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Крым[1] Крим[2] Къырым / Qırım[3] Crimea / Crimean peninsula | ||
<colbgcolor=#D52B1E><colcolor=#fff> 대륙 | 인문 | 동유럽 |
지질 | 유라시아, 유럽반도 | |
위치 | 동유럽 흑해 아조프해 연안 | |
국가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영유권 주장, 실질적 통제) [[우크라이나| ]][[틀:국기| ]][[틀:국기| ]](영유권 주장, 국제적 인정) | |
면적 | 27,000km² | |
시간대 | UTC+2 → UTC+3 | |
민족 |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크림 타타르 | |
언어 |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공용어) | |
인구 | 약 2,410,000명(2022년 1월) | |
최대 도시 | 세바스토폴 |
위치 |
[clearfix]
1. 개요
크림반도 영토 분쟁 | |
실효 지배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영유권 주장 | [[우크라이나| ]][[틀:국기| ]][[틀:국기| ]] |
동유럽에 위치해 있으며 흑해, 아조프 해에 면한 반도. 중심도시는 중앙부에 있는 심페로폴(Симферополь)이다. 북쪽의 헤르손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
크림 반도의 면적은 27,064km²이다. 고대에는 그리스인과 스키타이, 고트족 같은 민족이 거주했고, 중세 말부터 근세까지는 크림 칸국의 영역이었으며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정복된 후 러시아인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해 오고 극소수 남아있던 그리스인들과 고트계 주민들은 우룸인으로 동화된 뒤 러시아인으로 동화되었다. 크림 칸국 시절부터 러시아와 악연이 많던 크림 타타르인들은 많은 수가 튀르키예 본토로 건너갔고, 크림 반도에 남은 소수는 2차 세계 대전 후기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4]
1950년 9월 21일, 북 크림 운하의 건설 계획이 확정되었다.
1954년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본인의 정치적 치적을 위해[5] 일방적으로 연방 내부의 행정구역을 조정,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편입시켰고, 이후 1957년부터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강의 물을 크림반도로 끌어들이는 계획인 북 크림 운하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내부의 경계선이 독립하는 각 공화국들간의 국경이 되면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됐다가 2014년에 투표를 거쳐 다시 러시아가 실효지배하게 된다. 보통 어디나라건 해당 지역을 실효지배 하고 있는 국가가 국제적으로도 주권 인정을 받으나, 크림반도 같은 경우는 현대에 들어와서 러시아가 침략으로 강제적으로 우크라이나로부터 빼앗아 온 곳이기 때문에 실효지배는 러시아가 하고 있음에도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며, 몇몇 소수의 공산권 독재 국가들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과 국제 단체들은 지금 현재도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고유 영토로 보고 있다.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연방시와 크림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면적은 26,100km²다. 크림반도의 인구는 2022년 1월 기준으로 241만명으로, 이 중에서 크림 공화국에 1,890,000명, 세바스토폴은 520,000명이다. 크림공화국은 1994년에 인구 2,190,000명을 찍은 이래로 우크라이나 인구가 본격적인 감소세에 접어듦에 따라 2004년도에 인구 2,000,000명 선이 깨졌고, 이후로도 인구가 정체 내지 감소세에 있지만, 세바스토플의 인구증가율이 높은데, 이 때문에 세바스토플에 인구가 점차적으로 집중되는 모양새다. 수도 심페로폴의 인구는 2013년 기준 360,000으로 세바스토폴과 비등했었으나, 이후 심페로폴의 인구가 정체 상태에 머무른 반면 10년도 안 되어 세바스토폴의 인구는 500,000이 넘었다. 즉 지금은 세바스토폴이 크림반도의 확실한 최대 도시다. 합계출산율은 2020년 기준 1.82명으로 러시아 기준으로나 우크라이나 기준으로나 양호한 편이지만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출산율이 1명대 초반까지 떨어진적이 있어서 인구구조는 불안정한 편이다.
2. 명칭
이곳의 이름은 영어식인 '크리미아(Crimea)'와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식인 '크림(Крым·Крим / Krym)'을 혼용하여 쓰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영어 문헌을 번역하다보니 크리미아라는 표기가 많았지만, 90년대 이후 러시아어식인 표기로 거의 정착되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크리미아', '크림' 두 표기를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2022년 3월 1일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 지명을 러시아어식이 아닌 우크라이나어식으로 표기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크림반도에서 크름반도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어 'и'는 국제 음성 기호로 /ɪ/에 해당되며, 이 모음은 외래어 표기법 상 'ㅣ'로 표기되므로 기존의 외래어 표기 용례[6]를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어 Крим([krɪm])의 표기도 '크림'이라고 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다. 언론에서는 크림과 크름을 혼용해 사용한다.
유지방을 가공한 식품인 크림과는 전혀 상관없다. 식품 크림의 스펠링은 cream으로, 발음만 비슷하지 아예 다른 단어이다. 크림의 어원마저도 크림반도와 전혀 연관성 없는 기독교 세례용 성유인 크리스마(cresma)에서 따왔다. 반면 지명 크림(Крым·Крим / Krym)은 크림 타타르어 크름(Къырым / Qırım)에서 유래한 것이며 구체적인 어원이 확실하지 않다.
3. 행정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던 당시에는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 자치공화국과 세바스토폴 특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2014년 크림 위기의 와중에 크림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크림반도는 독립국인 크림 공화국을 선포하고 세바스토폴은 크림 공화국으로 일시적으로 편입되었다. 러시아의 행정 구역으로 가입하는 조약을 맺으면서 세바스토폴이 빠진 나머지 지역이 러시아의 구성 공화국인 크림 공화국이 되고 세바스토폴은 연방시가 되었다. 조약이 비준되면서 러시아는 크림반도 전체를 크림 연방관구로 지정했고 후에 크림 연방관구는 남부 연방관구에 편입되었다.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합병을 러시아의 무력 점령으로 간주하며, 2014년 〈우크라이나 일시적 점령지에서 인권과 자유 제공에 관한 법〉을 제정, 자국의 영토라고 간주하고 있다. 일부 친러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 역시 여전히 명목상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보고 있다.
4. 역사
세바스토폴과 케르치 사이의 항구 도시 수다크의 제노바 성채
4.1. 고대
크림반도의 역사는 고대부터 상당히 역동적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의 식민 도시 케르소네소스가 무역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 지역에 식민 활동을 한 그리스인들은 도자기에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담아서 이를 현지인들의 밀과 교환하는 무역을 하며 평화롭게 교역하였다.[7]기원전 513년 경에 다리우스 1세에 의해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가 된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세기경 크림반도 및 케르치 해협 우안 지역에 스키타이계와 그리스계를 중심으로 보스포로스 왕국이 성립되어 번영하였으며 한때는 폰투스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다시 회복되었고 결국에는 로마 제국의 종주권하에 놓이게 되면서 지중해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4.2. 중세
서기 340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지배권이 상실되었고 370년 훈족의 침입을 받은 이후 명맥이 거의 끊기는 듯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 당시 동로마 제국이 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반도 중북부는 고트족에 이어 볼가 불가르, 그리고 하자르 칸국이 지배하다가 10세기 키예프 공국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동로마의 영향을 받고 동방 정교로 개종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동방 정교를 받아들이고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의 동생인 황녀 안나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지역이 현재의 세바스토폴 근처인 케르소네소스이며, 이런 까닭에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화되기 이전의 크림반도는 정교회와 러시아 국민의 성지 역할을 했다. 동로마가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몰락한 후 크림반도 남부는 트라페준타 제국이 수복했다가 남부의 최하단부는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이 점령하였고 제노바는 카파(Kaffa) 항을 식민화했다.참고로 카파 항은 그 악명 높은 중세 흑사병의 최초 발병지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이다. 아직 중세 흑사병의 감염 경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학설은 이렇다. 1347년에 몽골 제국의 일원인 킵차크 칸국 자니베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크림반도의 카파를 공격했는데 이 때 몽골군 내부에 흑사병으로 죽은 병사들이 있었다. 이 때 몽골군은 생물학 전쟁을 시도하는데 그 흑사병으로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투석기에 실어서 카파 성벽 너머로 던져버린 것이다. 이 병사들의 시체에서 페스트균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카파 성 안엔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카파에 거주하고 있던 이탈리아인들이 총 12척의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배에는 페스트균 감염자들도 탔기에 선내에선 빠른 속도로 흑사병이 퍼져 나갔고, 이후 이 죽음의 배는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란 항구에 입항했다. 그 후 보균자 및 선내에 가득한 시체들로 인해 시칠리아에 이어 곧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져나갔다. 그래서 훗날 이를 '죽음의 배 사건'으로 부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력하게 떠오르는 가설'일 뿐 100% 확실한 실사(實史)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그 카파 공성전 당시 몽골군이 투석기로 흑사병에 감염된 병사의 시체를 성벽 안으로 던져 넣었다는 기록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남긴 기록이 아니라 한 이탈리아 법조인이 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풍문을 기록한 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카더라 통신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메시나 항에 입항한 이른바 '죽음의 배'가 정말로 카파에서 출항한 배가 맞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카파에서 발병한 흑사병이 이탈리아로 퍼진 것이 맞는지 제대로 역학조사가 이뤄지지 못했기에 그럴 듯하지만 확실하게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카파의 흑사병과 메시나의 흑사병이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만만찮다.
키예프 공국의 붕괴 이후 이 지역 대부분은 킵차크 칸국에 속했으며, 킵차크 칸국이 와해되면서 1430년 크림 칸국이 독립했다. 제노바 공화국과 크림 칸국, 그리고 트라페준타 제국의 번국이였던 테오도로 공국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맞섰는데, 1475년,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와 제노바의 식민지를 전부 점령하고 테오도로 공국도 멸하고 크림 칸국도 복속시켜 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8세기, 크림 칸국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 정복하면서 이후 쭉 러시아령이 되었다.
지배층인 칸과 그 일족은 몽골 출신이었지만 피지배인은 튀르크계 부족들로 구성되었고 그것도 얼마 뒤에는 둘이 서로 섞여버려서 크림 칸국은(사실은 시조인 킵차크 칸국부터 이미) 이미 사실상 튀르크계 국가였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 번국으로 지내다보니 오스만 투르크와의 동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오늘날의 크림 타타르인의 언어는 튀르키예어와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크림 칸국은 그냥 속국이 아니라 만약에 오스만 제국의 제위가 끊어져 버린다면 크림 칸국의 칸이 오스만 제국의 제위를 잇는 조건이었다. 거의 청나라와 내몽골 수준. 혈통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많이 동화되었다. 아제르바이잔어와 터키어보다 크림 타타르어와 터키어가 더 가까울 지경이니 할 말 다했다. 사실 단순히 거리만 따지면 크림반도와 오스만 제국 본토가 제법 멀어 보이지만, 흑해 덕분에 서로 접근이 편리했던 영향도 있다. 동로마 제국 시절에도 제국 도시 케르손이 있었고 폴리스 시대에도 흑해를 통해 그리스 문화권과 긴밀히 교류해 왔음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으로 크림반도와 그리스, 발칸, 소아시아 문화권과 아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냥 타타르어도 같은 튀르크어족이나 크림 타타르어는 남부 방언 한정으로 오구즈어파, 볼가 타타르어 등 나머지 타타르어는 킵차크어파로 전혀 다르다.
4.3. 근대: 크림 전쟁
그러다 부동항을 얻기 위해 흑해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고 뒤이어 흑해 일대에서 주도권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남진 정책을 강하게 밀어 붙이고 있었고, 부동항 확보를 위한 1차적인 목표가 바로 크림반도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가 제국주의에 거하게 취해 있어서 크림 진출은 이처럼 부동항이 주목적이었지만, 크림반도가 원래 고대 그리스인들과 동로마가 제대로 개척해 놓은 땅이고, 바로 이 동로마 제국을 통해 키예프 공국이 정교회로 개종함으로써 러시아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점[8]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은 진출이었다. 전략적 거점이거니와 역사적 의미까지 컸고 제국주의까지 동반되니 눈에 불을 켜고 점령하려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결국 1768~1774년, 1788~1792년, 두 차례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크림 칸국을 사실상 독립국으로 만들어버렸고 곧바로 이를 합병했다.[9] 이렇게 크림반도를 수중에 넣은 러시아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발칸반도와 캅카스 방면에서 지중해를 향해 적극적인 남진을 시도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 열강들은 이런 러시아의 남진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도왔다. 또한 직접적 이득이 없던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 이것이 크림 전쟁이다.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고 러시아는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해 1856년 파리 조약을 통해 흑해 일대의 통제권을 잃고 남진이 저지되었다.
이 전쟁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영국의 여성 간호사 부대를 창설해 전장에서 간호병으로 활약해 현대전 간호병의 전략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크림 전쟁은 근대 전쟁과 현대 전쟁의 경계선을 그은 전쟁이라고 평가한다.
4.4. 소련 시대
1919년 11월 말의 상황. 사실 이 해만 해도 엄청난 격동이 벌어졌기에 지도가 조금씩 다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러시아 혁명 이후 크림반도 지역과 그 북부의 오늘날 헤르손(Kherson) 주 지역은 크림타타르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독립했으나, 1921년 소련에 편입되었다. 이 때 헤르손 지역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고, 크림반도만이 소련 내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Крым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Совет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 되었다.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제외하면 서구권에서 그리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림반도도 독소전의 주요 격전지 중에 하나였다. 1942년 세바스토폴 함락 이후 독일군은 크림반도 전역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케르치 해협을 중심으로 캅카스의 유전 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해협을 건너려는 독일군과 케르치를 탈환하려는 소련군 간의 전투가 수없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케르치는 영웅 도시 칭호를 받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1944년 5월, 약 45만의 병력을 동원한 소련군의 공세에 약 25만의 독일-루마니아군이 패하면서 루마니아 해군의 원호 아래 흑해를 통해 철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독일군이 소련에서 물러난 1944년 5월 18일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나치 점령기 당시에 자행된 민족 차원의 대 소련 반동 행위에 대한 보복 조치"를 운운하면서 크림 타타르인들을 전원 저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다.[10] 사족이지만 이 때 크림반도 전체에 흩어져 있는 20만 명에 달하는 타타르인들을 전부 화물열차 편에 잔뜩 쑤셔 넣어서 출발시키기까지 딱 3일 걸렸다고 한다.[11] 기차 안에서만 최소 7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2천 4백여 가구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는데, 그 과정에 굉장히 의심쩍은 구석이 있어서 가족끼리 생이별하라고 고의로 찢어놓았다는 음모론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사람들은 1980년대가 다 돼서야 고향 땅으로 돌아올 권리를 되찾게 된다. 크림 타타르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노래 "1944"의 뮤직비디오. 참고로 이 노래는 2016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우크라이나 대표로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 크림반도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 크림 운하의 건설 계획이 확정되었고, 1957년에 착공된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강에서 크림반도까지, 약 400㎞에 걸쳐 운하를 건설해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크림 타타르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끝난 이후 이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서 누리던 소수민족 자치공화국 지위를 잃고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개 주로 격하당했다가, 19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12] 3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13]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크림반도의 인구 구성은 71%는 러시아인, 22% 가량이 우크라이나인이었는데, 오히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된 이후 러시아인 인구 비중이 점차 증가하여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는 인구 90% 가량이 러시아인이 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연방 내에서 행정구역을 조정한 것에 불과해[14] 큰 문제가 없는 조치였지만 소련 해체 이후 소련 내부 경계선이 국경선으로 변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1945년 얄타 회담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4.5. 소련 해체
간접적이다만 소련 해체로 이어지는 사건들 중 하나가 이곳 크림반도에서 이어졌다. 정확히는 8월 쿠데타가 발발할 당시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있었던 곳이 크림반도에 위치한 휴양도시 포로스의 다차이다. 이 다차에서 쿠데타 실행 당시 아침 식사를 하며 신연방 조약을 구상하던 고르바초프에게 쿠데타 가담 장성들이 들이닥쳐 사임하고 대통령 직위를 넘기라 협박했고, 이를 거부한 고르바초프가 쿠데타 기간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던 곳도 이곳 크림반도의 다차였다.소련이 해체될 무렵이던 1991년 1월, 크림반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계 주민들의 요구로 다시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4.6. 1990년도 독립 시도
※크림 관련 주요 일지
- 1954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편입
- 1991.2 크림 주민, 자치공화국 승격 운동 전개, 우크라이나, 자치공화국 승격 인정
- 1991.6 크림 자치공화국, 일방적 독립 선포
- 1991.12 러시아, 우크라이나 독립 경우 크림반도의 러시아반환 주장(우크라이나측은 이를 일축)
- 1992.2 크림 의회, 완전 독립 개헌안 채택
- 1992.4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권 부여(독립은 불허)
- 1992. 5 크림 의회, 독립결정 유보
- 1992.6 우크라이나, 크림 의회지도자간 크림의 우크라이나 존속 합의
- 1994.1 Meshkov 크림 자치공화국 대통령 취임 이후, 독립내지 러시아와의 합병을 공개적으로 재추진
- 1994.3 독립문제에 관해 여론투표 실시(당초 주민투표 실시예정이었다가 구속력 없는 여론 투표로 격하)
- 1994.5 크림 의회(3. 27 총선에서 Meshkov를 지지하는 친러시아계가 80% 이상 당선), 크림 독립을 규정한 1992년 헌법 부활 결의 러시아 및 서방국가들의 여론에 따라 추후 철회
- 1994.7 Kuchma 대통령의 당선에 따라 독립움직임 일단 진정
- 1994 1994년 중반 Meshkov 대통령과 크림 의회간 대립, 권력투쟁 발생
- 1994.10 크림 의회, Meshkov 대통령 정부의 해산 결의, 대통령의 권한을 상당히 박탈, 총리에게 부여 Meshkov 대통령의 헌법위반 주장 반발에 따라 의회측은 헌법자체를 개정
- 1995.3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크림 자치에 관한 법률을 개정, 크림 자치공화국 대통령직 폐지 자치 공화국 지위는 계속 인정
- 1995.4 Kuchma 대통령, 크림 자치공화국 정부를 한시적으로 우크라이나 내각 산하에 종속 조치
- 1996.6 우크라이나 신헌법에서 크림 자치공화국의 지위는 인정하되, 권한은 다소 축소 규정
- 1997.10 크림 의회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채택 결의
- 1998~00 L. Hrach 크림 공산당 제1서기와 친 Kuchma 대통령 성향의 S. Kunitsyn 크림 총리간 정치적 대립이 나타났으나 대체로 안정적인 정국 유지
- 2002 크림 자치 공화국 선거에서 친 Kuchma 대통령 성향의 의원들이 득세, B. Deich 의회 의장 선출
주우크라이나 대한민국 대사관 정세 동향정보 - 작성자 주우크라이나대사관 작성일2006-09-13 (원본링크)
- 1954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편입
- 1991.2 크림 주민, 자치공화국 승격 운동 전개, 우크라이나, 자치공화국 승격 인정
- 1991.6 크림 자치공화국, 일방적 독립 선포
- 1991.12 러시아, 우크라이나 독립 경우 크림반도의 러시아반환 주장(우크라이나측은 이를 일축)
- 1992.2 크림 의회, 완전 독립 개헌안 채택
- 1992.4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권 부여(독립은 불허)
- 1992. 5 크림 의회, 독립결정 유보
- 1992.6 우크라이나, 크림 의회지도자간 크림의 우크라이나 존속 합의
- 1994.1 Meshkov 크림 자치공화국 대통령 취임 이후, 독립내지 러시아와의 합병을 공개적으로 재추진
- 1994.3 독립문제에 관해 여론투표 실시(당초 주민투표 실시예정이었다가 구속력 없는 여론 투표로 격하)
- 1994.5 크림 의회(3. 27 총선에서 Meshkov를 지지하는 친러시아계가 80% 이상 당선), 크림 독립을 규정한 1992년 헌법 부활 결의 러시아 및 서방국가들의 여론에 따라 추후 철회
- 1994.7 Kuchma 대통령의 당선에 따라 독립움직임 일단 진정
- 1994 1994년 중반 Meshkov 대통령과 크림 의회간 대립, 권력투쟁 발생
- 1994.10 크림 의회, Meshkov 대통령 정부의 해산 결의, 대통령의 권한을 상당히 박탈, 총리에게 부여 Meshkov 대통령의 헌법위반 주장 반발에 따라 의회측은 헌법자체를 개정
- 1995.3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크림 자치에 관한 법률을 개정, 크림 자치공화국 대통령직 폐지 자치 공화국 지위는 계속 인정
- 1995.4 Kuchma 대통령, 크림 자치공화국 정부를 한시적으로 우크라이나 내각 산하에 종속 조치
- 1996.6 우크라이나 신헌법에서 크림 자치공화국의 지위는 인정하되, 권한은 다소 축소 규정
- 1997.10 크림 의회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채택 결의
- 1998~00 L. Hrach 크림 공산당 제1서기와 친 Kuchma 대통령 성향의 S. Kunitsyn 크림 총리간 정치적 대립이 나타났으나 대체로 안정적인 정국 유지
- 2002 크림 자치 공화국 선거에서 친 Kuchma 대통령 성향의 의원들이 득세, B. Deich 의회 의장 선출
주우크라이나 대한민국 대사관 정세 동향정보 - 작성자 주우크라이나대사관 작성일2006-09-13 (원본링크)
그러던 와중 크림반도 내에서 크림반도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계에서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진다. 이러한 움직임을 달래기 위해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크림 자치 공화국(우크라이나어: Автономна Республіка Крим, 러시아어: Автономная Республика Крым)이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크림반도에 상당히 미련이 남아 있었다. 특히 크림반도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주민들은 1992년 독자적인 헌법 제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따로 놀려고 할 정도로 친러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고,[15] 트란스니스트리아같이 러시아군이 개입할 경우 사실상 러시아 통제 아래 독립국으로 분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옛 소련 해군에 속했던 흑해함대 관할 등의 문제를 두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조율 중이던 러시아 정부 측에서는 우크라이나를 크림반도의 관할 문제로 자극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흑해함대는 1997년 우크라이나 해군과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로 분할되기 전까지 러시아, 우크라이나 공동관할이었다. 무엇보다도 국제법상 현상 유지의 원칙에 따라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영토가 되는 것이 타당했으며 1994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참여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Budapest memorandum)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영토 주권을 보장하기로 했으므로 협약을 부득이 어겨가면서까지 크림반도를 차지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1997년 우호친선조약을 통해 흑해함대를 양국 해군 관할로 분할하고, 세바스토폴에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는 것이 허락되는 대신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인정했다.
4.7. 양국의 갈등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점차 친서방 - 탈러시아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양국간 갈등이 점화되기 시작한다.결국 2009년에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셴코 정부에서 러시아 해군에 크림반도 시설 임대를 연장하는 것을 거부하며 러시아에 크림반도에서 해군 철군을 준비하라고 요구하였다.## 당연한게 나토에 가입하려는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함대는 가장 큰 걸림돌이였기 때문.#
4.8.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2013년부터 2014년 사이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되고 반러, 친서방 성향의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지원을 당시 러시아에서 추진하고 있던 유라시아경제연합의 관세동맹으로 유도시켜 유라시아 연합을 보강시키려 하고 있었던 터라, 우크라이나 정부의 정권교체는 곧 세력권 이탈로 해석했다. 나름대로 우크라이나를 끼어넣으려 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공들이던 프로젝트가 친러정부의 전복으로 전부 물거품이 된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에 새로 수립된 민주정부를 인정하고 이후 몇 차례 영향력 행사를 통해 친러 정부의 성립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16], 유로마이단의 경우 워낙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패와 실정으로 친러 성향 정치세력이 인심을 잃었던지라, 적어도 러시아가 바라던 근시일 내에 민주적인 방식(선거)을 통해 친러 정권이 집권하기는 힘들었다.이는 공산당-지역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한 크림반도 주민들을 자극했고, 러시아는 이를 이용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당시 공산당이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제1당이 된 적이 있었고[17] 공산당의 세가 약해진 다음에는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당이라는 정당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야누코비치도 지역당 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크림 자치정부 및 러시아계 주민들은 2014년 2월 영토 내의 공항을 장악하고 독립 움직임을 보이며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에 주둔 중이던 해군 병력을 이용해 의용대를 빙자한 군사력으로 크림반도를 점차 장악해 나갔다.
이후 러시아에 의해 장악된 크림 자치공화국은 3월 16일 주민들을 상대로 독립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해 독립 여론을 확인했다. 투표 결과는 독립 및 러시아 귀속 찬성 96.77%라는 압도적인 여론이 나타났다.[18] 3월 17일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해 다음날인 3월 18일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면서 사실상 러시아로 편입되었다.[19]
한편 합병 당시 여론 상황을 보면 러시아계는 병합에 적극 찬성이고, 우크라이나계는 정치성향에 따라 다소 갈렸으며 크림 타타르인은 반대가 많았지만 크림 타타르인은 인구의 15% 남직한 소수민족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병합할 수 있던 것이었다. 합병이후로 한동안 축제분위기였던것도 이때문이었다. 참고로 고려인들은 현지여론의 영향을 밤아 경제상황, 정치성향에 따라 달랐는데 크림반도에 주거하는 고려인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인구와 경제력이 우월하다면서 기회로 보며 찬성쪽이 우세한 편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당시에 크림반도내에서 러시아 병합 찬성 여론이 우세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러시아내에서도 그냥 이 참에 크림반도를 병합하자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푸틴도 지지율이 부진하던 와중에[20] 이런 여론을 외면했다가, 2016년 총선과 2018년 대선에서도 악영향을 끼칠게 뻔했기 때문에 경제적, 외교적인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크림반도 병합이라는 카드를 써먹은것인데 우크라이나군이 이때는 위낙 약체라 병합이 손쉽게 진행되어 러시아군이 손해본것도 없었고[21] 크림반도 병합 이후로 푸틴의 지지율이 폭등하여 反 푸틴 여론을 완전히 잠재우는데 성공을 거둔것은 물론, 약 4년 동안 경기침체에도 러시아에서 푸틴은 신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입지를 다질정도로 푸틴과 통합러시아에게 엄청난 대박이 되었다.
한편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시작했으며, UN에서는 총회 결의안 68/262호를 통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22]
일각에서는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정식 인정하거나 혹은 크림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부 일부 지역은 우크라이나에게 반환하고,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케르치, 얄타 등 주요 부동항 도시들이 몰려 있는 남동부 지역은 러시아령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영토 분할을 해서라도 이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당사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방의 정치권 인사들이 이를 받아들이지는 미지수.(실제로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 전 지역들을 모두 우크라이나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반환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거듭 못 박았다. 즉, 양측 모두가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라 저 분할안이 실행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러시아측의 입장은 역사적으로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연방의 고유 영토라는 것이다. 이 입장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일관되게 유지되게 있다.
2017년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을 배경으로 한 200루블의 신권이 발행되었다.관련 뉴스(러시아어) 크림반도 영유권 주장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 등장한 젤렌스키 정권은 돈바스와 크림 문제의 평화적 해결 공약의 일환으로 2020년부터 크림반도 러시아 합병으로 인한 탈주민들을 위한 도시를 건설했고 #,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크림 반환을 위한 국제적 지지 확보를 목적으로 국제회의인 '크림 플랫폼'을 개최하며 꾸준히 국제적 관심을 조명시키려 노력했다.
4.9.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함으로써 크림반도에 물 공급을 할 수 있는 헤르손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크림 합병 이후로 심각한 물 부족 및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쪽에서 북크림 운하를 봉쇄한 탓에 크림반도쪽으로 물을 확보하질 못해서 러시아쪽에서 공수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23]참고로 크림 타타르인 메질리스(Qırımtatar Milliy Meclisi)[24]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에게 다시 정당하게 크림반도 영유권이 회복되는 순간 2014년 2월 27일(러시아가 사실상 크림반도를 통제하기 시작할 날) 이후 불법으로 이주한 러시아인은 퇴거대상자라고 밝혔다.[25] 2014년 ~ 2022년 사이 불법으로 이주한 러시아인만 1,000,000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다만 워낙 많은 러시아인들이 거주중이고 서방국가들이 이주자 추방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부역하여 우크라이나인에게 해를 끼친 게 아닌 단순이주자들은 그냥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 강제 이주는 그 자체로 인종 청소가 될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6월 들어 그 동안 우크라이나가 차단하고 있던, 크림반도에 물을 공급하는 북 크림 운하를 재개통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대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8월 우크라이나가 헤르손으로 향하는 철도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히며 기어코 크림까지 우크라이나의 사정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보페도로프카(우크라이나어로는 노보페도리우카) 비행장이 폭발해 사상자가 났다는 소식이 들러왔다.
8월 23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크림반도 탈환이라는 목표를 공식 선언했다.# 9월 13일 우크라이나 국방부 트위터에서 크림반도를 탈환하는 선전영상을 올리면서 다시 한번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군대와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다.
10월 8일, 크림 대교에서 큰 폭발이 발생했다.[1보] "러시아 점령지 크림대교에서 큰 폭발" <로이터> 크림 대교 붕괴 사건 문서 참고.
2023년 4월 28일 우크라이나군에 드론 공격으로 인해 러시아 해군 흑해 함대가 있는 세바스토폴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리고 전 돈바스 반군 사령관 이고르 기르킨은 2023년 5월 SNS 영상으로 2014년 당시에, 크림 공화국 자치 정부는 애시당초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할 의사가 없었으나 기르킨 자신을 위시한 러시아군이 무력으로 분리독립과 러시아 편입을 강제했다고 주장했다.#
2023년 5월 중순부터 우크라이나군이 크림 반도 탈환을 목표에 둔[26] 2023년 우크라이나 대반격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대반격 자체가 목표인 자포리자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면서 크림 반도 탈환은 없던 일이 되었다.
7월 16일. 다시 크림 대교를 철로 제외한 도로 부분을 공격했다. 8월에 우크라이나군 드론, 미사일들이 흑해함대 사령부와 주축 함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전황으로 한동안 안전하듯하다가 2024년 6월에 크림반도 해수욕장 은근 공격하였다는 점이다.#
5. 인문지리
크림반도는 흑해와 아조프해(아조우해)로 대부분이 바다에 둘러져있다. 하지만 반도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육로가 짧기 때문에, 반도이지만 사실상 섬이나 월경지와 다름 없는 위상이다.마치 6.25 전쟁 이전 한국령이었던 옹진반도와 비슷한데, 크림 공화국을 기준으로 한 우크라이나 본토와의 경계는 10 km가 안 되고, 그나마도 중간에 5km짜리 호수가 있다. 이름은 프리오브라젠카(Preobrazhenka). 좁은 지협으로 본토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었고 오히려 끝부분이 넓게 퍼져있다는 점에서 고흥군이나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도 비슷하다. 사실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경계보다 남쪽에 건천에 가까운 운하가 있으므로 기능적으로는 섬이라고 할 수도 있다.
크림반도 북부의 수많은 호수들은 사실 석호로, 퇴적 작용으로 바다 곳곳이 막혀 생긴 것들이다. 이 퇴적물로 크림반도가 섬이 아닌 반도로 존재하는 것으로, 실제로 마지막 간빙기 시절까지만 해도 크림반도는 섬이었다. 후빙기(홀로세) 이후로 퇴적물의 육화로 비로소 반도가 된 것이다. 크림반도가 섬이 아닌 반도가 된 것은 불과 1500여 년 전의 일이다. 이를 시바시 호수라고 하는데 시바시의 뜻은 '더러운' '썩은' 이라는 카자크어로 한자로 번역돼서 부해(腐海 썩은 바다)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시바시 호수는 굉장히 얕고 여름이면 바닷물이 데워져서 썩은내가 나며 호수가 핑크빛으로 물든다. 이곳의 습지와 갯벌은 세계적으로 중요하고 특이한 자연 환경이다. 지형을 보면 굉장히 특이한데 페레코프 지협[27]으로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가 연결되어 있고 옆에 꼭 인공적인 다리처럼 아라바트 사주가 있다.
러시아 본토와는 육로 연결은 되어 있지 않고 무조건 흑해, 아조프 해를 건너야 했지만 2018년 크림 대교가 개통되어 러시아에서도 육로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주행해 건넜다. 한국으로 치면 거제도처럼 러시아 본토에서 연륙된 섬이 되었다.
얄타 회담이 열렸던 얄타(Ялта) 시가 이곳 남부의 흑해와 맞닿은 도시이다. 인구 13.5만 러시아의 소치와 함께 유명한 흑해의 여름 휴양지로, 소설가인 안톤 체호프가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이곳에 살기도 하였다. 캣 피플(1942) 같은 고전 공포 영화 프로듀서로 유명한 발 루튼도 이곳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에 이민왔다. 알룹카(Алупка) 역시 유명한 크림반도의 휴양지다. 그래서 유로마이단 초기엔 크림 위기가 경쟁 관광지인 소치를 띄우고 크림을 엿먹이려 한다는 일부 우크라이나 정치인의 주장도 있었다. 과거엔 관광객의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에서 왔기 때문에 큰 타격이 예상되었지만 푸틴이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나서는 공무원들을 크림반도로 휴가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생각만큼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크림반도를 한국에서 제주도 가듯 가까운 휴양지로 선호하기 때문에 관광수입면에선 크림 위기 그 때만 잠깐 움찔했지 곧 정상화되어 거의 피해가 없는 상태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지속적으로 침체되고 있는 양상이고 무엇보다 물가가 꽤 올라서 그렇게 큰 재미를 본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우크라이나도 경제 침체가 덜한 게 아니고 우크라이나인 관광수요보다는 러시아인 관광수요가 더 크기 때문에 차이가 있고, 인프라 수준같은 것은 많이 나아졌기는 했지만 물가가 오른 것을 감안하면 득실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유럽권에서 숨겨진 포도주 명산지이다. 러시아 마트를 가보면 러시아 국내산(Россия)과 크림반도산(Крым)이 따로 진열돼 있다. 참고로 러시아 사람들은 조지아(Грузия)산을 으뜸으로 친다.
2014년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점령과 러시아 귀속 선언 이후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향한 모든 자원 공급을 중단하면서 크림반도에 물이 말랐다.한글영문기사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게 크림반도를 넘긴 것은 비록 1차적으로는 본인의 정치적 치적을 위해서긴 했지만,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한 마디로 현실적으로 따져 우크라이나 땅에 귀속되어야 제대로 토지를 활용할 수 있는 땅이 우크라이나를 버리고 러시아로 갔으니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주민들의 동의를 전혀 받지 않고 졸속으로 이뤄진 점은 비판의 소지가 있고,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빠르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현지 주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전략적 가치
크림반도 안의 항구, 해군기지 뿐만 아니라 항구도시 오데사, 미콜라이우, 마리우폴, 로스토프나도누 등과 같은 도시들을 막기에, 쳐들어가기에 수월한 전략적 기지다. 러시아 기준으로 오데사, 미콜라이우의 함선 건조의 안전과 크림반도 동부/서부의 단절성도 해결할 수 있다.
인근 수로인 드니프로 강도 주요 수로이자 교통로이며, 그리스시절, 바이킹 시절에도 건재한 교통로로 쓰이며 크림반도와도 끈끈한 영향을 받는다. 또한 흑해 앞바다에서 캅카스, 카스피해 지역의 물동량을 바다로, 유럽으로 이어준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흑해 함대의 유지와 정박 측면에서 필수적인 위치다. 러시아의 몇 안 되는 부동항이자, 지중해로 이어주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6. 관광
동구권 관광지 특성 상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자연, 바다와 해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사까지 많은 역사 유적 등으로 과거 우크라이나를 넘어 동유럽 전체에서 꽤 알려진 휴양 관광지이다. 러시아 제국 말기인 1873년에 크림반도를 관통하는 철도가 연결되어 러시아 제국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휴가철이 될때 찾는 휴양지로 이름을 날렸고, 소련으로 바뀌면서 이들 휴양지가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개방되었고, 많은 리조트 호텔과 캠프장, 요양원이 설치되어 소련의 최고의 인기 휴양지 가운데 하나로 손 꼽혔다. 소련에서 어린이들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 바로 크림반도 피오네르 휴양캠프(아르텍) 티켓이었을 정도였다. 소련 서기장들의 별장도 설치되어 8월 쿠데타 당시에도 고르바초프가 잠깐 감금되었을 정도. 소련이 무너진 이후로도 관광지로 명성을 날리는것은 여전해서 우크라이나를 여행한 외국인들에게는 키이우, 리비우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3대 관광 지역으로 꼽혀왔으며 오데사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였기도 했다.전쟁 전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인이 관광하는 데 직접적인 제한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당연히 지금은 크림반도에 들어가려면 국제공항이 있음에도 대러제재로 국제노선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러시아 본토를 거쳐 출입해야 하며 화폐는 당연히 우크라이나 흐리우냐가 아닌 러시아 루블이 통용되고, 서방의 제재로 인해 비자카드, 마스터카드, 아멕스 등 국제 신용카드 및 체크카드, 그리고 해외 로밍[29]의 사용이 불가능하니 사전에 러시아 루블화 현금이나 동전, 러시아산 신용카드[30]를 지참하고 가야 한다.
러시아의 크림 병합에 따른 서방의 경제 제재로 크림반도에서 이용이 불가능한 프랜차이즈와 서비스들이 몇 있다. 맥도날드는 있었다가 철수하였고, 버거킹과 KFC도 없다.[31] 스타벅스도 없어서 러시아 본토로 여행가서 맥도날드나 KFC를 먹고 오는 크림 출신 러시아인들도 많으며 또 넷플릭스도 안 터진다.
국내 모 여성 잡지가 크림반도 투어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크림반도의 유명 관광지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
우크라이나 정부에서는 크림반도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통일부 허가 없이 임의로 북한에 방문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사처벌 받는 것과 유사하게 사전에 자신들에게 승인을 얻지 않고 러시아를 통해 크림반도에 입국한 기록을 확인한 경우 이유 불문 불법으로 추후 3년간 우크라이나 입국을 전면 금지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크림 지역 신문, 방송, SNS 등을 뒤져서 인터뷰나 사진 등을 통해 크림반도 출입을 잡아내고 있음을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에서 경고하고 있다. 이 경우 일본,미국 등에서 입국거부 사례가 되는지는 확인 불가.
한국에서도 크림반도는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여행경보제도 3단계인 출국권고였다. 다만 돈바스나 다른 출국권고 지역처럼 아주 위험한 상태는 전혀 아닌데 정치적 이유로 그렇게 지정한 사례에 가깝다. 한국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러시아가 통치하고 있다는 점까지 더해져 사고가 생길 때 우크라이나 영사관이나 대사관의 도움을 받기 어려우니 이곳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유의하자. 호주는 2018년 8월 기준 여행금지, 미국은 여행경계 단계이다.
다만 크림반도 현지주민들은 우크라이나에 있을때보다 치안이나 인프라 수준이 더 나아졌다고 말한다.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러시아 정부에서 크림 대교를 건설하고 낙후된 인프라 시설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으며 치안인력도 늘렸기 때문이다.[32] 대신 우크라이나의 법규 대신 러시아 법규를 적용하고 치안인력이 크게 늘어나면서 사는것이 더 까다로워졌고 물가도 꽤 올랐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정부를 여전히 싫어하기는 하지만 러시아 정부라고 해서 무조건 환영해준다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다.
2021년 8월 3일자 코메르상트 보도에 따르면 크림반도에는 2021년 1월부터 7월까지 7개월 만에 관광객이 약 500만 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
2021-2022년 우크라이나 위기를 계기로 2022년 2월 13일 0시를 기해 크림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영토 전역이 여행금지로 지정되면서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 영토로 판단 중인[33] 크림반도 역시 여행금지가 걸렸다. 이에 따라 크림 대교나 러시아 국내선 항공기 등을 이용하여 크림반도를 출입한 사실이 SNS 등으로 확인될 경우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된다.
7. 기타
- 크림반도의 랜드마크들을 전투기 시뮬레이션 내에서 현실 사진과 비교하며 둘러본 영상이 있다.
2014년 이전에는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당시 크림반도에 맥도날드 지점이 3개 존재하였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모두 폐쇄되었다.
- 키크는 수술로 유명한, 일리자로프가 크림 반도에 소재한, 크림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 러시아어. 발음은 '크릠'.[2] 우크라이나어. 발음은 '크림'.[3] 크림 타타르어. 발음은 '크름'.[4] 일각에서는 독일에 부역한 것에 대한 처벌이라고 하나 애초에 독일보다 소련 편에서 싸운 크림 타타르인이 훨씬 더 많다. 체첸·인구시인, 칼미크인의 사례처럼 독일에 부역한 소수의 사례를 스탈린이 침소봉대하여 이들을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태운 것이다.[5] 당시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게오르기 말렌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브렌티 베리야 등 차기 경쟁자들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던 그는 우크라이나계 공산당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크림 반도를 재빠르게 우크라이나에 넘겨벼렸다. #[6] 우크라이나어 и /ɪ/보다 우리말 'ㅡ'에 더 가까운 러시아어 ы나 폴란드어 y (모두 /ɨ/)도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ㅣ'로 표기하며, 따라서 러시아어 Крым([krɨm\])의 표기도 '크림'이 된다.[7] 일조량이 많지만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 그리스 지역의 특성상 밀 농사보다는 포도나 올리브 농사를 주로 지었다. 그리고 이 올리브와 포도를 가공하여 만든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고대 그리스 상인들의 주 상품이었던 것. 반면 흑토 지대와 인접한 크림반도 일대에서는 밀 농사가 성행하였기에 고대부터 무역이 활발했던 것이다.[8] 당장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연 블라디미르 대공이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처음 세례를 받은 곳이 바로 크림반도의 헤르소네소스(오늘날의 세바스토폴)였다. 이 때문에 크림반도는 제정 시절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 성지 역할을 하였다.[9] 이렇게 최근까지 오스만에 복속되어 있던 크림 칸국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크림반도에는 이슬람풍 대규모 건축물 바흐치사라이 궁전이 관광자원으로 남아있다.[10] 이들 대부분을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버렸는데 이 강제 이주 때문에 크림 칸국 멸망 이후 고향을 떠나 정착한 터키와 고향인 크림반도를 제외하면 크림 타타르가 제일 많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우즈베키스탄이다.[11] 이 강제 이주를 주도한 사람은 바로 스탈린의 심복 라브렌티 베리야였는데 강제 이주 2달 후 타타르인의 강제 이주를 완료했다고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고했더니 그 직후 아라바트 사주 지역을 실수로 빼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베리야는 이들을 실어 보낼 기차 편을 구하는 대신 아직 아라바트 사주에 남아있던 타타르인 수백 명을 배에 모조리 실은 후 배를 침몰시켜 아조프 해에 수장시켜 버렸다.[12] 165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학정에 맞서 카자크 대봉기를 일으킨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에게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신종을 맹세한 조약으로 이 조약 직후 러시아가 참전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몰락하는 계기가 된 대홍수의 스케일이 훨씬 커지게 된다.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이후 러시아가 수백년 만에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손을 뻗치게 된 계기가 된 조약이다.[13] 혈통상으로는 러시아인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접경 지대 출신에 10대 시절부터는 우크라이나에서 살았으며 정치인으로서의 지역 기반까지 우크라이나였던 인물이라 사실상 우크라이나인 취급을 받았다.[14] 당시까지만 해도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하고 붙어 있을 뿐 러시아 본토와는 연결이 안 되어 있는 사실상의 월경지기도 했다.[15] 실제로 우크라이나 독립투표 당시에도 크림반도는 찬성률이 50% 중반 수준으로 타 지역들이 독립 찬성률이 80%~90%대를 기록한것에 비한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것이었다. 그나마 당시에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이 나온것은 이 당시가 되면 소련이 8월 쿠데타 이후로 완전히 무력화된데다가 우크라이나가 분리독립하게 되면 서구권처럼 잘살게 될것이라는 기대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로 10년 가까이 초인플레이션과 지하경제 창궐 등 경제난에 허덕이게 되며 정치성향 자체가 완전히 친러로 굳혀졌다.[16] 실제로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정권에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17] 물론 정권창출에는 실패했다.[18] 그러나 애초에 이 투표조차 부정투표였을지도 모른다. 포브스 기사 이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투표율은 고작 40%에 득표율도 5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러시아군이 크림반도를 장악한 강압적인 상황에서도 고작 55%밖에 득표하지 못했다는 건, 러시아가 크림에서 생각보다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 기사대로라면 영토 강탈에 그나마 내세운 알량한 명분마저 조작한 거짓이었던 셈이다.[19] 사실 이 방식은 약 200년전 미국이 멕시코에게 했던 행동과 유사하다. 멕시코의 영토 캘리포니아를 빼앗기 위해 괴뢰국가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세우고 한달도 안 되어 미국 연방으로 편입시켰다. 이 역사를 공부하고 캘리포니아 배경인 쾌걸 조로를 보면 그 속의 유럽우월주의에 자신도 모르게 기가 차게 된다.[20] 당시 러시아의 여론조사 자료를 보면 2010년 이래로 푸틴의 지지율이 70~80%대에서 60%대로 내려갔고, 그 영향으로 2011년 총선에서 부정투표에도 통합러시아의 의석이 과반을 겨우 넘겼을 정도였다. 비록 대안 부재로 2012년 대선에서 푸틴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어쨌든 2014년 소치올림픽 개최 직전까지도 이 추세가 계속 유지되어서 푸틴의 지지율이 50% 후반~60% 초반을 오가는 수준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고, 反 푸틴 여론도 상당한 편이었다는것도 알수있었다.[21] 당시 막 과도정부가 들어섰고 러시아가 심은 간첩이 곳곳에 있는 상황이라 공수군이나 스페츠나츠등에서 신뢰할수 있는 병력들만 특별히 차출하고, 장비들도 잘 굴러가는것들을 뽑아서 부대를 급조했다. 이 부대들이 신속대응군으로 크림반도 경계에 배치됐다.[22] 출처[23] 러시아가 전쟁 때 우크라이나로부터 빼앗은 동남부 지역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려는 배경에는 이런 문제도 있다.[24] 메질리스는 아랍어 마질리스(مجلس, '앉는 장소')에서 유래하며 의미가 확장되어 '협의회·평의회'를 뜻하기도 한다.[25] 과거의 유사 사례로, 1차 세계대전 후 알자스-로렌 지역 주민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처분이 있다. 이때 프랑스에서 현재 우크라이나 측 방침과 유사하게,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할양되기 전에 프랑스 국적자였던 지역 주민과 그 후손은 국적 변경 및 잔류를 허용하였지만 영토 할양 후 이주한 독일인들은 퇴거 대상으로 분류해 독일로 강제 소개시켰다.[26] 다만 주 목표는 아니다. 이 공세의 최우선 목표는 자포리자 지역 장악, 마리우폴 수복 및 러시아군의 남부 회랑 절단이었다.[27] 여담이지만 이 지협은 토탈 워 시리즈 등 게임에서 제대로 묘사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호수와 습지를 생략하고 코린트 지협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8] 노바 카호프카보다 더 위쪽부터는 거대한 드니프로 강 본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마음대로 잠글 수가 없다.[29] 러시아 유심 제외[30] 이른바 미르 카드[31] 대신 심페로폴에서는 KFC 대신 짝퉁인 CFC(Crimean Fried Chicken)가 영업하고 있다.# 대신 이곳만의 햄버거 체인이 있어서 간단히 식사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32] 물론 한국만큼 안전하다는 건 아니고 흔한 동유럽 관광지의 치안 수준 정도다.[33] 미국, 일본 등 서방국가들과 같은 판단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불법으로 점령했다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