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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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8년 이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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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후한 말의 호족이자 서주의 관리로 자는 원룡(元龍). 진규의 아들로 서주 하비국 회포현 사람.진규-진등 가문은 서주에서 잔뼈가 굵은 중요 호족 세력이라고 한다. 원술이 인질로 잡으려 했던 진응은 그의 동생이며, 그 밖에도 여포에게 포로로 잡혔던 동생이 3명 있었다.
진등은 역사와 연의에서는 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정사 삼국지》에서는 서주에서 활동한 사람이라 그런지 여포전에 전기가 부속되어 있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하고 백성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25세에 벼슬길에 올라 서주 광릉군 동양현의 현장이 되어 선정을 펼쳤다.<선주전>에 따르면 도겸이 죽으면서 미축에게 유언하여 유비에게 서주를 양도하려고 한다. 유비가 거절하자 진등도 사신으로 와서 유비에게 서주를 맡아달라고 청하나 유비는 또 거절하며 수춘의 원술이 명문가이니 차라리 그에게 양도하라고 한다. 진등은 원술은 교만한 자라서 서주를 다스릴 만하지 못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사군(使君, 주자사에 대한 경칭)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 진등도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공융도 유비가 서주를 맡을 것을 권하니 유비가 그제서야 받아들인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진등 등이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 유비가 새로운 서주 자사가 되었다고 알리자 원소가 긍정한다.2.2. 여포 토벌의 첨병
여포가 유비의 뒤통수를 치고 서주의 주인이 되자 진규, 진등 부자도 여포의 영향력 하에 있게 되었다. 여포가 서주목이라는 지위를 요구하려고 진등이 여포의 사신으로 허도에 왔을 때, 조조는 진규의 관질(官秩)을 2천 석으로 올리고 진등에게 광릉 태수의 벼슬을 내리고 은밀히 병사를 모아 조조군에게 내응하도록 했다.여포는 아무것도 이루고 오지 못한 진등에게 다음과 같이 화를 낸다.
경의 부친(진규)이 내게 조공(조조)과 협력하길 권하여 공로(원술)와의 혼사도 끊었소. 내가 구하던 것은 지금 하나라도 얻은 것이 없는데, 경의 부자는 나란히 지위가 오르고 권세가 중해졌으니 경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오! 경이 나를 위해 말했다면, 그 말이 무엇이었소?
그러나 진등이 태연하게 천천히 여포를 깨우치듯이 말하자 여포는 화를 풀었다.제가 조공을 만나 이르길, '장군을 대우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아 응당 고기를 배불리 먹여야 하니, 배부르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이 이르길, '경의 말과 같지 않소.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배가 고프면 부릴 수 있으나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라 했으니, 그 말이 이와 같았습니다.
진등은 광릉에서도 선정을 펼쳤고 그 위신(威信)으로 해적 설주가 귀부해오기도 했다. 만 1년이 되는 날에 이르기 전에 공로를 달성하고 백성들이 경애하니 진등이 "이제 가히 쓸 만하다."고 말했다.
진등은 조조가 여포를 공격할 때 내응하여 선봉에 섰다. 한편 여포도 진등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었는지, 그의 세 아우를 하비성에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이들을 인질로 화친을 요구해도 진등은 듣지 않았다. 나중에 여포의 부하 장홍(張弘)이 여포가 패배하면 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 진등의 아우들을 데리고 도망쳐서 아우들은 살아났다. 여포가 패배한 후에는 그 공로로 복파장군이 되었다.
2.3. 주변인들을 평가하다
<진교전>에 따르면 당시 광릉태수였던 진등이 진교에게 공조(功曹) 직책을 맡긴 뒤 그를 허창으로 보내면서 허창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듣고 오라고 한다. 진교가 돌아와서 말한다. "모두 당신이 오만하고 자긍심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진등이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말한다.진기, 진심 형제: 내실이 청정하고, 화목하며 덕행이 겸비되어 있다.
화흠: 연못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며 예법이 있다.
조욱: 몸을 깨끗이 닦고 추악함을 가슴 아파하며, 식견이 있고 뜻 있는 마음이 있다.
공융: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강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탁월하다.
유비: 재지가 출중하고 왕패의 재력을 갖고 있다.
화흠: 연못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며 예법이 있다.
조욱: 몸을 깨끗이 닦고 추악함을 가슴 아파하며, 식견이 있고 뜻 있는 마음이 있다.
공융: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강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탁월하다.
유비: 재지가 출중하고 왕패의 재력을 갖고 있다.
진등은 "자질구레한 사람들까진 말 안했고 내가 이렇게 많은 이들을 공경하는데 무엇이 교만하단 말인가!"라며 평상시 생각과 행동이 이와 같았고 진교를 깊이 존경하고 친구처럼 대했다.
2.4. 손책/손권군을 격파하다
연의에는 나오지 않으나, 손책의 대군을 막은 적도 있다. 진등은 예전에 손책이 격파한 진우의 조카로 예전에 진우가 손책에게 당한 것을 갚고자 했다. 진등은 몰래 인수를 엄백호의 잔당에게 주었다.[2]손책은 군사를 보내 광기성(匡琦城)에서 진등을 공격했는데 그 깃발과 갑옷이 땅을 뒤덮을 정도였다. 진등의 수하들은 모두 적군이 아군의 10배나 되니 성을 비우고 피하면 적군은 물에 익숙한 자들이라 육지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어 곧 철수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진등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성문을 닫고 지키며 밤새 형세를 관망하다가 날이 새자 기회를 잡고 손책군을 급습해서 패퇴시켰다. 진등은 승세를 타고 추격해서 수많은[3] 병사를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손권은 대군을 일으켜 진등에게로 향했다. 진등은 자신의 병사로 대적할 수 없다고 여겨 공조(功曹) 진교에게 명령하여 조조에게 구원군을 요청한다.
진등은 몰래 성 밖 멀리 떨어진 곳을 군영의 처소로 삼고 땔나무를 많이 베어오게 하여 땔나무 묶음을 간격을 두고 가로와 세로로 여럿 세워뒀다. 밤이 되자 땔나무 묶음에 불을 일으키고 성 위에서 경축하고 환호하니 마치 대군이 도착한 것처럼 보였고 손권군이 놀라서 도망가는 사이에 진등은 군을 이끌고 추격해 다시 수많은(萬) 적을 참수했다. 다만 이 기록들은 모두 선행행장 기록이라 곧이곧대로 믿기엔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하술한다.
<진교전>에 손권이 진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과장성 기록만 배제하면 손권군[4]과 진등과의 마찰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손권군을 격파한 공으로 동성태수[5]로 진급하여 진등이 떠날 때, 백성들과 관원들, 노약자들은 포대기에 업은 채라도 진등을 뒤따르려 했으나 진등이 이들을 타일러 돌아가게 하였다.
2.4.1. 기록의 신빙성
진등과 손씨세력 간의 전투는 <여포전>과 <손책전>의 서술이 다르다. <손책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서는 손책이 진등을 토벌했다 나오며 이동평에서도 증험이라고 덧붙였다. 그와는 반대로 <여포전>에 주석으로 달린 《선현행장》에서는 진등이 손책을 격파했다고 나온다. 배송지는 원래 손책이 단지 진등을 치려는 것에서 그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조조를 치기 위한 군대를 일으킨 것은 맞고 첫 타겟이 진등이었다고 설명한다. 배송지는 이후 <손책전>에 손책이 이렇게 진등과 붙으려고 하던 차에 사냥을 하다가 허공의 문객들이 손책을 암살했다고 주석으로 남겼는데, 이렇게 서로 전투 중에 대치하다가 손책의 갑작스런 암살로 흐지부지 되었다는 게 좀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손책/손권 군과의 전투에서 진등이 각각 1만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1만 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이는 손가의 동원병력을 생각해 봤을 때 각각 1만 명씩 전사했으면 손가 세력은 바로 괴멸 상태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지나치게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기록 자체를 신뢰한다고 해도 萬은 '많이'라는 뜻의 수사적 의미의 단어로도 쓰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수사적인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피해가 1만 명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진수의 삼국지 본전과 다른 배송지 주 기록과 진등의 <선행행장>은 유달리 이질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행행장>의 기록을 부정하는 의견도 많은 편이다. 《자치통감》에도 진등의 손책/손권군 격파에 대한 기사는 싣고 있지 않다.
2.5. 죽음
이렇게 유능한 진등도 최후는 매우 독특했다. 화타전에 따르면 진등은 평소 회를 즐겨 먹었는데 어느 날부터 가슴에 통증이 생기고 속이 편치 않아 화타에게 치료를 받았다. 화타가 준 탕약을 먹자 구토를 함과 동시에 붉은 색을 띤 벌레가 몇 되나 나왔다고 한다. 화타는 진등에게 말하길, "3년 안에 재발할 것이나 뛰어난 의사가 있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3년 후에 진등은 같은 증상을 보였고, 화타는 이미 조조에게 찍혀서 처형당해 이 세상에 없었던 뒤라 결국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묘사로 보아 진등의 질병은 기생충(간흡충) 감염으로 추정되며 생선회를 좋아해서 지나치게 자주 먹은 탓에 기생충에 감염되었고 화타의 처방으로 증상이 호전되었으나 식습관이 고쳐지지 않아 재발한 것으로 보인다.[6] 또는 화타가 재발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라든지 뛰어난 의사가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으로 봐서는 간흡충으로 인해 이미 간암이 발병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7] 화타가 회를 계속 먹으면 재발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경고했는데도 진등이 회를 워낙 좋아해 못참고 먹다가 결국 재발해서 죽었다는 버전도 있다.
진등 사후에 조조는 매번 장강에 이를 때마다 진등의 계책을 쓰지 않아 손권이 세력을 키워버렸다고 탄식하였으며, 조비는 진등의 생전의 공을 추념하여 진등의 아들 진숙을 낭중으로 삼았다.
3. 삼국지연의
정사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연의에서의 이미지는 아버지 진규와 콤비로 등장하여 유비를 도와주다가 이후 유비와 헤어지는 1회성 조연 이미지가 강하다.이전에 서주를 다스리던 도겸이 죽고 유비가 서주의 대권을 쥐자 진등은 유비 밑에서 중용되어 모사와 문관으로서 활약했다.
유비가 황제의 조서에 의거하여 원술을 치기 위해 서주를 비운 사이, 장비에게 서주의 수비를 맡기면서 진등에게 보좌역을 맡긴다. 이 와중에 장비는 술잔치를 벌이다가 술을 거부하던 조표에게 곤장형을 내리고, 이때 진등이 말리지만 장비는 '문관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라면서 무시한다. 결국 조표는 자신의 사위인 여포를 끌어들여 유비의 뒤통수를 치고 서주를 빼앗게 한다. 이에 진등은 여전히 여포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하면서 겉으로 여포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속으로는 아버지 진규와 힘을 합쳐 여포를 파멸시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먼저 원술과의 정략결혼을 거부한 여포에 의해 아버지 진규와 함께 조조에게 사신으로 보내졌는데, 여포의 바람과는 달리 조조와 내응하기로 말을 맞춘다. 이에 조조가 벼슬을 내리자 돌아왔을 때 여포가 "나에게 서주목 관직을 달랬지 누가 네 배만 채우랬냐?"라고 따졌고, 진등은 "그건 조승상이 여포 형님을 굶주린 매로 만들어 원소나 유표 같은 다른 잡놈들을 잡아먹게끔 한 겁니다."라고 거짓부렁을 펼쳐 넘어갔다.
그러나 원술의 정략결혼 제안을 거부한 일 때문에 원술이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침공하였고, 이에 여포가 진궁의 제안을 따라 진규, 진등 부자의 목을 쳐서 화해를 구걸하려 하자, 진등이 나서서 계책을 내어 결국 원술의 군사를 물리친다. 그리고 이 와중에 과거 헌제를 호송한 공이 있었던 양봉, 한섬이 원술을 배신하도록 회유하였고, 이 둘을 서주에 남긴 뒤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여포를 제거할 생각도 했었으나 진규가 이 둘이 오히려 여포를 도우면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서 이도와 낭야에 보낸다.
이후, 진규 - 진등 부자는 매일 여포와 술잔치를 벌이고 아첨하며 여포를 주지육림에 빠지게 만들어 모사 진궁의 간언도 듣지 않으려 하는 똥별로 타락시킨다. 그러다가 조조가 쳐들어오자 거듭 잘못된 간언과 계책을 올려 여포를 손해보게 만들고 여포 수하 사람들을 서로 이간질시키며, 마침내는 여포의 부하들을 속여 여포의 명령을 거짓으로 전달하여 서주성을 빼앗아 조조에게 바쳤다. 조조는 진규 - 진등 부자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여 상으로 그들의 녹봉과 식읍을 크게 늘려주었다.
여기까지는 연의와 정사에서의 모습이 비슷하나, 이후에는 약간 다른 성격의 인물들로 묘사된다. 흔히 알려져 있는 연의에서의 진등은 이후 조조보다는 유비에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정사에서는 조조 밑에서 일하는 충실하고 능력있는 지방 관리였다.
연의에서는 여포가 패망한 뒤 조조는 차주를 보내 서주를 다스리게 했는데, 유비가 조조를 속이고 허도에서 도망쳐 서주를 다시 찾으려 쳐들어오자, 진등은 차주에게 유비를 거짓으로 속여 죽이자고 계책을 냈지만, 속으론 유비와 친하였기에 몰래 밤에 성을 나가 유비에게 계책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계책을 내어 관우가 자신을 장료라고 속이고 성 앞으로 가서 차주더러 성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이에 차주가 속아 성 밖으로 나가자 진등은 성문을 잠그고 차주를 들여보내지 않았고, 관우는 차주를 곧바로 죽였다.[8] 그리고 진등은 유비를 성 안으로 맞아들여 서주의 새로운 주인이 되게 하였다.
후에 조조가 유비를 격파하고 또다시 서주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죄를 보면 조조가 진등을 진작에 죽였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진등은 여전히 서주에서 벼슬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를 볼 때, 연의에서 나타난 저러한 박쥐같은 모습은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의외로 자신을 엿먹인 가후를 중용하고 장수에게도 딸을 시집보내 주던 조조의 모습을 보면, 대인배적인 태도를 진등에게도 보여주었을 가능성도 있다.[9]
조조에게 의탁한 이후의 삶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화흠이 화타를 조조에게 추천하는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한 사망 장면을 각색해 언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4. 평가
훗날, 배송지는 진등과 장홍을 묶어서 "진등, 장홍은 아울러 웅기와 장절을 지니고 있었으나, 진등은 수명이 다해 요절하면서 공업을 다 이루지 못했고, 장홍은 약한 군사로 강한 군사를 대적하여 열렬한 뜻을 세우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라고 평했다.유비는 유표에게서 천하인을 논할 때 진등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만약 원룡[10]처럼 문무와 담지[11]를 갖춘 자는 응당 고대에서 구할 뿐, 창졸 간에 그와 비견될 자를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유비의 평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실제 역사 속의 진등은 당대에 손꼽히는 호걸이었던 것이다. 참고로《진교전》에 따르면 진등도 "유비는 패왕의 재력이 있어 존경한다."고 얘기한 바 있으니, 정말 서로가 서로를 깊히 흠모한 셈.
정사에서 진등은 결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능력 면에서는 문무지용(文武知勇)을 겸비하였으며 백성들을 인자하게 보살펴서 인덕(仁德)에서도 이름이 높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널리퍼졌으니 실로 당대에 손꼽히는 호걸이었다고 할 만하다. 삼국 정립보다 훨씬 이전에 죽은 사람인데도 삼국시대 3국[12]의 모든 창업군주들이랑 깊은 인연이 있는 것도 흥미로운 점. 연의에서는 유비를 호의적으로 평가한 정사에서의 행적 때문인지 유비의 조력자처럼 등장하지만, 정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유비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졌던 것과 별개로 그저 서주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며 살아간 인상이 더 강하다. 즉, 난세를 살아간 지역 호족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인물.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진등/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향년 39세. 화타가 죽고 나서 사망했다. <화타전>과 <진등전>의 기록대로라면 진등의 출생한 해는 170년 ~ 172년, 사망한 해는 208년 ~ 211년 사이다.[2] 엄백호가 의지한 허소가 손책을 습격한 자객인 허소와 동일인물이란 의견도 있으나 명사인 성헌과 대호족인 엄백호가 의지할 정도로 세력가인 허소가 허공의 빈객이며 자객인 허소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낮다.[3] 萬.이 표현에 대해서는 하단을 참조하면 된다.[4] 손권이 직접 인솔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손권 세력의 군대다.[5] 《선행현장》에 동성태수라 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로 보인다. 당시 동성이란 지명은 군이 아니고 현이었다.(임회군 동성현) 광릉태수로 쭉 지내온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실제로도 광릉군 출신인 진교의 열전을 보면 진등이 태수로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6] 중국의 지형 특성상 바다 생선회를 먹기보단 민물 생선회를 먹었을 확률이 높다. 민물 생선회는 바다 생선회보다 기생충 감염률이 높다.[7] 코에이의 삼국지 6에서는 이걸 말하려는 것인지 화타가 등장할 때 일정 확률로 "진등님의 위 속에는..."이라는 대사를 보여주기도 한다.[8] 또한 판본에 따라서는 장비가 차주의 일족을 몰살해 버린다.[9]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진규&진등 부자를 책망하여 서주의 백성들에게 불안감을 높여주긴 싫었고, 가뜩이나 관우가 하비성에서 농성하고 있었으므로 서주의 관리를 맡겼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쪽으로 해석한다면 조조가 예전에 저질렀던 서주 대학살과도 연관지을 수 있으니 서주 출신의 진등 & 진규 부자를 중용하여 서주 대학살 시즌 2는 없다고 안심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김홍신 평역판을 계속 인용하자면 진규&진등 부자는 조조의 명을 받들어 서주의 혼란 방지에 힘썼고, 이후 진등은 조조가 관우 건에 대해 묻자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단 유비 삼형제와의 의리 때문인지, 하비성의 형세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 관우를 제압할 계책까지는 내지 않았다.[10] 진등의 자.[11] 담력과 포부.[12] 조위의 조조, 동오의 손책, 촉한의 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