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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족(王族, Royalty)은 군주국에서 왕의 가족이나 왕의 혈통이 이어진 친척을 말한다. 왕조 그리고 왕실의 일원이다. 군주가 황제일 경우는 황족(皇族, Imperialty)이라고 한다.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은 황족/왕족의 존재를 법적으로는 부정하고 금지하기에 공화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나, 비주권군주제라는 예외가 있을 수는 있다. 다만 이는 제도(특권 계급)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작위가 개인에게 주어진다는 측면을 고려하여 체제가 공화국으로 바뀌어도 어느 정도 예우해주는 부분도 있다. 즉 왕족과 국민을 겸하는 셈.
2. 범주
한자문화권에서는 중국 기준으로 부계혈통의 경우 군주의 5대손까지, 모계혈통의 경우 딸의 자녀, 즉 외손주 정도까지만 왕족의 일원으로 치고 있다.[1] 한국에서는 고대에는 그나마 계층구분 기록이 명확한 신라의 경우 성골~진골이 일단은 왕족 개념에 해당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는 특정 가문의 가계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왕위계승권이 있는 최상위 귀족에 가까운 개념이었기때문에 그 범위는 중국이나 후대 조선에 비해 굉장히 넓었다. 초기에 외국에서 왔다고 명시된 석탈해 가문이 전쟁을 통한 정복이나 내란을 통한 찬탈 없이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르기도 했고 이후에도 고구려계 안승이나 발해의 대조영, 가야 구형왕 가문 등 신라 밖 출신 외부인을 정략적으로 진골로 인정한 경우도 있다. 둘 다 진골이고 선대-차기 국왕 관계인 선덕왕과 원성왕이 부계로 21촌 거리다. 중국이나 조선 같으면 이 정도 거리는 너무 멀어서 그냥 왕족도 아니고 성씨만 같은 남남이나 마찬가지다.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이어야만 했다는 설도 있지만 가야계 진골 문명왕후처럼 이래저래 예외가 있어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후 조선 시대부터는 위 중국과 똑같은 범위의 왕족개념을 받아들여 정착시켰다.조선은 왕자의 아들과 손자들은 물론 딸들과 손녀들까지 엄연한 왕족이었지만, 왕녀는 아들을 낳아도 왕족이 아니었다. 왕녀의 아들은 왕족이 아니니까 왕위 계승권도 없어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다.
유럽에서는 남녀 구분없이 계승권이 가까운 사람[2]을 왕족으로 쳐주지만, 여기서도 기본적으로는 부계혈통을 더 쳐주는 일이 많다. 일례로 영국 왕실에서 찰스 3세,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3]의 자식들은 태어날 때부터 prince, princess지만, 프린세스 로열 앤의 자녀들은 다르다. 어머니인 왕녀가 왕의 후계자라서 곧 여왕의 자녀가 될 예정이 아닌 한 어머니의 작위인 왕족으로써의 작위를 물려받지 않고, 아버지가 귀족이라면 그 작위를 따라간다.[4]
모계혈통은 직계후손이 아니면 따로 왕족으로 지정해줘야 하는 관습이 있다. 왕의 혈통을 받았으나 (좁은 의미의) 왕족의 범위에서 벗어나면 일반 귀족 대우를 받는다.
황족이나 왕족은 다른 신하들과 구별되어야 하므로 작위를 받게 되어있는데, 신라 때는 고유의 작위인 갈문왕 등이 있었으며, 중국 역대 왕조와 대한제국의 경우는 가까운 황족/왕족에게 친왕의 작위를 수여했다.[5]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에서는 왕과의 촌수에 따라 대군[6], 군, 도정(都正), 정(正), 부정(副正), 수(守)[7], 부수(副守), 영(令)[8], 부령(副令), 감(監)의 칭호를 수여했다.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에서는 공, 후. 서양의 경우는 프린스나 프린세스를 수여. 왕족은 작위를 쓰는 대신에 일반적으로 성씨를 쓰지는 않는다. 왕족을 지칭할 때 따로이 성을 붙여 쓰지는 않는 관습은 동서양이 동일하다. 즉 해당 왕조 체제에서는 국성은 기본값(디폴트)으로 여겨진 셈이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수양대군(유)'라고 일반적으로 칭하지 수양대군 이유라고 하는 경우는 없었다. 서양권도 '앙주 공작 루이', '루이 공작'이라고 하지, 앙주 공작 루이 드 부르봉, 부르봉 공작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사극에서 성을 붙이는 경우는 고증이 틀렸다고 봐도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처럼 혈족주의가 강한 부족중심의 왕조에서는 왕가 혈통만 받았으면 특히 외국에서는 관습적으로 대충 다 왕자라 불러주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군주의 가족이나 친척이므로 왕조 자체에 대한 충성심은 가장 높으나,[9] 군주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반란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보통 군주의 관리를 받으며 생활한다. 원래 신라-고려-조선 초까지는 왕족들도 다른 신하들처럼 일반 관직에 나갔으나,[10] 조선 성종 때의 구성군 사건 이후 '종친사환금지법'이 생기며 왕으로부터 5촌까지는 명예직 외의 관직은 하지 못하게 되고, 왕실에서 주는 봉록으로 먹고 살게 되었다. 고려의 경우는 왕족들의 힘이 가장 약했는데, 초기는 제법 강했으나, 이후 절간에 승려가 된다든가,[11] 반란군의 얼굴마담이 된다든가, 원나라에 사신으로만 간다든가, 볼모로 잡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특히나 대령후 사건의 경우는, 문벌귀족이 비대해짐에 따라 왕족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여실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12] 그로 인해 의종 시기를 거쳐 무신정권 때는 왕족의 권위가 더욱 바닥으로 추락했다. 왕의 권위가 실추됨과 동시에 왕족들의 권한도 덤으로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13]
조선의 경우, 중기 이후에는 경국대전의 종친사환금지법에 따라, 왕족은 과거를 볼수 없고, 실권직도 받지 못했다.[14] 벼슬길에 오르더라도 명예직이나 한직으로, 청요직이나 당상관, 정승에 오를 수 없었으며, 5대 이상 지나야[15] 종친에서 벗어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조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왕족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나 하원의원이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되고 싶다면 후계권 내지는 왕족 포기나 평민이 되어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족들은 예술가, 군인, 성직자가 되거나 학자가 되는 길을 걷는 게 다반사다.[16]
현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를 추구하기에 황족/왕족의 존재는 대한민국 헌법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공화주의를 채택한 공화국 대부분은 법적으로 황족/왕족의 존재를 부정한다.
3. 장점과 단점
왕족 자체가 혈통이라는 이름의 신분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특권을 누리며 살아왔고, 예나 지금이나 전쟁 같은 급박한 상황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몸을 피할 수 있는, 심지어 전쟁터에 출전하여도 가장 보호받는 VIP 신분이다. 인류 최대의 전쟁 중 하나였던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왕족들은 민중들에게 사라예보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라며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온한 삶을 유지했다.[17]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항상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왕권 체제이던 옛 시대에선 그야말로 군주란 그야말로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남자 왕족이면 대다수 왕위에 관심이 있었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한마디로 왕의 자리는 항상 누군가 노리는 목표였고, 구체제 왕조의 구성원이었던 왕족은 역성혁명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멸족 대상이었다. 실제로 상술했듯이 1차 대전 당시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은 유럽의 왕족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혁명으로 폐위되어 고국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외국을 떠도는 망명객이 되었고 최악의 경우 러시아의 로마노프 가문 같은 경우는 폐위당한 후 황족 일가 전체가 몰살당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또 왕의 암살시도가 일어나면 항상 제일 먼저 의심은 주위 왕족들에게 향했다. 실제로 반란 시도는 왕족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아주 근거없는 의심은 아니다. 물론 이 반역 시도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대부분 직계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다. 재수 없으면 본인은 왕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팔아 역모를 꾸미는 바람에 끔살당하는 참사도 있다. 이 경우에는 운이 좋아야 유배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사(賜死)였다. 제 아무리 본인이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역모를 꾸밀 정도의 사람이 본인의 이름을 빌려야 할 정도의 권위와 입지를 가졌다는 뜻이기 때문에, 왕의 입장에서는 살려두기 어려운 위협인 것이다. 이 경우 다른 역적들이 거열형/능지형/참수형(+효수)에 처해진다면, 왕족은 사약이나 교수형으로 그나마 시신을 보존해주는 정도였다.거기다가 관직에 나가지 못하니, 왕위에서 먼 왕족들은 달성할 목표가 없다고 공부와 운동을 열심히 안 하는 경우가 많아서 평균적인 지력과 무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했고, 심하면 왕족임에도 천자문 같은 기초교재를 떼는 것은커녕, 자기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는 물론이요, 기본적인 정권지르기나 발차기 같은 기초적인 호신술도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왕위 계승권이 있는 사람이 매우 똑똑하다거나 열심히 공부한다거나 매우 튼튼하다거나 열심히 운동한다거나 하면 왕위에 욕심이 있는게 아닌가 해서 왕과 신하들에게 찍힐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18] 어차피 왕족의 경우 무식하고 허약해도 먹고 사는 것 자체는 보장되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19] 관직에 제한을 당하고 그렇다고 왕족이라는 지위 때문에 평민의 업종을 할 수도 없는 마당이라 왕족들은 한마디로 특권을 누리는 무직 백수(…)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기에 그만큼 사고를 많이 쳐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에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보면 하나같이 왕족이 끼어있을 정도이다. 태생부터 꿈도 없이 그저 자기 본능대로 살기 알맞은 환경에서 살아와 난봉꾼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러 역모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주색잡기나 적당히 자기 평판을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역모가 발생할 경우 역모 세력이 자기 멋대로 어느 왕족을 왕으로 추대하는 바람에 그 왕족이 영문도 모른 채 사약 배달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예 왕으로 추대조차 못받을 정도로 사고를 치되 그렇다고 왕에게 보고되어 유배될 정도의 선을 넘는 사고를 치면 그것도 곤란하니 적당한 수준의 사고를 쳐놔 평판을 떨어뜨려놓는 게 왕족들의 보신책이었다.
4. 경칭
4.1. 조선 · 대한제국
왕자와 왕녀의 경우, 혼인 전 궁에 살 때는 '아기씨'로 불렸다가, 혼인을 하면서 봉호를 받으면 왕자는 '대군 / 군 자가', 왕녀는 '공주 / 옹주 자가'로 불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봉호를 받기 전 어린 왕손들도 보통 자가라고 불린 기록이 남아있다.현대 사극에서는 아무 왕족에게나 마마라는 호칭이 붙는데, 완전히 틀렸다. 만약 일반 종친 따위를 마마라고 부르면 당장 불경죄로 반역 내지는 역모라고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다. 왕족에 대한 경칭들 중 가장 높은 존칭인 마마는 왕과 왕비, 상왕과 대비, 세자, 세자빈, 세손 등 매우 제한된 왕족만 사용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포하면서 '전하'로 부르던 대군주를 '폐하'로 불렀고, 그 때부터 왕족을 부를 때 '전하'를 사용한 듯하다. 〈독립신문〉을 보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이전인데도 의화군(의친왕)과 흥선대원군을 가리켜 '전하'라고 한 기사들이 있다.[20][21]
대한제국 수립 후에 황태자를 제외한 고종의 아들들은 친왕이 되었고, 친왕은 '전하'로 불렸다. 명성황후를 대신해 사실상 황후 역할을 하던 황귀비 역시 '전하'라고 불렸다.# 덕혜옹주가 말년에 영친왕의 아내인 이방자를 '비전하'라고 호칭한 편지가 남아 있다.
군으로 봉해진 방계 황족들(고종 직계가 아닌 사람들)의 경칭에 대한 기록은 따로 없다. 다만,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이승응이 순종 시기에 사망했을 때 《승정원일기》에 그를 '저하(邸下)'로 적어두었기에# 방계 황족 군들은 '저하'로 불렸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민간 신문들을 보면, 친왕 뒤에는 '전하'를 꼬박꼬박 붙였으나 방계 황족들은 '봉호' + '이름' + '씨'순으로 적었다. '영평군 이경응 씨', '완순군 이재완 씨'처럼.
5. 창작물
창작물의 장르에 따라 묘사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가벼운 딸바보물이나 귀족영애물에선 왕권이 왕자/왕녀를 괴롭혔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묘사되며,[22] 이에 반발을 표하는 이도 적고 형제들 간의 사이도 굉장히 좋거나 왕과 왕비도 자식들을 굉장히 아끼고 호위무사나 메이드 등 고용인들도 주인공을 어화둥둥하는 등 좋은 모습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왕자/왕녀들이 인생에 큰 시련 없이 호의호식하며 죽을 때까지 평탄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지며 로맨스 판타지에서 때때로 보인다. 양판소, 양로소에서나 악역 영애물, 악녀물에서 직계 왕자나 공주급 왕녀까지는 아니어서 즐겨 애용되지는 않더라도 공녀 등의 고급 영애처럼 좋은 히로인 겸 여주인공 후보감.
그러나 정치물과 같은 시리어스물에선 현실 이상으로 왕족 사회가 각박하게 묘사되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거나 부모도 자식을 왕권을 이을 핏줄로만 생각하며 정을 주지 않고 특정 자식만 편애하는 등 콩가루 집안급 부정적인 묘사가 심한 작품도 있다. 사실 이쪽이 위보단 현실적인 묘사에 가깝다. 현실에선 형제들이라도 정적에 가깝기 때문에 마냥 사이좋게 지내기도 힘들며 왕/여왕이 일이 바빠서 자식을 직접 키우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왕위쟁탈전으로 숙청 당할지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정을 쉽게 주지 않기도 했다. 형제자매나 부모자식간 사이가 매우 돈독했던 왕족도 물론 있었지만 위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적다.
무협, 무협 로맨스, 판협지, 동양 판타지에서도 꽤나 자주 나오는 설정으로 주인공이 왕자인 경우보다 숨겨진 왕족이기에 사건에 얽히는 경우가 많다. 좀 더 고급으로 가면 황족이라는 용어로 발전하며, 주변인으로 등장하여 조력자가 되거나 갑질을 하기도 한다. 황족인 악역인 경우 최종보스가 아닌 경우라면 별볼일 없이 퇴장하는 경우가 많다.
6. 같이 보기
[1] 남계 후손과 여계 후손의 입장 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한데,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왕세자가 아닌 왕자의 자녀들도 왕자/왕녀 칭호와 전하 경칭을 부여받아 엄연한 왕족 신분이였던 반면에 사촌이 되는 왕녀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타국의 왕족이 아닌 이상 부친의 작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고, 대부분 오등작의 일원이였기 때문에 일개 귀족 신분이였다.[2] 대략 현 군주의 직계 후손이나 형제와 그 자손까지의 범위의 방계.[3] 다만 에드워드 왕자의 자녀인 루이즈와 제임스는 prince, princess 작위를 가지고 있으나 사용하지 않고 있다.[4] 다만, 관례를 깨고 여왕이 앤 공주 자녀들에게 작위를 주려고 했지만, 앤 공주 부부가 사양했다고 한다.[5] 먼 황족에게는 왕이나 군왕을 수여했다. 다만 대한제국은 애매하게도 제국 선포 이전에 왕실의 후손들이 사용하던 칭호인 군(君)으로 계속 봉해졌다.[6] 정종 연간에는 공[7] 황진이의 유명한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의 벽계수가 중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이 바로 '푸른 물'과 '벽계수라는 봉작을 받은 종친'이라는 뜻이다.[8] 조선시대 화백 두성령이 유명하다.[9] 당연한 것이 왕조 자체가 왕족 자신의 가문으로 이 호사를 누리는 기반이기 때문.[10] 그 덕분에 특히 원성왕 이후의 신라 하대는 무열왕계에 비해 밀리는 정통성을 자신들의 결집력으로 상쇄하기 위해, 육촌~팔촌 이내의 가까운 원성왕계 김씨 왕족들이 주요 보직을 독식하다시피 했으며, 그에 따라 대신이었던 사람이 왕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또한 조선의 영의정 중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도 다름아닌 수양대군. 다만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후 왕위를 양위 받기 전 중간 단게로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영의정이 된 것이라, 특수한 사례에 들어간다.[11] 현종이 이런 시절을 보냈다가 극적으로 왕이 된 사례다.[12] 사실 이는 왕족이 쓸데없이 잘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대령후는 독자적인 부(府)를 열어 따로 세력을 가졌고, 인망도 좋아서 추종자도 있었으며, 나름 의종과 왕위경쟁을 했던 몸이다. 그래서 애초에 조용히 살기에는 틀린 사람이었다. 괜히 제안대군과 유선의 행동이 처세술의 일환이라는 시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대령후는 고려의 숨막히는 정치속에서 결국 간신들의 모함과 의종의 확신으로 몰락하게 된다.[13] 참고로 고려의 작위에는 개부의 권한이 주어지기도 했다. 대령후 왕경의 대령부 이런 식으로. 왕족들은 작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족내혼을 선호했는데, 원간섭기 이후로 족내혼이 제한되면서 작위유지가 힘들어졌다. 왕과 사돈을 맺지 못한 왕족들은 명예직만 받고 말았다.[14] 초기에는 수양대군이 영의정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도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비상식적인 인사이기는 했다.[15] 즉. 왕의 4대손까지. 왕이 못 된 아들 → 손자 → 증손자 → 고손자. 여기까지 왕족 대접.[16] 물론 군인이라 해도 명목적 대표이고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17] 다만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란 평가는 왕족들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억울한 면이 있는 것이 1차 대전 개전 당시 다른 나라 왕족들과 친인척 관계로 얽혀있던 유럽 각국의 왕족들은 전쟁의 개시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우발적인 사건으로 전쟁의 도화선에 한번 불이 붙자 복잡한 외교 관계와 내셔널리즘의 발호로 인해 맞물린 민족간 대립관계 속에서 국가적으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왕족들끼리의 왕위 다툼과 계승권을 놓고 군주의 의사에 따라 전쟁을 벌이던 시절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중세 및 근세까지고 내셔널리즘과 국민국가 체제가 견고하게 자리잡은 20세기 세계대전 시기는 전쟁을 왕족들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애저녁에 한참 지난 세상이였다. 사라예보 사건만 해도 오히려 당시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세르비아를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자치권을 확대하려고 한 자유주의자였으나 자신의 암살 사건이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한 세르비아 탄압의 빌미가 되어 1차 대전이 일어났으니 오히려 본인으로선 상당히 억울한 일일 수 있다. 실제로 승전국이지만 같은 군주국이기도 했던 영국도 이 때문에 승전국 및 강대국 중에서도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에게는 유화적이었지만 하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군주제 혐오자인 우드로 윌슨이었고 똑같은 군주국이자 승전국인 벨기에는 아예 독일에게 짓밟혔으며 그런 독일의 적대국인 프랑스는 아예 공화국인데다 원래부터도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쟁 발발 원인적으로는 억울하다고 할 수 있을정도로 객관적인 책임이 없었는데도 유난히 수난을 많이 당한 것이었다.[18] 사실 이건 조선 초기 계유정난의 영향이 너무 컸던게 왕자의 난 이후 태종-세종-문종 치세 및 계유정난 이전까지는 왕족들이 정치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바도 커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러는게 딱히 문제가 없었다. 정확히는 태종-세종-문종이 강력한 왕권으로 왕족들을 통제하면서 이들을 써먹은것이고 문종은 어린 단종을 두고 세상을 떠나긴했지만 왕족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믿을만한 고명대신들에게 맡기면서 보험도 들었다. 문제는 어린 단종 대신 왕족과 신하들을 통제하고 조율해야 할 가장 큰 웃어른인 왕대비가 없었다는게 생각외로 치명적이었다는 것이다. 계유정난이 그 부족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왕족들의 지지를 받았거나 아예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처럼 허무하게 숙청당한것도 황표정사 같은 문제 때문도 있지만, 왕대비가 없는 상태에서 왕대비를 대신할 윗서열 왕족이란게 왕위에 욕심이 있었던 수양대군과 성격 개차반인 양녕대군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정희왕후가 왕족의 정치참여를 막기 시작했지만 당사자들이 벌인 짓을 생각하면 꼬리자르기에 불과했고 이후 조선에서는 왕족보다 외척의 힘이 강해지면서 태종이 조선초기 죄 없는 심온을 숙청한 것을 상당히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건 매한가지이다. 그리고 그렇게해도 계유정난이라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선례로 인해 왕족들은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살아있어도 견제를 받는 처지였고 어느정도 좀 목소리를 낸다싶으면 경신환국이나 세도정치 정국 때처럼 대비에게 선제적으로 숙청을 당하기도 하는 지경이 되었다.[19] 글 몰라서 사기당하고 삥땅쳐도 그냥 왕에게 호소하면 왕이 알아서 족쳐줄 것이 분명하다. 왕족이 이런 식으로 기망당하는 건 결국 왕의 위신과도 이어지는 문제니까.[20] 네이버 지식백과 〈독립신문〉 1897년 1월 9일 토요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172&cid=51385&categoryId=51385[21] 네이버 지식백과 1897년 7월 31일 토요일 독립신문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65&cid=51385&categoryId=51385[22] 아예 왕실까지 가지도 않고 공작가 같은 고위 귀족가문부터가 상대적으로 낮은 귀족가문 하나 정도는 멸문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이 있다는 설정도 종종 나온다.[23] 형인경우는 왕형, 남동생인경우는 왕제이다. 황제의 형제인 경우는 각각 황형, 황제(皇弟)라고 칭한다.[24] 본래 독립왕국의 경우 왕후, 제후국인경우는 왕비라고 칭하지만, 그리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