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8:00:07

유교/비판과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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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당대의 비판
2.1. 도가의 유교 비판2.2. 묵가의 유교 비판2.3. 안영의 비판
3. 제사, 삼년상 집착
3.1. 반론
4. 여성에 대한 편견과 가부장제5. 사상 강요6. 과학 발전 저해
6.1. 반론
7. 실용 지식과 상공업 발전 저해(과도한 문치주의)
7.1. 반론
8. 국수주의9. 맹목적인 복종 강요
9.1. 반론
10. 습합 논란11. 유교의 과거지향성12. 비판에 대한 의견1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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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교는 현대에 들어서 여러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비판들 가운데 합리적인 비판들도 있으나 현대에 일어나는 병폐들을 모두 유교의 탓으로만 몰고 가는 비합리적인 비판들도 같이 섞여 있다. 아래는 그런 유교에 대한 현대의 여러 비판들과 그에 대한 여러 반론들에 대한 내용이다.

2. 당대의 비판

유교는 당대 다른 사상들경쟁하며 서로 비판을 주고 받았고, 또한 여러 사상가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2.1. 도가의 유교 비판

공자노자에게 예禮에 대해 물었다.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지고 오직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 사기열전 中

공자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인仁이 존재하고, 그 보편적인 본질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는 예禮를 따를 것을 제안했다. 공자에 의하면 이 예禮는 모두가 따라야 할 기준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 부분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다. 그런데 공자는 예禮라고 하는 특정 교화 체계를 내세우고 모든 사람을 거기에 합치려고 한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한 장치가 될뿐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기준을 확보하고 모든 인간이 일치해나가는 것이 천명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의 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노자는 이 기획 자체가 필시 가치론으로 빠져 구분하고 배제하는 기능을 피하지 못한 채 새로운 갈등의 원천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2.2. 묵가의 유교 비판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 지식인들은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묵자는 공자가 주장하는 인仁은 엘리트주의적이며, 결과적으로 임금, 주인만을 귀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백성, 하인은 배제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제후국들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부모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공자가 제시한 인仁으로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종식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비록 천하의 도적들에게 이르러서도 역시 그러하다. 도적은 자신의 집은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집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집의 것을 훔쳐 그것으로 자신의 집을 이롭게 한다. 도적은 또 자신은 사랑하면서 남은 사랑하지 않는다.

또한 묵자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 지식인들이 입으로만 인과 예에 대해 말하면서, 실제로는 백성을 위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묵자는 대안으로 모든 이를 향한 차별없는 사랑인 겸애兼愛와 실천적 사랑을 제안했다. 사람들이 서로 평등하게 사랑해야 하며, 입으로만 사랑을 떠들게 아니라 실제로 적극적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쳐야 춘추전국시대의 난세가 종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묵자는 공자가 요구하는 삼년상과 화려한 장례식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다. 공자가 가르치는 방식대로 장례를 치르려면 많은 시간과 재산이 들 수 밖에 없는데, 당시 대부분의 백성은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와 재산이 없었다. 공자가 요구하는 삼년상과 화려한 장례식은 허례허식에 불과하며,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귀신은 없지만, 군자는 제사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공자의 제자들은 말한다. 귀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제사의 예를 배우라는 것은 마치 손님이 없는데도 손님 접대의 예를 배우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묵자는 공자가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지니면서 한편으로는 제사를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2.3. 안영의 비판

「공자가 제齊나라에 가서 경공景公을 만나 뵙자, 경공은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이계 땅을 봉지로 내려주려고 안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안영은 이렇게 반대하였다.

"안 됩니다. 저들은 오만하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이들로서, 아랫사람을 교화시킬 수 없습니다. 또 백성을 느슨하게 하여 백성과 정치를 친밀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명天命만 세워놓고 일에는 게을러, 직무를 맡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장례에 너무 돈을 들여 백성과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며, 상喪을 너무 오래 끌어 슬퍼하느라 세월을 허비하니,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안으로는 스스로 실행하기 힘든 것을 감추면서, 밖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유자儒者입니다. 그래서 복장을 특이하게 하여 얼굴을 꾸미기에만 힘씁니다. 따라서 무리를 이끈다거나 백성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훌륭한 현인들이 사라지자 주나라가 쇠퇴해진 것입니다. 위의威儀만을 중시하자 백성의 행동은 천박해지기 시작하였고, 명성과 즐거움만 번드르하게 꾸미자 세상의 덕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공구孔丘[1]는 명성과 꾸밈으로 세상을 현혹시키며, 음악과 춤을 수식하여 무리를 모으고, 사람 사이의 예가 어떠니 하고 복잡하게 하여 의표儀表의 시범을 보이며, 옷깃을 어떻게 하느니 하며 예절에 힘써 무리에게 뽐내고 있습니다. 많이 배운다고 하면서 세상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많이 생각한다고 하면서 백성을 도와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명을 두 배로 늘린다고 해도 그들이 요구하는 교육을 다 배울 수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요구하는 예절을 다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재물을 쌓아도 그들이 말하는 즐거움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꾸미고 사술을 부리면서 세상의 임금들을 현혹시키고, 명성을 풍성히 하여 백성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는 세상에 보일 수도 없는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교화도 결코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런 자에게 봉읍을 주어 우리 제나라의 풍습을 바꾸게 한다니, 이는 무리를 인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도가 아닙니다."

경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좋소!"

그리고는 공자에게 그저 후한 예물만 주고 봉지 하사의 일은 유보시킨 채, 그저 공경히 만나면서 그의 치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안자춘추> 中

공자를 만난 제나라 경공이 공자를 마음에 들어해 그에게 봉토를 하사하려 하자, 재상 안영이 이를 반대한 일화이다.

3. 제사, 삼년상 집착

안영묵자가 한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 특유의 제사, 장례식에 대한 집착은 이미 공자가 살아있었을 때부터 비판의 대상이었다.

3.1. 반론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安."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故, 不爲也. 今女安則爲之."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 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재아가 물었다.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너무 깁니다. 위정자가 3년 동안 예식을 시행하지 않으면 예식이 반드시 폐기되고, 3년 동안 음악을 하지 않으면 음악이 전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묶은 곡식이 다 할 무렵은 바로 새 곡식이 여무는 때입니다. 불씨를 뚫어 불을 피우는 것처럼 1년이면(期)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니 1년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공자께서 물으셨다.

"부모 돌아가시고 1년 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면 너는[2] 편안하겠느냐?"

"편안합니다."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무릇 군자는 상중에는 음악을 들어도 기쁘지 않고 어디를 거처해도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네가 편안하다고 하니 그렇게 해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께서 이르셨다.

"여(재아)는 인(仁)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 3년은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무릇 부모를 위해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천하에 통하는 상례인 것이다. 여도 태어나서 3년 동안 그 부모의 품에서 사랑을 받았을 텐데."
- 논어 양화편(陽貨篇) 21

하지만 막상 공자는 삼년상이 너무 길으니 1년만 하겠다는 제자 재아의 공개적인 거부를 허락하며,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을 생각해서 자식도 부모를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추모하라고만 했을 뿐, 삼년상 자체를 엄격하게 강요하거나 강제하지는 않았다.[3]

실제 해당 기록에서도 공자는 앞에서 분명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라고 재아의 요청을 허락했으며, 결국 끝까지 반항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굳히지 않는 재아에 대해 "여(재아)는 인하지 못하구나. 여도 태어나서 3년 동안 그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았을 텐데."라고 재아가 나간 뒤에 혀를 끌끌차는 모습만을 보여주었을 뿐[4] 재아를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3년상을 억지로 치르게 강제로 압박하거나 자신의 제자에서 파문하겠다는 식으로 삼년상을 명백하게 강요하거나 강제한 기록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재아는 이 사건 이후에도 공자에게 쫓겨나지 않고 공자의 제자로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으며, 공자의 면전에서 대들다시피 삼년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했음에도 이를 이유로 공자에게 심각한 괴롭힘이나 갑질 또는 파문 같은 보복을 당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공자는 '불문마'의 고사처럼 인간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만약 공자가 삼년상에 강하게 집착했다면 재아같은 제자가 그에게 대들다시피 반론을 제기하고 삼년상을 치르지 않겠다고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는 모습이나, 그러한 의견들 자체를 아예 용납도 하지 않고 또한 삼년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을 허락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일화에서 공자는 소탈하면서도 큰 틀을 지키는 범위라면 고지식하게 지키는 것보다 유연하게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종법적인(수직적인) 면이 강한 유교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강요'와 '갑질'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4. 여성에 대한 편견과 가부장제

논어 양화편을 보면 여자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버릇없이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몇몇 유교 옹호론자들은 이 구절이 앞뒤 맥락 없이 나오며, 누구나 마음대로 글을 집어넣고 뺄 수 있었던 시대상황, 그리고 공자의 태도들 볼 때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논어란 책 자체가 공자 자신이 저술한 것이 아닌 공자의 제자 중 하나였던 증자의 제자가 중심이 되어 각자 적어두었던 문서들을 편집해서 만든 공동저술이었고 진나라의 천하통일진시황이 대대적으로 법가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백가들을 탄압한 후유증[5]으로 전한 때 사람들의 전승 및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찾은 문서들을 바탕으로 복원했던 역사 때문에, 현존하는 논어는 전체적으로 앞뒤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며 비문이 꽤 있다.[6] 그리고 공자가 2,500여년전 사람인 것을 생각해 보자. 가부장적인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상식'이었고, 사방에서 전란이 벌어지던 그 시대에 무거운 중장비를 들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성에 비해 육체적으로 연약한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공자가 직접 그 말을 했든 아니 했든 이 발언은 일단 여성에 대한 편견은 맞다. 이후 조선왕조실록 원문검색 사이트에서 이 말의 한문 구절인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遜 遠之則怨[7]'만 검색해도 지겹도록 튀어나오며 조광조, 정철, 권근 등등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잘만 써먹어왔다. 유교가 사실 공자만의 학문이 아니고 맹자, 순자, 동중서 같은 후세의 수많은 유학자들이 참여한 일종의 공동철학이기에 유교와 남녀 차별이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은 분명하다. 뭐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화목함이 어쩌고 하는 경지를 운운하더라도 성별의 차이를 근거 삼아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별적인 사상이다. 당장 칠거지악같은 악폐습을 보자.[8] 그나마 조선에서는 삼불거를 두어 간통과 도벽을 제외하면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일이 일어나도 이혼을 못하게 했다지만, 칠거지악의 일부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었다. 가령 시부모를 잘 섬기는 것의 명확한 기준이 없고[9], 여기에 질투와 말이 많은 것 역시도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전근대의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그리고 가부장적인 문화들은 불교 문화권, 기독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처럼 인류 역사에서, 또 전 세계 곳곳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으로서, 유교도 그러한 여러 사례들 중 하나로 보아야 옳다.

실제로 석가모니(이하 부처) 또한 ‘삼장(三藏; Tripitaka)’에 수록된 기록을 보면 부처는 자신의 이모이자 계모였던 프라자파티 고타미(Prajapati Gautami)가 간청하는 ‘여성의 수계’를 결코 인가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부처의 계모이자 이모[10]였던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석가족 여인 5백여 명과 함께 와서 출가하여 도를 닦으려 하니 여성들도 교단에 받아들여 달라고 하였을 때 부처는 처음에 세 번이나 이에 대해 거절하였다. 결국 세 번씩이나 거절을 당하고도 물러나지 않고 덥고 먼지 많은 먼 길을 다시 찾아 온 이들 여인들을 애처럽게 여긴 아난다(Ananda)가 부처에게 여인들의 출가를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지만 그때에도 부처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부처의 최측근 시자였던 아난다가 강하게 끼어들어 프라자파티 고타미를 대신해 중재를 하였고 그 결과, 부처는 일련의 특별 규정, 이른바 <비구니 팔경계법(Garudhammas)>을 제정하였는데, 이 규정에서는 여성의 수계에 대한 조건들을 자세히 정해놓았으며 비구니들은 생이 다할 때까지 이 규정을 철저히 지키도록 강하게 요구받았다.[11]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이후 불교에서 여성은 그 본성상 결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아라한이 될 수 없다, 남자는 성불하지만 여자는 성불하지 못한다는 여러 성차별적인 사상들이 나오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가령 불교에서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는 사상이 구체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여인오장설[12]인데, 이는 부처의 32상 가운데의 제10상인 음마장상(陰馬藏相)의 조건이 여인오장설로 발전되었다고 주로 해석되는 편이다. 이 음마장상은 여래의 남근이 말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것인데 여자에게는 당연하게도 남근이 없으므로 부처가 될 수 있는 32상을 절대 구비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불교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기도 한 법화경에서조차, 여자는 일단 환골탈태하여 남자가 된 뒤에야 열반할 수 있다. 전통불교는 교리적으로 분명히 여성차별적이었던 것이다. 일종의 구원인 열반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유교나 기독교보다 더 악질적인 측면도 있다.

이렇듯 불교의 사례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의 쿠란에 있는 기록에서도 분명 성차별적인 구절과 기록들은 굳이 설명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자주 확인이 된다는 점에서, 전근대 종교와 사상들의 성차별과 가부장적인 시각은 인류 사회의 공통된 모습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결국 유교 또한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처럼 전근대의 사상으로써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5. 사상 강요

공자의 경우 효도를 중시했으나 맹목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증자 문서에도 나오는 일화를 보면 증자가 아버지 증점에게 잘못을 저질러서 맞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맞고만 있다는 이야기를 공자가 듣고 증자의 융통성 없는 효행을 나무란다. 그러나 공자 이후 유교는 증자, 맹자, 주자의 맥으로 이어졌기에 병든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거나, 굶는 부모를 위해 허벅지 살을 잘라 먹이는 등의 극단적인 효행이 강조되었다.

과거에 효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윤리학적으로 재검토되고 있다. 분명히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거나, 악의를 품고 해코지하는 경우도 있는데도 맹목적으로 효도를 강요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전근대적인 사상을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로 구체화시켰다. 그 외에도 형사소송법 제224조 및 제235조를 만들기도 했다. 이 법률로 인해 자녀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13] 부모를 고소, 고발 할 수 없지만 부모는 자녀를 상대로 자유롭게 고소, 고발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상대로 거짓 고소, 고발해도 자녀는 방어할 수 없다. 이 법률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무고죄로 고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위헌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헌법재판소유교적 전통을 이유로 들어 합헌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체화시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부분 엄연히 우리의 고유한 의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효’라는 우리 고유의 전통규범을 수호하기 위하여 비속이 존속을 고소하는 행위의 반윤리성을 억제하고자 이를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 2008헌바56

이것 역시 유교만의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다. 수많은 고대 문화권에서 자식은 당연히 부모의 소유물, 혹은 가족공동체나 가장의 소유물처럼 생각했고 그것을 올바른 윤리로 여기고 강조했다. 오히려 유교에서 많이 소개되고 장려되는 일화 같은 경우 결국 효행에 감동하여 계모와 화해하여 완전한 부모자식이 되었다 수준의 화해 스토리라고 한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가족공동체나 가장이 자식을 마음대로 썼는데 어쩌라고? 그게 올바르다 수준의 얘기 역시 많다.

또한 현대에 윤리학적으로 재검토되고 있다 한다면 기존의 전통적인 관념이나 풍습 가운데 윤리학적으로 재검토되고 있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지나친 효도 강요가 불합리한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서구 일부의 해체주의가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거나, 혹은 몇몇 이들이 이를 추종하는 것을 이유 삼아 모든 윤리적 관념을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윤리 관념 해체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지, 저 새가 해로운 새이므로 박멸시키려 노력했더니 어라? 하는 경우가 일어난다던가, 전통 도덕과 관념을 모조리 해체하자고 해서 다 해체하고 보니 남은 게 없더라는 촌극을 굳이 따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6. 과학 발전 저해

유교라는 사상이 과학 발전에 걸림돌이 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논리학, 과학적 방법론의 부재이다. 서양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밀한 논리학을 유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유교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논어, 맹자 등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유교에 묻혀버린 묵가, 법가 등에서 어느 정도 논리학의 씨앗이 보이는데 비해 유교의 경우 지극히 관념적이다. 인도 철학에도 존재하는 논리학[14]이 유교에는 부재한다. 단적인 예로 위키백과의 논리학의 역사 항목을 보면 기원전부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시조로 삼아 이븐 시나, 르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에 이르기까지 논리학을 꾸준히 발전시켜온 서구와 이슬람에 비해 중국은 분량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세 줄로 끝날 지경이다. 게다가 묵가, 법가의 한비자, 명가의 공손룡 등의 인물의 연구 결과일 뿐 유교의 영향은 아예 없다.

과학의 언어는 수학과 논리학인데 동아시아에서 수학은 관에서 나랏일하는 도구나 선비의 취미에 불과할 뿐이었지, 우주의 진리를 재는 잣대가 아니었다. 유학자들은 수학을 바탕으로 주장을 입증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중세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무엇보다도 논리학이 부재한 채 근거, 증명, 실험 없이 형이상학적 주장만을 반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유학자들은 난세를 개혁하기 위한 현실적, 실천적 합리성이 강했으나,[15] 유학에 내재된 합리성이란 괴력난신이나 미신을 멀리하고 현실 세계에서 실천적 삶의 방식을 계몽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회적 상식에 따르는 합리성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과학과 수학으로 얻어지는 합리성이 아닌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유교는 관념 일변도였다. 과학적 방법론이 부재하고 실험과 실천도 없으니 과학적인 탐구와 사고실험, 그에 따른 과학적 결과도 나올 수가 없던 것이다.

여기에 반론을 내놓는 사람들은 중국이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로 대표되는 4대 발명으로 유명하다는 것, 송나라 시절에는 톱니바퀴를 이용한 물시계를 만드는 등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유교 사회 아래에서도 과학적 발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증거로 쓰이곤 한다.[16] 그러나 동아시아 사회는 논리학의 부재 때문에 단순 반복적 개량이나 우연적 발견 이상의 영역, 고도의 실험과 증명, 통계가 요구되는 영역으로는 결국 나아가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과학적 방법론이 부재하고 실험과 실천도 없으니 과학적인 탐구와 사고실험, 그에 따른 과학적 결과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교가 지향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삼고 복고적, 과거회귀적 성향을 띄게 된다. 유교는 답을 현재와 미래가 아닌 과거 요순시대에서 찾는다. 공자부터가 '요순을 근본으로 삼고 문무를 본받는다'고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시조가 이 정도이니 유교=복고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유교의 과거회귀 성향은 뿌리 깊게 박힌 근본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에서는 검소한 삶과 함께 작은정부를 추구하게 된다. 유교는 백성이 고달프지 않게 일 벌리지 않고 사회를 유지만 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며 새로운 문물이나 제도, 유교 경전에서 유래하지 않은 사회적 변화를 꺼린다. 게다가 장인상인이 대접받지 못하거나 일정 역할은 하더라도 천시받는 경향이 있었다.[17][18] 서양 귀족들의 사치에서 나온 상, 공인의 이익이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시각에서 볼 때 이처럼 검약과 사치 금지를 강제하는 유교는 확실히 과학 발전을 저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양의 과학 발전사를 통해 비교해 보자면, 과학자들의 시초인 연금술사들은 납을 금으로 바꾼다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면 사실상 돈이 나올 구석이 많지 않았다. 특허제도가 갖춰지기 전이라 아이디어의 사용권 판매 등을 통해 돈을 뽑아낼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 귀족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독특한 기계들이나 취미, 전쟁 용품을 구매하여 서로 경쟁하면서 기술 발달에 기여했다.[19] 이를 통해 당시의 연금술사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얻으며 기술 발전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나마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유학자들이 기득권이던 동양에서는 이같은 사치와 욕망 추구를 통한 과학 발전은 힘들었던 측면이 크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욕망,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 지식에 대한 야망에서 나오는데 유교적 윤리와 가치관은 이를 가로막는 면이 크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선의 경우도 전술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유학자가 부의 추구와 사치를 죄악시했다. 조선 성종이 궁궐에 구리 수로를 좀 깔은 것 가지고 대간들이 잡아먹을 듯 달려든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해당 사례처럼 유학자들은 사치 없이 자급자족하는 작은 농본국가, 즉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삼았다. 이렇게 과거 회귀와 복고를 주장하니 새로운 기술을 추구하는 지식인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귀족이나 왕의 호기심일지언정 작은 수로라도 깔아보는 사회여야 수로 기술이나 상하수도도 발전하는 법인데, 유교는 그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경전에 의거하지 않은 변화나 시도를 엄격히 검열하는 학문이었음이 자명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동아시아의 내재적 과학 발전의 사례로 꾸준히 제시된다. 하지만 그들의 상당수가 비주류거나 재야 연구자였다. 간혹 특정 실학자가 명문가 출신이거나 관직에 올라 어느 정도의 고위직에 올랐다 한들[20] 국가의 방향성을 바꿀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실험 정도에 그쳤다. 실학자 중 상당수의 주장이 실상 성리학에 근거하며 상업을 억제하는 억말론, 폐전론 등을 주장했다는 점, 정전제 같은 은주시대에 근거한 철저한 유교적 현실개혁을 주창했음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정치세력화 할 수 없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정의 현실정치에 그들의 개혁 사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도리가 없었던 것. 유럽처럼 과학자, 장인, 상인, 공인이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며 다수가 주류가 되어 사회를 변혁시킨 사례와 조선의 실학은 동등하게 비교하기 힘든 것이다.[21] 마찬가지로 세종, 문종 시기가 조선사에서 이질적인 시대였을 뿐이지 사림이 집권한 뒤에는 기술을 잡기 취급하며 과학에 철저히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유학자들이라고 바보는 아니니 해외에서 조총, 홍이포, 감자, 고추 같은 신문물이 들어오면 뜯어보고 효용이 있는지 연구해 보는 정도는 하긴 했다. 그러나 운 좋게 유입된 외부 문물을 수동적으로 복제하고 그대로 쓰는 것에서 그쳤지, 그 문물을 토대로 새 영역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서구에서 머스킷이 후장총, 기관총으로 발전하는 사이 조선과 명, 청에서는 화승총을 근본적 개량 없이 마르고 닳도록 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22] 조선이야 자원이 부족했지만 명, 청의 경우 자원이 부족할 것도 없고 외부 유입이나 교류가 적지도 않았다. 돈이나 사람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으며 전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과 도전을 하도록 이끄는 사회문화적 동기부여가 매우 부족했던 것이다. 장인의 기술을 천하게 취급하며 어쩔 수 없이 사회에 필요하긴 하지만 유자가 나설 영역이 아니라고 벽을 치는 게 유교의 세계관이었다. 그런 마당이니 발전이 있었을 수가 없다.

조선 중, 후기 당대 유학자들의 핵심 관심사는 이기론, 북벌, 호락논쟁이니 하는 것들이었고, 관념적 탐구에만 철저히 몰두했다. 수학이나 천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간혹 나온다 한들 개인 차원의 취미에 그칠 뿐이었다. 교과서백과사전에는 정약용이 기계를 다루는 이용감을 두자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이용감이 실제로 설립된 바는 없고, 조선에서 기계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 성과를 낸 사례도 딱히 없다.[23] 정약용이 거중기를 개발했으나 거중기를 바탕으로 기계공학이 부흥한 바도 없고, 다른 지식인들이 그런 발견에 감명받고 노력했다는 사례도 없다. 그저 학자 혼자의 개인기였을 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신하들은 왕, 후계자의 관심사를 철저하게 사서삼경과 대학연의 등으로 돌리고 다른 기술은 잡기 취급하며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왕 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이 후대를 양성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사농공상적 질서 아래에서 기술자나 상인은 낮은 계급으로 취급했고, 장인들은 신분상승이나 부, 욕망의 실현 가능성이 없으니 혁신 없이 시키는 일이나 반복하는 처지였다.[24] 이처럼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유학자들이 기득권이던 동양에서 사치와 욕망을 통한 과학 발전은 힘들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유교에서 과학을 연구한다고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으나, 애당초 과학을 연구하려는 동기부여 자체가 적으니 분쟁이 벌어질 이유도 적은 것이다.[25] 꾸준히 일관되게 사회 하층민의 잡기 취급하는데 어떻게 야심과 재능이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작 뉴턴이나 하위헌스 같은 인재가 참여하고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비견되는 조선의 이황, 이이, 송시열 같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재들은 모조리 성리학적 담론에 몰두한 것이 현실이었다. 상류층을 제외하고 봐도 중세 유럽에서 명망있는 장인이나 상인은 부를 얻고 도시의 유지로서 행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조선의 장인은 그저 할당된 생산량이나 찍어내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에서의 과학 발전은 연은분리법의 발견처럼 우연히, 혹은 유교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이루어지긴 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주요한 과학 업적들을 살펴본다면, 조선 초기의 측우기혼천의 같은 관측기구, 역법 개정, 지리지 제정 등의 발전은 대부분 농본국가에서 농업을 지원하고 국가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다시 말해 우주나 자연법칙 자체에 대한 지적 탐구와 거리가 좀 있다. 조선의 과학은 농업, 천문 등 유교 사회에서 농사짓고 나라 돌리는데 필수적인 영역에서만 일정 수준의 발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외의 군사나 수학 같은 분야의 독자적인 발전은 조선 초기의 세종, 문종 시기에 국한되었다. 문종 사후 사림이 집권한 뒤 조선 사회는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유입된 외부의 지식을 분석하고 복제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외에 유학적 지식이나 세계관과 관계 없는 화학, 물리, 기계공학, 건축, 통신, 에너지, 산업 등의 분야에서는 암울할 정도로 발전이 미미했던 것이 현실이다.

정리하자면 과학 발전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사치, 욕망에 대한 금기, 국력진흥과 기술에 대한 거부감, 무엇보다도 논리학과 실험, 증명정신 부재로 인하여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과학 발전에 지장이 되었음은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6.1. 반론

동아시아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은 막상 가장 유학적인 국가였던 송나라와 성리학을 국학으로 채택한 승유억불의 조선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었다. 북송남송의 기술 발전과 경제적 발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며, 한반도의 경우만 보아도 유교적인 색채가 가장 강했던 조선시대에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화차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같은 언어학의 발전과 동의보감 같은 의학 발전 또한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서양과 비교하여 유교가 과학 발전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 많다고 평가 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이는 서양의 과학문명이 특이하고 독보적인 경우이지 유교가 딱히 다른 사상들과 비교했을 때 유독 과학 발전에 크게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 많은것은 아니다. 유교 문화권 뿐만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이나 힌두교 문화권, 불교 문화권 등등 유럽 문명을 제외한 대다수 문화권에서 자체적인 서양식 과학발전과 산업화에 모두 실패했음은 해당 문제가 유교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럽 문화권만의 특이한 사례라고 평가하는 것이 객관적이다.

유교가 과학발전에 크게 저해된다는 위와 같은 평가는 따지고 보면 오직 유럽 문명권과 비교할 때만 나올 수 있는 평가이며[26] 전근대 기준으로 보면 유교는 유럽 문명권을 제외한 다른 문명권들의 과학 발전사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앞서는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이는 한반도가 만약 유교 문화권이 아닌 이슬람, 불교, 힌두 문화권이었다고 가정하면 그러한 경우에도 과연 유럽만큼의 과학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하는 간단한 질문만 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러 사상들 중 유교만 유독 과학발전에 저해되는 사상이라는 편견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유럽화된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기에 오직 유럽의 기준만으로 다른 문화권들과 사상들을 재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서양식 사고관념에만 갇힌 채로 유교를 재단하고 평가하면서 여러 편견들과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유교 문화권인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빨리 과학 기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도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그런 것이지, 만약 끝까지 쇄국을 고집했다면 지금처럼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서양식 사고관념에 갇힌 채 재단하고 평가해서 편견과 오류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서구 사상사에 대해 학부 수준의 지식이라도 있다면 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양식 사고관념이 기반이라면 그렇게 평가할 수 없는 일이다. 서양식 사고관념에 제대로 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논리학의 부재에 대한 비판에서 과학까지 이어지는 비판을 하면서, 또 사회 분위기 등등의 정신적 태도가 문제인 것마냥 말을 한다는 것이다. 과학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논리학이 발전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과학이 발전할 수 있겠냐,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동양을 비판한 다음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고 과거지향적인 복고주의적인 성향이기에 과학이 발전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상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

논리학에 대한 이해도 별로 없다. 논리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천재의 창작물에 가까우며, 이슬람권 역시 논리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에 속한다. 인도 철학 역시 동양철학보다 논리학적인 풍모가 매우 짙은 것은 사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무에서 논리학을 창조한 것은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논리학을 창안한 것이지만, 동양 역시 따지자면 인도 철학인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논리학이 나올 만한 기반은 어느 정도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인도건 동양이건 논리학이 창안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천재의 등장을 논리학의 기반으로 돌려야지, 결코 유교의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몇몇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중국어와 서구어의 언어적 차이가 문제라는 쪽에 더 설득력이 있다.

하위헌스, 뉴턴 등의 학자들도 위키 수준에서 제대로 싣지 않아서 그렇지 관념적인 연구 역시 상당히 많이 수행한 인물들이다. 이황, 이이 등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저런 연구를 많이 했다. 옛 철학자들은 상당히 다방면의 연구를 수행했다. 깊게 알지 못한 피상적인 수준의 비판인 것이다.

또한 서양은 귀족 등 상류층이 자신들의 사치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적극 지원했다지만, 정작 그 서양에서도 이를 안 좋게 보는 시선은 있었다. 대표적으로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경우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화학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지만, 그는 세리로서 시민들의 세금을 착취하여 다이아몬드를 태우는 등의 실험을 했는데 이는 당시 시민들의 눈에는 사치로 보였고 결국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된다. 이런 식의 과학기술 연구와 발전이 마냥 옳고 좋은 것일까? 위 문단에서는 과학의 발전을 위해 그러한 고통이나 희생을 감내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로도 갈 수 있다.

7. 실용 지식과 상공업 발전 저해(과도한 문치주의)

조선시대의 사(士) 계층의 경우, 즉 관료 및 공무원 계층은 국가를 총괄하는 마스터플래너이자 기득권층이므로 어느 사회에서나 우대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文)적 자질을 지닌 지식인층을 공고화된 학습 체계를 통해 재생산하며, 결과적으로 실용 지식과 거리가 멀어지는 현상은 유교 문화권에서 강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유교의 영향으로 빠르게 이루어진 교육 시설의 보급과 학습 체계의 형성은 선진적이었다고 할 만하지만, 그 내용 차원에서는 신분제 및 안정된 사회와 결합하며 기존 질서 유지 및 실용 지식의 괴리를 불러왔으므로 복합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사농공상 순으로 선비를 우대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국가였으며, 이는 심각한 교역 쇠퇴와 경제 발전 지체를 가져왔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당시 조선은 중국, 일본과는 교류를 했으며 조선의 교역은 내부적인 요인보다는 명나라의 해금령과 일본의 센고쿠 시대 같은 외부적 요인들의 영향이 더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이 전기에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주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으로 기반 시설이 엉망이 되어 그랬다는 설명과 상업 자본 발전이 늦어서 그랬다는 설명이 있는데,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상업이 동아시아에서 이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고려 > 조선의 교체는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붕괴하면서 생긴 여파이기도 하다.

고려는 동아시아 무역에서 원-고려-일본의 중간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는 국가였다. 그러나 원 말기, 전 세계적인 흑사병 창궐로 실크로드가 완전히 망해버린다. 이에 따라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 무역의 중심이었던 원의 경제가 개판이 되는데, 당시 원은 세조 쿠빌라이 칸이 세운 '지원발행보초'를 통해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놓고 유통하고 있었다. 즉,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교초는 휴지쪼가리로 전락한다.

당시 교초를 가장 많이 갖고 있던 국가는 원나라, 그리고 원과 무역을 하던 고려 등의 주변국들이었다. 그런데 이 교초가 휴지조각이 되자 원과 고려의 경제가 큰 타격을 입는다. 원이 막북으로 쫒겨나고 중원의 새 지배자가 된 명나라는 국제 무역을 최대한 억제하고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으로 재편성하면서 교초를 완전히 폐지한다.

결국 경제붕괴와 지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고려의 국력이 쇠진하고 대신 조선이 세워졌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고려 때 세워졌던 상업과 국제무역 중심의 경제 인프라는 완전히 몰락한 상황이었다고 봐도 좋다. 그 상업 중심의 경제 인프라가 얼마나 끔찍한 피해를 불러왔는지 잘 아는 중국과 조선의 유교 사대부들은 상업에 투자하는 것을 꺼렸고, 이후 중농 위주, 자급자족적 정책으로 농업에 투자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역은 한 쪽만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 조선의 위정자들이 중상주의적 이념을 가졌다해도, 동아시아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에서 해외무역을 막는 정책(해금령)을 취한 이상 동아시아의 국제무역은 크게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조선의 상업은 관청을 중심으로 한 지역 단위의 정부-개인 거래를 활성화시키고, 다시 이를 조공 무역으로[27] 거래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게 된다.

또한 상업 종사자들이 너무 많으면 농사를 짓는 사람이 적어져 국가 경영에 해가 될 것을 염려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 상업은 엄밀히 따지면 본인이 생산 활동은 하지 않으며 그저 물건을 옮기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기에 천하게 봤다는 의견도 있고, 또한 공업은 일단 본인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긴 하니 상업보다는 덜 천하게 여겼다고 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근대[28]에는 기근이 거의 일상이었으므로 일단 식량을 만드는 농업보다 공업과 상업이 상대적으로 더 천시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오류가 있는 것이, 막상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고려나 통일신라보다 더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이 강하게 나타났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놋그릇[29], 자개, 칠기 등의 생활 용품이 시장에 출시되어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시대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잡은 조선시대부터였다. 고려는 물물교환, 현물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었다.

7.1. 반론

여기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문치주의인데, 유교의 경우도 실은 문치주의를 비판했다. 이는 양성지의 이야기 등으로 비판을 가했고, 이미 군인들에 대한 대접을 중시했고, 흔히 조선왕조에서 고려송나라의 경우 문아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많이 했다. 실제로 고려왕조에서도 이제현은 문아에만 치우쳤다고 비판했고, 이색의 경우는 무과를 공식적으로 두어 무신을 현행 수시채용이 아닌 공채로 뽑자고 주장했다. 고려의 이러한 문치주의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바로 1차 무인의 난[30]무신정변(2차 무인의 난)이었음을 생각해보자. 즉 군인들에 대한 처우와 보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교가 자체적으로 중시해왔다. 적군을 막기 위해서는 훌륭한 무관이 필요하고, 그 훌륭한 무관을 대접하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기 어렵다고 비판을 가했다. 당장에 정강의 변이나 무신정변 이전에 보여준 무책임의 극치를 달리던 유학자들에 대한 질타도 이후 명나라나 조선 왕조에서 해왔고 송나라나 고려 자체에서도 해왔다.

사실 무인들도 유교 사상을 중시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때문에 선비계층과 친하게 지내며 스스로 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또한 문인들 역시 무인들과 친하게 지낸 적도 있고 창칼을 들고 싸운 문관들도 제법 있었다.[31]

한편 전통 시대에 다른 지역의 대다수 지배층은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하여 그 과정에서 피지배층에게 피해를 준 반면, 상대적으로 유교 문화권에서는 학문에 권위를 둬 동시대 어느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고, 지배층 내부의 갈등에 의한 사회적 피해를 최소화 하였으며 유교의 빈자 구휼, 약자 보호 등의 순기능적 이념은 사회 안정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유교 국가들 역시 피지배층의 불만을 공포로 잠재우기 위해 능지형, 거열형, 오체분시 같은 가혹한 형벌을 실시했으며, 말 안 듣는 노비를 때려죽이는 등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책임을 면죄받는 지배층도 존재했다. 명분은 유교에서 취했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법가에서 빌려와 채워넣은 것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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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기에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32]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33]이 상당 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34]

그리고 후기에는 신분 간 상하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 되었는데, 몰락 양반이 많아지고 좀 더 자본주의적으로 바뀐 사회상 때문이었다. 이 때부터는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할 수 있었다.[35]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36]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인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단, 평민들이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고위직은 결국 인맥으로 연결된 명문가문 출신이 차지하여 결국 명백한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고위직을 인맥과 혼맥으로 연결된 이너서클이 차지하는 건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있었던 일로, 유교도 그런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유교가 문제였기에 이너서클이 생겼다고 할 수는 없다.

관료제 또한 매우 근대적인 체계였는데, 다른 문화권들은 19세기까지 매관매직이나 하고 있을 때[37] 조선은 이미 근대적인 실력주의 관료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동시대 유럽에서 시험으로 관료들을 선발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38] 당대 조선은 이미 과거제를 통해 관료들을 선발하고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처음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 때의 문제점들을 대폭 개선, 지역균형과 능력주의가 매우 절묘하게 섞인 합리적인 제도로 발전했으며, 소과에서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대과에서 점수로 줄을 세워 최종 합격자를 가렸다.[39]

역설적으로 조선시대 때의 신분상승이 이전에 귀족 사회적인 모습이 매우 강했던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 때보다 상대적으로 더 활발했던 것이다. 이는 유교가 신분제를 무조건 공고하게만 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차이가 있는 모습이다. 또한 '유교자본주의'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와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국가들의 빠른 경제발전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유교적 전통과 시스템 덕분이라는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유교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 또한 분명 존재함을 알 수 있다.

8. 국수주의

국수주의 사상으로 악용되기도 하는데, 유교의 화이론을 근간으로 하는 중화사상으로 동북공정과 여러 공정을 펼친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 이는 유교를 인륜의 실현을 위해 쓰기보다 선민사상 고취, 즉 민족적 우월감을 드높이는 수단으로 쓰기에 문제가 된다. 반면 식민사학으로도 쓰이는데, 일본은 존왕양이를 넘어 아예 존황양이라고 하면서 제국주의에 악용되는 수단이 되었고 이것이 양이론이 되며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추기는데 악용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교를 정치적으로 쓰기에 이러한 탈이 생기는 것으로, 유학자들은 그래서 정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정관정요보단 정치적 요소가 떨어지는 대학을 선호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유교를 정치이념의 도구로 전락시킨 원인이 되었다. 사실 조선에서도 홍건적반역자오랑캐로 규정하여 의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본시 화이론이니 양이론이니 하는 것은 침략자들에 대한 보호용으로 써야 하는데, 오히려 보복성 전투와 침략전쟁에 대한 명분과 상대 국가에 대한 멸시, 멀쩡히 온 사신을 원칙도 없이 가두거나 죽이는 것에 썼기에 문제라는 것이다.

가령 몽골 제국고려송나라일본을 차례로 침략해 벌인 짓거리만 봐도 화이론에 근거해 당대에는 몽골 제국이 오랑캐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는 행동이나, 역으로 침략행위의 정당성을 유교를 근거로 이용하면 오히려 유교를 욕먹이는 것 밖에는 안된다. 그 정관정요도 실은 유교를 과도한 국가주의 수단으로 부추기는데 문제가 있었다.

9. 맹목적인 복종 강요

유교에서 충효를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 이것이 불합리한 명령이나 악폐습을 합리화하며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한다는 비판이 있다.

지배계층과 군주들, 더 나아가 상급자나 윗사람들이 취사선택하여 자신들의 이념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는 것만 골라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불합리함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유교의 사상과 글들, 논리들은 어물쩍 넘어가거나 언급을 하지 않거나 아예 빼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명나라의 건국자인 홍무제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홍무제의 탄압 정국 속에서 맹자의 사상과 글들을 지켜내기 위해 명나라의 유학자들과 관료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자신을 죽이겠다는 황제의 살기어린 협박에도 굴하지 않으며 황제를 막아서고 직언했다.[40]

9.1. 반론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民)은 복종하지만 백성(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백성이 인군을 버리고 따르는 데에 있어서는 털끝만 한 여지도 용납되지 않는다."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하민지약야 불가이력겁지야 지우야 불가이지기지야)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득기심즉복지 부득기심즉거지 거취지간 불용호발언)
ㅡ 《조선경국전》
태어나면서 사람은 각기 사적이고 각기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천하에 공적인 이익(公利)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도모하지 않고 공적인 해악(公害)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누군가 나와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자기 자신의 해악을 해악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해악을 해소하게 하였다. 이 사람의 수고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보다 천만 배이다. 무릇 천만 배의 수고를 하고 자신은 그 이익을 향유하지 않는다면, 천하 사람들의 인지상정으로는 반드시 그런 자리에 서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에 헤아려 보고서 군주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 허유(許由)와 무광(務光)이 그들이다. 들어갔다가 다시 떠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요(堯)와 순(舜)이 그들이다. 처음에는 들어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떠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우(禹)가 그러하다. 어찌 옛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과 다른 바가 있어서 그리하였겠는가? 편안함을 좋아하고 수고로움을 싫어하는 것은 역시 인지상정이다.

후대의 군주들은 그렇지 않다. 천하의 이해관계의 권한이 모두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천하의 이익을 모두 자기에게 돌리고 천하의 해를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려도 된다고 생각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사적인 이익[自私自利]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의 매우 사사로운 일을 천하의 공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오래 지나면서 안주하여 천하를 커다란 기업으로 여겨 자손에게 전하여 무궁토록 향수하게 하려 하였다. “내가 이룬 성취와 작은 형이 이룬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많은가?”라는 한고조의 말은 이익을 좇는 속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에는 천하의 인민이 주인(主)이고 군주는 객(客)이어서, 군주가 일생토록 경영하는 바가 다 천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군주가 통치의 주체(主)가 되고 천하의 인민은 객이 되어 천하에 평안한 곳이 없는 것은 다 군주 때문이다. 그래서 천하를 얻지 못했을 때는, 천하 사람들의 간과 뇌를 해치고 천하 사람들의 자녀를 이산시키며 자기 한 사람의 재산을 늘리려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나는 본래 자손을 위해 창업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천하 사람들의 골육을 착취하고 천하 사람들의 자녀를 이산시키며 자기 혼자의 음란과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당연시하여 “이것은 나의 재산에서 나온 이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하의 큰 해악은 오직 군주다. 만약 군주가 없다면 사람들이 각기 사적 이익[自私自利]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어찌 군주를 둔 것이 본래 이와 같았겠는가!

옛날 천하의 사람들이 그 군주를 위하여 받드는데 아버지에 비기고 하늘에 견주었어도 진정 지나치지 않았다. 지금 천하의 사람들이 군주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이 마치 원수 대하는 것과 같고 그를 독부(獨夫)라고 이름하는데, 참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선비들(小儒)은 얼빠진 모양으로 군주와 신하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 빠져나갈 데가 없다고 하여, 걸주와 같은 폭군까지도 탕무가 목을 벤 것이 부당하다고 하며, 망령되이 백이숙제를 터무니없게 전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멸하여 피투성이가 된 모습은 저 썩은 쥐와 다를 바가 없다. 어찌 이 커다란 천지와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 오로지 군주 한 사람만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무왕은 성인이고, 맹자의 말은 성인의 말이다. 후대의 군주는 (자신을) 아버지와 같고 하늘과 같다는 헛소리(空名)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엿보며 눈치보는 것을 금지하였다. 군주는 모두 성인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고 <맹자>를 폐지하고 과거 과목에서 제외하기까지 하였는데, 어리석은 선비들에게서 근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후대의 군주가 과연 이 재산을 보전하여 영원토록 전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사사로이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이미 (천하를 자신의) 재산처럼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재산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누가 나(군주)만 같지 않겠는가? 끈으로 단단히 묶어놓고, 자물쇠로 잠가놓아도, 한 사람의 지력이 천하에 갖고자 하는 많은 무리를 이길 수 없으니, 멀게는 몇 대에, 가깝게는 자신의 당대에 그 혈육의 파멸이 그 자손에게 일어난다.

(중략)

그러므로 군주의 직분에 밝으면 요순의 시대처럼 사람들은 (평화적으로) 선양할 수 있고, 허유나 무광 같은 이가 속세를 등지지 않을 것이다.

- 황종희, <명이대방록> '군주에 대하여' (原君) 中
어떤 사람이 "형태가 없는데도 보고, 소리가 없는데도 듣고서"[41] 그 군주를 섬긴다면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신하라고 할 수 없다. 자기 몸을 죽이면서까지 군주를 섬긴다면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역시 신하라고 할 수 없다. "형태가 없는데도 보고, 소리가 없는데도 듣는 것"은 아버지를 섬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몸을 죽이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는 것의 최고 표준이다. 그래도 신하라고 하기에 부족하다면 신하의 도리는 어떻게 한 이후에나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저 넓은 천하는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신하와 관리를 두고서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은 천하 백성을 위한 것이지 군주를 위해서가 아니며, 만민을 위한 것이지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천하 만민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그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군주가 태도나 말로써 나를 강제하더라도 복종하지 않겠다. 하물며 형태가 없고 말도 없는 데에서랴! 그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조정의 관직에 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하물며 내 몸을 죽이면서까지 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군주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군주가 태도나 말로 드러내지 않는 기호와 욕망이 있을 때, 내가 따라서 그것을 보고 듣고 한다면 이것은 환관이나 궁녀의 마음이다. 군주가 자기를 위해 죽고 자기를 위해 망할 때, 내가 (이것에) 따라서 죽고 망한다면 이것은 사적으로 총애를 받는 자나 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신하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다.

세상의 신하들이 이런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신하는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군주는 나에게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주가 나에게 인민을 나누어주고 다스리게 한다고 하며, 천하 인민을 군주 주머니 속의 사사로운 물건 정도로 생각한다. 지금 사방이 시끄럽고 혼란하며 민생은 초췌하여 우리 군주를 위태롭게 하기에 충분하니, 이것을 다스리고 기르는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사직의 존망에 관계없다면 사방의 시끄러움과 혼란, 그리고 민생의 초췌함은 비록 직무에 충실한 신하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하잘것없는 걱정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저 옛날의 신하는 이런 (천하를 위하고 만민을 위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저런 (군주를 위하고 일성一姓을 위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대개 천하의 치란(治亂)은 일성의 흥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에 있다. 그래서 걸주가 멸망한 것은 곧 치세(治世)가 되는 까닭이며, 진(秦)나라와 몽고가 일어난 것은 난세가 되는 까닭이다. 진(晋), 송(宋), 제(齊), 양(梁)의 흥망은 치란과 관계가 없다. 신하가 백성의 재난을 경시하면 곧 군주를 도와서 흥하게 하고 군주를 따라서 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신하의 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커다란 나무를 끄는 것과도 같아서, 앞에 있는 사람이 '어기' 하면 뒤에 있는 사람이 '영차' 하는 것과 같다. 군주와 신하가 함께 나무를 끄는 사람인데, 만일 손으로 나무를 동여맨 줄을 잡지 않고, 발로 땅을 디디지 않고, 나무를 끌어야 할 사람들이 나무를 끄는 사람들 앞에서 그저 웃으며 놀기나 하고, 뒤에서 나무를 밀어주어야 할 사람이 그것을 좋다고 하면 나무를 끄는 일은 할 수 없다.

(중략)

어떤 사람은, 신하는 자식과 함께 칭하며 신자(臣子)라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자식은 기(氣)가 통하며, 자식은 아버지의 몸을 나누어 (자신의) 몸을 이룬다. 그러므로 효자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날마다 그 기를 가까이해서 오래되어도 통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불효자는 몸이 나누어진 이후 날마다 멀어지고 소원해져서 오래되면 기가 서로 같지 않게 된다.

군주와 신하의 명분은 천하 국가라는 입장에서 생긴 것이다. 나에게 천하의 책임이 없다면 나는 군주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나가서 군주를 섬길 때 천하 백성을 위한 것으로 일을 삼지 않으면 군주의 노비가 된 것이고, 천하를 위한 것으로 일을 삼으면 군주의 사우(師友)인 것이다. 그런즉 신하라고 하여도 그 이름은 여러 차례 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은 진실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 황종희, <명이대방록> '신하에 대하여' (原臣) 中

유교 역시 군주, 아버지의 불합리한 명령에 대해서는 신하와 자식이라 할지라도 들고 일어날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맹자중국장 자크 루소라 평가받는 명말청초의 유학자 황종희 또한 맹목적인 복종과 반대되는 주장들을 하였다.

심지어 황종희 같은 경우 군주는 사람들의 필요로 인해 생겨난 자리이며, 따라서 천하의 주인은 백성이고 군주는 객(客)이라고 봤다. 같은 원리로 특정 가문의 군주 세습을 비판했으며, 신하와 군주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아니라 '천하의 이익'을 매개로 묶인 철저한 비즈니스적 관계라 주장했다. 즉 천하의 이익이 아니라면 애초에 남남인 관계이므로, 혈연적 인연인 부모 자식 관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유교에서 말하는 예가 군주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장려한다고 알기 쉬우나, 논어 팔일편에서 말하는 예는 반대의 의미다. 정공이 묻기를: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어찌해야 합니까?” 공자가 이르시기를: “임금이 신하 부리기를 예로 하고, 신하가 임금 섬기기를 정성스러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가 무엇이기에 임금이 신하를 예로 부려야 하는가? 공자가 들으시고 이르시기를: “이것(알고 있음에도 하나하나 다시 물어서 그르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예이다.”[42]

유교는 다른 모든 제자백가의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시작부터 사회규범이자 정치규범으로 존재했다. 애당초 춘추전국시대로 혼란한 당시 사회상에서 "나를 관직에 앉히고 나의 사상을 따르면 나라를 평화롭고 부강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사상가들의 난립이 제자백가였음을 기억하자. 따라서 자연스럽게 바람직한 사회의 형태에 대해 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제일 목적이 사회 안정과 평화였던 만큼 요즘 말로 공동체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띌 수밖에 없다. 그나마 유교는 바람직한 사회질서를 제시하는 데에 당대로서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것인데, 사회의 구성원리인 충을 효에서 도출해내는 것은 인간 사회가 그 어떤 세기말적인 파멸에 마주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절대 내어주지 않는 최후의 덕성과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가족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의된 권위가 없고 정당한 권력이 없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질서, 효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과정은 개개인이 계몽되고 교육된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갑갑하다. 특히 군주와 부모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역성혁명과 방벌을 인정한 100년 뒤의 맹자(100년 뒤라고 해봤자 기원전 4세기 사람이다)가 아닌 공자의 사상으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충효로 모시며 그 잘못을 간하되 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정성으로 보필하며 스스로 잘못을 깨달으시길 기다린다"는 방법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 지배윤리로 실천된 유교는 백성에 대한 군주의 의무와 이를 저버린 군주에 대한 혁명 및 방벌은 단순히 명목적인 가치에서 그치지 않고 왕조의 정통성, 상소와 간쟁 등의 정치역학적 구조, 구휼과 혜민 등의 실재하는 사회적 규범으로써 존재했다.

또한 이런 맹목적인 복종 탓에 유교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를 옹호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위에 나왔듯이 유교에서는 민본주의라 하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민본주의 자체는 근대 민주주의와 성격이 물론 다르지만, 백성=국민으로 치환하여 국민의 뜻을 존중하고 이를 위한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의 한 성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장 근대에 서구의 민주주의-공화정 체제의 내용을 접한 동아시아의 유림 인사들은 절대 이를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로서 장점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10. 습합 논란

이것 역시 유교에서 논란이 된다. 흔히 고대중세불교, 근세에는 천주교구한말에는 개신교와 결탁해 사후세계를 좋아하지 않고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지탄을 받았다.

특히나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개신교인데, 애당초 개신교는 늦게 와서 전도 좀 안 하고 말 잘따랐다고 밀어주고 개종자가 줄을 잇자 여러 종교나 유교계에서도 논란이었다. 양 쪽 진영의 보수주의자는 다원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유교와 개신교의 관계는 개신교가 늦게 들어와 이제 수립하려는 찰나에 일제강점기를 맞이했다.

안정복 선생같은 사람들은 이를 야합으로 규정해 비판했다. 고려시대 유학자들이 죽을 때 화장을 했고 불교에 심취했다고 비판하였으며 이색같은 유학자가 갑자가 부처가 대성인이라고 한 것을 비판했다. 성호 좌파 성호 우파 논쟁에서도 천주교의 인정 유무가 핵심이었다. 유림 여럿이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개신교를 믿으며, 독립운동을 벌이며 노비 문서를 태운 것도 유림 사이에 논란이었지만 그 이전의 종교들에 비해 논란은 적다. 개신교의 경우 주류는 다원주의를 반대했으나 오히려 동도서기론에 근거한 유교와 개신교의 습합은 거론하지 않는다. 이유는 정적이 될법한 천주교나 불교는 유교가 대신 쳐냈다는 이유다.

11. 유교의 과거지향성

마광수를 포함한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유교가 과거지향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공자가 주나라를 국가의 이상향으로 여겼다는 논어의 구절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유교의 본질을 오해하면서 나온 주장이다. 우선 서양의 기독교적 시간관과 유교의 시간관을 비교해야 한다. 전자는 선형적이면서도 과거, 현재, 미래가 평행한 구조를 지닌다. 과거가 다시 돌아오는 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의 시간관은 원형적이면서도 순환하는 구조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반복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현재의 역사 속에 과거의 역사와 유사한 순간이 있고, 과거의 역사 속에서 미래의 역사도 보이는 것이다.출처

12. 비판에 대한 의견

조선 멸망에 즈음하여 성리학은 발전의 걸림돌이요 족쇄라는 인식이 퍼졌고, 서양 문명그리스도교 보급에 의해 생활면에서도 많은 자리를 양보해줘야 했다. 정치적·군사적 패배의 원인을 종교와 사상에서 찾는 방식이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지나며 유학의 명맥은 끊기다시피 하였다.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직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차별, 전체주의, 연령차별, 권위주의, 집단주의, 직업의 귀천, 남아선호사상, 똥군기, 호주제, 가부장제, 나이를 내세우거나 들먹이는 문화, 갑의 횡포 등의 악습들이 유교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물론 이러한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 과연 유교 본연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상황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제사, 성차별에 대한 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해방 후 여성들이 천주교와 개신교 등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가속화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애당초 공자가 주장한 3년상은 당시 시점에서 봐도 묵자 등에 의해 허례허식이라고 까이는 경우가 있었다.[43]

하지만 위 글에서 언급된 문제 중 일부는 조선 왕조 혹은 현대 대한민국의 문제점일 뿐이다. 열거된 문제들을 모두 유교로 인한 문제라고만 단정짓고 결론을 귀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 예로 직업의 귀천 항목을 보아도 사농공상은 단지 직업 구분이었을 뿐 신분의 상하관계를 정한 것이 아니었는데, 상업 발달이 더디던 조선에서 왜곡됐다는 설이 있다. 박지원조차 중국 선비들을 만나 사농공상이 직업의 구분에 불과하냐고 물었을 정도. 또한 호주제, 똥군기 등 일제의 식민통치와 그 뒤를 이은 군국주의(군사독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을 논할 때 다른 부분들은 무시하고 오로지 유교의 폐단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봤을 때 분명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불교 또한 비슷한 논리로 정도전 등의 유학자들에게 온갖 비판을 받고 조선시대에 비주류로 몰렸던 과거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정말 진지하게 불교가 고려를 멸망시킨 원인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과거의 폐단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 결국 조선시대의 문제가 고려시대 불교의 잔재 때문이 아니라 조선 자체의 문제이듯이, 현대 대한민국의 문제는 대한민국 자체의 문제이지 조선시대의 유교 때문이라 탓하는 것은 잘 된 건 내 덕, 잘못된 건 조상탓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일제강점기6.25 전쟁을 거치며 전통 단절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사람들이 현대에 가장 유교탓을 하는 소위 똥군기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근현대에 해당하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에서 대부분 유래되었다는 측면을 볼 때, 과연 '유교탓'은 얼마나 정확한 이해와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객관적으로 항상 의심해봐야만 한다.

오늘날에도 유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종가나 종친의 경우 현대화가 된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으며, 종가 및 종친 출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온가족 및 종친들이 모두 모여 명절이나 조상의 기일 때 집단으로 제사 및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지금도 일부 종가 및 종친 쪽에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유교의 방식 그대로를 따르고 있으며, 일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생소한 제사 방식이 남아있다. 현대 가정에서는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직접 만들거나 차리기도 귀찮다며 주로 온라인 등지에서 배달 서비스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종가 및 종친에서는 조선 중대 이후 확립된 이 '의식'을 아직까지도 고수하고 있다.[44][45][46]

중국5.4 운동을 기점으로 유교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으며,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뒤 유교의 폐해가 사뭇 크다고 진단하며 아예 문화대혁명 시기 유교를 봉건시대의 악습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유교 경전과 유물들을 파괴했다. 이 탓에 중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유교 복원을 위해 한국의 성균관을 방문하여 종묘제례악을 비롯한 유교식 예법, 제사법 등을 역수입해가기도 했다.[47] 더군다나 문화대혁명 당시 유교의 잔재를 모두 타파한다고 벌인 여러 반인륜적인 행위들은 도리어 중국 사회에 크나큰 상흔으로 남고 말았다. 그 후에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도입한 북한 역시 유교의 잔재를 악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한편, 가부장제 같은 유교의 부정적인 면만 뽑아다 주체사상이란 것을 만들어버렸다.

13. 결론

본문에서 일관적으로 강조한 것은 현대의 시각으로 전통 사회에 걸려 있던 여러가지 제약들을 무시하고, 다른 문화권과 공정한 비교 없이 전통 사회에 유교가 남긴 영향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거나, 정확한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도 없이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모두 유교탓으로 귀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지만, 그것 못지 않게 전근대의 유교 이념을 무작정 '아름다운 전통' 운운하며 현대의 악습들까지 정당화하는 데 악용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다룬 여권 문제, 연장자-연소자 관계 문제, 집단주의, 전체주의, 권위주의 문제, 비민주성 문제, 직업 간 귀천 문제 등은 현대 사회에서 당연히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점이다. 애초에 어느 사회에서나 다른 이념을 수용할 때는 엄정한 비판 하에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은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식이다.

유교는 현대적인 정치 이념과 거리가 멀고, 그러한 정치이념 안에서 가정되는 보편성을 갖추지 못했다. 인간 본성론의 보편주의가 정치 영역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고, 애초의 그 인간 본성론 자체가 현대와 들어맞지 않다. 현대의 정치이념은 고정된 형태의 인간 본성을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의 구조와 당시 사회에 걸려 있던 여러가지 제약에 대한 이해 없이 현대의 기준만으로 유교를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무작정 유교의 이념 가운데 현대의 민주주의, 평등과 인권 사상과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 유교에는 현대적 인권 사상이 있어 서당에서 성교육을 했지만 모두 기독교나 일제가 망쳤다는 식의 역사왜곡을 함으로써 자존감을 채우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당연하지만 현대 대한민국의 악습들로 열거되는 여러 문제점들을 모두 유교로 인한 문제로만 몰아가고 유교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이보다는 한국에서는 유교적 민본주의 사상이 서구에서 들어온 민주주의 정치와 독특하게 결합된 면이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유교 정치 이념의 영향으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곧잘 사용되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개념은 민주주의 정치에서 말하는 '여론'과 엄연히 다른 개념이며, 유럽의 민주주의에서는 '민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48]

이러한 비판이 한국인의 정신 문화에 몹시 중요한 까닭은, 좋든 싫든 현대에도 유교 문화나 유교에 뿌리를 둔 가치관, 이념, 사고 등이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정치 이념이나 가치관과 동떨어진 부분이 상당히 많음에도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사실상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세대 역시 유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가정에서 효도를 강조하는 점부터 시작하여 제사 등의 풍습이나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전통문화, 한국의 직장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예절에도 유교의 영향이 깊게 남아 있는 건 물론 하극상이나 효도 등의 일상언어에 이르기까지 떨쳐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에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유교를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정작 그런 젊은 청년층조차 본인들이 자각을 못하거나 애써 부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결국 유교의 영향이나 유교에 근본을 둔 의식 체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애당초 한국의 교육과정부터 가치관이 확립되기 전인 유년기부터 유교 사상의 영향이나 그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교육(부모에 대한 효도나 가족과 친지 간 화목을 강조하는 점, 국가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한 교육[49])등을 받고 자라나기에 이를 떨쳐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법조차 유교의 영향권에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가족 해체에 대비한 법률조항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가족 구성에서 불이익을 받는 자를 위한 법률조항은 아예 없어 관련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이에 대해 전근대적 악습이라는 비판과 수호해야할 유교적 전통이라는 반박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 단순히 유교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정확히 유교와 현대 사회의 괴리를 파악해내 좋은 영향은 현대 사회에 맞는 방향으로 잘 순화해서 보존하고, 유교가 끼치는 악영향을 떼어내되 무엇보다도 그 악영향의 빈 자리를 한국 사회와 잘 들어맞는 올바른 사상으로 메꾸면서 또한 이러한 것을 사회 일선에서 실천해 나가도록 시민사회와 연계해나가는 것이 한국 유학에서 몹시도 시급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예를 들어 변질된 유교적 전통 항목에서 장유유서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적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면 장유유서의 옳고 그름이나 의의에 대한 판단 작업의 시작은 일단 철저히 유교적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한국인은 오랜 세월 동안 장유유서와 밀접히 이어져 있어 이로부터 분리되기 힘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를 위해서는 옳고 그름 및 폐해 척결이나 새로운 문화 도입에 대한 방법론을 주창해야 한다.

이러한 판단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비단 장유유서만이 아니다. 다시 장유유서를 예로 들어 보자면,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의 장유유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이나 무비판이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런 유교적 가치들은 여타 유교적 원칙이나 나머지 삼강오륜을 비롯한 여러 유교적 가치관들이나 원칙 등과 함께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작동하라고 만들어진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유유서는 유교적인 맥락에서 활용되지 않거든 그 의미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처럼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유교의 악습이 무비판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한국 사회의 실정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은 유교에 대한 현대의 연구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당연히 유교적 배경과 현대적 배경을 동시에 살펴보며 비판해야 하므로,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유교에 대한 깊은 식견과 성찰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1] 공자의 본명이다.[2] 원문에 여(女)는 여(汝) 즉 '너'란 뜻이다.[3] 실제로 위의 일화에서도 공자는 재아에게 삼년상을 억지로 치르도록 강압적으로 계속 설득하지 않고 재아가 삼년상을 명백히 거부하자 "네 마음 편한대로해라"라고 말하며 재아의 의견을 그대로 들어주었다.[4] 실제로 재아는 대낮에 대놓고 낮잠을 자기도 해 이것을 본 공자가 한숨을 쉬며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는 법인데 어쩔 수 있겠나"라며 대놓고 썩은 나무에 빗댈 정도로 여러 모로 스승의 속을 많이 썩인 제자였다.[5] 분서갱유는 후대 유학자들이 왜곡한 것이지만 실제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6] 공자의 일상생활을 설명한 10장 향당(鄕堂)편 맨 마지막 구절이 대표적인 예인데, 수레를 탈 때의 자세를 적은 구절 뒤로 뜬금없이 '사람 기척을 느낀 들이 곧 날아 올라 빙빙 돌더니 다시 내려 앉았다. 공자가 말했다. "산마루의 꿩들이 때를 만났구나, 때를 만났어!" 자로가 꿩들을 향해 두 손을 모으자 꿩들은 다시 힘차게 날개짓을 하고 가버렸다.'라는 아무 부연설명도 없고 장의 전체 내용과 맞지도 않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두고 수많은 유학자들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현재는 이 구절의 앞뒤에 무엇인가 내용이 있었는데 사라져버리고, 이 구절 역시 오자 등으로 변질되어 본래의 의미 파악이 힘들어졌다고 본다.[7] 헌데 21세기에 허위 미투 운동 등으로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자 일각에서 맞는 말 아니냐는 주장도 있기는 하나, 모든 여성이 꽃뱀은 아니고 모든 미투가 허위 미투는 아니기에 여전히 이 말 자체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8] 증자는 사람들이 "칠거지악에 속하지 않는다" 라고 말렸음에도 밥을 설익게 지어 계모에게 봉양한 죄로 아내를 내쫓은 경력까지 있다. 당시 유학자들에게 여성차별은 이미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9] 때문에 제안대군이 박씨와 이혼할때 안순왕후가 써먹었다.[10]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석가모니를 낳고 7일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죽자 석가모니의 아버지 정반왕이 처제 고타미와 재혼했다. 그래서 고타미는 혈연상으로는 부처의 이모, 호적상으로는 계모가 된다.[11] 그 외에 사분율의 계본에 의하면 남자의 계는 250계인데 비하여 여자의 계는 98조나 더 많은 348계를 지켜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계의 조항에 대하여는 현대적인 안목으로 볼 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새롭게 혁신적인 개정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12] 여인은 전륜성왕, 제석천, 마왕, 범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설.[13] 성폭력, 가정폭력의 경우는 예외이다. 쉽게 말해 부모가 막장 부모일 때만 허용한다는 뜻.[14] 기원전 6세기부터 논리학파가 등장하였으며 5세기의 철학자 진나 등장 이후의 신인명 논리학, 다섯 명제로 이루어지는 오분작법, 디그나가의 삼단 논법 등의 개념이 존재한다.[15] 유학이 현실을 외면하고 공리공담만 일삼았다는 것은 성리학에서 기반한 편견이다. 아무래도 조광조같은 인물들이 송양지인스러운, 머릿속이 꽃밭같은 발언을 내뱉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면이 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서 한나라 시절까지의 유학자들은 대단히 실천적이고 과감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모사로서도 꾀를 잘 냈고 말재주 하나에 목숨을 건 채 제나라를 투항시킨 역이기, 군무에 능하며 황건적을 잘 때려잡은 노식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 사례다.[16] 다만 송나라가 산업혁명을 해낼 법한 잠재력이 있었다는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송나라에서 성행하던 수력 방적기나 물레방아, 제철 방식이나 석탄 이용은 유럽마냥 딱 중세 수준의 기술이었지 시대를 초월한 고도의 기술력이 아니었다.[17] 상인이라는 말 자체가 천대적인 의미가 있다. 주나라가 건국된 뒤 망국의 후예인 상나라 사람들은 상업 외에 종사할 분야가 없었는데, 상나라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상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상인은 불명예스런 직업이라는 인식, 즉 상인 천대는 전 세계적으로 보이는 경향이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은 그 정도가 더했다. 유교 뿐만 아니라 상앙의 법가 사상에서도 농촌 중시와 함께 상인 억압을 크게 강조하는데, 이런 전통이 중세까지 이어지며 주자학, 성리학에도 인입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구에서도 중세 초까지 상인은 하위 계급이었던 것은 같다. 그러나 상업과 도시 문화권, 상품경제와 선박무역이 발전하며 상인의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상업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세차익을 취하는 상인 계급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그러나 한자동맹, 베네치아제노바 공화국같이 상인 공화정이 있을 정도였으니 상인의 실질적인 지위는 낮지 않은 편이었고 거물 상인은 귀족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18] 국가적 정책 차원에서도 볼 때 성리학적 전통이 후기까지 매우 강하게 보존된 조선의 경우에는 “백성들 가운데서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공(工)과 상(商)에 종사하였으므로 농사를 짓는 백성이 날로 줄어들었으며 말작(末作)이 발달하고 본실이 피폐했다.”라는 정도전의 사상처럼 상업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도 상업을 불신하고 농촌 위주의 사회를 지향했으며 후기 명에서 경제가 발달하며 국가적 부를 거머쥔 거상들이 나타나긴 했으나 이것은 상세를 거둠으로 충당하는 세수 등의 현실에 타협한 결과이지 국가적 방향성의 변화라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이다. 경제가 미약하게나마 발달한 후기 조선 또한 마찬가지. 자본주의의 맹아로 포장된 조선 실학자들 역시 실상은 유학자로서 상업을 '말업'이라 천시하거나 성호 이익처럼 폐전론을 주창하며 시장을 날려버리자고 하는 등 대다수가 억말론을 강하게 주장한 편이었다. 성리학에 비교해서 오히려 초기 유교가 공자의 제자 자공이 상인인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상업을 깔아뭉개진 않았던 편이었다. 물론 유학자나 농민에 비해 상인이나 기술자를 천하게 본 것은 마찬가지다. 반면 유사한 시기,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사회는 상업을 인위적으로 밀어주지는 않거나 무관심할지언정 상인을 때려잡자는 식으로 굴지는 않는 편이었다. 중농주의 학자나 관료들이 상업을 억제하는 법안을 낼 지라도 중상주의가 힘을 잃고 소멸하지는 않는 식으로 서로 영역을 구축하며 견제했던 셈이다. 또한 시간이 흐르고 절대왕정 시대가 되면 콜베르 등의 관료들이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경향이 드러난다.[19]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력이 필요한 초창기의 화승총과 같은 개인화기, 또는 풀 플레이트 아머가 귀족층을 중심으로 발달하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20] 정약용, 박제가 외에도 이가환, 서유구, 이서구가 판서직에 오른 바 있다.[21] 실학보다 더 적합한 사례는 일본의 난학이다. 난학은 전국적으로 전파되며 성행하였다. 보수적 성향의 막부가 난학을 금하려 하긴 하였으나, 일단 막부가 해당 학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라는 건 증명이 되므로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이 가능하게 했던 기반으로 평가받고 있다.[22] 물론 조선에서도 천보총 같은 시도는 있긴 했다. 조선에서 화기 개량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천보총의 경우 조총과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로 총열 길이를 수정하여 사거리를 늘린 정도로 추정되는 총이며, 뇌홍이나 화약, 탄환 발전, 장전방식 변경 같은 신개념의 등장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신기술이 등장할 사회적 토양, 화학이나 기계공학 등의 발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는 하다. 플린트락 유입의 사례에서도 조선은 플린트락의 효용성은 인식했으나 국가예산, 심각한 자원 부족과 기계공학 기술 부족으로 플린트락을 도입할 수 없었다. 당시까지는 플린트락의 가성비가 조총을 압도하지 못했으므로 플린트락을 도입하지 않은 건 조선의 예산사정으로는 합리적인 결정이긴 했다. 그러나 애초에 기술 격차와 처참한 무역 능력 탓에 시도조차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머리판이나 총검 도입 같은 기술격차가 적은 발상의 영역에서도 동양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기술의 문제보다는 과학적 탐구정신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23] 조선에서 기계공학의 발전이 미진했던 것은 자연환경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많다. 서양의 경우 농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차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기계공학의 발전을 이룩해냈다. 수차를 통해 만들어낸 에너지로 제분업부터 시작하여 광산업, 직물, 종이, 금속 가공을 해내 동력과 에너지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아진 것이다. 이렇게 축적된 기계공학적 발전으로 유럽 세계는 매우 정교한 시계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럽과 비교해 조선의 하천은 하상계수 문제로 물레방아, 수차를 운용하기에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물레방아를 소수 쓰기는 했으나 쓸 수 있는 지형이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효과도 적었다. 이처럼 필요가 적으니 노력의 투입과 발전도 적을 수 밖에 없는 것.[24] 연은분리법같은 예외가 있긴 하나 이와 같은 유례를 조선사에서 찾기 힘들다.[25] 혹자는 서구 기독교 문명이 유교 문명에 비해 과학을 탄압하는 성질이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1980년대 갈릴레이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고리짝적 도태된 관점, 세간의 속설이나 야사에 불과하다. 애초에 교회에 의해 핍박받은 과학자의 사례를 꼽기 힘들다. 갈릴레이의 사례가 그나마 비슷한 사례이지만 종교적 이유보다는 갈릴레이의 오만함이 더 큰 문제였다. 애초에 교회가 천동설에 딱히 집착할 이유가 없었고 충분한 근거가 나오면 기존 학설을 폐기할 수 있다는게 기본 입장이었다. 교회는 가설 차원에서 지동설을 논의하는 것을 허용했고 가설인 것을 명시하면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으며 출판물을 낼 수도 있다고 명시했다. 이처럼 교회는 전혀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논쟁한 것. 그러나 기존 이론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관측 데이터가 필요했는데 당시 시점에서는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자신의 이론을 가설 차원으로 국한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이 과정에서 교회의 관계자들과 인간적인 갈등이 일어났다. 즉 갈릴레이의 오만한 성격, 타협능력 부족 같은 정치력의 부족이 탄압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실력만 있고 사회성이 부족한 학자가 따돌림 당하는 건 현대 학계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갈릴레이 재판도 권위있는 학술 아카데미 내에서의 내부 논쟁에 가까운 것이었다. 종교를 떠나 교회가 학문과 이론의 검증을 관장하는 최고 지식인 집단이었기에 일어난 일에 불과한 것. 우선 똑같이 지동설을 연구한 요하네스 케플러는 전혀 탄압을 받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는 아예 주교였다. 로저 베이컨, 니콜라스 오렘, 알버트 매그너스, 존 페컴, 토마스 브래드워드, 월터 벌리 등등 무수한 학자들이 교회와 별 대립 없이 무난하게 학문을 연구하며 잘 살았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교회의 지원 하에 따뜻하게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스로부터 전수되어온 고등학문을 보존하는 당대 최고의 학술 연구 기관이 교회였으니 지식인이 거기서 배우고 연구하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26] 실제로 서양이 아닌 이슬람, 불교, 힌두교 같은 비 서양 문명권들의 다른 사상들과 비교해서 유교가 유독 과학 발전에 더 불리하다고 평가하는 경우나,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남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같이 유럽 외의 지역들과 비교해서 한반도의 과학발전이 더 늦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들은 존재하지 않는다.[27] 조선은 명에 조공을 바치고 명은 이에 하사품을 내리며, 다시 조선은 왜국에서 조공을 받고 하사품을 내리는 형태였다.[28] 사실 20세기 초에도 마찬가지였다.[29]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려웠다.[30] 고려 현종 때 발생한 사건으로 문신들이 신임 관료들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신들의 영업전을 강탈해서 무신들이 들고 일어났다.[31]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 역시 원래는 문관 출신이었다.[32]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33]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34]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35]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 지배층(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인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36]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37] 영국군이 매관매직으로 인해 크림 전쟁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개박살이 난 이후에야 매관매직이 사라졌을 정도로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매관매직이 합법적인 전통이었다. 애당초 과거 제도 같은 시험을 통해 관료나 군인들을 선발한다는 개념조차 없었을 정도였다.[38] 유럽에서 지방 말단 관료는 공식적으로 돈을 주고 자리를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공식적인 매관매직 제도는 근세 유럽의 군, 특히 육군 전투병과의 임관 및 진급 제도로 임관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근속 년수를 채운 뒤 돈으로 계급을 샀다. 원래는 정부의 지원 부족을 육군 장교들이 자기 돈으로 해결하던 게 공식적인 제도가 됐던 것이다. 특히 영국 육군의 사례가 유명한데, 이들은 크림전쟁 때까지도 이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발라클라바 전투로 대표되는 크림전쟁에서의 영국 육군 기병대의 삽질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거였다.[39] 물론 이것도 후기로 가면 매관매직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선발하는 정시보다 수도권에서만 제한적으로 선발하는 별시를 더 남발해대서 의도했던 지역균형과 능력주의도 온데간데 없어진다.[40] 홍무제는 중국사를 통틀어 숙청과 탄압으로 손에 피를 매우 많이 묻힌 황제 가운데 한 명이다. 당시 홍무제의 눈밖에 나 삼족이 몰살당한 신하들이 부지기수였다.[41] 이 구절은 <예기> 곡례 상에 있다. 의미는 '어린이가 부친의 형상을 보지 못하고, 부친의 음성을 듣지 못했는데도 부친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황종희가 묻는 것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로 군주를 대하는 것이 신하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42] 실제 조선에서도 군주에게 무조건 복종만 하는 신하보다는 목숨걸고 간언하는 신하가 더 존경받았다. 연산군을 꾸짖다 사망한 김처선이나, 숙종과 대립하다 귀양을 가고 결국 사약까지 마신 송시열등.[43] 당장에 3년상 제대로 치르다가 외려 상주가 죽어 아이러니하게도 효도를 하려다가 불효를 저지르는일이 발생했다.[44] 유교의 제사는 현대에는 비판받는 대상이지만, 최초로 유교식 제사 의식이 주창된 춘추시대에는 분명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춘추시대라는 혼란기에는 아직 후대의 도교처럼 엄밀한 종교의 체계는 갖추지 못했으나 지역마다 등의 잡다한 신(神)을 섬기는 신앙이 상당히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숭배 의식이 무당의 지도를 받아 상당한 폐해를 끼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개중에는(실제로 춘추시대 이전의 풍속이 남은 것일 수도, 새롭게 나타난 것일 수도 있지만) 상나라의 풍속처럼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는 숭배 의식마저 있었다. 예를 들어 황하하백에게 바치는 제사는 사람을 강에 던져버리는 인신공양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제사를 '음사(淫祀)', 즉 사악한 제사이며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배척하고(주나라의 의식에 기초를 둔) '올바른 제사'를 강조했다. 결국 전근대 유교의 제사 의식은 신을 빗대어 벌이는 사이비 종교 풍속에 어느 정도 제동장치가 되어줬던 것.[45] 반대로 말하면 유교식 제사가 가치가 있었다는 주장은 야만과 인신공양 풍습이 남아 있던 춘추시대에나 가능했던 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세계 각지에서 근대화와 계몽화가 이루어지던 조선시대만 놓고 따져 봐도 제사 문화의 악습은 변호하기 힘들다. 사실 이는 어딜가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데, 종교는 분명 생겨날 당시에는 당대에 약자를 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종교의 교리는 변하지 않는데 사회는 계속 변하여 점점 더 종교가 주장하는 범위보다 더 약자를 존중해가니 결국 종교가 악습으로 치부될 지경으로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당장 이슬람의 교리도 현대의 우리 눈에는 성차별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제법 여성을 존중하는 편이긴 했다.[46] 다만 제사의 경우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상을 이렇게 놔야 한다 저렇게 놔야 한다는 규정도 없었고 심지어는 상을 차리는 것도 '형편껏 차려라' 이게 다였다. 그러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도 상을 풍성하게 차려야 한다.' 이런 게 아니었다는 거다. 이 역시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는 것. 심지어 제사상을 차리는 방식은 그 어떤 것도 주자가례를 포함한 권위있는 예법 책에 실려있지 않았고, 송시열조차 생선을 동쪽에 고기를 서쪽에 놓는 어동육서에 대해서 "바다가 동쪽에 있어서 그런 건가?" 라고 추측했을 뿐이었다.[47] 중국에서 유교를 부활시킨 것은 단순히 문화를 복원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후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중국 내부의 모순이 가중되자 중국의 집권세력인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유교의 상호 공존 가치를 주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 주도로 공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고, 대외 한어 학원의 공식 명칭을 공자학원으로 하며, 공자의 제사를 집행하는 등 다른 문화 복원보다 더 큰 비중을 두고 유교를 복원시키고 있다. 단순히 문화 복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섣부른 진단이다.[48] 오히려 유럽은 '다수의 폭주'로 인한 끔찍한 흑역사가 있다 보니 여론을 중시하더라도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49] 물론 이 부분은 유교의 영향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시절의 흔적이 작용한 부분도 큰 편이지만, 원래 성리학적 윤리관 자체가 국가주의적 지배 체제를 옹호하는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