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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은 캐나다에 귀화한 우크라이나인 또는 우크라이나계 후손들이다.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들은 캐나다에서 130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우크라이나계 인구가 3번째로 많은 나라[1]로, 미국내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90만명보다 많은 숫자이다. 미국은 러시아계 미국인, 유대계 미국인, 폴란드계 미국인 인구가 우크라이나계보다 월등히 많지만 특이하게도 캐나다의 경우 우크라이나계 인구가 더 많은 편이다.주로 중부와 서부에 거주한다. 캐나다 중부 매니토바주 전체 인구의 14.5% 서스캐처원13.4% 앨버타9.3%, 서부의 브리티시컬럼비아5.0%, 유콘6.3%가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인구이다.
2. 역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일대의 농민들이 캐나다로 많이 이주했다. 당시 유대인을 제외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이 무학 농민으로 미국보다는 농업 이민이 유리했던 캐나다로 더 많은 이민이 이루어졌다.[2] 그와 동시에, 캐나다 정부가 캐나다 서부 내륙의 프레리 지역 아스펜-파클랜드 벨트에 체르노젬 토양을 확인하면서 같은 체르노젬 토양이 많은 우크라이나 출신 농민들의 이민을 받아 노하우 도입 및 서부 개발 촉진을 꾀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상당기간 캐나다 이민 홍보 관료들이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우크라이나인 이민을 도왔고 이는 캐나다에 우크라이나계 인구가 유난히 많은 이유이자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상당수가 전술한듯 서스캐처원, 앨버타, 매니토바[3]에 다수 포진한 이유이다.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의 근현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근현대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존속하는 동안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방은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가톨릭을 탄압한 러시아 제국과 다르게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는 정교회가 차별을 받았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역시 가톨릭이기는 해도 동방 정교회의 전례를 유지하는 차이에다 가난한 우크라이나계 농노들이 주로 믿는다는 이유로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가난한 농업 지대에 총알받이용 병력 공급 지역 즈음으로 여겼으며, 갈리치아는 빈곤 문제가 심각해지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간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리치아 내 우크라이나인들은 특별한 기술이 있을 턱도 없고 그 때문에 농업 이민을 선호한데다, 차라리 춥더라도 평소에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폴란드계나 유대계, 독일계랑 부딪힐 일이 적은 캐나다를 주 이민지로 택한 것.
특히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를 믿고 있던 갈리치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캐나다 서부로 많이 이주했다. 이 갈리치아 지역의 빈곤은 19세기 후반에 특히 극심했는데, 해당 지역은 우크라이나 내 다른 지역들이 비옥한 흑토 지대인 것과 다르게 비교적 척박한 편이었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갈리치아 지역 주민의 소득 증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동안 식량 생산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해당 지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편입되고 중부-동부 지역이 러시아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전통적인 무역로마저 단절되었고 설상가상 별다른 공업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자 도시에서도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다른 지역 농민들보다 두 배 적게 먹는 대신 낙후된 농업 기술과 허약한 건강상태로 4분의 1 정도의 효율로 일하며, 농업 이외에 주 산업은 주류 양조 산업으로 농촌 내 알콜 중독이 만연하였다. 절망적이고 빈곤한 사회 분위기 속에 우크라이나계 농민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15% 정도로 당시 오스트리아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서구 세계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이 유명하다면 중유럽에서는 이른바 "갈리치아의 빈곤"이 기근의 대명사로 통했을 정도였다. 영양실조로 연간 5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4]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 상당수는 이웃 폴란드인 농민들을 따라 아메리카로 대량 이민을 결정하였다. 갈리치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상당수가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물론 우크라이나에서 캐나다로 이민한 사람들 중 상당수의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미국 이민을 좀 더 선호한 편이었지만, 캐나다 동부로 이주한 인구 역시 적지는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캐나다는 연합군으로 파병하였고,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들의 명목상 출신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동맹국에 속해있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캐나다에서는 약 8,000여 명의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들을 친오스트리아파 위험 인물로 오해하여 강제 수용소에 수감하고, 노역을 시킨 흑역사가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약간의 배경 상식만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빼도막도 못할 캐나다의 흑역사이다.[5]
우크라이나인들의 캐나다 이주는 20세기 중엽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우크라이나인들로 구성되었던 무장친위대 소속 제14무장척탄병사단의 군인들이 다수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1970년대 소련에서 유대인들이 일정 액수의 돈만 내면 해외 이주를 허락하는 정책을 취하자, 상당수의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이 캐나다, 미국, 이스라엘 등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소련 해체 이후에 독립국이 되었고, 우크라이나보다 캐나다가 훨씬 경제적인 수준이 좋은지라 경제적인 풍요를 찾아 캐나다로 적지 않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주하고 있으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주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이다.[6]
3. 문화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중 11.5% 정도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본토에선 사라진 표현이나 어휘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캐나다 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측의 증언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이민 3세대 정도 되면 우크라이나어를 구사를 못하고 영어만 사용하게 되면서 캐나다 여타 현지인들과 동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오늘날 기준으로 캐나다 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 비율은 감소한 편이다. 세대가 지나면서 정교회나 우크라이나 가톨릭을 고수하는 인구보다 다른 종파를 믿거나 아니면 무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7] 다만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많이 이주했던 영향은 남아있어서 매니토바 주 위니펙에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대주교구가 설치되었으며, 에드먼턴, 토론토, 새스커툰, 뉴 웨스트민스터에도 교구가 존재한다고 한다. 캐나다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미국 피츠버그를 중심으로 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교회를 따라서 현지인들을 개종시키고, 영어로 예배를 보는 방식으로 신자 수를 늘리는 정책을 취하기도 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대거 캐나다로 유입되면서 캐나다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도들도 크게 늘었다.
70년대 이후 이주한 사람들의 경우는 소련 시절 이루어진 국가 무신론 정책의 영향으로 세속적인 성향이 강하다.
4. 출신 인물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1등은 우크라이나, 그리고 2등은 러시아[2] 같은 이유로 러시아의 재세례파 신도 상당수가 캐나다로 이주했다.[3] 캐나다의 프래리 지역[4] 기근과 알코올 중독으로 면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콜레라, 발진티푸스, 천연두 및 매독이 창궐해서 해당 지역의 평균 수명을 크게 낮추었다.[5] 이 외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이민자들(대부분은 오스트리아인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인이나 세르비아인 등등 슬라브계) 8만여 명이 캐나다 전시조치법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6] 2022년 캐나다 정부는 망명을 신청한 우크라이나인 70만여 명 중 40만여 명에게 난민 허가를 내주었다.#[7] 반면 아직 브라질에서는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들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 수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8] 이전에는 외무장관 및 국제통상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집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쓰고 키이우 대학교에 교환학생을 다녀온데다 그 시절 KGB의 사찰까지 당한 바 있어, 프리랜드 부총리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국면에서 러시아를 강하게 규탄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