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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colcolor=#fff> 남한산성 南漢山城 | Namhansanseong Fortress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1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608,705㎡ | |
건축시기 | 조선 인조 3년(1625년) |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소유 | 광주시·성남시·하남시 | |
관리 | 경기도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221e1f,#fff><colcolor=#fff,#221e1f> 남한산성 | |
영어 | Namhansanseong |
프랑스어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기도 광주시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지정번호 | 1439 |
등재연도 | 1997년 |
등재기준 | (ii)[1], (iv)[2] |
경기도의 도립공원 | ||
<colbgcolor=#004097><colcolor=#fff> 남한산성도립공원 南漢山城道立公園 Namhansanseong Provincial Park | ||
위치 | 경기도 광주시·성남시·하남시 | |
면적 | 35.16㎢ | |
지정일 | 1971년 3월 17일 | |
관리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
사무소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 | |
링크 | }}} |
<colbgcolor=#344c3c> 조선시대에 그린 지도 |
남한산성 성벽[3] |
EBS에서 제작한 남한산성 유튜브 영상 |
[clearfix]
1. 개요
공식 홈페이지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 성곽 및 시설물 소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산성이다. 광주시에 거의 전부가 있지만, 성남시와 하남시에도 일부가 걸쳐있다. 성남 쪽에서 들어가는 게 접근성이 좋기에 성남시에서도 남한산성을 많이 홍보한다.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의 도립공원이다.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조선 인조 때 손을 보았는데, 해발 497m인 청량산(淸凉山)을 서쪽 끝으로, 해발 514m 벌 봉을 동쪽 끝으로 하여 긴 장방형 돌로 쌓았다. 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아서 험난하며, 다른 쪽은 능선이 긴 반면, 성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 형상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다.
2. 역사
그러나 이때까지 발굴된 유물들은 신라계 유물이 여전히 압도적이기에, 백제가 한성 공함을 당한 이래로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다가 신라가 한성을 점령한 후 다시 주장성(晝長城)으로 개축했을 개연성이 높아졌다.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와 맞붙은 나당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만에 하나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 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바로 다음 방어선으로 활용하고자 남한산 주위에 둘레 4,360보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그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다.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이라는 설 역시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자료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최근 수행된 남한산성 행궁지 기단과 그 주변 지역 발굴조사 결과 신라계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광해군 13(1621)에 개수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다시 개축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고는 재침에 대비하여 개조되었다. 개조 완료 후 광주목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기본인 수도 방어 목적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조선 시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리었다.
주요한 전투로는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홍타이지의 군대를 상대로 벌인 농성 전이었다. 병자호란 때 결국 함락되었다는 점 때문에 입지가 요새로서 탈락이고 심지어 평지성과 다를 것이 없다는 선입견이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막상 가보면 산세는 지금도 험준하고, 급히 도망쳐 들어간 데다가 방산비리까지 겹쳐 물자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막강한 청군의 서양식 화포에 얻어맞으면서도 한 달 이상을 버텨냈음 자체가 방어력을 입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밑에서 남한산성을 보면 청나라군이 물리적으로 함락하지 못한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공방전 40여일 동안 청군은 수차례 대규모 공격에도 불구하고 돌파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성 내부 물자가 고갈될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으면서 서서히 조선군을 조였다. 결국은 식량이 다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된 탓에 항복했다.
병자호란 이후 피비린내 나는 처형장이 되어버렸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장소인데, 신해 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갇히기 시작했고 신유박해의 한덕운을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에는 김덕심, 김성우 형제 등이 순교했다. 제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건 1866년 병인박해 때이다. 정은, 그의 종손 정양묵, 그리고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성우의 모든 가족이 체포당해 순교했다. 현재 알 수 있는 마지막 순교자는 이치재다.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군청이 안에 있었으나, 항일의병으로 산성과 행궁 내 군기고와 수호사찰을 불태우고 방화하여 대부분 건축물이 사라졌다.
1917년에 군청이 경안면으로 이전한 뒤로는 서서히 쇠락했고, 방화로 터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 일부와 함께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소실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말 완벽하게 매몰되어 유구 상태가 굉장히 훌륭했다.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 마무리되었다.
3. 주요 문화 유적
<colbgcolor=#344c3c> 경기문화재단에서 제작한 남한산성 디지털 자료 영상 |
3.1. 남한산성의 4성문
3.1.1. 동문(좌익문)
<colbgcolor=#344c3c> 좌익문[4] |
3.1.2. 서문(우익문)
<colbgcolor=#344c3c> 우익문 |
서문 인근에 전망대가 있는데, 위례신도시와 롯데월드타워, 한강, 그리고 남산 서울타워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N서울타워와 남한산성 서문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어 옥수동 달맞이 공원, 응봉산 팔각정과 함께 서울의 야경 포인트로 유명하다.
3.1.3. 남문(지화문)
<colbgcolor=#344c3c> 지화문 |
1990년대까지만해도 남문으로 차량이 통행하였다. 남문으로 차량이 통행하는 모습 참고 물론 너비가 좁아 일방통행만 가능하였으며, 반대편으로 진행하는 차량은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남한산성 아래를 가로지르는 산성터널의 개통과 함께 인도로 전환되면서 남문으로 사람만 통행한다. 참고
3.1.4. 북문(전승문)
<colbgcolor=#344c3c> 전승문[5] |
여담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인조와 김류의 독촉으로 이시백이 조선군 3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 북문으로 나와 싸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사 300명이 모두 전멸한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2021년 4월 21일부터 해체보수공사가 이루어져, 북문(전승문)에서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 북쪽(교산신도시쪽)에서 남한산성으로 올라오는 고골계곡 등산로를 이용하기 전에 알아두자.
3.2. 남한산성 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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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4c3c> 남한산성 행궁 전경 |
3.3. 수어장대
<colbgcolor=#344c3c> 남한산성 수어장대 |
일제강점기 수어장대[6] |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휘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왼쪽에는 청량당이 있으며, 뒤편에는 우물이 있어 장대에서 근무하는 장졸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3.4. 숭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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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 숭렬전 | ||
설화 | 한성백제 | 위례성 |
<colbgcolor=#344c3c> 숭렬전 전경[7] |
숭렬전 내부[8] |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 갔을 때, 꿈에 웬 사람이 나타나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북쪽 성벽의 봉암(蜂巖)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놀란 인조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는 성주 온조대왕이다.”라고 하였다. 곧 잠에서 깬 인조는 온조왕에게 들은 대로 즉시 성의 북쪽을 살펴보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청나라 군이 봉암을 오르고 있어 그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온조왕의 은혜를 입은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 한성으로 돌아간 후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이는 온조왕사(溫祚王祠)라 불렸다. 온조왕사는 온조왕묘, 백제시조묘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참고로 인조는 이괄의 난 때 공산성으로 피난 간 적도 있는데 공산성은 백제의 2번째 수도인 웅진성이었던 곳이다.
1779년 8월, 정조는 남한산성에 방문한다. 정조는 봉암에 올랐다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에게 병자호란 당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이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났던 이야기를 하였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흔적이 남아 있냐고 묻자 서명응은 남한산성 행궁 뒤에 있는 청량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청량산은 온조왕이 첫수도 하남위례성을 만든 뒤 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때부터 정조는 온조왕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졌고 온조왕사에 대해서도 더욱 격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후 1795년 9월, 광주 판관 이시원이, 고구려의 사당인 숭령전이나 고려의 사당인 숭의전도 모두 이름이 있는데 유독 백제의 사당만 이름이 없으니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숭렬전(崇烈殿)이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보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렇게 온조왕사는 정식으로 국가가 제사를 받드는 사당인 숭렬전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설화가 있다. 제문을 준비하고 있던 정조의 꿈에도 온조왕이 나타난 것이다. 꿈에 나타난 온조왕은 정조의 인품과 그의 업적들을 칭찬하면서 혼자서는 쓸쓸하니 다른 국왕들의 사당처럼 명망 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잠에서 깬 정조는 온조왕의 청을 받아들여 남한산성 축성에 공로가 컸던 총융사 이서를 숭렬전에 같이 모시게 하였다. 온조왕과 이서는 무려 1,600여 년의 시간 차이를 가진 인물들로 이렇게 숭렬전은 이 두 사람이 함께 모셔진 독특한 사당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남한산성이 온조왕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 하남위례성의 유적으로 유력한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남한산성 간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백제 초기 수도에 대한 대략적인 위치 개념은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5. 청량당
<colbgcolor=#344c3c> 청량당[9] |
이회 장군의 영정뿐만 아니라 서북쪽 책임자인 벽암(碧岩) 각성 대사와 이회 장군의 부인 송씨(宋氏)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회 장군, 벽암 대사, 이회 장군 부인의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다.
3.6. 현절사
<colbgcolor=#344c3c> 현절사[10] |
1688년(숙종 14)에 광주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1693년 봄에 현절사라는 이름으로 사액하였다. 사당은 본당과 좌우에 있는 부속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산등성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본당과 부속건물이 단을 이루고 있고, 단 위에는 담을 둘러 그 중앙에 솟을대문을 내었다. 지붕 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이며 이출목 이익공의 주심포 형식이다. 본당 좌우의 방풍 막은 아래를 직선으로 자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며 정면 각 칸에는 4쪽의 여닫이 격자문을 달았다. 솟을대문이 2개 있는데 밖의 것은 사당을 출입할 때, 또 하나는 본당과 부속건물을 구분하는 담의 중앙에 위치하여 본당을 출입할 때 사용했다. 대문은 여닫이 2쪽 문으로 2개의 대문 모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부속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본당과 같이 맞배지붕과 홑처마 양식의 건물이다. 2동의 건물이 모두 중앙의 1칸에는 우물마루가 배치되고 좌우에는 2쪽 여닫이 격자문을 한 방이 있고, 자연석을 주춧돌로 한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는 건물이다.
3.7. 침괘정
<colbgcolor=#344c3c> 침괘정[11] |
3.8. 연무관
<colbgcolor=#344c3c> 연무관[12] |
3.9. 봉암성 & 한봉성
<colbgcolor=#344c3c> 봉암성 & 한봉성 |
4. 가는 길
4.1. 대중교통
지하철로 가기에는 성남시 소재의 역인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보다는 산성역이 가깝다.[13][14] 여기서 9번, 9-1번(주말), 52번, 53번(주말)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남한산성입구역에 하차할 경우 2번 출구로 나와 시내버스 정류소에서 382번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버스를 이용하여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단 순수하게 전철역에서 내려서 걷는다고 가정하면 산성역을 추천하지만, 평일에는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이용하여 유원지를 통해 올라가는 것을 추천하며, 휴일에는 산성역에서 내려서 9-1번, 53번을 이용하길 추천한다.기타 등산로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15], 경기도 하남시 광주향교(교산신도시 예정지)에서 북문 쪽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광주시(경기광주역)에서 이동할 경우 15-1번을 이용하면 된다.
5. 사건 및 사고
6. 기타
- 전근대에 지어진 요새들이 대부분 그렇 듯 현대에 와서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은 많이 퇴색되었다.[16][17] 대신 현재는 각종 먹거리, 볼거리들이 밀집된 관광지와 등산로로서 애용되고 있다. 서울 거주자로 어딘가로 가고 싶은데 멀리 갈 여유는 없다면 남한산성도 고려해볼만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하철역에서 버스만 타고 가면 둘러볼 수 있다. 특히 산성의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유료주차장이 있어 주차 후 어떤 방향으로 올라가도 산성을 둘러볼 수 있다. 힘들면 물론 다시 성벽에서 중앙방향으로 가면 주차장이 있다보니 소위 하이힐신고도 둘러보는 코스가 된다. 등산뿐 아니라 로드자전거 업힐
이나 MTB 다운힐[18] 코스로도 유명하여 주말이되면 수많은 인파와 자전거로 마찰이 일어나기 일쑤. 가서 둘러보다 보면 볼거리나 먹거리가 생각 외로 많다. 조선시대 때는 해장국으로도 유명한 곳이었고, 9번 버스를 타고 간다면 남한산성 남쪽 민속마을에 닭죽촌도 있다.
- 2007년 1월 1일부로 남한산성 입장요금이 폐지되었다. 행궁은 어른 2,000원(경기도민은 무료), 주차요금은 승용차 기준 평일 3천 원, 주말 5,000원이다. 운영시간은 17시 30분까지이니 아침 일찍 가도록 하자. 오전 시간만 넘어가도 자동차가 무지 막지하게 막혀서 짜증이 솟구친다. 남한산성 가는 길이 왕복 2차로밖에 안 되어 자동차가 남한산성 입구에서부터 계속 밀린다. 남한산성 입구에서 남한산성까지 가는데만 무려 2시간이 넘게 걸린다!
- 육군학생군사학교가 괴산군으로 이전하기 전 성남시에 위치해 있을 때는 지리적인 가까움으로 입단전 기초군사훈련 때에는 수어장대 앞에서 조국수호 결의대회를 했고, 4학년 후보생들은 40km 산악행군을 이 남한산성에서 했다.[19] 매년 미묘하게 코스가 바뀌긴 하지만 거의 이 산성 성곽을 안이나 밖을 따라 돌았으며, 중간중간 7사단 GOP를 연상케하는 미친 경사가 있어서 장교 후보생들뿐만 아니라 훈육장교들도 매우 싫어했다. 또한 중간에 수어장대에서 교육대별 단체사진을 찍는 이벤트도 있었다. 학군교가 괴산군으로 통합 이전된 지금은 옛날 이야기다. 이외에 육군종합행정학교도 이 근방에 있어서 '남성대'라는 별칭으로 불렀으나, 이 역시 지금은 영동군으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이 일대가 전부 위례신도시로 개발 중이다.
파일:위례남한산성.png
- 육군교도소가 옛날엔 남한산성 근방(복정역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군 내부에서 육군교도소를 은어로 '남한산성'이라고 돌려 말하고는 했다. 경기도 이천시 쪽으로 육군교도소를 옮긴 후에는 없어진 말이지만 나이드신 분들은 남한산성이라고 하면 군 내부의 법적 처벌을 상기하기 때문에 매우 싫어한다. 오인용의 연예인 지옥을 보면 사람 하나 때려 잡으려고 하면 남한산성 가고 싶냐며 말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7세기 신라시대 유적부터 17~19세기 조선시대의 축성기술이 모두 보이며, 비상시 산성도시라는 독특한 점이 큰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산세와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린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 그리고 서양식 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기술이 접해지고, 당시 중국과 일본의 축성양식도 들여와 더해진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로써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은 11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가지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안전등급이 D E급으로 안전대책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해당 기사
- 남한산성 도립공원 내에도 대인지뢰 매설지역이 있다. 2001년부터 3회에 걸쳐 지뢰 제거 작전이 실시되었다고는 하나 지금도 미확인 또는 유실지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과거 지뢰지대 등 표시판이 곳곳에 있다. 지뢰 표시판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자.
- 남한산성 남문 밖의 경우 광주시 관할이 아닌 성남시 관할이라 치안 및 소방출동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남한산성 남문 밖을 제외한 동서북문 및 남문안은 광주시 관할이기 때문에 광주소방서 및 광주경찰서에서 소방 및 치안을 맡지만 남한산성 남문 밖은 성남시 관할이기 때문에 성남중원경찰서에서 치안을 맡고 성남소방서가 소방을 맡는다. 다만 두 지역이 모두 경기도 관할이라 광역상으로는 경기도남부경찰청과 경기도 소방재난본부가 두 지역을 모두 맡고있다.
- 2019년 들어서 주차료가 5배 인상되었다.#
- 성남시 명칭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다.[20]
- 뜬금없지만, 일제강점기었던 1930년대에 서울의 동대문~뚝섬을 오가던 경성궤도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 인근을 경유해 이천, 광주에 이르는 철도를 건설하려고(!) 했었다. 만약 이 철도가 실제로 건설되었다면, 현재의 성남시, 광주시, 이천시와 남한산성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5] 사진 출처.[6]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를 할 수 있다.[7] 사진 출처 - 경기문화재단.[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9] 사진 출처 - 광주시.[10] 사진 출처 - 광주시.[11]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12]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13] 산성역의 옛 이름이 남한산성역이었다. 지금의 남한산성입구역은 단대역이었다.[14] 지하철로 손쉽게 접속 가능한 이점 때문에 남한산성의 접근성은 (땅 대부분이 광주시 관할임에도) 성남시가 더 유리한 입장이다.[15] 5호선 마천역에서 하차하여 걷거나 3317번으로 환승하여 남한산성입구라는 이름을 가진 해당 노선의 종점이자 운행사의 이름인 송파상운 차고지 정류장에서 하차하거나 3214, 3217, 3416, 3314, 3318, 3313, 3315(이상 서울), 33, 231(이상 성남)등의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이 노선들 중에는 마천역이 아닌 거여역에서 오는 노선도 있다. 등산 좋아하면 마천역에서 내려서 그대로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도 되지만 상술된 서문 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라서 계단이 많고 제법 가파른 코스다.[16] 그러나 남한산은 송파, 강동, 하남, 팔당, 광주, 성남 등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충지 중에 요충지며, 그런 지리적 요건이 여전하기에 지금도 군 부대는 주둔하고 있다.[17]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 일부가 가산산성에 의지해서 전투를 치른 적이 있었으나 당연히 포격과 폭격을 듬뿍 맞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패퇴했다. *[18] 2018년 7월 1일부로 산악자전거, 산악오토바이, 전동킥보드 등 바퀴달린 모든 것이 출입금지되었다. 이에 대해서 자전거 동호인들은 매우 불만적인 의견을 내비치고 있다.[19] 이는 각각 51기, 50기가 마지막이었다.[20] 성(城)의 남쪽(南)에 있어서 성남이라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