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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84호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
수량/면적 | 3구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백제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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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위치한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상(마애불)으로 백제의 불상 조각 작품으로 추정한다.세 불상이 모두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머금어 흔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불상으로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태안 마애여래삼존상보다는 조금 더 이후 시기 작품으로 추정한다.본래 바깥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잊힌 불상이었다가 1959년에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삼존상이 있는 서산 가야산은 백제시대부터 개심사 등 여러 절이 창건된, 일대에서는 유명한 산이다. 현재는 절터만 남은 사적 제316호 보원사지(普願寺址)도 가야산에 있는 오래된 절 터이다. 보원사는 여러 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유물들을[1] 보면 백제 때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 기간 융성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쇠퇴한 모양이다.
학자들이 절 터를 발굴 조사하던 1959년 4월 어느 날, 국립부여박물관 관장 홍사준은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혹시 절에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지, 산에서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나 석탑 따위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녔는데. 한 주민에게서 인(印)바위에 가면 웃는 산신령 조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그 주민은 삼존상이 산신령과 그의 두 부인들이고, 우측에 있는 부인이 앉아서 턱을 괴고 놀리자 좌측에 있는 부인이 화가 나서 돌을 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삼존상을 확인한 홍사준은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고, 이렇게 해서 1500년간 산 속에 있던 삼존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든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풍부한 입체감과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삼존상은 높이 2.8m 석가여래입상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높이 1.7m 협시보살을 두었는데 우측의 보살은 보통의 보살입상이지만 좌측의 보살은 특이하게도 반가사유상의 형식으로 조각되었다. 반가사유상은 6~7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불상으로 많이 제작되었지만 마애불 중에서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2]
서산 삼존상의 본존불은 어떤 부처인지 그 자체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좌우 협시불의 형식을 보고 추정한다.
세 불상을 보면 먼저 우측의 보살입상은 보관을 쓰고 양손을 모아 보주를 든, 일명 봉보주(捧寶珠)보살상 형식인데 보통 관세음보살로 여긴다. 좌측 반가사유상은 일반적으로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석가모니 혹은 미륵보살로 본다. 이 해석을 적용한다면 우측의 봉보주보살상을 관음보살, 좌측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좌우 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을 두는 형식은 오직 이 삼존상에서만 나타나고 다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므로 서산마애삼존상은 매우 독특하다. 당시 백제인들의 독창적인 형식일 터이다.
서산 삼존상의 이러한 스타일 때문에 본존불이 누구인지 여러 해석이 있는데, 만약 좌측의 반가사유상을 일반적인 견해대로 미륵보살로 본다면, 본존불은 미륵보살과 가장 관련이 깊은 부처인 석가여래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봉보주보살상은 관세음보살이 아닌 제화갈라보살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 현재를 상징하는 석가여래, 과거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로 구성이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 이러한 추론은 삼존불이 미래-현재-과거를 상징한다는 법화경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는 이쪽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우측의 봉보주보살상이 7세기를 전후로 백제, 일본, 중국에서만 나타난 형식임을 근거로 관세음보살이라고 본다면, 본존불이 아미타불일 가능성도 있다. 서산 삼존상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만약 서방극락세계의 부처인 아미타불이 본존인 아미타삼존상이라면, 우측의 봉보주보살상은 정석대로 관세음보살이고 좌측의 반가사유상은 원래 대세지보살이어야 한다. 당시 백제인들이 대세지보살 대신 백제에서 인기가 많았던 미륵보살을 반가사유상 형식으로 조각했으리란 추정도 있다.
서산 삼존상은 반가사유상의 코, 팔 부분이 조금 훼손된 것을 빼면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이 불상이 이 자리에서 1500년 세월을 보냈음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 1965년에 삼존상을 보호하겠다고 보호각을 설치했는데 오히려 습기가 차고 백화현상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자 2005년부터 문과 벽을 부분적으로 철거했고 2006년에는 완전히 철거했다.
상술한 보원사지와는 물리적으로 거리가 가깝고 연대도 비슷하기 때문에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하지만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아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백제의 미소'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을 만든 사람이 김원용이다.
백제 불상의 얼굴은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미소 또한 현세적이다. 군수리 출토 여래좌상은 인자한 아버지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도 듣고 앉은 것 같은 인간미 흐르는 얼굴과 자세를 하고 있어서 백제 불상의 안락하고 현세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 중 가장 백제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 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 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세대ʼ 1960년 5월호
‘세대ʼ 1960년 5월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이 불상이 있는 지리적 위치가 백제와 중국간 교통, 교역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당시의 활발했던 백제와 중국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 삼존상 자체의 형식과 내용 등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삼존상의 미소
3. 외부 링크
4. 국보 제84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1] 현재 보원사지에는 석조, 당간지주, 5층석탑, 승탑, 승탑비까지 5가지 보물이 남아있다. 또한 1918년에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 1968년에는 금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되었다.[2] 문경 관음리 석조반가사유상, 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 정도가 있으나 서산의 삼존상과는 조각 수준이나 보존 상태가 크게 차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