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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후안 카를로스 1세 | 미겔 데 세르반테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 아돌포 수아레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 펠리페 6세 | 파블로 피카소 | 예수의 테레사 | 펠리페 곤살레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이사벨 1세 | 세베로 오초아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호세 사파테로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살바도르 달리 | 안토니오 가우디 | 엘 시드 | 알폰소 10세 | 페르난도 알론소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프란시스코 데 고야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안토니오 마차도 | 미겔 인두리안 | 미카엘 세르베투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로라 플로레스 | 펠리페 2세 | 카를로스 1세 | 로시오 주라도 | 그레고리오 마라뇬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디에고 벨라스케스 | 이사벨 판토하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미겔 데 우나무노 |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비센테 페레르 | 카밀로 호세 셀라 | 페드로 두케 | 다니 페드로사 | 파우 가솔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다비드 비스발 | 라파엘 나달 | 카마롱 데 라 이슬라 |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산티아고 카리요 | 안토니오 반데라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 페드로 알모도바르 |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 미겔 에르난데스 | 후안 마누엘 세라 | 로페 데 베가 | 엘 그레코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 호아킨 사비나 |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 앙헬 니에토 | 마누엘 아사냐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조르디 푸졸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 알레한드로 산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에르난 코르테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카를로스 사인츠 | 파퀴리 | 텔모 사라 | 몽세라 카바예 | 마누엘 데 파야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삭 페랄 | 플라시도 도밍고 | 미겔 길라 | 루이스 부뉴엘 | 엘 코르도베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프란시스코 피사로 |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 라울 곤살레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아만시오 오르테가 | 마놀레테 | 에두아르도 칠리다 | 페란 아드리아 |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 호아킨 로드리고 | 에밀리오 보틴 |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프란시스코 헨토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세바 바예스테레스 | 이삭 알베니스 |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카르멘 아마야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 마누엘 산타나 |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 자코네로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 |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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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들 |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 |
첫 여성들 |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 |
범법자들 |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 |
예술가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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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건설자들 |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 |
운동선수들 |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 |
출처 | }}}}}}}}} |
<colbgcolor=#000><colcolor=#fff>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 |||
출생 | 1451년 10월 31일[1] | ||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시 (現 이탈리아 리구리아주 제노바시) | |||
사망 | 1506년 5월 20일 (향년 55세)[2] | ||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야돌리드시 (現 스페인 레온-카스티야주 바야돌리드시) | |||
국적 |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 [[스페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항해사, 탐험가 | ||
신장 | 183cm | ||
배우자 | 필리파 모니스 페레스트렐루 | ||
자녀 | 2남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리구리아어 | 크리슈토파 쿠룽부(쿵부) Cristoffa Co(ro)mbo[3] | |
이탈리아어 |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Cristoforo Colombo | ||
스페인어 | 크리스토발 콜론 Cristóbal Colón | ||
라틴어 | 크리스토포루스 콜룸부스 Christophorus Columbu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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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활동한 탐험가, 항해사, 콩키스타도르.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아메리카는 무주지가 아니었고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유럽인 입장에서의 시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럽 중심으로 만들어진 말인 대항해시대라는 말도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에 콜럼버스의 공헌을 신항로 개척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즘은 미국 교과서도 발견하다(discover) 보다 만나다(encounter)로 서술하기를 권한다.
또 유럽인 중에서조차 북유럽의 바이킹[4]과 존 캐벗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한데다, 콜럼버스 본인은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서유럽인 입장에서조차)아메리카의 발견자라는 타이틀을 가지지는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식한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을 잇는 신항로를 개척해, 지속적 교류 계기를 만든 유럽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터잡은 신생 독립국가 미국은 자신들의 건국 서사시를 마련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럼버스의 항해 관련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도 수도를 컬럼비아 구로 명명한다든지,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이 국경일로 정해져 있는 등 아직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국에게도 전파되었다.
''디오스코로 테오필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 1862, 캔버스에 유화" 아메리카에 상륙하는 콜럼버스 일행을 그린 기록화. 주위에 그를 경외하는 타이노인이 발가벗은 채로 묘사되어 있다. |
"아메리카의 발견" (The Discovery of America) 미국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왼쪽에 그를 경외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 반 나체로 묘사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1958년 철거됐다.[5] |
그러나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침략자, 학살자였고, 그 인성과 능력 또한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히 저열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 사회 정의 운동의 붐을 타고 원주민 중심의 아메리카사 인식이 보급된 뒤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나빠졌다. 미국 내 오리건,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몇몇의 주에서는 콜롬버스의 날 명칭 대신에 원주민의 날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는 2020년 콜럼버스 조각상 2개를 철거했고, 코네티컷에서는 콜럼버스 석상의 머리 부분이 잘려 사라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콜럼버스는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것, 또 특정 위인의 업적과 인품이 항상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할 때 대표적인 예시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소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긴 하지만, 역사를 바라볼 때 조금이라도 주관이 개입되는 순간 얼마나 진실이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2. 인명 표기
1450년생으로 보통 많이 알려졌지만 1447년생이라는 주장도 많다. 또한 콜럼버스는 제노바 공화국 출신임에도 스페인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어식인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와 함께 스페인어식인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럽언어권에서는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 인물의 인명을 표기할 때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식이 아닌 자국어식으로 바꿔 표기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영어식 표기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로 널리 알려지게 됐고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하고 있는 규정용례도 각각 영어와 스페인어식 표기를 따른 '콜럼버스, 크리스토퍼'와 '콜론, 크리스토발'이다.그러나 콜럼버스에서 파생된 미국의 지명인 Columbia의 규정 용례는 '컬럼비아'이다. 관련 문의.[6] 이와 마찬가지로 인명인 Columbus 역시 영어식 표기에 근거한 것이므로 컬럼버스로 표기해야 하나 이 경우에는 관용을 존중한 표기인 '콜럼버스'를 규정 용례로 제시하고 있다. 다만 언중에서는 Columbia를 콜럼비아로도 표기하며 Columbus의 경우도 콜롬비아의 영향 때문에 콜롬버스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3. 생애
3.1. 신항로 개척 과정
어린 시절의 행적은 불분명해서 태어난 연도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2024년에 스페인계 유대인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롬보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방견문록을 읽고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7]
지구는 둥글 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중국과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며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는 콜럼버스의 거리 계산이 터무니없이 어긋났고[8] 콜럼버스의 요구 조건이 꽤나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신대륙)[9]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꽤나 많이 요구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가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에 그친 것에 견줘보면 날강도 수준이다.
그러다 마침내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후원해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왕도 권력이 꽤 있었음에도[10] 콜럼버스의 요구가 워낙 까다로워 여왕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가면서 개인적으로 후원해줘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사벨 1세는 자신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았으며 그 왕관은 현재 톨레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나 2달 10일 뒤인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당시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임을 굳게 믿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딱히 교차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가 인도를 갔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1498년 5월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를 발견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쪽 희망봉[11]까지 내려가 다시 동쪽으로 돌아 항해해서 진짜 인도로 갔다. 이때부터 콜럼버스가 간 곳이 인도가 정말 맞는지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에서 향신료 등 유럽인들이 인도에서 원하던 것들을 얻어오는 데 성공했으나, 콜럼버스는 그런 성과를 얻지 못했고 바스코 다 가마의 묘사와 콜럼버스의 묘사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성과를 얻지 못한 콜럼버스 쪽이 더 불리했던 건 당연지사.
유럽인들은 둘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항해를 따라 갔으며, 결국 1503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직접 아메리카를 가보고선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임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자신이 간 곳이 인도란 주장을 죽을 때까지 꺾지 않았고 신대륙의 이름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 붙여지게 된다.
이사벨 1세의 신대륙 개척 지원에 대해선 세간에 알려진 대로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개인적 흥미를 느껴 지원했다'라는 설보다는 다른 설이 좀 더 설득력 있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 투르크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인해 설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고 또한 옆나라 포르투갈이 항해왕자 엔히크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12] 따라서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내다보았고 이 때문에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과 요구를 살라망카 대학을 포함한 스페인 학자층, 그리고 정부 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다.
다만 여왕이 남편인 페르난도 2세와는 무관하게 개인 자격으로 후원했던 탐험이라 후에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득이 스페인으로 몰려왔을 때 덕을 보는 쪽은 카스티야뿐이었고 동시에 지중해 무역을 업으로 삼던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은 큰 손해를 입었다.
3.2. 아메리카로의 첫 항해
콜럼버스는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1492년 8월 3일에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13]를 출발, 서쪽으로 모험을 떠났다.[14] 선박 수는 여왕에게 대여받은 산타 마리아 호, 니냐 호, 핀타 호와 아는 사람에게 빌린 1척 도합 4척이 전부였다. 기함이자 가장 큰 배인 산타 마리아 호는 1460년경 건조됐으며, 길이 약 36m, 돛대 3개가 있었고 불로 달군 화강암 탄환을 쏠 수 있는 사석포(射石砲)로 무장했다.[15] 한편 니냐 호와 핀타 호는 크기가 산타 마리아 호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배였다.10월 12일에 그가 '인도'라고 믿은 신대륙 본토와 가까운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에 상륙해 '산살바도르 섬'으로 이름붙였다. 훗날 서인도 제도로 불릴 카리브 지역을 탐험할 때 12월 25일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산타 마리아 호가 좌초되어, 돌아올 때는 배가 1척 줄었다. 콜럼버스는 1차 원정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여왕에게 보고했다.
3.3. 2~4차 아메리카 원정, 원주민 탄압 및 학살
콜럼버스의 사악한 탐욕은 1493년에 재개한 2차 원정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났다.[16] 우선 그는 1차 원정에서 돌아올 때 선원 30명 가량을 히스파니올라 섬에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구워삶아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막대한 원조를 받아낸다.[17] 선원들은 1차, 2차 원정 모두 사면을 미끼로 범법자들 위주로 선원으로 모집하기는 했지만, 2차는 전직 군인 등의 전문직 경력자도 모집하는 데 더해 온갖 병기까지 소지하는 등 대놓고 원주민을 족칠 생각이었다.이렇게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에 세웠던 거점인 라 나비다드[18]로 돌아와 보니 일전에 잔류시켰던 30명 가량의 선원들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증언할 당사자가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하게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후 콜럼버스 탐험대의 행보를 토대로 분석하면, 선원들이 한 사람당 최고 5명씩 원주민 여자를 거느리거나 금은보화를 착취하며, 심하게는 원주민을 살해하기까지 하는 등 행패를 부리다가 마침내 화가 난 원주민들에게 모조리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후 콜럼버스는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 북부[19]에 여왕의 이름을 붙인 식민지 거점인 라 이사벨라를 세운 뒤, 호전적인 부족뿐만 아니라 평화롭게 대하던 원주민들마저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자비도 없이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그 후로도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 그 당시 원주민들은 철기가 없이 돌로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으니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저항하다가 붙잡힐 시 분살을 포함한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패배에 직면했을 시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3차 원정(1498~1500)과 4차 원정(1502~1504) 때의 콜럼버스 탐험대는 점점 더 잔인해져서, 엄청난 맹견 품종인 마스티프까지 끌고 와서 원주민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규정한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시 손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출혈로 죽어갔으며, 9살의 소녀부터 35세의 성인 여성들까지 강제로 은화 한두 닢에 매춘부로 전락시켰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히스파니올라 인구는 30만 명이었으나 불과 2년 만에 10만 명이 죽었고, 나중에는 500명밖에 남지 않았다가 결국 원주민인 타이노족은 전멸했고 혼혈 후예만 남았다. 그러자 콜럼버스와 스페인인은 처음에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그마저도 전부 소모하고 나자 나중에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 왔다. 흑인 노예들도 원주민 노예들처럼 얼마 못 버티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와중에 어떻게든 살아남은 흑인 후손들이 원주민 및 백인과 혼혈 자손을 남겨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은 아프리카계 흑인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 많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땅이 중국의 남서부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대칸이나[20] 전설의 황금 광산을 찾았지만 애초에 번지수를 잘못 찾았으니 나올 턱이 없었다.
관련 내용 1, 관련 내용 2.
보다 못한 다른 스페인 관리들이 본국에 콜럼버스의 만행을 알렸지만, 본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했다. 이에 기고만장해진 콜럼버스는 점점 오만이 극에 달해 본국에 자기가 정복한 땅의 총독 권한과 해군 제독 자리를 요구했으며, 이 직위들을 자식들에게도 세습시켜 달라고까지 했다. 심지어 사업에서 얻은 이득의 1/10은 자신의 몫으로 하겠다고도 했다. 주는 것도 없이 얻어만 먹으려는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원정대 구성원들에게 잘 대해 줬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례로 한 부하 선원이 섬을 발견했는데, 그 선원을 협박해서 자기가 발견한 것으로 거짓 보고하는 등 남의 공을 가로채는 짓을 자주 해 인망이 없었으며 부하들 중에서도 적이 많았다.
사실 콜럼버스가 저지른 짓은 당시 유럽의 시각으로도 아주 사악하다고 비난받은 행위였다. 아무리 당시 백인들이 타 인종을 야만인이라며 낮잡아 보았다고는 하지만[21] 콜럼버스는 야만인(=원주민)과의 약속은 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등 아예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다. 콜럼버스의 부하들조차 보다 못해 "제아무리 야만인이니 뭐니 해도 최소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지 않느냐?"며 크게 반발했고 심지어 일부는 그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한 법이라, 당시 콜럼버스의 부하들 중에는 원주민들과 친해져서 호형호제하는 사람도 많았고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얻은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앞에서조차 원주민들을 대놓고 탄압했으니 굉장히 화가 날 만 했다. 급기야 1504년 1월에는 일부 부하와 원주민들이 작심하여 콜럼버스를 암살하려 하기도 했는데, 이에 자던 중 놀라서 속옷 차림으로 달아나 다른 스페인 주둔군이 있는 곳으로 피신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그 꼴을 본 스페인 군인들조차 대놓고 비웃었을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원주민을 잔인하게 대한 이유는 그의 항해가 수익성이 있음을 스페인 본국에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중국이나 인도를 향하는 항로가 아니라 원주민들이 담배 피우던 평범한 땅일 뿐이었다. 물론 이후에 이 신대륙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과 기호품이 유럽 국가들의 재정을 책임지는 근간이 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대 기준으로도 먼 후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콜럼버스가 당시 발견했던 신대륙은 그냥 외딴 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00% 이익이 난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결과는 1% 이윤만 나는 셈이니, 그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막대한 금을 수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긁어모은 금조차 턱없이 적은 양이었고 그는 점점 더 잔인해지게 된다.
여하튼 이런 만행 때문에 콜럼버스는 당대부터 이미 크게 지탄받는 인물이었으며, 근현대에 반짝 콜럼버스에 대한 미화가 흥하게 되지만 이내 그의 추악한 민낯이 까발려지며 콜럼버스의 이름은 탐험가의 대명사가 아닌 피와 욕망에 굶주린 학살자의 상징이 되었다.
3.4. 몰락과 죽음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 섬과 오리노코 강을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힘든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이던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몰락하게 된다. 당연히 막대한 빚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결국 겨우 몇해 사이에 처참하게 몰락하여 아들 디에고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게 된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했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조차도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실제적인 직책의 세습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명칭만은 대대로 가지게 된다.
콜럼버스의 시신 일부가 있다고 전해지는[22]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당당하게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고 설명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곳을 찾은 매독 연구 관련 책자 지은이에게 현지 길라잡이도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나마 이게 하느님이 내리신 천벌입니다."라고 조롱했다.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세상을 떠난 후 그곳에 묻혔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1542년 대서양 건너편 산토도밍고로 이장되었고, 1795년 프랑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점령하자 아바나로 이장되었으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가 독립하자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져 세비야 대성당의 남쪽 익랑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인 '죽어도 스페인 땅 안 밟겠다, 마음대로 하셔!'를 고려하여 그의 관은 현재 4명의 동상[23]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붕 떠서 받들려 있다. 스페인이 이러한 무리수까지 두면서 그의 시신을 운구한 이유는 비록 그의 행적에 대한 여러 논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스페인의 황금기를 개척한 공로자였기 때문이다.
4. 콜럼버스의 교환
지도 보기콜럼버스와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와 유럽의 동식물, 문화 전파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생산성 높은 작물들로 인구가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대다수인 90%가 사망했다.[24] 왜 이렇게 양상이 달랐느냐 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치명적인 공기 전염병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5]
미국 대륙의 일부 원주민 출신 근본주의자들은 악마가 전한 작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위와 같은 배경을 두고 있다.
| 유럽→아메리카 | 아메리카→유럽 |
동물 | 소, 돼지, 말, 당나귀, 양, 염소, 낙타, 물소, 토끼, 닭, 오리, 거위, 호로새, 비둘기, 고양이, 페릿, 꿀벌 | 라마, 알파카, 밍크, 기니피그, 칠면조, 머스코비오리, 연지벌레[26] |
식물 | 아몬드, 사과, 살구, 아티초크, 아스파라거스, 바나나, 보리, 비트, 빌베리, 비터멜론, 후추, 브로콜리, 양배추, 케일, 콜리플라워, 방울다다기양배추, 칸탈루프 멜론, 카람볼라, 카르다몸, 당근, 시나몬, 정향, 커피, 오렌지, 레몬, 오이, 대추야자, 아마, 무화과, 마늘, 아메리카머루, 헤이즐넛, 대마초, 키위, 상추, 망고, 기장, 귀리, 오크라, 육두구, 올리브, 양파, 복숭아, 양귀비꽃(아편), 완두콩, 배, 무, 피스타치오, 루바브, 쌀, 호밀, 대두, 사탕수수, 토란, 차, 순무, 밀, 호두, 수박, 양조용 포도, 마, 목화, 팥, 녹두, 콜라나무 | 악키[27], 용설란, 선인장, 아마란스, 애로루트, 아보카도, 강낭콩, 블랙베리, 고추, 피망, 블루베리, 치클, 캐슈넛, 치아, 체리모야, 커스타드 애플, 크랜베리, 코카나무, 카카오, 구아바, 허클베리, 해바라기, 돼지감자, 옥수수, 지카마, 카사바, 파파야, 패션프루트, 땅콩, 피칸, 파인애플, 감자, 호박, 퀴노아, 고무나무, 사포딜라, 딸기[28], 고구마[29], 담배, 토마토, 바닐라, 야생쌀[30], 마떼, 실유카, 주키니, 과라나 |
병균 | 수두, 페스트, 콜레라, 감기, 디프테리아, 인플루엔자, 한센병, 말라리아, 홍역, 성홍열, 장티푸스, 천연두, 발진티푸스, 백일해, 황열, 매종(pian, 혹은 Yaws)[31] | 베젤(= 풍토성 매독), 열대성 백반피부염, 샤가스병, 매독[32], 필록세라 |
한편 해외의 일부 네티즌들은 만약에 빈란드로 떠난 바이킹들이 정착에 성공해서 지금보다 약 500년 일찍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하는 가정에 대한 대체역사적인 상상을 제기한 적도 있다. #[33]
5. 평가
"콜럼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 빅토르 위고
비록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류 최초 '발견자'도, '유럽인 최초 발견자'도 아니지만, 이것이 콜럼버스의 항해의 역사적 가치를 낮추지는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콜럼버스는 당대 최고의 항해사였다.
단순한 발견을 넘어 처음으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관계를 맺고 유럽-아메리카 교류의 제대로 된 물꼬를 튼 사람이 콜럼버스다. 위의 상륙은 모두 일회성에 그쳤지만, 그는 첫 상륙 이후로도 4번의 항해를 했다. 이를 증명하듯 한동안 유럽인 위주로 사회가 작동되던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국에는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미국을 시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아메리카 대신 콜럼버스에서 여성형 어미를 붙인 컬럼비아(Columbia)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미국 수도 워싱턴의 공식 명칭인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 D.C.)에서 쓰이고,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비롯, 수많은 지명에서 컬럼비아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오하이오 주 내에도 콜럼버스라는 도시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콜럼버스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콜롬비아 공화국이 이러한 지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
콜럼버스의 이 항해는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설탕과 은 때문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 가져온 설탕은 이 발견 이후 영국의 왕실부터 일반 노동자 계층까지 사용하는 최고의 사치품이 되고, 은은 그 당시 명나라가 조세를 은으로 하게 되면서 중국의 은 수요가 늘어났는데 이 때 스페인이 포토시 언덕에서 채굴한 은을 교역에 사용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 스페인은 설탕과 은을 교역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군사력에 투자하여 교역로를 지키는 강한 해군을 양성할 수 있었다. 즉 콜럼버스의 잘못된 계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근현대사 인식이 역사해석의 주류로 올라선 이후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급속히 추락했다. 원주민에게 콜럼버스는 원주민 수천 명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아치웠으며, 각종 재물을 약탈해간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그의 탐험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몰려들어 원주민에 대한 핍박, 학살, 탄압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아직도 영웅시되는 모양이다. 사실 콜럼버스의 행적은 카탈루냐에 이득이 가는 결과물을 만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 또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에서도 자신들 지역의 출신지인 콜럼버스에 대해 호응이 높으며 콜럼버스의 만행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 움직임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데, 이를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5.1. 콜럼버스의 날
자세한 내용은 콜럼버스의 날 문서 참고하십시오.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 국가[34]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하지만 사후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 인식이 변화와 그의 업적들이 재평가 되면서 최근에는 "원주민의 날"과 같이 바꾸는 추세다.#
6. 오해
6.1.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발견자인가?
자세한 내용은 빈란드 문서 참고하십시오.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고도로 발전된 정치 제도를 갖춘 다양한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느니 어쨌느니 운운하는 것은 지극히 유럽인들의 관점이므로 적합하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아메리카 원주민 혹은 고대 아시아인들이야말로 첫 발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콜롬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이 아시아라고 믿었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도인이라고 착각해 인디오(indio)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신대륙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아메리카 대륙의 어원이 된 아메리고 베스푸치다. 이후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아메리카 대륙의 명칭을 그의 이름으로부터 따왔다.
콜럼버스의 발견 논리를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한반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고대 한민족도 아닌 포르투갈인인 마리이(馬里伊)[35] 또는 네덜란드 출신의 헨드릭 하멜 등의 유럽인이 발견했다는 것과 똑같다. 실제로 이렇게 가르치지 않듯이, 콜럼버스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한 '신대륙'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설령 유럽 기준으로 좁혀서 보더라도 콜럼버스는 유럽인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자 또한 아니다. 유럽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알아냈거나 방문했던 사람들은 콜롬버스 전에 이미 수두룩했다. 대표적으로 빈란드로 유명한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 유적의 존재로 레이프 에이릭손을 비롯한 아이슬란드/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이 이미 서기 11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외에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 현 캐나다 동부에 갔다거나[36], 프랑스의 노르망디 어부들이 캐나다의 래브라도 반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며, 바스크인들이 어업, 포경을 목적으로 북미 쪽 바다로 가거나 해안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다. 무려 기원전에 유럽인은 아니지만 페니키아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간접적으로나마 교역을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아직 완벽하게 검증된 설이 아니다.
심지어 콜럼버스 본인조차 자신의 항해일지에서 이름 모를(일지의 일부가 손상되었다) 이에로 섬 출신의 사람이 카나리아 제도 서쪽에서 육지를 보았다고 진술했고, 같은 일지에 1484년에 있었던 일을 인용하면서 마데이라 제도의 주민이 포르투갈의 국왕을 찾아가서 자신이 본 육지를 언급하며 지원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썼다.[37]
이탈리아 선원들 역시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150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편 콜럼버스를 옹호하는 측은 '발견'의 정의를 단순한 '존재의 인식'이 아닌, '과학 체계로의 편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령 천왕성은 육안으로도 충분히 관측할 수 있고 그 존재를 인식한 사람도 많지만 허셜 오누이가 천왕성을 발견했다고 한 것처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최초로 인식한 것은 아니지만 콜럼버스의 모험으로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존재가 근현대 지리학 체계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콜럼버스 역시 발견자라고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다만 현재까지는 주류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아닌데다, 이 조차 콜럼버스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으로서 항해를 시도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이 당시 사람들의 시점에 한해 확실히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고 이를 지리학적으로사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6.2.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였는가?
자세한 내용은 플랫 에러 문서 참고하십시오.오늘날 미국 등 서구 국가의 위인전에서는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한 줄 알고 콜럼버스의 탐험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이러한 통념과는 달리 지구 구형론은 이미 대항해시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확고하게 퍼진 상식이었다.[38] 주경철 교수의 말에 따르면,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 콜럼버스 vs '바다의 서쪽엔 낭떠러지가 있어 떨어져 죽을 테니 못 간다'는 당대 사람들의 대결구도는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의 창작으로, 그가 저술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전기소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삶과 항해(A History of the Life and Voyages of Christopher Columbus, 1828)』 속에서 콜럼버스를 지구 구형론을 받아들인 근대적 지식인으로 묘사한 반면, 당대 관료들과 종교인들은 대부분 아직도 지구를 원판 모양으로 생각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묘사하였다고 한다.[39] 물론 교육을 못 받은 평민들은 여전히 모르는 경우도 많았지만 콜럼버스는 민중을 현혹시키려 한 사람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규 교육을 이수한 항해사들을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 발견된 사실이었고 콜럼버스의 시대에서 1700년도 더 전에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방법으로 지구 둘레의 계산까지 구한 기록이 있다. 측정의 오차야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 학문과 기술의 미시적인 문제이지 대략적인 지구의 크기는 알고 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일화도 천동설에 대한 논쟁이었지 지구 평면설에 대한 논쟁이 아니었다. 간혹 천동설과 지구 평면설을 동일시하여 천동설을 믿은 사람들을 지구 평면설도 같이 믿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아니다. 지구 구형론에 대해서는 중세 시대 종교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알마게스트의 주장을 토대로 하여 확고부동한 사실로 믿고 있었다.[40] 애초에 당시 원양 항해기술 자체가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발전한 것이었고, 바다를 끼고 사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선 상식이나 다를 바 없는 사실이 바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에 퇴짜를 놓은 실제 이유는 콜럼버스의 엉터리 거리 계산법이다. 직선으로만 15,000km 정도[41]를 틀렸는데, 유럽에서 아시아, 즉 일본과 중국까지의 거리인 19,600km를 3,700km로 줄여버렸다. 어느 정도의 오차가 있지만,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 측정한 지구의 둘레길이까지 나와 있던 상태에서, 콜럼버스는 아주 희박한 근거를 가지고 터무니 없을 정도로 낙관적인 거리를 제시했다. 콜럼버스의 계산대로라면 미국이 있어야 할 위치에 인도나 지팡구가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신념으로 항해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완벽히 빗나간 계산[42]을 가지고 항해를 했다.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 제노바 정부가 콜럼버스의 후원을 거절한 이유도,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시아 탐험대를 여러 번 조직해봤던 입장에서는 어디서 굴러온 이상한 놈이 맞지도 않는 이론을 들먹이면서 당대 기술력으론 불가능한 원양 항해를 하자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에 기가 차서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1차 탐험대 선원 대부분이 제대로 모집한 선원들 말고 죄수들이었던[43] 이유도 이런 터무니없는 계산을 믿고 항해에 나섰다가는 대서양에서 플라잉 카스테야노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정규 선원들이 항해를 거부하고 나선 결과물이었다.
콜럼버스를 반대한 사람들은 당시로서도 지금[44]으로서도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북유럽의 북게르만족(특히 아이슬란드인) 정도를 제외하면 아메리카 대륙을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콜럼버스 일당이 대서양 방향으로 가다가 (나중에 무고한 원주민들에게 행한 만행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히도) 인도는 고사하고 조선이나 일본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바다 위에서 말라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거나 하다못해 하와이나 이스터 섬 정도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콜럼버스 선단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전멸하거나 선상반란으로 와해됐을 것이다. 콜럼버스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 아메리카 대륙이 있었던게 천운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후대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함대는 세계 지리에 대해 충분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훨씬 더 큰 규모의 선단으로 항해를 했음에도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지나 난생 처음 보는 잔잔한 바다를 보고 안도했다가 그 후 몇 개월을 어마무시한 넓이의 망망대해 위에 떠다니며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마젤란도 필리핀에서 원주민과 싸우다 죽은 뒤 수십 명의 사람들만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을 생각한다면 콜럼버스는 운이 좋았다.
이를 두고 콜럼버스가 투자를 위해 사기를 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1차 원정대에 자신도 동행했고 언급했다시피 콜럼버스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당도한 곳을 인도로 믿은 걸로 보아 사기를 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지구가 둥글지 않고 배 모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3차 항해일지 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3차 항해일지 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주장했던 지구 모델 |
모든 증거가 여기가 중국이나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자 콜럼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론을 살짝 수정하는데 '지구 구형론을 부인'해 버린다. 정확히는 자신의 3차 항해일지에서 지구는 둥글지 않고 (서양)배 모양 형태라고 주장한다. # 당연히 이 어처구니 없는 이론은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았고,[45]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지구 구형론에 따라 아시아가 생각보다 넓었거나, 혹은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또 다른 대륙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결론적으로 콜럼버스는 틀렸고 당대 사람들은 옳았다.
콜럼버스만 신대륙에 가본 처음에는 인도에 도착했다는 콜럼버스의 주장을 사람들이 믿었지만, 몇 년 안되어서 콜럼버스의 항로를 따라서 신대륙에 가본 사람들이 여럿 나왔고, 그런 사람들 중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당당하게 그 땅을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대륙이라고 자신의 책자를 통해 주장했다. 한편 콜럼버스는 계속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주장했고, 콜럼버스의 주장을 의심한 사람들에 의해 논쟁에 휩싸였다. 반면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고 인식하고 발표한 아메리고는, 하급 선원의 지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다.
7. 여담
- 그의 초상화로 잘 알려진 문서 상단의 그림은 그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 하면 자주 인용되는 편.
- 아들이 둘 있었는데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디에고는 아버지의 직책을 명칭만이었지만 손자인 루이스는 스페인 국왕 카를 5세[46]로부터 베라과 지역[47]을 봉토로 받음으로써 1대 베라과 공작(Ducado de Veragua)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베라과 공작위를 이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조상이 조상인지라 이쪽에서는 해군이나 해운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17대 공작 크리스토발 콜론 데 카르바할 이 마로토(1925 ~ 86)는 해군 중장까지 지냈는데 ETA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현직인 18대 공작(1949 ~ )도 해군 중장을 지냈었다.
- 한편 콜럼버스의 다른 아들 하나는 첫 부인 사후 내연녀와의 관계에서 나왔는데, 이사벨라 여왕의 시동으로 들어가 궁정 신하로 출세하게 된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그냥 관리로 살았다. 책벌레였던 탓에 이 사람이 가진 도서 컬렉션은 지금도 스페인에서 알아준다고 하며 콜럼버스의 전기를 최초로 쓴 사람이기도 하다.[48]
- 달걀의 아래쪽 껍데기를 살짝 깨뜨린 다음 똑바로 세워, 항해 성과를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고 인정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꿀먹은 벙어리로 만든 '콜럼버스의 달걀' 일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달걀을 세운 것은 콜럼버스가 아닌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이탈리아의 건축가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설계를 공개했던 당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운 일화가 와전되어 만들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 달걀을 깨서 세운 일화는 과거에는 "아무도 시도치 않았던 발상을 처음해낸 것"으로 유명했으나 현대에는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만약 제 3자가 달걀을 세워보라고 요구했는데 콜럼버스가 이런 시도를 했으면 발상의 전환이 맞으나 문제 제기자가 콜럼버스 본인이었다는 것에 맹점이 있다. 즉 그런 시도를 요구받은 제 3자들은 은연 중에 '달걀을 상하게 하지 않는 상태에서 세워야한다'는 무언의 규칙을 강요받은 상태에서 했고 콜럼버스는 출제자로서 그런 가정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했으니 공평치 않다는 것. 이는 국내에도 나온 콜럼버스 달걀의 반론이란 책에도 나와있는데 다른 이들은 원본인 달걀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세우려고 노력한 반면 콜럼버스는 아예 밑 부분을 깨버리고 세웠으니 이는 곧 '세울 수만 있다면 어떠한 파괴적 행위도 정당화된다'는 식의 결과를 정당화하는 유럽 침략주의 인식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 1차 항해가 길어지는 와중에 나침반의 바늘이 갑자기 멋대로 움직여 선원들이 바다의 악마가 나침반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둥 동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대 관점에서 보면 (아마 세계 최초로) 지구의 자기 변화를 발견한 것이지만 콜럼버스로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고, 북극성 또한 다른 별들처럼 움직여서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급히 둘러대서 겨우 진정시켰다.
- 미드 소프라노스 시즌 3에서 콜럼버스에 대해 항의하는 원주민 시위대와 옹호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갈등이 나온다. 근데 정작 이탈리아 남부 출신인 푸리오는 콜럼버스가 북부출신이라고 깐다. 현대 미국인들이 콜럼버스에 대해 갖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 이탈리아 해군의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급 전함 중 한 척에 이름이 계승되었다.
- 세계적인 물류기업인 DHL에서는 업계 최초로 해외발 미국행 항공 특송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자사의 기록을 홍보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테마로 재밌는 광고를 만들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기뻐했는데, 이미 DHL 배달원이 콜럼버스를 한참 기다리고 있었으며 한국에서 온 물건인데 확인해 달라고 콜럼버스에게 서명을 부탁했다. 마지막에 콜럼버스가 DHL이 전달해 준 물건이 뭔지 박스에서 꺼내보니 다름 아닌 모터보트 엔진이었다. 이 CF는 원래 1998년에 호주에서 제작된 CF를 1년 뒤인 1999년 당시 DHL의 한국 대리점 역할을 했던 일양 익스프레스에서 수입하여 우리말 더빙과 자막 편집만 거쳐 그대로 방영한 것으로, 원판 CF에서는 배달원이 싱가포르에서 온 물건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CF에서 배달원의 목소리 더빙을 맡은 성우는 강수진이다.
- 외계인의 지구방문(혹은 침공)이 주제로 나올때 흔히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사건을 많이 빗대어 말한다. 그 예로 스티븐 호킹은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외계인은 콜럼버스, 지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비정상회담 방영 당시, 패널 대부분이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것으로 배웠다고 한다. 유일하게 이집트 패널 새미 라샤드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아메리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미 라샤드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문서로.
- 2020년 6월 10일에는 보스턴에 있던 동상이 참수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유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관련으로 인종차별 철폐 여론이 조성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아메리카에 백인들이 몰려오게 된 장본인격인 콜럼버스가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1개월 후인 7월 4일 미 독립기념일에도 미국 각지에서 나타났다.
8. 대중매체
8.1. 영화
적어도 세 편의 영화화가 이루어졌다.8.1.1.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949)
가장 걸작. 프레드릭 마치가 주연한 1949년 영화이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합작으로 만들어졌으며, 1940년대 말 영화치고는 남미 원주민들의 학살 등의 이야기도 중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흥행은 그리 안 좋았는데 20만~30만 파운드로 만들어 12만 1,000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8.1.2.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992)
1992년, 콜럼버스의 미국 대륙 서구권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서 제작된 두 편의 영화 중 하나. 영어 제목은 'Christoper Columbus: The Discovery'이며, 하술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보다 조금 먼저 개봉했다.
존 글렌[49]이 감독을 맡고, 그리스계 프랑스 배우인 조르주 코라파스가 콜럼버스로 나오고, 인디아나 존스가 될 뻔했던 톰 셀렉[50]이 페르난도 왕, 레이첼 워드가 이사벨라 1세 여왕으로 나오고 말론 브란도가 종교재판관 토르케마다 추기경으로 나왔다. 그밖에 캐서린 제타존스가 콜럼버스의 두번째 아내로, 베니치오 델 토로도 나왔으며 슈퍼맨 시리즈를 제작했던 살카인드 부자가 제작을 맡았다.
워너 브라더스가 배급을 맡아 1992년 8월 21일에 미국에서 개봉했는데 4,5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전세계에서 8,500만 달러를 벌어 흥행은 실패했으나 같은 시기 개봉한 경쟁작인 '1492 콜럼버스'보단 약간 더 흥행은 했다. 한국에서는 개봉되지 못하고 비디오로만 먼저 나왔으며 나중에 지상파에서 우리말 더빙판으로 방송되었다.
8.1.3. 1492 콜럼버스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 위 영화와 함께 콜럼버스의 항해 5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영어 제목은 '1492: Conquest of Paradise'이다.[51] 리들리 스콧이 감독, 공동 제작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콜럼버스 역으로, 시고니 위버가 이사벨라 여왕 역으로 출연했다.
1992년 10월 9일에 북미 개봉을 했다.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학대 등의 어두운 측면도 다루어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점에서 꽤 볼 만한 작품.
다만 고증오류도 적지 않다. 예를 들자면, 1492년 항해에 나서기 전 콜럼버스 자신이 아프리카 희망봉 경유 인도행 항로 얘기를 언급하는데, 실제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행 항해가 성공한 건 그로부터 6년 뒤(1498년)이다. 그리고 추가 항해를 준비하던 동안 자신이 발견하던 신대륙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만 (대륙의 이름을 아메리카라고 지어 소개한 책자는 이미 발표되어 있었던 시점이었으나) 이제 막 탐사를 시작한 당시의 시점에서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확정되어 보편화되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영화 내에서 콜럼버스 개인에 대해서는 무척 호의적이라 역사와 안 맞는 묘사가 다수 존재한다. 굉장히 마인드가 근대인인 것처럼 그려진다거나, 원주민들에게 너그러운 유화책을 편다던가. 대신 동행한 에스파냐 귀족들이 착취와 학대를 저지르고 콜럼버스와도 충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금 채굴 할당량을 안채웠다고 원주민 손을 자른 장면이 있는데, 콜럼버스를 따라온 귀족이 원주민 손을 자르자 콜럼버스는 이를 보고 화를 낸다. 하지만 실제로는 콜럼버스도 할당량 안 채웠다고 손 자른 건 매한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콜비어천가 수준으로 콜럼버스를 미화한 건 아니다. 영화 속에서 콜럼버스는 동생들에게 강압적인 형으로 그려지고, 이탈리아 출신 이방인인 탓에 겸손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독선적인 모습으로 적을 잔뜩 양산한다. 또 식민지 통치를 못한 것도 역사대로 나온다. 산토도밍고에 태풍이 몰아닥쳐서 (첫 항해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며 친분을 가졌던) 원주민 추장한테 도와달라고 하자, 그 원주민 추장이 "이제 당신도 우리말 좀 배우지?" 라고 쏘아붙이며 차갑게 거절하는 장면까지 있을 정도.[52]
한편 1492 콜럼버스로 제목을 바꾸어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영웅인가? 약탈자인가?'라는 문구를 달고 199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했으나 서울관객 33,700여명에 그쳤다.
사실 이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어서, 4,700만 달러를 들여 만든 영화이나 전세계 흥행 다 합쳐서도 7,000만 달러를 겨우 넘겨 본전치기조차 실패했다.
다만 흥행은 실패했어도 반젤리스가 작곡한 OST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음악은 전쟁 장면 등의 비장한 영상의 배경 음악으로 많이 쓰인다. 반젤리스의 히트곡들을 수록한 컴필레이션 앨범엔 반드시 들어가는 곡이다. 영화 내적으로 혹평과 호불호가 많이 갈렸지만 OST는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8.1.4. 기타 영화에서의 모습
- 유비소프트의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어쌔신 크리드에선 어쌔신 크리드 2: 디스커버리 이후 행적이 등장한다. 스페인 암살단의 암살자 아귈라가 선악과를 손에 얻고 난 후 신대륙으로 출항할 준비를 하던 그를 찾아와 선악과를 숨겨달라 부탁하며 무덤까지 가져가달라 한다. 에지오의 도움을 받은 이후 암살단의 협력자가 된 콜럼버스는 이를 받아들여 숨긴 뒤 자신이 죽을때 무덤으로 같이 가져간다.
8.2. 게임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 2: 디스커버리에서 출연한다. 새로운 항로 개척을 위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왔다가 로드리고 보르지아의 함정에 빠져 잡힐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에지오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같이 스페인으로 떠난다. 에지오의 도움으로 이사벨 1세의 협력을 얻게 된 그는 항해를 준비하며 암살단의 협력자로 남는다. 이후 행적은 위 영화 항목에 서술.
- 에로게 영웅전희에서는 모에화되어 USA의 수장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와 세력이 인접하면 80.000골드와 자신의 영토를 교환하자는 이벤트를 볼 수 있다. 이 때 제안에 따라 영토를 구입하거나 제안을 거절한 후 USA를 멸망시키면 동료로 영입할 수 있다.
- 대항해시대 3에서 스페인식 이름인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나온다. 다만 유저들의 흔한 상식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 당대인들이 지구가 둥근 줄 몰랐고 콜럼버스만이 오직 그걸 알고 있었다는 오류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 대항해시대 5에서는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해명하기 위해 항해한 주인공 일행이 제노바에서 프랑스 서해안의 해도 2를 얻기 위해 찾아오자 자신을 박대한 포르투갈 소속 사람이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쫓아내면서 국적을 바꾸라고 했으며, 주인공 일행이 쥬피톨 에르난데스에게서 받은 잉글랜드 국적 증명서를 가져오자 주인공 일행에게 해도를 건네준다.
주인공 일행이 메르카토르로부터 라몬이 카보베르데에서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을 듣고 신대륙으로 향했다고 생각해 콜럼버스를 찾아가는데, 주인공 일행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자 콜럼버스는 자신이 찾은 것은 인도라면서 화내면서 주인공 일행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전에 쫓아낸다. 주인공 일행이 토스카넬리에게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대해 언급한 것에 대해 기분 나쁜 이유를 들은 후에는 니나의 설득으로 주인공 일행과 항해를 하면서 파리, 이스탄불, 케이프타운, 누비아 거점 등을 다녔다. 진정해도 퀘스트에서는 평형 세계의 자신과 만나게 되는데, 이쪽은 원래 세계의 자신과 달리 아직 신대륙으로의 항해에 나서지 않은 상태라 자신이 갈 곳이 인도라고 굳게 믿고 있어서 스킬 이름도 '인도 항로에 대한 열정'이다. 또 하나의 자신을 본 콜럼버스는 주인공 일행에게 '아무래도 영혼의 이끌림 같은 것 때문에 또 하나의 자신에게 끌리는 것 같으며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 같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53] 이에 영감을 얻은 주인공 일행은 평형 세계의 쥬피톨과 만날 시도를 하게 된다. 세계일주 퀘스트에서 쥬피톨이 언급하길 또 한명의 평형세계의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세계일주에 성공했다고 한다. 생 제르맹 백작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다른 가능성과 미래를 가진 평형세계의 또다른 자신들이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평형세계의 동일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일정한 방향성은 존재한다면서 바스코 다 가마는 반드시 동쪽으로만, 콜럼버스는 반드시 서쪽으로만 간다고 한다. 즉, 다른 평형세계의 수많은 콜럼버스들 중에서도 인도에 도착한 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 제르맹 백작이 그 방향성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는 건 세계의 섭리에 거역하는 일이고 차원의 질서와 균형에 악영향을 주는지라 바로잡아야 하며, 진정해도 퀘스트를 주는 이유도 이것이라고 하니 다른 세계의 콜럼버스가 동쪽으로 가는 것도 말그대로 천기를 거역하는 일이라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1.5부 2막에서 라이더로 나오는데, 고증에 충실하게 가감 없는 악당으로 나오고 성능도 나름대로 괜찮아서 호평을 받았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이벤트에 의해 2/2/6/0의 탐험가로 등장한다.
-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올랜덤 인물전에서는 F급 영웅으로 등장한다. 오버로드라서 F급 영웅 중에서는 가장 쓸만하지만 워낙 약해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여담으로 다른 F급은 김일성,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로 나머지 F급들은 전부 한국에서 개새끼 소리 듣는 인물들임을 생각하면 콜럼버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볼 수 있다.[54]
- 월드 오브 워쉽 이탈리아 10티어 전함의 이름이다. 15인치 16문의 가공할 화력과 360도 회전하는 후방 포탑이 특징.
[1] 콜럼버스의 대표적인 초상화에 묘사되어있는 날짜가 10월 31일이므로 가장 유력한 생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의 생일은 알려진 바가 없고, 여름 혹은 초가을에 태어났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이름의 유래인 크리스토퍼 성인의 탄생일이 7월 25일인데, 그와 콜럼버스의 탄생일이 일치하여 이름을 크리스토퍼라고 지었다는 설도 있다.[2] 이 조차도 생일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나이라고 볼 수는 없다.[3] [kɾiˈʃtɔffa kuˈɾuŋbu; ˈkuŋbu\][4] 《빈란드 사가》의 주인공 레이프 에이릭손 일행.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다가 현재의 뉴펀들랜드래브라도 일대에서 바이킹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사실로 입증되었다.[5]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 왼쪽에 있었다. 오른쪽은 "구출(The Rescue)"이라는 조각상이 있었는데, 개척자를 위협하는 원주민을 붙잡아 구출하는 백인 남자가 묘사되어 있다. 이 역시 동일한 년도에 철거돼, 지금은 개척자의 개 조각상만 남아있다.[6] 해당 사례에서는 "'Columbus'는 이탈리아 인명이라 이탈리아어 표기법과 관행에 따라 '콜럼버스'로 적"는다는 잘못된 내용이 있는데, Colombus는 라틴어·영어식 표기이며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어식이 아닌 영어식 발음 [kəˈlʌmbəs\]를 절충한 것이다.[7] 후술하지만 사실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고대 유럽인들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때는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논쟁뿐이었다.(요즘이야 우주 항공 기술 발달로 지동설이 입증된 지 오래지만 이시기는 천동설이 주류였다.)[8] 이 과정에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구형이 아닌 서양배처럼 중간이 잘록해 자신이 계산한 거리가 맞다고 주장한다.[9]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도 스페인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처음 항로를 개척하고 발견한 섬이니 신대륙이다. 어차피 무력 진압할 거니 섬에서 나오는 것과 총독 자리까지 다 스페인 거라 생각 한 듯하다.[10]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동군연합이었는데,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 국왕이었다. 카스티야가 아무래도 아라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성과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는 대서양에, 아라곤은 지중해에 접하고 있어서 대항해시대 이후 아라곤은 찬밥 신세가 된다.[11] 유럽인, 정확히는 포르투갈 함대의 희망봉 발견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보다 앞선 1488년 이뤄졌지만, 장기간 항해에 따른 선원의 반대로 인도양 초입에서 다시 리스본으로 복귀한다.[12] 당시 포르투갈은 아직 인도 항로를 개척하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첫 탐험 이후 1494년에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단이 이를 성공시킨다.[13] 카디스 근처에 있다.[14] 바다의 악마가 존재한다고 믿던 당대였기에 이날 항구에서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처럼 선원들과 그 가족, 친구 등의 우는 소리가 출항 준비부터 늦은 시각까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15] 상상에 의거한 이 배의 레플리카는 19세기 이래 여러 번 제작됐다.#[16] 1차 원정 직후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보낸 기록을 보면 원주민들에 대해 "친절하고 영리하다"고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2차 원정 때부터는 "멍청하고 폭력적인 야만인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반면 타이노인들은 처음 만난 콜럼버스 일행을 굉장히 잘 대접해 주었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선의의 표시로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당장 콜럼버스 본인조차도 탐욕으로 인해 돌변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데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온유하고 악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살인이나 도둑질도 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세상에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고 믿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말을 하며, 온유하고 항상 미소를 짓습니다"라며 이들을 극찬할 정도였다.[17] 1차 원정 때의 선박 수는 도합 4척이 전부였으나, 2차 원정 때는 그 네 갑절인 17척으로 원정을 재개했다.[18] 현재의 아이티 북동쪽에 있었다.[19] 현재의 푸에르토 플라타 주에 소재했다.[20]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후손에게 보낼 편지를 갖고 왔다. 당시 콜럼버스를 포함한 유럽인들은 13세기에 원나라를 탐방하고 온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을 즐겨 읽었고, 그래서 아직도 중국을 쿠빌라이 칸의 후손들이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참고로 3차 원정때까지는 몽골인들이 유럽에 세운 국가도 명맥상으로나마 잔존해 있긴했다.(...)[21] '아예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다'는 극단적인 분석도 있지만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현대적인 수준의 인종 평등 의식이나 인권 개념은 아직 없었던 시대였지만, 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이라고 해서 유럽인들이 아예 타 문화권과의 교류 없이 살지는 않았다. 애초에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처럼 동시대 스페인, 포르투갈 정복자들의 포악함을 비판한 사람들의 주된 논리가 "유럽에서도 종교나 인종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때려 죽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이 아니라고 다른 대륙의 원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거나 노예로 부리는 인간들은 이단이나 마찬가지다."였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지만 인간 본연의 기본적인 도덕관념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타 문화권 정복 활동을 펼치던 유럽 국가들도 자국민이 개인으로서 함부로 살인, 강도, 방화, 약탈 등의 행위를 저지르면 중범죄로 처벌하는 등 최소한의 도의는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부색이 희지 않고 + 나무와 풀을 대충 엮어 만든 조잡한 집에 살고 + 윗옷을 안 입거나 얼굴에 구멍을 뚫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매우 야만스럽고 + 저런 모습으로 보아 경제관념이나 세상 물정도 별로 모를 테니 + 잘 구슬려 물물교환에서 오래오래 이익을 뽑아먹으면 좋을 상대', 그러니까 '결코 우리 유럽인만큼 우월하지는 못하지만 일단 말은 통하고 설득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정도의 인식을 가졌다고 봄이 옳다. 진짜 유럽 사회 전반의 관념을 콜럼버스가 대표한 것이 아니라, 콜럼버스 같은 당시 신대륙을 찾던 개척자들이 당시 유럽 사회 기준에서도 상상 이상의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양아치들이라서 저런 유혈사태를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득이 생기니 유럽 본국에서도 이런 행태를 방관했기에 면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22] 물론 확실한 인정을 받은 건 아니다. 되려 과학적인 조사를 거부하고 있어 의심을 많이 받는다.[23] 관을 들고 있는 앞의 두 사람은 그의 항해를 지지한 두 왕, 뒤에서 고개 숙이고 짊어지고 있는 두 왕은 항해 지원을 거절한 두 왕이다. 옷차림에 상징물이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 편하다.[24] 그나마 메스티소(백인-원주민 혼혈)로 피가 이어진 경우는 많으나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주민 인구가 많은 곳(볼리비아, 멕시코, 페루)도 19-20세기의 급속한 인구 증가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북미나 카리브,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경우는 메소티소의 인구 비율도 적어서 원주민의 피가 이어진 경우가 많지 않다.[25] 매독은 성 접촉을 통해 전파된다.[26] 이 벌레에 추출해서 빨간색 염료와 천연색소로 쓰이고 있으며 고대 잉카 시절부터 사용되었다. 현재는 딸기우유 등에 첨가해서 사용하고 있다.[27] ackee. 자메이카 원산의 과일. 덜익은 과일과 씨앗은 맹독성이지만 다 익은 과육은 고급 식재료로 사용된다.[28] 정확히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딸기의 교배친들. 유럽에도 동속이종의 야생 딸기는 존재하였다.[29] 그런데 이 작물은 특이하게도 콜럼버스 이전에 아메리카 밖으로 전파된 적이 있었고 심지어는 다른 대륙에서 유입된 작물로 추정된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30] 벼 종류는 아니고, 줄의 한 종류이다.[31] 열대 피부병[32] 매독은 원래 구대륙에도 존재했는데, 원주민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반론도 존재한다.[33] 특히 옥수수 같은 경우를 말하자면 옥수수의 전신이 되는 식물인 테오신테는 오늘날 옥수수와는 다르게 곡식이라고 볼 부분도 거의 없고, 너무 단단한데다 작았는데 오늘날처럼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모양이 변한 건 12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만약에 서기 1000년에(10세기 ~ 11세기) 옥수수가 빈란드에 거쳐 유럽으로 일찍 전래되었다면 아마도 미국 대륙과 다르게 테오신테와 비슷하게 원형에 가까운 보존된 모습으로 유지되지 않을까 하는 재밌는 가설도 제기했다.[34] 페루, 벨리제, 우루과이[35] 조선에 상륙하였던 서양인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1582년(선조 15) 마리이(馬里伊)가 제주도에 표착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곧 명나라로 이송된 것이다. 포르투갈 상인만이 이 지역의 해상에서 활동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마리이는 포르투갈인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열린 시기로 서양 상선이 난파하여 조선에 표착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36] 서기 5세기에서 6세기 무렵에 활동했던 아일랜드의 수도사인 성 브렌던이 북미 대륙에 도착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신세계를 찾아 떠난 성자 브렌던[37] 출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종훈(역), 콜럼버스 항해록, 1492년 8월 9일 일지.[38] 이런 잘못된 역사적 인식들을 '플랫 에러'라고 한다.[39]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1] '평평한 지구' 신화, 조선일보, 2009년 06월 18일 수정, 2022년 10월 12일 접속[40] 다만 알마게스트의 경우 이미 증명된 지구 구형론을 틀린 천동설 이론에 넣다보니 논리가 좀 이상하다.[41] 한국과 베네수엘라나 콜롬비아의 거리와 비슷하다.[42] 일설에는 아랍의 거리 계산법과 유럽의 거리 계산법을 혼동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북대서양 계절풍 타고 딱 6주면 인도에 도착한다고 썰을 풀고 다녔는데, 처음부터 잘못 계산한 거리에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 일부러 더 줄여서 이야기한 것으로 추측된다.[43] 스페인 여왕에게 부탁해서 이번 탐험을 다녀오면 잔형을 면제하고 석방해 준다는 조건으로 고용했다.[44] 콜럼버스가 타고 간 산타 마리아호는 배수량이 겨우 150t밖에 안 되는 쪽배다. 어느 정도냐면, 현재 한강 유람선의 배수량이 이것보다 4배도 넘게 더 큰 688t이다. 게다가 길이는 프로펠러기인 DC-3와 비슷한 약 18~21m. GPS 등 각종 항법장치에 엔진, 식품 보존 기술, 의학 등 모든 게 발달한 현대에도 이 수준의 배를 타고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가는 것은 물론이고, 콜럼버스의 실제 항로인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45] 지구는 콜럼버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양극을 지나는 둘레가 적도 둘레보다 짧고, 그 차이마저도 굉장히 작아 구에 굉장히 가깝다. 굳이 배에 비유하자면 서양배보다는 동양배에 가깝다. 애초에 배고 나발이고, 자연물 중에 지구보다 구형에 가까운 작물은 완두콩 정도 밖에 없다.[46] 스페인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47] 현재 파나마의 베라과 지역. 선조의 업적을 주장하며 상당한 영토를 주장하는 콜럼버스의 후손들과 스페인 왕실간의 오랜 갈등을 봉합하기 위하여 일단 명목상 영토인 미정복지를 던져주고 알아서 정복하라고 작위를 내렸다. 1대 공작인 루이스 콜론은 파나마쪽으로 가서 자신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했지만 원주민의 반발과 악천후 등으로 실패하고 20년만에 스페인으로 복귀하면서 봉토를 반납하는 대신 작위의 보존과 연금을 받기로 하였다. 내려진 봉토가 완벽한 정사각형이었다.[48] 리들리 스콧의 영화에는 콜럼버스는 인정도 못 받다가 이 아들의 전기로 진가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오류이다. 적어도 당대에는 연대기 작가들 중에 콜럼버스를 찬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49] 1932~. 유어 아이스 온리부터 살인 면허까지 다섯 편의 007 시리즈를 연출했다.[50] 그는 이걸로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51] 원래는 당연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제목에 넣었겠지만 당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992)'가 이미 존재하여 제목이 겹치는 문제가 있었고, 500주년 기념사업회가 존 글렌 감독의 손을 들어주면서 콜럼버스를 뺀 제목으로 개봉하게 되었다.[52] 결국 산토도밍고는 엉망이 되고 불명예스럽게 쫒겨나 감옥에 갇혔다가 이사벨 1세가 특별사면을 해서 겨우 풀려난다.[53] 다만, 다른 세계의 자신이 서쪽으로 가면 인도에 반드시 도착할 거라며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서, 자신은 그 결말을 아는 지라 심란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기는 했다.[54] 한국의 경우에도 20세기 전후로 위인전집을 통해 모험심 넘치는 항해사로 이름을 알렸던 콜럼버스의 어두운 면이 알려지면서 이미지가 예전보다 추락하였다. 한국도 과거 비슷한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만행에 공감하는 부정적 인식이 생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