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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한국어: 선제후(選帝侯), 선거후(選擧侯) |
라틴어: Princeps Elector | |
독일어: Kurfürst(쿠어퓌르스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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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작위제도에서 으뜸가는 지위.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주들을 가리킨다.근대화 이후, 민주화 이전의 정치는 간선제가 일반적이었는데. 바로 이 간선제의 원형이라 봐도 무방하다. 대상이 황제에서 대통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아예 같지는 않다. 가장 극명한 차이로 선제후는 국회의원 처럼 선거로 당선되는게 아닌 각계 유력인사나 국가의 장로급 또는 지방의 호족중 권력이 막강했던 이가 자리 했었다. 대체로 이런 이들이 귀족에 원형이었기에 차후에는 귀족들 중에 대표자들이 선제후가 되는 식으로 발전 한 것이다.
명칭 자체는 로마에서 기원 하긴 했으나 왕을 선거로 뽑는 형태 자체는 훨씬 이전 부터 존재하였고, 그 형태가 온전히 확립된 것이 로마 때 부터로 보고 있다.
2. 역사
2.1. 초기의 선제후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은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유래되었다.[3] 게르만족의 전통상 원래 지도자 선출은 모든 남성 구성원이 참여해야 하지만, 시간과 거리 상의 제약으로 처음에는 참여자를 귀족 신분으로 한정하였다.독일의 왕을 뽑는 선거의 기원은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였다. 동프랑크의 5대 부족 공작[4]인 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 상·하 로트링겐 공작들은 회의를 열어 독일 부족 공작 중에서 다음 왕을 뽑기로 결의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서프랑크 국왕 샤를 3세의 왕위 계승권 주장을 거부하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다음 왕으로 선출하였고,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소멸하고 독일 왕국이 시작되었다.
선출로 왕이 된 콘라트 1세도 후사 없이 사망하자, 919년 5월 6일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회의에서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다음 왕으로 선출되었다.[5] 하인리히 1세 이후 오토 왕조가 독일 왕위를 사실상 세습하였지만 형식적으로 선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는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진 후에도 이어졌다.
962년 독일왕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도 독일 왕국의 국왕 선출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다. 즉,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이 회의에서 독일 왕국 국왕인 독일왕을 뽑고 이 독일왕이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게 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토 왕조의 황제들은 제위를 아들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고자 새로운 방안을 고안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전에 국왕 선거를 실시하여 아들을 공동 독일왕에 앉히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오토 왕조는 제위를 세습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력이 강성하거나 권위가 안정적인 시절에는 주로 이런 방식으로 제위가 세습되었는데, 잘리어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황권이 비교적 강했던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는 이렇게 세습을 위한 방책으로 부자 사이인 두 명의 공동 독일왕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실권은 현역 황제인 부왕이 장악하였고, 아들은 명목상 공동 독일왕이지만 황태자로서 역할이 제한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는 황제들이 이탈리아 경략과 십자군 전쟁 등으로 해외로 출병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들 공동왕이 해외로 출타 중인 부왕을 대신해 내정을 다스리기도 했다. 그러나 때때로 아버지가 해외로 출병한 틈을 타, 공동왕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는데,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2세 등이 그런 사례였다. 이런 아들들의 반란은 결국 황권의 약화와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하인리히 4세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은 결국 서임권 투쟁에서 황제가 패하는 결과(보름스 협약)에 일조하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은 대공위시대의 혼란을 야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게르만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던 9세기 서프랑크 왕국에서도 귀족들의 선출로 국왕을 뽑았다. 987년,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귀족들의 선출로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것이 그 사례다. 왕위에 오른 위그 카페는 독일의 오토 왕조와 마찬가지로 선출제 속에서 아들에게 왕위를 세습할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부왕제로, 신성 로마 제국의 공동 독일왕과 비슷한 제도였다. 즉 왕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아들을 부왕으로 선출시켜 대관식까지 받게 한 후 권력의 일부분을 떼어주는 것이었다. 이후 카페 왕조는 무려 14세기까지 왕조가 지속되었으므로, 프랑스에서는 점차 장자 세습제가 굳어졌다.[6]
2.2. 선제후의 전성기
동프랑크 왕국 말기, 독일 왕국 성립기에 시작된 황제선거 전통은 이후 기존 부족 공작들과 함께 오토 1세의 제국교회 정책으로 성장한 수좌주교[7]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 등을 포함한 선거인단이 황제(독일왕)를 선출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8] 그러다가 12세기 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 시절에 선제후 제도는 큰 변화가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그 중에서도 특히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행사했던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시절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제위 세습은 큰 위협에 처해 있었다. 바이에른와 작센을 전부 손에 넣으며 호엔슈타우펜 가문보다 더욱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벨프 가문의 존재 때문이었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즉위 후 거의 평생을 라이벌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과 다툼을 벌였고 결국 승리해 그의 영지를 잘게 쪼개어[9] 5대 부족 공국 체제를 사실상 해체하였다.(1180년~1190년)강력한 황권을 휘두르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프리드리히 2세의 사후 몰락했으며, 이미 그의 생전에 슈바벤 공국은 사실상 해체되어 이름만 남은 껍데기로 전락했다, 이후 1356년 금인칙서가 반포될 때까지 선제후 자리는 고정되지 못하고 유력 제후들이 돌아가면서 차지했다. 선제후 자리를 놓고 제후들 간의 다툼도 자주 발생했다.
선제후는 세습화한 왕조의 후계자를 공인해주는 거수기 역할을 할 때가 많았지만, 왕조가 단절되었으나 황권이 약화되고 제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막강한 실권을 발휘하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선제후가 그러한 실권을 실질적으로 발휘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황권 강화를 위해 선제후들을 조져놓았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사망한 직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프리드리히 3세 때까지 약 250년간의 적지않은 기간 동안이었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황권 강화와 가문의 안정적인 제위 세습을 위해 선제후를 독점하였던 5대 공국을 해체했지만, 그가 죽자 거수기였던 선제후들이 오히려 진정한 실권을 발휘하며 바르바로사의 후손들을 몰락시켰다. 바르바로사 사후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즉위하여 강력한 황권을 이어가려 했으나 1198년, 이른 나이에 죽자 제후들을 찍어 누르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반감을 가진 제후들과 교황이 결탁하여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이자 차기 황제(독일왕)로 이미 선출된 프리드리히 2세를 거부하고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를 선출했다. 그동안 독일 역사에서 가문이 단절된 경우가 아니라 왕조의 후계자가 있는데도 선제후들이 실권을 발휘해서 왕조를 갈아치운 것은 이때가 사실상 처음이었다.[10]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안정적으로 세습하게 되는 1452년까지 약 250년간 선제후들은 황제선거에서 실력을 행사했고, 황제들과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13세기에는 당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의 입김도 선제후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대 교황 중 최절정의 위세를 과시한 인노첸시오 3세는 선제후 중 3명의 성직 선제후에 더해 세속 선제후 중 라인 궁정백을 포섭하여 황제선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권력 다툼을 벌이던 호엔슈타우펜 왕조[11]을 견제하기 위해 1198년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해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일시 단절시키고 벨프 가문의 오토 4세가 제위를 차지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막상 오토 4세가 제위에 올라 자기 권력을 강화하자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를 압박하여 결국 제위에서 자진해서 물러나도록 하기까지 했다. 독일왕이 아닌 대관을 받은 황제 중에서 교황의 압력으로 퇴위한 것은 오토 4세가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오토 4세 퇴위 후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배후 지원하여 그를 황제에 앉혔지만, 프리드리히 2세도 교황과 갈등을 벌였고, 이에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3번이나 파문을 날렸다. 이런 과정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크게 힘을 잃었지만, 교황 역시 독일 제후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1250년,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제국은 후계자를 두고 혼란에 빠졌고 30여 년 간의 대공위 시대가 시작되었다. 결국 교황과 제후들은 혼란을 종식시키 위해 다시 정통성 있는 황제를 뽑아야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1273년 대공위 시대를 종식하기 위한 황제선거가 열렸다. 제후들의 반감으로 교황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제후들은 혼란을 방지하고자 황제를 뽑되, 특정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며 강성해지는 것을 막고자 일부러 한미한 백작 가문을 황제로 선출하기를 원했고 마인츠 선제후와 뉘른베르크 성백 프리드리히 3세[12]의 주도로 스위스 산골짜기에 있는 합스부르크 백작인 루돌프 4세가 새로운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선출되었다. 당시 어수선한 상황과 교황 및 막강한 공작, 프랑스 국왕 등의 견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루돌프 1세는 교황의 대관을 받지 못했다. 이후 하인리히 7세를 제외하면 한동안 이처럼 대관을 받지 못하고 제위를 이어가는 시대가 지속되었다. 루돌프 1세는 죽기 전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물려주고 미리 후계자로 선출시키기를 원했으나 제후들은 당연히 거부하였고, 이후 나사우 백작 아돌프, 루돌프 1세의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13], 룩셈부르크 가문,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등이 돌아가면서 제위에 올랐고 어떤 가문도 3대 이상 장기적인 세습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각 가문은 후손들에게 제위를 세습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점차 세습 주기가 길어졌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제위 세습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가문이었다. 1356년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카를 4세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룩셈부르크 가문은 카를 4세의 차남 지기스문트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기스문트가 가진 독일 왕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을 상속받은 사람은 지기스문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였다.
그러다가 1452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가 독일왕 프리드리히 3세로 선출된 후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점 세습하기 시작했다. 재주는 카를 4세가 부리고 돈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져간 셈.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도 초기에는 세습을 이어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나 워낙 장수한 덕에 경쟁자들이 죄다 먼저 죽어[14]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제위를 세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는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 취급을 당해 황제선거에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의 경쟁 끝에 황제로 선출되었다. 게다가 카를 5세도 아들을 황제로 선출시키는데 실패했다. 사실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2세이 황제로 선출되기를 원했지만, 스페인 출신에 대한 제후들의 거부감과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배신[15]으로 인한 패퇴로 1553년 자진해서 아들을 황제 후보자로 출마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펠리페 2세는 선출되지 못했지만,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진작에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이어갔다.
2.3. 금인칙서 (1356년)
1356년 황제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공포하여 7명의 선제후를 명시하였다.금인칙서에서 확정된 선거제도와 선제후 특권을 살펴보면,
- 선제후는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이상 성직제후 3명, 라인 궁정백, 작센-비텐베르크 공작[17],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국왕 이상 세속제후 4명으로 확정.
- 선거는 단순 과반수. 선거 결과에 복종하지 않는 선제후는 자동적으로 선제후 지위를 박탈당한다.[19]
- 선거 결과는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선제후 영지는 분할을 금지하고 장자 단일 상속제로 한다.[23]
- 선제후는 '호출에 응하지 않을 권리'와 '소환되지 않을 권리'를 가지며, 선제후에 대한 반역은 대역죄로 처벌한다.
- 제위가 공위일 경우, 라인 궁정백이 슈바벤 지역과 프랑켄법이 미치는 지역을, 작센 공작이 작센법이 미치는 지역을 통치한다.
- 제후 사이의 동맹, 도시 사이의 동맹은 금지한다.[24]
- 제후 사이의 개인적 다툼을 금지한다.[25]
- 선제후를 비롯한 제후의 영지 주권을 법적으로 확정한다.
결국 선제후 특권은 제국 내에서 선출로 뽑힌 황제에게도 권력을 제한 당하지 않으며 영지 내에서는 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다. 다만 한 가지 제약이 있었는데, 마음대로 작위를 퍼줄 수 없는 것. 이것은 황제의 고유 권한이었으나 문제는 이마저도 선제후들이 자신들에게 충성한 신하들을 추천하면 제국의회에서 황제가 거의 들어주었기에 있으나 마나였다.
황제 선거권이 있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할 시 각각 선제후 한 표씩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다수결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들어선 이후로는 대부분의 황제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으나, 로마 이래 황제 직위와 게르만 귀족의 오랜 관행상 최고직위는 세습직이 아니었으므로 황제선거를 앞둔 때에는 출마를 앞둔 유력제후가 선제후들에게 굽신대며 돈과 각종 이권을 챙겨주었다. 대표적으로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는 자기 자식에게 절대로 세습하지 않을 것을 공약하여 당선 되었을 정도였다. 사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일단 선출되면 무를 수 없는 종신직이었기에 경쟁 가문의 후보가 황제로 등극하면 무를 수가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격적 등극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틈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카를 7세로 즉위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황제로 등극했지만, 선출 전에 쉽게 승계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26] 중세시대 교통과 통신의 열악함 탓에 유고시에 다시 모이기도 어려우니 미리 차기 황제를 뽑아두기도 했다. 차기 황제로 내정된 사람은 '로마왕'으로 불렸다.[27] 하지만 차기 황제는 대부분 현직 황제의 아들, 동생, 손자가 당선되었고 없다면 사위 등 친지들이 당선되었다.
2.4. 금인칙서 이후
상술하였듯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된 르네상스 시기 이후 실제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거의 독식했지만, 그렇다고 황제선거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매번 무난하게 당선된 것은 아니었다.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호엔촐레른 가문[28]을 제외하면 선제후라고 그저 거수기는 절대 아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도 했다. 16세기 초에는 막시밀리안 1세의 장손 카를 5세[29]는 황제선거 시 유럽 내 거대 자본인 푸거 가문과 베르트 가문을 동원해서[30] 돈을 뿌려 프랑스 프랑수아 1세를 제치고 당선되었으며, 이때 프랑수아 1세는 30만굴덴, 카를 5세는 푸거 가문을 동원하여 85만굴덴을 뿌렸다. 이러한 현질에 경악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출마를 고려하다 포기할 정도. 프랑수아 1세의 출마에서 보듯이 황제 출마, 즉 피선거권은 선제후 자격을 요하지 않아서 외국 군주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도 출마가 가능했다.[31]선제후는 독일 땅의 귀족 서열에서 으뜸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황제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왕보다 낮은 자리이긴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 안의 왕위는 모두 황제가 겸하는 명예직이거나 선제후를 겸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황제 다음가는 자리였다.[32] 또한 제국대법원의 관할에서 벗어나는 독자적인 법원을 가지며, 독자적인 화폐 주조권과 관세권 같은 자율성을 가졌다. 선제후의 의무라고는 황제를 적대하고자 하는 동맹을 결성하지 않을 의무 뿐이었고, 슈말칼덴 전쟁의 작센 선제후국이나 30년 전쟁의 팔츠 선제후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바이에른 선제후국,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의 프로이센 왕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등 이조차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33] 명목상으로 신하이지만 황제를 뽑는 유권자이다보니 황제로서는 상전이 따로 없는 격.
3. 상세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합스부르크 세속령은 엄연히 구분되는 직위이나, 사실상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식하다시피 했기에 한국 국내에서는 이로 인한 혼동이 자주 발생한다. 예컨대 종종 카를 6세의 국사조칙을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결부하여 이해하고는 하는데, 국사조칙은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령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을 남성 상속자가 없으면 여성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과 관련된 국사조칙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34]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200년전 문서를 들고 나와서 합스부르크 가문 땅도 다 내꺼 드립 치고 그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었다. 전쟁 중인 1742년에 있었던 황제 선거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인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을 당선시키고자[35] 마인츠 선제후와 트리어 선제후, 그리고 동맹 관계인 하노버 선제후[36]의 지지를 받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세습해오던 선제후 직위인 보헤미아 왕위가 당시 카를 7세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막상 자신은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를 7세는 자신의 두 표와[37] 친척한테 표를 몰아준 다른 비텔스바흐 가문 구성원들[38]의 두 표,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39]와 작센 선제후[40]의 지지를 받아 황제에 당선되었다.[41] 이처럼 황제 출마와 선거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물론 현직 황제라도 마음대로 배제할 수가 없는 고유의 제도였다.이후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카를 7세를 여러번 격파했지만, 이미 카를 7세가 당선된 이상 오스트리아도 그가 사망할 때까지는 무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카를 7세가 즉위 3년 만에 사망해서 타협이 벌어지고, 1745년에 황제 선거가 다시 열려서 프란츠 1세가 뽑힐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참패하여 그 대가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 중 알짜 지역이었던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내주어야 했다. 당시 슐레지엔은 공업지대로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령의 세수 비중에서 4분의 1을 차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에 속하지 않으나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작위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대공이 그 예로, 선제후는 아니나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공작(Herzog)이 아닌 대공(Erzherzog)으로 불렸으며 대특권(Privilegium Maius)과 소특권(Privilegium Minus)을 보유하여 장자상속, 재판권과 같은 선제후 권리는 물론이요 선제후 회의에 속하지 않은 제후들 중 최선임 제후로서 영방국의 제국회의를 주재할 권한 등이 부여되었다. 이 근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4세[42]가 조작한 문서였으나, 프리드리히 3세가 선출된 후 셀프 승인했다.
제국 말기에는 현직 오스트리아 대공이 아닌 후계자가 선제후 특권을 부여한다는 식의 명예직으로 부여되기도 했다. 그 예로 7년 전쟁이 끝나고 협상 결과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요제프에게 보헤미아 국왕의 선제후 특권이 부여된 일이 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요제프는 1763년 황제선거에서 7표[43]를 받아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하자 1765년 황제 요제프 2세로 즉위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후 선제후국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헤센 선제후국만은 선제후 호칭을 계속 사용했다. 헤센 선제후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편을 들다가 프로이센에 강제 합병당해 멸망할 때까지 선제후 칭호를 유지한 유일한 국가였다.
4. 선제후국 목록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8B425F, #AB5071 20%, #AB5071 80%, #8B425F); color: #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356 - 1623 | ||||||
성직 선제후 | 세속 선제후 | ||||||
마인츠1 | 쾰른1 | 트리어1 | 보헤미아 | 팔츠2 | 작센 | 브란덴부르크 | |
17세기에 추가 | |||||||
바이에른3 | 하노버4 | ||||||
1803년 이후 추가 | |||||||
레겐스부르크5 | 잘츠부르크6 | 뷔르츠부르크7 | 뷔르템베르크5 | 바덴5 | 헤센5 | ||
신성 로마 황제 1: 1803년 소멸 2: 1777년 팔츠-바이에른으로 통합 3: 1623년 선제후국 승격 4: 1692년 선제후국 승격 5: 1803년 ~ 1806년 6: 1803년 ~ 1805년 7: 1805년 ~ 1806년 | }}}}}}}}}}}} |
4.1. 기존의 7개 선제후
나폴레옹 전쟁 이전 선제후국들은 모두 제국 궁정의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물론 이 직책들은 명예 칭호일 뿐이라 실질적인 직위는 아니다.- 성직 선제후 3명
- 마인츠 대주교: 독일 왕국령의 제국재상(Reichserkanzler für Deutschland). 선제후 중 최고서열로, 투표순서도 마지막이라 투표 전 동수일 경우 사실상 캐스팅보터 역할을 했다. 1801년에 라인강 서안의 영지가 혁명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그 후속 조치로 1803년 레겐스부르크 대주교후로 대체되었다.
- 쾰른 대주교: 이탈리아 왕국령의 제국재상(Reichserkanzler für Italien)으로 서열 2위. 특이하게도 베스트팔렌과 엥게른[44]의 공작이라는 세속 제후를 겸했으며 뮌스터나 파더보른 같은 인근 지역 주교를 겸하는 대주교들도 있었다. 1583년부터 1761년까지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숙질계승으로 준세습화하기도 했으며, 1597년부터는 쾰른이 아닌 본에서 머물렀다. 1797년에 라인강 서안의 영지를 혁명 프랑스에 점령당한 후, 1803년에는 라인강 동안에 남은 영지도 주변 세속 군주들에게 분할되며 사라졌다. 마지막 선제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45]이라 주교직을 빼앗기고 나서도 튜튼기사단 단장을 맡거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부왕직을 맡는 등 잘 나갔다(...).
- 트리어 대주교: 부르군트 왕국령의 제국재상(Reichserkanzler für Burgund). 라인강 유역을 장악했으나 프랑스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를 우려한 트리어 대주교들은 17세기 이후부터는 트리어가 아닌 코블렌츠에서 머물렀다. 역시 나폴레옹 전쟁 중인 1795년과 1803년에 걸쳐 모든 영역을 상실하고 소멸하였다. 마지막 선제후[46]는 아우크스부르크 주교[47]직으로 물러나 거기에서 죽었다.
- 세속 선제후 4명
- 작센 공작: 제국 대장군(Erzmarschall)이자, 황제 공위시 북독일[48] 지역의 제국섭정이다. 작센은 아주 태고적부터 황제 선출권이 있었으나, 문제는 앞서 말한대로 당시 작센을 통치하던 아스카니아 가문이 작센-비텐베르크와 작센-라우엔부르크로 갈라져서 서로 황제 선출권을 주장하였고 이때문에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3세[49]가 동시에 선출되는 촌극이 벌어지자 카를 4세가 1356년 금인칙서로 장자계열인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을 선제후로 인정하였다. 작센-비텐베르크의 아스카니아 가문은 3대 5명만에 절손되었고, 이후 후사가 없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작센-라우엔부르크 아스카니아 가문의 요청을 씹고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도왔던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위를 수여하여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두 손자 에른스트와 알브레히트가 베틴 가문의 영지를 분할하여 에른스트의 후손들이 선제후가 되었고, 알브레히트의 후손들이 작센 공작을 자처하였으나 슈말칼덴 전쟁에서 알브레히트의 손자인 작센 공작 모리츠가 6촌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처벌하기 위한 카를 5세에게 편승하여 알브레히트계가 작센 선제후가 되었고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튀링겐 일부만 겨우 유지하여 이후 무수히 갈라질 에른스트계 작센 공국의 조상이 되었다. 1806년 라인 동맹에 가담하여 작센 왕국으로 승격했고, 빈 체제에서도 그대로 승인되어[50] 독일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 라인 궁정백[51]: 제국 집사장(Erztruchsess, ~1623년 및 1706~1714년) 또는 제국 재무장(Erzschatzmeister, 1648~1706년 및 1714년~1777년), 그리고 황제 공위시 남독일[52] 지역의 제국섭정. 영지는 옛 상 로트링겐 지역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켄의 후계로 간주되었다. 1214년부터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나, 1253년부터 분할상속 되었고, 만약 바이에른이 황제 선출권을 갖는다면 라인 궁정백,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까지 총 3표를 행사할 우려가 있어 장자계열이었던 라인 궁정백이 살아남고 차자계열인 바이에른은 황제 선출권을 잃었다. 1621년에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팔츠 전쟁에서 패배하여 제국추방령에 처해지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선제후위를 바이에른에 빼앗겼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리드리히 5세의 맏아들 카를 1세 루트비히가 되찾았다. 1685년에는 칼뱅파였던 지메른 분가가 단절되고 가톨릭 신자인 노이부르크 궁정백 필리프 빌헬름이 계승하면서, 종교적 균형이 깨지는 것을 우려한 다른 선제후들의 견제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가 새로이 선제후로 격상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777년,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바이에른까지 상속받았으나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상속받으면 1표로 통합할 것을 규정해서 팔츠-바이에른 1표로 통합되었다.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제국 시종장(Erzkämmerer). 실질적으로는 옛 슈바벤의 후계이다. 원래 아스카니아 가문이 다스렸으나 1320년 대가 끊겨버렸고 황제 선출권을 노리던 당시 독일왕 루트비히 4세가 자신의 맏아들 루트비히에게 넘겨주면서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게 되었다. 비텔스바흐 가문과 제위를 놓고 다투던 카를 4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바이에른의 황제 선출권을 박탈하면서도 브란덴부르크의 황제 선출권은 내버려 두었는데 이는 브란덴부르크를 빼앗아 룩셈부르크 가문이 황제 선출권 2장을 확보하겠다는 큰그림을 그렸기 때문. 실제로 카를 4세는 1371년, 브란덴부르크를 침공해 사위인 오토 7세[53]를 협박하였고 2년 뒤 연금하사를 명목으로 쫓아내어 자신의 맏아들 벤첼에게 브란덴부르크를 수여하였다. 그러나 무능했던 벤첼은 동생 지기스문트에게 브란덴부르크를 빼앗겼고, 1415년에 지기스문트가 자신의 보헤미아 왕 즉위를 도운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6세에게 브란덴부르크를 하사하여 나중에 독일을 통일하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지배가 시작되었다. 1618년부터는 프로이센 공작[54]을, 1701년부터 1806년까지 프로이센 국왕[55]을 겸하였다.
- 보헤미아 국왕: 제국 연회장(Erzmundschenk).[56]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는 국가였으나 체코인들의 국가에게 선거권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콘라트 4세가 죽은 후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가 황제 선거에 출마하는 등 꾸준히 제국의회에 얼굴을 비추면서 선거에 나섰고 나중에 카를 4세가 룩셈부르크 가문의 제위 세습을 용이하게 하고자 경쟁 가문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선거권은 박탈하는 한편 보헤미아 왕국의 선거권을 아예 금인칙서로 인정하였다. 즉, 실질적으로 바이에른의 후계. 하지만 실질적인 선거 참여는 얼마 없었으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의 1519년 선거 정도에서나 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0년 전쟁 이후 하노버 선제후국이 새로 들어오기 전인 1653, 1658, 1690년 선거에서는 동점 획득을 막기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자진해서 투표를 포기하기도 했다.
어차피 투표 안해도 선출 확정이니까
4.2. 17세기 이후 새로 추가된 선제후
- 바이에른 공작: 팔츠의 자리를 대신하여 제국 집사장. 카를 4세가 비텔스바흐 가문을 견제한답시고 바이에른의 선거권을 박탈하여 한동안은 공국으로 남았다가,[57] 1618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란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왕이 되어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적대하자 그 보복으로 팔츠 선제후 자격을 박탈하면서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인 바이에른에게 선제후 자격을 주었다. 1648년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사실상 패전하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팔츠 선제후가 부활하였음에도 선거권을 유지하였고, 1777년에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르가 바이에른을 상속받으면서 팔츠-바이에른 1표로 통합되었다.1805년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나폴레옹을 도운 대가로 이듬해 왕으로 승격했고, 이후 라인 동맹에 가담했다. 바이에른 왕국은 빈 체제에서도 그대로 승인되어 독일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 하노버 공작[58]: 제국 기수(Bannerbearer). 1714년부터 1806년까지 영국 하노버 왕조 국왕.[59] 1795년에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 혁명정부와 야합하여 마인강 이북 지역에 대한 프로이센의 우선권을 보장받았고, 이를 근거로 1803년에 나폴레옹이 점령한 하노버 선제후국을 인계받아 자국에 합병했다. 이후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하노버 선제후국 영역을 포함한 마인강 이북 지역을 프랑스에 빼앗겼고, 나폴레옹은 라인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던 헤센 선제후국과 프로이센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합쳐 베스트팔렌 왕국을 형성했다. 빈 체제에서 베스트팔렌 왕국이 해체되고 하노버 선제후국이 복구되면서 하노버 왕국으로 승인되었다.
4.3. 나폴레옹 전쟁 중 새로 추가된 선제후
1777년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같은 가문인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는 바이에른 선제후국 영지를 상속받으면서 팔츠 선제후의 선거권과 바이에른 선제후의 선거권이 팔츠-바이에른 1표로 통합되어 선제후가 8명으로 축소된 가운데,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성직 선제후 3곳의 영지가 프랑스로 합병되고 프로이센의 침공을 받은 하노버 선제후국이 소멸하면서 총 5개 선제후직이 공석 상태가 되었고, 이에 1803년 3월 2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채택된 제국 대표 회의 최종 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에 따라 나폴레옹의 입맛에 맞는 위성국들이 선제후 지위를 차지했다.이듬해 나폴레옹은 '프랑스인의 황제'를 선포했고,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2세는 이대로 가다간 신성 로마 제위마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자신은 그 보호자를 자처했고, 프란츠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을 해산하라고 위협했다. 결국 제국은 8월 6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선제후는 라인 동맹에서 왕 또는 대공(Großherzog)으로 지위가 바뀌었다. 여담으로 나폴레옹 전쟁 중 새로 추가된 선제후들은 황제선거에서 투표 한 번 하지 못했다.
- 레겐스부르크 대주교: 원래 콘스탄츠 주교후를 맡고 있던 카를 테오도르 폰 달베르크는 독일을 침공한 나폴레옹을 지지하여 그 대가로 1802년부터 마인츠 대주교(선제후)가 되었다. 결의안에 따라 마인츠 대주교 직위는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로 대체되었고,[60] 프랑스에 넘어간 라인강 서안의 마인츠 대주교령에 대한 보상으로 기존 레겐스부르크 주교후령과 주변의 몇몇 수도원령이 세속화되어 레겐스부르크 자유도시와 함께 '레겐스부르크 후국(Fürstentum Regensburg)'으로 통합되었으며, 라인강 동안의 기존 마인츠 대주교후령 일부도 세속화되어 '아샤펜부르크 후국(Fürstentum Aschaffenburg)'으로 재구성되었다.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는 두 후국의 후작을 겸했으며, 제국 재상(Reichserzkanzler) 및 최고서열 선제후 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라인 동맹에서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는 명목상 라인 동맹의 '수석군주(Fürstprimas)'였고, 추가로 프랑크푸르트·베츨라어 자유도시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바이에른 왕국과 레겐스부르크 후국 영유권 분쟁을 겪었고, 1810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레겐스부르크 후국은 바이에른에 합병되었다. 대신 나폴레옹에게 아샤펜부르크 후국 인근의 하나우 후국과 풀다 후국을 보상으로 받아 달베르크의 영지들은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으로 통합되었고, 달베르크의 레겐스부르크 대주교직과 수석군주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은 빈 회의 이후 대체로 바이에른 왕국에 합병되었다.
- 잘츠부르크 공작 → 뷔르츠부르크 공작: 1801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에 휘말려 작위를 잃은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도 3세[61]에 대한 보상으로 기존의 잘츠부르크 주교령을 세속화하여 영지로 제공하고 선제후 자격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1805년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나폴레옹 때문에 페르디난도는 또다시 영지에서 쫓겨났고, 이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잘츠부르크 공국이 오스트리아로 편입되면서 페르디난도는 뷔르츠부르크 공국을 영지로 받았다. 라인 동맹에서 선제후와 뷔르츠부르크 공작 지위는 뷔르츠부르크 대공으로 대체되었으나, 빈 회의 이후에 페르디난도는 다시 원래 지위인 토스카나 대공으로 복귀하고, 뷔르츠부르크는 바이에른이 가져갔다.
- 뷔르템베르크 공작: 1805년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나폴레옹을 도운 대가로 이듬해 왕으로 승격했고, 이후 라인 동맹에 가담했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빈 체제에서도 그대로 승인되어 독일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 바덴 변경백: 1806년 라인 동맹에 가담하여 바덴 대공국으로 승격했고, 빈 체제에서도 그대로 승인됐다.
- 헤센카셀 방백: 1803년 이전에 프랑스가 합병했던 마인츠 주변지역을 받고 크기를 키우는 동시에 선제후 지위를 받았다. 하지만 라인 동맹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하는 패기(...)를 부려, 나폴레옹은 헤센 가문의 종가 헤센카셀 대신 방계인 헤센다름슈타트 방백을 헤센 대공국으로 승격시켰다. 헤센 선제후국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직후 프랑스군에 점령당했고, 나폴레옹이 1807년에 베스트팔렌 왕국을 구성하면서 헤센 선제후국을 합병시켜 버렸다. 헤센카셀은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에 영지를 되찾았고 빈 회의 동안 선제후 빌헬름 1세는 헤센 지방의 고대 게르만 부족인 카티족에서 따온 '카텐 왕(König der Chatten)'으로 승격해달라고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독일 연방에서 대공 지위만 공인받았으며, 헤센다름슈타트의 헤센 대공국은 그대로 승인되었다. 결국 헤센다름슈타트의 헤센 대공국보다 우월함을 내세우기 위해 헤센카셀은 종전대로 '헤센 선제후국'을 유지하면서 보조 칭호로 '풀다 대공'을 사용했다.
5. 창작물에서의 선제후
- Warhammer(구판)의 인간 세력 중 하나인 제국(Warhammer)은 선제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선제후들은 지역을 통치하며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다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권도 가진다.
- 몇몇 판타지 소설에서는 그냥 좀 센 제후의 이미지로 '선제후'라는 말을 쓸 때도 있다. 물론 '選'을 쓰기 때문에 선거군주제가 아니고서야 '선제후'라는 용어의 등장은 부적절하다.
[1] 하인리히 7세(황제로써는 1312년~1313년 동안 올라있었다.) 연대기의 황제 선출 당시의 삽화. (좌측부터)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정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2] Bf 109 K형의 별칭이기도 하다.[3] 이는 몽골 제국의 쿠릴타이와도 비슷한데 쿠릴타이는 정확히 말해서 정치기구로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쿠릴타이의 역할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선제후와의 공통점이라면 마찬가지로 특정 신분에게만 자격이 주어졌다.[4] 독일어로는 Stammesherzogtümer, 한국어로는 주로 '부족 공국'으로 번역된다. 원래 프랑켄, 슈바벤, 작센 등 각 지역을 차지하던 게르만 부족의 군주에서 기원하는 작위이기 때문. 10세기 경에는 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 상·하 로트링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 하지만 하인리히는 작센과 프랑켄의 지지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곧바로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다.[6] 카페 왕조를 계승한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도 카페 왕조의 방계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시각으로는 왕조 교체가 아닌 가문계통의 교체일 뿐이다. 그리고 카페 왕조의 경우에는 운도 따라줬는데 남성 후계자를 계속 배출한 덕분에 왕조의 대가 끊기지 않았다. 반면 신성 로마 제국은 툭하면 왕가의 대가 끊기는 바람에 왕조가 계속 교체되었다.[7]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세 교구 주교들. 이들은 일찍이 로마 제국 시대부터 교구가 설정되어서 독일 지역의 다른 주교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8] 이 시기의 선제후 명단은 명확하지 않은데, 1152년 기록에 의하면 교회의 대표들과 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 네 명의 공작들이 언급된다.[9] 대표적으로 작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작센의 중심지가 니더작센에서 작센안할트를 거쳐 현재의 작센주로 옮겨지는 원인이기도 하다.[10] 이로 인해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여러 문서에서는 1198년부터 실질적으로 우리가 아는 선제후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본다.[11] 북이탈리아는 호엔슈타우펜 치하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남이탈리아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의 공적 지배와는 별도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이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를 차지하던 교황령은 남북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포위를 당하던 상황이어서 교황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았다.[12]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을 통치한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직계조상. 호엔촐레른 가문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는 뉘른베르크 성백 프리드리히 3세의 5대손이다.[13] 나사우 백작 아돌프를 꺾고 기어이 독일왕으로 즉위하기는 했으나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했다.[14] 친척인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유복자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친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알브레히트 6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칠리 백작 울리히,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 등[15] 베틴 가문의 알브레히트계 출신인 모리츠는 종가 에른스트계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보유한 선제후 작위를 열망했고 슈말칼덴 전쟁에서 황제에게 붙어 선제후 작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수감하는 등 가혹하게 처우했고, 자신의 장인인 헤센 방백 필리프까지 수감당하자 비르텐, 툴, 메츠를 넘겨주는 대가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손을 잡아 카를 5세를 공격해 오스트리아에서 몰아냈다.[16] 더 정확히는 작센-비텐베르크 공작.[17] 당시 작센을 통치하던 아스카니아 가문은 영지가 죄다 떨어져있어 관리에 어려움을 느끼고 작센-비텐베르크와 작센-라우엔부르크로 분할하였다. 두 분가는 선제후 자리를 놓고 싸우다가 장자 계열이었던 작센-비텐베르크가 선제후로 인정받았다. 여담으로 아스카니아 가문은 원래 브란덴부르크도 통치했는데 금인칙서가 발표되기 30년 전에 대가 끊겨버렸다.[18] 대관식은 아헨보다 이탈리아에서 교황에게 직접 받는걸 선호하고 그렇게 한 황제들도 있었다. 그리고 마인츠 대주교가 선임 제후임을 들어 아헨에서 쾰른 선제후에게 대관받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고,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선거가 끝나면 바로 마인츠 대주교가 대관하는 걸로 변경되었다.[19] 이전 혼란한 대공위시대와 대립왕의 등장을 예방하려는 의도였다.[20] 나중에 살인과 반역 같은 중죄까지 넘어간다.[21] 황제 공위시 대리로 황제명의 화폐도 주조 가능한 특권도 있다.[22] 중세시절 유대인은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교도였고, 이교도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은 말 그대로 아무런 의무와 권리가 없는 존재여서 유대인의 생명과 재산은 원칙적으로 황제의 소유였다. 즉 유대인을 죽이거나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으면 살인이나 강도죄로 처벌하는게 아니라 황제 소유의 물건을 손상시킨 죄에 대한 판결을 받는 구조라 황제가 보호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23] 게르만 귀족들의 전통상속법은 분할 상속제였으나 상속으로 선제후들의 직위 다툼과 영지분할로 세력이 약해지는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독일왕으로까지 즉위했던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는 쿨하게 이 조항을 씹고 팔츠 선제후국을 4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했다. 그리고 명시된 브란덴부르크, 작센 등 본령이 아닌 영토에는 해당하지 않아 나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는 본령인 브란덴부르크는 맏아들에게, 가문이 원래 소유한 프랑켄 영지는 차남 이하의 자식들에게 상속하게 하였고,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는 동생 알브레히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작센-비텐베르크와 튀링겐은 본인이, 가문이 대대로 세습해온 마이센은 알브레히트에게 분할해주었다.[24] 그러나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도시와의 동맹은 카를 4세가 맏아들 벤첼의 선출 로비로써 자신이 스스로 위배해서 제후들이 들고 일어났다.[25] 페데(Fhede)라는 중세 관습이 있어서 개인적인 다툼이 있을 경우 가족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당사자들이 한판 붙는(?) 풍습이 있었다. 이 과정 중 제후 본인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해 선제후 자리가 비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26] 레오폴트 1세 시절엔 루이 14세의 방해로, 카를 5세 때는 역시 프랑수아 1세의 출마로.[27] 작위로써의 왕이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황태자에 해당한다. 정확하게는 '로마인의 왕'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하위 직함인 '독일왕'도 정확하게는 '독일인의 왕'이다.[28] 지금에서야 독일사에서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라이벌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호엔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기도 전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선출 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지자를 자처했다.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는 막시밀리안 1세의 선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고, 종교 개혁 시기 요아힘 2세는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개인적으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회가 공인되고 나서야 국가단위의 종교 개혁을 시행했을 정도였다.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기 베르크 공국 상속 문제로 틀어지기 시작해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일으켰던 시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우호적이었다.[29] 카스티야 국왕이기도 했던 아버지 필리프는 일찍 죽었다.[30] 이 대가로 푸거 가문에 티롤 지방의 은광 채굴권을 하사했다.[31] 프랑수아 1세 이전에는 필리프 3세, 이후의 앙리 3세, 루이 14세도 출마를 원했으나 교황과 독일 제후들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무산되었다. 필리프 4세 같은 경우는 둘째 아들인 필리프나 동생 샤를 드 발루아(필리프 6세의 아버지)를 후보로 내세우려 하기도 했다.[32]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하는 독일, 이탈리아, 부르군트 왕국 각각의 재상직은 3주교가 나눠 가지고 있었으며, 보헤미아 왕과 프로이센 왕(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선제후였고, 나머지 선제후들도 황제의 자문관 내지는 직속 가신으로부터 유래하는 궁정 명예직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작센 선제후와 팔츠 선제후는 공위시 북독일과 남독일의 섭정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선제후의 지위는 인정이 되어서, 이후 빈 체제에 들어서서 왕국으로 승격한 사례도 많다. 작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하노버 왕국이 그 예.[33]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알브레히트계의 모리츠에게 선제후 직위를 넘겨주었고, 30년 전쟁 초반부에 대패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제국추방령을 당하고 선제후 직위를 바이에른에게 빼앗겼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레오폴트 1세를 적대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제국추방령으로 1714년까지 외국을 전전하는 등 황권이 강하면 선제후를 처벌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선제후국의 힘이 세면 처벌도 불가능했다.[34] 국회의원이 자기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의원직은 공식적으론 못 물려주는 것처럼, 합스부르크 가문령은 사적 세습 재산이지만 제국 황제는 공적 선출직이다.[35]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황제, 즉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북독일에서 거의 배제되었지만, 제국 내 교회령(대주교구, 주교구)과 제국기사령, 기타 군소 제후들에게는 아직 황제의 영향력이 통하긴 했다.[36] 조지 2세는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그러나 나중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고 7년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보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대판 싸웠다. 본래 영국의 1701년 정착법(act of settlement in 1701)에 의하면 영국 국왕이 영국이 아닌 자기 영지의 이익을 위해서 영국 군대를 동원하거나 하노버,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에게 작위를 내리거나 의회의 의원으로 임명하는 것, 영국 영토를 마음대로 떠나는 것은 불법인데, 첫 번째와 세 번째 조항이 거의 사문화되어 무시당했다.[37] 카를 7세는 30년 전쟁으로 선제후가 된 바이에른 공작이며, 보헤미아 왕국도 기본적으로는 선거군주제였기에 보헤미아 귀족들이 의회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버리고 왕위를 들어다 바쳤다.[38]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는 카를 7세와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이었던데가 노이부르크 분가의 세습 이후로는 같은 가톨릭이었고, 카를 7세의 동생 클레멘스 아우구스트는 쾰른 선제후.[39]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0년 합스부르크 최대의 꿀땅인 슐레지엔을 뜯어먹기 위해 국사조칙을 파기하고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비밀리에 오스트리아와 강화를 맺으면서 슐레지엔을 얻어 국력을 강화하는 기반으로 삼았다.[40]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거 전 카를 7세를 지지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를 반띵하기로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부인이 카를 7세와 마찬가지로 요제프 1세의 딸이어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긴 했다. 카를 6세가 상속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자 무시했다.[41] 친 오스트리아 세력인 조지 2세는 어차피 표수가 절망적이기에 투표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역시 친 오스트리아 세력이었던 마인츠와 트리어는 끝까지 침묵해 다수결로 카를이 선출되었다.[42] 카를 4세의 사위로, 황제를 2명이나 배출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룩셈부르크 가문보다 꿇릴게 뭐냐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사람이었다. 조작 문서를 장인에게 당당하게 들이밀어 카를 4세와 그 문서를 감정한 페트라르카를 당황하게 만들었으며 더 오래 살았으면 합스부르크 가문을 더 일찍 끌어올렸거나 아예 나락으로 쳐박았을 것이라는 이중적인 평가를 듣는 인물이다.[43]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는 셀프 투표했고, 프리드리히 대왕도 카를 테오도어에게 투표했다.[44] 독일어로는 Engern. 앵글로색슨의 앵글로가 여기서 유래했다. 브레멘 남부로 길게 이어진 역사적인 지역이다.[45] 레오폴트 2세의 8남 안톤 빅토어 대공.[46]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9남인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대주교[47] 역시 영지는 상실되어 바이에른 왕국에 넘어갔다.[48] 공식적으로는 작센, 베스트팔렌, 하노버 외 북독일[49] 잉여인간 프리드리히 3세의 조상뻘으로 알브레히트 1세의 3남이었다.[50] 대신 비텐베르크 등 영토 1/4를 프로이센 왕국에게 상실했다. 프로이센 왕국은 작센 왕국에게서 빼앗은 지역에 작센 주(Provinz Sachsen)를 설치했고 오늘날의 작센안할트주로 이어지고 있다.[51] 참고로 팔츠와 궁정백 자체는 그 수가 많았다. 선제후로 지명된 궁정백이 현재의 라인란트팔츠 지역에 있던 팔츠를 관리하는 라인강 유역 팔츠의 궁정백이었으며 시간이 지나 팔츠 선제후(Kurfürst von der Pfalz)로 고유명사화 되었다.[52] 정식으로는 프랑켄, 슈바벤, 라인란트와 남독일[53] 바이에른 공작으로는 오토 5세.[54] 요한 지기스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빌헬름.[55]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56] 직역하자면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자리[57] 그래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은 15세기 말에 분할상속되었던 영지를 알브레히트 4세가 통합한 이후 끊임없이 성직 선제후 자리를 노렸다. 결국 쾰른 전쟁을 통해 1583년부터 1761년까지 쾰른 선제후 자리를 숙질계승으로 사실상 세습하였다.[58]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었다가 하노버로 수도를 이전. 1692년 레오폴트 1세에게 선제후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당시 족보 연구의 공로로 라이프니츠가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로서는 훗날 팽(烹) 당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59] 조지 1세, 조지 2세, 조지 3세가 여기에 해당한다.[60] 기존 레겐스부르크 주교후는 결의안 통과 후 보름도 안되어 선종했지만, 교황이 결의안에 따른 교구 변동을 정식으로 승인한 것은 1805년 2월 1일이다.[61]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의 동생이었는데, 프랑스 혁명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유럽 군주 중 자기 고모의 목을 날려버린건 생각도 안하고 프랑스 혁명 정부를 제일 먼저 공식 승인한 군주였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