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쾨니히스베르크 방어전 당시 MG81 기관총으로 경계 중인 국민돌격대 대원들 | |
날짜 | |
1945년 1월 13일 ~ 4월 25일 | |
장소 | |
동프로이센 | |
교전국 |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틀:깃발| ]][[틀:깃발| ]][[이반 바그라먄| ]] [[틀:깃발| ]][[틀:깃발| ]][[이반 체르냐홉스키| ]] [[틀:깃발| ]][[틀:깃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틀:깃발| ]][[틀:깃발| ]][[파벨 바토프| ]] | ]][[틀:깃발|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페르디난트 쇠르너|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프리드리히 호스바흐 | ]][[틀:깃발|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
전력 | |
소비에트 지상군 제2벨로루시전선군 제3벨로루시전선군 제1발트전선군 제43군 소비에트 해군 발트함대 소비에트 공군 제1항공군 제3항공군 제4항공군 제15항공군 제18항공군 | 독일 육군 중앙집단군[1] └ 제2군 └ 제3기갑군 └ 제4군 독일 해군[2] 국민돌격대 |
병사 166만 9,100명 전차 3,000대 대포 25,000문 항공기 3,000기 | 독일 국방군 병사 58만 명 국민돌격대 척탄병 20만 명 전차 700대 대포 8,200문 항공기 700기 |
피해규모 | |
전사 및 실종 12만 6,464명 부상 및 병사 45만 8,314명 | 사상 105,538명 포로 22만 명 |
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동프로이센 영토의 대부분이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합병 소련이 쾨니히스베르크, 메멜 등의 도시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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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소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중 1945년 1월 13일부터 4월 25일까지 실시된 소련군의 전략 공세이다. 이 공세를 계기로 나치 독일에서 22만 명에 달하는 포로가 발생했으며 최대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와 알렌슈타인을 비롯한 동프로이센 지방을 소련과 폴란드에 영구히 내주게 되었다. 소련군은 폴란드 동북부로 30~60km까지 진격했으며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소련군 역시 전선군 사령관 이반 체르냐홉스키를 포함하여 13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2. 배경
바그라티온 작전이 대성공으로 끝나면서 벨로루시를 탈환하고 중부집단군을 와해시킨 소련군은 기세를 올려 나치 독일 본토의 최동단에 위치한 동프로이센까지 진격했다. 발트 3국을 점령하고 남하하여 메멜을 공략하기 시작한 이반 바그라먄의 제1 발트 전선군에 호응하여 이반 체르냐홉스키[3]가 지휘하는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은 1944년 10월 16일부터 27일까지 동프로이센 방면으로 공세를 가했으나 프리드리히 호스바흐가 지휘하는 제4군의 역습에 의해 1만 6,000여명의 병력들과 914대의 전차와 돌격포들을 잃고 패퇴한 바 있다.이후 잠시 공세를 중지하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은 충분한 예비 전력이 확보되자 1945년 1월 13일 제2 벨로루시 전선군과 43군, 제1 발트 전선군과 소련 해군 발트 함대와 함께 다시 동프로이센 지방으로 총공세를 가했다. 당시 소련이 동원한 병력은 무려 166만 명에 달했고 3,000대의 전차와 3,000대의 항공기 그리고 2만 5,000문의 포병전력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였다.
3. 공세 초기
1월 13일, 포병의 준비사격 아래에 소련군은 공세를 시작했다.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은 공세 첫 날 불과 1.5km 밖에 진주를 못했지만 5일 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20km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유는 독일군이 진작 대소 국경과 가까운 쾨니히스베르크 주위의 인스터베르크-하일스베르크 축을 따라 상당한 요새화를 했기 때문이다.[4] 또한 독일군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생산된 대포들부터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까지 끌어와서 포격지원을 하며 버텼다. 그러나 소련군은 피해를 무릅쓰면서 계속 무려 2주간 대규모 공세를 가했고 방어하던 독일군은 물량에 밀려 전선이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에르하르트 라우스가 지휘하던 제3기갑군은 많은 기갑 장비들을 손실했으며 프리드리히 호스바흐의 제4군은 궤멸 직전이었다.1월 14일,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은 폴란드의 나레프 전역을 공격했고 1월 20일 경 엘빙 지역[5]을 공격했다. 로코솝스키가 독일군 우익을 위협했고 제3 근위 기병 군단이 알렌슈타인을 점령하면서 독일군 후방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1월 23일, 로코솝스키의 전차 부대는 비스툴라 석호에 도착해 독일군 전체의 통신선을 끊어버렸고 포위망을 형성해 독일군은 더 큰 절망에 처하게 되었다. 호스바흐는 뢰첸[6]에서 병력을 강행군시키며 서쪽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다.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도 자신의 잔존 제3기갑군 병력들을 철수시키려 한다.
한편 체르냐홉스키는 독일 3기갑군의 잔존 병력을 쾨니히스베르크로 몰아냈고 1월 28일, 제1발트전선군을 지휘하는 이반 바그라먄은 1944년부터 포위하던 메멜 지역[7]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8]
이렇게 독일군 중부집단군 잔존 병력들은 소련군에 포위되었고 소련군 주력은 안정적으로 포메른 지역에 대한 공세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4.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
초토화된 쾨니히스베르크 시내. 그 위로 Yer-2 폭격기들이 비행하고 있다.
자신의 병력들을 지키려 했던 호스바흐와 라인하르트는 위치를 사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라인하르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지휘권을 양도한다. 그리고 잔존 병력들은 로타르 렌둘릭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으로 재구성된 새 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가 포위되면서 잔존 3기갑군 병력들과 20만 명의 독일 민간인들이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었다. 포위 공격으로 하루 배급량은 180그램의 빵으로 줄어들었고 민간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도시에서 계속 굶주리거나 소련군에 투항해 소련군의 자비만을 바라거나 비스툴라 석호의 빙판을 건너 필라우의[9] 피난선을 찾는 것 밖에 없었다. 즉, 소련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당했던 그대로 되갚아준 셈이다. 물론 그럼에도 피해 규모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10]
하루에 2,0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석호의 빙판을 건너 피난선에 탑승했다. 독일군은 포위된 다른 아군 병력들과 합류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소련군의 거센 공격 앞에 좌절되었다. 그러나 2월 19일, 제3기갑군과 제4군 병력들이 필라우로 가는 기동로를 간신히 개통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노획한 T-34들을 바탕으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해 잠란트 반도[11]와 필라우 급항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군 28군단과 연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5기갑사단 병력과도 합류했다. 이렇게해서 4월 까지 필라우와 쾨니히스베르크와의 육로를 개통해 유지할 수 있었고 필라우를 통해 들어오는 배로 보급을 유지하고 피난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속에 처한 독일군이었지만 쾨니히스베르크의 방어선 자체는 여전히 매우 단단했는데 윈스턴 처칠이 엄청난 요새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또 다른 전쟁에 대비해 1888년부터 건설된 15개의 포트들이 있었다. 이 포트들은 당시 열강들이 개발하던 대구경 포에 대비한 방호성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막강한 대전차 방어선도 구축된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이 방어망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어떤 지역에서는 킬로미터 당 250여 문의 곡사포를 배치할 정도로 막대한 포병과 항공 지원을 쏟아부어서 방어하는 독일군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안겨주기로 했다.
4일 간의 준비포격 후 1945년 4월 6일부터 소련군은 총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은 여러 지점에서 공세를 가해 최종적으로 독일군 부대들이 상호 지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곳곳에 고립시킬 계획이었다. 이미 독일군들은 사기가 꺾여 있었고 19세기에 지어진 강화 요새들도 소련군에 의해 돌파당하거나 패닉에 빠진 수비 병력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 방어선은 하루 만에 곳곳이 무너져버렸다. 2일 째가 되자 기상 환경이 좋아지면서 소련 공군이 독일군들을 정밀 폭격하기 시작했고 Il-2들은 반격하려던 독일군 병력들에게 사신이 되어 강림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포트 8 요새 수비 병력들도 결국 항복한다.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독일군 지휘관 오토 라슈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항복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히틀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독일군은 낡은 장비와 급히 징집된 국민돌격대 병력으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소련군은 항복을 재차 요청했지만 독일군 수비병력들은 이틀을 더 싸웠다. 4월 9일, 더 이상 전투할 수 없게 된 독일군은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라슈의 벙커로 소련군 대표단이 방문하면서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독일군은 4만 2,000명의 병력이 전사하고 9만 2,000명의 병력이 포로로 잡히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쾨니히스베르크가 점령된 이후에도 동프로이센 곳곳에 잔존한 독일군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4월 25일 이들마저 완전히 진압되면서 동프로이센은 완전히 소련군에 접수되었다.
도시의 80%가 소련군의 무지막지한 포격과 공습 앞에 파괴되었으며[12] 거의 전체에 해당하는 20만 명이 넘는 쾨니히스베르크 주민들은 소련군에 의해 독일 본토 지역으로 추방당했다.
포위전 과정에서 멧게덴 학살로 불리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3,000명이 넘는 독일 민간인들이 복수심에 불탄 소련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하고 강간당했다.
5. 결과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로 진입한 소련군 ISU-152 자주포
22만 명이 넘는 대병력의 독일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며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리고 소련은 역사적으로 중세 13세기 독일계 튜튼 기사단의 프로이센 점령 이래 독일인들 고유의 영토였던 동프로이센을 해체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 기사단국과 프로이센 공국의 옛 수도이자 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요람인 고도(古都) 쾨니히스베르크를 완전히 병합하였다.[13] 즉, 소련이 나치의 군국주의[14]와 전체주의 전통의 근간 발상지까지 완전히 접수해버린 것이다.[15] 동프로이센의 해체는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없애려던 서방 연합국들도 동의했던 바인데 이 지역이 독일 기사단국으로부터 시작되는 동방식민운동의 종착점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전간기 동프로이센이 독일의 월경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후 영토 할양 협정에서 동프로이센의 중남부는 소련에 동부 영토를 뺏긴 신생 폴란드에 보상격으로 할양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를 포함한 동프로이센의 북부는 소련에 합병되었다. 이후 새로 소련에 편입된 구 동프로이센 지역은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으며, 소련이 붕괴된 현재는 칼리닌그라드주가 되어 러시아 영토로 남아있다.
[1] 이후 북부집단군으로 개칭[2] 소규모 포격 지원[3] 불과 37살의 나이에 전선군 사령관 자리에 오르며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 계급을 찍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1945년 2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 교외에서 공세 준비를 위한 시찰하던 도중 적 포탄의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4] 현재 인스터베르크는 러시아 연방 칼리닌그라드 주의 체르냐홉스크로 이름이 바뀌었고 하일스베르크는 폴란드령 리즈바크 바르민스키로 이름이 바뀌었다.[5] 지금의 폴란드 항구도시 엘블롱크이다.[6] 현재 폴란드의 기지츠코 지역이다.[7] 현재의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지역이다.[8] 수비하는 독일군 병력은 3개 사단 잔존 병력들이 전부였고 민간인들을 바다로 대피시킨 뒤 철수한다.[9] 현재의 러시아 발티스크 지역이며, 러시아 해군 발트함대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10] 어찌보면 당연한데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3년간 지속되어 왔지만 쾨니히스베르크 포위는 길어야 3달이다.[11] 현재의 러시아 삼비아 반도 지역이다.[12] 이미 1944년 영국 공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폭격했는데 이때 받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군의 공격까지 받게 되는 불운이 겹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련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한 후 이 잔해들은 소련 각지로 보내져 레닌그라드와 같은 중요 도시들을 재건할 때 쓰이게 되며, 그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공원이 들어서거나 삭막한 소련식 건물이 자리잡게 된다. 그 결과, 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같은 몇몇 사례만 제외하고는 독일령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흔적이 사라진 상태이고, 유명한 일곱 개의 다리도 4개가 파괴되었다. 이 중 2개만 다시 지어져 독일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다리 한번만 건너기가 소련 시절에는 가능하게 되었다.[13] 동프로이센과 쾨니히스베르크가 통일 독일의 발상지였던 적은 없다.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시절부터 수도였던 베를린이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동프로이센 지역을 영토로 둔 프로이센 공국을 흡수 합병하고, 이후 국호를 바꿔 프로이센 왕국이 된 이후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등 동프로이센 지역의 중요성은 전쟁 시 피난처 내지는 폴란드 분할 이후에 합병한 폴란드 지역에 대한 견제용도로 줄어들었다. 프리드리히 1세나 빌헬름 1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르기는 했으나 상징적인 의미 이상은 아니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같은 경우는 쾨니히스베르크에 가본 적도 없었다.[14] 엄밀히 말해 프로이센 왕국의 군국주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월경지가 많았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비롯되었고 튜튼 기사단, 동프로이센과는 관련이 없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프로이센 공국 출신 융커들을 가혹하게 탄압해서 씨를 말려버렸다.[15] 히틀러는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인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자기 입맛에 맞게 나치즘 사상에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