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F015F 0%, #800080 20%, #800080 80%, #5F015F);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800080> 추존 존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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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추존 황제 사마의 | 司馬懿 | |||
사마의 상상화 (역대고인상찬) | |||
출생 | 179년 9월 17일 | ||
후한 사례 하내군 온현 효경리 (現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샤오징진) | |||
사망 | 251년 9월 7일 (향년 71세) | ||
조위 사례 하남윤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 고원릉(高原陵) | ||
재위기간 | 조위 하진정후 | ||
220년 3월 15일 ~ 220년 12월 11일 | |||
조위 안국향후 | |||
220년 12월 11일 ~ 224년 | |||
조위 상향후 | |||
224년 ~ 226년 6월 29일 | |||
조위 무양후 | |||
226년 6월 29일 ~ 251년 9월 7일 | |||
재임기간 | 조위의 태위 | ||
235년 1월 8일 ~ 239년 2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 하내 사마씨 | |
휘 | 의(懿) | ||
부모 | 부친 경조부군 모후 기정(奇庭) | ||
형제자매 | 8남 중 차남 | ||
배우자 | 정실 선목황후 후궁 백부인, 복부인 등 | ||
자녀 | 9남 2녀 | ||
자 | 중달(仲達) | ||
작호 | 하진정후(河津亭侯) → 안국향후(安國鄕侯) → 상향후(向鄕侯) → 무양후(舞陽侯) → - | ||
묘호 | 고조(高祖) | ||
시호 | 문후(文侯) → 선문후(宣文侯) → 선왕(宣王) → 선황제(宣皇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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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서진의 고조(高祖)[1]로,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다. 추촌 황제인 조조를 시작으로 1대 황제 조비, 2대 황제 조예, 3대 황제 조방까지 걸쳐 위나라를 섬겼다.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관중과 서북면을 지켜내는 등 나라 안팎에서 많은 공을 세우며 최고직인 태위와 태부직을 지냈다.말년에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몰아내고 대업의 기초를 닦았으며,[2] 사후 무양문후(舞陽文侯), 무양선문후(舞陽宣文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장남인 사마사를 거쳐 차남인 사마소가 진왕(晉王)에 오르자 선왕으로 추존되고[3]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어 서진을 건국한 후에 고조 선황제로 추존되었다.
2. 일생(정사)
자세한 내용은 사마의/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라이벌이자 북벌의 최종 보스이다보니, 실제 역사의 최후의 승자임에도 사공명주생중달 등 제갈량보다는 한 수 아래로 묘사되는 편이다. 천재 제갈량에게 그나마 사마의쯤 되니까 간신히 상대가 가능했다는 정도. 위와 촉의 국력 차가 사마의를 살렸다는 식이다.삼국지 전반부가 조조와 유비의 라이벌 대결이라면 후반부는 제갈량과 사마의가 라이벌이 된다. 그리고 극후반에는 강유와 등애로 계승된다.
처음 등용됐던 시기[4]를 한참 지나서야 등장하는데[5] 사마의는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한 직후 처음 등장하여 조조에게 이 기세로 익주까지 정벌하라고 진언하나 조조는 듣지 않는다. 관우가 번성을 수몰시키자 또 등장해서 장제와 함께 조조에게 손권을 끌어 들이라고 건의한다.
일찍이 조조가 세 마리의 말(馬)이 한 구유통에서 구유를 먹는 꿈을 꾸었을 때 조조는 이를 마등 삼부자로 여겼다. 그런데 조조가 죽기 직전 똑같은 꿈을 꾸자 가후에게 해몽을 부탁하자 가후는 이를 록마로 해석하여 길조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사마(司馬)씨의 득세를 뜻했다.
사마의는 조비에게 건의하여 대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촉한을 협공하게 한다. 그러나 재빨리 방도를 강구한 제갈량은 군사들을 각기 파견하고 등지로 하여금 오와 동맹을 다시 맺게 하여 5로 대군을 물리쳤다. 이 5로 대군 이야기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사마의가 제갈량 라이벌로서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조비 사후 조예가 그 뒤를 잇는 과정에서 사마의가 옹주와 양주의 경비를 맡았을 때, 제갈량은 마속과 이야기하다가 그 사실을 듣고 매우 놀라면서 "위나라의 진정한 장수라면 사마의 한 사람 뿐이라고 해도 좋다."라고 말하기까지 하면서 사마의를 띄워준다. 제갈량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가 군을 지휘한다면 북벌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고 마속은 조비가 죽은 틈을 타서 유언비어로 사마의를 실각시키고 제갈량에게 더 큰 신임을 받는다. 정사에서 마속이 이런 책략을 쓰는 장면은 없고 사마의가 실각되지도 않았다.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지휘관 조진이 계속 패하자 조예는 다시 사마의를 기용한다. 사마의는 신속히 제갈량과 내통 중인 맹달을 평정하고 장합을 파견해 가정의 마속을 패배시킨다. 가정에서 마속이 패하자 사마의는 군을 이끌고 곧바로 서성으로 진군한다. 성에 군사가 없었던 제갈량은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에 올라 악기를 연주했다. 사마의는 의심이 많아서 제갈량이 복병을 숨겨놓았을 것이라 의심하고 퇴각한다. 정사에서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활약한 것은 조진, 장합 등이었고 사마의는 당시 완성에 주둔 중이었으니 여기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정사에서도 제갈량이 성을 비우자 복병을 의심한 사마의가 군을 물린 일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배송지는 이 일화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정사에서 제갈량의 북벌은 5차례이지만 연의에서는 위의 진격에 대한 반격인 3.5차 북벌까지 한 차례 북벌로 추가되어 육출기산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제갈량의 4차, 5차 북벌이 5차, 6차 북벌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있으니 혼동에 주의하도록 한다. 위군은 진창에서 궂은 날씨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실패하고 말아서 다시 장안으로 퇴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위나라 조정에서 퇴각하라는 전서를 보냈는데, 전서가 도착한 시점이 궂은 날씨 다 버텨내고 맑아져서 진군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반드시 치고나올 것이라 예견한 반면, 조진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자 사마의가 조진에게 제갈량이 기습을 해오지 않으면 얼굴에 분을 바르고 치마를 두른 채 조진에게 절을 하는 벌칙을 받겠다고 한다. 이에 조진은 자신이 틀리면 조예께서 내리신 말 한 필을 선물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사마의의 예상이 옳았고 조진은 적의 기습을 제대로 당하나 겨우 사마의에게 구원을 받아 살아남았다.[6] 이에 조진은 상심하고 부끄러워 병이 재발하던 중 제갈량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받고 열받아 죽어버린다.
제갈량의 4차 북벌에서 군량 문제로 제갈량이 퇴각하자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합은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다가 전사한다. 정사에서는 장합이 만류하는데도 사마의가 억지로 장합에게 추격을 명해서 괜히 장합을 죽게 만든 것이다. 연의에서는 그 반대로 사마의를 띄워주기 위하여 사마의가 만류했던 것으로 바뀌었다.
제갈량의 5차 북벌에서 제갈량이 꾀를 쓴다. 위연은 사마의와 단기로 겨루다가 거짓으로 후퇴하여 사마의를 상방곡으로 유인한다. 여기서 문관인 사마의와 촉나라의 무력 본좌 위연이 일 대 일로 싸우는 창작 장면이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덕분에 사마의는 태사자와 칼싸움을 벌인 왕랑처럼 문관계의 양대 무력 본좌가 되었다. 제갈량은 상방곡 안으로 들어온 사마의를 화공을 이용하여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하늘은 사마의의 손을 들어 줘 마침 내린 비 때문에 사마의는 무사히 빠져나왔다.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며 크게 한탄했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다. 사마의가 상방곡에서 화공을 당한 장면은 연의의 창작이며 정사에서는 제갈량의 상을 골짜기로 들어가서 치렀다는 기록 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의 삼국지 매체에서는 위연과 사마의의 일 대 일 결투 부분을 대부분 삭제한다. 상방곡으로 유인하는 것은 사마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인데, 사마의가 직접 결투에 응한 상황이면 위연이 그냥 싸우던 중에 죽이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거기서 또 위연이 거짓 후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쉽게 말해서 후반부 촉의 무력 원톱인 위연이 사마의와의 결투에서 밀려서 퇴각하는 상황인데 사마의는 의심 없이 위연을 추격한다. 이렇다는 말인즉 위연은 사마의와 결투를 벌여서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오히려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마의의 무력이 강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앞서 사마의가 요화에게 허둥지둥 쫓기는 게 설명이 안 된다. 아무리 전술적으로 사마의가 패배해서 도망가는 상황이라지만, 무력 차이가 심하게 나는 적장이 추격할 때 오히려 결투를 벌여 전황을 뒤집는 일이 연의에 자주 있었다.
사마의는 상방곡에서 당한 뒤 싸우지 않고 진채를 지켰고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여자 옷과 관을 보내 상례를 치르느라 집에만 처박혀 있는 아녀자에 비유하여 모욕한다. 사마의는 격분하지만 일시적인 개인적 분노를 참고 최후의 승리를 도모했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각색으로 정사에서는 이러한 도발에 넘어가 빡친 사마의가 출진하려고 했으나 신비가 말려서 넘어간 것이다.
제갈량이 보낸 사자로부터 공명이 식사는 적게 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도맡아 한다는 말을 듣고 식소사번이니 제갈량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했다.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관용구는 정사에서도 나오는 대목이지만 연의에서는 이 일화가 각색되었다. 제갈량이 죽자 사마의는 진격하는데 제갈량이 죽기 직전 명령으로 만들어진 목상을 보고 그가 살아있다 착각하여 깜짝 놀라 퇴각을 명령했다. 이후 사마의의 대사 "내 머리가 아직 붙어 있느냐?"가 압권이다. 이후 진짜로 제갈량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마의는 탄식하며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정사에서 이는 제갈량이 죽자 후미를 맡은 강유가 대처를 잘해서 사마의가 물러나자 생긴 속어이다.
사마의는 공손연의 난을 평정하는데 여기서 명대사를 읊는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우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키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고, 달아날 수 없을 때는 항복하고, 항복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한다." 정사에서도 나오는 명대사지만 정사와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변경되었다.
조예가 죽은 뒤, 조상의 음모로 인하여 실권을 빼앗기지만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다시 정권을 탈환한다. 왕릉의 난의 묘사는 없으나, 죽을 때의 장면은 있다. 사마사와 사마소에게 나라에 충성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사마의는 주인공도 아니면서 계속 주인공 보정을 받고 있다. 위연과 면전에서 마주쳤으나 제갈량이 사마의를 유인해오라고 해서 일기토 떴으면 바로 죽일 수 있는 사마의를 죽이지 않고 거짓 퇴각했다. 게다가 기껏 사마의를 계곡에 몰아넣고 제갈량이 화공으로 사마의를 거의 죽이기 일보직전까지 몰아붙였는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사마의는 살아났다.[7]
4. 가족 관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죽은 후 등장한 서진의 고조 사마의는 같은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사마천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다. 즉, 전주 이씨로 비유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와 이안사의 후손이긴 하지만, 조선 왕실 직계가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의 한 아무개의 관계[8]로 볼 수 있다.《사기》에 의하면 사마천의 가문은 원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가문은 주나라를 떠나 위(衛)나라, 조(趙)나라, 진(秦)나라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한나라 시대 명문가들은 대개 수도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사마씨도 온현 일대의 거족으로, 명망높은 청류파 가문이었다. 사마방의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기에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다.
- 사마랑 - 사마방의 장남.
- 사마의 - 사마방의 차남.
- 사마부 - 사마방의 삼남.
- 사마규 - 사마방의 사남.
- 사마순 - 사마방의 오남.
- 사마진 - 사마방의 육남.
- 사마통 - 사마방의 칠남.
- 사마민 - 사마방의 팔남.
천하의 사마의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장춘화였다. 그러나 말년에 장춘화를 늙었다고 대놓고 괄시하는 것을 보면 젊었을 때 두려워 했던 것 같다. 사마씨 가문은 천재가 가득했고 사마의의 아내 장춘화도 똑똑했는데 어째서 그 후손들의 능력은 영 아니었다. 특히 아들 사마간은 똑똑하나 정신병이 있었고 증손 사마충과 먼 후손인 사마덕종은 아예 백치였다.
다만 사마주와 사마준의 경우, 각각 오나라 정벌과 독발수기능 진압 때 활약하기는 했다.
- 장춘화 - 사마의의 정실, 사마사, 사마소, 사마간, 남양공주의 어머니.
- 복부인 - 사마의의 첩, 사마량, 사마주, 사마경, 사마준의 어머니.
- 장부인 - 사마의의 첩, 사마융의 어머니.
- 백부인 - 사마의의 첩, 사마륜의 어머니.
- 사마사 - 사마의의 장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소 - 사마의의 차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량 - 사마의의 삼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주 - 사마의의 사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경 - 사마의의 오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간 - 사마의의 육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준 - 사마의의 칠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융 - 사마의의 팔남, 장부인의 아들.
- 사마륜 - 사마의의 구남, 백부인의 아들.
- 남양공주 - 사마의의 장녀, 장춘화의 딸.
- 고육공주 - 사마의의 차녀, 생모 미상, 두예의 아내.
5. 평가
자세한 내용은 사마의/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기타
- 사마의는 중국어로 쓰마이(Sīmǎ Yì)에 가깝게 발음된다. 삼국지는 오래 전부터 한국에 전래되어 유명해졌기 때문에 정해진 외래어 표기 원칙이나 대중들에게 통용되는 표기 모두 한국 한자음이다. 그렇다보니 중국어 발음은 어색하고 괴상하여 잘 쓰이지 않는 편인데[9] 사마의는 발음도 꽤 비슷하고 어감이 찰져서 커뮤니티에서는 은근 이런 표기가 보인다. 특히 영상 매체를 통해 중국 삼국지 사극이 많이 알려지고 거기서 이런 발음이 자주 나오는게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삼국지 관련 커뮤니티에서 사마의를 쓰마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꽤 많다. 후한 말 당대인들이 쓰던 상고한어 발음은 사마의 - 셔 므라 릿(sjə mraʔ ʔrjit).
- 위나라의 인물 대부분이 축소되거나 언급되지 않아 순욱마저 공기가 되기 십상인 어린이용 삼국지 학습만화에서도 사마의 만큼은 비중이 굉장히 높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대부분의 어린이용 학습만화 삼국지의 후반부 주인공격 인물은 제갈량이고 사마의는 그 제갈량의 라이벌로 나오기 때문. 그리고 그 때문에 사마의는 주로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90년대 후반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한결의 곱빼기 만화 삼국지가 그 대표적인 사례. 하지만 사마의의 집념만큼은 정말 대단하게 묘사된다. 예를 들어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죽을 각오로 싸워라!"라고 독려하면, 사마의가 "죽어도 다시 일어나 싸워라!"라고 부르짖을 정도.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 대부분이 촉을 주연으로 했으니 사마의가 악역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은 아니나 실제 사마의 역시 빌런 소리를 들어도 싼 악행들이 있어서 일방적인 대립 구도 설정이라고 볼 수 없다.
- 민간 설화에서는 제갈량에 집착하는 이미지도 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제갈량이 죽자 제갈량의 시신을 강탈하려는 사마의가 대노한 강유과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있고 아예 사마의가 제갈량 묘를 몰래 팠는데 무덤 아래에 묻힌 자석 때문에 발이 안 떨어지니까 쫄아서 튀거나 관우 장비 귀신이 튀어나와서 쫓아내거나 조자룡 귀신이 쫓아내기도 하는 다양한 설화 버젼이 있다.
- 사마의의 고향 하내 온현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물리치고 연주하게 했다."는 '사마의득승고'라는 타악곡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마의의 유일한 시인 '천지개활 일월중광'이라는 시에 곡조를 붙인 게 현대까지 전승되어 왔다고. 시에 곡조를 붙었다는 것은 후대의 윤색이라는 의견도 있다.
天地開闢 日月重光
遭遇際會 畢力選方
將掃穢甫 還過故鄕
肅淸万里 総斉八荒
告成歸老 待罪武陽
천지개벽 일월중광
조우제회 필력선방
장소예표 환과고향
숙청만리 총제팔황
고성귀로 대죄무양
천지가 개벽하고, 일월이 거듭한 즉
좋은 군주를 우연히 만나, 마침내 힘을 떨쳤다.
장수로서 잡초들[10]을 쓸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만리에 걸쳐 숙청을 하고 어지러운 팔방을 평정하였다.
성공을 보고하고 돌아가서 무양(武陽)의 죄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遭遇際會 畢力選方
將掃穢甫 還過故鄕
肅淸万里 総斉八荒
告成歸老 待罪武陽
천지개벽 일월중광
조우제회 필력선방
장소예표 환과고향
숙청만리 총제팔황
고성귀로 대죄무양
천지가 개벽하고, 일월이 거듭한 즉
좋은 군주를 우연히 만나, 마침내 힘을 떨쳤다.
장수로서 잡초들[10]을 쓸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만리에 걸쳐 숙청을 하고 어지러운 팔방을 평정하였다.
성공을 보고하고 돌아가서 무양(武陽)의 죄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 시를 못 하는 걸로 유명했다. 현대까지 유일하게 내려오는 바로 위의 시를 보면 운만 맞춘 작전 보고서가 따로 없다. 단가행으로 유명한 조조가 건안문학을 일으킨 이후 당대 귀족 사회에서 시를 못 쓴다는 건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된다는 걸 생각할 때 시에 아주 관심이 없던 걸지도 모른다.
- 사마의는 낭고상으로도 유명하지만, 형인 사마랑 관련 기록인 《사마랑전》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12세), 시험을 보는데 하도 덩치가 커서 "나이를 속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고, 게다가 역시 한 덩치하는 동탁이 사마랑에 대해 "내 아들이랑 꼭 닮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사마랑 본인 말에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의 집안 유전이라니 동생들인 사마의와 사마부도 꽤 한 덩치 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 조선 시대에도 충성심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평가가 안 좋았다. 그래도 병법에 관해서는 나름 좋게 평가 받았다. 세종대왕도 김종서에게 사마의의 고사를 들어주는 기록이 있다.[11]
- 《상림전》에 상림보다 지위가 높으나 고향 선배 대접을 해서 항상 인사를 했다고 한다.
7.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사마의/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추존 황제.[2] 다만 당시 조상 일파는 권력을 남용하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점에서 당시 위나라에서도 고평릉 사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빼앗은 자식과 손자들과 달리 사마의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위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이런 점에서 사마의에 대한 평가는 미묘한 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3] 그래서《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는 '사마선왕(司馬宣王)'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상하게 추존 황제의 칭호를 받았음에도 그는 황제 칭호보다 '사마선왕'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당장《삼국사기》같은 후대 사서들 말고도 서진 시기에 지어진《정사 삼국지》나 그에 주석으로 달린 서진 ~ 동진의 사서들조차 그렇다.[4] 사마의가 처음 등용되었을 때는 조조가 삼공의 지위를 없앤 208년경이다.[5] 이는 정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조가 사마의를 경계해서인지 요직에 쓰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6] 사마의의 구원이 성공한 것에는 굳이 진군하지 말라는 제갈량의 전서를 무시하고 진군했던 진식과 위연의 과실이 컸다. 결국 진식은 이 책임을 모두 지고 사형당했고, 그나마 위연은 아직 그 용맹이 쓸데가 있어서 어물쩍 넘어갔다.[7] 이 시점에 사마의가 죽는 것으로 묘사하면 안 되는 이유는 연의에서도 정사와 마찬가지로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부분을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8] 본관은 같으나 분파는 다른 관계[9] 중국어 표기로 바꾼 예시를 들자면, 리우베이(유비), 차오차오(조조), 주거량(제갈량), 츠비다잔(적벽대전), 추스뱌오(출사표) 등이 있다. 대부분은 직관적이지 않고 한국 한자음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10] 공손연의 무리[11] 사마의(司馬懿)가 제갈량(諸葛亮)과 더불어 위남(渭南)에서 마주 대해 보루(保壘)를 지키고 있었는데, 누가 사마의가 패하지 아니한다고 했으리오마는, 사마의가 1백여 일 동안을 지키기만 하고 비록 제갈량이 건귁(巾幗)을 보내면서 여자 같이 비겁하다고 욕을 하였어도, 끝내 가볍게 나가지 아니하고, 마침내 성공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마의가 무겁게 지니는 계책이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장수가 되어 병법을 알기가 가장 어려우니, 오래 끌 만한 것을 속히 결전(決戰)함은 병법을 아는 자가 아니겠고, 더불어 싸울 만한데 싸우지 아니함도 병법을 아는 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