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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멕 마야 테오티우아칸 테노치티틀란 톨텍 | <colbgcolor=#006847> 아즈텍 제국 | 스페인 제국 누에바 에스파냐 | 제1제국 | 임시정부 | 제1연방공화국 | 중앙집권공화국 | 제2연방공화국 | 제2제국 | 합중국 | |
틀락스칼텍 | ||||||||||
사포텍 | ||||||||||
미스테카 | ||||||||||
타라스칸 | 유카탄 공화국 |
삼국동맹 Ēxcān Tlahtōlōyān[1] | |||||
나와틀어 상징 | |||||
1519년 아즈텍 제국의 최대 강역[2] | |||||
1428년 ~ 1521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테노치티틀란 왕국 | 스페인 제국 [[누에바에스파냐| 누에바에스파냐 ]] | ||||
위치 | 멕시코 고원 일대 | ||||
정치 체제 | 연맹왕국, 도시국가 | ||||
수도 | 테노치티틀란 (사실상) | ||||
국가 원수 | 우에이 틀라토아니(황제) | ||||
주요 황제 | 이츠코아틀(1428~1440) 몬테수마 2세(1502~1520) | ||||
민족 | 메시카족 외 아메리카 원주민 | ||||
인구 | 5~6백만 명 | ||||
언어 | 고전 나와틀어 | ||||
종교 | 아즈텍 국교[3] | ||||
주요 사건 | 1428년 삼국동맹 결성 1521년 멸망[4] | ||||
면적 | 220,000 km2[5] (1520년) |
언어별 명칭 | |
<colbgcolor=#CCCCCC,#212121>한국어 | 삼국동맹 아즈텍 제국 메시카 제국 |
고전 나와틀어 | Ēxcān Tlahtōlōyān |
나와틀어 | Mēxihcatlahtohcāyōtl |
스페인어 | Triple Alianza Imperio azteca Imperio mexica |
영어 | Triple Alliance Aztec Empire |
중국어 | 阿茲特克帝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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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세기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아스카포찰코국의 제후국인 테노치티틀란국이 1428년 주군국을 제압하고 근방의 도시국가들을 복속하여 성립된 연합 제국이다. 근본적으론 테노치티틀란 왕국이 영토를 확장한 형태이기에 테노치티틀란 왕국 시기와 제국 시기를 통틀어 아즈텍 제국이라 칭한다.2. 명칭
'아즈텍 제국'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의 학자들이 편의상 사용하는 명칭이다. 테노치티틀란을 세운 민족은 스스로를 메시카(/meːˈʃiʔka/), 그리고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메시코 테노치티틀란(/meːˈʃiʔko tenoːt͡ʃˈtit͡ɬan/)이라고 불렀다. 아즈텍은 메시카족의 건국 신화상의 고향인 '아스틀란'(Aztlan)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18~19세기의 유럽 사학자들이 근대 멕시코와 유럽인 도래 이전의 메시카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 붙인 것이었다. # 후대의 학자들이 편의를 위해 역사상의 특정 국가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흔한 현상으로, 동로마 제국도 그러한 예이다.삼국동맹[6]이란 명칭은 스페인 식민 시기에 처음 등장한 이름이고, 이것이 아즈텍 제국 당시에도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제국/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인구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막연한 인식, 소규모 콩키스타도르에 패망한 역사 등으로 인해 도시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종종 오해받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고 당대 유럽권과 유사한 수준의 인구 밀집도를 보였다. 아즈텍 제국의 총 인구는 500~600만 명으로, 동 시기 영국보다도 인구가 많았다. 세계 기준으로도 그럭저럭 인구 대국이었던 셈이다.[7]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인구는 약 8~2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이 역시 상당한 대도시이다. 그때 런던이나 파리는 5~10만 명이었고, 구세계의 역사적인 대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바그다드의 전성기 시절의 인구가 약 50만 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8] 개별 도시 인구는 아니고 도시권을 묶은 인구이기는 하지만, 전근대 도시는 본래 수도/식량 공급이나 위생적 한계로 소도시들이 연계된 형태의 도시들이 많았다. 도시권 인구로 보아도 유럽의 여러 도시와 비슷한 수준이다.[9]
5. 문화
인신공양 풍습 때문에 대중문화에서는 잔혹한 고대 문명 정도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지만 알고 보면 뛰어난 천문학 기술, 대규모 도시 건설, 무상 의무교육 실시 등 꽤나 고도로 발전한 문명이었다. 애초에 인신공양은 당시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보편문화라서 굉장히 체계적이고 절도있게 행해졌으며, 따라서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야만과는 거리가 멀다.종말론 떡밥으로 유명했던 마야 달력 만큼은 아니지만 아즈텍의 달력인 태양의 돌도 종말론과 엮여서 상당히 유명하다. 돌에 새겨진 아즈텍 신화에서, 이전에 지구에 네 번의 멸망이 닥쳤고 또 닥칠 것이라 예언한다는 부분 때문에 음모론자들이 흥분할 만한 지점이 좀 있기 때문. 물론 이건 그들이 떠드는 것처럼 외계인 조우같은 게 아니라 재난이 흔해서 문명이 빈번히 교체될 수밖에 없던 메소아메리카의 역사로부터 생긴 신화다.
5.1. 교육
여러 사회 요소들 가운데서도 특히 교육을 가장 중시해서, 최초로 모든 '자유민'들에게 신분에 상관 없이 남녀 모두에게 의무교육을 실행한 국가[10]였다. 물론 말만 제국이지 실상은 수많은 도시국가들로부터 조공만 받고, 내정은 일절 간섭하지 않는 도시국가들의 군집인지라 행정력이 닿는 유일한 직할지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시민들에 한해서였다. 그래도 당시 시대상 의무교육의 개념조차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진보한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징병제 국가였기에 남성은 체력 단련, 군사 교육, 가상전쟁 훈련과, 기초적인 종교 교육 등을 받았다. 학문의 경우, 평민 학교에서는 농사와 사냥에 필요한 생활 지식과 숫자 세기 등을 가르쳤으며 귀족과 왕족 자제들의 경우 사제들이 더 높은 수준의 수학 및 종교 지식과 철학, 역사, 역법 등을 가르쳤다. 여성은 기초적인 생활 지식과 집안일, 여성으로의 몸가짐 등을 익혔다.
5.2. 인신공양과 종교 제의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 참고하십시오.신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5.3. 가톨릭으로 개종되기까지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부터 온 스페인 제국의 콩키스타도르들과 스페인 선교사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고대에는 인신공양 제례가 있었다고는 하나 가톨릭 전래 이후에는 고대 레반트 지역의 인신공양 풍습이 상징화되어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라고 말하는 제사를 빼면 완전히 사라졌고[11] 스페인에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스페인 전역을 정복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구대륙과 고립된 채 빈번한 재해로 고대적인 종교의식이 유지될 수밖에 없던 아즈텍의 사정을 중세 유럽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결국 이들의 눈에 인신공양은 반드시 척결되야 할 악마의 농간쯤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황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야만적인 문명을 계몽시키고 있다.'라는 도덕적 정당화와 낭만적인 영웅주의적 포장이 잔뜩 들어간 서사가 먹혀들어가기 좋은 지점이었으므로 악마화도 더해졌다. 여기에 더해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의 침략 과정에서 여러 문헌과 유적이 파괴되면서 식인설을 포함해 인신공양과 관련한 악마화도 이루어졌다. 특히 아즈텍 신화와 역사, 종교의례에 대한 소실과 왜곡이 심각하다. 세상의 도덕적 양면성을 인정하는 아즈텍 종교의 세계관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선교사들이 이해하지를 못해서 온갖 왜곡을 가해 재해석한 바람에 아즈텍 신화를 테스카틀리포카라는 악신과 케찰코아틀이라는 선신의 대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다만 스페인인 모두가 아즈텍 문화 소실을 자행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즈텍 토속신앙은 문화인류학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 원주민들과 같이 나와틀어로 된 기록을 굉장히 상세히 남겼던 바 있고, 당시 예수회나 프란치스코회 성직자들 중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 등에도 박식한 지식인들도 있었던지라 모두가 흑백논리에 빠진 근본주의자인 건 아니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소수 온건파의 입장에서도 원주민 문화를 왜곡하고 희생시켜서라도 원주민을 카톨릭으로 무조건 개종시켜야 한다는 기본지침이 변경되지는 않았다.[12] 특히 원주민들의 빈번한 반란에 위기감을 느낀 식민화 초기에는 하루라도 빨리 스페인의 문화적, 종교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이는 강경파의 문화 탄압에 대한 방조로 이어졌다. 상술한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역시 멕시코 지역에 파견된 것은 아즈텍이 멸망한지 8년이 지난 1529년이었고, 그가 저술한 피렌체 문서는 고고학, 문화학적 측면에서의 정확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에게 미리 아즈텍의 문화를 교육하기 위한 저서란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의도적인 야만화가[13]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목적은 더 많은 원주민들을 더 많이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이 때문에 창세 신화같은 기초적인 문화의 기틀 역시 제대로 서술되지 않았기에 이를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바야돌리드 논쟁에서도 보듯, 콩키스타도르들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원주민 부족들에게 잔혹한 통치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동안 붙잡은 사제나 귀족 계급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켰으며, 신화 및 역사문헌 파괴에 저항하는 사제와 사관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또 일찍이 회유에 넘어가 복종을 맹세한 자들에게는 기득권 지위를 부여하는 등 큰 혜택을 베풀었다.[14] 물론 제국을 전부 통제하기에는 코르테스 일당의 수가 적기도 했고, 무조건적인 파괴만 일삼아서는 오랜 세월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한 문명의 고유종교를 말살하기는 무리였다. 이후 폭압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콩키스타도르는 몇가지 보조적인 정책을 동원했다.
우선 스페인 침략자들은 인신공양이 벌어진 이유가 말/소/돼지/양 같은 대형 가축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했고, 사육 난이도가 낮고 번식율이 엄청 높은 돼지[15]를 구해서 키우게 했다. 다만, 돼지의 보급이 다소 영향을 끼치긴 했어도 인신공양이 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카톨릭이 아즈텍 종교에 유화적인 때가 없었으므로 돼지를 이용한 공양 역시 허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원인은 사회제도에 있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를 신대륙에 이식한 형태인 엔코미엔다 방식이 멕시코에 정착한 콩키스타도르들 사이에 보편화되면서, 점차 '영주-교회-피정복민'이라는 유럽식 질서가 원주민들에게 익숙해지며 카톨릭이라는 이방 종교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토대도 만들어졌다. 1503년에 제정된 엔코미엔다 제도의 목적은 아메리칸 인디언의 지위를 규정하여 신대륙 발견 직후에 행해진 강제 노역의 악습을 줄이고자 제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원주민을 노예화하는 제도로 악용되었으며, 사실상 과거 아즈텍이 요구했던 조공 이상의 공물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면서 반란의 싹수를 잘라버릴 탄압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문화 및 종교탄압이 지속되고 구대륙에서 비롯되는 물질적 기반이 마련되자 카톨릭이 급속도로 퍼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부터 카톨릭과 관련된 사료가 많이 발견된다. 과달루페의 성모 전승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전승들은 현대에 와서는 토착 종교유산의 파괴를 정당화하고 원주민 개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톨릭의 프로파간다라는 비판도 많다.
그러나 멕시코 일대 정복 이후 가축들이 대거 들어온 뒤에도 인신공양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인신공양을 부추긴 가장 큰 원인이 종교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근과 재난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를 불식시키는, 메소아메리카 환경의 특수성에 발맞춰 발전한 종교가 오랜 세월 정착해 있었기에 인신공양을 하루아침에 없애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이들의 개종에 성공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메소아메리카의 인신공양 교리가 가톨릭의 성체성사 교리와 꽤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인신공양 외에도 옥수수 가루를 사람 모양으로 반죽한 또띠아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나와틀 종교의식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에서 둘이 닮은 부분이 있었다.
이러한 성체성사 교리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실 기존 나와틀 종교의 교리에서 '위대한 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한다는 관념'이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아즈텍을 비롯한 멕시코 원주민들의 신화에서 신들은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들 역시 결국 언젠가 힘을 잃고 쓰러질 운명이었다. 아즈텍의 신들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존재들로, 태양신 토나티우가 결국 모든 힘을 잃고 죽는다면 곧 다섯차례의 멸망을 이은 새로운 멸망이 도래할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신들의 존재를 지속시켜주는 에너지, 만물에 깃들어 순환하는 토날리를 바쳐야 했다. 이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신들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메소아메리카 신화에는 신들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스스로 혹은 서로의 심장을 바쳐 태양에게 토날리를 공급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신들조차 자신을 공양하여 태양에게 토날리를 바치는데, 인간은 당연히 신들을 본받아 이들의 의식을 돕고 우주의 운행에 기여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세계관은 예수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그리스도교의 성체성사 교리가 메소아메리카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또띠아로 만든 성체'와 '코치닐 염료로 염색한 음료'를 이용해서 누구보다 고귀한 제물인 하느님의 아들이 인신공양되어 세상의 멸망을 늦춘 사건을 매주 재현하는 변용은 메소아메리카인들에게 나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영구히 제물이 되어주셨으니 더 이상 사람이나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 자체가 여타 종교의 과비용적인 제사의식들을 밀어내고 거대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던 원동력 중 하나였으니 이는 메소아메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구세계[16]에도 고대에는 바알 신앙 등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종교가 있었고, 인신공양을 혐오한 고대 로마 종교나 고대 유대교에서도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은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이 같은 교리는 이전의 기존 종교에 비해 간소하고 효율적인 종교의식을 통해, 특히 가축을 제물로 바칠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어필됐다. 이와 같은 현상이 아즈텍에서도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례성사 역시 몸과 영혼의 병을 고치는 신비한 의식으로 여겨져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졌다.[17] 물론 이는 기존 나와틀 종교의 물의 여신 숭배 중에 카톨릭의 세례처럼 물로 신도를 축복하는 의식이 있어서 아즈텍인들에게 익숙하기도 했고, 고유종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골자로 성체성사와 세례성사를 보조적으로 보급했기에 개종에 성공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런 급격한 개종은 이후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교황이 원주민의 권리를 개선하는 판결을 내리는 데 기여했다.
5.4. 꽃 전쟁
아즈텍의 전쟁 방식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꽃 전쟁이다. 무기들은 오로지 마쿠아후이틀과 방패만을 이용하며, 매복이나 함정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아야했고, 양측의 머리수 역시 동일해야했다. 이러한 전쟁에서 벌어진 적군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것. 이렇게 생포된 포로들은 인신공양에 이용되었거나 아니면 상대 측 지도부에게 알려 포로 몸값을 뜯어내는 식으로 이용되었다.5:5부터 400:400까지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일어난 국지전으로, 이는 틀락스칼텍같은 아즈텍에 비해선 영세하나 언제든 강력해질 수 있을 잠재력을 가진, 아즈텍에 적대적인 도시국가들을 상대로 벌어진 전쟁들이다. 아즈텍만의 고유의 전쟁 방식은 아니고 아즈텍 이전 고전기부터 존재해왔던 전쟁 방식이나, 틀락스칼텍과의 200여년 간의 꽃 전쟁은 특기할만한다.
한창 테츠코코 근방을 평정하고 여러 민족 도시 국가들을 복속시켜가며 규모를 불리던 아즈텍은 근방의 틀락스칼텍 역시 몇 번 공격했으나, 이를 요격한 틀락스칼텍 병력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틀락스칼텍을 정복하는 것은 매번 실패했다. 애초에 틀락스칼텍은 목테수마 1세까지도 약소국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테노치티틀란을 견제할 정도로 강대한 도시국가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틀락스칼텍에 대한 공략이 매번 실패하고, 그렇다고 틀락스칼텍과의 원수 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놔뒀다간 틀락스칼텍이 어느 사이에 강대해져서 아즈텍을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 사용한 방책이 바로 서로 간 합의를 하고 벌어지는 소규모 국지전을 통한 견제, 즉 '꽃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전쟁 형태였다.
이는 세력 간의 전면전이 발생했을 시 교착 상태로 빠지고 이에 대해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전통적인 의례 전쟁이었다. 이런 형태의 전쟁은 양측에 여러 이점이 있었다. 아즈텍은 막대한 전비로 인해 경제가 망가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틀락스칼라를 포위하고 사실상 손아귀 안에 있음을 과시할 수 있었고, 틀락스칼라 입장에선 전면전으로 들어간다면 막대한 출혈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상대 측 고위급 전사를 잡으면 포로의 몸값을 받아낼 수 있었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200여년간 이러한 꽃 전쟁을 통해 균형을 맞춰왔으며 다른 도시국가들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18]
그러나 이러한 꽃 전쟁의 지속은 틀락스칼텍같은 복속되지 않은 크고 작은 부족 세력들과 아즈텍 사이에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악감정을 불러올 것이 명확했다. 계속된 아즈텍의 압박과 방어전에 이골이 난 틀락스칼텍은 언제든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하고 싶어했으며, 그러한 감정이 코르테스의 에스파냐 군대와 만나게 되면서 결국 아즈텍 입장에선 최악의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꽃 전쟁 같은 소규모 국지전을 통한 영향력 행사는 고대 그리스 같은 도시국가들의 연합 형태의 권력 구도를 가진 여러 국가들에선 의외로 흔한 형태의 전쟁이기도 하다.
비슷한 것이 스파르타와 메세니아의 관계다. 스파르타도 실질적으로 정복한 영토인 메세니아를 일부러 멸망시키지는 않고 남겨두었고 매년 메세니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해 쳐들어가 메세니아인들을 죽였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메세니아를 잃는데, 스파르타가 테베와의 전쟁에서 진 후 테베가 메세니아를 실질적으로 독립시키자마자 그동안 스파르타가 저지른 만행에 이를 갈며 스파르타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지하고 재침공에 대비해 방어준비를 했다. 이후로도 메세니아는 스파르타가 참여한 동맹에는 절대로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반스파르타 성향을 띄게 된다. 이는 틀락스칼텍이 어떤 협상도 없이 메소아메리카 외부의 침략자 편에 붙어 아즈텍을 멸망시키려고 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꽃전쟁은 다른 나라 역사의 국지전과 명확히 구별되는 몇가지 독특한 점이 존재한다. 상술한 스파르타의 경우 단지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메세니아가 절대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고 속임수를 썼던 반면, 꽃전쟁은 형식적이기는 했을지언정 종교적 의례성이 강하고 틀락스칼텍이 역으로 아즈텍에 쳐들어갈 정도로 공평한 대결을 지향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메세니아의 경우 명확하게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여 사실상의 복속 관계였던 반면, 틀락스칼라는 불리하긴 했지만 끝까지 저항하여 정복당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즉, 틀락스컬텍이 일방적으로 탄압받는 피지배민족이었다는 통념과 다르게,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은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동등한 위치에서[19] 연합체를 형성했을 뿐인 전통적 대립관계에 가까웠다. 한 마디로 국력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어느 한 쪽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만큼 균형 유지를 위해 서로의 국력을 소모시켜야 했으니, 그 수단으로 선택한 방법이 바로 꽃 전쟁이었다.
꽃 전쟁은 아즈텍과 그 주변국들의 신화적 세계관에 입각했을 때, 이러한 현실 정치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중단할 수 없는 대립을 지속하면서도 느슨한 연맹을 유지하는 모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명분이 있는 방안이었다. 상술했듯이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인신공양 풍습은 훨씬 이전의 문명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으며, 아즈텍의 대규모 인신공양 역시 목테수마 1세 시기에 아즈텍과 주변국의 사제들이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고 동등한 관계에서 참여하여 합의 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였다. 인신공양의 원인이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였고, 자연재해는 제국이든 약소국이든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기에 태양신의 죽음을 막으려면 함께 합리적인 인신공양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측 기록에는 틀락스칼텍이 마치 아즈텍의 속국이자 인신공양의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스페인 본국의 독자들에게 정복자들을 영웅화하고 그들을 도운 원주민은 쳘저하게 무지하거나 피해자인 존재로 포장될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스파르타를 포함해 대부분의 국가가 사로잡은 포로를 노예로 부려먹은 반면, 아즈텍은 포로를 신성한 인신공양의 제물로 취급해야 했기에 인신공양 전까지 아즈텍의 전사로서 최대한 예우와 대접을 해주는 독특한 풍습[20]이 있었다는 것도 뚜렷한 차이점이다. 그래서 콩키스타도르가 인신공양 직전의 제물을 구해줬더니 왜 내가 신에게 가는 길을 막느냐며 제물이 역으로 반발한 사례도 자주 있었다. 당시 패전한 전사가 인신공양되지 않는다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가족에게조차 신들의 뜻을 져버린 가장 수치스러운 불명예로 취급됐다고 하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상기한대로 아무리 거대한 제국이라 한들, 서로 간의 머리수가 똑같고 무기가 제한되며 매복이나 함정이 없는 제한전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이는 몬테수마 2세의 치세에서 두드러졌다. 꽃 전쟁이 6번이 있었는데. 0승 4패 2무, 즉 한 번도 못 이겼고, 심지어 한 번은 침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는 몬테수마 2세가 아즈텍 제국의 재규어 전사 제도를 폐지해 전문적인 전투 집단의 양성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필요할 때 전쟁을 선포하는 건 주로 전사의 머리수가 압도적인 아즈텍이었기에, 주변국들은 꽃전쟁이 필요하다고 여기면서도 노동력에 필요한 건장한 남자들을 전쟁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하는 아즈텍의 갑질에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6. 경제
지역마다 다른 통화가 사용되었다. 물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 화폐 단위는 카카오이다.위조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행한 아즈텍에서도 밀랍이나 점토, 야생 카카오 아종 등으로 위조화폐를 만드는 생계형 위조범들이 있을 정도로 카카오 콩은 상당히 귀중한 소액 화폐였다. 모든 카카오 콩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고, 종과 출처가 된 지역에 따라 크고 작은 가치의 편차가 있었다. 고액 화폐의 경우에는 후에 서술되는 콰치틀리 면포나 금속으로 된 도끼날 등이 있었으나, 누에바에스파냐 시대로 접어들며 에스파냐의 화폐들이 유입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카카오 콩은 누에바에스파냐 시대에도 살아남았고,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부 지역에서 화폐로서의 기능을 했다. 누에바에스파냐 시대가 되면 에스파냐의 레알 및 페소들과 병행했는데 이를 통해서 명확한 가치 편차를 알 수 있다. 레알은 200개의 카카오 콩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8레알은 1페소의 가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고액 화폐인 콰치틀리(quachtli) 면포 역시 품질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가치를 가졌으며, 작게는 카카오 콩 65개부터 크게는 240 ~ 300개까지 다양한 가치의 편차를 가졌다.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일반인들은 1년에 20개의 면직물을 소비할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술했듯, 에스파냐의 화폐들이 유입되면서 결국 쇠퇴하게 된다.
아즈텍인 사회의 중심은 여느 문명들과는 크게 다르지 않게, 시장이 중심이 되었다. 특히 도시국가들을 포함한 대제국으로 성장한 아즈텍이 무역 체계를 독점한 이후, 도시국가들에서 나오는 수많은 공물과 상품들이 아즈텍의 시장을 오고 갔다. 장날이 되면 60,000명이 올 수준이었던 테노치티틀란의 틀라텔롤코 중앙 시장은 에스파냐인들도 놀랄 수준으로 거대했으며, 이러한 시장의 존재를 본 한 스페인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가는 것과 천당에 가는 것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대개의 아즈텍 부인들은 천당을 고른다. 그러나 먼저 천당에서 시장에 갈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강을 통해서 물자가 오가고 상인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아즈텍의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5일장이 섰다. 그만큼 귀족들과 왕족의 소비력이 막강했으며, 새의 깃털과 재규어의 가죽, 카카오와 황금, 해안지역에서 가져온 굴, 거북, 가재 등 온갖 물자들이 몰려들었으며 밀수 역시 이루어졌다.#아즈텍에 바퀴가 있었는지 여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지만, 대체로 바퀴가 물류 수송에 커다란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수도 테노치티틀란부터가 운하도시였고, 물류에서 카누가 차지하는 부분은 현대의 자동차 그 이상이었다. 아즈텍에서는 상인의 카누를 부수는 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더군다나 수레를 만들어도 이를 끌만한 마땅한 원동력, 즉 소, 말같은 종의 대형 우제류들이 없었던 메소아메리카에선 바퀴가 쓰이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실제로 이 지역의 바퀴 유물도 완구같은 형태로만 발견되고 있다.
다만 수도가 내륙에 있었던 아즈텍에 도로망이 미비했던 건 페널티였는데, 이것 때문에 전성기의 영토도 잉카 제국의 1/10을 겨우 넘겼고, 아즈텍의 멸망 당시 잉카와는 다르게 피난이나 임시수도 같은 시도도 못해보고 그대로 멸망했다.
도구의 대부분이 나무나 돌이었고, 철을 다루지 못했던 탓에 나무를 베는게 어려워서 숲을 밀어버리고 개간을 하는 건 어려웠다. 다만 농업 자체는 번성했다.
아즈텍은 주로 채식 위주로 식사를 했으며, 육류도 먹었는데 여러 양서류, 파충류 동물들과 곤충류들을 별미로 먹었다. 주요 가축으로 개, 칠면조, 오리 등이었다고 추정되고는 있으나, 이 부분은 불확실하다. 칠면조 뼈같이 확실하게 증거가 남아있는 마야 문명을 통해서 추정만 할 뿐이다.[21] 또한 주요 작물로는 콩이나 땅콩 등의 견과류, 용설란, 옥수수, 토마토, 아마란스 등이 있었다.# 밀, 쌀같은 노동집약적 문명의 안정성에 주요 역할을 하는 곡식들이 없었던 메소아메리카 지방에서 지력을 굉장한 수준으로 소비하고, 보관도 어려운 옥수수같은 주요 작물들의 한계와 지력을 회복시켜줄 대형 가축의 부재는 아즈텍의 발전에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이는 곧 자연스럽게 식량이 인구 수를 제한시키는 맬서스 트랩에 빠지게 만들었고, 이러한 한계는 잉카 같은 타 아메리카 계열 문명들도 마찬가지였다. 감자 같은 다른 작물들은 안데스산맥을 넘지도 못했고, 설사 넘어와 아즈텍에서 재배되었다고 해도 결국 한계는 확실했기 때문에 곡식의 부재를 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7. 야금술
메소아메리카 지역은 전체적으로 야금술의 유입이 늦었다. 남아메리카나 북아메리카 지역의 원주 문명들, 특히 오대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기원전 5500년대 당시 사용된 유물이 출토될 정도였고, 남아메리카는 기원전 2150년대에 만들어진 금속 유물이 출토된 데 비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금속 유물은 기원전 200년대에 출토된 유물이다. 초기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야금술이 퍼진 곳은 현대의 에콰도르 지방 문명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멕시코 서부 지역으로, 10세기 초반에는 멕시코 서부에서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널리 퍼졌다.아즈텍에서 야금술의 주요 재료로 사용된 것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문명들과 유사하게 금, 은, 그리고 구리 등이었다. 이러한 금속들이 널리 쓰인 것은 유라시아 문명들도 그러하듯, 가공이 쉬웠기 때문이었고, 특히 청동을 통해 실생활에 쓰일만한 도끼나 농기구같은 여러 도구들까지 만들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금속 기술들의 발전이 곧장 무기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금속제 무기들보다는 흑요석 무기들이 더 널리 쓰였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부서지거나 하면 쓰기 어려운 금속 무기들과 달리 발전한 흑요석 가공 기술을 통해 흑요석 무기들을 쉽고 간편하게 만들 수 있었고, 무뎌지면 부러트린 후 다시 쓰면 되었다. 또한 아즈텍의 금속 무기 유물로는 화살촉 등이 있었으며, 콩기스타도르들이 아즈텍을 침략할 즈음엔 아즈텍인은 청동기들을 실험하면서 여러 성분을 가진 금속들을 만들고 있었다.#
8. 사회 구조
8.1. 사제 계급 / 틀라마티니
8.2. 귀족 계급 / 피필틴
서양 문명에서 귀족으로 불리는 계층인 지도자층을 아즈텍에선 피필틴(Pipiltin)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지위는 상속되었으며 힌두교의 크샤트리아 계급처럼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고위직을 담당하여 공무원, 제사장, 대상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유럽의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기관인 '칼메칵'(calmecac)을 운용했으며 이 곳에서 제례, 전쟁 수행, 행정 기술과 같은 실무 능력과 고위층으로서 요구되는 사교 예절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교육기관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피필틴뿐이었다.
일본의 다이묘처럼 피필틴들은 행정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한 크기의 봉토를 하사받았는데, 이를 '필랄리'(pillali)라고 불렀다. 이 봉토는 아즈텍 사회에서 실질적인 농노 계층인 '마예케'(mayeque)들이 운영했다. 마지막으로 피필틴들이 정부로부터 받는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조세의 완전 면제였다.
8.3. 평민 계급 / 마세우알틴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 장인 그리고 소수의 상인들로 구성된 이들을 마세우알틴(macehualti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 바쳐야 하는 의무를 지닌 일종의 신민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주로 마을 규모의 공동체 경제 단위를 구성하며 살았는데 이를 '칼풀리'라고 불렀다. 칼풀리는 일종의 지연과 혈연으로 묶인 집단을 말했으며, 각각의 칼풀리는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고 이를 후대의 구성원에게 물려주었다.
이런 칼풀리를 운영하기 위한 마세우알틴 계급의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따로 존재했는데, 이를 '텔포치칼리'(telpochcalli)라고 불렀다. 이 교육기관은 기초적인 종교 신앙과 전쟁에서 징집병의 역할을 수행할 마세우알틴들의 전투 교육, 그리고 일상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했다.
8.3.1. 테쿠틀리, 테칼레케, 칼풀레케
마세우알틴들의 사회체계를 결정하는 칼풀리는 그들 사이에서 지배와 피지배 계층을 나누기도 했다. 칼풀리를 지도하고 법적•경제적 책임을 지는 이들을 테쿠틀리(tecuhtli)[22]라고 불렀으며, 칼풀리 내에서 나오는 일정량의 생산물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마세우알틴들은 이 테쿠틀리를 통해서 중앙에 세를 납부했는데, 자신이 속한 칼풀리에 세수를 바치는 이들을 테칼레케(tecaleque)라고 불렀으며, 틀라토아니(아즈텍 사회의 종교체계)에게 세수를 납부하는 이들은 칼풀레케(calpuleque)라고 불렀다. '칼풀리'라고도 불리는 이 사회 체계는 아즈텍 사회 체계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8.4. 노예 계급 / 틀라코틴, 마예케
노예로 번역되는 아즈텍의 노예 계급을 틀라코틴, 또는 마예케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노예'라고 번역되지만, 노예보다는 채무나 죗값을 갚을 능력이 없어 노동력으로 갚는 일시적인 상태에 가깝다. 때문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서유럽의 노예와는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 노예가 되는 이유
이들은 정복한 도시의 공물로서 끌려온 전쟁 포로가 대부분이었다. 자유민이나 귀족이라도 죄를 지으면 틀라코틴으로 강등당할 수 있었다. 큰 빚을 져도 노예가 되었고, 거액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었다.
- 세습되지 않음
서유럽 노예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아즈텍 노예 계급은 세습되지 않았다. 노예의 자녀는 평민으로 인정받았다.
- 업무 외 생활의 자유, 재산 소유권
노예들도 성실하게 일만 한다면 개인의 일상생활에 전혀 침해를 받지 않았으며, 결혼하여 자녀를 가질 수도 있었고, 돈을 벌어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심지어 소유권에는 '다른 노예'도 포함되어 있어서, 노예가 노예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23]
- 노력에 따라 해방이 가능함
빚이나 죗값을 전부 갚으면 해방되었다. 또한 노예일지라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면 자유를 얻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사가 될 수 있었다.
- 부당한 학대로부터 보호받음
주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노예를 폭행하거나 학대하면 그 소유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주인이 자신을 부당하게 학대할 경우, 지역 내 특정 신전으로 도망치면 그 자리에서 해방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8.5. 계급 간의 사회 이동
아즈텍은 매우 엄격한 법률을 가진 제국이었으나, 그와 별개로 계급 제도만큼은 다른 국가들보다 매우 유연했다. 아즈텍의 계급은 태어날 때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넘나들거나, 죄를 지어 강등당할 수도 있었다.이 벽을 가장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24]. 사회 지도층이자 귀족인 피필틴의 경우에는 전공을 세우거나, 포로를 잡아오는 수에 따라 더 많은 봉토를 선사받았다(이는 아래에 설명된 꽃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평민 계급인 마세우알틴도 피필틴들의 무공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여주면 피필틴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도 피필틴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노예 신분인 틀라코틴의 경우, 죗값이나 채무를 모두 청산하거나 전투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자유민이 되었는데, 이를 재규어 전사나 독수리 전사라 불렀다. 오늘날로 따지면 장교에 해당하는 자유민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재규어 전사와 독수리 전사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재규어 전사는 전술한 대로 평민이 4~8명 정도의 포로를 잡으면 노예병도 공적을 세워 평민으로 해방되면 될 수 있는 위치였지만 독수리 전사는 귀족 계급이거나 귀족으로 신분상승할 수준의 공적을 세워야만 될 수 있었다. 현재로 비유하자면 위관과 영관 수준의 계급 차이가 존재한다.
아즈텍 사회의 법률은 굉장히 엄격했고, 계급 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진행되었다. 피필틴의 경우,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처벌을 통해서 마세우알틴으로 강등될 수 있었으며, 심각한 범죄의 경우에는 틀라코틴으로 더 강등시키거나 아예 제물로 써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계급 간 이동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다른 아즈텍 사회의 경쟁력 중 하나였으나, 사실상의[25] 마지막 황제였던 몬테수마 2세가 제위에 관련된 문제로 큰 곤혹을 치른 이후 계급간 이동이 상당히 경직되었으며, 특히 재규어 전사를 폐지하면서 국방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다만 몬테수마 2세가 재규어 전사 제도를 폐지한 이유는 당시 재규어 전사들이 특권계층화 되어 중세 아랍의 맘루크나 18~19세기의 예니체리처럼 정치에 멋대로 개입하는 등 폐단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규어 전사의 대체제가 나오기도 전에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침략해버렸다는 것이다.
8.6.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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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우테목 | 틀라코친 | 모텔치우친 | 소치켄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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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니친 | 테우에츠키티친 | 오마카친 | 세세친 | |
제17대 | ||||
나나카시팍친 |
자세한 내용은 틀라토아니 문서 참고하십시오.
9. 잉카와의 연관성
중앙아메리카 최대의 세력 아즈텍 제국과 남아메리카의 최대의 세력 잉카 제국과는 동시기에 공존했고, 스페인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에 멸망한 시기도 비슷하다. 양국은 각 지역에서 패권세력으로 군림했으나 《총, 균, 쇠》에 따르면 정작 양국은 단순히 교류가 없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존재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2,000년 전에 유라시아 양 끝단, 8000km나 떨어져 있는 로마 제국과 한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교류도 있었던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단절된 이유는 두 제국의 사이에는 아마존 같은 울창한 정글지대와 높은 안데스산맥이 자연적인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26] 그리고 바다와 인연이 없어 항해술이 발달한 문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다로 우회할 수도 없었다.《총, 균, 쇠》에서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수레를 끌 수 있는 짐승인 잉카 제국의 라마와 수송의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도구인 아즈텍 제국의 바퀴가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담아서 서술하고 있다. 힘 좋은 가축과 바퀴 달린 탈것의 조합은 패권 국가의 기반이 되는 중장거리 운송수단이 된다. 만약 아즈텍과 잉카가 서로간 교류를 성사시켜 그 두 요소를 조합시킬 수 있었다면 메소아메리카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10. 스페인에게 정복된 이유
왜 이 거대한 제국이 그리도 쉽게 멸망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콩키스타도르의 강철검, 총, 말로 대표되는 무력의 기술차와 주변 부족들의 적의(敵意), 전염병의 유행 정도로 요약된다.10.1. 전염병?
당시 총은 강력하지만 효율적인 무기는 될 수 없었고, 숫자에서도 스페인 측이 훨씬 열세였다. 의외로 총은 등장 당시 임팩트는 컸지만, 워낙 원시적인 수준이라 전장을 지배하는 게임 체인저 같은 무기는 못 되었다. 가령 총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인 스트렐치가 있었는데도 창기병인 윙드 후사르가 주축이 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발린 루스 차르국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아즈텍의 패배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지만, 스페인의 정복은 '전염병 등이 문제가 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한 전염병은 정복 과정에서가 아니라 정복 이후 원주민들의 저항 역량을 약화한 요인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을 케찰코아틀로 인정해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케찰코아틀을 자처하기 전에는 그들을 케찰코아틀로 부르지 않았고, 그 뒤에도 콩키스타도르들의 탐욕스러움 때문에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곧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아즈텍은 이미 스페인령 쿠바 총독과의 짧은 만남을 한 차례 경험해 본 적 있었으며, 이후 스페인인들의 공격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10.2. 전투 능력의 격차
아즈텍이 패배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전투 능력에서의 차이였다. 당시 아즈텍은 청동기 시대와 석기 시대의 과도기였다, 금속을 통해서 무기를 만드는 것은 실험적으로 행해졌을 뿐이지 가장 많이 대중적으로 쓰이던 무기들은 대체로 흑요석 같은 석기 무기들이었다. 콩키스타도르들은 수백 년에 걸친 레콩키스타 시기를 거친 베테랑들이 대다수였고, 아즈텍이 콩키스타도르와 원주민 연합군들과의 전쟁에서 밀린 것이 단순 꽃 전쟁 같은 작은 전쟁에만 특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이었다. 당시 아즈텍은 푸레페차, 즉 타라스칸과의 전쟁 중 대패를 경험한 이후, 영토 확장을 사실상 단념하게 되면서 비슷한 체급인 국가와의 전쟁이 근 50여년간 부재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꽃 전쟁만 벌이면서 아즈텍이 전면전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다. 당시 대규모 전면전이 일어날 일도 없었고, 일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콩키스타도르들의 상륙은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그에 비해서 콩키스타도르들은 전술되어있듯, 근 800년 동안 이어진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전쟁에서 다져진 베테랑들이 대다수였고, 무관으로서의 귀족에 충실한 이들이 많았다. 대를 이어서 벌어진 싸움에서 계속 쌓인 노하우들은 후술할 금속 및 화약무기들과 함께 아즈텍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만약 이러한 노하우가 없었다면 슬픔의 밤같은 사건들이 계속 벌어진 끝에 에스파냐 군대는 동맹 원주민 세력들마저도 모두 잃고 흩어져 결국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에 대를 이어서 전쟁 기술들을 가르친 귀족 세력들은 아즈텍과의 전쟁에서 명백한 우위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콩키스타도르들의 승리 비결이 단순히 철과 화약같은 무장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들은 단지 유럽에서 가져온 무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재료를 모아 화약과 포탄을 제조[27]했고, 호수에 띄울 조립식 전함 역시 우호적인 현지 원주민들의 협력하에 직접 건조한 것이었다. 틀락스칼라에서는 원주민들로부터 구리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화살촉을 제작하기도 했다.[28]
게다가 아즈텍에는 금속제 무기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마카후이틀로, 나무 몽둥이에 날카로운 흑요석 날을 여러 개 박아넣은 무기였다. 이 무기는 일반적인 직물이나 가죽, 그리고 맨살에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으나[29] 스페인인들의 철제갑옷에는 의미가 없었고, 이는 다른 흑요석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금속 무기도 없는데 금속제 갑옷은 당연히 있을리가 없었다.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갑옷은 솜을 넣은 두꺼운 누비 갑옷들이 주류였다.[30] 유럽에서도 누비갑옷이 오랜기간 쓰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냉병기들은 어느정도 막아주었지만 총알에는 퍽퍽 뚫린다.
여기에 더해서 스페인인들은 금속제 도검과 쇠뇌는 물론이고 심지어 화약을 사용하는 총이나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니 아예 화력면에서 아예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았다.[31]
물론, 이러한 점을 뒤엎을만한 단점이 스페인인들에게도 있었는데 바로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당장에 테노치티틀란에 올 때 당시 코르테스가 이끄는 이들은 카리브 원주민까지 합쳐도 1,000명이 안 되었고, 그나마 코르테스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 토벌군을 매수하고서야 2,000명 정도 되었는데 이들이 슬픔의 밤 전투로 사실상 전멸했다. 당장에 슬픔의 밤에서 아즈텍인들은 앞에 있던 아군이 죽건말건 달려들어 코르테스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정도였기에 아무리 아즈텍이 화력이 딸린다고 해도 압도적인 규모 앞에서는 아즈텍의 희생자가 갑절 이상으로 나도 결국은 스페인군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32]
허나 스페인인들은 운 좋게도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게 되는데 아즈텍의 패권에 반발하던 지역 부족들의 협력이었다. 당장에 슬픔의 밤 이전에도 코르테스의 병력은 스페인인+카리브 원주민까지 합쳐 2,000명 남짓 되었지만 그와 동맹한 현지 원주민은 8,000명이나 되었다. 물론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군이 40,000명이나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격차지만, 심지어 슬픔의 밤 이후로는 스페인인+동맹한 원주민 숫자가 2,00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어도 그 중에 400명만 스페인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주민 숫자가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10.3. 주변 부족과의 갈등
스페인의 아즈텍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와 함께 행군하는 멕시코 원주민 부족 병사들 |
사실 위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메소아메리카 사회는 험난한 지형들로 인한 소통과 교류의 부재로 굉장히 분열되어 있었고, 도시국가들과 부족들마다 기술과 사회의 발달 수준이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즈텍 제국은 틀락스칼텍이나 타라스칸 등을 제외하면 마땅한 경쟁 상대가 부재했고, 아즈텍 하위 부족들 역시 흔히 불리는 삼국동맹에 해당하는 도시국가들을 제외한다면 뚜렷하게 발전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10,000명 단위의 대규모로 성장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기 때문에 선민사상이 상당히 두드러졌다. 상기된 꽃 전쟁 역시 그 시작은 분명 아즈텍뿐만 아니라 틀락스칼텍을 포함해 모든 주변국들과의 공통된 필요에 의해 합의된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전투에만 집중하는 전문적인 전사 계급의 수는 아즈텍이 많을 수밖에 없었기에 인력 손실에 대한 부담이 적은 아즈텍 측이 불가피하게 전쟁을 쉬어야 할 농번기 등의 시기에도 지나치게 꽃 전쟁 선포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랫동안 테노치티틀란은 꽃 전쟁을 선포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전면전을 일으키겠다는 협박을 필두로 공물을 요구하는 등 하위 부족들을 험하게 다뤄왔으며,[33] 이러한 선민사상과 그에 기반한 통치로 인해 오랫동안 반아즈텍 감정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에스파냐 군대가 틀락스칼라군과 연합하여 메소아메리카를 가로질러 진격하기 시작하자 그다지 수가 많지 않았던 에스파냐 군대는 현지 원주민들을 통해, 막 도착한 시기에 비해 수십 배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가 맞부딪히는 상황에서 염두에 두어야할 점이 있는데, 아즈텍은 대규모 전쟁을 벌일 능력은 있었으나 그러한 대규모 군대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뤄야할 지에 대한 전략•전술의 노하우가 없었던 반면, 에스파냐 군대는 근 800년을 이어온 레콩키스타의 대규모 전투들에서 전략•전술의 노하우를 배워서 왔다. 능력만 있는 쪽과 능력을 갖추고 이를 활용할 전략과 전술을 갖춘 쪽이 싸운다면 결국 능력만 있는 쪽이 패배하는 것은 당연했고, 결국 그리 되었다.
중남미 토착 문명의 복속과 멸망의 초석을 놓으며 큰 흐름을 주도한 건 콩키스타도르들과 그 뒤에 있는 스페인이었지만, 전근대적 기술력의 한계로 인하여 스페인 정복 이후에도 1500년대~1600년대를 통틀어 독자적인 원주민 세력의 자체적인 영향력은 상당히 유지되었고, 자연스럽게 무늬만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인 식민지 내에서 원주민 세력들이 따로 따로 서로 항쟁하며 경쟁하는 구도가 오래 지속되었다.
인근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들과 부족들 중에는 아즈텍이라면 치를 떨며 원수로 여겼던 곳도 있었고, 아즈텍과 스페인 사이에서 아무런 의견 표명도 없이 잠잠히 있다가 전세가 스페인 쪽으로 기울자 아즈텍을 손절하고 그대로 스페인에 붙어버린 경우도 꽤 되었다. 아즈텍의 지배하에서 도리어 농민들의 삶의 질이 좋아졌단 말도 있었던만큼 아즈텍 근방 원주 부족 국가들의 참가는 흔히 알려진 수준으로 '모두가 아즈텍 원정에 참가했다'거나, '엄청나게 많았다'라고 보기는 어렵다.[34] 그렇지만 아즈텍 정벌에 참가한 원주민들 역시 꽤 되었고,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아즈텍 정벌에 나서자 자발적으로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꽤 큰 규모의 병력까지 제공하여 스페인군과 함께 싸웠다. 아무리 화력에 무기/갑주가 좋아도 보급 등의 문제로 인해 스페인인들만으로는 무리 또는 굉장히 힘들었을 전쟁이 아즈텍 제국 내부의 피지배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덕택에 유리해질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스페인의 경쟁 라이벌이었던 포르투갈이 식민지배했던 다른 아메리카 지역들의 경우를 보면…
- 마야 문명이 위치한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 등 중앙아메리카 북부 일대의 경우, 각각의 도시국가 및 여러 군소 부족 하나하나와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100년이 넘도록 스페인군의 정복 활동이 이루어져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에 가서야 스페인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 스페인의 식민 진출 이전 아즈텍의 영향권에 속해있지 않았던 캘리포니아 반도, 치와와, 두랑고, 코아우일라 등 멕시코 북부 지역과 캘리포니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텍사스 주 등 미국 서남부 지역들의 경우에도 마야 문명권이었던 멕시코 남부 지역,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 같은 중미 북부 지역들과 비슷하게 콩키스타도르들이 멕시코 북부 지역과 미국 서남부 일대에 분포하던 나바호족, 푸에블로족, 치리카와족, 추마시족, 후파족, 포모족 등 현지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각각 정벌하는 데 많은 시간들을 쏟아야 했기에,[35] 17세기 중후반기에 와서야 스페인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토가 방대하고 척박한 사막지대가 많아 스페인에게 정복되지 않은 원주민 부족들의 상당수가 잔존해있었으며, 이후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고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으로 영토를 팽창하던 미국과, 스페인에서 독립한 옛 식민지령 국가였던 멕시코에 의해 모두 완전히 정복되었다.
- 잉카 제국의 영역권에 속해 있었던 페루와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의 경우, 이전 멕시코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침공 이전 잉카 제국과 카나리족, 차차포야족, 챵카족 등 피지배 원주민 부족 간의 내분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이들 모두 남미 대륙으로 들어오던 스페인인들과 손을 잡아 잉카 제국을 공격했고,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의 함락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잉카 멸망 이후에도 망코 잉카 유판키와 투팍 아마루와 같은 잔존 잉카 세력들이 40년 가까이 빌카밤바에서 항전하다가 1572년에 스페인에게 완전히 정복, 평정되었다.
- 승마술이나 화약 무기 등 유럽식 전쟁 방식에 빠르게 적응하여 습득하고[36] 종족들 간의 결집력도 있어서 본격적으로 스페인군에게 반격까지 가했던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역에 분포하던 마푸체족과 카웨스카르족, 테우엘체족[37] 같은 남미 원주민 부족들의 경우,[38] 결국 스페인 식민제국 시절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평정을 못하여 북부 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고, 남부 지역은 원주민들이 지배하는 불완전한 상태였다가, 식민지였던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독립한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양국 정부가 추진한 남부 개척 정책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었다.
-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유일한 포르투갈 식민지이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영토 면적이 가장 방대했던 브라질의 경우, 포르투갈이 그 방대한 면적의 브라질 영토를 전부 다 식민지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식민지 개척 초기에 해안 지역에만 포르투갈의 통제력이 미쳤고, 포르투갈의 통제력이 닿지 않았던 서부 내륙 아마조니아 밀림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 다수는 반독립 상태를 유지했다가 이후 포르투갈 식민지시대 중후반기에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 서부로 대거 진출하여 본격적인 서부 개척이 이뤄지고,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완전히 브라질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심지어 아마조니아 지역은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정글 지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오늘날에도 브라질 정부의 행정력이 닿지 못하는 곳이 많으며, 그래서 21세기에나 그 존재가 알려진 미접촉 부족이 꽤 있는 편이다.
- 베네수엘라의 경우, 카라카스족의 카시쿠 과이카푸로 추장이 베네수엘라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연합하여 밀림과 습지대가 많은 베네수엘라의 지형을 활용해 스페인군에게 항거하는 등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이 끈질기게 이어졌고, 결국 1552년에 와서야 완전히 스페인에게 정벌되었다.
- 우루과이의 경우, 스페인이 노리던 은, 금, 구리 등 지하 자원들이 여타 라틴아메리카 지역들보다 빈약한 데다가 식민지 개척 초기 축산업이나 어업을 빼고는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산업이 별로 없어[39] 페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칠레 같은 다른 스페인령 남미 지역들에 비해 사실상 쓸모 없는 땅에 가까웠고, 내륙 오지에서는 차루아족 같은 현지 원주민들이 극렬하게 저항했으나, 이후 스페인이 막대한 병력수를 동원한 정복 전쟁을 밀어붙여 차루아족 등 현지 남미 원주민들이 차지하던 내륙지대까지 모조리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일부 잔존 부족 세력들이 스페인 식민지 시기 후반까지도 살아남아 있었는데 우루과이가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 와서야 우루과이 정부에 의해 모두 정벌되었다.
- 아즈텍, 마야 문명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멕시코 중남부 지역에서 번성하던 다른 원주민 문명인 타라스칸(푸레페차)은 1521년 스페인의 공격으로 아즈텍이 멸망한지 9년뒤인 1530년에 스페인군에게 정복되었다.
- 코스타리카, 파나마, 니카라과 등 중앙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국가들의 경우, 자그마한 국토 면적에 비해 습하고 험한 늪지대와 밀림들이 워낙 많아 18세기까지 스페인의 직접적 통제가 먹히지 않는 내륙 지역들이 군데 군데 존재하고 있었다.
- 남극해와 가까운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섬에 살았던 야간족과 오나족 같은 원주민들의 경우, 한랭하고 거친 기후에 스페인조차도 쉬이 침략하지 못해 마푸체족과 테우엘체족 등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부 본토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까지 사실상 반독립 지역으로 남아있었지만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1860년대와 1870년대를 전후하면서 남아메리카 남부 본토 지역을 완전히 정벌한 후, 티에라델푸에고 섬으로 진출해 칠레령과 아르헨티나령으로 분할•합병했다. 이후 칠레군과 아르헨티나군, 백인 이주민들에 의해 원주민들은 모조리 학살되거나 토벌되었다#.
다른 지역 원주민들은 다 오랫동안 잘 버티거나 훗날 정복되었어도 그럭저럭 버텼지만, 아즈텍만은 이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군대와 연합한 원주민 부족의 공격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물량과 동원 전력의 측면으로 보면 사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은 틀락스칼텍을 주축으로 한 다양한 반아즈텍 동맹군의 업적에 가까웠고, 이 중에서 스페인 세력은 분명히 주도적인 지도 세력이긴 했지만, 머릿수로는 훨씬 더 많은 반아즈텍 토착 협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인구가 1,000만 명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자체도 스페인인들은 2,000명도 안 되는 규모였지만 텍스코코, 틀락스칼텍, 오토미 등의 원주민 동맹군이 주력이라서 이들을 합한 100,0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50,000명 정도 규모의 아즈텍 방어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250,000명이 살던 당대의 초거대 도시로, 호수 속에 있었던 자연요새였다.[40] 게다가 테노치티틀란의 250,000명의 시민들은 유사시 전부 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주변 원주민 도시들과 군사 협력을 하고 조립식 전함을 동원해 호수를 장악해서 한 번에 도시에 갇히게 되자, 호수는 오히려 아즈텍인들을 봉쇄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텍스코코 호수는 석회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는 마실 수가 없었는데,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이 물을 마시게 된 아즈텍인들은 병이 들어 더욱 위기에 몰렸다. 철저히 고립된 상황과 석회 성분이 많은 호수는 전염병의 대유행도 불러왔다.
결국 1521년, 스페인인들과 원주민 동맹군의 총공격에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그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해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항복한 아즈텍인 중에서 귀족이자 아즈텍 군사령관이었던 틀라쿳신은 마지막까지 아즈텍의 저항을 이끌며 코르테스에 맞섰으나 아즈텍이 멸망하고 나선 이후에는 친스페인 인사가 되어 멕시코 시티를 재건하는 직책까지 맡았고, 이를 잘 수행해내어 스페인 총독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상당한 수의 하인과 땅, 고급 주택을 보유한 고위 인사가 되었다.[41] 몬테수마 2세의 황녀인 아즈텍의 공주 테쿠이츠폿신은 틀라토아니의 적통인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코르테스의 적극적인 보호로 아즈텍 황족을 말살하려 했던 원주민 동맹군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고, 코르테스의 배려로 스페인인 장교 알론소 데 그라도의 아내가 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42] 그래서인지 이들은 현대 멕시코에서 매국노 취급을 받기도 한다.
잔존한 아즈텍인들은 테노치티틀란 재건과 지방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는데, 원수지간인 틀락스칼라의 군대와 구 아즈텍 제국군이 한 깃발 아래 싸우는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촌극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어서, 멕시코 제1제국 건국 이래로 테노치티틀란의 후신인 멕시코 시티와 틀락스칼텍의 후신인 틀락스칼라 주는 현재까지도 같은 멕시코 땅이다. 두 지역 주민들은 서로를 각각 매국노의 후손과 식인종의 후손으로 욕하는 등 현재까지도 사이가 매우 나쁘다.
사실 상술했듯이 비록 틀락스칼텍의 기득권 지위가 19세기까지 이어져 자연스럽게 스페인의 제국주의에 협조한 측면이 분명 있긴 했어도 어쨌든 스페인에 가담했던 시기 자체는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이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던 15세기 중세였기에 뿌리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은 좀 억울한 측면이 있긴 하다. 또한 아즈텍 역시 대규모 인신공양이 있긴 했지만 당시 메소아메리카 역사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야만적으로 볼 일도 아니었고 이걸 즐겼던 식인종이라는 비난은 더더욱 터무니없는 왜곡이었으니, 이런 상황은 같은 나와틀 문명권에 속한 민족끼리 서로를 지역감정으로 도가 지나치게 비하하며 물어뜯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결국 따지고보면 이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의 원인은 모두 스페인의 침공과 식민정책에 원인이 있으므로 결국 멕시코 역사의 비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교황청에 투서를 넣어 자신과 원주민 현지처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에게 적자 지위를 부여해 재산을 상속하게 하거나[43], 친분이 있었던 원주민과의 혼혈들에게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다. 그 때문에 코르테스는 현대 멕시코 메스티소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11. 대중적 편견과 오해
우선적으로 알아둬야 할 점은, 커뮤니티와 유튜브 등에 퍼진 아즈텍 관련 정보는 거의 콩키스타도르가 퍼뜨린 날조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낭설이므로 일단 거르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아즈텍을 무슨 인외마경급의 지옥으로 묘사하고 스페인과 가톨릭을 영웅시할수록 더 많은 날조가 가미되었다고 보면 된다. 인신공양 탓에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지 모르지만, 내막을 알고보면 문화와 역사가 다른 것이지 아즈텍도 다 사람 사는 곳이었다.한국 역시 2010년대까지는 식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아즈텍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예를 들어 2006년에 개봉한 <아포칼립토>를 평가하면서[44] 백인우월주의적 왜곡이라며 비판하는 칼럼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도 여러 멕시코계 문명권들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고증 문제들 역시 많다.
그러나 상술한 촘판틀리 유적 발견과 관련한 잘못된 인터넷 썰 이후로는 인식이 극변하여, 2020년대 초에 와서는 '판타지 소설 뺨치는 악의 제국', '멸망당할 만했던 국가' 등으로 억울하게 조롱당하고 있다. 그나마 전문가와 아즈텍 역덕후들이 '아즈텍의 인신공양 문화가 인터넷 밈이 되면서 과장되고 있다'라는 우호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나 영향력은 작다. 사실 기존 아즈텍에 대한 동정 여론의 원인은 인신공양의 사실 자체는 알았지만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다 끝내 정복당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했지 아즈텍 자체에는 무지했다는 점이 크다.
이런 왜곡된 정보가 민간에 퍼지는 것은 멕시코와 한국 간의 관계를 생각해서도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현대 멕시코는 대한민국이 조선의 역사성을 계승하고 있듯이 아즈텍 제국을 국가적 정체성으로 계승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아즈텍이 비정상적인 국가였다는 속설이 스페인 식민국 시절의 역사왜곡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혹시라도 이에 무지한 한국인이 멕시코인과의 대화에서 "아즈텍은 멸망해도 싼 국가였죠?" 따위의 소리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인터넷에서 넷우익이 끄적인 소설을 대충 읽은 외국인이 "조선은 일본에게 멸망당해도 싼 국가였죠?" 급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실례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각종 역사에 대한 밈이 다 그렇지만, 아즈텍 문명은 멕시코와 한국이 지리적으로 멀어 잘못된 정보가 교정될 기회가 적고 인신공양이란 소재의 자극성 탓에 특히 그 왜곡과 과장의 정도가 심하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결국 커뮤니티가 왜곡된 정보를 퍼나른 결과 한국에서는 정확한 정보가 아닌 "13만 6천 명의 두개골이 수납된 촘판틀리", "1487년 당시 4일간 신에게 바쳐진 8만 4천 여명의 포로", "백성과 주변국을 인간 가축으로 삼은 식인종 국가" 따위의 명백한 허구가 무비판적으로 생산되며, 단순 무지에 의한 동정적 시선이 자극적인 허구에 의해 재미와 흥미만을 위한 유흥거리로, 아즈텍 그 자체를 하나의 판타지적 '악의 제국'으로 보도록 시선이 변질되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참고
아래는 아즈텍 제국과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메소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및 편견들이다.
- 아즈텍은 13만 명이 넘는 사람을 인신공양으로 학살하고 식인을 자행했으며, 그 증거가 우에이 촘판틀리다.
- 아즈텍의 인신공양과 식인의 증거들은 대다수 스페인 학자들과 성직자들, 혹은 국력을 과장시키고자 시도한 기록자들에 의해 조작되었기에 코르테스나 그의 부하들의 기록은 왜곡, 특히 학살의 규모와 잔혹성 부분에서 과장이 섞였다는 것이 INAH[45]를 비롯한 학계 다수의 의견이다.
- 우에이 촘판틀리(Huey Tzompantli)는 2015년, 멕시코시티 내의 템플로 마요르[46]에서 실제로 발견되었으나 코르테즈 원정대원 안드레스 데 타피아(Andrés de Tapia)가 136,000명의 머리를 전시했다고 기록한 것과 달리 두개골은 현재까지 발견된 수는 670여 개이며, 인근 유적들의 크기와 규모까지 합하였을 때에 최대 1만 여명 정도일 것이라 추산하고 있다. 사실 13만여명의 두개골을 수납한 촘판틀리는 단순 계산만 해도 테노치티틀란의 전성기 시절 인구수에 맞먹는 엄청난 수이며, 이러한 수의 두개골을 단순 수납하기만 해도 테노치티틀란 전체를 뒤덮을 수준의 크기일테니 136000명의 두개골이 수납되었다는 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숫자다. 따라서 이는 중세시대에 흔했던, 스페인 측에서 전공을 과장하기 위한 의도의 숫자 부풀리기식 과장법에 불과하다 봐야한다. 특히 13만이라는 숫자는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유명한 숫자인 14만 4천과 유사한 숫자로 중세에는 대충 큰 수를 나타낼 때 흔히 사용되었다.
- 인신공양은 아즈텍의 고유문화이며, 다른 국가에서는 이런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인류 역사적으로 꾸준히 실행되어 왔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문명에서 행해지는 종교 의식은 크게 인신공양에서 동물공양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기도 및 제사로 변화했다. 그런데 인신공양이 다른 단계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대형 초식 동물 가축, 즉 소, 돼지 같은 생물들이 필요했고, 그런 환경 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인구 등의 다른 조건 또한 같이 갖춰져야 했기 때문에 인신공양이 완전히 퇴화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사례가 아즈텍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로쿼이, 잉카, 마야, 타라스칸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들에서 상당한 인신공양이 발생하였으며, 관습적 인신공양이 철폐된 고대 이후의 구대륙에서도 재난이 지속되어 민심이 흉흉해지거나 적에 대한 원한이 강하면 이벤트성 인신공양을 통해 내부 안정을 꾀하려는 시도가 간혹 발생했다.[47] 게다가 자원이 부족한 그런 환경과 더불어 대규모 문명이 기근과 재해에 의해 빈번히 교체될 수밖에 없던 열악한 신대륙의 기후 조건은 이런 인신공양 풍습을 지속시킨 원인이 되었다.
- 아즈텍은 인간농장을 만들어 인신공양을 공포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또 인신공양의 제물을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나 옥수수로 취급하였으며, 제물이 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몸부림쳐야 했다.
- 아즈텍이 주변국가들을 인육농장처럼 굴렸다는 주장 또한 대표적인 낭설이다. 되려 정복하기 힘든 규모의 국가들이기에 꽃 전쟁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보는 게 맞다. 주변국 역시 아즈텍에게 먼저 꽃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던 것이 그 근거 중 하나. 조선의 변경을 약탈하던 여진족이 조선을 일부러 정복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듯, 아즈텍 역시 일부러 인육을 위해 주변국을 정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즉 아즈텍이 멸망한 원인은 인신공양에 의한 원한이 아니며, 지속적인 대립관계와 조공 요구로부터 자연스럽게 쌓인 원한이었다. 애초에 인신공양은 당시 메소아메리카 전역이 공유하는 신화적 세계관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종교 제의였다.
- 아즈텍 제국을 비롯해 메소아메리카인들은 자기 자신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순교에 버금가는, 인간의 몸으로 신화를 재현하는 신성한 행위로 인식하였다. 이 사실은 위 꽃 전쟁 항목과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에 잘 서술되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포함한 인간의 피와 심장을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결함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세상이 멸망하지 않기 위해선 적극적으로 포로와 노예들, 그리고 자신들의 피와 심장을[48]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본격적인 인신공양 이외에도, 일정 나이 이상의 남성들은 전투에서 적을 죽이고 그 피를 바르는 것으로 성인식을 치르기도 했다.[49] 이런 이유로 꽃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신공양의 제물이 된 전사들은 가축은 커녕 죽기 전까지 예우와 대접을 받는 순교자로 취급되었다.
- 위칠로포치틀리(또는 믹틀란테쿠틀리) 신상은 아마란스 씨앗을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든 뒤, 전분에 어린아이의 피를 섞어 반죽한 것으로 만들어졌으며 아즈텍인들은 축제가 끝난 뒤 이를 먹었다.
- 역시 낭설이다. 위칠로포치틀리를 향해 봉헌된 축제는 판케찰리스틀리 축제로, 아즈텍인들은 이 기간에 꿀과 호박씨가 섞인 아마란스를 볶아 거대한 위칠로포치틀리 모양의 강정을 만들고 가마에 태워 행진하다가 신전 앞에서 그 신상을 조각내어 다 같이 나누어 먹었다. 이를 두고 스페인 사람들이 어린이 피를 타 마신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강정에 노팔 선인장 열매의 과즙을 적셔 먹은 풍습이 와전된 것이다. 애초에 아즈텍 종교에서 토날리를 함유한 피는 신의 식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인간이 피를 마시는 건 불경죄로 취급되었다.
- 어떤 인터넷 썰에서는 위칠로포치틀리가 아니라 믹틀란테쿠틀리 신상 사진을 올려놓고 아마란스 씨앗과 어린아이 피가 섞였다는 낭설을 퍼뜨리기도 하는데,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던 믹틀란테쿠틀리 신상으로 판케찰리스틀리 축제와 아무 상관없는, 그냥 흙으로 빚어진 도자기다. 아마 해당 신상이 어린아이처럼 익살스럽게 생긴 탓에 누군가가 위의 유언비어와 혼동하여 아무렇게나 만든 저급 썰로 추정된다.
- 아즈텍인들은 하루라도 인신공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음날 태양이 뜨지 않을 것이라 믿었으며, 가톨릭 선교사들이 '인신공양을 안 해도 내일 태양이 뜬다!'라 호언장담하고 실제 그렇게 되자 자신들의 무지함을 늬우치며 개종했다.
(...) - 당연히 인터넷을 통해 퍼진 낭설이다.[50] 아즈텍인들은 바보가 아니다. 인신공양을 한동안 하지 않는다고 바로 태양이 뜨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제사장 틀라카엘렐에 의해 정립된, 차기 태양신이 될 위칠로포치틀리를 위한 인신공양 신앙에서는 특별한 재앙이 없으면 대략 52년 주기로 토날리가 바닥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당시 기대수명을 감안하면 하루는 커녕 최소 두 세대는 지나야 태양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의 '인신공양의 원인' 항목 참조. 그리고 위의 가톨릭으로 개종하기까지 항목에서도 서술되어 있듯이,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급격히 이루어진 것은 이렇게 황당한 이유가 아니라 나와틀 종교 교리의 특수성과 더불어 스페인의 여러 식민화 정책과 사회적 조건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였다.
-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와 가톨릭 선교사는 아즈텍의 폭정으로부터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주변의 평화적이고 목가적인 원주민을 구원한 영웅들이다.
- 콩키스타도르와 가톨릭 선교사를 비롯한 스페인 지배층을 원주민의 구원자로 영웅화하는 시각도 역시 과장되었으며, 현대 멕시코 입장에서는 일종의 식민사관에 해당한다. 에르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은 명백한 침탈자였고 가톨릭 선교사들은 이들의 무력을 등에 업고 나와틀 문화에 대한 탄압을 주도했다. 아즈텍의 압박을 받던 틀락스칼텍의 입장에서 코르테스가 해방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51] 침략의 선봉대를 지휘했고, 이로 인해 멕시코 지방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미국-스페인 전쟁 이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52] 사실상 스페인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통치 역시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준으로 가혹했다. 바야돌리드 논쟁에서도 보듯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원주민 부족들에게 잔혹한 통치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동안 붙잡은 사제나 귀족 계급들이 기독교로의 개종이나 스페인으로의 복속을 거부하면 개로 물어뜯어 살해하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점령 직후에 콩키스타도르가 행한 잔혹한 약탈과 강제노역은 둘째로 치더라도 유럽식 봉건제도인 엔코미엔다가 정착한 이후에 행해진 세금과 공물 제도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영지에서 아즈텍이 부과했던 조공 이상의 착취가 이루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 더군다나 스페인은 테노치티틀란을 무너트린 후, 그 지역을 멕시코시티란 이름으로 바꿔서 메소아메리카 지방의 통치 중심으로 사용했다. 테노치티틀란의 권위는 아즈텍 성립 이래부터 현재까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으며, 아즈텍의 신전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대대적인 문화, 종교 탄압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원주민들에게 중요한 성지이자 문화적 중심지로 여겨졌다. 테노치티틀란이 주변국 원주민들에게 마냥 원수로만 취급되었다면 스페인의 정복 이후에 아즈텍의 주요 신전들이 원주민들에게 성지 취급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틀락스칼텍 문서와 꽃 전쟁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애초에 틀락스칼텍을 아즈텍의 완전한 피지배민족으로 보는 시각에는 오류가 많다. 속설과 다르게 틀락스칼텍 역시 당대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행했다. 또한 상술한대로, 애초에 틀락스칼텍은 테노치티틀란의 속국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종교성이 강한 연합체에 포함될 뿐인 오랜 라이벌 격의 적국이었다.[53] 물론 테노치티틀란이 제국으로 성장한 뒤 전쟁과 공물과 관련해서 오래 시달렸단 점도 거짓은 아니나, 틀락스칼텍이 철저하게 약자였고 아즈텍이 인육 조공을 받았다는 설은 명백하게 콩키스타도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다. 처음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이방인 침략자라고 생각해서 저항한 것이었는데, 이후 양 측의 소모전이 지속되고 협상 자리에서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을 침략할 계획을 설명하며 동맹을 제안하자 몇 번의 내부 회의 끝에 이를 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측 기록에는 틀락스칼텍이 마치 아즈텍의 속국이자 인신공양의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스페인 본국의 독자들에게 정복자들을 영웅화하고 그들을 도운 원주민은 쳘저하게 무지하거나 피해자인 존재로 포장될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아즈텍 안간가축 사육설도 완전히 낭설일 뿐더러, 틀락스칼텍이 순순히 가축 취급을 당할 만큼 만만하고 약한 소규모 국가인 것도 절대 아니었다. 자세한 건 틀락스칼텍 문서 참조.
- 비록 위의 편견들이 과장과 왜곡이라 해도, 인신공양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고 이는 잘못된 것이니 아즈텍은 야만적인 문명이 맞는 게 아닌가?
- 현대인의 기준에서 인신공양은 분명 잘못된 것이겠지만, 이 잣대를 역사적 맥락의 고려 없이 15세기 문명에 들이대는 것 역시 명백히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메소아메리카라는 지역 자체가 인류의 정착이 늦어졌고 기후적으로도 좋은 지역이 아니었기에 오랫동안 고립된 채 15세기까지 인신공양 풍습이 유지되었으며, 상술했듯이 이는 콜로세움 식의 쾌락을 위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를 지켜본 일부 가톨릭 선교사들이 증언하듯 종교적 엄숙함과 제물의 명예를 존중하며 체계적인 의례로서 치루어졌다. 다시 말해, 메소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인신공양과 식인은 당시와 500년 이상의 격차가 있는 시대에 태어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힘들지는 몰라도 그것을 행할만 한 충분한 역사적 이유가 있으며, 이것들이 결코 아즈텍이 야만문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당대의 합리적인 관습에 따른 의식이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는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이므로 농업도 일찍 발현해서 관습에 따른 인신공양과 식인이 유교, 불교, 아브라함계 종교 등 새로운 종교에 의해 흔적만 남기고 철폐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아즈텍을 비롯한 당시 멕시코 지방은 아메리카 지방 특유의 혹독한 환경과 농업의 늦은 정착, 그리고 인신공양을 대체할 새로운 제물의 부재로 인해 자발적으로 인신공양이 사라지게 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또한 스페인의 정복 이후 몇 세기 동안 많은 사실이 왜곡되고 소실되었다는 점에서, 아즈텍 제국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환경과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역사학의 절대적 방법론을 무엇보다도 신중하게 지키며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12. 여담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이 대부분 그렇듯이 15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리던 아즈텍을 원시 문명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아즈텍이 건국된 1248년은 고려시대 중반 고종의 집권기였고, 아즈텍이 멸망한 1521년은 조선시대 중반 중종의 집권기였다. 아즈텍 제국이 맹위를 떨친 시기의 반은 한국사의 '근세'로 지칭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물론, 당시 청동기시대 초기였던 아즈텍 문명이 유럽과 인도, 중국 등의 유라시아 세계에 비해서 낙후되어 있었지만, 호수 위에 대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어 8 ~ 200,000여 명을 부양한 것이나, 고대 이집트 수준의 천문학 역법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에선 유라시아식 고대 문명은 아니다.또 열대우림에서 발생한 문명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인근 유카탄 반도에 있었던 마야 문명의 이미지와 섞인 것으로, 아즈텍이 존재하는 멕시코 중앙 고원은 고지대 상춘 기후라서 열대우림은 커녕 도리어 건조한 편이어서 초원 사이 사이에 선인장이 많이 자라는 편이었다. 아즈텍 건국 신화에서도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서서 뱀을 먹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54]
세계 유일본인 아즈텍 시대 가죽 지도(11세기 제작)를 국내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내 혜정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맨눈으로 보면 그냥 가죽 덩어리 같지만 첨단 도구로 확대하면 보인다고 한다.
아즈텍 시대의 유물 중에는 인간의 두개골처럼 생긴 커다란 호루라기가 있는데, 흔히 보이는 '인간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호루라기'는 멕시코 관광객들에게 팔기 위해 흥미와 자극 위주로 재해석된 관광상품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두개골 모양의 평범한 호루라기에 불과하다. 링크
아즈텍 왕조의 계승권은 그 왕조의 마지막 황녀가 스페인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에게 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왕조를 부흥시키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공작의 대우를 받으며 지금도 가계가 이어지고 있어서, 언제고 이들을 다시 불러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인신공양, 식인 등의 풍습이 있었던 지역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에 대한 대우는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22년 5월부터 8월까지 아즈텍 특별전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이라는 국제교류 전시회를 대규모로 열었는데, 박물관 측에서 설명한 전시회의 취지는 아즈텍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으나 정작 보러 간 사람들은 인신공양 행위 자체에 기겁하고 있어 인터넷상에서 회자되었다.[55] 전시에선 인신공양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아즈텍의 인신공양이 인육을 먹기 위함이나 쾌락이 목적이 아니라는 변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전반적인 전시 퀄리티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유머] 국립중앙박물관 아즈텍전 후기
멕시코의 조칼로 광장에서 아즈텍 문명이 스페인군과 그 동맹군에게 함락된 지 500년째 되는 날에 전통의상을 입고 참가하는 행사가 열렸다.행사 사진 기사
현대 멕시코는 아즈텍의 유산을, 특히 중앙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며, 이중 일부는 세계적으로도 퍼졌다. 현대인이 먹는 초콜릿은 아즈텍의 음식이 변형된 것이다. 토마토, 아보카도도 아즈텍의 나와틀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나와틀어는 현재는 소수가 사용하는 언어이지만 보존 노력이 있다. 멕시코 요리 자체가 아즈텍의 영향이 있다. 치와와도 아즈텍 제국에서 탄생한 품종이다. 망자의 날과 같은 아즈텍에서 유래한 명절도 있다. 죽음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아즈텍인 등의 원주민의 관념은 성녀 산타 무에르테의 신앙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멕시코의 스페인과 비교되는 대가족과 가족 공동체를 지향하는 문화도 아즈텍의 영향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라는 식의 관념과 결합하여 가족 중 누군가가 죽어도 가족의 일부로 여겨졌고, 조상을 존중하는 정신이 있었다. 코코와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흔적이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 국기에 들어가는 멕시코의 국장은 아즈텍 건국 신화가 모티브이며, 수도 멕시코 시티도 아즈텍 제국의 수도 자리에 세워졌다. 옛 아즈텍 제국이 서울 공화국 현상이 있던 나라였듯, 오늘날의 멕시코도 이런 경향이 지방 분권 성향이 강한 다른 서구 국가보다 강한 편이다.
13. 창작물에서
굉장히 발달된 사회상과 반비례하는 금속 기술, 그리고 16세기까지 남아 있었던 잔인한 인신공양 문화라는 특징들로 인해서 메소아메리카 지역이 등장하면 십중팔구 등장한다. <Warhammer>의 리자드맨 이후로는 가끔 공룡과 엮이는 경우가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잔달라, Fate/Grand Order의 나우이 믹틀란 이문대의 디노스, 원신의 나타 등 아즈텍+공룡 모티브를 갖고 오는 경우 대부분 워해머의 리자드맨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Warhammer>의 리자드맨들의 전체적인 문화와 모티브가 아즈텍과 마야 등 중미 문명에서 따왔다. 특히 적대적인 타 종족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점이 비슷하다. 흑요석 가공술이나 가죽 누비 갑옷 등으로 상당한 전투능력을 보였던 것처럼 이들도 올드 원들의 피조물로 초고대문명에 가까운 기술력을 보여준다. 에이지 오브 지그마 이후, 세라폰이라는 이름의 팩션으로 재탄생하였으며, 아즈텍 제국+공룡 모티브로 타 창작물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
- <메이플스토리>의 보스 몬스터 자쿰의 디자인은 아즈텍 문명의 유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 <모탈 컴뱃 X>부터 등장하는 코탈 칸은 지구인이 아닌 외계 아웃월드 출신이긴 하지만, 복장과 쓰는 무기 등을 보면 아즈텍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특히 산 채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뽑아버리는 페이탈리티는 명백한 메소아메리카식 인신공양의 패러디.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는 중미의 마술 조직 '날개 달린 자의 귀환'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즈텍 문명에 기반을 둔 마술 틀라위스칼판테쿠틀리의 창과 아즈텍식 피부부적 마술 등을 사용한다. 에차리와 쇼치틀, 텍파틀이 이 곳 출신.
-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중남미를 대표하여 등장하는 개근 문명이다. 문명마다 고유한 성능을 갖게 된 문명 3 이후로는 각 작품마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군사에 이점이 있으며 그에 걸맞게 AI도 대체로 호전적인 축에 속한다. 지도자는 문명 1부터 문명 4까지 줄곧 몬테수마 2세였다가 문명 5부터 몬테수마 1세가 등장한다. 문명 온라인에서도 플레이 가능한 문명으로 채택되었다.
- <문명 3>: 식량을 추가로 제공해 도시의 성장을 빠르게 하는 농업적 특성과 군사에 이점이 있는 군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인 전사보다 발이 빠른 것이 특징인 재규어 전사를 고유 유닛으로 받는다.
- <문명 4>: 군사에 이점이 있는 군사적 특성과 문명의 전체적인 운영을 유연하게 해 주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유 유닛인 재규어는 일반적인 검사보다 전투력이 낮지만 숲이나 정글이 있는 타일에 위치해 있으면 방어력 보너스를 얻어 더 강력해진다. 희생의 제단이라는 고유 건물은 법원을 대체하는데, 노예 노동 시 불만이 감소하여 많은 생산력을 보다 수월하게 얻을 수 있게 해 준다.
- <문명 5>: 적을 죽이면 문화 점수가 들어온다. 즉, 주변의 만만한 문명 하나 붙들고 계속 전쟁 상태 유지하면서 병력을 잡아먹어 문화를 충당하는 문명이며, 유명한 소치밀코 수상 정원을 모티브로 삼은 수상 정원은 많은 식량을 제공해 주어 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게 해 주며 본작에서 인구는 곧 과학으로 연결되므로 각종 기술을 보다 빠르게 연구할 수 있다. 고유 유닛인 재규어도 숲과 정글에서 전투력과 행동력 보너스를 받으며 적 유닛을 제거할 때 체력을 소량 회복하는 등 유용한 진급들로 무장하고 있다.
- <문명 6>: 고유 유닛인 독수리 전사가 처치한 적 유닛이 일정 확률로 건설자가 되고, 문명의 특성으로 건설자를 소모하여 건설 속도를 가속시킬 수 있다. 따라서 독수리 전사로 적을 포로로 잡고, 그 포로는 도시 생산에 갈아넣는 식으로 운영하게 된다. 몬테주마의 지도자 특성 덕분에 사치품에서 더 많은 쾌적도를 얻으며 사치품을 다양하게 확보할수록 유닛들의 전투력이 증가하므로, 전쟁을 보다 수월하게 치를 수도 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에선 <2편 확장팩>과 <3편 확장팩>에서 플레이 가능한 문명으로 나온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잔달라, 잔달라 트롤 종족은 격전의 아제로스 이후로 전술했던 워해머의 리자드맨 팩션에 영향을 받아, 아즈텍풍으로 재탄생했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의 DLC 선셋 인베이전에서는 유럽을 침략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콜럼버스 이전에 바이킹들이 아메리카를 먼저 발견했는데, 이때 바이킹의 항해 기술이 아즈텍인들에게 노획되었다는 설정이다.[56] 이후 아즈텍인들은 발달된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수백년에 걸쳐 아메리카의 패권 국가가 되고, 1200년대에 이르러 1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럽 대륙을 침략한다. 이 설정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후반부가 아주 하드코어한 동유럽, 중동 지역과 달리 서유럽은 후반부 플레이가 루즈해진다는 이유에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나온 것이다. 한편 잉카 제국은 무슨 짓을 한 건지 13세기에 총을 개발해서 아즈텍 제국과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 《죠죠의 기묘한 모험》 1부 프롤로그에서 아즈텍 제국의 어느 부족이 돌가면의 힘으로 세계정복을 꿈꾸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언급이 나온다.[57]
- <미디블2: 토탈 워>에 등장. 오리지널에서는 AI 팩션이며 확장팩 킹덤즈의 아메리카 캠페인에서 쓸 수 있다.
고증대로 철제 무기와 방어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유럽의 중보병 및 기병, 포병에게 골고루 약하다. 그러나 유럽의 병력은 반드시 원정군일 것이기 때문에 수적으로 압도할 수는 있다. 아즈텍의 병력은 부대 단위당 병사 수가 더 많으며, 사기도 높게 잡혀 있어서 병종의 우위를 누리기 힘든 시가전 등에서 유럽 군대와도 거의 대등한 싸움이 가능하다. 야전에서 아즈텍으로 유럽 군대와 야전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에르난 코르테스가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던가?[58]
- <섀도우런> 등장하는 기업들 중 '아즈텍놀로지'라는 기업이 등장한다. 과거 아즈텍 제국에서 혈마법을 부렸던 마법사들이 세운 기업인데 게임의 장르가 사이버펑크이기에 다른 초거대기업들 처럼 국가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생필품을 생산을 해서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기업이지만 실상은 약자들의 피를 착취하여 생체실험에 사용하는 작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본사인 과거 멕시코였던 아즈틀란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매일 아즈텍놀로지에게 제물로 바쳐져 죽는다.
- <스타바운드>의 조류형 외계 종족 아비안은 아즈텍 제국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NPC 이름도 나와틀어로 되어 있으며, 건축 양식도 비슷하고, 종교 의식으로 인신공양을 하기도 한다.
- SCP-034는 아즈텍 설화의 흑요석검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 왠지 모르겠지만 <블랙 앤 화이트 2>에선 그리스를 침공한다. 그 외에도 많은 속국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야만한 아즈텍이라며 치를 떨며 혐오한다. 그렇지만 무력적으로 짱 세서 얌전히 닥치고 있었는데, 신이 그리스를 이끌고 와버리자 문화적이든, 군사적이든 아즈텍보다 그리스가 낫다는 판단하에 죄다 배신해버린다.
- <던전 크롤>의 키쿠바쿠드하의 재단이 영락없는 휴이 촘판틀리다. 사악한 강령술의 악마신 키쿠바쿠드하는 신선한 시체를 바쳐 고통을 선사하고, 강령술로 시체를 기워입어 방어력을 올리는 시고투비의 포옹 역시 메소아메리카 국가들의 인신공양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유희왕》의 몬스터 카드 중에 아즈텍의 석상이 있다.
-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에서 산타나 가 잠들어있던 유적이 아즈텍 유적이다.
- 포 아너에서도 아즈텍 제국이 멸망했음이 언급된다. 물론 대재앙으로 대부분의 국가가 멸망하고 히스무어 대륙에 모인 상태인만큼 콩키스타도르를 파견한 주체가 스페인 대신 호르코스 군단으로 바뀌었다. 이후 멸망한 아즈텍의 생존자들인 오셀로틀이 히스무어 대륙에 도착해 기어이 복수를 끝마쳤다.
13.1. 아즈텍 제국 캐릭터
[1] [ˈjéːʃkaːn̥ t͡ɬaʔtoːˈlóːjaːn̥\](예슈칸 틀라톨로얀). 아즈텍 제국 언어인 나와틀어의 발음을 로마자로 옮김.[2] 프랑스어로 쓰여 있다.[3] 우이칠로포치틀리, 케찰코아틀 등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 기존의 메소아메리카 종교와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틀라카엘렐이 중간에 종교개혁을 통해서 신화의 내용을 고쳤기 때문이다.[4] 명목상으로 테노치티틀란의 틀라토아니가 스페인 식민 당국의 허수아비 임금으로 1565년까지 존재했다.[5] 조선의 국토면적과 비슷하다.[6]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틀라코판[7] 참고로 비슷한 시기 잉카 제국은 1200만 명 가량으로 약 2배 정도 더 많았다.[8]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100만 명을 넘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 역시 100만을 돌파했음이 확실시된다.[9] 비슷한 시기인 16세기 중반 그단스크의 인구가 7만여 명이었는데 당대 동유럽에서 상당히 큰 축에 속하는 대도시였다.[10] 군사학이 의무 교육이었던 스파르타와 비슷하지만, 사실상 평생 군사 훈련과 세금 납부가 목적이었던 스파르타와 달리 군사 이외의 다른 학문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는 없다.[11] 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 사라졌으며, 로마 외부의 이방민족인 바이킹 및 슬라브도 기독교 전래 이후 이런 풍습이 사라졌다.[12] 문화 상대주의의 기틀조차 잡히지 않은 중세였으니 아무리 지식인이라도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당시는 교황청의 지침을 거스르는 건 파문 및 화형감이었다.[13] 특히 아즈텍 식인설과 인간농장설.[14] 아즈텍의 후예를 자처하는 현대 멕시코에서 틀락스칼텍을 매국노 취급하는 것에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다. 물론 이들은 아즈텍 제국에게 오래동안 시달렸다는 이유가 있기에 정당화할 여지가 있지만, 이러한 배신 행위는 아즈텍 고위층 일부도 포함된다.[15] 한 번 태어날 때마다 10쌍둥이는 기본이다.[16] 특히 유럽 문화권 주변[17] 죄와 병을 연관 짓는 세계관은 어는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인 신앙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1세도 세례가 죄를 씻는다는 교리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는 일화도 이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는 불교 신화에서도 부처의 은총을 받거나 열반을 했더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와 나와틀 종교가 서로 합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18] ##[19] 물론 규모의 차이가 있던 만큼 현실적인 이유로 여러 부분에서 아즈텍이 갑이긴 했지만. 가령 제사와 축제를 핑계로 한 공물 요구에 상대적으로 잃을 게 많은 틀락스칼텍이 한 수 접어줄 때가 많았다.[20] 승리한 전사가 패배한 전사를 양아들로 삼았다고 한다.[21] 사실 가축 사육설은 인신공양을 옹호하기 위한 가설중 하나이지만, 테노치티틀란이 가축을 기를 정도로 넓은 지역도 아니고 마야가 위치한 유카탄 반도와 직선거리로도 1,000km가 넘기 때문에 마야의 가축이 제대로 전파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22] 사회적 지위 말고도 "어르신"이라는 뜻을 가졌다. 신들의 이름에 '테쿠틀리'가 붙은 경우가 많다.[23] 조선시대의 노비도 이와 유사하게 노비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다.[24] 사실 근세 이전의 계급제도가 다 이런 식이었다.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과거 제도를 치러서 여기서 합격한 사람들이 양반이나 신사로 불리면서 지배 계층을 형성했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이전의 일본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다이묘들이 칼과 영지를 하사하고 가신으로 부리기도 했으며, 12세기 이전의 유럽도 기사들은 주로 부유한 평민 계층에서 충당되어 이들 중에서 공적이 큰 사람들에게 귀족 작위가 내려지는 일이 많았다. 유럽, 일본 사회와 아즈텍, 조선, 중국 간의 차이라 하면, 유럽이나 일본은 근세 이후로 이렇게 형성된 신분제가 아예 고정되어 근대까지 이어진 것이고, 아즈텍과 조선,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느슨하고 유연한 신분제도가 멸망때까지 유지되었다는 차이가 있다.[25] 몬테수마 2세의 후임자인 쿠이틀라우아크와 콰우테목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26]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각자 분리독립한 이유도 안데스산맥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27] 황은 포포카테페틀 화산 분화구에 직접 들어가서 구했고, 초석은 열대지방 흙에 산재해 있던 걸 물에 타 말려서 채취했으며, 포탄은 석재로 만들었다.[28] 당시에는 철제 대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구리와 주석을 조합한 청동 대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리와 주석들을 모아서 청동 대포를 만들어 쓴 것이다. 당시 아즈텍을 비롯한 메소아메리카는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쯤 되는 과도기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실생활용 도구들을 만들어서 쓰긴 했으나, 화약의 부재 때문에 그것들로 대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29] 코르테스가 탄 말의 목이 마콰우이틀에 의해 단번에 잘려나가 코르테스가 죽을 뻔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요석의 단면은 매우 날카로워서 현대까지도 수술용 메스로 쓰일 정도다. 그러나 흑요석은 날카롭고 경도가 높은 편이지만, 강도가 낮고 취성이 강해 실제 내구성은 강철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기에 스페인인의 철제 무기와 부딪히면 깨지거나 부서졌고, 스페인인들의 판금 갑옷에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30] 스페인인들도 나중에는 무거운 판금 갑옷 대신에 아즈텍 방식의 갑옷을 종종 입게 된다. 금속제 갑옷보다 가벼워서 활동하기 편한 데다가, 원주민들의 투석구를 막아내는 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31] 코르테스 휘하의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에 도착해서 맨 처음 한 행동이 바로 화산을 찾아다닌 것이었는데, 화산에서는 화약의 재료가 되는 유황과 초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32] 아즈텍측도 슬픔의 밤 이전에 강화를 요청하는 스페인측에 처음에는, "우리가 니들 1명 죽일 때 우리 전사 25,000명이나 죽는들 결국 이기는건 우리"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수적 우세가 경험이고 화력이고 의미없을 정도로 너무 심했다.[33] 역시 명나라와 오스만 튀르크 등의 당대 다른 구대륙 제국과 달리 넓은 영토를 유지할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게 원인이었다.[34] 애초에 태생이 도시국가의 복속과 동맹으로 이루어진 제국인 만큼 당연히 아즈텍도 이러한 동맹시의 경우 가혹한 통치를 할 이유가 없었으며 그들 또한 적극적으로 적대할 이유가 적었다.[35] 특히 뉴멕시코 주의 경우, 스페인 세력이 점령했다가 원주민들의 반격으로 축출되는 일까지 있었다.[36] 미국의 인디언 전쟁 당시 미국 중서부/남서부 지역에서 항전했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비슷했다.[37] 후안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바로 이 부족 출신이었다.[38] 반면 아르헨티나와 칠레 중북부 일대에 살았던 차루아족, 아이마라족, 케추아족 같은 다른 남미 원주민 부족들은 커다란 저항없이 스페인군에게 손쉽게 정복되었다.[39] 지금도 우루과이는 남미에서 육우 사육 등 축산업이 잘 나가는 나라이다.[40] 테노치티틀란은 스페인에 의해 함락된 후 호수가 메워져 현재의 멕시코 시티가 되었는데, 호수를 메워서 만든 도시라는 특성상 멕시코시티 도시철도를 건설하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41]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목테수마 데 툴텡고 공작이라는 스페인 작위를 계승해오고 있다.[42] 현존하는 몬테수마 2세의 후손들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며 이 가문은 1935년 멕시코 정부에서 지급을 중단할 때까지 연금을 수령받았다. 남계로 내려온 적통도 있었지만 그쪽은 1836년에 마지막 후손이 뉴올리언스에서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대가 끊기게 되었다.[43] 전부는 아니었지만 서장자 마르틴 코르테스를 비롯한 4명은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44]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문명이 마야 문명이긴 하나, 작중의 인신공양이나 규모는 누가 봐도 아즈텍이다. 대놓고 아즈텍이라고 하자니, 아즈텍을 기원으로 여기는 멕시코 출신 인구가 결코 적지 않은 미국 사회상 때문에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로 마야로 바꿨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45] Instituto Nacional de Antropología e Historia, 1939년 설립된 멕시코 국립 고고학 기관[46] Templo Mayor, 위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을 섬기는 쌍두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매장된 테노치티틀란 구 시가지.[47]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권은 예외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유럽권은 마녀사냥이 내부의 희생자를 만들어 전쟁, 기근, 질병에 의한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인신공양의 기능을 대체했다.[48] 아즈텍 사제들 역시 자신들의 혀, 귓볼, 장딴지 등지를 가오리나 선인장 등의 가시로 스스로 찔러서 피를 신에게 바쳐야 했다. 이러한 사혈 의식 역시 멕시코 지방 전체적으로 흔한 풍습이었다.#[49] 이런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해당 남성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자를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50] 유튜브 쇼츠에 의해 유명해진 유언비어다.[51] 이들은 코르테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독보적인 기득권 지위를 보장받았다.[52] 시선에 따라 갈리기는 하나 그러한 상황에서 현대의 구 스페인 식민 국가들도 사실상 스페인이 지배하는 지역이라 보는 이들도 있고, 실제로도 예나 지금이나 구 에스파냐, 포르투갈 식민지 국가들의 사회 계층들은 스페인계 백인 상류층과 원주민, 혹은 흑인 하류층같은 형태로 분열되어 있다.[53]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와 비슷하다.[54] 흥미롭게도 아즈텍과 비슷한 기후를 가진 곳은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이다. 둘 다 산악 건조지형이라는 면에서 크게 비슷하다. 괜히 스페인의 북중미 식민지배의 중심지가 멕시코 시티와 인근 지역이 된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미국의 서부극을 흉내내 찍으면서도 미국 본토 서부극과 달리 텍사스(과거에는 멕시코령이었음)나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역이 주된 배경이 되는 스파게티 웨스턴 또한 사막이나 황무지를 배경으로 한 촬영이 주로 스페인에서 이루어졌다.[55] 사람 넓적다리 뼈로 만든 피리, 제사에 바칠 사람 심장을 담는 그릇 등이 전시되어 있다.[56] 물론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에 당도한 것은 9세기 경의 일이고, 아즈텍은 13세기 경에나 등장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지역도 아즈텍은 중미에 위치한 반면 바이킹들은 캐나다 해안가에만 당도했다. 현실과 달리 가축으로 쓸만한 우제류라도 있었던 모양이다.[57] 이들은 햇빛에 취약한데 아즈텍이 태양을 숭배하는 문명인 것을 감안하면 햇빛에 불타 사라진 듯 하다. 죠죠 특유의 현실에 있던 상황을 픽션이랑 섞은 예시중 하나이다.[58] 다만 플레이어는 기병의 기 자도 모르던 당시 아즈텍 지휘관이 아니며, 기병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으므로 얘기가 좀 다르다. 게다가 AI 역시 멍청해서 기병을 제대로 활용 못하니, 보병의 빠른 이동속도와 압도적인 병력수로 유럽 보병을 포위공격+기병대에 보병 우라돌격을 시킨다면 중수 이상 되는 실력만 가져도 손쉽게 이길 수 있다. 오히려 포위공격이 불가능해 한 번에 한 놈 법칙 식으로 스페인군에게 학살당하기 일쑤인 시가전에서 더 불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