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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1975 · 1976 · 1977 · 1996 · 2022 | |
리그 우승 (15회) | 1967 · 1968 · 1969 · 1971 · 1972 · 1975 · 1976 · 1977 · 1978 · 1984 · 1995 · 1996 · 2021 · 2022 · 2023 | |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9회) | 1973후기 · 1974전기 · 1975전기 · 1976전후기 · 1977전기 · 1978전후기 · 1979후기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8 · 2014 · 2021 · 2022 · 2023 | |
시즌 문서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현역 선수 경력 | 모리 토모야/선수 경력 · 니시카와 료마/선수 경력 · 야마자키 소이치로/선수 경력 | |
경기장 | 1군 교세라 돔 오사카 · 홋토못토 필드 고베 · 2군 마이시마 베이스볼 스타디움 · 지방 홈구장 와카사 스타디움 교토 | |
홈 중계 채널 | ||
주요 인물 | 감독 키시다 마모루 · 선수회장 스기모토 유타로 · 주장 공석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버팔로 벨 · 10.2 결전 · 칠석의 비극 ·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 | |
틀 문서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더(한큐-오릭스) | 역대 1라운더(킨테츠)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한큐-오릭스) |
1. 개요
오릭스 버팔로즈의 역사 및 시즌별 기록을 정리한 문서.2. 역사
공식적로 오릭스 버팔로즈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가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의 프랜차이즈에 흡수된 형태이기 때문에 브레이브스 - 블루웨이브 프랜차이즈를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오릭스 버팔로즈 공홈에 있는 구단역사를 보면 오릭스가 한큐 브레이브스를 인수한 1988년(오릭스로서의 리그 첫 참가는 1989년.)부터 게재하고 있다.[1] 그야말로 족보가 참으로 거시기한 상태.과거 한큐, 긴테쓰 팬들을 온전히 수용한 팬베이스라고 보긴 힘들지만, 구단 측에서는 그래도 한큐, 긴테쓰 팬들을 위해 올드 유니폼, OB 초청, 간사이 클래식[2]등 전신 팀을 추억하기 위한 행사는 하는 편이다. 올드 유니폼 종류만 해도 70~80년대 한큐 브레이브스, 일본생명 구장-후지이데라 구장 시대의 킨테츠 버팔로즈, 교세라 돔 오사카 시대였던 말기의 킨테츠 버팔로즈, 오릭스 블루웨이브[3] 4종류가 기본으로 쓰이고 최근에는 그 이전의 한큐/킨테츠 유니폼이나 오릭스 인수 직후의 '오릭스 브레이브스' 유니폼을 쓰기도 한다. 때문에 정말 시도때도 없이 올드 유니폼 데이가 열리며 매년 테마가 다르다. 물론 OB(레전드) 초청도 긴테츠 때 따로, 한큐 때 따로 이렇게 한다. 구장에서도 과거 긴테쓰, 블루웨이브 응원단의 깃발이 보이기도 하며 몇몇 응원가는 긴테쓰/블루웨이브 시절에 쓰던 것들이 그대로 쓰인다.[4]
하지만 현재의 오릭스 버팔로즈는 2005년 이후에 재탄생한 신생팀과 다름없다고 봐도 그다지 무리는 없다. 애초에 영구결번이었던 킨테츠의 1번(스즈키 케이시)이나
다만 오해하서는 안 될 게 어디까지나 '신생팀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공식적으로도 버팔로즈가 과거 한큐-블루웨이브와는 전혀 연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NPB 사무국이 인정한 공식적인 역사는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 - 오릭스 블루웨이브 - 오릭스 버팔로즈. 한국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변쳔 연표가 기록된 패널이 전시되어 있는 KBO 사무국의 한국야구회관빌딩처럼 도쿄 돔의 야구전당박물관에도 일본 프로야구 12개 구단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전시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버팔로즈의 역사는 한큐 시절까지 단절 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사진) 그렇기 때문에 이 항목의 '역사' 부분은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로 한정해 소개한다.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구단연혁은 독립된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2018년 기준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 시절 경험이 있는 현역 선수는 2015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선수 겸 배터리 코치를 맡던 포수 나카지마 사토시가 은퇴하면서 모두 사라졌고, 블루웨이브 시절 경험이 있는 선수마저도 스즈키 이치로가 2019년 일본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개막전 후 은퇴를 선언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2021시즌 이전까지는 퍼시픽 리그 구단들 가운데 유일하게 마지막 퍼시픽리그, 일본시리즈 우승이 21세기인 팀이었고, 한때는 자신들이 합병했던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연도(2001년)에도 밀렸을 정도에, 자신들이 제외한 약체 전력들을 데리고 창단해야 했던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7]의 포스트시즌 기록에도 한참 밀렸을 만큼 암울한 기록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래도 2022시즌에 대망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하면서 이 이야기는 옛말이 되었다.
2.1. 브레이브스 - 블루웨이브 프랜차이즈 역사
파일:external/www.geocities.jp/bravesflag.jpg한큐 브레이브스의 구단기.[8]
1936년 한큐 전철이 한큐군(阪急軍)이란 이름으로 창단. 전후인 1946년 다시 한큐군이란 이름으로 프로야구 리그에 참여. 이듬해인 1947년 한큐 베어즈(阪急べアーズ)로 구단명을 바꿨으나, 시즌 개막일이었던 1947년 4월 18일 구단명을 한큐 브레이브스(阪急ブレーブス)로 다시 바꾸고 이 이름으로 계속 리그에 참여한다. 1950년 양대리그제 시행 당시 퍼시픽리그에 참가했으며,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을 홈으로 삼았다. 한큐 철도망의 덕택에 경기를 보러오는 고정팬들이 꽤 있었다.[9]
1950년 양대리그 시행이후 퍼시픽 리그에 소속되었으나, 1960년대 중반까지 니시테츠, 난카이, 토에이, 마이니치(다이마이 - 도쿄) 등 잘나가던 팀들에게 밀려 그저 인기 없는 구단으로 회색 구단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똑같이 밑바닥을 기어간다고 지하철 야구단이란 비아냥을 듣던 킨테츠 버팔로즈와 서로 하위권을 전전하면서 지냈다.[10] 그러다가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부임한 이래 1967년 구단 최초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일본시리즈 상대가 아주 잘 나가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 때는 교진군의 V9시절(1965년~1973년 연속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의 최전성기였는데, 교진군이 9연패를 하던 시절 그 중 거의 절반 이상인 무려 5회(67~69, 71~72)[11]나 만나 모두 준우승에 머무르며 콩라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무튼 퍼시픽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으로 성장한 것은 잘된 일.
이후 브레이브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이 1974년 부임, 니시모토 감독이 만들었던 토대 위에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시대가 끝난 이후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1976년과 1977년 2년 연속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우승하며 니시모토 감독 시절의 굴욕을 되갚았다.[12] 이 시기에 배출한 스타로 세계 최초 통산 1000도루 돌파와 13년 연속 도루왕, 1회 선두타자 홈런 일본기록, 통산 1065도루의 리키 헨더슨 이전까지 '세계의 도루왕'이라 불린 후쿠모토 유타카와 통산 350승 투수 요네다 테츠야, 그와 콤비를 이뤘던 카지모토 타카오, 역대 최고의 서브마린 투수 중 한 명인 야마다 히사시와 그만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꾸준함을 보인 언더핸드 선발 아다치 미츠히로, 강속구 투수로 이름난 1975년 일본시리즈 MVP 야마구치 타카시, 1973년, 1979년 수위타자 카토 히데지, 홈런왕 3회 수상과 32시합 연속 안타(1971)을 기록한 나가이케 토쿠지 등이 있다. 특히 야마다(1순위), 카토(2순위), 후쿠모토(7순위)의 3명의 명구회 회원을 배출한 1968년 드래프트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 스카우팅으로 평가받는다.[13][14]
1978년과 1984년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15] 브레이브스는 세이부 라이온즈가 막강한 자금력으로 퍼시픽리그 최강 구단으로 도약하기 전까지 퍼시픽리그를 대표했던 최강팀이었고, 세이부가 최강팀으로 발돋움한 뒤에도 세이부의 독주를 저지할 1순위 후보이자 상위권 단골로 꼽혔었다. 위의 황금기 멤버들에 이어 미노다 코지, 마츠나가 히로미, 이시미네 카즈히코, 부머 웰즈, 사토 요시노리, 이마이 유타로 등의 스타 선수들을 여럿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기업인 한큐 전철이 1988년 시즌 종료 후 금융업체인 오릭스에[16] 구단을 매각하며 한큐 브레이브스의 역사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참고로 1957년에 서거한 한큐 전철 창업주인 코바야시 이치조가 타카라즈카 가극단과 한큐 브레이브스는 절대 팔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결국 후손들이 타카라즈카만 빼고 이 유언을 어긴 것. 다만 한큐는 나중에 경영권 문제로 곤란을 겪던 한신 전기철도를 인수하면서 한신 타이거스도 동시에 인수하게 되었다.
오릭스 브레이브스의 구단기.
왼쪽은 블루웨이브로 구단명을 바꾸며 새로 만든 마스코트인 네피.[17] 버팔로 불&버팔로 벨이 탄생하기 직전인 2010년까지의 메인 마스코트였다. 오른쪽은 스즈키 이치로.
1991년에 니시노미야시에서 코베시로 연고지를 옮겼고, 오랫동안 써왔던 브레이브스 대신 항구 도시인 코베의 이미지에 맞게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팀명을 바꾸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의 구단기 & 엠블럼[18] |
쇼와 말기에 퍼시픽리그 최강팀의 자리를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넘겨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세이부와 우승 경쟁을 벌일 정도로 강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큐 브레이브스의 마지막 해인 1988년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후쿠모토 유타카와 야마다 히사시가 팀의 매각과 동시에 은퇴했으나, 그들을 대체할 젊은 선수들이 전성기에 있었다. 투수로는 베테랑 사토 요시노리와 느린 강속구를 준수한 변화구와 섞어가며 투수들을 낚은 좌완투수 호시노 노부유키가 있었고, 야수진에는 마츠나가 히로미-부머 웰즈[19]-이시미네 카즈히코-후지이 야스오 등의 토종 강타자들에 난카이의 연고지 이전 이후에도 칸사이에 남고자 했던 카도타 히로미츠까지 합류해 '블루선더 타선'[20]이라는 맹타선이 만들어졌다. 특히 오릭스로 이름을 처음 바꾼 1989년에는 킨테츠 버팔로즈, 세이부 라이온즈와 마지막까지 리그 우승을 두고 3파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해의 우승 경쟁은 지금도 야구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오릭스 브레이브스는 승차 없이 단 1리 차이로[21] 2위에 머물며 킨테츠 버팔로즈에게 우승을 내줬다.[22]
기존의 니시노미야 구장보다 더 넓은 그린 스타디움 코베로 옮긴 후, 구단 수뇌진은 한큐 시절의 막강한 타격 중심의 팀컬러가 새 야구장에선 통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는지 요미우리 V9 시절의 주전 2루수이던[23] 도이 쇼조 감독을 영입했다. 하지만 도이 감독 시기의 성적은 3년 동안 3위만 하며 상위권 커트라인 유지에 그쳤고, 여기에 도이 감독이 마츠나가, 이시미네, 웰스 등 기존 한큐 출신 선수들과 불화를 겪어 이들을 다른 팀들로 떠나보내는데 일조하는 바람에 지금은 감독 경력 자체보다도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폼이 이상하다며 2군에 박아 슈퍼스타의 앞길을 막은 꼰대로서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도이 감독이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난 뒤 1989년 킨테츠 우승 당시의 감독이었던 오기 아키라 감독이 부임하며 다시 오릭스의 전성기가 돌아온다. 천재 타자 스즈키 이치로의 폭발,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노다 코지, 하세가와 시게토시, 후지이 야스오등 기존 전력들의 분전, 다구치 소, 히라이 마사후미, 노무라 타카히토, 트로이 닐 등 신 전력의 대두 등이 맞아떨어지면서 1995년, 1996년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특히 위의 두 우승은 고베 대지진을 극복하고 거둔 우승이라[24] 더욱 값진 우승이 되었다. 이 시기 팀의 전력이나 티켓파워에서 이치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우측 외야 관중석에만 우익수 포지션의 이치로를 보는 사람으로 북적였다고. 하지만 그것도 약발이 떨어져 1997년부터는 도로 관중수가 하락했다. 특히 1996년에는 리그 우승과 더불어 나가시마 시게오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수가 140만이 안되었다.
2000년대 들어 주요 전력이던 하세가와 시게토시,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등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한 후에는 반등의 기미라고는 전혀 없이(...) B클래스(하위권)에 쭉 맴돌았다. 구대성 선수가 바로 오릭스의 침체기인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구대성, 카네다 마사히코, 다니 요시토모 등이 분전했지만 성적은 줄곧 하위권이었고[25] 오기 감독 이후 이시게 히로미치, 레온 리[26], 이하라 하루키 등 감독들은 별다른 성과 없이 줄곧 갈리기만 했다. 암흑기의 한가운데이던 2003년에는 이시게 히로미치 감독이 4월에 일찌감치 해고되고 타격코치를 맡던 레온 리가 감독직을 급하게 이어받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44승 88패 4무(승률 .333)의 압도적 꼴지에 927실점, 819자책점, 팀 평균자책점 5.95, 팀 피안타 1534개라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기록을 세웠고[27][28], 심지어 당시 리그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20실점 이상을 허용한 패배만 4번을 당하는 굴욕적인 기록도 세웠다.[29]
여담으로 한큐-오릭스는 지금까지 4차례 승리한 일본시리즈에서 첫 해인 1975년을 제외하곤[30] 모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어 승리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팀이기도 하다. 거기다 그때 요미우리의 감독은 모두 나가시마 시게오였다.
2.2. 현재 : 블루웨이브-버팔로즈 프랜차이즈 합병 후
2005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합병하여 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스가 되었다. 합병시 긴테쓰가 흡수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구단의 공식적인 역사는 오릭스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를 계승한다.합병의 이야기를 하자면, 긴테쓰 버팔로즈는 나름대로 오사카의 터줏대감이였으나 옆동네 야구단의 압도적인 인기에 밀려 적은 인기와 함께 어마어마한 교세라 돔 오사카의 이용료 등으로 인한 적자 때문에 더이상 야구단을 운영할 수 없다고 GG를 치게 된다. 이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회장인 와타나베 츠네오를 위시한 보수파 구단주들을 중심으로 아예 한 구단[31] 더 합병한 뒤 10개 구단으로 단일리그제로 환원한다는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반발한 선수회[32]는 전무후무한 파업으로 이를 간신히 저지하고, 없어지는 구단 대신 한 자리를 채우는 방향으로 2리그 유지를 시키는 등, 파란의 연속이였다. 결국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새로 창단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된다.
합병 주체가 오릭스였기 때문에,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는 흡수당한 것으로 취급하므로 구단역사는 오릭스를 계승하게 되었다. 따라서 킨테츠의 역사는 여기서 끝. 영구결번 등도 2004년을 끝으로 없어지게 되었다.[33] 한가지 더 슬픈 건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는 팀이 해체될때까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선수단은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를 통해 오릭스와 라쿠텐으로 나뉘어 소속되게 되었으며, 쓸만한 선수들은 대부분 오릭스가 오릭스 버팔로즈에 잔류시켰다. 오릭스 버팔로즈는 기존 오릭스 주축 선수단에 킨테츠 선수단의 일부를 흡수하여 새로운 선수단을 꾸리게 되었다.
오릭스의 2군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네이밍라이츠(명명권) 시스템으로 인해 서패스 고베(サーパス神戸, Surpass Kobe)[34] → 서패스(サーパス, Surpass)[35]'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가[36] 2008년을 끝으로 계약이 해지되며 다시 오릭스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네이밍라이츠로 2군을 운영하는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뿐(쇼난 시렉스)이었다가,(2000~2010) 2011년부터 이쪽도 그냥 베이스타즈 2군이 되었다.
오릭스의 큰 문제점은 구단주가 야구팬인데 야구단 운영을 모른다는 것이었다.[37]
어쨌든 모 회사가 금융회사라 돈은 많은데, 한신처럼 지역내 팬베이스가 확고한 것도 아니고, 젊은 선수를 제대로 키워내는 팀도 아니었던지라 다른 팀의
야구단이라기보다는 금융회사스러운 운영은 지금도 여전해서[39], 여전히 상술한 대로 베테랑 선수들이 마지막으로 1~2년 정도 현역연장을 위해 거쳐가는 팀 중 하나다. 다만 오릭스 입장에서는 어차피 돈은 많은데다가, 모기업이 금융뿐만 아니라 보험, 부동산, 증권, 렌터카 등 전국단위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이런 유명선수들이 입단해서 성적은 어찌됐건(...) 스포츠신문에 크게 이름을 날려주고 입단 자체만으로 뉴스거리가 되어주며, 가끔씩 모기업 광고에 출연도 해 주거나 박찬호, 이승엽 때 처럼 중계권을 구입해 가외수입을 안겨주기도 하는 등 야구 외적으로 큰 홍보효과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방만한 경영을 굳이 바꾸지 않고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경영하면서 성적이 나오는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이기에, 베테랑들로 자리를 채우면 신인은 출장기회를 잃어 성장이 늦어지고, 신인이 제대로 못 커서 팀은 망가지고, 인기는 점점 더 떨어지고, 떨어진 인기와 성적을 회복하기 위해 베테랑을 영입해오고...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나마 가끔씩 튀어나오는 괜찮게 자란 유망주들도 FA가 되면 미래가 없는 팀에서 탈출하기 바쁘다. 반대로 FA를 구입해서 때우려고 해도 자금력에서는 밀리지 않으면서도 더 큰 인기와 수도 도쿄, 우승권 전력 등 단순히 돈 이외의 큰 메리트를 가진 요미우리 자이언츠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한신 타이거스 등의 빅클럽에 영입싸움에서 밀리기 일쑤라 결국 진짜배기 특급 선수들은 영입에 실패하고, 저렇게 한물 간 B급 FA나 외국인 선수 정도로 전력향상을 꾀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자니 또 상술한대로 악순환에 빠지고...하는 수렁에 빠진 팀. 그래도 돈은 많아서 거물 선수가 FA로 나오면 항상 주 영입 후보 중 하나로 꼽히고는 있다.
야구단도 결국 기업이란 측면으로 바라볼 땐 꽤 똘똘한 경영을 하지만, 야구 팀이란 측면에서는 방만한 경영, 망가진 육성 시스템[41][42]으로 인해 빵점인 구단.
2021년에는 전 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이던 팀이 우승까지 차지하고, 2022년에도 우승을 차지는데, 팀의 성공 요인으로는 팀의 체질변화가 꼽히고 있다. 2017년 2군 구장이 있는 오사카시 코노하나구 마이시마[43]에 최신식 훈련센터를 새로 세워 일본프로야구 12개 팀 중 가장 좋은 시설을 마련했으며[44], 육성시스템을 갈아치운 효과를 톡톡히 봤다. 원래 꼴찌는 줄창나게 하다 보니 유망주 뽑기엔 나름 유리하나 그 유망주를 못 키우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팀이었는데, 어차피 안 나오는 당장의 성적은 포기하고 즉전감보다 하이실링의 선수 위주로 드래프트 기조를 바꾸고 거기에 새로 만든 훈련센터에서 체계적인 육성을 통해 신인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리는 데 성공했으며, MLB에서 돌아온 히라노 요시히사나 T-오카다 등 베테랑들도 힘을 보탠 것. 이런 긍정적인 변화가 한 해 반짝으로 그칠지, 선순환으로 계속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상기한 노력을 통해, 오릭스는 유망주들이 피하고 싶었던 팀에서 유망주들이 입단하고 싶어하는 팀이 되어 가고 있다.
이렇듯 팀 꼬락서니는 막장이었지만, 구단가 하나는 센스가 일품이다. MEGA STOPPER라는 밴드가 주로 만들고 있는데, 스카 펑크풍의 흥겨움이 돋보인다. 특히 매년 같은 시기에 구단응원가를 발표하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과 비교하면 넘사벽. SKY, PLAY BALL, calling.
3. 역대 시즌
3.1. 2005년
프런트가 합병을 추진한 사유 중 하나는 킨테츠의 주력선수인 나카무라 노리히로, 이와쿠마 히사시, 오오무라 나오유키, 이소베 코이치 등을 영입하여 우승을 노려 보고자 했기 때문인데, 정작 해당 선수들은 이에 반발했다. 나카무라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했다가 처참히 망하고 결국 오릭스로 왔으나 한 해만에 성적 부진+연봉 문제로 인한 갈등 크리가 쌍으로 겹치며 방출당한다.[45] 이와쿠마와 이소베는 선수회의 선봉에 서서 공식적으로 오릭스를 엿먹이며(...) 고생길이 훤한 라쿠텐행을 선택했다. 오오무라는 들어갈 것처럼 말하다가 막판에 뒤통수를 치며 FA 권리를 행사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갔다. 이후 오릭스는 트레이드로 기어이 오오무라를 오릭스에 데려왔으나 2년만에 방출시켜 버렸다.[46] 또 이 기간에 들어온 드래프트 하위 신인선수들에게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오릭스의 전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에 아주 충실하게(...) 선수 분배 드래프트에서의 우선권[47]을 무기로 오릭스와 긴테쓰 양 팀에서 건질 수 있는 주력급 선수나 상위픽 유망주들을 포지션 가릴 것 없이[48] 모조리 빨아들이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는 40대를 눈앞에 둔 노장선수[49]나 나이만 먹고 성장이 정체된 노망주, 미미한 기대치의 젊은 선수들을 떠넘기는듯한 행태로 골고루 밉상짓을 했다.어쨌든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로 팀을 재편하고 맞은 첫 시즌인 2005년 당시 오릭스의 성적은 62승 4무 70패로 4위였다. 2004년의 최하위 6위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은 성적. 게다가 1군 주전급 선수들이 거의 없이 창단 시즌을 맞은 라쿠텐이 97패로 2005년 6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칭찬해줄 것이 별로 없었던 성적이었다.
3.2. 2006년
2006년에는 메이저리그 도전에 실패한 긴테츠 최후의 4번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와 요미우리에서 부진 끝에 방출된 왕년의 대타자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데려오며 소소한 화제거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순위는 오히려 5위로 더 내려갔고[50]상술했듯이 시즌 종료 후 나카무라와는 연봉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결국 방출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 나카무라는 네임밸류에 걸맞지 않은 입단 테스트 - 육성선수 입단 형태로 다음 시즌 주니치에 입단했고, 그곳에서 주전 6번타자 자리와 3루수 골든글러브를 획득하며 주니치의 53년만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00년대 중반 오릭스 프런트의 형편없는 안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3.3. 2007년
2007년에는 외국인 감독의 성공을 벤치마킹해 메이저 출신의 테리 콜린스 감독을 데려오고 왕년의 홈런왕 터피 로즈가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까지 1승 16패의 부진으로 시즌 초부터 A클래스 경쟁에서 멀어졌고 결국 2004년 이후 3년만에 다시 최하위를 기록했다.3.4. 2008년
2008년에는 1999년 이후 9년만에 처음으로 A클래스(상위권)에 진입하였다. 15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한 고마쓰 사토시를 필두로 가네코 치히로, 콘도 카즈키, 야마모토 쇼고 등 10승 선발투수들이 마운드를 지켰고 타선도 세이부에서 이적해온 홈런왕 타자 알렉스 카브레라(36홈런 104타점), 역시 2007년부터 복귀한 또다른 홈런왕 터피 로즈(40홈런 118타점) 듀오 둘이서 76홈런 222타점으로 퍼시픽리그를 폭격하면서 투타의 균형이 맞았다. 테리 콜린스 감독[51]이 잘리고 오오이시 다이지로가 감독대행을 맡으면서 시즌 초반을 어수선하게 보냈지만, 어찌저찌 반등에 성공하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이어 리그 2위[52]를 차지. 하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선 3위 닛폰햄에게 2연패하며 탈락.3.5. 2009년
2009년에는 56승 86패 2무로 다시 퍼시픽리그 꼴찌로 추락했다. 5위, 즉 꼴찌에서 두번째가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거취를 둘러싸고 구단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팀 분위기가 개판된 치바 롯데 마린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참... 작년 신인왕 코마츠가 1승 9패 7.09라는 충격적인 추락을 보여주는 등 마운드가 전반적으로 붕괴했다. 오이시 다이지로 감독은 사임하고 2010년 오카다 아키노부 전 한신 타이거스 감독이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여담으로 2009년에는 터피 로즈가 9년을 채우며 외국인 제한이 풀린 덕에[53] 5명을 가동하는 팀이 되었는데, 야수진에만 4명. 그것도 터피 로즈, 알렉스 카브레라, 호세 페르난데스[54], 그렉 라로카등 각 팀의 주포급의 거포들로만 쫙 깔아버린 덕에 팀 전체 공격력의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해버려 다른 팀들에게는 공포를 안겨주지만 정작 팀의 인기는 하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정작 그 초중량 타선은 부상 크리로 전혀 잘 가동되지 못했다.3.6. 2010년
2010년 2월 5일 팀의 외야수인 오제 히로유키 선수가 전지훈련지인 오키나와 미야코 섬의 숙소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55] 일단은 자살로 추정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새해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니 성적도 리그 5위로 시망. 결국 21세기 첫 10년을 2008년 단 한 번 A클래스에 든 것으로 마무리했다. 후새드. 동쪽의 개막장팀도 2번 찍었는데... 그나마 요코하마와는 달리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한 거[56]에 위안을 삼았지만 요코하마는 2016년에 CS 진출에 성공했고, 그것도 모자라 첫 해부터 오릭스도 못 간 파이널까지 가더니 이듬해엔 CS 우승까지 했다.3.7. 2011년
2011 시즌에는 대대적인 전력강화의 일환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풀린 이승엽을 얻어오고, 거기에 박찬호라는 카드까지 영입했으나 둘다 한 시즌만 뛰고 한국복귀를 하게 되었다.
새 유니폼과 마스코트가 이 해 1월 8일에 공개되었는데 마스코트 자체가 모에선을 너무 맞은 느낌이 든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배경 스토리에 따르면 박사가 멋대로 만들어낸 시공을 초월한 소 로봇이라는데… 버팔로 벨 참조. 한국에서도 모에선을 맞았다.
동시에 공개된 유니폼은 예상보다 멋지게 나왔다. 홈은 의외로 괜찮은 편이며 외곽선과 넥라인에 금색을 사용한 덕에 황금간지가 줄줄, 원정은 회색이긴 했지만 가슴 로고와 폰트는 보조색인 노랑색이 커버하기에 사이타마 세이부보다 몇배 나은 편. 남색은 서드 유니폼에 적용되었다. 다만 밀워키 브루어스의 유니폼 색상을 연상시키게 한다는 평이 있다. 1월 28일 NHN이 오릭스와 1년간 공식 후원계약을 체결하여 헬멧과 유니폼에 한게임 로고가 박힌다. 기사보기
3.8. 2012년
3.8.1. 시즌 중
이대호를 영입하면서 타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지만... 현실은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이대호가 팀내 홈런(24홈런)과 타율(.286) 그리고 타점 선두(91타점)를 차지했고, OPS도 0.846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나머지 타자들은 전혀 이대호를 받쳐주지 못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이대호가 타점을 기록했을 때 30승 27패 2무지만 타점 0일 경우는 27승 50패 8무(...).
결국 2012년 보란듯이 6위를 찍었다. 비밀번호 하나 더 추가. 그 와중에 이대호는 퍼시픽 리그 타점왕 자리를 가져갔다(...). 팀 전체에서 유일한 타이틀 홀더다 이게(...).
다만 이 때문에 이대호가 돋보이는 효과가 있었으니(...). 1년차 외국인이 유일하게 활약하다 보니 팬들 사이에서는 대박영입이라고 찬사를 받았다. 시즌 초기에는 이대호가 크게 부진하면서 실망하는 반응이 주류였으나, 빠른 적응과 함께 공격력이 폭발하기 시작하자 180도 달라진 반응을 보여줬다. 특히 이대호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의 나카무라 타케야와 시즌 막바지까지 홈런왕 경쟁을 해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59]
3.8.2. 스토브 리그
프론트가 약을 빨았는지 스토브리그 기간동안 미친듯이 선수들을 빨아들여 이적시장 태풍의 핵이 되었다.우선 10승 경험이 2번이나 있으나 감독과 사이가 틀어져서 2군에서 썩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토노 슌을 트레이드로 땡겨온 것으로 시작, 원 오릭스 소속이나 한신으로 간 뒤 포텐 터져서[60]3할 3번찍고 각성한 히라노 케이이치도 FA로 계약하였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 FA를 선언한 테라하라 하야토의 보상선수로, 11년까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절대적 마무리 투수였던 마하라 타카히로를 공짜로 업어왔다(...).
그리고 스프링캠프 직전에 마지막으로 대박이 터졌는데, 현재 퍼시픽리그 최고 외야수라 여겨지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이토이 요시오까지 트레이드로 영입하였다. 주전급 4명, 그것도 리그 타이틀을 노려볼만한 영입을 4건이나 성공시켜서 무시못할 전력으로 발돋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문제는 이토이를 제외하고는 2012년 시즌에 다들 약간씩 하자가 있던 선수들이라 넷 다 잘 터지면 대박이지만 재수없으면 3명 정도는 밥값 못할지도 모른다는게 불안요소. 토노는 감독과 불화가 있기는 했지만 12년에는 1군 등판이 거의 없었고, 히라노는 커리어 로우를 찍었으며, 마하라는 1년내내 부상 + 2014년 FA취득(...). 사실 이토이도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에 보내달라고 닛폰햄에 요구했다가 트레이드된 케이스[61]라 언제 구단과 불화를 일으킬 지 모른다.
3.9. 2013년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이대호 앞뒤로 믿을 만한 선수들이 좀 들어섰지만 여전히 이대호가 공격의 핵인 건 부정 못 하는 상황. 개막 당시에는 리그 최강급의 타선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공인구의 변화로 인해 사전 예측만큼의 위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이토이나 이대호나 홈런을 양산하는 스타일이 아닌 중거리포이다 보니, 공인구가 바뀌었다고 홈런이 크게 늘어나고 그러지는 않는지라 다른 팀들이 오히려 덕을 크게 본 것. 그렇다 해도 이토이-이대호-발디리스로 이어지는 클린업은 기술과 힘을 겸비한 리그 최고의 타선이라는 평을 받지만 그 셋과 포수 이토를 제외한 나머지 쩌리들은 공인구가 바뀌었건 말건 여전히 땅을 파고 있는지라 팀 전체 타격성적으로는 오히려 파리그 최하위라는 웃지 못할 상황.반면에 투수진은 시즌 전의 걱정이 그대로 터져서 12년에 그나마 밥값을 했던 기사누키 히로시의 대체자원으로 여겨지던 이가와나 토노는 1군에서 뛰기엔 부족한 투구내용을 보여주고 있,고 노히트노런으로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니시 유키는 부침이 심한 투구를 보여주고 있으며, 외국인 선수들은 내려갈 선수는 내려간다는 진리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중이라 믿을 수 있는 선수가
결국 작년과 마찬가지로 클린업이 터지지 않으면 패배하는 패턴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으며 승률 5할에 올라갈 듯 하면서 못 올라가고 주저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고토
결국 A클래스 진입에 실패했다. 경기가 순연돼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가 열릴때 라쿠텐과 3연전을 했다. 최종 성적은 144경기 66승 73패 5무(0.475)로 리그 5위를 차지하며 꼴지 탈출에는 성공.
오프시즌에는 클린업의 중추인 이대호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아롬 발디리스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 빼앗겼다. 그 공백을 매우기 위해 소프트뱅크에서
3.10. 2014년
4월 6일 기준으로 윌리 모 페냐가 8경기동안 6개의 홈런을 치며 자신을 버린 소프트뱅크에 확실히 복수하고 있다. 팀도 5연승으로 1위를 달리며 쾌속의 스타트를 끊었다. 정작 소프트뱅크로 간 이대호는 안타는 괜찮게 치고 있지만 홈런을 치지는 못하고 있다. 투수진도 니시 유키 등이 대폭발. 3-4월동안 무섭게 달리면서 그 달의 퍼시픽 리그 월간 MVP 투수(니시 유키), 타자(윌리 모 페냐)부문 모두를 쓸어갔고, 과거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연상케 하는 반지원정대 급 라인업을 갖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수위 다툼을 하고 있는 중. 5월 17일 5시간에 걸친 수위공방전에서 12회말 이토의 희생플라이로 2-1로 승리, 수위를 따냈다.그렇게 퍼시픽리그 1위인 상태로 교류전에 돌입했건만 주위의 시선은 여전히 촌놈마라톤 취급에 이제 슬슬 DTD가 오겠지(...) 하지만 그러한 주위의 시선을 비웃듯 교류전에서도 선전을 계속
7월 10일 호크스와의 3회전중 트리플 플레이를 따냈는데, 심판진의 오심으로 무효처리 되었다.[67] 설상가상으로 7월 25~27일에 걸쳐서 벌어진 적지 후쿠오카에서의 소프트뱅크와의 맞대결 3연전에서는 칼을 갈며 벼르고 별렀던 소프트뱅크의 역습에 3연전 싹쓸이 패. 1.5게임차 뒤진 2위로 내려앉았다. 이전부터 0.650에 육박하던 승률을 조금씩 까먹으며 버텨왔지만 시즌 중후반 선두 경쟁을 하고 있는 팀과의 중요한 일전에서 거의 자동아웃 수준이던 상대팀 포수 호소카와에게 2경기나 결승타를 맞는 등 내용도 영 좋지 못한 상황. 그대로 내려가 버릴지, 혹은 극복할 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8월에 들어와서 호크스가 파죽의 9연승을 기록하면서 게임차가 벌어졌고 1위자리는 절망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소프트뱅크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면서 결국 우승은 실패했다.[68], 그리고 나머지 2경기를 이김으로써 승차 없이 2위가 되었다.
그리고 6년만에 올라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3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1승 2패로 밀리면서 광탈하고 말았다[69]. 시즌 최종성적이 호크스와 게임차 없이 무승부 숫자에서 비롯된 승률차이로 2위였던 만큼 오래간만에 좋은 성적을 낸 오릭스로서는 천추의 한으로 남을 시즌이 되고 말았다.
2013년 시즌을 정리하자면 2012년의 막강 투수진에 업그레이드 된 타선이 힘을 보태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돌풍을 일으킨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에이스 카네코 치히로는 트리플 크라운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며 만장일치로 사와무라상을 수상했으며 , 니시 유키와 외국인 투수 딕슨도 규정이닝 달성 + 3점대 방어율로 선발진을 잘 지켰다. 사토 타츠야(홀드 포인트 1위, 홀드 3위)와 히라노 요시히사(세이브 1위)를 필두로, 히가 모토키, 키시다 마모루, 마하라 타카히로 등이 가세한 불펜진은 리그 최상급의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타자진은 리그 2위로 작년의 클린업만 야구하는 타선에서 확실히 탈피했다. 이토이는 타격왕을 차지했고, 윌리 모 페냐는 홈런 3위로 이대호의 확실한 대체재 역할을 수행해주었다. 거기에 T-오카다가 23홈런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머지 선수들도 리그 평균급의 타격을 해주며 밸런스 패치가 적절하게 이뤄진 모습을 보였다.
3.11. 2015년
1게임만 더 이겼어도 1996년이후 18년만의 우승을 차지할수 있었던 아쉬움을 뒤로하고 2014 시즌의 성과에 고무된 구단은 2015년 시즌 본격적으로 19년만의 우승을 목표로 삼고 과감한 보강에 나섰다. 특히 2015년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는 해라, 당시 고베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던 팀으로서는 더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도 돈 쓰는 규모는 적지 않은 구단이었으나그러나 현실은 개막 4연패, 그 후 1승을 찍더니 다시 4연패를 하는 등 초장부터 영 좋지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6월이 되기도 전에 승패마진 -15를 찍는 역대급 막장 시즌을 치르는 중.
리그를 씹어먹는 포스를 보였던 카네코 치히로가 부상으로 개막부터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 딕슨이 리그 MVP급 포스를 보여주고 니시도 작년을 능가하는 성적을 찍고 있으며 토메이가 신인 2년차 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투구를 보여주면서 선발진은 선방하긴 했는데, 작년의 팀을 떠받쳤던 주축 불펜들인 히라노(5.40, 5월31일 시점) 사토(4.35, 5월31일 시점), 키시다(5.63, 5월 31일 시점), 히가(부상으로 등판없음)가 전부 나가 떨어졌다. 5월말 시점의 팀 성적 34패중 19패가 역전패라는 사실이 이 팀의 암울한 불팬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팀 타격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타선을 이끌던 이토이가 극도의 부진에 빠지고 그나마 공갈포라도 쳐 주던 페냐가 나가면서 데려온 블랑코는부상, 부진에 시달렸고 팀은 암흑기 포스를 풍기고 있다. 거액을 투자한 마이너에서 돌아온 나카지마의 성적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나마 새얼굴인 신인왕 경쟁 대열의 루키 니시노 마사히로와 고작 2500만엔 연봉의 독립리그 출신 카라바이요가 체면치레를 해 주고 있는 정도이지만, 둘 다 사실상 신인이기에 언제 하락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더욱 암울.
결국 6월 2일, 모리와키 히로시 감독이 사실상 사퇴하면서 후쿠라 준이치 수석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무리할 공산이 커졌다.
그래도 교류전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자기 홈에서 3연승 스윕하며 체면치레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적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8월에는 어느 정도 승을 먹으며 5위 라쿠텐에 1경기 차까지 따라붙어 탈꼴을 향한 희망고문 모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찌감치 선두 소뱅과는 27.5게임차라는 까마득한 수준의 승차가 생기며 사실상 우승 트래직 넘버는 소멸. 3위 세이부와는 8게임차, 4위 지바롯데와는 7.5게임차라는 초월적인 수치라 따라잡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9월 15일,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제치고 꼴찌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1일 기준으로 오릭스의 잔여 경기는 2경기에 불과하지만, 라쿠텐은 무려 6경기여서 이 순위도 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하지만 감독의 사임 발표 등으로 팀 분위가 와해된 라쿠텐이 시즌 막판 무기력하게 무너지면서 최하위 탈출에는 성공했다.
3.12. 2016년
원정 유니폼을 회색에서 남색으로 바꾸었다. 과거 블루웨이브 시절 쓰던 남색의 부활이긴 한데, 사실 블루웨이브 시절의 푸른색에 가깝던 남색보단 현재 쓰는 팀컬러이자 킨테츠의 말기 팀컬러와 비슷한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이다.개막 후 13경기가 지난 4월 12일 현재까지 팀 홈런이 단 1개도 없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개막 후 무홈런 기록[70], 팀 득점과 실점 모두에서 영예로운 리그 꼴찌이며, 당연히 퍼시픽리그 꼴찌를 순항중이다.(...) 14경기만에 이토이 요시오가 홈런을 기록하였고 꽤 긴 시간동안 라쿠텐과 함께 팀 홈런이 한자릿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5월 초에 뜬금없는 분전과 세이부, 라쿠텐 두 팀의 거한 삽질로 한 때 순위를 4위까지 끌어올리면서 탈꼴찌의 희망을 가지는 듯 했으나 교류전이 시작되면서 도로아미타불...
5월 24일 릭 밴덴헐크가 선발등판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NPB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22 : 6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떡실신을 당했다(...). 주자 만루에서 4볼넷으로 밀어내기 4점이라는 진귀한 기록을 남겼다.
6월 19일 기준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함께 교류전 최하위권에 머물러있다. 교류전 때만 되면 오릭스도 중박은 친다는 이야기도 올 시즌에는 할 수 없게 되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3연전에서 스즈키 세이야의 2경기 연속 끝내기 홈런, 3경기 연속 결승타라는 하드캐리로 3경기를 모두 역전패로 내 준 것이 뼈아팠다. 우천순연된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를 승리해도 공동 최하위, 지면 단독 꼴찌가 된다. 6/20(월) 한신과의 원정경기에서 패하면서 5승 13패를 기록하며 교류전을 최하위로 마감했다.
팀은 여전히 못나가는 가운데 일본의 마일리지 포인트 카드인 폰타와의 홍보활동 제휴로 폰타의 마스코트인 너구리 폰타의 트위터 계정을 통한 버팔로즈 응원 기획이 시작되었는데 경기 시작 전에 업로드 되는 일러스트에 나오는 폰타의 희망찬 표정과 패배한 경기 후에 업로드 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짠한 표정의 폰타가 네티즌들의 묘한 동정과 공감을 얻으면서 컬트적인 인기만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무려 15만이 넘는 팔로워를 기록하면서 불과 2개월 반만에 본진인 폰타의 트위터 계정의 팔로워수를 뛰어 넘어버렸다.#
홈이 돔구장인데도 여기저기서 우천취소를 많이 겪어서 치른 경기가 다른 팀에 비해 5~6경기 적은 상황이다. 퍼시픽리그에 돔을 쓰는 팀이 4개나 있는데...여러모로 묘한 시즌이 되고 있다.
전반기가 끝난 시점에서 1위 소뱅과 25경기 차, 3위 지바 롯데와 15경기 차의 최하위를 기록중이었으나, 후반기 들어서 5위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엄청난 추락을 하게 되면서 5위와의 경기차이가 많이 좁혀졌다. 7월 31일에 세이부와의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를 기록, 세이부와의 경기차이는 0.5경기차밖에 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세이부가 8월 첫 3연전에서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스윕을 당해준 덕분에 최하위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최하위로 굴러떨어졌다. 의외로 시즌 막판 1위 감별사 노릇을 했는데, 소프트뱅크에게 스윕을 거두거나 위닝을 하면서 닛폰햄의 극적인 역전우승에 일등공신이 되...는듯 하다가, 그 닛폰햄 또한 9월 14~15일 2연전에서 잡으면서 2위로 내려 앉혔다. 특히 14일엔 닛폰햄 오타니 쇼헤이의 일본 구속 최고기록인 164km 직구를 이토이가 멋지게 받아쳐서 2타점 적시타를 만들어 내는 명장면까지 만들었다. 1위를 하고 싶다면 오릭스부터 잘 잡도록 하자...
결국 최하위, 그것도 NPB 팀들 중 승률이 가장 낮은 팀이 되고 말았다. 이쯤되면 누가 감독을 맡든 답이 없을지도...그리고 2016년 시즌 종료를 기준으로 양대 리그 12구단 중 유일하게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를 진출한 적이 없는 유일한 팀이 되었다.[71] 거기다 히로시마가 DeNA를 누르고 올라가며 일본시리즈 올라간 지 가장 오래된 구단도 가져갔다.[72]
다만 두 가지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이토이 요시오가 역대 최고령 도루왕에 오른 것과 NPB 사상 최초의 무포일(!!!) 시즌을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라나?
3.13. 2017년
시즌 전 후쿠라 준이치 감독이 실책을 범한 선수에게 점심도 안 주고 훈련을 시키고, 체중이 증가한 선수를 2군으로 내려보내는 등 지옥훈련을 시켰다.개막 3연전, 전년도에 꼴찌자리를 놓고 다투던 라쿠텐과의 홈 3연전을 무난하게 스윕을 당하면서 올해도 "그러면 그렇지"의 상황이 반복되는 듯이 보였다. 세이부와의 2연전을 스윕할 때만 해도 하위권 팀끼리의 도토리 키재기 정도로 보였으나...이어진 일본시리즈 우승팀 닛폰햄과의 3연전을 싹쓸이하면서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어진 롯데와의 경기도 11대 1로 대승을 거두면서 개막 3연패 후 6연승을 질주. 6승 3패로 소프트뱅크를 제치고 2위로 치고 나갔다. 2014년 2위 이후 이름값 뿐이던 막강 선발진이 모처럼 제몫을 하는 가운데 과연 이 기세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지 더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할 듯.
그리고 그 기세가 4월 한달 내내 이어지면서 라쿠텐과 더불어 퍼시픽 리그의 판도에 대이변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작년에 4위에 그쳤던 세이부까지 3위에 오르는 등 지난 해 B클래스 세 팀이 나란히 A클래스 자리를 차지하면서 상전벽해의 양상을 일으키고 있다. 4월말 현재 15승 7패, 승률 .682. 한달 내내 위닝시리즈의 페이스를 보이면서 수위 라쿠텐
그러나 선두 등극의 호기로 여겼던 선두 라쿠텐과의 센다이 3연전에서 1차전을 승리한 보람도 없이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면서 불길한 출발을 보이더니 5월 5일 닛폰햄에게 패하며 3위로 추락했고, 이 후 DTD의 늪에 빠져 5월 한 달 동안 8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 결국 5월 26일 롯데에게 패하면서 5위까지 추락하고야 말았다(...). 5월 들어 4연패, 5연패, 6연패를 한번씩 하면서 교류전 들어가기 직전인 5월 28일까지 월간 성적 4승 18패.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안했던 꼴찌가 이제는 가시권이다(...).
그런데 교류전 첫 주에 야쿠르트와 요미우리를 차례대로 스윕하며 6월 3일까지 교류전 전승을 질주했다.
현재까지의 행보를 보면 후쿠라 감독의 평판은 상당히 나쁜 편이다. 1이닝에 번트 두 개를 쓰는 등 아웃카운트를 늘려가며 툭하면 번트작전을 찾고 선수기용 및 배치도 돌대가리로 할 뿐더러, 7월 25일 세이부에게 시즌 2호 8연패를 당하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드립을 치면서 실패를 남의 일 같이 이야기하는 등 입만 산 감독이라는 평. 실제로 사토자키 토모야 테레비 아사히 해설위원도 "번트 쓰기 전에 성공시키기 위한 포석 잘 뒀는지 생각하고 써라"라고 하고 코마다 노리히로 TBS라디오 해설위원도 후쿠라의 선수기용을 돌려깔 정도로 해설자들 사이에서도 후쿠라식 야구에 대한 악평이 절로 나오고 있다.[74]
그 이후로는 거의 완전히 4위자리에 고정. 위로 치고 올라가기도 힘들고 밑으로 내려가기도
결국 9월 24일 세이부 전에서의 패배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되었다.
9월 29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경기에서 외국인 타자 크리스 마레로가 NPB 통산 10만번째 홈런포를 때려냈다.[75]
정규시즌 종료 후, 미야우치 요시히코 오너가 시즌 종료 보고에서 후쿠라 감독에게 팀의 기동력이 약하다, 연습 더 해라라는 쓴소리를 했다. 그 와중에 10월 10일 스즈키 이치로 일본 복귀시 오릭스 말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발언을 했고 오릭스 팬들에게 선수보강, 투자나 하라는 말을 들은 건 덤.
옆리그
3.14. 2018년
시즌 후 오랫동안 마무리 자리를 지켜온 히라노 요시히사가 FA를 선언하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떠났다. 팀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상하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FA를 선언한 마스이 히로토시를 영입하여 미리 히라노의 빈 자리를 메워놨다.매년 돈을 뿌려가며 화려하게 전력보강을 해
그리고 맞이한 시즌 개막전의 상대는 전년도 우승팀인 소프트뱅크였다.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의 중책을 맡은 니시 유키가 소프트뱅크 타선을 상대로 7 ⅓이닝 2실점으로 역투했음에도 불구 타선이 센가 코다이 - 이와사키 쇼 - 데니스 사파테로 이어지는 상대팀의 필승 릴레이에 단 27명의 타자로 영봉패(안타를 치고 나가서 병살로 이닝이 마무리 된 회가 있기 때문에 퍼펙트나 노히터는 아니다.)하면서 2018시즌도 패전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8회 들어와서 투구수가 120구에 육박하면서 구위가 떨어져가고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 몰렸음에도 구시대적 선발완투를 고집한 무능한 감독의 똥고집 때문에 니시는 잘 던지고도 패전투수가 됐다. 물론 이날 타선 하는 거 봐서는 잘해봐야 노디시전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로써 오릭스는 개막전 7연패.
4월 17일 치바 롯데를 상대로 5:3 패배했다. 가네코는 최고구속 140km 언저리에서 직구로 꾸역꾸역 막았지만 5회 수비 실책과 폭투가 겹치며 3실점 해버리고 말았다. 6회 4번타자 로메로의 뜬금포로 3:3 동점을 만들었지만 불펜 방화로 7회 2실점 하고만다. 타선은 9안타를 치긴 했지만 무네, 아다치가 8타수 1안타로 꽉 막혔고, 하위타선에선 T-오카다, 이토가 무안타로 침묵했다. 특히 이토는 번트 병살로 뼈아픈 실책을 하고 말았다.
4월 18일 치바 롯데를 상대로 4;3 진땀승을 거뒀다. 4회까지 서로 무득점으로 치고받다 선발 투수인 앤드류 앨버스(전 한화)가 첫 타자를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흐름이 조금식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 타자인 나카무라 쇼고가 11구까지 가는 승부끝에 땅볼로 아웃을 잡았지만 4번타자 이노우에 세이야한테 안타를 맞고 1, 3루가 되고만다. 5번 타자인 스즈키 다이치를 실점없이 땅볼로 잡았지만 다음타자인 기요타 이쿠히로한테 적시타를 허용하고만다. 다행이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1실점으로 4회를 종료했다. 이후 6회 1아웃에서 아다치가 안타로 출루하고 와카츠키 켄야 타석에 대타 T-오카다가 안타를 때려 1사 1-3루를 만들었다. 1번 타자 무네 유마가 오랜만에 적시타로 동점이 됐고, 요시다 마사타카도 안타로 나가면서 1사 만루가됐다. 4번 타자 로메로가 풀카운트 승부끝에 볼넷으로 역전했고 다음타자 마레로가 2타점 적시타를 올려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다. 8회 신인투수 쿠로키 유타가 흔들려 2실점했지만 역전은 당하지 않았고 니폰햄에서 온 마스이 히로토시가 아슬아슬하게 세이브를 따냈다.
이후 꾸준히 5할 아래를 밑돌며 5위 자리로 그냥 여느해처럼 시즌이 흘러갈 분위기였으나, 세이부의 상승세가 잠잠한 사이 승률을 끌어 올리면서 5할을 넘기고 1위와 5게임, 3위와는 1.5게임차의 4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교류전에서 소프트뱅크가 야쿠르트, 주니치에게 4연패를 당하고, 21세기 최악의 시즌을 맡은 거인에게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면서 교류전 도입 이래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사이 히로시마와의 3연전을 독식하는 등 야금야금 승수를 쌓아 6월 14일 자로 3위까지 올라갔다. 신흥 중심타자 요시다 마사타카가 세리그 투수진을 맹폭하며 교류전 MVP에 올랐고, 한화 이글스 출신 외국인 투수인 앤드류 앨버스가 실질적인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올스타전에도 감독 추천으로 뽑힐 정도의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에 고무되었는지 오릭스는 시즌 도중 선발 요원 보충을 위해 또다른 KBO 약팀 kt wiz 출신 투수인 돈 로치를 영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7월에 6승 13패 1무로 DTD한 결과 8월 초에는 5위까지 떨어졌고, 그 사이 A클래스 구단들인 세이부-닛폰햄-소프트뱅크(+롯데)가 분전하며 게임차가 더욱 벌어졌다. 게다가 꼴찌 라쿠텐이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 사임 이후 히라이시 요스케 감독대행 체제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순식간에 꼴찌와의 게임차가 2게임 차까지 좁혀졌다. 올해도 A클래스는 멀어지는 듯한 분위기.
결국 또 B클래스가 확정되었고 10월 5일 시즌 최종전인 소프트뱅크전을 패했으나 롯데가 잔여경기 전승을 거둬도 승률을 뛰어넘을 수 없게 되어 시즌 4위가 확정되었다. 아울러 2018시즌 12개 구단 중 가장 빨리 일정을 소화했다. 10월 5일 최종전 이후 니시무라 노리후미[76]에게 1군 지휘봉을 맡길 것으로 보인다. 다구치 소 2군 감독의 1군 감독 승격도 검토되었으나 경영진의 구상에 니시무라가 더 맞다고 판단한 것 같다.
맨 위의 요약에도 나와있듯 양대리그 최저 평균자책점(3.69), 최소 실점(565)의 우수한 투수력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공격력으로 인해 망한 시즌. 선발진은 니시 유키와 야마오카 다이스케 외에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없지만 가네코, 앨버스, 딕슨 등이 부상으로 가동이 제한되기는 했어도 일단 나와주면 준수한 투구를 펼쳤고, 신인 좌완 타지마 다이키도 스팟 선발로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불펜진은 야마모토 요시노부라는 우수한 영건이 등장하고 클로저 마스이 히로토시, 콘도 다이스케, 사와다 케이스케, 요시다 카즈마사 등이 활약해 다른 상위권 구단들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퀄리티를 보여줬다. 하지만 상술했듯 이 팀이 망한 이유는 빈곤한 득점력. 점수를 내야지 불펜이 걸어잠그든 말든 하지... 팀 득점력은 퍼시픽리그 4위인 538점으로[77] 그 투수력을 가지고도 득실차 -를 찍었다. 요시다 마사타카가 대망의 첫 풀타임 시즌을 보내며 3할 20홈런으로 분전했지만 T-오카다가 극도의 부진에 빠지고 작년 후반기 좋은 모습을 보인 로메로-머레로의 우타 외국인 듀오도 공갈포의 모습만 보였으며 그나마 후쿠다 슈헤이나 니시노 마사히로, 오다 유야가 똑딱이 노릇이라도 해준 것을 빼면 죄다 멘도사 라인들 뿐인 물빠따 팀이었다. 주전 유격수 아다치 료이치는 퍼시픽리그 규정타석 만족 타자 중 최저타율(.219)을 기록했을 정도. 아다치의 경우 선수 본인이 못 친것도 있지만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만성 질환이 있어 절대적인 체력관리가 필요한 선수를 대체자원도 없이 굴린 후쿠라 준이치 감독의 무능한 기용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2018 시즌 이 팀의 문제를 집약해놓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3.15. 2019년
자세한 내용은 오릭스 버팔로즈/2019년 문서 참고하십시오.3.16. 2020년
자세한 내용은 오릭스 버팔로즈/202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3.17. 2021년
그동안의 암흑기를 청산하고 25년만의 리그 우승을 이뤄낸 시즌.자세한 내용은 오릭스 버팔로즈/2021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3.18. 2022년
리그 우승을 넘어 26년만의 V5를 이뤄낸 시즌.자세한 내용은 오릭스 버팔로즈/202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3.19. 2023년
자세한 내용은 오릭스 버팔로즈/202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3.20. 2024년
자세한 내용은 오릭스 버팔로즈/202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일본프로야구 구단 중 중간에 운영 주체가 인수된 경우라도 과거 프랜차이즈의 역사를 버리지 않으며, 당연히 홈페이지에 소개해 놓고 있다.[2] 과거 같은 간사이 지방 팀이었던 난카이 호크스의 후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와의 연간 경기 중 몇몇 경기를 간사이 클래식으로 개최하며 옛 팬, OB, 선수단들과 함께 과거 간사이 지방에 있던 한큐, 킨테츠, 난카이 팀들을 추억한다. 간사이 클래식 땐 각 팀 관련 OB들을 초청해 시구식을 개최하고 각 팀의 올드 유니폼(소뱅은 난카이, 오릭스는 한큐/킨테츠)을 입고 경기를 치른다. 2016년까진 오사카 클래식이란 명칭이었으나 2017년부터 간사이 클래식으로 개명했다.[3] 그중에서도 1995년~1996년 퍼시픽리그 연패 시기의 유니폼이 자주 쓰인다.[4] 응원가는 킨테츠 시절의 선수 응원가가 한큐-블루웨이브 시절의 선수 응원가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유용(流用)된다. 응원가 작곡을 대체로 오사카의 구 킨테츠 응원단 출신의 사람들이 맡기 때문으로 추정.[5] 계획은 있었으나 취소되었다가 여러 사유로 무산된 경우이다. 1984년 통산 1천도루 달성을 기념해 후쿠모토의 7번을 영구결번으로 제정하려 했으나 본인이 아직 현역인 점도 있고 해서 고사했기에 취소되었는데, 1988년 후쿠모토가 은퇴한 것과 동시에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 매각되어 버렸고, 후쿠모토가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1991년까지 코치를 하면서 등번호를 그대로 쓴 데다가, 이후 오릭스에서 구단명과 연고지를 바꿈과 동시에 한큐 시절의 색채를 지우는 데 주력하면서 결국 영구결번이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엔 그래도 후쿠모토의 업적이 업적이다 보니 2000년까지 결번처리 되었다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이적한 신도 타츠야가 후쿠모토 본인의 허락을 받아 달기도 했다. 등번호값에 한참 못 미친 활약을 해서 그렇지. 야마다 히사시의 17번은 준영구결번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17번은 야마다가 은퇴하고 얼마 안 가서 다른 후배가 달았는데 그 후배가 일본인 메이저리거의 선두주자 중 하나인 하세가와 시게토시이다. 통산성적으로는 야마다와 비교가 안되지만 오릭스 재적시절에 시즌 두자릿수 승수를 4번이나 기록하며 95년 리그우승, 96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고 무엇보다도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간계투로 보직을 바꾸어 9년이나 버티면서 소속팀에서 인정밨았다는 점에서 물려받은 등번호가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했다고 할 수 있다.[6] 다만 스즈키의 경우는 구단 측에서 영구결번을 제안했으나 스즈키 본인이 거절했다.[7] 3번이나 파이널에 갔던 라쿠텐과 달리 우승으로 직행한 2021시즌이 되어서야 겨우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고,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한 2022 시즌 종료 기준으로도 라쿠텐 5회, 오릭스 4회로 여전히 진출 기록 수에선 밀리고 있다. 대신 CS 우승은 2021-22시즌에 연속 우승을 이뤄내며 2013년 우승이 전부인 라쿠텐을 밀어냈다.[8] 이 구단기 말고도 80년대에 구단 마스코트 브레이비와 후반기에 쓰던 로고가 그려진 빨간색 위주의 구단기가 병행해서 사용되기도 했다.[9] 여담으로 한큐가 다카라즈카 극장을 세운 방법과 똑같이 야구장 설계 초기부터 한큐 철도망이 지나가는 근처 부지를 잡고 지었다고 한다.[10] 그래도 중간에 간간히 A클래스를 5번(53, 55~56, 58, 64년) 기록했다. 반면 킨테츠는 69년 이전까지는 54년 딱 1번이 전부.[11] 1970년엔 롯데 오리온즈가 파리그 우승. 1973년엔 난카이 호크스가 전기리그 우승 후 플레이오프에서 이 해 후기리그를 우승한 한큐를 3승 2패로 누르고 파리그 우승.[12] 1975년의 일본시리즈 상대는 바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참고로 카프는 이 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루었으나 일본시리즈에선 한큐에게 전패(무승부 2번 포함)하는 바람에 우승에 실패했다. 히로시마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은 그로부터 4년 뒤 이룰 수 있었다.[13] 한큐는 이 해 12라운드에서 카도타 히로미츠도 지명했지만 이쪽은 한큐의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를 거친 뒤 다음 해 난카이 호크스에 지명되어 그곳에 입단한다. 카도타는 현역 말년에 다이에에 인수된 호크스가 후쿠오카로 떠나자 한큐를 인수한 오릭스 브레이브스에 입단하면서 뒤늦게 브레이브스와 인연을 맺었다.[14] 참고로 1968년 드래프트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드래프트 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스타들이 배출된 황금 드래프트로도 유명하다. 당시 향후 10년 넘게 지탱한 선수들이 한큐에서 많이 나와서 그렇지, 다른 팀들의 드래프티 면면도 대단한데, 타부치 코이치(당시 한신), 야마모토 코지, 미즈누마 시로(이상 당시 히로시마), 호시노 센이치, 오시마 야스노리(이상 당시 주니치), 아리토 미치요(당시 롯데), 히가시오 오사무(당시 니시테츠), 카네다 토메히로(당시 도에이) 등이 이 드래프트에서 지명됐다. 덤으로 이 해 토에이의 1순위 지명자였던 유격수 오오하시 유타카는 이후 한큐로 이적해 뛰어난 수비력을 가진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골든글러브 7회, 베스트나인 5회를 수상했다. 한큐는 자팀의 드래프트 지명 선수 외에도 이 드래프트로 정말 많은 걸 뽑아먹은 셈.[15] 다만 일본시리즈에선 센트럴리그 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78년엔 야쿠르트 스왈로즈한테, 1984년엔 9년 전에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3승 4패로 패했다.[16] 한국에서는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상 오릭스 같은 금융회사에 야구단 매각을 할 수 없지만, 일본에서는 가능하다. 다만 한국에서도 농구단이나 배구단같이 규모가 작은 리그의 팀 매각은 가능하며, 야구단 운영은 법적으로 안 되지만 스폰서와 명명권이 사용된 팀명까지는 가능하다.[17] 패미통의 표지 일러스트 담당이자,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 포포와 쿠쿠를 디자인한 마츠시타 스스무가 디자인했다. 참고로 브레이브스의 시절엔 마스코트로 오리가 모티브인 브레이비를 사용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호시노 센이치를 거르고 뽑은 1968년 드래프트 1순위 출신의 시마노 오사무가 이 시절부터 전속 슈트 액터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마노는 호시노와 달리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한 채 한큐로 트레이드되어 은퇴했지만, 은퇴 이후 오히려 브레이비-네피의 슈트 액터로 이름을 알리며 전화위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팀이 오릭스에 매각되고 고베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마스코트가 네피로 바뀐 후에도 1998년까지 계속 슈트액터를 맡으며 마스코트 연속 출장 기록까지 세울 정도로 나름 인기를 누렸다. 이후 구단 직원으로 일하다 병으로 퇴직 후 2010년 사망.[18] 오릭스 버팔로즈로 구단명을 바꾸고 오사카로 메인 연고지를 변경한 후에도 2008년까지 이 형태의 구단기를 사용했다. 물론 하단의 "블루웨이브(Bluewave)"는 "버팔로즈(Buffaloes)"로 변경.[19] 일본프로야구 용병 중 최고의 용병 반열에 거론되는 인물로, 1984년에 외국인 선수 최초의 타격 삼관왕을 수상했다.[20] 실제로 오릭스가 코베시로 연고지를 옮겼을 당시 새로운 구단명을 팬 투표로 공모했을 때 가장 많은 표를 받았던 이름이 오릭스 선더즈였다. 다만 이 투표 결과는 결국 반영되지 못했다.[21] 참고로 세이부도 승률 2리 차이로 3위를 기록했다. 이유는 하단 각주 참고.[22] 지난 해인 1988년 10월 19일 카와사키 더블헤더 경기에서 킨테츠에게 고춧가루를 뿌렸던 롯데 오리온즈가 이번에는 오릭스에게 고춧가루를 뿌렸다. 시즌 막판 6번의 맞대결에서 3승 3패로 동률을 차지하며 오릭스가 1리 차로 밀려나는 가장 큰 요인이 된 것. 여담으로 킨테츠는 같은 시기인 10월 12일 세이부와의 더블헤더에서 4연타석 홈런을 때린 용병타자 랄프 브라이언트의 활약의 힘입어 세이부를 2리 차이로 3위로 몰아내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이 해 일본시리즈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리버스 스윕을 허용하는 굴욕을 맛보며 우승에 실패했다.[23] 도이를 영입한 데엔 세이부 왕조를 꾸린 히로오카 타츠로, 모리 마사아키의 요미우리 출신 관리야구 감독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24] 당시 유니폼에는 '힘내라! KOBE'라는 패치가 붙어있었다.[25]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2001년 팀 사상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의 제물이 된 때도 이 때였다. 긴테쓰의 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2001년 9월 26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의 원정경기에서 9회 초까지 5-2로 앞서 있었으나 8회 도중 교체된 구원 투수 오쿠보 마사노부가 9회 말에 아웃을 하나도 못 잡고 안타→2루타→볼넷 크리로 만루를 허용했다가 9번타자 후루쿠보 겐지(그날 3타수 무안타)의 대타로 나온 키타가와 히로토시에게 세계 최초의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리그 우승 홈런을 얻어맞고 긴테쓰 좋은 일만 시켜줬다. 결국 오기 감독은 그 해를 끝으로 사임했다. 여담으로 당시 긴테쓰 감독은 공교롭게도 오기의 제자였던 나시다 마사타카였다(...).[26] 롯데 오리온즈,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용병으로 활약한 명선수.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흑인 감독, 메이저리거 데릭 리의 아버지. 여담이지만 수정 전 레론 리란 이름으로 적혀있었으나, 레론 리는 바로 레온 리의 친형이다(...). 참고로 이쪽도 롯데 오리온즈에서 장기간 활약을 펼친 명선수로 NPB 통산 타율 2위(.320) 기록을 갖고 있다.[27] 저 4 항목 모두 그 기나긴 NPB 역사상 최악의 기록이다! 이해 오릭스의 팀 평자는 12개구단 유일의 5점대(그것도 6점대가 될락말락한)에 나머지 NPB 11팀과 비교해 무려 1점 이상(!!!)이나 높았다(...). 심지어 이해 45승 94패, 승률 .324로 오릭스보다 훨씬 더 폭망한 센트럴리그 최하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도 팀 평자는 4.80으로 오릭스에 비교하기가 미안할 수준이었다. 이해 일본프로야구가 꽤나 심한 타고투저였던 걸 생각해도 한심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28] 투수진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물빠따 타선 때문에 울었던 2002년과는 정반대로 2003년엔 타선은 어느정도 나아졌지만 반대로 투수진들이 폭망해버렸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해 오릭스 투수진은 규정이닝을 소화한 투수조차 없었을 뿐더러 이들 중 평자 4점대 미만인 투수가 딱 1명밖에 없었다(...). 근데 그 1명이었던 시오미 다이스케는 3시합 등판, 2이닝 투구로 평균자책점 0점을 찍은 게 전부인지라...그러니까 그냥 선발이건 구원이건 나오는 족족 상대팀 타선에게 얻어터졌다는 말이다. 당연히 이렇게 얻어터지는 투수진이 제대로 승리를 챙길리가 없었으니, 10승 투수가 없는 건 물론이요 팀내 최다승조차도 구대성이 겨우 6승을 한 게 다였다. 그 구대성조차도 이해 시즌엔 승수보다 많은 8패 찍고 방어율 4.99로 망해버렸다. 그나마 잘 던진다는 투수의 성적이 그 정도일 테면 얼마나 투수진이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기록.[29] 첫번째는 6월 17일 이와테 현영구장에서 열린 지방 홈경기에서 6회까지 난타전을 벌이다가 7회에 10실점으로 제대로 얻어터지면서 21-11로 패배했고, 두번째인 7월 27일에는 후쿠오카 돔에서 다이에에게 32안타를 얻어맞으며 4회에만 벌써 1-19라는 충공깽스런 점수차를 보여주다가 7-26로 대패했다. 세번째인 8월 1일 경기가 압권이었는데, 야후 BB 스타디움으로 몰려온 고베의 홈 관중들 앞에서 투수진은 홈런만 7발을 얻어맞았고 야수들은 수비에서 4실책을 범했으며 타격에서는 스기우치 토시야에게 꽁꽁 틀어막혀 29-1로 떡실신 당했다. 경기 하이라이트 9회말에 1점을 내지 않았다면 역대 최다 점수차 완봉승 신기록을 다이에에게 허용하였을 상황이었다(현재 역대 최다 점수차 완봉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즈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상대로 기록한 0-26이다.).마지막인 9월 14일에도 8월 1일 경기와 마찬가지로 야후 BB 스타디움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3회까지 1-7로 앞서다가 4, 5회에 각각 7실점씩 도합 14실점이나 당하면서 20-11로 대역전패를 당했다.[30] 고바 타케시가 이끌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4승 2무로 탈탈 털며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9년 뒤에는 에이스 야마다 히사시가 3패를 당하며 오히려 역관광당했다.[31] 당시 모기업 다이에의 경영난으로 휘청대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치바 롯데 마린즈와 합병한다는 안이 있었다. 결국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다이에 호크스를 인수해 현재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어진다.[32] 당시 선수회 회장이 바로 후루타 아츠야였다.[33] 상술되었듯,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300승 투수 초혼(草魂) 스즈키 케이시의 1번이 오릭스에서는 본인이 원치 않아서 영구결번에서 해제되었다.[34] 2000~2005[35] 2006~2008[36] 서패스는 일본의 주택건설업체인 아나부키공무점의 맨션아파트 브랜드이다. 한국으로 치면 래미안 경산 정도 되는 네이밍 센스. 그러나 아나부키공무점은 이후 경영사정 악화로 부동산회사인 다이쿄에 인수되었다.[37] 구단주이자 라쿠텐 이글스 창단의 숨겨진 일등공신 및 이대호 박찬호 이승엽 데려오신 분인 미야우치 요시히코는 모기업이자 일본 최대의 리스 회사인 오릭스의 창업주로, 일본 재계에서 소문난 야구광이라 환갑이 넘어도 투수로 뛸 정도다. 그러나 2004년 프로야구 리그재편 문제 때 오릭스와 긴테츠의 합병을 주장해 선수협과 야구팬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2014년에 마이니치신문과 한 인터뷰에서는 당시 결산시점에서 12구단의 재무제표를 연결해 봤더니 총합이 적자였다고 하며, 야구를 흑자를 내는 비즈니스로 만들기 위해 리그개편이 필요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남겼으며, 지금(인터뷰 당시 2014년)은 10구단 체제가 아닌 12구단 체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오릭스가 흑자를 유지한다면 구단명을 기업명까지 뗀 '오사카 버팔로즈' 로 바꿀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남겼다. 여담으로 오사카 버팔로즈는 킨테츠 버팔로즈가 해산 전 쓰던 정식 구단명이었다.[38] 이게 명단을 보면 진짜 노답인게, 200-300만 달러를 받던 왕년의 30-40홈런 타자나 왕년의 1선발들을 전성기 몸값 그대로 데려와서 대타나 6선발 정도로 쓰다가 폭풍방출을 하는 일이 자주 보였다. 토니 블랑코나 브라이언 벌링턴 등...[39] 모회사 오릭스는 실제로 키움증권과 친해서 기업인수 관련 일을 같이 하기도 한다.[40] 물론 요미우리는 대량 먹튀 발생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41] 사실 야수 육성이 롯데와 함께 일본 최악이라 그렇지 투수 육성은 그 와중에도 괜찮다(...). 비슷하게 머니게임을 즐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투수 육성에 정평이 나 있고 야수 육성이 약점인 것과 비슷하다.쿄진 쇼콘과 오릭스의 돈질은 돈이 많이 나간다는 것 빼곤 전혀 다르지만[42]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투수는 부상도 많고 매일 등판할 수도 없고 컨디션도 많이 타는 등 로스터에 변동이 심하고 연장전이나 패전처리 등 유망주들이 끼여들 자리도 많아서 유망주에게 제법 기회가 돌아가는 포지션이지만 야수는 기본적으로 에브리데이 플레이어라 주전선수가 잘하면 매일 나올 수 있어서 2군 선수에게는 기회 자체가 안 가는데 또 야수는 투수에 비해 어지간하면 잘 다치지도 않는다. 그나마 기회가 좀 나는 자리는 포수나 유격수 정도인데 이나마도 투수에 비하면 턱없이 문이 좁다. 또 이렇게 한번 주전으로 자리잡으면 어지간해선 안 내려오니 FA취득도 빨라서 대형 FA는 비교적 야수가 많은 편이고 결국 비싼 FA 많이 사들이는 구단은 자연스럽게 야수를 많이 구입하게 된다. 이래서 미국이고 일본이고 돈질 많이 하는 구단들은 야수가 잘 안 큰다. 뉴욕 양키스도 투수진에는 양키스 팜 출신이 제법 되는 데 비해 야수진은 양키스 팜 출신은 저지와 안두하 딱 두 명이다.[43] 엄연히 오사카 시내이긴 한데, 인공섬이라는 특성상 2군 구장 주변에 놀 만한 곳도 없다. 다리 건너 USJ가 있긴 하지만 테마파크가 유흥을 즐기러 가는 곳은 아닌지라 오사카 시내에는 야구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44] 특히 선수 숙소의 경우에는 모기업의 노하우를 활용해 신축아파트 안 부러울 정도로 잘 지었다.[45] 하지만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후 다시 부활에 성공. 이후 라쿠텐, 요코하마에서 뛰며 2천안타까지 달성한다.[46] 사실 이적 첫 해엔 주전 중견수로 열심히 뛰었고 타율 자체는 .291로 좋았지만 문제는 세부성적. 홈런이 0개에 출루율 .321/장타율 .341로 OPS가 7할도 안되는 시원찮은 모습에 주특기였던 도루조차도 5도루 12도루자로 성공률이 30%도 안 되는 개막장스런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상 단타만 잘 치는 것 외엔 장점이 없는 똑딱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만약 감독이 킨테츠 시절 팀 선배였던 오오이시 다이지로가 아니었다면 진작 백업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이러니 수뇌진 측에서 공격, 주루 어느것 하나 기대에 못미치는 오오무라에게 기회를 줄래야 줄수가 없었고 결국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2010년엔 단 2타석에 그친채 결국 그해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면서 그대로 은퇴하고 말았다.[47] 자세한 분배 드래프트 방식은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 항목을 참조.[48] 특히 센터 내야는 블루웨이브에서 시오자키 마코토-고토 미츠타카-히라노 케이이치, 버팔로즈에서 아베 마사히로-미즈구치 에이지 등 양 팀의 주전 선수들을 모조리 데려와 포지션 적체가 생길 정도였다.[49] 이렇게 라쿠텐으로 보낸 선수 중 야마사키 타케시는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해 39세의 나이로 홈런왕까지 차지하는 회춘을 보여주며 오릭스를 제대로 엿먹였다. 이런 탈 오릭스 효과스러운 사례 말고도 블루웨이브 시절 우승의 주역이자 덕아웃 리더로 팬들의 지지를 받던 오오시마 코이치, 2000년대 초 투타 모두 막장가도를 달리던 오릭스에서 어떻게든 투수진을 지탱했던 카네다 마사히코, 오구라 히사시 같은 베테랑 선수들을 토사구팽한 것으로도 오릭스는 욕을 먹었다.[50] 말이 5위지 승률 .391로 전년보다 약 8푼이나 승률이 떨어져서 4할도 못 찍었다. 라쿠텐이 아니었으면 최하위를 찍었을 만한 성적.[51] 이후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뉴욕 메츠 감독을 역임하였다. 감독 취임 후 선수들이 주로 다는 배번인 1번을 달았는데 당시 주전급으로 올라서고 있던 고토 미츠타카가 1번을 어쩔수 없이 콜린스 감독에게 내주고 다른 배번을 달 수밖에 없어 논란이 있었다.[52] 여담으로 이때에 오늘도 졌다가 공개되었다.[53] 2010년엔 알렉스 카브레라마저 풀린다. 외국인 6명으로 운용이 가능할 뻔했으나 로즈가 재계약을 하지 못해 결국 카브레라로 돌려 5명으로 유지할듯 싶어보인다.[54] 그 사망한 메이저리거 투수 아니다. 2002년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그 페르난데스다.[55] 그 이후로 오제의 등번호인 41은 애도의 의미로 팀에서 사실상 준 영구결번이 되었으나 2020년 이후 외야수 사노 고다이가 사용하게 되면서 준영구결번은 해제.[56] 요코하마가 2000년대에 A클래스를 찍은 2001, 2005년 당시엔 센트럴리그에 CS가 없었다. 2007년부터 추가.[57] 3위 세이부는 68승 9무 67패(승률 .5037) 4위 오릭스는 69승 7무 68패(승률 .5036)[58] 이날은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고쿠보 히로키의 은퇴시합이었다.[59] 결국 홈런왕은 나카무라 타케야에게 돌아갔다.[60] (적어도 2010년대 이전까지)오릭스가 내보낸 선수들은 다른 팀에서 포텐이 터지거나 부진에서 벗어나 부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언급된 히라노도 그렇고, 보다 상징적인 사례로 긴테쓰 시절 40홈런을 치며 메이저에 도전했다가 LA 다저스에서 1년도 안되 폭풍 방출(...)된 뒤 오릭스에 돌아왔으나 부상과 구단과의 갈등으로 삽질을 거듭한 끝에 자유계약으로 풀린 강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가 있다. 2007 시즌이 끝나고 오릭스에서 방출된 그를 주니치 드래곤즈가 육성선수로 헐값에 데려갔고, 그는 그해 주니치에서 20+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하며 끝내 일본시리즈 MVP가 된다! 노리히로는 수년 뒤까지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주전 3루수로 활약하며 2013년에는 현역 통산 2000안타까지 달성한다.[61] 이토이의 FA 취득은 2017년에나 가능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최대 4년동안 쓸 수 있다.[62] 0.300/0.384/0.468 17홈런 61타점 75득점 33도루[63] 0.303/0.384/0.493 24홈런 91타점 60득점[64] 0.289/0.371/0.441 17홈런 91타점 60득점 1도루[65] 사와무라상 조건 7개를 모두 달성해서 다나카 마사히로보다 1개 앞섰지만 결국 다나카가 사와무라상을 탔다.투승타타[66] 시즌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부상으로 인해 2이닝 투구 후 교체됐다.[67] 1루수인 T-오카다가 다이렉트 캐치로 타자아웃, 1루를 밟아서 주자아웃,3루에 송구해서 3루주자 아웃. 헌데 1루심판인 요시카와는 1루앞에서 원바운드후캐치한걸로 판정했다.[68] 이 때 마신 고배를 8년 후 같은 날인 10월 2일에 그대로 갚아주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69] 참고로 2008년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2위로 올라와서 홈에서 3위인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탈락. 역사는 반복된다.[70] 1953년 난카이 호크스. 12경기. 퍼시픽리그는 개막 3연전에서 6팀 모두 단 한개의 홈런도 치지 못했다.[71] 센트럴리그의 과거 꿈도 희망도 없었고 클라이맥스도 경험하지 못했던 요코하마 DeNA가 2016년에 리그 3위를 기록하며 클라이맥스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위인 요미우리를 누르고 파이널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72] 1996년. 히로시마가 가졌던 종전 기록은 1991년.[73] 그래도 작년 꼴찌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거의 파리그의 독주무대인 교류전이란 걸 감안하면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는 데만 그친 셈(...).[74] 이 이전에도 2016년 한화 이글스 코치였던 니시모토 다카시가 닛칸스포츠 칼럼으로 오릭스 팀 내부 코치 배치전환을 비판하기도 했다.[75] 이 10만번째 홈런포에 함정이 있는데 사실은 본인이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친 홈런이 누의 공과가 돼서 취소가 된 덕분에 본인 바로 앞에서 홈런을 친 T-오카다의 홈런이 99999번째 홈런이 되고 100001번째 홈런이 되어야 할 자신의 홈런이 10만번째 홈런이 돼버렸다. 누의 공과라는 게 드물기는 해도 아주 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 그 누의 공과를 자신이 기록하면서 마치 의도한 것처럼(...) 10만번째 홈런의 영광을 T-오카다에게서 뺏어간 모양새가 돼서 그쪽 인터넷 상에서는 누의 공과를 노리고 한 게 아니냐는 농담도 나오고 있다.[76] 2010년 치바 롯데 마린스를 2010년 일본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리그 3위팀이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사례이며 언론은 사상 최대의 하극상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기린 바 있다.[77] 5위 롯데 534득점, 6위 라쿠텐 520득점으로 근소한 차이. 이 해 퍼시픽리그는 득점 순위와 리그 순위가 일치한 시즌이 되었다. 심지어 이 팀들은 투수가 타석에 서는 센트럴리그 최저득점 팀들인 한신과 요코하마보다도 50점 가까이 점수를 못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