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3:48:20

성상 파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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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성상파괴주의 측에서 그린 프로파간다성 책자의 삽화. 예수의 초상에 회칠을 하는 것을, 십자가에 박힌 예수에게 물을 먹이는 것에 비유하였다.[1]
그리스어 Εἰκονομαχία (Eikonomachía)
그림에 대한 투쟁
라틴어 Iconoclasmus
프랑스어 Iconoclasme
영어 (Byzantine) Iconoclasm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레온 3세의 성상 파괴령 (726년)3.2.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성상파괴운동3.3. 이리니의 반동 정책3.4. 2차 성상 파괴운동3.5. 성상 파괴주의의 종말
4. 성상 파괴주의 황제 목록5. 성상 파괴주의와 동서 교회 대분열의 관련성6. 여담7. 관련 문서8.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들

1. 개요

동로마 제국에서 두차례 (1차: 726 ~ 787년/2차: 814 ~ 842년)에 걸쳐 일어난 대대적인 성상 파괴 운동. 아랍 무슬림 세력인 우마이야 왕조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극복한 이사우리아 왕조레온 3세가 시작하여 아모리아 왕조까지 지속되었다. 신의 형상이나 인간/동물의 우상 제작을 거부하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칼케돈 파와 단성론과의 대립으로 아랍인들에게 시리아와 이집트를 빼앗긴 동로마 제국이 그나마 남은 영토 내에서 기존의 칼케돈 파와 성상 파괴주의파로 다시 분열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동로마 황제들의 성상 파괴주의는 포교의 수단으로 성상을 적극 활용하던 로마 교황의 반발을 사서 동서 교회의 갈등을 유발, 1054년에 상호 파문으로 벌어진 동서 교회 대분열의 시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내에 있는 성 이레네 성당은 이 성상파괴시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인데, 당시 성상들이 파괴되어 현재까지 본당 안에 십자가 하나만 달랑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 이 건물은 회칠도 없었고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궁전 무기고, 보물창고, 19세기에 들어서는 궁중보물박물관으로 활용되었다.

2. 배경

유스티니아누스 2세 이후 20년 간의 혼란 끝에 황제로 등극한 레온 3세가 성상 파괴 명령을 내리고, 성상 파괴 주의자들을 대거 중용하면서 발생하였다.

레온 3세가 이같은 일을 벌인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까닭은 종국에는 성상 파괴 운동이 소멸되어 근거 이론 등을 담은 저작들은 전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레온 3세의 출생지 및 근거지가 각각 게르마니키아 및 이사우리아라는 동방이었고, 레온 3세 사후로도 시리아가 성상 파괴 주의의 배후지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몇가지가 추론되고 있다.

1. 가장 우선적으로, 시리아 지역은 전통적으로 단성론의 근거지였는데, 사실상 성상 파괴주의는 단성론적인 사고에서 기인했다는 점. 사실 아래 이유들보다 이게 정설로 취급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상파괴주의는 수백년 간 제국의 골치를 썩이던 단성론 문제가 해결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 단성론 거점에서 발흥했다는 게 굉장히 수상하다. 간단히 말해 이단으로 공인된 탓에 더이상 등장할 자리가 없던 단성론이 성상파괴주의로 포장지만 바꿔 재등장했다는 것. 참고로 단성론은 성상 파괴주의 이후로도 수차례 포장만 바꿔 재등장할 정도로 끈질겼다. 하지만 '레온 3세가 단성론을 지지한 황제가 끌어내려지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과연 단성론을 지지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존재하며, 레온 3세 본인은 독실한 정통 정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2. 인근 지역에서 이슬람교가 발흥했는데, 이슬람교의 철저한 우상 숭배 금지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 위의 내용이 대체로 정설이지만, 그래도 직관적으로 볼때 이슬람교의 영향을 지우기가 어렵긴 하다. 유의할 것은 이것이 동방이 아닌 서방의 교회에서 주로 주장했다는 것이다. 서방교회는 성상파괴주의 황제들을 Sarakenophron, 즉 사라센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멸시하였다. 이른바 성상파괴가 이슬람과 유대교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은, 동로마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동로마 황제를 멸시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레온 3세 및 성상파괴주의의 주요 지지자들은 변방의 군인들로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양 있는 귀족들과 교육 수준 및 내용이 달랐는데 이로 인해 십계명 4조의 우상 숭배 금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렸다는 점. 콘스탄티노폴리스 지역의 그리스인들은 수백 년간에 걸친 종교적 말씨름과 키배와 현피 끝에[2] 우상 숭배에 대한 내용 역시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관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시골 출신의 군인들은 사정이 달랐던 것.

4. 황제권 강화 노력과 동시에 당시 강력한 권한을 가졌던 수도원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는 것. 무난하고 평이한 설이다. 로마 황제는 전통적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 종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한 전통적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당시 강력한 권한과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수도원을 견제하기 위해 성상파괴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강력한 수도원 견제는 후대인 콘스탄티노스 5세대에 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레온 3세는 법률적으로는 '에클로가' 반포, 군사적으로도 공이 많은 강력한 황제였으며 로마 주교(교황)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성상파괴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3. 전개

세계사적 변화나 의의에 대해선 아래에서 다루고, 이 항목에서는 동로마 제국 내에서 벌어진 사건들만 대략 다룬다.

3.1. 레온 3세의 성상 파괴령 (726년)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위협과 정국 불안정으로 인한 20년간의 혼란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현실에 절망한 국민들은 성상에 의존했고 급기야 성화 자체를 노골적으로 숭배하거나 세례식에서 성화를 대부모로 사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과도한 성상 숭배 풍조는 소아시아의 많은 주교들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성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여기고 이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제국, 나아가 기독교권 전역에 확산시키고자 노력했다.

717년 3월에 즉위한 레온 3세는 그해 이슬람 세력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무너져가던 제국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레온은 성상을 불리한 전황을 뒤집는 데 활용했다. 가령,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군에게 포위되었을때 기적을 일으키는 성화로 유명했던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길을 가리키는 성모 마리아) 성모상'을 치켜들고 도시 성벽에서 행진하게 했다.[3] 그 결과 동로마군은 용기를 얻어 침략자에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본래 시리아 출신이었던 레온은 내심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성상 파괴주의를 신봉했다. 721년 칼리프 야지드 2세가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성당, 시장 주택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상들을 즉각 파괴하게 했을 때, 레온은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또한 레온은 725년에 대중들 앞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 행위가 모세십계명 중 둘째[4] 계명[5]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726년 여름, 테라 섬과 테라시아 섬 사이의 에게 해에서 해저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해일이 발생했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레온은 이를 제국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하고 성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며 본격적으로 성상 파괴 운동을 개시했다. 그는 우선 소피아 대성당의 입구에 위치한 칼케 대문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형 성화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파괴 작업을 감독하는 지휘자에게 거센 공격을 가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고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에게 해의 함대와 트라키아의 육군에서도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727년, 라벤나 총독령의 백성들은 황제가 성상 파괴운동을 벌이는 것에 격노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파울로스 총독은 살해되었고 휘하의 관리들은 달아났다. 반란군은 자체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또한 투시아에서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하다 3년만에 진압되었다. 레온은 군대를 파견해 라벤나의 반란군을 제압하는 한편 3년간 동서방의 교회 지도자들과 협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황제는 73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 제르마노스를 해임하고 유약하고 고분고분한 성직자 아나스타시오스를 세계총대주교로 앉힌 뒤 마침내 성상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으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성상성물들이 파괴되었고, 성상을 간직한 자들은 체포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소아시아 남부의 카라비시아노이 테마와 그리스 지역의 헬라스 테마에서도 아갈리아노스 콘토스켈레스 등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당했다.[6]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이러한 황제의 칙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레온은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으나 아드리아 해에서 풍랑으로 침몰해버렸고 그 직후 교황은 병으로 사망했다.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731년 초 황제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교회들에서 나오는 연간 수입을 몰수해버리자 그해 11월에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상에 불경스럽게 손을 대는 자는 파문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황제는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그리고 발칸 지역의 교구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옮기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렇듯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갈등은 성상 파괴운동으로 인해 갈수록 격화되었다.

참고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관할구역상 경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정해졌던 다키아 및 마케도니아 관구와 트라키아 관구[7]가 이 때까지 그대로 왔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지금 정교회의 통칭이 '그리스' 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오늘날의 그리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북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저 경계선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산하에 있었는데, 레온 3세가 교황의 관할에서 떼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줌으로써 이 때부터 정교회 및 그 전신에 속하게 되었다.

3.2.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성상파괴운동

741년, 레온 3세가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는 720년에 2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공동 황제가 되었고 아버지의 성상 파괴 정책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이에 성상 숭배세력은 그를 축출하기로 결의하고 콘스탄티노스의 매형 아르타바스도스를 주축으로 하여 742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아르타바스도스는 사라센을 정벌한다는 핑계를 대고 동방으로 가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해 손쉽게 공략한 뒤 황제를 자칭했다. 그 후 그는 성상을 복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콘스탄티노스는 아모리움으로 피신해 아나톨리아의 군대를 끌어모아 743년에 소아시아의 사르데스에서 아르타바스도스를 격파하고 그해 11월 2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아르타바스도스와 그의 두 아들 니키타스, 니키포로스는 원형 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실명당했고 그의 주요 지지자들은 처형되거나 다양한 신체 절단의 형벌을 받았다. 또한 찬탈자에게 제관을 씌워 준 아나스타시오스 세계총대주교는 매질을 당하고 벌거벗겨진 채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원형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황제는 뜻밖에도 아나스타시오스가 계속 세계총대주교를 맡게 했는데, 이는 세계총대주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후 콘스탄티노스는 제국 동방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사라센인과 여러 차례 교전해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주교들을 해임하고 입맛에 맞는 주교들을 임명했으며 믿을 만한 지지자들에게 새로운 교구를 만들어줬다. 그러던 754년 2월 10일, 황제는 보스포루스의 히에리아(Hiereia, Hieria) 궁전에서 공의회를 개최했다. 공의회에 참석한 338명의 고위 성직자들은 7개월 동안의 토의 끝에 8월 29일 "그리스도의 본성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으므로 유한한 공간 속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묘사한 성상은 우상 숭배와 같은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폐기되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성상 옹호론자들을 파문하는 한편 수도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했다. 당시 수도원은 대표적인 대토지 소유자였고 면세 해택을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수도원을 쥐어짜면 상당한 토지를 얻어내 신민들에게 나눠줌으로서 세수를 늘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수도원 탄압은 정도가 지나쳤다. 그는 수도원을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비하하면서 수도원을 온갖 죄악과 타락의 온상지로 취급했다. 비티니아의 성 아욱센티오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스테파노스는 온갖 죄목을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돌팔매질을 맞아 죽었다. 그리고 수백 명의 남녀 수도자(수사, 수녀)들은 성상을 공경했다는 이유로 신체 절단, 처형 등의 형벌을 당했다.

심지어 트라키시온 테마의 총독 미카일 라카노드라콘은 남녀 수도자들을 불러모아서 "당장 서로 결혼하지 않으면 키프로스로 유배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말을 듣지 않는 수사의 수염에 불을 붙였으며, 버려진 수도원 서고의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금과 은으로 된 제기들을 팔아 그 수익금을 황제에게 보냈다. 황제는 그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그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황제가 이런 태도를 보이니 다른 테마라고 다를 바 없었고, 제국의 수도원들은 심각한 파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많은 수도자들은 제국의 통제가 미치지 않은 지역으로 도망쳤다.

3.3. 이리니의 반동 정책

775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망한 뒤 즉위한 레온 4세는 아버지처럼 성상 파괴주의를 따랐지만 우유부단해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지 못했고 황후 이리니의 압박으로 성상 파괴 운동의 강도를 줄였다. 그러던 780년 9월 8일 레온 4세가 열병을 앓다가 사망하자, 이리니는 10살짜리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황제로 세우고 스스로 섭정이 되어 11년간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녀의 섭정은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성상 파괴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아나톨리아의 군대는 성상 옹호론자인 그녀의 집권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키고 레온의 다섯 동생들 중 장남 니키포로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봉기는 곧 진압되었고 주모자들은 처형되었으며 레온의 다섯 동생들은 모두 삭발당하고 강제로 성직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반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동로마 총독은 독립을 선언했고 782년 아르메니아 장군 타차테스는 이슬람 세력에게 투항했다. 이리니는 이슬람 세력의 압박을 모면하기 위해 향후 3년간 매년 7만 디나르를 바치는 조약에 합의해야 했다.

그러나 이리니는 성상 파괴 운동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784년 세계총대주교에 자신의 전직 비서 타라시오스를 임명했고 785년 8월 29일에 교황 하드리아노 1세에게 서한을 보내 이전 공의회의 성상 파괴 결론을 뒤집기 위한 새 공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이리니가 세계총대주교를 자기 사람으로 임명한 것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그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윽고 786년 8월 17일, 사도 성당에서 로마와 동방의 교구들에서 파견된 주교들이 모였다. 그러자 성상 파괴주의를 따르는 황궁 경비대와 수도 주둔군 소속의 병사들이 성당 안으로 박차고 들어와서 "당장 떠나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고, 주교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쳐 버렸다. 이에 이리니는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을 사라센 정벌을 단행한다는 명분하에 아시아로 보내고 그 자리에 비티니아 출신의 믿을 만한 병사들로 채웠다.

그후 이리니는 도망쳤던 주교들을 불러모아 787년 9월 니케아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철통같은 경비를 받으며 공의회를 개최했다. 수개월에 걸친 토의 끝에, 공의회는 성상에 대한 적대 행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성상 파괴를 주장하는 모든 문헌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주관하에 압수해야 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리하여 성상 파괴 운동은 40여 년만에 종식되는 듯했다.

그러나 성상 파괴주의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리니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에게 기대를 걸었다. 790년 이리니가 자신이 아들보다 지위가 높은 선임 군주로 군림할 것이며 자신의 이름이 황제의 이름보다 먼저 언급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하자, 콘스탄티노스는 불만을 품고 어머니를 체포해 시칠리아로 유배보내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리니는 이를 눈치채고 아들을 투옥한 뒤 제국군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군대는 대거 봉기해 감옥에 갇힌 콘스탄티노스를 구출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이리니를 엘레우테리오스 궁전에 감금시켰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이 무능한 황제임을 드러내 지지자들을 실망시켰고 어머니를 섣부르게 사면시키는 바람에 어머니가 반격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말았다. 797년 6월, 이리니는 병사들을 풀어 아들을 습격하게 했고 아들이 가까스로 탈출해 보스포루스를 건너자 사람을 보내 아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그녀는 포르피리 누각에서 아들의 두 눈을 뽑았다. 그 후 그녀는 황제를 칭했으며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정계에서 축출했다.

3.4. 2차 성상 파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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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니의 반동 정책 이후, 성상 파괴 운동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를 축출한 니키포로스 1세도 성상을 옹호했으며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탄압했다. 그런데 811년 7월 24일, 니키포로스는 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패해 전사하고 그의 두개골이 불가리아의 왕 크룸의 술잔으로 쓰이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크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레온 5세는 우선 크룸을 물리친 뒤, 이 모든 게 성상을 옹호했기 때문이라며 성상 파괴 운동을 재개했다.

사실 이리니의 치세 때에도 동방의 병사들은 성상 파괴주의에 공감했고 자신들이 당한 재난을 성상 숭배와 연관지었다. 또한 수도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은 성상 파괴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노병들은 813년 6월에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석관 앞에서 제국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지켜본 레온 5세는 대대적인 성상 파괴 운동을 벌임으로서 국민들을 결집시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해 파괴 운동을 재개했다.

레온 5세는 성직자, 수도자 및 원로원 의원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성상 파괴를 부활시킬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한 고문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상을 사용하고 공경한 모든 황제는 반란으로 축출되거나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성상을 공경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자연사했고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으며, 사도 성당에서 황제 무덤에 있는 모든 영예와 함께 안식에 들었다.

레온 5세는 814년 6월에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문헌에서 성상 파괴를 옹호하는 증거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위원회는 6개월에 걸쳐 증거를 물색한 뒤 12월 초에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에 황제는 726년에 레온 3세가 철거했다가 이리니가 다시 복원했던 칼케 대문 위의 대형 그리스도상을 철거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레온 3세가 병사들을 보내 철거했다가 격렬한 반발을 샀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이 거기에 가서 소요를 일으키며 성상에 저주의 말을 퍼붓고 돌을 던지게 한 뒤, 자신이 우연을 가장해 현장에 가서 성상을 보호하고 신성 모독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성상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815년 1월, 황제는 성상 옹호론자인 니키포로스 세계총대주교를 소환했다. 이때 세계총대주교와 함께 황제를 만나러 간 스투디움의 대수도원장 테오도로스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항거했다.
"교회의 일은 성직자에게 맡겨 두고, 폐하께서는 국정과 군대에만 신경을 쓰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신앙을 침해하려 한다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우리를 설득한다 해도 우리는 그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의 말은 더욱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세계총대주교를 비롯한 모든 성상 옹호론자들이 공공장소나 개인 주택에서 일체의 집회를 여는 것을 금지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니키포로스를 가택에 연금시켰다. 그 후 황제는 니키포로스 세계총대주교를 유배보낸 뒤 콘스탄티노스 5세의 친척 테오도토스 카시테라스를 임명했다. 그후 벌어진 일련의 교회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레오와 콘스탄티노스 시대의 교회회의가 옳다고 결론내리고 성상 공경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다만 레온 5세는 성상 옹호론자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단지 목소리가 큰 사람들만 본보기로 처벌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들의 그림이 수놓인 옷을 갈기갈기 찢고 발로 짓밟았으며 그림이 그려진 나무판에 오물을 묻히고 도끼로 쪼개 광장에서 불태웠다. 이로 인해 많은 예술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3.5. 성상 파괴주의의 종말

820년 12월 25일, 레온 5세는 황궁 성당에서 성찬예배에 참석하던 도중에 미하일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이 전대미문의 암살극으로 집권한 미하일 2세는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레온 5세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즉, 성상 파괴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굳이 성상 옹호론자들을 박해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테오필로스도 아버지처럼 성상 파괴론자였으며, 당대 최고의 성상 화가 라자로스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이 무렵 성상 파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성상 파괴가 처음 시작되었던 동방의 속주들은 상당 부분 사라센에게 넘어갔고 남아있는 속주의 주민들도 이슬람교와 명백하게 비슷한 교리인 성상 파괴에 대해 불신을 품었다. 또한 인문주의가 확산되고 시각적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풍조가 퍼졌으며 백성들은 평화롭고 자신감이 넘쳤던 옛 시절의 낯익은 그림들을 갈망했다.

그러던 842년 1월 20일, 테오필로스가 이질에 걸려 3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성상 파괴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테오필로스의 황후 테오도라는 어린 아들 미하일 3세를 대신해 통치하며 삼촌 세르기우스 니케티아테스, 오빠 바르다스 등을 측근으로 삼았다. 그후 그녀는 843년에 제7차 세계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 파괴론자들을 파문하고 성상 공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843년부터 동방 정교회에서는 사순대재 첫째 주일을 "정교주일"로 정하고 성화상의 승리로 정교회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모든 정교회의 교리와 규범은 참 진리에 기초함을 선포하는 날로 지내고 있다. "정교주일"에 정교회에서는 성화상을 갖고 성당 주위를 돌며 특별성가와 기원을 바친다. 이후 성상 반대는 두 번 다시 제기되지 않았다.

4. 성상 파괴주의 황제 목록

5. 성상 파괴주의와 동서 교회 대분열의 관련성

대부분의 세계사 교과서들은 동로마에서 성상파괴 운동이 발생해 로마 교황이 반발하고 이것이 동서 교회 대분열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런 내용이 전부인 탓에 의무교육 과정 중에 세계사를 접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성상파괴 운동으로 동서 교회가 완전히 갈라졌고, 이후 동로마 제국은 성상 공경을 하지 않게 되었다…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 발생한 일은 더 복잡한데, 일단 동서 교회 대분열은 성상 파괴 운동 탓이 아니라 양자의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동서 교회 대분열의 결정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성상 파괴 운동보다는 이 사건으로부터 2~300년이난 지난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마저도 당대인들이나 역사가들이나 모두 심각하거나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것은 주저한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상호 파문이란 게 있었던듯 없었던 듯 아리송 한데, 뭐 어쨌든 그 무렵에 서로 공적 관련성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사실 파고들면 들수록 교회가 분열된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나 신학적 근거를 들기가 매우 어렵다. 오죽했으면 동로마 제국 후반기 동서 교회 통합론이 고개를 들던 시점에, 교회 통합 반대론자들이 내세운 이유 중 하나가 성체성사에서 동방은 발효된 빵을 성체로 쓰는데, 서방은 발효 안 된 빵을 쓴다였으니. 게다가 현대인의 시점에선 이 어처구니 없는 반대가 당대인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다만]

무엇보다도 성상파괴 운동 자체가 기독교 전체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판정되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으로 교회가 분열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오늘날 정교회는 성상을 모시고 있다. 사실 성상 파괴 때문에 동서 교회가 분리된 것이라면, 성상 파괴 운동이 소멸된 시점 직후에 동서 교회의 화합이 거론되어야 했다는 것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마디로 성상 파괴 운동은 그저 그리스도교 전체 안에서 발생했던 이단으로 여겨졌고 이 사건으로 동방, 서방 양자의 신앙 자체가 달라진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는 얘기.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성상 파괴 반대를 주창하여 이리니 여제가 개최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이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가톨릭, 정교회 구분 없이 공인된 마지막 공의회인데[9], 이 자체가 당시 기독교 교회는 하나임을 인증하는 것이다. 단지 교황이 여전히 황제를 믿지 못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니케아에서 회의가 열렸다거나, 이 공의회가 양쪽이 참가, 인정한 마지막 공의회였다거나 하는 점이 걸리긴 하다만.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성상 파괴 운동은 교회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억눌러져 있던, 혹은 해소된 줄 알았던 불화를 일으켰고, 이는 동서 정치 체제의 분열을 촉발시켰는데, 정치 체제가 분열되자 결국에는 교회까지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얘기다. 그걸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의 내용이다.

일단 제국 내에서 종교 갈등이 발생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 이미 기독교, 제국, 로마는 이라클리오스 왕조 시절 내내 성상 파괴 문제보다 더 파괴적인 단성론 문제로 지지고 볶다가 기독교가 간신히 합을 맞춘지 얼마 안 되었다.

문제는 성상 파괴 갈등 와중에 로마 대주교의 교황 문제, 즉 서방교회의 관할권 문제가 불거졌고, 다시 종교 갈등이 터지자 급도 가장 높고 잠재된 불만도 가장 높은 로마 대주교가 반대 세력의 선봉장 격이 되어 버렸다는 점.

이렇게 되자 레온 3세는 일벌백계 + 실질적인 견제 차원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실행 직전 그레고리오 2세가 사망한 것이다. 후임 교황인 그레고리오 3세 역시 성상 파괴 반대의 기치를 올렸지만, 새 교황 뽑느라 시간 보내고, 체포하라고 보낸 함대가 난파되고, 나폴리 공작이 거부하고… 뭐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되었고, 조세 권한을 박탈하네, 서로 연락을 끊네 마네 하며 이혼 조정 기간 중의 부부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실 로마 뿐 아니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어나 너 죽네 나 죽네의 드잡이질 상태(..)가 된 탓에 로마만 특별히 신경 쓰기가 어려워지기도 했고.
사실 성상 파괴주의는 단성론에 비해 이론이나 지지 기반이 꽤 약한 편이긴 했다. 과장 좀 하자면, 단성론은 엄청난 시간을 거치며 셀 수 없는 저작과 토론으로 갈고 닦아진 기독교 이론인데, 어디 시리아 변두리 군바리들이나 믿는 허접한 단성론 변종인 성상 파괴주의 따위야 동네 새내기 사제도 몇 마디 말로 격파 가능한 수준이었다. 단지 문제가, 제국이 2~30년 간 제위 계승 문제로 내전 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 간신히 적절하게 들어선 새 황제가 이 이단 신앙을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라클리오스 이후 황제들이 대를 이어 고생 끝에 종교 문제를 극복하고 로마 교회에 대한 통제권도 휘어잡았는데, 이단자가 황제가 되어서 엉뚱한 신앙을 주장하는 바람에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릴 위기에 처한 셈이다. 또, 밥그릇 문제 교황 문제와 관련해서는, 단성론 문제가 종결된 이후, 황제에 대한 복종의 일환으로 교황 자리를 로마 외부인 중에서 선출해왔었는데, 레온 3세의 등장 직후 이게 깨어졌다. 레온 3세가 모든 것을 망치고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선 이후로 교황 자리는 대체로 이탈리아인들의 밥그릇 대잔치가 되어 버렸다. 어쨌건 결과적으로는 서방 교회를 보호, 관리할 황제가 자기 스스로 손을 놔버린 셈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로마가 방치되다시피한 시기에 잠잠하던 랑고바르드 왕국이 다시 일어나 이탈리아 반도를 털어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교황과 이탈리아인들 입장에선 황제가 랑고바르드 왕국과 짜고 치는 고스톱 손을 잡고 로마를 터는 게 아닐까... 라는 두려움에 쌓이게 되었다. 애초에 동로마 역사에서 변방 야만인들에게 적당히 떡고물을 내주고 종속, 회유시키거나 용병으로 부려먹는 일은 밥 먹듯이 있어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런즉, 결국 교황의 입장에선 믿을 수 없는 이단자 황제 대신 아예 서쪽에서 잘 나가는 다른 누군가를 수호자로 선택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실현시킨다.

뭐, 그 뒤론 피핀 3세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의 수호자를 대물려 받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기는 사라졌지만, 그 반대급부로 로마에 대한 카롤루스와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은 커졌다. 그런데 친 카롤루스 파였던 레오 3세가 교황좌에 오른 시점이 하필이면 동로마에서 성상파괴주의가 세를 잃고, 다시 로마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던 무렵이다. 결국 레오 3세가 아예 발상 전환을 해서,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 자리를 안겨주고 동로마와 영원히 작별하자는 쌈빡한 생각을 해냈으니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했다.

성상 파괴 운동이 교회 대분열을 불러왔다는 식으로 단순히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교회 분열이 아니라 정치적 분열이 실제 사건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동로마 제국은 교황과의 연고를 통해 서유럽에 대한 영향력과 명분을 미약하나마 유지해왔고, 단성론 논쟁이라는 종교적 내분을 해소하며 이를 확고히 하는 듯했으나, 성상 파괴 주의의 발흥이라는 종교적 내분이 재차 발생하여 교황과의 연고를 스스로 포기하게 되었다. 이 결과 교황은 새로운 보호자로서 신성 로마 제국을 만들어냈다. 결국 이 일련의 사건으로, 우리가 아는 서유럽 세계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렇게 양자가 정치적으로 분리되고, 라틴이 그리스와 점점 멀어지고 게르만과 가까워지면서 라틴-게르만과 그리스 간 언어적, 문화적 차이가 확대되던 탓에 동방과 서방 교회 간 교류는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되었고, 후손들은 동서 교회가 분열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동서 교회 대분열은 특정한 사건이 촉발한 것이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 내부에 한정해서 이 성상 파괴주의 하나만을 국한시켜 살펴보면, 황제 한 명 잘못 두어서 괜히 수십년 간 골치 좀 썩었다는 것이다. 사실 동로마 내에서 종교 갈등이란 건 단성론이 더 끈질기고 악명 높기 때문에, 성상 파괴주의 정도야 그냥 단성론의 분파 내지 재부흥 운동 정도로 봐도 된다. 단지 서유럽에 대한 지배력을 영구히 상실하는 나비 효과가 일어난 것이 좀, 많이, 아주 특별할 뿐.

6. 여담

약 8세기가 흐른 후 서유럽에서도 종교개혁기에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네덜란드처럼 칼뱅파가 득세한 곳에서는 적극적으로 가톨릭 성당이나 수도원의 이콘과 조각들을 파괴하여 현재까지도 일대의 교회들을 가보면 다른 유럽의 교회들보다 더 수수한 것을 볼 수 있다. 애초에 네덜란드 독립의 시발점인 80년 전쟁이 1566년 성상파괴운동과 이를 반역으로 간주한 펠리페 2세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해 벌어지 것이다.

뜬금없을지는 몰라도 조선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7. 관련 문서

8.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들


[1] 하지만 후대에 성상파괴가 이단으로 정죄되며, 되려 해당 그림의 회칠하는 사람의 얼굴이 긁혀 지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2]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조상 덕분인지 오늘날의 그리스인들 역시 토론이라면 끝장나는 민족이 되었다. 그리스/문화 항목을 참고 할 것[3] 626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도 마찬가지로 했었다.[4] 유대교, 정교회, 개신교 기준. 가톨릭루터교에서는 1계명의 일부로 본다.[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마라.[6] Cyril Mango의 '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의 139p 중, 'In 727 the Carabisian Theme and the Theme of Hellas rebelled against him, possibly because of the edict; but he defeated them.'[7] 여기서의 관구는 교회 관구가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이래의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세속 관구이다.[다만] 성체성사의 누룩을 넣냐 마냐는 최초의 성체성사, 즉 최후의 만찬의 시간대 역추산이 걸린 문제이므로 단순히 빵 레시피 가지고 쌈박질한 것이라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다만 현대 가톨릭의 경우 누룩 유무를 교리 문제가 아닌 예법의 차이 정도로 보아 동방가톨릭이 누룩 넣은 방으로 성사를 보는 것을 허용한다.[9] 영어 위키백과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초대 7대 세계공의회)에 의하면 이 'Second Council of Nicaea (787)'이 7개 중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