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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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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광조 시절 사회2. 집안 내력과 초년기3. 사림에 의한 개혁을 꿈꾸다
3.1. 폐비 신씨 복위 논쟁3.2. 정몽주김굉필의 문묘 종사에 대한 논쟁3.3. 군자, 소인의 논쟁3.4. 현량과(賢良科: 천거 제도)3.5. 소격서(昭格署) 폐지 논란3.6. 공안개정, 노비종모법, 한전제3.7. 정국공신 개정 시도(위훈 삭제)
4. 기묘사화와 몰락

1. 조광조 시절 사회

조광조가 등장한 시기는 중종 시절이었다. 중종은 연산군을 반정(反正)으로 쫒아내고 반정공신들이 앉힌 왕으로서 실권이 약했다. 반정공신에게는 연산군의 폭정(暴政)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조선 최초로 일어난 신하가 주동이 된 반정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중종의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역모 사건이 줄지어 발생할 정도로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중종 2년(1507) 김공저와 조광보의 옥사 및 이과의 옥사, 중종 3년(1508) 신옥의의 옥사, 중종 4년(1509) 왕실 종친들이 연루된 옥사, 중종 8년(1513) 박영문과 신윤무의 옥사 등이 있었다.

이 옥사들을 살펴보면 중종반정에서 보였던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모순을 알 수 있다. 김공저와 조광보의 옥사에는 유자광 같은 자가 공신으로 책봉된 것에 대한 반발심리가 작용했고[1] 이과의 옥사는 왕을 호위하는 내금위(內禁衛)에서 꾸민 역모로 반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무사들이 온당한 포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신옥의의 옥사 역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가 박탈당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으며 왕실 종친들의 옥사 역시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이었다. 박영문과 신윤무의 옥사는 반정의 과실(果實)을 문신들은 마음껏 누리나 무신들은 제외된 현실에 불만을 성토하다 모반죄가 적용된 것이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 책봉의 기준을 본다면 공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신을 선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예가 있다. 중종은 자신의 외척인 윤탕노를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추천하였다. 그러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윤탕노는 반정 때 한양 밖에 있어 반정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하를 추대하려는 마음은 다른 이들의 배가 넘었을 것입니다.

라며 정국공신 3등에 임명한 바 있다. 이때 임명된 반정공신의 수는 110명인데, 개국공신의 수가 30명임에 비해서도 나눠먹기가 지나쳤다. 게다가 '윤당(允當) 대신'이라 불리며 연산군의 말마다 "윤당하신 분부이옵니다"라고 아부를 해대던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2], 연산군이 총애하던 시인 김감, 연산군에게 여자를 바치고 임숭재 급의 총애를 누렸던 구수영[3] 등 연산군의 측근들이 일을 꾸밀 때부터 가담한 것도 아니고 중종반정 당일 가담하고도 1등공신과 2등공신에 척척 배정되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과를 비롯해서 격문을 돌리고 군사까지 모집한 진짜 정국공신이 될 만한 사람들은 "결국 한양에 있던게 아니니까 무효. 연산군 미워했음이야 만백성이 한마음 아니었음?"하면서 격이 떨어지는 원종공신에 봉해버렸다는 것. 이과는 분노하여 반정을 꾀했다가 들켜서 처형당했다.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은 이것을 연이어 비판하였고 정국의 불안정이 심화되었으나, 때맞춰 신복의 옥사가 일어나면서 공신 개정 문제는 잠잠해졌다. 그러자 이제는 연산군 대의 과거 청산 문제가 대두되며 무오사화 관련 논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무오사화를 주동했던 유자광이 유배되고 사화를 입은 사대부들이 복권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논쟁을 주도한 이들은 대간이었고, 대간에 맞서는 반정공신들은 도덕적인 결함들을 안고 있었으므로 대간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에다가 반정을 이끈 성희안, 김수동, 류순정 등이 모두 사망하여 국정에 공백이 생겼다.

이에 중종은 공백을 메꿈과 더불어 자신의 친정체제를 굳히기로 결심하였고, 국정의 공백을 메꿀 세력으로 반정 세력을 궁지로 몰아대던 대간(사림)을 지목했다. 조광조의 등장 이전 정세가 이러하였으므로 조광조가 정치에 전면으로 등장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다.

2. 집안 내력과 초년기

성종 13년(1482) 한양 조씨 조원강과 여흥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양 조씨는 조휘원나라에 포섭되어 초대 쌍성총관이 되면서부터 쌍성총관부의 수장인 총관을 세습해 온 원나라의 끄나풀 집안이었는데, 그 후손 중 1명인 조돈환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귀순 후 환조를 도왔던 조돈의 후손만 대가 이어지면서, 한양 조씨는 대표적인 조선 개국공신 집안이 되었다. 조광조의 5대조 조상인 조온이성계의 조카로, 이성계와 이방원을 보필하며 무공을 세운 인물이다. 5대손인 조광조와는 느낌이 참 많이 다르다.

아버지 조원강은 역참을 관리하는 찰방을 지냈다. 찰방은 비록 외직이기는 하나 문관 종6품에 해당하는 결코 낮지 않은 관직이다. 조광조가 태어날 당시 조씨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크게 몰락하진 않았던 듯하다. 조선은 공신의 후손에게 음으로 양으로 만만치 않은 혜택들을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4]

연산군 4년(1498), 아버지 조원강이 압록강 인근 평안북도 희천군의 찰방으로 부임하였을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유학자 김굉필이 그 곳으로 유배를 오자, 17세였던 조광조는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김굉필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김굉필에게 배운 유학은 조광조의 일평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뒤 18세에 결혼하였고 19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조광보의 옥사 때 심문당하기도 했는데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는 조광조가 반정공신들을 비판하는 세력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뜻도 된다. '조광보 옥사 사건'은 박경, 김공저, 유숭조, 조광보, 문서귀 등이 반정 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분개해, 박원종유자광을 제거하고 정미수[5]를 정승으로 앉히자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문제는 조사 과정에서 이들만이 아닌 조광조, 김식 등도 이들과 교류하며 문제의식을 공유해서 자칫하면 대형 옥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즉위초라 그런지 주모자인 박경과 김공저는 참수하고 나머지 가담자들은 유배보내는 것으로 끝났다.[6]
"생원 김식, 조광조 등이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고 관대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대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본받는 자도 생겼다. 성균관에서 그들이 스스로 사성십철(四聖十哲)을 일컫는다고 하여 이들을 죄로 몰아넣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5년(1510) 29세에 진사시를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실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자신의 행동도 철저히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르려고 하였다. 주위에서는 이를 비웃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악시하기까지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조정에 조광조의 이름이 잘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유생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는지, 중종 5년(1510) 사정전에서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강의하도록 했을 때 조광조가 대표로 나와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그 뒤 중종이 성균관에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유생을 천거(薦擧)하도록 명하여 200명 중에서 3명이 뽑혔는데, 그중 조광조도 있었다. 이때 조광조가 천거받음에 많은 대신들이 반대하였다. "조광조가 천거받는다면 참봉이나 별좌 벼슬 정도나 받을 텐데 조광조의 학문이 아까우니, 그가 학업에 정진케 함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조광조를 6품직에 바로 올려서 등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고, 이후 이조판서였던 안당이 천거하여 그 해에 조광조는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로 임명되었다. 중종 10년(1515) 34살 나이에 성균관의 전적으로 임명되며 정치 전면에 나섰다.

이미 뛰어나게 학문을 익힌 조광조였지만 늘 선비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남다른 각오로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읽는 책인 《소학(小學)》을 늘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천거로 벼슬길에 오른 조광조를 놀리면서 "소학을 열심히 읽어라. 그러면 조지서 사지는 할 수 있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조광조는 조지서 사지에 임명된 지 2달 만에 알성시를 치러 급제했다. 스승 김굉필갑자사화로 죽었지만 김굉필의 동문들이 아직 살아 있었고, 김굉필의 다른 제자들인 김정국, 김안국 등도 있었다. 조광조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학문, 정치, 시사를 토론하였다. 그 중에는 훗날 조광조의 죽음을 방관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조광조의 죽음만은 막아주려고 했음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후세에까지 거의 소인배나 간신으로 매장당한 남곤도 있었다.

이런 야사가 있다. 어느 날 남곤과 조광조가 산책을 나갔는데 조광조는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자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곤은 눈길 한 번 안 주고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에 돌아온 조광조는 부끄러움에 자책하며 한탄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는 남곤을 무섭게 생각했다.
젊은 사내가 어떻게 여자를 보고 눈이 한 번도 안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남곤이란 친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하거나 외면할까봐 무섭구나.
말을 마친 뒤 조광조의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이 출처불명의 일화는 전혀 말이 안 된다. 일단 유사한 민담들이 너무 많다. 《삼국지》 등에서는 이 일화가 화흠관녕의 일화로 나오므로 저 일화는 표절일 가능성이 높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지>의 일화에서는 관녕이 남곤 포지션인데,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어서 세속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조광조 포지션인 화흠과 인연을 주도적으로 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화를 가져다가 정반대로 해석한 것. 또 조광조 다다음 세대뻘 되는 정인홍도 저런 에피소드가 있다. 게다가 조광조는 성균관 시절에부터 자세를 절대로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더운 날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수양에만 몰두했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남곤은 훨씬 더 현실 관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3. 사림에 의한 개혁을 꿈꾸다

3.1. 폐비 신씨 복위 논쟁

중종 10년(1515) 34살에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조정에 출사, 3사 중 홍문관에 들어갔다.

중종 8년(1513) 박영문과 신윤무의 모반사건이 있었고, 천둥번개가 여러 번 울리는 등의 일이 생기자 중종은 구언(求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신하들에게 '아무 제안이나 좋으니 왕에게 상소를 올리라.'는 뜻이었다. '구언'은 주로 나라에 재해 등의 변고가 잦을 때 내려졌는데, 하필 중종 시절은 워낙 재해가 많아 중종은 한 해에도 몇번이나 구언을 하라는 명을 내릴 때도 있었다.

이때(중종 10년) 박상과 김정은 중종의 첫 왕비였던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의 딸로[7], 중종반정 때 신수근이 살해당하고 신씨는 폐비된 바 있다. 이러한 신씨를 복위하자 함은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것이다. "아내가 쫓겨남은 남편에게 잘못이 있거나 시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을 때에나 합당하므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왕비가 폐위됨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또한 이 폐위는 신하가 왕을 위협하여 왕비를 폐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박상과 김정은 이를 복위함으로써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박상과 김정은 상소문을 단단히 밀봉하고 "전하께서 직접 뜯어보소서."라는 쪽지를 위에 붙인다. 이를 본 승정원(비서실)은 뜯지 않고 중종에게 직접 올린다. 중종은 이를 읽어보고 놀라, 상소를 확인하지 않고 올린 승정원을 질책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사정을 알아내고 동요했다. 곧 대간에서는 박상과 김정을 탄핵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종묘사직을 위협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이들이 반정세력의 도덕성과 왕의 무능을 정면으로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구금되고 심문당한 끝에 결국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때 조광조는 알성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을 2달간 지내고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때 조광조는 상소를 제출하여,
박상과 김정은 전하의 구언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만일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지, 처벌을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대간은 나서서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들을 처벌하게 되었습니다. 대간이란 본디 언로(言路)를 열어야 그들의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재상들이 그들을 처벌하자고 해도, 대간은 그들을 용납하자고 하여 언로를 넓혀야 합니다. 저는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이들과 어찌 함께 근무하겠습니까? 저와 그들은 서로 용납할 수 없으니, 사헌부사간원의 대간을 전원 파직하고 언로를 여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발언에 조정은 크게 동요하였다. 우선 박상과 김정을 탄핵한 대사헌[8]이었던 권민수의 후임 대사헌 이장곤이 이 발언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조광조와 같은 견해를 가진 관료들이 하나둘씩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대간에 남아 탄핵을 주동한 적이 있었던 사헌부의 관료들은 여전히 그들의 주장을 고집하며, "종묘사직이 언로보다 더 중요한데[9] 조광조의 처사는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반정공신들 역시 조광조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홍문관의 전체 관원이 나서서, '조광조의 견해가 옳긴 하지만, 전 대간도 종묘와 사직을 위해 결단하였으니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는 양시론(兩是論)을 주장했다. 그러자 중종은 "한쪽이 옳으면 옳은 것이지, 양쪽이 옳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였다. (《중종실록》재위 10년 11월) 그러자 사간원은 "사헌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이들은 "우리는 조광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사헌부는 양시론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중종은 당황하여, "조광조 한 사람의 발언 때문에 모든 관료들이 서로 대립하다니 매우 놀랍다. 어찌하여 이 조정에 이런 큰 변고가 있는가?"라며 질책했다.

그래도 논란이 계속되자 중종은 대신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영의정 유순은 "조광조나 대간의 주장이 다 옳은 것이다.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경감하자."라고 말하며 살짝 논쟁의 핵심을 벗어난다. 그러자 좌의정 정광필ㆍ우의정 김응기ㆍ우찬성 김전ㆍ우참찬 남곤은 "조광조의 견해가 옳다."고 하였고, "이에 따라 대간의 거취를 정해야 한다." 말하였다. 그러자 양시론을 가장 처음 주장했던 홍문관(弘文館) 부제학 김근사가 "의정부의 대신들이 화목을 도모하지 않고, 조광조의 편을 듦으로써 분란을 키운다."라고 비판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듣고 "홍문관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자 중종은 만류하며 수습했다.

결국 조광조의 발언 때문에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졌고,[10] 결국엔 좌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이 "박상과 김정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하고 주장하였다. 결국 대간은 교체되었고, 중종 11년(1516), 조광조는 3월 6일에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3월 28일에는 홍문관 수찬으로 승진했다. 5월 22일에는 경연검토관이 되었고, 11월엔 박상과 김정이 복직함으로써 논쟁이 조광조의 완승으로 끝났다.

3.2. 정몽주김굉필의 문묘 종사에 대한 논쟁

1년이 지나 중종 12년(1517) 10월, 정몽주를 비롯한 성삼문, 박팽년 등의 문묘 종사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영의정 정광필은 "성삼문과 박팽년에 대해서는 아직 보류하는 게 좋다."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생각해보면 시기상조였기 때문이다.[11] 다만 정몽주에 대해서는 모두 문묘 종사에 동의했다.[12] 이때 우의정 이자가 조광조의 스승이었던 김굉필을 언급하며 그를 포상하자고 하였고, 중종도 동의하여 이들의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틀 뒤 성균관 생원 권전이, "정몽주뿐 아니라 김굉필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많은 신하들이, "김굉필이 뚜렷이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문묘에 종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며 반대했다. 실제로도 김굉필은 나중에 문묘에 종사되기는 했지만, 똑같이 문묘에 종사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성혼, 송시열 등에 비하면 학문적 업적은 초라했기에, 신하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13] 중종 역시 "자격이 없는 자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자 조광조는 "김굉필 같이 행실이 바른 자는 찾기 어렵습니다."라고고 발언했다. 맞는 말이라 쳐도 공정성 제로

또한 조광조는 뒤이어, "많은 유생들이 김굉필을 칭송하므로 그의 사람됨을 알 만 합니다."라고 칭찬하며, "그는 행실로 유학의 모범을 보였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받드는 것이며, 그렇다면 종사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원로대신들은 "정몽주는 괜찮으나, 김굉필은 비록 뛰어난 유학자이긴 했어도 명이 짧았으므로[14] 성리학을 떨치지 못하였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중종은 "정몽주도 종사하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몽주가 우왕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논리면 이성계도 욕해야 하겠네? 그러자 조광조는 "당시 사람들은 우왕이 왕씨인지 신씨인지 몰랐을 뿐 아니라[15], 정몽주가 그의 밑에서 벼슬을 한 것은 부귀영화를 원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흠이 안 됩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원로대신들과 중종은 양보하여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되, 김굉필은 그럴 수 없다."는 타협안을 내밀었고,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를 논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것이다.

조광조와 그의 세력은 신진 사림파 세력이었고, 사림은 성리학을 내세우는 학파들이었다. 정몽주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였고, 또한 김굉필은 사림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자 젊은 사림들의 우두머리로 떠오른 조광조의 스승이었다. 이들 신진 사림은 이들을 문묘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성리학화를 더욱 촉진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사상적 뿌리로 여긴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자신들의 학문적 권위를 높이려고 했으리라.

하지만 중종은 신진 사림을 밀어주는 입장이면서도, 이들이 훈구세력과 적당히 균형을 이루길 원했으므로, 이들의 손을 완전히 들어줄 수는 없었다. 또한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것은 조광조에 호의적이었던 정광필 같은 대신들도 반대할 정도로 억지였다. 이들이 김굉필을 민 것은 아무리 봐도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것 때문이지, 김굉필이 성리학에 큰 공헌을 해서가 아니었다.[16] 정몽주는 이미 조선 초부터 충신으로 평가받았고, 이색도 '동방 이학의 시조'라 말할 정도였으니 문묘 종사에도 대신들도 동조했지, 김굉필은 대신들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듣보잡이다.

만일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한다면,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는 문묘에 종사된 대유학자의 수제자가 되는 셈인데, 그렇잖아도 신진 사림파의 필두(筆頭)였던 조광조는 국가 이념의 스승이 되는 격이었다. 이는 지나칠 정도의 권력집중이었다. 이런 그들의 속셈을 당시 반정 세력들과 왕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사실 김굉필의 문묘 종사는 이후에 실현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사림이 조선을 장악하고도 시간이 흐른 광해군 시기의 일이고, 그나마도 조광조를 신원해준 후의 후속 조치나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아도, 김굉필의 문묘 종사는 정몽주에서 시작해서 조광조까지 이어지는 학맥을 전부 문묘에 종사하는 과정에 편승한 정도이다. 따라서 김굉필을 문묘로 모시자고 주장한 것은, 신진 사림의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노림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3. 군자, 소인의 논쟁

중종 13년(1518) 5월 15일, 한양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담장과 집, 성벽이 무너질 정도였다. 당시 천재지변(天災地變)은 사람의 잘못에 하늘이 노한 탓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왕은 신하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때의 논의에서, "지진은 음양이 쇠했기 때문이며, 음은 소인이고 양은 군자이니 조정에 소인이 가득해서 생긴 결과"라는 설이 대두되었다. 이때 반정공신 중 하나였던 조계상이, "소인들의 행적은 겉보기엔 알 수 없고, 따라서 왕을 바른 도로 인도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수작"이라는 말을 했다.

이에 신진 사림파들은 격분하였고, 조계상과 그를 옹호한 장순손을 "군자를 해치려는 간사한 소인"이라고 지목해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참잔관 권벌, 대사헌 고형산 등이 합세하여 탄핵한다. 결국 중종은 조계상을 파직하나, 장순손은 가볍다고 보고 파직에 동의하지 않는다. 영의정 정광필은 "단지 말 한마디 잘못한 것 가지고 재상을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는데, 대간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했다.

5월 20일, 경연에서, 당시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는, "대간과 홍문관의 견해는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닌 모두의 공론"이라고 말하며 중종을 설득한다. 마침내 중종은 그 둘의 고신(告身)[17]을 빼앗고 파직을 명했다.

위의 논쟁은 사소한 듯 보이나, 신진 사림과 반정공신들이 직접적으로 부딪힌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가 있다. 조계상은 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2등에 임명된 데다, 조광조가 등용되기 전엔 대사헌, 예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낸 거물이었다.

반정공신들은 그동안 폐비 신씨(단경왕후)에 대한 논쟁, 문묘 배향, 그리고 소격서 폐지 등, 이들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는 사림들의 행보를 방관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 역시 유학자 출신으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음에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또한 사림들의 행보가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자와 소인 논쟁은 위의 사건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반정공신 중 거물급에 속하는 인물들이 신진 사림의 탄핵을 직접 받아 실각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3.4. 현량과(賢良科: 천거 제도)

중종 13년(1518) 3월 11일, 왕과 대신들이 경연에서 왕에게 강론하는 시종을 뽑는 논의를 할 때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가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시종은 신중히 뽑아야 합니다. 시종은 경연에서 임금과 강론을 하므로 학문이 풍부하고 행실이 바른 사람이어야하고, 문장의 수준만 고려할 수는 없고, 또 너무 미천한 출신을 등용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모두 고위직에 있고 말단직에는 이에 해당될 만한 인재가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지금이 사람을 천거하여 써야 될 때라고 봅니다."

즉 위의 말은, 상당한 시중과 같이 고위직에 오를 사람을 천거로 통해 바로 뽑자는 뜻이었다. 그러자 대사헌 최숙생도 거들었다.
"그동안 여러번 어진이를 천거를 통해 발탁했지만 과거시험 급제자들과 차별되어 임용되었기 때문에 유능한 사람을 이번에 천거한들 응하지 않을까봐 걱정입니다."

뒤이어 조광조는 천거제의 방식과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말한다.
지방에선 감사, 수령이, 한양에서는 홍문관, 육경, 대간이 천거한 뒤, 그 인재들을 한 데 모아 왕이 직접 면담하여 시험한다면,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한나라에 시행했던 현량방정과와 같은 것입니다. 과거시험의 문제점은, 글재주만 있는 자만 선발되기에 그 사람의 행실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천거제는 행실 등도 모두 감안한 뒤 뽑는 것이므로 이상적입니다.

다음날 대간에서는 "천거제는 한나라의 현량과와 효렴과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으며, 이는 조광조의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성균관 등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은 반대하는데, 그 이유로 "과거 시험에서도 재주와 행실이 빠질 수 있듯, 천거제에서도 그러한 인물들이 빠질 수 있고, 또한 이 천거제로 인한 폐단을 알 수 없으므로 과거의 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들었다.

남곤 역시 현량과에 반대한다. 그는 천거제도의 폐단을 언급했다.
중국에서 과거제도가 마련된 것은, 현량과, 효렴과 등의 폐단을 거친 뒤의 일입니다. 당시의 천거된 사람들은 천거한 사람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정작 재주가 있던 사람들은 누락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천거를 잘못하였다고 천거한 사람을 처벌할 수도 없으므로[18], 이러한 폐단이 일어나는 것을 법적으로 규제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천거로 선발하는 것은 어쩌다 한번 할 수는 있어도, 항상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김정은 이를 받아, "사소한 문제점을 걱정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느 세월에 교화를 하겠냐"고 말한다. 조광조는 이를 받아 발언하길, "천거제를 시행하되, 과거시험 역시 유지할 것이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천거에서 빠졌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를 "재주 있는 사람은 과거시험을 치르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9]

조광조의 '천거제와 과거제를 병행하자.'는 제안은 안당 같은 대신들 또한 동의하였다. 그리고 중종 역시 "천거제를 속히 시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곧이어 세부적인 절차가 마련되는데, 한양의 경우 중추부, 육조, 한성부, 홍문관에서 인재를 찾아내면 성균관에 보고하고, 그러면 성균관에서는 이를 예조에 보고한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향약(鄕約)에서 추천된 인재들은 수령에게 보고되며, 수령은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이들을 심사한 뒤 예조에 보고한다. 예조는 이들을 한 데 모아 시험을 보고, 천거자의 잘못을 막기 위해, 천거자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과 나란히 적어 놓게 한다.

이렇게 중종 13년(1518) 6월에 천거제를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실행은 지지부진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중종 14년(1519) 2월 누가 대궐에 익명의 편지를 매단 화살을 쏘았는데, 그 편지는 승정원(비서실)에서 곧바로 불태웠기에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중종이 "소인이 군자를 해치기 위해 한 짓"이라고 말하고, 또한 신용개는, 이를 쓴 사람이 "조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누군가가 한 짓"이라고 말했다.

현량과로 천거된 사람들은 벼슬 초년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종 6품, 7품의 (상대적으로) 고위직을 척척 받았고,[20] 이에 정광필이 "세종대왕께서도 '신하를 예우하는 방법은 자급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처음부터 이런 높은 자리를 함부로 내리는 것은 폐단이 클 것입니다"라고 다시 만류했으나 씹혔다.

그리고 곧이어 강윤희 고변 사건이 터진다. 강윤희는 정국공신인 김우증을 고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김우증이, "현량과 출신이 조정에 들어오면 정국공신을 다 죽일 것이다. 그 전에 이들을 쳐 없애자."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우증은 "화살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를 우려했으므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 사건을 조사한 결과, 김우증은 유배를 당하게 되고,[21] 현량과는 탄력을 받아, 그 결과 마침내 중종 14년(1519) 4월 28명을 최종 선발했다.

현량과의 인재들은 과거시험을 치른 급제자들과는 달리, 상당한 지위에 등용될 만한 사람들을 뽑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평균 연령이 35세가 넘었고, 또한 그 중 12명이 관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반대한 사람들이 우려한 대로, 이들은 명문 귀족 출신의 자제들로 정부와 상당한 연줄이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대부분 한양에 거주하였다. 이는 '숨어 있는 인재들을 널리 구한다.'며 내세운 애초의 취지와는 달랐다. 향거리선제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명목상으로는 그래도 '지방의 인재를 찾기 위함'이었기에 처음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천거할 권한도 태수 등 지방 관리에게 있어서, 현량과보다야 더 지방민들이 천거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향거리선제도 현량과처럼 썩을 소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도 자체의 구조는 현량과보단 나았다. 그에 비해서 현량과는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거제를 시행한 것은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士林)들이었으므로, 당연히 이들이 뽑은 자들은 전부 사림(士林)들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유입은 가뜩이나 신진 사림의 대두로 골치를 썩이던 반정공신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게 된다. 게다가 도덕성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그들의 말과는 다르게, 공정성과도 거리가 멀었던지, 안당의 세 아들인 안처겸, 안처근, 안처성 3형제가 전국에서 28명을 뽑는 현량과에 함께 급제했다.[22] 여기에 김식, 박훈, 정완, 송효직은 분명한 조광조 일파였다. 때문에 반정공신들이 "조광조가 그의 야욕 때문에 현량과를 이용하여, 자기 파벌의 사람들의 수를 늘린다"고 판단하는 게 당연했고, 이로써 그들이 조광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적개심이 구체화된다.

이 폐단은 심각해도 그냥 심각한 게 아니었다. 구품관인법마저 극초반기에는 목동 출신의 등애가 등용되기도 했는데, 현량과는 처음부터 막장이었다. 가정하자면 만일 조광조 세력이 쫓겨나지 않고 오래오래 집권해 현량과도 유지되었다면, 현량과는 조선판 구품관인법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광조가 반대파를 의식해 과거제도를 남겨뒀던 거고, 조광조 자신도 과거제 폐지까지는 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품관인법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조광조가 조정에 계속 있었더라면 장애물거리에 불과한 과거제는 결국 폐지했을 것이다.

사실 '과거제도만으로는 인재를 뽑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 내내 고민되어 온 부분이기 때문에, 옛 제도를 부활시켜 지금 제도와 병행해 보자는 발상 자체는 옳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옛 제도를 부활시켜 봤더만 시행하기 무섭게 옛 제도의 문제점과 폐단이 다시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천 년 전 시작된 제도를 조선에 적용하려면, 그에 걸맞은 개선책을 반드시 마런해야 했다. 불구하고 개선은커녕 개악을 한 수준이라 제도 자체의 장점은 하나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한나라 시절 현량과만 해도 천거받은 사람이 사고 치면 천거한 당사자도 처벌하는 견제책이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에 천거받고 등용된 사람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그를 천거한 사람과 삼족까지 멸하는 제도를 그대로 시행하기는 무리수였지만, 천거제의 특성상 견제 혹은 감시 체계는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런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조광조 이전에도 물론 현량과 비슷한 제도가 없지는 않았다. 태종 때 태종이 하륜에게 현량을 추천하라고 했더니만 함량미달의 측근들만 추천했다는 것이나, 왕이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등용하기도 했던 것, 특히 학문적 명성을 쌓은 이들을 두고 대신이나 대간들이 벼슬을 내리자고 하는 기록은 많다. 하지만 그것들도 상설적인 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태종과 하륜의 사례에서 보듯 상설적이 아니라도 문제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 앞서 나온 김정의 반론은 뭘 모르고 한 소리와 다름없는 셈이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남곤이 한 수 위다. 남곤이 우회적으로[23] "한나라그거 했다가 말아먹었는데요?" 라고 경고하자 김정이 "그런 사소한 거 신경 쓰지 맙시다." 라고 받아쳤는데, 나라 말아먹는 게 사소한 일인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관리들이 공자맹자왈만 해서 과거시험을 치는 걸로 알겠지만 뭘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툭하면 '옛날에 ~제도가 있었는데', '옛날에 ~한 사례가 있었는데' 등으로 옛날 일에 대한 언급을 할 때가 많다. 심지어 왕에게 간언할 때도 "옛날에 ~한 일이 있었으니 하지 마셔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하기까지 했다. 즉 역사 심지어 한국사뿐 아니라 중국사까지 관리들에겐 필수 학문이었다. 즉 관리들도 대충 한나라가 향거리선제로 말아먹었음은 알았을 것이다. 이걸 감안해보면, 김정의 발언은 그냥 망언급 발언 아니면 김정이 역사도 모르는 무식쟁이라는 말이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현량과는 대실패였다. 1000년도 더 전 한나라가 했다가 폐지된 것을 다시 쓴 셈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림들의 자신들에 대한 인식과 타 세력에 대한 인식도 엿볼 수 있다. 정승의 아들이 3명이나 뽑히며, 결정적으로 자파 세력만 있다는 건, 그것도 기준이 덕이나 인품 등이라면 "우리 빼곤 그리고 지방민들은 덕도 인품도 없는 새퀴들" 딱 이거다. 반대로 보면 자기네들은 엄청난 덕과 인품을 지닌 고고한 존재쯤으로 봤다는 소리. 하지만 공자자로의 사례를 보면 알듯, 공자는 행실 엉망이던 자로를 제자로 받아들여 반듯한 인간으로 만든 반면, 이들은 "저놈들은 소인배이니까 대할 가치도 없음ㅋ 우리만 잘난 놈들" 수준의 태도를 지녔으니, 과연 기존 세력들보다 인품이 좋았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전형적인 소인배와도 비슷한데, 진정으로 공자의 이상과 가치를 따르고 진정으로 덕과 인품을 갖추었다면 배척하기보다는 차라리 포용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 기준마저도 객관적으로 따지는 것도 아닌 자기네들의 자의적인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특히 유교에서 내세우는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데, 유교에서는 "누구라도 공부하고 수양하면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고 했고, 심지어 조광조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더욱이 기묘사화가 일어나지 않고 어찌저찌 넘어가서 중용되었다 한들 역시나 현량과는 폐해만 더더욱 키웠을 게 뻔하다. 그 향거리선제마저 추천받은 자가 사고치면 추천한 자까지 처벌하는 등의 조치로 신중을 기하게 했는데[24] 현량과는 그것도 없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조광조같이 이상만 있고 나머지는 맹탕인 이들만 남게 될 것이고,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버릴 가능성이 100%다.

현량과가 정말 그렇게 좋은 제도였다면 선조 이후 집권한 사림파들이 현량과를 실시하자고 했을 텐데, 그 누구 하나 그러지 않았다. 같은 사림계열임에도 현량과의 문제점을 인정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25] 오히려 세도정치기의 안동 김씨의 유망주(?)에 올랐던 김좌근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이렇다할 벼슬을 하진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인 김조순의 환갑 선물삼아 순조가 김좌근에게 종 6품직에 제수한 적이 있다지만 그 이후 과거 급제 전까지 이렇다한 벼슬한 적이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에 집안 배경으로 벼슬하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만큼 조선이 과거제도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제가 막장이 된 시대에도 말이다.

더군다나 현량과 실시 관련에서 보면 알겠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반대파인 정광필, 남곤 등등의 논리가 더 탄탄하다. 정광필은 "과거제에 문제가 많듯 천거제에도 문제가 많을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했으며, 남곤은 아예 실패 사례를 언급했다. 반면 조광조 일파의 논리는 어떠한가? 일단 처음 내세운 이유는 "과거제도로는 인재를 다 찾을 수 없으니 시행하자!" 라는것이다. 뭐 이 취지만큼은 좋았다. 앞서 말했듯 과거제로는 인재를 다 선발하는 게 불가능하고, 현재 과거제와 가장 유사한 공채 같은 것에서도 보면 거기서 올라온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지 않다는데서 보듯[26], 분명 문제제기 자체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 조광조가 말한대로 현량과는 향거리선제에서 따온 제도인데, 그렇다면 향거리선제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개선하는 방식으로 밀어야 했다.[27] 그러나 조광조는 이를 그대로 복붙만 했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조차도 아니다. 심지어는 향거리선제에 있었던 견제 장치는 죄다 떼어먹은 채로 올려, 오히려 향거리선제만도 못한 제도를 건의한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어차피 조선 정차상 반대가 나오는 만큼 합리적인 반론이 나오면 철회 혹은 고치면 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음부터다. 정광필, 남곤은 반대했고, 이제는 이에 반론을 제기해야 했다. 하지만 정광필, 남곤의 논리에 제대로 된 반박을 내놓기는커녕 김정은 "그까짓 거에 신경쓰면 교화는 언제 하나?"라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는 헛소리나 하고 있었고,교화 다 하기 전에 나라부터 말아먹게 생겼다. 조광조는 그나마 이에 개선책을 내놓았다만, 여전히 반대파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조광조와 김정은 정광필남곤의 반대 논리에 대해 제대로 된 반박을 못했고, 반대파들을 끌어안지도 못했다. 어떠한 제도나 정책을 내세울 거면, 그를 뒷받침할 논리를 내세우고 장점을 강조하고 단점에 반박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반대파들을 설득하거나 반박해서 정책을 내세우는데 더 용이한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 어떤 나라라도 장점은 하나도 없는데 단점투성이인 제도를 채택할 리 없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겉보기에는 장점으로 가득해 보여야지 그래도 채택할 것이다. 문제는 조광조의 현량과 제시는 남곤에게 완벽히 논파되었고, 이를 반박한 김정은 논리성이 없는 주장으로 논파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조광조는 그나마 김정과는 달리 이를 개선했고, 실제로 처음 올린 것과는 달리 천거자를 분명하게 밝히고 과거제를 참고하여 그래도 처음보다는 좀 더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반대파들에게는 여전히 '그게 그거'라는 인식이었고, 더 문제가 되는 건 취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버렸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조때에 사림이 완전히 집권한 후에도 현량과는 다시 실시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현량과 논란은 조광조와 김정에게 현실정치가로서 큰 한계가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일지도 모른다. 김정은 논리성을 찾아볼 수 없는 반박을 했다. 조광조는 그래도 꼴에 리더라면서도 반대파를 설득시키기엔 한없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으며, 결정적으로 반대파들의[28] 우려대로 자파 세력만 기용하였다.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것도 그다지 좋은 거라 말할 순 없지만) 반대파에 있던 이들 몇 명도 슬쩍 끼워주어 반대파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든지, 아니면 "반대파도 우리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보인다든지 할 텐데, 그런 건 없고 무조건적인 배척만 보였다.

혹여나 현대 정치에 와서 누군가 이런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허울뿐인 눈 가리고 아웅, 보여주기식이라 할지라도 지방별로 28명의 쿼터를 분산하고, 블라인드 면접을 실시하는 등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들을 어떻게든 만들었을 것이다. 조광조 측은 현실은 조금도 생각도 않은 셈. 당시 조광조 일파는 절대적으로 왕의 총애에만 기대어야 할 수준으로, 말하자면 내시와 별 다를 바 없는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다.[29] 반면 반대파들은 상당수가 공신이라는 지위, 그에 기반하는 재산과 벼슬, 그것도 아니라면 정광필처럼 명망이나 남곤 같은 실력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모든 면에서 불리한 채 왕의 총애만 기대야 하는 처지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이다. 비약해서 보면 결국 현량과 실시는 조광조의 몰락과 연계되어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물론 조광조의 몰락 때는 3사 관원, 대신들 심지어 유생까지 반대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반대파가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대간들의 요구로 현량과는 폐지되고, 그 합격자들도 모두 합격 취소가 되었으며, 조광조 사사 얘기가 나왔고[30], 이후 조광조 일파의 핵심 인물들도 줄줄이 죽어나간다. 즉 반대파들이 조광조를 감싸준 게 아니라, 미처 교체되지 않은 기존에 조정에 있던 이들이 조광조를 감싸준 것이다. 외려 조광조에게 크게 반대했던 정광필, 남곤이 조광조를 끝까지 지키려고 한 셈. 이것만 봐도 남곤을 소인으로 본 조광조 세력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보여준다.

사실 상술된 견해들은 현량과 실시를 포함해 너무 조광조의 발언 등을 문면 그대로만 보고 있는 셈이다. 현재 대학교 입시에서도 수시가 시작되었을 때 온갖 외국의 제도를 대입해 보고 한국 정시의 폐해 등을 조명하면서 수시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물론 수시나 정시나 나름대로 장단점들이 다 있는 제도지만 확실한 건 수시 도입 이후로 상류층, 부유층들의 온갖 입시비리나 꼼수가 판을 친다는 것이다. 지방민이나 서민들은 알기 어려운 별의별 대입 전형, 인맥이나 금력 등을 이용해 중고등학생이 할 수 없는 논문의 공저자로 올리거나 학술활동 대외활동을 시키는 등의 꼼수를 통해 자신의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형이 삭제나 개선되지 않고 있다. 수시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불이 붙듯 정시의 폐해를 욕하던 언론과 문화매체들이었지만 수시의 폐해, 꼼수, 비리 등이 매해 떠오르고 특히 타분야에서 경력을 쌓다 정치에 입문하는 신인 거물 정치가들은 자식교육문제에서 이 수시전형에 걸면 걸리다시피 하는 노다지인 것을 봤을 때 분명 심각한 수준이지만 여러 통계자료를 통해 수시가 주는 온갖 이득을 계속 말해지고 있지 수시 폐지 문제 같은 것은 잠깐 떠오르다 사라진다. 시험제도의 단점을 이를 악물고 주장하던 것, 천거제의 단점이나 실질적 목적인 자기 패거리의 사익추구에는 눈을 감고 모른 체를 하던 것, 그러면서 입으로는 허울뿐인 고귀한 명분을 줄줄 내뱉으며 고상한 척을 하는 것은 비슷하다.[31]

까고 말해서 이득을 계속 독식하고 계층을 공고화시키려는 상류층의 행동인데 이것은 구품관인법이 그랬듯이 과거와 현재를 가리지 않는 만국공통의 현상이다. 조광조와 현량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인데 이들이 입으로 내세우는 명분이나 평소 뱉고 다니던 말과 상관없이 그냥 특정계층의 권력이나 이득 독점시도라고 봐야 한다. 단지 사림파들이 당시 조선의 상류층 전체가 나눠먹던 것을 자기들끼리만 해처먹으려던 것이 큰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과거제 자체가 한계가 있다지만 마찬가지로 시대의 한계가 있던 조선에는 상당히 유용한 제도였고 이런 인재 추천제도는 어느 일파가 권력을 잡건 너무 갈등유발의 소지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다.[32]

3.5. 소격서(昭格署) 폐지 논란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 도교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 태백금성에 제를 올리기도 했으나, 즉위 원년(1392년)에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 곳을 제외한 초제(醮祭) 장소를 모두 폐쇄시켰다. 유일하게 남은 곳이 소격전(昭格殿)으로 뒷날의 소격서(昭格署)이다.

태조는 이곳에서 가뭄이 들면 기우제, 하늘에 이변이 있으면 초제를 지내곤 했다. 태조 3년(1394) 5월 이곳에서 초제를 지냈으며, 같은 해 8월에 대신들이 천도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결론내리지 못하자 소격전에 거동해 가부를 점치기도 했다. 태종 2년(1402) 대제학 이첨을 보내 초제를 지내고, 세종 9년(1427)에는 평원대군의 탄생을 맞아 이곳에서 개복신초례를 지내는 등, 유교국가 조선 성립 이후에도 소격전은 국가제전의 일부로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도교와 관련되었으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세종 7년(1425) 7월, 세종대왕은 "도교와 불교의 가르침은 허황된 것이며 특히 도사들의 말은 더욱 허황되다."라고 비판하면서도, "소격전에서 제사 지냄은 오랜 관습이므로 지금에 와서 폐지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세조 12년(1466) 관제 개혁으로 소격전은 소격서로 명칭이 바뀌고 령(令)을 두어 정5품으로 하였다. 이 같은 변화는 소격서가 종교성이 약해지고 완연한 국가 기관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준다. 종교성은 사라졌지만 기존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어 세조 12년(1466) 10월 사직(社稷), 종묘(宗廟)에 기제(祈祭)를 지냈다. 예종, 성종도 이를 이어갔다.

유교 원리에 충실했던 성종도 재위 8년(1477) 2월 왕자가 병에 걸리자 사직, 종묘와 함께 소격서에 제사를 올렸다. 성종 12년(1481) 6월의 기사를 보면, 가뭄을 맞아 흥천사에 기우제를 지낸 것을 두고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이 "부처님에게 빌어 비를 내리게 했다는 말은 사서를 아무리 뒤져도 상고할 수 없는데, 왜 그토록 부질없는 일에 기대십니까?"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성종은 그렇게 "따지면 소격서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허황된 거 아니냐? 제를 지내는 것은 백성을 가엾게 여겨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다."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재위 15년(1484) 1월, 성종은 자신이 먼저 승정원소격서 혁파에 대해 하문했다. 이때는 오히려 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 좌부승지 이덕숭(李德崇)이 "국가의 오랜 관례를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성종은 "소격서의 유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그곳에서 치러지는 제사도 정결하고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이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닷새 뒤 승정원에서 소격서 유지 관리 및 제사에 대한 규정을 담은 소격서검찰사목(昭格署檢察事目)을 만들어 올렸다. 성종 23년(1492) 1월, 경연 자리에서 시독관(侍讀官) 이달선(李達善)이 "소격서는 도교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정도를 벗어났습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성종은 "정도를 벗어난 점은 인정하되, 옛부터 있던 것이므로 없앨 수 없다." 하고 답했다.

소격서는 중종 이전까지 그다지 중요한 관청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지내는 제사나 기도도 별로 주목받지 않아서 운영에 미비한 점이 있었다. 폐지 주장도 간간히 제기될 뿐이었고, 그나마도 중요한 쟁점이 되진 않았다.

소격서를 두고 "중국 천자처럼 산천에 제사를 지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중종의 반응만 대충 보고 내린 결론으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역대 국왕들이 소격서에 보인 방침은 "오랜 관례라 없앨 수 없다"는 것으로 한결같았다. 운영과 제사가 부실해서 국왕이 먼저 폐지 안건을 꺼내는 기관이, 왕권과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정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고려팔관회와 비교하면 국왕의 관심도 차이가 확연하다. 소격서는 그 자체로 단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중종 이전에는 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딱히 손댈 필요 없이 오랫동안 해오던 대로 했던 것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있었지만 한번도 중요시되지 않았던 소격서는 중종 13년(1518) 음력 8월 초하루,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가 소격서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변모한다. 발단은 종묘 대제에 쓸 제물인 가 종묘의 문턱을 넘다가 쓰러져 죽은 것이었다. 삼공과 예관 등 중요 대신들이 모두 참관한 자리였으므로 더욱 파문이 컸다.

중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자리에서 조광조는 "조선의 제례가 옛 방식과 맞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좌의정 신용개는 "제례 방식을 바로잡기 위해 우선 소격서와 같은 도교식 제례 의식을 하는 관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영의정 정광필은 "이는 옛날부터 해온 것이므로 굳이 폐지할 필요는 없다."면서 반대하였다.

그 뒤 잠잠해졌다가, 홍문관 관료 1명이 소격서 폐지를 청하는 상소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불붙는다. 그 뒤 8월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승진한 조광조가 소격서의 폐지를 심각하게 재론하여 소격서 논쟁이 매우 격화된다. 조광조는 상소에서 "세상을 규범하는 것은 오직 성리학뿐이며, 다른 이단을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고,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망설이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왕께서는 단단하고 굳은 것은 버리고, 유약하고 부질없는 것을 생각하며,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며 부질없는 것에 연연해하며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에 중종은, "소격서는 오래돼서 혁파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정이 "전대의 잘못된 일을 후대에 반복하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간은 전원이 사직하겠습니다."라고 강경하게 대응한다. 중종이 "설령 그리 되더라도 소격서는 폐지할 수 없다." 하고 거부하자, 당시 도승지였던 문근은 "전하의 완고한 태도가 놀랍습니다."라며 비판했다.

이후 거의 1달 뒤에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신용개, 우의정 안당 등도 나서서, "소격서를 혁파함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중종은 거부하고, 대간은 출근을 거부했다. 이때 과거를 시행할 시기가 다가오자 중종은 이런 명을 내렸다.
"대간은 반드시 복직하지 않을 것이다. 소격서 문제는 오래 토론해도 무관하지만, 과거는 왕정의 대사라 결코 미룰 수는 없다. 그러니 대간을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 중으로 빨리 다른 대간을 뽑도록 하라."
'대간을 모두 교체하고 새로 뽑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조광조는 이를 받아,
"… 이는 암군(暗君)이 하는 일입니다. … 오늘날 일어나는 일은 너무도 그릇되어 저희들이 눈을 씻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음과 말이 격분하여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며 강하게 대답했다. 9월에 접어들자 마침내 조광조도 사직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중종이 뜻을 굽히지 않자 조광조는
"연산군 이후 새로운 풍조가 생겼는데,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었고 이로 원기(元氣)를 배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니 저의 마음이 아프고 애통함을 진실로 다 아뢸 수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중종이 "대간을 혁파하는 한이 있어도 과거를 미룰 수는 없으며, 과거를 미룰 수는 있어도 소격서를 혁파할 순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자, 조광조는 거꾸로 "과거를 미루거나 일시 폐할 수는 있어도, 소격서는 당장 폐지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때 조광조는 소격서를 연산군의 폐정에 비유하여 비판했다.

조광조는 이 문제가 중종반정 이후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한 새로운 기풍의 진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소격서는 결코 대단한 기관이 아니었지만 도교와 관련되었으므로 폐지하자고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이런 작은 것조차 바로 잡지 못한다면 성리학 이념에 의한 새로운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조광조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막기 위해 성리학 원칙을 가장 위에 두고자 했다.

반면 중종은 반정공신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다지기 위한 친위세력으로 기묘사림을 끌어들였을 뿐, 그네들이 꿈꾸는 사회개혁에 동의할 의지가 없었다. 그저 선왕들의 정책을 이어 신하들의 견해를 물리치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함으로써, 적당히 왕의 권위를 세우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것도 해결하지 못하면 개혁은 없다고 본 조광조가 강력히 반발하자, 덩달아 중종의 고집도 극심해진 것이다.

조광조가 이처럼 비판하자 중종은 더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광조가 발언한 그 다음날, 중종은 "과거시험일자가 임박해서 대간을 교체했을 뿐 다른 뜻은 없으며, 소격서 폐지에 관한 문제는 대신들과 의논해서 결정하겠다"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소격서를 폐지하겠다고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조광조는 중종이 사실상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격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고 간주하고 "이런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감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라며 경하를 올렸다.

이후 소격서 폐지는 절차상의 문제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13년(1518) 9월 3일, 중종은 소격서 폐지를 기정사실로 인정하였으며, "사직하고 물러난 대간들은 속히 복직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하라." 명령하였다. 조광조의 상소로 격화된 소격서 폐지에 대한 논쟁은 이로써 2달 만에 종결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중종은 곧 소격서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중종 15년(1520) 1월 17일, 중종은 남곤, 이유청 등과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기우제, 기청제나 지내는 소격서를 혁파함은 잘못된 일인 듯하다"며 소격서를 부활시킬 의사를 내비쳤다. 남곤 등은 "혁파한 지 얼마 안 된 것을 바로 부활시키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그러자 중종은 "소격서를 부활시키지 않더라도, 기우제나 기청제를 소격서가 있던 자리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낸다.

이처럼 소격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중종의 뜻이 확실하게 드러나자, 영의정 정광필은 "당초 (소격서) 혁파에 관한 논의가 있었을 때 재상들은 역대 선왕들께서 설치한 것을 경솔하게 없앨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혁파한 것을 이제 와서 다시 세울 수는 없습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소격서 부활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입장은 정광필이나 남곤의 생각과 다름이 없었다. 중종은 더 이상 소격서를 부활시키자는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소격서 문제는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거의 3년이 지난 중종 17년(1522) 12월, 중종은 어머니 자순대비(정현왕후) 윤씨의 병환을 핑계로 다시 소격서 문제를 거론하였다. 중종은 "어머니의 병환이 6달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면서 말을 꺼냈다. 중국 황제의 전례에 따라 자신도 필요할 때는 종묘사직은 물론 산천에 기도할 수도 있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소격서 부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은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해서 종사와 산천에 제를 지내려 한다"는 중종의 말에 쉽사리 반대할 수가 없었다.

중종은 주장이 먹혀들었음을 감지하고, 이번에는 "어머니의 희망"이라는 이유로 소격서 부활을 주장했다. 소격서를 부활시키자는 사람은 어머니 자순대비이며, 그 어머니가 지금 매우 위독한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대신들에게 부탁하면서, 소격서를 부활시킬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결국 정광필을 위시한 대신들은 "소격서의 부활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대비 마마의 병환을 걱정하는 전하의 마음을 거스를 수 없기에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라는 뜻을 밝혔다. 그리하여 소격서는 복구되었다. 다시 대간들이 반대했으나 중종의 뜻은 완강했다. 결국 소격서는 쭉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선조가 파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와해되고, 이후 복구가 되지 않아 사라졌다.

소격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기구였다. 가뭄이나 한파의 피해가 클 때 나라에서 종묘사직과 산천, 일월성신(日月星辰)에게 제사를 지내는 관례는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 그래서 도교에 관계된 기관임에도 본격적으로 이단(異端) 논쟁에 휩싸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중종 13년(1518) 8월 조광조가 "소격서를 폐지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을 때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조광조는 "왕도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라고 주장했고, "만약 이단을 택한다면 전하께서 연산군과 같은 군주가 되려 함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결의를 표명했다. 중종은 소격서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조광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왕권에 손상이 온다'고 판단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중종의 뜻이 완강한 만큼 조광조의 주장도 강하였다. 거의 2달 이상 지속된 논쟁 끝에 소격서는 폐지되었으며, 그때까지 반대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중종의 권위는 상당히 크게 손상되었다. 그만큼 조광조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조광조는 관직에 진출한 이후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였다. 특히 조광조는 연산군이 크게 훼손한 성리학적인 이념을 다시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연산군대 이래의 중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연산군대의 중신들이었기 때문에 연산군대의 학정을 비판하고 성리학적 이념을 바로 세운다는 주장은 매우 효과적인 정치적 공세였다.

정국공신들의 위세에 눌려있던 중종도 이러한 전모를 잘 알고 조광조를 비호했으나, 왕권 위에 성리학을 둘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소격서 폐지를 반대하는 중종의 입장에 적극 동조하는 대신들은 없었다. "국초의 관례를 함부로 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제시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을 폐지해야 한다는 조광조의 주장이 지니는 명분에는 이들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종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권위의 온존을 위해 소격서를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조광조의 적극적인 주장 때문에 소격서는 폐지되었다.

명심해야 할 점은 소격서 논쟁을 제기하기 전까지 조광조가 강경하게 개혁을 밀어붙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소격서 논쟁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보여준 태도는, 이전에 보였던 행동과 너무도 달랐다. 결국 조광조가 중종의 뜻을 꺾었으니 자연히 조광조의 정치적 위상도 크게 확대될 터이나, 이는 조광조가 이후 개혁활동의 전면에 설 수밖에 없도록 한 요인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이후 현량과와 위훈삭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으나, 중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점을 알아도 절충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백성의 절반이 노비가 되어가는 현실을 타파하려면 토지개혁, 신분제 완화 등 강도높은 개혁이 필요한데, 고작 소격서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고 물러선다면 이후의 개혁들도 막힐 수밖에 없었다.[33]

즉, 이런 것이다. 소격서는 전혀 중요한 기관이 아니었기에 부담 없이 개혁의 시발점으로 폐지논의를 시작했다. 그러자 중종은 여태까지 선왕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옛 제도를 가벼이 없앨 수 없다"고 답했다. 실권을 가진 공신세력에게 명분 하나로 맞서던 조광조는 '이 작은 개혁도 해내지 못하면, 유일한 무기인 명분도 꺾이고 미래가 없다'고 보고 점차 강경하게 밀어붙인다. 조광조의 명분이 탄탄하고 솔직히 소격서는 별로 중요한 기관도 아니어서, 원로대신들도 별다른 반대를 안 했다.

그저 공신세력을 견제할 친위세력이 필요해 조광조를 끌어들인 중종은, 점점 당혹스럽고 짜증이 났다. 중종은 소격서 폐지 논란의 뒤에 있는 정치적 전말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이 키워준 이들이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음에 분노했고, 결국 별 것 아닌 일이 왕권을 둘러싼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어 결국 기묘사림을 불신하게 되었다.

다만 조광조도 선택을 잘못 한 면이 있다. 소격서는 조광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폐지 주장이 나오던 기관을 달리 말하면 그런 폐지 주장에도 '굳이?' 라는 말이 나오며 묻힐 만큼 소격서의 폐지에 있어 찬반논쟁은 미적지근한 수준으로 있어왔다.

요컨대 소격서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사소해서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나마 이렇게 치열한 논쟁거리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조광조가 나섰기 때문이지 앞서 보았듯 처음에는 또 소격서 폐지 건의가 나왔다가 묻혀가고 있었던 만큼 소격서가 유교적 제례에 어긋나는 기관이기에 지속적으로 폐지논란이 있어왔던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불사를 벌이는 행위처럼 현실적인 문제[34]까지 벌어질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보니 폐지논란이 있으나 그것이 범지배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요소는 아니었다.

물론 조광조가 나서자 다들 동의한데서 보듯 다들 폐지에 찬성할 생각은 있고 누가 나서서 밀어붙이면 따라줄 생각은 있지만 굳이 중요한 일이 아니니 다들 그냥 넘긴 것. 그런데 조광조는 여기에 무리해가며 집착했다. 지배층 전반적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만한 일도 아니고 왕이 적극적으로 공감할만한 사안도 아닌데 무려 왕의 조상까지 들먹여가며 강경하게 주장한 것은 정치적으로 옳다고 볼 순 없다.

다른 사안에서도 보듯 조광조의 성향이 반대파나 중도파를 아우르고 가는 스타일이 아니고 오직 자기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이들끼리만 밀고가는 스타일이니 그런건 신경도 안 썼을 수 있겠지만 애초에 내 말만 맞다고 우기며 타인들을 무시하기만 하는 정치가 올바른 정치일 리가 없다.

즉 조광조가 좀 더 현명했다면 타 정치파벌이나 왕도 확실하게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사소한 그런 사안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런 사안에서 시작한 뒤 점점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야 했다. 추가로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소격서 철폐로 중종의 심기를 너무 제대로 건드린 것도 문제다. 어쨌거나 신진 세력에 불과한 자신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던 것은 중종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므로 개혁정책을 이루기 위해선 중종에게 절대적으로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중종의 심기를 너무 지나치게 거슬려서도 안 된다. 아직가지 중앙정계에서의 입지가 탄탄하지 못한 사정상 왕의 지지는 필수적인데 왕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노력은 커녕 왕의 뚜껑이 날아가버릴 말은 한 것은 정치적 관점에선 빈말로라도 현명하다 할 수 없다. 물론 조광조 관점에서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는 옳다고 믿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사고 자체가 문제다.

3.6. 공안개정, 노비종모법, 한전제

참고 링크

조광조 일파의 개혁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게, 조광조 일파는 공안개정(貢案改正),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한전제(限田制) 같은 진보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비록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 주장이나 국방에 대한 인식 반대파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등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조광조는 공안개정(貢案改正),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저 주장들만으로도 충분히 개혁가 소리를 들을 만했고, 실제로 저 정책들은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는 진보적인 개혁이었다. 위훈 삭제의 경우 비록 조광조의 실제 언행을 보면, "해당 공신들은 실제 공이 없고 인간성이 좋지 않은 자들"이라는 공격만을 하고 "공신들의 과도한 기득권이 민생에 부담을 준다"는 종류의 발언은 보이지 않았지만, 위훈 삭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신전의 특혜와 공적 영역으로의 환수였다.[35]

특히 그가 방납문제의 대안으로 주장한 공안개정(貢案改正)은 이후 이어진 공물변통 논의의 시초로 평가되기에 그가 실무에서 종종 보였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구안만큼은 실로 당대 최고의 혜안을 지닌 일세의 개혁가에 걸맞은 것이었다.[36][37][38] 그 전에도 공안개정(貢案改正) 따로 방납문제 따로 거론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 둘을 한꺼번에 연관된 문제로 화두로 올린것은 조광조가 최초였다고 할 수 있다. 조광조의 논리는 공안개정(貢案改正) 즉 불산공물(不産貢物) 폐지가 자연히 방납유인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공안에 있는 이상 방납인을 찾아갈 수밖에는 없고 공안에 없으면 그러할 이유가 없어지기에 이는 매우 직관적이고 명쾌한 논리였으나 그 이전까지 이 같은 방식의 접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불산공물(不産貢物) 폐지가 단순히 민호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 이상의 해결이 시급한 구체적인 문제라는 것으로서 그 이전까지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가 그 같은 문제를 '방납'으로 정의한 것이다.

조광조 일파가 과격하고 편향적이라 남곤을 포용하지 못한 건 사실이나 기묘사림이 등장하고 그들이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한전제(限田制)[39], 공안개정(貢案改正)과 같은 개혁을 외친 건 세조 때부터 시작된 훈구파들의 의한 조선의 모순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40][41] 조광조 일파의 개혁 목표는 조선 초기의 국가운영 시스템으로 설정되었던 국역체제의 재확립이었다. 국역체제는 연산군 대의 폭정을 경험한 이래 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 대에 이르러서도 개선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일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국역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국가운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양민과 수세전은 점차 흩어지고 버려지기 시작했고, 이는 양민들이 국가권력과 관료들이 주도하는 수탈의 심화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해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조광조 일파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서 조선초기의 국역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과 한전제(限田制)를 들고 나왔다.

균전법과 한전제(限田制)를 동시에 시행한다는 것은 당대에서 매우 급진적인 개혁책이었는데 왜냐하면, 균전법을 실시하더라도 토지 보유자의 가족 인원과 소유 노비의 수가 많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유 토지 결수를 넓힐 수 있지만, 한전제(限田制)까지 시행하면 아무리 점유자의 가족 구성원과 노비의 수를 늘리더라도 일정 이상의 보유 토지 결수를 넘어서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와 같은 조광조 일파의 개혁론은 노비 증식과 농장 확대를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던 훈구파들에게는 치명적인 개혁론이다. 훈구파들은 조광조 일파의 개혁에 강력하게 저항해 조광조 일파의 개혁론을 좌절시키기 까지 하였다. 훈구파는 사실 국역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을 이용하여 재산 축적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국역체제의 복구를 주장하는 어떠한 논의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42]

조광조 일파가 제거되고 조광조 일파의 개혁 활동이 조정에서 전면적으로 부정되자 그 결과 노비의 급증과 훈구파의 농장 확대는 꾸준히 계속되었고, 명종 재위 10년대 이후가 되면 국역체제는 회복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양민이 줄어들고 노비가 증가하는 양소천다 현상, 그리고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적자 상황과 같은 위망에 직면하여 훈구파는 국가를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김성우,「16세기의 사림파, 진보세력이었던가?」(『한국사 시민강좌』33, 2008).)

3.7. 정국공신 개정 시도(위훈 삭제)

조광조가 추진한 현량과에 대한 정국공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는데, 이는 화살을 날린 사건이나 김우증의 모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조광조는 정국공신들에게 먼저 정면공격을 시도함으로써 이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막으려 했으니, 이는 곧 정국공신 개정 시도였다.

중종 14년(1519) 10월 25일, 대사헌 조광조는 중종에게 다음을 건의했다.
"정국공신 중엔 연산군의 총신도 있고,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들이 만일 반정 때 공을 세웠다면 몰라도, 이들은 공도 없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자들로, 이로움이 있다면 왕도 시해하고 나라도 빼앗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임금은 이러한 일의 근원을 막아야 하며, 따라서 정국공신을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며 조광조는 "공신 2등, 3등 중 개정할 자가 많고, 4등 50명은 대부분 공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때 중종이 공신의 개정을 반대하자, 홍문관 부제학 김구가 대간의 뜻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대간들과 승정원에서까지 공신의 개정을 촉구했지만, 중종은 이러한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간은 전원 사직을 요청했다. 또한 조광조와 대사간 이경동은 밤이 깊어 새벽 1시가 되었는데도 거듭 정국공신 문제를 거론했다.

정광필, 안당을 비롯한 대신들은 처음에는 '그 많은 공신들을 어떻게 다 개정하겠냐. 1등, 2등, 3등은 놔두고 4등에서만 문제되는 자들을 개정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중종은 반색하였으나, 대신들은 이내 "다시 생각해보니, 다 개정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하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빡친 중종이 "그럼 처음부터 다 개정하자고 할 것이지 왜 말을 바꾸고 난리냐"고 한소리를 했고, 이에 대간들이 "대신들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을, '말을 바꾸었다'고 구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중종을 꾸짖어 중종의 속을 더 긁었다(…). 박시백 화백은 "그동안 조광조를 견제하던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마저도 조광조의 개정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고, 중종은 더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중종 14년(1519) 11월 8일, 결국 대간 전원이 사직을 요청하자, 중종은 한발 물러서 19명의 명단을 제외하였는데, 그러면서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11월 9일, 영의정 정광필은 삭제할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다.

15일 밤,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4. 기묘사화와 몰락

그날 밤 자정에 승지 윤자임 등은 승정원에서 숙직을 하다가 경복궁 안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이 때 서문인 영추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영추문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경복궁의 중심부인 근정전에서는 군인들이 계단 아래 좌우로 정렬해 있었고 안팎이 모두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으며 건물 안에는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 등이 있었다.

윤자임이 그들에게 "왜 여기에 있냐"고 물어보자 이들은 "주상 전하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승정원(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불렀다면 말이 안 된다"고 항의하며 내전으로 들어가 왕을 만나려 하였다. 그 때 안에서 승전색(承傳色)이었던 신순강이 나와 병조참지 성운에게 "지금부터 승지가 되었으니 가서 왕의 전교를 받으시오"라고 말했다. 군졸들은 계속 항의하는 윤자임을 밀쳐내고 성운을 들여보냈고 성운이 나오면서 의금부에 투옥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가지고 나왔다. 새벽 5시경 중종은 승정원, 홍문관, 대간을 다 교체하고 새로 승지가 된 성운에게,
"조정의 큰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지체해선 안 된다. 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려라. 두세 번 재촉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결정을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했다. 누가 주도적으로 조광조 처형과 같은 문제를 논의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를 처형하는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대신들은 소식을 듣고 속속 입궐하고 있었으며 도착한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안당 등의 의정부 대신들은 "조광조 등을 붕당(朋黨)죄로 처형하겠다"는 것을 듣고 강하게 반발했다.
정광필: 전하께서 그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붕당죄가 적용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중종: 내가 그러한 게 아니라, 조정에서 그리 말하였다.

이런 남의 탓 하기는 중종이 평생에 걸쳐 써먹은 정치 생존술이었다. 조광조를 붕당죄로 몰고 죄안을 작성해야 하는데, 이때 중종은 남곤을 콕 집어 맡긴다. 남곤은 중종의 기대에 부응해 죄안을 작성한다. 이를 본 정광필의 만류에도 중종은 "조정의 뜻" 운운하며 남곤이 쓴 명단에 기어이 몇 명을 더 추가로 쓰라고 종용한다. 또 중종은 "이 무리들 중에 조광조가 바로 우두머리"라면서 조광조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드러낸다. 한편 남곤은 이때 중종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를 죄인으로 모는 죄안을 작성했다고 후대에 더 까인다.
정광필: 제가 도착하였을 때 이미 와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죄를 청하라고 시키셨고, 따라서 이는 모두 전하의 뜻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조정의 뜻이라면, 어째서 의정부의 대신인 제가 왔을 때, 이미 그들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결정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종: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대신들이 잘못한 것이다. 빨리 조광조에 대한 형을 결정해 올리라.

중종은 그러면서 정광필, 안당의 면담을 거절했다. 그러자 정광필은 "조광조 등을 전하께서 뽑아 높은 지위에 임명하고 그들의 말을 다 들어주었으면서 하루아침에 처형하는 것은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라면서 반발한다. 뒤이어 의정부, 6조, 한성부에서 모두 "조광조가 붕당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였고 뒤이어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150명이 궁궐 안으로 난입해 통곡하며 항의하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중종은 한 발 물러서 "조광조의 는 사형이 마땅하나 곤장 100대에 유배형으로 경감한다"라고 명한다. 정광필은 이것도 부당하다고 항의하나 중종은 "사형을 감형하는 것이므로 사정을 둘 수 없다"라고 말핬다.

다음 날 왜 이런 중대한 결정이 밤에 갑자기 이루어졌는지, 왜 신하들 몰래 비밀스럽게 했는지 신하들이 따지기 시작했다. 또한 비밀리에 일을 벌이던 날에 중종은 사실 정광필을 설득하라고 남곤과 이장곤을 보냈지만, 정작 정광필은 남곤을 노려보고 남곤도 중종의 친위쿠데타를 방관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눈을 피하면서 아무 말도 못한다. 이후, 남곤 역시 조광조 사사(賜死) 건에 대해서는 정광필과 함께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다. 당시 기록을 하던 사관(史官)도 "조광조를 총애하던 왕과 지금 조광조를 죽이기 위해 악을 쓰는 왕이 같은 사람인가?"라고 사론(史論)에 남겼을 정도.[43]
사신은 논한다. 대간이 조광조의 무리를 논하되, 마치 물이 더욱 깊어가듯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일을 날마다 드러내어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즉위한 뒤로는 대간이 사람의 죄를 논하여 혹 가혹하게 벌주려 하여도 임금은 반드시 유난하고 평번(平反)하였으며, 임금의 뜻으로 죽인 자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대간도 조광조를 더 죄주자는 청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이런 분부를 하였으니, 시의(時議)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짐작해서 이렇게 분부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3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父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신하들은 "전하의 말씀으로는 '조정이 청했다'고 했는데, 대체 누가 전하에게 처음 청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중종은 밝히기를 거부하였는데, 새로 교체된 대간에서 이를 비판하며
"왕이 신하를 처벌하는 것을 몰래 명을 내려 깊은 밤중에 비밀리에 처리하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왕께서 신하를 신임하신다면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신임하는 척하며 속으론 죽일 생각을 가지셨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러하면, 이는 나라가 위태로워질 조짐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중종은 드디어 내막을 털어놓는데 홍경주[44]가 남곤, 송질, 김전의 집에서 "무사 30명이 조광조 등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홍경주는 중종에게 "무사들의 공기가 심상치 않으므로 이를 무마하려면 조광조를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무사들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조정의 대신을 죽이는 것은 쿠데타를 의미하고, 이를 왕에게 밀고가 아닌 통보식으로 언급한 것은 노골적인 쿠데타 위협이었다. 중종이 내막을 털어놓자 다급해진 홍경주가 나서서 해명했다.
제가 남곤, 김전 등과 의논한 뒤 "조광조의 죄를 바로잡자"고 청했고, 이때 남곤은 "훗날 내가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라는 평을 듣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뒤 홍경주를 시켜 무사 30명의 불온한 행동을 고했다는 박배근에 대해 조사하게 했는데, 이때 무인들은 아직도 "조광조의 처벌이 너무나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유생들의 집단 상소에 이 일이 무마될 것 같자 추가적인 집단행동을 계획 중이었음이 드러난다. 이것은 완벽한 역적모의였고, 이것이 밝혀진 이상 대역죄인으로 처벌이 가능하였으나, 중종과 조정은 이에 맞설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조광조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였고 조광조의 죄를 기정사실화하는데, 사실 기묘사화가 군사력까지 동원한 중종의 친위쿠데타임을 감안하고, 정광필조차도 결국 위훈삭제를 취소할 정도로 중종의 압박에 굴복한 것을 생각하면 이는 중종의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으로 봐야한다.

그리하여 11월 20일 중종은 정국공신 개정 논란을 취소하였고 조정을 장악한 정국공신들은 "현량과도 파방(罷榜)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때 유관은 "현량과를 통해 행실이 보잘 것없는 사람들이 단지 아는 사람이라 하여 등용되었으므로 모든 이들이 이를 분하게 여길뿐 아니라 이런 행위는 왕을 기만하는 짓입니다"라고 말했다.[45] 뒤이어 유관이 안당의 아들 3명이 모두 천거된 후 합격한 것을 근거로 들어 안당을 비난했다.
설과(設科)를 처음에 발의한 사람이 안당(安瑭)인데, 그 세 아들 【처겸(處謙)ㆍ처함(處諴)ㆍ안처근(安處謹)이다.】 은 재행(才行)이 높지 않은데도 다 천과(薦科)에 들었습니다. 몰라서 피혐(避嫌)하지 않았겠습니까? 알면서 피혐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곧 부정이니, 어떻게 정승의 자리에 두겠습니까? 빨리 가소서.

이에 대해 중종은 "안당이 나쁜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며 맞장구를 친다. 이후 조침이 말하기를 "정광필이 영의정으로서 조광조의 일파들이 과격한 것을 한탄하였다고 하는데, 대신이 되어서 바로잡지는 않고 한탄만 하고 있었으니, 이런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디스하였다.
정광필은 범상한 재상(宰相)이 아니나, 당초에 신진의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러한데도 일찍이 조처하지 않고, 신이 하료(下僚)로서 늘 듣건대는 정광필이 한밤에 남몰래 한탄하였다 합니다. 대신으로서 한밤에 남몰래 한탄만 하고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위태로울 때에 무엇을 돕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직(社稷)의 신(臣)이겠습니까?

중종은 이 발언에도 "대신으로서는 조짐이 있을 때 도모해야 한다"며 맞장구를 친다. 뒤이어 조광조가 심문받을 때의 일이 알려졌는데 조광조가 병조판서 이장곤의 자를 부르면서 "못난아, 못난아, 섭섭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심문관 홍숙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어찌 감히 우리를 심문하느냐!"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전해지자 중종은 노여워하면서 심문관으로 참여한 김전과 홍숙을 불러 더 자세히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김전과 홍숙이 말하기를 "조광조는 그 날 에 만취한 상태로 끌려나왔으며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고 이장곤을 '못난아, 못난아'라고 부르며 대청에 뛰어오르려 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중종은 이에 대해서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으니 마땅히 죽어야한다!"라고 이장곤의 이름을 부른 죄로 조광조를 사사하려고 하자 남곤이 "술에 취해서 미친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라고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이니 사사해서는 안 된다고 강렬히 반발했다. 이 말을 시작으로 중종은 계속해서 조광조를 죽이자고 언급하나, 이 때마다 남곤이 조광조는 나라를 위해서 잘해보려다가 소인이 되는 줄도 모르고 실수한 것뿐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느니 등 정면으로 중종에게 맞서며 반대하여 바로 즉결처형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후로 사흘 동안 "조광조의 교만함이 너무하다. 기강이 너무 떨어졌다"라고 계속 불평하였다. 그 때까지 중종은 "현량과를 파방하지 말되 현량과 합격자들에게 현직을 제수하지 말자"고 하는 등 나름 온건론을 펼치고 있었고[46] 신하들은 이에 언짢해 있었다. 그런데 중종이 조광조의 심문시의 불손한 태도를 보여 노하자 이를 본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천거된 인재들을 헐뜯고 "조광조가 자기 입맛대로 사람을 구별하여 급제시켰습니다"라고 성토하였다.
(숨은 인재를 찾는다며 무려 수십 명을 급제시킨 걸 두고) 숨은 인재가 한두 명이면 몰라도 이렇게 많을 수 있습니까?
자기 도당의 사람만 뽑고, 심지어 미리 문제까지 알려주고 시험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밤마다 자기 도당끼리 모여 인물을 품평한 뒤 뽑자, 뽑지 말자 논의하면 그것으로 곧 합격, 불합격이 결정되었습니다.
성수종[47]이란 인물은 문장이 너무 천박하여 알아볼 수 없는 답안지를 제출하였는데도, 조광조가 '성수종의 인물이 쓸 만하니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 뒤 뽑았습니다.

뒤이어 대간에서 이들 의정부의 대신들을 탄핵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남곤이유청을 영의정과 좌의정에 임명하여 정광필과 안당을 실각시킨다. 중종은 정광필이 교체되는 그 날 "조광조를 사사(賜死)하고 현량과도 파방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조광조의 개혁 정책들은 성리학이념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지만, 문제는 조광조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완급 조절을 하지 못한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들을 중종에게 강요한데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광조의 왕도정치(王道政治)에 공감했던 중종도 자신을 마구 굴리고 갈구는 조광조를 점점 꺼렸다. 더욱이 반정 공신들이 폐비 신씨(단경왕후) 복위 문제와[48] 소격서 혁파, 위훈 삭제 등으로 조광조와 사림파들에게 감정이 격해지면서 중종은 조광조와 반정 공신 중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지경에 몰렸다.

중종 자신은 그다지 적극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애당초 중종은 개혁 그 자체보다 정국의 안정을 위해 사림을 중용했을 뿐이었다. 일단 사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이 추구하는 개혁을 지지하고 따르기는 했지만, 점차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광조를 위신한 사림들을 불신하였다. 소격서 폐지 사안만 하더라도 성리학나라 조선에서 유지할 명분 자체가 없었어서 일부 기성 사림들을 위시한 훈구공신들조차도 폐지 여론에 가세해서 중종이 마지못해 폐지한 것이다. 오해와 달리 훈구공신들이 전부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무작정 반대한 것은 아니다. 훈구공신들도 사림과 갈등하기는 하나, 엄연히 유교와 성리학을 가치관의 근본으로 삼는 유학자들임에 유의해야 한다. 이후 중종은 소격서를 재건했다.

기묘사화궁궐에 호출된 인물들의 벼슬을 살펴보면 에 관련된 인물들이 눈에 띈다.[49] 이를 보면 조광조의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은 정국 공신들이었는데 이들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과거 5번의 모반을 본다면 공신호에 대한 문신과 무신들의 알력이 상당하였는데, 이는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정작 위험을 무릅쓴 무신들보다 문신들에게 더 많은 공이 돌아갔기에 불만이 많았던 탓이다. 공신호에서 주로 문관들이 높은 등수, 무관들은 낮은 등수에 올랐는데 여기서 조광조가 공신호 삭제를 하며 낮은 등수는 대거 삭제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안 그래도 세운 공에 비해 낮은 등수를 받아 억울해하면서도 참고 있던 무관들을 다시 한 번 대거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무관들은 공신들과 호응해 그들의 군사력으로 이를 제재(制裁)하려 한 것이었고, 군에 대한 통제 수단이 전혀 없었고 이를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던 조광조와 그의 일파들은 아예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었다.

반면 중종은 이들이 벌인 중종반정의 중심에 있었던 경험이 있었고, 연산군이 축출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으므로, 군의 반란 조짐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결과 그는 무관들을 대표하는 반정 공신의 의견대로 조광조를 처형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진정시키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홍경주가 자신에게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키려고 하니, 이를 무마시키려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여 이를 따라 진정시켰다고 하였는데, 신하들이 "이 말을 한 자들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홍경주가 박배근정귀아를 지목한다. 이들을 심문하니 사실이었다. 이 부분은 역적 모의에 해당되나, 놀랍게도 중종은 이들에게 형 100장을 치고 귀양시키는 정도로 무마시켰으며, 이마저도 시행되지 않고 마침내 방면되기에 이르렀다.
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淸)이 의논드리기를, “순전히 저들을 분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말한 것이니, 무슨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김우증은 놓아 주어야 하겠으나, 박배근(朴培根)ㆍ정귀아(鄭歸雅) 등의 죄도 우증과 같으니, 삼공에게 물으라.” 하매, 삼공이 아뢰기를, “배근ㆍ귀아가 망언(妄言)을 내기는 하였으나 일은 성사하지 않았으니, 놓아 주어도 됩니다.” 하니, 상(중종)이 "죄다 놓아 주라"고 명하였다.

중종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그때까지도 무인을 통제할 수단이 없었고 이들의 실력 행사를 진압할 수 있는 무력도 없었던 것이었다. 중종은 '반정 세력에게 옹립된 왕'이라는 한계가 뚜렷하였고 조광조 일파는 이런 무력한 왕의 권위만 믿고 반정 공신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던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추진한 반정 공신 삭제의 대상은 4등 이하를 차지하고던 무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종 자신도 조광조에 대한 두려움과 그의 개혁 정책에 대해 슬슬 질렸을 가능성이 높다(중종 문서 참조). 중종이 소격서를 폐지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나 문묘 배향을 반대한 것, 위훈 공신 삭제 등을 반대한 것, 군자 소인 논쟁에서 처벌을 반대하는 것을 볼 때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중종이 썩 내켜 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조광조를 발탁하고 그 일파를 상당한 위치까지 등용한 것이 중종 자신이었음은 사실이나 이들이 개혁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은 중종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급진적이었고 중종의 입장에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었다.[50]

중종실록》에는 없지만 《선조실록》에는 다른 설도 언급하는데, 남곤 등이 궁궐 후원의 나뭇잎들에 글씨를 새긴 뒤 개미들로 하여금 나뭇잎을 파먹게 하여 '주초위왕'[51]의 글씨를 만들게 하고 이를 중종에게 이것을 고해 바쳐 중종을 분노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조광조가 문묘에 배향된 이후 중종의 위신에 해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이야기로 추정된다. 실제로 KBS 1TV역사스페셜》에서 실제 실험한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벌레들은 나뭇잎에 묻은 꿀만 먹었고, 설령 잎을 먹는 벌레에게 주더라도 잎을 남김없이 먹는다. 자세한 내용은 기묘사화 문서 참조.

결국 조광조는 이후 능성[52]으로 유배되었지만 결국 유배 1달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최후에 금부도사(禁府都事)[53]에게 "전하의 편지 같은 것 없냐"고 물어보았는데 달랑 쪽지 1장을 받자 "내가 이래봬도 대부였는데"하며 기막혀 했다고 한다. 당시 사약의 효능이 그저 그랬던지라 1그릇을 먹어도 죽지 않았는데 군자다운 고요하고 차분한 태도로 "허허, 내가 죽지 않았으니 1그릇 더 주시구려"라고 했다고도 한다.

다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는 말도 있다. "좀 기다려달라"고 금부도사(禁府都事)에게 거듭 청한 뒤 "이제라도 사약을 취소한다는 교지를 갖고 사자가 뛰어오지는 않을까" 하여 창 밖을 내다보며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러다 금부도사가 독촉하자 다 포기하고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일단 중종실록 재위 14년(1519) 12월 16일 2번째 기사에 실린 조광조의 최후는 이렇다. 금부도사에게 조정의 일을 묻고 나서 자신이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안 조광조는 한탄하며 유언을 남겼다.
(전략) 또 거느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하였다. 자주 창문 틈으로 밖을 보며 글을 쓰고 분부하는 일을 끝내고, 드디어 거듭 내려서 독하게 만든 술을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후략)

사족으로 '조광조를 죽인 원흉'이라며 이후 비난을 받는 남곤은 사실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였다. 같은 김종직 계열이기는 했지만 조광조는 김굉필 문하의 급진 사림이었고 남곤은 김일손 문하의 사장파[54]였다. 조광조의 사사가 확정되자 남곤은 눈물을 흘렸으며 자신의 일을 후회해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쓴 모든 을 불태우게 했다. 이로서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였던 남곤의 글은 후대에 전하지 않고 오직 시 1수만 전한다.

중종 말년에는 "젊은 친구들이 나름 잘해보려고 했던 일인데,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처벌한 것은 아닌가 싶다"훈훈하게 얘기할 거면 그냥 유배를 보내고 끝내지 왜 죽였어?란 분위기가 대세가 되어 그 때까지 살아있던 김안국이 복직되었고[55] 죽은 이들은 다수가 복권되었으나 유독 조광조만은 선조 대에 와서야 복권되게 된다. 아마도 훈구 세력의 견제, 무엇보다도 중종의 혐오가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분석이다. 사실 그 뿐만은 아니다. 영의정까지 지낸 홍언필은 조광조와 내종간이었지만 조광조의 신원을 끝내 반대했는데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언필이 조광조의 신원을 반대한 이유는, 자기 장인이던 송질도 영의정을 지냈지만 송질 역시 조광조에 의해 탄핵당한 것을 보고는 조광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을 수도 있는데,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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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원종이 연산군이 거느렸던 미녀들을 모두 소유한 부도덕에 대한 반발심리도 있었다.[2] 혼자 해먹는 걸로 모자라서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일가 친척들까지 죄다 공신에 봉했다.[3] 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의 8남인 영응대군의 맏사위.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인 휘신공주의 시아버지이다. 구수영은 사돈 연산군을 배신하고 중종반정에 가담했고 며느리 휘신공주도 내쫓았다. 그러나 훗날 중종의 명으로 휘신공주는 남편 구문경과 재결합했다.[4] 연산군 때는 대간들이 "공신들은 대대로 녹이 끊어지지 않는 특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저 발언이 나온 것도 연산군이 즉위하고 얼마 안 가서 공신들의 적장자들을 한 단계씩 승진시키자 한 말이다. 그렇다고 연산군이 특별히 공신을 아껴서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왕들도 즉위 초에 이러는 일이 있었다.[5] 문종의 딸인 경혜공주의 아들[6] 조광보는 조광조와 이름이 비슷해 형제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하필이면 성씨도 조광조와 같은 한양 조씨이고 가운데 이름인 광자도 한자가 똑같다.(조광보趙光輔) 그러나 조광보와 조광조는 선대에서 갈라진 먼 친척 관계일 뿐 조광조의 친형제는 조자가 돌림자로 조광조의 형은 조영조, 동생은 조숭조이다.[7]연산군의 왕비 거창군부인 신씨는, 단경왕후 신씨의 고모가 된다. 고모와 조카가 동서지간이 되었다가 나란히 폐비된 것.[8] 대간 중 하나인 사헌부의 수장.[9] 이를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국가의 발전과 안위가 언론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물론 일반적인 왕조라면 절대 나오지 못할 말. 조선이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결국 언로를 여는 것이 국가의 발전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으니 어느정도는 비슷하다. 그러니 조선 입장에서 보면 국가를 위해서 종묘사직이 중하냐 언로가 중하냐고 논쟁한 것에 가깝다.[10] 대간이 계속 교체되다 보니, 3번째 교체에선 아예 국가 인재 풀에 더 이상 추천할 사람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이조판서 안당이 만류하여 없었던 일로 했다.[11] 물론 성삼문박팽년이 문묘에 종사되는 날은 끝까지 오지 않았지만.[12] 정몽주의 경우에는 아예 태종이 정몽주를 추켜세워준지라 별다른 반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당대에도 극찬의 평을 받기도 했고.[13] 물론 김굉필소학을 중시한 점을 보면 그가 학문적 연구보다는 학문의 기본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남명학파의 몰락에는 그 시작인 남명 조식이 저서를 많이 남기지 않은 점도 한 몫을 했던 걸 감안하면, 문제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14] 김굉필김종직의 제자로,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하자 유배되었고, 곧 사사되었다.[15] 우왕신돈의 첩 반야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이성계가 집권하자 이것을 공식화한다. 그래서 세종대왕 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도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은 신우, 신창이라고 지칭했다.[16] 실제로 공헌을 했다고 보기 정말 어렵다. 고작해야 소학 연구에 몰두한 정도. 이황, 이이, 조식 등과 비교하면 암만 봐도 억지다. 당장에 김굉필 문서만 봐도 앞의 세 사람에 비해서 내용이 썰렁하다.[17] 직첩(職牒)이라고도 하며, 벼슬아치의 임명 사령장(辭令狀) 혹은 사령서(辭令書)[18] 정작 향거리선제에서는, 피천자가 사고를 치면 천거한 사람도 처벌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현량과에는 이런 연좌제가 없었다.[19] 이후 숙종~영조 시기의 이익성호사설에서, 그리고 정조시기의 박제가북학의에서 조광조와 같은 주장을 했다.[20] 종6품을 받으려면 과거에서 장원급제 즉 1등으로 합격하거나 착착 승진을 밟거나 그것도 아니면 공신이 되는 것밖에는 없있다.[21] 이때 김우증의 친척이였던 조광조가 원래 좀 모자란 사람이라며 옹호해 주었다.[22] 더욱이 안당은 정승이었다![23]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과거제도가 등장한 것이 이것의 폐단의 이후니까, 돌려 말하면 그만큼 현량과가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 것이다.[24] 이 때문에 추천할 권한을 지닌 자가 심지어는 추천을 하지 않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그 반대로, 그렇기에 추천한 자와 추천받은 자와 끈끈한 인맥이 형성되긴 했다만.[25] 당장 현량과를 반대한 남곤도 계열을 따지면 사림파였다.[26] 가령 대한민국 교육부에 있던 어떤 인간이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 라고 한다든가.[27] 하다못해 구품관인법조차 처음엔 향거리선제조조의 구현령의 장점을 섞은 제도라고 내세웠을 정도였다.[28] 여기에서 반대파란 단순히 현량과에 반대한 정광필, 남곤뿐 아니라, 조광조 일파를 싫어하던 이들 전부.[29] 그나마 내시보다 나은 점이라면, 내시와는 달리 조광조는 사림파 전반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광조를 살리는데 힘이 되지 못했음을 보면, 분명 조광조의 기반은 그리 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30] 후술하겠지만 그나마 정광필남곤은 시종일관 반대.[31] 현대와 차이가 있다면 조광조의 파벌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현대는 언론매체와 미디어를 포함해 아예 하나의 세력이 공고하게 결속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32] 어차피 과거제도 경제력과 족벌의 힘이 다 필요하고 과거제 이후에도 인맥 밀어주기는 존재하기에 상류층 전체가 계층을 공고화하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33] 단 조광조가 토지개혁, 신분제 완화 등의 개혁의 신호탄으로 소격서 혁파를 선택했는지는, 그가 개혁을 해보기도 전에 숙청당했으므로 알 수가 없다.[34] 불사를 벌일 때는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왕실에서 벌이다 보니 결코 규모가 작지 않았다.[35] 중종의 결사반대와 달리 대신들까지도 처음에는 이치에 안 맞는 거 아닌가? 하고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서버렸다는 것도 중종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36] 우리 나라의 田稅는 1/30인데 공물은 과다하니 그 때문에 민생이 날로 곤궁해진다. 경비의 쓰임새를 헤아려 적절히 줄인 뒤에라야 대체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다… 지금 각 읍의 공납을 살펴보면 土産이 不均하고 또한 모두 방납을 하고 있는데, 1升을 바칠 경우 1斗를 징수하고 1匹을 바칠 경우 3∼4필을 징수하니, 묵은 폐단을 그대로 따라 이같이 극단한 데까지 이르렀다. 조정이 어찌 생민을 위한 계책을 마련하지 않을 것인가(趙光祖,≪靜菴集≫권 3, 參贊官時啓 5·6).[37] 그러다가 중종대에 이르면, 趙光祖가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論貢物之弊>에서 공납제의 문제를 공액의 과다와 불산공물의 분정 그리고 방납의 폐로 지적하면서, 규모를 고쳐 安民의 내실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고 논하였다.167)167)(趙光祖,≪靜菴集≫附錄 권 5, 年譜 論貢物之弊) 여기서 조광조가 공안의 개정(改貢案)과 방납의 근절(杜防納)을 공물폐의 제거를 위한 양대 과제로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공납제 개혁의 방향을 규정지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38] 正祖(재위:1776-1800) 또한 대동법이 성립되는 과정을 말하면서 정공도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중종 때는 文正公 趙光祖의 말에 따라 貢案을 개정하고 각 관아의 防納 폐단을 금했었다. 선조 때는 正供都監을 두고 영의정 李浚慶이 그 일을 주관했으나 결국 제대로 안 되고 말았는데, 그 당시 선정신 李文成公(李珥)이 누차에 걸쳐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면서 그에 관한 상소를 거의 열 차례나 올리고, 게다가 또 東湖問答 을 올려 收米 제도를 시행할 것을 청했는데, 그게 바로 대동법의 근원이 되었다."129)129) 正祖, 弘齋全書 卷12, 序引 , “中廟朝因文正公趙光祖言 改定貢案 而禁各司防納之弊 宣廟朝設正供都監 領議政李浚慶主其事 竟不得行 當時有先正李文成 屢請釐弊 疏幾十上 而又進東湖問答 請行收米之規 此其大同之源頭也. 정조는 중종 때 조광조가 공안개정을 시도 이후 선조대 초반 이준경이 정공도감을 두었으나 실패하여 대동법의 근원이 되는 이이의 수미법이 나왔다고 하였다.[39] 이를 주장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소윤으로 악명 높은 정순붕이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라고 쫓겨났다가 김안로가 몰락한 후 복귀하나, 돌아온 후에 그는 오명이 두고두고 남게 된다.[40] 다만 정국 공신의 개정건은 남곤 또한 조광조가 죽기 2년전에 이미 온건한 수준으로나마 정국 공신의 개정을 먼저 주장했었다.(12년 윤12월 25일)[41] 물론 그보다 더 개혁의지가 강했던 정광필 등은 일단 범위를 정하자는 신중론에서(14년 11월 2일) 일주일만에 4등 공신 거의 전원을 삭훈하자고 조광조에 전적으로 찬동하는데 이른다.(14년 11월 9일) 그러나 조광조의 사후, 중종은 강한 압력을 놓아서 위훈 삭제의 건을 하지 말라고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대간들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개정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 소신이었다고 말하던 정광필조차도 중종의 압력에 굴복해 개정하지 않는 것에 찬성을 던지고 만다.(14년 11월 21일) 즉, 그와 기묘사림들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를 의미했다.[42] 그러나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의외로 적대적이진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조광조의 과격한 공격은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56] 사실 기묘사화는 이런 훈구파들을 친위세력으로 삼던 중종이 점점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친위쿠데타였다.[57][43]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라는 뜻의 사관(史官)은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의무였으며, 사관으로 뽑히면 가문에서 이를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명예로운 직책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 후에 짤막하게 사론(史論)의 형식을 빌어 개인적인 감상인 사론(私論)을 덧붙이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았고, 별 흠도 되지 않았다. 물론 개인감정 등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한다든지 하는 것은 엄청난 불명예였다. 그러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던 인물로 인해, 이전에 일이 터졌다. 그리고 가끔 현대 기준으로 보면 이뭐병스런 사론도 있기는 했다. 병자호란 이후 "사대부들이 환향녀이혼하는 것을 금해달라"고 말한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놈"이라고 디스한 것이라든가.[44] 홍경주는 중종의 후궁희빈 홍씨의 아버지이다.[45] 이런 비판에는 근거가 충분하다. 전국에서 인재를 뽑는다는 현량과가 사림파의 사람들만 게다가 조광조를 처음 천거했었던 안당은 그의 아들 3형제 모두가 전국의 유생 수만 명 : 28의 경쟁률을 뚫고 현량과에 뽑혔다. 과연 이를 어떻게 평해야 할까?[46] 무효 처리를 하지 않고 합격 사실을 인정해주되 그에 따른 벼슬을 주지 않기로 하는 절충안. 신하들은 무효 처리를 주장하고 있었다.[47] 조광조의 제자로, 병과로 급제했었으나 기묘사화로 대간에게 탄핵을 당한 뒤로 벼슬을 하지 못 했다.[48] 그나마 이것은 초반기 일로, 나중에는 잊혔다. 사실 조광조가 주목을 받은 이유가.이 사건이었다.[49]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 병조판서나 병조참지의 경우 군사의 최고 책임자였고 판중추부사는 왕명 출납과 숙위(宿衛)·군사 기무를 담당하던 관청의 수장이었다.[50] 사림파는 무관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었고 만약 더 심하게 나가면 결국 쿠데타 혹은 내란에 준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중종이 먼저 손을 쓴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이를 명분으로 조광조를 숙청했던가.[51] , 走와 肖를 합치면 가 되니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라는 의미. 즉, 조위왕(趙爲王).[52]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그 때 당시 능주는 인조 때까지는 능성현이었다.[53] 당시 죄인을 다스리던 의금부에 속한 관리.[54] 경전 공부 등의 도덕 수양도 중요시하지만 문학 역시 중요시하는 파.[55] 그의 친구김안로의 영향이란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