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14:32:20

이나바 아츠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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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시즌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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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298><colcolor=#ffffff> 1군 1 신조 츠요시감독 · 77 하야시 타카야수석 · 81 타테야마 요시노리투수
82 카토 타케하루투수 · 73 타케다 히사시투수 · 89 야기 히로시타격 · 72 야마다 카츠히코배터리
85 야치 료타내야수비·주루 · 80 모리모토 히초리외야수비·주루 · 79 다이타 타케노리데이터 분석관·주루
2군 90 이나바 아츠노리2군 감독 · 78 시미즈 마사지종합 · 84 이토 타케시투수 · 91 카네코 치히로투수
83 우라노 히로시투수 · 87 사토 토모야키타격 · 75 오다 토모유키타격 · 75 야마나카 키요시포수 인스트럭터
74 이와다테 마나부내야 수비·주루 · 76 콘타 토시마사외야 수비·주루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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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 아츠노리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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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95 1997 200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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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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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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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AP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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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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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WBSC 프리미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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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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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도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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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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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br] 2006~200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 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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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1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고쿠보 히로키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나바 아츠노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아사무라 히데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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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퍼시픽 리그 수위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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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퍼시픽 리그 최다 안타

파일:NPB 로고.svg 2006년 일본 시리즈 MVP
이마에 토시아키
(치바 롯데 마린즈)
이나바 아츠노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주니치 드래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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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 아츠노리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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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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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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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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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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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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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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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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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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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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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보 히로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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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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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타 히로카즈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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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 스왈로즈]] 등번호 41번}}}
카나자와 츠기오
(1990~1994)
이나바 아츠노리
(1995~2004)
키다 마사오
(2006)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58번
카미시마 타카시
(2000~2003)
이나바 아츠노리
(2005)
타카구치 타카유키
(2006~2010)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41번
카토 카츠히토
(2003~2005)
이나바 아츠노리
(2006~2014)
브라이언 로드리게즈
(2018~)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등번호 80번
야마모토 코지
(2008)
이나바 아츠노리
(2015~2021)
공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90번
와타나베 히로시
(2021~2023)
이나바 아츠노리
(2024~)
현역
}}} ||
파일:InabaGM.jpg
<colbgcolor=#006298><colcolor=#ffffff>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No.90
이나바 아츠노리
稲葉篤紀 | Atsunori Inaba
출생 1972년 8월 3일 ([age(1972-08-03)]세)
아이치현 니시카스가이군 시카츠초
(現 아이치현 키타나고야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추쿄 고교 (아이치)[1] - 호세이대학[2]
신체 185cm, 94kg
포지션 외야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4년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30번, 야쿠르트)
소속팀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5~2004)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05~2014)
지도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코치 (2013)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 (2013~2017)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7~2021)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감독 (2024~)
프런트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GM (2022~2023)
등장곡 야쿠르트 시절: 필살사괘인 OST - 황야의 끝에
닛폰햄 시절: Queen - I Was Born to Love You
응원가 야쿠르트 시절[3]
닛폰햄 시절[4]
닛폰햄 시절 찬스 시(이나바 점프)[5]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지도자 경력5. 프런트 경력6. 플레이 스타일7.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감독이다.

선수시절 야쿠르트 스왈로즈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간판 스타로 활약했었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

고등학교 3학년때 치른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아이치 대회 준결승에서 스즈키 이치로를 내세운 아이치공대 부속 메이덴 고교 에 4-5로 석패하는 바람에 고시엔 무대는 고등학교 3년동안 밟아보질 못했다. 졸업 후에는 호세이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하며 야구를 계속했고 1993년 봄 대회에서 주전 1루수로 활약했다. 같은해 열린 제 22회 미일 대학야구 대표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4학년때는 팀의 4번타자로 활약. 호세이대학의 추계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 해에 도쿄 6대학 야구 춘계리그 베스트 나인, 2년 연속 미일 대학야구 대표팀에 선정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학 졸업 후 1994년 드래프트 회의에 참가하였고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3순위에 지명하였다.

2.2.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

파일:external/www.asahi.com/20120429004.jpg
2001년 일본시리즈 2차전에서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하는 이나바
입단 이후 외야수 훈련에 초점을 맞추었고 개막 엔트리에는 진입하지 못했으나 1군 첫 출장이었던6월 2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에서 데뷔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하며 화려하게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시즌 시작을 늦게 한 탓에 규정타석을 채우진 못했지만 타율 .307 8홈런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다음해인 1996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리는 일 없이 주전 외야수로 도약하며 규정타석 3할을 기록했고, 3년차인 1997년에는 타율은 .267로 떨어졌지만 장타력도 만개하면서 데뷔 첫 20홈런(21홈런)을 기록하는 등 향후 야쿠르트 외야진을 이끌 중심선수로써 기대를 받았다.

이후 1998~2000, 2003년에 부상으로 고전한 것을 빼면 2004년까지 야쿠르트의 중심타선의 일원으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특히 2001년엔 타율 .311 25홈런 90타점으로 활약하여 야쿠르트의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끌며 데뷔 첫 베스트나인에도 선정되었다.

2004년 시즌 종료 후 FA 선언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노렸으나 트라이아웃까지 시도했음에도 영입 의사를 보이는 구단이 나오질 않으면서 결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했고 2005년 2월에 연봉 23% 삭감(7800만엔 → 6000만엔)을 감수하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입단에 협의하며 야쿠르트를 떠나게 되었다.[6]

2.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파일:Nipponham-Inaba.jpg
이적 첫해 125경기에 나서서 타율 .271 15홈런으로 2004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성적으로 시작했다. 2006년에는 야쿠르트 시절부터 사용했던 등번호인 41번을 달았고 2001년 이후 모처럼 3할타율에 복귀하는가 하면 커리어 최다인 26홈런을 때려내며 닛폰햄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 활약상은 가을야구에서도 이어져 2006년 일본시리즈 MVP까지 수상하는데 이르렀고 데뷔 첫 골든글러브까지 받게되었다.[7]

2007년에는 .337의 타율로 수위타자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2009년까지 3할타율을 기록하며 4년 연속 3할을 기록했다.

2012년 개인 통산 250홈런과 2000안타, 1000타점, 2000경기 출전을 달성하였다.

2013년 시즌 전 40대의 몸으로 wbc 대표팀에 발탁되었고[8] 네덜란드전에서 홈런을 쏘아올리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쇠화를 이기지 못하고 리그 성적이 급락했다. 2014년 왼 무릎 수술을 받고 7월 무렵 복귀하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해 9월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한다. 오릭스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선 대타로 나와 적시타를 쳐 팀을 파이널 스테이지로 이끌었으나 결국 소프트뱅크에 막혀 일본시리즈 진출은 끝내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파이널 스테이지 일리미네이션 게임이 이나바의 은퇴경기가 된 셈.

3. 은퇴 이후

은퇴 직후인 2015년에는 테레비 아사히 홋카이도 테레비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5년 초에 열린 평가전에서 대표팀의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경력도 쌓기 시작했다. 그해 말에 열린 제 1회 프리미어12에도 타격코치를 역임했다.

2016년에도 대만, 네덜란드, 멕시코와의 평가전에서도 코치로 발탁되었고 2017 wbc에서도 코치직을 역임하면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전임자였던 고쿠보 히로키가 2017 wbc를 끝으로 사임하자 차기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고 7월 31일에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4. 지도자 경력

4.1.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감독 취임 후 처음으로 나서게 된 대회인 2017 APBC에서 3전 전승을 거두며 초대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감독 취임 이후 첫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2018시즌이 끝나고 치러진 미일야구 올스타전에서도 도합 5승 1패를 거두는 등 그럭저럭 무난히 감독직을 수행하는 모습이다.

2019 프리미어 12를 앞두고 선수 선발에서 의문점을 자아내기도 했다. 시즌내내 애니콜이었고 4점대로 다소 부진한 타구치 카즈토를 발탁하고 1할 9푼이라는 절망적인 타율임에도 단지 주루 능력만 믿고 소프트뱅크의 슈토 우쿄를 데려가는 등 뽑아 갔어야 했나? 싶은 선수 선발로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결승에서 한국을 누르고 2회 대회를 우승하면서 우려를 불식시켰다.

아니 오히려 2017 APBC의 우승주역들인 속칭 '이나바의 아이들'이 대회에서 쏠쏠하게 활약했다. 타구치는 롱릴리버로 나서서 깔끔한 투구를 보여주었고 이마나가 쇼타는 예선에선 투구내용이 나빴으나 슈퍼라운드에서 호투하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야마사키 야스아키 역시 대회기간동안 대표팀의 9회를 원천봉쇄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겐다 소스케도 호주전 결승 스퀴즈 득점과 안정적인 수비로 대표팀을 든든히 지탱하였다.

그리고 17년 '이나바의 아이들'의 멤버는 아니지만 발만 믿고 발탁한 슈토 우쿄는 신들린 주루 플레이로 호주전 역전승의 주역이 되며 단기전에서 대주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어쨌든 현재까지의 감독 이나바는 대체적으로 평가가 좋은 편. 특히 일본이 국제대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일전에서 아직까지 패배가 없다는 점이 고평가의 주요 원인이다. 그것도 사무라이 재팬을 내세워 인기를 끌던 하라 감독 시절처럼 빅볼로 조져대고 있어서 더더욱 고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선 평가가 급격히 나빠졌는데 대표팀 멤버 선출에서 너무 이름값에만 치중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라쿠텐과의 평가전에서 역전패를 당하면서 APBC와 프리미어12에서 쌓아왔던 좋은 평가를 까먹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개막전을 맞이했지만 도미니카 공화국에게 3대 1로 패배 위기까지 갔다가 겨우 역전승을 거두며 어려운 경기를 펼쳤다.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8회까지 2대 2로 접전을 벌인 끝에 한국의 실책성 플레이로 간신히 5대 2로 이겼다.

올림픽 기간 내내 대부분의 경기를 어렵게 끌고가며 전반적인 경기 운영과 선수 기용 문제 등으로 까이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는 중. 분명 비판적인 요소는 많으나 이기기는 하다보니 대놓고 뭐라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2021년 8월 7일, 올림픽 결승에서 미국을 2대 0으로 꺾고 드디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오랜 염원이었던 올림픽 금메달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경기 종료 직후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었는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9]

올림픽 종료 후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임기가 만료되며 감독직에서 아름답게 물러나게 되었다. 박수칠 때 떠난 셈이다. 또한 그 유명한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가 생각나는 대목의 반대로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나는 대목이다.

5. 프런트 경력

5.1.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GM

2012년부터 2021년까지 팀을 지휘한 쿠리야마 히데키의 사임 발표 후 후임 감독으로 거론되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으나 구단 GM으로 가면서 프런트 쪽으로 노선을 틀었다.# 결국 26일 차기감독은 신조 츠요시로 내정되었다.

감독직을 고사한 것에 대해선 여러 추측이 있지만 아내의 선수단 내 갑질 문제가 발목을 잡은 것 아니냐는 설이 나오는 등 정확한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6. 플레이 스타일

파일:20191120_005958.gif
이나바의 타격폼
거의 매년 10~20개의 홈런을 기록할 수 있는 장타력을 보유함과 동시에 규정타석 3할을 6번 기록하고 2007시즌 수위타자 타이틀에 오를 만큼 기본적인 컨택 능력은 좋은 편이다. 특히 왼팔을 몸에 딱 붙이면서 나오는 특유의 스윙 덕분에 몸쪽 공에 강한 타격을 선보인다. 한때 닛폰햄시절 한솥밥을 먹던 신조 츠요시가 "이나바는 몸쪽 공 치는데는 천재적이다."라며 감탄하기도. 야쿠르트 제적 시절에는 패스트볼 계열에 강점을 보인 반면 변화구에 약점을 노출했으나 닛폰햄 이적 이후에는 변화구 대처 능력도 많이 좋아졌다. 특히 커브볼 대처 능력이 무지막지하게 좋았다. 또한 야쿠르트 시절엔 좌투수 상대 타율이 .232로 좌상바 기질이 막연했으나 닛폰햄 이적 이후 2010년까지의 기준으로 좌투수 상대 타율이 .295를 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야쿠르트 시절 부족했던 점들이 닛폰햄 이적 후에 개선된 경향.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2006~2009년까지, 1루수 골든글러브를 2012년에 수상한 실적이 있는 만큼 수비력도 나쁘지 않았다. 외야 수비시 위치판단 능력이 좋으며 우익수로 출전한 2002년, 2006년에 리그 외야수 레인지 팩터 1위에 오르는 등 수비 범위도 넓은편이었다. 리그 외야수 보살 1위를 2차례 기록할만큼 송구 능력도 탁월하다. 멀리던지기 기록이 80미터에 그칠만큼 강견은 아니지만 송구동작이 상당히 민첩하고 송구 정확도가 좋아서 평범한 어깨를 가지고도 많은 보살을 기록할 수 있었다.

도루 시도 자체는 적지만 1루까지 3.96초, 3루까지 11.45초를 내달릴 만큼 느린 주자는 아니다. 평소 공수교대 때에도 전력질주를 하는 만큼 주루플레이에서도 전력을 다해 뛴다고.

7. 여담

  • 오른쪽 뺨에 마치 화상 자국과 같은 흉터가 있는데 이나바 본인이 저서에서 원인 불명의 자국이라고 밝혔다.
  • 프로필 상에는 좌투좌타라고 명시되어있으나 젓가락질, 필기는 오른손으로 한다. 골프를 칠 때도 오른쪽으로 친다고...
  • 한때 근시였던 탓에 시력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콘택트 렌즈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야쿠르트 입단 이후에 라식수술을 받으면서 시력을 회복했다.
  • 통산 사구가 138개로 이는 좌타자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위는 요미우리의 아베 신노스케.
  • 유년 시절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쉽게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성격이었고 그 때문에 학창시절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선배들의 담배 셔틀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아버지에게 알려져 크게 훈계를 받게 되었고, 이때 훈계를 받으면서 "강해져야 한다"는 결심을 한 뒤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 선배와 담판을 벌여서 이후로는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개인 성적보다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경향인데 2000안타를 달성했을 때도 "딱히 마음먹고 노린 것은 아니었고, 득점 찬스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려는 마음 뿐이었다.", "2000개의 안타를 때리려고 시즌을 치르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감독님을 헹가래하기 위해서(우승을 하기 위해서) 시즌을 치르는 것이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고 개인 성적은 뒷전이다."한 코멘트로 2000안타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팀의 승리가 더 중요하다는 코멘트를 남겼다.[10]
  • 현역시절 경기 전에 동료들과 캐치볼을 할 때 몇몇 좌완 투수들의 투구폼을 흉내내서 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 닛폰햄 이적 첫 시즌인 2005년에 58번을 단 것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등번호 41번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41이 자신의 이니셜인 'AI(Atsunori Inaba)'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 좋아하는 음식은 감자칩. 오프시즌 때 하도 감자칩을 많이 먹는 바람에 체중조절이 안될 때가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은퇴 시즌인 2014년 1월엔 감자칩을 엄청나게 먹어댄 탓에 체중이 기존의 94kg에서 100kg 이상까지 늘어났다. 이러한 체중 변화를 억제하기 위해 저칼로리 감자칩을 먹으면서 체중 조절을 한다고 한다.
  • 홋카이도에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해, 홋카이도 가스 CF에 나오기도 했다.
  • 득점권 찬스에서 주로 행해지는 '이나바 점프'로 일컬어지는 응원법이 있다. 발단은 2006년 당시 미야기 구장의 규정상 트럼펫 등 소리가 큰 응원 도구를 쓸 수가 없어 육성 위주로만 응원이 행해졌는데 이 때문에 찬스에서 사용할 팡파르를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웠다. 큰 소리를 내기 어려우니 점프라도 해서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했는데[11]초반엔 소규모로 행해지던 이 응원 방식은 점차 규모가 커지더니 2000년대 후반부터는 삿포로 돔이 들썩일 정도[12]로 장관을 이루는 응원 방법으로 거듭났다. 이나바의 은퇴경기에선 소프트뱅크 호크스 팬들도 함께 이나바 점프를 즐겼을 만큼# 꽤나 인기있었던 응원. 이나바 본인도 이 응원을 당연히 알고 있으며 응원이 시작될때마다 초구를 거의 놓쳤다고 한다. 이나바의 은퇴 이후엔 나카타 쇼가 물려받았다. 나카타가 후배를 폭행하는 대형 사고를 저지른 바람에 요미우리로 트레이드 돼서 현재는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상황. 워낙 인기가 커서 다른 선수들이 물려받을 듯하다.


[1]추쿄대학 부속 추쿄 고교[2] 경영학부[3] 狙いすまして 鋭く打ち返せ 稲葉篤紀 頼りになる男 (단단히 노려라 날카롭게 되받아쳐라 이나바 아츠노리 믿음직한 사나이)[4] 今、見せろ お前の底力を 突き進め 勝利を掴み取れ (지금 보여줘라 너의 저력을 힘차게 나아가라 승리를 차지해라)[5] 가사는 동일하며 전주만 추가되었다.[6] 닛폰햄 파이터즈 구단 역대 최초의 FA 영입이자 2022년 시즌 종료 후 후시미 토라이를 영입하기 전까진 닛폰햄이 유일하게 타구단 출신 선수를 FA로 영입한 사례였다. 중간인 2018년에 츠루오카 신야를 FA로 영입하긴 했으나 이쪽은 닛폰햄에서 데뷔 후 2015년 소프트뱅크로 FA 이적했다가 다시 FA로 되돌아온 거라 홍성흔, 양의지처럼 이전 소속 선수를 다시 데려온 사례다.[7] 이 당시 좌익수 모리모토 히쵸리 - 중견수 신조 츠요시 - 우익수 이나바 아츠노리가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한 팀의 외야수 세 명이 모두 글든글러브로 선정된 건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다.[8] 그것도 소속팀에서는 플레잉코치신분이었다.[9]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기도 했고, 올림픽에서 퇴출되었다가 다시 부활한 종목인 만큼 이번 기회에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하면 자국내에서 엄청난 비판 여론이 나올것이고 언제 다시 금메달에 재도전 할 수 있을지 장담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나바 본인도 이를 모를리가 없었기에 금메달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올림픽에 임했고 그에 따른 엄청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올림픽 이전부터 받다가 대회가 좋게 마무리 되었으니 그간 쌓여왔던 감정들이 북받쳐 오른것.[10] 여담으로 2000안타를 때려낸 공은 잃어버렸다고 한다.[11] 반면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응원 분위기가 아니라 단지 초봄의 센다이 날씨가 추워서 소수의 관중들이 점프를 하기 시작한 것에서 착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2] 삿포로 돔 규정상 내야석은 점프가 금지되어 있지만 이나바 점프를 할때만은 예외다. 대신 전주가 끝나면 빛의 속도로 착석. 이때 발생되는 진도는 대략 3~4 정도에 해당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