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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200> 짐바브웨 공화국 제2대 대통령 로버트 게이브리얼 무가베 Robert Gabriel Mugabe | |
<colcolor=#000000> 출생 | 1924년 2월 21일 |
남로디지아 식민지 쿠타마 (現 짐바브웨 서마쇼날랜드 주 쿠타마) | |
사망 | 2019년 9월 6일 (향년 95세)[1] |
싱가포르 글렌이글스 병원 | |
재임기간 | 초대 짐바브웨 총리 |
1980년 4월 18일 ~ 1987년 12월 31일 | |
제2대 짐바브웨 대통령 | |
1987년 12월 31일 – 2017년 11월 21일 | |
가족 | 아버지 가브리엘 마티비리(Gabriel Matibiri) 배우자 그레이스 무가베 (1996년 결혼) 슬하 4명 |
학력 | 쿠타마 칼리지 (교사 연수 과정 / 졸업)[2] 포트헤어 대학교 (역사학 · 영문학 / 학사) 남아프리카 대학교 (경영학 · 교육학 / 학사) 런던 대학교 국제 프로그램 (경제학 · 법학 / 학사) 런던 대학교 국제 프로그램 (경제학 · 법학 / 석사) |
신장 | 173cm, 78kg[3] |
종교 | 가톨릭 |
소속정당 |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 애국전선 (1987–2019)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1963–1987)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연합 (1961–1963) 국민민주당 (1960–1961)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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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4년, 90세 당시의 모습 |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독립운동가이면서 초대 총리(1980 ~ 1987)이기도 했다.
한때에는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잔혹한 학살과 초인플레이션을 위시한 경제 파탄, 사치 등으로 국가를 파탄내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 독재자로 전락한 인물로, 독재자가 된 영웅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2. 상세
앞서 말한 것처럼 한때는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짐바브웨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투사였고 집권 초기까지도 이러한 면모가 남아서 백인과 화합정책도 실시하고, 순조로운 경제성장을 보여주면서 짐바브웨의 문맹률을 10%대로 낮춰 아프리카 최저의 문맹률을 기록한 데다가 보건체계도 정비하는 등의 업적들도 남겼다.그러나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잔혹한 철권통치를 펼치는 것은 물론, 2000년대 중후반에 발생한 초인플레이션[4]은 전 세계에 짐바브웨의 이름을 안 좋은 면에서 널리 알렸으며, 그 이전에도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국민의 80%를 실업자로 만들면서 짐바브웨를 최빈국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고, 에이즈에 대한 무능한 대처로 환자를 2백만이 되도록 방치하면서 짐바브웨를 세계에서 가장 낮은 평균수명을 가진 나라에 소말리아를 뒤이은 취약국가지수 2위를 기록한 나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악행들 때문에 2009년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주말판 매거진 '퍼레이드'에서 선정한 독재자 순위에서 오마르 알 바시르(2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8위), 심지어 김정일(3위)[5]까지 모조리 제치고 당당히 세계 최악의 현직 독재자 1위에 선정되었을 정도였다.
당시 무가베의 무능을 비꼬는 한 만평에서는 짐바브웨 국민들에게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준 사람은 없다면서 자기를 대통령으로 다시 뽑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무가베의 모습을 그렸는데, 문제는 여기서 국민들에게 줬다고 하는 것이 10만% 인플레이션과 80%의 실업률, 그리고 국제적 고립이다.
3. 집권 전
1980년대의 무가베 |
현재는 전세계 최악의 독재자 중 하나이자 아프리카의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지만 젊었을 적의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로디지아 시절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지휘하여 백인정권을 패퇴시키고 백인정권에 신음하던 흑인들을 해방시키며 사실상 짐바브웨의 국부이자 흑인 독립운동의 대명사격 인물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던 인물로, 그 위상은 넬슨 만델라와 같은 위상이었다.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와 함께 독재자가 된 영웅의 대표적 사례.
무가베는 코사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나 자나키 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전 대통령, 키쿠유족 출신의 주술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케냐의 조모 케냐타 전 대통령 등 다른 남동아프리카 국가의 역대 지도자들과 다르게[6] 쇼나족 중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7]로,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목수였다고 한다. 부모는 프랑스에서 온 예수회 사제들의 영향을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무가베도 선교사들이 개척한 마을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사이가 벌어졌고, 선교마을에서 쫓겨나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8] 이렇게 방랑생활을 하면서 무가베의 형제 자매도 전염병으로 요절했지만, 다시 마을에 돌아와서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부모는 1934년에 이혼했지만, 어머니[9]는 무가베에게 수업료를 계속 내어줬고, 이렇게 무가베는 고향의 가톨릭 계열 사립 기숙 고등학교 쿠타마 칼리지에 1941년에 입학한 후 교사 연수 과정을 마치고 194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어릴 적의 무가베는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며, 독서를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라 '겁쟁이'라는 놀림까지 받을 정도였고, 가축을 돌보라고 할 때에면 '한 손에는 채찍을,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든'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후 정치와 무관한 교사로 일하던 무가베는 1949년 장학금을 받고 당시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근대화되어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포트헤어 대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된다. 똑똑하고 부지런했던 무가베는 남아공으로 유학을 와서 이곳에서 역사학 및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프리카 국민회의(ANC)에 가입하면서 반식민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1952년 고향으로 돌아와 찰림바나 사범대학(Chalimbana Teacher Training College)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교사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백인정권 아래서 아프리카인들이 신음하는 것을 인식한 그는 점점 과격해지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무가베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점점 과격해지던 무가베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투쟁에 나선다. 38세인 1960년부터 로디지아 백인정권에 맞서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64년 과격한 행동으로 인하여 넬슨 만델라처럼 10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어 1974년에 풀려났다. 그러나 무가베는 옥고를 치르던 1966년 12월에 겨우 3살밖에 안된 아들을 뇌염으로 잃었는데도 휴가 요청을 기각당해 장례식에 참여할 수도 없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거절당했을 때 그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연합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무가베는 평화적인 투쟁만으로는 독립을 얻을 수 없음을 느끼고 무장투쟁으로 전환했다.
감옥에서 무가베는 죄수 중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선생으로 포섭해 수감자들에게 기본적인 문해력, 수학, 영어를 가르치게 했는데, 이때 무가베는 오전에는 교장 역할을 했고, 오후에는 이전부터 다니던 원격대학 런던 대학교 국제 프로그램의 공부를 하면서, 그의 학구열은 수감 생활 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경제학 및 법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가 취득한 학위는 총 7개가 되었다. 이때 무가베는 런던에서 아내 샐리가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 필사해 전달해준 자료를 밤을 새워 공부했다고 한다. 또한 이런 학력 덕분에 후에 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지도자'로 불리게 되었다. 무가베의 학위 명단
무가베 자신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당시 공산정권이 들어서 있던 인접국 모잠비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짐바브웨의 게릴라 전쟁을 지휘한다. 이 당시 여러 공산국가들은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지원했고, 소련, 중국, 동유럽 각국, 북한까지도 무가베의 게릴라전을 지원했다. 물론 무가베는 군사지도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개별작전을 지휘하지는 않았다. 짐바브웨의 군부 실세들이 대부분 이 당시 무가베의 호소에 응해 게릴라전에 참전한 인물들이다. 쿠데타군을 이끈 필립 콘스탄티노 치웽가 대장도 이때 게릴라전에 참전한 인물. 부부 세습을 하려는 무가베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 하야를 압박했어도 상당히 예우를 갖춘 것은 다 이런 인연 때문이다.
수많은 흑인들이 무가베의 연설과 라디오 방송에 의한 호소에 응해 게릴라전에 참전하였고, 백인 정권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은 최소 3만 명의 사망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다. 백인정권은 무력에서 압도적으로 앞섰지만 머릿수가 딸렸기 때문에 도저히 이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1979년 백인정권은 손을 들고 말았고, 1979년 영국에서 랭커스터 하우스 합의가 발표되어 백인 정권은 항복하고 흑인에게 정권을 넘기겠다고 합의했다. 짐바브웨로 돌아온 무가베는 총선 운동을 하던 1980년 2월에 4일 간격으로 2차례나 있던 암살 기도를 피했으며, 2월 14일에 있던 총선에서 전국 투표의 63%를 차지하여 의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짐바브웨는 1980년 4월 18일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게 된다. 로디지아는 고국의 유적인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이름을 따와 '짐바브웨'로 국호를 바꿨으며, 무가베가 초대 총리를 맡아 실권을 가지게 되고 카난 바나나가 직함뿐인 대통령이 된다.
다만 독립 운동 당시의 무가베에게는 어두운 일면이 있었는데, 당시 무가베는 반 로디지아 정부 투쟁 당시 동맹 관계였던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ZAPU)과 연대할 때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배신을 일삼으며 지휘관들 중 일부를 감금했다고 한다.
독립국 짐바브웨의 총리가 된 무가베는 1982년에는 '솔즈베리'라는 이름을 가지던 짐바브웨의 수도를 하라레로 개명하고 제국주의 시절 유럽인들의 이름을 딴 공공시설들을 흑인 민족운동가들의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하라레 서부에는 독립 전쟁 중에 사망한 흑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국가영웅묘역[10]'을 만드는 등 무가베는 백인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무가베는 '이 정착민 해충을 우리 집에서 없애자'라는 과격한 연설을 하던 이전과는 달리 백인들을 달래기 위해 백인 공무원의 연금과 사유 재산을 보호하려고 했고, 로디지아 시절의 백인 장관들을 재등용하거나[11] 의회 20석은 자동으로 백인들에게 할당하는 등[12] 흑백화합정책을 벌여 '아프리카에서의 흑인에 의한 국가건설의 모델', '인종 화해를 수용한 흑인 영웅'으로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도 무가베를 '주목할 세계 지도자'로 꼽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무가베의 집권 초반에는 백인들의 삶이 로디지아 시절보다 오히려 증진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가베는 하루에 16시간이나 일하며 국정에 온 힘을 기울였는데, 일례로 무가베는 교사 출신이었던 경험을 살린 교육 정책을 실시해 독립 당시 2%에 불과하던 짐바브웨의 중고등학교 진학률이 1990년에는 70%에 달했으며, 비슷한 기간에 문해율은 45%에서 80%로 증가해 당시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문해율이 높은 국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짐바브웨의 보건 및 사회복지 정책은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고 짐바브웨는 남부 아프리카의 제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무가베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혜안이 있는 지도자'로 불렸다. 1987년엔 로디지아 정부-ZANU-ZAPU 3자가 합의한 랭카스터 협정을 깨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바나나를 몰아냈다.
대통령이 된 무가베는 헌법을 개정해 총리제를 폐지한 후 1987년 12월 30일자로 짐바브웨 대통령이 되어 명실상부한 권력자에 올랐다.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계엄령 선포권은 물론이고, 국회의원 1/5 선출권, 의회 해산권과 무제한 선거 출마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무가베는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 일당제를 원했지만, 1990년대 초반에 아프리카 등지의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나면서 이 계획을 '연기'하게 되었다.
4. 대통령 집권 이후
4.1. 경제 파탄
짐바브웨는 백인정권에서 벗어난 직후에는 가난한 후진국이었어도 자원 부국이자 풍부한 농업을 자랑했던 국가로, '아프리카의 빵 바구니'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무가베는 그런 기반을 가진 고국을 3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실질소득을 오히려 저하시킨 것은 물론, 최전성기(?)에는 그 어떠한 전란도 없이 취약국가지수를 소말리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만들어놨으며, 사실상 경제라는 개념이 소멸한 수준이었다. 무가베가 국제적으로 김정일도 능가한다는 말을 듣게 한 결정적인 원인.대통령이 된 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는 그럭저럭 경제를 운용해왔다지만 원자재에 국가경제를 많이 의존했던 경제구조 탓에 1인당 GDP는 600–1000달러대의 박스권에 머물고 있었고 80년대 성장률 추세도 1984년에 -1.9% 성장을 기록하는 등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않았으며, 특히 국가가 물가와 환율, 수출입을 전면 통제하는 통제경제 노선을 택한 탓에 변변한 경제성장 같은 건 이룩하지 못했다. 결국 1992년에는 -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90년대 후반에 외환보유고가 바닥나서 1990년대 말에 한국처럼 IMF에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50%에 육박하는 실업률, 가뭄으로 인한 농업 생산량 저하, 정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터지기 시작했으며, 또 콩고 내전에 개입해 막대한 전비까지 쏟아부으며 경제는 날로 갈수록 악화되어갔다. 그리하여 집권 초 2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짐바브웨인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무가베의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상황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무가베는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2000년에 토지개혁으로 소수인 백인 지주들의 농지를 몰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본래 짐바브웨의 토지 개혁은 1980년 독립 당시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계획되었으나 영국이 돈을 대주는 조건으로 매입 후 분배 방식으로 해줄 것을 요청해서 바뀌었는데, 그 영국이 태도를 바꿔 돈 못 대준다고 나선 통해 개혁이 지지부진했다. 그 상황에서 2000년에 무가베가 무상몰수 카드를 다시 뽑아든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영국의 분노를 샀으며,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직접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무가베는 내정간섭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이는 짐바브웨 국민들의 무가베에 대한 지지율을 더 높여주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1960년대에 영국인들이 짐바브웨로 이민가서 농장을 사서 합법적으로 정착한 것까지 압수하고 폭도들이 이러한 농장주를 살해했다고 반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민자들은 그전의 식민지 시절에 백인들이 거저 얻은 그 땅을 산 것이었다. 땅 뺏은 뒤 뺏은 땅을 합법적으로 구매한다고 해도 흑인들 입장에서는 뺏긴 땅인 건 여전하다. 한국인 입장에서 치환하면 일제강점기에 매국노, 조선귀족들이 일제로부터 하사받은 후 후손들에게도 상속받은 땅과 똑같거나 그 이상인 포지션인 만큼 짐바브웨 정부는 콧방귀도 안 뀌었다. 결국 (일부 백인 이민자는 빚까지 져가면서) 비싼 돈주고 산 농장은 죄다 거덜났다. 문제는 이렇게 강탈한 농장들이 농사를 모르는 흑인들에게 돌아갔다는 점이다. 백인 농장주들이 토지 독점은 심했어도 선진 농업 기술로 짐바브웨 농업을 지탱했는데 그게 다 0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나마 농부에게 분배된 경우는 좀 나았지만, 대부분은 농장의 장비조차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할 정도로 농업에 무지하여 짐바브웨의 농업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런 핸디캡을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토지 분배를 추진한 점에선 무가베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아예 소련처럼 강제로 트랙터 교육이라도 시켰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안 했던 것이다. 특히 무가베의 큰 잘못은 토지개혁 자체가 아니라 대책 없이 즉흥적으로 시행했다는 점과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 인기를 위해서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무가베 정권은 2008년에 외국 자본이 소유한 짐바브웨 기업들 중 5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소유한 기업은 주식 절반을 내국인(정확히는 토착 흑인 짐바브웨인)에게 양도하라고 지시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IEEA라고 부르는 법안을 발의한 것인데, 사실 짐바브웨가 아니더라도 FDI(외국인 직접 투자) 제한 자체는 많은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으며 당연히 그 적용 업종 범위 및 제한율은 국가마다 천차만별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를 완화하거나 강화하는 등 변화해가는 부분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우리나라도 옛날보다 훨씬 개방되긴 했으나 지금도 일부 업종에 대해 외국인 투자비율 50% 제한 등의 규제를 두고 있다. # 이러한 법을 만든 이유는 위의 백인 농장주 축출과 동일한 취지인데, 원래 짐바브웨에서 외국 자본이 크게 차지하는 부분은 사실상 농업과 광업 뿐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서술한 토지개혁으로 농업에서 외국 자본(백인 농장주)을 쫓아낸 다음, 이 법안으로 광업에서의 외국 자본들을 축출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짐바브웨 경제애 대한 불확실성을 크게 증가시켰다.
다만 이는 짐바브웨 경제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미 2002년부터 쭉 이어진 서방의 제재로 인해 외국 자본의 비율이 높지 않았을 뿐더러 위에서 말했다시피 사실상 광업을 타겟팅한 법안인데 대부분의 외국 광산 기업들은 이것으로 인해 철수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결국 토착민에게 지분을 양도했다. 물론 이를 따른 기업들도 외국 자본을 가져와서 신규 투자를 하기가 어렵게 되고 짐바브웨 자회사의 자산을 통한 재투자밖에 할 수 없게 되어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광업같은 업종은 일시적으로 많은 신규 투자(장비 구입 등)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여담으로 이 법의 시행도 개판이어서 법을 일관성 없이 적용하고, 주식 양도에 따른 보상금도 적절한 가치로 지불되지 않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위의 막장 정책들 중 짐바브웨 경제를 몰락시킨 가장 큰 원인은 토지개혁이다. 광업과 비슷하게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농업이 망해버렸기 때문에 농업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아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예 2000년엔 2백만 톤에 이르던 옥수수 수확량이 8년 만에 고작 45만 톤으로 감소했다. 당연히 외환보유고는 거덜났고 서방의 제재로 인해 지원도 끊겨 경제는 파탄이 났다.
그 결과 짐바브웨는 1999년부터 2008년까지 2001년(1.4%) 한 해를 제외하면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는데,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짐바브웨의 GDP는 68.58억 달러에서 44.16억 달러로 바뀌어 이전의 약 64.3% 수준으로 폭락했으며, 평균 경제성장률은 -4.3%에 달했다. 심지어 2003년에는 -17%, 2008년에는 -17.7%의 성장을 기록했다. 1인당 GDP도 동시기 기준으로 585달러(1999)에서 352달러 미만(2008)으로 떨어졌다.
당시 탄자니아, 부르키나파소, 동티모르, 말리가 600$대였고 기니비사우, 니제르, 토고, 르완다, 마다가스카르가 500$대, 라이베리아, 에리트레아, 미얀마, 네팔, 우간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시에라리온이 400$대였다. 심지어 383$를 기록한 말라위보다도 낮았다! 이 시기 짐바브웨보다 가난한 나라는 에티오피아(321$), 콩고민주공화국(318$), 부룬디(195$) 정도밖에 없었다. 소말리아는 1991~2012년 세계은행 통계가 없지만 통계가 잡혔으면 짐바브웨보다도 낮았을 것이다. 비공식적 추계로 2008년 소말리아의 1인당 GDP는 227$라고 한다.
사회도 파탄나 2004년에 짐바브웨 인구의 1/4인 300만 명이 삶의 개선을 위해 외국으로 이민했고, 2005년 기준으로 실업률은 80%에 육박하게 되었으며, 2009년에는 실업률이 무려 95%였다. 쉽게 말해 취업률이 고작 5% 미만이라는 말.
2007년 기준으로 빈곤율은 80%에 육박했다. 이 중 외국 이민은 심각해서 2007년 기준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학교사 80%가 짐바브웨인이었다. 또한 2008년엔 어린이들의 취학률은 겨우 20%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2008년 8월부터 1년간은 콜레라가 창궐해 98,000명 이상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는가 하면 1997년에 63세/54세였던 남성/여성 평균수명은 단 10년 만에 34세/36세로 줄어들었고, 관광 산업도 파탄났는데 밀렵은 더 늘어나서 환경까지 파괴되었다. 게다가 콜레라 사태 땐 무가베는 콜레라를 '영국이 개발한 생물무기'란 부적절한 말을 했고, 인권 탄압·경제 실책을 영국 및 미국 탓을 했다.
4.1.1. 무가베 시기 짐바브웨의 취약국가지수
무가베 때문에 경제가 한창 붕괴되었던 시기의 짐바브웨는 가히 역사에 남을 만한 수준의 취약국가지수를 기록했다.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9년 짐바브웨의 취약국가지수는 114.0점으로 전체 2위를 차지했는데, 1위인 소말리아의 취약국가지수는 114.7점이었다. 이는 비소말리아 국가의 취약국가지수 중에서는 114.5점을 기록한 2015년의 남수단[13]에 이어 단연 2위이고, 물론 전란을 겪지 않은 나라의 취약국가지수로는 압도적인 1등이다. 전란 없이 취약국가지수가 114점은커녕 105점을 넘긴 나라는 2006~2013년의 짐바브웨를 제외하면 기니(2009)[14], 아이티(2013, 2016, 2017)[15] 정도밖에 없고, 이들 중 최고점인 2013년 아이티(105.8점)도 최암흑기 짐바브웨의 기록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며, 당연히 전란 없이 취약국가지수가 110점 이상의 '매우 높은 위험'으로 분류되었던 나라는 2007~2010년의 짐바브웨를 제외하면 전혀 없다. 게다가 전란을 전혀 겪지 않았던 짐바브웨의 특성상 관점에 따라서는 최암흑기의 짐바브웨가 최암흑기의 소말리아, 수단[16], 남수단[17]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덤으로 취약국가지수 역대 최고점은 2012년에 소말리아가 기록한 114.9점이었고, 2009년으로부터 15년 후인 2024년 기준으로 취약국가지수 1위인 소말리아가 111.3점에 불과(?)하며, 예멘 내전으로 취약국가지수 1위를 4번(2019 ~ 2022)이나 차지했던 예멘의 역대 최고점이 113.5점(2019)이고, 취약국가지수 2위를 차지했던 다른 나라들은 짐바브웨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내전을 겪고 있거나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나라인 데다가 취약국가지수가 114점 이상을 기록했던 나라는 소말리아(2008, 2009, 2010, 2012, 2015, 2016)[18], 남수단(2015), 그리고 짐바브웨(2009) 이렇게 3개국밖에 없으며, 심지어는 113점 이상을 기록한 나라도 수단(2007~2008), 소말리아(2008~2018[19]), 짐바브웨(2009), 차드(2010)[20], 남수단(2015~2018), 예멘(2019)이 전부다. 또 대표적인 파탄국가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이 취약국가지수 3위권 안에 들어간 적이 없고[21], 시리아 내전으로 유명한 시리아마저 1위는커녕 2위는 아예 기록한 적이 없을뿐더러 3위를 2번(2021, 2022) 기록하는 정도에 그쳤다는 것을 보면[22] 최암흑기 짐바브웨의 실태가 그야말로 '총 없는 내전' 수준이자 최암흑기의 아프가니스탄, 시리아도 능가하는 생지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가베 시기 짐바브웨의 연도별 취약국가지수 순위와 점수는 다음과 같다.
2005년 | 15위(94.9점) |
2006년 | 5위(108.9점) |
2007년 | 4위(110.1점) |
2008년 | 3위(112.5점) |
2009년 | 2위(114.0점) |
2010년 | 4위(110.2점) |
2011년 | 6위(107.2점) |
2012년 | 5위(106.3점) |
2013년 | 10위(105.2점) |
2014년 | 11위(102.8점) |
2015년 | 16위(100.0점) |
2016년 | 16위(100.5점) |
2017년 | 13위(101.6점) |
2018년[23] | 10위(102.3점) |
짐바브웨를 제외하면 전란의 영향 없이 대규모 경제파탄에 시달린 나라는 북한[24], 베네수엘라[25]밖에 없으며, 짐바브웨도 능가하는 경제 파탄을 보여주었던 자이르(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26]와 독립 초기의 몰도바[27]조차 경제 파탄에 있어서 전란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28]
4.1.2. 기록적인 초인플레이션
이코노미스트에서 보인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율. 짐바브웨가 2008년 4분기에만 7.3×1022% 폭등했다고 나온다. 기사 |
무가베 치하의 짐바브웨는 상상을 초월하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유명한데, 그 이전에도 무가베의 폭정과 경제 파탄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편이었지만 이 기록적인 물가 상승으로 무가베는 국제적으로 엄청나게 (나쁜 의미로) 유명세를 탔다.
짐바브웨는 이미 농업도 망하고, 기업도 망하고, 자본은 해외로 빠져 나가고 하다보니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수가 부족해진 상황이었지만, 경제개념이 전혀 없던 무가베는 오히려 돈 찍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짐바브웨 달러를 마구 찍어서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어이없는 짓거리를 했다. 그리고 짐바브웨 경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붕괴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펭괴에 버금갈 정도의, 2008년 들어 세계 인플레율 2위[29]라는 기록까지 가지게 된 초인플레이션은 그나마 남아있던 지지층도 없애 오히려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하게 되어 전 세계에 짐바브웨와 무가베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8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해 1인당 소득이 40% 폭락한 시기와 겹쳐진 것이다.
이 당시 짐바브웨의 화폐는 같은 크기, 같은 재질, 같은 두께의 아무것도 인쇄가 안된 종이보다도 가치가 떨어졌으며, 때문에 짐바브웨 달러는 북한 원과 같이 절대로 위조지폐를 만들지 않는 화폐의 양대산맥이 되었다. 이는 도저히 위조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해서가 아니라 위조지폐를 만드는 노력과 비용이 화폐액면가보다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30]
초인플레이션을 어떻게든이라도 막기 위해 정부가 고정가격제를 실시하자 모든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았으며, 짐바브웨의 경제는 문자 그대로 물물교환 체제가 되었다. 실제로 이발소를 운영하던 한 한국인 교민의 말로는 가게의 하루 거래액이 단순 금액으로 한국 정부의 10년 예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하며, 짐바브웨에 살던 외국인들과 대사들은 생필품 구매를 위해 짐바브웨 대신 이웃나라에 가서 물건을 잔뜩 사가며 겨우 연명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실제로 중앙은행, 금융기관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공식 환율로 짐바브웨 달러를 미국 달러로 바꿀 수 있어서 미화 100달러를 가지고 짐바브웨 달러로 바꾼 뒤 이를 다시 은행에서 미국 달러로 환전하는 것을 반복하여 1백만 달러를 얻어낸 사람과 단돈 500달러로 벤츠를 산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런 탓인지 무가베는 2008년 대선 때 모건 창기라이(Morgan Richard Tsvangirai, 1952~2018)[31]에게 1차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과가 나왔다(창기라이 47.9% vs 무가베 43.2%). 이렇게 되자 무가베는 온갖 수단을 사용해 창기라이를 괴롭혀서 2차 선거를 방해했고 견디다못한 창기라이가 선거 보이콧을 선언해 2차 선거에서 88.5%로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가 비판을 퍼붓고 국내외의 여론이 안 좋아지자 결국 무가베도 창기라이와 타협을 시도해 헌법을 개정하여 폐지되었던 총리직을 부활시키고 2009년 2월 11일에 창기라이를 총리에 앉히며 거국정부를 형성했고,[32] 총리가 된 창기라이는 외국환 도입 정책을 펼쳤고, 짐바브웨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의 상흔에서 그제서야 회복했다. 하지만 여진히 문제는 많았으며 고질적인 정부재정의 부족은 여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짐바브웨 달러와 같이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경제 파탄을 이끌어낸 무능한 독재자였던 무가베는 전술한 것처럼 런던 대학교 국제 프로그램 경제학 학사 및 석사 출신이었다. 즉, 런던 대학교의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유럽의 최상위권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경제적 식견이 뛰어남을 의미하는데, 이런 엘리트의 성과물이 무려 짐바브웨 달러와 전란 하나 없이 소말리아에 버금갔던 취약국가지수인 셈이다.
4.2. 독재 행각
짐바브웨 주요 야당인사 체포 현황 |
무가베의 야당과 언론 탄압, 고문을 동원한 폭정은 매우 가혹했는데, 김정일을 누르고 세계의 독재자 랭킹 1위에까지 들어간 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시 무가베를 지지하던 짐바브웨의 국민들은 무가베의 갑작스런 돌변과 국정 파탄에 당혹해하며 무가베에 대한 연민까지 느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학교에서 쓰이는 역사 교과서를 직접 저술했는데, 비록 소위 김부자 교과서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날조 내용들을 만들어내거나 없는 전공을 날조하는 등의 내용은 없어도 이 교과서에는 "여당인 ZANU당은 진정한 흑인들의 정당이며 야당인 MDC는 백인의 꼭두각시 정당이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물론 무가베는 자기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가두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4.2.1. 무자비한 고문과 가혹 행위
짐바브웨의 고문은 세계에서 굉장히 잔인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잔인성으로 따지면 북한, 이란에 절대로 뒤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다. 실제로 고문당한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떤 짐바브웨인은 경찰이 자신을 고문실로 끌고 가서 갈고리에 걸린 채로 며칠 동안을 매달려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갈고리에 입을 걸거나 입을 날카로운 물질을 이용해서 인중이 찢어져버린 사람도 있었다. 특히 고문실로 끌려간 피해자들은 고문관들이 채찍으로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후려쳤으며 등과 온몸에 엄청나게 많은 상처가 날 정도로 채찍을 후려쳐서 땅에 피가 철철 흐를 정도가 되었고 결국 과다출혈로 숨진 사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엉덩이를 몽둥이와 여러가지 각목 등을 비롯한 온갖 흉기들로 때려서 그 부위가 피멍이 들었고 후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그 부위가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서 잘라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이외에도 의도적으로 욕창이 생기게 만들어서 피해자들의 살이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고문도 있었고, 음식을 주지 않고 굶어 죽게 만들거나 사람을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여버리는 방법, 피해자에게 정체불명의 화학 물질을 바르는 방법도 있었으며, 극악무도한 물고문과 전기고문도 존재했고, 심지어 사람의 살을 조금씩 조금씩 고통스럽게 잘라낸 인육을 먹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짐바브웨 교도소에서의 가혹 행위의 예시를 들자면,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구속된 어느 미국인은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방에서 나체인 상태로 침대에 연결된 철제 족쇄에 다리가 묶인 상태로 감금되었고, 한 여자는 척추와 목뼈에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서 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참혹하게 사망했으며, 심지어 어떤 아이는 무자비한 구타 끝에 결국 눈이 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문을 명령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무가베였다.
실제로 무가베 시절 짐바브웨에는 죄 없는 사람들이 조작된 혐의로 수감된 경우가 많았으며, 짐바브웨의 교도소에서는 하루에 평균적으로 30명이 죽어나갈 정도로 환경도 열악했고, 수감자들의 시체는 매장되지도 못한 채 교도소에 방치되었다가 무연고 시체가 늘면 한데 모아 암매장되었다. 당시 짐바브웨 교도소의 사진(열람주의)을 보면 뼈만 남은 죄수들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
이 자료에 의하면 2011년 2월 19일에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국제사회주의조직(ISO)의 모임이 열렸는데, 갑자기 짐바브웨 경찰이 이 모임에 들이닥쳐서 참여자들을 체포했다. 경찰이 참가자들을 잡아간 이유는 이들이 이집트와 튀니지의 혁명에 관해 토론했으며, HIV 활동가이자 국제사회주의조직 회원인 네비게이터 문고니의 사망을 추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임에 참석한 45명이 짐바브웨 감옥에 갇혔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피고인인 호프웰 검보는 "우리에게 육체적 체벌이 가해졌다. 나는 코가 깨졌다"고 말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때린 도구와 맞은 부위에 따라 다양한 부상을 당했다", "에이즈 감염자를 포함해 우리에 대한 약이나 치료도 차단됐다"고 증언했으며 함께 수감되었던 모임의 참석자 중 하나였던 데이비드 음팟시는 이런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영국 BBC 방송은 2011년 8월 8일에 짐바브웨의 마랑게(Marange) 다이아몬드 광산 주변에서 짐바브웨의 군과 경찰이 고문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에 따르면 이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에게 무자비한 구타와 성폭행은 물론 개에 의한 무자비한 공격까지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마랑게에 있는 고문 수용소 운영은 무가베의 친구가 맡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고문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돈이 없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엄청난 금액의 돈을 요구하거나 광부들에게 채찍질을 포함한 고문 등을 통해서 강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고 한다. 고문으로 인해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한 포로가 증언하기를 "그들이 아침에 40번, 오후에 40번, 저녁에도 40번씩 채찍질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피해자도 "가끔 광부들이 두들겨 맞아서 걷지 못하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BBC 방송은 "우리가 확보한 가장 최근의 희생자는 2월에 발생했고, 고문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고, 또 고문 수용소에 관한 증거를 짐바브웨 정부에 보냈지만 BBC 방송은 정부로부터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고 방송을 내보냈다.
4.2.2. 백인 탄압&중구난방 토지개혁
사실 90년대까지 무가베는 백인과의 화합 정책을 펼쳤지만, 2000년 2월부터 무가베는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했으며 백인에 대한 공공연한 인종차별과 복수를 선동했다.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독일, 더 나아가 유럽을 좀먹는 악마로 규정해 유대인 대학살을 일으키고,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무가베 역시 짐바브웨 내부의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적을 필요로 했다. 1980년대 초의 구쿠라훈디 대학살에서는 그 타깃이 은데벨레족이었고, 2000년대에는 백인으로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사실 백인들이 흑인들의 증오를 받던 데에는 백인들이 독립한 짐바브웨의 경제 기득권을 독점했던 것도 있었다. 토지개혁 이전까지는 백인 농장이 짐바브웨 노동력의 40% 이상을 고용했고, 2000년 기준 짐바브웨의 1인당 GDP는 591달러였으나 인구의 0.6%에 불과한[33] 백인의 1인당 소득은 1만 달러 정도였을 정도였다. # 동시기 기준 이들은 짐바브웨에 있는 비옥한 토지의 무려 70%를 독점했다. # 심지어 1975년 기준 1인당 GDP가 717달러였던 로디지아의 흑인 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연 480달러[34]만 벌었으나 백인들은 평균적으로 연 8000달러[35]를 벌었고, 독립 이전의 1978년 짐바브웨의 농업 생산의 90%를 백인 농장이 생산했다고 한다.
무가베가 독립 후에도 이렇게나 무소불위의 경제권력을 휘두르던 백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흑인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자 물론 백인들도 반발하여 민병대를 조직해서 대항했다. 이에 무가베는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해 백인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하며 집을 불태워서 나가게 만들었고, 심한 경우에는 반항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백인들에게서 빼앗은 농장은 1400만 헥타르(140,000㎢)[36]에 달했으며, 이렇게 빼앗은 농장들은 무가베(15개), 부통령(13개) 등 고위층들에게 집중적으로 분배되었다.
이 유혈사태에는 여당의 열성당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제5여단 출신 군인들도 참여했으며, 심지어 구쿠라훈디 학살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페란스 시리 공군 사령관이 추가 군인을 보내기도 했다. 또 대법원에 보호를 신청한 농장들이 최우선적인 습격 대상이었으며,[37] 반대로 무가베에 우호적인 농장들은 습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무가베는 "아프리카의 자원은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가 아닌 아프리카인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며 아프리카 국가들과 서구 유럽 국가들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기도 했다. 무가베 정부가 이러한 경찰과 민병대들의 학살을 방조하면서 1980년대 초반 무가베 집권 후 백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농장,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리하여 백인 민병대와 흑인 경찰과 폭력배 간의 무수히 많은 유혈 사태들이 발생했다. 증언에 의하면 백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가서 나중에 풀려나서 국외 추방될 때까지 강제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호명되는 사람들은 무자비한 채찍질을 당했고 흑인들은 인종정화를 명목으로 백인 처녀들과 소녀들을 강간하고 임신시켜 흑백 혼혈아를 출산시켰다. 실제로 2006년까지 60명의 백인 농부들이 흑인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토지개혁 전까지 5천 명에 달했던 백인 농장주들 중 2008년까지 짐바브웨에 남은 사람은 단 280명이었다.
2000년 3월에 짐바브웨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흑인들의 토지 침공이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리자,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사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대법원장을 포함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판사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판사들을 앉힌 후 2001년 11월에는 '짐바브웨에서 거의 모든 백인 소유 농장을 보상 없이 몰수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무가베는 흑인 100퍼센트에 가까운 국가가 되었다, 백인 농장을 모두 환수할 때 비로소 혁명이 완수되는 것이라는 망언을 남기면서 만족했고, '참전군인'들이 백인 농부들의 토지를 폭력으로 강탈한 것을 옹호했다.[38]
그러나 이 토지개혁 정책으로 가장 크게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백인들이 아니라 바로 짐바브웨 흑인들이였는데 짐바브웨에서 사는 백인들이 알고 보면 짐바브웨 경제의 핵심축이었기 때문이다. 짐바브웨의 비옥한 토지에서 자라는 작물 대다수가 백인들의 땅에서 난 거였으며 그렇게 비옥한 땅에서 자란 농산물이 짐바브웨 GDP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나 다를 바 없던 퇴역군인들의 급여를 마련하겠다고 해도 약속은 커녕 급여랑 땅 모두 퇴역군인들이 아닌 무가베랑 그의 정치인들의 손아귀로 들어갔으며 더군다나 백인들을 쫒아내서 땅을 확보했다 해도 농업기술에 숙달해 있던 백인들과는 달리 아무런 지식도 능력도 재산도 없던 흑인들이 차지하자 농수산물을 생산할 수가 없어 생산율이 폭락하기 시작했다.[39] 그 영향으로 짐바브웨에서는 백인 농장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합해 총 200만 명이 무일푼이 되어 그 중 40만 명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농장 대다수, 그것도 가장 좋은 농장들은 무가베와 그 동료들이 독점하면서 토지개혁이 말로만 납득 가능한 명분을 내세웠지 실질 목적은 자신들의 재산을 축적하기 위함이 아니었냐는 의심까지 들게 만들게 되며 토지개혁의 명분까지 철저히 훼손된 것은 덤이고. 사실상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운 정도가 아닌, 호랑이떼 잡겠다고 산골마을에다 불지른 격이 되어버렸다.
또한 이러한 억압과 백인 학살이 세상에 알려지자 유엔과 국제 지원단체들의 지원마저 중단되고[40] 서방권 국가 사이에서 짐바브웨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가 들어가자 짐바브웨의 경제상황도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41] 결국 후임인 에머슨 음낭가과는 본인도 독립운동가+백인 농장주에 의한 피해자 출신인데도 토지개혁으로 야기된 문제를 수습한다며 백인 농장주들에게 굴종적이다 싶은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그 이전에도 짐바브웨의 백인 인구는 과거 대비 대폭 준 상황이었다. 1975~1976년에는 30만 명[42], 1980년 22만 명이었던 백인들은 독립 후 백인들이 기존까지 누려왔던 특권을 잃으며 당시까지 로디지아에 살던 백인 중 무려 2/3가 짐바브웨를 떠났고, 1985년에는 5년 전의 절반 미만인 10만 명이 되었으며,[43] 2002년에는 47,000명, 2012년에는 29,000명이 되었다. 무가베 축출 후인 2022년에는 에머슨 음낭가과의 친백인 정책에 힘입어 34,000명으로 늘었다.
이후 무가베는 2014년 9월 5일에도 모든 백인 짐바브웨인들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며, 흑인 짐바브웨인들에게 "백인 농부에게 농지를 임대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4.2.3. 2008년 총선에서의 폭력 사태
2008년 총선 이전에 투표 제도는 무가베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먼저, 300만 명의 재외국민은 외교관을 제외하고는 투표 참여가 금지되었고, 선거인 명부에는 120세인 유권자가 등록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유권자 550만 명 중 1/3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데다가, 무가베에게 유리한 선거구에는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난 가공의 유권자들이 여러 명씩이나 생겼다고 한다.2008년 있던 총선에서는 3월 29일 1차 투표로 4명 중 무가베와 경쟁자인 모건 창기라이가 당선되었고, 6월 27일 있던 결선 투표에서는 창기라이가 후술할 이유로 사퇴했지만 무가베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선 투표를 진행했으며, 그 결과 선거는 당시 현직이었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85.5%로 압승했다. 그렇지만 이 투표는 국제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조차 이 선거를 비난할 정도였다. 참고자료
이 선거 당시 언론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사위원회의 일원으로 짐바브웨에 비밀리에 입국해 몇 년을 지냈던 미국의 칼럼니스트 클레어런스 페이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자신은 짐바브웨의 경찰에게 체포될까봐 두려워서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로버트 무가베가 외국 언론인들에게 비자 발급을 중단했기 때문이였다고 한다. 비자 발급이 중단된 이후 짐바브웨에서는 무가베를 지지하지 않는 야당 인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과 언론들에 대한 폭력행위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짐바브웨 시민들은 경찰이나 깡패들의 폭력을 두려워하여 잠을 자는 것조차 두렵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며, 그들에게 사망한 짐바브웨인들의 명단은 짐바브웨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클리어런스 페이지는 증언했다.
이 선거 당시에 짐바브웨에서 폭력으로 사망한 사망자 명단은 무가베에 반대하는 야당이 작성하여 국제 언론매체에 제공했고, 시카고 트리뷴의 아프리카 특파원이 보도했다. 이 보도 내용에 따르면 무가베에 반대했던 한 남자는 자기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다른 남자는 자기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폭력배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런 식으로 정부에 표적으로 찍힌 한 남편에 대한 경고로 부인이 강간살해되기도 했으며 사람들을 소리소문없이 데리고 가서 무시무시한 고문을 하거나 살해하며 온갖 협박을 가하거나 반대파들의 아내에게 집단 성폭행을 가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무가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 거기다가 2008년 4월 25일에는 야당인 MDC 본부가 경찰에게 습격을 당해 한 번에 215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1차 투표 이후 수도 하라레에서 열릴 예정이던 창기라이 총재의 유세는 무가베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병대원 1천여 명이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하며, 군 정보기관이 개입하여 주도한 모건 창기라이 암살 음모까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2008년 선거에서는 무가베의 온갖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야당지도자인 창기라이가 결선투표에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였지만, 창기라이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가해지는 무가베의 폭력행위들을 중지시키기 위해 선거에서 기권했다. 이렇게 2008년 6월 27일 무가베는 85.5%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다시 당선된다.
이런 식의 폭력배와 경찰을 이용한 방법으로 결선 투표 과정에서는 고작 하루 만에 확인된 사람만 80여 명 이상이 살해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고문당하거나 협박당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여러 뉴스들을 보면 무가베 지지자들이 야당 인사들에 대한 공격을 자행해서 단 3달 동안 최소 153명을 살해하고 5,000명을 고문하고 구타하는 탄압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무가베는 죽은 사람을 유권자로 등록해 자기 표로 만들고, 여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식량 배급을 중단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했다.
게다가 재당선 직후인 2008년 8월부터는 콜레라가 짐바브웨에 확산되어 3,800여 명이 숨졌으며, 전술하듯 '모든 물자의 물가가 30분마다 올랐다는' 초인플레이션과 80%에 달하는 실업률, '짐바브웨에서 편히 잠을 자는 사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국민들은 도탄해 빠졌음에도 무가베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오로지 선거 테러에만 골몰했다. 그때 당시 84세였던 무가베는 젊었을 적의 위대한 면모는 눈 씻고 봐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국민의 생명과 자유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고 권력에만 집착하는 미치광이 독재자로 변해 있었다.[44]
이 폭력 사태는 같은 해에 있던 초인플레이션과 함께 무가베의 악명을 높였고, 2009년에 김정일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로 선정된 것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사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에도 무가베는 선거가 시작되기 전과 선거가 끝난 후에 자신을 찍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자신의 반대파들에 대한 유혈 사태를 저질렀는데, 당시 선거 무렵에는 언론인과 변호사가 반무가베 인사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구금, 구타, 고문, 협박을 당한 것은 물론 야당 의원 48명을 포함한 533명이 불법적으로 체포되는 등 유혈사태가 발생해 짐바브웨는 영연방에서 1년 동안 자격이 정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어도 100만 단위의 유령 유권자가 등록되기도 했으며, 1990년과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광범위한 부정선거와 입법권, 사법권 남용, 준군사 조직을 동원한 야당 위협이 동원되기도 하는 등 무가베는 부정선거로 자신의 권력을 연장해 37년이나 집권할 수 있었다.
4.2.4. 소년병 양성
심지어 BBC에서 2004년 2월 29일에 방영한 "수용소의 비밀(Secrets of the Camps)"이라는 방송에 의하면 무가베는 지난 2001년 11월부터 전국에서 납치해온 10세 이상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1만 8천여 명을 수용한 뒤 고문방법과 살인기술을 훈련시키는 시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방송에 따르면 이 시설에서는 어린이들을 술과 마약에 중독시켜 인지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뒤 살인 기술과 고문 방법을 가르쳤고, 심지어 이들이 여성일 경우에는 아무리 11살 소녀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훈련의 일부라며 성폭행까지 가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것을 거쳐간 아이들은 매우 큰 고통을 받고 고국을 떠나는 경우까지 있었는데, 심지어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의 경험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밑에 나온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에서 목숨을 걸다시피한 증언을 한 아이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살인기술을 배운 대니얼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한 손에 곰인형을 든 채 사람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방법을 배웠다, 다음 단계는 전기고문이고 그 다음 단계는 물고문을 하는 것"이라고 목숨을 걸다시피 한 증언을 했고, 당시 수용소에서 고문당한 죠셉이란 소년이 증언하기를 자신과 같은 어린이들이 자신을 기둥에 묶고 자신의 성기에 전기자극을 가했으며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죠셉은 신경계가 마비되고 말았다고 한다. 거기에 베드로라는 소년은 다른 곳에서 온 군인들이 소년들에게 소녀들과 성행위를 해야 한다는 지시를 했고, 소년들은 구타를 당한 후 강제로 소녀들을 강간해야 했다는 증언도 남겼다.
심지어 무가베 본인도 이 수용소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으며, 무가베는 그의 정부측에서 '생활 기술 훈련 및 리더십 개발로 국가 건설을 위해 청소년을 변화시키고 권한을 부여하는 곳'이라 말하는 '국립 청소년 서비스(National Youth Service)' 캠프가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며 곧 모든 청소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송에 따르면 짐바브웨에는 이런 수용소가 선거철에는 전국에 수백여 곳이나 생겼다고 하며, 이 곳을 거쳐간 어린이들은 총 5만 명이 넘었다고 하고, 수용소 관리는 무가베와 독립전쟁에서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45]이 맡는다고 한다.
거기다가 2002년에는 짐바브웨 정부가 이 수용소에 지원하는 금액을 2배로 늘렸는데, 수용소의 한 관계자 말로는 이렇게 지원금이 증가한 이유는 "내년에 총선이 있기 때문에 여당을 지원하는 행동대가 필요해서"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무가베는 "짐바브웨를 젊은이의 국가로 만들겠다"며 "11세에서 30세 정도의 인구가 이 나라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짐바브웨 정부도 이 수용소의 비인간성을 인지했는지[46] 이 다큐멘터리에 대해 '짐바브웨 정부는 마피아가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근거 없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며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들을 전면 부인했지만, 2007년 5월 24일에는 여당 의원들마저 이 '국립 청소년 서비스 캠프'의 환경에 기겁했다는 뉴스가 나오며 BBC의 보도는 기정사실화되었다.
이후 이 '국립 청소년 서비스 캠프'는 2007년에 만성적인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으며, 그동안 전국의 약 150개의 캠프에서 8만 명[47]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사실상의 군사 훈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이렇게 훈련받은 청소년들은 무가베의 친위대격인 민병대로 자리잡아 '참전군인'으로 위장당한 채 백인들의 농장 약탈과 선거철의 폭력 행위 등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이 캠프에 소속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여당인 ZANU-PF의 캠페인 자료와 무가베의 연설문 선집을 교육받았으며, 야당이 백인 통치로의 복귀를 모색한다는 흑색선전도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무가베는 2015년에 이 프로그램의 재도입을 촉구하며 '강제 국가 청년 봉사 훈련' 도입 계획을 강조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무가베 사후인 2021년 4월에 다시 부활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이 프로그램은 주로 보안 부문과 여당을 위한 기반을 제공할 것으로 예측된다. 참고자료
4.2.5. 정적 숙청
무가베가 자행하는 정적에 대한 숙청은 아주 악명이 자자했다. 2014년 3월에는 짐바브웨의 언론인이며 인권운동가인 이타이 자마라가 번호판이 없는 차에 실려서 납치된 이래 행방불명되었는데 사실상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또한 에드워드 친도리 치닝가 전 ZANU PF 광업위원회 의장은 마랑게 다이아몬드 광산과 관련한 부정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운전을 하던 도중 의문사했다. 짐바브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교통사고지만, 짐바브웨 야당 정치인들은 그가 운전 중에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고 주장했다고 하며, 실제로 친도리 치닝가는 사망한 지 고작 24시간도 안 돼서 부검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황급히 매장되었다. 짐바브웨 국회의원인의 크로스는 치닝가가 그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로부터 10일 후에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무가베는 자신의 당 내에 있는 핵심 인물들조차도 정권에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면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숙청했다. 전직 육군 참모총장이던 솔로몬 무주루[48]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며 무가베와 함께 짐바브웨 독립전쟁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지만 2011년 8월 15일에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아 사망했는데, 무주루가 자신의 농장에 도착하자 괴한들이 그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지시한 뒤 총을 쏴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괴한들은 무주류의 시신을 침대 위에 옮기고 폭발물을 설치한 뒤 집에 불을 지르는 만행까지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이뤄진 조사에서 증인들은 무주루의 집에 불이 나기 전 총성을 몇 번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짐바브웨 법원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으며 그의 시신을 찾아달라는 유가족의 요구를 거부했다.
4.3. 소수자 탄압
4.3.1. 빈민촌 강제 철거
2005년 3월 31일의 총선 직후에 무가베는 빈민들이 야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수도 정화'를 명목삼아 '쓰레기 이동 작전'이라는 뜻의 무람바츠비나 작전(Operation Murambatsvina)을 실시해 빈민가를 강제로 불도저를 동원해 철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집을 잃은 빈민들은 짐바브웨 당국이 인정한 사람만 12만 명에 달했고, UN은 70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추측했으며,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무려 당시 짐바브웨 인구의 1/5에 달하던 24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빈민가들의 철거 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철거 후 사진은 원산 폭격 후 원산이 연상될 정도로 참혹하며, 당시 짐바브웨인들도 이 작전을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과 빗대어 '짐바브웨의 쓰나미'라고 불렀다고 한다.4.3.2. 성소수자 탄압
호모포비아였던 무가베는 동성애가 ‘비아프리카적인 현상'이며 "동성애자들이 지옥에 갈 것이고 동성애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개나 돼지, 염소, 조류만도 못하다"고 주장하면서 "짐바브웨는 어린이들이 하나님이 정한 결혼제도에 대한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성장하도록 하지 않겠다"고 덧붙이면서 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중국은 동성애를 허용하라고 압박하지 않아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무가베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성애자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2014년에는 약 1,40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짐바브웨에 게이, 레즈비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고 "동성애자들을 소탕"하고 싶어하는 무가베는 이후 법을 바꿔서 성소수자에 대한 법이 더욱 가혹해졌다.무가베는 2014년 무가베의 외동딸[49]인 보나의 결혼식에서 "나는 우리나라(짐바브웨)에 동성애자 집단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그저께 그 얘기를 듣게 됐다. 따라서 누가 이 집단에 속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짐바브웨 동성애자 단체는 대통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활동을 이어 오고 있지만 무가베는 성소수자들의 목을 자를 것이라고 그들을 주기적으로 협박하고 있다. 실제로 짐바브웨의 전직 대통령인 카난 바나나(양성애자)가 재직 중에 남자직원들과 성적 관계를 가진 혐의로 기소되는 등 동성애자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나이지리아와 우간다에서 새로 제정된 반동성애법들에 대해 무가베는 마음에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가베는 새로운 반동성애법에 서명한 나이지리아와 우간다 대통령들을 칭찬하면서 "서방은 이것이 인권 침해라고 말한다.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이 최근에 한 일 말이다. 남자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결혼한다면 인권은 보장된다. 하지만 남자가 남자와 결혼한다면 우리는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계속 추방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이러한 그의 동성애 탄압과 폭압 정치 때문에 런던에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1999년 10월경에 무가베는 비공식적으로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영국 외무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무가베는 쇼핑을 목적으로 일주일 전쯤에 영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사치 생활을 하러 갔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99년 10월 30일 런던의 버킹엄 게이트에 있는 크라우네 프라자 호텔 앞으로 들어오는 무가베의 승용차에 3명의 남자가 갑자기 뛰어들었고, 동성애자 단체 회원인 이들 중 2명이 차를 가로막자, 피터 타첼(Peter Tatchel)이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승용차 문을 연 타첼은 경호원을 밀치며 무가베의 팔을 잡은 뒤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무가베, 당신을 고문 혐의로 체포한다. 고문은 국제법상 범죄 행위다." 이 회원들은 승용차에 뛰어들면서 "무가베, 동성애자를 모욕하지 마라"라는 현수막도 들고 있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ghFWos-ELjw 영국 경찰이 도착하자 타첼은 유엔의 반고문 조약 등을 보여주며 무가베를 체포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타첼과 동료들을 체포했고, 풀려난 무가베는 그날 저녁 귀국해버렸다. 피터 타첼 일행은 “우리는 인권 억압자에 대한 시민의 체포를 연출해 볼 생각이었다"며 무가베가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겨온 것은 물론, 최근 2명의 언론인을 고문하는 등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타첼은 "특히 국민들은 굶주리는데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외국에 나와 사치품을 사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며 무가베를 비판했다.
4.4. 은데벨레족에 대한 학살 - 구쿠라훈디(Gukurahu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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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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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 ||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 |||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동대학살 ,1923, | 발생 위치 일본 제국 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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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1937, | 발생 위치 일본군 점령하 중화민국 난징시 | ||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도미니카 공화국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 |||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크로아티아 독립국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관련 단체 체트니크 | |||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알제리 학살 ,1954 ~ 1962, | 발생 위치 프랑스령 알제리 전역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과테말라 | ||
문화대혁명 ,1966 ~ 1976,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전역 | 영국령 홍콩 | ||
난쟁이 수용소 ,1970 ~ , | 발생 위치 북한 전역 | ||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 발생 위치 동파키스탄 | ||
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부룬디 | ||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우간다 | ||
관련 인물 이디 아민 | |||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민주 캄푸치아 | ||
재판 ECCC | |||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 |||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 |||
수용소 뚜올쓸라엥 | |||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짐바브웨 | ||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 |||
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이라크 쿠르디스탄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 |||
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 ||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 |||
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 |||
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르완다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관련 단체 후투족 민병대 (Interahamwe | Impuzamugambi) | |||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 발생 위치 자이르 키부 | ||
파룬궁 학살 ,1999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전역 | ||
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 ||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 |||
야지디 학살 ,2014 ~ 2019, | 발생 위치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 ||
관련 단체 ISIL | |||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 발생 위치 미얀마 라카인주 | ||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 ,2023 ~ , | 발생 위치 이스라엘 전역 | ||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또한 1983년 1월 3일부터 1987년 12월 22일까지 무가베와 무가베의 반대파 지도자인 조슈아 은코모(Joshua Nkomo, 1917~1999)가 합의할 때까지 무가베는 거의 5년 동안 북한에서 훈련받고 북한이 제공한 무기를 사용하는 짐바브웨 국군의 보병여단인 제5여단[50]을 양성했다. 북한은 제5여단 외에도 짐바브웨 군대의 정규 지휘권 밖에서 활동하는 특수살인부대를 훈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짐바브웨 인구의 20%를 차지했던 마타벨레란드에 거주하는 은데벨레족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그 이유는 부족 주민들이 은코모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무가베는 먼저 1982년 2월에 은코모를 쿠데타 혐의로 체포한 후 공개 성명에서 "ZAPU와 그 지도자인 조슈아 은코모 박사는 집 안의 코브라와 같다. 뱀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머리를 때려 파괴하는 것이다."이라는 발언을 남겼고, 이에 반발한 마타벨레란드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이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린 후 지시를 내려 제5여단을 투입하며 대규모 학살을 시작했다. 이 '작전'에는 '구쿠라훈디'라는 말이 붙었는데, 이 말은 쇼나어로 '봄비가 오기 전에 겨울을 씻어내는 이른 비'라는 뜻이다.
먼저 제5여단은 '우리는 무가베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며 촐로초, 루파네, 응카이 등 마테벨레란드 지역의 주요 도시로 들어가서 2주일 만에 무려 2천 명이 넘는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천주교 위원회(ZCCJP)가 1천 명 이상의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보고서에 따르면, 제5여단은 주로 10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학교 등의 시설에 한꺼번에 모아서 구덩이를 판 후 민간인들을 생매장하거나 교회에 강제로 가둔 뒤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했으며, 임산부와 생후 4개월밖에 안된 아이에게도 예외는 없었고, 심지어 학교에서 공부하던 여학생들을 강간하여 임신시키는 악행까지 벌였다. 거기다가 제5여단 대원들은 주민들에게 무가베와 무가베 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하면서 가족과 친구들이 고문당하고 총에 맞는 것을 돕게 했으며, 학살의 비극에 통탄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주민 역시 사살했다. 심지어 이들은 부모에게 자식의 인육을 먹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들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데, 웬만하면 절대 다운받아 보지 않을 것을 권장한다. 여기서 묘사되지 못한 구투라훈디의 다른 학살 수법들은 난징 대학살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잔혹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5여단은 해질녘부터 해뜰녘까지 통금을 실시하여 통금 시간에 이동하는 사람들을 즉결로 사살했으며, 마테벨레란드 지역을 철저히 봉쇄해서 이 지역에 식량이 조금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에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간 주민들이 "식량이 없으면 무엇을 먹어야 하냐"라고 물었더니 "당신 동료들의 인육을 먹으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풀을 뜯어먹거나 벌레들을 잡아 먹어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너무 학살이 잔혹했던 나머지 구쿠라훈디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무가베마저 죽을 때까지 구쿠라훈디 학살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면서도 후에 이 학살을 '광기의 순간'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이런 참혹한 방법이 지속된 끝에 은데벨레족 2만-3만 명이 사망했다. 이 학살의 트라우마로 마타벨레란드 주민들은 절대적인 ZAPU 지지층이 되었는데, 그 일례로 1983년의 총선에서는 마타벨레렌드의 모든 의석에서 은코모가 몸담은 ZAPU가 당선되었다.
한편 은데벨레족뿐만 아니라 은코모가 이끄는 ZAPU 산하 군대로써 짐바브웨 독립을 위해서 게릴라 투쟁에 참여한 ZIPRA 출신 군인들도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어제의 독립군들이 독립한 고국에서 그들의 손으로 어제의 동지들을 학살한 것이다.
제5군단 사령관이자 학살을 직접적으로 담당했던 무가베의 측근 페란스 시리[51]는 그 '공'을 인정받아 공군 사령관으로 승진했으며, 이후 5군단은 1986년 말에 해체되고 일반 부제 편제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ZAPU는 1987년에 있던 상술한 협정으로 ZANU와 합병되어 ZANU-PF가 되었으며, 은코모는 1999년에 사망한 후 '국가 영웅'에 추대되어 국가영웅묘역에 안장되었다.
한편 구쿠라훈디 학살의 배후가 북한이었다는 것은 짐바브웨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라 구쿠라훈디 피해자측은 김정일[52]의 죽음을 기뻐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무가베의 측근인 디디무스 무타사(Didymus Mutasa, 1935~) ZANU-PF 행정담당 비서는 짐바브웨 군대를 훈련시켜준 김정일에게 감사하다고 하며 "그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이 선택한 인기 있는 지도자였다."는 망언을 남겼고, 무가베와 당이 김정일과 교류한 것은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며 김정일을 '우리가 교제했던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
4.5. 부정부패와 사치 행각
무가베는 짐바브웨를 전란도 없이 한때 같은 대륙에 위치한 소말리아와 동렬로 놓일 정도의 파탄국가로 만들었으며, 국민의 80%를 실업자로 만들고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도 엄청난 수준의 사치행각을 일삼았다. 국민들은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자기 혼자 온갖 호강 다 하고 살아서 그런지 폴 비야처럼 90살이 넘었을 때에도 여전히 정정했다.[53] 프로필의 84세 시절 사진과 문서 상단의 90세 시절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얼굴만 보면 이제 갓 70줄에 든 사람 같아 보였다.무가베는 짐바브웨의 국영 다이아몬드 회사의 자금을 횡령했고, 순자산은 대략 2천만 달러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돈들의 대부분은 스위스 등의 해외에 은닉했다고 한다. 또 2021년에는 영국의 담배회사 BAT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것까지 폭로되었다. #
4.5.1. 호화 별장 건설
2008년 4월 건설된 무가베의 별장 참고자료 |
2008년 4월 수도 하라레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26km나 떨어진 곳에 2003년부터 지어온 무가베의 별장이 완공되었는데. 2개의 호수를 갖춘 44에이커(약 17.8헥타르)의 조경 부지에 세워진 이 별장의 가격은 2,600만 달러(한화 약 290억 원)로, 대통령궁의 3배 크기에 25개의 침실[54], 3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식당, 큰 침대가 있는 무가베 전용의 대형 침실을 갖추고 있다. 그는 이 궁전의 인테리어에 수백만 달러를 들였는데, 중동 예술가를 1년간 고용해서 별장 천장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도록 했다. 게다가 이 별장 주변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강제로 이주당했고, 별장 주변은 경찰과 군대가 24시간 감시했으며, 이 별장을 경호하는 사람은 별장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발포하여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웃긴 사실은 짐바브웨 대통령이 받는 연봉이 공식적으로는 고작 5만 7000달러(한화 약 6천만 원)밖에 안 된 데다가 이 별장이 건축될 무렵에 짐바브웨는 상술했듯 어마어마한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멸망 직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인데, 그런 와중에 이런 초호화 별장을 지은 무가베는 당연히 "무슨 돈으로 저런 짓을 했냐", "이 별장을 건설할 돈이면 무람바츠비나 작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2천 개 이상의 저가 주택을 짓고도 남는다"는 등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게다가 이 별장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3번째 지은 별장에 그가 소유하게 된 5번째 별장이었는데, 심지어 무가베는 2008년 이후에도 이런 식의 별장을 짐바브웨 내에 몇 개나 더 지었을 정도로 권좌에서 축출될 때까지 엄청난 수준의 사치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4.5.2. 해외 쇼핑
뿐만 아니라 무가베는 외국에 갔을 때도 호화로운 쇼핑을 즐겼는데, 한 기사에 의하면 무가베는 2011년 상반기 6개월 동안 외국 여행에 무려 1200만 파운드(한화 약 206억 원)를 지출했다고 현지 일간지 데일리뉴스가 폭로하기도 했다. 게다가 2016년에도 싱가포르에서 아내인 그레이스와 함께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쇼핑을 하는 등 사치가 심각했다.#짐바브웨의 국영 항공사인 에어 짐바브웨는 무가베의 해외여행을 위해 자주 비행기를 차출당했기 때문에 별명이 '에어 무가베'가 되었고, 짐바브웨의 대학생들은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무가베에게 'Vasco da Mugabe'라는 별명을 붙였다.
4.5.3. 의외의 식생활
다만 의외로 무가베의 식생활은 후술할 생일파티를 벌일 때를 빼고는 금욕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가베는 2015년 2월 28일에 있던 91세 생일파티 자리에서 나의 장수비결은 배부를 때까지 먹지 않는 것이라며 자랑했다. 무가베는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주변 고급호텔 골프장에서 열린 대규모 생일파티를 하기 전에 방송 인터뷰 도중에 "나는 잘 먹지만, 내 배를 가득 채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뉴스통신 사파(SAPA)가 보도했다.그는 "당신은 잘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이 당긴다고 배가 찰 때까지 먹지는 마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충고했는데, 무가베는 자기 건강을 매우 생각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이 생활 습관은 상당히 유명하다고 한다. 무가베는 매일 새벽 4~5시에 일어나 오랫동안 산책을 하고 식단에서 고기는 조금만 먹고 야채는 많이 먹었으며, 짐바브웨인의 주식이자 옥수수가루를 반죽한 사자(sadza)를 선호했다고 한다. 또한 무가베의 여동생은 무가베의 장수비결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가베는 치즈케이크도 아주 좋아해서 모건 창기라이와 회담할 때 다과회 상을 차와 치즈케이크로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55]
그렇게 건강관리를 하고 식생활 자체는 검소했기에 평소 식비로 낭비를 하지 않은 점은 의외의 절약과 검약이다. 하지만, 식비를 아낀 대신 명품을 쓸어담거나 부정부패로 재산을 착복하는 점은 변치 않았으므로 이런 소탈한 식생활이 그의 폭성과 사치에 면죄부가 될 순 없다. 독재자나 부패한 부유층에게 있어서 절약과 검약은 돈을 쓰지 않는 행위가 아니며, 본인의 기준으로 쓰잘데기 없는 것에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치 행각과 별도로 식생활만큼은 검소했다고 알려진 독재자로는 무가베를 제외하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마시아스 응게마가 있으며, 역사상 가장 부패한 독재자로 꼽히는 수하르토는 한술 더 떠 장관들과 컵라면을 끓여먹기도 했을 정도로 식생활이 소박했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와 엔베르 호자[56]는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검박한 생활을 한다고 알려진 만큼 식생활도 평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별도로 김정일&김정은처럼 나라를 거덜낼 정도로 사치를 부리며 초호화 식사를 누린 독재자도 있으며,[57] 사치와 호화로운 식사도 즐기면서 전통 음식도 함께 즐기는 절충적인 독재자 김일성과 모부투 세세 세코도 있다. 독재자의 정점이라 불릴 만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고향인 조지아 음식을 자주 찾아 먹었으나, 그 외의 사생활은 반스탈린적 성향인 학자들도 인정할 정도로 매우 검소해서 유산이 옷 몇 벌과 담배 파이프 몇 개, 만년필, 모아둔 월급 정도였다.[58]
4.5.4. 생일파티
2013년 2월 21일. 89세 생일파티 당시 |
무가베의 기행과 사치가 가장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그의 생일파티다.
당시 89kg짜리 케이크 사진. 저 큰 탑처럼 보이는 물체가 바로 케이크다.[59] |
2015년 7개의 케이크들 중 일부.[60] |
2015년에 열린 생일파티만 해도 생일 잔치에 코끼리, 기린, 영양, 악어 등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도축하여 만든 요리로 한상 가득히 차려 손님 접대에 썼는데, 무가베는 부인과 함께 91개의 풍선을 하늘에 날리면서 생일파티를 시작했다. 약 2만 명이 참여한 생일 파티는 빅토리아 폭포 인근의 한 고급 호텔 골프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고 장수를 기원했다. 이때 생일파티에는 캐비아와 고급 위스키와 대형 생일 케이크만 7개가 놓였고 어린 코끼리 1마리, 버팔로 2마리, 흑담비 2마리, 임팔라 5마리가 들어갔다. 이 동물들은 지역 토지 주인이 대통령에게 바친 진상품이었다. 또 소 40마리, 사자 1마리, 악어 1마리도 선물로 전달됐고 또 다른 코끼리는 총살해 빅토리아 폭포 지역 사회에 전달했다. 무가베의 생일잔치는 7일 동안이나 계속됐는데 이번 잔치에는 약 한화로 약 18억 원인 160만 달러가 들어간 것으로 추산된다. 물론 이 날에 공개된 무가베의 생일 케이크는 정확히 91kg이었다.
무가베는 매년 그래 왔듯이 국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기부로 이뤄졌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해 야생동물 보호단체는 비윤리적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야당 관계자들은 생일파티에 쓰인 재정은 공중병원, 지역 학교 복구와 건설에 쓰여야 할 것이었다고 맹비난했다.
2016년 케이크들 중 일부. |
한편 무가베는 이 생일 파티에서 짐바브웨에서 가뭄 때문에 굶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을 해댔는데, 정작 2016년 짐바브웨는 20여 년 만에 닥쳐온 최악의 가뭄 때문에 짐바브웨 국민 300만 명이 식량난을 겪고 있으며, 가축 2만 마리가 아사해 긴급 구호를 기다려야 하는 지경에 놓인 상황이었다. 이에 짐바브웨 야당 정치인 심바 마코니는 현지 언론에 “우리의 친애하는 지도자께서 짐바브웨 국민들이 굶주리는 가운데 성대한 생신잔치를 준비하셨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심한 처사인가?"라는 멘트로 무가베를 대놓고 비판했다.
이러한 국제 사회의 비판과 2016년 6월부터 공무원들이 제때 봉급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80% 이상의 노동자들이 비공식 영역에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은 물론 12월부터 이어진 폭우로 홍수가 나 20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도 어김없이 93kg 케이크를 만들어서 사치스럽게 잔치를 해댔다. 2월 25일 마타벨렐랜드 남부 마토보 국립공원에서 열린 공식 생일잔치에 든 비용은 무려 250만 달러(한화 약 29억 원)로 역대 최고액이자 매년 생일잔치에 들어가는 평균 비용인 100~150만 달러(한화 약 17억 원)의 1.5배~2배에 달한다.#
이날 생일잔치에서 무가베는 "분파를 형성하느라 바쁜 사람들은 자신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며 권력승계 문제로 분파 갈등을 겪고 있는 집권 여당에 대해서도 후계자를 지명할 생각이나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에 한 인권단체의 대변인은 생일잔치가 열린 마타벨렐랜드는 무가베의 인권 탄압으로 인해 억울하게 학살된 사람들이 묻힌 곳이라면서 학살 현장인 이곳을 축하 장소로 써서는 안 된다고 무가베를 비판했다. #
그리고 2018년에는 94kg이 될 것이라 예측되고 있었으나 후술할 군부 쿠데타로 인해 퇴진하게 되면서 더이상 이런 케이크 행사는 할 수가 없었다. 퇴진 후 무가베의 생일인 2월 21일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전직 대통령 예우를 계속 받게 되었지만 이미 권력을 상실한 터라 94번째 생일은 별다른 잔치나 행사 없이 비공개로 가족끼리만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는 2019년에 무가베 본인이 사망하여 케이크 촌극도 슬며시 막을 내렸다.
4.6. 교육
위와 같은 독재 행각만 보면 교육 정책도 엉망진창으로 했을 것 같지만, 본인이 교육학 전공자이고, 독재자가 되기 전에는 짐바브웨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던 데다가 교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교육기관과 교육제도는 생각보다 잘 정비해놨다. 무가베가 독재하던 시절 유일하게 긍정적인 성과를 거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무가베는 독립 후 모든 국민에게 무상 의무교육을 약속했고 이는 고등학교까지 적용되고 있다. 원래 무가베는 대학교육까지 무료보급을 약속했지만, 최악으로 치우치는 짐바브웨의 경제사정상 무상 대학교육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차저차 고등학교 교육까지는 필수로 정비한 덕에 2007/2008년 국제 연합 개발 계획(UNDP)의 통계에 따르면 짐바브웨의 문해율은 89.4%인데, 이는 아프리카 최고 부국 세이셸(91.8%)을 제외하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았다. # 그리고 무가베 집권 후반기 짐바브웨의 문해율은 90.4%였고, 심지어 짐바브웨 당국은 97%로 추산했을 만큼 무가베 치하의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국가로 꼽혔을 정도로 교육인프라 하나만큼은 잘 정비해 놓았다. 참고자료 반면 짐바브웨와 인접한 국가들인 모잠비크와 말라위는 2022년 기준으로도 문해율이 60%대에 불과하다.
5. 2000년 이후의 행적들
2000년 1월 무가베 대통령이 10만 짐바브웨 달러(당시 환율기준으로 한화 약 295만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2005년에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전쟁을 일으키는 조지 W. 부시와 토니 블레어를 "히틀러와 무솔리니처럼 무고한 국가를 공격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한 불신성한 사람들이며, 세계 지배를 노리는 파시스트들"이라고 마구잡이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워싱턴 포스트지 주말 매거진 퍼레이드의 전 세계에서 최악의 독재자 부분에서 1위를 기록했다. 본인 스스로도 100세까지 채우고 퇴임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거나 사후 부인에게 권력을 물려줄 거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100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대해서 언급한 것일 뿐 100살이 넘어도 죽지 않으면 하야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61]
결국은 자국 화폐를 포기하고 자신의 정적, 그것도 자신이 네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모건 창기라이와 연정을 선언해 회복 중이라고 하였지만 믿는 사람이 없었다.
똑같이 젊은 시절 백인우월주의 정권에 항거하며 남아프리카의 국부로 존경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너무나도 비교된다.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에게 무가베는 개인적으로도 친했던데다가 오래 전 험난한 시절을 겪을 당시 너무나도 뜻이 맞는 동지였기에, 국내외적으로 비판받는 종신 독재자가 된 쿠데타로 축출되기 직전의 무가베를 살아생전에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 원래 만델라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무가베를 '태양이 나오기 전까지 별과 같았던 존재'로 평가했지만 무가베의 타락에 대한 실망은 누구보다 컸을 만델라는 2008년 선거의 폭력 사태를 '지도력의 비극적 실패'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62][63]
무가베도 자신이 죽으면 권력승계화가 좌절되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적어도 압수한 백인 농장들만이라도 절대로 도로 백인들에게 줄 수 없다면서 소유권한을 이미 여러 이들에게 양도했고, 죽을 경우에도 유언으로 다른 사항도 준비했다고 한다. 상술했듯 이전 짐바브웨 백인 농장들의 독점실태가 심각해도 워낙 심각했던 탓에 무가베를 쌍욕하는 다수 반대파조차도 지지하는 일이라 설령 무가베가 죽어도 백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땅을 찾으려면 꽤나 고생할 예정이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카다피를 지원하고자 군대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자국 사정도 워낙 개차반이라 대규모 지원은 어림도 없고 겨우 일부 부대와 군사고문단 수준을 지원했으며 큰 도움이 못 된다는 분석이다. 결국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카다피가 짐바브웨로 망명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지만 알다시피 카다피는 자신의 독재 정권이 반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붕괴된 뒤에도 리비아 국내 이곳 저곳을 떠돌며 카다피 정권의 잔존 세력들과 함께 승산 없는 싸움을 이어가다가 나토 공군과 반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해버렸다.
2011년 5월에는 불라와요[64]에서 열린 국제 무역 전시회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경찰 알로이스 마부누가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전용 화장실을 사용했다가 비밀경찰에 의해 1달 동안 구류 상태에 처해진 후 10일간의 징역형과 계급 강등 처리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마부누에게 적용된 혐의는 '대통령의 '옥좌'에 도전해 그 위에 앉기까지 했다'는 거였다고 한다.
2011년 11월에는 남아공의 유명한 식당 체인인 난도스가 무가베를 주연으로 한 광고를 제작해서 짐바브웨 국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있다. 내용은 광고가 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몰락하거나 사망한 독재자들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담 후세인, 마오쩌둥, 이디 아민, 피터르 빌럼 보타(?!) 같은 좋은 벗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무가베가 쓸쓸히 저녁식사를 준비한다는 가슴이 아리는 내용. 그런데 후세인, 마오쩌둥, 이디 아민 등이야 다 그렇다 쳐도 피터 보타를 넣은 건 무리수였다는 비판이 많았다고 한다. 무가베가 젊은 시절 정상인이었을 때 맞서 싸운 것이 로디지아 같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었으니 아파르트헤이트를 고수할 정도로 백인 우월주의자인 보타가 유럽을 극도로 혐오하던 무가베랑 친구라는 건 영 아니라는 것. 물론 이건 광고가 만들어진 곳이 남아공이므로 자국의 독재자라는 이유로 광고에 넣은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수괴인데다 집권 당시 흑인이고 인도인이고 백인이고 일단 걸렸다 싶으면 길거리 한복판에서 두들겨 패고 끌고 가서 고문하는 게 일상이었던 보타 시절을 좋게 기억하는 남아공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첨언하자면 무가베는 카다피를 보고 "뇌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돌직구를 날린 적도 있다. 사실 과거 1990년대에도 에티오피아의 전 독재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망명을 받아주기도 했고, 이후 멩기스투는 무가베가 사망한 후인 2024년 시점에도 짐바브웨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뜸하게 생존신고를 하고 있다. 무가베가 이렇게 외국의 독재자들을 보호해주고 지원해주는 이유는 딱히 그들을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도 언제 그런 꼴을 당할 지 알 수 없어서 보신 차원에서 하는 행동인 게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무가베는 카다피에게 지원을 해주긴 했다만 사이가 좋은 친구까지는 못 되었던 것.
건강상태가 의심스러웠는데 2011년 9월 5일에 위키리크스가 밝힌 바에 따르면, "2008년 6월에 전립선암 판정을 받고 3~5년 내에 사망할 것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매년 1월 눈 검진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것을 포함, 아시아로 연례적인 휴가를 떠나고 평소 건강한 식단과 소식을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면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듯했다. 그 덕분에 무가베는 시한부 판정을 넘기고 전립선암 판정 11년 후인 2019년에야 사망했다.
2011년 12월 22일, 즉 김정일 사망 5일 뒤 ZANU-PF의 행정국장이자 무가베의 최측근인 다디무스 무타사가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에 따르면 무가베는 김정일을 '사랑스러운 남자'(a lovely man)로 표현했으며, 구쿠라훈디 학살에 대해서도 "우리 당은 짐바브웨 군을 훈련시킨 김 위원장에 감사하고 있다"라는 막말을 남기며 "김 위원장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선택받은 인기있는 지도자였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 다만 데일리 메일이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출처 사용을 금지당할 정도로 악명 높은 황색언론이라는 것은 감안하고 보자.
2013년 7월 31일 대선에서 또 승리했다. 득표율은 61.9%. 상대후보인 모건 창기라이는 33.9%에 그쳤다. 현재 창기라이는 총리이다. 연정을 구성한 셈이다. 그러나 창기라이의 민주변화운동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선거결과에 불복을 선언한 상황이다. 그러나 결국 무가베가 몰아붙여서 5선 임기를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5선 임기를 시작한다면 2018년까지 재임할 것이며 이 때 무가베의 나이가 94세. 이에 대선 경쟁자였던 모건 창기라이 등 야당 지도자들은 "야당 우세 지역에서 100만 명이 투표를 하지 못했다"며 "선거 부정행위가 짐바브웨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무가베는 "선거에 패배하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쓰레기처럼 처리하겠다"며 "영국이 짐바브웨에 거주하고 있는 백인 소유의 토지 몰수 정책 때문에 나를 축출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가베는 여러가지 기행들을 저질렀는데, 2014년 90세 생일을 기념해서는 무려 500만 달러짜리 동상을 제작했다. 김일성김정일동상 제작으로 50년 노하우를 가진 북한의 만수대창작사가 만들었으며 이들은 아프리카에 선전용 대형 조형물 제작으로 외화를 벌고 있다. 더 재밌는 건, 당시 생일파티에서 "9살 같은 젊음을 느낀다.", "은퇴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2014년에는 자신의 9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내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정적 상당수와 동생 대부분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으니... #
2014년 3월에는 4월 EU-AU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인(그레이스 무가베)을 초청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기도 했다. 부인 그레이스는 2002년 야당 탄압, 백인 농부 추방 등으로 인하여 EU 입국이 금지된 상태.[65]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회의 참석과 짐바브웨 및 수단의 인권 문제 등을 둘러싸고 긴장이 야기되긴 했지만 어찌어찌 참여는 한 모양.
이 회의에서 무가베 대통령의 인권탄압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회의 첫날 비공개회의 연설에서 "오늘날의 짐바브웨 상황은 새로운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해치고 있다"고 무가베 대통령을 겨냥해 공세를 폈으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폭정과 인권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무가베 대통령의 회의 참석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라고 타보 음베키 전 남아공 대통령 등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무가베를 두둔하고 나섰다. 영국 등 유럽국가들은 짐바브웨의 폭압적 정치와 인권탄압을 비판하면서 붕괴 직전의 경제상황이 무가베 대통령의 실정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이를 식민통치했던 영국의 잘못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무가베 대통령은 정상회의 연설에서 "유럽은 선거에서의 승자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짐바브웨에서 합법적으로 치러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2015년 2월 4일에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지도자회의에 참석했다가 하라레 공항에 도착한 뒤 공항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무가베가 공항에서 그를 환영하는 지지자들에게 연설한 뒤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뎌 곧바로 넘어졌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측근들은 재빨리 그를 부축해 리무진에 태웠으며 리무진은 속도를 내며 사라졌다고 전했다. 넘어지는 장면을 찍은 일부 사진기자는 보안요원에 의해 사진을 삭제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이 사진이 꽤나 웃긴지라 해외에서는 mugabe falls down(무가베 넘어지다)이라고 해서 이 사진들처럼 패러디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으로 동성애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던 2015년 7월 1일 반 동성애주의자 무가베가 워싱턴에 가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청혼하겠다고 빈정댄 사실이 보도되었다, 무가베는 국영라디오와의 인터뷰 도중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있고 매력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결정했다. 필요하다면 워싱턴에 가서 무릎을 꿇고 오바마에게 청혼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며 "왜 오바마가 남색을 금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감히 무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2016년 2월에 무가베는 은퇴할 계획이 없으며 하느님이 '오라'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집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7월에는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짐바브웨 참전용사연맹 소속의 여러 독립투사들을 체포하는가 하면, 8월에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끝난 이후 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이유로 올림픽에 파견했던 선수단 31명을 전원 체포했다는 나이지리아 매체의 보도에 대해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12월에 2018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그러나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았다는 것이 큰 문제다.
2017년 2월, 93세 생일 기념 짐바브웨 국영 TV 연설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한다며 짐바브웨인을 위한 짐바브웨를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했다.
2017년 10월에는 세계보건기구가 무가베를 보편적 보건의료 및 건강 증진을 정책으로 삼아 아프리카 지역의 보건 향상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친선대사로 임명해 세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집권 초 행보로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소식을 접한 세계의 여러 보건의료 및 인권단체들은 무가베의 장기 독재로 인해 짐바브웨의 보건 환경은 오히려 퇴화했다면서 세계보건기구를 비판했다.
6. 하야
6.1. 축출 과정
2017년 11월 15일에, 상황을 보다 못한 짐바브웨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 로버트 무가베가 후술할 자기 아내인 그레이스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면서 부통령인 에머슨 음낭가과를 11월 6일 해임한 게 원인으로, 음낭가과는 해외 망명했다. 이때 경질한 이유도 어처구니 없는 게, 마법을 사용해 반역을 꾀했다는 것. 군부 출신인 음낭가과가 경질되자 그동안 무가베한테 충성을 바쳐왔던 군부가 이에 반발하여 그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군부는 국영방송을 통해 대통령 주변의 범죄자, 국정농단 세력들이 표적이지 쿠데타가 아니라고 일축했으나, 이미 군부는 의회 등 정부 건물과 국영방송사 ZBC 등 수도 하라레 전반을 장악했으며, 무가베 사저에서 30–40발의 총성이 들렸다는 제보도 있었다. 더 어이없는 건 11월 13일에 군부 수장인 콘스탄틴 치웽가 장군이 고위급 장교 90명을 대동하고 "해방전쟁 참전용사 출신 인사들을 겨냥한 숙청을 중단하라", "숙청 멈추지 않으면 쿠데타 직면할 것"이라며 무가베한테 대놓고 경고했다는 것.#영상 즉 쿠데타 실행 이틀 전에 미리 알려줬다는 의미와 같다. 부통령이 해임된 날이 11월 6일인데, 쿠데타가 벌어진 날은 고작 9일 후인 15일이다. 이토록 단기간에 쿠데타 과정이 착착 진행되어간다는 것 자체가 군부가 예전부터 이미 준비는 철저히 다 해놓은 채 벼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군 지휘부는 언제 봉기할지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마침 군부 측 대표격인 부통령이 경질되자 그대로 일으킨 것.
짐바브웨군은 크게 보면 두 파벌이 있는데, 첫 번째가 짐바브웨 해방전쟁 당시 백인 정권 편에서 싸우다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짐바브웨군에서 활동한 로디지아군 출신이고, 두 번째가 로디지아군을 상대로 싸우다 협상으로 백인정권이 물러나자 군에 들어온 무가베의 게릴라 출신들이다. 로디지아군과 게릴라들은 거의 15년 동안 적으로 싸웠으니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게릴라 출신들이 정권을 잡은 이상 로디지아군 복무자들은 그만큼 숙청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무가베가 개국공신들이 경쟁자로 올라서는 것을 막기 위해 로디지아군 출신들을 적극 기용한 탓에 지금까지 파벌이 나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군 고위급 장교 90명이 한꺼번에 대동하여 '쿠데타 경고' 기자회견을 했다는 것을 볼 때 짐바브웨군 내부에서 파벌을 불문하고 거의 전부가 무가베의 축출을 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군부에서는 '무가베 대통령과 그 가족은 무사하며,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66], '이는 쿠데타가 아니며 무가베 주변에서 범법행위를 하고 있는 범죄자들만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발언부터가 바로 전형적인 쿠데타 직후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자 주위의 인사들을 축출하기 위해 일으켰다는 주장은 매우 흔해 빠진 쿠데타의 대외명분이기도 하다.
이에 무가베는 반역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집권 37년 만에 처음으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 즉 명분 축적이나 각종 준비 등을 철저히 해왔을 거라는 점, 이미 주요 시설 및 방송국을 장악하는 등 정석적인 쿠데타 형태대로, 즉 군부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가베가 이번 위기를 빠져나갈 가능성은 낮다. 결국 무가베는 가택 연금되었고, 남은 지지 세력의 반발과 국제 사회의 비판 여론, 독립 원로로서의 공로를 감안해 군부에서 무가베를 총살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까지 남은 임기를 채우겠다며 사퇴와 퇴진 후 과도정부를 구성하라는 군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집권당에선 무가베의 당 대표직을 박탈하고 음낭가과를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했으며, 또한 무가베의 아내 그레이스를 제명했다. 그리고 11월 20일까지 자진 사임하지 않는다면 탄핵 절차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후 당과 군부의 압박에 19일 늦은 저녁 자진 사퇴를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정작 국영방송을 통해 생중계된 연설에서는 12월에 열릴 여당 총회를 주관하겠다는 딴소리를 하면서 끝내 사퇴를 거부했다. 자신과 부인에 대한 면책 특권, 개인 재산 유지를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했다는 기사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이미 무가베가 대표직을 맡고 있었던 여당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 애국전선은 무가베의 대표직을 박탈했고, 20일 직접 탄핵절차를 개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1월 22일 탄핵 표결이 진행될 예정이며,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무가베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이상 탄핵 충족 요건인 3분의 2를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는 문민통제 및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개발 도상국 혹은 최빈국이 수두룩하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가 민심 이반에도 불구하고 장기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군부의 지지에 기반을 둔 덕분인데, 만약 군부마저 등을 돌리면 육체적 생명은 해외 도피, 망명, 사임으로 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 생명은 확실히 끝난다.
6.1.1. 우려
일각에서는 무가베가 축출된 짐바브웨가 음낭가과 부통령과 치웽가 장군 사이에 권력 다툼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 소말리아처럼 될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참고로 소말리아는 1991년 시아드 바레 정권 축출 후 헤게모니를 쥐게 된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와 마디 모하메드 등 반군 출신 군벌 지도자들의 분열과 내전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져 세계적인 파탄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외국의 원조와 약간의 축산업 외에 별 다른 국가 산업 자체가 없는 소말리아와는 달리 짐바브웨는 농업이 발달했으며 백금, 리튬 등의 자원이 풍부하다.또한 소말리아는 바레 정부가 축출되고 내전이 일어나 막장화되기 전인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독재자 시아드 바레 전 대통령이 선거나 야당 없이 종신 독재를 벌이고 대체 정치 세력들의 활동을 허용하지 않으며 1당 1인 독재를 펼치고 자신의 출생 부족인 다로드-마레한 족을 우대하고 여타 부족 세력들을 박해, 배척하는 등 내부적으로 이미 내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바레는 1990년대 초 다당제 허용과 대통령 임기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하려고 했으나 통일소말리아회의 등 당시 소말리아 내 반정부군 세력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고 내전을 일으키면서 실패하였다.
반면 짐바브웨는 무가베 독재정권이긴 했어도 그래도 대통령 선거도 하고 야당의 정치 활동도 허용되는 등 부정선거로 여러번 대통령직을 이어가더라도 1950년대 이승만 독재 정권 당시 한국이나 2020년대 블라디미르 푸틴 독재 정권의 러시아처럼 어느 정도 민주정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보츠와나, 잠비아, 모잠비크, 나미비아, 에스와티니 등 주변 남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안정적이고 남아프리카의 역내 국가들 모두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착되어 있어서 소말리아처럼 장기 내전에 빠져 지옥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단 무가베 축출 후 짐바브웨가 내전으로 무법천지가 되면 이들 남아프리카 주변국들과 여러 광물 자원을 노리는 서구 열강들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다. 짐바브웨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고 영토 면적이 소말리아보다는 작아서(짐바브웨 - 390,757㎢, 소말리아 - 637,657㎢) 설사 무정부 상태에 빠져 군벌, 부족 세력들간의 내전이 발발해도 남아공, 보츠와나, 잠비아, 에스와티니, 모잠비크 등 남아프리카 주변국들의 군사 무력 개입만으로도 안정화, 통제가 상당히 수월하다. 그리고 짐바브웨는 내륙국가라서 4면으로 국경/영공 봉쇄, 물자 유입만 차단해도 내전이 장기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금방 전쟁이 끝나기 쉽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군부가 다수의 파벌로 나뉘어 있다면 모를까 군부와 정권층 인사들 전체가 무가베보다는 음낭가과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날 일이 거의 없다. 짐바브웨군의 경우 무가베에 대한 반대도 컸지만 무가베를 축출하기에는 명분도 미약했고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음낭가과가 먼저 나서줬으니 음낭가과에게 반기를 들고 무가베를 위해 싸워줄 이유는 없다.
무가베 축출 이후에 음낭가과 신정부가 안정적으로 정국을 통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소말리아와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무가베 축출 이후에 집권한 현 짐바브웨 정권이 안정적으로 정국을 통제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와 서방 국가들의 외교관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음낭가과와 치웽가 역시 무가베 독재정권 시절 은데벨레족 등 반대파 부족 세력들에 대한 무력 진압을 주도하며 무가베를 지지했고, 무가베 정권 하에서 고위각료로 성장했던 인물인 만큼 무가베보다는 조금 나을 뿐, 그들도 별 반 다를바 없는 독재 정치를 펼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무가베가 실각, 사망하고, 정권을 장악한 음낭가과 현 대통령과 음낭가과가 임명한 치웽가 현 부통령이 권력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 없이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짐바브웨가 1991년 시아드 바레 독재정권이 붕괴된 직후의 소말리아나 1997년 모부투 세세 세코 독재정권이 축출된 이후의 콩고민주공화국,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 몰락 이후의 리비아, 2019년 오마르 알 바시르 정권 붕괴 이후의 수단 공화국처럼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졌다.
6.2. 하야 선언 이후
결국 현지 시각 2017년 11월 21일(KST 11월 22일)부로 전격 사임했다. 짐바브웨 의회는 그의 사직서를 접수했고, 후임 대통령은 음낭가과가 승계한다고 밝혔다. 짐바브웨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사임하면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나 90일 이내에 집권 당이 새 대통령을 지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무가베의 사임과 함께 짐바브웨 정부는 무가베의 재산과 신체적 안전을 보장하며 무가베 집권기에 일어난 여러 정적 탄압과 관련된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 전직 대통령 예우를 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예우에는 수도에 소재한 무가베 일가의 거주지의 관리와 유지에 필요한 인력ㆍ비용, 무가베가 이용할 벤츠 S500급의 관용차 3대, 경호관 6명을 포함한 직속 보좌 인력 20명, 관용 여권, 연 4회의 관용 비행기 이용권한 등이 포함된다. 또한, 무가베의 퇴직금 명목으로 1,000만 달러의 현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외 여러 면책권이 부여되는 등 매우 관대하게 처분되었다. 무가베가 재임 중후반기에 국가 경제를 말아먹는 등 개판을 쳤다 해도 일단 짐바브웨 백인통치를 끝낸 공이 있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무가베와 여러모로 관련이 있으며, 탄핵안이 입안되자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정권을 이양했기 때문에 군부 입장에서 무가베를 일방적으로 격하하기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록 무가베는 권력을 박탈당하기는 했으나 숙청된 것은 아니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정치에는 아무 관여를 하지 않는 대신 남은 여생을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 물론 이때 무가베는 건강이 나쁘며 백살이 다 되어가는 노인네라 여생이 얼마 안 남았으니, 굳이 사법적 처리로 나라를 시끄럽게 하기 보다는 조용히 여생을 마칠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점은 위의 여러 학살이나 정적 암살 의혹사건들은 사실 군부나 후임자도 공범이라서 이런 걸로 무가베를 재판대에 세워 봐야 자기들도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최대한 피를 보지 않는 정권 교체가 더 이득이다. 그 이유는 정권 이양이 평화롭게 진행돼야 새로 정권을 잡은 자들도 추후에 본인들이 권력을 내려놓을 때에 대해 보다 더 안정감을 느끼고, 권력을 사수하려는 경향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수직에서 해임되었고 사실상 제명되었다. 이로 인해 앙금이 있는지 2018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무가베의 축출을 다른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반면교사로 삼아 권력 유지를 유연화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2018년 11월에 치료차 싱가포르에 머무르고 있으며, 벌써 싱가포르에 온 지 2개월이 되었다고 하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다. #
7. 사망
사망 3개월 전인 2019년 6월에 싱가포르의 병원에서 찍은 사진 |
2019년 4월에 로버트 무가베는 퇴원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싱가포르 글렌이글스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게 되었다. 2019년 6월에 27세의 무가베의 아들이 아버지의 최근 사진이라며 사진 3장을 공개했는데, 이제 갈 날이 머지 않았다는 듯 매우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이 무가베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결국 로버트 무가베는 2019년 9월 6일 오전 10시 40분에 싱가포르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죽기 직전에 무가베는 암이 악화된 상태였다고 한다.
짐바브웨 정부 외에 남아공, 중국 등 일부 국가는 애도를 표했지만, 짐바브웨 국민들은 '눈물이 아깝다' '학살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기분좋은 금요일' 등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전술한 것처럼 무가베에 의해 엄청난 학살을 당했던 은데벨레족 주민들은, 무가베 사망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몇날 며칠을 축제로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때 한 은데벨레족 출신 주민은 "저 놈이 너무 평화롭게 죽어서 분하다"며 비통해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시신은 싱가포르에서 고국인 짐바브웨로 운구되어 2019년 9월 11일에 하라레에 도착했고, 500명의 지지자들이 무가베의 고향에 모여 무가베를 추모했으며, 장례식은 2019년 9월 14일에 하라레의 국립경기장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원래 무가베의 시신은 수도 하라레의 국가영웅묘역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유족들의 요구로 9월 28일에 그의 고향인 즈빔바 지역의 쿠타마 마을에 묻혔다. 이렇게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피나는 노력 끝에 백인 압제자들을 몰아낸 위대한 독립영웅 로버트 무가베"에서 "동포들을 착취, 학살하여 더러운 부귀영화를 누린 추악한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로 평가가 추락하는 영욕의 삶을 살아온 무가베는 95년간의 긴 인생을 끝마치게 되었다.
8.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
말년에 무가베가 가장 신임하던 사람은 바로 배우자 그레이스 무가베(Grace Mugabe, 1965~)였다고 한다. 그레이스 무가베는 로버트 무가베의 말년에 고령의 남편을 대체해 사실상 짐바브웨를 지배했던 인물로 꼽힌다.
원래 무가베의 첫 번째 아내는 샐리 무가베였는데, 이전에 무가베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집에 돌아가 샐리와 상의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애처가였다. 그러나 무가베는 짐바브웨 대통령 사무실의 타이피스트였던 그레이스와 불륜 관계를 가졌고, 이 불륜을 알아차린 샐리가 이들의 불륜을 저지하려 했지만 샐리는 병에 시달려서 몸 상태가 말이 아닌 상태였고, 결국 첫 아내 샐리가 사망한 후 1996년 그레이스는 무가베와 결혼했다. 무가베보다 41세 연하의 1965년생인 그레이스는 짐바브웨의 영부인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ZANU PF의 여성연맹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며 당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 현재에 이르렀다. 그와 함께 2014년에 하라레의 공립 대학교 '짐바브웨 대학교'에 입학한 지 단 2개월 만에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믿기가 힘들 정도로 박사 학위를 빨리 딴 것이 의심스럽다고 한다. 더욱이 무가베가 아내에게 학위를 수여했다고 하는데, 짐바브웨 대학교의 총장은 짐바브웨 대통령이 겸임한다는 것을 감안해도 수상한 감이 있다.
사치스럽기로 악명이 자자한데, 실제로 그레이스는 저소득층 주민의 주택을 짓기 위한 예산을 횡령해 고급 주택을 지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물론, 쇼핑을 좋아해서 세간에선 '구찌 그레이스'로도 불린다. 그레이스는 2014년 초에 딸의 결혼식에 무려 51억 7천만 원을 쏟아부어서 수많은 짐바브웨 국민들이 굶어죽어가는데 저렇게 돈을 쓰냐는 비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짐바브웨는 빈곤 때문에 소녀들이 10~15살의 어린 나이로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다시피 하는 조혼 문제도 심각한 나라이다. 같은 나라에서 누군가는 돈 때문에 딸을 파는데 누군가는 딸의 결혼식 때문에 수십억을 쓰다니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또한 성격도 까탈스럽고 이기적인지라 2009년 홍콩에서 명품들을 사며 쇼핑을 하다가 자신을 촬영하던 영국인 사진기자를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폭행해서 폭행 혐의로 입건되었다가 합의금을 주고 풀려난 적도 있었다.
2015년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되는 우유를 네슬레에서 더이상 구매하지 않기로 하자 이를 소모하기 위해 알파오메가라는 아이스크림, 초콜릿 회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 그해 11월, "내가 특수 휠체어를 만들어 밀고 다니면서 무가베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무가베 대통령은 2014년 12월 연설에서 (집권당인) ZANU-PF 반대"라고 외쳐 사실상 판단능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레이스 무가베는 2018년 대선에서 ZANU-PF 후보로 나설 것임을 이미 밝힌 바 있는데, 무가베 대통령보다 41살이나 어린 50세의 그레이스 무가베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무가베 대통령만큼 장기집권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창기라이 전 총리는 수렴청정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다만 군부의 수장이자 부통령인 에머슨 음낭가과가 계승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변수.
2016년 12월 26일에 그레이스는 짐바브웨의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국립공원 야생동물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그나마 좀 살기나은 밑동네 남아공에도 저택이 있고 또 자주 남아공을 방문하는데 2017년 8월에는 발목염좌를 치료하기 위해 남아공을 방문했다 자기 아들의 친구이자 현재 남아공에서 활동하는 모델인 개브리엘라 엔젤스를 폭행했다고 한다.# 엔젤스는 2017년 만 스무살이 조금 넘었고 그레이스에게 단순히 몇 대 맞은 정도가 아니라 얼굴에 심한 흉터가 남을 정도로 상해를 당했다고 하여 남아공 국민들은 우방국 영부인이라지만 자국민이 그리 당했으니 그레이스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남아공 정부에서는 외교관 신분은 치외법권을 적용받는다는 이유로 그레이스를 그냥 짐바브웨로 귀국시키는 정도로 끝나 논란이 있었다.사실 외교관 신분도 아니었지만 이는 남아공의 집권당 ANC 나 짐바브웨의 ZANU-PF 도 예전 백인정권과 싸울 때 서로 협력했던 역사가 있어 마치 한미동맹 내진 북중동맹까지 군사동맹은 아니더라도 유대감이 곤고한 편이다. 그러하기에 남아공은 무가베가 유엔에서 인권유린으로 욕먹어도 변호하는 입장을 취했고.
2017년 11월 15일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그레이스의 승계야망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애초에 그레이스는 독립운동으로 지지 기반이 있었던 무가베와는 달리 정통성이나 별다른 공적도 없었던지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반발이 상당했고, 그레이스의 라이벌이었던 에머슨 음낭가과가 축출되면서 음낭가과를 밀고 있던 군부가 반발한 것이 쿠데타의 원인이기 때문에 복권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11월 21일에 남편이 하야함에 따라 권력 세습의 가능성은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고 그나마 엘레나 차우셰스쿠나, 장칭 같은 최후는 안 맞았으니 오히려 그레이스 본인에게는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공식적인 키는 불명이지만, 두 번째 사진에서 173cm의 무가베와 엇비슷하게 나온 걸 보면 여성으로서는 장신이다.
9. 기타
- 이웃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부 넬슨 만델라와는 생전 인종차별에 대항한 독립운동가[67]라는 공통점으로 친분이 깊었는데 만델라는 마음이 잘 맞는 동지였던 무가베가 독재자로 타락하는걸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만델라의 장례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 1994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바스 훈장을 수여받았으나, 2008년 대선 결선투표 이틀 전이던 2008년 6월 25일에 '짐바브웨의 인권 탄압에 대한 혐오와 민주주의 과정에 대한 철저한 무시'를 이유로 훈장을 박탈당했다. 참고로 영국의 훈장을 박탈당한 사람은 무가베 외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유일하다.
- 2015년에는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짐바브웨의 독립을 이뤄냈다'는 명목으로 중국의 민간단체에서 한때 수여하던 정체불명의 상인 공자평화상 제6회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무가베 본인은 이 상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 말년에는 집권 초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고 하며, 심지어 각료 회의 시 코를 골며 자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 무가베 사후인 2023년 차남인 로버트 무가베 주니어가 하라레 교외에서 열린 파티에 참여해 차량 전면유리를 깨뜨리는 등 난동을 부리며 미화 12000달러(약 1500만 원)의 피해를 입혔다는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물론 본인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
- 2022년 9월 18일 짐바브웨의 유명 저널리스트 호프웰 친오노(Hopewell Rugoho-Chin'ono)가 트위터 투표를 올린 바에 따르면 투표 참여자 중 무려 74%가 이안 스미스를 짐바브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뽑았다. 무가베는 21%[68], 음낭가과는 5%에 그쳤다. 친오노는 이에 대해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겪은 우리들은 ZANU-PF가 이안 스미스보다 더 나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슬프다."고 평했다. #
10. 둘러보기
짐바브웨의 역대 총리 | ||||
(초임) | ← | 초대 로버트 무가베 | → | 2대 모건 창기라이 |
[1] 무가베가 축출된 2017년 기준으로 짐바브웨가 대기근, 말라리아, 에이즈 창궐로 국민들의 평균 수명이 44세로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평균치의 두 배가 훌쩍 넘게 장수했다.[2] 짐바브웨 노턴에 위치한 가톨릭 계열 사립 기숙 고등학교이며, 무가베는 여기서 교사 연수 과정을 거쳤다. 또한 재학 중 학비를 벌기 위해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3] 출처[4] 포브스 발표로 무려 6.5×10^108 = 6,500만 구골(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5] 심지어 독재자 시절 무가베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바로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이 인연으로 북한은 무가베의 동상을 제작해 선물해 주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6] 다른 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남동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부족장이나 주술사의 자녀들이 부유층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7] 쇼나족 추장의 자식도 당연히 있었다.[8] 다만 그와는 별개로 무가베는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9] 사족으로 무가베의 어머니는 거의 100살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10] 북한의 만수대해외개발회사가 건설에 참여했으며, 묘지 관리도 북한인들이 맡고 있고, 묘지의 디자인도 대성산혁명렬사릉과 비슷하다는 말이 많다. 이 무덤에는 독립전쟁 과정에서 전사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정부가 '국가에 대해 헌신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이 안장되며, 2022년 11월까지 총 161명이 이 무덤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무덤에 안장된 사람들 대다수가 무가베 이래로 짐바브웨의 여당이었던 ZANU-PF의 동조자들이었기에 편향성 논란이 있다. 무가베의 사망 직전에는 전직 짐바브웨 고등교육부 장관 조나단 모요(Jonathan Moyo, 1957~)가 "북한이 국립영웅묘지를 더럽히고(tainted) 있다"고 비판하며 건설 과정에 북한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과 '자유를 위해 싸우다 숨진 진정한 영웅'이 아닌 '독재자를 위해 살다 간 이들', 즉 무가베에게 빌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묻혔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11] 예시로 대법원장은 1984년까지 백인 판사였다. 사실 짐바브웨에 흑인 판사가 처음으로 생긴 것도 독립 직후였으니... 덤으로 최소 백인 2명이 2000년대 초까지 짐바브웨의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12] 이는 1987년 폐지되었다[13] 다만 남수단도 2020년 내전이 멈췄는데도 2020년대 내내 취약국가지수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내전의 후유증이 그만큼 크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만.[14] 바로 전 해에 쿠데타와 민주화 시위 학살이 있던 것의 영향이다.[15]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의 여파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는데 2016년 허리케인까지 불어오며 큰 피해를 입었다.[16]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취약국가지수 Top 3 안에 들었고, 특히 2006~2007년에는 취약국가지수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수단조차 114.0점의 벽은 넘지 못했으며, 최고점이 2007년 기록한 113.7점으로 2009년 짐바브웨보다도 낮았다. 이 역시 제2차 수단 내전(2005년 종전)의 후유증이 남은 사례지만 2005년 이전부터 통계가 시작되었으면 짐바브웨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취소선 처리. 물론 짐바브웨는 수단 내전이 끝난 수단보다 높은 점수를 어떠한 전란의 후유증도 없이 기록했다.[17] 남수단 내전 자체는 2020년 종전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18] 게다가 2015~2016년 소말리아 점수가 114.0점으로 2009년 짐바브웨 점수랑 동점이다.[19] 2014 제외[20] 최고점이 113.3점(2010), 최고 순위가 2위(2010)이었다. 당시 차드는 차드 내전이 한창이었는데, 즉슨 최암흑기의 짐바브웨는 최암흑기의 차드보다도 파탄 상태였다.[21] 최고점이 109.3점(2010), 최고 순위도 6위(2010, 2012, 2023)이었다. 아이티도 2010년 아이티 지진 직후인 2011년 5위를 기록했다.[22] 덤으로 시리아는 100점을 처음 넘긴 것도 2014년이었고, 최고점도 111.5점(2019)였다.[23] 무가베가 쿠데타로 축출된 2017년 지표가 반영되었다.[24] 공업화도 상당히 되었고 세계적 강대국이 할거한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데도 1인당 GDP가 아프리카에서도 최하위권의 최빈국 수준 신세다.[25] 석유 매장량 세계 1위인데도 남아메리카 최빈국이다.[26] 풍부한 자원 + 미국의 풍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느릿느릿한 경제성장은 기본에 마지막에는 1인당 GDP를 그야말로 사실상 반토막내버렸다.[27] 유럽(정확히는 동유럽) 국가임에도 최암흑기에는 1인당 GDP가 아프리카에서도 최하위권의 최빈국 수준이었다. 당연히 오늘날에는 그 상흔에서 벗어난 상태다.[28] 사족이긴 하지만, 70년대 후반의 적도 기니는 당시 상황에 빗대어 취약국가지수를 유추해보면 당시 짐바브웨보다도 높게 나오는 것은 물론 어쩌면 소말리아의 역대 최고점까지 훌쩍 넘기며 120점에 가장 근접한 점수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적도 기니의 대통령이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겨우 무가베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폴 포트도 능가하는 학정도 학정이었지만 뜬금없이 고향 별장에 쳐박혀 비밀리에 천도를 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기에 당시 적도 기니는 문자 그대로 '대통령이 있는 무정부 상태'나 다를 바 없었고, 인구의 최소 1/3이 해외로 망명할 정도로 인구 유출이 극심했기 때문이었다.[29] 1위는 앞에서 설명한 헝가리 펭괴이다. 물론 21세기로 한정하면 1위가 맞다.[30] 스위스 프랑화도 비슷한 사유로 위조지폐가 없다. 스위스 프랑화는 온갖 위조방지장치로 떡칠되어 있어서 화폐 가치보다 화폐 제조비용이 더 높다.[31] 과거에는 ZANU-PF에 입당한 적도 있을 정도로 열렬한 무가베 지지자였지만, 구쿠라훈디 학살 등 무가베의 실정을 보고 무가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는 1999년에 야당 '민주적 변화를 위한 운동(MDC)'을 세운 뒤 2002년에 짐바브웨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무가베와 맞붙었으나, 2008년 대선 때와 맞먹는 부정선거 수법이 동원되었기에 선거에는 패했고, 2000/2003/2007/2008년에 4번이나 체포되기도 했고, 특히 55세 생일 다음날이던 2007년 3월 11일에 갑자기 체포된 후 경찰에게 두개골에 금이 가고 최소 3번이나 기절했을 정도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데다가 이 무렵에 경찰에게 폭행을 당한 창가라이의 경호원이 7개월 뒤에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무가베는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2016년 6월에 암에 걸렸다고 발표한 후 2018년 2월 14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병원에서 대장암으로 향년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32] 이후 창기라이는 2013년 9월 11일에 총리직에서 퇴임했다. 참고로 창기라이는 2010년 5월 26일에 내한할 때 배재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33] 인구가 1200만 명도 되지 않던 짐바브웨에서 백인 수는 7만 명 남짓이었다.[34] 2024년 가치로는 2803달러다. 참고로 1975년 세네갈의 1인당 GDP가 561달러 미만이었다.[35] 2024년 가치로는 46720달러로, 2024년 기준 프랑스의 1인당 GDP에 비견되는 수준이다. 참고로 1975년 미국의 1인당 GDP가 (당대 가치로) 7800달러였다.[36] 짐바브웨 전체 면적의 약 35%에 대한민국 면적의 1.4배에 달한다.[37] 당시 정보부는 아예 습격 대상 농장 리스트까지 만들었다고 한다.[38] 정작 이들 중 진짜 '참전군인'들은 15–20% 정도였고, 나머지 대다수는 무가베가 동원한 젊은이들, 즉 상술한 '국립 청소년 서비스 캠프' 출신의 민병대들이었다. 게다가 그 '참전군인'들이 실제로는 짐바브웨 독립유공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가베는 자신의 (사실상의) 사리사욕을 위해 가짜 독립유공자들을 대량으로 양성했다는 이야기가 된다.[39] 대한민국 등 2차 대전 이후 신흥독립국들이 식민지에 부역하던 공무원, 법조인, 군인들을 독립한 고국에서 등용해 이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야 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국가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식민부역자를 써야 했던 것. 물론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무산이 욕을 먹는 것은 노덕술처럼 처벌해야 마땅한 악질들까지 면죄부를 주고 등용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40] 다만 여기에는 유엔과 국제 지원단체의 정치적, 경제적 주축이 과거에 제국주의 국가 출신이었던 백인 국가들(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백인국가는 아니지만 일본도 제국주의 국가 출신에 경제적인 면에서 영향력이 강하다)이기 때문이란 것의 영향도 아주 없지는 않다.(...) 허나 당시 UN 사무총장은 가나(이쪽도 콰메 은크루마라는 독재자가 된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출신의 코피 아난이었으니 별 의미는 없는 따짐이다.[41] 이와 비슷한 일이 전대의 우간다에서도 있었다. 우간다의 상업을 독점하던 인도인들의 재산, 상점을 이디 아민이 몰수해 흑인들에게 분배했는데 흑인들은 인도인들과 정반대로 제대로 된 상업 능력도 없었기에 기껏 분배받은 상점도 제대로 써먹지 못해 우간다의 경제파탄의 단초가 되었다.[42] 이는 당시 로디지아 인구의 8% 수준이었다.[43] 다만 역설적으로 짐바브웨의 독립 이후 짐바브웨의 백인 농부들은 오히려 로디지아 시절보다 더 잘 살았다고 한다.[44] 사실 초반에 멀쩡하게 나라를 다스리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듯 싶었다가 후반에 본색을 드러내며 폭정으로 나라를 말아먹는 것은 흔하다. 심지어 그 이디 아민도 집권 초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45] 말이 그렇지 쉽게 말해 짐바브웨판 독립군들이다.[46] 또한 BBC가 과거 식민지배국이던 영국의 방송국이라 짐바브웨 입장에서 더욱 고깝게 볼 만했던 면도 있다. 사실 과거에도 영국 언론들에서는 짐바브웨의 독립유공자 보훈 연금이 짐바브웨 경제의 파탄 요인 중 하나라고 진지하게 주장한 바가 있는데,(찌라시 언론사가 아닌 정론 언론사들까지 그랬다) 심지어 (식민지 출신인) 한국 언론들에서도 서방 언론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무가베의 지지층인 '퇴역군인'(잘 보면 짐바브웨 독립군들을 단순 퇴역군인으로 폄하했다)에 대한 '과도한' 무상지원으로 재정위기가 심화되어 경제가 망가졌다"는 식으로 응당 해야 마땅했던 짐바브웨의 독립유공자 지원을 폄하해 보도하기도 했다. # 실제로 36000여 명의 (무가베를 지지하는) 독립유공자들에게 지원해 준 돈이 1인당 5만 짐바브웨 달러로 다 합치면 GDP의 3%에 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웃기게도 이들은 후에 음낭가과 정부가 지불해야 할 백인 농장주(자세한 사항은 후술)에 대한 배상금(한화로 4조 원, GDP의 약 16%, 심지어 5년 안에 다 갚아야 함)으로 인해 짐바브웨 경제가 망가질 거라는 소리는 전혀 안 하고 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GDP 3% 쓰면 경제가 망가지는데 16% 쓰면 별 피해가 없다는 거지?[47] 2007년 짐바브웨 인구가 겨우 1245만 명이었다. 무가베는 전쟁도 없는 나라에서 인구의 0.64%를 소년병으로 키운 셈.[48] Solomon Mujuru, 1945–2011. 참고로 부인인 조이스 무주루(Joice Runaida Mujuru, 1955–)는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짐바브웨의 부통령이었다.[49] 아들 셋 중 하나는 죽었고, 현재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다. 참고로 딸의 나이는 1988년생으로 무가베가 64살 때 태어났다.[50] 무가베가 속한 부족이자 오직 무가베에게만 충성을 맹세한 쇼나족 출신으로만 구성되었다. 충격적이게도 제5여단 소속 군인들은 대다수가 무가베가 이끄는 ZANU 소속으로 짐바브웨의 독립을 위한 게릴라 투쟁에 참여했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해방군(ZANLA) 출신, 즉 한국으로 치면 독립군 포지션 출신이었다![51] Perrance Shiri, 1955–2020. 짐바브웨 독립운동 참여 여부가 불명확한데도 무가베의 사촌만이라는 이유로 요직에 앉은 낙하산 인사였으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며 자신을 '검은 예수'라고 자칭했을 정도로 오만한 인물이었다. 1992년부터 2017년까지 짐바브웨 공군 사령관을 역임했고, 후술할 무가베에 대한 쿠데타를 조직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무가베의 축출 후에도 농업부 장관을 역임하다가 2020년 7월 29일에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2008년 12월 13일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암살 시도의 일환으로 총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은 적이 있다.[52] 물론 당시 북한의 국가원수는 김일성이었으나 김정일이 어느 정도 실권을 장악해가던 중이었다.[53] 폴 비야는 2024년 기준 만 91세임에도 별다른 건강 악화 소식조차 없을 정도로 정정하다. 비야 역시 무가베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난한 국민들을 뒤로 한 채 틈만 나면 프랑스, 스위스에 있는 호텔의 고급 스위트룸에서 휴가를 보내서 구설수에 오른 바가 있다.[54] 25개의 욕실로 보도된 경우도 있었는데, bedroom을 bathroom으로 오기한 영미권 기사에 기반한 주장으로 보인다.(...)[55] 치즈케이크는 일반 케이크류 중에서 탄수화물 함량이 가장 낮은 축에 든다. 시트와 반죽에 들어가는 설탕 정도만 탄수화물이기 때문. 또한 이 때문에 키토제닉 식으로 만들기도 쉽다.[56] 둘 다 북한 이상으로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통치로 악명이 자자하다.[57] 물론 독재자 중에서도 호화스런 식생활을 즐긴 인물은 이들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하다.[58] 전용 요리사와 주치의, 운전수, 별장도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들도 다 갖추는 거라 사치 취급도 받지 못한다.[59] ZANU–PF는 짐바브웨의 집권당의 영문 약자이다.[60] 위 사진 2개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의 26회 주제인 '글로벌 최악의 지도자'에서 9위로 선정된 무가베의 사치행각 설명 중 첨부되었다. 제작진이 여기서 사진을 가져왔는지는 불명. 또 안경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저건 진짜 케이크가 아니다. 케이크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플라스틱 인형이다.[61] 그러나 현실은 후술하듯 93세에 쫓겨나고 95세에 죽었다.[62] 평소 만델라는 다른 지도자를 비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도 이름은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어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63] 여담으로 무가베와 만델라 모두 같은 95세에 죽었다.[64] Bulawayo, 짐바브웨 서남부에 있는 도시로, 세실 로즈가 총독 관저를 지은 곳이기도 하며, 오늘날에는 짐바브웨의 제2도시이다.[65] 사실 이 때문에 로버트 무가베도 같이 금지되어 있지만, 정상회담이라 예외적으로 이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무가베에 한해서만 입국을 허가해준 것이라고 한다.[66] 다만 이 말은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아니게 되긴 했다.[67]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특성상 사실상 백인 식민지 국가나 다를 바 없었으므로 무가베를 독립운동가라 표현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표현은 아니다.[68] 허나 저렇게 나라를 박살냈는데도 국민 1/5이 여전히 무가베를 지지하는 것부터가 독립영웅 무가베의 이미지를 그리워하는 짐바브웨인들도 많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