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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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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colcolor=#fff><colbgcolor=#330066>
파일:독립운동가 박은식_.jpg
출생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목 주남방
(現 황해북도 황주군)
사망 1925년[1] 11월 1일 (향년 66세)
중화민국 강소성 숭후시
(現 중국 상하이직할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1
재임기간 제2대 임시대통령
1925년 3월 23일 ~ 1925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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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 본관 밀양 박씨
부모 아버지 박용호, 어머니 노씨 부인
배우자 연안 차씨
자녀 슬하 2남 3녀[2]
딸 박영애, 양자 박시창
학력 서당
종교 유교 (성리학)대종교
성칠(聖七)
백암(白巖), 겸곡(謙谷)
필명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
파일:박은식 초상화.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3. 기타4. 어록5. 갤러리

[clearfix]

1. 개요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 『한국통사』 中
한국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제2대 임시대통령.[3]

지식인 출신[4]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나라를 위한 논설을 쓰고 애국 계몽 사상가로서 영향을 끼쳤다.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연장자 세대로서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힘썼고 의외로 강한 작전도 계획하여 독해보이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나, 평상시 사생활에서의 인품은 아량이 넓고 온화하고 사려깊은 인격자의 성품으로 유명하였기에 절로 수많은 청년과 중년 독립운동가들이 큰 어른[5][6]으로 모신 인격자[7]였던 위대한 인물이다.

한국 근대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현대의 근대 사학자들은 박은식의 책을 읽지 않고는 연구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동명성왕실기(고구려)나 발해태조건국지(발해) 같은 고대사 서적도 그가 저술한 것이다. 특히 안중근에 대한 역사적 재발굴도 박은식의 저서에 의해 이뤄졌다. 박은식이 어릴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8]과 친구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중화민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 남겼던 "안중근전"이 중일전쟁 중에 분실되어 버렸던 상황에서, 먼 훗날 1992년 중국 흑룡강성의 하얼빈에서 70년만에 발견되면서 안중근이 재조명되었다.

안중근의 형제가 아버지처럼 모셨던 분으로 타계하던 날도 안중근의 친동생 안공근이 박은식 대통령을 옆에서 지켰다.

2. 생애

1859년(철종 10) 9월 30일 황해도 황주목 주남방(현 황해북도 황주군)에서 박용호(朴用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몰락한 상태로 지냈으나 할아버지 박종록(朴宗錄)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아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882년 상경해 서울에 살던 중 7월에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고종에 제출하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 낙향해 태천의 성리학자 박문일의 문하로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10살 때부터 부친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1885년 향시(鄕試)에 급제했다.[9] 1888년부터 참봉을 지냈고 1898년 위암 장지연이 속한 <황성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이 때를 계기로 계몽 운동에 참여하여 만민 공동회, 독립협회 등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대한제국의 자주개혁에 관심을 가지던 지식인이었지만 결국엔 완전한 항일운동가가 되었는데, 을미사변으로 일제에 반감을 가지게 된 게 컸고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1902년[10] 개혁당에 가입하며 지식인 포지션을 벗어나 완전한 항일 독립운동가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8년 서우학회의 후신인 서북학회 회장을 맡았으며[11] 1909년 3월, 〈서북학회 월보〉에 보수적인 유교와 유림 사상을 질타하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해 을사조약을 막아내지 못한 보수 유림들을 질타하는 기고문을 내었고, 중국의 양명학을 중시하여 이를 필두로 한 '대동교'를 창시하여 종교 부장을 지냈다.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을 통해 유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 유교정신이 전적으로 국왕에게 치중되어 있으며, 백성들에게 보급하여 가르칠 정신이 부족하다. 따라서 백성들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맹자의 사상을 도입해야 한다.
2. 개혁에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유학자가 오기만 기다리는 안이한 태도 때문에 불교나 기독교처럼 쉽게 전파되지 못했다.
3. 간이직절(簡易直切)을[12] 천시하고 지리한만(支離汗慢)한[13] 학습만을 추구한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교육 활동을 포기하고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구국 운동을 하게 되었으며 1912년 상하이로 이동하여 박달 학원을 세우고 상하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에는 이상설, 신규식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감독이 되었고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구국단'을 결성하여 독립 운동에 기여했으며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게 되었다가 1919년 상하이로 돌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14]의 사장을 맡았다.
파일:Rhee_Syngman_and_Yi_Donghwi.jpg
1920년 12월 28일 이승만 임시 대통령 환영식
(오른쪽 세번째 인물)
'노인 동맹단'도 조직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우규가 있다. 상술된대로 당시의 노인 개념은 40대 후반부터여서 한국나이 46살부터 회원으로 받았고, 50대가 주활동층이고, 60대가 간부층이었다. 물론 강우규는 동맹단 지도자 박은식보다도 나이가 위였기에 60대에 가입하여서 노인동맹단 내에서도 어른이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임시대통령인 이승만탄핵되자 후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임시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제가 대통령이 의정원의 동의없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가 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15]하였고 이후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개정한 후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사임한 이후 그 해 11월 병고(病苦)와 노환[16]을 앓게 된 그는 독립을 위한 민족의 통일을 주창하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순국 후에는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3년 노백린, 신규식 등과 함께 국내 운구가 결정되어 중국에서 유해가 봉환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3. 기타

파일:서울대 박은식 흉상.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선생
서울대학교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을 기념하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
  • 저서로는 고종 즉위부터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사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있으며, 상술된 안중근전,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등 매우 많은 저서가 있다.
  • 복장도 항상 검소하고 소탈하였고 독립에 대한 의지가 대쪽같은 고결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말로 대인배라는 호칭에 적합한 아량을 갖춘 인격자여서 사람들을 대함에 인간미까지 묻어나던 사람이었기에 많은 독립운동가들[17]이 그를 어른으로 모시며 존경하였다. 한 일화로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경비가 된지 얼마 안된 사람이 박은식 대통령을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가던 병든 조선인 노인 취급을 하며 그를 멈춰 세웠다. 평생 가진 돈은 모두 항상 자신의 독립운동조직에 쓰거나 주변의 어려운 독립운동가들에게 나눠주었기에, 너무나 검소한 나머지 옷차림이 허름했기 때문에 도저히 정치인으로 보이지 않았고, 이미 호흡기질환[18]이 있었기에 안색도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은식은 화를 내지 않고 안에 있는 사람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경비가 묵살했는데, 조금 뒤 소란한 소리를 듣고 나온 정부 측 인물이 "몸도 불편하신 대통령 각하를 세워두다니 각하께 무슨 짓이냐"며 그를 크게 혼내려 했고, 박은식 대통령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혼내지 말라"며 이를 저지하며 경비를 격려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 중국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의 협력대상으로 보면서도, "만일 중국이 강성해진다면 교만해질 것이며 한반도에 대한 야심이 생겨 중국의 동정은 얻을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날카로운 경고를 한 적이 있다. 이는 박은식이 활동하던 당대 쑨원의 연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그 예시로 1921년 연설에서는 "중국이 잃어버린 영토는 가장 최근의 것부터 말하자면 웨이하이웨이와 뤼순, 다롄, 칭다오, 홍콩, 그리고 광저우 만이 있고 그 전의 것으로는 조선, 타이완, 펑후열도가 있다."고 연설했으며 1923년 8월과 1924년 2월에는 "중국이 다시 강력해지면 조선이 저절로 중국 밑에 다시 들어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즉 쑨원은 한반도가 옛날부터 중화대륙의 속국이었지만 사악한 서양오랑캐들과 결탁한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탈환해야 할 중국의 영토로 생각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런 경고를 한것으로 생각이 된다.[19] 이후 장제스도 독립운동 지원을 빌미로 속국화 하려고 시도하면서 연설로는 한반도에 대해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망언을 했고#, 훗날 시진핑이 2017년 미중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이다."라는 망언을 한 걸 생각한다면 의미있는 경고인셈.

4. 어록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 『한국통사』 中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 『한국통사』 中
전술을 알지 못하는 유생이나 무기도 없는 농민이 순국을 각오하고 맨손과 맨주먹으로 적과 싸워 뼈를 들판에 파묻을지언정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전통 가운데 배양된 민족 정신의 발로였다.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中
천자가 있은 이래로 (중략) 경쟁이 없는 때가 없었으니,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중략) 승자는 존재하고 패자는 멸망했으니, 그 경쟁의 시대에 처하여 무릇 지각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중 다른 사람에게 승리할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비록 보통으로 나누는 이야기와 간단한 노름일지라도 승리를 좋아하고 패배를 싫어하거늘, 하물며 국가의 존망이 달린 큰 문제에 있어서랴!
- 『서우』 제1호

5. 갤러리

  • 사진 기록들이 제법 존재하는 여타 임시정부 인사들과는 다르게 박은식이 등장하는 존영 자료들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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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에 나온 박은식 서거 기사 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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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환영식의 박은식 3.1절 기념식의 박은식


[1]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923년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것이 역사적 사실이므로 오기이다.[2] 막내딸 박영애만 제외하고 전부 요절.[3] 임시정부 헌법상 국가원수의 호칭은 ‘임시대통령’이었다.[4] 평생 학문만 하고 살려했고, 평안도나 황해도 일대뿐만 아니라 한양에서까지 성리학, 실학, 양명학까지 마스터한 걸로 널리 유명한 학자였지만, 모친이 아들의 공무원생활을 간절히 원해서 할 수없이 과거시험을 보고 소과는 물론 바로 그 빡세다는 대과 초시(향시)까지 한방에 합격했을 정도이다. 참고로 훗날 지지자들이 한시에 능했다느니 서예에 능했다느니 하는 이승만은 1880년대 박은식보다 응시 기준으로 약 10년 정도 늦은(1890년대) 세대인데 소과조차도 매번 합격을 못해서 포기한 사람이다. 소과에 대과 초시까지 다 합격한 박은식은 이승만과는 수준이 달랐던 진짜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물론 당시는 강화도 조약 이후 나라 정세가 점점 막장으로 가던 시기라 높은 관직은 하고 싶지 않아 낮은 관직을 하겠다고 하여, 대과 복시는 보지 않고 대기하다가 능참봉직을 받아 관직생활을 했다.[5]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하던게 50~60대였지만(첫 활동은 한일합방 전 40대였을때 민영환, 이준 등이 주도한 개혁당 활동 시절부터이긴 하다.) 어른으로 불렸었다. 지금이야 60대에 한창 정치하는 사람들이 널렸지만 당시에는 매우 적었는데, 평균 수명이 짧아서 50대도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노인 대우하는 표현을 들었다. 결혼을 대부분 일찍 해서 40~50대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많았었다. 당시 서슬퍼런 일본 정부조차도 몇몇 사건에서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잡았다가, 독립운동 기여도와 무관하게 70대 독립운동가들만 그냥 나이가 많아서 앞으로 독립운동 더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검찰 불송치나 기소유예로 풀어준 적도 꽤 있을 정도였다.[6] 한국인에게 전형적인 매국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을사오적조차 그 권세를 누리고도 한명 빼고 죄다 지금 기준으로 매우 일찍 죽었는데, 50대에 3명 60대에 1명이, 살인사건이나 사고도 아니고 그냥 질병으로 죽었다. 을사오적 같은 권력자조차 50대에 막 죽는 판에, 70대를 기대하는건 지금으로는 90살 넘는 장수취급이었다. 한명의 예외 장수 매국노는 팔순잔치도 하고 81살에 죽은 권중현 뿐이다. 사실 권중현을 이완용보다 더 극혐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다. 이완용은 젊을때부터 공부라도 스스로 잘해서 올라왔고(어릴적 세자였던 순종의 교사) 아관파천때 가장 노력한 신하였지만 노력 대비 무시당하는 설움이라도 당한데다가 매국노 되고 살인미수라도 당해서 죽다 살아나고 죽어서도 족보에서 삭제되었는데, 권중현은 공부도 못하는데 조선말에 빽쓰고(과거급제한 이완용과 달리 음서다) 뇌물쓰고 권모술수 별짓을 다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놓고 그자리에서 기껏 한 일이 매국노였기에 꼴보기도 싫은데 무려 혼자만 별일도 없이 건강하기까지 하고 죽어서는 안동 권씨 공식 족보에 조상으로 멀쩡히 남겨져 후손들에게 90년째 제사도 받으며 대우받기 때문.[7] 임시정부 대통령제를 강하게 밀던 김구이승만의 세력들조차 독립운동계의 큰어른인 박은식을 함부로 반대하지 못하였고 그의 요구에 따라 임시정부 대통령제를 실제 폐지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탄핵으로 당시 이승만과 김구 측이 잠시 힘을 잃었던 시기였다.[8] 아들처럼 유명하지 못하지만 사실 꽤 대단한 인물이다. 안태훈은 황해도 신동으로 유명할만큼 머리가 엄청나게 좋았고, 같은 신동인 박은식과 황해도 학문계 양대산맥이라 불리며 10대 후반부터 함께 공부했었다. 당연히 안중근과 안중근의 친동생도 박은식을 어릴때부터 친삼촌처럼 봐 왔기에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뒤에도 박은식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박은식처럼 안태훈도 과거시험 대과 초시(향시)에 합격하여 지방 공무원생활을 했었다.[9]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10] 일본은 을사조약 전에도 이미 러일전쟁 준비하던 시기(보통 1902년 영일동맹 때부터로 본다. 가쓰라-태프트 밀약때로 보기도 한다.)부터 조선의 몇몇 지역을 거의 일본땅처럼 행정과 개발을 멋대로 하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작은 농촌지역이던 한밭 지역(대전)을 큰 영토이자 조선 남부의 허브로 바꾸려고 주변 충청도의 연기군을 포함한 여러 지역 땅을 엄청나게 빼앗아서 대전에 합병하며 큰 도시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을사조약 전에 한창 러일전쟁을 하던 무렵이다. 당시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이미 대한제국의 독립된 정부로의 중요한 권리 상당수가 넘어갔던 시절이다.(을사조약은 제2차 한일협약이다.) 사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은 형식적인 시점이고 실질적 식민지 시대는 3년 이상 더 오래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11] 당시 서북 지역은 개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박은식도 기독교계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에 양명학의 '양지(良知)'라는 개념을 기독교의 '성령'과 비교하려는 시도를 했고 결국 박은식의 양지론은 양명학의 기반하에서 기독교 '성령'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을 가진 신으로의 개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2] 간단하며 즉석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13] 지리멸렬하고 느림.[14] 1896년 독립협회가 발간한 독립신문과 당연히 별개의 신문이지만 신문 이름은 거기서 따 온 게 맞다.[15] 이는 도산 안창호가 임시정부 초기부터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단, 김구이승만이 이를 완전히 묵살했다.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귀찮게 굴지말고 닥치라는 수준(실제 편지에 "입을 다무시오"라고 썼다)의 공격적인 편지를 써 보낸적도 있다.[16] 사임전에도 건강이 안 좋았다. 임시대통령직을 수락한 것도 본인의 소신대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직을 그만두기 위함이었다.[17] 특히 노백린 장군이 박은식을 가장 따르고 존경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박은식 역시 대통령이 되었을때 노백린에게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임명받도록 하였다. 또한 박은식과 함께 활동하였던 이승교의 아들 이동휘도 박은식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박은식이 대통령제 폐지를 주장할때 이동휘가 앞장섰었는데, 폐지는 성공했으나 이후 얼마 안되어 공산주의자라는 견제에서 그를 보호해주던 박은식과 노백린이 1년 안에 모두 사망하자, 공산주의자라고 그를 싫어하던 김구와 이승만 등에 의해 축출되고 소련으로 갔다. 강우규도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 항상 박은식을 가장 크게 신뢰하였다. 박은식이 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몇달만에 순국했을 만큼 이전부터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던 상태에서도 대통령으로 뽑힌 건, 그만한 업적과 능력 탓이지 괜히 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저서 한국통사 역시 현재까지도 한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구한말 자료 중 하나이며 여전히 많은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책이다.[18] 사망원인이 인후염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병원치료를 자주 안해서 병원 진료기록이 남은게 그런거 외에는 별로 없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사망 전까지 드물지만 각혈도 했다는 증언이 있는 등 증상의 종류상 노환에 겹쳐 폐병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대통령 재임기간이 6개월밖에 안된 건 이미 건강이 꽤 좋지 않았던 것 때문이고, 그렇기에 대통령제 폐지 외에도 개혁할게 많았으나 빨리 그만두어야 했기에 조금 미진하게 끝낼 수 밖에 없었다.[19] 출처 : 쑨원과 한국,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 배경한 지음. 한울아카데미 출판. 24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