결승전에서 구원등판[3], 역전승의 발판이 되어 팀을 결승으로 이끌고 이후 이어지는 결승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59년 만에 결승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게 불과 사흘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4] 그 결과 고시엔 춘계·하계 대회에서 연패를 달성해 팀의 우승에 공헌했고 우리나라의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국민체전에서도 팀을 정상으로 이끌며 한 해 3연패를 달성했다. 1997년 추계 현 대회 예선부터 다음해 제53회 국민 체육 대회 결승까지 공식 경기에서 44연승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고교 시절의 이런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그해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닛폰햄 파이터즈가 영입경합을 벌인 끝에 교섭권을 따낸 세이부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고 1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여기에 한 가지 비화가 있는데, 마쓰자카 본인은 요코하마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지명한 세이부가 마쓰자카가 염두에 두고 있던 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이부 구단은 모기업의 세이부그룹 계열사에 요코하마 고등학교 학생들을 취업시키겠다는 조건을 마쓰자카에게 걸었고, 이를 들은 마쓰자카는 결국 수락했다.
- 이때 마쓰자카 지명에서 미끄러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는 거포 3루수 후루키 카츠아키를 1순위로 지명하게 되는데, 이 선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초등학교 때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구단은 '타이요(요코하마의 전신)'라고 썼었다. 이 선수는 무라타 슈이치, 우치카와 세이이치 등과 함께 요코하마를 대표하는 거포 유망주로 기대받았으나, 컨택, 선구안, 수비가 죄다 별로였고 결국 프로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는데 커리어하이가 2003년의 타율 .208 / 22홈런 / 37타점이었으니 말 다했다.
마찬가지로 마쓰자카 지명에서 미끄리진 닛폰햄 파이터즈는 당시 고교 제일의 포수 중 1명으로 칭송받던 사네마츠 카즈나리를 1순위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쪽도 고등학교 때 39홈런을 날리며 준수한 포수라 평가받은 것과는 정반대로 타격이 심각하게 안 좋아서 후루키와 마찬가지로 닛폰햄에서 제대로 주전포수 자리를 잡지 못했고, 결국 경쟁에서 밀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요미우리에서는 백업 포수로 정착하며 그럭저럭 자리를 잡았다가 2017년을 끝으로 방출되었고, 이후 닛폰햄에 2018년 육성코치 겸 포수로 복귀해 다음해인 2019년에 은퇴했다. 동기들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커리어였으나 백업 포수로써는 나름 괜찮았던 선수라 가늘게나마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3. 일본프로야구 1기 시절
<colbgcolor=#004687><colcolor=#191919> 헤이세이의 괴물 (平成の怪物) |
1999년 1월 세이부 입단식에서. 왼쪽은 당시 세이부 감독 히가시오 오사무.
깡말랐던 데뷔 초기 시절.
1999년 4월 7일, 도쿄 돔에서의 닛폰햄 파이터즈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한 데뷔 무대에서 1회말 투구하는 모습. 평균 구속은 150.1km/h, 최고 구속은 155km/h가 찍혔다. 참고로 이 영상의 제목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충격의 프로 데뷔전이다.[5] |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프로 데뷔 첫해인 1999년도에 180이닝 16승 5패 평균자책점 2.60이라는 신인으로서는 믿기 힘든 스탯을 찍으며 데뷔 첫해에 다승왕,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석권하고[6] 고졸 투수로는 33년 만에 신인왕을 차지해 일본 야구계 최고의 투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치로와의 첫 대결에서 3연타석 삼진을 뽑아냈고, "자신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는 멘트를 남겼다.
그리고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2002년[7]을 제외하곤 가공할만한 완투율을 자랑하면서 매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하는 특급 에이스로 군림했다. 특히 3년차인 2001년엔 33경기에 등판해 240.1이닝 15승 15패 방어율 3.60을 기록하면서 사와무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사와무라상은 수상 과정에 논란이 있었는데, 12승 9패 196.2이닝 187탈삼진 방어율 2.46[8]의 노구치 시게키나 9승 13패 192이닝 171탈삼진 방어율 2.67의 이가와 게이를 제치고 마쓰자카가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것.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일단 노구치나 이가와는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을 채우지 못했고[9] 마쓰자카는 당시 양대리그를 통틀어 유일한 15승 투수였던데다가 240.1이닝에 214탈삼진으로 저 둘에 비해 이닝과 탈삼진을 훨씬 더 많았기 때문.
하지만 당시 최고의 투수는 당연 노구치 시게키[10][11]였고 마쓰자카도 당해 승률 50%로 사와무라 상 수상 자격 기준인 승률 60% 이상을 기록하지 못한 데다가 평자책도 3점 중후반대로 수상 자격 기준인 2.50 이하의 평자책을 만족하지 못했지만 전년도인 2000년도에도 수상자가 없었고 원칙대로 수상자를 고르면 2년 연속으로 수상자 후보가 없자 선정위원회에서 비록 마쓰자카가 자격 미달이긴 하나 격려 차원에서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히는 해프닝도 있었다[12]. 이런 일이 발생하자 '사와무라 상 수상이 정말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맞는가?'하는 의문과 함께 수상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사례로 2001년이 언급된다.
아무튼 마쓰자카는 이때까지만 해도 1999년 87볼넷, 2000년 95볼넷 2001년 117볼넷으로 제구력이 썩 좋은 투수는 아니었는데 2002년에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꾸고 딜리버리를 수정한 이후 2003년부터는 볼넷 허용률도 눈에 띄게 줄이면서 완전체 투수로 성장하며 2006년까지 최전성기를 달렸다. 하지만 정작 사와무라 상을 추가하지 못하면서[13] 미완에 가까웠던 2001년에만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마쓰자카의 커리어에서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2004년 일본시리즈에 출전해 팀을 일본제일로 이끌었다. 무서운 건 6차전에 선발등판하여 승리를 거두고 7차전 7대2로 앞선 8회말에 구원등판하여 홀드를 기록했다는 점이다.[14] 참고로 헹가래 투수는 9회말에 등판한 도요다 기요시이다.
2006년 사이토 카즈미와 투수 부문에서 치열하게 경쟁했고 마쓰자카는 17승 200탈삼진 방어율 2.13 등 무시무시한 스탯을 찍었지만, 사이토는 18승 205탈삼진 방어율 1.75 승률 0.783 투수 부문 4관왕을 차지했다. 그 해 사와무라상은 사이토가 수상했다. 대신 수비를 인정 받으며 골든글러브는 마쓰자카가 가져갔다. 이 둘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 맞대결했는데 마쓰자카가 완투승을 거뒀지만 팀은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까지 NPB 통산 8년 동안 평균자책점 2.95, WHIP 1.14, 204시합(190선발) 108승 60패 72완투 18완봉 완투율 38% 1402.2이닝 1355삼진이라는 엄청난 스탯을 찍고 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와 함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게 된다.[15]
이 글들은 당시 마쓰자카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현지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 세이버메트리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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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4.1. 2006년~2012년: 보스턴 레드삭스
2006년 12월 13일 보스턴 레드삭스 입단식에서.
2006 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텍사스 레인저스, 뉴욕 메츠, 뉴욕 양키스 등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이 입찰경쟁을 벌인 끝에 보스턴 레드삭스가 5111만 1111달러를 지불하고 독점 교섭권을 따냈고 6년간 총액 5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특급대우를 받으며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포스팅비까지 합치면 무려 1억 달러 넘게 투자했으며 6년간 1억 달러면 S급선수를 FA로 영입할수 있는 금액이다. 사이 영 상을 2회 수상한 "제2의 외계인" 요한 산타나의 계약규모가 6년간 1억 3750만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훗날 보스턴팬들의 분노를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에이전트가 그 분인 마쓰자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구단주인 존 헨리는 협상기간 동안 테오 엡스타인 단장과 테리 프랑코나 감독 등 사절단과 함께 마쓰자카와 저녁 식사를 주선했는가 하면 자신의 개인 전용 제트기로 래리 루치노 사장과 테오 엡스타인을 보라스 코퍼레이션 사무실이 있는 LA까지 파견해서 보라스와 협상하게 하기도 했다. 결국 지리한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극적으로 계약을 타결했다고 한다.
이런 기대감에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그를 유망주 순위 1위에 올렸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
보스턴 입단 첫해인 2007 시즌, 데뷔전에서 잭 그레인키와의 선발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32경기 15승 12패 ERA 4.40 ERA+ 108 204.2이닝 201K 80볼넷 bWAR 4.1을 기록하면서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했으며, 팀의 2007년 월드 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포스트시즌 성적은 총 4경기 선발 등판해 2승을 거두었으나 퀄리티스타트는 한 차례도 기록하지 못하였고 ALDS, ALCS의 평균자책점도 5점대로 좋지 않았다. 월드시리즈에서는 5.1이닝 2실점 승리 투수로 전보다는 선전했지만, 결과적으로 포스트시즌에서는 그저 그랬다.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고있는 오카지마 히데키와 마쓰자카
2008시즌 등판일지 |
이듬해인 2008년에는 29경기 18승 3패 ERA 2.90 ERA+ 160 167⅔이닝 154K 94볼넷 bwar 5.4를 기록했다. 부상으로 한 달가량 출장하지 못하긴 하였으나 평균 소화이닝이 5.78이닝, 6이닝을 넘긴 경기는 11경기에 불과하며, 퀄리티스타트 성공률이 48%로 채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한 볼넷은 리그 최하위의 기록이고, BB/9 또한 5.05로 최하위권. 다만, 피안타율이 .211로 AL 1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 타구는 투수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DIPS 이론이 세이버매트릭스계의 지지를 받던 때라 운빨이라고 평가절하 당하기도 했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투수의 투구 스타일도 BABIP에 영향을 끼친다는 해석이 중론이 된 이후로는 08마쓰자카의 경우 BABIP을 낮추는 스타일의 피칭을 한 것이라고 평가가 바뀌었다. 실제로 08년엔 극단적으로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스타일의 투구를 했는데, 보더라인에 걸치는 투구는 스트라이크 존 안쪽에 비해 명백하게 BABIP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계속해서 존 안에 걸치도록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런 식으로 던지면 볼넷을 내줄 위험성이 커지고 투구수가 많아져 이닝소화력이 약해진다는 단점 때문에 타자가 강하거나 실점 위기일 때가 아니라 투구 전체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마쓰자카는 단점을 신경쓰지 않고 바깥쪽만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투구를 했고 그 결과물이 저 극단적으로 낮은 피안타율과 많은 볼넷, 규정이닝을 간신히 채운 이닝소화력이었다.
물론 운 또한 따라주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이 해 마쓰자카는 유독 분식을 안 당했고[16] 6이닝도 힘들게 꾸역꾸역 채우고 내려갔음에도 좋은 보스턴 타선에 힘입어 18승을 기록할 수 있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3경기 등판해 딱 1경기만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해 승리를 챙겼을 뿐 나머지 2경기 모두 5이닝만에 강판당하였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에 이르는 등 작년과 똑같이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이 해 뛰어난 활약으로 사이영 상 투표에서 4위를 기록한다. 여기까지가 마쓰자카의 전성기.
이듬해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의 2연패를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 MVP를 수상했으나 정규 시즌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59⅓이닝 던지는 데 그쳤으며, 2010시즌에도 9승 6패 ERA 4.69 153⅔이닝 74볼넷 133탈삼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마쓰자카 본인은 2009년의 부진에 대해 일본과 메이저리그의 트레이닝 시스템 차이라고 밝혔다. 마쓰자카는 선발 등판을 앞두고 롱토스와 불펜 피칭을 같은 날에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어깨가 소모되고 부상 우려가 있다며 레드삭스 구단이 금지시켰고, 일본식 훈련을 고집하려는 마쓰자카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런 식으로 계속 훈련하면 나는 일본 시절처럼 던질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만 이 인터뷰 기사 내용이 미국에도 알려져서 이슈가 되자 마쓰자카는 "자신은 공개적으로 팀 훈련 방식을 비판한 적이 없고, 인터뷰 기사 내용대로 말한 적도 없다"며 영문으로 사과 성명을 냈다.#
2011년 성적은 8경기 3승 3패 ERA 5.30 37⅓이닝 23볼넷 26탈삼진.
2012년에는 복귀 후 첫 등판부터 5이닝 4실점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최종 성적은 11경기 45⅔이닝 동안 1승 7패 ERA 8.28.
2012년 시즌으로 보스턴과의 6년 계약이 끝났다. 메이저리그 정복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6년 동안 117경기 50승 37패, ERA 4.52, 1완투, 조정 ERA 101, WAR 10.5, WHIP 1.418로 그냥 평범한 메이저리그 성적을 냈다. 참고로 동급이라던 요한 산타나와 로이 오스왈트는 같은 기간 142경기 61승 47패 평균자책점 3.21, 조정 ERA 128, WAR 16.6(산타나), 168경기 65승 49패 평균자책점 3.56, 조정ERA 117, WAR 19(오스왈트)이다.
첫 2년은 상당한 성적을 냈지만 09년의 부상 이후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먹튀가 되고 말았다.
4.2. 2013년: 마이너리그
마쓰자카 자신은 보스턴에 남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확률은 제로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보스턴도 "어떤 결정도 안했고 어떤 대화도 안했지만 언제 대화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해 마쓰자카를 잡을 의지가 약함을 입증했다. 일본에서는 마쓰자카 쟁탈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고향팀인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가 스캇 보라스와 접촉을 시작했고, 치바 롯데 마린즈도 이토 쓰토무 감독이 직접 나서서 마쓰자카가 일본에 오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다 친정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도 마쓰자카를 뺏기지 않을 기세였다.그러나 마쓰자카 본인은 메이저리그 잔류에 무게를 두고 있었고 결국 2013년 2월 11일, 메이저리그 구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시범경기에서는 호투를 펼쳤지만 5선발 경쟁에선 실패했고 일단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투구를 하다가 4월 29일 옆구리 통증으로 강판. 그 뒤 DL로 내려갔는데 왼쪽 옆구리 좌상으로 복귀에는 3주나 걸린다고 한다.#
부상에서 복귀한 뒤 6월 11일에 트리플A에서 2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6월 16일 선발 등판을 했으나 3⅔이닝 4안타 4실점으로 강판당했다. 결국 8월 20일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한 채 방출되었다. 마쓰자카의 트위터에 의하면 자신이 스스로 방출 요청을 하여 방출된 것이라고 한다. 성적은 5승 8패 평균자책점 3.92
4.3. 2013년~2014년: 뉴욕 메츠
그리고 FA 신분을 얻게 되었다. LA 다저스와 LA 에인절스 등의 서부 지구 팀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세이부 라이온즈의 경우에는 마쓰자카의 영입을 시즌이 끝난 이후 고려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마쓰자카가 일본 복귀를 희망할 경우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뉴욕 메츠 시절.
8월 22일, 뉴욕 메츠와 메이저리그 계약에 성공했다. 기존 우완 선발투수인 제레미 헤프너와 헨리 메히아의 시즌아웃으로 땜빵 선발로서 계약한 것. 계약하고 바로 다음 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홈경기 선발로 등판했다. 하지만 등판하자마자 1회 1실점, 2회 4실점(...)하고 6회 시작 전 교체되었다. 5이닝 5실점(5자책) 1볼넷 4삼진 6피안타 2피홈런.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을 때의 성적은 4⅓ 이닝 4실점 5삼진 4볼넷(…). 애틀란타와의 경기에서는 3이닝 6실점을 하며 강판되었다. 이 3경기동안 성적은 3경기 12⅓이닝 동안 ERA 10.95 무승 3패 피안타율 0.365 WHIP 2.11이라는 최악이라는 말밖에 안나오는 막장피칭을 보였다.
그래도 9월 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는 콜업 안 해준 원한이 서린 투구를 하며 5⅔이닝 1실점 6삼진 3볼넷으로 그럭저럭 희망이 보이는 피칭을 했다.
9월 14일 마이애미 말린스를 상대로 드디어 오랜만에 메이저리그 선발승을 거뒀다. 7이닝 동안 탈삼진 3개에 2피안타 1볼넷, 1실점 호투를 통해 스스로 메이저리그 잔류 희망의 불씨를 남기는데 성공. 9월 2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도 6이닝 동안 탈삼진 6개에 4피안타 3볼넷 4실점 2자책점으로 다소 부진했으나 팀 타선이 터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9월 25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는 선발로 나와 7⅔이닝 무실점에 4피안타, 탈삼진 6개를 잡아내며 활약, 본인의 시즌 3승과 함께 팀의 1:0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콜업된 후 초기에는 퇴물급 피칭을 선보였으나, 이후 실전 감각이 돌아와서인지 급격히 경기 내용이 좋아졌다. 2014년 계약은 꿈도 못 꿀 것 같던 8월 달 분위기와 달리 2014년 1년 남짓한 짧은 계약으로 메츠에 잔류할 가능성, 내지는 4~5 선발을 찾는 팀들이 긁어볼만한 복권으로 등극하는데에 성공했다.
2014시즌을 앞두고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자격으로 메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4월 16일(미국시각)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다. 19일 경기에서는 1이닝 2피안타 1볼넷 1실점으로 부진했으나 바로 다음날인 20일 경기에서는 연장전 3이닝동안 1볼넷 5K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거기다 이 경기를 통해 미국, 일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리고 4월 24일(미국 시각) 팀이 4:1로 이기고 있는 9회에 올라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첫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불펜으로 전환한 뒤에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
한편 메츠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경기가 우천때문에 취소되어 5월 25일 더블헤더로 진행되게 되었는데, 여기서 한 경기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간만에 선발로 출전한 5월 25일 경기에서는 6이닝 3피안타 1볼넷 6탈삼진 2실점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답내친으로 1점을 얻은 것은 덤. 이 경기 이후에는 선발로도 출장하고 있다. 여전히 볼넷이 많지만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평균자책점도 3점대를 유지하고 있다.
2014 시즌 최종 성적은 34경기 83⅓이닝 3승 3패 1세이브 3홀드 78탈삼진 평균자책점 3.89로 마무리하였다.
이후 일본 복귀를 결정하며 이 시즌이 메이저리그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8시즌 158경기 132선발 790.1이닝 56승 43패 1세이브 ERA 4.45 Bwar 9.4 Fwar 8.4.
5. 일본프로야구 2기
5.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2014 시즌 종료 후 일본프로야구 복귀설이 돌더니 결국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3년 12억엔 계약을 맺고 돌아왔다. 구단관계자를 비롯해 팬들까지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했고 앞으로 잘할 가능성이 희박한 투수한테 12억엔은 너무 과한거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헤이세이의 괴물 마쓰자카가 최소 10승은 해줄 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이 와중에도 장훈은 “마쓰자카는 현재 딴 사람이다. 팔꿈치가 너무 내려와 있다. 8:2의 비율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발언을 남겼는데,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온 선수들한테 혹평을 하기로 유명한 장훈의 발언이라 당시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시즌을 앞둔 2015년 3월 초에 팀 연습에 혼자만 참가 안 해서 어깨를 부상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직후에 치러진 시범경기에서도 3이닝 3사구 2실점의 영 좋지못한 피칭을 보여주며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후 개막부터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어깨부상으로 인한 2군 스타트가 확정됐다. 그래도 팬들은 후반기부터는 던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2015년 4월, 언론의 취재로 마쓰자카의 부상은 마음의 병으로 몸은 아픈 곳이 없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특단의 조치로 무기한 '노 쓰로 조정'[17]에 들어갔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고, 5월에 실시한 원투(멀리 던지기)테스트에서는 '투수의 최소 합격선'인 50m도 힘겨워하는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며 일본 야구계를 경악하게 했다. 결국 7월 마쓰자카는 내년을 향한 조정에 돌입했다고 공식 발표하고 8월에 어깨수술을 받았다[18]. 어깨수술하며 실제로 아팠던 걸로 확인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1군에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 하고 시즌 아웃되어 팬들의 조롱을 받는 등 헤이세이의 괴물의 일본 복귀 첫해는 최악의 시즌이 되어버렸다.
이 당시의 사진
반면 소속팀인 소프트뱅크는 마쓰자카 없이도 퍼시픽리그를 초고속으로 우승하고 2015년 일본시리즈마저 연패한 탓에 마쓰자카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2015년 시즌 동안 투수들이 너무 많아서 1군 선발 투수 자리만 해도 6명(스탠드리지, 밴덴헐크, 나카타, 셋쓰, 데라하라, 다케다)이 변칙적으로 로테이션을 돌고 있으며[19] 이 틈에 못 끼어서 2군에 있는 투수들만으로도 1군의 로테이션을 꾸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타구단 팬들로부터 1군에서 안 쓰려면 임대라도 해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팀에서는 마쓰자카 본인의 요청에 따라 수술 후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재활을 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거의 방목을 했다. 이러한 소프트뱅크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가 많은데, 이는 사전에 부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라이벌 팀에서 부활해서 장애물이 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20] 고액으로 계약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미 소프트뱅크의 관계자가 "구단주도 기대는 안 했다. '타 구단에서 활약할 바에 우리가 붙잡자'라고 생각해서 계약했다"라고 했다[21].# 일본 최강의 재력을 가진 구단이니 가능한 행동.
구단에서는 수술 후 복귀까지 6개월이 걸린다고 발표했지만, 선수로서 가장 치명적인 어깨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었다. 일단 1년간 구단의 방목 덕분에 마음 편하게 재활을 할 수 있었던 게 도움이 됐는지 몸 상태는 나아졌다고 한다. 2016년 3월 3일 두산 베어스와의 연습경기에 등판해서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최고 구속은 141km/h 정도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2016시즌에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역시 어깨 문제로 휴업하다가 8월 25일에 2군에서 첫 등판을 했으며 2군 경기에서도 1⅔이닝 동안 2피홈런 9실점이라는 재앙같은 피칭을 하는 등 영 좋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1군 콜업은 올해도 물 건너가나 싶었지만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콜업되었다. 구도 기미야스 감독은 전날 마쓰자카와 면담을 가졌으며 2군과 1군은 다르다. 한 번이라도 1군에서 던지는 게 좋다고 하면서 불펜 투수 등판 예고를 했다. 공만 좋다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도 포함도 생각해본다고.
그렇게 2016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라쿠텐 전에서 0대2으로 뒤진 8회말에 등판하며 드디어 일본 복귀 후 첫 1군 마운드에 올랐다.[22] 하지만 결과는 1이닝 3피안타 4사사구 5실점 2자책점으로 최고 구속은 시속 144km에 제구력도 좋지 않는 등 혹사 여파가 세게 온 듯하며 결국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도 합류 불발됐다.
2년동안 말아먹은게 못내 아쉬웠는지 2016년 시즌 끝나고 본인의 의사로 윈터리그에 참가했다. 많은 우려[23]가 있었으나 총 4경기에 선발 등판, 20이닝 13피안타 11탈삼진 11볼넷 6실점 평균 자책점 2.70를 기록하며 꽤 좋은 성적으로 인생 첫 윈터리그를 마무리했다[24]. 이후 스프링캠프에서 의욕적으로 공을 던지며 재기를 노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한 시간동안 공을 수백개나 뿌리는 무시무시한 연습량으로 인해 그 분이 있는 한화로 오라는 드립이 흥하고 있다.
그리고 시범경기 개막전에 등판하고 히로시마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7이닝 노히트를 기록하는 쾌투를 보였으나 2군에서 개막을 맞이했다. 이후 2군 있다가 4월 12일 와다 츠요시가 팔꿈치 통증으로 2군을 가면서 15일 오릭스 전에 등판 예고를 됐다. 하지만 마쓰자카 본인도 어깨 부상으로 등판 취소, 이후 재활에 몰두하며 결국 17시즌에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소프트뱅크에서 재계약을 원한다고 한다. 향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마쓰자카에게 준 돈은 상품 판매로 다 충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수 본인이 FA를 선언하면서 소프트뱅크와 결별하게 되었다[25]. 이정도 먹튀에도 구단주는 마쓰자카에게 준 3년간 12억엔을 그 정도는 (상승의 강팀을 만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오차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데다, 팬들도 마쓰자카의 계약 규모 때문에 선수단 운영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라서 다른 팀 팬들의 어그로에도 개의치 않는다.
소프트뱅크 퇴단 이후에는 뛸 팀을 찾아다녔고 요코하마에서 관심이 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오퍼가 들어오지 않자 최저 연봉(2000만엔)만 받겠다고 선언을 했다. 현재 실력만 보자면 그 돈도 아깝지만 마쓰자카가 가진 상품성을 감안하면 데려올 가치는 충분하다는 게 현재 인식이다. 우선 한신과 주니치가 거론됐지만 한신은 리빌딩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대만 진출까지 모색하고 있으며 퉁이 라이온즈측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되었지만 마쓰자카 본인이 "거짓뉴스가 나를 망친다."고 강력히 반발, 부인하기에 대만 진출은 단순 찌라시로 머물었다.
그러던 와중에 닛칸 스포츠를 시작으로 일본의 스포츠 신문들이 일제히 주니치 드래곤즈의 마쓰자카 영입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라이 분고 주니치 구단주가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혹평을 했고 이러한 기사를 접한 한국의 기자들은 마쓰자카가 주니치에게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도를 했다. 그러나 구단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의 주니치 팬들 사이에서는 "구단주가 의뭉스럽게 딴청부린게 하루이틀이냐, 어차피 얘기 다 해놓고 연막 피우는 게 뻔하다"라면서 마쓰자카의 영입을 거의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팬들의 추측대로 주니치에서 입단 테스트 기회를 제공했다. 전적으로 현장의 의견을 고려하여 영입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감독과 사장은 긍정적인 뉘앙스의 인터뷰를 남겨 2018시즌 마쓰자카의 소속팀이 점차 정해지는 분위기다.[26]
5.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2018년 1월 23일, 언론을 통해 비공개 입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니치 공식 입단을 확정지었다. 주니치의 모리 시게카즈 감독에 의하면, 스프링캠프 명단에도 넣을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봉은 4억엔에서 무려 96%가 삭감된 1500만엔에 계약하였다. 이 수치는 육성선수를 제외하면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삭감률이라고 한다. 등번호는 테스트 직전 만약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99번을 달 것이라고 예고했었다.[27]2018년 3월 4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반테린 돔 나고야에서 열린 라쿠텐 이글스와 시범경기에 선발 등판해 피홈런 포함 2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시범경기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되었다. 4월 5일 요미우리전에서 선발로 나섰다. NPB 경기에서 선발로 나선 것은 12년만.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5이닝 96구를 던지면서 8피안타 3사사구 3실점(2자책)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결과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소뱅 시절 계속 언급한 팔이나 어깨부위의 위화감 얘기도 안 하며 다음 등판을 기대하게 했다.
4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7이닝 동안 123구를 던지며 4피안타 2탈삼진 2볼넷 1몸에 맞는 공 2실점(1자책)을 기록하며 퀄리티스타트 플러스를 챙겼지만 1-2로 패배하며 패전 투수가 됐다.
4월 30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1실점 3피안타 8피사사구 6탈삼진을 기록했고 팀이 3: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5월 20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투수로서는 6이닝 3피안타 7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고 타자로서는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는 등 투타 양면에서 활약했고 팀이 6: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6월 8일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교류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1실점을 기록했고 팀이 5:4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전반기 기록은 7선발등판 3승4패 방어율 2.41 37.1이닝 35탈삼진 22볼넷 WHIP 1.29. 잔부상이 많아 등판수가 적은 것을 빼면 빼어난 비율 스탯을 보여주며 쏠쏠하게 활약 중. 많이 못 나와서 그렇지 실력 자체는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할 듯. 원 소속팀 소프트뱅크 선발 로테이션이 붕괴된지라 아까운 자원으로 재평가되는 지경.
그리고 마운드에서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덕분인지 올스타전 세리그 선발투수 팬투표 1위로 선발되었다.
8월 1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2실점 6탈삼진 5피안타 6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8: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8월 16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3실점 6탈삼진 5피안타 3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11: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9월 2일 거인전에서는 2이닝 61투구 9피안타(2피홈런) 1탈삼진 7실점으로 거하게 불을 질렀고 9월 13일 한신전에서는 5이닝 95투구 5피안타 4탈삼진 1실점(1자책)으로 선발승을 거두었다. 시즌 6승(4패) 기록.
시즌 성적은 11경기 55.1이닝 등판 6승 4패 51탈삼진 방어율 3.74로 많이 나오지는 못했지만 괜찮은 비율스탯을 기록했다. 거의 이닝당 1탈삼진을 기록할 정도로 올라온 구위가 볼만하다.
시즌 후에는 테레비아사히에서 중계한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게스트 해설을 맡았다. 2018년 11월 12일 NPB에서 선정한 올해의 컴백상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주니치도 마쓰자카 영입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연봉도 1500만엔에서 8000만엔으로 상승하였다.
그런데 2019년 2월 9일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팬에게 싸인을 해주다가 극성팬이 팔을 잡아당겼는데 이때 팔에 위화감을 호소했고, 검진 결과 어깨 염증이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 탓에 장기간 이탈이 불가피 해졌다.
5월 16일 팀의 연습일에 골프를 치러 가서 구단 자체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이 구단 대표를 통해 발표되었다. 팬들의 반응은 비난 일색.#
7월 16일 한신전에서 시즌 첫 등판했다. 5이닝 2실점을 기록했는데 1, 3, 5회 대량실점 위기가 있었으나 위기관리능력을 보이며 탈출했다. 2:2로 팽팽한 가운데 교체되어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7월 27일에는 DeNA와의 경기서 0.1이닝 8실점이라는 최악투를 보이며 다시 1군에서 말소됐다.
이후 2군에서 컨디션 조절과 경기 출전으로 1군 복귀를 노렸으나 정규 시즌이 끝나면서 그대로 2019년을 마무리. 시즌 후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연봉을 최저까지 내리면서 주니치에 계속 남을지를 협의 중이었으나 주니치 입단 테스트를 도와준 모리 시게카즈 디렉터, 토모리 유이 해외 스카우트가 사임을 하면서 마쓰자카 본인도 방출을 요청했다. 일단 현역 생활은 계속 할 생각이라는 방침. #
그리고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일본시리즈 해설을 맡았는데 나름 소프트뱅크 출신이라고 교진 출신인 다카하시와 함께 부른 듯. 작년 일본시리즈 게스트 해설에서 평가가 나쁘지 않아 올해도 해설을 맡게 되었다. 은퇴 후 진로는 해설 쪽으로 점쳐지는 듯.
5.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주니치 퇴단 이후 친정인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마쓰자카 획득에 나섰다. 2020년은 세이부에서 뛰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분위기. 그리고 2019년 12월 3일 NHK 등 일본 언론에서 오피셜이 뜨면서 돌고 돌아 결국 세이부에 돌아오며 친정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시즌 시작 전 연습경기에서 두산 베어스의 정수빈에게 3루타를 맞고 오재일에게 투런홈런을 맞았다.
이후에 닛폰햄 전 연습경기에 등판하여 4이닝 4실점을 기록했다. 직구가 힘이 없어서 변화구 위주 피칭을 하다보니 투구수가 많아지는게 여전히 문제.
그러다가 또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추(목) 부위에 내시경 수술을 받았다고 하며 재활에만 2~3개월이 소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세이부 팬들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국 2020 시즌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구단은 재계약 예정이라고. 구단 역사에 남을 에이스이자 왕년의 전국구 스타라 다시 세이부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는 날엔 좌석은 매진될 것이고 상품도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또한 '친정팀에서 재기 후 영광의 은퇴'라는 스토리를 만들고 싶을 것이다.
2020년 12월 21일 1천만엔 깎인 연봉 2,000만엔에 다음 시즌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게 2021년을 맞이했지만 시즌 절반쯤 지난 시점에서 2군에서도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있다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인은 2020년에 받은 목 내시경 수술. 수술을 받은 후 손저림이 생겼는데 2021년까지 손저림이 낫지 않아 공을 던질 수 없는 몸상태가 되었다고.
6. 은퇴
결국 2021년 7월 7일, 은퇴를 선언했다. 2021년 10월 19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현재 공석인 등번호 18번을 달고 마운드에 올라 현역 시절을 마감하는 피칭을 선보일 예정이다. 같은 날 은퇴 기자회견도 계획되어 있다.19일 당일 예정대로 마운드에 올라와 1타자만을 상대했다. 콘도 켄스케에게 5구 승부 끝에 볼넷을 주고 현역 마지막 등판을 마무리했는데 5개의 공 모두 포심이었음에도 120km/h를 넘기지 못했고[28] 제구도 뜻대로 잘 되지 않았는데, 오른팔의 손저림이 심한 모양이다.은퇴 경기 투구 영상
2021년 12월 4일,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으로 최종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식 도중 스즈키 이치로가 깜짝 등장해 꽃다발을 전달했다.영상
이렇게 일본 야구에 충격을 안긴 헤이세이의 괴물은 젊은 시절 누적된 혹사의 여파로 MLB 시절부터 점차 하락세를 겪더니, 일본 복귀 후 끝없는 부상에 시달리다 아쉬움 속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7.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1999 | 세이부 | 25 | 180 | 16 | 5 | 0 | 0 | 2.60 | 124 | 95 | 151 | 1.17 | ||
2000 | 27 | 167⅔ | 14 | 7 | 0 | 1 | 3.97 | 132 | 99 | 144 | 1.35 | |||
2001 | 33 | 240⅓ | 15 | 15 | 0 | 0 | 3.60 | 184 | 118 | 214 | 1.25 | |||
2002 | 14 | 73⅓ | 6 | 2 | 0 | 0 | 3.68 | 60 | 22 | 78 | 1.02 | |||
2003 | 29 | 194 | 16 | 7 | 0 | 0 | 2.83 | 166 | 72 | 215 | 1.17 | |||
2004 | 23 | 146 | 10 | 6 | 0 | 0 | 2.90 | 127 | 48 | 127 | 1.16 | |||
2005 | 28 | 215 | 14 | 13 | 0 | 0 | 2.30 | 172 | 59 | 226 | 1.03 | |||
2006 | 25 | 186⅓ | 17 | 5 | 0 | 0 | 2.13 | 138 | 37 | 200 | 0.92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2007 | BOS | 32 | 204⅔ | 15 | 12 | 0 | 0 | 4.40 | 191 | 81 | 201 | 1.32 | ||
2008 | 29 | 167⅔ | 18 | 3 | 0 | 0 | 2.90 | 128 | 101 | 154 | 1.32 | |||
2009 | 12 | 59⅓ | 4 | 6 | 0 | 0 | 5.76 | 81 | 32 | 54 | 1.87 | |||
2010 | 25 | 153⅔ | 9 | 6 | 0 | 0 | 4.69 | 137 | 82 | 133 | 1.37 | |||
2011 | 8 | 37⅓ | 3 | 3 | 0 | 0 | 5.30 | 32 | 24 | 26 | 1.47 | |||
2012 | 11 | 45⅔ | 1 | 7 | 0 | 0 | 8.28 | 58 | 23 | 41 | 1.71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2013 | NYM | 7 | 38⅔ | 3 | 3 | 0 | 0 | 4.42 | 32 | 16 | 33 | 1.24 | ||
2014 | 34 | 83⅓ | 3 | 3 | 1 | 3 | 3.89 | 62 | 56 | 78 | 1.34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2015 | 소프트뱅크 | 1군 기록 없음 | ||||||||||||
2016 | 1 | 1 | 0 | 0 | 0 | 0 | 18.00 | 3 | 4 | 2 | 5.00 | |||
2017 | 1군 기록 없음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2018 | 주니치 | 11 | 55⅓ | 6 | 4 | 0 | 0 | 3.74 | 50 | 37 | 51 | 1.48 | ||
2019 | 2 | 5⅓ | 0 | 1 | 0 | 0 | 16.88 | 12 | 5 | 2 | 2.63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2020 | 세이부 | 1군 기록 없음 | ||||||||||||
2021 | 1 | 0 | 0 | 0 | 0 | 0 | 0.00 | 0 | 1 | 0 | ∞ |
8. 국가대표 경력
2회 연속 WBC 대회 MVP를 차지한, 역시 영광의 시절을 보낸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시절.
마쓰자카의 국가대표 경력은 매우 화려하며 그 실적과 성적도 매우 훌륭하다. MLB에 건너가기 전인 2006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이 선발된 모든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였으며[29], MLB에 건너가서도 2009 WBC에 출전하여 팀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국가대표 단골이었다.
특히, 쿠바[30]와 대만전[31]에 극강의 모습을 보였으며 두 나라의 경기에 선발로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팀이 이겼다.[32]
마쓰자카는 프로 선수로 나선 국제대회에서 통산 13경기 9승 2패 86.2이닝 61피안타 93탈삼진 22볼넷 2사구 21실점(17자책) ERA 1.77 [33]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2006 WBC, 2009 WBC 우승 및 MVP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 등 실적도 화려한 편이다. 단순히 클래식 스텟만 훌륭한게 아니라 세부 스텟을 봐도 WHIP는 0.96, BB/9가 2.08, k/9가 9.66, 볼삼비는 무려 4.23이다. 마쓰자카는 국제대회에서도 공을 거침없이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었으며[34] 그렇기에 볼넷을 내주는 경우가 적었던 것이며 전성기 시절 구위도 좋았기에 타자들과의 정면 승부에서 결과도 좋았다. 다만 정면 승부를 하다 보니 홈런을 종종 맞기도 했으며 특히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정면 승부 결과가 안좋을 때 홈런을 비롯해서 이승엽의 2루타 등 장타와 함께 결정적인 실점을 내주기도 했었다.
그의 국대 커리어에서 다른 선수와 비교하여 재밌는 점은, 13경기 모두 선발로 등판했다는 것이다. 많은 국제대회를 나와 선발로만 활약한 케이스는 흔치 않다.[35] 마쓰자카와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단골이던 우에하라 고지도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부터는 구원 투수로 나왔고, 리그내에서는 좌완 최고 선발 투수인 스기우치 도시야 조차도 거의 모든 경기에서 불펜 투수로 보직을 전향해야했을 정도로 일본 투수들 라인업에서 좋은 투수들이 즐비했다. 이와쿠마 히사시도 2009 WBC에서 구원으로 등판한 적이 한 번 있고, 다르빗슈 유도 2009 WBC에서 대회 후반부에서는 불펜 투수로 나왔다. 2000년대 국대 단골이던 와다 츠요시도 2006 WBC에서 멕시코전에 구원 등판한 적이 있다. 심지어 대투수 구로다 히로키마저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나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정상 불펜으로 돌릴 정도의 일본 팀이었는데, 이런데도 마쓰자카는 모든 경기를 선발로 나왔다는 점에서 그가 선발 투수 에이스로서 얼마나 중용받았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
여담으로, 한국 대표팀과의 통산 기록은 3경기 1승 1패 21이닝 10실점(7자책) ERA 3.00으로 그가 국제대회 통산 실점한 21실점 중 절반 가량인 무려 10실점을 한국 대표팀에게 내줬다. 마쓰자카가 국제 대회에서 허용한 홈런 수는 4개[36]인데 그 중 절반인 2개도 한국에게 내준 것이다.
홈런 맞은 경기는 마쓰자카의 국제대회 13경기 중 1회에 실점한 4경기이기도 한데 재밌는 점은 한국전 외의 2경기에서는 솔로 홈런으로 각 1점씩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나,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이승엽의 투런 홈런을 포함 4실점, 2009 WBC 승자조 경기에서 김태균의 투런 홈런으로 2실점했다. 마쓰자카 상대로 초반에 공략하기 어려워했던 여타 다른 나라 타자들과는 달리, 우리나라 타자들은 마쓰자카에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마쓰자카의 국가대표 커리어 2패 중 1패도 한국이 안겨준 패배였다. [37]
이렇듯, 한국에게는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고 임팩트 큰 장면[38]들을 내주며 한국 팬들에게 우에하라 고지나 오타니 쇼헤이급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실제 한국과의 통산 성적을 제외하고 다른 국가와의 경기에서 통산 성적은 10경기 8승 1패 75.2이닝 11실점(10자책)ERA 1.19의 엄청난 성적이 된다. 즉, 다른 국가에는 재앙과도 같던 투수였다.
일각에서는 다르빗슈 유[39]와 마쓰자카가 힘으로 밀어 붙이다[40]가 한국 타자들 상대로 다소 약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국 타자들이 파워 피처의 유형의 투수들에게 강하고 일본산 피네스 피처 유형의 좋은 로케이션과 커맨드 및 뛰어난 변화구로 타자들을 상대하는 투수들에게 전통적으로 약했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는 선택적 기억의 오류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와다 츠요시[41][42]나 이와쿠마 히사시[43], 와타나베 슌스케[44][45]처럼 제구가 좋거나 변화구 무브먼트가 훌륭한 이른바 기교파 투수들에게 한국 타자들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에하라 고지[46][47]나 오타니 쇼헤이[48] 등 파워피처 유형의 투수들에게도 한국 타자들이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 고려할 때, 마쓰자카가 파워 피처스럽게 피칭하여 한국에게 안통했다기보다는 한국 타자들과 상성이 안 좋았던 것으로 이해하는게 일견 타당해 보인다.[49][50]
그래도 일본 내에서는 전반적으로 통틀어 볼 때, 대표로 나갈 때마다 성적도 훌륭하고 국가대표 단골이였기에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일본 내에서도 매우 좋게 평가된다. 마쓰자카보다 개인으로는 높게 평가받는 다르빗슈 유도 국대 성적과 실적에서는 마쓰자카에게 몇수는 접고 들어갈 정도로 괴물 투수라는 별명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8.1. 1999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마쓰자카는 아마추어 시절에 고3이던 1998년 9월에 일본 고시엔 구장에서 펼쳐졌던 아시아 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 등에 출전하였을 정도로 국가대표 단골이었다. 그런 마쓰자카가 프로선수로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처음 참가한 대회는 1999년에 한국에서 열린 제 20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이다. 이 대회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로 2등까지 시드니 올림픽 진출권이 주어졌기에 한일 양국가는 1등에게만 올림픽 직행권이 주어지던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달리 대회 마지막 날 예정된 한일전에 총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전의 중국과 대만전을 모두 잡아 2연승을 하면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되기 때문. 그래서 이 둘 다음으로 전력이 강한 대만전에 양 국가 모두 총력을 쏟았고 에이스 마쓰자카[51]는 한국전이 아닌 대만전[52]에 등판하게 된다.- 2회까지 잘 막고 있던, 마쓰자카는 3회 들어 선두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고 만다. 이후, 후속타자를 삼진 처리해 원 아웃을 잡아내었지만 다음 타자에게 중견수 앞 안타를 맞아 1사 1,2루의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여기서 후속 타자에게 중견수 앞 빗맞은 안타를 맞아 선취점을 내준다. 이후 다음 타자를 1루수 번트 플라이볼 아웃, 그 다음 타자는 삼진 처리하며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 했다. 4회말 일본 타자들이 한점을 만회해주어 스코어는 1:1 동점이 되었고 이 때부터 대만의 선발 차이충난[53]과 마쓰자카의 팽팽한 투수전이 시작되었다. 마쓰자카는 3회 실점 이후 9회까지 한 타자만 출루를 허용하고 나머지 타자는 모조리 범타 처리했다. 다만 위기가 없지는 않았다. 6회초 안타를 치고 나간 선두타자가 마쓰자카의 보크와 희생 번트로 3루를 밟아 1사 3루가 되었는데 여기서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하고 그 다음 타자는 2루수 평범한 땅볼로 처리하며 실점없이 위기를 넘긴다.
이 위기를 끝으로 마쓰자카는 7회부터 9회까지 3이닝 퍼펙트로 대만 타자들을 범타로 돌려세운다. 그러는 한편, 일본 타자들도 여전히 상대 선발 차이충난에게 막혀 추가점을 내지 못했다. 9회에도 선두타자가 좌익수 플라이 아웃 당하고 이후 다음 타자가 삼진 처리되며 투아웃이 되었고 다음 타자 오키하라가 친 타구가 3루 쪽에 평범하게 뜨고 말았다. 정규이닝이 끝나고 당연히 연장행이구나 싶었던 찰나,[54] 대만의 3루수 홍셍셴이 평범하게 내야에 뜬공을 잡지 못하고 떨어트리며 이닝을 끝내지 못했고 9회말 투아웃에 주자 1루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운 좋게 출루한 오키하라가 2루 도루를 성공했고 흔들렸던 차이충난은 후속 타자 이이즈카에게 볼넷을 내주며 2사 1,2루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차이충난이 물러나고 이후 차오진후이[55]가 구원투수로 올라왔다. 하지만 폭투로 인해 주자들이 하나씩 진루해 2사 2,3루 상황이 되었고 결국 헤이마 준[56]에게 끝내기 안타를 내주며 이날 일본은 최종스코어 2:1로 신승을 거뒀고 마쓰자카는 프로 선수로서 참가한 국제대회 첫 경기에서 선발승을 기록했다. 이 날 경기에서 마쓰자카의 기록은 9이닝 13탈삼진 3피안타 1볼넷 1실점 완투승. 최고 구속은 직구 151km/h였다.[57] 특히, 이 날 경기 6회 무사 2루 상황부터 9회초까지 12타자 연속 범타 처리로 경기 후반부에 대만 타선을 꽁꽁 틀어막은 것은 압권. 상대 선발 차이충난도 8과 3분의 2이닝 동안 11탈삼진 2실점(1자책)으로 훌륭한 피칭을 보여주었으나, 마지막 아웃카운트 직전 3루수의 수비 실책으로 인해 정규이닝을 마치지 못했고 결국 팀의 패배를 바라봐야 했다.
마쓰자카는 일본 원정팬 3000명을 동원시켰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중이었으며, 그 인기에 부응하며 프로 자격으로 출전한 국제대회 첫 경기부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쓰자카는 대만과의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돼 기쁘다. 한국전에도 감독이 등판을 지시하면 던지겠다"[58]라고 인터뷰에서 밝혔으나 투수 보호 차원에서 한국전 등판은 없었다. 당시 국내에서 일본과 한국 양국의 전국구 스타였던 마쓰자카와 이승엽의 대결을 기대한 한국팬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이었다.
마쓰자카는 이 경기를 시작으로 국제대회에서 마쓰자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8.2. 2000 시드니 올림픽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회 전까지 25경기 12승 7패[59] 148과 3분의 2이닝 동안 129탈삼진 ERA 4.36을 기록하며 전년도[60]에 비해 2년차에는 그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마쓰자카는 8월 한여름부터 퍼지는 모습을 보이며 부진했다. 특히 대회 직전인 8월 16일 긴테츠 버팔로스와의 경기부터 5경기 동안 승을 챙기지 못했으며 이 5경기 동안 25이닝동안 28실점 24자책점을 기록했다. 게다가, 올림픽을 2주 앞둔 9월 3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긴테츠 버팔로스와의 경기에서 1루 커버를 들어가다 타자 주자와 얽혀 아킬레스 건 부상을 입었고 올림픽 직전 마지막 경기인 9월 10일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도 6과 3분의 2이닝 동안 6실점(5자책)을 기록하며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여름에 퍼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닝 소화력도 떨어지고 탈삼진 능력도 전년보다 못하자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를 골고루 선발[61]해 참가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마쓰자카는 에이스라는 중책을 맡으며 중요한 경기에만 선발 등판한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대회 첫 경기인 미국과의 경기에 마쓰자카는 선발로 등판하였다. 이 때 상대 선발은 향후 메이저에 진출하기도 하는 벤 시츠[62]. 1회에는 선두 타자 브렌트 애버내시[63]를 풀카운트 접전 끝에 유격수 땅볼 처리, 2번 브래드 윌커슨[64]을 중견수 플라이 아웃 처리했다. 3번 마이크 닐[65]에게 볼넷을 내줬지만, 4번 타자 어니 영[66]을 우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1회를 끝냈다. 2회에는 5,6,7번 타자인 존 코튼[67] - 마이크 킨케이드[68] - 덕 민케이비츠[69][70]를 각각 삼진 - 유격수 땅볼 - 삼진 처리하여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냈다. 3회에도 8번 9번 타자인 마커스 젠슨[71]과 아담 에버렛[72]을 삼진 처리하며 무난하게 2아웃을 잡았다. 다음 1번 타자 브렌트 애버내시에게 미국 팀의 첫 안타가 되는 좌전 안타를 내줬지 2번 브래드 윌커슨을 우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3회도 무실점으로 마무리.
4회에는 선두 타자 마이크 닐을 중견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였지만, 4번 타자 어니 영에게 중전 안타를 맞아 1사 1루가 되었다. 하지만 다음 타자들인 존 코튼과 마이크 킨케이드를 중견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쳤다. 5회에는 선두 타자 덕 민케이비츠를 중견수 플라이 아웃, 8번 마커스 젠슨을 포수 팝플라이 아웃 처리, 9번 아담 에버렛을 유격수 땅볼 처리하여 삼자범퇴로 이닝이 끝났다. 6회에는 선두 타자 브렌트 애버내시와 후속 타자 브래드 윌커슨을 각각 1루수 - 3루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였으나, 3번 타자 마이크 닐을 볼넷으로 내보내 2사 1루가 되었다. 그래도 4번 어니 영을 우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무실점으로 마무리.
문제는, 7회말. 선두 타자 존 코튼에게 유리한 카운트에서 한 가운데 공을 던져버렸고 존 코튼이 이를 놓치지 않고 우중간을 가르는 3루타를 쳐내며 무사 3루의 위기를 맞는다. 여기서 다음 타자 마이크 킨케이드[73]에게 좌전 안타를 맞아 선취점을 내줬고 덕 민케이비츠에게 좌전 안타과 히트 앤 런 작전으로 무사 1,3루가 되어 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후속 타자 마커스 젠슨이 쳐낸 타구가 투수 쪽을 향했고 마쓰자카가 먼저 2루에 던지고 2루수가 홈에 들어오는 주자를 잡기 위해 포수에게 송구했지만, 간발의 차로 세이프되며 추가로 1실점했다[74]. 스코어는 2:0에 1사 1루 상황에서 각각 한 개씩의 공만으로 아담 에버렛을 포수 팝플라이 아웃 처리, 브렌트 애버내시를 1루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이닝을 더 이상 실점없이 끝낸다.
8회에는 선두타자 브래드 윌커슨을 2루 땅볼 처리하였지만 마이크 닐에게 유격수 방면 내야 안타를 내준다. 어니 영을 우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여 2사 1루 상황이 되었다. 존 코튼의 타석에서 1루 주자 브래드 윌커슨이 2루 도루를 시도했는데, 포수의 송구 실책으로 주자가 3루까지 진루했다. 추가 실점의 위기 상황에서 타자 존 코튼을 우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여 무실점으로 이닝을 끝냈다.
그러는 한편, 일본의 타자들은 7회까지 최고 구속 156km/h를 기록한 상대 선발 벤 시츠의 구위에 눌려 4안타 빈공으로 점수를 뽑지 못해 마쓰자카의 패색이 짙어졌다. 하지만 벤 시츠가 내려간 후 8회에 타구치의 3루타에 이은 오키하라의 유격수 땅볼로 1점을 만회하고 9회에는 행운의 내야안타와 상대의 실책 덕에 추가 1득점하며 승부를 2:2 원점으로 되돌렸다.
동점 상황 9회말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선 마쓰자카는 선두 타자를 유격수 땅볼 처리했지만, 덕 민케이비츠에게 유격수 키를 살짝 넘기는 안타를 내주며 1사 1루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덕 민케이비츠 대신 대주자 트래비스 도킨스[75]가 투입되었고, 후속 타자 마커스 젠슨의 타석에 도킨스가 2루 도루 성공, 이후 젠슨이 2루 땅볼 진루타를 쳐내며 2사 3루가 되었다. 빗맞은 안타라도 끝내기가 될 수 있던 상황. 하지만 다음 타자 아담 애버렛을 풀카운트 접전 끝에 직구로 삼진 잡아내며 실점없이 이닝 마무리하여 연장까지 승부가 이어갔다. 10회초 일본 타자들은 득점을 내주지 못했고, 마쓰자카는 10회말에도 마운드에 올라왔다.
10회말 선두 타자 브렌트 애버내시에게 2루수 키를 살짝 넘기는 안타를 내줬다. 무사 1루. 브래드 윌커슨은 희생 번트를 시도 했는데, 이 번트 타구가 투수 쪽으로 떠버리고 만다. 1루 주자는 당연히 투수가 플라이 아웃 처리할줄 알고 1루로 귀루 하였으나, 마쓰자카는 의도적으로 낙구[76]시켜 1루에 송구해 타자 주자를 먼저 처리했다. 그 사이에 2루로 달린 1루 주자는 결국 런다운에 걸리며 아웃되었다. 마쓰자카의 센스가 돋보인 장면이었다. 후속 타자 마이크 닐도 1루 땅볼 처리하여 10회는 무실점으로 막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11회부터는 마쓰자카의 뒤를 이어 스기우치가 등판하여 11회말과 12회말을 실점없이 막았으나 13회말 아웃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하고 마이크 닐에게 끝내기 2점 홈런을 맞으며 팀은 4:2로 미국에 패하게 된다. 마쓰자카는 승리를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이날 10이닝 8피안타 5탈삼진 2볼넷 2실점으로 대회 시작 전 슬럼프설을 부정이라도 하는 듯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고 구속은 153km/h. 하지만 여름에 퍼지는 모습을 리그에서 보여줬는데 첫 경기부터 138개의 공을 던지며 혹사의 불안을 야기했다.
- 마쓰자카는 5일 휴식 후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 등판하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데다가 대회 첫 경기 미국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한국 측에서도 경기 전 점수를 많이 뽑기는 어렵다는 예상이 대다수였다.[77]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한국 타자들은 1회부터 마쓰자카를 엄청나게 두들겼다. 1회초 선두타자 이병규 좌전안타-박종호 볼넷으로 무사 1,2루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3번 박재홍을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4번 김동주가 한가운데 몰린 직구를 놓치지 않고 2루타를 터트리며 이병규와 박종호는 홈을 밟게 되어 2:0으로 선취점을 내준다. 이어 김기태는 아웃되었지만 이승엽이 마쓰자카의 몸쪽 직구를 그대로 받아 쳐내 투런 홈런을 치며 1회에만 마쓰자카는 4점이나 내주고 만다.
하지만 마쓰자카는 각성하여 6회까지 더 이상 실점하지 않았고 그러던 중에 타자들은 1회 두 점, 5회 한 점을 뽑아 내주어 4:3의 스코어로 7회초 한국의 공격에 들어선다. 7회초 선두타자 홍성흔에게 볼넷을 내준 뒤, 이후 정수근의 2루타를 내줬으나 1루 주자 홍성흔이 3루에서 아웃 되어 1아웃 2루가 되었다. 결국 박진만의 2루타로 마쓰자카는 추가로 한 점을 내주며 5:3으로 점수차가 더 벌어졌다. 1사 2루의 위기가 계속 되었지만, 후속 타자 이병규를 삼진, 박종호를 1루수 땅볼 아웃하며 더 이상 실점없이 이닝을 끝냈다. 그런데 7회말 임창용의 분식회계로 인해 2점을 내줘 한국은 동점을 내주었고 마쓰자카는 8, 9회에도 실점없이 마무리했다. 팀 타자들도 추가점을 내지 못하여 5:5 스코어로 10회 연장으로 접어들었다.
10회부터는 마쓰자카 대신 도이 요시카즈가 마운드를 올라왔다. 하지만 도이 요시카즈는 한국에 2점을 내주었고 일본도 10회말 한 점을 만회했으나, 1사 만루에서 나온 병살타로 인해 7:6의 스코어로 경기가 끝났다.
마쓰자카는 2경기 연속 노디시전이었으나 전 경기와 달리 이번 한국전에서는 기대와는 달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 날 총 161개의 공을 던졌고[78] 최고 구속은 156km/h를 기록했지만 9이닝 7피안타 10탈삼진 5볼넷 5실점으로 제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김동주와 이승엽에게는 그의 주무기인 직구로 장타를 맞았다. 2경기동안 19이닝을 던진 마쓰자카는 예선 마지막 쿠바와의 경기와 준결승 쿠바전에는 등판 하지 않았고, 한국과의 동메달 결정전에 선발로 등판하며 이전 경기 아픔을 설욕할 기회를 얻게된다.
- 준결승전에서 마쓰자카는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1회말 선두타자 이병규와 2번 타자인 박종호에게 연속 안타를 맞으며 무사 1,3루의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예선 때와 달리 이승엽과 김동주를 연속 삼진 처리하고[79] 마지막 김기태를 중견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1회의 위기를 끝낸다.
2회를 시작으로 마쓰자카는 6회 초 1아웃에서 이병규에게 우전 안타를 맞기 전까지 어떤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으며 1회 노아웃 1,3루 상황에서 이승엽의 타석을 시작으로 6회말 정수근의 타석까지 무려 16타자 연속 범타처리 했다. 하지만 6회에 위기가 찾아온다. 이병규의 우전안타-박종호 볼넷으로 1사 1,2루 위기가 찾아왔고 이승엽을 삼진으로 잡아냈으나, 이병규가 3루 도루를 성공해 2사 1,3루의 위기가 된다. 다음 타자인 김동주가 잘 맞은 타구를 날리지만 생각보다 멀리 뻗지는 못했고 중견수에게 잡히며 마쓰자카는 실점 없이 6회까지 마무리한다.
0:0 팽팽한 균형이 8회로 이어진다. 8회말 박진만의 안타 - 정수근의 희생번트, 여기에 이병규 타석에 2루수 실책으로 1사 1,3루가 된다. 후속 타자인 박종호가 포수 파울 플라이로 물러났고, 다음 타자는 전 3타석 모조리 삼진 당한 이승엽. 이승엽은 당시 대회에서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다음 타자 김동주는 6회에 좋은 타구를 날렸기 때문에 마쓰자카는 비어있는 1루로 이승엽과 정면 승부한다. 풀카운트 접전까지 가는 끝에 마쓰자카가 던진 공이 몸쪽 스트라이크존 중간 높이에 형성되었고[80], 이승엽은 이를 밀어쳐내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2루타를 작렬시킨다. 이후 후속타자 김동주에게 1타점 빗맞은 우전안타를 맞으며 8회에만 총 3점을 내준다. 김기태를 중견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이닝을 마쳤지만 이 3점은 너무나 뼈아팠다. 9회초에 일본 타자들은 구대성에게 1점을 만회하여 분전했으나 결국 팀은 3:1로 패하였다. 한국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일본 선수들은 노메달 굴욕[81]을 맛보며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날 마쓰자카의 기록은 8이닝 6피안타 10탈삼진 1볼넷 3실점이었다. 마쓰자카는 조별 예선 경기와는 달리 1회 무사 1,3루 때부터 6회 원아웃까지 무려 16타자 연속 범타처리 해내며 괴물 투수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한국 최고 타자들인 이승엽과 김동주의 헛스윙을 이끌어내는 장면은 그가 가진 볼의 위력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8회 이승엽을 상대로 정면 승부하다가 장타를 내주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완투패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의 기록은 3경기 27이닝 21피안타 25탈삼진 8볼넷 10실점(7자책)이었다. 딱히 부진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국전만 따져보면, 2경기 17이닝 8실점(5자책)로 기대만 못한 피칭을 보여줬다. 물론 대회 시작 전 리그에서 부진한 모습[82]을 보였던 마쓰자카였기에 국제전에서 오히려 좋은 피칭을 보여줬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구대성과의 선발 싸움에서 지며 완투패 했기에 한국 내에서 마쓰자카를 기대만 못해 실망했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일본 내에서도 마쓰자카가 한국에 두 차례나 두들겨맞은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살의 프로 초년병이기는 했지만 최고 인기를 누려온 괴물 투수가 상대 라이벌 국가의 최고 타자들에게 여러 번 통타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인 때, 기성 프로 선수들을 압도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가 소포모어 징크스으로 슬럼프를 겪다 대회에서도 신인 때의 모습이 안 나왔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심지어, 마쓰자카는 부진한 와중 올림픽을 출전하기 전인 9월 13일 당시 교제 중이던 니폰 TV 아나운서 시바타 토모요[83]의 자택 아파트 앞에서 주차 위반 혐의를 받는다. 단순 주차 위반이라면 범칙금 정도만 내고 끝났겠지만, 당해 마쓰자카는 8월에 이미 속도 위반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 되어 있던 상황. 즉, 무면허 운전을 한 것. 심지어 주차 위반을 은폐하려든 것 아니냐는 의문까지 생겨 논란이 더 심화되었다. 당시 세이부 구단의 구로이와 아키라 홍보 과장이 그 대신 법정에 출두해 마쓰자카가 시바타 집에 갈 때 무면허 상태로 차를 몰고 갔다고 시인했다. 결국, 도쿄 지검에 서류 송검되어 약식 기소에 의해 벌금 19만 5000엔의 유죄 판결을 받는다. 이로 인해, 당시 구단 사장인 오노 켄지 및 홍보 과장 구로이와는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심지어 마쓰자카는 당시 사이타마현 교통 안전 캠페인 홍보대사기도 했다. 이 건이 알려진건 올림픽이 끝난지 한달 후인 2000년 10월 17일이었고, 9월 13일은 시드니 올림픽 출전 직전으로 리그에서 부진하던 중이였기에 무면허 운전을 할 정도로 밀회에 빠져 올림픽에서까지 제 기량이 안 나온 것이냐고 일부 언론에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스포츠 호치의 한 기자는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으니 올림픽 전 리그에서도 부진했던 것이고 결국 올림픽에서마저 제 기량이 안 나오고 상태가 별로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은 한국전에서 통타 당한 것에 충격 받았다는 평 정도만 할 뿐, 심각한 부진은 아니었기에 20살의 프로 초년병을 위로하고 감싸는 기사들이 주를 이뤘다.
8.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마쓰자카는 2003년 29경기 16승 7패 194이닝 동안 215 탈삼진 ERA 2.83으로 탈삼진왕과 방어율왕을 차지하는 등 신인 시절 만큼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고 본인의 본격적인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다.[84]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03년 말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의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당당히 선발 되었다. 이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예선을 겸한 대회였으며 우리에게는 삿포로 참사로 더 유명한 대회이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마쓰자카에게 팀의 2번째 경기인 대만전 선발을 맡겼다. 아무래도, 직전 대회인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전에 부진하였고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대만을 상대로 엄청난 피칭을 보여주었기에 마지막 날의 한국전이 아닌 팀의 두 번째 경기인 대만전에 선발 등판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1회를 삼자범퇴로 잘 마무리한 마쓰자카 였지만, 2회 선두타자 천진펑에게 높은 직구를 던졌다가 중전 안타를 맞는다. 이후, 후속타자의 희생 번트로 1사 2루가 되었으나 그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하였다. 다음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어 2사 1,2루가 되었지만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해 다음 타자 예헌창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위기를 무실점으로 벗어난다. 일본 타자들은 2회부터 5회까지 매 이닝 점수를 득점 해주었고 5회말까지 스코어가 무려 8:0으로 벌어진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마쓰자카는 좋은 피칭을 보이며 3회부터 6회까지 별 다른 위기도 없이 잘 막아낸다.
7회에 선두 타자 천진펑에게 좌중간 2루타를 맞고 무사 2루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마쓰자카는 후속 타자들을 1루수 파울 플라이 아웃 - 삼진 - 삼진 처리하며 무실점으로 이닝을 끝낸다. 이후, 투수는 이시이 히로토시[85]로 교체되었고, 팀은 무난하게 9:0으로 이겨 마쓰자카는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 날 기록은 7이닝 3피안타 1볼넷 무실점 12탈삼진으로 대만전을 잡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예선이었던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마찬가지로 대만전을 꺾는 것이 올림픽 진출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고 볼 수 있으며[86] 일본은 대만전에서 마쓰자카의 활약 등으로 3연승하며 무난하게 예선 1위로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87].
8.4.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시즌 중에 열린 아테네 올림픽 직전까지 마쓰자카는 18경기 8승 6패 126과 3분의 2이닝 동안 98탈삼진 ERA 3.20을 기록했다. 게다가 9완투 4완봉으로 리그 최고의 이닝이터다운 면모까지 보여주며 아테네 올림픽에도 승선했다. 그리고 올림픽에서 쿠바와의 경기, 호주와의 동메달 결정전에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 당시 올림픽에 출전한 팀들 중 가장 강팀은 단연 쿠바였다. 쿠바가 아마 최강으로 불리던 때이기도 했고 실제 이 대회에서 8승 1패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유일한 1패가 일본에게 기록한 것이었는데 쿠바를 꺾는데 앞장선 첨병 역할을 한 선수가 바로 다름아닌 마쓰자카였다.
쿠바전에 등판해 2회까지 퍼펙트를 기록하고 타선에서는 와다 카즈히로가 선제 2점 홈런으로 2:0. 3회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지만 이후 세 타자를 범타 처리하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여기에, 4회에 조지마 겐지와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연속 홈런으로 4:0까지 점수를 벌렸다. 마쓰자카도 8회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는다. 문제는 팀이 6:0의 스코어로 앞서있던 9회말.
마쓰자카는 선두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에게 안타를 맞은 후, 2루수 실책으로 후속 타자를 내보내고 만다. 무사 1,3루에서 프레데리치 세페다를 삼진 잡았지만 이후 두 타자에게 각각 2루타와 안타를 맞아 3실점하며 강판된다. 이후에는 이시이 히로토시가 올라왔고 쿠바는 대타와 대주자 공세를 퍼붓지만, 이시이가 두 타자 연속 삼진으로 추가 실점 없이 마무리하여 경기는 6:3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 날, 마쓰자카는 8회까지 무실점이었지만 9회를 끝내 다 마무리하지는 못하였고 8.1이닝 7피안타 7탈삼진 1볼넷 3실점(2자책점)으로 경기를 마쳐 승리투수가 되었다. 다만 4회 1사에서 151km/h의 직구를 받아친 율리에스키 구리엘에게 오른팔을 직격당하는 타구를 맞고도 9회까지 교체되지 않은 채 마운드를 지키는 모습은 일말의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했다.[88] 특히, 이날 마쓰자카는 무려 137개의 공을 던졌는데 리그에서도 많은 공을 던진데다가[89] 4회 투구하는 팔인 오른팔을 직격당하고도 9회까지 던졌기에 혹사라고 볼 수도 있었다.[90]
- 이후, 조별 예선 잔여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했고 가장 중요한 게임인 준결승전[91]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선발로 등판한 이날, 마쓰자카는 여전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었다. 2회와 4회에 각 한 차례씩 볼넷으로 주자를 내보낸 것 이외에는 4회까지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 타선은 상대 선발 크리스 옥스프링[92]의 호투에 막혀 점수를 뽑지 못하였다. 5회에는 마쓰자카가 선두타자에게 호주의 첫 안타를 내주었고 희생 번트로 인해 1사 2루의 위기가 되었지만, 두 타자 연속 삼진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0:0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던 6회 초 호주의 공격에서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잘 잡아냈지만, 이후 두 타자들 좌전 안타 - 볼넷으로 내보내며 1사 1,2루의 위기가 된다. 다음 타자를 2루 땅볼 처리하며 2사 1,3루가 되었지만 이후 브렌단 킹맨[93]이 마쓰자카에게서 깔끔한 우전 안타를 뽑아내며 1타점을 올렸다. 여기서 1루 주자가 3루로 무리하게 진루를 시도하다가 아웃되어 이닝은 그대로 종료된다. 이렇게 스코어는 1:0으로 6회말로 접어들었다. 6회말에도 상대 선발 옥스프링은 일본 타자들에게 실점 없이 이닝을 종료시켰고 7회초 다시 마쓰자카는 마운드에 올라온다.
7회도 삼진 2개를 솎아내는 등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시켰다. 7회말 일본은 2사 1,3루 기회를 잡았지만 후지모토 아쓰시가 구원으로 올라온 제프 윌리암스를 공략하지 못했고 평범한 3루 뜬공으로 물러나며 찬스가 무산되었다. 별 소득 없이 8회초 마쓰자카는 다시 등판하여 첫 타자에게 중전 안타를 맞지만 이후 타자에게 투수 앞 땅볼로 병살 처리한다. 그리고 다음 타자에게 안타를 맞았고 128개로 많은 공을 던지고 있었기에 8회 2사 1루 주자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그는 마운드를 내려간다. 이어 올라온 이와세가 다음 타자를 3루수 뜬공 처리하며 승계 주자 득점 허용 없이 이닝 마무리.
마쓰자카는 이 날 경기에서 7.2이닝 5피안타 13탈삼진 3볼넷 1실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팀 타자들은 호주팀 선발 옥스프링[94]과 이어 올라온 제프 윌리엄스[95][96]에게 무득점으로 막히며 준결승에서 1:0으로 영봉패당하게 된다[97]. 풀경기가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팀은 어쨌든 동메달 결정전에서 캐나다를 11:2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예상과 달리 은메달도 확보하지 못했으니.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일본 입장에서는 사실상 실패한 올림픽[99]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과 미국도 없는 상황에서 동메달이었기 때문[100]
팀과 별개로 마쓰자카 개인에게는 시드니 노메달의 수모를 다는 아니지만 일정정도 되갚게 된 셈.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의 최종 기록은 2경기 1승 1패 16이닝 12피안타 20탈삼진 4볼넷 4실점(3자책) ERA 1.69이었다.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1패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두 경기 모두 훌륭한 피칭을 선보였다. 특히, 쿠바에게 대회 유일한 패배를 안기는데 앞장섰고 호주전에서도 1실점 외에는 좋은 피칭을 보여줬다.
8.5. 2006 WBC
2006 WBC ALL-WORLD TEAM AWAR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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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자카는 전년도(2005년) 최전성기의 성적을 기록[101]하며 2006 WBC 일본 야구 국가 대표팀에도 승선한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왕정치감독은 마쓰자카를 중요한 경기의 선발로 내보낸다. 그리고 마쓰자카는 그에 부응하며 등판 때마다 좋은 피칭을 보여주어 초대 WBC 대회 MVP까지 차지하였다.
- 마쓰자카는 일본의 대회 두 번째 경기였던 대만과의 경기에 처음으로 출전한다. 이전의 두 번의 올림픽 예선에서 대만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대만 킬러 마쓰자카였기에 그 모습을 재현하길 기대하며 대만전에 선발 출전 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일본은 1회부터 타무라 히토시의 3점 홈런으로 앞서 나갔고, 2회에도 1점을 추가하는 등 2회만에 4점으로 마쓰자카를 지원해준다. 1회부터 볼넷, 사구를 내주며 흔들린 마쓰자카였고 2회에도 연속 안타로 1점을 내주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타선의 호조에 힘입어 3,4회는 실점없이 이닝을 마무리 짓는다. 4회를 끝으로 일본은 마쓰자카를 마운드에서 내렸고, 야부타 야스히코를 대신 투입한다. 그러던 와중, 5회초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의 3점 홈런 등 대거 6점을 뽑아내며 점수차를 더 벌린 일본은 이후에도 무탈하게 경기를 최종 스코어 14:3 완승으로 끝냈고 마쓰자카는 승리 투수가 되었다.[102] 그 전 2경기보다는 못했지만, 대만 킬러라는 명맥을 이어 승리를 챙기며 대만전 승리의 보증수표다운 모습을 보였다. [103] 이 날 마쓰자카의 기록은 4이닝 3피안타 3탈삼진 1볼넷 2사구 1실점 ERA 2.25
- 이후, 1라운드 아시아시리즈 하이라이트인 한국전과 2라운드 첫 경기인 미국전에서는 휴식을 취했고 2라운드 상대들 중 가장 약체로 분류되던 멕시코와의 경기에 선발로 출전했다. 1회 호르헤 칸투에게 안타를 맞지만 이후 후속 타자를 범타 처리하여 이닝을 실점없이 끝냈고, 2회에도 아드리안 곤잘레스에게 안타를 맞지만 후속 타자를 범타 처리해 실점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3회에는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냈고, 4회에는 사토자키 토모야의 2점 홈런 등 타자들이 4점을 득점해줘 4:0으로 크게 앞서게 되었다. 마쓰자카는 그에 보답하듯, 4회에도 삼자범퇴로 이닝을 삭제시켜 버린다. 5회초 일본 타자들이 1득점을 추가해줬고, 5회말 다시 마운드에 올라온 마쓰자카가 볼 넷으로 주자 한명을 내보냈으나 병살 처리하며 이닝을 실점 없이 끝냈다. 이어, 마운드를 와다 츠요시에게 넘겨주며 마쓰자카는 경기를 마쳤고, 팀은 8회에 1점 내주었으나 9회에 다시 1점을 뽑아내며 6:1로 승리를 거둔다. 덕분에 대회 2승 째를 올렸다. 이 날 마쓰자카의 기록은 5이닝 1피안타 2탈삼진 2볼넷 무실점이었다. 비록, 상대가 약체로 분류되던 멕시코였지만 메이저 출신이 즐비한 라인업이었고 초호화 라인업의 미국도 그에 패배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 파란을 일으켰던 한국 대표팀도 스코어 2:1로 신승[104]을 거뒀을 정도로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런 팀에게 5이닝 무실점 호투하며 승리의 초석을 잘 닦은 셈.
이어, 첫 경기 미국전 패배와 2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한일전에도 패해 1승 2패로 일찍 귀국할 뻔 하였으나...
- 결승전 초 공격은 일본이었고, 말 공격이 쿠바였다. 1회초부터 일본은 1사 만루 찬스를 잡아서 이어서 타무라 히토시의 사구에 의한 밀어내기,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볼 넷으로 인한 밀어내기로 2점을 뽑았다. 여기에다 이마에의 2타점 적시타까지 보태 대거 4점을 득점하며 쿠바를 크게 앞서 나간다. 1회부터 4:0으로 앞선채 1회말 수비에 들어선 마쓰자카는 선두 타자 에두아르도 파렛에게 우측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맞아버린다. 마쓰자카가 던진 커브가 높게 형성되었는데, 이를 상대 타자가 놓치지 않았다. 불안한 출발인 듯 했지만, 이후 후속 타자들인 미첼 엔리케스와 율리에스키 구리엘은 3루 땅볼로 처리하고, 아리엘 보레로는 삼진 처리하며 더 이상 출루 허용 없이 1실점으로 1회를 마쳤다. 2회말 수비에서 안타 하나를 맞기는 했으나, 마쓰자카는 아웃 카운트 세개를 모두 삼진[105]으로 잡아내며 2회도 무실점으로 마쳤다.
3회말에는 선두 타자에게 2루타를 맞아 무사 2루의 위기를 맞았으나, 이후 후속 타자인 에두아르도 파렛을 삼진 처리하며 1회 솔로 홈런을 내준 것을 복수했다. 이후, 두 타자 미첼 엔리케스와 율리에스키 구리엘을 범타로 돌려세우며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친다. 4회말 여전한 4:1상황에서 선두 타자 보리엘이 친 타구가 우중간으로 굉장한 임팩트와 함께 크게 날라갔다. 하지만, 공이 임팩트만큼 생각보다 뻗지는 못했고 그 덕에 중견수 아오키가 펜스 바로 앞에서 잡아냈다. 거의 홈런 타구였지만, 생각보다 뻗지 않았고 체공도 길어 마쓰자카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던 셈. 이후 후속타자 프레드릭 세페다가 친 타구가 마쓰자카를 향했고 마쓰자카의 발목을 맞고 굴절되어 내야를 빠져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유격수 가와사키 무네노리가 몸을 날려 안타성 타구를 잡아냈고 1루에 송구하여 아웃 카운트를 하나 더 적립. 마쓰자카는 후속타자 오스마니 우르티아에게 중견수 안타를 맞았지만 후속 타자 요안다 갈로보를 우익수 플라이 아웃시키며 이닝을 실점없이 끝냈다. 하지만, 프레드릭 세페다가 친 타구에 발목을 맞았기에 마쓰자카는 투수 보호 차원에서 교체된다. 이날 기록은 4이닝 4피안타 5탈삼진 무사사구 1실점으로 1회에 선두타자에게 홈런을 맞았지만 그 외에는 위기 때 좋은 피칭을 보여 쿠바 타선을 추가 실점 없이 묶을 수 있었다.
팀 타자들이 5회에 다시 추가 2득점을 해주어 6:1로 앞서나가게 됐지만, 마쓰자카에 이어 불펜으로 올라온 와타나베 슌스케와 후지타 소이치의 방화로 인해 8회말 6:5 한점차로 다시 점수가 좁혀진다. 하지만 팀 타자들이 9회초에 대거 4득점을 하며 다시 점수차를 10:5로 벌려놓았고 9회말 오츠카 아키노리가 1실점 하기는 했으나 이외에는 더 이상 실점없이 마무리하며 10:6의 스코어로 경기 종료. 일본은 초대 WBC 대회에서 우승국이 된다.
마쓰자카는 이 대회에서 3경기 3승 0패 13이닝 8피안타 10탈삼진 3볼넷 2사구 2실점 ERA 1.38의 기록으로 마무리한다. 유일한 이 대회의 3승 투수였으며 훌륭한 성적과 함께 초대 WBC MVP를 차지한다. ALL-WBC Team에 이름을 올린 것은 덤. 이때, 일본 대표팀의 대회 기간을 통틀어 팀 평균자책점이 2.54였는데, 마쓰자카의 평균 자책점은 1.38로 그를 훨씬 하회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준결승전 스플리터 낚시와 직구 쾌투로 악몽을 선사한 것으로도 유명한, 우에하라 고지는 마쓰자카와 초대 대회 WBC 선발진을 이뤄 마운드를 단단하게 막아주기도 했으며 이 때 우에하라의 이 대회 평균 자책점은 ERA 1.59 였다. 기록으로보나, 중요한 경기에서 피칭 내용[106]으로 보나 마쓰자카와 우에하라가 선발진을 이뤄 여러모로 투수진에서는 이 둘이 캐리했던 대회.
8.6. 2009 WBC
2009 WBC ALL-WORLD TEAM AWAR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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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전년도인 2008년에 보스턴에서 18승 3패 ERA 2점대로 훌륭한 피칭을 보여준 마쓰자카는 2009 WBC 일본 대표팀 감독 하라 타츠노리에 의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대회 전부터, 일찍이 하라 감독은 이와쿠마 히사시, 다르빗슈 유와 더불어 마쓰자카를 선발 3인방으로 낙점했다고 공표했다. 대회 첫 경기였던 중국전은 다르빗슈 유가 선발로 나섰고, 승자조 경기였던 한국전에 마쓰자카는 선발로 나서게 된다.
- 한국전에 등판한 마쓰자카. 상대 선발은 2008 베이징에서 일본을 꽁꽁 묶었던 김광현. 일본은 전년도 김광현에게 철저하게, 그것도 두번이나 봉쇄당한 것에 복수심이 불탔던건지 김광현을 철저하게 분석해와서 1회부터 격렬하게 두들긴다. 1회에만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2타점 등 3점을 뽑아 3:0으로 일본은 앞섰고, 1회말 한국의 공격 때 선발 마쓰자카가 3점의 여유를 안은채 마운드에 올랐다. 첫 타자인 이종욱을 유격수 땅볼 처리하며 무난하게 시작했으나 후속 타자 정근우에게 안타를 맞는다. 이후 김현수에게도 우전 안타를 맞는데, 정근우는 3루까지 노렸고 이치로의 빠른 송구 때문에 아웃 되는 듯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가 되었고 이 틈을 노려 김현수는 2루까지 내달렸다. 하지만, 3루수 무라타 슈이치의 빠른 대처로 2루에 송구되어 김현수는 아웃되었고 2아웃 3루 상황이 된다. 다음 타자는 당시 대회 한국 타선에서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한국의 4번 타자이자 주포 김태균. 마쓰자카는 3구 연속 변화구로 유인구를 던진다. 하지만 김태균은 반응 조차 안했고, 이에 마쓰자카가 몸쪽 높게 직구를 던졌는데 김태균이 그대로 잡아당겨 비거리 140M 대형 2점 홈런을 만들어냈다. 스코어는 순식간에 3:2, 한 점차로 좁혀졌고 오히려 일본이 쫓기는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흔들렸는지 마쓰자카도 후속 타자 이대호를 볼 넷으로 내보내고 만다. 하지만 후속 타자 추신수를 1루 땅볼로 잘 처리하며 더 이상 실점 없이 1회는 종료.
2회초 일본 타자들은 더 힘을 내줬다. 무라타 슈이치의 3점 홈런을 포함 대거 5점을 득점하며 김광현을 무너트렸다. 김광현은 원 아웃만 잡은채로 마운드를 내려갔다.[107] 마쓰자카는 일본 타자들의 호조 덕에 8:2 굉장히 여유있는 점수 차로 2회말 마운드에 다시 올라섰다. 첫 타자 이진영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후속 타자 박경완을 병살 처리하며 주자를 누상에서 지워버렸다.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박기혁을 2루 땅볼 처리하며 2회는 실점 없이 무난하게 마무리. 3회말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온 마쓰자카는 첫 타자 이종욱을 3루 땅볼, 정근우를 삼진 처리했다. 후속 타자 김현수를 볼 넷으로 내보냈지만, 1회에 본인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한 김태균을 우익수 플라이 범타 처리하며 이닝을 무실점으로 끝냈다.
4회초에 일본 타자들은 1점을 추가해줬고 4회말 마쓰자카는 이대호 좌익수 플라이 - 추신수 3루수 파울 플라이 - 이진영 1루 땅볼로 삼자 범퇴 처리하며 승리 투수 자격을 갖춘 채[108]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후 마운드는 와타나베 슌스케가 물려 받았고 팀은 더이상 실점없이 7회 최종 스코어 14:2로 무난하게 콜드 승[109]을 거둔다. 이 날 마쓰자카의 기록은 4이닝 4피안타 1탈삼진 2볼넷 2실점 ERA 4.5로 다소 부진. 하지만 상대 선발 김광현이 워낙에 크게 무너지는 바람에 그 대비 효과로 마쓰자카는 상대적으로 잘 던진 셈이 되었고 덕분에 승리도 기록했다.
- 이후, 1라운드 하이라이트였던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 한일전에서는 휴식을 취했고 2라운드 첫 경기였던 쿠바와의 경기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쓰자카는 이전에도 2004 아테네 올림픽과 2006 WBC 결승전에서 쿠바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이 날 경기에서도 그 모습을 다시 재현하였다. 1회말 선두 타자 요에니스 세스페데스를 3루 땅볼 처리하며 무난하게 시작했지만 이어 후속 타자들이었던 미첼 엔리케스와 세페다에게 연속 안타를 맞으며 흔들렸다. 그러나, 여기서 마쓰자카 특유의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 후속타자 요스바니 페라자를 좌익수 플라이, 율리에스키 구리엘을 중견수 플라이 처리하여 이닝을 실점없이 마무리 하였다. 2회는 삼자 범퇴로 마무리하였다. 3회초는 일본 타자들이 3점을 뽑아줘 3:0으로 앞선 채 3회말 마운드에 마쓰자카는 다시 들어섰다. 선두 타자를 삼진 처리했으나 1번 타자 요에니스 세스페데스에게 안타를 내줬다. 2번 타자 미첼 엔리케스를 룩킹 삼진 처리하며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3번 세페다에게 안타를 맞으며 우전 안타를 맞으며 2사 1,3루의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마쓰자카 특유의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 후속 타자이자 4번 타자 요스바니 페라자를 삼진으로 잡아내 3회 아웃 카운트 세 개를 모조리 삼진으로 잡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짓는다. 4회초와 5회초 일본 타자들은 한 점씩 더 추가해주었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마쓰자카는 4회를 삼자 범퇴 처리, 5회에도 안타 하나를 맞지만 병살 처리하며 세 타자로 이닝을 깔끔하게 끝낸다. 6회말 팀이 5:0으로 앞선 상황에서 다시 등판한 마쓰자카는 2-3-4번 타자들 각각 유격수 땅볼 - 3루 땅볼 - 삼진 처리하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낸다. 이 6회를 끝으로 마쓰자카는 마운드에서 내려갔고 이어 등판한 이와쿠마 히사시, 마하라 다카히로, 후지카와 큐지가 각 1이닝씩 무난하게 무실점으로 경기를 끝냈다. 이날 마쓰자카의 기록은 6이닝 5피안타 8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숱한 위기에서도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해 실점 없이 경기를 끝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 -2006 WBC로 이어져온 쿠바에게 강했던 그의 모습을 다시금 여지없이 보여줬다.
팀은 한국과의 한국과의 2라운드 승자조경기에서 한국에 4:1로 패배하며 엘리미네이션 게임으로 밀려난다. 이 엘리미네이션 게임 상대는 쿠바. 일본의 4강 진출과 대회 탈락의 당락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였기에 쿠바 킬러였던 마쓰자카의 재등판도 기대 했으나 불과 3일전에 6이닝 던졌던 선발 투수를 이틀 휴식만 준 채 재등판 시키는건 무리라고 판단했던 하라 감독. 하라 감독은 이와쿠마 히사시를 선발로 내보냈고 이와쿠마와 그를 이어 등판한 스기우치 도시야[110]는 이와쿠마와 더불어 쿠바 타선을 무실점으로 봉쇄하여 팀은 5:0 2경기 연속 영봉승으로 일본은 4강 진출을 확정짓는다. 이어, 2라운드 순위 결정전도 휴식을 취한 마쓰자카는 준결승전인 미국전에 선발 등판하게 된다. 아무래도 전년도 MLB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마쓰자카를 하라 감독이 믿고 중용한듯 하다.
- 하라 감독의 기대와는 달리 마쓰자카는 초반부터 흔들렸다. 1회 선두 타자 브라이언 로버츠에게 선제 솔로 홈런을 맞고 시작했다. 2구 가운데로 몰린 직구를 로버츠가 놓치지 않았고 통타 당했다. 후속 타자 데릭 지터를 2구 만에 유격수 땅볼 처리 하였으나 3번 타자인 지미 롤린스에게 중견수와 유격수 사이 떨어지는 빗맞은 안타를 맞았다.[111] 하지만 다행히, 다음 4번 타자 데이비드 라이트를 유격수 땅볼 처리하여 2사 2루의 상황이 되었다. 다음 타자 애덤 던을 변화구로 룩킹 삼진 잡아내며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후, 2회에는 라이언 브론을 1루 땅볼 처리하며 원아웃을 잡아냈다. 후속 타자 브라이언 맥캔에게 볼 넷을 내주며 1사 1루. 이후 두 타자 마크 데로사와 커티스 그랜더슨을 연속 좌익수 플라이로 범타 처리하며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2회말에는 일본 타자들이 1점을 만회해주었고 1:1 동점 상황이 되었다.
3회초 그런 동점 상황에 다시 마운드에 오른 마쓰자카는 선두 타자 브라이언 로버츠를 삼진 처리하였고 후속 타자 데릭 지터도 유격수 땅볼 처리하며 무난히 2아웃을 잡았고 그대로 이닝이 마무리 되는가 싶었더니... 3번 타자인 지미 롤린스에게 우전 안타를 맞았다. 여기에 롤린스는 도루를 성공하며 2사 2루의 위기 상황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4번 타자 데이비드 라이트가 우중간에 떨어진 적시 2루타를 쳐내며 1실점하게 된다. 스코어는 2:1로 다시 일본은 뒤지게 된다. 이후, 이에 흔들렸는지 후속 타자 애덤 던을 볼 넷으로 내보낸다. 하지만, 그 다음 타자 라이언 브론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더 이상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4회에는 삼자범퇴로 미국 타자들을 돌려세웠고, 4회말 일본 타자들의 공격력이 대폭발 하며 대거 5점을 득점한다. 스코어는 6:2로 벌어졌고 마쓰자카는 여유있게 5회초 수비에 들어서게 된다.
첫 타자 브라이언 로버츠를 유격수 땅볼 처리했으나, 2번 데릭 지터에게 안타를 맞았고 후속 타자 지미 롤린스에게 볼 넷을 내주어 1사 1,2루 위기가 되었다. 그래도 특유의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해 후속 타자 데이비드 라이트를 직구로 룩킹 삼진 잡아내며 2사 1,2루로 아웃카운트를 늘렸다. 여기서 하라 감독은 용병술을 발휘해 좌타자인 애덤 던의 타석 때 좌완인 스기우치 도시야를 구원 등판시킨다. 마쓰자카는 1,2루에 승계주자를 남겨놓고 내려갔다. 스기우치가 하라 감독의 용병술대로 애덤 던을 삼진 처리하며 승계주자 분식회계없이 이닝을 마무리 시킨다. 이후 팀은 8회초에 미국에게 2점을 내주며 6:4로 쫓겼으나, 8회말에 일본 타자들이 다시 3득점으로 응수하며 9:4로 점수차를 벌렸고 9회초에 다르빗슈 유가 2사 2루의 위기에서 실점없이 경기를 끝내며 팀은 9:4의 스코어로 이기고 결승전을 올라가게 된다.
이날 마쓰자카의 기록은 4.2이닝 5피안타(1피홈런) 4탈삼진 3볼넷 2실점 ERA 3.86으로 첫 경기였던 한국전과 마찬가지로 마냥 잘 던졌다고 볼 수는 없는 기록이지만 두 경기 모두 어쨌든 승리 투수로 기록됐으며 지지않는 에이스[112]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승전에는 당일 선발 이와쿠마 히사시의 호조[113]와 스즈키 이치로의 결승 2타점으로 스코어 5:3으로 한국을 꺾고 일본은 우승을 차지한다. 일본의 대회 2연패. 마쓰자카는 스즈키 이치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후쿠도메 고스케, 와타나베 슌스케, 스기우치 도시야, 아오키 노리치카 등과 함께 2연패 멤버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는 3경기 3승 0패 14.2이닝 14피안타 13탈삼진 5볼넷 4실점 ERA 2.45를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으로 팀의 우승에 공헌한다. 1회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유일한 3승을 기록한 투수가 되면서 2009 제 2회 WBC MVP로 선정되며 2연속 대회 MVP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ALL-WBC Team에도 선발 되었으며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마쓰자카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
[1] 이후, 레이와의 괴물이라는 칭호는 사사키 로키가 갖게 되는데, 사사키 역시 초고교급 유망주로 주목받은 바 있다.[2] 여담으로 이 명승부에서 마쓰자카와 맞대결해 패한 PL학원의 투수 카미시게 사토시는 팔꿈치 부상으로 프로 진출을 포기한 후 2003년 닛폰 테레비에 입사해 현재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중이다. 미일프로야구 교류전 중계에서 카미시게가 캐스터에 객원해설이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카미스게 캐스터가 코시엔에서는 서로 라이벌이었지만, 오늘은 서로 잘해봅시다 라는 멘트를 했다.[3] 이날 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서 풀 이닝을 소화하고 있었다.[4] 참고로 고시엔 대회는 전부 낮 경기로 치러진다. 1년 중 가장 더운 8월 초중순에 뙤약볕 밑에서 경기를 한다는 얘기다. 특히 8강전은 하루에 4경기를 다 치러버리기 때문에 아침 8시부터 경기를 시작하는데, 요코하마 고교와 PL학원의 경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더운 3번째 경기인 낮 1시 경기였다.[5] 1번타자 이데 타츠야 - 2번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3번타자 카타오카 아츠시와 대전하며, 결과는 마쓰자카가 이데와 카타오카는 삼진, 오가사와라는 투수 땅볼로 삼자범퇴시켰다. 이날 경기는 5 - 2로 세이부가 이김과 동시에 마쓰자카가 8이닝 9탈삼진 2실점으로 데뷔 무대에서 첫 승리투수가 되었고, 닛폰햄의 이날 득점은 오가사와라가 8회에 마쓰자카의 생애 첫 피홈런인 2점 홈런을 날린 것이 유일했다. 출처[6] 사와무라상은 옆 동네에서 같은 해에 데뷔한 대졸 신인 우에하라 고지가 차지했다. 우에하라는 이 해 20승+센트럴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7] 2001년 혹사의 여파가 컸다. 안 그래도 고교때부터 상식을 초월하는 혹사에, 프로 1년차부터 풀타임 선발을 뛰었고, 당시에는 제구력이 많이 부족해 볼넷도 많아 투구수도 많았다. 여기에 2001년에 240.1이닝을 투구한 것[8] 센트럴리그 방어율왕[9] 노구치 시게키는 승수와 승률, 이가와 게이는 승수, 승률, 이닝, 완투[10] 여담으로, 이 당시 노구치 시게키가 기록한 WAR는 1980년 시즌부터 2019년까지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를 양대리그 통틀어 3위에 해당된다.(Delta 및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 delta 기준 9.2. npb stats 기준으로는 7.8 기록.) 1위와 2위는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와 다나카 마사히로이다(delta 기준 각각 11.5, 9.8. npb stats 기준으로는 각각 9.6과 8.1의 WAR기록.). 마쓰자카의 단일시즌 WAR 커리어 하이는 2005년이다(delta 기준 8.9. npb stats 기준으로는 7.3 기록.). 참고로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NPB는 역사적인 타고투저 해의 연속이었고 반면 2011년은 기록적인 투고타저의 해로 이처럼 서로 간의 리그 환경이 극과 극이라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와 다나카 마사히로의 기록과 2001년의 노구치 시게키의 기록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11] 다만 일본의 세이버 스텟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유명 사이트인 ranzan을 기준으로는 노구치의 기록이 전체 3위가 아니다.[12] 원래 사와무라상은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긴 하다[13] 그 당시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도시야 혹은 이가와 케이같은 선수들에게 밀리며 수상을 하지 못했다.[14] 9년 뒤에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는데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라쿠텐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6차전에서 160개를 투구 후 7차전 마지막 이닝에 행가래 투수로 등판한 것[15] 가끔 비교가 된 우에하라 고지의 성적은 같은 기간 평균자책점 3.02, WHIP 1.03, 195시합(193선발) 102승 54패, 56완투 9완봉, 1391⅓이닝, 1236삼진이다.[16] 남긴 주자가 잔루가 되는 비율을 구하는 LOB% 80.6%로 전체 3위였다.[17] 볼을 아예 던지지 않는 조정. 즉 캐치볼이나 투구연습을 하지않고, 달리기나 스트레칭 등의 기초적인 훈련만 하며 경과를 지켜보는 조정법.[18] 류현진이 받았던 수술과 비슷한 수술이다.[19] 특히 외국인인 스탠드리지와 밴덴헐크를 10일 간격으로 번갈아서 등록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스탠드릿지는 10승 + 3점대 ERA의 준수한 성적에도 자리가 없어서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다.[20] 실제로 미국 진출 전까지 마쓰자카는 소프트뱅크의 천적이었다.[21] 일본 리그는 외국인 보유가 무제한이기에 외국인 선수에 한해서는 이런 경우가 종종 보였다[22] 2006년 10월 7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이후 10년만에 일본프로야구 1군 무대에 복귀했다. 당시 상대는 공교롭게도 현 소속팀 소프트뱅크.[23] 현 마쓰자카 실력에 트리플에이 선수들도 오는 윈터리그에서 잘할 수 있겠느냐. 오히려 부진하고 자존심 잃고 오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다.[24] 특히 마지막 경기에는 7이닝 1실점, 투구수 88개로 호투했다[25] 이 소식이 보도된 날짜는 소프트뱅크의 일본시리즈 우승 바로 다음날이었다.[26] 주니치행이 떠오른 이유 중의 하나로 팬들은 현 주니치의 수뇌진이 세이부 시절 마쓰자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모리 시게카즈 현 감독은 마쓰자카의 신인 시절 세이부의 코치였고 데니 도모리 해외 스카우트 담당은 마쓰자카의 선배로 세이부의 필승조의 일원이었다.[27]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28] 초구 시속 118km/h의 높은 볼을 시작으로, 2구째 시속 118km/h 공은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3구째 시속 117km/h의 공과 4구째 116km/h짜리 공은 모두 볼이 됐다. 5구째가 마쓰자카의 마지막 공이었으며 시속 116km/h로 날아간 공은 몸쪽 스트라이크존을 한참 벗어났다.[29] 보스턴에 합류한 2007년부터 2년간은 국가대표로 출전하지 않았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 정예가 발탁되어 참가한 국제대회는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2008 베이징 올림픽 단 두개였다. 먼저 2008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 메이저리그 선수들 차출이 거부된 대회이다.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는 시즌 종료 이후 열려 메이저리거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박찬호는 당시 메이저리거였지만 시즌 종료 이후 이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대만전에서 호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쓰자카는 당시 일본의 빅리거였던 이치로, 마쓰이 등과 함께 이 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진출만 아니었다면 마쓰자카의 국제대회에서 태도나 그의 성격상 모든 대회에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30] 2004 아테네 올림픽 승리투수,(8.1이닝 3실점(8회까지는 무실점)) 2006 WBC 결승전 승리투수(4이닝 1실점) 2009 WBC 2라운드 첫 경기승리투수.(6이닝 무실점) 통산 3전 3승 0패[31]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승리투수(9이닝 1실점)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승리투수(7이닝 무실점) 2006 WBC 아시아 라운드 승리투수(4이닝 1실점) 통산 3전 3승 0패[32] 두 나라 경기를 모두 통틀어 통산 6전 6승 0패.[33] 2009 WBC 직전 호주 대표팀과의 평가전 기록 1.2이닝 2실점을 포함하면 88.1이닝 23실점(19자책) ERA 1.94 기록.[34] 물론 100% 모든 경기에서 그런것은 아니고 2004 아테네 호주전이나 2006 WBC 대만전은 기교파 투수 위주의 피칭을 종종 보여주기도 했었다.[35] 국제대회 특성상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끌어내기 위해 상황에 따라서 투수를 보직 상관없이 내보낸다. 하지만 국제대회에서도 선발은 중요 역할을 맡으며 마쓰자카의 경우 강팀 상대나 결승전 같이 중요 경기에 선발로 출전했다. 최고 투수만 모인다는 국가대표팀에서 중책을 맡은 것이다.[36] 2006 WBC 결승전에서 쿠바 에두아르도 파렛의 솔로 홈런, 2009 WBC 준결승전 미국의 브라이언 로버츠의 솔로 홈런과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이승엽의 투런 홈런, 2009 WBC 승자조 경기에서 김태균의 투런 홈런.[37] 나머지 1패는 2004 아테네 4강전에서 호주에게 1:0 스코어로 패한 것이다. 마쓰자카는 선발 투수로서 7.2이닝 13탈삼진 1실점으로 분투했으나, 팀 타자들이 호주 투수들에게 틀어막히는 바람에 호투하고도 패전의 멍에를 써야했다.[38] 이승엽과 김태균의 홈런이나, 시드니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승엽의 결정적 2타점 적시 2루타 등.[39] 한국전 통산 8이닝 4실점(3자책점) ERA 3.38 기록[40] 실제, 이진영은 스톡킹에 나와 다르빗슈 유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이라 오히려 할만했고, 제구가 좋고 변화구가 다양한 이와쿠마 히사시가 오히려 더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한국은 스피드에는 어느 정도 적응하지만 변화구가 좋고 제구가 좋은 선수들에게 애먹는다는 말도 덧붙였다.[41] 한국전 통산 12이닝 2실점 ERA 1.5 기록[42] 실제, 와다 츠요시는 "나의 생명선은 스트레이트다"라고 말할 정도로 리그 내에서는 거침없이 직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정면 승부하는 파워 피처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특유의 제구력과 변화구로 한국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땅볼을 많이 유도하는 피네스 피처스러운 면모가 주를 이뤘다.[43] 한국전 통산 13이닝 3실점 ERA 2.08 기록[44] 한국전 통산 12.2이닝 1실점 ERA 0.71 기록[45] 와타나베의 경우 제구가 좋은 투수는 아니었으나, 워낙에 변칙적인 투구를 많이하던 투수라 한국 타자들이 공략을 잘 하지 못했다.[46] 구속은 느리지만, 공격적인 투구 패턴으로 직구를 거침없이 스트라이크에 꽂아 놓아 유리한 카운트를 잡아놓는 파워피처 유형에 가깝다. 실제로 2006 WBC 준결승전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한복판 직구로 이승엽을 두 차례나 삼진으로 잡는 등 파워피처스러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었다.[47] 한국전 통산 2경기 1승 1세이브 8이닝 3피안타 9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ERA 0.00[48] 한국전 통산 2경기 1승 13이닝 21탈삼진 무실점 ERA 0.00[49] 마쓰자카와 비슷한 케이스가 후지카와 큐지. 후지카와의 경우 엄청난 직구의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누르는 피칭 스타일을 지녔으며 국제대회 통산 13경기 11.2이닝 2실점(1자책) ERA 0.77으로 훌륭한 성적을 보여주었지만 한국전에서는 임팩트 큰 실점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2006 WBC에서 이종범에게 내준 2타점 적시 2루타 분식회계 라던가, 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이진영에 내준 동점타[50] 다만 우에하라의 경우 파워피처긴 하지만 무브먼트를 앞세운 파워피처이고 오타니의 경우 애초에 한국 수준의 타자가 칠 수 없는 구속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또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51] 대회 전까지 23경기 14승 5패 166이닝 139탈삼진 ERA 2.60로 데뷔 첫 해임에도 뛰어난 활약 중이었다.[52] 당시 대만타선은 4번타자를 맡은 천진펑이 가장 핵심선수였다. 또한 (훗날 대만 야구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하는) 훙이중도 포함되어 있었다.[53] 이 선수는 훗날 부산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해 2002년에 다시 방한했고 한국과의 결승전 경기 선발 투수로 나왔다. 당시 결승전 경기에서는 4회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조기 강판됐다. 이외에도, 2001년 야구 월드컵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등판했던 적도 있고 여러모로 한국과 인연이 있다.[54] 마운드에 있던 투수 차이충난도 타구가 뜨자마자 3루를 가리키며 마운드에서 내려와 덕아웃으로 향했다.[55] 당시 고교생 신분이었다.[56] 마쓰자카의 요코하마 고교 직속선배이기도 하다.[57] 당시 마쓰자카의 피칭 내용을 기록한 기사[58] 당시 인터뷰가 실린 기사.[59] 마쓰자카는 한여름부터 퍼지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전 봄과 초여름에 그나마 승수를 많이 쌓아 승률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60] 25경기 16승 5패 180이닝 동안 151 탈삼진 ERA 2.60 기록. 심지어 데뷔해였다.[61]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요미우리를 포함한 대다수 센트럴 리그 팀들이 선수차출을 거부했다. 주니치 드래곤스의 백업포수 스즈키 정도만이 센트럴 리그 소속 선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올림픽기간 내내 주전으로 출전한 케이스.[62] 이후, 메이저에 진출하여 커리어동안 4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특히 2004년은 그의 최전성기였다.[63] 2001년에 템파베이에서 메이저 데뷔전을 치렀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5년을 마지막으로 MLB에서 자취를 감췄다.[64] 훗날,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통산 타율 0.247 홈런 122개를 때려냈다. 하지만 2008년 허리 부상이후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2010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저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시즌에 32개의 홈런을 쳐낸 적도 있을 정도로 일발장타 능력이 있던 선수.[65] 당일 경기 스기우치 도시야로 부터 끝내기 홈런을 쳐낸 선수. 메이저 경력은 199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뛴 6게임이 그의 커리어에서 전부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다.[66] 메이저 통산 88경기에 출전했고 27 개의 홈런 0.225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 시드니 올림픽 이후에는 2002년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용병 신분으로 NPB 무대를 밟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3년 메이저에 다시 복귀하지만 2004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67] 금메달 리스트 존 코튼과의 Q&A[68] 2002년과 2003년 다저스에서 선수생활 한다.[69] MLB 통산 1087게임 출장 0.271의 타율 홈런 66개 장타율 4할 5리로 장타 능력은 별로였지만, 선구안이 좋아 볼넷을 잘 얻어내던 선수. 여기에 뛰어난 수비력을 보유하여 2001 AL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86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 시즌 당시 백업 1루수로 밤비노의 저주를 끝낸 마지막 아웃 카운트 풋아웃을 기록한 선수기도 하다. 이 해에 보스턴은 팀 전체가 Sportsman of the year에 선정되어 본인도 선정되었다. 여러모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한 미국 타자 가운데서는 가장 뛰어난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 투수까지 포함하면 로이 오스왈트와 벤 시츠가 있다.[70] 이외에도, 한국과는 결승 홈런을 두 번이나 친 것으로 인연이 있는 선수. 예선전에서는 진필중을 상대로 결승 만루 홈런을 쳐내 팀의 4:0 승리에 일조하였고,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한국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쳐냈다. 참고로 이 때 끝내기를 내준 투수는 박석진. 즉,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을 두 번이나 울린 선수기도 하다.[71] 시드니 직전까지 메이저 저니맨으로 팀을 옮겨다녔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당시는 마이너 팀 소속이었다.[72] 커리어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전전하다 2012년 1월에 은퇴했다. MLB 통산 0.242의 타율에 40홈런을 기록했다.[73] 준족을 자랑하는 선수였으며, 훗날 용병 신분으로 2004년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74] 당시 마쓰자카는 타구를 잡자마자 3루를 쳐다보며 3루 주자 마이크 킨케이드를 묶었지만 마쓰자카가 뒤돌아 2루로 던지자마자 킨케이드는 빠른 발로 홈에 쇄도하여 득점했고 마쓰자카는 실점 이후 한참을 2루 쪽을 바라보며 씁쓸해했다.[75] 커리어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보냈으며 MLB 통산 타율 0.163의 처참한 타격을 보여준 선수. 대신 준족을 자랑해, 메이저리그 경기에서는 대부분 대주자로 경기에 기용되었다.[76] 번트에는 고의낙구가 적용되지 않는다. 자세한 고의낙구의 개념은 본 항목 참조.[77] 선동열도 마쓰자카에게는 "많이 뽑아봐야 2점"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78] 참고로, 앞선 미국과의 경기에서 138개의 공을 던졌으므로 두 경기에서 무려 299개의 공을 던진 셈.[79] 그 사이 박종호는 2루 도루를 성공시켰다.[80]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마쓰자카는 "풀카운트에서 어떤 공을 던질까 혼란스러웠다. 포수의 사인대로 직구를 던졌는데 이게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며 자신의 의도대로 던진 공이 아니었음을 밝혔다.[81] 1982년 LA 올림픽에서 야구가 처음으로 채택 된 이후, 일본은 처음으로 노메달 굴욕을 맛봤다. 그것도 처음으로 프로 차출이 허용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라이벌인 한국에 패한 결과였으니 충격이 클 만도 했다.[82] 마쓰자카는 올림픽 직전 5경기에서 25이닝 28실점(24자책)라는 처참한 기록을 보여주었다.[83] 참고로 2004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84] 이 해를 기점으로 마쓰자카는 2006년까지 4시즌 동안 NPB에서 최전성기를 보낸다.[85] 추후에 2006년 초대 WBC 한일전 도쿄돔 경기에서 이승엽에게 8회의 결정적 홈런을 맞게되는 투수.[86] 예선 2위까지만 올림픽 출전 티켓이 부여되었다.[87] 다만 한국이 대만에게 패배해서 그때과 달리 한국전 승리도 중요했다. 그리고 한국은 3위에 머무며 올림픽 진출이 좌절되었고 대만이 본선 진출했다.[88] 여담으로 당일 경기 포수였던 조지마 겐지는 몸에 맞은 후 괜찮다며 계속 던지겠다던 마쓰자카에게 "만약 너가 상태가 안 좋다면, 내가 바로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거야"라고 말했다고 경기후에 밝혔다. 마쓰자카는 구리엘 타구에 직격당한 이후 다음 타자 오스마니 우르티아에게 141km/h의 직구를 던지며 10km/h나 구속이 떨어지자 조지마는 상태가 안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르티아에게 안타를 맞아 1사 1,2루 상황이 되자 조지마는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지만 마쓰자카가 곧장 괜찮다고 조지마에게 사인을 보냈고 마쓰자카가 바로 다음타자부터 150km/h의 직구를 던지자 안심했다고. 이후, 마쓰자카는 두 타자를 범타처리하며 실점 없이 4회를 마쳤다.[89] NPB 리그에서는 2004년 아테네 출전 전까지 9완투 4완봉을 기록할 정도로 철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쓰자카였다. 실제 올림픽 직전 세경기 동안 7월 19일 니혼햄전 144구, 7월 26일 다이에 호크스전 136구, 8월 2일 오릭스전 152구 총 432구를 던졌다.[90] 당시 대표팀 감독 대행이던 나카하타 키요시는 2020년 마쓰자카를 만나 당시 상황을 회고하였다. 이 회고에 따르면 마쓰자카가 나카하타의 교체 요구를 거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나카하타)가 마운드에서 (트레이너 대신) 그만 던지라 말했더니 공을 버리고서 "왜 바꿔요!"하는 거 같은 거야. 내 입장은 안중에 없었지?"라며 웃으면서 물었다. 이를 듣고 마쓰자카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어렸어요."라고 나카하타에게 웃으며 사과했다. 여담으로, 나카하타는 훗날 TBS 방송에서 해설자로서 마쓰자카의 은퇴 특집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의 열정과 투수로서의 책임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라고 다시금 언급하기도 했다. 부상 위험에도 불구하고 속투하려던 마쓰자카에게 꽤나 감명받은 모양.[91] 당시 게임 영상[92] 우리나라에는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선수로 잘 알려진 호주 야구 선수. 올림픽 직전까지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트리플 A팀인 포틀랜드 비버스 소속 불펜투수였다.[93] 1루수 브렌단 킹맨은 올림픽 출전 이전에 플로리다 말린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뛴 적이 있다.[94] 당일 경기, 6.2이닝 5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기록.[95]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적인 불펜인 JFK에서 J를 맡았던 선수.[96] 당일 경기에서는, 2.1이닝 3탈삼진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퍼펙트로 일본 타선을 잠재웠다.[97] 이 활약을 바탕으로 두 선수는 이후, NPB 무대를 밟게 된다.[98] 호주는 예선라운드에서 대만에게도 지는 등(대만의 왕첸밍 - 차오진후이 계투에 막혀 0대3으로 패배했다), 4승 3패로 간신히 준결승에 진출한 상태였다. 만약 대만이 예선라운드 이탈리아전에서 9회 대역전패당하지 않았으면, 호주는 예선탈락할 수도 있었다(대신 승자승원칙에 의해 대만이 준결승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99]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팀 당 2명씩 출전되었고 투수들 중 성적이 리그에서 별로인 투수들도 있어 최정예가 아니라는 점과 원래 감독인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아테네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현장을 떠난 지 10년 넘었던 수석 및 타격 코치인 나카하타 키요시가 갑작스럽게 현장을 지휘했다는 점을 주된 원인으로 추측했다.[100] 시간이 흘러 2021년 5전 전승 금메달로 그 수모를 만회했다.[101] 2005년 한 해 215이닝 동안 226 탈삼진 ERA 2.30 기록. 사와무라 상은 스기우치 도시야에게 내줬지만 이 해 탈삼진왕을 차지한다.[102] WBC는 올스타전처럼 5회를 다 소화하지 않아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다. WBC는 선발 투수의 투구수 제한이 있기 때문.[103] 여담으로, 마쓰자카는 본인이 국제대회에서 출전한 모든 대만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야말로 대만전 승리의 보증수표인 셈.[104] 1회 이승엽의 결승 투런 홈런이 터졌다.[105] 프레드릭 세페다, 오스마니 우르티아, 야리엘 페스타노 삼진 처리.[106] 마쓰자카와 우에하라 고지는 각각 결승전과 준결승전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107] 여담으로, 일본 킬러라 불리던 김광현이 속절없이 무너진 이 경기 이후로 이 대회가 끝날 때까지 김광현은 단 한 차례도 선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한국도 프로간의 대결에서 일본에게 콜드 패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심지어 2022년 현재까지도 이 경기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한국 야구 팬들과 대표팀 관계자들이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108] WBC는 올스타전처럼 5이닝을 다 채우지 않아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다.[109] 2022년 현재까지도 한일 양국 간 프로 1군이 선발된 대결에서 유일한 콜드 게임이다. 2023 WBC에서 또 나올뻔 했으나 13:4로 가까스로 콜드게임은 나오지 않았다.[110] 당일 경기에서 구원으로 올라와 3이닝 퍼펙트 완벽투를 선보였다.[111] 사실 이 타구는 중견수였던 후쿠도메 고스케와 유격수 나카지마 히로유키의 콜 플레이가 원활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애매한 위치에 떨어지기는 했으나, 체공시간이 길었던 타구였고 두 수비수가 우물 쭈물하며 타구 처리를 서로 미루는 사이 공이 떨어져버렸기 때문.[112] 원래 이 별명의 원조는 사이토 가즈미이다. 하지만, 이 투수는 일찍이 사이버 투수화 되는 바람에.. 잘 던지는 투수에게 유행처럼 이 말이 번졌다. 마쓰자카도 본래 커리어 초반 혹은 고교 시절에는 '헤이세이의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언급되었으나, 지지않는 에이스 혹은 마쓰작가(...)라는 별명도 붙여졌다.[113] 7.2이닝 4피안타 6탈삼진 2볼넷 2실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