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18:05:19

김경문/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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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코치 시절3. 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3.1. 2011년 두산 베어스 감독 사퇴와 NC 다이노스 감독 선임3.2. 중도 사퇴에 대한 비판
4. NC 다이노스 시절
4.1. 2013 시즌4.2. 2014 시즌4.3. 2015 시즌4.4. 2016 시즌4.5. 2017 시즌4.6. 2018 시즌
5.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5.1. 1기5.2. 2기
6. 현장 복귀?7. 평가
7.1. 계투진 혹사7.2. 큰 경기에 약하다
7.2.1. 통계적으로7.2.2. 그냥 시즌 운용에 약하다
7.3. 2011년 중도 사퇴 논란7.4. 선수관리 부실
8. 역대 감독 성적

1. 개요

야구에서 이기는건 운이고 지는건 실력이다.
출처
김경문의 지도자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코치 시절

은퇴 후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연수 후 귀국해 1994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배터리코치로 영입되며 1996년까지 있었다.[1] 1998년부터 친정팀 두산 베어스에서 배터리코치[2]를 맡았다.

코치 시절 일화로는 이재우의 투수 전향에 기여한 바 있다.[3] 때는 2000년, 두산에 연습생으로 입단한 이재우가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는 훈련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배팅볼 던지는 모습을 본 김경문 코치가 직접 미트를 끼고 이재우의 공을 받아봤고, 투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면서 코칭스태프와 구단에게 한번 투수로 키워 보자며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3. 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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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시즌 종료 후, 선동열 감독의 영입을 둘러싼 두산과 LG의 경쟁 속에서 두산을 9년간 이끈 김인식 감독이 사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선동열은 은사 김응용이 감독으로 있는 삼성의 수석코치로 이동했고, 공석이 된 감독 자리를 두고 고심하던 두산 수뇌부는 놀랍게도 당시 무명에 가까웠는데다 존재감도 사실상 제로였던 배터리코치 김경문의 감독 승격을 발표했다.[4]

부임 당시 2002년과 2003년 연속 PO 진출 실패에 특히 2003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아니었으면 꼴찌를 기록해도 할 말 없는 성적이었기 때문에 장수할 것인지 의문스러웠지만, 2004년 부임 첫 해부터 팀을 3위에 올리며 PO에 진출시키면서 일약 젊은 명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부 선수들이 병역비리 사태에 연루되어 빠졌음에도 2004년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2005년에는 시즌 마지막 날 SK 와이번스를 제치고 정규시즌 2위에 올라 PO에서 한화 이글스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삼성 라이온즈에게 0:4 스윕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2006년에는 주포인 김동주의 부상 속에 5할 승률을 넘기면서 선전했지만, 결국 5위에 그치며 PO 진출은 간발의 차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발굴한 이종욱고영민 같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중용하면서 팀 타선의 체질을 개선하더니 2007년과 2008년에는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다만, 김성근 감독의 SK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2년 연속 분패. 대신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되어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야구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하지만 구단의 외국인 선수 지원도 약간 아쉬웠고, 투수 운용이 야수 운영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서 한 끗 부족한 운영으로 인해 KBO 한국시리즈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정규시즌 우승은 번번히 물을 먹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정규시즌 3위를 차지하여 준PO에서 롯데를 격파하고 PO에 진출, 두 번의 PO에서 모두 5차전까지 가는 처절한 접전 끝에 각각 SK와 삼성에게 PO에서 패퇴하면서 두산에서 우승의 꿈을 이루는데는 실패했다.

번트를 거의 대지 않는 강공 위주의 공격을 주로 펼쳤고, 김인식 시절의 뻥야구 대신 탄탄한 수비, 발을 이용한 주루플레이, 불펜야구를 중점에 두는 스타일로 팀을 변화시켰는데 이는 기록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팀홈런, 득점, 실점, 방어율 하락, 도루 증가). 공격력이 전체적으로 하락한 이유는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KBO 리그의 전설적인 클린업 우동수 트리오정수근김동주를 제외하고 타팀으로 모두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줄어든 공격력 때문. 이를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고, 도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극복했다.

분명 타선의 체질 개선과 발야구 정립, OB - 두산 역사상 제일 높은 승률 기록 등 큰 공이 있었던 반면에 쓸 만한 투수는 전부 불펜으로 돌려 감독으로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선발 투수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임태훈, 이재우, 고창성, 정재훈 등 믿는 투수만 주야장천 기용하여 승리하는 방식으로 비난받고, 이런 운영이 누적이 되면서 두산의 투수력은 김경문 체제 후반기로 갈수록 약화되었다. 무리하게 우승을 노리는 게 몇 년째였고, 결국 그 후유증이 2011년에 대폭발했다. 자세한 것은 바로 아래에 후술.

3.1. 2011년 두산 베어스 감독 사퇴와 NC 다이노스 감독 선임

우승을 향해 야심차게 시작한 2011 시즌. 4월 3일 개막전에서 김현수김동주의 솔로포를 앞세운 승리로 시즌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4월 한달 동안 2~3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기분 좋게 시작하는 듯 했으나, 5월 들어 그의 선수관리에 치명타를 입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하지만 5월의 마지막과 6월의 시작이었던 SK와의 3연전에서는 스윕당할 뻔 하다가 2승 1패로 위닝시리즈를 가져가게 되면서 기세를 살리는 듯 했으나 연이은 삼성과의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를 내준 것을 시작으로 다시 연패를 기록하며 참담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결국 두산이 7위까지 내려간 상황에 결국 2011년 6월 13일 두산 베어스 공식사이트에 사퇴에 관한 변을 올리면서 자진 사퇴하였다.
"7년 동안 고생해 준 선수들이 부상이다. 감독인 내가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서 더는 냉혹하게 분발을 촉구하지 못하겠다. 정말 좋은 선수들과 함께 해 행복했다."

이 사퇴 소식에 어디의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두산 팬들은 단체로 패닉에 빠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실 사퇴 의사는 5월부터 밝혀 왔다고 한다. 어린이날 더비5월 5일 LG전의 처참한 패배 이후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구단에서 말렸고, 재차 사퇴의사를 강하게 밝힌 것이 결국 받아들여진 것.

이후 감독은 김광수 수석코치가 대행하게 된다.[5]

당분간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그렇게 오래 쉬진 않을것이라고 밝힌 만큼 2011 시즌이 끝나고 어느 팀의 감독을 맞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2011년 연말쯤에 돌아올 것으로 알려진 김경문 감독이 8월 말에 갑자기 귀국했다. 물론 겉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한성백제박물관 건너편의 "문 카페"의 개업 때문에 귀국했다지만, 실상은 NC 다이노스2012년 드래프트가 열리는 2011년 8월 25일 이후에 창단 감독을 선임할 것이라고 밝혀서 NC의 초대 감독으로 낙점된 게 아니냐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게다가 김경문 감독의 오른팔로 잘 알려져 있었던 박보현 두산 베어스 1군 매니저가 그 무렵 두산 구단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6]

그리고 8월 31일, NC 다이노스의 창단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두산 선수단은 시즌 초반에 많이 까먹은 승수를 서서히 복구하면서 4강을 향한 희망을 키워 나가던 중이었는데, 팀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진 사퇴한 감독이 고작 2달도 안 되어 신생팀의 창단 감독으로 가게 되면서 두산빠들은 집단 멘붕에 빠졌다.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는 문 카페에 축하 화환을 보냈다가 NC 다이노스 감독 부임 소식을 듣고 급하게 화환을 취소하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실패하고 말았고,[7] 두산 측에서는 감독 선임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잔여 연봉을 끊어버렸다.[8] 그 후의 행보는 더 가관인데, 11시즌이 끝나기도 전인데 갑자기 9월부터 두산의 주요 코치진들[9]의 이름이 구단 홈페이지에서 사라져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즌 중간에 자진 사퇴한 감독이 2달만에 다른 팀의 감독으로 가버렸고, 그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주요 코치들을 빼간 것이다.

3.2. 중도 사퇴에 대한 비판

2019년에 다시 자진사퇴로 물러나 런기태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前 KIA 감독인 김기태는 LG에서 자진 사퇴 후의 행적이 그리 나쁘지 않았음에도 그 사퇴 하나만으로 런기태라고 LG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김기태가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선임된건 적어도 정규시즌이 끝나고 난 후였고 코치를 유출시키는 것과 같은 행동도 없었다. LG에서 같이 일한 코치들이 KIA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LG가 2군 코치진을 개편하면서 실직하게 된 사람을 데려오거나 스스로 사표쓰고 KIA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김경문은 시즌 중간에 팀을 버린 것도 모자라서 잔여 연봉을 받는 사람이 두 달만에 다른 팀 감독이 되고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코치들까지 빼가는 기본적인 상도덕도 없는 역대급 악질의 통수를 치고 간 것이다.

그나마 두산 베어스는 김경문 감독 사퇴 당시 7위였던 순위를 최종 5위로 끌어올리면서LG만은 이기려는 의지도 없지 않았다 시즌을 마감한다. 재임 시절 명성을 날렸던 KILL 라인은 김경문 감독의 무분별한 혹사로 인해 다시는 그 모습을 되찾지 못했고[10], 두산은 그 이후로 항상 불펜이 약점인 팀이 되면서 가을야구에 도전할 때마다 이 부분이 아킬레스건으로 남게 되었다. 2010년대 중반 기준으로 투수진에서 중심축을 딱 잡아주어야 할 20대 후반~30대 초반 투수들, 즉 80년대 중후반 출생인 투수들을 싹수가 보이는 족족 갈아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11] 그 외 두산에 남은 건 정재훈 외에는 없다. 그리고 두산은 201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변진수, 김명신, 함덕주, 이영하, 박치국, 곽빈 등 90년대 출생 투수들이 단체로 1군 멤버가 되면서 불펜진에 관련해선 그래도 한 시름 놓게 되었다.[12] 그렇게 상위 지명으로 투수 유망주들을 기를 쓰고 쓸어담았음에도 김경문이 나간 지 장장 6~7년 만이다!

그렇다고 재임 시절 선발진이 멀쩡한 것은 더욱 아니었는데, --비-비-비 시절에서 보듯이 두산은 선발이 강한 팀도 아니었다. 후임이었던 김진욱 감독이 받은 선발진은 외국인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와 토종 에이스 김선우가 끝이었다.[13] 게다가 김진욱 감독은 너무나도 답이 없는 뒷문을 커버하기 위해서 용병 투수로 2012년에 마무리 스캇 프록터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14] 다행히도 김승회, 유희관, 노경은 등의 자원을 잘 활용하면서 김진욱 감독이 두산 선발진을 살려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는 김진욱 감독의 공이지 김경문이 투수진을 박살내놨다는 점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야수진은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김경문이 팀을 떠난지 3년 후인 2014년 두산 베어스의 라인업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김경문 감독 시절에 중용되었던 선수는 김현수, 대수비, 대주자 및 제4외야수 롤이었던 정수빈 그리고 내야 유틸로 써먹었던 오재원이 끝이다. 양의지는 사실상 경찰청에서 키워서 보내준 것이고, 본인이 타격 능력을 바탕으로 기회를 잡은 것이지 김경문이 딱히 큰 공을 세웠다고 할 만한 점은 없다.[15] 민병헌 또한 입대전부터 적지 않은 기회를 받기는 했지만 경찰청에서 타격이 일취월장했고, 제대했을 땐 이미 감독이 바뀌어 있었다. 국가대표 2루수에까지 뽑혔었던 고영민은 내부경쟁자인 오재원에게 2011년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오재원의 경우 내야 유틸이 가능하다는 점 덕분에 1군에서 계속 쓰이긴 했지만, 김경문의 양아들 고영민 부활 프로젝트의 희생양으로 인해 선발 출장을 보장받지 못했다. 오재원이 완벽히 두산 2루수 주전을 꿰찬 것은 고영민이 완전히 퇴물이 되어버린 11년 시즌 이후였다.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손시헌은 김경문 시절엔 잘 했으나 2013년 들어서 부진하더니 타격에서 각성하기 시작한 김재호에게 밀리기 시작했으며, 시즌 후 FA를 취득해 이종욱과 함께 NC로 갔다. 그 손시헌에게 밀려 10년 가까이를 백업으로 있었던 김재호는 '13시즌부터 각성의 기미가 보이더니 '15시즌에는 전반기 팀의 MVP로 뽑히고 9번 타순에서 타율 3할을 뽑아내는 등 아예 풀타임 주전을 꿰차버렸으며, 이 시즌에 데뷔 이래 처음으로 국가대표 A팀에 뽑혀서 여기서도 주전 유격수로 날아다니며 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했고 마지막엔 골든글러브까지 타내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외야 백업 롤이었던 정수빈은 김경문 시절 코너, 중견 가릴 것 없이 자리에 구멍이 나면 땜빵으로 구르다가 11시즌에 되어서야 고정된 포지션으로(우익수) 뛸 수 있었고, 이종욱이 FA로 이적하고 난 14시즌에 들어서야 본 포지션인 중견수에 고정되어 출장하기 시작했는데 풀타임 중견수가 된 첫 해부터 리그 탑급 중견 수비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더니[16] 타격에서도 커리어하이를 찍고 전 경기 출장까지 달성하면서 날아다녔다. 거기에 2015년 한국시리즈 MVP. 둘의 나이차를 고려한다고 해도 이종욱의 이적 후 활약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된다.[17] 즉, 김경문은 두산에 물려주고 나간 유산이 김현수 단 하나 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팀을 초토화시키고 나간 것이다.

선수들을 육성, 발굴해서 단기적으로 본인이 사용하는데까지는 뛰어난 감독이었지만[18][19], 특유의 믿음의 야구로 인해 쓰는 선수만 쓰기 때문에 육성, 발굴해낸 선수들은 혹사당하며 서서히 망가져버렸고, 이 과정에서 가을야구에 무려 6번이나 도전했지만 결국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단기전에서 무능한 감독이었다. 그리고 두산 전통의 2군 육성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그 6번의 가을야구도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팀에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곧바로 자진사퇴라는 이름으로 도망가버렸다.[20] 더군다나 사퇴한 지 2달 만에 다른 팀의 감독으로 부임하더니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팀의 코치, 프런트를 싸그리 빼가는 기본적인 상도덕이 없는 짓까지 해 버렸다.

이후 야구 팬들은 원조 런동님, 투수진은 박살내고 성적 안좋으니 도망갔다. KBO리그의 루이스 피구[21] KBO 리그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파렴치한 행보 라며 그를 비난 했다.

4. NC 다이노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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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013 시즌

2012 시즌 퓨처스 리그를 정복하고, 외국인 3인방과 특별지명 8인, 이호준이현곤의 FA영입으로 팀을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시범경기때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개막하자 7연패에 빠지며 신생팀의 한계를 드러낸 것인가 하고 걱정했지만...

4월 11일 LG를 상대로 이재학이 첫 승을 따내며 분위기가 반전, 이후 SK를 상대로 2승 1패를 거두어 창단 첫 위닝시리즈를 만들었다. 특히 SK 와이번스를 상대로는 2013년에 우세였다. 같은 해 13연패를 찍으며 9호선을 개통한 한화 이글스보다 경기력이 낫다는 평.

5월 이후부터는 4월의 극심한 부진에서 벗어나 28경기 15승 12패 1무 (13.06.08 기준)의 성적으로 5할이상의 승률을 보이면서 기존 구단들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매우 인상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5월 이후 호성적에는 팀 QS 1위를 달리는 선발진들의 힘이 크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7회 이후 불펜진의 방화로 실점하는 경우가 많아서 적은 점수차 리드를 하고 있을때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후반기에는 투수진이 안정된 반면 타선이 생각보다 잘 터지지 않을 때가 많아 걱정을 자아냈다. 하지만 선수층이 안정되며 야금야금 승수를 쌓아올리기 시작. 시즌 초에 연패를 너무 당해서 하위권에 머물렀을 뿐 팀의 경기력은 중상위권까지 올라왔다. 그 덕에 KIA 타이거즈를 제치고 시즌 최종 7위를 하였다.

4.2. 2014 시즌

1월 22일 계약기간 3년간 계약금 5억원, 연봉 4억원에 계약을 마쳤다. 즉, 연장 계약이다.

정규 시즌 시작부터 투타 모두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면서 팀이 단독 1위까지 올라왔다. 시즌 초부터 다크호스라는 평가는 많이 받았지만, 그야말로 괄목상대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할 시기인 여름 고비만 잘 넘긴다면, 4강권은 물론 우승에도 도전해볼 만하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6월 15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역대 8번째로 프로야구 감독통산 600승 고지에 밟았다. 인터뷰

다만 6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 팀이 부진에 빠지는 과정에서 김종호를 양아들이라고 기용한다고 NC 다이노스 갤러리 등에서 까였다.

거기에 7월 1일에 콜업한 조평호를 단 두 타석 쓰고 10일에 말소한 점도 비판받았다.

8월 3일 SK전에서 찰리의 욕설 퇴장 이후 14분간 시간을 끌어 비매너 이야기가 나왔다. 심지어 불펜에는 아무도 몸을 풀고 있지 않았다. KBO로부터 엄중경고를 받았지만 솜방망이도 아닌 헛스윙 처벌이라는 평이 대다수.

이래저래 탈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10월 3일, 창단 3년, 1군 진입 2년만에 을 가을야구 진출을 이끌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팀을 가을야구까지 올려보낸건 좋은 성과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포스트시즌에서는 매우 부진했다. 이게 더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NC와 준플레이오프를 치른 4위팀은 LG였기 때문.[22] 결국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경험부족이 겹치면서 1승 3패로 참패했다.

4.3.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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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즌 개막전에서 김태형 감독과 함께.

4월 22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파울 폴대 위로 날아가는 김상수의 솔로 홈런에게 합의 판정을 신청했으나 번복되지 않자 강하게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 김경문 감독의 NC 다이노스 감독 부임 이후 첫 퇴장이다.

맥없는 패배도 여러 차례 거두긴 했지만, 6월에는 1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6일 kt wiz와의 경기에서 패해 2위로 내려갔다.
17일에도 다시 kt wiz와의 경기에서 대패, 3위로 내려갔다.

19일 ~ 21일간의 한화 이글스와의 3연전에서 전승을 거두고 다시 1위 자리를 차지했다.
23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패해 도로 3위로 내려갔다.

7월 들어서 부진이 극에 달한 손시헌, 모창민, 조영훈을 너무 신뢰한다고 까이고 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3위권을 유지는 하고 있다. 그러나 7월 마지막날 결국 4위로 떨어졌다.

8월 초에 다시 2위 복귀. 그러나 언제 순위가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힘겨운 상태이다.

8월 12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2연전 시리즈를 스윕, 시즌 처음으로 3위 이내에서 바로 아랫순위 팀과의 격차를 2경기로 벌렸다.

다만 김성근살려조에 가려서 그렇지 최금강 혹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결국 개천절에 또 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뜬금없이 조범현의 양아들 모 포수의 뒷담으로 비동님, 雨동님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플레이오프에선 또 밑에서 올라온 팀, 그것도 친정팀한테 업셋당했다. 두산 시절에는 한국 시리즈때 맨날 졌어도 올라온 팀한테는 항상 이겼는데 NC에서는 2년 연속으로 업셋을 당했다.

4.4. 2016 시즌

NC 다이노스/2016년 참고.

2015년 11월 30일, 4년 총액 96억으로 NC가 삼성의 박석민을 영입해오는데 성공했다. 2015년 가을야구를 했던 나머지 팀들이 모두 전력이 하락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전력을 보강한 팀이 되면서, 강한 전력의 팀이 만들어졌다.[23]

5월 22일 마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통산 6번째 14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시즌 시작 이래 6월 14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곧 콩라인 유지 중. 두산 베어스가 워낙 잘 나가고 있어서 가을야구때까지 줄곧 이대로 갈 듯 하다. 그렇지만 연승기록에 도전하는 모습은 역시 매섭다. 6월 19일 현재까지 NC가 6월 전승을 기록하고 있어서 혹사로 논란이 되고 있는 김태형과 달리 팀 운영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화전에서 연승이 끝나고 난 이후 무승부와 기아전 3연전 스윕을 당하자 슬슬 다시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운명의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 1번째 경기는 완패하고 2번째 경기는 장원준의 컨디션 난조와 이어 올라온 불펜의 방화 때문에 이겼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마이클 보우덴에게 노히트 노런을 내주며 루징시리즈로 마감하게 되었다. 6월 15연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두산 베어스와 같은 16승을 올리며 선두와의 게임 차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7월 들어 두산의 타격 사이클이 내려가고 불펜 불안으로 루징을 반복한 반면 NC는 올라오는 타격 사이클에 필살기인 불펜야구를 시전하며 후반기에 어느새 게임차가 2.5경기까지 좁혀졌다. 다만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기에 선발 한 명의 공백과 팀 분위기의 악화 등을 감당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태양의 이탈에 이어 추가 승부조작 루머가 퍼지고 대체선발인 정수민의 답없는 부진 등이 겹치면서 불펜 과부하가 우려되고 있는 시점이다.

8월엔 NC는 2번 연속 1위 자리를 밟아보기만 한 뒤 두산의 상승세가 시작되자 경기차는 다시 5.5로 벌어졌다. 게다가 넥센이 2위 자리를 3경기 차로 맹추격해오고 있는 상황이라 까딱하면 2등 자리도 위태위태하다.

9월 11일 기준으로 1위 두산과는 경기차가 7.5라 추석 맞대결에서 2번 다 이기지 않는 이상 물건너갔다고 보면 되고 3위 넥센과는 4경기 차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2위는 왠만하면 할 것 같지만 잔여경기가 전 구단 중 가장 많아서 부담으로 다가오는데다 타선도 부진하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불펜들도 지쳐서 이전만큼의 믿음은 주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김경문 입장에선 여러모로 골치아플 것이다.[24]

9월 16일 두산전 역전패로 게임차는 10.5게임차까지 벌어졌다.

17일과 18일 SK를 그야말로 압살해버렸으나 두산도 KT를 똑같이 묵사발내버린 덕에 매직넘버는 3이 되었다. 그리고 20일에 kt에게 고춧가루를 맞는 와중에 두산은 삼성에게 이기는 바람에 두산의 매직넘버는 1로 줄어들었다. 즉 한 경기라도 지면 두산의 1등은 완전히 확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9월 22일 두산이 kt에게 대승하면서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같은 날부터 NC가 연승하기 시작하며 3위 넥센과의 승차를 6.5로 벌려놓았다. 승차도 그렇지만 9월 들어 넥센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태라 3위로 떨어질 걱정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9월 2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더블헤더에서 두 번 다 승리함으로서 2년 연속 정규시즌 2위를 확정지었다.

에릭 테임즈의 음주운전 혐의가 사실로 드러난 뒤 '책임을 질 것은 지겠다'며 시즌 종료 후 사퇴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10월 5일 넥센에 연장 접전 끝에 패했으나 6일 넥센의 선발 양훈이 처참하게 무너진 덕에 승리를 거두고 감독 통산 800승 기록을 달성하였다.

10월 25일 플레이오프에서 LG를 누르고 NC 다이노스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뤄냈지만, 작년 플레이오프 상대인 두산한테 4전 전패로 힘 한번도 제대로 못쓰고 시리즈를 패배했다


11월 9일 승부조작 문제와 NC 구단의 고의 은폐 문제가 한창 논란인 가운데 NC 다이노스와 3년 20억원에 재계약을 했다. NC 측에서는 "김경문 감독이 지난 5년간 신생팀을 상위권으로 이끈 점을 높이 평가하여 재신임을 했다"고 밝혔다.

4.5. 2017 시즌

별 다른 구설수 없이 팀을 잘 이끌면서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다만 7월 28일 급체 증세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덕분에 수원에서 열리는 kt wiz와의 주말 3연전 내내 경기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해당 경기들은 김평호 수석코치가 대행하게 될 예정.

이후 검진 결과에서 MRI 및 각종 혈액검사 결과 뇌하수체에 직경 약 2센티미터 미만의 작은 선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위 선종은 양성 종양으로서 이를 제거하는 외과적 시술이 당장 필요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행히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으나 추가적인 치료와 회복기간이 필요함에 따라 김평호 수석 코치 체제는 조금더 이어질 전망이다.#

8월 5일 마산 삼성전부터 다시 감독 자리에 복귀했다.

리빌딩 시즌이라고 선언한 뒤, 양아들만 줄창 기용하고 있다.

그리고 9월에 투수진이 다 퍼졌다. 특히 김진성, 원종현, 임창민. 이전 시즌까지 김성근 못지 않게 혹사 성향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 김경문 감독이었으나 성적 탓에 묻혀 있었던 것이 이제서야 그 여파가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미 김경문 감독 시절을 겪어본 두산 팬들은 두산 시절 어떻게 갈수록 투수진을 황폐화 시켰는지를 언급하며 그 테크트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9월의 부진한 투수진 때문에 NC는 끝내 롯데에게 밀려서 3위로 떨어졌고, 26일부로 3위 트래직 넘버는 2밖에 남지 않은, 즉 자력으로 3위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결전의 날이었던 10월 3일, 결국 롯데가 LG를 꺾으며 4위 자리가 확정되었다.

그래도 5일 와일드카드전은 SK에 10대 5 대승을 거두어 가볍게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고[25], 8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도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9대 2 대승을 거두었다. 8일 잦은 대타/대주자/대수비 투입으로 야수 엔트리 소모가 심했던 것은 조금 아쉬웠다.

10월 13일 준플 4차전, 4이닝 2실점으로 그럭저럭 호투하던 최금강을 내리고 원종현을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손아섭에게 3점 홈런, 이대호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는 대형참사를 자초하며 야구는 감독이 한다는 구식명언이 아직 유효함을 확인시켜줬다. 참고로 원종현은 가을야구 전 경기 출장 중이며, 김진성은 지난 3년간 240이닝을 소화한 상태다.

10월 15일 준플 5차전 9대 0으로 크게 앞서는 8회말에 또다시 원종현을 등판시켰다. 포스트시즌 6경기 연속등판 진정으로 원종현을 고창성 시즌2로 만들 생각인게 분명하다. 거기에 9점 차로 앞선 9회 마무리 임창민까지 소모시켰다. 참고로 6.1이닝을 던진 해커의 뒤를 이어 나온 투수는 롱맨이었던 이민호.

10월 17일 플옵 1차전 타선의 대폭발로 13대 5 대승을 거두었지만, 8점 차에서 김진성을 내는 등 여전히 쓸놈쓸 기질을 보이고 있다. 원종현의 모습도(!) 잠시 보였지만 다행히 등판하지 않았다,

비판이 이상하게 많지만 지금까지는 좋은 단기전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 중견수들이 전부 부진하자 곧바로 김준완을 투입한다던가, 그때 그때 잘 맞아떨어지는 대타 작전, 투수교체 등은 감독 인생 첫번째 시리즈 업셋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놈의 투수 혹사...장현식을 빼고는 믿었던 외인 원투펀치가 전부 흔들리다 맨쉽이 아예 선발진에서 이탈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그간의 혹사의 대가를 이자까지 더해서 치르는 중이다. 하필이면 플레이오프에서.

결국 10월 21일 패배로 시리즈 전적이 1승 3패가 되어서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3년 연속으로 그것도 전에 몸담고 있던 두산에게 포스트 시즌에서 패배했다.

4.6.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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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전력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런 팀을 추스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20승 39패로 승률 .339를 기록한 6월 3일 자진 사퇴를 하게 되었다. 유영준 단장이[26]감독 대행 역할을 맡으며 김경문 감독은 팀의 고문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후 후속기사들은 NC 내부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사실상 경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5.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5.1.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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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팀 감독으로서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2021년 현재까지 감독으로서 이룬 커리어 유일한 우승.

자세한 내용은 김경문호/2007년, 김경문호/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를 볼 것.

5.2. 2기

파일:201911160100166080009459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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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선동열 감독이 사퇴하면서 현재 야구인 중에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명으로 꼽혔다. 결국 예상대로 2019년 1월 28일, 11년만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9 WBSC 프리미어 12 슈퍼라운드 최종전과 메달 결정전에서 일본한테 연달아 2연패[27]를 하면서 우승에 실패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고,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선수 선발 과정과 올림픽 경기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최종 4위라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다. 올림픽에서의 결과가 좋았다면 2021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28]까지 단기 연장계약, 혹은 계속해서 대표팀 감독으로 남을 수도 있었으나 달라진 새 야구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을 이어나가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며 2020 도쿄 올림픽 종료 이후 불명예스럽게 임기가 종료되었고, 그의 감독 커리어에 크나큰 오점으로 남았다. 하지만 후임 이강철 감독이 2023 WBC에서 도쿄 올림픽의 김경문보다 더한 최악의 운영으로 상대적으로 묻히게 되었다.

6. 현장 복귀?

2020년 11월 초를 기준으로 두 달째 대표이사 자리가 공석인 한화 구단의 신임 사장에 지방 구단 출신의 야구인이 선임될 예정이며 그와 친분이 있는 김경문 감독이 차기 감독직을 맡게 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김 감독은 2021년에 있을 도쿄 올림픽까지 국가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긴 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현장 복귀를 추진하는 데 제약이 되진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한화가 최종적으로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을 선임하면서 현장 복귀는 불발되었다. 엠엘비파크 쪽에서 흘러나온 말에 의하면 한화 감독 면접을 본 것 자체는 사실이며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신임 사장이 구단 이미지가 노화된 쪽으로 굳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외국인 감독의 기용을 고려해 볼 것을 주문했고, 그 결과로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선임되면서 김경문 감독의 현장 복귀가 무산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실에 반발해서 국가대표 선정에 한화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정은원강재민을 뽑지 않고 김진욱오승환을 뽑았다는 점에서 논란과 의혹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올림픽을 대차게 말아먹은 과정에서 보여준 아집과 불통의 운영방식을 미루어볼때, 당분간 KBO리그 사령탑에 복귀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다만 프론트, 단장, 해설위원으로서 복귀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최근 근황으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마이너리그 초청코치로 연수를 받고 있다.

사실 김경문의 나이가 60세가 넘은 고령인 것도 있고, 현재 KBO리그 추세가 두산, 키움, 삼성 등이 일찌감치 확실한 내부 시스템이 자리잡혀서 내부 승진 출신 감독으로 성적을 뽑아내왔다는 점에서 감독 복귀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한 상황이다. 실제 김경문의 후임으로 선임된 이동욱이 2020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것과 KIA,넥센,두산에서 오랜 코치생활의 경험을 앞세워 KT의 시스템을 재정립하여 3년만에 통합우승을 이루어 낸 이강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명장의 탁월한 지략으로 우승하는 시대는 지나갔고, 마찬가지로 지도력이 상식적 수준에조차 미달하는 졸장이 아닌 이상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는 것과 현장을 떠난지도 꽤 된 만큼 더더욱. 다만 오랜 감독생활이 경험을 살려 구단의 단장 및 고문직으로서의 가능성은 있는 편.

그러나 의외로 현장복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닌게 실제 야구 관계자들 및 각 팀내에서 김경문의 이름이 꽤나 거론이 된다고 한다. 22시즌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팀들도 있는데다가 계약이 만료되는 지도자도 꽤나 생기는 만큼 두산-NC시절 역량을 보여준 김경문이 거론이 되는 듯. 하지만 현재 KBO리그는 프론트 중심 및 팀의 시스템을 잘 아는 코치진에서 감독으로 승격시키는 문화가 자리잡은 만큼 김경문이 다시 감독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은 편이다. 나이도 꽤나 고령이기도 하고.

그러나 뇌경색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문제는 물론이고 SK 시절에 팀을 박살내며 그보다 악평을 더받은 염경엽이 LG 트윈스에 감독으로 복귀해 29년만의 우승까지 이끌면서 현장 복귀의 가능성이 생겼다. 물론 그 염경엽은 지도자로서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던 것도 감안해야한다.

7. 평가

다소 평범한 현역 시절과 무난한 코치 시절을 보냈지만,[29] 2004년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취임한 후, 마지막 해인 2011년을 제외하고 내내 5할 승률을 유지하면서 팀을 3번 한국 시리즈에 올려놓았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와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인물. 그러나 2020 도쿄 올림픽 야구에서 보여준 졸전으로 평가가 하락했다.

두산 시절의 긍정적인 평가로는 베어스 프랜차이즈 출신으로서 코치와 감독으로서 두산을 가을야구 단골팀으로 만들었던 공, 김인식 감독 퇴임 이후 황폐화된 선수진을 재건했다는 점, 베이징 올림픽 우승으로 두산팬덤의 규모를 크게 확장시켰다는 점 등을 주요 공으로 꼽는다. 물론 불펜투수진 혹사, 2011 시즌중 사퇴하고 바로 다른 팀 감독으로 갈아탔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은 분명한 과이다.

김경문 감독이 선수빨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폄하를 받기도 하지만, 그 공포의 두산 타선은 바로 김경문의 작품이었다. 특히 그가 김인식 감독 퇴임 이후 물려받은 선수진은 그야말로 황폐화된 폐허에 가까웠다. 주축선수 대부분이 노쇠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30], 김동주와 홍성흔 정도를 제외하고 과감히 물갈이, 타선의 대부분을 2군 선수들과 신인들, 신고선수들로 가득 채웠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 국대타선으로 불리웠던 선수들 대부분이 그가 발굴한 선수들이다. 이종욱, 고영민, 김현수, 오재원 등등 다른 감독이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선수들이 국가대표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선수가 부족할때마다 트레이드 또는 FA 보상선수 등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는데, 최준석, 이원석 등은 수년간 두산의 주전선수로 활약했다. 포수가 부족할 때 최승환이나 채상병 등을 데려와 좋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리빌딩에 완벽히 성공한 셈. 혹자는 민병헌은 경찰청이 키워준 선수니 김경문 감독의 공이 없다고 하는데, 민병헌은 경찰청 이전에도 꾸준히 백업으로 기용되었던 선수라 공이 아주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두산 팬덤의 확장에도 기여했다. 한국프로야구 팬이 급격하게 늘어났던 계기 중 하나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극적인 금메달이다. 당시 김경문 감독의 야구 국가대표팀은 숙적 일본을 예선과 4강에서 2번이나 물리쳤으며 결승전에서도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더블플레이로 전승 우승을 달성하였다. 이 때 국대에서도 이종욱, 고영민, 김현수, 김동주, 등의 두산선수들이 활약하면서 두산이라는 팀을 일반인들에게 크게 어필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전 10-0 대승을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짜릿한 승부를 연출하면서 재미있는 야구, 중독성 있는 야구를 보여주어 결과적으로 베이징 올림픽으로 늘어난 팬덤을 두산팬으로 끌어들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타 팀 팬들에게는 두산의 한국시리즈 2연패 전력을 다진 장본인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두산 팬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2015~16년 우승 당시 멤버 중 ‘김경문의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멤버들은 외국인 선수라서 단기계약 신분인 니퍼트를 논외로 두면 정재훈, 김현수 정도였고, 대부분의 우승 주축 멤버들은 김경문 재임 당시 2군 및 군복무 선수[31]였거나, 다른 팀 소속[32] 또는 김경문 감독 사임 이후 고교 및 대학을 졸업하고 입단한 선수들[33]이었다. 또한 감독 재임 당시 주축 멤버들은 대부분 팀을 떠나거나 은퇴했으며, 김경문 감독과 함께 NC로 옮겨가기도 했다. 불펜진 붕괴로 김경문 이후 어려움을 겪었던 점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 우승공신이라 볼 수는 없으며, 지금의 두산 전력과 큰 관계는 없다는 것이 두산 팬들의 다수 의견.

NC 팬들에겐 신생구단이던 NC를 1군 진입 2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어낸 뛰어난 지도자. 하지만 두산 시절에는 업셋도 안했지만 피업셋도 안했던 것에 비하면 NC 시절에는 2년 연속 피업셋을 당하였다. 그에 비해 김경문 감독 시절 우승은 꿈도 꾸지 못했던 두산이 김경문의 NC를 이기고 올라간 데 이어 2015 시즌을 우승으로 장식하고 2016 시즌 압도적으로 우승하면서 이중으로 비난받고 있다. 게다가 2016 시즌 전 압도적 전력의 평가를 받았던 NC였기에 더욱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34] 2017 시즌엔 지역 라이벌 롯데에 밀려 4위를 마크해 욕을 좀 먹었으나 롯데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오르며 드디어 업셋에 성공했다. 2018년에는 결국 혹사로 투수진이 무너지고 10위까지 떨어지자 세이으로까지 불렸고, 결국 경질로 NC 감독에서 물러났다. 이렇다 보니 NC 팬들 중에서도 당초 투수였던 나성범을 타자로 전향시킨 것 외에는 잘한 것이 없다면서 성과를 과소평가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그래도 NC 시절에도 두산 때와 마찬가지로 야수 성장이나 무명 선수 발굴에 일가견을 보이면서 신생팀을 빠르게 리그에 정착시켰다는 건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35]

7.1. 계투진 혹사

불펜야구라는 시대착오적 소모성 야구를 2000년대에 유행시킨 사람이 선동열이라면 그 유행을 주도한 건 김성근과 김경문이다. 김응용, 강병철, 김인식같은 구세대 감독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선동렬과 김성근도 기아와 한화에서의 처참한 실패로 프로팀 복귀가 난망해 보이는 현재 KBO에서 혹사로 가장 돋보이는 감독이다.

두산 팬들에게는 이탈하는 가운데서도 키워내긴 했지만,[36] 선발 투수 하나 못 키운 채 그저 투수들을 죄다 불펜으로 갈아넣어 결국에는 두산 투수진을 완전히 박살내버린 인물로 남아있다. 특히 KILL 라인의 혹사는 경악할 수준. 두산 팬들에게 김성근에 이어 혹사에서도 2인자라고 욕먹는다. 반면 후임 김진욱 감독은 단 2년 만에 선발 투수를 키워내면서 그 긴 재임 기간 동안 단 한 명의 선발 투수도 못 키워 낸 김경문 감독과 비교가 되었다. 두산 팬들은 이 때 두산 야구 보면서 처음으로 5선발 로테이션이 두산에서도 돌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감탄했다. 게다가 16시즌 들어 두산이 리그 최강의 4 돌리게 되면서 팬들은 김경문을 더더욱 까게 되었다.

NC 감독이 된 이후에는 선발 야구를 어느 정도는 하려는 모양새지만, 경기 운용 방식은 큰 변화가 없어 특정 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건 여전하다. 2015년엔 최금강이 페넌트레이스에서 너무 혹사당한 끝에 가을야구에서는 제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과부하로 인해 두산에게 먼저 2승을 거둬놓고도 무너졌다. 2016년에는 그와 혹사 2인자 자리를 다투던 염경엽이 불펜혹사를 최대한 지양하는 가운데 김성근 다음으로 많은 혹사를 자행하며 혹사 2인자 자리를 확고히 했다. 어쨌든 ---의 타선과 외국인 선발투수와 불펜진의 활약으로 2등까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특히 두산 시절 고창성에게 자행했던 10년 준플 5경기, 플옵 5경기 전경기 등판은 심지어 김성근조차도 선수를 단기간에 저렇게 많이 출장시킨 사례가 없었을 정도로, 09, 10년 성적을 바탕으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대 차출까지 될 정도의 유망한 신인급 사이드암 투수는 결국 이 10연투 이후로 구위가 급감, 선수 인생이 완전히 아작나버렸다. 현재는 특별지명을 통해 간 NC에서 2군을 전전하는 그저 그런 투수로 지내다가 2016 시즌을 끝으로 방출당했고, 야구를 오래 보지 않은 팬들은 이 선수가 한때 리그 최고의 셋업맨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후 고창성은 kt wiz에 2018년에 입단하면서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KBO 리그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국가대표 감독이 되자마자 여전히 본인 특유의 잔혹한 습성을 못 버렸음이 다시 드러났다.

감독 커리어 내내 한 시즌도 빠짐없이 행해오던 투수 혹사 습성과 그 혹사에 가장 앞장서서 지지하고 같이 일을 벌였던 최일언 코치와 함께 또다시 본인들이 꽂힌 투수만 상황에 상관없이 반복해서 출전시키는 투수진의 쓸놈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앞으로 최소 10년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투수인 이영하, 조상우를 거의 매경기 출석체크 시키면서 굴리고 있고 리그에서 최고 레벨의 마무리로 성장한 고우석, 하재훈, 문경찬은 엔트리에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인지 거의 출전이 배제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9년 11월 12일, 또다시 이영하와 조상우의 출전을 예고하며 KBO판에서 최고의 투수혹사 감독이 바로 본인임을 확실하게 만천하에 알리는 중이다.[37] 그리고 결국 일본에 2연패하며 욕을 왕창 먹고 있는 중이다.[38]

물론 프리미어12와 베이징 올림픽은 투수력부터 큰 격차가 났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는 윤석민, 송승준, 장원삼, 봉중근, 오승환 등의 투수진이 빵빵했기 때문에 비교적 투수로테이션을 유연하게 돌릴 수 있었으나, 2019 프리미어12의 경우 류현진은 규정으로 불참, 오승환은 재활 중, 봉중근은 은퇴, 장원삼은 무적, 윤석민은 실종 등으로 인해 투수진을 어쩔 수 없이 양현종, 김광현 두 명 위주로 돌려야 할 정도로 뎁스가 얇아져 투수로테이션을 유연하게 돌릴 수 없었고, 게다가 고우석, 하재훈, 문경찬은 경기 수가 많지 않은 프리미어12 경기 수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기회를 많이 주었다. 세 명 모두 2경기 이상은 등판을 했다. 게다가 프리미어12는 경기가 많아봐야 8경기이니 애초에 투수 로테이션을 유연하게 돌릴래야 돌릴 수도 없다.

허나 2020 도쿄 올림픽에서조차 접전 상황만 되면 조상우를 주구장창 내보냈고, 구단에서도 관리받던 고졸 신인 이의리를 3일 휴식 후 등판시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더욱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전 고우석이 흔들리는 것을 믿음 하나로 교체하지 않고 운용하여 한일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오승환은 다음 경기에 쓸꺼라고 아꼈다고 한다. 그런 오승환은 결국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건 했다. 김경문이 감이 확실히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7.2. 큰 경기에 약하다

다음 중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적이 없는 감독은?[39]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img1480465586028.png
김응용 김영덕 김태형
김성근 김경문 류중일
선동열 조범현 김인식

김경문 감독은 리그 성적에 있어 역대 감독들 중 좋은 편인 건 사실이다. 초대 김영덕 감독과 현임 김태형 감독을 제외하면 8시즌 960경기 승률 0.542로 최고 승률이다. OB/두산은 김인식 감독 하에서는 부침이 있었지만 4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40] 총 5회 진출에 우승 2회로 명문팀의 반열에 들어서는 팀이였다.

김경문 감독이 원래부터 큰 경기에 약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정규 시즌 성적이 그대로 포스트 시즌에도 반영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부임 첫해인 2004년 3위로 마친 포스트 시즌에서는 4위로 올라온 KIA를 2승으로 셧아웃시키고 플레이오프에서는 2위인 삼성에게 1승 3패로 패퇴했다. 2005년 2위로 마친 포스트 시즌에서는 3위로 올라온 한화를 3승으로 셧아웃시키고 한국시리즈에서는 반대로 4패로 셧아웃당했다. 2007년 2위로 마친 포스트 시즌 역시도 3위로 올라온 한화를 3승으로 셧아웃시키고 한국시리즈에서 2승 4패로 무너졌다. 2위로 마친 2008년에도 3위로 올라온 삼성을 4승 2패로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서 1승 4패로 무너졌다. 3위로 마친 2009년 역시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게 4위로 올라온 롯데를 3승 1패로 셧아웃시키고 2위 SK에게 2승 3패로 패퇴했다. 2010년은 달랐을까? 3위로 마쳤으며, 이때도 4위로 올라온 롯데를 3승 2패로 물리치고 2위 삼성에게 2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내줬다. 자신보다 낮은 순위팀과의 포스트 시즌은 18승 5패(승률 0.783), 세트스코어 6전전승, 자신보다 높은 순위팀과의 포스트 시즌은 8승 20패(승률 0.286), 세트스코어 6전전패였다. 한마디로 정규 시즌 순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한 마디로 두산 시절에는 업셋도 못하지만 업셋 당하지도 않는 감독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경기에 약하다기보다는 그의 승패는 전문가들이 팀간 전력을 토대로 쉽게 내릴 수 있는 예상에 그냥 잘 들어맞았을 뿐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약한팀을 상대로 승리하고 강한팀을 상대로 지는 것이 이상할 일이 있겠는가? 정규시즌 순위를 그대로 포스트 시즌에도 유지하는 김경문 감독이 만일 정규 시즌을 1위로 맞추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IF 역시 야구 팬들 사이에 가끔 회자되는 떡밥이다.

그럼에도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생긴 것은 결국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는게 크다. 2004년은 플레이오프에서 1승 먼저 했지만 그 후로 3패해서 탈락, 2005년은 한국시리즈에서 0승 4패 스윕패로 준우승, 2007년엔 한국시리즈에서 2승 후 4연패로 준우승[41], 2008년은 한국시리즈에서 1승 후 4연패로 준우승, 2009년은 플레이오프에서 2승 후 3패로 탈락, 2010년은 플레이오프에서 2승 3패로 탈락, 2014년은 준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로 탈락, 2015년은 플레이오프에서 2승 3패로 탈락. 2016년은 한국시리즈에서 0승 4패 스윕패로 준우승, 2017년은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로 탈락. 4번 진출한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준우승을 했다.(...)

다만, 한국시리즈에서 그가 상대했던 대부분의 팀이 2000년를 넘어 역대 최강급으로 꼽히는 절대강자들이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역대 36회(85년 통합 우승제외)의 한국시리즈를 봐도, 업셋우승은 36회 중 단 6회뿐.[42] 그만큼 하위팀이 1위팀을 상대로 한국시리즈에서 승리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다만, 여기에 더불어 김경문 감독이 한국시리즈만 올라가면 너무나 일방적으로 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맞다. 2007년을 제외하면 한번의 한국시리즈에서 2승 이상을 거둬보지도 못했다. 그때도 2승까지는 좋았지만 4연패 때는 너무 일방적이었다. 김성근이 꺼낸 고졸 신인 김광현 카드와 기습적인 도발과 벤치클리어링에 리오스를 앞세운 두산이 흔들리며 급격하게 무너졌고 그 후...

특히 잠실에서 매우 약한 편인데, 한국시리즈 진출 4번 할 동안 잠실 경기 전적이 0승 10패로 2005년 2패, 2007년 3패, 2008년 3패, 2016년 2패를 했다. 홈 구장인 잠실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경기는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43]

한국시리즈만 올라가면 패퇴하는 탓에 2등 컴플렉스도 매우 심한 편이다. 올림픽에서 전승우승으로 금메달을 따내 무관의 한은 풀었지만,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1사 만루 역전패 위기에 처했을때는 난 영원히 2등인가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고 한다.

큰 경기에 약하다는 말이 다시 거론된 것은 NC 감독을 맡고부터다. 뒤집지는 못해도 당하지는 않던 김경문 감독이 2년 연속으로 뒤집기를 당했던 것. 201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LG에 1승 3패로 패퇴하면서 가을야구 호구설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압도적인 투수진을 거느린 김성근의 SK가 상대였지만, 당시 상대였던 LG의 양상문 감독은 감독 커리어에 처음으로 맞는 첫 포스트시즌이었고 야수진에 비해 리빌딩이 진행속도가 느린 LG 투수진은 SK 왕조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44] 그럼에도, 각축 끝에 석패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무너졌다는 점은 쉴드를 쳐주기 힘들다. 그래도 NC 구단의 첫 가을야구라서 어느정도 쉴드는 받았다.

2015년 삼성 라이온즈와 정규리그 1위를 두고 끝까지 경쟁하다가 겨우 2게임 반차로 아슬아슬한 2위를 거머쥔 2015 시즌, 역시나 첫 포스트시즌을 치르던 김태형 감독의 두산 베어스에게 패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심지어 3차전은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해놓고 2승 1패로 우위를 가져갔으나, 고작 3일을 쉬고나온 니퍼트의 공을 제대로 치지도 못하면서 4차전을 내주고, 홈에서 열린 5차전도 리드를 가져가놓고선 역전을 헌납, 15년 가을을 그렇게 마감하고 말았다.

2016년에는 2위로 마친 후 4위로 올라온 LG를 맞아 3승 1패로 승리하면서 업셋을 간신히 막아내기는 했다.[45]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선 선발투수 4불펜 투수 단 둘로 겨우 투수 6명만 쓴 두산에게 일방적으로 눌려서 싹쓸이를 당했다. 감독 커리어 기준으로 잠실구장에서 한국시리즈 10연패 및 전패, 한국시리즈 8연패, 홈구장에서 한국시리즈 10연패 및 전패, 역대 한국시리즈 및 세계 야구 결승전 최소득점(2득점)[46][47]이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잔뜩 양산했다. 당연히 NC는 두산에 4차전 내내 끌려다녔고 단 한 차례도 점수 상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48]

2017년에는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8점차 리드하는데 원종현을 올리는 만행을 선보였다. 아무리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의도였다지만... 그나마 준플레이오프는 초보감독 조원우와 김원형 코치가 더한 삽질을 해서 5차전까지 간 끝에 올라갔으나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선 그 모든 부작용이 터지며 투수진이 장현식을 제외하고 무너지며 2차전부턴 일방적으로 난타당했다. 3차전에 당겨쓴 해커가 무너지고 맨쉽이 아예 불펜으로 강등[49]되는 등 선발진이 무너진 상황에서 선발이 강하고 불펜이 취약하다는 평이 있던 두산의 투수진을 맞아, 2년 내내 혹사당한 두산 선발진을 무너뜨리는데까진 성공했으나 김진성, 원종현, 임창민, 이민호 등 시즌 내내 혹사당한 필승조들이 모조리 무너져 패전조 수준으로 전락, 지는 경기마다 두자릿수 득점을 상대에 퍼주며[50] 혹사의 대가를 이자의 이자까지 혹독하게 지불하고 1승 후 3연패로 3년 연속 두산에 밀려 우승이 좌절되고 말았다.

원인을 찾아보면 일단 선발을 못 키운다는 점이 크다. 단기전, 특히 7전 4선승제인 한국시리즈를 제대로 꾸려가려면 08,10 SK, 09 KIA, 11~14 삼성, 16 두산처럼 믿을만한 선발이 4명 있는 게 가장 좋고 아무리 적어도 3명은 있어야 하는데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시즌 중 리오스, 랜들, 박명환 3선발 체제였던 05년이 그나마 가장 선발이 강했던 해였고 07, 08, 16년은 제대로 된 선발이 외인 둘뿐이었다. 특히 08년에는 방어율 4점대 중반 랜들이 유일하게 믿을만한 선발이었다. 선발투수 육성실패는 자연히 불펜 혹사로 이어진다. 16시즌 혹사지수 TOP10 중 김성근 다음으로 많은 3명을 올렸을 정도로 불펜 의존도가 높다. 페넌트레이스 1위도 한 적이 없어 휴식 없이 플레이오프 때부터 불펜의 피로가 쌓이고 필승조가 연투로 퍼지면 결국 사태를 수습할 수 없어진다. 16년의 경우 이재학, 이태양 2명의 선발이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날아갔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으나 김경문이 재임하는 구단에선 항상 선수단 관리 소홀로 범죄가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외국인 선발투수들은 3일 휴식하고 등판하다 구위 하락을 못피하고, 불펜은 시즌 내내 혹사당해 드러누우면서 시리즈는 날아간다. 2016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이종욱의 적시타로 8회초에 1:1 동점을 만들어놓고도 필승조의 과부하로 내보낼 투수가 없어서 김진성-구창모-배재환 등을 출첵시키듯 내보냈다가 탈탈 털리고 어이없게 승리를 헌납한 것이 대표적인 모습이다. 또한 원종현 역시 NC의 16 가을야구 8경기 중에 7경기에 등판시켰고, 결국 코시 3차전에서는 0이닝 2사사구 강판, 4차전에서는 0.2이닝 4피안타 3실점하면서, 구위가 급격히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플옵에선 155km를 씽씽 던지던 파이어볼러가 코시에선 145km를 간신히 찍는 모습은 마치 10년에 김경문이 10경기 연속 등판을 시켜서 선수인생을 아작내버린 고창성의 데자뷰같은 모습이었다. 병력이 있던 선수를 혹사시켜 결국 커리어에 흡집을 내버리는 것은 선배들의 데자뷰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여기에 단기전 선수단 운용도 극히 단순하다. 타순이나 라인업 모두 페넌트레이스에서 한 치의 변화없이 고정이다. 선수들이 부진해도 변화를 전혀 가져가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타격 사이클이 지지부진하면 중심타선은 믿고 기다리더라도 앞뒤로는 변화를 주며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 하는데 그런 모습 보기 굉장히 힘들다. 단기전에서 이보다 더 단순하고 요지부동인 감독은 단기전 들어가며 수비조차 나 몰라라 하던 제리 로이스터밖에 없다. 그래서 일단 타선이 부진하면 끝도 없이 길어진다. 2008[51], 2016[52]년이 대표적이다. 김경문이 참가한 역대 코시에 한번 패배하기 시작하면 한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시리즈를 내어주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2017년에는 노진혁, 김준완 등을 투입해서 나름대로 재미를 보았으나[53] 다른 단점이 고쳐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대주자, 대타 요원까지도 복붙이다. 김성근처럼 포지션이나 선수 컨디션 고려없는 대타나 뜬금없는 번트 등 쓸데없이 작전에 매달리는 것도 그거대로 문제겠지만 여름 지나고 가을 오듯 너무 뻔하니 상대팀은 예상 못한 변수가 나올 염려가 없어 수비와 투수진 운용이 편하다. 2016년 한국시리즈 2, 3차전에서 연속으로 경기 막판 이호준의 대주자로 김종호를 내보내서 공격력을 스스로 감쇄시킨 것이 대표적인 모습.[54] 대주자로 나온 김종호는 두경기 연속 9회 타석에 들어서서 연속으로 허무하게 삼진을 당하며 경기를 아예 끝내버렸다. 2015년에 좋은 타격감을 뽐내던 지명타자 이호준을 빼고 2점 차로 뒤지는 상황에서 타자 나성범을 투수로 쓴 적이 있는데, 이 때처럼 타선을 일부러 약하게 하는 듯한 짓을 또 저지른 것이다.

여담으로 유독 롯데 자이언츠에게 강하다. 두산 시절에는 2009년과 2010년 2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서 롯데를 격파했으며 특히 2010년은 리버스 스윕이었다. 세월이 흘러 2017년, NC 감독으로서 롯데를 상대했을 때도 격파했으며 이는 김경문 감독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업셋 승리다.

2019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이후에도 2019 WBSC 프리미어 12에서 슈퍼 라운드 최종전과 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에게 연달아 패하면서 큰 경기에 약하다는 걸 여지없이 보여줬고, 2020 도쿄 올림픽 준결승 1경기, 2경기에서 각각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미국 야구 국가대표팀한테 패배하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 심지어 동메달 결정전에서조차 도미니카 야구 국가대표팀한테 패배하여 최종 4위라는 부진을 저질렀다.

7.2.1. 통계적으로

먼저 현재와 같은 KBO 포스트시즌이 확립된 1989년부터 2018년까지 (양대리그였던 1999년, 2000년 제외) 총 28번의 포스트시즌에서 정규시즌 1위 팀이 우승을 못한 경우는 1989년, 1992년의 빙그레, 그리고 1987년, 2001년, 2015년의 삼성, 2018년의 두산 이렇게 총 6번밖에 없다. 즉, 업셋 확률은 고작 21.4%에 불과하다. 한국시리즈에서 업셋은 통계적으로 7번의 도전 기회가 주어져야 겨우 한 번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이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해 한국시리즈에 올라온 팀의 업셋 확률이며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할 확률까지 합치면 정규시즌 2위나 3위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확률은 10% 미만이라고 봐야 한다.

김경문 감독이 한국시리즈에 4번 진출했으나, 정규시즌 우승팀으로 진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14.8%의 업셋 확률로 4번 진출한 한국시리즈에서 한번도 우승을 못 했으니 잘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통계상으로는 못했다고도 할 수 없다.[55] 원래 현행 KBO 포스트시즌 방식상 정규시즌에서 우승 못한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이기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56] 따라서 통계상 이것만 가지고 큰 게임이 약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 결국 정규시즌에서 우승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아래 문단에서 서술. 다만 선수 혹사 측면에서는 분명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현대 프로야구에서 감독이 정규시즌에 미치는 영향력은 승수기여는 2승 정도가 고작이라고 본다.[57][58] 어차피 경기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가 하기 때문. 현대 야구에서 감독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7.2.2. 그냥 시즌 운용에 약하다

무엇보다도 김경문은 감독 생활을 이어오며 정규 시즌 우승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단기전 능력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거의 전부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선발을 못 키우고, 불펜만 짜먹으니 이상할 거 없는 일인데 단기전 능력에 의문부호가 있는 상황에서 1위라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지도 못하니 우승은 절로 멀어진다.

물론 김경문 감독이 활동한 2000년대 KBO에서 우승한 감독들이 투수 혹사를 하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니다. 그냥 거의 다 혹사를 저지르던 시기였기 때문. 야구에서 투수혹사가 아예 없이 우승하는 감독이란 야알못 팬들의 망상 속에나 존재하는 환상종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혹사를 '매우 덜 시키고' 우승하는 감독, 혹사를 '남들만큼 시키고' 우승하는 감독, 혹사를 '유별나게 시키고' 우승하는 감독이 있을 뿐이다.[59] 이는 간단한 계산으로도 알 수 있는데, KBO 리그에서 한 시즌에 반드시 소화해하는 이닝 수치는 이론상 가능한 최소 수치를 계산해도 1224이닝, 실질적으로는 1300이닝 정도를 소화해야 한다(144경기 기준). 선발 5명이 전부 합쳐 900이닝을 먹어준다고 가정해도 400이닝 정도가 남는데, 이를 1군 엔트리만으로 커버하려면 27인 로스터에 투수를 13명 쓰는 기준으로 불펜 한 사람 당 평균 50이닝을 소화해야 한다. 그러니까 1군 주전급 불펜투수 1인에게 가는 부하를 최대 50이닝 이내로 확실하게 억제하려면 모든 선발투수가 류현진급 이닝이터인 팀(류현진의 KBO 커리어 평균 이닝이 약 181⅓ 이닝)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28경기 체제로 놓고 계산해도 1200이닝 정도는 필요하며, 이 또한 선발진이 총 800이닝, 평균 160이닝은 먹어줘야 하는데 160이닝이면 류현진 다음가는 급의 이닝이터인 장원준의 커리어 평균 이닝(153⅔ 이닝)보다도 더 큰 수치다. 실제로 00년대의 다른 우승감독들인 김인식 김응용 김재박 선동열 김성근 조범현 중 불펜 안 갈아먹고 우승한 감독은 없으며, 2018년에도 함덕주와 박치국이 혹사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투수를 안 갈아먹을수는 없다. 문제는 갈아먹는 방식의 문제라는 거다.

이 정점에 있는 김성근을 보면 김성근은 혹사가 나쁜 것을 알고도 저지른 악한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시즌 초반에 팔을 갈아 달려서 정규리그 우승을 거의 확정지어놓고, 힘을 비축하다가 또 한국시리즈 승리 청사진을 짠 뒤 올라오는 팀을 제압하였다. 장기적으로는 김경문과도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팀을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정도로 잿더미로 만들었지만, 적어도 1시즌 내에서는 정규시즌에 지쳐 포스트시즌을 망치는 삽질은 미리부터 알고 회피한 것이다. 선동열이나 김재박(...)과 같은 이후 흑역사화된 감독들도 1시즌 내에서 혹사를 하더라도 투수들의 피로도를 어느 정도 관리하고, 한국시리즈 운용을 계산하고 바라보며 혹사를 자행했다.[60]

반면 김경문 감독은 2010년대 NC에서의 운용을 보면 비교적 상위급 선발이나 필승조 물량이 충분한 편이라서 투수운용을 잘 하고 이닝을 분배하면 혹사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냥 주축 투수를 한 명씩은 매년 작정하고 족치는 수준으로 굴렸다. 성적을 내기 위해 혹사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혹사에 대한 자각이 없어서 혹사를 한 것이라는 의미.[61]오히려 두산에서는 토종 선발을 못 키운 책임을 어느 쪽에 돌리냐와 별도로 외국인 스카우트 문제도 겹치면서 결과론적으로 선발진이 언제나 한국시리즈에서 기다리고 있던 팀들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갑론을박이 존재했다. 하지만 환경이 달랐던 NC에서도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한국시리즈 우승 또한 차지하지 못하는 사이 심각한 혹사를 자행하며 부정적으로 검증되었다.[62] 데리고 있는 수석코치나 투수코치가 바뀌어도 이 방식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쯤 되면 본인 책임으로 봐야 한다.

성적을 위해 혹사를 자행하기보다 김경문처럼 그냥 투수 관리를 효율적으로 못하는 감독인데도 동시대에 우승한 감독은 없을 것 같지만 딱 한 명 있다. 2009년 KIA 타이거즈 감독이었던 조범현. 괜히 2009년 KIA가 우주의 기운으로 우승했다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완벽한 4선발+3필승조+상위타선 심지어 이 중에 몇은 역사상으로 드물게 운에 기댄 시즌[63]을 보낸 선수들을 굴리면서 감독의 좋지 않은 투수운영이 1시즌 투수력 소모에 영향을 끼칠 여지 없이 우승했으니까. 하지만 조범현 한 명과 비교해서 김경문 감독이 불운하다고 하기에는 우승 경험 감독과 아닌 감독을 가리지 않고 다른 모든 감독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이 문단의 핵심이다. 분명 NC 2년차에 승부조작에 그 투수가 연루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지만[64], 그랬으면 과한 행운이라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것이 불운이라고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본인이 소모시키지 않은 선수들로 단기전을 펼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절대적인 전력의 약세에서 오는 험난한 확률을 뚫고 잘만 우승했다는 것도 단기전 능력이 아닌 정규시즌 장기레이스 능력의 문제라는 의견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전력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있고 한 경기를 잡는 능력도 있지만 정작 정규시즌 144경기를 계획할 능력은 부족한 감독이다. 물론 정규시즌 가을야구를 꾸준히 가는건 분명 대단한건 사실이다. 유럽 축구로 비유하자면, 항상 상위권에는 오르는데 리그 우승이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못하는 격.

즉 팀을 우승후보로 만드는 능력은 아무리 두산과 NC 양 쪽 프런트빨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결과로 증명한 반면, 결과적으로 그 시점에서는 물러나는 것이 팀과 본인 양쪽을 위해 좋았을 감독. 2015년과 2016년의 염경엽 감독처럼 피드백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 연세에 그게 쉬울 리가.

7.3. 2011년 중도 사퇴 논란

시즌중에 사퇴한 것이 팀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답이 없으니까 도망간 것 아니냐는 팬들의 반발이 있다. 하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계속된 준우승으로 심한 2인자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2011년은 김경문 감독 입장에서도 이례적인 두산구단의 지원이 있었고,[65] 시즌 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 상황에서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으니 압박감을 크게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시리즈에서 3번이나 물을 먹고 어느 때보다 우승이 간절하고, 여건이 맞춰진 상태에서 말이다. 강한 프라이드에 사로 잡혀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김경문 감독은 5월 5일 어린이날 잠실더비에서 몇년간 어린이날 LG를 압도하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대패한 날 사퇴의사를 처음 전했다. 당시 두산은 그 동안의 혹사 피로 인한 투수들이 부진 새로 뽑은 용병 페르난도 니에베의 부진, 7위의 순위로 선수단 자체의 분위기가 매우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계속된 우승 실패로 인한 본인의 자존심에 심한 자책감을 느꼈고 결국 시즌중 사퇴라는 불명예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즌 중에 중도사퇴한 뒤 휴식을 취하며 공부하고 싶다던 사람이, 사퇴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자신의 카페 개업 관련이라면서 귀국한 뒤 신생 NC감독직에 취임하고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코치진을 빼간 것은 그 어떤 쉴드도 불가능한 배신행위이다. 특히 그를 믿었던 팬들은 통수라고 볼 수 있고 어느 팀 팬들이라도 응원하는 팀의 감독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반발한다. 2011년 당시 처음 김경문의 사퇴 소식이 나왔을 때 대부분의 두산 팬들은 팀을 망치고 도망친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윤석환과 조계현을 비난하거나 임태훈때문에 마음 고생 많으셨겠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66] 하지만 2달 후 NC감독으로 간 이후 급속도로 두산 팬들의 팬심이 식어버렸고, 두산 헤비 팬들 사이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2016년 11월 9일 NC와 3년 20억에 재계약을 체결했다. "어려울 때 함께 헤쳐 나가는 게 팬에 대한 도리"라고 재계약 소감을 밝혔다. 두산팬들은 2011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허탈해 했다.

그리고 2018년 NC가 시즌 초부터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자진사퇴하였으나, 사실상 경질되었다는게 대부분의 반응.

7.4. 선수관리 부실

2016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선수 관리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정작 두산은 김경문이 떠나자마자 사건사고가 확 줄어든 반면 새로 옮긴 간 NC에서 잦은 사건사고가 발생한다는 게 그 이유.

두산의 경우 2011년 말, 김재환의 도핑 사건이 나긴 했어도 김경문이 자진사퇴한 이후 새 감독이 선임되기 전 어수선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고, 감독이 바뀐 2012년 이후로는 선수 관리가 제대로 되어 2014년 이용찬이 신고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사용 가능한 스테로이드계 피부약을 신고를 안해서 도핑에 걸려서 잠깐 구설수에 오른 일 딱 하나 뿐이었다. 특히 두산은 김경문이 나간 뒤 2018년 6월까지 선수가 음주운전이나 승부조작 등 현행법을 어긴 선수는 하나도 없다. 이후 진야곱의 불법도박 혐의가 드러나긴 했으나, 이것도 2011년의 일이다. 즉 김경문의 선수 관리 실패의 연장선이고, 최규순 게이트의 경우 현장의 문제라기보다는 프런트가 연루된 사안이다.

NC에서도 이태양의 승부조작이 드러나고, 비록 무혐의로 결론 났지만 이재학이 불법 도박 의혹을 받기도 했다.[67] 또한 이성민마저 승부조작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성민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 경찰의 개입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민호가 부인을 폭행하고 외도를 저질렀다는 등의 파문이 일며 구단의 징계를 받기도 했고, 팀의 4번 타자인 에릭 테임즈까지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 2016년 한 해에만도 엄청난 범죄, 사건사고를 일으키면서 범죄C, New Crime 등의 조롱을 받으며 여론의 몰매는 맞는 중이다.

물론 선수들이 무슨 미성년자도 아니고 감독이라는 사람이 선수단 전체의 사생활을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지만,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NC팬 내외로부터 선수단 관리가 미흡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많이 듣고 있다.

8.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4 두산 베어스 133 70 62 1 3위 3위
2005 126 72 51 3 2위 준우승
2006 126 63 60 3 5위 -
2007 126 70 54 2 2위 준우승
2008 126 70 56 0 2위 준우승
2009 133 71 60 2 3위 3위
2010 133 73 57 3 3위 3위
2011 57 23 32 2 7위[68] -
통산 960 512 432 1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3 NC 다이노스 128 52 72 4 7위 -
2014 128 70 57 1 3위 3위[69]
2015 144 84 57 3 2위 3위
2016 144 83 58 3 2위 준우승
2017 137[70] 75 59 3 4위 4위[71]
2018 59 20 39 0 10위[72] -
통산 740 384 342 14
총계 1700 896 77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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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절 삼성은 1차 암흑기양준혁, 이승엽 외에는 돋보이는 이가 없을 정도의 부진을 겪었다. 좀 뒤로 가면 신동주, 이동수 밖에 없었고, 투수진도 김상엽, 박충식 외에는 돋보이는 선수가 없었다.[2] 98년도 까지 두산 베어스는 팀명을 OB로 사용을 했다.[3] 이재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아마추어 시절까지만 해도 투수가 아니라 내야수였다.[4] 이 당시 일화가 있는데, 당시 선동열이 감독이 될 줄 알고 김경문 본인은 마침 고대 후배 양상문롯데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자 롯데의 수석 코치직을 제안받고 협상을 위해 부산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두산 구단의 연락을 받고 급히 상경하여 두산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이 경쟁 속에서 이광환 감독이 사퇴한 다음 LG가 선택한 자는 이순철. 그리고 이 선택은 두산에게는 신의 한 수가, 반면에 LG에게는 최악의 한 수가 되고 말았으니... 자세한 것은 이순철/지도자 경력 참조.[5] 결과적으로 김광수 대행은 후임 감독직에 오르지 못했고, 고양 원더스가 창단되자, 고양으로 옮기며 김성근 사단으로 불리게 된다.[6] 롯데 자이언츠 - 두산 베어스를 거친 투수 출신 프런트. 2000년 5월 김영수를 상대로 두산 베어스트레이드된 후에는 두산에서 2002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프런트로 몸담았으며, 현재는 NC 다이노스의 1군 매니저다. 두산에 사직서를 낸 이후에는 "문 카페"의 운영을 잠시 맡았다고 한다.[7] 이후 두산 베어스 갤러리는 극렬한 김경문 안티로 돌아선다.[8] 엄밀히 말해서 김경문은 경질이 아니라 자진사퇴라 지급을 안 해도 된다.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준 것일 뿐.[9] 당시 박승호 2군 감독, 김광림 타격코치, 강인권 배터리코치. 그나마 강인권은 15 시즌, 두산으로 컴백했다가 한용덕을 따라서 한화로 갔다.[10] 고창성은 10년 포스트시즌 10경기 연투를 버티지 못하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2차 드래프트에서 NC로 가게 되면서 다시 고통받다가 16시즌엔 아예 1군에 올라오지도 못하고선 시즌 종료와 함께 방출되었고, 호주리그와 kt를 전전하다 은퇴했다, 임태훈은 사생활 문제가 크긴 했지만 그 전부터 혹사로 인해 허리 통증이 왔고, 혹사로 인해 구위가 떨어지면서 2010년에는 피홈런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이미 하락세의 조짐을 보이며 사생활 문제가 없었어도 망가졌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이재우는 혹사 여파로 인해 팔꿈치 수술을 두 차례나 받고 2013년에 선발 투수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만 이후 별다른 활약이 없이 2015년 시즌 후 방출되어 한화로 이적해 추격조를 하다 허용투수가 되었고 2017년 시즌 중 은퇴했다. 그나마 가장 관리해줬던 이용찬은 군 제대 이후 제구가 안 되는 홍상삼, 부상으로 낙마한 정재훈 대신 겨우겨우 두산의 필승조가 되었다. 그러나 시즌 후 팔꿈치 수술로 WBC 참가가 무산되고 만다. 알다시피 팔이 맛이 간 원인은....[11] 2017년 현재 두산에 이 나이대인 1군 불펜은 입단한 뒤 터지는 데까지 장장 10년이 걸린 김강률, KILL 라인의 유일한 생존자 이용찬, 2012년에 대졸신인으로 입단하고 지금은 군대에 있는 윤명준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12] 말고도 1군에 올라올 가능성이 있는 젊은 투수로는 유재유, 현도훈, 박신지 등이 꼽힌다.[13] 그 김선우도 2012년부터 노쇠화가 찾아오며 부진하기 시작했고 2년 후 두산에서 방출되어 떠나고 만다.[14] 이용찬은 당시 선발로 이미 전향한 상황이었다.[15] 양의지가 공수겸장으로 국내 탑급 포수로 발돋움한 것은 15시즌 두산으로 복귀한 강인권 코치의 공이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16] 수비력은 신인 시절부터 알아주던 선수였으나 그 전까지는 경험 부족에 포지션도 고정되지 않아 안정되지 못했던 게 컸다.[17] 이종욱은 플레이오프는 MVP를 2년연속 수상 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했지만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 귀신같이 삽을 펐다.[18] 이마저도 김경문의 육성능력이 뛰어나다기 보단 두산의 화수분 시스템이 뛰어났기에 가능하단 의견들도 있다.[19] 두산이 화수분야구 시스템이 뛰어났기에 육성능력이 뛰어나지못했다는 건 생각의 여지가 있다. 애초 김경문이 두산 감독을 맡았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김인식 감독의 감독 재임기간중 2002년의 부진과 2003년 팀의 분위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감독을 맡았던 것이다. 즉 상위권의 전력으로 감독을 맡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수분 야구 시스템을 구축하여 침체기에 빠져있던 두산을 가을야구로 다시 반복적으로 진출시킨 것은 엄연한 김경문 감독의 대단한 성과라는 것이다. 즉, 김경문이 두산 감독 부임 시절 전부터 화수분 야구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팀 분위기 및 성적이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김경문이 감독으로 부임하에 화수분 야구 시스템이 구축되었다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20] 임태훈 건으로 사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위에서도 보이듯이 사퇴 의사를 처음 밝힌 건 5월 5일, 고 송지선 아나운서의 싸이월드 글이 올라온건 5월 7일, 고인이 사망한 날은 5월 23일이다.[21] 물론 선수가 팀을 배신한것과 감독이 팀을 버린것의 차이가 있다.[22] 이때 LG는 시즌 초 9위로 떨어진 이후 -16을 극복하고 4위를 하는 과정에서 시즌 막판 4위 싸움에서 많은 힘을 쏟아야 한데다가 시즌 최종전이 사직 롯데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창원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NC의 체력적인 우위로 보였으나 탈락한 쪽은 NC. 아이러니한 것은 준플레이오프 상대팀이었던 LG 또한 전년도 시즌 정규시즌 2위로 11년만의 가을야구와 동시에 플레이오프에 직행하였지만 두산에게 1승 3패로 탈락했다. 원인은 NC와 같이 경험부족. 당시 4위였던 두산은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에게 5차전 승부 끝에 리버스 스윕을 가져간 지라 플레이오프에선 체력적으로 LG의 우위가 점쳐졌으나 결과는 LG의 패배.[23] SK는 내부 FA 3명이 타팀으로 유출되었고, 삼성은 , 용병3명, 박석민까지 팀 전체 WAR가 반토막났다. 넥센 역시 박병호, 벤헤켄의 해외 진출과 유한준, 손승락의 타팀 이적으로 WAR가 거의 반토막났다. 두산은 저 팀들에 비하면 전력 유출이 덜하지만 그래도 김현수의 해외 진출은 타격이 크다.[24] 암 수술 이후 150km의 속구를 던지던 원종현은 구위가 계속 하락하고 있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최금강과 이민호, 연투 마무리 임창민까지 혹사를 당하고 있으나 이 분 덕에 별로 욕을 먹지 않고 있다.[25] 김경문 감독의 포스트시즌에서의 첫 SK전 시리즈 승리이다.[26] 이후 김종문 운영팀장이 유영준 단장을 대신할 새 단장으로 승진하게 된다.[27] 슈퍼라운드 최종전에서 일본에게 패배를 해도 메달 결정전에서 승리했으면 우승이 가능했던 상황이었다.[28] 다만 이 대회는 12월까지도 개최 소식이 없어서 사실상 취소되었다.[29] 삼성 시절은 암흑기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시기는 하필이면 간통 루머로 인해 팀을 떠나 평가가 박하다.[30] 안경현, 장원진, 김민호, 전상렬 등등이 주전으로 뛰고 있었고 김경문이 취임하던 2004년에 이 들은 30대 중반의 베테랑으로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31] 양의지, 민병헌, 박건우, 김재호, 오재원, 김재환, 허경민, 유희관 등.[32] 장원준, 오재일, 이현승 등. 사실 우승 전력이라는 평가는 장원준 전후로 달라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33] 박세혁, 류지혁, 함덕주 등.[34] 물론 이 시즌은 NC에서 승부조작 등 각종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졌기 때문에 무조건 김경문 감독의 책임이라고는 볼 수 없다.[35] 이러한 점은 비슷하게 kt의 창단 첫 감독을 맡은 조범현이 부임기간 동안 나름 신생팀을 리그에 자리잡게 했음에도 최하위에 그쳤던 걸 감안한다면 매우 높게 평가받을 부분이다.[36] 김경문의 공이라기보단 두산의 전통적인 화수분 야구 덕분에 이룬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37] 팬들을 더 열불나게 만든 점은, 그 와중에도 중계진이나 기자들은 투수 혹사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없고 언제나처럼 카메라나 언론 앞에서 허허 거리면서 본인을 덕장 이미지로 포장하고 있는 김경문을 국가대표 전승 감독이라고 옹호하면서 오히려 찬양하기 바빴다는 것이다.[38] 심지어 선발인 김광현이 9.1이닝 던질 동안 두산에서 3선발이었던 이영하는 불펜으로만 8이닝을 던졌다.[39] 원본은 아르센 벵거의 'Who has never won the Champions League?'. 굵은 글씨 3명은 한국시리즈에서 직접 김경문을 이긴 감독들이다.[40] 1998년부터 2001년 시즌까지.[41] 한국시리즈 사상 첫 2연승 후 4연패 기록이기도 하다.[42] 87년은 전국체전이라는 변수로 인해(광주에서 전국체전이 열린 관계로 해태는 플레이오프 홈 경기를 전주에서 치러야 했다.), 89년은 포시 일정 상 2위팀에게 불리할 게 없었고, 92년에는 수당 문제 및 감독 거취 문제로 잡음이 많았으며, 01년에는 잠실 중립경기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삼성 선수들이 압도적인 전력이 무색하게 워낙 졸전을 펼쳐 패배했고, 15년에는 삼성 내부에서 악재가 일어났다. 18년이야 뭐......[43] 16년에는 원정팀 자격이긴 하지만 전패. 물론 한국시리즈 홈 경기로 보더라도 전패인 건 마찬가지다.[44] 물론 2014시즌 LG 투수진은 삼성 다음가는 리그 최상급이었다. 당시 LG 투수진의 황금기를 이끌던 국내 선수들 중 우규민, 류제국, 이동현, 봉중근을 제외한 다른 투수들은 20대였다. 오히려 2014시즌에는 야수진의 노쇠화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1군급 야수진에 20대라고는 오지환박경수, 김용의, 문선재 뿐이었다. 그 박경수마저도 부상으로 포스트시즌에 못 나간 걸 생각하면.. 현 LG 야수진의 리빌딩이 빨라 보이는 이유는 15~16시즌에 야수 체계를 완전히 갈아엎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인정 빠따를 못 막은건 NC가 못한 것이다.[45] 이마저도 와일드카드부터 시작해서 체력 다 빠진 LG에게[73] 졸전 끝에 이겼다는 소리가 나왔을 만큼 경기력이 막장이었다.[46] 심지어 이 기록은 재팬시리즈나 월드 시리즈로 범위를 확장시켜봐도 타이기록이 단 한건밖에 없는 엄청난 불명예이다. 테임즈의 KBO 리그 고별포가 아니었다면 세계 신기록 하나 만들어낼 뻔했으니...[47] 그 외에 장타는 고작 2개로, 4차전 모창민의 2루타와 테임즈의 솔로포 말고는 하나도 치지 못했다. 또한 2차전 이종욱의 적시타 이외에는 득점권에서 하나도 안타를 치지 못했다.[48] 동률마저도 1차전 연장끝에 1:0으로 패배를 당했다. 0:0이 아닌 동점도 2차전 8회초 1:1 뿐이었는데, 이마저도 8회말 곧바로 해커-김진성-구창모-배재환이 4점을 헌납하며 무너졌다.[49] 플옵 1차전은 승리 투수가 되기는 했으나 사실 김준완의 메이저급 호수비 덕분이었고, 결국 다음날 최주환에게 생애 포스트시즌 첫 홈런 겸 역전 만루홈런을 헌납하면서 완전히 박살났다.[50] 심지어 오재일에게 KBO 포스트시즌 신기록인 1경기 4홈런 9타점을 홈에서 내주는 굴욕까지 당했다.[51] 특히 김현수[52] 나테이박, 이종욱 등[53] 심지어 기존에 부진했던 나성범이 못한 것도 아니었다.[54] 이호준도 잘 한건 아니었지만, 나테이박 중에서는 그래도 양반이었다.[55] 다만 4번이나 진출한 코시에서 두 번이나 스윕패를 당하고 총 3승 20패라는 끔찍한 전적을 보인 것은 그걸 감안해도 심각하긴 하다.[56] 업셋에 성공한 2001년과 2015년 두산 베어스의 사례를 보면 일반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국시리즈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한국시리즈중립경기 규정 때문에 3차전부터 7차전까지의 모든 경기가 잠실 야구장에서 벌어졌다. 즉, 7경기 중 5경기가 하위 승률을 기록한 두산 베어스 홈에서 벌어지는 경기였다. 물론 7차전까지 가더라도 6,7차전 2경기가 단순히 개최 구장만 달라지는 것이고 이 규정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4차전까지도 삼성은 정규시즌 승률 약 1할 차이의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졸전을 펼치면서 1승 3패로 몰리는 상황까지 발생해 결론적으로 6차전 하나 홈구장 바뀐 것 가지고 중립경기 규정이 없었으면 우승했을 것을 못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지만, 만약 5차전 삼성 승리 이후 6,7차전이 삼성 홈구장에서 펼쳐졌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작은 변수의 문제보다는 01두산이라는 팀 자체가 아웃라이어 중의 아웃라이어라고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긴 하다. 2015년 한국시리즈말 안해도...[57] 엄밀히 말해서는 감독 WAR는 측정할 수 없다. WAR는 대체선수 대비 승수기여인데 대체 감독이란 게 없기 때문. 다만, 세이버매트리션들은 정확한 수치는 아니나 통계적으로 2승 정도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더 올리고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이는 감독과 단장의 분업화가 잘 이루어진 메이저리그 기준이기 때문에 감독 권한이 메이저리그보다 더 큰 KBO 리그에서는 감독의 승리기여 정도가 더 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것도 메이저리그보다 어느 정도 더 영향이 있다 뿐이지 큰 차이를 보인다고는 할 수 없는 정도다. 감독이 작정하고 팀을 망치는 모 롯데 감독 수준이거나 투수를 혹사해 박살낸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이것도 감독이 잘하고 못하는 걸 넘어서 그냥 상식 밖의 운용을 하는 사례이니...[58] 이건 정확히 말하면 경기 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용을 한다든지 김경문이나 김성근처럼 팀의 미래를 갈아먹는 식으로 팀의 승수나 장기적인 전망을 깎아먹을 수는 있어도 경기장 내에서 선수들의 플레이에 관여해서 직접적으로 승수를 깎아먹거나 올리기는 어렵다는 뜻이다.[59] 메이저리그에서도 혹사 없는 감독은 없다. 단지 불펜투수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는 편이다.[60] 게다가 이 두 팀도 불펜하면 남부럽지 않은 팀이였다. 삼성은 안정권KO로 불리우는 초특급 불펜이 있었고, 현대도 꾸준히 준수한 불펜들이 매년 튀어나왔다. 또 이 두팀의 선발이 약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61] 실제로 NC에서 오랫동안 김경문 감독을 보좌한 최일언 투수코치는 '3연투가 없었으니 혹사가 아니다'는 식으로 김경문 감독을 옹호했다. #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62] 다만 2016년 후반기부터 NC 토종 선발도 좋지 않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장현식이나 구창모 같은 유망주들에게 선발 등판 기회를 많이 줬으나 이 선수들은 달감독 시절에는 부상이나 부족한 이닝이터 능력으로 팬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나마 구창모는 2019년에 토종 에이스로 성장했다.[63] 단순히 BABIP신의 은총을 받았든, 아니면 이때 빼고 건강했던 적이 없던 선수들이 건강했든.[64] 어쨌든 2016년은 감독 본인이 혹사를 덜해야 하나 처음 생각해본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2017년에는 성과주의 조급증이 도지면서 그런 거 없었다.[65] 전시즌 월드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었던 니퍼트를 영입했고 일본에서 돌아온 이혜천을 재영입했다.[66] 이 때는 두산 팬들이 진짜로 은퇴하고 문카페 차리고 야인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67] 정확하게는 2011년 두산 소속 당시의 일로 당시 두산 감독은 김경문이었다.[68] 중도 사퇴. 최종 성적은 5위.[69] 준플레이오프 탈락. 그러나, 상대 LG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면서 3위 확정.[70] 시즌 중 7경기는 김평호 수석코치가 감독대행.[71] 플레이오프 탈락.[72] 중도 경질. 최종 성적도 1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