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왼쪽부터 이성준, 윤용필, 오태환, 심혜숙 |
1990년 이성준(당시 31세, 전과 8범), 오태환(당시 31세, 전과 5범), 윤용필(당시 31세, 전과 6범)과 주범 이성준의 애인 심혜숙(당시 22세, 비전과자) 등 4인조로 범죄단체를 구성하여 피해자를 흙 속에 파묻는 극악무도함을 보여준 사건. 대한민국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처벌에 대한 강경론도 활성화되었다.
범인들 중 남자 3명은 모두 인천 출신으로 공갈, 강도, 상해 등의 전과가 있었다. 이성준은 미성년자였을 때 범죄를 시작했고[1] 오태환과 교도소 동기였다. 직업도 있고 노모와 아내, 어린 자식을 포함한 가족 등 잃을 것이 많았던 다른 남자 공범들과 달리 유일하게 홀몸이었고, 애인 심혜숙에게 반해 그녀와 결혼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가장 극악무도하게 범죄를 주도하는 이유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태환은 1980년 인천의 한 고등전문학교를 나온 뒤 보험회사, 목재회사 등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술주정과 포악한 성격 때문에 오래 붙어 있지 못했고 1988년 9월부터 스페어 운전사로 근무했던 택시 회사에서도 잦은 음주운전과 행패 때문에 6개월만에 쫓겨났다. 윤용필은 오태환과 중학교 동기동창이었다. 1983년 이후 택시, 트럭 등을 운전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범죄꾼이었다. 사고 당시 윤용필은 택시운전사, 오태환은 자동차등록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태환이 이성준을 윤용필에게 소개시켜 주면서 이들은 함께 모여 범행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1차 범죄 이전부터 이성준의 여자친구인 심혜숙에게 마음을 품고 있어서 이성준이 전과자라는 걸 그녀에게 아웃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이성준이 1차 범죄 때 훔친 차에 오태환의 애인 물건을 던져놓았다. 그러나 이게 그들이 꼬리가 잡히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짓이었다. 친구 사이인 놈이 잡히면 자신에게 혐의가 올 수밖에 없고 당연히 진술을 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심혜숙은 남자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이도 10살 가까이 차이날 정도로 어리고 유일하게 전과가 없으며 번듯한 직업도 갖고 있는[2] 등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이다. 하지만 남자를 잘못 만나도 너무 잘못 만나 인생 망하고 말았다. 본래 결혼을 약속한 다른 애인이 있었으나 그 남자가 갑작스럽게 바람나면서 파혼당했고 친구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나이트클럽에 데려갔다가 하필 그날 거기에서 이성준과 만나 버리고 만 것이 화근이었다. 헌팅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빨간 장미꽃다발을 사 들고 집까지 따라왔고, 유복한 집안 셋째 아들이고 레스토랑을 경영한다고 속이면서 얼마 뒤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결혼하겠다며 인사까지 드렸다. 물론 거짓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밑천이 드러나 불같은 성격에다 차츰 말과 행동에서 처음과는 너무나 다른 이성준의 모습을 보고 심혜숙은 이별을 결심하고, 수면제까지 먹을 정도로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나고 사귄 지 겨우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이 사건이 일어나버려, 결국 제때 헤어지지 못하는 바람에 인생을 망쳤다.
2. 1차 범죄
이들의 범죄 행각은 강릉시 신혼부부 강도 사건부터 시작되었다. 남자 3명은 1990년 10월 28일 오후에 인천광역시에서 렌터카를 빌린 후 바로 강릉 경포대로 출발했으며 여관에서 하루를 보낸 후 여행 경비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강도를 저지르기로 작정했고 때마침 기념사진 촬영 중이던 남편 손씨(당시 28세), 아내 한씨(당시 24세)를 납치해 폭행, 결박한 후 승용차로 납치하였다.이들은 피해자 중 일부를 신랑 소유의 엑셀 승용차에도 나눠 태우고 현장에서 9km 떨어진 지점에서 현금과 수표 등을 강탈한 후 대진동 야산의 소나무에 묶어 놓은 채 도주했다.
범행 후 주범 이성준과 1차 사건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그의 애인 심혜숙은 피해 신랑 소유의 엑셀 승용차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다가 인천 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냈고 사고 피해를 당한 택시 기사와 출동한 경찰관에게 흉기를 휘두르면서 저항하며 도주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사고를 낸 엑셀 승용차가 도난 차량임을 밝혀냈으며 그 차 안에서 발견된 오태환의 애인 최모 씨(당시 21세)[3] 명의로 된 예금통장 및 가스총 등을 발견했다.
3. 2차 범죄
1990년 11월 9일 이들은 2차 범죄를 저지르기로 작정했다. 지난 번(강릉 신혼부부 강도 사건)처럼 피해자를 살려주게 되면 자신의 범죄 행각이 탄로나게 되어 추적당할 것을 염두에 두고 두 번째 범죄 계획에서는 피해자를 살해하고 철저히 암매장하여 숨기기로 한 후 범행에 착수했다.사건 당일 오후 1시 쯤 6번 국도를 지나가던 피해자들의 승용차를 자신들의 렌터카로 가로막아 납치했다. 이들은 친척의 결혼식과 고희연에 가던 일가족으로 류모 씨(당시 54세)와 그의 외손녀 최□□ 양(6살), 어머니 김○○ 씨(81세), 이모 김△△씨(74세)였다.[4] 일가족을 납치한 범인들은 현금 20만원 등을 강탈한 후 피해자들을 폭행하면서 손과 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 뒤 트렁크에 가두었고 이 중 어린아이는 범인들과 함께 있었던 주범 이성준의 애인 심혜숙이 안은 채 피해자의 차량 뒷 좌석에 타고 갔다. 뒤이어 범인들은 피해자 가족들을 생매장할 음모로 전날 민박을 했던 곳에서 두 자루의 삽을 빌린 후 이성준과 윤용필은 인근 야산으로 가 김씨 자매 할머니들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렸고 류씨에게 3000만 원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목을 졸랐다. 마지막으로 오태환이 "아저씨, 살려주세요"라고 울부짖던 6살 아이의 애원을 무시하고 생매장했다. 그것도 발가벗겨서. 남자 3명은 모두 대마초를 피워 환각 상태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5]
범행을 저지른 후 일당은 피해자의 차 등 2대에 나눠 탄 채 경기도 안양시로 도주하여 하루를 머무르면서 사창가에 들르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는 등 태연히 지내다가 안양에 있던 이성준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태환의 애인 최모양을 만나서 지리산으로 도피하기로 논의한 후 대전광역시로 도주했으며 지리산으로 갈 때 심혜숙의 친구 박모 씨(당시 21세)에게도 함께 놀러 가자고 제의했다.
4. 검거 과정
하지만 주범 이성준의 애인 심혜숙의 친구 박씨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심을 느껴 경찰서에 신고했다. 결국 사건을 접수받은 대전동부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했고 사건이 발생한 하루 뒤인 10일 낮 1시 20분경 바로 범인의 소재 파악에 성공하여 일당들이 나눠 타고 있던 승용차들을 발견해 바로 공포탄과 실탄 등을 쏘면서 오태환, 심혜숙을 체포했다.한편 피살자의 승용차를 자기 마음대로 타고 다니던 주범 이성준과 윤용필은 경찰관이 발사한 실탄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차를 억지로 타고 가다가 5중 추돌사고를 냈다. 뒤이어 추격하는 경찰들이 계속 총을 쏘면서 실탄 1발이 피해자의 차량 타이어에 맞아 펑크가 나자 차를 버리고 도주했다. 결국 도주했던 범인 중 윤용필은 가벼운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음날인 11일 밤 8시 30분쯤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1동의 친구 집에서 주민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서울영등포경찰서 경찰관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주범 이성준은 가슴에 총상을 입는 중상을 당하고도 도주하다가 대전광역시 동구 가오동에 위치한 천동주공아파트[6]의 옥상에 은신해 있던 중 끝내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시체는 12일 오전 9시 40분쯤에 발견되었다.
5. 수사 과정
1차 범죄에서 피해를 당한 신랑 소유의 엑셀 승용차에서 발견된 증거물을 통해 범인 오태환 등 일당들의 존재를 확인했고 오태환의 애인의 소재를 계좌 정보로 알아낸 후 연고지가 대전임을 알아내 이 일대 경찰서와도 공조수사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범인을 모두 검거한 후 증거물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흙에 오염된 버선을 발견한 경찰관의 혹독한 심문에 결국 범인들은 생매장 사건을 저질렀음을 자백했다. 예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사건 내용에 경찰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6. 사건 여파
당시 부검 집도의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피살자들의 사인은 전원 질식사. 호흡기에 흙 등이 심하게 들어가서 질식 사망한 상태였으며[7] 경찰 조사 결과 어린 아이가 살려 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당들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돌덩이를 굴리고 흙을 덮어 생매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언론에 보도되자 사건 수사를 맡은 경찰관과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아 분개했고 서울특별시 청량리 위생병원[8]에서 사망자의 영결식이 거행된 11월 14일에는 시민들도 함께 참석하여 당시 현장을 취재하던 방송 기자나 PD 등을 통하여 다양한 의견을 게시했고 피해자의 유해와 유족을 태운 영구차는 '□□아, 엄마! 하고 한 번만 불러다오', '우리 할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딸 살려주세요.' 등의 슬픈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건 채 장지로 향했다.고작 6살이었던 딸과 친정아버지, 할머니, 이모할머니까지 4명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참혹하게 잃은 최양의 어머니는 병원 영안실 앞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호소문을 읽었다. 호소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었다.
대통령은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부모의 딸로서 □□이가 부활할 수 있도록 명복을 빌어 주십시오. □□이가 부활할 때 이 세상의 죄악이 자취를 감출 수 있습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우리 □이![9] 초롱초롱한 눈망울, 순진무구한 웃음소리, 이 모든 행복한 모습이 흙으로 사라집니다.
영결식이 끝난 뒤 포천군 재림공원묘지[10]로 향한 영구차에는 '구멍 뚫린 민생치안 국민은 누굴 믿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한편 이 사건을 해결한 대전동부경찰서 형사진은 사건 처리의 공로를 인정받아 1계급 특진을 받았으며 노태우 정부 시기에 시행된 범죄와의 전쟁의 여파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결국 (검거 과정에서 사살돼 이미 죽은 주범 이성준을 제외한) 범인 3명에게는 1990년 12월 4일 모두 사형이 구형되었고 1991년 3월 5일에 모두 사형이 선고되었다. 윤용필과 오태환은 같은 해 11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실 이 사건의 재판 과정은 말이 좋아 신속 진행이지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판사들이 앉은 법대 뒤에서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가 촬영 중이었던 데다 변호사들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미 재판을 시작해서 변호인이 들어왔을 때는 인정신문과 검사 주신문까지 다 끝난 상태였다. ‘범죄와의 전쟁’ 첫 사건이니 국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의도였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이런 사건은 변호인 없이는 법정 자체가 열릴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검사 신문까지 다 끝냈다. 진행된 절차는 당연히 위법이고 무효였다.
재판장은 변호인들이 출석하자 국선변호인에게 윤용필, 오태환에 대한 반대신문을 하게 했다. 심혜숙의 변호인 김형태는 즉각 ‘앞의 진행은 법적으로 무효다. 변호인들은 피고인들이 검사 주신문 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들어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었고 심혜숙에 대한 반대신문만 1주일 뒤에 하겠다며 두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고 2주 뒤로 선고일을 잡았다.
검사의 논고는 “본건을 철저히 그리고 신속히 심리해 주신 재판부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이러한 피고인들을 위하여 과연 우리가 이러한 재판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인지 감히 반문하고 싶습니다.”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남짓 만에 1심 선고까지 다 마치는 졸속 재판이었다.
공판조서는 거짓이 가득했다. 국선변호인이 처음부터 출석한 것으로 허위 기재되어 있었고 공소사실이 빡빡하게 15쪽 가량 되었는데 검사는 이를 일일이 피고인들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그런데 취재의 편의를 위해 검사는 아예 묻지도 않고 재판장이 이 사실들을 다 인정하느냐는 식으로 개괄적으로 묻고 넘어갔다. 오태환과 윤용필은 머리를 끄덕였고 심혜숙은 가만히 서 있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인 심혜숙의 공모 여부에 대해 따로 두 피고인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공판조서에는 검사가 일일이 끊어서 묻고 피고인들은 모두 다 인정한 걸로 거짓 기재되었으며 심혜숙은 처음부터 재판이 분리되어 아무런 진행이 없었던 걸로 되어 있었다. 김형태 변호사는 판사실로 찾아가 조서를 사실대로 기재하고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이에 김형태는 재판장과 법원서기를 허위공문서 작성죄로 고소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텔레비전 보도까지 나갔으나 저녁 9시 메인뉴스부터는 이 소식이 일체 사라졌다.
결국 첫 재판으로부터 1주일 뒤 열린 심혜숙에 대한 2회 공판에서는 재판장과 서기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김형태 변호사는 바뀐 재판장에게 1회 공판조서가 잘못된 걸 입증하기 위해 당시의 뉴스 동영상과 서기, 검사를 증거로 신청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바뀐 두번째 재판장도 또 사실과 다르게 공판조서를 작성했다. 재판장은 심혜숙에게 공모 부분을 몇 마디 묻다가 이를 부인하는 걸 확인하고 재판을 끝냈다. 그런데도 조서에는 마치 검사가 공소장대로 쭉 물어가고 심혜숙이 이를 부인하다가 결국 ‘예, 너무 화를 내고 힘들게 하여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공모를 인정한 양 기재되었다. 다시 이의를 제기하자 재판장은 4회 공판에서 세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신문 등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했다. 그러는 동안 해가 바뀌고 1991년 1월 말이 되어서야 1심 변론이 종결되었으며 2월 선고 때는 재판장이 또 바뀌었다.
그러나 사건 내용이 너무나도 흉악했기도 하고 아직 보도통제가 남아 있던 시절이라 이러한 사항들은 별다른 반향을 부르지 못했다.
사형 확정 약 1년 뒤인 1992년 12월 29일 윤용필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현장을 입회한 문장식 목사의 저서 <아! 살았구나 아! 죽었구나>에 따르면 그는 14시 8분에 사형장으로 들어왔으며 인정심문 때는 '그만 중지하시오'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유언을 남기는 시간에 한 말은 이러했다.
모든 분들에게 실망을 주어 죄송합니다. 용서를 빕니다. 헤어져도 저는 천국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하늘나라로 가게 된 것,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찬송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1절을 부른다.)
내 육신 중에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분들에게 바치겠습니다.
이미 안구와 신장 등 장기 기증을 신청했는데 사형장에서 몸 전체를 기증한다는 자술서를 다시 썼다.[11] 다음 인정심문을 끝낸 후 곧바로 문장식 목사의 주도로 예배를 시작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가 405장을 부르고 문 목사가 잠깐 기도한 후 윤용필이 성경 요한계시록 14장 13절[12]을 읽은 후 14시 30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형태 변호사에 따르면 ‘이 쓸모없는 하찮은 목숨에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는 말을 남겼고 그의 모친은 아들 시신을 인수하는 자리에서 혼절했다고 한다.(찬송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1절을 부른다.)
내 육신 중에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분들에게 바치겠습니다.
사형 확정 약 3년 만인 1994년 10월 6일에 오태환이 처형되었는데 그도 장기와 사체 기증을 했지만 이쪽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린 듯 자신이 여론에 떠밀려 과도한 형을 받았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억울해했다고 한다.
나는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론에 의해 심증으로 재판한 것을 부당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죄 지은 것은 달게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고수의 죄를 개별적으로 낱낱이 따져 파악하지 않고 언론 보도에 의해서만 처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긴 후 김우성 신부가 천주교 의식을 집례했으며 이후 입회한 스님과 문장식 목사도 함께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고 악수한 뒤 12시 28분에 집행되어 12시 38분에 사망했다. 시체는 --주범의 애인이자 공범이었던 심혜숙은 살인과 생매장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이듬해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고 청주여자교도소에서 8년을 복역한 뒤 1998년에 가석방되어 일당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출소 후에는 공부해서 서울예대의 문창과에 입학해 어릴 적 꿈이었던 문학을 배웠고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에서 당선 바로 아래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위암에 걸려 2003년 7월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7. 이후 논란
사건이 발생한 지 22년여가 지났고 범인들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 지도 십여년이 지난 2012년 2월 24일자 한겨레신문에 당시 심 양의 변호를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가 사건 관련 글을 기고했다. 양평 생매장사건 스물하나 여자는 그렇게 무너져갔다(전편), 나 때문에 저 여자가 죽는구나(후편)그러나 이 글은 큰 비판을 받았는데 심혜숙이 공범이 아니라는 취지의 칼럼이기 때문이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인해 무리하게 기소했고 그로 인해 고작 21살 여성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요지다. 심지어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아니라 심혜숙에게 '최대 피해자'라는 말을 사용했다! "착하고 영리해 보이는 커다란 눈에, 아직 앳된 여고생 티가 남아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도저히 현실이라 믿기지 않는 듯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어린 여자보고 이를 감당하라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면서 굉장히 불쌍하게 묘사했다.
댓글란에는 범죄자에 대한 온정주의라고 폭격을 퍼붓는 댓글이 쏟아졌다.
대략 요약하자면 '그녀가 그렇게 불쌍한가? 뭐가 그토록 불쌍한가. 살인에 가담하지는 않았더라도 자기가 가담하고 있는 일이 강도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건 당신도 인정하지 않는가. 엄연한 가해자 중 한 명인 그녀만 불쌍하고, 정말 말 그대로 아무 죄도 없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노인들과 어린아이(고작 6살)는 불쌍하지 않은가? 이런 글을 쓰면서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냐?'는 비판이다.
애초에 이 여자를 쉴드치면서 내세운 논리 자체가 굉장히 궁색한데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걸 전혀 몰랐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비명 한 번 안 질렀단 말인가? 그 말을 100% 믿는다고 해도 사형까지는 무리수였어도 흉악범죄 방관 혐의는 씻을 수 없다. 남자친구가 강도질을 하는 것까지는 분명히 알았으면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으니까.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말릴 엄두도 나지 않아' 아무것도 못했네 어쩌네 하는데 결국은 변명일 뿐이다. 말리다가 맞거나 협박당하거나 욕을 먹기라도 했으면 참작 사유라도 되었겠지만 나중에 “아이와 할아버지는 어쨌느냐”, “이 추위에 얼어 죽으면 어떻게 해요.”라고 몇 번 물어본 것이 고작이고 남자친구가 둘러대자 결국 그걸로 끝이었다. 김 변호사조차 이것 이상은 주장하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신고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친구에게 “저 사람들이 지리산 같이 가자는데 너무 무서워. 제발 나 좀 도와줘”라고 말한 것이 고작이었는데 김 변호사는 이 말을 가지고 이 여자가 경찰에 신고한 거라고 주장했다. 경찰에 직접 알린 사람은 엄연히 이 말을 들은 심혜숙의 친구다!
결국 피해자들의 유족도 이 글을 읽고 말았다. 피해자 중 6살 아이의 아버지[13]는 분노하여 이런 댓글을 달았다.
김형태 변호사님 저는 생매장 당한 최□□ 아이의 아빠입니다 20년도더 지난 가슴아픈 잊을수 없는 사건을, `억울하게 스러져간21살의 여자` 심아무게의 인권을 얘기하면서 그들에게 비참하게 희생된 가족들의 인권은 없는 변호사님, 간신히 아무러가는 아픈 역사를 이런글들로 또한번의 유가족들의 가슴에 못받는 변호사님의 이중성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함부로 나의 슬픔을 얘기이렇게 말도안되는 인권운운하는 당신 이리해도 되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함부로 나의 슬픔을 얘기이렇게 말도안되는 인권운운하는 당신 이리해도 되
유사 사례로 잠원동 묻지마 살인사건 발생 후에도 범인의 동창이라는 기자가 범인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8. 여담
2012년 채널 뷰 르포랭킹 사건사고 TOP5 13회에서 이 사건이 소개되었으며 2013년 10월 21일자 MBC에서 '수사의 추억 - 형사'라는 부제로 이 사건이 소개되었다.TVING 오리지널 예능인 여고추리반에서 스토리의 중심인 30년 전 가스 폭발 사고의 시작점인 30년 전의 예언 각성자 이지예가 예언한 첫 사건으로 등장한다.
2017년 6월 7일 신지우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영상
2022년 6월 22일 '샨나엘의 카건파일리뷰'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영상
2022년 11월 15일 디바제시카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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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1975년인데 1977년부터 강도를 저지르고 다녔다.[2] 여행사에 다니면서 일요일이면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3] 이 사람은 범죄나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저 오태환과 애인 사이였을 뿐이다.[4] 당시는 인권이나 사생활 보호가 잘 안 되던 시대여서 피해자의 실명이 모두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나무위키에는 적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게 6살 아이는 원래 가지 않아도 되었고 본인도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증조할머니가 증손녀를 너무 예뻐해 데려가려고 했고 결국 설득해서 따라나선 것이라고 한다. 만약 끝까지 고집을 부렸더라면 이 아이만이라도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 5년 만에야 어렵게 얻은 자식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한다.[5] 범인들과 자주 어울렸던 석모씨의 집을 수색한 결과 대마초 1킬로그램이 발견되면서 밝혀진 사실이다.[6] 재개발이 확정되어 2026년에 준공될 예정이다.#[7]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할머니들과 목이 졸린 류씨가 그것으로 죽지 않고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가 생매장으로 죽었다는 의미다.[8] 현재의 삼육서울병원[9] 애칭으로 이름 끝 글자 하나만 불렀다.[10] 이 재림공원묘지는 육군 대령 신분으로 단심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된 박흥주 대령이 묻혀 있는 곳이다.[11] 하지만 자술서의 내용으로 보아 몸 전체를 기증한다고 해석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서 결국 원래 예정되었던 장기들만 기증되었다. 교도소장은 자술서를 쓸 때 교도관들이 곁에서 지도를 잘못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12]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3] 참고로 이 분은 사건 1년 뒤 윤용필과 오태환을 용서할 정도의 대인배였다. 그런 대인마저도 분개하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