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5 23:40:53

K-POP/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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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 이후2. 1960년대3. 1970년대4. 1980년대5. 1990년대6. 2000년대7. 2010년대8. 2020년대

1. 광복 이후

이 시기는 아직까지 일본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와 그 전부터 이어진 강한 일본의 영향력, 그리고 냉정하게 조선보다 훨씬 앞서 있던 당시 일본의 국력상 학술, 문화 등의 사업도 사실상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대중음악의 주요 인물들은 당연히 강점기부터 활약해왔고 이들은 일본 문물을 깊게 공부하거나 더하면 일본에서 공부하다 오거나 한 사람들이었다. 강점기 시기 대중가요를 녹음하는 곳은 서울에 단 한 곳밖에 없었고, 보다 좋은 녹음 퀄리티 등을 위해 일본에서 녹음하고 오는 일이 있을 정도로 한국 대중가요의 역량은 약했으며 일본인들을 위한 공연도 성행했다.[1]

물론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특유의 색채는 당연히 살아있기에 역으로 일본 문화계에서 한때 조선풍이 유행한 적이 있을 정도로, 나름의 색채가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도 싫건 좋건 간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대중의 취향부터가 일본풍을 익숙히 여기고 듣기 좋아했으며, 새로이 데뷔하는 신인들도 강점기 시절을 살거나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이 시기의 주요한 대중가수들이나 히트곡을 보면 일본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 일본과 조선의 국력이 비교가 안 됐는데 이 당시 조선, 혹은 해방 이후의 한국이 소위 말하는 스탠다드 팝이니 스윙, 재즈를 했다고 했을 때 일본은 안 했겠냐는 것이다. 20, 30년대 빅밴드 재즈나 스윙은 미국에서만 한 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고 당연히 동아시아에서 일본도 하고 중국도 했다. 이런 풍의 음악이 조선과 일본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제 와서 조사하긴 어렵지만 개연적으로는 몇몇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의 영향력이 없었다는, 다시 말해서 직수입이었을 거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하는 것이다.

60년대 전까지는 한국 경제 자체가 암울했다.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인해 한국 경제 역시 전혀 좋지 않았고, 이후 미군정도 그렇게 좋은 정치는 아니었으며 이양 이후에도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625까지 이어졌다. 위문공연도 많았고 전쟁을 소재로 한 노래가 많았다. 상술했듯이 엔카의 영향력이 강했고 그 다음으로는 민요의 영향력이 있었고, 서구 가요의 영향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지만 아무래도 광복 이전에도 그랬듯이 대중적 인기도 그렇고 작곡이나 연주 자체가 그동안 해오던 엔카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였다.

625가 끝난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경제도 회복되고 했지만 전반적으로 여러 가지 혼란과 경제난으로 인해 50년대 말이 되기 전까지는 광복 이전의 기조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현인, 남인수, 황금심, 백설희 등 광복 이전의 스타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625 당시 여러 위문공연으로 활약을 했고 후방에서도 쇼는 있었지만 이렇다할 변화는 50년대 말부터 찾아왔다. 이 시기 패티 김, 현미, 이미자, 최희준, 신중현 등 젊은 가수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고 대체적으로 미국풍을 많이들 좋아하였다.

특히 59년 최초로 민간 상업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종전까지의 일본형 악단, 극단 방식의 공연의 영향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물 먹은 PD들이 서구식 음악이 세련되고, 일본풍에서 벗어나며 궁극적으로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해 많이 밀어주었다.

2. 1960년대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긴 했지만 미군정이 들어선 이후에는 한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625 전쟁, 미군의 주둔 등으로 인해 한국은 미국의 영향력을 상당히 강하게 받기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나서 대중음악에서는 패티김, 현미, 윤복희, 신중현 등 미국 제8군 공연을 했던 이들이 대두한 것은 분명히 새로운 흐름이었다. 그때는 더더욱이나 음반 팔아서 생활이 말이 안 되기에 공연을 해야 하는데, 이 당시 공연을 하고 돈을 받기에는 한국인보다 미군 공연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기에 미 8군 무대가 좋았고, 질도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또한 59년 부산 MBC를 시작으로 60년대 초에 방송국들이 개국하기 시작하면서 대중가요에서도 더욱 세련됨을 추구하면서 본격적인 변화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소위 말하는 스탠더드 팝의 영향력이 강해지던 시기였다. 음향도 좋아지고 음반도 LP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되면서 용량도 커졌다.

그러나 이렇게 미국의 영향을 받고, 미군의 취향에 맞추는 가수들이 나름대로 잘 관리되고 양성되던 것과는 달리, 대중의 취향이 급변하지는 않았다. 특히 왜관 등 미군기지가 있던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지방에서는 더더욱 변화의 속도가 느렸다. 물론 그나마 음반의 구매력이라는 게 있는 게 도시 사람들이었고 TV, 공연도 지방보다는 대도시 위주였다. 하지만 결국 1960년대의 주요 히트곡과 히트가수들을 보면 몇몇 평론가들이 기를 쓰고 눈을 돌리는 것과는 달리 미 8군 출신의 가수들과 미국의 영향력은 하나의 새로운 조류가 나타나서 어느 정도 세력을 이루었다는 것이지 아직까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넘어섰다고 보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라디오는 지방에도 꽤 많이 보급되었는데 지방 사람들은 여전히 일본풍과 트로트를 좋아했다.[2]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 번,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 최희준의 하숙생,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 곽순옥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오기택의 고향무정,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 이상열의 못 잊어서 또 왔네,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 백야성의 잘 있거라 부산항, 나훈아의 천리길,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등 수많은 이시대 대표 가수들과 대표 히트곡들은 일본풍이거나 일본의 영향력이 배어 있는 곡들로, 대중들의 욕구는 명확하게 일본풍을 바라고 있었다.

조영남을 비롯한 번안곡, 현미의 밤안개, 패티 김의 가곡, 노란 샤쓰의 사나이, 신중현 사단의 노래 등도 분명히 커다란 히트곡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부터 대중음악이 미국과 미군의 영향력하에 재편되었느니 하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과장이다. 평론가들의 계보학에서 이런 당시 대중의 욕구나 인기가 무시되고 있는 것에 가깝다. 70년대까지도 당시 히트곡을 들어보면 평론가들의 계보학과 너무나도 다른 소위 토속적인 노래들이 계속 툭툭 튀어나온다.

실제로 60년대 가요대상을 보면, 물론 65년 66년부터 시작하긴 했지만 팝 계열이 대상을 먹은 것은 69년 mbc에서 신중현이 키운 펄 시스터즈 한 번뿐이다. 그리고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의 가요계는 트로트의 절대 우위에 디스코 등을 대표적으로 젊은이들이 놀기 좋은 그 시대별 나이트클럽 댄스 장르가 그 다음이다. 80년대 후반을 제외하고는 70, 80년대에서 서술되는 내용은 적당한 인기를 얻은 일종의 변화상 정도에 스타가 몇 있는 거지 장르적으로 실제 최고 인기는 아니었고 항상 트로트가 최고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트로트 장르 내에서의 변화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반면 민요의 기세는 60년대 즈음해서 마무리가 되는 편이다.

그리고 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으나 사실 북한과의 대립이 아직 첨예하던 시대상에 더불어, 60년대가 바로 검열이 활발히 시작되던 시기기도 하다.

3. 1970년대

60년대 말부터 나타나던 경향이었지만, 대한민국의 경제가 조금이나마 발전하면서 이때부터 20대 대학생들이 새로운 구매자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통기타, 청바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도래하여 대한민국 록 음악의 태동기를 비롯한 대중음악계의 대부 신중현의 대활약, 이장희 등을 위시한 북아메리카·유럽 음악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과 쎄시봉(C'est si bon)이라 불리는 공연장에서 활동하는 포크 뮤직 장르의 가수들, 그리고 대학교 락밴드 가수들이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르의 토대를 닦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서울 시내에서 이런 공연장과 더불어 히피 문화 등에 절어있는 젊은이들이 술 마시고 노래를 듣거나 공연할 수 있는 장소가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고 이런 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가수나 연주자로 많이 활동했다. 그 전까지는 전문 연주자들이 집단적으로 연주하고 공연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소규모의 대학생들이나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 좋아하는 스타일을 마음대로 연주하고 발표하곤 했다. 나름대로의 창작력이 좀 발휘되기 시작되는 부분이 있었다.

7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 등의 가요제가 큰 인기를 끌었다. 나름대로 전국적으로 퍼진 라디오나 텔레비전[3] 등을 통해 큰 인기를 끌며 등용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80년대 역시 70년대를 예비하는 듯한 흐름은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아직 개도국에 불과한 시절이라 청소년층의 구매력이 사실상 없었다. 락밴드 유행도 서울의 청년층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통기타, 청바지, 포크 등의 사변적이고 고급스런 상류층 청년문화가 성행했다. 이런 통기타 포크락은 사변적이거나 고급스러운 가사와 단출한 멜로디를 통해 듣는 것도 그렇고 기타 하나 사서 직접 치는 것도 그렇고 지방의 청년들에게도 쉽게 호응이 생길 수 있었다.

70년대의 중간인 75년에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인해 가요계는 많은 타격을 받았다. 많은 연주자와 작곡가, 가수들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 사람들도 많았고, 또 그들의 빈틈을 틈타 상술된 가요제 등을 통해 나름대로 새로운 신인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4. 1980년대

소위 말하는 전두환 시기다. 이 시기까지 아직 한국은 개도국이었지만, 3S 정책을 시행하던 전두환 체제와 더불어 그래도 70년대와 비교하면 꽤 올라온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중음악계에 상당한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다. 또한 TV 보급율이 좀 문제긴 하지만 80년부터 컬러TV가 시작되면서 보는 맛이 달라져 춤이나 비주얼 등의 비중이 상당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런 경제 발전이나 TV 보급율 등의 이슈로 인해 80년대는 초반과 후반의 분위기 차이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4]

8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추적인 변화 중 하나는 한국형 블루스라고 볼 수 있는 소위 한국형 발라드를 완성했다는 점에 있다. 이런 한국형 발라드의 틀을 완성한 두 인물로 이문세의 히트곡을 많이 작사/작곡한 이영훈과 가수 유재하가 거론되며 그들의 영향력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이때 국제적인 슈퍼스타인 마이클 잭슨부터 뉴 키즈 온 더 블록으로 이어지는 영미팝의 영향이 여전히 지대하게 존재하였으나 이 시기 이후 대한민국에서 대중음악계의 인기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외국 음악이 No.1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사실상 마지막이다.

록 음악을 기반으로 하거나 많이 섞어서 쓰던 조용필과 전영록 등을[5] 선두로 송골매, 부활, 시나위, 들국화, 백두산 같은 밴드들이 대한민국 록 음악 장르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다만 조용필이나 들국화, 송골매가 록 위주이면서도 1970년대 선배 뮤지션들의 영향으로 포크나 여타 장르의 성격을 띄기도 하는 다양한 형식의 밴드 음악을 했다면,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부활, 시나위, 백두산은 신대철, 김태원, 김도균등 소위 3대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던 이들이 만든 밴드로, 영국의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하드 록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부활은 웅장한 밴드사운드와 발라드를 접목, 시나위나 백두산은 직접 헤비메탈을 연주하며 한국 록 음악의 장르 분화도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 송골매를 제외하면 나머지 밴드들의 실제 대중적 인기는 도시권 젊은이들에게 조금 있었지 전체적으로는 그저 그런 편이었다.

또한 3저호황으로 더욱 발전한 경제에 힘입어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서 나이키 신발을 구입해서 신고, 가수들의 음반을 구입하고, 공연을 보러 다니는 10대가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함으로써 이들을 겨냥한 상품이 쏟아지고 1980년대 후반 댄스 음악이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이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고, 나아가 향후 한류로까지 발전하는 K-POP의 토대가 된다. 전영록, 김완선, 이선희 등 80년대 중반 당시의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던 가수들이 그 증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변진섭이 89년 발매한 2집으로 180만 장을 팔면서 그 이상으로 청소년 문화의 범람과 대두가 이미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음악적 변화에 있어서는 당시 한국 내부에서 흥행했거나 외국의 대세인데 왜 외국처럼 안 될까 하는 매니아들의 근심거리였던 발라드, 록이 주목받지만 디스코, 펑크 등 흑인음악적 요소도 조금씩 시작되고는 있었다.[6]

5. 1990년대

1980년대의 마지막과 90년대의 시작은 변진섭이나 김완선, 신해철, 이승환, 015B와 같은 80년대 후반으로부터 이어지는 젊은 가수들의 거대한 약진이 돋보였지만 한 편으로는 현철이나 주현미와 같은 트로트 가수들이 여전히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같은 공존을 깨트린 계기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이들이 데뷔한 1992년이 현대적인 케이팝(Modern K-pop)의 시작점으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7] 이 이전에도 손지창, 김완선, 안혜지, 김혜림서태지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던 또래의 아이돌 가수들이 있었고 92년까지만 해도 김민종, 김원준 등 서태지 이전과 비슷한 느낌의 아이돌 가수들이 속속 데뷔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흐름이 개편된 것이다.

나이트클럽 DJ나 이태원 문나이트 등에서 댄스를 추던 많은 사람들이 제작자 및 작곡가 그리고 가수 등으로 뛰쳐나온 시기가 되었다.[8] 당시 이른바 5대 작곡가로 불리던 김창환, 최준영, 주영훈, 윤일상, 김형석 중 김창환과 최준영이 대표적인 DJ 출신 작곡가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제작한 유대영 역시 유명한 DJ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아이들을 이루던 양현석이주노는 유명한 댄서였고, 현진영과 와와도 유명한 댄서 출신 가수였다. 무엇보다도 현진영의 경우 현재 K-POP의 한축을 이루고 있는 이수만이 이끄는 SM의 1호 가수였다는 점에서 서서히 현재 K-POP의 원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와와의 경우도 1~2기 모두 유명한 댄스가수인 클론듀스로 성장하였다.

이렇듯 댄스가요는 1990년대 초중반을 그야말로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6년 은퇴를 선언하고 그 이후 H.O.T.가 데뷔하고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면서 소속사에서 양성, 제작된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변화를 맞이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연습생 시기 소속사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서 데뷔한다. 즉 소속사의 입맞에 맞게 조련되고, 노래뿐만이 아니라 춤이나 예능, 외국어 등 여러 분야의 훈련을 받고, 또한 활동 역시 회사의 전문적인 계획 아래 운영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팬클럽이라는 구조도 본격적으로 회사에서 관리하는 체제로 들어갔다. 즉 팬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했고 이 체제는 2020년대를 지나는 현재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K-POP의 가수 생산 체제이기도 하다. 또한 소속사 내에서 주요 작곡가가 있어서 이른바 소속사 스타일이라는 게 처음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당시 이렇게 트레이닝을 받고 등장한 대표적인 보이그룹으로는 H.O.T., 젝스키스, 신화, god가 있었고, 걸그룹으로는 1997년 ~ 1998년 이후부터 등장하여 베이비복스, S.E.S., 핑클 등이었다. 이들을 이른바 1세대 아이돌이라 부른다. 이들은 199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누렸고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을 이어나갔다.

단지 이런 아이돌 그룹들이 등장할 초창기에는 가수들의 전문성이 상당히 올라왔던 시기고 아이돌 그룹들은 처음 시작할 때라서 시행착오가 많아서 생각보다 별로 혹독한 트레이닝도 거치지 않았고, 실력이나 전문성에서 아이돌 그룹들이 상대가 안 됐다. 많은 기존 가수들은 자기자신들의 노래를 직접 제작할 실력이 있기도 했고,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등도 주요 등용문이어서 이들 역시도 상당히 걸러져서 나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업소 등의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길게 활동하다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당시 부족한 시스템에서 나온 아이돌들은 음악적인 전문성에서 기존 가수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단지 젊음, 퍼포먼스, 외모, 팬관리 등으로 기존 가수들을 인기에서 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댄스, 아이돌, 소속사 등이 두각되면서 스타의 산실이던 가요제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가요제는 나름대로 창작력이 있는 가수들의 산실이었다. 성인, 대학생 등이 꽤 남는 여가시간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합주, 작사, 작곡, 편곡 등에 힘을 쏟다가 데뷔했다. 그러나 소속사에서 빨리 성공하고 싶은 어린 나이의 가수 지망생들을 빨아들이고, 그동안 가요제 인기 장르 중 하나였던 락과 포크의 인기가 내려가면서 가요제의 생명력은 거의 꺼지게 되었다.[9]

1990년대는 혼성그룹도 꾸준히 등장했다. 1994년 룰라, , 투투, 1996년 UP, 1998년 S#ARP, 코요태 등이 대표적이다. 솔로 가수도 상당한 강세였다. 여성 쪽에는 김창환이 댄스가수로 변신 시킨 박미경부터 시작해서 엄정화, 김현정, 백지영, 이정현까지 시대를 풍미하는 여성 솔로 댄스 가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남성쪽에서는 솔로 가수는 90년대 초중반 차트를 유린한 신승훈과 그의 뒤를 이어 압도적 판매량을 자랑한 조성모로 알 수 있듯이 최고의 빅스타는 발라드 가수였지만, 김건모[10], 박진영, 김성재, 유승준(現 유승준) 등 남성 솔로도 댄스 가수들이 대세를 주도하였다.

록 분야에선 시나위 출신 보컬로 솔로로 데뷔한 김종서와 '마왕' 신해철과 그가 이끌던 록밴드 N.EX.T가 90년대 초중반(1992 ~ 1997)에 히트했으며 90년대 중반에는 김정민, 후반에는 김경호가 큰 인기를 끌며 한국에서 락 발라드라고 불리우는 장르의 인기를 촉발했다.

한 편으로는 흑인음악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R&B의 경우 워낙 미국에서 잘 나갔기 때문에 한국형 발라드와 R&B를 결합한 가수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힙합의 경우 사실 당시 10대나 20대에서 하고 싶어하던 가수들이 많았던 것 치고는 대부분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몇몇 그룹이나 노래가 인기를 좀 끌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서 본토 맛을 낼 줄 아는 교포가수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고, 흑인음악과의 가벼운 결합이나 실험 정도는[11] 여기 언급된 가수들 중 조금이라도 길게 커리어를 가져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거의 다 하긴 했다고 보면 된다. 그것도 꽤 진지하게.

이처럼 1990년대에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10대 ~ 20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면서 대한민국 대중음악은 10대가 시장 전체를 장악하다시피하고 이런 현상은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1998년 한국영상음반협회(RIAK. 現 한국음반산업협회)측은 음반 시장에서 10대 취향(댄스, 랩, 힙합)이 차지하는 비율을 80% 이상으로 추정했다. 20대가 15%를 차지하고 나머지 연령층이 전체 5%를 가지고 나눠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10대의 음반시장은 2천8백24억 원에 이르렀다.[월간조선]

6. 2000년대

2002년을 끝으로 1세대 아이돌 그룹이 완전히 퇴장하고부터는 다른 식의 가수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여성 가수 쪽에서는 핑클, S.E.S., 베이비복스가 퇴장하고 난 뒤엔 어린 여성 솔로 가수들이 활발한 활동으로 인기를 얻었다. 특히 BoA의 경우 일본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가수였다. 또한 1990년대 후반부터 살아 남았던 혼성그룹인 코요태도 200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보냈다. 남성 아이돌 그룹에서도 H.O.T.젝스키스의 퇴장 이후 god가 전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에는 IMF의 영향으로 음반 판매량이 급감하기 시작하였는데, IMF 관리체제는 음반시장 규모를 축소시킨 한편 상대적으로 불법 음반시장을 키웠다. 호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주요 음반 소비계층이 正品(정품) CD(콤팩트 디스크) 대신 불법 카세트테이프와 CD 불법 복사본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월간조선] 또한 소리바다의 대두와 MP3의 등장으로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이 음반에서 음원 단위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는데, 사실 이전에도 해당 가수의 골수 팬이 아닌 이상, '타이틀 곡만을 위해 앨범 하나를 사는 것은 손해'라는 인식은 조금이나마 있어 왔다(소위 '길보드'라 불리는 복제 음반의 대부분이 당대 가수의 타이틀곡 내지 인기곡만을 모은 것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소리바다의 등장은 '돈 주고 노래 사면 손해'라는 인식을 가져왔고, 음원 중심으로의 변화는 이러한 인식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왕비호는 "어이, 동방신기 팬클럽 카시오페아. 회원이 80만 명인데 정작 앨범은 10만 장만 팔렸다며?"[14]라고 말했을 정도. 이 발언에는 '팬이라면 적어도 앨범 1장 정도는 사 주어야 한다'라는 전제가 숨어 있는데, 즉 '팬클럽은 80만 명인데 앨범은 왜 10만 장만 팔렸느냐'는 발언에는 '그럼 나머지 70만 명은 다운받았다는 소린데?'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장르 면에서는 대중들이 이른바 R&B 소울 위주의 발라드가 대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댄스 분야에서는 여성 솔로로 이효리, 남성 솔로로 가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명맥을 유지해나가던 시절이었다. 힙합의 경우도 사실 2000년대에도 90년대와 별로 다를 바는 없었다. 대중적 인기의 관점으로 본다면 1위를 한 몇몇 가수들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댄스 가수나 아이돌 가수들이 일종의 차용을 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원래 한국에서는 부유층 문화에 속하며 PC통신에서나 활발하던 힙합이 인터넷 상용화가 되면서 조금 더 대중화가 되고 언더힙합 시장이 만들어지는 정도의 변화는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으로는 J.ae의 '어제처럼', 애즈원의 원하고 원망하죠, 박정현의 꿈에, 박화요비의 lie 등이 있었고, 2001년 브라운 아이즈의 데뷔 이후 휘성 등 본격적인 남성 R&B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2004년 미디엄 템포 발라드를 주력으로 하는 SG워너비의 등장과 대히트 이후 수많은 가수들이 천편일률적으로 2000년대 중반 동안 소몰이창법만 써서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대중들이 지칠 무렵, 2000년대 후반부터 아이돌 그룹이 서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는 발성, 창법이 성대에 매우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시절에 소몰이창법을 사용했었던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박효신도 창법을 바꿨고, 심지어 대표주자였던 SG워너비조차 성대결절로 창법을 바꾸었다.

2000년대 초반에 1세대 아이돌들이 퇴장하고 중반에는 소몰이창법이 크게 유행을 탄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돌 그룹의 명맥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 1990년대에 결성된 혼성그룹들은 2000년대에 와서도 어느 정도 인기를 유지했으나, 신규 결성 그룹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2000년대에 결성된 혼성그룹은 2001년 거북이, 2006년 타이푼, 2007년 써니힐, 2009년 어반자카파 등이 전부였었고 이들은 나름대로의 색깔로 인기를 끌었으나 높은 인기를 오랫동안 지속하지는 못했었고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이후 1세대 아이돌의 맥이 거의 끊긴 뒤 2000년대 초반은 댄스를 추는 아이돌, 특히 걸그룹은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2세대 아이돌의 원형이 되는 동방신기가 큰 팬덤을 형성하며 인기를 끌었던 거 외에 이후 SS501, 슈퍼주니어 등이 활동하긴 했으나 대중들에게 크게 인정받는 상황은 아니었고, 걸그룹의 경우에는 쥬얼리 정도만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인기 있던 걸그룹이었던 씨야는 소몰이 그룹에 가까웠다.

그러다 2007년 YG와 JYP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남녀 아이돌 빅뱅원더걸스가 각각 거짓말, Tell Me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2008년 역시 히트곡들을 내며 최고의 인기를 이어갔고, 2009년 이후에는 소녀시대Gee소원을 말해봐로 뮤직뱅크와 각종 차트에서 1위를 하여 그때까지 대세였던 R&B 발라드 열풍을 완전히 끝내고, 다시금 가요계에 댄스 음악들을 불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해부터 슈퍼주니어 Sorry, Sorry, 2NE1의 I DON'T CARE, 카라의 미스터 등을 시작으로 하는 걸그룹 열풍과 아이돌 그룹들이 대규모로 등장하여 K-POP의 현재를 이루어 나가는 시기로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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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10년대

원더걸스로부터 시작된 아이돌 흐름이 사실상 201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2009년 시작되어 2016년까지 지속된 슈퍼스타K를 비롯한 여러 오디션 프로, 나는 가수다로 대표되는 경연 프로그램, 각종 음악예능 등이 아이돌 음악에 흥미가 없는 성인 대중들의 욕구에 부합하였다. 나가수나 슈스케는 워낙 열풍이었고 이런 프로가 워낙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와 아이돌 음악에 흥미는 없지만 가볍게 듣는 대중들을 만족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오디션 프로 출신 가수들의 인기는 대부분 반짝인기에 그쳤다.

여성 솔로 쪽에서는 아이유가 10년이 넘게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으며, 아이돌 시장은 이른바 해외 진출 특히 카라소녀시대의 일본 진출 성공 이후에는 대부분 일본으로 진출이 일상화가 되면서 국내 활동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여성 아이돌 그룹들은 소녀시대를 필두로 2NE1, 카라, 티아라, 씨스타, 걸스데이, 에이핑크, AOA, EXID 등을 중심으로 대중들에게서 상당한 강세를 꾸준히 보여오면서 인기를 모았다. 후배 아이돌 뿐 아니라 장르를 막론 많은 가수들에게 영향을 끼친 2세대의 상징적인 그룹 빅뱅은 멤버들이 한 명씩 군입대를 하게 되고 팬덤형 그룹인 EXO인피니트, 방탄소년단 등이 3세대 남성 아이돌 대표로 전면 부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바톤터치를 하며 세대교체가 되었다.

이른바 2세대 아이돌 전성기는 BIGBANG이 MADE 프로젝트로 잘 나갔떤 2015년이 사실상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3세대 아이돌 시장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2016년 여자친구, TWICE, 마마무, BLACKPINK, Red Velvet을 중심으로 3세대 걸그룹들이 위용을 떨치거나 성장하는 시기였고, 이 후에 보이그룹은 방탄소년단이, 걸그룹은 BLACKPINK가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음악이 전 세계 대중음악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특히나 2010년대 중반에는 Wanna One, IZ*ONE을 비롯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하여 거기서 파생한 프로젝트 그룹이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물론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상당수가 조작임이 밝혀지면서 그 이후에는 그 열풍이 대중적인 측면에서는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기획사들이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이용할 정도이고 이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2010년 중후반부터 유튜브를 활용한 북미, 아시아, 유럽 등 해외 진출이 매우 활발해져 K-POP의 글로벌 성장이 이전에 비해 폭발적으로 확대 되었고 방탄소년단, BLACKPINK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K-POP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는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초창기 유튜브 열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싸이에게도 이득이었지만 케이팝의 세계 무대 진출에도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튜브 활용이라는 좋은 예시를 케이팝에 제시해 주었다.

여전히 양산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이돌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때부터 서서히 아이돌 개인이나 그룹이 장르별 다각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아이돌로서의 가창력, 퍼포먼스 등 역량에 대한 시청자와 팬들의 기대치가 점차 상향되면서 수많은 아이돌 중에도 정말 실력 있는 소수만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2010년대 후반부에 접어들며 음원차트 사재기 논란에 휩싸이는 문제도 있었다.

쇼미더머니의 성공으로 한국 힙합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단 여전히 일반 대중가요에 비교해 보면 그렇게까지 큰 파이는 아니었다. 10대 20대 사이에서의 화제성은 나름대로 있긴 했으나.

2010년대 마지막은 트로트 장르가 장식했는데 장윤정, 박현빈, 홍진영 등을 위시한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10여 년간 중심을 잡고 활동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들이 이른바 브라운관을 장악하는 정도의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트로트도 당시 유행하였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차용하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붐이 일기 시작했다. 40대 이상의 연령층들이 트로트라는 장르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점이라 볼 수 있겠다. 물론 트로트도 40대 이상 말고는 잘 안 보는 연령층의 제한과 트로트 프로그램 자체보다는 특정 트로트 가수 등에 치중된 인기로 인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8. 2020년대

2020년대는 여전히 4대 기획사 중심의 댄스형 K-POP발라드, 트로트, , 오디션 노래 등이 가요계를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15] 음악적으로는 점점 장르의 파괴와 혼종들의 탄생, 즉 변화의 시기가 다가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음악적인 특성으로는 BPM의 자유로운 변화, 마디별로 진행되는 급격한 장단조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노래가 등장했다. 화성을 벗어나는 멜로디의 등장 역시 잦아진 편이다. 영미권 대중음악 종사자들에게 2020년대의 K-POP(특히 아이돌 음악) 노래들은 2000~2010년대에 영미권에서 유행했던, 리듬보다는 높은 톤의 멜로디가 축이 되는 댄스음악들의 여러 요소를 연상시킨다. 전체적으로 음악이 전위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2020년 들어서 세계적 인지도와 인기를 자랑하는 방탄소년단BLACKPINK는 각각 빌보드, 국내외 음원, 음반, 유튜브 등에서 이전보다 진화한 성과로 역사에 한 페이지를 쓰면서 위상과 아성을 다지며 K-POP을 양분했다. 특히 방탄소년단은 영어 싱글 Dynamite로 한국인 최초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한편 여자친구, 러블리즈 등 중소 기획사들의 아이돌들이 7년차 징크스로 인해 활동을 종료하게 됐다.

이전까지 빛을 못 보던 걸그룹들, 예를 들어 오마이걸 같은 경우 2019년 퀸덤에서의 우수한 성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뒤 마침내 2020년 살짝 설렜어라는 곡으로 데뷔 이래 최초로 멜론 실시간 차트 1위와 음악방송 8관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으며 브레이브걸스 또한 2021년 초 위문공연 댓글 모음 영상이 알고리즘을 타기 시작하면서 롤린이라는 곡이 역주행을 해 며칠 전까지 해체 논의가 오가던 그룹이 순식간에 전국민이 아는 그룹이 되기도 했다.

2021년은 신예 걸그룹들의 활약이 두각을 나타낸 한 해였다. 에스파는 두 번의 컴백 모두 음원 차트에서 정상을 맛보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고, STAYCIVE도 합세해 그 기세를 이어갔으며 이들은 한국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보이그룹은 여전히 대중성 있는 그룹의 부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평균적으로 파이가 커진 아이돌 음반시장에서 NCT, 세븐틴, ATEEZ 등의 기존 그룹들과 더보이즈, ENHYPEN, 투모로우바이투게더로 대표되는 신진 그룹의 음반판매량이 동반 상승하여 팬덤형 보이그룹들이 득세하는 모양새가 형성이 됐다.

2022년은 기존 걸그룹들의 건재와 동시에 신인 걸그룹들의 엄청난 활약으로 걸그룹이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수진학교폭력 가해 논란으로 부침을 겪었던 (여자)아이들은 멤버 재편 이후 절치부심하여 발매한 TOMBOY가 음원 차트에서 데뷔 이래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정상에 올랐다. 9년차 걸그룹 Red Velvet도 클래식 샘플링 열풍을 일으켰고 비슷한 시기 IVE는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4세대 대표 걸그룹중 하나로 떠올랐다.ITZY는 그동안의 침체기를 이겨내고 다시 한 번 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다. 반면 2021년 눈부신 활약을 했던 aespa는 걸그룹 최초 음반 초동 판매량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 이 해 데뷔한 Kep1er, NMIXX, LE SSERAFIM 순서대로 걸그룹 데뷔 음반 초동 판매량을 갱신하였고, 이 중 LE SSERAFIM은 멤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음원 성적을 거두었다. 2세대 대표 걸그룹 소녀시대는 5년 만에 정규 7집 FOREVER 1으로 컴백하여 멜론에서 TOP100과 주간차트에서 상위권(5위)을 차지했고, 음반 초동 판매량 18만장으로 자체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며 2세대 걸그룹 최초로 음반 초동 판매량 10만장을 돌파하게 되었다.

2세대 대표 보이그룹 BIGBANG은 4년 만에 컴백하여 다시 한 번 놀라운 대중파워로 음원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해 화제를 일으켰고, 4세대 보이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ENHYPEN은 한층 더 두터워진 화력으로 음반 초동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 Stray Kids, NCT DREAM, 세븐틴도 전년도에 비해 음반 판매량이 증가하는 등 전반적으로 음반 시장과 팬덤에 집중된 모양새가 더 강화되었다. TWICE의 첫 솔로 주자인 나연선미, 태연 등 솔로 가수들의 활약도 이어졌다.

한편 방탄소년단앤솔러지 앨범 Proof를 발매하고 군 문제 등으로 당분간 개인활동을 중심으로 팀 잠정 휴식기를 예고했고, 데뷔 이전부터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아 기대를 모았던 NewJeans는 데뷔곡으로 멜론 TOP100과 일간 차트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수록곡들도 차트에 줄세우기를 하며 IVE와 함께 괴물 신인의 면모를 보여줬다. 또한 세계 최고의 걸그룹이라 일컫는 BLACKPINK가 무려 2년여만에 컴백해 또 다시 유튜브 조회수, 전세계 음원 차트 기록을 자체 경신하며 케이팝 퀸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몇몇 평론가들 사이에선 해외 팬과 여성 팬 겨냥으로 인해 획일화된 컨셉, 음악의 폭 확대 등으로 아이돌 음악이 해외에서는 인기가 많아지는 반면 국내에서는 점차 대중성을 잃어간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보이그룹의 경우 2010년대 초부터 일찌감치 여성 팬만을 공략하기 시작해 남성들이 보이 그룹 노래를 거의 듣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으며[16], 걸그룹 역시 2010년대 말 이후 점차 시장 자체를 키울 수 있는 해외 팬과 구매력이 높은 여성 팬의 취향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걸크러시 콘셉트로 획일화되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섹시 콘셉트는 2010년대 초중반에 이미 주류에서 밀려난 지 오래이며[17], 청순 콘셉트 역시 2010년대 후반 이후 거의 사장되고 말았다. 반면에 해외 팬을 겨냥한 홍보 방식은 2020년대 초반까지 상당히 유효하다. 여러 차례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그룹들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걸그룹 분야에서도 국내 남성 팬의 숫자 자체가 비교적 줄어든 상태이며,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걸그룹에 대한 언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18] 그나마 2022년부터 주목받는 신예 걸그룹들이 일부 등장하면서 특히 IVE, NewJeans가 기존의 걸크러쉬와는 차별화된 독보적이고 신선한 콘셉트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고 높은 성적을 거두는 모습을 보여줬다.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으로 위기였던 aespa도 새 앨범을 히트하고 성공적인 복귀를 했다. 호황의 2022년이지만 걸그룹 3~3.5세대로 활약했던 몇몇 멤버의 재데뷔로 인해 4세대로 묶이기도 하는 등 아직도 세대구분의 아이러니함은 존재한다.[19] 만약, 4세대로 활약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들이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를 아예 넘어서지 못한 채로 상당히 아쉬운 성적표를 들고 전성기에서 내려온다면 이들 역시 후에 다른 세대에게 바톤을 넘기고 같이 3세대(혹은 '3세대 이후')로 묶일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그것과 상관 없이, 대중문화예술인 표준계약서의 최대 계약 가능 기간인 '7년' 단위로 세대가 바뀌는 것이 통용될 가능성도 있다.[20]

23년 정국의 Seven, 세븐틴의 파이팅해야지, 손오공, NCT DREAM의 Candy,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Sugar rush ride 등이 히트쳤지만 걸그룹보단 히트곡이 현저히 적은데, 5월 하이브에서 데뷔한 보이그룹 BOYNEXTDOOR, 9월 SM에서 데뷔하는 7인조 보이그룹 RIIZE 등의 성공 여부로 남자아이돌 열풍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해 볼 수 있다.


[1] 애초에 한국 최초의 공연용 극장부터가 서울이 아니라 인천에서 일본인 대상으로 세워진 극장이다. 그리고 그 시절 기도라고 부르던 것을 아직까지도 경호원을 기도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절 문화계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2] 다만 50~60시기는 한국의 경제력에 비해 워낙 미8군에서 뿌려주는 돈이 막대했고 언론 문화 등도 이런 서구풍을 추종하는 인물들이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뭐가 대세였는지는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3] 이건 동네에 적으면 한 개 있는 수준이었지만[4] 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TV 보급율이 늘어나면서 위력은 커지지만 채널이 부족했다. 가요프로는 30%를 넘는 시청률을 자랑했고 각종 가요제는 전성기의 나가수 정도 되는 화제성이 있었다.[5] 조용필의 경우 록과 트로트가 많이 섞였다고 해야 하겠지만.[6] 본격적인 흑인음악은 78년 사랑과 평화 1집이 시작이지만 80년대 조금씩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문나이트를 비롯한 춤꾼들도 이미 이 때부터 춤을 추고 있었고, 흑인음악 댄스로 최초로 1위를 한 나미와 붐붐의 인디언 인형처럼도 89년 곡이다.[7]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초의 아이돌도 아니었고, 아이돌문화나 팬문화 같은 것도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부터 등장은 하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아이돌은 아무래도 소방차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팬 문화 같은 것도 이선희, 박남정, 김완선, 변진섭, 소방차, 이상은 등이 80년대 중반부터 이미 팬보이 팬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다녔고 이들 사이에 다툼도 벌어지는 등 그 원형은 이미 있었다. 팬 문화나 아이돌 문화 등이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급격하게 달랐던 것은 맞다.[8] 문나이트가 대표적으로 많이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강남 강북 여기저기에서 춤추던 사람들이 많이 뛰어나왔다. 다 이태원 근처에 댄스 매니아들이 살았던 것도 아니고 집과 먼 사람들은 어쩌다 한 번 가지 매번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9] 유재하 가요제 등 아티스트 지망생들의 루트는 있었다.[10] 다만 김건모는 댄스가수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가진 아티스트이다.[11] 디스코나 펑크가 아니라 R&B나 힙합.[월간조선] 월간조선 2000년 3월호, <10대의 구매력 앞에 무릎 꿇은 대중문화 시장의 내막>[월간조선] [14] 실제 주문-MIROTIC의 앨범판매량은 100만 장 이상이였다. 왕비호는 추후에 정정하고 사과함. 참고로 10만 장은 개콘 녹화 당시의 수치이며, 선주문 분량 30만 장은 제외되었다.[15] 하나 트로트 문서의 2021년 문단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트로트는 2020년대 각종 트로트 프로그램의 양산과 급격한 매너리즘으로 인해 다시 암흑기를 맞이하고 말았다.[16] 이로 인해 국내에서 보이그룹에 남성 팬이 있으면 동성애자라고 놀림받는 일이 생겼다.[17] 그나마 4세대에서 (여자)아이들, 르세라핌 처럼 걸크러쉬 및 해당 그룹만의 차별화된 컨셉과 섹시 컨셉을 적절히 섞어 병행하는 스타일만 살아남은 수준이다.[18] 2020년대 시점에서 1020 남성의 절대다수는 BewhY창모 등으로 대표되는 힙합이나 임재현이나 닐로 등으로 대표되는 발라드 같은 비아이돌 분야의 음악에 좀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음악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더 넓게 보면, 한국 연예계의 관심을 점차 끊고 그 빈자리를 인터넷 방송, 게임, 버추얼 유튜버 등으로 채우고 있다.[19] 다만 2022년 이후 새로 데뷔한 그룹은 KPOP 팬들 사이에서 거의 무조건 4세대로 불리는 추세다.[20] 이 경우, 연도를 세는 단위로만 세대라는 단어가 사용되므로 세대교체의 의미가 사실상 거의 퇴색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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