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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자유주(Freistaat Bayern)는 독일 동남부에 위치한 주이다. 주도·최대도시는 뮌헨. 독일 16개 주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으며, 인구는 약 1,343만 명으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이어서 2위다. 주요 도시로는 뮌헨 외에도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밤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잉골슈타트, 뷔르츠부르크 등이 있다.서쪽에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서북쪽에 헤센주, 북쪽에 튀링겐주, 동북쪽에 작센주, 동쪽에 체코, 동남쪽과 남쪽에 오스트리아, 서남쪽에 스위스와 접한다. 직접 닿아 있진 않지만 리히텐슈타인과도 가까운 편이며, 오스트리아를 통해 알프스산맥을 넘으면 이탈리아가 나온다.
영어로는 바바리아(Bavaria, /bəˈveəriə/[3]). 참고로 바이에른 사람, 바이에른 방언이라는 뜻의 명사는 Bavarian(바바리안), '바이에른의'라는 의미의 형용사는 bavarian이다.
원래 발음은 '바이언(/ˈbaɪ̯ɐn/)'에 가깝고, 현지에서는 '바이안(/ˈb̥ai̯.ɐn/)'[4]에 가까운 발음이지만 외래어 표기법 독일어 세칙 중 '자음 앞의 [r]는 '으'를 붙여 적는다'가 있어서 '바이에른'이 된 것으로 보인다.
2. 특성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독일'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옥토버페스트의 인지도 때문인지 레더호젠(Lederhosen)을 입은 남자들과 디른들(Dirndl)을 입은 여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프레첼[5]을 먹는 스테레오타입을 주로 떠올리는데, 사실 이 이미지는 바이에른주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옥토버페스트의 유명세도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바이에른에 주둔한 미군이 현지 문화를 독일 전체의 문화로 착각하고 자국 대중문화에서 바이에른 문화를 독일 문화로 묘사해 전세계로 퍼뜨린 영향이 크다. 니더작센, 브란덴부르크 등 북부 지방의 전통 의상은 흔히 생각하는 독일 전통 의상과는 거리가 멀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북독일인은 마도로스 모자에 스웨터 차림으로 나왔다. 이 때문에 '저건 진정한 독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다른 독일 지역의 사람들도 많아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하지만 이미 너무 강하게 자리잡은지라 바꾸는 건 힘들 듯. 바이에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일인이라기보다는 '바이에른인'으로 인식하고, 다른 독일인들 역시 바이에른인들을 독일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인식한다.아래 사진에서 남자들이 입은 옷이 레더호젠, 여자들이 입은 옷이 디른들이다.
오스트리아 티롤주의 경계 부근에 2963m의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산이 있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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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 ~ 1623년 | 마인츠 선제후국 · 쾰른 선제후국 · 트리어 선제후국 · 작센 선제후국 · 팔츠 선제후국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 보헤미아 왕국 | ||
16세기에 추가 | 바이에른 선제후국 · 하노버 선제후국 | ||
1803년 이후 추가 | 레겐스부르크 선제후국 · 잘츠부르크 선제후국 · 뷔르츠부르크 선제후국 · 뷔르템베르크 선제후국 · 바덴 선제후국 · 헤센 선제후국 | ||
관련 용어 | 로마왕(독일왕) · 황제선거 · 선제후 · 금인 칙서(1356년판) · 제국의회 · 제국대법원 · 제국추밀원 · 저지대 국가 · 변경백 · 방백 · 팔츠 · 궁정백 · 주교후 · 제국백 · 자유도시 · 부족 공국 · 영방국가 | ||
주요 종교 | 가톨릭(국교) · 발도파 · 후스파 · 개신교 | ||
관련 유물 | 레갈리아/신성 로마 제국 · 롬바르디아 철관 ·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 금인 칙서 ·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관 | ||
군사 | 제국군 · 황제군 · 란츠크네히트 · 도펠죌트너 · 슈바르체라이터 | ||
주요 사건 | 카노사의 굴욕 · 십자군 전쟁 · 대공위시대 · 이탈리아 전쟁 · 후스 전쟁 · 종교 개혁 · 독일 농민전쟁 · 슈말칼덴 전쟁 · 30년 전쟁(베스트팔렌 조약) · 7년 전쟁 · 나폴레옹 전쟁(제국의 해체) | }}}}}}}}} |
기원전 바이에른 지방에 처음 정착한 주민들은 켈트족들로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 지역을 라에티아 속주와 노리쿰 속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 켐프텐,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경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게르만족들이 대이동하여 로마 제국 영토를 침공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발생했고 이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물결 속에서 바이에른 땅에도 488~520년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바이에른족(바바리아족)이 들어와 원거주민인 켈트족, 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바이에른족은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공작령(Herzogtum Bayern)이라 불린다. 그 사이인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시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78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아길롤핑 가의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공작령을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제국)에 합병시켰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817년 프랑크 왕국은 분할되었으며, 바이에른 공작령은 루도비쿠스 1세의 차지가 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은 919년 독일 왕국으로 변모했으며, 바이에른 공국은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em duchy) 중 하나가 되었다(바이에른 부족 공국). 독일 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5대 부족 공국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된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마침내 교황의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바이에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얼마 후 황제의 견제와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976년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케른텐 공국이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되었다. 분리된 2개의 공국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으로 통합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을 거쳐 오늘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는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정적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으로부터 바이에른 영지를 몰수한 후 바이에른 궁정백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에게 증여하여 바이에른 공국의 오토 1세가 되었다. 이로서 유서 깊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주 남동부 지방인 오버바이에른, 니더바이에른만을 비텔스바흐 가문이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 도시, 수도원 보유지, 기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오토 1세의 아들 루트비히 1세는 결혼을 통해 라인 궁정백령을 얻어 라인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루트비히 1세의 아들 오토 2세는 라인 궁정백령과 니더바이에른은 장남 루트비히 2세에게, 오버바이에른은 차남 하인리히 13세에게 분할 상속하였다. 이 중 루트비히 2세의 막내가 루트비히 4세로서 바이에른을 통합하고 독일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323년에는 브란덴부르크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는 라인 궁정백령은 형 루돌프의 가계에게 넘겼으며, 그의 사망으로 인해 영토 역시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14세기 말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러 분가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하여 통치했다. 그리고 1356년의 금인칙서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황제 선출권을 빼앗겼으며 브란덴부르크는 1371년, 카를 4세에게 빼앗기며 독일 내에서 급격하게 세력을 잃었다.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브레히트 4세는 갈라졌던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모든 영토를 통합했고, 뮌헨을 수도로 삼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조 반박문으로 종교 개혁이 발생하자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가톨릭 수호의 입장을 취하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대항종교 개혁 세력(안할트 동맹)의 중심이 된다.
1545년,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6] 빌헬름 4세는 종교개혁에 동참할까 고민했으나, 카를 5세가 트리어나 쾰른의 선제후 중 하나는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하여 가톨릭으로 남았고, 후계자들인 알브레히트 5세와 빌헬름 5세를 거치며 바이에른은 매우 엄격한 로마 가톨릭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1583년부터 벌어진 쾰른 전쟁(Truchsessischer Krieg)의 결과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쾰른 선제후 자리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향후 약 200여년 동안 숙질 계승으로 쾰른 선제후 자리를 준세습화하였다.
30년 전쟁(1618년~1648년)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편에서 싸웠다. 그의 지도력으로 바이에른 공국은 영토를 확장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는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선제후 자리를 빼앗아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고 바이에른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30년 전쟁으로 바이에른은 초토화되었으며 팔츠 선제후국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선제후 자리를 되찾았다.
18세기에는 야심만만했으나 주제를 몰랐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카를 7세로 인하여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위 계승 전쟁들(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로 끝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1777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마지막 남계였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사망하면서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르에 의해 팔츠와 바이에른이 재통합되었고[7] 이 과정에서 황제 요제프 2세가 바이에른 일부 지역을 병합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반대로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접어들자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에 맞선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다. 그러나 1796년엔 프랑스 혁명군에,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에, 다시 1800년에는 프랑스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격상되었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나폴레옹 체제하인 1808년에는 바이에른 지방 최초의 헌법이 반포 되었으나, 이후 5년간은 프랑스 제1제국의 입맛에 맞게 수많이 개정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나폴레옹이 매우 불리해지자 나폴레옹 전쟁 후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독일 연방 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에 이어 3번째로 큰 국가가 되었다. 다만 티롤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조용히 반납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고 빈 체제가 들어선 후 막시밀리안 1세의 계속된 치세하에서 1818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 출신의 연예인 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에 퇴위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는 작센 왕국, 하노버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는 제3 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 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지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프로이센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 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에 가맹했으며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 활동, 군사 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제국 내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제2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 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 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1919년 아이스너는 암살되었고, 잇따른 혼란 속에서 혁명 위원회들이 '적색 테러'를 자행하고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했다. 이 공화국은 1919년 5월 독일의 육군 부대들과 민방위대들이 뮌헨을 탈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하면서 끝장이 났다.
1919년 8월에 통과된 새로운 바이에른 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1920년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영토였던 코부르크를 흡수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1920, 1921년에는 우익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뮌헨에서 시작되었고,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 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뮌헨 폭동). 실패 이후 바이에른에서 나치 당세는 급락했다. 맥주 홀 폭동 직전 선거에서 프랑켄에서 20%, 오버/니더바이에른 10%를 넘겼던 지지율이 폭동 직후 선거에서는 10%도 못 넘길 정도로 폭락, 이후부터는 나치 지지율이 전국 평균에 턱걸이할 뿐이었다. 선거 지도 이로 인해 1933년 이전까지는 바이에른 인민당에 밀려 바이에른의 주도권을 잡지는 못한다.
이후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잡자 독일의 모든 주들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이던 바이에른은 나치즘의 요새가 되었다. 당시 가톨릭 세력은 대체로 나치에 긍정적이지 않았으나 히틀러에게 가톨릭이 협력했다고 하면 독일 내에서는 백발백중 바이에른이다.[8] 그런 주제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당시 독일의 다른 주들에 비해 연합국의 폭격을 많이 받지 않았다.[9]
전후 바이에른은 미국 점령 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프랑스 점령 지역인 팔츠는 분리되어 새로 창설된 라인란트팔츠 주에 편입되었다. 1948년의 서독 기본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수도 베를린이 두 동강이 난 데다 공산주의 동독 영토인 브란덴부르크 주가 둘러싼 바람에 여러 대기업 본사들이 바이에른으로 이전해 전후 큰 경제적 발전을 이룬다.
설명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바이에른 영토는 팔츠 지방(현재 라인란트팔츠주 남부)도 포함하고 있었다.[10] 1920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월경지인 코부르크 지역을 흡수하였다.
4. 경제
독일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주로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BMW, 아우디, MAN, 알리안츠, 지멘스, 오스람 등 독일 유수의 기업들의 본사가 뮌헨을 비롯한 바이에른주 도시들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베를린이나 구 동독 지역에 본사가 있던 회사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도 적었고 승전국 중 미군 관할이었던 덕에 복구도 빨랐던 바이에른으로 대거 피난을 온 것이 주효했다.해외에서 독일 매체를 수입할 때, 바이에른 지역을 로컬라이즈 할 때는 부유하고 발전한 남부 지역이라는 공통점으로 미국의 부유한 텍사스, 영국의 부유한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 지역 등으로 각 나라에 맞게 로컬라이즈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바이에른과 텍사스,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는 모두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모두 정치적으로 보수세가 강하다.
5. 정치
바이에른 주의회의 원내 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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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11] 독일에서 가톨릭 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12]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한편 개신교 신자 비율은 총 인구의 19%이다. 바이에른의 얼마 안되는 개신교 관련 시설들은 대부분 바이에른 북부의 프랑켄 지방, 그 중에서도 미틀프랑켄 지방(뉘른베르크, 안스바흐 등)과 오버프랑켄 지방 동부(바이로이트, 호프, 쿨름바흐 등)에서 볼 수 있다. 단, 오버프랑켄 지방 서부에 위치한 코부르크는 독일 제국 멸망 이전까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영토였기에 개신교가 우세하다. 2018년에는 마르쿠스 죄더 주 총리가 '모든 공공 건물에 십자가를 의무적으로 부착하라'는 조례를 발표했다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기사
바이에른 지역 정당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기사련, Christlich-Soziale Union)의 본거지로, 2차 대전 이후 단 한 차례 주 총리를 사민당에 내준 것을 제외하곤 주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다만 시 단위 선거로 가면 특히 주도인 뮌헨이나 뉘른베르크처럼 규모가 있는 도시의 경우 사민당에 밀리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한다. 기사련(CSU)은 오직 바이에른에만 존재하는 지역 정당으로, 바이에른 이외 지역에서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협력하고 있다. 기민련(CDU)은 바이에른주의 지역적 특수성을 인정해서 따로 후보를 내지 않고, 기사련을 지지한다. 연방 의회에선 두 당이 연대하여 CDU/CSU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세부적인 지역구로 들어가면 대도시권인 뮌헨이나 뉘른베르크 등은 사민당 지지율이 좀 더 높으며, 시장도 사민당 소속이 더 많이 당선되었다.
한편, 바이에른은 1999년까지 독일의 16개 주 중에서 유일하게 양원제 의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는 하원을 Landtag(주의회), 상원을 Senat(원로원)이라 했다. 독일 연방의회처럼 공식적으로 양원은 별개의 기관이었으며, 이 당시 상원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아일랜드 상원과 비슷한 직능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필요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1999년에 주 헌법을 개정해 단원제로 전환하여 당시의 하원(Landtag)만이 현재의 단원제 주의회로 남아 있다.
주의회 선거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지만, 개방형이고 7개의 현에 따라 권역별로 의석 수를 정한다.
2018년 주 총선에서는 기사련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41.5%) 제1당 지위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전통의 맞수인 사민당도 추락하여 대신 동맹 90/녹색당이 의석을 더 확보했고,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이 사민당과 같은 수의 의석을 확보해 비상이 걸렸다. 결국 기사련과 중도~중도우파 정당인 자유 유권자(Freie Wähler, FW)[13]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다.
2023년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에서는 구 서독지역 주임에도 AfD가 약진하면서 독일의 극우화에 대한 우려가 다시금 드러났다. 그리고 연방의회 연정 3당(사민당, 녹색당, 자민당)은 2018년 대비 부진했으며, 특히 자민당은 아예 원외로 밀려났다. 같은 날 치러진 2023년 헤센 주의회 선거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면서, 안 그래도 지지율이 부진하던 올라프 숄츠 정권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여담으로 기사련의 활동 영역인 바이에른이지만 뷔르츠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슈하르트 시장은 예외적으로 기민련 소속이다. 슈하르트 시장은 기사련과 자민당이 공동으로 시장 후보로 추천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6. 특색
특이하게도 오늘날 바이에른 주의 행정구역과 별개로, 바이에른에 소속된 지역 전체가 바이에른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바이에른의 영역은 과거 바이에른이 북쪽의 다른 지역을 병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이에른은 크게 도나우 강 이북 지역과 도나우 강 이남 지역으로 나눌 수있고 진짜 바이에른 본토는 도나우강 이남에 해당하는 오버바이에른현과 니더바이에른현, 즉 양바이에른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이 양바이에른은 텔레비전에서 독일 국가(國歌)보다 바이에른 주가(州歌)를 먼저 연주할 정도로 지역색이 강하다. 중앙정부과 별도로 자체 국경 경비대(Bayerische Grenzpolizei)[14]까지 두고 있다.
양바이에른의 독특한 정체성은 복잡한 역사에서 기원한다. 양바이에른이 위치한 곳은 도나우강 이남으로, 원래 게르마니아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라이티아 속주와 노리쿰 속주였고 많은 도시들이 로마 제국 국경 방어선의 군단 기지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문명화가 일렀으며, 많은 로마인들이 살았고 민족 대이동기에 지배자가 된 바유바리족도 당연히 이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바이에른은 튜튼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냥 신성 로마 제국의 일원이라는 성향이 강했다. 현 바이에른인들은 로망스어를 안 쓰는 게르만족 이주민 바유바리족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역사는 강 건너 북방 미개 야만인 게르만족들과 달리 고대 로마 및 라틴족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어쩐지 이중적인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다. 바이에른인들은 빵도 Brot라고 안 하고 라틴어 simila(밀가루)에서 기원한 Semmel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서게르만에서 독일이 분기되어나오는 최초의 계기는 튜튼어를 로마문자로 재구성한 로마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특히 로마인들의 후예가 많이 살고 있었던 바이에른 지역은 사실상 독일이 최초로 태동한 지역이라고 할 수있다. 튜튼과 로마의 후예로서 가장 오래된 문화적 독일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바아에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와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진짜 원조 독일로 생각한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로 성서독일어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일반적인 근현대 독일권 관념과 다른 독자적인 독일관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있다. 대부분의 근현대 독일인들은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는데 사용한 독일어로 반로마-개신교-영방시민적인 상호동질감을 형성했지만 로마의 후예를 자처하는 정통 가톨릭 왕당파 바이에른인들에게는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독일이 종교개혁의 고향으로 완전히 이미지가 굳어진 가운데서도 베네딕토 16세라는 독일인 교황이 선출될 수 있었던 저력으로도 작용하였다.[15]
언어적으로도 양바이에른은 다른 지방과 구분된다. 다른 독일 지방에도 각 지역 언어가 존재하듯이, 양바이에른에는 바이에른어(오스트로바이에른어, '바이에리슈' 혹은 '바이리슈')[16]라는 지역 언어가 따로 존재하는데,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바이에른어를 알아 듣지 못해 별도의 사전을 구매하기도 한다. 바이에른어는 독일의 표준 독일어보다는 오스트리아 독일어에 가깝다. 바이에른 사람들에게 오스트로바이에른어를 '사투리(Dialekt)'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며 '지역 언어(Lokale Sprache)'라고 강변한다. 바이에른인들은 어쩔 수 없이 공식적으로 '개신교적인' 표준 고지독일어를 쓰는 것과 별개로 자신들이 독일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토착언어를 쓰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오죽하면 바이에른어를 쓰지 말자는 공익광고가 있을 정도.
바이에른어 사용 지역[17]은 바이에른 대부분 지역과(프랑켄, 슈바벤 현 지역 제외) 작센 주 남부 극히 일부 지역, 오스트리아 대부분 지역, 스위스 동부 일부 지역, 이탈리아 쥐트티롤 지역, 그리고 독일계 주민이 모여 사는 헝가리 외덴부르크(헝가리어로는 쇼프론)과 체코 뵈머발트(체코어로 슈마바) 지역에 분포해 있다.
바이에른어-독일어 사전. '바이리쉬'의 철자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
바이에른인들의 국적이 독일이기는 하나, 양바이에른인들이 생각하는 독일과 다른 지역민들이 생각하는 독일은 같지 않다. 때문에 양바이에른인들은 다른지역 독일인들의 독일관념을 근본도 없는 이단적 아류로 보고, 다른 지역 독일인들은 양바이에른인들의 독일관념을 시대착오적 나르시시즘으로 치부한다. 게다가 실제로 후술할 양바이에른의 경제력이라던가 혹은 지역 축구 구단인 바이에른 뮌헨의 입지가 워낙 강력한 탓에 바이에른 우월주의와 그에 대한 반발여론으로 독일 국내에서도 말이 많다. 어쨌든 독일인에게 바이에른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다. 잘못하면 싸움난다.
독일 내에서도 그렇지만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잘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잘 사는 지역은 아니었고,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이 분할되면서 동독에 있던 기업들이 주로 바이에른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 왕국(공국) 수도인 뮌헨이나 원래 자유도시였던 대도시들을 빼면 대부분 농경지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독일 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다. 이처럼 지역 산업의 주축이 농업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던 당시 집권당인 사민당의 농지 개혁을 반대한 나치당 등의 지지세가 높았다.[18]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폴란드, 체코로 할양된 동쪽 영토에 살고 있던 많은 독일인들과 기업들이 국경 지대에 있고 땅도 넓고 지가도 싼 바이에른으로 대거 이주, 이전해왔고, 소련이 점령하게 된 동독에서도 많이 넘어왔다.
바이에른의 졸른호펜(Solnhofen) 지역은 쥐라기의 동물 화석으로 유명하며 시조새로 유명한 아르카이옵테릭스와 콤프소그나투스의 첫 화석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은 보존율이 뛰어나서 웬만한 연조직(깃털이나 날개막 등)이 화석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또한 1400만 년 전에 운석이 충돌해 생긴 지금 24km짜리 크레이터, 리스(Ries) 분지도 바이에른 지역에 있으며 그 분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중세도시 뇌르틀링겐에 리스 분지 박물관이 소재해 있다. 방문하면 NASA가 기증한 월석도 구경할 수 있다.
지역방송인 BR은 교향악단과 독일판 방통대라 할 수 있는 'Telekolleg'를 운영하고 있다.
6.1. 프랑켄 지역에 대한 푸대접
프랑켄 지역은 바이에른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프랭키쉬(Fränkisch)라는 별도의 지역 언어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바이에른과는 매우 다른 지역색을 가지고 있다. 프랑켄 지방 대부분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바이에른주에 속하기는 하지만 바덴뷔르템베르크와 헤센, 튀링겐 등 인접 주에도 걸쳐있다.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나우강의 수계인 바이에른 지역과 달리 프랑켄 지역 대부분[19]은 라인강의 지류인 마인강 수계에 형성된 지역이다.역사적으로 프랑켄은 본래 바이에른의 일부가 아니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19C에 와서야 나폴레옹에 협력한 바이에른 공국이 나폴레옹으로부터 프랑켄 지방을 할양 받으면서 바이에른 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그 이후 바이에른 내 2등 지역처럼 취급받으면서 지금까지도 지역감정이 이어지고 있다.
바이에른 남부가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선제후국-왕국 루트로 바이에른으로서의 일관적인 정체성을 가진 반면, 북부의 프랑켄 지역은 중세 이래 여러 주교령[20]과 중소제후, 오히려 프로이센의 시초가 되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지가 있던곳으로 역사적으로도 19세기 초 바이에른 왕국에 통합될때까지 다른 길을 걸었다.
특히 현재 바이에른은 독일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꼽히는데, 프랑켄은 그 혜택을 그만큼 보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감정도 있다. 결정적으로 이 지역은 바이에른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구 프로이센 왕가(호엔촐레른안스바흐 분가)[21]의 근거지[22]이다. 종교적으로도 오랫동안 바이에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프로이센 왕가와 연이 있는 곳인 만큼 바덴뷔르템베르크처럼 개신교의 남방 한계선 역할을 맡은 도시들이 꽤 있는데, 특히 바이로이트, 쿨름바흐, 안스바흐의 경우 시내의 종교 시설이 바이에른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루터교회 위주로 되어 있다.
바이에른 주 소속임에도 이렇게 스스로 바이에른인이 아니라 프랑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뉘른베르크나 바이로이트 같은 프랑켄 지방의 도시들로 가면 하늘색과 하얀색의 바이에른주 색깔은 거의 보이지 않고, 빨간색과 하얀색의 프랑켄 지방 색깔을 훨씬 많이 볼 수 있다.
맥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바이에른이라, 프랑켄 지역을 '와인 따위나 마시는 동네'로 폄하하기도 한다.
6.2. 바덴뷔르템베르크와의 라이벌 의식
같은 남독일로 분류되지만 서쪽에 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와 지역감정이 있다. 양바이에른이 바이에른족과 로마인의 후예인 반면 바덴뷔르템베르크는 알레만족의 후예로서 시작부터 계통이 달랐으며, 바이에른은 종교개혁 시기에도 가톨릭 신앙을 유지한 비텔스바흐 가문[23]이 지배한 지역이었고, 지역 도시 잉골슈타트는 독일 내 예수회와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최대 거점이라 불렸을 정도로 가톨릭 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그에 반해 뷔르템베르크 지역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일찌감치 개종하여 루터파의 남독일 최대의 거점이었으며, 당대 제후 울리히와 크리스토프 역시 종교개혁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 저항하다가 털려서 영지를 몰수당했다가 헤센 방백 필리프의 도움으로 되찾는 등 16세기부터 20세기 초 독일 제국 해체까지 루터파를 완강히 신봉한 프로테스탄트 제후였으며,[24]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엔 작센과 함께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공작도 동시에 왕 작위를 받았을 정도로 남독일에선 수위를 다투는 큰 세력들이었다. 이런 문제로 두 지역은 지금도 라이벌적인 감정과 함께 종교 분포도 등에서 꽤나 차이를 보인다.[25]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는 양 지방의 대표 도시임과 동시에 남독일 최대의 공업 도시들이기도 하며 독일 세계 유수의 자동차 제조 기업인 BMW가 뮌헨에 본사를, 아우디가 잉골슈타트에 본사를 두고 있는 반면, 역시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자동차 기업인 벤츠, 그리고 고급 스포츠카 브랜드인 포르쉐는 슈투트가르트에 본사를 두고 있다. 재미있게도 두 주에 다 로텐부르크라고 불리는 지명(로텐부르크옵데어타우버, 로텐부르크암네카어)이 있다.정치적으로도 바이에른은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주 여당의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었기에 보수·우파 색채가 짙은 반면, 바덴뷔르템베르크는 동맹 90/녹색당 등 진보·좌파 세력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두 지역 사이에 알고이(Allgäu)라는 지역이 있는데, 두 주에 치여 놀림감이 되는 곳이다. 정작 거기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이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와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이곳에 위치해 있으며 최근에는 물 끼얹어서 치료한다는 바트 뵈리스호펜이란 마을이 알려지기도 했다.
6.3. 북독일 폄하 풍조
과거부터 대대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현재 브란덴부르크)에 라이벌 의식과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그 후신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베를린,[26] 거기에다 한자동맹 자유시인 함부르크와 브레멘에까지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축구 경기에서도 바이에른 뮌헨-베르더 브레멘 경기와 바이에른 뮌헨-함부르크 SV 경기에서 강한 라이벌 의식이 드러난다.바이에른은 본래 프로이센과 동등한 왕국이었으나, 187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저히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고, 바이에른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통일 이전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큰 연방국 중 하나였으며, 통일된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 주도 하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새 독일 제국에서의 주도권은 프로이센, 함부르크와 브레멘 등 구 북독일 연방 세력, 거기서도 특히 인구, 면적과 경제 규모가 우월한 프로이센이 잡게 되었다. 새 독일 제국의 황제, 수상, 국기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제도들이 프로이센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참 오묘하게도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던 바이에른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각을 세웠지만[27] 그리 홀대를 받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술했듯이 독일 지역권 내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단일 세력이었기 때문에 프로이센 측도 적대시하는 쪽보다는 포섭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 당장 오스트리아 편을 든 북독일 연방국 중 하노버 왕국, 나사우 공국, 헤센 선제후국은 아예 망했고, 헤센 대공국과 작센 왕국도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28] 이렇게 줄 잘못 섰다가 풍비박산난 다른 왕/공국들과는 반대로 프로이센 측에서는 하노버를 멸망시키고 털어먹은 금고의 금괴를 전부 바이에른 왕국에 뇌물로 넘기면서 통합을 제안했고, 1871년 바이에른 왕국도 독일 제국에 제후국으로 가맹하게 된다. 그리고 이 뇌물로 받은 금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건축 덕질로 탕진한다.
역사적으로 바이에른 사람들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을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보다 유서깊다고 여겨서[29] 바이에른 사람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한자동맹 자유시가 개신교인 반면 바이에른은 가톨릭 국가였고, 독일 제국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이 전국을 개신교 지역으로 만들려는 작업에 착수하며 가톨릭 지역을 압박한 것도 그 반감에 더 불을 지피기는 했지만.[30]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도 '프로이센이 멋대로 일으킨 전쟁에 바이에른이 이끌려갔다'라고 여길 정도였으며, 이는 프로이센의 중심지 베를린에서 유지되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이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중도 좌파 성향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지자, 바이에른은 강경 우익을 지원하여 나치의 발상지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내륙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베를린, 브란덴부르크[31] 등이나 함부르크보다도 연합국의 폭격을 덜 맞아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타 지역보다 덜했다. 전후 복구 역시 전쟁 피해를 직접적으로 본 영국이 점령한 니더작센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소련이 점령한-그리고 반은 동독이 가져가고 반은 동독에 포위되어 고립된-베를린, 아예 소련이 전부 점령하고 폴란드에 절반이 털려나간 데다 공산화까지 되어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던 브란덴부르크보다는 쇼 미 더 머니를 쳐가며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도 여력이 충분한 미국이 점령한 바이에른 쪽이 훨씬 수월하고 빨랐다. 여기에 더해 베를린에서는 지멘스와 알리안츠의 본사가 바이에른으로 이전되고, 작센에서는 아우디 본사가 이전되며 바이에른은 어부지리를 누렸다. 유명한 것들만 추린 게 이 정도고 언급 안 된 기업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
결국 프로이센은 양차 대전 이후에 오데르 강 이동 지역에 있던 영토들 대부분을 폴란드와 러시아에게 빼앗긴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수도이자 정치적 중심지인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도 베를린 공방전으로 초토화되면서 망해버린 반면, 해안이 없는 내륙 지대에 농경지 밖에 없어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바이에른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받아 살아남았고, 폴란드와 러시아에게 합병당한 구 프로이센 지방과 대전 말기 베를린 공방전으로 초토화된 수도 베를린 등지에서 나온 실향민과 피란민들이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덜했던 바이에른 지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지역 인구도 늘어나고,[32][33] 전후의 여러 혜택들을 골수까지 빨아먹으며 오늘날 독일에서 전쟁으로 잃은 구 프로이센 지역들보다 부유한 지방이 된 걸 감안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한편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바이에른과 대비되는 북부 지역 '대표' 이미지를 니더작센이 갖게 되었는데(산악 내륙 지역과 대비되는 평지와 바닷가, 가톨릭과 대비되는 개신교 이미지 등) 실제로도 폭스바겐의 본사가 하노버 근교인 볼프스부르크에 자리잡고 있다. 즉 동서독 분단 이후의 남북 지역감정 구도는 바이에른 대 니더작센 이미지로 재편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사투리 역시 바이에른 사투리와
7.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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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행정구역 |
- 뮌헨(주도)
- 뉘른베르크
- 아우크스부르크
- 레겐스부르크
- 잉골슈타트
- 퓌르트
- 뷔르츠부르크
- 에를랑겐
- 밤베르크
- 란츠후트
- 바이로이트
- 아샤펜부르크
- 켐프텐
- 로젠하임
- 파사우
- 슈트라우빙
- 다하우
- 호프
- 메밍겐
- 안스바흐
- 코부르크
-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개최지.
- 린다우
- 로텐부르크옵데어타우버
8. 매체에서
원조이다 보니, 옥토버페스트를 다루는 매체에선 반드시 등장한다. 특히 깃털 달린 모자와 멜빵반바지 차림의 남성이나, 하얀 블라우스와 앞치마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맥주잔을 들고 호탕하게 웃고 있다면 열에 아홉은 여기다.위와 별개로 나치즘의 고향이라는 흑역사 탓에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흔한 편이며,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혼란을 그린 작품에선 온갖 반란과 테러가 난무하는 마굴 취급이다.
예시로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을 묘사한 히틀러:악의 탄생에서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기 전까지의 주무대로[36], 히틀러의 연설에 환호하는 바이에른 시민들과 그에게 호감을 표하는 바이에른 지도부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이 지역의 사투리가 네모바지 스폰지밥에서 잠시 등장한다. 정확히는 독일어 더빙판에서 원래 징징이가 자신을 독일인이라 둘러대자, 스폰지밥이 독일어를 흉내내는 것을 바이에른어로 그러는 것으로 현지화되었다. 사실 외국 매체에서 자국어가 등장할 때 그 언어의 더빙판에서는 뭔가 차이를 줘야 하니 사투리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의 경우 바이에른어가 단골이다.
나치 독일이 세계를 정복했다는 설정인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선 작중 로스웰에 주둔한 친위대 병사가 여긴 바이에른이 아닌데도 왜 털양말을 보급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잠시 언급한다.[37]
9. 관련 문서
- 바이에른 왕국
- 뮌헨: 독일 제3의 도시이자,[38] 바이에른의 심장부.
- FC 바이에른 뮌헨: 뮌헨과 바이에른, 나아가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프로 축구단.
- TSV 1860 뮌헨: 뮌헨이 연고지인 축구단이자 FC 바이에른 뮌헨의 지역 라이벌.
- 레겐스부르크
- SSV 얀 레겐스부르크: 레겐스부르크가 연고지인 축구단, 현재 2. 분데스리가에 참가.
- 아우크스부르크
- FC 아우크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가 연고지인 축구단, 현재 분데스리가에 참가.
- 바이에른 요리
- 프랑켄 지역: 바이에른과는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는 바이에른 북부에 위치한 지역이자 前 왕국.
- 뉘른베르크: 바이에른 제2의 도시이자, 프랑켄 지역의 심장부.
- 1.FC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가 연고지인 프랑켄 지역 최고의 프로 축구단이자 FC 바이에른 뮌헨의 지역 라이벌.
- 밤베르크
- 로텐부르크
- 프랑켄 요리
- 기독교사회연합: 오직 바이에른에서만, 바이에른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정당.
- BMW: 바이에른 자동차 산업의 자존심. BMW는 Bayerische Motoren Werke의 약어이며, 이를 해석하면 '바이에른 주의 원동기 제작 회사'라는 뜻이다. BMW의 로고에도 바이에른 주의 주기가 사용되었다.
- 아우디: 독일 자동차 브랜드 서열
영원한3위. - 아디다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이자 나이키에 대항하는 독일인의 자존심.
- MAN: 독일의 상용차, 엔진, 기계 제조 업체.
- 바이에른급 전함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바이엔슈테판
- 파울라너
- 아돌프 히틀러
[1] 큰 방패 내 4개 문양은 11시 방향부터 시계 방향으로 오버팔츠, 오버/미텔/운터프랑켄, 슈바벤, 니더/오버바이에른을 상징한다. 가운데의 작은 방패는 비텔스바흐 가문을 상징한다.[2] Markus Söder[3] 실제 발음은 버베어리어에 가깝다. 바바리아는 관용적 표기인 셈.[4] '바이얀'이라고 들리기도 하지만 끊어서 읽으라고 해보면 Bay-ern으로 끊어서 읽는다.[5] 바이에른에서는 단어가 약간 달라서 브레체(Breze) 또는 브레첸(Brezen), 브레츤(Brezn)이라 한다.[6] 빌헬름 4세는 어머니의 압력에 동생 루트비히 10세에게 란츠후트를 떼주었는데 루트비히 10세는 자녀가 없어 다시 환수했다.[7] 대신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한쪽 가계가 끊기면 다른 한쪽의 가계가 물려받을때 황제선거권을 1표로 제한하는 조항이 있어 팔츠-바이에른 1표로 통합되었다.[8] 추축국 최대 점령 영역까지 확장하면 여기에 크로아티아 독립국도 포함된다. 다만 이건 일부의 이야기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부모 등 일반 평신도들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9] 전쟁의 책임은 오히려 프로이센에게 돌아갔다. 프로이센의 기득권이자 독일 군부의 주축인 융커들은 독일의 군국주의를 이끌기는 했지만 나치와는 미묘한 관계였으며 검은 오케스트라처럼 히틀러를 적대한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연합국(사실 소련은 군사교류 시절의 경험으로 독일 군부와 나치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프로이센을 벌하는 것에는 미온적이었다)은 프로이센을 해체시켰다.[10]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상속받으며 병합해서 그렇다. 대신 나폴레옹 전쟁으로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였던 하이델베르크와 만하임은 바덴 대공국으로 떨어져나가 오늘날에도 라인란트팔츠가 아닌 바덴뷔르템베르크에 속해 있다.[11] 독일은 종교개혁의 진원지라서, 가톨릭이 보수적이고 개신교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미국이나 영국, 한국의 상황과는 다른 셈.[12] 독일은 전체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인구수가 비슷하다. 그러나 지역별로 비율의 편차가 크며, 남부는 신성 로마 제국부터 이어오는 골수 가톨릭 지역이다. 반면 북부는 개신교의 발상지이기에 개신교 선호가 강세다.[13] 지방자치,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정당이라 주의회나 주의회보다 단계가 낮은 지방의회에서만 활동하는데, 유일하게 바이에른의 자유 유권자만 선거를 통해 주의회에 진출했다. 브란덴부르크 주의회의 자유 유권자는 이름만 같은 별개의 정당이다.[14] 1946년 창설되었다. 동서독 분계선도 바이에른 지역은 바이에른 국경 경비대가 경비했다. 그러나 탈냉전과 오스트리아의 EU 가입 여파로 1998년 해체되었으나, 유럽 난민 사태로 2018년 재창설됐다.[15] 베네딕토 16세도 바이에른 태생이다.[16] 해당 언어에 대한 맞춤법 규정이 따로 없는 채로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철자가 매우 다양하다. Bayerisch, Bairisch, Bayrisch 등으로 표기 된다. 바이에른어로는 Boarisch라고 적는 듯. 타 지역 방언들도 비슷한 조어 방식을 가진다. 한국식으로 하면 경상도어, 전라도어, 서울어라고 하는 식이지만 단순히 방언이 아니라 옛날에는 각각 다른 나라였기 때문에 인식이 다르다.[17] 여기선 Boarisch라고 적고 있다.[18] 반면 수도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던 구 동독 지역은 산업이 발전했고, 공장에 취직한 노동자들이 많아서 공산당의 세력이 강했다. 오죽하면 당시 베를린의 별명이 ‘붉은 베를린’이었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베를린 지역 당 지도자로 취임했을 때에는 당 내부에서도 험지에서 고생한다는 인식이 컸을 정도였다.[19] 일부 페크니츠 등 도나우강 수계에 속한 지역도 끼고 있다.[20] 뷔르크부르크 주교령, 밤베르크 주교령 등[21] 프로이센 공국을 창설한 알브레히트 공작이 안스바흐 분가 출신이다.[22] 다만 안스바흐 분가를 포함한 모든 호엔촐레른 가문의 종가인 호엔촐레른성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다.[23] 다만,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은 종교적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가톨릭을 유지했다.[24]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직계는 빌헬름 2세(호엔촐레른의 빌헬름 2세와는 동명이인이다)를 끝으로 단절되었으며, 이후 가톨릭교도인 알츠하우젠 계통의 방계가 뷔르템베르크 왕위 요구자로 정해져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25] 어떻게 보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관계와 비슷하다. 스위스는 개신교도가 어느 정도 있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가톨릭교도가 주를 이룬다.[26] 현재 독일에 남아 있는 프로이센 지역 중 바이에른과 경제 및 인구 규모로 대항할 만한 곳들이다.[27]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으며, 보오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 측 연합군으로 참전했다.[28] 사실 이 두 나라도 프로이센이 완전히 병합하려 했으나 러시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선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특히 헤센은 강제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당한 북부 오버헤센을 사실상 프로이센한테 뺏겼다.[29] 실제로 루트비히 4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될 무렵, 호엔촐레른 가문은 뉘른베르크에서 황제 거성이나 관리하고 있었던 소규모 귀족 가문이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호엔촐레른 가문 이전에 브란덴부르크를 통치하기도 했고, 프로이센의 실질적인 본체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호엔촐레른 가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1415년 이후의 일이다.[30] 다만 이 사안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딱히 바이에른만 압박한 것은 아니어서,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가톨릭이 무시못할 지분을 차지하던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오버슐레지엔, 베스트프로이센, 포젠 등의 가톨릭 세력도 처지가 별다를 바 없기는 했다.[31] 전부 옛 프로이센 왕국 지역이다.[32] 다만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힌터포메른 등 구 프로이센 지역 영토들에서 빠져나온 구 프로이센 지역의 실향민들은 전쟁 당시 독일이 영유권을 상실한 구 프로이센 지역과 다른 지역 정서와 문화, 자연환경 때문에 바이에른이나 바덴뷔르템베르크 같은 남부 내륙 주 지역에서 정착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33] 그나마 내륙이던 슐레지엔 출신 실향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부 내륙 주들에서 정착, 적응하는데 성공했지만 해안 지대였던 동프로이센과 힌터 포메른 지역 출신 실향민들은 바다가 없는 바이에른이나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정착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했다.[34] 실제로 동서독 통일 이전 오씨(Ossi)란 단어는 본래 동프리슬란트 사람들을 뜻하던 단어였다.[35] 저지독일어의 한 갈래이다.[36] 된 후에는 무대가 당연히 베를린으로 옮겨진다.[37] 로스웰은 거의 사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메마른 곳으로, 지역 특성상 밤에는 좀 춥긴 하지만, 바이에른의 알프스 지역처럼 털양말을 신어야 할 곳은 아니다. 작중의 병사도 그 때문에 발에 습진이 생겼다는 불평을 덧붙인다.[38] 나머지 둘은 베를린과 함부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