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
남우주연상 | ||||
제42회 (1989년) | → | 제43회 (1990년) | → | 제44회 (1991년) |
존 클리즈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나의 왼발) | → | 필립 느와레 (시네마 천국) |
제55회 (2002년) | → | 제56회 (2003년) | → | 제57회 (2004년) |
러셀 크로우 (뷰티풀 마인드)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갱스 오브 뉴욕) | → | 빌 머레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제60회 (2007년) | → | 제61회 (2008년) | → | 제62회 (2009년) |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 → | 미키 루크 (더 레슬러) |
제65회 (2012년) | → | 제66회 (2013년) | → | 제67회 (2014년) |
장 뒤자르댕 (아티스트)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 → | 추이텔 에지오포 (노예 12년) |
역대 | ||||
영화부문 남우주연상 | ||||
제8회 (2002년) | → | 제9회 (2003년) | → | 제10회 (2004년) |
러셀 크로우 (뷰티풀 마인드)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갱스 오브 뉴욕) | → | 조니 뎁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 |
제13회 (2007년) | → | 제14회 (2008년) | → | 제15회 (2009년) |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 → | 숀 펜 (밀크) |
제18회 (2012년) | → | 제19회 (2013년) | → | 제20회 (2014년) |
장 뒤자르댕 (아티스트)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 → | 매튜 매커너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 ||||
남우주연상(영화) | ||||
제7회 (2002년) | → | 제8회 (2003년) | → | 제9회 (2004년) |
러셀 크로우 (뷰티풀 마인드) | → | 잭 니콜슨 (어버웃 슈미트) 다니엘 데이루이스 (갱스 오브 뉴욕) | → | 숀 펜 (미스틱 리버) |
제12회 (2007년) | → | 제13회 (2008년) | → | 제14회 (2009년) |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 → | 숀 펜 (밀크) |
제17회 (2012년) | → | 제18회 (2013년) | → | 제19회 (2014년) |
조지 클루니 (디센던트)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 → | 매튜 매커너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
}}} ||
<colbgcolor=#04032b><colcolor=#fede58> 다니엘 데이루이스 경 Sir Daniel Day-Lewis[1] | |
본명 | 다니엘 마이클 블레이크 데이루이스 Daniel Michael Blake Day-Lewis |
출생 | 1957년 4월 29일 ([age(1957-04-29)]세) |
영국 잉글랜드 미들섹스 켄싱턴 (現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켄싱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2] |
직업 | 배우 |
활동 | 1970년-2017년 |
학력 | 브리스톨 올드 빅씨어터학교 |
신장 | 187cm |
배우자 | 레베카 밀러[3](1996년~현재) |
자녀 | 장남 가브리엘케인 데이루이스(1995년생)[4] 차남 로난 칼 데이루이스(1998년생)[5] 3남 카셸 블레이크 데이루이스(2002년생)[6] |
[clearfix]
1. 개요
영국 잉글랜드 출신인 할리우드 배우.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자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영국 기사작위를 받았다.[7] 메소드 연기의 대표적 배우로[8] 첫 주연을 맡았던 《나의 왼발》과 2007년작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앞서 두 차례의 오스카를 가져갔으며, 2013년 영화 《링컨》으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3번이나 받은 기록을 세운 배우가 되었다.[9]
2. 생애
1957년 4월 29일 아버지 세실 데이루이스(Cecil Day-Lewis)[10]의 두 번째 아내인 질 밸컨(Jill Balcon)[11]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잉글랜드 런던. 그의 외조부는 마이클 밸컨 경(Sir Michael Balcon)으로 영화사 일링(Ealing) 스튜디오의 대표였다. 다니엘의 누나인 태머신 데이루이스(Tamasin Day-Lewis)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이다. 다니엘이 두 살이 되자 가족은 런던 동남쪽의 그리니치(Greenwich)의 크룸즈힐(Croom's Hill)로 이사갔다. 그리니치에 살면서 다니엘은 런던 남부의 거친 아이들과 살았고 유대인 혈통과 잰 체(posh) 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이 때에 다니엘은 런던 남쪽의 억양과 습관, 지역색 등을 남부 출신인양 완전히 익혔는데, 이를 두고 그의 첫번째 ‘연기’라고 생각한다고 한다.[12] 이 때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좀도둑질 등의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고 현재 자주 회상하는 편이다.1968년 다니엘의 부모는 다니엘이 너무 거칠다고 생각해 켄트의 기숙학교인 세븐오크스(Sevenoaks) 스쿨로 보냈다. 그는 이곳을 싫어했다. 여기서 그가 그나마 관심을 둔 일은 목공과 연기, 낚시 정도였다. 2년 뒤에 피터즈필드(Petersfield)의 좀 더 진보적인 사립학교인[13] 버데일스(Bedales)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곳은 좋아했다. 그의 누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널럴한 곳이었다고 한다.
14살에 1971년작인 사랑의 긴 여로(Sunday Bloody Sunday)에 단역으로 출연하였으나 크레딧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본인은 그 경험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나앨아 맡은 역은 동네 교회에 주차된 비싼 차를 파손하는 역이었고 그 역으로 2파운드를 받았다고 한다. 1975년 베더일을 떠나면서 그의 제멋대로인 태도는 많이 누그러졌다. 직업을 선택해야 될 나이가 되자 다니엘은 5년짜리 가구공 견습직에 지원했으나 경험 부족으로 반려되었다. 그러자 다니엘은 학창시절 활동했던 런던의 국립청소년극단에서 연기를 잘 한다고 칭찬을 받은 것을 떠올리고 브리스톨 올드 빅 스쿨(Bristol Old Vic School)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에서 함께 연기한 피트 포스틀스웨이트(Pete Postlethwaite)[14]의 대역을 맡기도 했다.
1983년까지는 영화 대신 브리스톨 올드 빅과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연극 배우로 활동했다. 80년에는 한여름 밤의 꿈의 플루트, 81년에는 드라큘라(Dracula)의 드라큘라 백작, 82년부터 83년까진 다른 나라(Another Country)의 가이, 83년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등 당시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연극 출연에 집중하였다.
1982년 처음으로 간디에서 단역으로 출연하여 영화배우로서 데뷔했다. 맡은 역할은 콜린이란 이름으로 주인공을 따돌리는 불량배이나 신경 예민한 엄마에게 맞기나 하는 역. 그 해에 영국의 TV 드라마인 5월의 서리(Frost in May)에 바빌론까지는 얼마나 먼가?(How Many Miles to Babylon?)[15]출연하였다.
그의 첫 영화 조연작은 1984년 작인 바운티호의 반란(Bounty)이었고 이듬해인 1985년,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이라는 2편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뉴욕에서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와 전망이 좋은 방이 같은 날에 개봉하기도 하여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그의 다양한 연기폭과 재능을 보여줬다. 뉴욕 영화 비평가는 그를 최고의 조연이라고 불렀다. 1986년에는 오랜 동업자인 연극 연출가 리처드 아이어(Richard Eyre)가 감독한 연극 퓨처리스트(Futurists)의 주연으로 출연하는 한편, 영국과 프랑스 합작 영화인 나노(Nanou)에 출연하였다. 1987년 필립 코프먼(Philip Kaufman) 감독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에서 다니엘은 처음으로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1988년에 개봉하였다. 1988년에는 정열과 사랑(Stars and Bars)[16]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으나 흥행엔 실패했다.
1988년,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처음으로 메소드 연기에 몰입한 영화인 짐 쉐리단의 나의 왼발(My Left Foot: The Story of Christy Brown)에 출연하였고 1989년 2월에 개봉한 이 영화로 다니엘은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후보군이 쟁쟁했는데, 7월 4일생의 톰 크루즈,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모건 프리먼,헨리 5세의 케네스 브래너,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였다.
1989년 3월, 다니엘은 영국 국립극장에서 리처드 아이어(Richard Eyre)가 감독한 연극 햄릿의 햄릿 역을 맡으며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메소드 연기를 한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 탈진하여 10월에 프로덕션을 떠나야 했다. 이때 탈진했다고 알려진 장면이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는 장면이라고 한다. 쓰러진 뒤에 미친듯이 울면서 무대에 오르기를 거부했다고. 실제로 다니엘 본인이 그 때 아버지의 유령을 만났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그 날 이후로 햄릿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다니엘의 공백은 당시 에이즈로 투병 중이던 베테랑 배우 이안 찰슨이 채웠다.[17] 햄릿 공연을 마지막으로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연극계를 떠났다.
이후 다니엘은 공백기를 가지다가 1992년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으로 돌아왔다. 영화는 비평적으로는 모호한 평가를 받았으나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했다. 이후 마틴 스코세이지의 1993년 개봉작인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를 찍었다. 이어서 1994년에 짐 쉐리단과 다시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를 찍어서 호평을 얻었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션 되었다.
그러나 1995년, 줄리아 로버츠와의 불륜 스캔들이 터졌고 이 때문에 활동을 잠시 쉬었다.
이후 다니엘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크루서블(The Crucible)을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에서 존 프록터(John Proctor) 역을 맡으며 1996년 복귀했다. 감독은 니컬러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였다. 그리고 영화 촬영 중에 원작자의 딸인 리베카 밀러를 만나서 1996년 11월 13일에 그녀와 결혼하였다. 1998년에는 짐 셰리던과 세번째로 호흡을 맞춘 영화 복서(The Boxer)에서 갓 출소한 IRA 조직원이자 전직 복서 역을 맡았다. 약 1년간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다니엘은 실제 복싱 선수에게 복싱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1997년 복서 촬영을 완료한 이후 다니엘은 5년간 영화를 찍지 않고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옮겨서 목공 일과 제화 일에 열중했고 제화공 견습을 따냈다. 이 즈음에 다니엘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니엘은 그 시절을 얘기하는 것을 거부했고 단지 "어떤 형태의 방해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시기였다(It was a period of my life that I had a right to without any intervention of that kind)"라고 술회했다.
2002년,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마틴 스콜세지와 갱스 오브 뉴욕(The Gangs of New York)을 찍으면서 영화계에 복귀했다.[18] 영화에서 다니엘은 갱들의 수장인 윌리엄 커팅(William Cutting), 이른바 도살자 빌(Bill the Butcher)이라는 악역을 맡았다.[19] 다니엘은 이 역을 위해 도살자 견습생 교육을 받았고 촬영 기간 동안 뉴욕 악센트를 유지하며 테이크 사이에 캐릭터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촬영 기간 동안 19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따뜻한 코트를 입고 연기할 수 없다고 코트 입기를 거부하다가 폐렴 진단을 받았지만 이조차 당시에는 폐렴 치료법이 없었다며 치료를 받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다니엘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피아니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밀렸고 대신 BAFTA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2005년 아내이자 영화 감독인 레베카 밀러는 다니엘을 자신의 영화인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The Ballad of Jack and Rose)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어 왔으며 10대 딸을 어떻게 길렀는지를 후회하며 죽어가는 남자 역을 맡았다. 촬영 기간 동안 "고독"을 느끼기 위해 아내와 떨어져서 살았다고 한다. 영화 자체의 평은 엇갈렸다.
2007년에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출연하였고 무수히 많은 상을 휩쓸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도 수상했다. SAG 수상에서 히스 레저에게 자신의 수상을 헌사하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레저의 연기가 "특별하고 완벽했다(unique, perfect)"고 평가했다.
2009년에는 롭 마샬의 나인에 귀도 콘티니(Guido Contini) 역을 맡았다. 캐스팅은 화려했는데 정작 영화의 평이 최악이었다.
2010년 12월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에 에이브러햄 링컨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 The Political Genius of Abraham Lincoln)이라는 책이 원작으로 2011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역을 준비하기 위해 다니엘은 1년을 보냈다. 링컨에 대한 책을 100권 정도 읽었으며 링컨과 비슷한 외모를 연출하기 위해 장시간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일했다. 영화는 2012년 11월 9일에 개봉했고 다니엘은 2013년 제 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 번째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3. 은퇴 및 근황
2017년 6월 20일, 배우 은퇴를 선언하였다. 여러가지 이유가 추측되는 가운데, 신빙성을 얻고 있는 가설 중 하나는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업을 위해서라고 한다. 다만 다니엘 데이루이스 자체가 은퇴와 번복을 반복하던 인물이라, 지켜보겠다는 입장도 많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은퇴 발표 직전인 2017년에 촬영이 완료된 영화 팬텀 스레드를 끝으로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정말로 영화계를 떠났다. 근황도 2019년에 길거리 파파라치에서 공개된 이후에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2024년에 아들 로넌의 감독 데뷔작 영화 '아네모네'(Anemone)에 숀 빈, 서맨사 모턴과 함께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4. 필모그래피
4.1. 영화
<rowcolor=#fede58> 연도 | 제목 | 활동 | 배역 |
1971 | 사랑의 여로 | 단역 | 벤다 역 |
1982 | 간디 | 단역 | 콜린 역 |
1984 | 바운티호의 반란 | 조연 | 존 프라이어 역 |
1985 | 전망 좋은 방 | 조연 | 세실 바이즈 역 |
1985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조연 | 죠니 역 |
1986 | 나노 | 조연 | 맥스 역 |
1988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주연 | 토마스 역 |
1988 | 정열과 사랑 | 주연 | 헨더슨 도스 역 |
1989 | 나의 왼발[20] | 주연 | 크리스 브라운 역 |
1992 | 라스트 모히칸 | 주연 | 나다니엘 포 / 호크아이 역 |
1993 | 순수의 시대 | 주연 | 뉴랜드 아처 역 |
1994 | 아버지의 이름으로[21] | 주연 | 제리 콘론 역 |
1996 | 크루서블 | 주연 | 존 프락터 역 |
1998 | 복서 | 주연 | 대니 플린 역 |
2002 | 갱스 오브 뉴욕[22] | 주연 | 빌 더 버처 커팅 역 |
2005 |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 | 주연 | 잭 역 |
2007 | 데어 윌 비 블러드[23] | 주연 | 다니엘 플레인뷰 역 |
2009 | 나인 | 주연 | 귀도 콘티니 역 |
2012 | 링컨[24] | 주연 | 에이브라함 링컨 역 |
2017 | 팬텀 스레드[25] | 주연 | 레이놀즈 우드콕 역 |
미정 | 아네모네 | 주연 |
4.2. 드라마
연도 | 제목 |
1980 | Shoestring |
1981 | Thank You, P. G. Wodehouse |
1981 | Artemis 81 |
1982 | How Many Miles to Babylon? |
1982 | Frost in May |
1983 | Play of the Month |
1985 | My Brother Jonathan |
1986 | The Insurance Man |
4.3. 연극
연도 | 제목 | 활동 | 배역 |
1979 | 채용담당자 | ||
1979 | 트로 일러스와 체리 다 | ||
1979 | 올드 킹 콜 | ||
1980 | 에드워드 2세 | 조연 | 랭커스터 백작 역 |
1980 | 클래스 에너미 | 주연 | 아이언 역 |
1980 | 한여름 밤의 꿈 | 주연 | 플루트 역 |
1981 | 분노로 돌아 봐 | 주연 | 지미 포터 역 |
1981 | 드라큘라 | 주연 | 드라큘라 백작 역 |
1982 | 다른 나라 | 주연 | 가이 베넷 역 |
1983 | 한여름 밤의 꿈 | 주연 | 플루트 역 |
1983 | 로미오와 줄리엣 | 주연 | 로미오 역 |
1984 | 드라큘라 | 주연 | 드라큘라 백작 역 |
1986 | 퓨처리스트 | 주연 | 볼로디아 마야 코프 스키 역 |
1989 | 햄릿 | 주연 | 햄릿 역 |
5. 기타
- 커리어 초창기에는 영국의 로버트 드 니로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배우도 로버트 드 니로다.# 또 라스트 모히칸과 갱스 오브 뉴욕의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배역은 로버트 드 니로에게 먼저 제안되었던 역할들이다. 라스트 모히칸 때 로버트 드 니로는 당시 마틴 스콜세지와 케이프 피어 촬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출연 제안을 포기했었다. 대신 마이클 만과의 협업은 그 후 히트에서 이뤄진다. 갱스 오브 뉴욕 촬영 때는 이 영화 대신 말론 브란도, 에드워드 노튼과 함께 스코어 찍는 것을 택했다.
- 메소드 연기가 독한 것으로 유명한데 영화 '나의 왼발'에서 장애인 역을 맡았을 때에는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같이 연기한 존 C. 라일리에 따르면 다니엘이 이탈리아에서 촬영하는 동안 촬영할때의 날씨가 추운 겨울인데도 19세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따뜻한 코트를 입고 연기할 수 없다고 코트 입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폐렴에 걸렸는데 다니엘은 19세기에 폐렴 치료법은 없었다며 치료를 받지 않으려고 해서 의사가 억지로 항생제를 놔야 했다고 한다. 특히 감독과 동료배우들도 치료를 받으라고 설득해야 했다.
- 메소드 연기의 대가답게 존 웨인의 연기를 무척 싫어한다. "아무 노력도 없고 쉽고 편한 길만 가려 했다. 연기가 항상 똑같다."란 평가를 남겼다. 반면 존 웨인 저 혼자만 라이벌이라 의식하고 뒤에서 열심히 캐스팅 방해하고, 험담 열심히 하고 다녔던 게리 쿠퍼의 연기에 대해서는 "나는 게리 쿠퍼를 사랑한다. 그의 연기가 보여준 순수함과 정직함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라는 극찬을 남겼다.#
-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몸에 문신이 꽤 많다.
- '평생 회피를 공부한다'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표현했다. (a lifelong study of evasion).
- 실제 성격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학교에서 유명하지 않았으며 아웃사이더였다고 한다. 인터뷰도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고 칭찬받으면 후배들도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유야무야 임팩트 없이 넘어가는 느낌이 강하다. 이 부분은 그가 유대인 혈통에 아일랜드 혈통[26]이라서 작용한 면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사교성을 늘리는 대신 내향적인 생활을 거치며 공상을 많이 했고 나중에 캐릭터를 깊이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 배우 생활과 별개로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분리하는 편이며 결혼 전의 애정 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고 알려져있다. 특히, 이자벨 아자니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 사귀었고 이자벨이 아이까지 가졌지만, 그녀의 임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엘이 "이제 헤어지자"는 팩스 한 장을 남기며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결별 방식도 방식이지만 결별 원인도 다름아닌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줄리아 로버츠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당시 다니엘과 줄리아 두 사람이 대중들로부터 욕을 엄청 많이 먹었다. 두 사람은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헤어졌다.[27] 이후 다니엘은 극작가 아서 밀러가 쓴 동명의 희곡을 영화화한 크루서블에 출연한 인연으로 아서 밀러의 딸 리베카 밀러와 1996년 11월 13일에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 아내 리베카 밀러[28]와 두 자식들. 사진은 좀 옛날 것 같은데 둘 사이에 난 첫 아이가 1998년 6월 14일 생인 로넌 칼(Ronan Cal Day-Lewis)이고 둘째가 2002년 5월에 태어난 캐셜 블레이크(Cashel Blake Day-Lewis)이다. 거주지는 아일랜드와 뉴욕을 왔다갔다 한다고. 다니엘은 1993년에 아일랜드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래서 현재는 이중 국적자이다. 런던 동남부의 축구팀 밀월의 팬이다.
- 배우이면서 숙련된 목수에다 제화공인데 목공과 신발 제작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있다고 한다.
- 갱스 오브 뉴욕을 촬영할 때 도살자 빌로 분노하기 위해 에미넴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 반지의 제왕의 아라고른 역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수많은 아라고른 역의 후보중 최초로 제안을 받은 사람이며 이후에 후보로는 크리스찬 베일, 조니 뎁, 러셀 크로우, 스튜어트 타운센드, 짐 커비즐 등이 있었다.
- 필라델피아의 앤드루 베켓 역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찍던 중이라 그 역은 톰 행크스에게 갔다.[29]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으로 고려됐지만 멜 깁슨이 보기에 너무 유럽인스러워서 대신 제임스 카비젤을 골랐다고 한다.
- 갱스 오브 뉴욕 촬영했을 때 뉴욕 억양으로 얘기했고 점심 때면 칼을 다듬곤 했다고 한다. 한편 같이 영화에 출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정신적 압박이 상당했다고 한다.[30]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상대역인 일라이 선데이 역을 맡은 배우가 결국 겁을 먹고 도망갔다.[31] 폴 선데이 역을 맡았던 폴 다노가 그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는데 (쌍둥이),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데이루이스의 상대역을 해냈을뿐 아니라 자신 또한 주눅들지 않고 광적인 연기를 한 것은 매우 칭찬해 줄 만하다.
- 라스트 모히칸을 찍었을 때 카누를 만들었고 동물을 추적하고 가죽 벗기는 법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12파운드 짜리 화승총도 완벽하게 익혔는데 영화를 촬영할 동안 이 총을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심지어 크리스마스 정찬까지 이 총으로 사냥한 동물을 먹었다고 한다.
- 2008년 오스카 주연상을 탔을 때 자신의 외할아버지 마이클 밸컨과 아버지 세실 데이루이스 와 자신의 세 아들에게 헌사했다.
- 187cm로 장신이다.
- 《링컨》에서 링컨을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갱스 오브 뉴욕》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인 도살자 빌이 링컨의 초상화에 칼을 던진 바 있다. 영상
- 《데어 윌 비 블러드》 인터뷰가 올라왔다.(#)
- 다니엘이 젊은 배우 중에는 히스 레저와 라이언 고슬링에게 존경을 표한 적이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때 미국배우조합상(SAG)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 수상소감에서 마침 당시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레저에 대한 경의[32]를 표하기도 했다.영상
- 에런 테일러존슨이 다니엘을 존경한다고 밝히는 등 많은 배우들에게 롤모델이 되는 배우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 갱스 오브 뉴욕, 링컨(영화) 등 데이루이스가 연기한 주요 배역을 엮어 만든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살기란 동영상.-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거절한 배역들#
- 영화 감독 마이클 만과 절친한 사이다. 라스트 모히칸에 출연했을 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
- 2010년 7월 15일엔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어릴 때 브리스톨 올드 빅 연기학교에 다녔던 인연으로 그랬다. 종교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며(had no religious education) 자신을 완고한 불가지론자라고 생각(suppose I'm a die-hard agnostic)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2년엔 아버지인 시인 세실 데이루이스의 원고 등을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1] 2014년 Knight Bachelor 기사작위를 받아 Sir가 붙는다. Knight Bachelor만 받은 인물은 이름 앞에 Sir만 붙을 뿐, 이름 뒤에 붙는 건 없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2] 아일랜드와 영국의 시민권 둘 다 가지고 있는 복수국적이다.[3]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이다.[4] 이자벨 아자니 사이의 자녀[5] 레베카 밀러 사이의 자녀[6] 레베카 밀러 사이의 자녀[7] 다니엘 마이클 블레이크 데이루이스 경(Sir Daniel Michael Blake Day-Lewis)[8] 그래서인지 영화를 찍는 주기가 긴 편이다. 게다가 링컨 이전에도 2~3년에 한 편씩 찍었으며, 더 복서와 갱스 오브 뉴욕 사이에도 5년이라는 긴 공백이 존재한다. 바로 이때가 그 유명한 이탈리아 제화공 일을 배운 시기. 이 때문인지 네이버에 등록된 출연작 개수는 2020년 기준으로도 22건밖에 되지 않는다.[9] 심지어 여성 배우계의 본좌라는 메릴 스트립도 여우주연상 2회, 조연상이 1회다. 물론 이 쪽도 끝판왕은 끝판왕. 그런데 지금은 사망한 배우 캐서린 헵번은 여우주연상만 4번을 가져갔다.[10] 아버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이다. 영국의 계관시인(국가나 왕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임명된 시인)이며, 니콜라스 블레이크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도 발표했다. 한국에도 황금가지 밀리언셀러클럽으로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출판되었다.[11] 배우며 유대인으로 다니엘의 외조부 가족이 라트비아와 폴란드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었다[12] 다니엘이 그리니치로 이사 전까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런던 중심부의 Kensington-Chelsea 으로 Belgravia, Westminster, Mayfair 등과 함께 런던 최고의 부촌이다.[13] 위키피디아 원문엔 independent school로 기재되어 있으며 우리의 대안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의 뜻을 갖고있다.[14] 1945-2010. 유주얼 서스펙트의 코바야시, 인셉션의 모리스 피셔 역을 맡은 바 있다.[15] 1차 대전 참전용사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서 고민하는 역[16] 남부 연맹기를 이르는 표현이다. 성조기(Stars and Stripes)와 표현이 비슷하다.[17] 해당 공연은 이안의 유작이 되었다.[18] 일설에 의하면 이 때 하비 와인스틴과 마틴 스콜세지가 다니엘 데이루이스를 찾아가 큰 역할이 아니니까 제발 배역을 맡아달라고 사정사정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승낙하고 미국에 왔는데 알고 보니 완전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 5년간의 공백이 괜히 깨진게 아니다.[19] 여담으로 배우 본인은 아일랜드 국적도 갖고 있으며, 영국과 아일랜드의 정치적 갈등을 다루고 아일랜드인에 대한 영국 경찰과 정보부의 인권 침해를 다룬 실화 바탕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주연으로 출연할 정도로 친아일랜드 성향인 데 반해 도살자 빌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을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20]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21]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22]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23]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24]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25]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26]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두 집단 모두 영미권 주류에서 은근히 배척을 받아 왔으며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성향이 있다.[27] 1995년, 이자벨은 뉴욕에서 혼자 그들 사이의 자식인 게이브리얼케인 데이루이스(Gabriel-Kane Day-Lewis)를 낳았는데 데이 루이스는 혼자 아이를 낳은 아자니에게 아이의 양육비를 줄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장남이 성인이 된 후에는 관계를 회복했는지, 공식석상에 아들과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링크 계모인 리베카 밀러와의 관계도 원만하다고 한다.[28] 1962년생이다[29] 1994년 아카데미시상식 에서 두사람은 루이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크스는 필라델피아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경쟁해 행크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30] 하긴 이 영화에서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맡았던 역할이 늘 칼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압적으로 노려보는 "도살자 빌(Bill the Butcher)"이었으니...[31] 그러나 다니엘과 감독은 이를 부인했다.[32] "unique he was perf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