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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아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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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숫자3. 등장 배경4. 주 계층5. 사례
5.1. 한국의 히키아게샤5.2. 중국의 히키아게샤5.3. 대만의 히키아게샤5.4. 홍콩의 히키아게샤5.5. 러시아의 히키아게샤5.6. 남양 군도의 히키아게샤5.7. 동남아시아의 히키아게샤5.8. 혼혈 히키아게샤5.9. 류큐인 히키아게샤5.10. 조선계 히키아게샤5.11. 중국계 히키아게샤5.12. 대만계 히키아게샤
6. 일본으로 돌아간 히키아게샤7. 어록8. 기타9. 실존 인물
9.1. 한국 출신
9.1.1. 후지이 히데토
9.2. 중국 출신9.3. 동남아시아 출신9.4. 러시아 출신9.5. 구 남양 군도 출신
10. 가상 인물 및 관련 작품11. 비슷한 경우12. 번외13. 관련 문서

1. 개요

1946년, 미군정기 조선에서 추방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담은 브리티시 파테 뉴스.
일본인들을 실어 옮기는 서울의 노면전차, 부산잔교역 근처에서 DDT 방역을 받는 모습, 그리고 최소한의 짐만 싸들고 고베행 배에 타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담겼다.
트루만, 조선내 일본인의 시급 송환(送還)을 언명
트루만(Harry S. Truman) 미대통령은 12日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 있는 일본인은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일본본토에 보낼 예정인데 이것은 될 수 있는대로 곧 실행될 것이다.
- 매일신보 1945년 09월 14일
하지 일본인송환방침 언명
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무장해제된 일본군인과 기타 일본인의 수송에 관하여 28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매일 평균 4,000명의 무장해제된 일본군인을 부산항으로부터 일본으로 수송할 계획이 완성되었다. 수송되는 무장해제군인은 정기선으로 이재민수용항으로 향할 터인데 그들은 개인소지품과 10일간 소요식량 及[1] 의료품 이외에는 휴대를 금한다. 물론 무기의 휴대는 불허하고 解隊에 필요한 書類等屬을 허락한다.

하지중장은 부산에서 출발하는 이재민의 수가 감소되고 있다고 말한다. 부산으로부터의 穀物資輸出은 지금부터 정지시키고 사람과 그들의 개인소지품의 수출만을 허락하기로 한다.”
- 매일신보 1945년 09월 28일
일본민간인 본국송환 시작
일본인의 철거문제는 3천만의 큰 관심사인 바 드디어 이들 일반 일본인의 송환은 10月 10日부터 개시되었다. 즉 3천명의 일본인을 태운 열차는 10日 경성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돌아 가는데 이 열차는 부산에서 돌아 올 때에는 일본에서 귀국한 3천명의 동포가 돌아 오게 된 것이다. 특히 朝鮮救恤同盟에서는 各般의 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군정당국도 동심원조하고 있다.
- 매일신보 1945년 10월 10일
군정청, 일본인송환의 순서 지시
군정청 지시에 의하여 조선에 있는 일본인은 계속 귀환을 시키고 있으며 현재 대기 중에 있는 사람은 약 40만 가량이다. 이들을 돌려보내는 순서는 먼저 신조선의 질서를 위하여 해독을 끼칠 염려가 있는 자, 그 다음으로는 새 경제수립에 불필요한 자이며 이와 반대로 조선의 공업을 위하여 필요한 기술자는 직장에 머물러 있게 하는 한편 조선인기술자를 다량으로 급속 양성하여 장차는 전부 조선사람의 손으로 공업계를 운영하도록 목표를 세우고 있다.
- 매일신보 1945년 10월 24일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일본인의 조선입국 금지 발표
[동경16일발공립]일본인이 조선에 가는 것은 이번에 전면적으로 금지되기로 되었다. 즉 연합국군총사령부는 15일 다음과 같은 지시가 있었다. “조선의 미국군정부로 부터 동경연합국군사령부에 초치하도록 요구해 온 이외의 일본인은 조선에 건너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일본정부는 일본인으로부터 제출된 도조선(渡朝鮮)[2] 신청서를 연합군국총사령부에 제출할 것을 금지하였다.”
- 조선일보 1946년 01월 18일
군정장관, 재조선일본인에 총철퇴령
18일 현재로 조선에서 철퇴한 일본인 총수는 47만 5,017명이고 귀국한 우리 동포는 총수 87만 848명이다. 그런데 러취군정장관은 22일부터 아직도 조선에 남아있는 일인을 다시 엄밀히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리었는데 반드시 조선에 남아 있어서 조선건국에 필요한 기여를 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만은 제외하고 그밖에는 전부 철퇴하도록 명령을 내리었다.
- 서울신문 1946년 01월 23일

히키아게샤([ruby(引揚者, ruby=ひきあげしゃ)])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만주, 대만 등에서 거주했다가 귀국일본인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들 중의 일부분은 해당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이다.

한국 한자음은 인양자인데 한국어에서 인양이라는 표현은 침몰한 배 등을 끌어올릴 때로 한정해서 쓰는 말이다.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귀향자, 귀국자이고 직설적으로 번역하자면 (몸을) 빼 낸 사람 정도가 된다. 관동군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일본인들은 히키아게샤에 포함되지 않고 재향군인으로 따로 분류되는데 정작 상당수가 일본군이 해체되는 바람에 민간인 자격으로 귀국했고 심지어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지 않으려고 민간인 행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한 일본인 남성이 현지의 일본계 이주민 여성이나 비일본인(주로 식민지 토착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가 일본 제국 패망 후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간 경우는 아버지와 달리 히키아게샤로 분류되며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이들 중에서도 출신지가 일본 본토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식민지나 괴뢰국 등이었던 경우 히키아게샤로 분류된다.

2. 숫자

일본메이지 유신 이래 대만, 조선, 만주, 남양군도식민지로 만들며 팽창해나갔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 중국을 넘어뜨리고 최강국이 되었고,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곳곳에 철도도 깔렸으며, 초등학교 의무교육화가 시행되어 문맹률도 획기적으로 떨어지는 등의 근대화가 진행되어 경제규모는 팽창하였지만, 실상 그 내실은 낙후되었다. 우선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농토는 여전히 여전히 소수의 부유층들이 독식한 상태로 농민의 다수는 여전히 빈곤한 소작농으로 남아있었으며, 예방접종의 시행과 마비키 근절의 영향으로 영아사망률이 줄어들면서 인구가 매년 급속히 증가하여 인구과밀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여, 도쿄, 교토, 오사카, 나고야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와 그 근교지역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상경민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주거환경을 감수해야 되는 등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이런 사회적 여건속에서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인생역전을 할 기회를 찾아 식민지로 이민을 갔고, 이들은 토지를 배분받거나, 기업을 차릴 때 특혜를 누리고, 인프라 사업에서 일본인 주거지역이 우선순위에 놓이는 등 식민지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으며, 대체로 일본 본토에 있을 때보다 높은 삶의 질과 풍요를 누렸다. 이렇게 넘어간 해외 체류 일본인들의 수는 일본제국 패전 당시에만 230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것도 군인을 제외한 수치다. 패전 당시 일본이 주권을 상실하는 지역 기준으로 만주국을 비롯한 중국 본토에 약 110만 명, 한반도에 약 70만 명[3], 남사할린에 약 38만 명, 대만에 약 32만 명, 쿠릴 열도에 약 2만 명 정도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참고로 당시 일본 본토의 인구가 1945년 즈음 약 7,000만 명 정도였다.[4]

3. 등장 배경

당연하지만 점령당한 지역의 백성들은 이미 오랫동안 전 군주에게 복종하는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교육된 만큼 점령자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위험성이 있는 인물들은 모조리 제거하고 점령자의 백성들을 이주시켜서 정착시키는 식으로 점령지의 충성심을 확보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더욱 '우리끼리'를 강요하는 사고관이 정착했다. 일제는 이것을 자국만이 아닌 해외의 식민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예컨대 한반도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은 연좌제를 적용하여 주변인들까지 가혹하게 처형하는 반면 자국민들을 한반도에 이주시켜서 협조자들을 늘리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렇게 많은 수의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다른 식민지들도 동일했다. 이 과정에서 현지인들은 목숨이나 물자, 땅을 빼앗기는 등 반드시 피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현지인들의 일제를 향한 감정은 긍정적인 게 아니라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일본 제국이 식민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정책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사점령 이후에도 식민지와 본토의 통치에 대한 개념, 질서 정리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기본적인 국적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에는 국적법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1945년 일본이 연합군패배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불법점거자가 되어 버렸다. 결국 거주 권한도 소멸하고 현지인의 적대감도 이길 수 없으니, 그동안 폭력으로 개척하고 점령한 식민지였던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이 바로 히키아게샤다.

4. 주 계층

이들은 본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식민지로 넘어온 사람들 또는 당시 제국주의에 협조하던 일본 대기업들의 회사원이나 그 가족들로 구성되었고 군인의 가족으로 넘어온 일본인들도 많았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에서 언급되는 부관연락선[5]에 탑승한 일본인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반도에는 1910년대까지는 거의 상인들과 주재원[6]의 가족 위주였으나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반 농민, 노동자와 식솔들도 많이 넘어왔다. 특히 일본의 만주 침공이 가속화되면서 식민지 정착이 일종의 붐이 될 정도였는데 일제가 정착민들에게 땅을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본토의 농지개혁은 친지주적으로, 농민들은 GHQ가 올 때까지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남아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대조적이었고, 식민지로 넘어온 일본인들은 1945년 기준으로 3%에 불과한 인구비율로 조선 전체 자산의 83%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삶의 질과 지위를 누렸다.
"자네가 가겠다면 나도 가겠네. 흔들리는 일본에선 그만 살겠네..."
사회파 SF소설가로 유명한 고마츠 사쿄일본침몰에 인용된, 1930년대 당시 구전 유행가.
이들 중 초기에 넘어온 일부는 조선에서 큰 상인이나 지주가 되어 소득을 누렸지만 1930년대 이후에 넘어간 계층은 그렇지 못했다. 식민지도 이미 선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끼리 경쟁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들은 소상공인 등이 되어 일본인이 많은 도시에 거주했다.

5. 사례

5.1. 한국의 히키아게샤

한국(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의 땅이나 거주지(적산가옥)나 재산(적산) 등은 전부 몰수되어 신한공사 등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고 적산을 증여받은 몇몇 기업인들이 이를 토대로 기업을 일구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50~60년대 일본에서는 이 때 몰수된 재산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발언도 있었다.[7] 반대로 한국에서는 일제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를 일본으로부터 보상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의견 대립이 있었으나 1965년 이런 것을 다 퉁치기로 하고 한일기본조약을 맺었다. 어차피 일제강점기 시절에 불법으로 빼앗은 재산일 뿐이었으니 돌려받을 명분도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일본인들이 급하게 떠나느라 남겼지만 재산이 되지 못할만한 것들은 그냥 방치되거나 6.25 전쟁통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예컨대 부산광역시아미동 비석마을은 바로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 위에 6.25 피란민들이 일본인들의 비석을 마을 계단, 건물 부재 등으로 사용하여 지은 판자촌으로,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쇼와 몇 년에 누가 죽었다 같은 일본어가 쓰인 비석이 계단으로 쓰이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8]

히키아게샤들은 당연히 일본으로 귀환해야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1945년 일본 정부는 항복하여 실질적으로 GHQ의 하부 기관에 불과했기 때문에 히키아게샤들의 귀환에서 일본 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9]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자력으로 일본으로 복귀해야 했다. 히키아게샤들은 지역마다 세와카이(世話會)라는 민간조직을 스스로 만들어 지역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수속절차를 도왔다.

그나마 미군이 제공하는 송환선에 타면 미군이 귀환과정을 안전하게 지켜줬지만 미군 송환선 탑승 시에는 현금을 1,000엔 이상 소지할 수 없었고 수하물 무게도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챙기고자 밀선을 타고 귀환하는 사람이 많았다.[10]


특히 원래 북한에 거주하던 이들이나 중국·만주에서 피난하다가 38선을 넘지 못하고 북한에서 발이 묶인 히키아게샤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미군정 아래에서 안전히 철수한 남한 지역[11]과는 달리 이들은 소련군정의 송환이 지연되고 소련군의 만행과 지역 주민의 보복에 시달리면서 집단거주지에서 영양실조, 감염병 등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력으로 38선을 넘어 탈출한 이들 가운데서도 귀환 과정의 굶주림, 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한편 38선 이남에 체류했던 히키아게샤들은 거의 대부분 무사히 철수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와중에 겪은 일들을 감안하면 이들이 집결한 곳이 부산 용두산공원 등 치안력이 유지되는 도시나 행정 소재지였기에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태평양 전쟁 말미에 패전이 가까워 보이자 건국연맹 등과 조선총독부의 밀교섭으로 다수의 일본군과 히키아게샤가 안전히 철수할 수 있었다.[12] 시골에서는 히키아게샤의 대다수가 지주와 그 하수인들이었기 때문에 보복 행위가 있었다고 하며 특히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지방의 보복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도 많았고 아예 일본인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이루고 본적을 한국으로 둔 사람들도 있었는데 패전 후 철수하면서 그 마을은 사라졌고 그들의 본적은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13] 도 한국에서 방송된 적이 있으며 그 마을 출신자들도 고령이지만 아직 일본에 있는데 마을 이름은 불이촌(不二村)으로 일본어 독음으로는 후지촌이었다고 한다.

인터뷰에 출연한 그 마을 출신 노인에 따르면 자신들은 그 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으로 강제로 귀국할 때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긴 마음이었고 억울한 생각도 있었지만 후에 자신들의 고향인 그 마을 또한 조선인에게 부당하게 빼앗은 땅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침탈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동창회가 열리면 일본에서부터 한국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역사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교들을 보면 동창회 관련해서 가끔 목격담이 나오기도 하고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본관 건물을 새로 짓기로 하자 웬 양복 입은 구부정한 할아버지들이 찾아와서 쳐다보니 일본인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인 졸업생들이 귀국 당시라며 보여준 사진을 보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마산고등학교의 사례다.

물론 일본 본국으로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 남아서 살아가던 히키아게샤도 소수 있다. 실제로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깡통시장[14]에는 "일본영감"이라는 히키아게샤가 1970년대까지 생존하고 있었다고 한다.[15] 핏줄이나 본래 국적은 일본이지만 태어난 곳도 조선의 마산이고 일본에 연고도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라서 그냥 그대로 눌러앉았다고 한다. 196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 외교관의 수기에 따르면 한일수교한국인과 결혼했다가 사별한 일본인 여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 주한일본대사관에서는 그런 여성들을 찾아내서 귀국시키곤 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오히려 일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 마을에서 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재한일본인 처들이 결성한 모임이 바로 부용회(芙蓉會)이다. 한때는 이 모임의 사람들이 약 4,000~5,000명에 달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90대 노인들만 남아 있으며 대부분이 경주시의 나자레원에서 돌봄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재한일본인 항목과 링크 참조.

특히 조선(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히키아게샤 자녀들은 한국인 입장에서 복잡미묘한 주제다. 정작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선에서 왔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갖은 무시와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교사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와 경주를 오가면서 자라다 17살에 일본으로 귀국한 일본인 작가 모리사키 가즈에는 저서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서 밝히길 자신이 노인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지만 아직도 자신을 키워준 조선인 유모들과 대구의 풍경을 잊지 못하고 평생 실향민[16]이라는 마음으로 살았고 자신의 남동생은 일본으로 이주한 후 낯선 일본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했다고 하였다. #1 #2

1983년 KBS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도 해방 후에도 조선에 남아 고생하며 살아온 삼남매#가 등장하였는데 여동생이 중간에 "일본인이라고 쫓겨다니면서 굴에서 피신했다"는 얘기를 했음에도 MC들은 "일본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을 정도로 아픈 과거의 산 증인이다."라고 해설했다. 사실 이 방송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가족을 찾던 출연자들의 상당수가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환한 한국인들이었다 보니 MC는 일본인의 후손이 아직도 조선에 남아 살고 있으리라 짐작조차 못해서 여동생의 발언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다만 외삼촌이 대한민국 국군 중령이었다고 언급했으므로 어머니는 재일교포가 아니라 한국에서 살던 한국인임이 확실하고 아버지가 일본인인 한일혼혈로 추측된다.[17]

그런 인식이 이들의 문학이나 미디어에서도 드러나고 있어서 동정심이 들기는 하지만 이들이 식민지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식민자(colonizer)들임을 고려하면 마냥 동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들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조선을 떠나며》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연식은 이후 학술대회에서 재조일본인은 '조선반도는 원래 일본 땅'인 줄 알고 있는 등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식민통치로 착취하여 콩고물이나 얻어먹고 살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히키아게샤 귀환담의 수용이 피해자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패전 후 자신들이 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히키아게샤들이 이러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기사1, 기사2, 기사3, 기사4)

남한 출신 히키아게샤들은 한일수교를 기점으로 일부가 남한에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던 반면 일본과 미수교 지역이자 대한민국 입장에서 미수복 영토인 북한 출신 히키아게샤들은 북일수교가 되기 전까지는 조총련을 통한 납북 등 극소수 케이스를 제외하면 사실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5.2. 중국의 히키아게샤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일본은 해외 공관에 "현지에 남은 자국민을 가급적 잔류시키라"는 훈령을 보냈는데 660만 명의 해외 거주 일본인이 한꺼번에 귀국하면 물자 부족 등 혼란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에 남겨진 자국민도 전후 일부만 귀국시킨 채 1959년 ‘전시사망 선고’를 내려 호적을 아예 말소할 정도였다.(…) 日 미즈기와 대책

그 결과 중국에서는 중국인 행세를 하며 남은 일본인들도 탄생했으며 몇몇 일본인들은 자기 자식들을 평소 알고 지내던 중국인에게 맡기고 나중에 데리러 돌아오겠다며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 잔류한 일본인 고아가 2,700명에 이르렀고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들도 중국에 잔류했는데 그 숫자도 4,000명 정도였다. 이 외에도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중국에 남은 일본인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은 일본인들 중 일부는 홍위병들에게 문화대혁명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1972년에 중일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일본 정부는 이들의 일본 귀국을 시도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일본인이라는 자각이 없었으며 90% 정도는 일본어조차 몰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과 혈연 관계가 있으면 영주권을 주는 법률에 의해 한 사람의 일본인과 친척 관계를 맺은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넘어오는 일도 있었다. 짐작한 대로 이들은 차별당했고 일부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이들의 2세, 3세가 일본에서 야쿠자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서술된 걸 보면 가이진(外人) 인식은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듯하다.

일본인 3,000명이 조선의용군홍군에 의해 학살당한 통화사건도 있었지만 잔류했던 일본 관동군의 선공으로 촉발되었고 일본인들의 학살은 중국군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했다. 어떤 의미로는 중일전쟁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이다.[18]

5.3. 대만의 히키아게샤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으로도 꽤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했는데 역시 일본의 2차 대전 패전으로 인해 수많은 히키아게샤가 발생했다.

1945년 패전 당시 대만에는 군인과 군속을 제외하고 약 28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거주 역사가 최대 약 50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중에는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도 다수 있었는데 이들을 일본어로 완세이(湾生), 중국어로 완성(灣生)이라고 한다.

패전 후 1945년 10월 미국과 국민정부는 대만을 비롯한 국민정부가 통치하는 중국 지역에 체류하는 일본인들을 귀환시키기로 결정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약 48만 명(군인, 군속 포함)의 재대만 일본인을 일본 본토로 귀환시켰지만 이들 중 일부는 미처 귀환하지 못하던 사이에 2.28 사건에 휘말려 희생되거나 본성인에 동화되었다.

현대 대만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호의적인 대일관과 맞물려 이들에 대한 인식이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다.[19] 특히 대만 동부에 정착했던 일본인들은 동부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던 일부 대만 원주민을 빼면 한족 대만인과의 갈등 요소가 적었고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 대만 동부에서 고생해 가면서 자신들의 농장과 마을을 구축해 왔던 것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편으로 이 때 대만에서 태어난 현재 80대를 넘은 일본인들은 많은 수가 자신의 고향을 대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현재 대만에는 이들의 고향 방문 사업을 돕는 시민단체도 있으며 민간 차원에서 대만에 남아있는 대만일치시기 유적을 보호하기도 한다.


2015년에는 식민지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 스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 완성후이자(灣生回家)가 개봉되었다.

5.4. 홍콩의 히키아게샤

홍콩일치시기 자체가 만주국 및 대만일치시기에 비해 존속기간이 짧았던 영향인지 홍콩 출신 히키아게샤들은 존재감이 적다. 동남아시아 출신 히키아게샤들과 비슷한 경우다.

5.5. 러시아의 히키아게샤

남사할린(가라후토)와 쿠릴 열도(치시마 열도)가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소련령이 되면서 일본 본토로 강제 추방되어 돌아간 케이스. 대체로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와 거리가 가까운 홋카이도도호쿠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20]

이들은 한반도, 중국, 대만 출신 히키아게샤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상술한 지역들은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한 식민지, 괴뢰국, 점령지이며 원주민의 절대적 인구 수 자체가 많았기에 어찌되었든 본래 이민족의 땅인 외지로 여겨진 반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원주민의 수 자체가 매우 적었고 이미 에도 시대부터 일본인의 진출이 시작됐을 만큼 이민의 역사가 유구하며[21] 지리적으로도 일본 열도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본토로 여겨졌고 행정상으로도 내지였다.[22] 실제로 중국, 한국 등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은 인구 비율상 소수였던 반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서는 인구 비중의 절대다수가 일본인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 지역, 특히 북방 4도의 히키아게샤는 1945년 이후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동방 영토에서 추방당한 독일인들이나 커즌 선 이동에서 추방당한 폴란드인들의 신세와 유사하다.

5.6. 남양 군도의 히키아게샤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남양 군도의 일본인들도 일본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가 속출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은 다른 히키아게샤들처럼 차별에 시달렸고 그대로 구 남양 군도에 잔류한 일본인들은 원주민 문화에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본토의 차별 대우와 식량 부족으로 남양 군도로 되돌아 간 경우도 있는데 팔라우의 제6대 대통령인 구니오 나카무라가 이런 케이스다.

5.7. 동남아시아의 히키아게샤

동남아시아의 구 일본 제국령 지역들은 동아시아의 구 일본 제국령 지역에 비해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짧다 보니 일본의 민간인이 이주한 경우보다는 일본군 병사들이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혼혈아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론 소수이지만 순혈 일본인인 경우도 있었는데, 사쿠라이 요시코가 대표적이다.

5.8. 혼혈 히키아게샤

부모 중 1명이 일본인이고 다른 1명이 구 일본 제국 식민지 토착민인 혼혈인이 일본 제국 식민지에서 태어나 현지에서 살다가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일본 본토로 간 케이스. 한국의 히키아게샤 중에서는 도간 망절씨의 조상인 망절일랑이나 성진 씨의 선조 즙간부가 대표적이며 남양 군도의 히키아게샤 중에서는 상술한 구니오 나카무라가 대표적이다.

5.9. 류큐인 히키아게샤

일본 제국 시절 오키나와를 비롯한 현대 일본국 영토를 제외한 구 일본 제국령 지역에서 살다가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오키나와 본토로 돌아가거나 일본 본토로 다시 이주한 류큐인들이다. 오늘날 류큐인들이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쪽도 넓은 의미에서는 히키아게샤로 불린다. 특히 오키나와와 기후가 유사한 제주도, 대만, 남중국, 구 남양 군도 지역에 류큐인 이주민들이 많았다. 류큐인 히키아게샤 중 대표적인 인물로 데루야 간토쿠가 있다.

5.10. 조선계 히키아게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의 후손들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조상의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문화적으로 일본화된 탓에 조선인들과 어울리는 데 한계가 있었으며 일본 제국 패망 후에는 결국 대다수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편 강제동원되어 중국, 동남아시아, 남양 군도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있는데 이들도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남기도 해서 중국에서는 조선족이 되고[23] 괌이나 북마리아나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이 되었다. 동남아시아, 홍콩 등지의 조선계 히키아게샤들은 전후 한국이나 제3국으로 가기도 했는데 남은 이들은 극소수였고 남은 이들 대부분은 현지에 동화되었다. 어떻게 보면 사할린 한인들과도 비슷하다.

5.11. 중국계 히키아게샤

명나라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명나라 유민들과 삼번의 난 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반란군 패잔병들, 그리고 동녕 왕국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동녕 왕국 유민들의 후손들 중 일부는 일제 치하의 중국 북부 지역(만주국, 왕징웨이 정권)이나 대만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문화적으로 일본화된 탓에 현지의 한족들과 어울리는 데 한계가 있었으며 일본 제국 패망 후에는 결국 대다수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물론 일부는 현지에 남아서 중국 본토인이나 대만인에 동화되기도 했다.

5.12. 대만계 히키아게샤

대만일치시기에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살아가던 대만인들 중 일부가 일본 제국의 다른 식민지로 이주하여 살던 경우다. 한국의 영남 지역 화교들 중 일부가 이쪽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일제 치하의 중국(만주국, 왕징웨이 정권)으로 이주하여 살던 경우에는 일본 제국 패망 이후 현지의 중국 본토인에 동화되기도 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대만에서도 징집이 실시되어 20만 명 가량의 대만인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동남아시아 등지의 전선으로 파병되었는데, 이들은 전후 귀환한 대만에서 국민정부에 의해 일본의 침략전쟁에 가담한 한간으로 몰려 투옥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아예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일본 본토나 제3국으로 도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6. 일본으로 돌아간 히키아게샤

식민 지배에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 입장에선 가해자에 식민지에 주거했을대는 특권층에 위치해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식민지에서 살았고 일본어일본 문화에 서투르다는 이유로 상당수가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사회적 차별을 당했다. 패전 직후 일본에선 일본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히키아게샤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차별에는 히키아게샤들의 출신이 하류층이었던 영향도 있었다. 당시 일제는 자국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빈농, 부라쿠민들을 모아 집단 이민단을 내보내곤 했는데 히키아게샤들은 이미 식민지로 나가기 전 일본에 있을 때에는 하층민이었다. 물론 이들은 실제 식민지에서 계층상승을 하기는 했지만, 본토인들 기준에서는 벼락부자라는 인식이 강했고,전후기때 일본 본토가 쑥대밭이 되었고, 이들이 식민지에서 가져온 재산도 1940년대 후반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상당수가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에 뼈대 없는 집안 출신이었던 이들은 다시 하층민으로 추락했던것이었다. 일례로 조선을 떠나며란 책에도 이들이 귀국한 뒤 겪었던 어려움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들의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문학이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어릴 때부터 장기간 식민지에 체류하면서 성장한 경우에는 그 나라에 문화적으로 동화된 상태라서 귀국 후에도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차별대우를 당했다. 이 때문에 몇몇 가난한 히키아게샤들은 야쿠자 같이 범죄의 길로 빠졌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몇몇 일본 대학들은 입시 과정에서 히키아게샤와 그 자손에 대한 특별전형을 실시한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동안 언급을 영 기피했고 해외에서 이들을 다룬 문헌이나 연구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비교적 일본에 우호적인 대만 및 팔라우에서는 언급이 좀 되는 편이다.

7. 어록

'식민지를 가지는 것, 타국 사람을 식민지화하는 것이 얼마나 그 종주국 인간을 망가뜨리고 추락시켰는가, 그것의 심각성을 일본의 지식인도 국민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국민국가 비판'의 학문적 조류를 만든 니시가와 나가오[24] 리츠메이칸대학 명예교수 著, 에세이 <식민지주의의 재발견> 中
'내가 조선에서 태어난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15년 동안 조선에 일본인으로서 있었다. 식민자[25]로서 거기에 있었다. 나는 아이였다고 해보아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아마 나는 조선인들에게 무해하였을 것이다, 라는 주장 역시 아무런 변명이 되지 않는다. (중략) 역사란 이를테면 이와 같은 것으로, 내가 아이였으며 무해했을지언정, 나 한 사람만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역사로부터 제외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란 이렇게 냉혹한 것이요, 그 정도로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일본인은 이 역사를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짊어나가야만 한다.'
포스트 콜로니얼 문학 작품을 다수 남긴 작가, 고바야시 마사루[26] 著, 에세이 <몸 깊은 곳의 이미지> 中
'내지'[27]에 인양되어 온 나는 거기에서 이방인이었다. 방언을 모르고, 살아야 할 집도 경작해야 할 땅도 없는 우리들은 내지(일본)에 고립되어 있었다. <인양자의 자식>이라 불리며 조소의 대상이 될 때마다 나는 반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는 거부당한 땅이었다.
<핼쑥해진 말을 보라>로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가, 이츠키 히로유키[28] 著, 에세이 <긴 여행의 시작> 中

8. 기타

군만두가 만주계 히키아게샤들이 일본에 들여왔다는 설이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만두는 일본 요리치고 별나게 마늘이 들어가서 '군만두를 먹으면 입에서 마늘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인식이 강한데 정작 중국에서는 만두에 마늘을 넣지 않는다. 일본에서 군만두에 마늘을 넣게 된 것은 돼지 키우기 힘든 기후인 만주·북경 지역[29]에서는 만두에 양고기를 많이 썼는데 질 떨어지는 늙은 양의 고기를 만두에 넣으면서 양고기 냄새에 익숙하지 않던 일본인들이 그 누린내를 감추기 위해 마늘을 듬뿍 넣기 시작한 게 시초이기 때문이다. 찐만두를 재차 기름에 튀기듯 굽는 방식이나[30] 마늘을 넣는 방식도 만주계 히키아게샤들을 가교 삼아 일본에 정착했다.

명란젓부산에 살던 일본인이 일본에 돌아가서 전파한 음식이다.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과도 관련이 깊다. 알박기 문서와 산리즈카 투쟁 문서 참고.

일본 내 히키아게샤 후손들은 오늘날의 일본국령 지역을 제외한 구 일본 제국령 국가를 방문하여 현지의 일본 제국 유적들을 둘러보기도 한다. 특히 대만에서 이들의 방문 및 일본 제국 유적 답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일관계 개선을 기점으로 대만만큼은 아니어도 히키아게샤 후손들의 방문 및 일본 제국 유적 답사가 늘어난 편이다.

9. 실존 인물

9.1. 한국 출신

  • 나리타 유타카(成田豊, 1929~2011) - 일본 최대의 광고 기업인 덴츠의 전 회장으로 천안 출신이다. 사람들에게 천안이 어딘지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서울 출신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서울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중학교 출신이라 서울에서 성장한 것이 맞긴 하다. 한국에서 자란 배경 탓인지 한일관계 개선에 신경을 썼다. 따라서 해당 시기 영향으로 덴츠도 친한 성향이 있고 한국 대기업의 대형 마케팅 프로젝트 수주를 잘 하는 편이다.
  • 망절일랑(網切一郞, 1942~2012) - 도간 망절씨의 시조. 일본식 이름은 아미키리 이치로. 경상남도 진해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건 망절 문서 참고.
  • 즙간부(辻幹夫) - 성진 즙씨의 시조. 일본식 이름은 츠지 미키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9.1.1. 후지이 히데토

藤井秀人(가명), 1930~2023.

일본 미야기현 출생으로, 1945년 8.15 광복 당시 15살이라고 했으니 출생년도는 1930년으로 추정되며 1992년 경향신문기사를 통해 62세로 보도되었다. 이후 행적은 한동안 미상이었으나 사망 직후 알려졌다. 2023년 2월 13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93세.

1945년 해방 당시 가족과 함께 강원도 춘천시에 살고 있던 일본인이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는데 아마 부모가 일본에서의 생활 기반을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왔기 때문에 해방 후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쫓겨나는 와중에도 한국인 행세를 하며 어쩔 수 없이 계속 한국에 눌러 산 듯 하다. 그는 '일본에서 막 귀국한 한국인' 행세를 하면서 서울의 한 창고회사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러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는데 전차를 타고 종로를 지나다가 조선인민군에 불법징집되어[33] 인민군 제5야영훈련소에 입대하였다. 훈련소에서 인민군이 후지이에게 이름을 묻자 "박념인(朴念仁)"이라고 대답했다. 朴念仁은 한국어 이름으로 쓰기 발음이 상당히 어색한 말이긴 하지만 뜻은 말이 되는데 '생각이 어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일본어로는 벽창호(말이 적고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인민군에게도 한국인인 척했는데 북한은 미국일본을 매우 싫어해서 일본인은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당할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인민군에서 운수 제4대대의 수송병으로 생활하다가 인민군 19사단 정찰대로 옮겨 황해북도 금천군에 배치되었로 영국 육군 보병부대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기절했다. 전투에서 낙오되어 황해북도 평산군 남천읍에서 포로로 잡혔으며 경상남도 거제군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수용소에서 비로소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고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서 당시에는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인이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일본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서 일본인이라고 주장했으니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을 듯하다.

대신 1953년 6월에 반공 포로로 인정되어 3년 만에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수용소에서 풀려나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으로 가던 중에 이번에는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는 체포조에게 체포되어 한국군 육군 제2보충대에 편입되었다. 다음해 애국반공청년지원병에 대한 특별휴가를 받아 서울에 온 후 대한민국 외무부에 귀국 신청을 했는데 이 전후 사정을 받아들인 당시 외무부로부터 "귀국 신청이 허가됐다"는 통지를 받았고 이를 근거로 제대할 수 있었다.

1년 후인 1955년 10월에 의가사 제대했고 일본에 돌아간 것은 1956년 2월 3일인데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오사카항에 내려 귀국했다.#

9.2. 중국 출신

  • 리샹란(李香蘭, 1920~2014) -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리샹란은 중국에서 활동했을 때 쓰던 예명으로, 일본어로는 리코란이라고 읽는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파일:이향란.jpg
  •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 1920~1997) - 일본의 유명 영화 배우. 중국 칭다오에서 사진 기사인 일본인 부부 밑에서 태어나서 중국에서 지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20살인 1940년에야 일본에 난생 처음 가 봤다. 사진병이 되어 항공정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 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 1935~2008) - 일본의 유명 개그 코미디 만화가. 대표작으로 오소마츠 군이 있다. 만주국의 러허성에서 관동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패전 직후 아버지가 소련으로 연행되어 남은 가족들과 자력으로 일본에 귀향하였고 정착했을 때 직·간접적인 차별을 당한 경력도 있었다.
  • 야나미 조지(八奈見乗児, 1931~2021) - 일본의 성우. 랴오닝성 푸순시 출생.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 야노 히로타케(야노 히로타케, 1943~2024) - 일본의 기업가. 다이소의 창업주로, 중화민국 베이징 출생. 본명은 쿠리하라 고로(栗原五郎)로, 야노 히로타케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결혼하면서 성을 아내의 성인 '야노'로 바꾸고 이름까지 히로타케로 개명했다.
  • 야마다 아키오(山田昭男, 1931~2014) - 미라이 공업 창업주이자 1대 사장으로 1931년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전후 처음 일본 본토로 들어가서 일본인이 인력거를 끌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선입견을 조심하게 되었다는 교훈 겸 자전적 일화가 한국에 번역된 책 중 하나에 서술되어 있다.
  •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 1935~2024) - 일본의 유명 지휘자. 만주 펑텐(선양) 출생.
  • 히노 히데시 ( 1946 ~ ) - 일본의 3대 공포 만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만화가. 소련 점령하에 있었던 만주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 출생.

9.3. 동남아시아 출신

9.4. 러시아 출신

9.5.남양 군도 출신

10. 가상 인물 및 관련 작품

  • 허준 <잔등> - 2016학년도 9월 모의평가 A형에 해당 부분이 출제되었으며 작품 전체에서는 주인공이 히키아게샤들을 증오하는 소년과 동정하는 국밥집 할머니를 만나지만 해당 지문에서는 할머니가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독립운동하는 아들까지 잃은 불행한 인물이지만 거지가 되어 버린 잔류 일본인들은 동정하고 관대하게 여기는 시각이 드러난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1948년 말에 월북했다!
  • 명가의 술 2부 - 가난한 소작농에게 만주국의 토지를 준다며 만주로 이주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 요코 이야기 - 재조선 일본인을 다루긴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 치우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 주의가 필요한 책이다.
  •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 - 남편이 징병당해 소식이 끊긴 만주국 히키아게샤가 자녀들을 데리고 만주 장춘에서 도보로 남하해 선천부산을 거쳐 1년만에 일본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다룬 회고.
  • 고바야시 마사키의 1962년작 영화인 인간의 조건 3부는 관동군으로 참전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주인공 카지의 관점에서 히키아게샤 이야기도 일부 다루고 있다.
  • 게임 용과 같이 제로: 맹세의 장소의 핵심 조연인 타치바나 테츠마키무라 마코토(본명은 샤오헤이) 남매도 히키아게샤 출신이다.[37] 타치바나는 집안 출신이 출신이라 사회적 냉대 속에 15세 때부터 삼합회에 들어갔다는 언급이 있고 중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걸 참다 못해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왔지만 일본에선 되려 중국인 취급받았다는 등 여간 고생이 심한 게 아니었다는 언급이 있다. 마코토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를 찾으러 왔다가 그 오빠의 오른팔인 오다 준[38]에게 실명+인신매매 크리로 인생 막장 테크를 타나 싶다가 때마침 팔려간 조직과 세력권 전쟁을 벌이던 본토 삼합회 청부업자였던 리웬하이에게 우연히 발견되어서 거두어졌다.[39] 이 남매의 사연들을 듣고 있자면 4편의 불행 남매였던 사에지마 타이가·사에지마 야스코 남매 이상으로 안타깝다.[40] 거기다 타치바나는 친동생과 해후하지도 못한 채 결국...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초신성 플래시맨 - 1980년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히키아게샤 고아를 모티브로 한 작품.
  • 소설 1Q84 - 남자 주인공인 가와나 덴고의 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중일전쟁 중에 만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본국으로 추방당한다.
  • 이세계 식당에서 현 점주의 할아버지, 즉 선대 점주가 대륙에서 일본으로 귀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현길언의 <전쟁놀이>, <그 때 나는 열한살이었다>, <못자국> 3부작 - 제주도 출신 소년 세철의 유년시절을 다룬 소설로 전쟁놀이는 일제 패망 직전의 시점을, 그 때 나는 열한살이었다는 제주 4.3 사건을, 못자국은 6.25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중 그 때 나는 열한살이었다에 일본인 교장 일가를 숨겨주는 내용이 나온다.
  • 콜드 케이스의 일본 리메이크 작인 콜드 케이스 ~진실의 문~ 시즌 3 9화에 등장한 피해자가 히키아게샤 출신이다.[41]
  • 미스터 초밥왕 - 주인공 세키구치 쇼타에게 장어 초밥을 가르쳐 준 야마토 초밥 주인 부부가 젊은 시절 중국에서 초밥집을 운영하던 중 일제 패망으로 인한 귀국길에 아들 준이치를 잃어버렸다. 이후 틈날 때마다 중국으로 건너가 아들을 찾았지만 허탕쳤다. 다행히 아들은 인정 많은 중국인 부부의 양자가 되어 잘 살고 있었고 친부모님도 함께 모시고 싶다는 간청으로 같이 모여 살게 된다.
  • 고바야시 마사루의 <포드 1972>, <쪽발이>, <일본인 중학교> 등의 소설 - 작가부터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서 대구, 안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히키아게샤다. <포드 1972>는 패전 후 폐병에 걸린 채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는 한 일본군의 회상이 주 내용이다. 어린 시절 조선인들과 함께 살던 마을에 한 터키인이 세련된 포드 자동차를 타고 등장했다. 주인공은 터키인의 가족들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들이 조선인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위계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생각에 친해질 수 없었다. 몇몇 사건을 겪으면서 터키인을 얕보려고도, 그의 딸에게 다가가 보려고도 하지만 결국 소외감으로 그의 딸을 상처입힌다. 터키인이 바로 용서[42]하였음에도 똑바로 사죄하지 못한다. 이후 참전하기 위한 겸 잠시 들른 고향(물론 어린 시절을 보낸 한반도의 한 마을)에서 전에 자기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조선인 아낙을 만났을 때 터키인은 항일세력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자동차를 타고 떠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모든 이야기를 병이 걸린 자신을 돌봐주던 위생병에게 털어놓고 "터키인이든 일본인이든 다 떠나가도 남은 사람들은 잘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고 멀어져가는 포드 자동차를 떠올리며 죽음을 예감한다는 내용이다.
  • 해협 - 2007년 NHK 드라마. 한국 올로케이션 작품으로 고두심, 하세가와 쿄코 등이 출연하였으며 격동의 시대에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인 청년과 히키아게샤 여성의 인생을 그렸다.
  • 대마인 시리즈 - 대마인들 중 스우 진레이는 중국 출신 닌자라는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지만 조상이 히키아게샤라서 완전한 중국인 닌자는 아닌 셈이다.

11. 비슷한 경우

일본의 히키아게샤와 유사한 사회적 문제는 20세기 전반까지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던 패권국들 대다수가 겪었으며 꼭 제국주의를 휘두른 강대국들이 아니었더라도 20세기 내내 지속된 국경의 변화와 해외 식민지령의 상실에 따라 주민들이 추방되는 일은 빈번했다.

일례로 프랑스에는 피에 누아르(Pied-Noir)가 있다. '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 알제리에 살던 프랑스인들을 의미하는데 1960년 당시 1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으나 알제리 전쟁의 결과로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모조리 프랑스 본토로 쫓겨났다. 유명한 피에 누아르로 알베르 카뮈이브 생 로랑 등이 있다.

현대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경우 식민지로 두고 있던 그리스불가리아,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등을 비롯한 발칸반도 각국에 많은 튀르키예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1829년과 1878년에 일어난 그리스 독립 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고 그리스와 불가리아 등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발칸반도 각국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튀르키예인들은 대부분 본토로 돌아갔으나 미처 귀국하지 못하고 해당국가에 남아있던 튀르키예인[43]들은 이후 발칸 각국 정부에 의해 차별과 탄압을 거쳐 강제동화되었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와 이웃한 그리스 북동부 지역에서 거주하던 나머지 주민들은 전간기 당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에 의해 그리스에서 축출되어 튀르키예로 강제 이주되었다. 튀르키예령 동트라키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의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튀르키예어가 모어인 경우도 있지만 현지인에 거의 동화되어 튀르키예어를 잊어버리고 이슬람 신앙만 간신히 지켜내는 경우도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자국 치하의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여 살던 네덜란드인들이 태평양 전쟁인도네시아일본의 식민지로 바뀌자 일본군을 피해 네덜란드 본토로 피신한 사례가 있다.[44] 일제가 패망한 후 다시 네덜란드군이 진주해 인도네시아의 재식민지화를 시도했으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의 결과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면서 이들은 완전히 네덜란드로 쫓겨났으며 이 때 네덜란드의 식민지배에 부역했던 친네덜란드 성향의 인도네시아인 부역자들 또한 함께 네덜란드로 쫓겨나기도 했다. 물론 끝까지 인도네시아에서 버티거나 본토 적응을 못해서 다시 인도네시아로 들어온 네덜란드인도 많았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어쩔수없이 자국 국민으로 인정은 해줬다. 단 이들은 그 대가로 오랜기간 차별대우를 감수하면서 인도네시아에 동화되어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동티모르가 자국의 지배에서 벗어남에 따라 1975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 합병디면서 동티모르에 이주, 정착한 인도네시아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령 시절에 지배민족 노릇을 했던 동티모르의 인도네시아계 이주민들은 2002년 동티모르가 독립한 이후에 서티모르, 수마트라, 술라웨시, 자바 등 동티모르로 이주하기 전 자신들이 살았던 인도네시아 본국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동티모르에 잔류하더라도 토착 동티모르인들에 의해 엄청난 차별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에서도 우마이야 왕조 시절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무슬림들을 추방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아랍계 이주민모리스코들은 레콩키스타 이후에도 꽤나 버텼지만 17세기 모리스코 추방을 통해 전부 북아프리카로 추방당했다.

포르투갈의 경우 해외 식민지를 거느렸던 포르투갈 왕국과 포르투갈 제1공화국, 포르투갈 제2공화국 시기까지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빈다 등의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에 이주하여 살기도 했는데 카네이션 혁명 이후 수립된 포르투갈 정부가 이들 식민지들에 대한 독립을 허용하고 식민지 독립 이후 앙골라나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신생국이 된 구 포르투갈령 식민지 출신 아프리카 국가들의 주도권을 장악한 흑인 정치 세력들이 이들을 악질 제국주의자로 간주해 잔혹한 탄압을 가하면서 모두 본토로 귀국했으며 이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도 일본의 히키아게샤와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등과 유사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당했을 때도 러시아령 폴란드에 거주하던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들이 러시아 제국 본토로 도망치는 일이 많았으며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토착 폴란드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45] 엄청난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46]

일본과 같은 추축국 출신인 독일에서도 동방 영토 및 동유럽에서 독일인들이 대거 추방당한 사례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오랜 기간 독일의 영토였거나 독일계의 영향권이었고 인구도 독일인이 절대다수였던 지역에서 주민들이 추방당했다는 차이가 존재하며 규모도 훨씬 방대했다. 상술했듯 현 러시아령인 사할린·쿠릴 열도 출신의 히키아게샤가 그나마 이들과 비슷하지만 규모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또 나치 정권 이전에 독일 제국 시기의 독일이 후발주자로 식민지로 삼았던 탄자니아나 나미비아, 카메룬, 토고 같은 아프리카 각국에서도 독일 당국에서 독일인들을 이주시켰는데[47]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 제국이 패망하여 이들 식민지들을 모두 영국이나 남아공, 프랑스 등 전승국들에게 넘기면서 대부분의 독일계 이주민들은 패전 후 영국과 남아공, 프랑스인들의 보복을 피해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일군 재산과 부들을 모두 내다버리고 독일 본국으로 도망쳤거나[48] 일부는 독일로 가지 않고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 남아 영국계 남아공인이나 보어인 등 아랫나라였던 남아공의 유럽계 민족 집단들처럼 독일계 나미비아인들이 되기도 했다.[49]

같은 추축국인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이던 리비아에티오피아를 비롯하여 2차대전 당시, 일시적으로 점령한 그리스나 크로아티아 등 발칸반도의 점령지 곳곳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보내 이주시켰으나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각지에서 추방 및 도주와 같이 학살이 벌어졌다. 이탈리아도 뭐라고 못하는데 패전국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도 일본과 더불어 학살, 약탈, 폭압을 벌이던 상황에 피해자 드립만 할 수도 없다. 대표적인 것이 유고슬라비아 곳곳에서 벌어진 포이베 학살사건(Foibe massacres)으로 곳곳에서 수백, 수천이 넘는 이탈리아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되었다.

폴란드에서도 2차 대전 이후에 소련에 의해 소련-폴란드 국경선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르부프, 브제시치, 빌노소폴전쟁 이후에 폴란드가 실효통치했던 커즌 선 동방 영토의 원주민들이 소련군에 의해 추방당했는데 이들은 대다수 독일로부터 새로 획득한 현 폴란드의 서부와 동북부 지방 영토에 정착했다.

소련 붕괴러시아 본토를 제외한 구소련 국가들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본토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다면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의 친러 성향 주민들이 히키아게샤와 비슷한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현재 모로코와 분리주의 분쟁 중인 서사하라 역시 모로코로부터 분리독립에 성공한다면 서사하라 내 모로코인 이주민들 역시 히키아게샤와 같은 전철을 밟고 서사하라에서 강제 추방당하거나 보복,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12. 번외

엄밀히 말하면 히키아게샤에 해당하지 않지만 히키아게샤와 유사한 사례들이다.
  •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가 몰락하면서 류큐 왕국의 구 사쓰마 사무라이 세력들이 사쓰마(가고시마현)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으며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오키나와가 잠시 일본령이 아니었을 때 오키나와의 일본 본토계 이주민들이 일본 본토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일본 본토에서 전자는 봉건시대의 잔재로 취급당했으며 후자는 히키아게샤들과 다를 바 없는 차별을 받았고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령이 되면서 오키나와로 돌아간 경우가 많았지만 그대로 조상의 고향인 일본 본토에 남기도 했다. 만약 오키나와가 독립에 성공했다면 후자도 히키아게샤에 해당하는 사례가 되었겠지만 오키나와가 독립에 실패한 후 현재까지 계속 일본령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히키아게샤와는 다르다.
  •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일본 본토로 망명한 친일 성향 식민지 토착민들
    일본 제국 식민지 토착민들 중 일본 제국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부일배들은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일부가 일본 본토로 도망치기도 했는데 한국의 몇몇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대만의 일부 본성인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만주국 멸망 후 한족 만주군 패잔병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오늘날 재일 중국인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에서 일본 도요토미 정권이 패배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일부 순왜들과도 비슷한 경우다.

13. 관련 문서


[1][2] 조선으로 건너 감.[3] 남한에 약 50만 명, 북한에 약 20만 명이 거주했다.[4] 북미와 중남미에도 각각 30만, 20만 명 정도의 일본인들이 거주했으나 이들 지역은 일본의 점령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북미나 중남미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귀국하지 않았다. 현재 일본계 남미인들은 그 수가 불어나 브라질에서는 일본계 브라질인이 100만 명을 넘었으며 페루에서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같은 일본계 대통령도 나왔다. 애당초 이들은 해당 국가의 국민으로서 합법적으로 이주해 거주하고 동화되었기 때문에 히키아게샤 분류에 들어가지 않으며 이 항목에서는 '일본이 패전 이후 상실한 지역에서 귀국한 자'들을 다룬다.[5] 부산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배를 말한다. 가수 조용필의 데뷔곡으로 유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에서 언급되는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 매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의 연락선이 바로 이것이다. 부관연락선은 부관페리로 이름만 바뀐 채 지금까지도 남아서 명맥을 잇고 있다.[6] 대기업 사원, 조선 주둔군, 일본 공무원 등을 말한다.[7] 이를 역청구권(逆請求權)이라고 한다.[8] 다만, 이곳의 일본인들은 대다수가 한국인들을 착취하는 지배층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부대끼면서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이라 부득이하게 일본인들의 묘지 터에 마을을 조성해 살았던 사람들은 이곳에 묻혀 있던 이들을 불쌍한 이들로 여겨서 동정했고 지금도 아미동 비석마을의 주민들은 묘지의 주인인 일본인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기도 하고, 때때로 제사 지내는 날이면 앞에 물 한 그릇이라도 떠다주고 있다. 부산광역시청서구청과 종교단체에서는 이들의 후손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비석을 집을 짓는 건축자재로 쓴 것도 6.25 전쟁으로 인해 인구 밀도가 늘면서 부득이하게 집터를 마련코자한 것이었지, 식민지배자들에 대한 고인드립 목적도 아니었으니 이곳의 주인이었던 일본인 망자들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6.25 당시 피란민들은 전쟁통에 어찌나 춥고 배고팠는지 무덤 위에서 자면서도 귀신 볼 여유조차 없고 추위와 배고픔이 더 무서웠다고 회고하고 있다.[9]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당시 김일성은 북한에 필요한 일본인 기술자들과 그 일가를 억류해 한반도 북부에 집중건설된 구 일본의 공업 시설과 발전소를 움직이고 자체 기술인력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전후까지 북한 공업은 전화의 피해를 복구하는 재생력과 시설복제에 있어서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해 보면 경험이 쌓이고 체제 특성상 인재와 재원의 집중투입은 잘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모여 북한이 전후 나름 오래 중공업과 군수공업에서 앞서가는 바탕이 되었다.[10] 단, 밀선 이용시 귀환까지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했다. 밀선에서 재산을 갈취하는 일도 자주 발생했고 해적을 만나 탈탈 털리는 일도 빈번했다.[11] 특히 남한 거주 일본인과 주둔 일본군의 철수의 매 행렬마다 미군이 호위로 붙어서 부산까지 호송했는데 심지어 매 행렬에 있던 소수의 일본군에겐 소총 휴대를 허용하여 남한인들의 린치를 저지하게끔 하기도 했다. 이런 경무장은 부산항에서 대부분 해제되었다.[12] 여운형건국동맹은 조선총독부와 교섭해서 무사 귀환을 보증하는 대신 공백기의 식량 문제 등을 해결하고 주권 회복 및 재건 과정 등을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를 정무총감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교섭은 8.15 광복 불과 3일 만에 미군정의 현 위치 고수 명령을 빌미로 총독부가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중앙청(당시 총독부)에 태극기가 3일만 게양된 이유, 장준하의 광복군 선발대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터치 앤 고만 하고 돌아가야 했던 이유, 38선 이북에서 8.15 이후에도 소련군과 항일 빨치산이 일본군과 싸우면서 도시 하나하나를 무력으로 자력 해방해야 했던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결국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점령하면서 총독부의 일장기는 곧바로 성조기로 대체되었다.[13] '일인들의 이상향, 호남평야 불이농촌' 2003년 광복절을 기념해 KBS 부산총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링크1 링크2[14] 현재는 없어지고 두월동 통술거리, 반월동 시장 등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현 월영마을 자리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자를 사고파는 곳이라 이름도, 유래도 부산의 깡통시장과 똑같다.[15] 이후 한국으로 귀화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귀화하려면 내국인 중산층 정도의 재산을 증명해야 하는데 단순 날품팔이 노동자였다면 귀화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16] 일본으로 이주한 후 자신에게는 조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문제로 인해 한국을 감히 고향이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더불어 자신의 집(Home)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라고 표현했으며 대구에서 조선인 유모들이 자신을 정성을 다해 키워주셨으므로 대구는 자신에게 '어머니의 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7] 과거에는 부계주의 국적법을 택하여 1998년 6월 14일 이전 출생자까지는 아버지가 한국 국적인 경우에만 자녀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 나이 및 일본인이라고 쫓겨다녔다는 언급이나 유창한 한국어 등으로 보아서 한국에서 자란 일본 국적자였다고 추측된다.[18] 중일전쟁 당시 공산당군은 기본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전하기보다 자신들의 세를 불리는 데 집중했지만, 그렇다고 일본군과의 전투가 없었던 건 아니고(단지 국민당군이 훨씬 적극적으로 싸웠을 뿐) 오히려 명목상 일본군을 적대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만주에 남아있던 만주국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은 쪽도 공산당군이다.[19] 대만 정치의 특성상 본성인외성인의 갈등이 중요한데 잔류 일본인은 본성인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동질감이 있다.[20] 한편 이들 사이에 섞여 남사할린으로 이주 및 징용된 조선인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해 한국계 러시아인의 한 집단인 사할린 한인으로 남았으며 이들의 정체성은 한국계 러시아인 하면 떠오르는 고려인보다 히키아게샤와 더 흡사하다.[21] 사할린은 1679년 마츠마에 번코르사코프(일본명 오도마리) 일대에 어장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쿠릴 열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마츠마에 번이 쿠나시르, 이투루프, 우루프 등지에 어장을 설치해 관리했다. 다만 남사할린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에 넘기고 일본인들이 철수했으나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다시 일본령이 된 후 일본인들이 재정착한 사례이기 때문에 쿠릴 열도, 특히 북방 4도와는 성격이 다르며 식민지와 본토의 중간적 성격을 가진다.[22] 단, 1875년 러시아에 할양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도로 차지한 남사할린은 패전 직전인 1943년에 가서야 내지에 편입되었다. 반면 쿠릴 열도의 경우 남쿠릴은 1855년, 북쿠릴은 1875년에 각각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로서 내지에 편성되었다.[23] 대만에 남은 경우는 대부분 돌아가거나 2.28 사건에 휘말려 죽거나 본성인에 동화되었다.[24] 일제 치하 조선 평안북도 강계군(現 강계시) 출신으로 한반도에서 태어난 히키아게샤다.[25] 식민지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나라 출신으로 식민지에 와서 생활하는 사람[26] 1927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 대구안동에서 유소년기를 보내고 1945년 육군항공사관학교를 60기로 입교하였으나 일제 패망으로 임관과 특공은 하지 못함. 1948년 일본공산당 입당, 신일본문학회서 활동. 1950년 레드 퍼지 반대 화염병 투쟁으로 와세다대학 중퇴. 1953년부터 도쿄도 스기나미구 진료소 근무 및 공산당 지역 활동, 재일 조선인과 히키아게샤를 다룬 소설들을 발표. 1971년 장폐색으로 사망. 작품의 특징은 어린 시절 조선에서 살며 자연과 사람들(조선인)에게서 느꼈던 좋은 기억이 있지만 결국 국가가 아닌 개인일지라도 제국주의에서 비롯된 지배자, 피지배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애향심과 소속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27] 일제강점기에 일본 열도를 이르던 말로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는 외지라고 불렀다.[28] 후쿠오카 출생이지만 서울평양에서 유년기를 보낸 케이스다.[29] 지금이야 해당 지역들에서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돼지 키우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졌지만 만주국 시절의 만주와 왕징웨이 정권 시절의 화북은 21세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30] 중국 본토에서 딤섬을 제외한 식사용 만두는 거의 대부분 물만두로 먹는다.[31] 광복 이후 경성중 건물을 미군정이 인수해 오늘날의 서울고등학교가 되었다.[32] 이계진 당시 아나운서가 쓴 책인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도시가스처럼 들릴 수 있어서, 이 사람이 나오는 뉴스에서는 '마에다 (주한일본)대사'라고 하면 그만인데도 장난삼아 일부러 이름까지 넣는 일도 있었다.[33] 전쟁 중에 외국인은 징집하면 안 된다.[34] 개인 문서가 따로 없지만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에 간략하게나마 약력이 기재되어 있어서 서술한다.[35] 본명은 사고야마 도메오.[36] 단,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인 사고야 도메오는 중국 지린성 허륭현(현재의 허룽시) 출신이다.[37] 대놓고 히키아게샤라고 불리지는 않고 "중국 잔류 일본인 출신", "잔류 고아"라는 식으로 간접 언급된다.[38] 물론 오다도 타치바나도 전혀 몰랐다. 이 무렵 오다는 그냥 양아치였고, 마코토가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얼마 후에 타치바나와 만나 그의 부하가 됐다.[39] 리는 자신을 은인이라 철석같이 믿던 마코토를 보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이 생각나 살인청부업자를 관두고 의원을 열어 마코토를 지키기로 결심한다.[40] 남매끼리 극장에 갔는데 어둠 속에서 주변 중국인들에게 온갖 위협을 당했다거나 여동생 마코토는 기껏 혈육이라고 해서 어머니랑 일본에 있는 할아버지를 찾아 왔더니 처음에만 환대하고 말이 안 통해서 다시 냉대다왜 기껏 중국어를 까먹을 정도로 일본어를 배웠더니 막상 어머니가 적응 못하고 자살했다. 더 골 때리게도 그 할아버지가 "한 평의 땅"을 알박기해 놓고 킬러 라오구이에게 살해당하는 바람에 난데없이 상속권자가 된 마코토는 순식간에 땅을 노리던 도지마구미의 타겟이 된다.[41] 작중에서는 중국 잔류 고아로 표현되었다.[42] 터키인은 선교사였으므로 기독교적 구원에 해당한다.[43] 이들 중에는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지배가 수백년이 넘을 정도로 길어지는 바람에 당시 이 지역에서 거주하였던 튀르키예인들 중에는 그리스나 불가리아, 북마케도니아 등 발칸의 피지배 속주들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있었다.[44] 이때 미처 인도네시아를 탈출하지 못한 네덜란드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잔혹한 탄압을 받았는데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전락한 게 대표적이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범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이며 네덜란드의 본토는 같은 추축국인 나치 독일에 의해 유린되었고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이 시기에 나치의 압제 하에서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안네의 일기 등의 출판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진술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도 한다.[45] 당시 독일 제국이 명목상 토착 폴란드인들의 문화를 존중한 것도 그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만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 승리했다면 독일 제국은 이전부터 지배했던 포젠단치히의 폴란드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구 러시아령 폴란드의 토착 폴란드인들을 독일화시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46] 토착 폴란드인들 중에서도 조상 대에 완전히 정교회로 개종하여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한 것 때문에 태생이 정교회 신자였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다만 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정교회 신자 행세를 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몰래 지켜낸 이들은 훗날 독일 제국 치하에서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고백했기 때문에 독일 제국의 탄압은 받지 않았다.[47] 결국 나미비아와 탄자니아는 이러한 독일인 이주민들의 착취와 행패에 식민지내 아프리카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독일군의 진압 과정에서 식민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까지 벌어졌다.[48] 이들 중에는 자신이 독일령 아프리카 식민지들에서 이뤄놓은 재산과 땅들을 빼앗아간 영국, 프랑스 등 1차 대전 당시 협상국과 1차 대전 패전 이후에 영국, 프랑스에게 넘어간 구 독일령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영국, 프랑스 땅으로 공식 인정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대한 증오와 원한을 가지며 1930년대 전간기 말기 나치당이 독일에서 대두되자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하기도 했다.[49] 특히 당시 독일 본토의 반나치 성향 독일인들(그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들)은 오히려 구 독일 제국령 아프리카 지역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