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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왼쪽)과 1230년(오른쪽)의 바랑인 친위대를 묘사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한글 / 영어 |
1. 개요
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며 가족처럼 보호했고, 거룩한 믿음은 대를 거듭하며 전해져 내려왔다. 이 충성스러운 자들은 순수함을 유지했으며, 배신의 사소한 징후마저도 그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콤니노스 왕조의 제2대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황녀 안나 콤니니의 기록
속칭 바랑인 친위대(영어명: Varangian Guards)는 10세기 말 동로마 제국이 북유럽 전사들의 원정 입대를 받아 창설한 이래 수백년 동안 존속한 금군을 가리키는 명칭이다.콤니노스 왕조의 제2대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황녀 안나 콤니니의 기록
흔히 영어 표기인 바랑기안 가드와 번역명인 바랑인 친위대로 알려져있지만, 편제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정부 직할의 중앙군 야전부대인 타그마였기 때문에 정식으로는 타그마 톤 바랑곤(Τάγμα τῶν Βαράγγων), 즉 그저 바랑인 부대라고 불렀으며, 혹은 그냥 바랑인들이라고도 불렸다.
국내에는 본 문서의 제목인 바랑인 친위대 말고도 바랑기아 가드, 바랑기안 가드, 바랑기아 친위대/근위대 등의 표현이 혼용된다.
"바랑기"(Βάραγγοι)란 본래 동로마인들이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의 북유럽인을 뭉뚱그려 가리킬 때 쓰던 호칭으로, 학술적으로는 바이킹들 중 9~10세기에 흑해를 건너 남하해서 전쟁이나 교역을 목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접촉하던 스웨덴계 바이킹이다. 어원은 고대 노르드어로 맹세를 뜻하는 "바르"(vár)[1]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들은 주로 장사와 노략질 등 그들의 본가와 거의 비슷한 생업을 영위했는데, 그 중 일부는 북유럽식 전투 방식을 살려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기도 했다.
2. 역사
사실 바랑인들 이전에도 바이킹들이 동로마 제국으로 건너가서 용병일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예 외인부대 식의 정규군 전력으로 편제되기 시작한 건, 명군이자 정복군주였던 바실리오스 2세[2]의 치세때였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 1세[3]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블라디미르 1세의 주도로 북유럽 각지에서 모집된 바이킹 전사 6,000명의 도움을 받아 아비도스 전투(989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4] 최대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바실리오스 2세가 툭하면 반란이나 일으키는 자국인 귀족 나부랭이들보다 오히려 이방인인 북유럽 전사들이 복무서약을 훨씬 잘 지키는 것을 깨닫고, 북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정 모집 공고를 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본격적인 외인부대원 모집이 개시되었다.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는지, 스웨덴 지역에서는 객지에서 전사한 바랑인 친위대원의 유산을 처리하는 특별법이 생길 정도였다.이는 이민족인 게르만족의 대침공이 유발한 지방분권적인 봉건제 시대에 꿋꿋하게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며 살아남으려고 했던 중기 동로마 제국의 발버둥이었다. 더 이상 고대 시민 보병으로는 이민족의 침공을 막을 수 없었기에 기마 무사 귀족이 등장한 것이었는데,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부켈라리이 사병들을 보유한 귀족들을 억압하면 국방력이 약해지고, 그렇다고 귀족들을 풀어주면 반란을 당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허스칼 복무에 익숙한 바이킹들은 정치 권력에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웅대함과 화려함에 경도되어 '이 거대한 도성의 수령이라면 부하 대우도 잘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눌러앉는걸 선호하게 되어 제국 정부와 바이킹들 사이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기록에 남은 첫 번째 바랑인 친위병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볼리 볼라슨인데, 동료들을 이끌고 1006년에 덴마크를 경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고 한다. 그가 금의환향할 때는 황제가 하사한 황금 장식의 자줏빛 옷을 입고 돌아왔는데, 볼라슨이 기록된 사가에는 외국의 무구들(즉 동로마식 무구)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볼리 볼라슨과 그의 동료들 외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바이킹 사가들이 있다.
중세 아이슬란드의 서사시인 《락스디엘리 사가》의 주인공인 볼라의 아들 볼리도 미클라가르드의 수령이 하사한 비단옷 위에 금실이 수놓인 자줏빛 망토를 걸친 화려한 모습으로 금의환향했다고 전해진다.[6] 이렇게 동로마 양식의 교회 건축과 프레스코화, 채색 《성경》 필사본은 저 멀리 아이슬란드까지 북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에 상인, 순례자, 근위대로 다녀온 것을 기념하는 룬 문자 비석들이 세워졌고, 바랑인 영웅들의 무용담을 전하는 아이슬란드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드어 사가와 역사서들도 집필되었다.
당시 바랑인 친위대원의 이야기가 이러한 영웅담으로 남았다는 것은 친위대원의 성공담이 그만큼 북유럽 사회에 큰 인상을 남겼음을 의미한다. 11세기는 이미 바이킹의 황혼기였고, 더 이상 침략과 원정으로 무용을 떨치는 것은 어려웠으며, 북유럽까지 영향을 미친 중세 기사의 발흥과 전면 보급으로 인해 전장에서도 도태될 위기에 있었는데 이제는 물려받은 말과 시종이 없으면 출세는 커녕 출전도 할 수도 없게 된 상황에서 칼 한자루 빗겨찬 무사 지망생이 실직 걱정이나 노후 걱정없이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랑인 친위대 복무였던 것이다.
바랑인 친위대는 동로마 제국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성 소피아 대성당의 2층 대리석 난간에는 처음에 정체불명으로 여겨진 문양이 있었는데, 기나긴 기독교 성찬의식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새긴 듯, 하프단(Halfdan)이란 인물이 여기 왔다 감이라는 뜻으로 적은 룬 문자 낙서로 밝혀졌다.#[7] 또한 그리스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에 세워져 있었던 사자 대리석상[8]에도 룬 문자가 새겨졌다. 바랑인 친위대 병사들은 복무를 마치면 퇴직금으로 동로마 제국의 금화와 무구, 그리고 자주색 비단옷을 가지고 말 그대로 금의환향했다.[9]
11~12세기가 되자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유롭게 방랑하는 바이킹이 줄어들었고, 바랑인 친위대의 성격은 바이킹 외인부대에서 세습 게르만 혈통의 특수전 부대로 바뀌어갔다. 스칸디나비아에서도 꾸준히 모집은 이루어졌지만,[10] 이 시기에는 오트빌 왕조의 멸망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에서 축출된 노르만인처럼 다양한 배경의 북유럽 혈통의 사람들이 친위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점은 정복왕 윌리엄 1세에게 패배하고 망명했다가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한 앵글로색슨족 테인[11]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앵글로색슨족 친위대원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일괄해서 앵글로바랑기 혹은 켈트인 친위대[12]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흔히 중세 유럽사 교양서적에서는 아예 '동로마 제국의 정예 영국인 용병'이라고 소개되니 그 비중을 짐작할 만하다. 노르만인들이 선도하는 중장 창기병 중심의 전법이 확립된 시대에 나라를 잃은 구식 테인이 갈 곳이 딱히 없었기도 했고. 비록 시작은 바이킹 허스칼 부대였을지언정 나중에는 앵글로색슨 테인 부대가 된다.
애초에 이름 자체를 북유럽인 부대라고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북유럽인의 입대를 대거 받았지만, 후기 바랑인 친위대 붐의 실상은 북유럽에서도 이미 기존 부족사회를 해체하고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 내 군인 직업이던 허스칼들이 일자리를 찾아왔던 것에 가깝다. 1차 십자군 이후 노르웨이 십자군들이 먼 이국인 동로마 제국 바랑인 친위대에 지원한 이유로 첫 째로는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던 동로마 제국을 마음에 들어했다. 두 번째로는 용병으로서 자신이 잘하는 직업에 남고자하는 열망, 마지막으로는 북유럽에서 부족 시절에 비해 왕권이 강화되어 부족 군인으로서 권력 기반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유럽에서 중요한 군역이 바이킹에서 기사와 맨앳암즈 중심으로 대체되자 당연히 북유럽 출신의 지원자는 눈에 띄게 줄었고, 최종적으로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앵글로색슨 7왕국 시대의 구식 테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망명 앵글로색슨 귀족과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 망명 앵글로색슨 귀족들과 후손들은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흑해 연안에 정착해 뉴잉글랜드라고 불리는 정착지를 형성해 살았다고 한다.
보통은 이렇게 수백 년에 걸쳐 기득권화된 전사 집단은 피할 수 없는 후진성 때문에 예니체리나 스트렐치, 팔기군처럼 점점 전투력이 쇠퇴하는게 일반적인데 바랑인 친위대는 전투력이 떨어지지도 않았던 모양이다.1204년에 제4차 십자군을 무진장 애먹이고, 끝까지 황궁을 지키다가 궤멸당했던 친위대는 테오도로스 1세 시절에 재건되었고, 최소한 1259년까지는 존속했다.[13] 훗날 1400년대까지 '바랑인'이라는 단어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등장하지만, 이것이 선대의 바랑인 친위대와 같은 집단인지 아니면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에서 온 용병 집단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4]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자와 충성서약을 맺었는데 이는 북유럽 바이킹들의 허스칼 맹세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허스칼들이 그의 주군과 생사를 같이 한 것과 달리 친위대의 충성서약은 특정 개인보다는 제위 자체, 그러니까 신분상 법적 고용주에게 있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한 예로 니키포로스 2세가 요안니스 1세에게 암살을 당했을 당시, 바랑인 친위대는 전임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지막까지 싸웠지만, 결국 찬탈자가 니키포로스 2세를 죽이자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방금까지 싸우고 있었던 적인 요안니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또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참패한 로마노스 4세가 알프 아르슬란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부제인 요안니스 두카스의 명령을 받고 로마노스 4세를 실각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콤니노스 왕조 당시, 아들인 요안니스 2세를 내치고 딸 안나 콤니니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황후 이리니 두케나가 바랑인 친위대를 시켜 요안니스 2세가 입궁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지만, 황제의 인장을 찬 요안니스 2세의 모습을 보고 바로 충성을 바쳤다는 설화도 있다. 이들은 적어도 현지인이 보기에는, 정변이 잦았던 제국에서 특정 황족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는 현재 제위를 보유한 신분상 법적 고용주에 대한 계약에 충실했다. 수령이나 족장 중심의 바이킹 전사들의 세계에서는 지배권에 대한 도전이 일상적인 일이었고, 도전에서 이긴 자가 지배권을 가지며, 지배자가 바뀌면 사회 구성원들은 그에 따라야 하는 전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랑인들은 동로마 황제의 지배권에 직접 도전하거나, 도전하는데 가담하지는 않았는데, 단순한 징집병이 아니라 용병부대인 이상 그들에게 봉급을 주는 법적 고용주를 직접 배신하는 것을 금기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다가도 황제가 되면 바로 충성서약을 바치는 대신, 새 황제도 바랑인 친위대의 과거를 따지지 않았다.
어쨌든 이들은 스위스 용병의 등장 이전부터 법적 고용주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혼란한 시기였고 배신과 반란이 매우 많았던 동로마 제국에서 그만큼 강하고 크며 결속력이 높은 집단이 대규모 반란을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더구나 혈통은 같지만 프랑스 왕국의 봉신으로 잔머리가 굵은 노르만인들이 툭하면 제국군의 뒤통수를 쳐댄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었고, 황제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들었다.[15]
바랑인 친위대는 전원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주로 도끼와 방패로 무장했는데, 황녀 안나 콤니니의 기록을 따르면 쇠사슬로 된 체인메일을 이용해서 중갑을 착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이들은 도끼뿐만 아니라 롱소드와 롬파이아[16]로도 무장했다고 한다.
후기의 바랑인 친위대(맨 좌측)를 묘사한 그림 출처 |
2.1. 활약
사실 이들이 이름을 날린 대규모 '전투'는 얼마 없다. 그럴 만한 것이 황제의 친위대인데, 이들이 참전할 정도로 큰 회전이 쉽게 안 터졌기 때문이다.[18] 바실리오스 2세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포카스 내전을 종식시킨 계기가 된 아비도스 전투나 요안니스 2세가 튀르크계 페체네그족을 격파한 베로이아 전투 정도이다.[19] 하지만 참전한 전투마다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칸나이 전투[20] 당시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니스와 바랑인 친위대를 파견하여 노르만 기사대를 격파했고, 역사적인 만지케르트 전투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 셀주크 튀르크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제4차 십자군 전쟁때도 침략자들에 맞서 용맹하게 저항했다고 한다.이들이 치른 전투들 중 가장 유명한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랑인 친위대가 패인을 제공한 디라키움 전투이다. 이 전투에 투입된 바랑인 친위대는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이끈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과정에서 숙청을 피해 살아남은 앵글로색슨 전사들로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어찌나 전투의지가 충만했던지 석궁 집중사격을 맞으면서도 전열을 유지하며 전진했고, 당대 최고의 충격기병 집단인 노르만 기사대의 돌격을 정면과 측면으로 연이어 받고도 모조리 씹어먹으며 패퇴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중세 기병을 맞상대할 수 있는 최초의 보병이었던 스위스 할버드병과 스코틀랜드 파이크병이 등장하기 200년도 전의 일이었다. 그마저도 스위스 할버드병과 스코틀랜드 파이크병이 산악 지형과 습지 지형에서나 전력을 냈던걸 생각하면 가히 전쟁사에 길이남을 전설적인 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쫓기며 패주하던 노르만 기사들이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내이자 당대의 여걸이었던 시켈가이타의 대갈일성에 재집결하여 반격을 가하자 밀리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근처 성당에 들어가 저항했다. 그러자 로베르 기스카르는 성당에 불을 질러 이들을 불태워 죽였다. 귀중한 정예부대를 통째로 잃은 알렉시오스 1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채 패퇴하고 말았다.
바랑인 친위대의 전투 스타일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면, 자신들의 고향인 북유럽과 잉글랜드에서와 같이 엘리트 보병으로서 전투에 임했을 확률이 높다. 많은 역사가들이 흔히 펠레키포로이 바르바로이(pelekyphoroi barbaroi), 즉 '도끼를 진 야만인'이라고 묘사했던 만큼 배틀액스와 아밍 소드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친위대들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칼을 찬 모습으로 잘 묘사되는 편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며 현지 문화를 받아들인 이들은 트라키아인들의 팔크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황실 근위대라는 특징으로 인해 마상에 올라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도 흔하게 등장한다. 상기한 페체네그족과의 베로이아 전투에서도 처음에는 기병들과 함께 돌격했다가, 황제가 하마 전투를 지시하자 내려서 전진했다는 묘사가 나오고, 훗날 제4차 십자군 당시에도 말을 타고 성벽 위를 돌아댕겼다는 라틴인들의 기록이 있다. 아마도 기동을 위해 말을 타다가 전투 시엔 하마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와 숙위 외에 첩보 업무를 수행한 사례도 있다.
3. 서브컬처에서의 등장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의 바리 미션에서 바이킹족으로 등장한다.[21] 항목 참조.
- <미디블2: 토탈 워>에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개사기급이다. 그러나 양손무기를 쓰는데 특유의 모션 때문인지 효율성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던 것이 <킹덤즈 크루세이드>에서는 양손무기가 버프를 받으며 크루세이즈 최강 보병의 위치를 차지했다.
- <미디블 토탈 워>와 비슷한 시대 배경을 다루는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등장한다. 용병단으로 등장하며, 다른 용병단과는 달리 동로마 황제의 봉신이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만이 동원할 수 있고, 다른 용병단과 달리 '고용'이 아닌 '동원'이기에 고용비용 및 유지비용도 저렴하여 동로마 플레이에서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토탈워 시리즈>처럼 각 유닛마다 고유 스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병종 구성이 중보병 중심이라 성능도 상당히 좋은 편으로, 그리스 문화권의 고유 상비군인 카타프락토이(중기병+궁기병)을 양익에 배치하고 중앙에 바랑인 친위대를 배치하여 중앙이 버텨주는 사이 양익이 적을 포위섬멸하는 모범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 사용은 동로마 플레이의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그러나 패치마다 너프에 너프를 거듭하면서 초기와 같은 비범한 제국의 위용은 더이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영지가 개발될 수록 징집병의 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용병단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규모가 성장하도록 설정되어 있는데 이 성장률마저 다른 용병단보다 낮다. 역사적 라이벌인 이슬람의 맘루크[22]에 비교하면 규모가 영 작아서 좀 아쉽다. 물론, 아직 동로마가 제국의 위용을 잃지 않은 중세 초중반 배경일 때에는 국력으로 극복하면 상관없지만.
또한, 캐릭터 개개인 단위의 이벤트가 충실한 게임답게 플레이어들을 즐겁게 해 줄만한 깨알같은 이벤트도 많이 준비되어 있다.
동로마 황제로 플레이할 때 공주를 제때 결혼시키지 않으면 친위병과 눈이 맞아서 결혼시켜 달라는 이벤트가 종종 발생하여 위신에 약간의 타격을 입지만 결혼을 허락할지, 아니면 내 딸을 넘본 야만인 촌뜨기 친위병 놈의 목을 쳐서 딸의 방 창문에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둘지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북유럽(분화 이전의 노르드 문화, 또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문화) 영주로 플레이할 경우 자식들이 바랑기안 가드에 입대하고 싶어하는 이벤트가 몹시 자주 발생한다. 허락해 주면 위신을 얻고, 못 가게 잡으면 위신을 잃는다. 이렇게 바랑기안 가드에 입대한 인원들은(당대 최고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넓은 세상 물을 먹은 덕분인지) 외교력 +2에 무력 +1 효과를 주고 같은 트레잇을 단 인물들끼리 관계 보너스를 받는 '바랑기안 가드' 트레잇을 얻게 된다. 이게 북유럽에서 유행하는 무슨 유학 코스라도 된 것인지, 워낙 입대자가 많아 노르웨이 왕, 스웨덴 왕, 덴마크 왕이 사이 좋게 바랑기안 전우회 소속인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종종 이슬람 제국과 혈전을 벌이는 동로마군의 일익을 초상화에 금테를 두른 북유럽 왕국의 국왕께서 지휘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23]
또 이 외에도 바랑기안 가드 이벤트 체인에도 깨알같은 이벤트가 많은데... -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했던 아들이 몇년 뒤 돌아오면서 '공훈을 세운 자에게 너그러운' 그리스의 왕(=동로마 제국 황제)이 하사한 막대한 금화를 롱쉽 한가득 실어서 아버지에게 가져다주거나[24]
- 이상한 갑옷과 창을 든 전사가 내 호위병들을 단숨에 제치고 들어와 날 껴안길래 잘 들여다보니 전쟁터에서 어떻게 단련했는지 흉터[25]도 생기고 무력이 무려 +4 된 용사가 된 아들이었다거나
- 여러 번의 전투에 참전하면서 미클라가르드(콘스탄티노폴리스)와 세르클란드(이슬람 땅)에서 자주 쓰이는 전략 및 전술을 배워와 뛰어난 전략가가 되는 등.
- 세르클란드 땅에서 전사하여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거나
- 동로마 제국의 전쟁에 휘말려 눈이 뽑히고, 거세당한 채 돌아온다거나[26]
- 그리스 여자랑 결혼해서 현지에 정착하겠다고 편지를 보낸다거나
- PTSD에 빠져서 악몽에 시달리는 폐인이 되어 돌아오거나
- 아버지의 종교와 문화를 버리고, 그리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인채 돌아오거나
- 몸 성히 돌아오긴 했는데 영문모를 그리스식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다니는 괴짜가 된다거나[27] 등.[28]
이런 훈훈한 이벤트도 있는 반면, 골치아픈 이벤트도 많이 있는데...
물론 적당히 복무하다가 돌아온다거나, 동로마 여자랑 결혼해서 데리고 오는 등의 적당한 결과도 있어서, 일이 꼬여서 입대한 아들들이 죄다 골치아픈 이벤트에 휘말려 적당한 계승자가 없어지지만 않는 한 상당히 재미있다.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바랑인 친위대가 용병으로 등장하며, 그리스 문화 용병이다. 가문의 일원을 바랑인 친위대에 보내는 것은 플레이버 팩 <북해의 군주>에서 추가되었으며, 바랑인 트레잇을 얻고 동로마 제국에서 복무하는 등 2와 비슷하다.
- <토탈 워: 아틸라>의 모드인 Medieval Kingdoms Total War 1212 AD에도 동로마 제국 계열 국가들의 병종으로 등장한다.
양손도끼나 양손둔기 등으로 중무장한 보병대로 나오며, 역사적인 고증대로 복장 역시 티어가 올라감에 따라 점점 찰갑에서 서유럽식 판금갑옷으로 교체된다. 또한 시대적으로 후기에는 잉글랜드인들을 많이 채용했다는 점 역시 재현하여 최고 티어는 유닛 이름이 앵글로바랑기로 바뀐다.
- 핀란드의 포크메탈 밴드 Turisas의 <The Varangian Way>와 <Stand Up and Fight> 등의 앨범 2개는 모두 바랑인 친위대에 대한 앨범이다.
<The Varangian Way>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드니프로 강을 통해 동로마 제국까지 가는 바랑인들의 모험에 대한 컨셉 앨범이며, 후속작인 <Stand Up and Fight>는 이어지는 바랑인 친위대 및 바랑인 친위대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위까지 주장한 노르웨이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 등에 대한 곡이 담겨져 있다. 해당 앨범들은 핀란드 내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Stand up and Fight> - 차트 5위, <The Varangian Way> - 차트 17위)
-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동로마 문명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문명 3>이고, 고유 유닛이라는 시스템이 처음 생긴 것도 3편인데다가 동로마를 대표하는 부대이니만큼 바로 나와도 좋을 듯 했지만, <문명 3>에서 <문명 5>에 이르기까지 드로몬이나 카타프락토이에게 고유 유닛 자리를 내어주고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로마 제국 지도자들의 대사로도 언급되지 않을 정도이다.[29]
이러다가 <문명 6>의 비잔티움 문명의 지도자 바실레이오스 2세가 타그마라는 신규 유닛을 지도자 유닛으로 가지고 나왔는데[30], 상술되어 있듯이 바랑인 근위대가 타그마에 속한 부대이고, 게임 내의 백과사전인 《시빌로피디아》의 타그마 항목에도 이렇게 언급되어 있기에 굳이 우기자면 간접 출연했다고 할 수 있다.
드디어 직접적으로 나오게 된 건 <문명 6>의 리더 패스 DLC에서 추가된 노르웨이 문명 지도자 하랄드 하르드라다의 신규 페르소나이다. 이 페르소나의 이름이 바랑인이다. 지도자 특성은 본 항목의 이름과 같은 바랑인 근위대로 종주권을 보유한 도시국가의 유닛을 헐값에 징병할 수 있게 하며, 이렇게 징병한 유닛으로 적 유닛을 제거하면 다양한 자원을 제공한다. 지도자 어젠다는 《하랄드의 사가》(Harald's Saga)로, 도시국가와 친한 문명을 좋아하며 그렇지 않은 문명을 싫어한다는 내용이다. 나름대로 유용하고 쓸 만한 보너스이긴 한데, 노르웨이 문명 자체의 성능이 조금 어정쩡한지라[31] 강력하다고까지 평가하기는 어렵다. 한편 바랑인 근위대는 동로마 제국에 고용된 신분이었지 용병을 부리는 고용주가 아니었는데, 작중에서는 입장이 거꾸로 된 감이 있다.[32]
- 한국의 대체역사물에선 동로마 제국의 상징과 같은 존재인 걸 반영해서 소설에서 동로마가 나왔다치면 거의 반드시 등장하며, 바랑인 근위대 소속 등장인물도 약방의 감초급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선 멸망하고 나서 재건된 동로마 제국에서 함께 재건되기도 한다.[33]
- <HUMANKIND>의 중세 상업 지향 문화인 동로마의 상징유닛으로 등장한다. 명칭은 Varangian Guards 그대로이고, 바랑인 근위대로 번역되었다.
(인게임 내 짧은 설명) 바랑인 근위대는 충성을 맹세한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하여 편성한 조직으로, 용맹함과 충성심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휴먼카인드 백과사전》의 설명) 바랑인 근위대는 황제의 경호원 역할을 수행한 동로마의 정예부대였습니다. 이들은 긴 도끼와 칼, 활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로 여겨졌습니다. 이 부대는 바실 2세에게 반기를 든 바르다스 포카스,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의 난 이후 창설되었습니다. 988년,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고자 여동생 안나 포르피로예니타를 넘겨주는 대가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6,000명의 병사를 지원받았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스칸디나비아인들이었고, 부대의 이름도 여기에서 기인했습니다. 동로마인들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을 "바랑인"이라 칭하였으며, 이 이름은 훗날 북유럽에서 온 용병들(노르만인, 색슨인 등)에게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랑인 근위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인 하랄 하르드라다는 바랑인 근위대장으로 복무한 후 1046년에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중보병(Heavy Infantry)을 연구할시 생산 가능하고 전투력이 38로 기본 유닛인 장검병보다 전투력 3 높고, 명예규율(Honor Code)이라는 바랑인 근위대와 구성된 부대의 퇴각을 방지하는 특수능력을 달고 있다.
- 《빈란드 사가(만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인 로알드(뱀)는 미클라가르드의 전사였다는 본인의 발언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한때 바랑인 친위대에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며 곡도를 사용한다.
- 유비소프트의 게임 포 아너에 바랑기안 친위대(포 아너)가 등장한다.
- <Warhammer 40,000>에 등장하는 스페이스 마린 챕터 중 바이킹 신화를 모티브로 삼는 스페이스 울프는 대성전 시절 프라이마크의 친위대를 바랑인 친위대에서 이름을 딴 '바라기르 터미네이터'라고 불렀다. 또한 <워해머 판타지>에서는 아카온의 최정예 카오스 중기병대가 '바랑가드'란 이름을 달고 있다.
4. 여담
- 상술했듯이 바랑인 친위대는 종종 로마 황제로부터 자주빛 비단을 하사받았는데, 6세기 무렵 동로마 제국으로 비단 직조법이 전파된 이후 비단(견직물)은 동로마 제국 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 전매품으로 다뤄졌고, 반면 중세 전기~중기 동방세계에 비해 경제=산업적, 문화적, 학문-기술적 수준이 뒤떨어졌던 서유럽에는 비단 직조법이 전파되지 않은 상태였다.[34] 게다가 이 천을 자주색(보라색)으로 물들이는 염료인 티리언 퍼플의 생산법 역시 동로마 제국 정부가 절대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는 상태였다.[35] 이때문에 당시(10~11세기) 티리언 퍼플로 물들인 최상급의 자줏빛 비단은 생산지에서도 같은 무게의 금값에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서유럽에서도 특히 매우 춥고 후진 변방이었던 북유럽에서 이러한 옷은 단순히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하고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36] 북유럽은 춥고 습해서 뽕나무가 없고 누에를 치지 못하니 그냥 비단도 황금 이상의 사치품이었는데 자주색으로 물들인 비단이었다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황제와 제국 정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선물로 이 귀한 자줏빛 비단을 애용했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의 친위대로 복무한 사람'이 금실로 수놓인 자줏빛 비단 망토를 걸치고 돌아왔다는 것은 '성실하게 복무하며 혁혁한 공훈을 세운 보답으로 황제에게 매우 귀한 선물을 하사받았다'는 뜻이었다. 즉 물건 자체의 가치도 대단하지만 상무적이고 의외로 법(특히 상호간의 계약)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던 북유럽인(대표적으로 바이킹)의 사고방식에서 '먼 땅으로 가 용맹을 떨치고 공훈을 세워 그 보상으로 더없이 귀한 선물을 받아 돌아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멋지게 성공한 사나이의 증거였던 것이다.
- 바이킹의 기록에 따르면, 바랑인 친위대 중에서 하랄 하르드라다라는 사람이 황제의 사무실에서 직접 봉급을 받고, 황제 미하일 5세를 시해한 뒤, 공주를 유괴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나중에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어디선가 들어봤다 싶은 역덕이라면,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해럴드 2세에게 패배해 전사한 그 사람이 맞다. 다만 이 일화는 동시기 동로마의 역사서들과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동로마의 역사서들조차 하랄 하르드라다가 쫓겨났다는 것만 일치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거짓일 가능성이 꽤 높다.
-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병력 일부분이 친위대에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노르웨이의 왕 시구르 1세가 이끄는 6,000명의 십자군은 1107년 노르웨이를 출발해 예루살렘 왕국에서 활약한 뒤 육로를 타고 노르웨이로 돌아가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여기서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고, 노르웨이와는 다른 선진적 환경에 반한 많은 병사들이 바랑인 친위대에 용병으로서 입대하려고 했다. 시구르 1세 역시 바이킹의 후손으로서 용맹을 인정받아 먼 이국에서 용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이킹의 영광이라 여기며 이를 매우 흔쾌히 수용했다. 시구르 1세는 황제가 제공한 명마와 보석을 여비로하여 육로로 덴마크 국왕을 접견한 후 매우 낭만있던 원정을 끝내고 즐겁게 자신의 노르웨이에 돌아갔다.[37]
-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저서인 《역사》에도 바랑인 친위대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 친위대원이 트라키아인 여성을 겁탈하려다가 저항하던 여성이 친위대원의 창을 빼앗아 죽인 일이 있었다. 이 행위는 정당방위였고 바이킹들은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인지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한 친위대원의 소지품을 동료들이 모아서(사죄금 형식의 보상) 그 여성에게 전달했다.[38]
- 여담으로 동로마 제국/군대의 복원도들에서 볼 수 있듯 동로마군의 병사들은 가슴 부분에 가죽으로 된 하네스를 착용해서 호버크의 중량을 분산시키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는데, 이 하네스를 일명 바랑인의 브라(Varangian Bra)라고 불렀다(...) 물론 브래지어는 원래 속옷이 아니라 팔/가슴 보호구를 뜻하는 의미였지만, 생김새도 브래지어 같이 보이다보니 간혹 역덕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쓰이기도 한다. 참고로 저 하네스는 바이킹들이 아닌 페르시아 쪽에서 전해졌다. 이미 이전 기록이나 프레스코에서도 동로마 병사들은 이 하네스를 흔히 이용했는데 바랑인 친위대가 차고 다니는 것이 유명해지면서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1] 영어로 '우리'를 뜻하는 'Our'와 같은 어원이다.[2] 마케도니아 왕조의 제9대 황제[3] 이 자도 바이킹 출신이었다.[4] 당시 동로마 제국이 외국에 절대 넘겨선 안 될 세 가지로 콘스탄티노스 7세가 규정한 내용 중에 있는 포로피니예니타(황실의 공주)를 블라디미르 1세에게 넘겼다. 하지만 이 딜(?)로 키예프 공국을 필두로 한 루스계 공국들이 정교회로 개종했고, 그 인연으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 직전까지 동로마 제국과 루스계 공국들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5]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북유럽식 표기로, 중세 노르드어로는 '거대한 도성'이었다.[6] 당시 기준으로 금실과 자줏빛 염료는 평범한 천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값진 물건이었으므로, 망토의 소재는 당연히 비단이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인 셈이다.[7] 바론 바이킹들의 Norse Futhark 룬 문자로 적힌 글귀인데 9세기쯤에 새긴 듯하다. 뜻은 Halfdan carved these runes 혹은 Halfdan was here으로 해석되는데 즉, 'Halfdan이 쓰고 감 혹은 왔다 감'이라 적힌 낙서였다.[8] 지금은 베네치아에 있음[9] 출처 - 《비잔티움 : 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10] 1015년부터 1130년까지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한 사람의 룬 비석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에는 북유럽 지방에서도 룬 비석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문서로 남아있거나 동로마의 기록으로 전해진다.[11] 테인(Thegn) : 앵글로색슨 7왕국 고유의 하급귀족 가신병[12] 이는 원래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섬 도래 이전 로마 제국령 시절, 브리타니아의 원주민은 켈트족이었기에 로마인들이 브리타니아인을 켈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13] 《모레아 연대기》에서는 1259년까지 언급이 된다. 다만 이것이 제4차 십자군 이전까지의 그 바랑인 근위대 모병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각 요충지에 파견되었던 소수의 바랑인 분견대들을 다시 중앙에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14] 마누일 2세 시기에 사신의 자격으로 유럽으로 온 동로마 제국의 관료가 자신들의 나라에 도끼를 든 잉글랜드인들이 있다고 언급을 했다. 이를 보면 최소한 마누일 2세 시기까진 우리가 아는 형태의 바랑인 친위대가 유지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5] 이 부분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에서 망명 이방인 집단인 바랑인 친위대가 가졌던 입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대 기준으로 고도화된 정치 시스템을 갖추었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만큼 내부의 정치적 알력이 강하고, 외부에서도 노리는 세력이 많았지만 바랑인 친위대는 반란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반란이 성공한들 계약 위반으로 해고감이었던데다가 중후기 앵글로바랑기들은 다른 갈 곳이 전혀 없는 망명자였던지라 자손들의 일자리까지 위태로워질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이 점은 직접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기까지 했던 맘루크 등의 다른 외인부대들과 차별화된다.[16] 트라키아 지방에 전해지는 낫 형태의 검인 팔크스(Falx)를 개량한 무기이다.#[17] 진짜 기사가 바랑인 친위대에 합류하는 경우도 있었다.[18] 물론 수백 명 정도의 소수 바랑기안을 황제가 직접 장군들에게 파견해 싸우게 하거나 분견대를 성에 주둔시켰다거나 하는 얘기들이 흔한 걸 보면 그냥 장식은 절대 아니었다.[19] 짐마차를 방패삼아 활과 화살을 보관해두고, 스웜 전술을 구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페체네그족을 바랑인 친위대 480명이 요안니스 2세와 함께 돌격해 두꺼운 사슬갑옷으로 페체네그족의 화살을 튕겨내며 양손도끼로 짐마차를 부수고, 페체네그족을 도륙내어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20] 1,000년도 더 이전,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군을 격파한 칸나이 전투와는 다르다.[21] 위의 이미지를 보면 바이킹 특수 유닛 버서커와 맞아 떨어진다.[22] 게임상으로는 이집트 왕위를 가진 인물- 보통은 술탄 -의 봉신 용병단이다.[23] 바랑기안 가드 복무 중에 아버지가 승하할 경우 입대 중인 아들이 왕국으로 돌아와 즉위하게 되는데, 시스템상 이 귀환 시간에 딜레이가 없다. 즉, 아버지가 승하하면 바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 그런데 이 아들이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 이었을 경우,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지휘관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전투를 지휘하게 되는 것. 사실은 일종의 버그에 가깝다.[24] 가난한 북유럽 영주의 기준에선 정말 큰 돈이다. 그나마 왕급 작위면 모를까, 구석 백작 같은 경우는 몇십 년이 걸려도 모으기 힘든 막대한 액수인 경우도 있다.[25] 얼핏 보면 나쁜 트레잇같지만, 실은 매달 위신 보너스를 주는 좋은 트레잇이다. 특히 위신으로 건물을 올릴수 있는 부족정에선 정말 중요하다.[26] 동로마 제국으로 플레이할 경우 바랑인 친위대원 중 한 명이 하필 공주랑 눈이 맞아서 연인이 되는 이벤트가 있다. 이때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주어지는 선택지 중에 그 친위대원의 눈을 뽑고 거세해버리는 선택지가 있다. 그래서 그 이벤트와 연관된 이벤트 아니냐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27] 출산율 -15%, 봉신관계도 -5, 같은 트레잇끼리 관계도 +30[28] 아마 동로마 제국이 고대 시절 동성애로 유명했던 그리스 지역이 주 영토라 넣은 개그성 이벤트로 보이는데 실제 고증대로 따지면 적합한 이벤트가 아니다. <크루세이더 킹즈 2> 배경 시기의 그리스 지역은 기독교 전파와 그에 따른 황제들의 동성애 탄압으로 동성애 기조가 사라진 상태였다. 즉, 동로마에 가서 동성애를 배울 수 없으며, 설령 배웠다하더라도 거기서 바로 처형되지, 몸 성히 돌아올 수가 없다.[29] 다만 지도자마다 개성이 풍부한 대사를 구사하게 된 것은 <문명 6>에 들어와서이긴 하다.[30] 컨셉면에서는 <문명 4, 5>에 나왔던 카타프락토이의 연장선이다.[31] 전반적인 보너스가 해군 쪽에 몰려 있는 게 크다. 문명 시리즈는 대대로 해전의 비중이 실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는 전통 아닌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32] 징병한 도시국가 유닛하고 용병하고 무슨 관계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검은 부대'라는 용병군을 거느린 것으로 유명한 헝가리 왕 마차시 1세도 도시국가 징병과 관련된 보너스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어젠다의 원문을 보면 이 유닛들을 직접적으로 '용병들'(mercenaries)이라고 지칭한다.[33] 다만 여기의 바랑인 근위대는 밀라노 군 중 일부를 돌려서 재건한 것이라 잉글랜드나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아닌 밀라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다.[34] 서유럽의 사회문화적 발전상이 동방 세계를 따라잡기 시작한 기점은 대략 길드와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중세 후기 무렵이었다.[35]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은 지중해 뿔고둥(Murex)이라는 생물에게서만 추출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정말 복잡하고 노동 집약적으로 이루어져 다른 국가는 생산하기에 엄두도 낼수가 없는 염료였다.[36] 북유럽보다는 좀 더 부유했던 프랑스나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들도 황제나 왕, 교황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게 되면 '비단을 사는 것' 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전매품인 자줏빛 비단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사적인 거래로 살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꼭 사고 싶어했다. 동로마를 동경하던 프랑크인이 동로마 제국 정부의 전매품 통제령 때문에 비단을 구입할 수 없게 되자 순식간에 극단적인 동로마 반대파로 태세를 바꿔 동로마에 대한 폭언과 욕설을 가득 남긴 일화까지 있을 정도이다.[37] 십자군에서 노르웨이 십자군은 큰 공을 세우면서도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노르웨이인 수천여 명의 모집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38] 이 사건은 미국의 중세 드라마인 <미디벌 오디세이> 시즌 4에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