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의 마그레브 정복 전쟁 아랍어: الْفَتْحُ الإسلَامِيُّ لِلْمَغرِب 영어: Muslim conquest of the Maghreb | ||
시기 | 647년 ~ 709년 | |
장소 | 마그레브 | |
원인 | 이슬람 제국의 확장 정책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알타바 왕국 아우레스 왕국 그외 베르베르 부족들 |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왕조 |
지휘관 | 그레고리오스† 겐나디우스 2세→ 엘레우테리오스 니키포로스 요안니스† 아프시마로스 쿠사일라 카히나 | 압둘라 이븐 사드 주바이르 이븐 알 와움 이븐 주바이르 우크바 이븐 나피† 아부 알 무하지르 디나르† 무사 이븐 누사이르 하산 이븐 알 누만 타리크 이븐 지야드 주하이르 이븐 카이즈 알 발라위† |
결과 | 이슬람 제국의 마그레브 정복. | |
영향 | 이슬람 제국의 팽창 가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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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47~709년, 이슬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마그레브를 정복한 전쟁.2. 배경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대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이래, 고대 로마는 북아프리카에 진출하여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했다. 기원전 112~106년 유구르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누미디아를 로마의 속국으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복속시켰고, 누미디아 서쪽의 마우레타니아 왕국 역시 로마의 봉신으로 삼았다가 칼리굴라 황제 대에 마지막 왕 프톨레마이오스를 암살하고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이리하여 오늘날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 사하라 사막 이북의 북아프리카 전역이 로마의 영역이 되었다.그 후 로마는 수백 년간 북아프리카를 점유하면서 그곳의 드넓은 농경지에서 생산된 막대한 곡물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439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 왕국이 아프리카 속주의 수도 카르타고를 함락하면서 로마로부터 떨어져나갔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534년 반달 왕국이 멸망하면서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그 후 카르타고를 수도로 하는 아프리카 대관구가 신설되었다. 아프리카 대관구는 북아프리카 본토와 사르데냐, 코르시카까지 책임졌고, 민사 행정은 카르타고의 장관이 맡았고, 군대는 민병대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베르베르인들이 제국의 치하에 불복해 계속 반란을 일으킨 까닭에, 아프리카의 상황은 항상 불안정했다. 더욱이 아바르족의 발칸 반도 침략과 사산 왕조의 동방 전선 침략,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이 맞물리면서, 제국은 북아프리카까지 책임질 여력이 없었다.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아프리카 총독부를 설치해 총독이 민정과 군정을 동시에 맡아서 책임지도록 했다. 602년 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포카스의 폭정과 사산 왕조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제국이 위태로워지자, 608년 아프리카 총독 대 헤라클리우스는 아들 이라클리오스를 황제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고, 이라클리오스는 610년 포카스를 제압하고 새 황제로 등극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에 귀속된 뒤 제 기능을 하던 아프리카 속주는 639~646년 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전쟁으로 인해 인근의 이집트 속주가 이슬람 제국의 손아귀에 넘어가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제3대 칼리파 우마르는 이집트를 정복한 여세를 몰아 아프리카 속주 마저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이집트 총독 압둘라 이븐 사드에게 침공을 명령했다. 이리하여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647년, 압둘라 이븐 사드는 우마르의 지시에 따라 멤피스에서 20,000명의 병력을 일으켜 아프리카 총독부가 있는 카르타고를 향해 진군했다. 당시 아프리카 총독 그레고리오스는 이집트가 정복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가 자신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거라고 여겨 이참에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이단인 단의론을 강요하는 정부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르타고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아랍측 사료에 따르면, 그레그리오스는 자신의 초상화가 담긴 동전을 주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어떤 동전도 발견되지 못했다.아랍군이 쳐들어오자, 그레고리오스는 수페툴라로 진군해 압둘라 이븐 사드와 맞붙었다. 전투 양상은 한 달 가까이 팽팽하게 진행되었지만, 메디나에서 2만 명의 추가 병력을 이끌고 달려온 이븐 주바이르가 도착하면서 전세는 무슬림군에게 급격하게 기울었다. 결국 그레고리오스는 전사했고, 그의 딸은 아랍군에게 붙들려 이집트로 끌려가다가 도중에 낙타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랍군은 수페툴라를 약탈한 뒤 카르타고 총독부를 공격했지만, 동로마군이 요새에서 결사 저항하자 공략을 포기하고, 후임 총독 겐나디우스 2세로부터 330,000 노미스마타, 즉 금 2톤을 공물로 받는 대가로 이집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 덕분에 아프리카 속주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수페툴라 전투의 여파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이 나날이 줄어들었다.
656년 제4대 칼리파 우스만이 피살당한 사건이 벌어진 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지지하는 세력과 무아위야 1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맞붙으면서 1차 피트나가 발발했다. 이슬람 세계 전체가 두 패로 갈라져 싸운 대규모 내전이었기에, 무슬림군은 한동안아프리카 속주에 관심을 두지 못 했다. 그 후 내전에서 승리한 무아위야 1세는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한 뒤 다시 아프리카 속주에 관심을 보였다.
때마침 아프리카 속주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아프리카 총독 겐나디우스 2세는 이슬람 세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모두에게 공물을 바쳤다. 여기에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자, 그는 세금을 대폭 늘렸다. 이에 민심은 이반했고, 베르베르인들은 제국에 대한 충성맹세를 철회했다. 특히 남부 튀니지 일대는 총독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던 664년, 콘스탄스 2세가 시라쿠사로 황궁을 옮긴 뒤 게나디오스에게 공물을 더 보내라고 요구했다. 겐나디우스 2세는 이에 반발해 사절을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665년, 엘레우테리오스가 이끄는 수비대가 봉기했다. 엘레우테리오스는 스스로 총독을 자처했고, 콘스탄스 2세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겐나디우스 2세는 카르타고에서 축출된 뒤 다마스쿠스로 도망쳐서 무아위야 1세에게 자신이 총독으로 복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무아위야 1세는 우크바 이븐 나피에게 1만 병력을 줘서 아프리카 속주로 진군하게 했다. 겐나디우스 2세는 이들을 따라갔으나, 665년 말 알렉산드리아로 도착한 직후 사망했다. 사망 원인이 무엇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우크바는 겐나디우스 2세가 사망한 후에도 원정을 이어가 아프리카 속주를 약탈하고 시칠리아에서 달려온 동로마 장군 니키포로스를 격파한 뒤 이집트로 귀환했다. 그 후 670년 카이루안 시를 전진 기지로 삼은 뒤 본격적인 원정을 감행해 로마군의 미약한 저항을 분쇄하고 요새화된, 탕헤르, 카르타고를 제외한 아프리카 속주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는 이윽고 대서양 연안까지 도달했다. 알안달루스 연대기 작가 이븐 이드하리에 따르면, 그는 대서양에 도달했을 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오 하나님, 바다가 저를 막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스칸다르처럼 영원히 질주하여 당신의 믿음을 가지고 불신자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그는 파도 속으로 말을 박차고 들어간 뒤 하늘을 향해 눈을 치켜들며 외쳤다고 한다.
"위대한 하나님! 내 진로가 이 바다에 의해 멈춰지지 않는다면, 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서쪽의 왕국들로 가서 거룩한 알라의 이름을 설파하고 알라 외의 다른 신을 숭배하는 자들을 칼로 쳐 죽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카르타고와 탕헤르 정복에 실패했고, 동로마 제국의 통치가 무너져서 혼란한 틈을 타 독립을 꾀한 베르베르의 봉기에 직면했다. 683년, 베르베르족 중 알타바 왕국의 왕 쿠사일라[1]가 잔여 로마군과 연합하여 베세라 전투에서 우크바를 주살했다. 원정군은 이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졌고, 결국 키레나이카로 철수했다. 쿠사일라는 카이루안을 장악한 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688년, 2차 피트나에서 승기를 잡은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주하이르 이븐 카이스에게 베르베르-동로마 동맹을 격파하고 북아프리카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주하이르는 명령을 받들어 카이루안으로 진군해 쿠사일라를 죽이고 베르베르인들을 서쪽의 맘스로 몰아냈다. 그러나 688년 베르베르-동로마 연합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주하이르가 죽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하산 이븐 알 누만에게 원정을 맡겼다. 하산은 이집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서쪽으로 진군하여 승승장구한 끝에 695년 카르타고를 공략했다. 이에 레온티오스 황제는 파트리키오스 신분인 요안니스와 게르만 혈통의 장군 아프시마로스에게 해군을 맡겨 카르타고를 탈환하게 했다. 두 장군은 697년 기습 공격을 감행해 카르타고를 성공적으로 탈환하고 아랍군을 카이로로 축출했다. 아프시마로스는 게르만 혈통의 장군인데 비해 요안니스는 파트리키오스 신분이었다고 하니, 요안니스가 아프리카 총독을 맡았을 것이다.
698년, 하산 이븐 알 누만은 카르타고로 재차 쳐들어가 동로마군을 도시에서 몰아냈다. 함대가 크레타 섬으로 철수한 뒤, 병사들은 레온티오스에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다. 아프시마로스는 티베리오스 3세를 칭한 뒤 요안니스를 처단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해 레온티오스를 체포하여 코와 혀를 잘라버리고 달마티아의 수도원으로 보낸 뒤 새 황제로 즉위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아프리카 속주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프리카 지배는 아직 완수되지 못했다. 아우레스 왕국의 여왕 카히나가 무슬림군에 반감을 품은 베르베르인들을 모집하여 항전했기 때문이다. 698년, 양측은 옴 엘 부아기 지방의 메스키아나 인근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하산은 키레나이카로 도주했다. 이후 양자는 4~5년간 전쟁을 이어갔는데, 점차 전세가 무슬림군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에 카히나는 무슬림군이 물을 구할 수 없도록 그들이 지나갈 경로에 자리잡은 모든 오아시스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조치에 반감을 품은 베르베르인들이 대거 무슬림군에 투항하면서, 그녀의 세력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703년경, 하산은 타바르카 전투에서 카히나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일설에 따르면, 카히나는 검을 든 채 무슬림 병사들을 숱하게 쳐 죽이다가 끝내 전사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적에게 붙잡혀 능욕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하고 독극물을 삼켜 자살했다고 한다. 하산은 그녀의 유해를 확보한 뒤 참수한 후 수급을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로 보냈다.
705년 하산이 사망한 뒤 아브드 알 말리크에 의해 신임 이프리키야(Ifriqiya: 우마이야 왕조의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선임된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다신교를 섬기는 베르베르인들을 탄압했다. 베르베르인들은 이에 맞서 거세게 항전했지만, 무사는 두 아들과 심복 타리크 이븐 지야드와 함께 모든 반란을 진압했다. 기록에 따르면, 무사는 708년에 대서양 연안에 도착했으며 709년까지 30만 명의 포로를 노예로 삼았고, 이중 6만 명을 칼리파에게 보냈다고 한다. 무사는 동로마 함대의 해안 습격에 대처하기 위해 이비사섬, 마요르카, 메노르카에 해군을 보내 모조리 공략했다. 단, 세우타(현재의 지브롤터)에 거점을 삼고 있던 동로마 총독 율리아누스(또는 돈 훌리안)만은 좀처럼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던 711년, 율리아누스는 돌연 무사에게 투항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모사라베(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 역사가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자기 딸인 플로린다 라 카바가 로데리쿠스에게 강간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귀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율리아누스는 우마이야 왕조군에게 바다를 건널 선박을 제공하고, 서고트 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여기에 서고트 왕국의 국왕 로데리크에게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이 무사에게 밀사를 보내 로드리쿠스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사는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7,000명을 맡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간 타리크는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리크 왕과 격돌해 대승을 거둔 뒤 이베리아 반도를 수년 안에 석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