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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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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 관등명 | ||||||||
장관 | 9주 | 5소경 | 차관 | 군 | 현 | ||||
<colbgcolor=white,#191919> | |||||||||
1. 개요
골품제(骨品制, Bone-rank system[1])는 신라의 신분제도이다.여기서 왕족은 다른 시대의 왕족들에 비해 말 그대로 '굉장히 확장된 의미의 왕족'이다. 조선은 부계혈통은 군주의 5대손, 모계혈통은 딸의 자녀, 즉 외손자 정도까지만 왕족의 일원으로 치는 정도였지만 신라에서는 둘 다 진골이고 내물 마립간의 직계 후손을 전부 왕족으로 간주했다. 성골은 신라 중대가 되면서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대가 끊겨 사라졌다.
이 중 6두품은 골층에서 분화되어 새롭게 등장하였고, 1~3두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차이가 없어져 평민으로 간주되었다고 추정된다. 다시 말해 3두품 이하는 역사적 기록이 아닌 학계의 추측이다. 기록이 아예 없기 때문. 당시 신라 사회에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거나 혹은 굵직한 사료나 역사적 기록에 남을 정도의 명망 있는 인물은 최소 4두품 이상은 되었다. 지방 토지나 호구 조사, 납세 등의 향토 기록이나 백성들의 실생활에서는 3두품 이하의 골품 개념이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할뿐이다.
처음에는 골 - 5두품 - 4두품 - 3두품 - 2두품 - 1두품의 6등급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성골 - 진골 - 6두품 - 5두품 - 4두품 - 3두품 - 2두품 - 1두품 순으로 8등급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성골이 소멸했으므로 진골 - 6두품 - 5두품 - 4두품 - 평민 순으로 5등급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2. 다른 신분제와의 비교
당시 고구려와 백제에도 신라의 골품제와 유사한 세분화된 신분제가 있었으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도 최고 귀족인 고추가와 대가, 소가 등으로 구분되었고 백제의 경우 역시 권력을 독점했던 최고 귀족층인 대성팔족의 기록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2]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7세기에 멸망하였기에 후대에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고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만이 그 기록이 고려대에 저술된 삼국사기를 통해 현대까지 전해지게 되었다.이런 강력한 신분제가 발생한 사유는 신라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신라가 경주시 일대를 지배하던 정도의 소국에서 차츰 커지는 과정에서 경주 주변의 진한과 변한의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게 됐고, 이런 흡수한 소국들의 옛 지배층을 등급화하기 위한 기준으로 시작된 것이다.
신라의 골품제가 고려 등 후대의 귀족제와 차이가 있다면, 귀족제는 보통 지배층과 피지배층 정도의 이원화 큰 틀 아래에서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단순화된 형태지만, 골품제는 같은 지배층끼리도 암묵적인 '급'을 넘어 명확하게 선을 그어 우열과 귀천을 명확히 했다는 정도. 정확히는 세계 어디나 귀족제에도 우열의 차이가 있기는 있다. 서양권만 해도 남작과 백작, 공작은 엄연히 급이 있었고 하위 귀족은 상위 귀족의 시녀 역할을 했으며 귀천상혼이라고 해서 결혼도 급에 맞춰서 했다. 신라 같은 경우는 피지배층까지 명확히 나누었단 것이다. 그러나 피지배층 끼리의 신분 우열은 지배층이 따로 개입하지 않는이상 실질적으로 별 의미가 없었다. 공부로 치자면 8등급이 9등급을 지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 후기에는 피지배층들끼리의 신분 우열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에 이른다. 이후 고려는 신분제가 간소화되어 비슷한 신분들끼리 차별하는 문화를 없애버렸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벌귀족이 권력을 독식하고 그 외 가문들은 과거 급제를 해도 요직에 진입하기 힘든 것처럼 급을 층층이 나누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암묵적인 개념으로서는 현대에도 각계각층에 이런 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신라 때 아예 규정으로 정해져 있던 것이 명목상 없어졌다는 것이 차이점. 옆나라 일본이 메이지 유신 전까지 관직별로 오를 수 있는 가문이 애초에 정해져 있던 것과도 비슷하다. 그런 일본사의 유일 예외가 평민 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근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공식적으로는 그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귀족에 양자로 들어갔다.
골품은 원칙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서울대 서의식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확정되는 신분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3] 대체로 골품제가 폐쇄적 신분제라는 데 의견이 모이고 있다. 그리고 골품에 따라서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 한계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수록된 소나나 죽죽처럼 진골, 6두품일 가능성이 낮은 지방인 출신임에도 진골이나 6두품만이 가능한 잡찬이나 급벌찬 관등을 추증받은 사례가 있는 걸 봐선, 적어도 죽은 뒤에 추증받는 건 생전보다 상위 골품의 관등이 가능했을 가능성도 있다. 죽고 나서 골품을 초월하는 모습은 김대성 설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적고, 기록이 간략해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다. 신라 하대에 내물왕계가 왕위를 독점한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무열왕계는 6두품으로 강등된다. 이처럼 골품이 떨어지는 경우는 확실히 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카스트끼리 완전히 분리해 규정하는 것과 달리 골품제는 상한선일 뿐이라서 하위 골품의 관등이나 직업을 상위 골품이 맡는 것은 가능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어릴 때부터 최고 관등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골품이 높은 사람이 신분이 낮은 사람이 주로 가지는 직업을 갖는 것도 제한이 없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의하면 분황사의 약사여래상 불상을 주조한 장인이 본피부의 강고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의 관등이 최소 5두품 이상인 10관등 나마였다.
3. 중위제
진급 상한에 6 ~ 4두품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일종의 특진제도인 중위제가 도입되었다. 6두품의 경우 아찬(阿飡) 이후 중아찬(重阿飡), 이중아찬(二重阿飡), 삼중아찬(三重阿飡),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 오를 수 있었고, 5두품과 4두품의 경우 각각 9중(대)나마, 7중나마까지 오를 수 있었다. 중위제를 통해 6 ~ 4두품까지의 불만을 다소나마 완화할 수 있었다. 중위제는 단지 관직은 그대로고 명목상의 직위만 높이는 식은 아니었다. 분명 대아찬 밑이었지만 대아찬이 이중아찬이나 삼중아찬을 함부로 다룰 수 없게 하는 효과는 있었기 때문이다.이 중위제도 신라 군주들이 진골들을 억누르기 위해 상당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어렵게 도입한 것이다. 물론 아찬은 제 아무리 오래 근무를 하든 능력이 우수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뭘 해도 진골 출신 대아찬보다 밑이었고 대아찬에게 숙이지 않으면 봉변을 당했으니 6두품들의 불만은 완전한 해소가 어려웠으나 이 제도가 생긴 후 경험이 모자란 대아찬이 경험 많은 아찬들을 함부로 못 다루게 하는 정도 효과는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 비교한다면 소위 아래 부사관 계급을 원사 상사 중사 하사로 구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갓 들어온 소위가 아무리 원사보다 공식적인 계급이 높더라도 그에게 함부로 하기는 어려운 것과 비슷했다.
4. 골품별 차이
골품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계층별로 세세한 제한이 있었는데, 흥덕왕 때인 834년, 입을 수 있는 의복, 수레의 크기와 끄는 동물이 몇 마리까지 가능한지, 집 크기, 장화끈 재질, 장화 색깔 등 생활의 모든 측면을 규정하기도 했다. 여자들이 사용하는 장식용 빗 재료까지도 엄중히 제한했다. 의관과 주거 등의 생활양식을 신분에 따라 제한하는 것은 신라시대 이외에도 전근대 봉건사회에서 모두 나타나는 현상으로 조선도 신분별로 집 크기, 의복, 가마 탑승 가능 여부, 탑승 가마 규모 등 온갖 세세한 것에 제한이 가해졌다. 신라의 경우는 다른 나라보다 좀 더 계층을 세세하게 나누고 체계적인 제한을 만들었다는 정도가 차이점이다.순기능을 찾자면 과소비를 방지해서 생산력이 미약한 농업경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은 있다. 삼국사기 잡지에 기재된 흥덕왕이 골품별 제한을 두는 교지(834년)를 읽어보면 흥덕왕의 이 조치 이전까지는 중하위 골품, 즉 하급 귀족부터 일반 백성층까지도 외래사치품 사용이 만연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興德王卽位九年 太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
흥덕왕 9년, 즉 태화(太和) 8년(834년)에 교지를 내려 말하였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손위와 손아래의 구분이 있고, 지위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법의 규정이 같지 않으며 의복도 다른 법이다.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을 좋아한 나머지 도리어 순박한 우리의 것을 싫어하니, 예절은 곧잘 분수에 넘치는 폐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삼가 옛 법전에 따라 명확하게 법령을 선포하노니, 만일 일부러 이를 어기면 진실로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릴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2 색복
흥덕왕 9년, 즉 태화(太和) 8년(834년)에 교지를 내려 말하였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손위와 손아래의 구분이 있고, 지위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법의 규정이 같지 않으며 의복도 다른 법이다.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을 좋아한 나머지 도리어 순박한 우리의 것을 싫어하니, 예절은 곧잘 분수에 넘치는 폐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삼가 옛 법전에 따라 명확하게 법령을 선포하노니, 만일 일부러 이를 어기면 진실로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릴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2 색복
골품별 제한을 만든 834년은 그 유명한 장보고와 청해진의 전성기로 해외무역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으며 이 교지 직전인 828년에는 한산주 표천현[4]에서 '자칭 빨리 부자가 되는 술법'으로 백성들을 현혹한 자가 등장해 처벌한 기록도 있어 돈이면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와 사기꾼이 활개치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제한을 만든 결과 일부 최상위 진골은 아예 집에 금을 씌우는 금입택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하위 골품의 사치는 억제되었다.
5. 성골과 진골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진덕왕(眞德王)조의 654년 03월(음)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까지 28명의 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이라 하였다.(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永校勘王, 謂之眞骨)." 단순히 이 기록만으로는 성골과 진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지만, 삼국유사에 '성골 남자가 없어 성골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어 같은 왕족 중에서도 왕위 계승권을 가진 계통과 그렇지 못한 계통이 따로 있었다고 해석된다.이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정해지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어 논란이 많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성골은 부모가 모두 성골(왕족)이고, 진골은 부모 중 한 쪽이 성골(왕족)이 아니라는 것이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 성골과 진골의 명확한 구별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양친이 왕족이면 성골이고 편친이 왕족이면 진골이라고 단순하고 확실하게 나눌 수 있다면, 진골 남녀의 혼인으로 나는 아들도 성골이니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즉위할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성골을 궁정 내에 거주할 자격을 가진 직계 왕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진지왕이 폐출되면서 진지왕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진골이 된다는 것. 소수설로는 비형랑과 관련해서,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을 비형랑으로 보는 설이 있다. 진지왕이 폐위된 후에 과부가 된 도화녀와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 비형랑, 김용춘이라는 것. 이 경우 비형랑 전설의 도화녀가 성골이 아니니 성골 + 진골의 조합으로 자연스럽게 진골이 된다.
6. 관등
서열 | 관등명 | 중시(령) | 도독 | 사신 | 시랑(경) | 태수 | 현령 |
성골 진골 | 이벌찬 | ||||||
이찬 | |||||||
잡찬 | |||||||
파진찬 | |||||||
대아찬 | |||||||
6두품 | 아찬 | ||||||
일길찬 | |||||||
사찬 | |||||||
급찬 | |||||||
5두품 | 대나마 | ||||||
나마 | |||||||
4두품 | 대사 | ||||||
사지 | |||||||
길사 | |||||||
대오 | |||||||
소오 | |||||||
조위 |
신라에서는 17관등이 있었으며, 골품에 따라 진급 상한선이 존재했다. 참고로 고려, 조선 시대의 품계가 사실상 18관등제이므로 신라의 17관등과 대략적으로 1대1로 매칭이 가능하다. 반대로 편의상 신라 관등을 2개씩 묶으면 고려, 조선의 품, 그리고 심지어 대한민국 공무원의 급과 비교하기 편리하고, 실제로 얼추 맞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라의 관등은 처음부터 17개의 관등이 존재한 것이 아니고 초기부터 존재한 관등이 12개로 정착되다가, 법흥왕 때 이르러 17개의 관등으로 정립되었다.
각 골품별로 색이 칠해져 있는 관직까지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진골의 경우 제한 없이 1등급 이벌찬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반면 6두품의 경우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6등급 아찬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 공란은 해당 골품이 임명되는것이 불가능한 관직을 의미하고, 칠해져 있는 색상은 실제 해당 관직에 종사하는 관리의 관복 색상이다. 각각 자색(紫色)/비색(緋色)/청색(靑色)/황색(黃色)이다.
즉 성골과 진골이라고 해서 대아찬부터 시작하거나 6두품이라고 급벌찬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높은 골품이라도 낮은 관등부터 공직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관복색(色)도 또한 신분(골품제)에 관련 없이 무조건 재직 중인 관직에 맞게 착용해야 하였다. 물론 골품이 높을수록 승진 속도가 빠르고 동 관등 내에서도 요직에 등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위가 설정된 관등은 아찬·대나마·나마의 관등이었다. 아찬에는 중아찬(重阿飡), 이중아찬(二重阿飡), 삼중아찬(三重阿飡),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 설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6두품들 사이에서의 구분일 뿐 그래봐야 진골들의 대아찬보다는 낮았다지만, 그럼에도 대아찬이 중아찬이나 이중아찬 등등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게 하는 나름의 효과는 있었다. 5두품 역시 대나마가 끝이라 대나마 안에서 중나마(重奈麻)에서 구중나마(九重奈麻)까지 9등급 체계였는데 역시 마찬가지 논리였다.
하지만 중위제의 설정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는데, 아찬·대나마·나마의 관등에 설정된 중위제가 동시기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한 시기에 한 관등에만 적용되었다는 주장이다. 법흥왕이 17관등을 정비하기 이전에는 12관등과 나마에 중위제가 설치되었는데, 법흥왕 때 17관등제가 정비되고 나마 관등이 나마와 대나마로 분화되면서 대나마에 중위제가 설치되었다. 그 근거로 법흥왕 7년 이전과 이후에도 대나마에 설치된 중위의 이름이 '-중나마'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나마와 대나마의 중위가 똑같이 존재했다면 이름이 서로 달라야한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 시기에 한 중위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찬 중위제가 생겨난 것은 기존의 간군인 골층과 비간군인 5두품 사이에서 6두품이 새롭게 등장하여, 대나마의 중위제를 무시되고 간군 관등이 6두품에게 수여되었다. 이 때 골층에서 분화되어 형성된 진골층은 6두품의 진급을 막기 위해 아찬 중위제를 마련하였다. 이로 인해 대나마의 중위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사족으로 위와 같은 견해에서 보면, 골품제의 본래 목적은 족장 출신의 간군인 골과 실무 관료 출신인 비간군의 두품을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법흥왕 7년 이전 12관등만 존재했을 때에는 비간군 관등의 최고 관등인 나마에 중위제가 설치되었고, 17관등이 마련되고 나서부터는 대나마에 중위제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골층의 분화로 인해 진골과 6두품이 형성되면서, 원래 간군 관등이었던 아찬~급찬 관등은 두품층이 진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진골은 두품층과 구별하기 위해 아찬 중위제를 실시하였고, 이벌찬~대아찬 관등은 진골 관등으로서 진골이 독점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등 기록에서는 관등을 보고 이 사람이 진골인지 6두품인지 추적을 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 왕족 안승이나 발해왕 대조영을 신라 측에서 진골 취급해 줬다는 건 하사한 관등(소판, 대아찬)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6.1. 초창기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하교자 명단 (서기 503년) |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하교자 명단 (서기 524년) |
사탁부 지도로 갈문왕(至都盧 葛文王) 사탁부 사덕지 아간지(斯德智 阿干支) = 아찬 사탁부 자수지 거벌간지(子宿智 居伐干支) = 급벌찬 탁부 이부지 일간지(尒夫智 壹干支) = 일길찬 탁부 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 = 급벌찬 본피부 두복지 간지(頭腹智 干支) 사피부 모사지 간지(暮斯智 干支) | 탁부 모즉지 매금왕(牟即智 寐錦王)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徙夫智 葛文王) 본피부 무부지 ▨간지(巫夫智 ▨干支) 잠탁부 미흔지 간지(美昕智 干支) 사탁부 이점지 태아간지(而粘智 太阿干支) = 대아찬 사탁부 길선지 아간지(吉先智 阿干支) = 아찬 사탁부 일독부지 일길간지(一毒夫智 一吉干支) = 일길찬 탁부 물력지[5] 일길간지(勿力智 一吉干支) = 일길찬 탁부 신육지 거벌간지(愼肉智 居伐干支) = 급벌찬 탁부 일부지 태나마(一夫智 太奈麻) = 대나마 탁부 일이지 태나마(一尒智 太奈麻) = 대나마 탁부 모심지 나마(牟心智 奈麻) = 나마 사탁부 십사지 나마(十斯智 奈麻) = 나마 사탁부 실이지 나마(悉尒智 奈麻) = 나마 |
포항 냉수리비(503)와 울진 봉평리비(524)는 판결문으로, 포항 냉수리비는 어느 지방 유력자의 재산분배 판결을 담고 있으며 울진 봉평리비는 북변 요충지 거벌모라에서 발생한 실화(失火)로 인해 빚어진 요소에 대해 현지 유력자를 문책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사건을 판결한 하교자의 명단으로 포항 냉수리비는 당시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 및 6인이 하교자이며 울진 봉평리비는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과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 및 12인이 하교자다.
이때 하교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건 탁부의 매금왕과 사탁부의 갈문왕이며 하교자의 다수가 탁부와 사탁부라는 점에서 당시 탁부와 사탁부가 6부의 주도권을 쥐었음을 보여준다. 포항 냉수리비에서는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이 신라 왕인데 왜 이후 울진 봉평리비에서는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이 신라 군주냐는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한 학계의 설은 본래 마립간이 탁부의 매금왕이었지만 지도로 갈문왕이 사탁부의 갈문왕으로서 6부의 수장 자리를 빼앗고 이후에는 신라 6부를 초월한 대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증왕 사후 두 아들이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과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이 되었고 사부지 갈문왕의 아들이 진흥왕이다.
이때 비석의 특징은 반드시 소속 부를 명시한다는 점이다. 이때 신라는 아직 중앙집권이 안 돼서 해당 부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하교자 명단에서 매금왕과 갈문왕을 제외한 나머지 하교자들 중 탁부와 사탁부가 1대 1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탁부와 사탁부가 6부의 실세로서 균형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부체제는 연맹왕국 같지만 명백히 서열이 나누어지고 가장 강한 부의 대표가 나라의 군주였다. 이는 3세기 고구려가 5부였음에도 왕위는 소노부에서 빼앗아간 계루부가 독점한 점에서 드러난다.
포항 냉수리비가 세워진 시점(503년)은 아간지(아찬)가 최고였고 울진 봉평리비가 세워진 시점(524년)에 와서 아간지의 상위로 태아간지(대아찬)가 분화되어 최고 관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법흥왕 때까지 17관등은 완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其官名, 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吉支·奇貝旱支.
(신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 제한지(齊旱支), 알한지(謁旱支), 일길지(壹吉支), 기패한지(奇貝旱支)가 있다.
《양서》 권54 〈신라열전〉 中
그러나 중국 측 사서인 양서에서는 이미 6세기 전반에 이벌찬을 비롯한 몇몇 고위 관등이 완성되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양서에 실린 신라 관련 정보는 521년 양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을 통해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상술한 울진 봉평리비가 건립되기 불과 3년 전이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봉평리비의 내용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해당 비문에서는 교시를 내린 인물들의 관등을 기록하고만 있을 뿐 대아찬이 최고 관등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법흥왕 대의 최고 관등에 관해 섣불리 단정지을 수만은 없는 셈이다.(신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 제한지(齊旱支), 알한지(謁旱支), 일길지(壹吉支), 기패한지(奇貝旱支)가 있다.
《양서》 권54 〈신라열전〉 中
하지만 양서의 기록 역시 이찬과 파진찬에 해당하는 관명은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흥왕 치세에 관등 체계가 완성되었다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보아, 17관등의 등장은 골품제와 연관이 깊으므로 진흥왕~진평왕 시기 사이에 같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금석문 상에서 이찬, 파진찬에 해당하는 관등은 550년경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에서부터 나타나며, 이벌찬과 잡찬은 561년에 설치된 〈창녕 척경비〉에서부터 등장한다.
6.2. 고구려인, 백제인에 대한 적용 기준
삼국통일 직후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을 대거 신라 사회에 편입하면서, 신라와 관등 시스템이 다른 두 나라의 고유 관등을 신라 관등에 대응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대부분 삼국사기 직관지의 기록인데 빠진 부분도 많다. 그리고 아래 대응은 귀순 초기 기준이고, 황산벌 전투에서 항복한 좌평 충상이 처음엔 일길찬인데 아찬까지 올라가거나 백제멸망전에서 백제를 배신한 달솔 자간이 일길찬까지 올라간 걸 보면 공을 세우면 추가 승진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서열 | 신라 관등명 | 고구려 관등 | 백제 관등 |
성골 진골 | 이벌찬 | ||
이찬 | |||
잡찬 | 왕족(안승) | ||
파진찬 | |||
대아찬 | 왕족(대조영, 명목상) | ||
6두품 | 아찬 | 1.좌평(佐平) | |
일길찬 | 2.주부(主簿) | 1.좌평(佐平) | |
사찬 | 4.대상(大相) | ||
급찬 | 5.위두대형(位頭大兄) | ||
5두품 | 대나마 | 2.달솔(達率) | |
나마 | 7.소상(小相) 8.적상(狄相) | 3.은솔(恩率) | |
4두품 | 대사 | 10.소형(小兄) | 4.덕솔(德率) |
사지 | 11.제형(諸兄) | 5.한솔(扞率) | |
길사 | 13.선인 | 6.나솔(奈率) | |
대오 | 14.조의 | 7.장덕(將德) | |
소오 | 14.조의 | ||
조위 |
7. 변화
이런 폐쇄적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선덕여왕 대에는 성골 남자의 씨가 말라버렸고 이 탓에 신라 최초로 여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선덕여왕의 사촌 진덕여왕 이후 최초로 진골 출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다. 그 후로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300여년간 줄곧 진골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수능이나 한능검을 공부한 이들은 알 수 있겠지만, 신라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왕족의 수도 꾸준히 많아지다보니 진골의 개념도 다른 왕조의 일반적인 왕족이라는 뜻보다는 일반 귀족 중 최상위 클래스라는 의미에 가까워졌다. 단적인 예가 신라 후대 왕위를 장악하는 내물왕계열의 진골 귀족들이다. 통일 신라 하대에 임금 자리를 놓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무열왕계와 내물왕계는 모계로는 9촌의 관계지만 직계로는 세대를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멀었다. 혜공왕은 지증왕의 10대손, 원성왕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의 8대손이므로 혜공왕과 원성왕은 최대 18촌이다. 이 정도면 통혼해도 근친혼으로 보지도 않을 수준. 때문에 이후 시대라면 그냥 남남이나 다름없고 전혀 경쟁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그 숫자도 진골이 다른 왕조의 왕족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무열왕계가 대권을 쥐고 있을 당시에는 왕권 강화와 진골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수 등 6두품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도 했으나, 내물왕계가 왕위에 오르고 무열왕계가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와 6두품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왕권도 약해지면서 이런 노력들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결과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진골 귀족 간의 치열한 왕위 다툼으로 번지게 되었다. 최후의 승리자인 원성왕마저 정작 자신이 임금이 되고 나선 무열왕계가 부딪혔던 현실을 뼈저리게 인식한 나머지 진골들의 횡포를 막고 6두품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온갖 정책들을 고안해냈을 정도로 왕권 신장에 열을 올렸다. 그나마 신라의 체제를 골품제의 한계 내에서 나름 어떻게든 손질해서 후세에 물려주는데까지는 갔지만, 끝내 장보고의 성장이 신호탄이 되어 그 다음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골품제 탓에 쌓인 신진 지방 세력들의 분노가 결국 후삼국시대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골품제 자체는 원래의 통일신라 영토만 한정하면 무색해졌다고 하지만, 이미 통일신라의 영역 자체가 해가 갈수록 크게크게 줄어드는 판국에서 이런 얘기는 나름 일리는 없진 않되 진지한 이론으로 보긴 어렵다. 여하튼 신라의 힘이 미치는 지역 내에서 골품제는 견고했으니까. 또 다른 우스개를 들어보자면 이 상황에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진골들과 6두품들의 비중은 대단히 높아져서 역설적이게도 신분제 자체의 모순은 쇠퇴 일로에 있는 신라 기준으로 봐도 상대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된다. 5두품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 왕실의 말을 듣지 않는 진골들과 6두품들이 죄다 신라에서 빠져나가 버렸으니.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냥 하는 우스개지 진지한 이론은 아니다.
사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관등은 외위제(外位制), 즉 중앙의 골품과 지방의 골품을 차별하는 제도에 근거해 옛 고구려의 지배층에는 7등급, 백제의 지배층에는 11등급 이상의 벼슬을 제한하는 차별적인 정책을 실행한 것도 치명적인 실책이긴 했다. 골품의 경우 고구려계는 6두품, 백제계는 5두품으로 그 골품의 상한선을 제한시켰다. 실제로 망국의 옛 지배층들이 벼슬길에 오른 기록도 별로 없고, 중앙 경주의 진골이나 6두품만이 대부분의 중요 직책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통일신라 이전 삼국시대 때의 신라에서는 의외로 지방민에 대한 대접이 당시 기준으로는 괜찮았는데, 단양 신라 적성비나 삼국사기의 여러 열전에서 지방민들이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남은 가족들이 경위를 받고 좋은 대우를 받는 기록이 여럿 있다. 적어도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경쟁하는 고구려나 백제의 지방민 대우에 비해 크게 딸리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의 지방민 차별이 3국 중 혼자만 특별히 더 심했다면 국경지대의 지방민들이 당연히 신라를 버리고 고구려나 백제에게 협력하지 신라에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을테니. 고구려나 백제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도 좀 더 강고하고 느슨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출신 가문만으로 많은 것이 좌우된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개념은 다들 존재했다. 중국의 경우 문벌귀족(중국) 문서로. 심지어 일본은 신라 멸망 후 900여년이 지난 19세기까지도 출신 가문에 따라서 조정에서 관직 진출의 상한선이 공식적으로 있었다. 물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헤이안 시대 말기와 가마쿠라 막부기를 거쳐 지방호족과 무사들의 권력이 중앙 귀족들의 권력을 압도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세를 떨치려는 호족과 고위 무사들은 왕실과 중앙귀족들에게 재물을 상납해서 작위를 얻거나, 혹은 귀족들과 결혼하거나 양자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가문의 격을 높이려 했으며, 밑바닥 하인에서 관백으로 출세하기로 유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관백이 되기 위해서 명문가인 코노에 가문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러다 삼국통일전쟁을 거치면서 공을 세우는 지방인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이들이 특례로 경위를 지급받는 경우가 늘어나 경위와 외위의 구분이 점차 없어졌고, 외위는 674년(문무왕 14년)에 폐지됐다. 일단은 예전엔 귀하던 경위를 지방민들도 똑같이 받게 된 것이지만, 모두가 받으니까 기존의 희소성은 사라지게 된다. 고대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진나라에서는 전국민에게 20개 등급의 작위를 할당하는 이십등작 제도가 있었다. 원래는 아무나 받을 수 없었던 이십등작을 전한 때 막 뿌리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흔해진 작위에 별 가치를 두지 않게 되어서, 전한 후기쯤 가면 20등작 중 가장 높은 관내후와 열후 정도나 이름이나 남지 그 외에는 취급도 안 해주게 된다. 그리하여 외위에서 경위로 올라가는 일종의 신분 특진이 사라졌는데 새로운 신분상승 제도는 없으니 완전히 고착화된 것이다.
외부 인사로 신라에서 최상급인 진골을 받은 것은 기록상 3가지 경우였다. 물론 기록 누락이나 다른 이유로 더 있었는데 기록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가야의 마지막 군주인 도설지왕도 단양 신라 적성비나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서 8위 사찬에 오른 기록을 통해 진골 혹은 6두품을 받은 정황을 볼 수 있지만, 결국 진골만이 승진 가능한 대아찬 이상의 관등까지 오르지 못한 채 기록에서 사라졌기에 진골인지 불확실하다. 도설지왕 문서로.
외부 인사로서 진골을 받은 경우는 다음과 같다. 금관가야의 왕실이 구형왕의 항복 이후 진골에 편입되었는데 구형왕은 최고 관직인 상대등이 되었고, 이것이 김유신의 가문이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던 고구려 왕족 출신 안승이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왕의 직책을 받으면서 진골이 된다. 마지막으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이후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는데, 이때 신라가 사여한 벼슬이 대아찬으로서 진골의 품계이니 대조영을 진골로 인정한 경우가 된다. 다만 마지막은 명목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안승 가문은 이후에 반란 일으켰다가 아작났다. 안승 본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평민 출신으로 진골이 된 소나가 있는데 이는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다 전사한 후 진골인 잡찬이 추증된 경우지만 이런 경우는 소나가 유일무이하다.
애초에 골품제도는 신라의 왕경인 서라벌 즉, 지금의 경주시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철저한 수도 중심편제가 된다. 대등들이 참석하는 화백회의는 사실상 종친회의였다. 그나마 신흥 세력이라는 김유신&김춘추 계열도 일단 진골은 진골이다.[7]
심지어 당나라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온 최치원조차도 6두품이라는 신분 때문에 한계에 부딪혀야 했다. 최치원이 쓴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은 눈여겨봤지만 결국 진골 귀족들에 의해 무시당했고 그 일로 완전히 좌절한 최치원은 관직에 물러나 은거하게 된다. 사실 시무 10조 중에 진골귀족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포함된 것을 생각하면 강제로 '은거당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치원에게 6두품의 한계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만으로 최치원의 말년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최치원이 시무 10조를 올린 것은 진성여왕 시절로, 이후 최치원은 6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최치원이 벼슬을 물러난 것은 효공왕 시절로, 이 와중에도 진성여왕의 양위와 효공왕의 즉위를 당나라에 알리는 국서를 작성하는 등 할 건 다 했다. 자세한 것은 최치원 항목으로.
어느 정도 지방에서 세력을 잡고 있으며 실력도 있었지만 승진이 제한되던 6두품 측에서 항의를 많이 했으며, 나라 망치는 제도라고 폐기하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진골 귀족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결국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신라 하대부터 중앙의 통제가 미치는 경주 일대를 제외하고 제대로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진골들에게 차별받던 신진 지식층인 6두품들이 호족과 군벌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만들어, 신라 멸망의 으뜸가는 원인이 되었다. 신라를 흡수한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군 사찬 즉 6두품이었다. 물론 중앙귀족이 아니기에 지방세력가에게 6두품 취급해준 것으로 보인다.
골품제는 결국 신라가 망하고 나서야 완전히 없어졌다. 왕족-호족-양민-노비의 4원 체제는 딱히 없어지지 않았지만, 골품제보다 신분의 유동이 비교적 활발했다. 반면 골품제의 진골 신분 경우에는 집권층끼리 싸우다보니 내려갈 일은 있었을지언정 올라갈 일은 통일신라 이후로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통일신라 이전에 왕통을 잇는 성골의 단절만 놓고 봐도, 골품제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폐쇄성이 심하게 두드러졌다. 성골의 소멸 이후 진골이 왕실 혈통으로 맥을 이었지만, 그마저도 진골 내에서 분화가 일어났다. 8세기 중후반 이후 왕실과 혈연적으로 멀어진 진골층이 두품층처럼 관료층으로 변화하였고, 진골세력 간 다툼이었던 왕위쟁탈전에서 공을 세운 6두품은 아찬 중위제의 제약을 넘어선 관등을 받았다.
이렇게 왕실에서 멀어진 진골과 6두품 중 공을 세워 아찬보다 높은 관등을 받은 자들은 득난(得難)이라는 새로운 신분 계층을 형성하였다.[8] 9세기 말이 되면 진골은 규모가 작아진 왕족을 넘어서 왕실만 지칭할 정도로 그 범위가 상당히 축소되었다. 왕통과 연결된 최고 귀족들이 자멸해서 사라지는 진귀한 기록을 남겼으니 어떻게 보면 막장이다. 스파르타도 1계급이 사라질 것 같으니까 다른 계급에서 인구를 가져왔다. 성차별은 어쨌든 전근대시대에는 보편적인 개념이었지만, 신라는 그것도 뛰어넘어서 성골 여자가 진골 남자보다 군주감으로 낫다고 볼 정도.[9]
비담의 난도 표면상의 이유는 남자가 아닌 여왕의 통치를 반대한다는 것이었지만, 골품제의 모순이 근저에 자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골품제는 신라의 왕권강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귀족 세력의 힘을 충분히 억제하여 나름의 중앙집권화에 이바지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쨌건 신라 초기에는 소수 귀족층의 강한 결집을 통해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순기능을 발휘했으며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특색이기도 하다. 당장 신라와 경쟁했던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비해 신흥귀족과 지방호족들이 중앙정계에서 활약하기는 수월했지만,[10] 그 대신 내분이 일어나는 빈도가 당시 신라보다 훨씬 잦았다. 특히 백제의 경우에는 왕권강화를 위해 왕비족을 다변화하는 식으로 귀족가문들의 힘을 분산시키려했지만, 이는 성공적이지 못하여 정변이 자주 일어나는 등 취약성이 강했고, 고구려는 백제수준으로 왕권이 취약한것은 아니었지만 642년의 정변 이후로 보장왕이 연개소문의 도움으로 왕이 되면서 연개소문을 비롯한 연씨 가문이 실권을 가져가는 형태로 국가가 운용되었는데 연개소문 생전에는 당나라를 막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연개소문이 사망한 이후로 보장왕이 연씨일가의 내분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결국 고구려가 멸망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부흥운동 실패까지도 권력층의 내분이 컸다. 신라는 비담의 난 등 몇몇 사건 외에는 상대적으로 내분으로 나라가 격렬하게 흔들린 경우는 적었고, 막대한 군공과 군권을 쥔 김유신을 본국에 남겨두고 김춘추가 고구려, 일본, 중국을 직접 바다를 건너 왔다갔다할 정도로, 권력구도가 안정돼 있고 권력자들 간에 상당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외부의 직면한 적이 사라진 통일신라시대 이후 몇백 년을 거치면서 사회의 역동성을 잃고 본격적으로 모순이 드러나 망국으로의 길을 재촉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계엄령처럼 전시에는 훌륭한 내부 단속 체제였지만 전시가 끝나고도 해제하지 못하여서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비슷하게 전시 기구를 해체하지 않아서 국가에 부담을 준 제도는 조선시대의 비변사가 있다. 비변사가 최고 국정운영기관이 됨으로 비변사를 장악한 소수관직만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국정장악이 가능해지면서 조선의 관료제가 제기능을 못하게 만들었다.
국가의 내재된 능력으로 체제를 바꿀 수 있었다면 900년을 넘는 것으로 알려진 신라의 역사가 더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 어쨌든 이렇게 개혁을 거부하고 골품제도에 집착해온 신라는, 결국 후삼국시대에 가서 나라 전체가 후백제와 후고구려, 고려, 기타 호족 세력들로 갈라지게 된다. 후삼국 분열 이후 이들에게 영토들을 다 뜯기게 된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뒤늦게나마 골품제의 벽을 일부 개방했다는 주장도 있다. 부산대 전기웅 교수는 소판 왕지본, 잡찬 소충자 등 성씨로 보아 진골이 아닌 후삼국시대의 지방세력가가 진골의 관등을 가지는 것들이 자칭이 아니라, 진성여왕대에 지방 통치 제도를 개혁하면서 도독과 태수를 파견하는 통일신라식 직접 통치 대신 지방의 실력자를 지주제군사로 임명하고 명목상 인정하는 당나라식 간접 통치로 전환하고 그 지주제군사에게 진골의 위계를 정식으로 수여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당나라 유학 당시 고병 휘하에서 지주군주사를 충분히 경험한 최치원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았다. 최치원은 자신의 저작에서 당의 지주군주사 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다만 신라 멸망까지 완전한 개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통설이고, 이런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 문제.
결정적으로 927년 견훤의 경애왕 시해로 신라 조정의 위상이 더욱 떨어진 상황에서 930년 고창 전투로 인해 미묘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지고 대세가 고려로 정해지자, 그나마 남아있던 경상도 일대의 친신라적 호족들이 죄다 고려에 항복해 버려 실효 지배 영역이라고는 수도 서라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내 역사 교과서나 한국사 관련 서적에 실린 후삼국시대의 신라 지도들을 보면, 경상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반도 영토들을 잃고 수도 서라벌과 경상도 일대들만 통치하는 면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도 후삼국시대 초중기의 이야기지, 후삼국 시대 후기 약 5년간은 수도 서라벌(현 경주 시)을 제외한 다른 경상도 지역 영토들마저 지방 호족들과 후삼국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한반도 내 주도권을 고려가 완전히 차지하게 된 이후에는 수도 서라벌만 지배하는 더 조그마한 소국으로 전락했다.
경애왕은 전장도 아닌 수도 경주의 포석정에서 후백제군의 침공을 받아 살해당하고, 후백제군에게 살해당한 경애왕의 뒤를 이은 경순왕은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가 없어 결국 신라를 통째로 넘기고 경주의 사심관 자리를 얻음으로써 신라 천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 사심관이란 것이 말이 관리이지 실상은 현지의 폭동을 막기 위한 볼모 내지 인질의 의미에 가깝다. 후한의 관내후와 비슷했는데 조조는 마초의 반란을 막으려고 마등에게 관내후 자리를 주게 하여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그래도 고려 시대에 신라 왕실 본가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 왕가의 중시조인 현종부터가 신라 왕실의 혈통을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신라 왕실 출신 이외에 정신 못 차리고 골품제를 고수하던 진골 귀족들 같은 경우, 고려시대에 일단 경상도 일대의 향리로서 나름대로의 기득권은 보장받을 수 있었으나, 시류를 약간 잘 타서 조금 일찍 고려의 관리가 된 옛날의 6두품들 앞에서 대단히 입장이 깎이는 수모는 참아야 했다.
과거 신라 왕실의 일원이자 귀족의 최고점으로 어딜가나 대접받으며 수도에서 떵떵거리던 진골 귀족들이, 이젠 고려 3경이라고는 해도 지방의 대도시 정도로 격하된 경주에서 대접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개경 중앙 귀족의 눈치를 봐야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김원충, 김경용처럼 고려 치하에서도 옛 신라의 진골 귀족들이 문벌귀족으로 성장하기도 했고 김부식의 조상인 김위영처럼 경주에 남아서도 명문가 지위를 유지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모든 옛 진골 귀족이 김부식 가문처럼 현달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고려가 호족연합국가적인 면모에 귀족 국가였다고 해도, 지방 호족이 된 과거 진골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경주 최씨 등 과거의 5~6두품들에 비해서는 딸리는 입장이었다. 경주에 남아 향리가 된 자들의 이러한 불만은 결국 신라부흥운동으로 표출되지만, 고려 정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아 부흥운동의 주동자들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유배되거나 참살당하면서 고려 왕조 시대에 일어났던 신라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단 모든 신라 진골이 이런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신라 진골들도 시대가 가면 계층이 분화되어 상당수는 고려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진입하고 그러지 못했던 가문은 김부식 가문 등 일부 명문가를 제외하면 중앙 권력과 멀어진 지방 향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전자와 후자의 비율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후자의 경우가 많았을 거라고 짐작할 뿐. 이들의 불만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며, 부흥운동은 먼 훗날의 누군가가 '당위성'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영 거리가 먼 원인에서 탄생함을 눈여겨 봐야 한다. 고구려와 백제, 발해의 부흥운동의 입장에서 외세는 당나라나 거란 뿐만이 아니라 신라 또한 외세 중의 하나였다. 같은 삼한 중 하나란 인식은 있었으나, 여하튼 외국은 외국이었던 것. 경순왕이 평화적으로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면서 평화롭게 고려에 흡수되었으나, 기득권을 빼앗기면서 대대로 하위층으로 내려앉은 진골들이 과연 이러한 것을 납득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들은 신라 멸망 이후로 옛 신라 지역 출신 고려인들 중, 고려 왕조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부류가 되었기에 망한 나라를 꼭 부흥운동을 일으켜서 되살려야 된다는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후세인의 입장에서 보는 당위성 운운 문제가 아니라,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체제에 충성하는 지방민을 조직적으로 육성해서 진압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신라는 그러지 않았다는 차이였을 뿐.
이러는 와중에 최씨 무신정권 이후로 무신정권의 막바지까지 김양경, 김경손, 김방경같은 신라 왕족 후손들의 분전도 있었는데 김양경은 강동성 전투로 대활약하고 김경손은 귀주성전투로 횔약하고 김방경은 몽골군, 삼별초군, 일본군과 전투로 대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김경손은 숙청당해 죽은 비운의 장군이 되었고, 김방경은 모진 고초 속에서 장수한 장군이 되었다. 김양경 또한 조충과 더불어 홀대받은 문관 중 하나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관련해서 좀더 복잡한 사정이 나오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필사본 화랑세기라는 물건 자체가 위서 의혹이 있어 주류학계에서는 배제된 상태다. 화랑세기를 참고한 드라마인 선덕여왕에서도 이 골품제 관련 묘사가 나오는데 천하의 미실조차도 성골 신분을 내세운 즉위 전 선덕여왕에게 어디 감히 성골의 몸에 손을 대느냐는 일갈을 당하고도 아무 말 못하는 수모를 당한다.
창작물에서 골품제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한 것으로 드라마 화랑이 있다. 비록 물질적 고증은 완전히 포기한 드라마지만, 골품제에 관해서는 상당히 비중이 큰데 서로 다른 골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반쪽으로 불리며 차별을 받는 등의 묘사가 많이 나온다. 다만 드라마 후반부에 주인공 무명이 사실은 성골이었다는 부분은 골품제 시스템상 설정 오류다. 휘경공은 다리에 장애가 있어 성골에서 족강당했다는 설정인데, 휘경공이 이미 성골이 아니므로 휘경공의 아들인 무명도 성골일 수가 없다.
8. 기타
8.1. 비유적 표현
학교에서 배우는 신분제 관련 용어인데다가 상당히 자세하므로, 신분제처럼 구별을 할 때 골품제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일이 많다.8.1.1. 스포츠에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요미우리에서 20년을 뛰고 선수생활 막판에 1~2년 정도 다른 팀에서 뛰어도 인정을 못 받고 선수생활 내내 요미우리에서만 뛰다 은퇴를 했더라도 코치생활을 다른 팀에서 한 경우도 순혈로 인정 못받는다. 다른 팀에서 선수나 코치로 근무하다가 감독에 취임한 OB는 1981~83년, 1989~92년 두 차례 감독을 역임한 후지타 모토시가 유일하다.
- FC 바르셀로나 -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팀으로서의 자존심이 높은 데다가 유스가 워낙 발달해서 유스 출신이 아니면 푸대접 받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팀에서 뛰는 유스출신이 잘 하면 DNA 드립을 치기도 한다. 메시, 차비 등은 성골, 파브레가스는 진골, 즐라탄, 앙리는 6두품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다. 즐라탄이 1시즌만에 대놓고 과르디올라를 폭풍디스를 하면서 뛰쳐나간 이유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외부 출신 선수가 푸대접 받는 경향이 있냐고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일단 클럽의 상징과도 같은 요한 크루이프가 라 마시아를 만들었을지언정 일단 본인은 순혈과 거리가 멀고, 다니 아우베스나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처럼 외부 유입 선수가 바르셀로나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례는 많다. 바르셀로나에는 수많은 정상급 선수들이 영입되었으며 이 중 실력에서 앞섰는데도 유스에게 밀렸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기껏해야 야야 투레정도고, 야야투레를 밀어넨 세르히오 부스케츠는 결국 자기 포지션에서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성장했다. 더구나 야야 투레도 펩을 깠으면 깠지 말년에는 바르셀로나에 돌아가고 싶다는 인터뷰를 하는 등 바르셀로나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즐라탄은 메시 때문에 중앙에서 밀려난 것이지 외부인이라 밀려난 것이 아니며, 앙리 역시 노쇠화로 페드로와 로테이션을 거치며 서서히 입지를 잠식당한 것이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낸 것처럼 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바르셀로나 유스들이 스쿼드의 대부분을 점하던 시절은 그리 길지 않으며 그 기간 내에도 알베스, 마스체라노, 아비달, 비야, 케이타, 산체스같은 외부 선수들이 계속 영입되었으며 이들은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펩이 물러난 이후로는 차비, 이니에스타, 푸욜, 페드로, 발데스 등 유스 출신 황금 세대 선수들의 노쇠화, 이적, 은퇴 등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네이마르, 수아레스, 라키티치, 슈테겐 같은 선수들이 영입되어 팀의 중심선수로 입지를 다졌다.
- 아틀레틱 빌바오 - 이 팀은 진짜로 아예 바스크 혈통이 아니면 쓰질 않는다. 바스크 혈통만 이 팀에서 뛸 수 있으며, 팀에 들어오는 자격 요건은 국적에 상관없이 바스크 혈통이어야 한다. 다만 조상 중 바스크인이 아무도 없더라도 유스팀에서 훈련받은 경우에는 뛸 수 있게 하면서 문호를 어느 정도 개방으며, 또한 제일 위 요미우리와는 다르게 감독 선임에서는 골품제를 배제한다.
- KIA 타이거즈 - 광주일고를 순혈로 우대하는 관행이 있었고 성골이라 칭했다. 진흥고, 동성고 출신들은 진골이라 했다. 해태 시절에는 군산상고도 높게 쳐줬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약해졌다. 군산시는 전라북도에 있고,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가 전라북도를 연고로 탄생하면서 군산상고는 해태에서 분리된다. 이후 해체된 쌍방울의 선수단을 기반으로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쌍방울과의 연결고리를 부정하면서 다시 기아에 붙게 되지만, 10년에 걸친 공백기 때문에 타이거즈 내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전라북도 연고 구단 창설활동 시기를 보면, 김봉연을 포함한 군산상고 출신 해태 인사 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광주 출신 광주일고 성골 중 성골 강정호가 기아로 지명이 안되자 많은 아재들이 한탄했다고 한다.
- 삼성 라이온즈 - 과거 팬들은 대개 경북고를 성골(류중일, 이승엽, 배영수 등), 대구상고(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양준혁 등)와 대구고를 진골, 포철고 등 기타 TK 지역 고교를 6두품으로 구분했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경북고 이외의 고교 출신이라도 지역 연고 출신이면 성골 진골 구분 없이 로컬 보이라고 좋아해주는 편이다. 2020년대에 와서는 성골 진골 구분을 하면 바로 사자후 할배 소리를 듣지만 야구를 잘하는데 지역 출신이기까지 하다면 여전히 프리미엄으로 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구자욱, 원태인 등이 있다.)
- 롯데 자이언츠 - 경남고를 성골, 부산고를 진골, 그 외 부산/경남 소속 고등학교들(개성고, 부경고, 마산용마고 등)을 6두품으로 우대하는 관행이 있다.[11] 이쪽은 갈매기 마당이라는 강력 팬덤 구성원들이 저 성골라인 출신들이 많기때문에 주전 선수들도 그쪽 출신이 아니면 대놓고 팬덤에서 차별받고 욕을 먹었다. 롯데 팬들이 이대호만큼 사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민호도 제주도 출신이기 때문에 갈매기 마당에서는 경남고 출신의 유망주 포수 장성우를 밀어주기 위해 차별받고 항상 욕을 먹었다.[12]
- 한화 이글스 - 한 때 북일고[13]를 성골, 대전고, 세광고[14]를 진골이라고 했었다. 다만 이 파벌에 대한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실은 그런거 없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2020년 김태균이 은퇴하기 전에는 북일고 성골은 존재했다.
- 대다수 K리그 구단들 - 초, 중, 고 모두 구단이 관리하는 유스 학교팀이 하나씩 있으므로 골품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은 갖춰져 있다. 또한 유스팀 협약이 없더라도 같은 지역의 다른 학교는 진골 취급 정도는 될 수 있다. 가령 울산 현대라면 모기업 재단인 울산현대고가 유스팀이지만 학성고등학교 또한 전통의 명문팀이며, 지금까지 산하 유스팀이 프로팀의 주축을 이룰 정도의 아웃풋을 낸 곳은 사실상 포항 스틸러스(포항제철고) 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그나마도 황선홍 감독 퇴임 후에는 해체된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성골이든 진골이든 상관없이 실력이 좋으면 레전드 대우를 받고 실력이 없으면 욕을 먹는 것은 똑같아서 우대하는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오히려 실력이 없으면 "성골, 진골 주제에 왜 못해?"라고 더욱 심하게 비난한다. 물론, 실력도 좋고 성골 유스에다 로컬 보이라면 더더욱 사랑을 받으며, 일단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기 전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 WWE를 비롯한 프로레슬링 단체들 - WWE처럼 역사가 오래된 단체 같은 경우엔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 심지어 최근엔 4대째 프로레슬러도 종종 나오는 편인데, 이런 n세대 레슬러들과 타 단체에 이적없이 데뷔부터 은퇴까지 함께 한 레슬러들을 주로 성골로 분류하는 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더 락, 랜디 오턴, 존 시나등이 있다.
8.1.2. 대학 내에서
서울대학교에서 지역균형선발 출신을 차별한다는 이야기가 기사화되었다. 기사1 기사2 정확히 말하면 서울대 전체에서 그런게 아니라 서울대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서 지역균형을 차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대학들이 지역에 분교를 내면서 캠퍼스에도 본진은 성골, 나머지 캠퍼스들은 진골 내지 6두품 쩌리들 취급을 하는 현상이 보이고 있다.[15]
고려대학교 내부에서는 서울캠퍼스와 세종캠퍼스 사이에 분쟁이 터져서 서울캠퍼스 학생들이 세종캠퍼스 학생에게 천민 출신이라고 막말하며 사이버 폭력을 휘두르던 사건이 있었다. 고려대학교/사건사고 문서 참고.
연세대학교 내부에서는 출신성분에 따라 차별한다는 이야기가 기사화되었다. # 정확히 말하면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연세대 커뮤니티인 세연넷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쪽은 더 심해서 아예 본교인 국제캠퍼스와 신촌캠퍼스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막아놔버렸다. 분교인 미래캠퍼스 학생들은 이 커뮤니티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서울대나 고려대나 연세대의 커뮤니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서울대와 고려대와 연세대의 전체적 분위기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대학(특히 어느정도 입학 성적이 되는 대학들)치고 그런 분위기가 없는 곳이 없다. 수시생(특히 지역균형이나 기회균형 류)에 대한 정시생의 우월감과 차별은 물론이고 지역균형선발, 사회적배려대상자 등 여러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에 대한 '구별짓기', 자기소개시 본교생에게 분교임을 미리 밝히지 않으면 당당하지 못하다는 인식 등이 성행하는 판국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학벌주의가 같은 학교 내에서조차 선을 그으려 하는 식으로 심화되는 것으로 신라의 골품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현상이며, 특히 입시 성적에 따른 문화적 권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대입 성적은 중요한 차별의 기제가 된다.
대학 서열의 경우와 관련해서도 골품제를 빗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커뮤니티 상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며 실제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때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기사 때문에 과장된 면이 많은데 해당 글의 댓글을 살펴보아도 호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다지 인기 있는 글도 아니었다.
8.1.3. 대학원에서
대한민국 대학원에서는 흔히 자대 자과 출신을 '성골'로 대우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자대 자과면 여러 장점이 있기 때문인데 우선 학과가 같은 만큼 대학원에 오기 전부터 지도교수의 수업을 들어봤거나, 교수와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일 수 있다. 또한 자대 출신이기 때문에 학과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 쉽고 주변 연구실과의 교류도 쉽기 때문에 이것도 강점이 된다.자대 타과 출신[16]은 '진골' 취급을 받는다. 과는 다르지만 출신 대학은 같으므로 '학벌 세탁'이라는 비난은 없으며 전공을 바꾼 것도 그냥 학부 전공이 안 맞거나 취업에 불리해서 다른 전공을 공부하려는가보다 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만 출신 학과는 다르므로 스타트가 자과생들보다는 느리고 모든 것을 혼자서 개척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울 수는 있는데, 이것도 그 학교 학부에서 복수전공을 하고 그 복수전공을 대학원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만회할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타대 자과 출신은 6두품으로 취급한다. 출신 대학이 다르므로 학벌 위주의 한국 특성상 '학벌 세탁'[17]이라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인식상 '같은 대학 출신의 전공 세탁'보다 '학벌 세탁'이 취급이 좋지 않으므로, 자대 타과 출신보다 낮은 6두품 취급을 받게 된다. 다만 학과가 같아서 학문과 관련된 주제가 거의 동일하여 학문적 연속성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장 거리가 먼 타대 타과 출신은 5두품 취급을 받는다. 대학 내부 인물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출신 학과조차 다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타대 자과 출신과 마찬가지로 '학벌 세탁'이 비난의 요소가 된다. 교수들도 적당히 관리는 하되 특출나게 재주를 보이지 않으면 방치해두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이 출신으로 지도교수에게 이쁨을 받으려면 최소 최치원 급의 재주를 가져야 한다는 말도 있다. 물론 최치원은 5두품도 아닌 6두품이었고 타고난 두뇌 자체가 이미 달랐으니 노력은 최치원 이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교수들마다 스타일이 다르니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성골'에 비유되는 자대 자과 출신 학생이 슬럼프에 빠져 힘들어하거나 재주와 영감을 영 찾지 못하고 위기를 겪고 있을 때에는 다독여주고 조언을 더 해주고, 때로는 따끔하게 채찍질과 꾸짖음도 하면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6두품'이나 '5두품'에 비유되는 타대 출신 학생에게는 위기를 겪거나 힘들어해도 '성골'만큼의 케어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제 갓 1년째 된 원생이랑 학부 4년까지 더해서 5년째 보고 있는 원생에게 가는 애정에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법이기 때문. '진골'로 불리는 자대 타과 출신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서, 특별히 학부 시절부터 복수전공이나 자선 수강을 하면서 그 전공의 교수들과 친분을 쌓아온 학생은 '성골' 못지않게 예쁨받을 수 있지만 '진골'이더라도 특별히 친분을 쌓아오지 못한 학생은 대우가 타대 출신과 다를 바 없으니 본인이 자대 타과 대학원 진학 생각이 있다면 일찍이 그 과의 교수들과도 안면을 트고 유대관계를 쌓는 것이 좋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국내 대학원 한정이다. 자대 자과 출신을 받는게 일반적인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자교 출신 역시 많지만 타교 출신 역시 많다. 예전에는 자신들만의 계층을 설정하고, 학벌이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만큼 배타적으로 행동했던 것이지만 현재는 인구 수가 많이 격감하고 대학만으로는 취업이 어려워진 한국 사회에서 대학원마저 취업준비의 일환으로 변질되어버린 탓이 크다. 외국의 경우는 조금씩 다른데 특히 학부 중심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졸업한 학생들의 경우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해서 당연히 타교에 진학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타교 출신을 배척하는 문화가 나타나기는 힘든 경우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8.1.4. 신학대학 및 교회에서
신학생들 사이에서 나도는 농담으로 부모님이 목사면 성골, 장로면 진골, 집사면 백골, 이도저도 아니면 해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천만다행히도 불교의 경우 사찰에서는 전술한 기독교처럼 골품제가 있지 아니하고 평등하다. 법사들의 경우 부모님이 법사든 아니든 전혀 상관없이 스님 시절때부터 열심히 노력만 하면 대웅전 대빵 큰스님이 될 수 있다.
8.1.5. 직장에서
공무원이 굉장히 많이 따지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공무원의 경우 일반 사기업보다도 더욱 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직장이다.공무원은 학벌을 보지 않는다. 공무원 사회에 입성할 때까지만! 공직사회는 학벌에 대한 차별이 의외로 심한 편이고, 집안 내력 및 재산 등도 따지며 성골 및 진골 및 6두품 등으로 계급을 나누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즉, 합격까지는 학벌 안 보고 뽑지만 입사 이후에 진급하거나, 좋은 직위를 차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학벌의 영향이 의외로 상당하다.
대학 학벌을 따지는 곳은 주로 기획재정부, 외교부 등 고시 출신들의 비중이 높은 중앙부처의 본청 및 본부 등이다.[18] 어차피 고시에 합격할 정도면 능력이나 업무역량은 특출난 몇몇을 제외하면 상향평준화 되어있고, 고시출신은 기수의식이 강해서 고공단 전까지는 거의 무조건 기수대로 승진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준은 학벌 같은 것밖에는 없다.
반대로 9급 출신이 대부분인 지방 공무원 조직에서는 출신 고등학교를 많이 따진다. 고교비평준화 시절 해당 지역의 1등 명문 고등학교가 조직의 인사와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비평준화 시대에 해당 고교를 졸업했더라도 입직 후 동문회에 초청받아 고위직 선배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다.
학벌 외에도 입직 경로에 따라 골품을 나누기도 하는데, 고시는 성골, 국가직 7급은 6두품, 지방직 7급은 호족이라는 말이 있다.
그나마 일반 사기업의 경우 이러한 골품제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다. 과거에야 당연히 사기업들도 일반 직원들의 학벌 및 집안 내력과 재산 등을 따지며 성골 및 진골 등으로 계급을 나눴으나, 세계 경제 위기 등으로 인해 구조조정과 생존투쟁이 일상화된 시대라 능력과 사회성 위주로만 평가하는 추세이다.
8.1.6. 군대에서
심지어는 군대의 장교들 사이에서도 이같은 인식이 있다.육군의 경우 성골은 당연히 육군사관학교, 진골은 육군3사관학교, 6두품은 ROTC, 5두품 이하는 OCS 등으로 묘사하는 식. 실제로 각 출신별 진급 TO가 이런 식이다. 이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교육과정을 보면 육사가 4년 풀타임으로 제일 길고, 3사의 경우 2년 풀타임이고, ROTC의 경우 2년 파트타임(방학마다 1번씩 4주 훈련을 받으므로 총 16주)이고, OCS는 16주로 각 소속간 교육기간에 차이가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ROTC의 경우 그 수가 제일 많은데다가 육군 ROTC들은 명문대 혹은 좋은 집안 출신들이 많아 이들이 전역 후 정계나 제계 등에서 영향력을 많이 발휘하기 때문에, 육군이 생각보다 함부로 대하진 않는다.
해군의 경우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성골에 해당하지만[A], 육군과 달리 수가 적은 한국해양대, 목포해양대, 제주대 등의 ROTC보다 위관급 장교의 다수를 차지하는 OCS 출신들이 두 번째로 힘이 세다. 해사에 비하면 약체긴 해도, 해군 OCS들은 명문대 혹은 좋은 집안 출신들이 많아 이들이 전역 후 정계나 제계 등에서 영향력을 많이 발휘하기 때문에, 해군이 생각보다 함부로 대하진 않는다.
공군의 경우도 공군사관학교 출신이 성골에 해당한다.[A] 특히 공군 장교 가운데 조종 특기는 공사 출신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 한국항공대학교, 한서대학교, 한국교통대에 설치된 공군 ROTC에 지원하여 파일럿으로 군복무를 할 수 있지만, 영관급 이상으로 갈수록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그나마도 전투기 기종 중에 KF-16이나 F-15K같은 주력기종일수록 그 수가 더욱 줄어든다. 그래도 이쪽은 다수의 조종장교가 군에 남기보단 빨리 전역해 민항사로 재취업할 생각만 하기 때문에, 공사 출신이 나 성골입네 해봐야 별 영향력이 없다. 군보단 전역 후 공사 출신 인맥에 견제당하는 게 더 짜증나는 편으로, 이마저도 민항사는 공군과 달리 전투기 조종사보다는 민항기의 주력인 여객기, 화물기와 조종 특성이 비슷한 수송기 출신이나 해군 대잠초계기 조종사 출신을 더 선호하므로 충분히 커버된다.
해병대의 경우도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성골에 해당한다.
물론 이게 고착화되고 교조화되어 파벌로 발전하면 안 된다. 초급장교의 경우 군 경력이 짧고 교육기간 차이도 최대 2년이므로 출신에 따라 능력을 보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개인의 자질이 더 큰 영향을 미칠 뿐이다.
8.1.7. 경찰 조직에서
경찰 조직 내에서도 경찰대학 출신은 성골, 경찰간부후보생 출신은 진골, 순경 출신은 6두품이다.라는 식으로 골품제 묘사가 있다.8.1.8. 정계에서
과거에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 지역 명문고등학교가 존재하던 시절에 출생지와 출생고교를 묶어 정치인들의 지역 기반을 나타내는데 성골/진골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는데, 경기/호남/충청/강원/영남(TK/PK) 등 특정 광역지역의 출신으로 해당 광역권의 명문고교(경기고/광주일고/대전고/경남고/경북고 등)를 졸업하고 명문대학을 거쳐 사회적으로 성공한 뒤 정치계에 입문하는 경우 해당 지역의 성골 출신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해당 지역에서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었다.반대로 출생지와 학맥의 광역기반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진골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일례로 홍준표의 경우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21]이지만 학창시절은 TK에서 보냈는데, 그러한 배경에서 내가 TK 성골은 아니라도 진골은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홍준표는 경상남도지사를 지낸 후 대구로 연고지를 옮기고는 무려 무소속으로 수성구 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어 대구광역시장까지 당선되었다.8.1.9. 노스페이스 골품제
중고딩 사이에서 한창 노스페이스가 인기일 때, 일진&학교폭력&왕따 문제와 노스페이스가 연관되면서 노스페이스 골품제라는 말까지 생겼었다. 노스페이스의 가격과 학교 내에서의 계급을 연결한 것. 농담으로 골품제 체험학습이라는 드립도 있었지만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해당 항목으로.8.2. 그 밖에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9회에서 안종석이 국사 시간에 이걸 몰라서 골룸제도라고 답했다.현존하는 성씨로 따지면 김씨, 박씨, 석씨가 진골 또는 성골에 해당되며 설씨, 최씨 등이 6두품에 해당된다. 대표적으로 최치원이 6두품 출신이다. 다만 삼국사기 등 기록에 따르면 김씨 중에서도 6두품이 있는 등,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이유로 골품이 떨어지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성씨와 골품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일본에서도 '가바네(姓, 骨)'라 하여 뼈 골(骨)자를 써서 씨족의 등급을 표시하던 전통이 있었다. 단 신라만큼 구속력이 크지는 않았으며, 덴노가 하사하는 성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우지(성씨) 항목 참조. 이처럼 고대인이 굳이 뼈를 신분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은 이유는 불명확하다. 다만 실제로 식습관에 의해 골밀도 차이가 발생하여 뼈의 모습 역시 눈에 띄게 달라진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특히 생전에 영양실조나 빈혈 등을 겪은 경우 골다공증의 발병 확률이 높아지며, 머리뼈(특히 이마, 눈두덩)에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만큼 자잘한 구멍이 많이 생긴다. 신분에 따라 식단 차이가 컸던 고대에는 이런 차이가 계층별로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9. 관련 문서
[1] 골 = 骨 = Bone / 품 = 品 = Rank / 제 = 制 = System 정도로 직역한 것이다. 성골은 Holy/Sacred Bone(성스러운 뼈), 진골은 True Bone(진짜 뼈)으로 직역된다.[2] 그나마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점은 몰락귀족의 후예인 을파소나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온달이 중앙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쓴 왕실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성공한 사례가 있음으로 볼 때, 고구려의 신분제는 왕실의 부분적인 타파 시도가 가시적 성과를 거둘 정도로 골품제에 비해서는 견고하게 자리잡지 못한것으로 보인다.[3] 서의식 교수는 '두품'이 말 뜻 그대로 개인의 능력과 공로로 취득되는 지위라고 주장하였다.[4] 어느 지역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지만 파주시 지역으로 비정하는 편이다.[5] 거칠부의 아버지[6] 이 말을 남기고 설계두는 621년에 당으로 건너가서 20여년 후 고구려-당 전쟁 때 당군에 종군하여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7] 남아있는 기록으로 추정하건데 평민이라 하더라도 수도에 산다는 건 지금의 북한처럼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일례로 전쟁에서 활약하여 전사한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에게 서라벌에서 살수 있게 허락한 걸 일종의 포상으로 주어졌다.[8] 득난이 6두품의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다.[9] 사실 이는 신라뿐만 아니라 전인류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으로, 전근대의 통치가문들은 남녀간 격차와 우선순위가 있다는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깔려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가문의 위상과 지위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던지라 계승시킬 남성을 찾지 못하면 작위 등의 다른 제한을 풀어서 범위를 넓히기보다는 차라리 여성에게 상속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남녀차별은 통념과 달리 전근대보다 근대에 와서 신분적 사고가 점차 사라지는 와중에 능력주의를 빙자한 사이비 과학 등으로 일시적으로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이는 인종차별과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낸다. 하필 조선이 성리학의 영향 등으로 어느 정도 예외적인 면모를 보였고 이마저도 꽤나 과장되는 바람에 흔히 오해를 사는 것일 뿐 전근대에 성별보다 신분이 우선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10] 이를 반영한것이 을파소에 관한 기록들과 온달설화다.[11] 다만 한때는 염종석, 주형광, 손민한, 장원준, 손아섭 등 경남고보다 더 프랜차이즈 스타가 많았던 부산고가 성골이라는 주장도 강했다. 그러나 부산고 출신 스타들이 줄줄이 이적하고, 게다가 경남고 출신의 레전드 둘이 너무 압도적이라 현재는 경남고를 성골로 취급한다.[12] 이후 장성우는 2015년 트레이드로, 강민호는 2018년 FA로 둘 다 팀을 떠나며 롯데는 포수 문제로 골머리를 많이 썩게 된다.[13] 재단의 소유주가 한화그룹이다. 유니폼도 한화 이글스와 흡사하다.[14] 송진우, 정민철, 장종훈 등 주요 레전드 배출.[15] 이 경우는 입학성적 차이가 심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지역균형선발 출신을 차별하는 행위는 다소 논란이 될 만한 사항이다.[16] 예를 들면 A대 물리학과나 신소재공학과 학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A대 전자전기공학과 석사로 입학하는 경우[17] 관련 문제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원 학벌을 취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대학교에 비해서 대학원은 더 높은 학벌을 취득하기가 쉬운 편이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사람들은 대학원 학벌이 좋아도 아예 무시해버리고 아예 대학교 학사학위를 어느 대학에서 받았는지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미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로 학부 학벌이 중요해서 아이비리그 같은 대학들의 졸업생들도 학부 졸업자끼리 뭉친다.[18] 금융위원회 같은 경우는 서울대 경제학부 출신이 나머지보다 더 많은 수준이라 출신을 보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A] 다만 대학서열 전체로 보면 진골로 볼 수도 있다.[A] 다만 대학서열 전체로 보면 진골로 볼 수도 있다.[21] 이 창녕군이 매우 묘한 지역인데, 경상남도 소속임과 동시에 생활권은 대구권 소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구의 영향력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