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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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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나자렛의 요셉 · 어머니 성모 마리아 · 형제 예루살렘의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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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모자이크
〈전능하신 그리스도(Χριστὸς Παντοκράτωρ, Christos Pantokratōr)〉
<colcolor=#000><colbgcolor=#E9C967> 출생 기원전 7년~기원전 2년 추정[1]
로마 제국 헤로데 왕국 베들레헴
(現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사망 서기 30년 4월 7일 (향년 30세)
또는 서기 33년 4월 3일[2][3] (향년 33세)
로마 제국 유다이아 속주 예루살렘 골고타
(現 이스라엘 예루살렘 골고타)
직업 장인(목수)[4]
가족
관계[5]
외조부 요아킴
외조모 성녀 안나
아버지 하느님 | 나자렛의 요셉[6]
어머니 성모 마리아
형제자매[논란] 예수의 형제 야고보[8][9]
요세(혹은 요셉)
유다[10]
시몬[11]
두 명 이상의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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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문자 ܝܫܘܥ
[jeʃuʕ](예슈) 혹은 [iʃoʕ](이쇼)
히브리어 <colcolor=#000,#ddd>ישוע
[jeˈʃu.a(ʕ)](예슈아)
그리스어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이에수스 크리스토스[12]
다른 전례 언어 라틴어 Iesus Christus
예수스 크리스투스
아랍어 그리스도교 يسوع المسيح
야수 알마시흐, 'المسيح'는 '메시아'라는 뜻
무슬림 عيسى المسيح
이사 알마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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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위상3. 이름4. 각 종교에서 보는 예수
4.1.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 예수의 정체
4.1.1. 혈통4.1.2. 구약 성경의 예형론4.1.3. 신약 성경의 원시 그리스도론
4.2. 이슬람의 관점에서 본 예수
4.2.1. 그리스도교와의 차이점4.2.2. 그리스도교의 영향
5. 생애
5.1. 일러두기
5.1.1. 사료로서의 복음서
5.2. 탄생 배경5.3. 탄생5.4. 공생애 이전의 삶5.5. 공생애5.6. 죽음과 부활
5.6.1. 성경에 따른 부활 이후의 행적
5.7. 별개 문서가 있는 복음서의 일화·비유
6. 예수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6.1. 예수 개인의 사상
6.1.1. 예수의 사랑6.1.2. 하느님의 바실레이아와 이스라엘6.1.3. 메시아
7. 예수 이후8. 역사적 예수9. 실존 여부10. 한국에서의 인식11. 예수 어록 전승
11.1. 예수의 화법
12. 예수에 대한 이모저모
12.1. 성격12.2. 결혼 여부12.3. 외모
12.3.1. 회화의 묘사12.3.2. 역사적 예수12.3.3. 신학적 예수의 모습
13. 가공 매체에서14. 여담

[clearfix]

1. 개요


예수서력기원 무렵 로마 제국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현자[13]이자 예언자[14]이며,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창시자이다.

2. 위상

예수와 그리스도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개인과 체계이다. 지역적, 문명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의 문화권에서 예수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호메로스로 상징되는 희랍 문화와 함께 서구 문명권의 주요 근간이자 가장 큰 근간을 이룬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 중세에도 근대에도 온갖 정치인, 사상가 등이 프랑스 혁명기의 이성의 여신 숭배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지향했으며, 문화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히려 현대에도 예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수요가 넘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 위상은 현역이다.

단순히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탄생 이후 20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전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인 26억 명 정도가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다(2024년 기준). 또한 종교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당대 강대국이었던 로마 제국4세기부터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지정한 이래로 유럽은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문화, 언어, 미술, 음악, 문학 심지어는 이념, 사상, 정치 등에도 예수와 성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간단한 예시로 유럽계 혹은 그리스도교계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의 이름 대부분이 성경 기반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그리고 그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명은 제국주의 시대 이래 말 그대로 지구 곳곳을 정복하여 전 세계 문명을 서양화시킴으로써 그 영향력을 퍼트렸다. 한국도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는데 예수의 탄생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서력기원이 그 예이다.

이슬람교도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교와 철천지원수로 생각되기 쉬우나 이슬람교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무슬림삼위일체는 인정하지 않으나 예수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다.[15] 이슬람교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해당 문단 참조.

성경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동정녀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16] 하느님을 아버지로, 목수 나자렛의 요셉을 양부로[17] 둔 인물. 한편 예수를 순수한 신화적 인물로 보고 실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있었으나[18] 현재에는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매우 공격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도 예수의 실존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의 실존 여부와 별도로 예수의 실제 행적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19]

현대 관점에서는 유대교그리스도교가 구분되며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예수로 간주되지만, 예수 본인은 구약 성경이 고백하는 신앙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종교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제자들과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행적을 '율법을 완전케 하려 했다'고 해석했다.(마태오 복음서 5장 17절) 때문에 초기 신자들은 자신의 무리들을 혈통적 의미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으로 뭉친 '참이스라엘'로 보았다. 즉, 초기 그리스도교 및 현대까지 이어진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해석에 의해서는, 예수의 가르침(그리스도교)은 서기 1세기의 신생 종교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어왔던 '참유대교'에 해당한다. 심지어 예수는 창조주의 위격으로서 유대교를 창시한 자로 해석된다. 당연하지만 이거 때문에 유대인들과 갈등을 벌인 것.

즉,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신도로 나뉘어질 만큼[20] 사실상, 아브라함 계통 종교에서 종교를 가리지 않고 주신으로 섬겨지는 야훼를 제외한 인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3.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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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각 종교에서 보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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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메시아)이자 성부(聖父), 성령(聖靈)과 다른 위격(페르소나)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이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선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책의 진(眞)주인공이며 책의 전반부 자체가 이 사람의 등장에 대한 복선이다.[21]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100% 거짓 없는 신이면서 또한 100% 거짓 없는 인간이며, 창조되지 않은 자,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6일 만에[22] 창조한 자이다. 그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종파도 있었지만 일찍이 사라졌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이집트의 콥트 교회이든, 에티오피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 간에 구체적인 해석은 갈릴지언정,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즉 세 페르소나가 한 실체를 이룬다는 교리는 공유한다. 또한 이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나온 것이라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밀한 정의가 늦게 나왔다는 뜻이지, 삼위일체 개념 자체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성부와 동질성을 가진다고 해석될 구절이 많았고, 반대로 구분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많았다. 여기서 양극단[23]을 우선 쳐내고, 그리스 철학을 통해 복음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물이 지금의 삼위일체 정의이다.
  • 이슬람에서는, 24번째(마지막 예언자 이전 최후)의 신성을 가지지 않은, 신도 신의 아들도 아닌 인간인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된다. 쿠란에 따르면 예수는 다만 특별히 죄가 없는 인간이며, '하늘로 승천하였다'라고 하지만 이슬람교에선 이를 신이 영광스럽게 했다고 해석한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급의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받지만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다른 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다는 점. 이슬람에 의하면 신에게는 부모도 아들도 없고 딸도 없다.[24]
  •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거짓된 예언자로 간주한다. 타나크(히브리 성서) 신명기에 '거짓 예언자'에 대한 묘사가 있다. 세속적 의미에서 세상을 평정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할 구세주로서 메시아를 기대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선 이단 중의 이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과거의 경우 유대인들에게서의 예수는 그저 사기꾼 정도로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개혁에 실패한 젊은 사상가 혹은 랍비로 보는 경향이 생겼고, 심지어 예수를 본받는 랍비 및 메시아주의 유대교 분파도 있다. 실제로 예수를 유대교에 도전한 혁명가로 볼 수 있지만, 살인, 간음, 이혼, 맹세, '귀에는 귀, 눈에는 눈'을 가리키는 유대교모세 율법에 대해서 예수가 새로운 해석과 명령을 제시하므로[25] 타나크(히브리 성서)의 율법을 철폐하지 않으면서도(율법의 연속성) 율법을 완성한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현지에서 예수가 서서히 재평가되는 것과 별개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하고, 예수에 대해 그나마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유대인들도 예수를 메시아로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 메시아주의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리 하나 때문에 메시아주의 유대인들은 스스로 유대인을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서나 그리스도교에서나 둘 다 그리스도교에 더 가까운 존재들로 생각하고 있다.
  • 바하이 신앙에서는 예수를 인정하나, 하느님의 아들로는 인정하지 않고 예언자이자 현시자로 정의한다. 이는 이슬람의 관점과 동일하다. 그가 신약을 전한 것도 인정하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부활, 그가 행한 기적들도 인정한다.
  • 다신교인 힌두교에서 예수는 에아사(Easa)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칼리 유가가 3000살이 되던 해 후나에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며, 유대 민족의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다. 힌두교 내에서 예수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며, 어떤 이들은 예수를 수많은 신 중 하나로 숭배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그저 인간으로서 신의 아들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1.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 예수의 정체

그리스도교는 탄생 시점에는 일단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로 보았다. 하지만 이조차 기존 유대교메시아 관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유대교의 메시아는 세속적인 군주, 정확하게는 '유대 민족을 이끌 정치적인 지도자 혹은, 압제받는[26] 유대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영웅'이었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세상의 종말 때 이 세상을 심판할 구세주의 개념으로 바라본 것. 이 때문에 초기부터 정통 유대교 신학과 마찰이 있었고, 사도 바울로에 의해 헬레니즘 세계에 그리스도교가 퍼질 때는 신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기존 그리스 신화에서 흔히 나오는 반인반신과 혼동이 되어 또 마찰이 있었다. 심지어 "예수는 마리아와 로마 병사 판테라 사이에서 난 사생아다."라는 주장 역시 그때 생긴 주장이다. 어쨌건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다구리를 맞았고, 예수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받았다. 이를 희랍 철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27]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이자 성부, 성령과 다른 위격(persona)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묘사하는 예수는 100% 거짓 없는 하느님이면서 또한 거짓 없는 인간이며, 창조되지 않은 자,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한 자이다. 그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고, 재림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교 종파들도 존재했지만, 이들은 일찍이 사라졌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이집트의 콥트 교회이든, 에티오피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 간에 구체적인 해석은 갈릴지언정,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즉 세 위격이 한 실체를 이룬다는 교리는 공유한다. 또한 이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나온 것이라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밀한 정의가 늦게 나왔다는 뜻이지, 삼위일체 개념 자체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성부와 동질성을 가진다고 해석될 구절이 많았고, 반대로 구분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많았다. 여기서 양극단[28]을 우선 쳐내고, 그리스 철학을 통해 복음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물이 지금의 삼위일체 정의이다.
교부(敎父)들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일치 안에서 한 분이시며 같은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데, 그는 신성(神性)에 완전하시며, 동시에 인성(人性)도 완전한 분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며, 또한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의 신성은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며, 그의 인격은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데, 죄로부터는 떨어져 있으나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같으시고, 그의 신성에 관해서는 역사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그러나 그의 인간적 출생에 관해서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한 분이시고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는 2가지 본성으로 인식되는 바,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계신 분이며, 본성들의 차이는 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각 본성의 특징들은 보존되고, 한 위격과 생존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오며, 두 위격으로 분리되거나 나눠짐 없이 한 분 같은 성자요 독생자이시며, 말씀,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와 같은 사실은 심지어 가장 최초의 예언자도 그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로도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케돈 신조
[29]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14절.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8절.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예수의 정체를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은 요한 복음서이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는 한처음에[30] 하느님과 같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예수는 하느님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31]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로, 예수가 인간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의 이 구절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가 100% 인간이면서[32] 또한 100% 하느님이라고 본다. 또한 예수가 하느님이면, 그리스도교가 어째서 유일신교가 되냐는 의문이 나오자 삼위일체론으로 이것을 설명했다. 즉 성부는 하느님이고, 예수도 하느님이며, 성령도 하느님이지만, 성부 = 예수 = 성령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음 구절들을 보면 이 뜻은 더 명확해진다.[33]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God replied to Moses: I am who I am. Then he added: This is what you will tell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출애굽기(탈출기) 3장 14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He said to them, “You belong to what is below, I belong to what is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but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That is why I told you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What I told you from the beginning. I have much to say about you in condemnatio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what I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the Father. So Jesus said (to them),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realize that I AM,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I say only what the Father taught me.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Because he spoke this way,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요한의 복음서 8장 23-30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Jesus said to them,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34]
요한 복음서 8장 58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고백하는 초월자를 뜻하는 말인 야훼는, '나는 있다', '나는 나다' 등의 뜻이며 영어로 하면 'I AM'이 된다. 그런데 인용한 구절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I AM으로 소개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자신을 야훼라고 드러냈다.[35]

문제는 이 교리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점이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대부분 이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이거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아리우스파,[36] 네스토리우스파,[37] 오리엔트 정교회[38] 등이 떨어져 나갔으며, 급기야 초대 교회 자체가 가톨릭[39] 정교회[40] 찢어져 버렸다.

성경의 텍스트에서도 예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41] 성경 텍스트의 그리스도론은 '한 줄 요약' 식으로 과격하게 요약되지 않고, 여러 설명들이 마치 칼케돈 신경에서처럼 긴장 관계를 이루며 예수를 논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예언자이지만 예언자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메시아이지만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며,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아들이며, 모세의 역할과 하느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42]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나 종의 모습을 취한,[43] 하느님과 함께 있는 하느님,[44] 한 분이신 주님이다.[45]

한편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유대교이슬람에서는 바로 이 삼위일체론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다신교라고 디스한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삼위일체론 문서를 참고해 보자.

4.1.1. 혈통

성경에 따르면, 즉 마태오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46] 루카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이었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나자렛의 요셉에게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47]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 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거슬러가고, 루카 복음서는 아담과 하느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서술한 것이며, 루카 복음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모든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4.1.2. 구약 성경의 예형론

흔히 예수가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였다고 표현되지만, 이 표현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예수 자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7절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가 보는 구약의 율법은, 예수가 폐지한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다. 또한 같은 원리로, 신약은 구약을 폐지하지 않는다.
그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루가 24장 25-27절, 44-46절(공동번역)

오히려 율법을 포함한 구약 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지, 폐기되고 사라져야 할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바탕으로서 이스라엘의 성경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고 그분을 통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역사役事에 관한 소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거듭 책―이스라엘의 성경―을 자구대로 인용하거나 관련 제재題材들을 들여온다. '율법과 예언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 증언을 해석하고 정당화해 주는 지평이다. …… 교회가 이스라엘 성경을 자기 성경의 첫째 부분으로 삼은 것은 강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성경의 문서들은 이론의 여지 없는 계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수 선포에 범주적 전달 가능성, 설득력,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 문서들을 되잡았다. 신약성경 문서들이 이스라엘 성경에 터하여 쓰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성경 독해의 해석학적 단초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성경(또는 그냥 구약성경)의 빛 안에서 읽혀야 한다. 자주 인용되는 고대 교회의 성서학자요 번역자인 히에로니무스의 말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를, '구약성경을 알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살짝 바꿔 말할 수 있겠다.
-Erich Zenger 씀,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22-23쪽[48]

물론 구약 율법 전체를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구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구약을 어떻게 수용하여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율법을 '시효가 지난' 텍스트로 보는 것은 신약 성경 본문의 자기 이해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약이 구약을 부정한다고 오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독법이다.[49]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상술했다시피 구약에서는 예수와 관련하여 예형론적으로 읽는다. 이를테면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보자.
<rowcolor=#000> 가톨릭 성경 개신교 개역개정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50]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서 52장 13절-53장 12절[51]
이 구절은 이른바 '야훼의 종'으로 불리는 이에 대한 구절로, 타인의 악행과 죄악을 짊어지고는 재판을 통하여 죽는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초월자에게 벌받은 자로 여겨지며,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예수는 바로 이 '야훼의 종'의 행적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하였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 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주장하였다.[52] 또한 예수는 나자렛에서는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4장 18-19절
라며 이사야 61장 1-2절을 칠십인역에 따라 자유롭게 인용하여,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강조했다.[53] 그 밖에도 자신이 요나의 기적을[54]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빵으로 장정 5천 명 이상을 먹인 기적에서는 출애굽기의 만나 및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을 자신에게 연관시킨다. 또한 신명기에는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명기 18장 15절
그런데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수명을 마치고 난 후, 후일담 격으로 나오는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 신명기 34장 10절

모세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보내줄 것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였는데, 정작 신명기의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시대까지 모세급 예언자는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이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과 (부자(父子) 관계로 표현되는) 매우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를 이루며, 자신을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며, 자신이 아버지와 어떤 동일함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야훼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사귀는 사람'이라는 모세급 예언자의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을 뛰어넘는 예언자임을 표현한다. 그 밖에도, 예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고, 복선이 뿌려져 있는 자라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그렇기에 구약을 예수에 대한 복선과 떡밥을 찾으며 읽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권장하는 독서법이다.

주의를 주자면, 그렇다고 해서 구약 본문의 1차적인 의미를 등한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 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씀.[55]

4.1.3. 신약 성경의 원시 그리스도론

예수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들은 '부활 체험'을 하였는데[56] 이는 선험하는 어떤 심리적인 기대와도 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57] 다음은 불어권 주석학자들의 논문 모음집[58]의 머리말과, 거기에 실린 논문 발췌이다.
자크 슐로셔(Jacques Schlosser)는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하는 체험을 어떤 수준으로 분류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를 찾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과 관련된 신약 성경의 자료들을 연구한다. ... 그는 심리학, 역사학, 문학적 지시들을 모두 수렴하면서, 역사학자가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보고하는 경우 이 지시들만으로 충분한가를 자문한다. 달리 말해, 이 체험은 주관적 체험에 속하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파스카 신심은 하느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보통 기준에 입각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파스카 신심을 말하기 위해, 종교사에서 반향을 찾을 수 있는 주변의 본보기들에서 표현을 끌어온 것인가?
슐로셔는 파스카 체험이 독특한 표시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이 체험을 보충적인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들이닥친 위기와 급변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본다. 제자들에게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게끔 하는 무엇인가가 일어났던 것일까? 슐로셔는 중요한 증언인 1코린 15,3-8을 개략적으로 살피면서 '오프테'(ophthē) 동사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어서 그는 체험의 특성이 들어 있는 추가 지시들을 수집한다.
슐로셔는 연구를 마치면서 제자들이 눈으로 본 것이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거나 또는 그것이 파스카 이전에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들로 형성된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는 그것을 "특별한 체험 ... 무엇인가 아무 이유 없이 뜻밖의 방식으로 외부에서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말한다.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 머리말 18-19쪽.
마르코는 체포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낸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여기서 '그들'은 명백히 예수의 동료들을 말한다. 의인이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고통받는 의인" 이야기에 나오는 전통 모티브라 하더라도, 이 간단한 진술을 십중팔구 당시에 일어났던 일과 일치한다. ... 광야의 예언자인 요한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예수에게 맞선 소송은 하느님 백성의 고위성직자들이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어쨌든 매우 다양한 파스카 이야기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이야기들이 증언하는 것은 제자들이 어찌할 수 없이 보이는 것 앞에서 체념했으며, 부활이 완전히 "뜻밖의 사건"[59]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 "실패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환상 곧 집단적 강박관념의 산물로서 부활을 만드는 것은 텍스트들의 분명한 방향을 거스르는 일이다."[60] ... 뮐러 자신도 인정하듯이,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의 새출발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렇게 돌변한 강력한 동기를 추정케 한다. 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는 이미 같은 말로 문제를 제기했다. 제자들의 돌변은 "만일 그 사이에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곧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다시 살아났다고 그들을 확신시켰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61]
-Jacques Schlosser. 〈환시, 무아경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 (위 책 215-217쪽)
파스카 체험은 보통의 환시들과는 달리 선행된 기대나 신앙의 결실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논문(위 책 236-237쪽)
즉 '부활 체험'은 심리적인 기대를 위해서 고통을 이겨냈다거나, 예수의 죽음을 재해석한 결과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죽었을 때 제자들은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조차 하지 않았던 뜬금없고 충격적인 사건으로서의 '부활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곧이어 원시적인 그리스도론, 곧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굳힌다.

이러한 원시적인 그리스도론은, 공관 복음서가 아직 작성되지 않았던 1세대 교회에서도 이미 확인이 되고 있다. 가령 필립비서에서는 예수가 '선재하는 하느님'이자 '사람이 되신 분'으로 고백되고 있었다.
6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
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
7ἀλλ'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
καὶ σχήματι εὑρεθεὶς ὡς ἄνθρωπος
8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γενόμενος ὑπήκο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θανάτου δὲ σταυροῦ.
9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ῷ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
10ἵνα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ἐπουρανίων καὶ ἐπιγείων καὶ καταχθονίων
11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 ὅτι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가톨릭 새번역]
6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개신교 새번역]
6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필립비서 2장 13절-53장 12절[62]
물론 이는 후대의 세계 공의회들처럼 헬라스 철학의 용어[63]를 사용한 삼위일체론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초기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위치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위의 필립비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나 사람의 모습을 취한' 예수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선포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유다인들이 피조물에게는 결코 쓰지도 않았고, 써서도 안 되는 표현이었다. 또한 이 찬가는 바울로가 창작한 것도 아니며, 전해 받은 찬가를 바울로가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다계 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전례적 기법의 운율을 가진 찬가이다. ... 찬가의 어휘는 바오로의 것이 아니다. 특히 예수의 하강에서 상승으로 이어지는 사고의 움직임은 "하강했다가 승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높여진"(사도 2,33; 5,31) 예수에 대한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도식에 근거하고 있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t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11-312쪽

공관 복음서 전에 작성된 바울로 친서인 고린토 1서에서도 예수에게 예사롭지 않은 고백을 한다.
ἀλλ' ἡμῖν _εἷς θεὸς ὁ πατὴρ_ ἐξ οὗ τὰ πάντα καὶ ἡμεῖς εἰς αὐτόν,
καὶ _εἷς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_ δι' οὗ τὰ πάντα καὶ ἡμεῖς δι' αὐτοῦ.[64]
[가톨릭 새번역]
우리에게는 _하느님 아버지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_주님(kyrios)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개신교 새번역]
그러나 우리에게는 _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_한 분(heis) 주님(kyrios)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_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고린토 1서 8장 6절

물론 주님(Kyrios)이라는 말 자체는 그냥 높은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유일한 주님'이라는 표현은 1세기 유다인들이 하느님 외에게는 쓰지도 않고, 써서도 안 되는 표현이었다, "주님은 X 한 분이 계실 뿐"이라는 말에서 X에 들어갈 말이 뭐냐고 물으면, AD 1세기 유다인들은 당연히 '하느님'이라 답변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1세대 교회가 예수를 유다인 나름의 표현 방식을 통해 하느님의 위치로 설명한 것은 분명하다.[65]

또한 일견 사소해 보일지라도 고린토 1서 8장 6절이 예수를 "유일한 주님(heis kyrios)"으로 표현하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성서에서 희랍어 heis(유일한)나 monos(홀로)는 하느님께 주로 부여되는 표현이다.(마태 23,8~9; 로마 3,30; 요한 8,41). "들어라 이스라엘" 기도에서 고백하듯 하느님은 유일하시다. 한편 1코린 8,6에서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는 하느님과 주님에게 공히 적용된다. 더욱이 이 구절은 어떤 다른 신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유일하신 분(4절)만이 존재한다는 선언 다음에 나타난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t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1쪽
이런 표현들은 "1우시아(본질) 3휘포스타시스(위격)의 하느님", "1휘포스타시스(위격) 2우시아(본질)의 그리스도"라는 이후 교부 신학의 철학적 설명은 아니지만, 1세기 유다인이 하느님에게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이미 1세대 유다계 교회에서 예수에게 적용된 것이다.[66] 이들 1세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위치로 고백한 것은 "유다 표징세계의 근본 원칙에 모순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귀결되는 필연적인 '확장'이자 '완결'이었다."[67] 하느님의 오른쪽에 좌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고백한 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유다인들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다이즘의 유일신주의를 저버린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킨다는 의식을 가졌다."[68]

4.2. 이슬람의 관점에서 본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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ٱلْمَسِيحُ عِيسَى ٱبْنُ مَرْيَمَ رَسُولُ ٱللهِ وَكَلِمَتُهُۥٓ أَلْقَىٰهَآ إِلَىٰ مَرْيَمَ وَرُوحٌۭ مِّنْهُ
Al-masīḥu[69]ʿīsā[70]ub'nu[71]maryama[72]rasūlu[73]l-lahi[74]wakalimatuhu[75]alqāhā[76]ilā[77]maryama[78]warūḥun[79]min'hu[80]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노라 (최영길 번역)
Christ Jesus the son of Mary was (no more than) a messenger of Allah, and His Word, which He bestowed on Mary, and a spirit proceeding from Him(Yusuf Ali 번역)
쿠란 4,171[81]

이슬람에서의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 예수(المسيح عيسى ابن مريم / al-masīḥ ʿĪsā ibn Maryam, 알마시흐 이사 이븐마르얌)'로 불리며, 24번째(마지막 예언자 이전 최후)의 신성을 가지지 않은, 하나님(알라)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82] 인간인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되어 공경받는다.

이슬람이 그리스도교와 적대한다는 이미지 때문에 이슬람에서 예수를 나쁘게 볼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매우 중요하고 공경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슬라모포비아를 부추기려는 일부 목사들이 이런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퍼트리는 경우도 있으며, 사실 아무리 공경한다고 해도 예수를 "하느님이 아닌, 그저 위대한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교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4.2.1. 그리스도교와의 차이점

이슬람에서 예수는 모세, 무함마드와 같이 알라(하나님)가 인류에 내린 예언자 중 하나이다. 중세시대에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기독교 문화의 유럽과 이슬라람 문화의 중동이 서로 싸운 십자군 전쟁의 사례와, 현대에도 주로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과 미국 지역에 대하여 이슬람 문화권인 중동에서 엄청나게 적대시한다는 점, 나아가 이슬람이 도대체 어떤 종교인지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이슬람이 그리스도교의 적이니 예수를 싫어할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뿌리가 같다. 기본적인 연대기와 행적, 기적 등은 그리스도교와 같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그리스도교와의 시각 차가 있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다른 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다는 점. 이슬람에 의하면 하나님에게는 도 아들도 없고 딸도 없다고 한다.[83]

우선 이슬람에서는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로, 무한히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는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알라) 이외에 그 누구도 신성을 가지지 못한다. 무함마드나 예수가 인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예언자인 건 맞지만 그들은 모두와 같이 생로병사가 있는 인간이며,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것은 엄연히 금지되며 무함마드 본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도 아들도 없이 홀로 계신 분이다. 즉, 예언자건 누구건 간에 아들이란 있을 수 없다. 즉 삼위일체론을 인정하지 않는다.[84]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흔히 "무슬림은 '예수 말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다'고 말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꾸란의 원문 자체가 모호하고 학자들마다 해설이 갈린다. 우선, 꾸란에서 십자가 사건을 언급한 유일한 경우인 4,157-158의 여러 번역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57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다라고 그들이 주장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 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의심하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측을 할 뿐 그를 살해하지 아니했노라 158하나님께서 그를 오르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라 (최영길 역)[85]
157And [for] their saying, "Indeed, we have killed the Messiah, Jesus, the son of Mary, the messenger of Allah." And they did not kill him, nor did they crucify him; but [another] was made to resemble him to them. And indeed, those who differ over it are in doubt about it. They have no knowledge of it except the following of assumption. And they did not kill him, for certain. 158Rather, Allah raised him to Himself. And ever is Allah Exalted in Might and Wise. (Sahih International)
157And because of their saying: We slew the Messiah, Jesus son of Mary, Allah's messenger - they slew him not nor crucified him, but it appeared so unto them; and lo! those who disagree concerning it are in doubt thereof; they have no knowledge thereof save pursuit of a conjecture; they slew him not for certain. 158But Allah took him up unto Himself. Allah was ever Mighty, Wise. (Pickthall)
157 That they said (in boast), "We killed Christ Jesus the son of Mary, the Messenger of Allah";- but they killed him not, nor crucified him, but so it was made to appear to them, and those who differ therein are full of doubts, with no (certain) knowledge, but only conjecture to follow, for of a surety they killed him not:- 158Nay, Allah raised him up unto Himself; and Allah is Exalted in Power, Wise;-(Yusuf Ali)
157And their saying: Surely we have killed the Messiah, Isa son of Marium, the messenger of Allah; and they did not kill him nor did they crucify him, but it appeared to them so (like Isa) and most surely those who differ therein are only in a doubt about it; they have no knowledge respecting it, but only follow a conjecture, and they killed him not for sure. 158Nay! Allah took him up to Himself; and Allah is Mighty, Wise.(Shakir)
157and their statement that they murdered Jesus, son of Mary, the Messenger of God, when, in fact, they could not have murdered him or crucified him. They, in fact, murdered someone else by mistake. Even those who disputed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Jesus was murdered) did not have a shred of evidence. All that they knew about it was mere conjecture. They certainly could not have murdered Jesus. 158God raised him up to Himself. God is Majestic and All-wise.(Muhammad Sarwar)
157 And because of their saying (in boast), "We killed Messiah 'Iesa (Jesus), son of Maryam (Mary), the Messenger of Allah," - but they killed him not, nor crucified him, but the resemblance of 'Iesa (Jesus) was put over another man (and they killed that man), and those who differ therein are full of doubts. They have no (certain) knowledge, they follow nothing but conjecture. For surely; they killed him not [i.e. 'Iesa (Jesus), son of Maryam (Mary) ]:158But Allah raised him ['Iesa (Jesus)] up (with his body and soul) unto Himself (and he is in the heavens). And Allah is Ever All­Powerful, All­Wise.(Mohsin Khan)
157and for their saying, 'We slew the Messiah, Jesus son of Mary, the Messenger of God' ㅡ yet they did not slay him, neither crucified him, only a likeness of that was shown to them. Those who are at variance concerning him surely are in doubt regarding him; they have no knowledge of him, except the following of surmise; and they slew him not of a certainty ㅡ no indeed; 158God raised him up to Him; God is All-mighty, All-wise.(Arberry)

이 구절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유대인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일 뿐,
ㄱ.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죽었는지 여부
ㄴ. 예수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이 대신 죽었는지 여부[86]
는 말하지 않는다. 특히 이 구절의 문맥이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대속 교의와는 상관이 없이, 유대인들의 범법 행위를 비판하는 맥락이라는 점에서 해석이 더 모호해진다. 다음은 이 구절에 대한 해석 후보들이다.[87]
  1.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죽지 않았다:
    가장 인기 있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예수는 죽지 않았고 에녹처럼 산 채로 하늘로 들어 올려졌으며[88]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89] 그러나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이미 꾸란 자체에서 예수의 죽음을 명시[90] 하거나 간접적[91]으로 언급한 구절들이 있다. 둘째, 인용된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 첫 학자는 무슬림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요한(676-749)이다. 요한은 이 구절을 반이슬람적 목적(십자가를 부정하는 무슬림들에게 현혹되지 마라)에서 해석했고, 후대의 무슬림 학자들은 반그리스도교적 목적(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사건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에서 요한의 해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즉 애초부터 이 해석은 순수한 학술적 주석이라기보다는, 목적에 끼워 맞춘 주석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이 무슬림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석인 건 분명하다. 튀르키예 국가 종무성(T.C.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
    에서는# 예수의 척추가 부서져서 죽은 것이며 알라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게 하였으며 "알라께서 그분의 관대함과 관대함으로 그들에게 주신 것을 기뻐하며 그들은 주님 옆에서 생계를 얻습니다..." (Al-i Imran 3/169-170)"의 구절에 따라서 순교자가 얻는 보상을 예수가 얻었다고 보고 있다.
B.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꾸란이 말하는 건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wa ma salabuhu)이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wa ma slulba)가 아니다. 무슬림 학자 Abdullah Yusuf Ali에 따르면, 꾸란은 단지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죽은 게 아님을 명시할 뿐이다.[92] 다른 무슬림 학자인 Mahmoud M. Ayoub 역시도, 해당 꾸란 구절이 십자가 죽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고 풀이한다. '자기네가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 예수를 죽였다'고 유대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말하는 것이며, 꾸란은 이 교만을 책망하고 있다는 것이다.[93] 이 해석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능동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지 유대인들의 음모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녀서가 아니며, 그렇기에 꾸란은 유대인'이' 죽인 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간에, 예수가 대속적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는 이슬람 해석들이 입을 모은다. 곧, 설령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대속적 죽음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쿠란에서는 총 25명의 예언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는 그 중 무함마드 직전 마지막 예언자이고 무함마드가 최종적인 예언자이다.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각 민족마다 수도 없이 많이 세상에 내보냈는데[94] 그 중 중요한 예언자가 모세, 예수, 무함마드 이렇게 셋이라고 가르친다. 실제로 무함마드가 꿈에서 모세를 만나, 하루에 몇 번 기도하는 것이 좋을지 상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슬림들 중에 종종 '이사(عيسى, ʿĪsā)'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이슬람권에서 예수를 일컫는 이름이다.

중세 한발리파 신학자였던 이븐 타이미야는 사실 그리스도인들보다 무슬림들이 예수를 더 존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예언자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가르침(이슬람)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경전을 왜곡하여 이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언자 예수의 복음서(Injil)는 이슬람교의 4대 경전 중 하나이지만, 이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언자 예수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원본' 복음서를 말한다. 무슬림들은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원본이 소실된 이후 제자들과 동시대의 다른 이들에게 변질되고 왜곡되었다고 생각한다.

중세 이슬람 역사가였던 이븐 카시르는 모세가 살던 시절에는 마술이,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의학이, 무함마드가 살던 아랍 사회에서는 시가 중시되던 사회였으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파라오의 모든 마술사들을 능가할 수 있는 마술 실력을, 예수에게는 다른 의사들을 능가하는 치유력을, 무함마드에게는 다른 시인들을 능가할 수 있는 글인 꾸란을 내려주었다는 서술을 남겼다.

종교가 아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쿠란 이슬람의 최고 선지자인 무함마드와의 급 맞추기를 위해 예수의 일대기를 묘사하는 데 엄청난 공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빼앗았지만, 가장 중요한 3명의 선지자 중 하나로서 무함마드와 거의 동급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무함마드와 예수의 격을 맞추면서도 예수의 명예나 입지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는 중동 지역에서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주류 종교로 존재해 왔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던 기성 종교로부터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도 무함마드의 입지를 높이려고 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4.2.2. 그리스도교의 영향

생전의 무함마드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다. 꾸란의 예수 관련 구절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정경 복음서와 외경 복음서 등을 의식한 흔적이 발견되며, 가령 꾸란 3장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마리아와 가지는 인간관계, 마리아의 어린 시절은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꾸란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7세기 초 저작물인 차명-마태오 복음을 연상시키며, 예수가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었다는 꾸란 3,49의 이야기는 외경인 토마 유년기 복음서에 나온다. 나병 환자를 살리고 눈먼 이를 보게 했다는 꾸란 속 기적 묘사는 당연 정경 복음서에도 나온다. 곧 어떤 식으로든 아라비아의 (그것도 풍부한 외경 전승을 간직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때 거상이던 무함마드가 접했음은 분명하다.

이 공동체로는 네스토리우스교, 아리우스주의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되지만 확실하진 않다.

가장 널리 알려진 후보는 네스토리우스교이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예수 안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엄격히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제도 교회의 핍박으로 동쪽으로 쭉 도피한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은 파르티아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상할 무렵 중요 도시에 발판을 마련하고 아랍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학교수도원이 결합된 제도로서 흩어져 있던 네스토리우스 신자들에게 어려운 환경에도 생존할 수 있는 지식과 신앙심을 부여하고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

만약 정말로 이슬람네스토리우스교의 예수 이해가 반영된 것이라면, 무함마드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시리아에 무역을 하러 가던 중 어느 늙은 수도자에게서 환영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일화에서의 수도자가 네스토리우스교의 수도자일 수도 있게 된다. 또한 무함마드가 히라산 동굴에서 첫 번째 계시를 받은 이후 찾아간 사람인 '와라카 빈나우팔(ورقه بن نوفل)'은 그리스도인이었다.[95] 와라카(ورقه, 아랍어로 '종이')라는 이름을 보면 그리스도교 교리에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와 신을 분리해서 본 아리우스파유니테리언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반면 단성론과는 상극이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의 박해가 극심한 지금까지도 비칼케돈 합성론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이다. 반면 카르타고는 단성론이 번성하던 이집트시리아보다 무슬림에게 늦게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96] 바로 카르타고가 위치한 이프리키야가 도나투스파[97]의 집산지였던 데다 반달 왕국의 영향으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 및 아타나시우스파 사이의 긴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 VS 정통 칼케돈 교리와 아리우스파가 난립하던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거 동로마 제국 영토 중에서 가장 빠른 개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98]

5. 생애

개요문에서 앞서 밝혔듯, 예수는 공생애 동안 종말론적 예언자로 활동했다.
most participants in the third quest would agree that Jesus was, at the very least, an eschatological prophet proclaiming the imminent coming of God's definitive rule and kingdom, a rule and kingdom made present even now in Jesus' authoritative teaching and mighty deeds of healing.
[대부분의 The Third Quest[99] 기여자들은 이렇게 동의한다: 최소한 예수는 종말론적 예언자이다. 하느님의 결정적 다스림 및 나라의 임박한 내림(來臨), 그리고 그 다스림 및 나라가 이제 그의 권위적 가르침과 강력한 치유 행위들 안에서 현재화됨을 예수는 선포하였다.]
-The Present State of the 'Thir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Loss and Gain, John P. MEIER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 악마 퇴치자 또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100]으로 칭해졌으며, 이로 인해 불어난 그의 세력을 못마땅히 여긴 이들에 의해 AD 30년 과월절 무렵[101] 신성 모독 혐의로 유대인 최고 의회에 사형을 구형받고 로마 공권력에 의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이 집행되어 골고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102]하였으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Ἰησοῦς Χρῑστός Υἱός Θεοῦ)라는 제자들의 선포(Kerygma)가 지중해 세계를 진동시킴으로써 교회사가 시작되었다.

곧, 우리는 예수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Jew who proclaimed the present yet future kingdom,
현존하지만 미래적인 나라를 선포한 유다인이다.

who was also an itinerant prophet and miracle worker in the guise of Elijah,
그는 엘리야처럼 유랑 예언자이자 기적가였으며,

who was also a teacher and interpreter of the Mosaic Law,
모세 율법의 교사이자 해석자였고

who was also a charismatic leader who called disciples to follow him at great price,
큰 대가를 치러서라도 자신을 따르도록 제자들을 부른 카리스마적 리더였고

who was also a religious personage whose perceived messianic claims wound up getting him crucified by the Roman prefect,
그의 메시아적 주장들 때문에 로마 총독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 종교적 유명 인사이며

in the end, a crucified religious figure who was soon proclaimed by his followers as risen from the dead and Lord of all.
마지막엔, 십자가에 못 박힌 종교적 인물이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죽은 이들로부터 일으켜진 자'이자 '모든 이의 주님'으로 선포되었다.
The Present State of the 'Thir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Loss and Gain, John P. MEIER

5.1. 일러두기

역사적 예수, 곧 역사 비평적 방법론의 관점에서 본 예수의 생애에 대해 작성하였다.

본 문서의 서술이 예수의 역사적 행적을 완전히 재구성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 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자의 생각과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예수에게 투영하는 것이므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103]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연구자들 내에서도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은 있기에 불완전하게나마 역사적 예수를 논할 수 있다. 또한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이 서방 그리스도교의 역사 비평적 성서 주석학과 상당히 많은 개념이 겹치기에 교계에서 가르치는 예수와 역사적 예수의 차이도 21세기 기준으로는 상당히 흐릿해져 있다. 개신교 쪽은 교단 성격마다 제각각인 감은 있으나, 소수 급진파 신학자나 교단의 일탈이라 말할 단계는 옛날에 지났다. 따라서 역사 비평적 관점의 연구 성과가 잘 반영되어 있다면 굳이 '역사적 예수'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이 문서를 읽을 때는 이를 감안해야 하며, 기여자들도 이 점들을 고려해서 작성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 문서 참고.

5.1.1. 사료로서의 복음서

고대의 많은 역사서들이 그렇듯이, 복음서 역시도 사건을 있는 그대로 녹음/녹화한 기록이 아니며, 그렇기에 사료 비평의 대상에 포함된다. 특히 교회는 예수가 부활하였으며 교회와 함께하고 현존한다고 믿었기에, '지상에서 활동하신 과거의 예수'와 '부활하신 지금의 예수'가 복음서에 혼재되어 있다.

그런데 동시에, 각 복음서는 교회에서 각자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듯이 초대 교회 역시도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였고, 예수는 '거짓 형제'를 식별할 기준이었다. 따라서 4복음서는 '거짓 형제'를 경계하고 예수를 기준 삼아 일치하려 한 초대 교회의 검증 과정을 통과한 기록이기도 하다.

종합하자면,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의 다음 비유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예수의 삶에서 유래한 이야기들을 서술함으로써 역사상 실제로 일어난 사실들을 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이 점은 특히 루카 복음 1장 1-4절에 분명히 드러난다). ...... 그것은 역사적 예수를 그대로 찍은 사진이라기보다는 그분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이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us Im Spiegel der vier Evangelien, 김병학 옮김, 분도출판사, 2009, pp.504-509.
분명히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사진이 아니며, 그보다는 각 저자가 자신의 화풍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거짓 형제'들을 경계하던 초대 교회 공동체들은 유다풍 그림, 거친 펜선 그림, 희랍풍 그림, 빛과 어둠의 미장센이 가득한 그림이 자신이 증언하는 예수의 모습과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 4장의 그림을 (물론 사진이 아님을 전제하면서도) 사료로 삼아 예수의 모습을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5.2. 탄생 배경

예수의 조상이나 가계는 역사적으로는 불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에 귀족이나 제사장 출신도 아닌 서민의 집안에서 가계를 기록하는 경우는 없었고 대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까운 조상 정도의 계보나 자신이 어느 지파 소속인지만을 기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경 기록에서 기적이나 신비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본다면, 로마 제국의 사실상 식민지인 이스라엘 왕국[104]의, 북부 지역인 갈릴래아 지방의, 촌락 나자렛에서 목수 요셉성모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파에 대해서는 바오로의 서간에서 "유다 지파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서술되어 있다. 바오로가 유대인이기에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라는 것만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증거로는 상당히 빈약하다. 대다수의 역사적 예수론에서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을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인 결과 "신학적 진술의 역사화"로서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105]

"신학적 진술의 역사화"이론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우선, 다윗의 자손이라는 조건이 메시아로 인정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문제를 제시한다. 가령 2세기 초 바 코흐바(Bar Kochba, Simon ben Kosibah)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음에도 랍비 아키바 등에 의해 메시아적 인물로 추앙받았다. 아울러 주의 형제 야고보 등 초기 교회에서 알려진 예수의 친족들이 다윗 자손이라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 묵인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유대인들이 사생아라는 비난은 가했을지언정 다윗 자손이라는 주장에 대해 논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다윗 혈통이 전적으로 꾸며진 것이라고 본다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지적한다.

또한 신약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바오로의 서신에서도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106]하며, 제일 이른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당당하게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주장한다는 점 역시 근거로 지목된다.[107]

어쨌건 성경에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108] 루가의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나자렛의 요셉에게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 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구세주의 동정녀 출생 신화 부분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주장된다.[109]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거슬러가고, 루카 복음서는 아담과 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서술한 것이며, 루카 복음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모든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두 복음서 모두 다윗의 후손인 나자렛의 요셉성모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으며, 예수는 그때 출생하여 나자렛에서 자랐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관념을 적용한 서술. 마태오 복음서에는 나자렛에서 살던 마리아-요셉 부부가 왜 뜬금없이 베들레헴에 있었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지만 루카 복음서는 호적 조사 때문에 잠시 간 것이라고 한다. 단 역사적으로는 어느 시점의 호구 조사인지 불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메시아가 태어날 수 있는 지역임을 강조하기 위해 2장 6절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라는 미가서 5장 1절, 사무엘하 5장 2절을 섞은 인용을 하고 있다.

설명하자면, 당시 유대 땅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왕족, 귀족의 후예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남유다 지역에 몰려서 살았는데,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귀족, 왕족 출신들도 내려와서 같이 살게 되면서 하나의 타운을 형성한다. 그 타운은 크게 도시들의 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크게 예루살렘, 여리고, 베들레헴 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 필자는 위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베들레헴도 과거에 왕족들이 타운을 형성했던 고을이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덧붙이려는 의도로 헤로데 대왕과 제사장들의 대화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역사적 예수론에서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예수 탄생 서술은, 실제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로 해석된다. 예수가 나자렛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팩트이기 때문에,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구약 성경 해석에 끼워 맞추기 위해 어떻게든 구약 성경상의 근거를 붙이다 보니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 서술되었다.

5.3.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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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는 목자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헤로데 대왕 통치 시절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고,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호구 조사를 할 때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110] 하지만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이 된 건 기원후 6년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기원후 1년은 물론 기원전 4년에도 호적 조사는 없었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첫 호구 조사라는 기록을 따라도, 기원후 6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 로마 기록을 대입하면 좀 더 아스트랄해진다. 로마 제국의 경우는 인구 조사관이 따로 있어서 각지의 인구를 조사한 통계를 남기는 경우인데, 기록에 의거하면 내전 등의 요인으로 해서 켄소르(Censor), 즉 조사관이 인구 조사를 한 것이 기원전 8년과 기원후 14년으로 기록된다. 달리 말해서, 기원후 6년의 조사 역시 불분명하며, 적어도 경전 기록대로 하여 황제가 지시한 호구 조사나 공식 조사는 아니거나 혹은 애초에 그조차 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탄생기를 몰랐다는 것이 확실하며, 예수의 탄생기는 복음서 저자들이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반영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상 깊게 기억하는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이야기. 마태오 복음서만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지만, 루카 복음서를 신뢰하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처음 온 사람들은 당대에는 그지없이 가난한 이들인 목자들이었다.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이 바친 세 보물인 황금, 유향, 몰약은 현대 신학에서는 세속의 왕권, 종교적 권력,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금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부의 상징이며, 유향은 당시 종교적 의례를 위한 필수품이었으며, 몰약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장례 때 죽은 이의 유해를 수습할 때 바르는 것이었다. 특히 몰약은 장례식 용품을 갓난아기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론 꽤나 황당하지만, 신학적 의미를 고려하면 밑에 서술하듯 그리스도교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예수의 부활임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루카 복음서에서 목자들이 예수 탄생을 처음 경배한 것은 루카 복음서의 "예수는 세상에서 제일 미천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목자는 당시부터 이미 극히 가난하고 별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재산을 지키는 막노동으로서 매우 낮은 직업으로 취급되었기 때문. 루카의 기록에서 목자를 예수 탄생을 처음 경배하는 이들로 설정된 것은 신학적 의미가 크다.

흔히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알려져 있지만, "예수의 실질적인 탄생일에 관하여 구약 전승과 신약 성서에는 기록된 바가 없고,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의 날짜나 교회에서 성탄의 의식(儀式)을 실제로 시작한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2세기 말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는 5월 20일의 특별한 축일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나 4세기 말까지는 기념일의 의식이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336년, 성탄 축일을 12월 25일로 지키는 관습이 서방 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로마인들의 이교적인 국가 축제일이었던 '무적의 태양의 탄신일'(Natale Solis Invicti)을 그리스도교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는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부터 태양을 최고신으로 공경하여 태양신의 신전을 건립하고 그 건립일을 축제일로 지정했던 것이다. 이 태양신에 그리스도를 대치시켜 354년 로마의 리베리오 주교는 이날을 성탄으로 판정하여 그해 로마 축일표에 기록했고 5세기 초에 이날을 예수 성탄 축일로 정식 선포한 것이다."(가톨릭 대사전)[111]

일단 목동들이 밖에서 을 치다가 노숙할 정도였으면 겨울은 아니며, 오히려 초여름으로 추정된다. 12월 25일이란 날짜는 3세기경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인기 있던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적의 태양신)의 생일이었다. 가끔 솔 인빅투스와 미트라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미트라를 포함한 각종 태양신을 짬뽕시킨 신이 솔 인빅투스이다. 간단히 말하면 태양으로 묘사되는 모든 신적 존재를 축하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태양이 가장 고마운 시기는 역설적으로 태양이 가장 짧은 날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12] 그래서 로마인들은 12월 25일에 솔 인벡투스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축제를 벌였다. 공교롭게도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천체가 태양이었다. 태양이 지고 뜨는 것을 부활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솔 인벡투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시다"라고 말한 것. 율리우스력에서는 12월 25일이 동지, 즉 해가 뜨는 시간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에는 동짓점 절입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게 아니라, 달력에서 대충 며칠쯤에 오면 그날이 무슨 날이라고 정하자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로마 제국 시대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포용(정복)하기 위해 임의로 정한 날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소수 신자들 중에선 세속화된 크리스마스를 안 지키고 진짜 탄생일로 추정되는 날을 계산해서 기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쪽 또한 부정확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참고할 유일한 기록인 성경 자체가 저자들이 예수의 탄생 시기를 전혀 몰랐으니 정확한 날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다.

그 외에 예수가 3월 25일, 즉 춘분 무렵에 수태되었다는 신비적 이유로 9개월을 더하니 자동적으로 12월 25일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꽤 정밀한 전례학 자료 고증을 통한 설도 새로 제시되었으나, 대부분 책들이 전례학과는 거리가 먼 데서 자료를 찾다 보니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 공인되기 이전인 2세기 중엽 무렵부터 예수의 탄생에 대한 논란이 나타났으며, 3세기부터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기념했다는 설도 강조되고 있다. 12월 25일이라는 날짜에 여러 의미들이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립적일 듯하다.[113] 또한 출생 당시 양치기들이 양을 치고 있다는 기록이 루카 복음서 2장 8~20절에 나오는데, 당시의 양치기들은 겨울에 바깥일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9월이라는 기록이 신빙성이 더 있을 수 있다. 이전 판본에서는 1월 4일이라고 했는데, 이건 정교회에서 아직도 율리우스력을 쓰기 때문에 동짓날이 달라진 것이다. 태양력 문서에 보다시피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은 그레고리력 제정 당시 10일 차이가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불문하고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에는 마구간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저 말구유에 뉘었다는 서술이 있을 뿐이었다. 사실 마구간으로 간주하는 것도 서방 그리스도교권의 이야기고, 그리스를 비롯한 동방 교회권은 예수가 마을 인근의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정교회 전승에 따르면 요셉은 방이 없자 마을 인근의 동굴로 피신해서 짚을 깔고 낳았다고.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기념 성당도 그 동굴 위에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여관에 방이 없다는 이유로 마구간에서 출산한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지 않은가? 당시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부유한 가정 아니면 가축이 사는 공간과 사람이 사는 공간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유럽,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중세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집은 가축 사는 곳과 사람 사는 곳이 나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인들은 해당 성경 구절을 듣고서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114]"라는 구절을 "여관에 자리가 없어서, 아기가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말구유에 눕혔다."고 해석하는 것 자체는 현대인들 기준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 구유에서 포에 싸진 상태로 구유에 뉘어졌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하느님의 가호를 받은 존재라는 증표였다는 견해도 있으며 유대교에서 포와 구유는 하느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또한 일부 역사학자들의 학설에 따르면 그 당시 그리스 의사들은 아기 요람으로 말구유를 사용하면 아기가 편안하게 잘 수 있다고 말구유 사용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헤로데 대왕이 자신의 자녀가 아닌 엉뚱한 자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태어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두려움을 느끼고 베들레헴의 갓난아기들을 학살했다고 서술했으나,[115] 역사적 사실로 보이진 않는다. 애초에 위에서 서술하였듯 동방박사의 방문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기 때문. 굳이 따지자면, 인구 조사 자료를 토대로 추산하면 약 20명의 아이를 죽였을 거라 추산할 수 있긴 하다. 현대 신학에서, 헤로데 대왕의 유아 학살 부분은 구약 성경에서 출애굽기모세 신화를 모티프로 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해석하는 메타포로서 서술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한편, 유대교의 경전인 '(예루살렘) 탈무드'에는 예수 탄생 시기에 '판델라'라는 로마의 군인의 간통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해당 사건에서 태어난 아기를 예수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16][117][118]. 다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탈무드의 속보성이 오히려 복음서보다도 늦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탈무드 자체가 복음서의 처녀 수태 설화의 영향으로 예수의 사생아설을 주장한다는 반박도 존재한다.

한편, 처녀 수태에 신화는 복음서보다 속보성이 빠른 아테네 신화나 그리스 신화(오르페우스, 디오니소스[119], 페르세포네, 페르세우스[120])에 이미 존재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예수 탄생 신화가 고대 신화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보는 주장도 존재하며[121][122]. 이러한 주장[123]에서는 처녀 수태 및 부활 신화까지도 예수와 매우 유사한 신화가 고대 신화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주로 오시리스[124]의 부활 신화나 사자의 서의 내용을 그 대상으로 꼽는다[125].

그러나 이에 대해 성서 주석학[126]에서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철저히 비헬라스적인 유대인이었다며 전술된 주장들을 일축한다. 처녀 수태를 비롯한 예수 관련 신화들은 그리스 신화와 무관하게 철저하게 유대교적 맥락에서 생성되었다고 본다. 앞서 언급된 오르페우스 신화나 디오니소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 모두 예수 신화의 처녀 수태와 플롯도 전개도 전혀 다르며[127], 예수 신화의 문맥이나 인용문은 전부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성경의 저자들이 재해석하거나 짜깁기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지적한다.[128][129] 가령 마태오 복음의 경우, 서로 다르게 전승된 공생활-죽음-부활의 내러티브를 탄생 내러티브와 결합하고[130] 여기에 구약 인용구를 덧붙이는 모습을 보인다.[131]

한편, 마태오 1장 23절의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공동번역) 는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이 '젊은 여인'[132]으로 쓴 것과는 달리 '동정녀'라 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마태오가 칠십인역에 따라 인용했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은 이 '젊은 여인'을 '동정녀'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기원전 2세기(또는, 그 이전)부터 유다교 내의 어떤 전통이, 앞으로 일어나리라 고대되는 이 특이한 탄생을 동정녀 모친에게서 나오는 메시아의 탄생으로 이해했음을 뜻한다. 마태 1,23에 이어서 고대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신탁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적용시켰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이사야서 7장 14절 주석)[133]

5.4. 공생애 이전의 삶

예수의 오랜 나자렛 시절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자세한 것을 모른다. 복음서는 침묵하고 만다. 어린 예수를 마리아가 길렀고, 그다음 요셉이 토라로 안내해야 했다. 회당에서 예수는 성서 봉독과 그 해석 설교를 들었다. 평소에는 직업을 구사했다. 예수의 직업과 요셉의 직업에 "장인"τέκτων이라는―흔히들 "목수"라고 번역하는―같은 낱말이 쓰인다.[134] ...... 물론 장인을 목수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을 너무 좁혀 놓는 것이다. 장인은 나무만이 아니라 돌도 다룰 줄 알았고 따라서 석수이기도 했다(참조: LXX 2열왕 5,11). 파피루스 문서의 그리스어에 장인들τέκτονες은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도록 되어 있다: 수문 건설, 양수차 정비, 문 짜고 집 짓기, 안장 수선 등.[135] 그들의 활동분야는 다방면을 아우른다. 더욱이 이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이것이 확인되는데, 한 장인을 두고 "그 손이 온갖 예술작품을 이루더라"는 말이 나온다.[136]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101-102쪽.

예수의 직업은 성경에서 '목수의 아들 또는 목수'로 등장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기 쉬운 가구 제작자보다는 활동 범위가 넓은 직업이다. 그리스어 텍톤(τέκτων)은 목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석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장인'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 이러한 직업상의 영향인지, 성경 속의 예수는 건설의 비유를 여럿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마르코의 복음서 14장 58절(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의 복음서 2장 19절(공동번역)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7장 24-27절(공동번역)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10-11절(공동번역)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절(공동번역)

기존 4대 복음서는 인간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보여주기 위해 쓰인 것이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그나마 예수를 가장 인간적으로 조명한 복음서는 루가의 복음서이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친척 관계로 묘사하며, 세례자 요한 잉태 여섯째 달에 예수가 잉태되었다고 말한다. 또 예수가 12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담을 나눴으며[137]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38] 위경인 베드로 복음 등에서는 어린 시절의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으나, 위경으로 지정되어서 가십거리 이상은 되지 못하는 듯.

어쨌든 예수가 태어나고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치를 날이 차자 요셉 부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물을 바쳤는데, 그날 성전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와 있었다. 시므온은 '메시아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마침 시므온은 마음이 동하여 성전에 나왔는데 마침 그때 예식을 치르고 나오는 예수를 만나게 된다. 시므온은 단번에 아기를 알아보고는 아기를 안고 '주인이시여, 이제 약속대로 저를 쉬게 해 주시는 군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찬송한 후, 요셉 부부를 축복하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아이는 수많은 이들을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할 것이며, 비난의 표적이 되기 위해 부름받았다. 그때 당신은 마음 아프겠지만 그것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당신이 대표하는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생략하지만 공통적으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세례자 요한은 자기 다음에 나타날 구세주를 예견하기 위한 존재였기 때문이고, 예수가 그 구원자였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지만, 복음서 본문에서도 세례자 요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등의 내용을 보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형과 더불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두 가지 가장 믿을 만한 정보로 여겨지는 일이 많으며, 역사적 예수 연구의 출발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30살 즈음까지 목수 일을 했던 것은, 세상에 필요한 일이라면 결국 다 영혼 구원에 간접적으로라도 도움을 주는 일이므로, 사역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들도 믿음으로 했을 때에는 다 거룩한 것임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139]

5.5. 공생애

예수께서는 서른 살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는데
루가의 복음서 3장 23절 중(공동번역 성서)
예수는 모종의 이유로 세례자 요한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30살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예수의 신학 핵심은 주기도문/주님의 기도로 요약되는 신의 정의(正義) 실현과 죄의 용서였다. 이 신학은 당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던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과 다니엘서의 종말론, 에세네파의 메시아론이 혼합된 복합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흔히 오해되는 부분이지만, 예수와 바리사이의 대결을 '율법 준수의 널널함 vs 율법 준수의 엄격함'으로 봐서는 안 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5장 17-20절, 공동번역성서, 산상 수훈

가령 혼인에 대해서는 예수가 바리사이보다 훨씬 더 엄격한 해석했으며[140], 율법을 준수하며 성전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바리사이와 공통되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읽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맥락화하여 읽는 것 역시도, 유다교 내부에서 존재하던 독법이었다. 가령 마카베오기는 안식일 율법을 재맥락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따라잡은 그 군대는 맞은쪽에 진을 치고 안식일에 그들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 그러나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카베오상 2장 32-41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그렇다면 예수의 율법 해석이 가진 독특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리사이가 '깨끗함'을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동안 예수는 '깨끗함'을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141]
예수가 비교적 가까이 대한 바리사이들도 깨끗함과 불결함의 구분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 점에서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예수에게도 깨끗함과 불결함은 거룩함과 속됨에 비할 만한 것이었다. 예수에게 관건은 성령께 의탁하여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안에서 나오는 것, 곧 악한 말과 행동으로 불결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사람을 참으로 더럽힐 수 있는 것이다. ......
예수는 근본적인 면에서 바리사이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불결함의 원인이 어디서 발단하는지 던진 물음에서 구별된다. 예수는 오직 이 문제에서만 바리사이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러나 깨끗함과 불결함의 근본적인 차이는 엄연히 남아 있다. 차이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예수는 깨끗함을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여겼다. 예수에게 관건은 깨끗함을 지키고 부정을 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끗함을 적극적으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더러워지는 이유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깨끗함을 유지하려면 감염될 만한 불결한 것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피해야 한다. 즉 경계선을 긋고 구별할 때만으로 깨끗함을 지킬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바리사이'라는 단어는 "제한하다, 구획하다, 경계를 정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죽은 사람으로 인해 불결해지지 않으려면 시신과의 접촉을 피하고,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에게 '피하기'와 '거리 두기'가 가장 중요한 실질적인 규정이다. 반면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깨끗함을 지닌 사람은 접촉하여 불결해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전염성이 강한 깨끗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 깨끗함으로 불결한 것을 청결하게 바꿔 놓는다. 그의 깨끗함은 공격적이고 승리를 거둔 것이어서 불결함을 거뜬히 물리친다.
그러므로 예수는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칠 수 있었고, 하혈하는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져 낫게 할 수 있었으며, 죽은 이에게 손을 대어 깨어나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수는 세례 때 받은 성령으로 더러운 영들(악마들)을 몰아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당대의 믿음에 따르면 대부분의 질병은 악마의 활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악마는 (더러운) 죽은 영이기 때문이다. ...... 예수는 깨끗함이라는 원천을 내면으로, 마음으로 옮겨 놓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윤리화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주술적인 영향에 대한 두려움을 바르고 단정하게 살아가라는 경고로 대체한 계몽가가 아니다. ...... 이렇게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깨끗함'을 적극적이고 전투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30-133쪽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오해는 바리사이에 관한 것이다. 신약에서는 바리사이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며 비판하지만, 신약의 서술을 신앙으로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바리사이를 절대악처럼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리사이 신학의 긍정적 면모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인정되며, Martin Ebner, Stefan Schreiber 등의 공저 《신약성경 개론》에서는 바리사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리사이(Pharisäer): 초기 유다교 평신도 운동의 주창자들로서, 통상 사제들만이 준수하는 정결 규정들의 보편화 및 민주화와 일상에서 그것들의 실행을 통해, 이스라엘을 거룩하고 사제다운 백성으로 만들고자 했음.
-《신약성경 개론》, Martin Ebner/Stefan Schreiber(Hrsg.), 이종한 번역. 902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슈베르트는 바리사이 율법해석의 민주적 원칙을 거론한다.(Die jüdischen Religionsparteien im Zeitalter Jesu. In: Kurt Schubert (Hg.), Der historische Jesus und der Christus unseres Glaubens.(Wien 1962) ...... 진지한 종교성으로, 성덕의 추구로, 공중과 동떨어지지 않은 생활로 그들은 광범한 민중 속에서 큰 존경을 누리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지적하기를, 백성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하도 커서 기도든 제사든 예배행사 일체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한다.(Josephus, Ant. 18,15) 게다가 그들은 평신도 운동으로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처지였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특별히 매력을 발휘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80-82쪽.
또 하나의 오해는, 예수가 종교적 개인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그리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이사야 62장 5절) 예수의 활동은 언제나 어디서나 '백성'을 향한 정향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개인을 향해 결단을 호소할 때도 그를 이 백성의 일원으로 바라본다. 예수의 구원 제시를 개인 치유로 이해한다면 몹시 오해가 될 것이다."(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 256-257쪽) 물론 1세기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사제들과의 긴장은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종교적 개인주의자 혹은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는 2장 17절에 시편 69,10을 인용하며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일을 옳다고 평가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142]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 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23-125쪽
품위없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과 상종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예수의 행동은 의식 변화를 부르짖는 열정적 호소, 회개의 호소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제도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 끼이게 되는데, 율법 관행인 안식일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재생시키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다.[143]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370쪽.

그렇기에, 예수의 행적이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되거나, 유대교를 완전히 뒤집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유대교는 구약 성서에서도 이미 이사야서나 다니엘서요나서 처럼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한 신학 전통 또한 가지고 있었다.[144] 예수의 성전 정화에서도 언급되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같은 식으로. 예수는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단 유대교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하는 신학의 계승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 예수가 말한 죽은 자의 부활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기원전 3세기~1세기 유대교 특유의 신학이다. 사두가이들이 예수에게 부활 교리에 관해서 시비를 거는 장면[145]이 있는데,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유대교에서는 영혼 불멸 교리를 믿지 않고 죽은 자가 묻힌 곳에 영혼도 잠든다든가, 죽을 때 영혼도 사라진다든가 하는 식의 믿음을 가졌다. 예수의 주장은 우연이건 필연이건 유대교 특유의, 일신교가 가질 수 있었던 개방성과 보편성을 계승해 갖춘 결정체였다.

이러한 예수의 행적에 대해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를 '갈릴래아의 견유'[146]라고 설명한다. 다만, 크로산은 자기 저서에서 각지의 여러 권위자들이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했지만 서로 모두 달랐다는 이야기 역시 함께 언급한다. 역사적 예수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말했듯 역사적 예수론이 해석하는 예수는 각기 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을 투영하는 것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데, 크로산을 비롯한 예수 세미나가 바로 이러한 케이스에 부합한다. Gred Theißen는 북미의 예수 연구 분위기를 (예수 세미나를 겨냥하여) '캘리포니아의 예수'라고 비꼬았다.[147][148]

복음서들 중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카 복음서 셋과 요한의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행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셋이 다소 비슷한 서술을 보이기 때문에 이 셋은 '공관 복음서'라고 부른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초반부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파하고 후반부에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과 시골 마을을 3번에 걸쳐 왔다 갔다 한다. 이 부분을 역사성을 반영해서 해석하면 공관 복음의 서술을 따르면 예수의 활동 시기는 불과 1년 이내인데 요한 복음서를 따르면 3년이 된다. 어디가 더 믿을 만한 서술인지는 진실은 저 너머에. 공관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중 어디가 어느 부분에서 더 역사성을 담고 있는가는 근대 이후 신학에서는 오랜 논쟁거리다. 일단 공관 복음서의 저술 연대가 요한복음서보다 앞선다는 것에는 성서 주석학의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더 빠른 저술이 더 높은 역사적 정확성을 지녔으리라는 전제가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149] 공관 복음서 역시 저자들이 그리스도론적 케뤼그마에 집중한 글인 데다가, 일단 상식적으로도 예수가 1년 이하로 활동했다고 가정하기는 너무 짧다. 일단 전통적인 독법에선 루카복음서에서 예수가 30살 즘에 공생애를 시작했단 구절과 요한복음서의 서술을 결합해서 예수가 33살을 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5.6. 죽음과 부활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AD 55년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3-8절, 공동번역성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같은 책 15장 17절)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 신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부활절을 가장 중요한 축일이자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유월절(=과월절=파스카 축일)을 맞아 예루살렘에 내려가 있을 때 목요일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고 금요일 새벽에 잡혀서 금요일 낮 3시쯤에 죽었다고 기록한다.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적 행적은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최후의 만찬은 오히려 수많은 신학자와 역사가들에게 실제 있었던 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후술할 부활 사건도 여러 해석이 존재하는데 최후의 만찬에 대해선 해석이 거의 갈리지 않는다. 예수가 분위기를 읽은 것이건 누군가에게 귀띔을 받은 것이던 예수는 자신이 잡혀 죽을 것이며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직감했고,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나눠주며 식사 때마다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의 뜻을 이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

만찬 이후 예수는 유대인, 대제사장을 포함한 반대자들에게 잡혀[150] 유대 총독 본티오 빌라도에게 재판에 회부되고, 반란군에게 내려지는 극형인 십자가형의 판결이 내려져 죽게 된다.

성경에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판결을 망설이거나 심지어 사형을 막으려 했으나 군중의 여론이 두려워 죽이게 된 듯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한 통치를 가했고, 심지어 과잉 진압으로 유대인들의 불만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해임된 사람이다. 당시 유대는 시리아 속주에 포함된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속주의 총독과는 다르게 사법권이 제한되는 자리다. 빌라도는 어디까지나 법적인 총독인 시리아 속주의 총독을 대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시리아 속주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해서 사실 집행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즉 원래대로라면 십자가형 같은 형벌은 형식적이라도 시리아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는 일관적으로 빌라도는 예수를 체포 바로 다음 날에 죽였다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총독 허가 없이 빌라도 선에서 끝내버렸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망설이기는커녕 규정도 무시하고 빠르게 처리한 셈. 복음서의 묘사처럼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을 가능성은 낮다. 차라리 '위험 분자에 해당되긴 하지만 비교적 위험성이 낮은 잡범'으로 간주하고 속전속결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망설였다는 구절은 '예수는 죄가 없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교로마 제국에 대립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썼을 가능성이 높다. 복음서가 쓰이던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숭배한 예수가 반란 혐의로 잡혀 사형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범죄자를 숭배하는 잠재적 반란 분자로 간주되어 잡혀 죽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예수의 일대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무덤에 매장된 지 사흗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여[151]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준 뒤 예루살렘 동쪽의 올리브산(감람산)에서 승천했다고 한다. 세 밤이 지나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 지 사흗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 지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날째다. 즉 온종일 시신인 상태로 누워 있던 건 토요일 하루뿐이었고 48시간도 안 돼서 부활한 거다. 신자들도 많이 헷갈리는 점이다.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다음의 사건들에 동의하고 있다.
  • 십자가형에 의해 죽임을 당해서 무덤에 묻힘.[152]
  • 빈 무덤의 발견.[153]
  •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늘어남.
  • 추종자들이 예수가 부활했음을 선포함.

특히 예수가 잡힌 즉시 순식간에 와해되었던 제자들과 신자들이 갑자기 열렬하게 그리스도가 부활했음을 외치며 순교했다는 점에서, 실제로 예수가 부활했느냐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들이 모종의 경험을 했고 그 경험으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주석학자 Gerhard Lohfink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154] 우선, 예루살렘에 남은 여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다. 이때는 아직 예수 발현을 목격하지 않았다. 한편 갈릴래아로 도주한 베드로는 호수에서 예수 발현을 제자들 중 최초로 체험하는데[155] 이를 통해서 일종의 신앙 고백인 다음 두 구절이 유래한다:
정녕 주님은 부활하여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장 34절)[156]
그리스도께서는 ... 케파[157]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장 3-5절)
그 후 베드로 일행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예루살렘 일행의 빈 무덤 발견을 전해 듣게 되면서 극도의 종말론적 기대가 공동체를 압도한다.[158]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 강림 체험을 하면서 교회사의 시작이 된 것이다.

한편 빈 무덤에 관해서는 시체 도적설[159], 재매장설[160] 등이 소수설로서 존재하기도 한다.[161]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단순히 시체가 사라진 빈 무덤만으로는 '부활'이라는 명제하에 다시 추종자들의 신앙심이 공고해졌다 하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부랴부랴 도망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듣고 어떤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잘 맞지 않는다. 탄압이 두려워서 도망가는 판국에 빈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는 다시 결집하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162] 또한 예수의 제자이든 적대자이든 간에, 사람이 빈 무덤을 봤을 때의 통상적인 반응은 '누가 시신을 옮겼다'는 것이지 부활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서들에서도 이를 지적하는데,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1세기 유다인들은 빈 무덤을 시신 도난으로 이해했고(마태 28,11-15), 요한 복음서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비슷하게 이해했다.(요한 20,15) 결국 빈 무덤은 부활의 증명서가 아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울기 시작한다(20,11.13.15). 그녀는 처음에 단순히 예수님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한 것인데, 사실상 이것이 훨씬 더 있을 법해 보이는 반응이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영적독서를 위한 마르코 복음》, 황종렬 옮김(성요셉출판사, 1991), 337쪽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은 부활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아닙니다. 신앙을 일으키는 요인은 부활자가 이 뽑힌 증인들과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무덤은 그러고 나서―언젠가 그런 표현이 있었듯이―마치 승전 트로피처럼 부활신앙에 덧붙여져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 또는 예수의 무덤은 잘못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미 신약성서에 예수 반대자들의 시신도난설이 있는데, 사실 이런 가설이 우리 시대에까지 계속 살아 있고 심지어 근래의 예수책들에서도 다시 채택된 일조차 있지요. 결국 그분은 뽑힌 증인들 앞에 살아계신 분으로서 부활자의 증언인 것입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163] 방송 대담[164]
케뤼그마에 견주어, 이야기에서는 예수의 매장 또는 무덤의 위상이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코린토 1서 15장의 케뤼그마에서 예수 매장에 관한 언급이 예수가 참으로 죽었다는 사실의 확증이라면, 이야기에서는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이라는 승리의 기념물이 된다. 하지만 케뤼그마에 중심을 두고 있는 이야기는, 부활 신앙이 빈 무덤에 집착하지 않고 케뤼그마에, 따라서 케파와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에서 체험한 내용에 뿌리박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4), 202쪽

결국 다양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게 되는 훨씬 더 강력한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절망에 빠져서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추종자들이, 갑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모진 고문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도 불사하며, 그들이 모두 입을 모아 "예수의 부활"을 외칠 수 있을 정도의 초월적 경험이 말이다.[165]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이 언제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빈 무덤을 확인했다는 기사만 들어 있다. 그것이 사흘 뒤라는 것도 복음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라 바울 서신에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바울 서신으로 알려진 성경 중에서 성서학자들이 바울의 친서라고 동의하는 7편의 성경에서 바울은 끊임없이 예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을 증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예수 부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서부터 자기주장을 펼쳐 나가는 것이다. 지나친 표현일 수 있지만 어쩌면 바울은 부활을 자기주장을 펼쳐나가는 근거로 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부활과 관련한 바울의 말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앙적 진술로 이해해야 한다. 가장 이른 바울 서신인 고린도전서도 예수 사후 25년이 경과되고 나서 기록되었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지만 예수 추종자의 일부가 그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트 어만 저, 강창헌 번역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확실시하는 것은, 이 '제자들의 예수 부활 체험[166]'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확립에 제일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 예수의 부활 사건이 없었으면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예수는 수많은 예언자 중 하나로서 구전으로만 기억되다가 잊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한편에서는 다양한 이견과 해석이 나온다. 육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을 제자들이 나름 해석한 것이라든가,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합리화를 시킨 것이라든가. 예를 들면 존 도미니크 크로산[167]은 부정하며 부활이 육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의미의 부활이라고 본다.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체는 매장되지 않고 버려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음에도 십자가 처형자의 유골은 1967년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단 1구가 전부다. 이는 처형 후 얕은 땅에 대충 묻히거나 십자가에 방치된 채로 들짐승들에 의해 뜯어 먹혀서 찾을 잔해조차 없기 때문이다.[168][169] 더군다나 성경에도 인정하듯이 제자들은 예수가 잡힐 때 죄다 도망가서 예수의 죽음이나 매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전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파에서는 요한 복음서의 전승에 따라 사도 요한이 예수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잘 보면 알겠지만 '예수가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부활로 설명되는 무언가를 마냥 부정하기도 어렵다. 핵심 제자인 사도들이야 예수의 처형 당시 도망쳤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예수 처형 당시의 정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사도들 외의 제자 중에는 누군가 처형을 목격하고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키레네 출신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들었다는 서술[170], 안식일로 접어들 무렵 무덤에 묻혔다는 서술과, 무덤을 내준 사람의 이름 또한 4복음서에 일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또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 당시를 직접 본 제자라고 인정하는 편집 흔적이 자주 있어서 실제 사도 요한은 아니더라도 사실적인 증언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예수의 시신이 그냥 버려졌다는 설을 밀어붙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171] 제자들의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해서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는 견해 또한, 예수 사후의 사도들의 선교 이야기인 사도행전 때문에 부정된다. 예루살렘에서 선교 때 사도들이 '당신들도 다 알다시피' 라는 말을 꺼낼 정도로 많은 수의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한 전제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아니더라도 예수 사후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이들이 예수 처형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남겼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원수난사화, 곧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체 예수 텍스트이며,[172] "빈 무덤 발견 이야기는 원수난사화에 속해 있었"다.[173]

한편으로 성경에서 인정하듯 제자들은 예수가 잡히자마자 바로 튈 정도로[174] 미묘하게 약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의 부활에 회의적이었던 제자들도 더러 있었는데, 위에 서술했듯 그들이 갑자기 결집한 데에는 무언가 "사건"이 있었다는 설명이 더 합치되기 때문에 적어도 '빈 무덤'설은 거의 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형태이던 간에 그의 제자들이 다시 모이고, 그걸 부활로 해석할 강한 무언가는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계에선 예수 부활 체험이 제자들의 내면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곧 부활 체험은 제자들도 기대나 예상을 하지 않았던, 외부에서 제자들에게 뜻밖에 들이닥친 무언가라는 것이다. 스승이 부활할 거라는 기대나 죄책감 같은 내면적 요인이 부활 체험을 부른 게 아니라, 부활 체험이 제자들의 내면을 바꾼 것이다.

다음은 불어권 주석학자들의 논문 모음집[175]의 머리말과, 거기에 실린 논문 발췌이다.
자크 슐로셔(Jacques Schlosser)는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하는 체험을 어떤 수준으로 분류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를 찾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자료들을 연구한다. ... 그는 심리학, 역사학, 문학적 지시들을 모두 수렴하면서, 역사학자가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보고하는 경우 이 지시들만으로 충분한가를 자문한다. 달리 말해, 이 체험은 주관적 체험에 속하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파스카 신심은 하느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보통 기준에 입각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파스카 신심을 말하기 위해, 종교사에서 반향을 찾을 수 있는 주변의 본보기들에서 표현을 끌어온 것인가?
슐로셔는 파스카 체험이 독특한 표시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이 체험을 보충적인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들이닥친 위기와 급변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본다. 제자들에게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게끔 하는 무엇인가가 일어났던 것일까? 슐로셔는 중요한 증언인 1코린 15,3-8을 개략적으로 살피면서 '오프테'(ophthē) 동사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어서 그는 체험의 특성이 들어 있는 추가 지시들을 수집한다.
슐로셔는 연구를 마치면서 제자들이 눈으로 본 것이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거나 또는 그것이 파스카 이전에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들로 형성된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는 그것을 "특별한 체험 ... 무엇인가 아무 이유 없이 뜻밖의 방식으로 외부에서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말한다.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 머리말 18-19쪽.
마르코는 체포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낸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여기서 '그들'은 명백히 예수의 동료들을 말한다. 의인이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고통받는 의인" 이야기에 나오는 전통 모티브라 하더라도, 이 간단한 진술을 십중팔구 당시에 일어났던 일과 일치한다. ... 광야의 예언자인 요한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예수에게 맞선 소송은 하느님 백성의 고위 성직자들이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어쨌든 매우 다양한 파스카 이야기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이야기들이 증언하는 것은 제자들이 어찌할 수 없이 보이는 것 앞에서 체념했으며, 부활이 완전히 "뜻밖의 사건"[176]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 "실패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환상 곧 집단적 강박관념의 산물로서 부활을 만드는 것은 텍스트들의 분명한 방향을 거스르는 일이다."[177] ... 뮐러 자신도 인정하듯이,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의 새출발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렇게 돌변한 강력한 동기를 추정케 한다. 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는 이미 같은 말로 문제를 제기했다. 제자들의 돌변은 "만일 그 사이에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곧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다시 살아났다고 그들을 확신시켰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178]
-Jacques Schlosser. 〈환시, 무아경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 (위 책 215-217쪽)
파스카 체험은 보통의 환시들과는 달리 선행된 기대나 신앙의 결실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논문(위 책 236-237쪽)

이와 관련하여 BBC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일부 해석에서는 예수가 물리적으로 유사 부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약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점은 사실이나, 6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매달렸던 점[179]을 근거로 하여 예수는 단기적으로 의식을 잃었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사망 판정을 받은 뒤 무덤에서 기적으로 의식을 회복하는 현대 의학 관점에서 '소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180][181][182] 이러한 해석에서는, 이후 예수가 망명하였으며 망명한 예수를 후대에서 신격화하기 위해 예수가 하늘로 승천한 것으로 성경을 가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 소수 견해[183]와 전승에서는, 제자들을 찾아가 부활을 보인 후 로마 제국의 정치적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인도로 망명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러한 주장과 전승은 예수의 무덤이 인도의 카슈미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직 인도시로말라바르 가톨릭-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의 전승과 그 전승을 확대 해석한 측뿐으로, 그들의 전승을 기록한 토마스 행전[184]의 속보성은 비교적 늦은 관계로 신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되지는 않고 있다.[185]
한편, 예수가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으므로 현대 의학적으로 소생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186], 소생했더라도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신체로 인해 제자들을 찾아가 신적인 이미지를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른 연구 결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어깨가 탈구됐고, 그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동맥이 파열된 것이 직접적인 사인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부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일부 수사본들이 빈 무덤 내러티브에서 종료됨[187]을 들어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것은 신앙 고백이지만, 마르코 복음의 내부 내러티브는 부활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샤를르 페로는 "모든 것이 이미 사전에 이야기되었기 때문"에 "마르코에게 부활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르코 복음의 중심에 위치한9,1~9) 예수의 변모 이야기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태오와 루카가 마르코를 따르고 있고 2베드 1,17-18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전해진다. 요한 복음사가는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지만 온전히 그 후광 속에 남아 있다고 하겠다. ..마르코는 수난 이야기 전에 하가다적인 이야기를 나름대로 배치해야 했다. 그리하여 변모 이야기는 복음서의 중심에 위치하여 예수의 신원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수준에 알맞게 설명한다. 마르코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교리 교수 내용을 취하면서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부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보기에 마르코는 그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변모 이야기가 시나이와 관련된 예수의 신원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기의 종말론적인 신원이 교리 내용의 중심을 차지했다. 모세처럼 아니 모세 이상으로 예수는 이미 변형 내지 변모하였다(이 두 표현은 희랍어로 같은 단어이다). 그는 신적 현존의 구름에 둘러싸여 영광의 세계에 속해 있다. 사실 다른 복음서들은 다소 고풍스러운 방식으로 부활 이야기를 전하는 데 더욱 흥미가 있었고 바오로는 십자가에 집중하면서 부활하신 분과 신자들의 만남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1코린 9,1; 15,7 이하; 갈라 1,15 이하). 그러나 마르코에게 부활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미 사전에 이야기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음 전체가 부활 이야기이고 그 정점은 변모 사건이다. 이 말로써 다른 부활 이야기들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를 지칭하기 위한 영광의 언어들이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본질적인 신분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넘어서서 이미 변모 사건 안에 집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변모 이야기가 일종의 서론처럼 수난 이야기에 결부되자 변모 이야기는 부활을 예고하고 앞당겨 보여 주는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부활 사건을 통해 변모 사건 역시 올바르게 회상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리고 복음서의 다양성으로부터 우리는 초대 전승이 이미 부활 이전에 자리매김한, 형언할 수 없는 예수의 이 체험을 메아리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체험을 옳게 말하기 위해서는 부활 사건이 또한 불가결하였다(마르 9,9)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천주교 서울대교구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54-355쪽
더군다나 마르코 복음서의 종결은 나름대로 1고린 15장과 상응한다.
나아가 코린토 1서 15장의 '묻히셨다'는 마르코 복음서 16장의 무덤 장면에 상응하는 내용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코린토 1서 15장의 '케파에게 나타나셨다'는 마르코 텍스트의 현재 형태에서는 16,7의 베드로(그리고 제자들)가 부활하신 분을 뵙게 되리라는 약속과 상응한다.[188]
-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 202쪽
그리고 애초부터 마르코 복음서를 부활 반증의 근거로 말하는 것은 바울로 서간의 연대를 도외시한 주장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복음서 중에서는 연대가 가장 빠르지만, 신약의 책들 중 가장 빠른 책은 아니다. 바울로 친서는 복음서들보다 저술 연대가 빠르다고 널리 인정되며, 이미 고린토 1서 15장에서도 부활 신앙이 확인된다. 따라서 부활신앙이 복음서의 저술보다 연대상 앞선다는 것은 분명하며, 부활 신앙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예수 사망 후 12제자들이 단지 꿈 내지는 종교적인 환영 체험을 하고 이를 예수의 빈 무덤과 연관하여 예수의 부활로 해석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며[189][190][191] 이러한 시각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죽은 후 예수의 부활을 강렬하게 열망하던 중 일상 및 종교적 상황에서 환상적, 종교적 체험을 겪고 그것을 예수의 빈 무덤과 연관 지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행적이 이와 관련된 증언을 하고 있다고 본다. 베드로의 환시 및 꿈을 통한 계시, 사도 바오로의 회심 체험 등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전근대인들은 꿈이나 환시, 점술, 제비뽑기 등을 종교적인 체험이나 암시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192][193]

사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들과 십자가형을 받은 그곳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 부활을 보였으면 부활의 진실성을 통해 훨씬 더 빠르고 쉽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수 있었을 텐데, 예수가 소수의 추종자 내지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나타났기에[194] 12제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순교하게 됐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예수의 사망일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 예수가 안식일 직전 금요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월절은 항상 매월 15일 즉 만월에 시작되니까, 빌라도 재위 기간 중 유월절이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 해는 30년과 33년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죽을 때 사방이 어두웠다고 전하는데,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33년 4월 3일 금요일 저녁, 예루살렘에서 부분 월식이 일어났다는 점을 지목해서 33년을 사망년도로 간주한다. 지질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 33년 4월 3일 금요일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가 죽자 땅이 흔들렸다는 기록과 일치한다며 같은 날짜를 예수의 사망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 연구 모두, 복음서가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비유로서 서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몰몬교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후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부활했던 빈 무덤이라 추정되는 곳엔 후대에 성묘 교회가 세워졌다.

5.6.1. 성경에 따른 부활 이후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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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별개 문서가 있는 복음서의 일화·비유

6. 예수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6.1. 예수 개인의 사상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인물로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새로운, 기존 유대교의 그것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상가로서 예수가 주창한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특히 이 문서 내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역사비평적 고찰에서도 다루고 있는 것처럼 예수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와 일치하는가란 물음이 나오기까지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자명하다. 개신교 교회 등에서 특히 힘주어 다루고 있는 중심 교리가, 성경에서도 예수를 특히 주목하는(그리스도교는 '예수교'이므로 사실 예수를 특히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불성설인데) 신자들과 학자들이 볼 때 예수가 개인적으로 강조했던 가르침과 어딘가 거리가 있는 듯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종교의 창시자가 생전에 행했던 가르침과 그이의 제자 및 후대인들이 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는 많다. 불교의 육식 금지만 해도 그렇다. 석가모니 부처는 살아 생전 육식을 적잖이 행했으며, 심지어 사인도 (비록 의견이 여전히 다양하긴 하나)오늘날 돼지고기였다고 널리 알려진 '수까라 맛다와'란 음식을 보시받아 섭취한 것으로 인한, 복통과 설사를 동반한 식중독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교인이 아닌데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의 언행에 실망하여 그리스도교와 그 창시자에 회의감을 품고 있다면, 예수 자신이 실제 남겼던 행적과 그로부터 알 수 있을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원래 가르침이었고 지금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어야 할, 사랑과 하느님의 바실레이아 같은 핵심 가르침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일부의 오해와 달리 예수 개인의 사상을 다루는 것이 곧 역사적 예수라는 연구 방법론으로 기우는 것은 아닌데, 역사적 예수 자체가 신화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만 다루어지던 예수란 존재를 실제 역사의 빛 속에서 조명하기 위한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역사적 예수 방법론에는 요세푸스 등 유명한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을 포함한 성경 외적인 문헌이 필요하고 동원되나, 예수 개인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는 사복음서 내에 명명백백하게, 그것도 여러 번 반복되어 명시되어 있는 그 자신의 행적을 둘러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예수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신 그 자체 또는 신격화된 존재이지만 일단 실존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인물인 이상(먼저 실존한 뒤 그의 살아 생전 사상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가 세워졌을 것이기에) 개인으로 거듭하여 드러냈던 사상을 먼저 언급하도록 한다.

예수의 사상을 몇 문장이나 몇 키워드로 모두 요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흔히 손꼽히는 키워드는 있다. 여기서는 흔히 아가페라고 불리는 예수의 독특한 사랑론과, 하느님의 다스림Basileia[195], 이스라엘 및 메시아를 중심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살핀다.

6.1.1. 예수의 사랑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성직자와 신학자를 포함한 대다수 그리스도교의 연구자들에게 예수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많이들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한 시점부터 십자가형을 당하기까지, 즉 부활하기 전까지 그 어떤 가르침보다 사랑할 것에 대한, 사랑을 바라고 실천할 것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했다. 예수의 사랑론이 독특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우선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사랑에 관한 아래와 같은 첫 언명에서 나타낸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측면이 그러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오의 복음서 5장 43-44절.
예수 이전까지 제사장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을 제외한 이방인들은 종교적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는 기존 율법을 힘닿는 대로 준수하고자 애썼던 당대의 모든 유대인들이 취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었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사랑이 '상을 받을 수 없는, 불완전한 사랑'임을 분명히 했다. 오로지 확장된 사랑, 내 정이 가고 내키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는 모두에 대한 사랑만이 진짜 사랑임을 천명한 것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의 복음서 5장 46-48절.
예수의 사랑에 관련한 언명 중 숱하게 인용되며 오늘도 많은 오해를 사고 있는 아래와 같은 구절도 실은 예수 특유의, 사랑의 폭을 확대할 것(즉 인류애적인, 흔히 아가페라 알려진 사랑)에 대한 강조이다(이와 같은 강조는 동일한 마태오의 복음서 내 46-50절에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각자가 자기 내키는 이들(내 가족, 내 친지, 내 민족 등)만을 소위 '사랑'하며, 인류애적인 사랑을 강조한 자신의 사상을 따라 사랑의 폭을 넓히지 않는 이는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을 확언했다. 예수는 (그의 말에 의하면)하느님을 대리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를 사랑한다란 곧 그가 부르짖은 확장적 사랑, 인류애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0장 34-39절.
예수는 공생애 내내 '회칠한 무덤'[196] 또는 '눈 먼 길잡이'[197]라 일컬었던 바리사이과 서기관 같은, 당대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들을 비판했는데 이들이 책임 있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는커녕, 즉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행하기는커녕 '사랑 그 자체신'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내려 주신 율법을 문자적으로 또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럴 때에 그 양을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마태오의 복음서 12장 10-12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마태오의 복음서 23장 23절
예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의 복음서 2장 27절
바리사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율법에 의하면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예수가 병을 고치려 들자 고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도 구하는 마당에 사람의 병을 고치지 않을 수 있겠냐며 보란 듯이 치유하는 기적을 베푼다. 가혹했던 고대의 노동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목적에서 안식일 하루라도 휴식을 취할 것을 말하던 율법을, 뻔히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도 모른체해야 한다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던 바리사이들의 사랑 없음이 이로써 드러난다. 이 일화와 아래의 언급으로 알 수 있는 예수의 율법 인식은, 율법은 오로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율법을 깨뜨리지 않되 '완성'하였으며 예수가 직접 말하고 행동으로 보이던 바와 같이 예수는 안식일제사, 십일조 같은 기존 유대교의 율법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에 (안식일에 회당 안에서 가르치거나,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등) 그것들을 모두 준수하고 거부하지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그 모든 제의들의 겉모습만을 맹목적으로 준수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최종적이고 근본적으로는 그것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계시된 것인 만큼 그러한 방향으로 올바르고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7-20절.
예수로 하여금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남기게 하여 유명해진 '부자 청년'이 두 번째로 물은,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냐는 물음에 예수는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순서 상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부터 반드시 해야 할 것으로 나아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현대인의 일반적 도덕 관념과 그런 관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법 체계에도 널리 스며 있되, 맨 마지막인 이웃 사랑만 그렇지 아니하다. 이웃 사랑은 봉사활동이나 기부가 선택사항 또는 권장사항으로 여겨지며 필수사항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에도 위대한 일, 혹은 좋은 일 정도로 여겨질 뿐 모두가 할 수 있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예수 시대로부터 2,000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예수의 일성을, 동일하게 또는 문장은 달라도 근본은 같은 말로 거듭해서 외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 젊은이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계명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18-19절.
예수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강조 중 '둘째간다'고 할 강조는 아래와 같은데, 당대의 율법 전문가들이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이 예수의 '악명'을 전해듣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보고자 한데 모인 데서 개중에서도 최고 유력자라 할 '율법의 전문가'가 단적으로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며 물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언급에 의하면,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며, 다시 수렴된다. 사랑은 율법의 시작이자 완성(또는/그리고 끝), 즉 알파와 오메가이다.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2장 34-40절.
십자가형과 이어질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임박했음을 안 예수가 한 것으로 요한복음이 제일 먼저 언급하는 것은, 당신이 하라고 말한 숱한 것들 중에서도 사랑, 그것도 마지막 순간까지의 사랑이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요한의 복음서 13장 1절.
그리고 유다가 예수를 밀고하고자 그가 건네준 빵을 챙겨 한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직후 요한복음에서는 물론이고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유명하다고 할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이 강렬한 인상과 함께 예수의 제일가는 어록으로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이유는 이 말이 사실상 예수의 유언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 13장 34-35절.
예수의 사랑론은 사복음서 곳곳에서 볼 수 있듯 비단 이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을 동반하였는데,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아래와 같은 거듭된 사랑에 대한 '강론'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것 같은 실제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다가, 곧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궁극이자 마지막 본으로서 본인이 언급한 지고지순의 사랑인 '자기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 즉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이처럼 그 어떤 가르침보다 사랑할 것을 강조했으며 본인이 스스로 제일가는 사랑이라고 말한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실존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로 남게 된다. 여기까지 살펴보았듯 만약 누군가가 신에 가닿기 위한 방법으로 온전히 예수의 언행을 본받기로 했다면, 그는 기필코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에 올바르게 주목한다면, 그는 오늘날 또다른 지배적인 교리이며, 영화 밀양에서도 관련된 장면이 나와 특별히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구호에 대해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의문을 불식시킬 수 있는데, 그는 간단히 말해 해당 문장이 최소한 예수에 주목할 때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이다. 예수에 기초한다면, 믿음은 곧 예수에 대한 믿음인데, 예수를 믿는다란 그이가 유일하게 선포한 '새 계명'인 사랑을 말로, 또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믿음'의 깊음을 자부하는 누군가가, 나는 교회에서 강조하는 갖은 믿음 생활(기도회 참여, 성경 필사 등)을 꾸준히 했다고 아무리 자랑한들, 그가 예수가 한 것 같은 약자들에 관심을 갖는 일, 약자들을 돌보고 돕고 함께하고 올바른 길로 이끄려고 했던 일 등에 소홀했다면 그는 예수 시대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처럼, 결코 예수가 말한 견지에서 아버지께 가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요한의 복음서 15장 9-17절.

6.1.2. 하느님의 바실레이아와 이스라엘

흔히 간과되기 쉽지만, 성경의 모든 책들은 구약에선 '이스라엘'[198] 이라 불리고 신약에선 '교회'Ekklēsia라 불리는 '하느님의 백성'에 완전히 정향되어 있다.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말 자체부터가 이스라엘의 도유된 영도자를 의미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메시아) 예수의 관심사 역시도 당연히 이스라엘이었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활 때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였으며, 자신이 유다인에게 파견되었다는 점[199], "구원은 유다인에게서"[200] 온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는 예수의 공생활이 아닌, 파스카[201] 후의 제자단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민족종교를 주장했는데 제자들이 이를 변개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유다인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관심은 만민 구원에 대한 관심과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두 관심은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론적 이스라엘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2 장차 어느 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들리라.
3 그 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서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
4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5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
이사야 2,2-5, 공동번역 성서
1 뒷날, 야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우뚝 솟아 언덕들을 굽어보게 되는 날, 높이 치솟아 멧부리들을 눈 아래 두는 날이 오면, 만민이 물밀듯 밀려오리라.
2 모든 민족이 몰려와 말하리라. "어서, 야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을 뽑으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거기서 어떤 길을 가리켜주시든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르자!" 그렇다. 야훼의 가르침(תוֹרָ֔ה, 토라)은 시온에서 나온다.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들려온다.
3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시리라. 그리 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4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미가 4,1-5, 공동번역 성서
이사야-미가에 의하면 종말론적 이스라엘은, 시온에 천하만민이 순례를 하면서 이루어진다. '만민순례Völkerwallfahrt'라고 불리는 이 모티프는, 시온(예루살렘)에서 토라가 나오고, 민족들이 그것을 들으려고 시온에 순례를 온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예수는 위와 완전히 똑같은 표상으로 교회를 설명했다: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οὐ δύναται πόλις κρυβῆναι ἐπάνω ὄρους κειμένη[202]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polis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마태 5,14, 공동번역 성서
1세기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산 위에 있는 폴리스'는 당연히 시온의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예수는 만민들에게 드러나는 '산 위의 폴리스'[203]라는 표상으로 교회를 설명했다.

초대 교회가 예수에게 배워서 가진 확신은, 이사야-미가의 이 예언이 유다인과 이방인의 교회적 결합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린 이스라엘은, 천하만민이 시온에 결합하여 이루어진 이스라엘이다. 이는 제자 세대에서 바울로가 한 비유(유다인이라는 '뿌리'에 접붙여진 이방인이라는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 로마 11,17-18)와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한다.

가령 산상설교의 경우, 이는 토라를 끝장낸 가르침이 아니라 '토라의 새롭고도 정통적인 해석'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관심사는 당연히 이스라엘이며, '토라의 새롭고도 정통적인 해석'인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우선 적용되는 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구체적인 공동체이다. 다시 말해서 산상설교는 UN 인권선언 같은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 공동체를 겨냥한 가르침이다. 동시에, 이 이스라엘에 모든 인류가 결합하여야 한다.

결국 두 관심사가 예수에게는 모두 중요했다:
ㄱ. 그리스도(메시아)는 이스라엘에 파견되었다.
ㄴ. 천하만민은 이스라엘에 결합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교회)에 대한 관심사와 병행하는 주제가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Basileia(=왕정=왕권)이라는 주제이다. 이 '다스림', '왕정', '왕권'은 단어 자체의 의미에서 보듯 당장 현세의 '백성'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세의 이스라엘(=교회)이 바실레이아의 대상이며, 이는 내세로 '미루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204] 물론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의 '천국', 곧 내세의 바실레이아가 '틀린' 개념인 것도 아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다스림'은 당연히 현세의 백성에도 내세의 백성에도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즉 '다스림'은 당장 현세의 백성에 적용되지만, 이 '다스림'은 환난과 고통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중단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두 가지 극단은 모두 예수의 바실레이아 관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극단 ㄱ. 하느님의 다스림은 온전히 현세적인 개념이다. 현세의 백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속하지만 죽고 나서는 다른 다스림에 속한다.
극단 ㄴ. 하느님의 다스림은 온전히 내세적인 개념이다. 내세의 백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속하지만 죽기 전에는 다른 누군가의 다스림에 속한다.

오히려 요한 묵시록에선 바실레이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예루살렘이라는 표상과 결합하고 있다. 이렇게 '구약의 이스라엘', '현세적 바실레이아'(=교회), '내세적 바실레이아'(흔히 말하는 '천국')가 한 지점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1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2 καὶ τὴν πόλιν τὴν ἁγίαν Ἰερουσαλὴμ καινὴν εἶδον καταβαίνουσαν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ἀπὸ τοῦ θεοῦ ἡτοιμασμένην ὡς νύμφην κεκοσμημένην τῷ ἀνδρὶ αὐτῆς.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polis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 묵시록 21,1-2, 공동번역 성서
물론 요한 묵시록은 파스카 후의 문헌이다. 그러나 거룩한 폴리스 새 예루살렘이라는 표상이 예수의 가르침(마태 5,14)에 기반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승한 '교회'와 예수의 연결고리도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실제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다" 류의 개인주의적인 견해가 유행했었지만,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이런 견해와 거리를 둔다.
역사상 예수가 과연 교회를 세웠더냐는 물음이 비평 신학에서 세차게 일어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물론 점차 뚜렷이 인식되고 있거니와, 이것은 문제 제기 자체에 잘못이 있습니다. 꼬집어 말하건대, 예수는 애당초 교회를 세울 수도 없었으니, 오래 전부터 교회가, 사실인즉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했습니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스라엘을 모아 하느님 백성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것으로 말하면, 예수에 의해 모여지고 예수의 죽음을 통해 거룩해진 하느님 백성의 삶을 살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말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상 예수에게서 무슨 정식의 교회 창설 행위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물론, 예수가 이스라엘을 어떤 방식으로 모았으며 참 이스라엘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했더냐를 묻는다는 것은 더없이 뜻있는 일입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차원》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Zur gesellschaftlichen Dimension des christlichen Glaubens (1982) , 정한교 번역, 분도출판사, 21996, p.5
'교회'란 근본적으로 예수가 모으고 가르치는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과연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살고 있는지는 언제나 거듭 검토되어야 하지만, 교회와 이스라엘을 아무 상관 없는 남남 개념으로 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 매우 어색한 논리이다.
Q: 예수께서는 교회를 원하셨습니까?

A: 많이들 다룬 문제로군요.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다"라는 알프렛 롸시의 유명한 말도 있지만, 그리 간단히 처리해 버려서는 물론 안 되겠지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냄받았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바깥을 생각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개인만을 상대하신 것도 아닙니다. 백성 속의 개인을 상대할 때도 이 선민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상대하신 것이지요. 말하자면 예수 시대의 교회란 이스라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활약 당시에도 또 나중에 사도들의 활동 중에도 이스라엘이 배반한다는 것,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자, 사도들은 이제 유다인 아닌 사람들,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들과 그다음 부활후대 상황에서 교회를 세운 사람들, 공동체들을 세운 사람들이 사실 같은 사람들이었고 보면, 특별히 이 점에서도 예수 시대와 교회 시대 사이의 연속성은 주어져 있다고 봅니다.
-요아힘 그닐카, 방송 대담[205]
예수가 관계하는 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다. 예수는 자기네 역사를 지닌 이 백성 앞에 나타난다. 이 백성을 상대로 활동한다. 이 사정이 예수의 활동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예수 자신이 이 백성의 일원인 이스라엘 사람이요, 모국어를 말하며, 성서의 언어에서 취한 청중에게 익숙한 표상과 동기 들을 자기 선포에 사용한다. 개인을 향해 결단을 호소할 때도 그를 이 백성의 일원으로 바라본다. 예수의 구원 제시를 개인 치유로 이해한다면 몹시 오해가 될 것이다. 예수는 이 백성을 앞에 두고 이 백성에게 자기가 보냄받았다고 의식했으며 이 백성을 자기 제자들의 협력으로 임박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런 집단적 현상을 처음으로 만들어낼 까닭이란 없었다. 아니,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 소임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사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 활동의 이 정향을 삭감 없이 인정할 때라야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게 된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갈릴래아의 예수 청중 가운데 이방인도 있었다는 사실이 종종 적시되어 있다 해서 이 정향이 원칙적으로 달라지는 바는 조금도 없다. 물론 예수의 청중 속에 그런 이방인들이 있음을 우리는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예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을 향해 있다. 이스라엘이 ― 꼬집어 표현하자면 ― 예수의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교회)였으며, 새로이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불려 들어와야 할 백성이었다. 여기서 "엑클레시아"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다름없이 하느님 백성의 모임을 뜻한다.[206]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공간적으로 이스라엘 땅과 계속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알려진다. 요르단 동쪽의 헬레니즘화한 열 도시 지역인 데카폴리스가 언급되기는 하지만(마르 4,20; 7,31; 마태 4,25),[207] 그리고 마르코 7,24 이하 // 마태오 14.21 이하에 따르면 예수는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넘어가고(루가는 삭제한다) 마르코 8,27 // 마태오 16,13에 따르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부근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루가 9,18은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일이 없이 예수의 혼자 계심을 말한다), 아무튼 이방인 가운데서 일어난 전도 활동을 말하는 바는 없다.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는 여행의 상황이 어떠했다고 할 수 있든간에, 그 지리적 소여는 정작 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 여행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들어준(마르 7,26//), 더욱이 예외로 특징지어진(마르 7,27-30//) 여행에서 추론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상 회상으로서 북부 여행에서 선교사업이 성립될 수는 없었다면, 여기서는 분봉영주 헤로데 안티파스 쪽의 일시적 추적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겠다(참조: 루가 13,31-32)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56-257쪽
우리는 예언자들이 고지한 만민순례Völkerwallfahrt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겠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텍스트는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섬기고 조공을 바치러 시온으로 모여온다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들이 아스라엘의 구원에 편입하여 행동한다는 그런 텍스트들을 보자. 예컨대: "그 날에, 많은 이방 민족이 주님께 와서 그의 백성이 될 것이며, 주께서 너희와 함께 사실 것이다"(즈카 2,15). 혹은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민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그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이사 2,2-3). 이렇게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구원 또는 율법 안에 들어오리라고 알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신도 자기 하느님께 몸바쳐 섬기리라는 혹은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런 상태로 되돌려 놓이리라는 전제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다. 예수 말씀을 위해서는 만민순례의 전환해석과 맞먹는 또 다른 출발점이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이 도발적 재해석에서야말로 우리는 ― 띠로와 시돈에 관한 판단의 경우와 비슷하게 ― 예수 말씀의 증빙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연결지어 볼 수 있는 경우는 여러 가지로 생겨난다. 어떤 경우든, 민족들이 마지막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러 올 것이다. 예수는 옛 예언자 사상을 적극적 형태로 다시 취한다. 그것이 중간시대에는 특히 묵시문학을 통해 퇴화하여, 마지막에 하느님 나라가 나타날 때 "이방인의 떼지은 무리"가 말살되리라고,[208] 적어도 일부라도 역사상 각 민족의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에 따라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되고 있었다.[209] 이스라엘이 또는 이 겨례의 다수가 예수의 메시지를 배척하더라도 민족들은 올 것이다. 만민순례 사상의 재해석은 그러므로 현재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가 드러난 이스엘의 상태와 대비해서도 민족들의 도래가 기대된다는 데에 있다.
-같은 책, 263-265쪽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 《예수》(Jesus)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6.1.3. 메시아

예수의 사상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메시아(그리스도)이다. 본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도유된 영도자를 일컫던 말로, 왕정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왕'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왕, 사제, '왕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모습을 갖춘 참된 왕' 등을 의미하는 복잡한 뉘앙스의 단어이다. 잘 알려진대로, 성경에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고백된다.

그런데 근대에 여기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곧 '역사적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칭하지 않았고 단지 후대의 교회가 그를 메시아로 고백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브레데William Wrede는 여기에서 '메시아 비밀'이라는 가설로 설명한다. 예수는 원래 스스로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규정하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후대 교회의 인식과 역사적 예수의 인식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은 스스로를 메시아로 인정했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숨기셨다"는 왜곡을 넣었다는 가설이다.

이 설명은 성서학에 많은 질문을 부른 뜻 깊고 거대한 가설임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성서학에서 다수론이라 하기 어렵다. 오늘날엔 '메시아 비밀' 개념을 복음서의 문필적 내러티브로 분석한다. 2022년에 원서가 나온 《21세기 제롬 성경 주해》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for the Twenty-Century[210]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서학계는 오랫동안 침묵하라는 명령을 역사적 또는 심리학적 모티브로 설명해 왔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이를 바로잡아 이 부분을 일종의 문학적 모티브나 주제, 혹은 도구로 여긴다. 마르코는 이미 1,1과 세례 때(1,11), 그리고 광야의 유혹 사화에서(1,12-13)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많은 이가 주장한 것처럼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주제를 통해 예수의 신원이 계시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논지는 아닌 듯 보인다. 마르코가 사용하는 이러한 내러티브적 수사修辭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라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정의하는 데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21세기 제롬 성경 주해 19: 마르코 복음서》, 염철호 번역, 성서와함께, 2023, pp.70-71
고전적인 성서학자이지만, 일찍이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도 복음서의 문필적 분석에서 비슷하게 말하였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메시아 고백뿐만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서도 '비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는 "예수의 금지 명령이 어떻게 무시되는지 묘사"한다.[211]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마르 7,36) 그렇다면 최소한 치유 사회에 있어서는 마르코 복음서에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메시아 비밀의 초점은 함구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함구령으로 드러나는 은밀한 발현에 있다"는[212] 것이다. 슈낙켄부르크의 이 예시는 메시아 칭호에 관한 직접적인 비밀 요청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를 접근할 때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가령 마르 14,61에서는 대사제가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고 묻는데, 마르코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간다면 1. 예수가 메시아라는 세간의 평을 적대자가 들었거나 2. 예수의 행적으로부터 "자칭 메시아"라는 의혹을 적대자가 도출했거나 이지, 소위 상상도 못한 정체라는 게 아니다. 또한 치유 사화가 아니라 베드로의 직접적인 메시아 고백에 대해서는 슈낙켄부르크는 다음을 지적한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마르코의 예수를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 이 메시아 칭호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이 메시아를 현세의 정치적 통치자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해방자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는 이 개념을 분명하게 밝혀 두어야 했다. ……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를 군중의 생각과는 달리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이렇게 그의 고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이 고백으로 마르코 복음서 전반부가 끝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그 고백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 후반부부터) 제자들에게 당신이 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 보여 주기 시작하신다.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난하고 죽어야 하는 '사람의 아들'의 비밀을 알려 주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 함구령 배후에는 예수의 비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밝혀 줄 사람의 아들에 관한 사고가 배태되어 있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134쪽.
예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비록) 은폐된 방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분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분명하기 이 주장을 내세웠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라는 것도 밝혀 주었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Règne et Royaume de Dieu》(R. Marlè 번역), Paris 1965, p.100[213]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의 경우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예수는 단 한 번도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이 호칭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불릴 뿐이다. 단 한 번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호칭을 수용한 적은 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그밖에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이 호칭을 인정하지만,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한 베드로의 고백(마르 8,27-33 병행)은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214]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29) 예수는 이 호칭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해방가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 메시아는 고통을 당해야만 하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마르 8,31)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백성들이 기다리던 그런 의미로의 메시아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의 수난예고 직후 고난받는 메시아를 반박함: 마르 8,32), 하느님의 뜻에 따른 메시아였다.
두 번째는 대사제가 예수에게 신원을 물을 때다. "'당신은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마르 14,61.62) 이 일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소송과정 중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선언할 적절한 시간에 잘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학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마르코 복음사가의 편집도 아니라는 것이다. "찬양받으셔야 할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묘사하는 표현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사제의 질문형식은 목격증언을 동반한, 대사제가 직접 발설한 말(ipsissima vox)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215] 여기서 예수가 왜 정치적 함축성이 들어있는 "메시아"라는 호칭을 받아들였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도 있다. 예수는 당시 무력한 상황에서 소송에 계류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인정한 메시아의 의미는 정치적 승리자인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받는 종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math({ }^{2})]2014), 318-319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는 예수가 친히 메시아라고 말한 바는 없지만, 예수의 사명의식이 메시아라는 주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직접적인 발설은 없었으나, 예수는 메시아 사명의식을 지녔다는 것이다.[216]
이러한 이유 등으로 인해, 근래 성서학계에선 '메시아 비밀'을 예수의 자의식에 대한 역사적이고 심리학적인 보도로 보지 않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이를 바로잡아 이 부분을 일종의 문학적 모티브나 주제, 혹은 도구로 여긴다."《21세기 제롬 성경 주해 19: 마르코 복음서》, 염철호 번역, 성서와함께, 2023, pp.70-71)[217]

역사적으로 예수는 이스라엘에 대한 전권을 주장했다. 가령 성전 정화는 단순한 시민 윤리적 각성 운동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218] 대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은 정확히 이 전권 주장을 감지했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성전 정화에서 논쟁이 된 것은 예수의 바로 이 '권한'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 21,23, 공동번역 성서
그리고 이스라엘에 전권을 가진 영도자를 당대엔 메시아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에 대한 전권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바로 그 때문에 죽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메시아라는 자의식이 정말로 있었거나, 직접 입으로 말하지만 않았을 뿐 '메시아'에 해당하는 자의식(이스라엘의 영도자)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메시아 비밀' 가설과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교는 사실 바울로의 사상이지 예수의 사상이 아니며 바울로가 예수를 '신격화'한 것이다"라는 가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생각이다. '신격화'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실상은 정반대이다. 후대의 세계 공의회들이 희랍 철학적인 용어를 동원해 가며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유일신론을 조화롭게 말하려고 애썼듯이, AD 1세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유일신론은 민감한 문제였고,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다신론으로 오해받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로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 내려는 축이 아니라 유일신론을 자극하는 일탈을 피해가려는 쪽이었다.
변모 이야기(마르 9,1-9)가 보여 주듯 시나이 동기는 유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의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수집된 일련의 표상들이 바오로 서간(1테살 4,13~17; 2코린 3장; 로마 10,6~7)에도 나타난다. 물론 이 소재들은 유다계 그리스도교적 표상의 언어로 표출된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과 함께 현실 너머의 것을 번역하기 위해 히브리적인 방식의 상징과 이미지들로 반죽된 언어인 것이다. 바오로는 이 단편적인 소재들을 수용하여 재편성하고 어느정도 순화시킴으로써 유일신 신앙을 자극할 수 있는 일탈을 피해갔다. 사도는 흔히 말하듯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우상화의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교리 교수 내용을 유다·희랍계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52쪽
연대기적으로 복음서보다 더 오래된[219] 필리피서의 찬가(2,6ff)에서는 예수를 선재하는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찬가는 바울로의 창작조차 아니다.[220]

또한 복음서 내부에서도, 예수는 스스로를 하느님과 구분하는 듯한 발언과, 하느님의 힘을 자신이 행사하는 듯한 발언을 모두 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백성 공동체와 부부로 표현되는(참고: 아가, 호세아서) '남편 하느님' 표상을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남편이 예수 자신이라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에 예수는 30대의 나이에도 미혼(정확히 말하면 공동체의 남편)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부부의 표상'을 통해, 예수는 유다인들이 매우 알기 쉬운 이미지로 스스로를 설명한 것이다.
마태 9,14~15과 그 병행구 그리고 마태 22,11~14; 25,6; 요한 3,29에서 신랑은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이사 54,5~6에 등장한다.[221]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4-3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22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223]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7-29)
요한 묵시록이 예수를 '거룩한 폴리스 새 예루살렘'의 남편으로 묘사하는 것도 역사적 예수의 이런 표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믿음의 핵심 요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역사적 예수의 사상에 기반한 것이다.[224] 예수는 이스라엘에 대한 전권을 주장했으며, 이스라엘이 예수와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어 재건되는 것은 당연히 중요했다.

역사적 예수가 어떤 카테고리의 인간이였냐고 묻는다면, 그나마 가장 정답에 가깝다고 성서학자들이 여기는 부류는 '종말론적 예언자'이다. 실제로 구약의 예언자들과 병행하며 비교하면 예수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예언자라는 말로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독특하다고 말한다.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차이로, 예언자들과 비교할 때 예수는 '나'를 압도적으로 자주 강력하게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그 어떤 예언자도 예수만큼 '나'를 강조하진 않았다. 구약에서라면 하느님이 "내가 말한다"고 했거나 "야훼의 말씀이다"라고 했을 자리를, 예수는 꾸준히 "나"로 대체했다.
"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 12,49, 공동번역)
"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공동번역)
"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공동번역)
"그러므로 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공동번역)
"누구든지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공동번역)
"누구든지 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 공동번역)
그 외에도 복음서에서 수도 없이 이런 사례를 나열할 수 있다. 현대의 독자들에겐 '나'의 강조가 별 감흥이 없겠지만, 1세기 유다인 독자들과 청중들에게 예수의 '나' 강조는 알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적대자들이 눈치채고 단호히 반대할 정도로 명백한 전권주장이었다.

이스라엘의 다른 예언자들은 절대로 다음과 같은 화법을 쓰지도 않았고, 써서도 안됐다:
23ὁ κύριος Ἰησοῦς ἐν τῇ νυκτὶ ᾗ παρεδίδετο ἔλαβεν ἄρτον 24καὶ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κλασεν καὶ εἶπεν· τοῦτό μού ἐστιν τὸ σῶμα τὸ ὑπὲρ ὑμῶν· τοῦτο ποιεῖ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25ὡσαύτως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μετὰ τὸ δειπνῆσαι λέγων· τοῦ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στὶ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τοῦτο ποιεῖτε, ὁσάκις ἐὰν πίνη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26ὁσάκις γὰρ ἐὰν ἐσθίητε τὸν ἄρτον τοῦτον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πίνητε, τὸν θάνατον τοῦ κυρίου καταγγέλλετε ἄχρι οὗ ἔλθῃ.[225]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23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감사를(eucharistēsas)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anamnēsin) 이를 행하여라.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anamnēsin)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3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24감사를(eucharistēsas)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anamnēsin)." 25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anamnēsin)."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린토 1서 11장 23-26절 (병행: 마태 26,17-19; 마르 14,22-26; 루가 22,14-20)
성찬에서 빵이 실체변화(가톨릭)하냐, 오직 상징(츠빙글리)이냐 등등의 교리적 차이는 있지만, 구약의 그 어떤 예언자에게서도 볼 수 없는 화법인 건 분명하다.

또한 산상설교를 보자:
18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20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7'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그러나 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33"또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그러나 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38'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그러나 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40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3'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그러나 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오 5장 18-44절(공동번역)
사실 율법에 주석을 다는 것 자체는 당대 율법학자들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준 충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말을 하는 방식에 있다. 위 발췌문에서, 예수는 마치 자신이 시나이에서 율법을 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인 것처럼 말을 하였다.
X라고 [하느님에 의해] 이르러진 말씀을[226]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Y라고 말한다."
라는 화법에서는 유다인 청중 누구나 예수가 스스로를 하느님의 위치에 놓고 있다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즉 예수가 준 충격의 관건은 율법에 해석을 달았다던지[227] 율법을 이완시켰다던지[228] 하는 게 아니다. 시나이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할 수 있느냐의 여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바로 이것을 정확히 간파했고, 단호하게 반대했다. 예수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물론 헬레니즘 철학의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위치로 설명했다.

현대 유다교의 석학이자 라삐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도 정확히 이 점을 지적한다. 뉴스너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신사적인 라삐인데, 그리스도교 신앙에 존경을 표하면서도 자신이 유다교 신자로 남은 이유를 저서 "A Rabbi Talks with Jesus: An Intermillennial, Interfaith Exchange"에서 다음과 표현했다. 이 저서에서, 뉴스너는 자신이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AD 1세기로 되돌아가 예수와 직접 이야기도 해보고 따라도 가봤다고 가정한다. 그는 예수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다가 다른 유다인 동포와 함께 기도하고 토라 공부를 하기 위해 조그마한 어떤 도시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 도시의 어떤 라삐와 함께 예수에 관한 토론을 한다:
선생님이 물었다. "예수라는 학자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단 말이지?"
내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충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빠뜨렸지?"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탰지?"
내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보탰습니다."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 『A Rabbi Talks with Jesus: An Intermillennial, Interfaith Exchange』, Dlubleday, 1993

즉 예수는 구약의 믿음에서 그 무엇도 빼지 않았고, 단지 자기 자신을 보탰다. 유다인 사회에 예수가 준 충격은 완전히 규격 외의 차원의 것이었으며, 토라를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하는 예수의 권한이야말로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가 스스로를 표현한 칭호인 '사람의 아들'을 보자. 이 칭호는 다니엘서 7장의 묵시에서 비롯했다.
2 다니엘이 말한다. 나는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하늘 끝 사방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면서 큰 바다가 출렁거리는데, 3바다에서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왔다.

4 그 첫째 것은 몸이 사자같이 생겼고 독수리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 짐승의 날개가 뽑혔다. 그러더니 땅에서 몸을 일으켜 사람처럼 발을 딛고 서는 것이었다. 그 짐승은 사람의 마음까지 지니게 되었다.

5 둘째 짐승은 곰같이 생겼는데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 짐승은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어디서 '일어나 고기를 실컷 먹어라.' 하는 말이 들려왔다.

6 내가 또 바라보니 이번에는 표범같이 생긴 짐승이 올라오는데 옆구리에는 새 깃이 네 개 달려 있었고 머리도 넷이었다. 그 짐승은 권력을 받았다.

7 그 날 밤 꿈에 본 넷째 짐승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겼으며 힘도 무척 세었다. 쇠로 된 이빨로 무엇이나 부서뜨려 먹으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먼저 나온 짐승들과는 달리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다. 8 그 뿔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 몸에서 작은 뿔 하나가 새로 돋아났다. 그러자 먼저 나온 뿔 셋이 그 뿔에 밀려서 뽑혀 나갔다. 그런데 그 작은 뿔은 사람처럼 눈이 있고 입도 있어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9 내가 바라보니 옥좌가 놓이고 태곳적부터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셨는데, 옷은 눈같이 희고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그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10 그 앞으로는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다. 천만 신하들이 떠받들어 모시고 또 억조 창생들이 모시고 섰는데, 그는 법정을 열고 조서를 펼치셨다. 11 그 뿔이 계속하여 외쳐대는 건방진 소리를 한 귀로 들으면서 보고 있자니, 그 짐승은 나의 눈앞에서 처형을 받아 시체가 박살이 나고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었다. 12 다른 짐승들은 권세는 빼앗겼으나 목숨만은 얼마 동안 부지하도록 버려졌다.

13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직역: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14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다니 7,2-14, 공동번역
이 구절에서 '짐승들'은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역사적 대제국들을 부정적 의미에서 상징한다. 성서학에선 제1제국(사자)을 바빌론, 제2제국(곰)은 메디아, 제3제국(표범)은 페르시아, 그리고 제4제국은 셀레우코스 왕국으로 추정한다. 이 네 마리 짐승들은 세상에 혼돈을 부르고 점점더 "짐승처럼" 만드는 네 가지 제국을 말한다. 그런데 짐승처럼 변해가는 세상이 극한에 달했을 때, "태곳적부터 계신 이"(7,10.13)의 다스림, 예수의 화법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바실레이아"가 제5제국으로 출현한다. 이 제5제국은 앞의 제국들과 달리 '짐승'이 아닌 '사람'(사람의 아들)[229]이 상징이다. 다시 말해서 제5제국(사람의 아들)은 앞의 짐승 같은 폭력과 혼돈의 바실레이아가 아닌, 진정으로 인간성이 회복되는 바실레이아인 것이다.

이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 표상을 예수는 자기자신에게 적용했다:
잘 들어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루가 12,8, 공동번역)

7. 예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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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로 시대에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정당인 열심당(젤롯, 혁명당)에서 일으킨 유대 전쟁은 1세기경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취임한 티투스는 서기 70년,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끝끝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결사 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유대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다 같이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 줄 가시적 공통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성전이 허물어질 것이라는 예수의 생전 예언이 실현된 셈이었다. 로마 군대는 조롱하듯이 성전의 서쪽 담장 하나만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통곡의 벽이다. 이후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안식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70년부터 1948년까지 나라 없는 백성이 된다. 이것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몇 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는데,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일으킨 유대인 반란(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 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만 추방했다[230].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하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 현대 이스라엘이 건국한 이후, 예수에 대한 재판이 불법적이며 무효라고 인정해 달라는 청원장이 이스라엘 법원에 접수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법원은 이 청원에 대해 '예수는 로마 제국 법에 따라 처벌받았으므로 로마 제국의 후계인 이탈리아 법정에 가서 소송하라'는 답변을 보냈다. 하지만 현대 법치 제도에서 고소자(유대인)가 아니라 판결자(로마 제국 법원)만이 피고(예수)의 명예 회복을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상식이다. 당연히 바티칸이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무고함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시대 로마 제국 속주들의 모습을 보면, 산헤드린에서의 판결이 사실상 확정적인 판결이라 볼 수 있다. 속주 유력자들이 내린 의견이기 때문에 보통 로마 제국 총독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인데, 잘 받아들이지 않아서 속주에서 분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책임은 총독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대부분 다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은 분명 속주에 대한 우위가 있었지만, 속주 총독은 현지 유력자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복음서에도 바라바 대신 예수를 처형하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민란이 날까 봐 무서워서 들어주었다는 구절이 있다.
  •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로마 전역에서는 제자들사도 바오로의 행보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231], 수백 년 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기에는 로마 제국국교가 되어 유럽 전역에 걸쳐서 공통된 서양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한 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칙령 이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양의 철학이나 문화, 역사에 그리스도교가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예시1][예시2](왜 지금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그리스도교가 세계에 널리 전파된 이유는 단지 서구 세력의 발전과 개척의 역사 때문일 뿐”이라면서 “그리스도교 교리 자체는 다른 종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열고, 서양의 근대가 나오는데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양종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된 것도 맞지만, 그리스도교가 서양의 발전에 힘을 보탠 것도 사실이다. 당장에 유럽에서는 교회의 어마어마한 기록을 통해 900년 전 고딕 성당의 설계도를 찾거나, 프랑스 남부의 한 농노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 대항해시대에 그리스도교가 영향을 준 부분은 선교에 있다. 미지의 땅의 발견은 서양의 교회와 권력 기관으로 하여금 산업 자원의 확보와 더불어 원주민에 대한 적극적인 그리스도교 전파라는 명분을 주었고, 이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군대 파견 및 현지 산업 시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234] 그 결과가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아프리카에 걸친 그리스도교화.
  • 현대 문명의 철학적인 기반이 되는 천부인권의 근본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한 조물주'가 어느 종교의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서구의 천부인권적 개념이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배경에서 나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근대에 등장한 천부인권(자연권)의 개념은 자연법사상에서 제시한 인권을 뜻하는데, 서구의 자연법사상의 근저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敎父)들과 중세 후기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있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이 유일신의 모양과 형상을 좇아, 영을 공급받은 유일한 피조물로서 모든 창조의 마지막에 창조된 것을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235]
  •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여기에 맞선 가톨릭 쇄신은 둘 다 '예수로부터 배운 원래의 신앙'을 기준으로 하였다. '개혁(reform)'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에는 '진보'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마르틴 루터이든 장 칼뱅이든 트리엔트 공의회이든 간에 논쟁의 대상은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이지 예수가 가르친 적이 없는 무언가로의 이탈이 아니었고, 바라본 것은 과거이지 미래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갈등이 루터도 칼뱅도 의도하지 않은 '근대'라는 사생아를 낳았으나, 계몽주의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들은 그 시대 유럽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데카르트라이프니츠, 같은 당대 유명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유신론자들이었으며, 버클리는 아예 성공회 주교였다.[236] 20세기 들어서도 한참 동안이나 유럽인 대다수에게 예수는 규준이었다.

8. 역사적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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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실존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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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에서의 인식

크게 광신도, 참그리스도인, 일반 신자[237], 예수를 인간으로서만 존경하는 사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교의 '적극적인 전도 활동'으로 반감을 가져 예수, 정확히는 '예수천국 불신지옥'[238] 교리를 만들어 낸 예수를 증오하는 사람 정도로 나눌 수 있겠다.
  • 광신도예수의 뜻을 자기 멋대로 왜곡 해석, 지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실천하는 등, 신도들은 물론이고 비신자들이 보기에도 영 좋지 못한 짓을 하면서 깽판을 부리는 자들이다. 보통 선민사상에 찌들어 다른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는 갱생시켜야 할 죄인으로 낮추어 볼 때가 많으며,[239] 이런 사고관이 공격적이거나 민폐스러운 전도 행위 등으로 드러나게 된다. 광신도들 때문에 한국 그리스도교의 평판이 매우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런 광신도들은 성경을 제대로 안 읽는 경향이 많고, 사이비이단일 가능성이 높다.
  • 참그리스도인은 순수하게 예수의 사랑, 이념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행하려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즉 본래 예수와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였던 '하느님의 나라'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도와 선교를 충실히 하는[240]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광신도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며,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의 사랑을 전하며 진실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봉사와 헌신으로 선교에 임한다.
  • 일반 신자는 그리스도교인 중에서 위 두 종류의 사람들을 제외한 신자들을 모두 일컫는 말에 가깝다. 딱히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비신자들에게 표출[241]하지는 않지만, 성당이나 교회는 다닌다고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물론 이 사람들도 엄연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교의 본래의 목적에 따르는 사람들이긴 한데, 온유도 광신도 없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다 일컫는 말로 보면 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 역사적 예수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리스도교는 믿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수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후세에 신으로 왜곡당한 인물로 보거나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신의 아들인 척했다고 생각하는 식. 무신론자불가지론자 중에서도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의 주인공이 이런 경우이다. 논쟁 중에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자 상대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이냐고 묻고, 그녀는 "요즘같이 핵전쟁의 위협이 큰 세상에 그런 분이 평화 사상을 퍼트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는 믿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타 종교인이거나 종교가 없거나 무신론자가 해당된다. 바로 위의 케이스와 구분하자면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도 고평가하지 않는 경우로, 아래의 케이스처럼 중립적인 경우라고 보면 되겠다.
  • 예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는 부류도 있다. 이 경우는 당연히 반그리스도교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 예수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 예수는 허구의 인물이기에 이를 비판 혹은 비난하기에는 앞서서 논할 대상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예수가 역사상으로 실존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과 별개로 인정 여부는 개인의 몫이지만, 일부 극단적인 쪽에서는 까기 위해 까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맨 위의 광신도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11. 예수 어록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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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 복음서 중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마르코의 복음서이다. 나머지 두 복음서는 마르코를 토대로 작성되었는데, 마르코 외에도 또 하나의 출전 전승을 공유한다는 설이 있다. 이는 예수의 어록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이는 '어록 출전'(Spruchquelle 혹은 Logienquelle), 약칭 'Q'(Quelle)라 불린다.

11.1. 예수의 화법

공관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화법은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공관 복음에 자주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요한복음에서는 단 2번만 사용한다.(3, 3.5). 그 대신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 강조되며, 세상,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영광 등의 주제가 예수에게서 말해진다. 이러한 차이들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요한 복음서의 예수 증언이 가지는 역사성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곧, 요한복음서의 예수에게서 강력하게 드러나는 신학적 성격이 역사와는 다른 관념에 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 연구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과거의 양자택일에는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곧 요한 복음서의 예수가 가지는 역사성에 대한 해답은 전에 생각하던 것보다 더 복합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자는 유대 독립 전쟁 때문에 서기 1세기 초의 팔레스티나와 단절된 것으로 보이지만,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유대 지방과 로마 제국의 제도에 관계되는 사항들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있으며 당시 생활상에 대해 해박하다. 또한 저자는 스스로를 예수에 대한 목격자 곧 증인으로 여기며,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다.(19, 35; 21, 24)[242] 이러한 면모들은 근대에 강력히 제기되었던, 요한복음서 예수의 역사성 논쟁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한다. 아무튼 이 부분은 워낙 온갖 추측과 떡밥과 썰이 난무하는지라, "이런 이런 말투가 역사적 예수의 말"이라는 식의 단정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애초에 이런 면모 때문에 '역사적 예수'라는 게 현대에는 다 식어버려 유행이 지난 떡밥이 되어버린 감도 있고.

12. 예수에 대한 이모저모

12.1. 성격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정신분석학자인 앤서니 스토에 따르면[243] 예수는 의외로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신약 성경에도 예수가 자신의 적들에게 "뱀들", "독사의 자식들"[244] 등의 표현을 쓰고, 남을 실족시키고 범죄하면서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이 "화로,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 벌레가 죽지 않는 곳"에서 영원히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원래 영적 지도자들이 불같은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것이 반대파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을 고려하면, 이게 실증적 연구인지 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예수를 사랑과 겸손과 온유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이해이며,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소 거칠어 보이는 언행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엄한 모습을 보인 것뿐이라고 본다.

12.2. 결혼 여부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12절
예수는 미혼자로 살았다. 자기 가정 이루기를, 아내와 자녀 두기를 포기했다. 당대 유다교계에서는 이런 처신이 한심한 충격적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는 것이 거의 의무적인 계명으로 여겨졌다. 근거는 창세기 1,28이었다: "자식 낳고 번성하라." 랍비들의 유다교계에서는 독신자란 혈통을 망각하는 자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미혼자를 랍비로 서품하기를 피했다. 쿰란에만 독신으로 사는 수도승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마태오 19,12에 어느 모로 보나 예수의 독신과 관련되는 로기온이 전승되어 있다. 백성 앞의 혼인교시와 연결지어 예수는 독신의 가능성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친다: "사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에 의해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분류법에 따라 구성된 이 말씀은 ― 고자가 되는 세 가지 경우를 꼽는데 ― 두 가지 점에서는 날카로움을 띤다. 우선 한 가지는 고자라는 멸시적 개념, 혼인할 수 없도록 거세됨을 가리키는 개념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거세는 신명 23,2 이하; 레위 22,24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는 흉측한 짓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말씀에 따르는 결론인즉 가치전환이라는 점이다. 처음 두 경우에는 외적인 불운으로 말미암아 신체적인 생산불능이라는 한스런 상태에 이르게 된 그런 일을 말하는데, 셋째 부분에서는 고자가 자의로 받아들인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은유다. 그런데 욕설 같은 인상을 주는 고자라는 개념이 그냥 남아 있고 보면, 이 대목이 예수를 향한 공격과 관계가 있다는 추정은 적확하다. 예수는 미혼자로 살기 때문에 적수들한테 고자라는 욕설을 들었으니,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하고 어울려 먹는 바람에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방을 덮어쓴 것과 한가지다.(마태 11,19//).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34-235쪽

예수는 총각으로 살았고 아내와 자녀가 없었으며, 적대자들에게 고자라는 욕설을 들으며 살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딱히 예수가 결혼 여부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가 유부남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결혼했다는 설, 또는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카나의 혼인잔치가 예수 본인의 결혼식이라는 설, 예수의 자손이 프랑스인의 시조라는 설 등이 있다. 3번째의 경우 예수는 사위에게 나라 하나를 만들어주고 그 나라의 초대 황제를 시켰는데, 그 나라가 바로 메로빙거 왕조이며 오늘날의 프랑스의 근본이라는 주장. 특히 댄 브라운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을 써서 대중에게 엄청 유명하게 알려지는 바람에 신학자들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골머리를 썩인 적이 있다. 심지어 고대의 파피루스 기록인 마냥 누가 위조하여 '예수에게는 아내가 있다'는 식의 글을 만들어 학자들조차 속아 넘어간 적도 있다.# 본 문서에서 결혼 여부가 문단이 따로 생길 정도로 길어진 것도 그 영향이 있다고 할 것이다.

카나의 혼인잔치가 예수의 결혼식이라는 주장은 사실 성경을 잘 읽기만 해도 쉽게 논박할 수 있는 상당히 허술한 주장.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나, "여인이시여,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와 같이 해당 혼인잔치가 본인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또 예수가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예수의 후손이 메로빙거 왕조까지 이어졌다면 그 사이 시간이 400여 년이나 되어서, 30년마다 한 세대라고 치면 최소 13세대가 넘으니 방계 후손이 엄청나게 많아야 하는데, 다른 예수의 후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심지어 가난한 노동자인 예수가 어떻게 사위에게 나라를 세우게 시킬 수 있고, 당시 이미 로마의 확고한 영토였던 프랑스에 어떻게 나라를 세우라 시킬 수 있었겠는가.

예수가 결혼했다는 주장에서 단골로 나오는 설명이 '당시 랍비는 결혼을 해야만 인정을 받았는데 예수도 랍비라고 불렸다'는 설명인데, 이는 랍비란 단어를 오독한 것이다. 랍비라는 단어는 1세기 당시에는 '나의 주인', 의역해서 '스승님', '나리', '어르신' 정도의 의미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라삐라는 호칭이 '선생님' 혹은 '스승님'이라는 호칭 대신 모두 네 번 사용된다(마르 9,5; 10,51; 11,21; 14,45). 하지만 이런 사실만으로는 이 호칭이 예수의 가르침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다. ... 전체적으로 보이 예수를 '선생님'(스승님) 혹은 '라삐'라 부른 것을 근거로 그분께서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신 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당시 '별생각 없이 통용되던 관용어'[245]였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55쪽.
당시에는 아직 랍비라는 호칭이 서품된 율사에 대한 존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한정된 사용은 1세기 말경에 비로소 관행이 되었고, 따라서 랍비라는 호칭에서 예수가 한때 어느 랍비 문하에 입학한 일이 있었다는 결론마저 끌어내어서는 안 된다.[246]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23쪽

또 혈연을 매우 중시했던 유대인들의 관념상 예수에게 아내나 자녀가 있었으면 그들이 성경이나 서간 등에 언급되어야 하고,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 하지만 초대 교회의 지도자는 베드로였고,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형제(혹은 사촌 형제)인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맡았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맡은 건 예수와 그나마 가까운 혈연 덕이었을 것이다. 즉 예수는 독신을 평생 유지했을 것이다.

예수 결혼설에 대한 반박은 바트 어만[247] 저서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에서 매우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다빈치 코드 문서에서도 일부 다루고 있다.

여담으로 예수는 정욕을 갖고 여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바오로는 서간을 보면 간음은 당연히 죄고, 정 성욕을 못 참겠으면 결혼을 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하되, 그것도 순결을 유지하는 것에 비해서는 차선책으로 여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임신은 창조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산모와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지만, 성행위 자체는 쾌락을 목적으로 하면 안 된다며 매우 터부시하는 면이 있다. 또한 고대와 중세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수음도 죄악으로 봤고,[248]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소위 '성 혁명'이 일어날 때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억압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을 종교에 돌렸다. 21세기인 지금도 그리스도교는 서양,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를 막론하고 성에 대해 보수적인 포지션을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는 복음서에서 결혼하지 않았다. 사제수도자 모두 예수의 본을 받아 평생 독신을 지키는 것이다.[249] 심지어 수도자가 없고 목회자가 독신을 지키지 않는 개신교에서도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의 아내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 표현되고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표현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무엇보다도 복음서의 예수 스스로가 부부나 혼인과 연관된 가르침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위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다. 이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일부일처제,[250] 혼인 불가해성 교리와[251] 큰 연관을 가지고 있다.
마태 9,14~15과 그 병행구 그리고 마태 22,11~14; 25,6; 요한 3,29에서 신랑은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이사 54,5~6에 등장한다.[252]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4-3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253]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254]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7-29)

12.3. 외모

12.3.1. 회화의 묘사

파일:sacred heart of jesus.jpg 파일:The_Head_of_Christ_by_Warner_Sallman_1941.jpg
예수 성심(聖心) 그리스도의 두상, 워너 샐먼 작(1941)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모습이자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수의 외모. 상당히 구체적이고 일관적으로 묘사된다. 서구적인 외모에 어깨까지 닿는 정도의 길이의 갈색 곱슬머리에, 앞머리를 옆과 뒤로 넘겨 늘어뜨렸다. 그리고 약간의 수염을 기른, 긴 얼굴형의 젊은 남성이다. 체격은 마른 편이다.
파일:Cefalù_Pantocrator_retouched.jpg 파일:xristospantokrator-agia-sofia.jpg
체팔루 대성당, 이탈리아 시칠리아, 12세기 하기아 소피아 성당, 튀르키예 이스탄불, 13세기
이 예수의 묘사는 이콘 양식의 하나인 '크리스토스 판토그라토(전능하신 그리스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판토그라토는 전능하다는 의미로, 예수가 의자에 앉아 왼손엔 성경을 들고 정면을 보며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의미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이콘 양식이다.

원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짧은 머리 예수가 나오는 등 예수의 묘사는 통일되지 않았다. 현재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미술은 주로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카타콤에서 발굴할 수 있다. 원래 그리스도교가 퍼진 중심지를 생각하면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등에서도 많이 발굴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성상 파괴 운동이슬람의 지배를 거치며 해당 지역들의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다. 또 1세기까지만 해도 유대교적 관념이 많이 남아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일종의 우상숭배처럼 여겨져서 예수를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물고기, 혹은 빵과 포도주 잔, 십자가 같은 상징적인 묘사가 많았다.

그러다가 대략 2~3세기경부터 긴 머리 예수를 묘사한 그림이 나오기 시작한다. 왜 예수의 머리카락을 길게 묘사하게 된 건지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 첫째로는 당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그리스 철학자에 비견하는 시도를 자주 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중 머리를 길렀던 아르키메데스아폴로니우스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됐다는 설. 둘째로는 당시 조각상에서 높은 신, 특히 제우스포세이돈은 긴 머리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 셋째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 탄생 때에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천사가 말하는데, 이는 70인역 성경에서 나지르 사람을 오역한 문장으로 하느님에게 봉헌되어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 삼손이 바로 그 나지르 사람이다. 즉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머리를 길렀다고 추정해서 그렇게 묘사했다는 설. 넷째로는 헤어스타일을 다르게 그리면 다른 사람들이랑 구분하기 쉬워서 그렇게 그렸다는 설이 있다. 다섯째로는 예수가 원래 머리카락이 좀 긴 편이었다는 극히 심플한 주장.

다만 이 시대의 긴 머리 예수는 여전히 '우리가 아는 모습'의 묘사가 아니었으며, 묘사들이 통일되지도 않았다. 긴 얼굴의 젊은 남성이 아니라, 기골이 큰 중년 남성에 곱슬거림이 풍성한 장발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묘사는 실제로 제우스포세이돈 회화의 영향일 수 있다.
파일:Ravenna_Jesus.jpg 파일:sinai jesus pantocrator.jpg
라벤나갈라 플라키디아의 영묘의 모자이크, 5세기(左) 라벤나 대성당의 모자이크, 6세기(右) 성 카테리나 수도원, 이집트 시나이 반도, 6세기
그러다가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공인되고서 그리스도교 미술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4~7세기까지 동안 예수의 묘사는 통일되지 않았고, 각 지역 교회의 문화가 반영되어 서로 다른 모습의 예수를 묘사했다. 깔끔하게 면도한 남성상을 좋아하는 헬레니즘-라틴 문화에서는,[255] 이러한 남성상에 따라서 주로 수염 없이 예수를 그렸다. 반면 수염이 풍성한 남성상을 선호하는 근동 문화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예수의 모습'이라 인식하는 바로 그 모습에 가깝게 예수를 그렸다.[256] 그리고 현대인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듯, 근동에서 제시한 후자의 초상이 결국 살아남고 인정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 등 동방 교회에서는 성상파괴운동을 거치면서 이콘이 양식을 정확하게 갖춰서 묘사되어야 한다는 교리가 정착되었고, 그에 따라 예수의 모습 역시 저 모습으로 완전히 정착한다. 정교회의 성화는 정말로 '공식'이 있어서 딱딱 정확히 양식을 맞춰 그려야 한다. 구도나 자세, 표정, 심지어 옷의 색도 함부로 바꿔 그리지 못한다.

다만 말해둘 것은 가장 오래된 이콘이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당대의 것은 아니며 저기 묘사된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까지 이어진 예수 회화의 가장 오래된 원형인 시나이 카타리나 수도원의 이콘도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기와는 300년에서 길게는 5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또한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되는 이상 작성자의 주관, 즉 제작 대상에 대한 경모의 감정이나 작성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형태의 신성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미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입멸 5백 년 뒤에야 처음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한 석가모니 부처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회화 상의 묘사 역시 당사자의 실존 화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반면 서방 교회는 동방보다 이콘을 더 자유롭게 그렸으며, 정말 온갖 화풍의 예수 모습이 다 나타났다. 6세기 밀라노 모자이크에서는 헬레니즘적 남성상으로 예수를 묘사하고, 1300년경의 피렌체 이콘에서는 근동 남성상에 따른 수염 있는 모습으로 그린다. 심지어 15세기 프랑스 프레스코화에서는 마치 콥트인처럼 그렸다. 심지어 르네상스 시기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최후의 심판의 경우도 헬레니즘적인 예수상에 가까우며, 수염 가득한 예수 모습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점진적으로 서방 문화에 보급된 것이다.

한편 이 예수의 묘사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를 막론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가 아는 모습의 예수는 중세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그린 것'이라는 말이 서양과 한국 교회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을 정도. 인종 차별을 극복하려는 취지는 좋지만 상기했듯 현대 예수의 초상은 시리아-이집트 일대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반대되는 주장으로, 그리스도교 미술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낭설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가 체사레 보르자의 얼굴이 예수의 초상화의 모델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체사레 보르자의 출생 연도(1475)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체사레 보르자는 본인의 진짜 얼굴 초상부터가 안 전해진다. 지금 있는 그림은 후대의 상상도다. 그가 살던 시대를 생각하면, 오히려 체사레 보르자가 예수의 얼굴을 모방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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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에게 발현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성화가 있는데, 굉장한 훈남이기는 하다. 다만 이 성화도 원본은 1934년도에 그려진 것이 따로 있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위 성화는 성녀 파우스티나가 사망하고 5년 뒤인 아돌프 힐라라는 화가가 성녀 파우스티나의 고해사제였던 안드레아스 신부의 감독하에 그린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감사로 이 성화를 봉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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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수의에 새겨진 화상을 복원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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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측 페르시아 세밀화에서 묘사된, 설교하는 예수

12.3.2. 역사적 예수

유럽권과 아메리카권은 인종에 관해 다소 민감하게 여기기 때문에 예수의 인종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나치스는 사실 예수는 아리아인이라는 어거지까지 썼다. 이스라엘에 주둔한 로마군 소속 게르만족 용병의 사생아라는 이상한 이론을 들고 나올 정도. 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주의에 심취해 있던 리하르트 바그너도 이렇게 믿은 사람 중 하나.

반대로 스파이크 리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맬컴 엑스에서도 "하느님백인이죠, 안 그런가요?"라는 목사에게 맬컴 엑스가 "성경을 바탕으로 볼 때 예수는 전형적인 아랍인 외모를 가졌을 텐데, 헛소리하지 마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나온다.[258] 물론 백인 우월주의를 까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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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실제 모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의 리처드 니브 교수가 다큐멘터리 <Son of God>을 통해 공개한 예수의 재현도

이 재현도는 시리아 지방의 유대인 군락에서 발굴된 두개골 3개를 가지고 복원한 것이며, 예수의 신장 역시 당시 평균 신장인 155~166cm이고 체중은 대략 50kg의 저체중으로 추측했다.출처1출처2 다만 정확히는 예수 본인을 재현했다기 보다는 그 시대 당시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평균 외모 재현도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심지어 평균이라고 치기에도 표본의 수가 상당히 작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비유하면 2천 년 뒤 미래인들이 서울에 살았던 특정인의 얼굴을 복원하기 위해 부산 사람의 두개골 3개로 평균을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복원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같은 민족들도 외모는 개체별로 정말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니, 실제 정확한 예수의 모습(얼굴 및 체형)은 이 '복원도'와 같을 가능성은 적다. 단지 평균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고 지레짐작 했다면, 이 복원도를 바오로베드로세례자 요한이나 심지어는 이스카리옷 유다의 모습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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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에게는 수혈 거부로 문제를 일으킨 사이비종교로 더 많이 알려진, 소수 종파인 여호와의 증인 역시 역사적 고증을 명분으로[259] 저 복원도와 유사한 모습의 예수 초상을 주로 사용한다. 물론 해당 복원도와 완전히 같진 않고 비교적 현대 중동계 혹은 라틴계 백인과 더 흡사한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인종적으로 유럽코카소이드는 아니지만 중동계 코카소이드는 맞다. 당시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은 셈족의 한 계통으로, 현대의 시리아인, 레바논인, 팔레스타인인과 함께 레반트계 코카소이드로 분류된다. 예수의 초상을 억지로 기존 초상과 다른 것을 제시하는 시도들은 유럽에서 꽤 민감한 화제인 인종주의와 관련된 바, 오히려 저들도 근거가 불분명하면서 억지로 다른 의견을 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서구 중심으로 이뤄진 예수 관련 논의를 중동으로 다시 돌린다는 점에서 의도는 좋은 시도이나,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우리가 아는 예수 초상의 직접적인 원조는 중동이다. 동방 교회가 현대의 예수 초상을 자신들이 지켜낸 것으로 간주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동방 교회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심지어 'Son of God'에서 제시한 재현도는 오히려 중동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많이 작용된 그림이다. 사실 예수가 탄생한 레반트 지역은 오래 전부터 지중해권이라는 특성상 역사적으로 남유럽권과 수많은 접점이 있었던 곳이며 고대부터 오랜 교역과 이주를 반복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권 사람들과 외견상 별 차이가 없다.[260] 굳이 따진다면 예수와 유전적으로 가장 닮은 현대 민족은 레바논인요르단인팔레스타인인들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예수의 정확한 모습을 재현하거나 추측할 증거는 없다시피하다. 성경을 비롯한 기록에는 예수의 외모에 대한 묘사나, 체격에 대한 말도 없으니 당시 이스라엘에서 평범하다고 받아들여질 외모였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예수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는 소크라테스가 눈 뜨고 못 봐줄 추남[261]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붓다는 상당한 미남으로 묘사되며, 공자는 뻐드렁니에 9척 6촌의 거구였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과 대조적이다.[262] 그나마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풍습으로 생각하면 미술에서 묘사처럼 어깨까지 닿는 긴 머리가 아닌 짧은 머리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정도이다.

12.3.3. 신학적 예수의 모습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이사야서 53장 2절
그가 읽던 성서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굴욕만 당하였다. 지상에서 그의 생애가 끝났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내시는 필립보에게 "한 가지 묻겠는데 이 말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혹은 딴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필립보는 이 성서 말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말씀을 풀어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8장 32-35절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바울로로부터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을 예수를 묘사한 걸로 해석했다. 즉 신학에서는 예수의 모습을 비참한 모습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7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객관적으로는 이 구절이 실제 예수의 외모를 묘사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이사야서의 해당 예언에서 말하는 미(美)는 군주나 장군으로서 가진 위엄을 말한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미'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은 '메시아께서는 위엄 쩌시는 정치적 지도자로 오실 것이다'라는 당대의 믿음을 부정하는 기록으로 봐야 한다. 또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을 예수로 해석하는 것 역시, 예수가 평소에 이목구비가 못생겼다는 의미보다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비참하게 고통 받으셨다'고 강조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 일곱 등경 한가운데에 사람같이 생긴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또는 눈같이 희었으며 눈은 불꽃 같았고
발은 풀무불에 단 놋쇠 같았으며 음성은 큰 물 소리 같았습니다.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고 얼굴은 대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요한의 묵시록 1장 13-16절

반면 요한묵시록에서는 부활하고 승천했지만 곧 재림할, 위엄찬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보다시피 초월적인 존재가 된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지 구체적인 이목구비를 말한 것이 아니라서, 실제 예수의 모습을 추측하는 데에는 별 도움은 안 된다.

양쪽 다 구체적으로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건 아니지만 신학적으로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는 해석이다. 전자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수난받는 예수, 후자는 부활하고 재림하여 인류를 심판할 전능한 예수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도 '예수님은 처참하게 그리는 것이 좋다' vs '예수님은 위엄차고 멋지게 그리는 게 좋다'는 의견을 서로 대립하며 내놓기도 했다. 물론 현재 그리스도교 미술은 둘 다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중요한 논쟁은 아니다.

13. 가공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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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여담

서구권에서는 놀랐을 때 감탄사로 이 사람이나 이 사람의 아버지, 아니면 이 사람의 어머니 등을 자주 찾는다. 영어의 경우 Jesus Christ!, 혹은 Oh my God! 프랑스어의 경우 몽디외(Mon Dieu), 이탈리아어의 경우 맘마미아. 특히 맘마미아는 단어의 모양만 보면 그냥 '나의 엄마'인데, 진짜 엄마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여간 예수가 서양에 문화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4대 성인 중 1명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지도 면에서는 그들 중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유럽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4대 성인이라고 당연히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성인과 한자 문화권의 성인(聖人)은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다.

워낙 파급 효과가 거대한 분이다 보니 사이비 종교에서 이분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왜곡해서 벤치마킹을 한다. 또한 사이비 종교의 과반수가 그리스도 계열의 사이비 종교인 이유 역시 이분의 인지도가 세계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게, 이걸 본인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어도 예수에 관해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꽤 나온다. 그러나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비신자들이 예수를 도덕적 스승으로만 여기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몽골의 징기스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의 이름이 어감상 굉장히 난감하다. 물론 예수게이는 예수와도 게이와도 관련이 없으며, 순전한 우연의 일치이다. 그리고 현대 몽골어에서는 예수를 "예수스(Есүс)"라고 부른다. 사람 이름인 고유명사[263]이다.

한국어경주방언으로는 여우를 예수라고도 하며, 그리스도교의 예수와 동음이의어이고 소설가 김동리가 이와 관련된 사건을 겪었는데 그게 나중에 소설 무녀도창작 배경이 되었다.

2013년 돌라 인디디스(Dola Indidis)라는 케냐의 한 목사예수를 죽인 죄이탈리아[264]이스라엘[265]을 고소했다고 한다.


[1] 서력기원의 정의에 따르면 AD 원년(1년)이어야겠지만, 서력기원이 원년을 정의할 때 오차가 있었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출생 연도는 기원전 4년이다. 학자들에 따라, 어떤 기록을 사용하냐에 따라 생년이 들쭉날쭉하는데, 이는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크게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 그리스도교에서는 이후 부활 및 승천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두 날을 주님 부활 대축일(부활절) 및 주님 승천 대축일로 기념한다.[3] 기독교에서는 복음서의 서술에 따라 사망 후 서기 30년 4월 10일 혹은 서기 33년 4월 6일에 예루살렘 정원 무덤(현재 성묘 교회,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음.)에서 부활했고 서기 30년 5월 19일 혹은 서기 33년 5월 15일에 예루살렘 감람산에서 승천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역사적 예수의 서술에서는 제외된다.[4] 공생애 이전의 삶 문단 참조.[5] 마태오 복음서의 서두는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이어지는 부계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6]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나자렛의 요셉은 예수의 양아버지이고, 예수는 본성(natura)적으로 하느님의 외아들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를 때에는 은총(gratia)에 의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 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 3, 19, 1)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성 아타나시오, 육화론, 54, 3)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 제2독서: Opera omnia, 29권(파리, 1876), 336면.)
-가톨릭 교리서 제460항

또한 예수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자렛의 요셉과의 가족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루가 복음서 2장 33절에서는 요셉을 아버지(patēr)라 명시하고 있으며, 신약이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도 예수와 요셉의 가족 관계를 전제할 때 성립된다.
[논란] 동복동생인지, 이복동생인지, 혹은 형제라 불릴 정도로 친밀한 친족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경에서는 이들은 형제자매라는 표현으로 수식된다. 성모의 평생동정 전승을 인정하는 가톨릭과 정교회는 전승과 당대 유대인들의 언어 습관, 그리고 죽아가는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 성모를 이들이 아닌 사도 요한에게 부탁한 점을 근거로 이들을 의형제나 친척# 혹은 아주 친밀한 사이(속칭 형동생 하는)로 간주한다. 특히 요한의 이야기를 결정적 근거로 보는데 장자로서 어머니를 부탁하는데 배제할 정도로 동생들을 믿지 못했다면 어떻게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수장의 자리를 얻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전승을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는 단어 그대로 동복형제로 본다.[8] 전통적으로 소 야고보와 동일인물로 파악되었으나 이견이 있다.#[9] 예루살렘 교회의 첫 수장이며 따라서 후대에는 첫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간주된다.[10] 전승에 따르면 유다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12사도유다 타대오나 예수를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과는 동명이인이다.[11]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의 뒤를 이어 2대 예루살렘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이쪽도 사도 시몬, 시몬 바르요나와 동명이인이다.[12] 당대 발음인 코이네 그리스어 기준으로 읽은 것이다. 현대 그리스어로는 이이수스 흐리스토스.[13] 이 관점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할 때 특히 마태오 복음서에서 두드러진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할 것을 요청하며 다음 대당명제(율법에 대한 새로운 개념) 등을 제시한다: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마태 5,21-26)"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마태 5,27-30) ③ "아내를 버리려면 이혼장을 써 주어라" → "불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마태 5,31-32)[14] 이 관점은 특히 루가 복음서에서 두드러진다. 24장에서 제자는 예수의 신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현대의 역사적 예수 담론에서도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본다. 일찍이 알베르트 슈바이처에 의해 주장된 이 관점은 샌더스(Ed Parish Sanders), 마이어(John Paul Meier) 등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지지되어,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의 기본 키워드로 통한다.[15] 오히려 무함마드 이전 최고위 선지자라고 가르친다. 예수에 대한 이야기도 따로 가르칠 정도.[16] 마태오 복음서 12장 46절-50절 참고.[17] 관점에 따라 달리 본다.[18] 예수 신화론 요약[19] 이 행적에 대한 논쟁은 역사적 예수 문서에서 말해지듯 성서를 바탕으로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견해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현대인들에게도 일반적으로 본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데다가, 내용이 매우 직설적이어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비신자들 사이에서도 별 논쟁이 안 생긴다. 예수의 행적 논쟁은 오히려 신학자들 사이에서 도는 떡밥이다.[20] 예수를 부정하고 야훼만을 숭배하는 것은 유대교인, 삼위일체론에 따라 예수를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야훼가 보낸 무함마드 이전의 예언자로 여기는 것은 이슬람교인의 대표적인 관점들이다. 이외의 수많은 자세한 내용들은 아래에 후술되어 있다.[21] 다만 유대교에서는 이 책의 후반부동인지로 치부한다.[22] 그리스도교에서 창세기의 6일 창조를 문자 그대로 6일의 시간 동안 이루어진 창조라고만 보는 것은 아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 개혁자 장 칼뱅#은 문자 그대로의 시간적 의미라고 보지 않았다. 가톨릭에서는 시간적 의미의 6일이라는 해석을 하지 않으며#, 개신교에서도 근본주의 진영의 주장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있다. 로널드 L. 넘버스의 『창조론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정통 개신교의 역사적-신학적 산물이 아니라 20세기 초엽의 안식교에서 생성된 것이다.[23] 동질성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아리우스파, 구별을 완전히 부정하는 단일신론파[24] 부모와 아들은 그리스도교를 저격한 것이고, 딸은 아랍의 전통 다신교를 저격한 것이다.[25] 마태오 복음서 5~7장 산상 수훈 참고.[26]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27] 다만 삼위일체론에 대한 구체적 용어 정립은 후대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예수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다신론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AD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던 생각이다. 자세한 건 아래의 '예수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부분 참조.[28] 동질성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아리우스파, 구별을 완전히 부정하는 단일신론파[29] 영어 번역본을 중역하되, 이 문서에서는 person(페르소나)은 위격으로, nature는 본성으로, essence는 본질로 번역했다.[30] '한처음'은 라틴어로 In principio. 창세기에서도 사용된 말로, 단순히 시간상으로 처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단순한 시간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정도의 의미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인 '한처음'이라는 요상한 말로 번역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타입문 세계관의 근원이라는 말이 떠오를 수도 있는데, 사실 진짜로 그것과 비슷한 의미이다.[31] 라틴어로 caro. 번역에 따라 이를 육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한국 가톨릭 번역판 성경. 그런데 라틴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말은 homo이고, 그렇기에 요한 복음서에서 굳이 homo 대신 caro를 택한 것은 꽤 주목할 만하다. 굳이 이 구절에서 복음서가 caro라는 말을 쓴 것은, 예수가 단순히 인간의 형상을 취한 것이 아니라, 나약한 육신을 지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었다는 뜻으로 적은 것이다. 디아블로 시리즈에서 티리엘필멸자가 된 것이 연상될 수 있는데 실제로 티리엘의 모델이 예수이고, 이 구절에서 caro는 '필멸자'에 가까운 뉘앙스로 쓰인 말이다.[32] 원죄가 없다는 점 때문에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은 원래 원죄가 없는데 아담하와의 죄 때문에 원죄에 시달리는 것이다. 즉 예수가 원죄가 없다고 해서 그가 사람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33] 인용한 국역 성경영어 성경은 각각 가톨릭 성경과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새 미국 성경 개정판, NABRE)이다. I AM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 역본들을 인용했다. 또한 NABRE에서 I AM을 대문자로 강조한 것도 그대로 인용했다.[34] I was가 자연스러운데, I am이라는 현재 시제로 자신이 신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불변의 진리는 반드시 현재형으로 서술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 때문에 이 발언 직후 유대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 라면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으나, '있다'의 의도를 유대인들이 제대로 이해했고, 신성 모독으로 간주했기 때문. 한국어 가톨릭 번역에서는 과거형 시제를 써서 있'었'다라고 말하기에 덜 와닿을지도 모르지만, 영어 번역에서는 이 부분이 직역되어 있다.[35] 참고로 흔히 성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알려진 야훼는, 성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삼위 전체를 모두 지칭한다. 그렇기에 가톨릭 성경 등에서 야훼를 성부가 아니라 주님(Dominus)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애초에 야훼는 엄밀히 말하자면 제우스, 오딘 같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존재 방식의 표현에 가까운 어휘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말 그대로 I AM이다. 예수가 야훼라고 하는 게 양태론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양태론은 예수가 성부라고 하는 것이지 야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36]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며, 하느님이 창조한 반신급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가 세력을 얻은 곳은 중동 지역인데, 훗날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이슬람이 이해하는 예수는 아리우스파의 관점과 비슷하다.[37] '예수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보지 않는다. 위의 칼케돈 신조에서 보듯이, 정통 신학에서는 예수에게 인성과 신성이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있다고 본다.[38] 예수에게는 신성만이 존재하거나, 인성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39] 성령은 성부와 예수에게서 발한다고 보았다.[40]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한다고 보았다.[41]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바보가 아니며, 예수에게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유일신 신앙을 지키는 건 그들에게도 당연히 중요했다.[42] 1테살 4,16-17[43] 필리 2,6-7[44] 요한 1,1[45] 1코린 8,6. 사소한 것처럼 보이겠으나, 성서에서 희랍어 'heis'(유일한)나 'monos'(홀로)는 하느님께 주로 부여되는 표현이다.[46] 그러므로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가 또한 14대이다. 마태오 복음서 1:17(공동번역성서)[47] 사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이 처녀라는 사실은 (최소한 고대의 상식으로는) 자명한 것이다. 따라서 처녀 잉태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48] 볼드체는 책에서 강조된 것.[49] 일찍이 마르치온 같은 경우 "구약 폐지하고 신약으로만 가시죠?"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교회에 수용되지 않았다.[50] 개역한글판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가 앞에 붙지만 개역개정판에선 생략했다.[51] 왼쪽은 가톨릭 성경, 오른쪽은 개신교 개역개정 성경. 워낙 중요한 구절이다 보니, 번역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맛깔나는 번역을 한다. 굳이 양쪽 번역을 다 인용한 것도 이 때문.[52] 루가 22장 37절 참고. 단 주의를 주자면, 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을 반드시 예수로 해석해야'만' 그리스도교 신학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로마 15장 21절에서는 이사야 52장 15절을 사도 바울로에게 적용되는데, 이를 통해 신약 성경이 이 구절을 예수에게'만' 적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이 '야훼의 종'을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유대교식 해석법도 그리스도교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새 예루살렘'이자 '예수의 신부新婦'이며(묵시 21,2), 때로는 예수와 동일시된다.(사도 9,4-5)[53] 칠십인역의 이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약 본문은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54] 예언자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나왔고, 이후에 이민족인 아시리아에 유대교 신앙이 전파된다. 이에 대비되어 예수는 죽은 지 셋째 날에 부활하고, 이후에 민족 신앙적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퍼진다. 여기서 눈썰미가 빠른 사람은,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이었고 "예수는 셋째 날에" 부활이므로 날짜가 하루 차이 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시대에 따른 어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복음서는 이 어휘 변화의 과도기로 학계에서 추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루가의 복음서에는 예수의 부활이 '사흘 만에'로 표현되고, 루카의 복음서에는 '사흗날에'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공관 복음은 모두 예수가 금요일에 사망하여 주일(일요일)에 부활했음을 고백한다.[55] 번역은 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7쪽-138쪽에서 인용. 다음 링크에서 각 언어 번역을 볼 수 있다: #[56]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이들이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으며 예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역사학적/주석학적 차원에서는 부활 체험(Experience)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는 직접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이 어떤 무언가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음"을 함의하는 표현이다.[57] 예수의 제자들은 '믿음'을 통해서 현실을 이겨내고 재해석할 만큼의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십자가형 당시 스승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였으며, 복음서는 부활을 제자들조차 기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여기에 대해 '제자단에 대한 묘사는 부활을 부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각색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복음서의 텍스트는 제자단을 그래도 덜 한심하게 묘사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베드로와 동료들은 십자가형 당시 예루살렘에 머무른 게 아니라 아예 갈릴래아까지 도주했으며, 갈릴래아로 도주한 핵심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머문 여제자들이 별개의 루트로 부활 체험을 한 것이다.(참고: Gerhard Lohfink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제18장.) 즉 역사적으로 제자단은 복음서 텍스트보다 더 소시민적이고 더 우스꽝스럽고 더 한심한 모습이었을 것이며, 이런 제자단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어떤 충격적인 체험이 온 것이다.[58]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59] (논문 내 주석)R. Penna, I ritratti originali di Gesù il Cristo. Inizi e sviluppi della cristologia neotestamentaria. I. Gli inizi (Studia sulla Bibblia e il suo ambiente), Milan, san Paolo, 1996. pp. 180-181 참조.[60] (논문 내 주석) D. Marmuerat, "Cequ'ils n'ont pas dit de Pâques", MB 25 (marsavril 2000), pp. 31-35(p.32).[61] (논문 내 주석)R. Pesch, "La genèse de la foi en la résurrection de Jésus. Une nouvelle tentative", dans M. Nenzerath, A. Schmid et J. Guillêt èds. La Pâque du Christ, Mystère de salut. Mélanges F. X. Durrwell (Lectio Divina 112), Paris, Cerf, 1982, pp. 51-74(p.54)에서 인용.[62] 필립비서는 역사 비평적으로 AD 55년쯤에 작성된 바울로 친서로 여겨진다.[63] 1개의 우시아(본질)와 3개의 휘포스타시스(위격)의 하느님; 1개의 휘포스타시스(위격)과 2개의 우시아(본질)의 예수.[64] all hēmīn _heis theos ho patēr_ ex hou ta panta kai hēmeis eis auton,
kai _heis kyrios Iēsous Christos_ di hou ta panta kai hēmeis di autou.
[65] 그 외에, 글의 구성에서 보더라도 의도적으로 '한 분 하느님'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대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66] 상기한 성경 인용들은 의도적으로 헬레니즘적 텍스트들과 요한 복음서를 배제하고 발췌한 것이다.[67] Gerd Theißen, 《Die Religion der ersten Christen. Eine Theorie des Urchristentums》, Gütersloh 42008, 73쪽.[68] Theißen, 같은 책, 같은 쪽[69] 메시아[70] 예수[71] 아들[72] 마리아의[73] 선지자(였다)[74] 하나님의[75] 그분의 말씀[76] 그분이 주신[77] 에게[78] 마리아[79] 그리고 영(靈)[80] 그분으로부터의[81] 어휘 분석 출처: #[82] 이슬람에서의 유일신인 알라는 부모 자식이나 형제와 같은 가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83] 부모와 아들은 유대교그리스도교를 저격한 것이고, 딸은 아랍의 전통 다신교를 저격한 것이다.[84] 다만 예수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영'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사용한다.(꾸란 3,45;4,171) 물론 이 말을 그리스도인과 같은 의미로 쓰는 건 아니다.[85] 최영길 역은 인터넷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는 매우 고마운 번역이지만, 번역 정확성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좋지가 않다. 어지간하면 다른 번역들과 대조하는 게 좋다. 아래 인용한 영어 번역들은 https://corpus.quran.com/에서 제공하는 7개의 영어 병행 번역들이다.[86] 최영길, Sahih International, Shakir, Muhammad Sarwar, Mohsin Khan, Arberry는 그렇다는 쪽으로 해석하지만, Pickthall, Yusuf Ali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것처럼 보였다'로 해석한다.[87] 꾸란 4,157-158에 대해서는 이슬람 역사 안에서도 매우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공존한다. 여기에 대한 이슬람 주석의 역사에 대해서는 Lawson, The Crucifixion and the Qur'an: A Study in the History of Muslim Thought를 참조하라.[88] Reynolds, "The Muslim Jesus: Dead or Alive", 251.[89] Parrinder, Jesus in the Qur'an, 106 참조.[90] 19,33;3,55;5,117[91] 5,17[92] Ali, The Holy Qur'an: Text, Translation and Commentary, 230 참조.[93] Ayoub, "Towards an Islamic christology, II: the death of Jesus, reality or delusion (A Study of the Death of Jesus in Tafsir Literature)", 91-121.[94]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이 사람이다.[95] 무함마드는 첫 번째 부인인 하디자 빈트후와일리드의 친척이다.[96] 오늘날 튀니지에는 극소수나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남아있는데 바로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이다.[97] 성령의 강림 없이는 예배가 무효가 된다고 주장하던 고대 그리스도교 분파[98] 다만 이건 예전까지의 정설이었고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14세기까지, 길게는 15세기 말까지 튀니지에 그리스도교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14세기면 콥트교 다수 국가였던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콥트교가 이슬람에게 다수를 허용한 시기이다. 튀니지에서도 그리스도교가 상당히 오래 버텼다는 소리.[99] 발췌자 주석: Third Quest는 1980년대 중반부터의 학풍을 말한다.[100] "역사가가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라든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확인해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사실상 기적을 행하는 사람, 악마 추방자요 치유자로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해 줄 수 있다."(Charles Perrot, 《예수와 역사》, 박상래 옮김, 301쪽)[101] '무렵'이라는 애매한 말을 사용한 이유는,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 날짜가 하루 정도 차이가 나고, 자정을 경계로 보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만찬의 다음 날이지만, 일몰을 경계로 보는 당대 유대인 기준으로는 만찬 당일이기 때문이다.[102]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이들이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으며 예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역사학적/주석학적 차원에서는 부활 체험(Experience)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는 직접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이 어떤 무언가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음"을 함의하는 표현이다.[103] 슈바이처역사적 예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투영한다. 슈바이처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죽여서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인물로 표현된다. 슈바이처는 대속론을 믿지 않고 역사적 예수만 믿었다.[104] 헤로데 대왕 당시는 헤로데가 로마를 등에 업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라서 아직 공식적으로는 로마의 땅은 아니었다. 헤로데 대왕이 죽자마자 후계자들의 통치권은 로마에게 뺏기지만.[105] 레이몬드 E. 브라운, 『메시아의 탄생』, CLC, 2014, 825-826p. 이하 『메시아의 탄생』으로 표기[106]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2번이나 강조하는 바울이 다윗의 혈통에 무관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으며, 다윗 혈통에 대해 오류를 범할 경우에는 그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에 의해 공격당할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메시아의 탄생』, 831p[107] 『메시아의 탄생』, 828-830p[108] 그러므로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가 또한 14대이다. 마태오 복음서 1:17(공동번역성서)[109] 단, 조로아스터교의 동정녀 신화는 조로아스터의 정액이 풀려져 있던 호수에서 동정녀가 목욕을 해서 조로아스터의 자식을 잉태한다는 내용이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신화와 서사 구조적으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110] 태어났을 때 그 바로 위에서 크게 빛나는 별이 밤하늘에 떴다고 한다.[111] 가톨릭 대사전의 해당 문서에선, 이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전통적인 기념일."로 설명하고 있다.[112] 뜨거운 여름날 내리쬐는 태양은 피서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맙게 여길 리가 없다.[113] 세례자 요한이 니산월 14일(태양력 3월 말경)인 파스카에 태어났다는 계산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티쉬리 15일(태양력 9월 말경)인 초막절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성서학적 해석으로는 초막절 출생은 의미가 있다.[114] 루카의 복음서 2:7[115] 이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의 부름으로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는데, 헤로대 대왕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에 가지 않고 나사렛에서 머물게 된다.[116] Patrick, "John The Apology of Origen in Reply to Celsus", pages 22–24, 2009 (ISBN 1-110-13388-X)[117] Schafer Peter, "Jesus in the Talmud",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15–24, 2009 (ISBN 9781400827619). 해당 자료는 에세이지만 '사피엔스'처럼 수많은 조사와 논문을 근거로 뒷받침하고 있다.[118] Tabor, James D. "The Jesus Dynasty: A New Historical Investigation of Jesus, His Royal Family, and the Birth of Christianity", New York: Simon & Schuster, 2006 (ISBN 0-7432-8723-1)[119]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인간)인 세멜레가 제우스로 부터 받은 죽은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 비교의 교리에 따르면 제우스의 아들 자그레우스가 티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가 디오니소스로 부활했다고 한다)의 심장 일부분을 음료 형태로 마심으로써 임신한다.(출처 : Hyginus, Gaius Julius, Fabulae in Apollodorus' Library and Hyginus' Fabuae: Two Handbooks of Greek Mythology,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07,ISBN 978-0-87220-821-6). 상술한 바와 같이 죽임을 당한 후 2번 태어나므로 이를 부활로 보는 견해가 존재하며, 인간 어머니와 신인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반인반신으로 볼 수 있다.[120] 페르세우스 어머니 다나에가 금빛물로 목욕함을 통해 제우스의 아들인 페르세우스를 임신하게 된다. (출처 : Warner, Marina, "Alone of All Her Sex: The Myth and Cult of the Virgin Mary", Oxford University Press)[121] Warner, Marina, "Alone of All Her Sex: The Myth and Cult of the Virgin Mary",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963994-6, 2016[122] Litwa, M. David, Iesus Deus, "The Early Christian Depiction of Jesus as a Mediterranean God", Minnesota Fortress Press, ISBN 978-1-4514-7985-0, 2014[123] 이집트 학자인 제럴드 메이시 (Gerald Massey, 1828-1927)가 이집트 '사자의 서'를 해석하여 주장함[124] 이집트의 신이자 왕으로서 지지를 받다가 이를 시기한 세트(남동생)에게 죽음을 당하고 이시스(여동생)에 의해 부활한 후 죽은 자의 나라인 두아트의 왕이 된다. (출처: Pinch, Geraldine "Egyptian Mythology: A Guide to the Gods, Goddesses, and Traditions of Ancient Egypt"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ISBN 978-0-19-517024-5)[125] Eddy, Paul Rhodes; Boyd, Gregory A, "The Jesus Legend: A Case for the Historical Reliability of the Synoptic Jesus Tradition", Grand Rapids Michigan Baker Academic ISBN 978-0801031144, 2007[126] 그리스도교 안의 주석학과 세속적 주석학에서 그렇게 한다.[127] 사실 각 그리스 신화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전문가들의 분석도 볼 것 없이 일반인들이 봐도 전혀 비슷하지 않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부활에 실패하며, 디오니소스 신화는 정본에서는 처녀 수태도 부활도 존재하지 않고 오르페우스 비교에 나오는 자그레우스 신화에서만 처녀 수태와 부활이 나온다. 오시리스 신화 또한 부활이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플롯에서 상당히 차이가 많다.[128] Bart D. Ehrman, "How Jesus Became God: The Exaltation of a Jewish Preacher from Galilee", Harper Collins, 2014 ISBN 0062252194, 9780062252197, 국내 번역서 바트어만,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갈라파고스 출판사, 2015[129] The Historical Jesus: Five Views, October 8, 2009, by James K. Beilby., 국내에서는 <역사적 예수 논쟁>, 2014, 새물결플러스 번역 출판함[130] "우리는 탄생 이야기들의 기원과 전수 과정은 예수님의 사역, 죽음, 부활 이야기들의 기원이나 전수 과정과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자료를 결합시킨 것은 한 명의 복음서 기자이다.[책 속 주석: 마태복음의 유아기 내러티브와 복음서 나머지 부분의 문체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은 처음 두 장이 다른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을 배제시킨다]"(『메시아의 탄생』 74쪽)[131]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태오 복음의 탄생 내러티브를 저자 혼자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마태오 이전 전승(pre-Matthean)이 탄생 내러티브 안에 들어있으며,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천사, 이집트로의 피신, 헤로데의 유아 학살 등은 마태오 이전 전승에 속한다.(참고: 『메시아의 탄생』 172쪽) "Knox, W. L., Sources, II 125는 '마태가 유아기 내러티브의 편집 과정에서 보통 이상의 개정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보통이라는 것은 복음서의 주요 내러티브 속에서 마태가 마가복음을 개정한 정도를 말한다."(『메시아의 탄생』 165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Joachin Gilka)는 마태오와 루카가 사용한 전승의 원천이 분명히 가계 전승(家系傳承)들과 관련된다고 말했다.(Joachim Gnilka, Das Matthäusevangelium. Erster Teil, Herders theologischer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vol. I/1, Freiburg-Basel-Wien 1986.)[132] "히브리어에서는 한 낱말로 되어 있으면서 앞에 정관사가 붙은 “젊은 여인”은 동정이냐 아니냐, 미혼이냐 기혼이냐의 명확한 구분 없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경우 '처녀'를 의미하기는 하지만(이러한 의미에서 '동정녀'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뜻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젊은 기혼 여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이사야서 7장 14절 주석) "히브리어 '알마עַלְמָ֗ה '는 '젊은 여인'을 뜻하며, 결혼한 여자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처녀, 동정녀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굳이 결혼한 여자와 구분되는 처녀를 지칭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버툴라בְּתוּלָה ) 이를 '동정녀'라고 번역한 것은 70인역에서 이루어진 일이다(παρθένος). 더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어, 이사야와 아하즈는 그 젊은 여인이 누구를 일컫는지 알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부인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제기되는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하즈의 아내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언제나 이 '알마'를 아하즈의 아내 아비야로 보았고, 그 아기는 히즈키야라고 보았다. 히즈키야와 관련된 연대표에 불확실한 부분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예언을 히즈키야에게 적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중략) 아하즈가 임금이 된 직후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 일어났고, 그때에 아하즈에게 아직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히즈키야의 탄생은 다윗 왕실의 미래를 위한 훌륭한 표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9쪽-140쪽)[133] 이사야서 이야기를 더 상세히 덧붙이자면, 구약 성경은 1차적으로는 당대 독자를 향해 저자가 서술했을 문필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데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성서 주석학의 폭넓은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있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교황청 성서위원회, 《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번역은 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137-138쪽에서 발췌)" 그리고 유다 왕국 내부의 왕자 탄생이 글의 전후 맥락상 이사야서의 1차적인 문필적 의도로 추정되기에, 이사야서의 해당 어휘는 '동정녀'보다는 '젊은 여인'으로 읽어야 원문 문맥에 가깝다.(앞에서 '젊은 여인'에 단 각주를 참고하라) 다만 그렇다고 한들 이사야서의 '젊은 여인' 독법이 '동정녀' 독법을 온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70인역이나 타르굼 등의 고대 번역은, 고대인이 구약을 바라본 '신학'을 현대인에게 보여주며, 실제로 구약을 번역할 때 (70인역뿐만이 아니라) 타르굼 등 고대 번역은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로 쓰인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도 어떤 시대의 예언이 다른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볼 수 있"다((안소근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137쪽). 즉 이사야서의 해당 부분을 '젊은 여인'으로 읽으면서도 마태오의 '동정녀' 독법의 타당함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동의하느냐와는 별개로, '구약 성경'이라는 문헌이 그 내부에서 사용하는 독법에 부합한다. 바로 그렇기에 마태오 1장 23절에서는 '동정녀'로,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는 '젊은 여인'으로 읽는 그리스도교 번역들(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NRSV, NABRE)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후대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성경 저자의 '1차적 의도'와 후대 독자의 '수용' 사이의 이 미묘한 긴장에 대해서는, 성경 문서의 성서 주석학을 통한 성경 읽기 부분을 참조.[134] (발췌자 주석)마태오 13장 55절; 마르코 6장 3절[135] (책 속 주석)Friedrich Preisigke - Emil Kießling, Wörterbuch der griechischen Papyrusurkunden II (Berling 1925-1931) 585.[136] (책 속 주석)Homeros, Ilias 5,60-61[137] 부모가 동행 중에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갔는데 다음 날에 없어진 것을 알고 수색 끝에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찾아냈다.[138]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139] 프로그래밍 개발자에 비유하자면, 전면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프론트엔드 개발자에 해당하고, 사역자들이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놓는 평신도들은 백엔드 개발자에 해당한다.[140]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장 11-12절, 공동번역)[141] 참고: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 《예수》)[142] 발췌자 주석: 이 부분에도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베르거, 같은 책, 169쪽)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베드 4,8과 잠언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같은 책 169쪽)[143] (책 속 주석)참조: J. 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Göttingen 1970) 96: "이렇게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것과 정확히 부합한다."[144] 일신교는 '우상 숭배'에 대한 적대에서 다신교와의 충돌이 있기는 하지만, 천하 사람들을 유일신의 자녀로 인식하기에 세계 시민적이고 평화 지향적인 면모가 분명하게 있다. 가령 "다니엘서는 야훼라는 신명 사용을 삼간다(9,2.4.13-14에만 나온다). 그 대신 '하늘의 하느님/주님/임금님'(2,18.19.37.44; 4,34; 5,23)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구약 성경 중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시기의 책들인 에즈라기·느헤미야기·유딧기·토빗기와 엘레판틴 유다인들의 서간에서 주로 확인되는 이 명칭을 통해, 야훼는 이스라엘·유다 종교에 국한됨을 벗어나 보편적인 하느님으로 되시는 바, 그분의 주권이 모든 지상 통치자의 제국들을 대체한다. .. 야훼는 유배 중·후 시기에 보편적인 민족신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이스라엘 또는 유다의 '민족신'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되었다. 신명기 32,8-8에서 야훼가 이스라엘을 당신 몫으로 차지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들에게 배당하셨다면, 이제 다니엘서에서는 이 관점이 바뀐다. 여기서는 세계 지배의 다른 모델이 설계되는바, 이에 따르면 모든 민족은 야훼에게 복속된 제후들이나 천사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이스라엘은 미카엘 천사의 다스림을 받는다(다니 12,1; 참조: 10,13). 7장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도 이 민족들의 천사들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야훼께서 그에게 통치권을 영원히 넘겨주신다." by 헤르베르트 니어Herbert Niehr, "다니엘서",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882-883쪽[145] 마태 22;23~33, 마르 12;18~27, 루가 20;27~40[146] 犬儒, Cynic. 헬레니즘 철학의 한 사조였던 키니코스 학파 계열의 사상가. 이들은 들개처럼 사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견유라고 번역한 것이다. 인류 문명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거부하고 철저한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세상을 떠돌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료 행위를 했다고 한다.[147] Gerd Theissen & Annette Merz, 《역사적 예수》, 43[148] 바로 이러한 점에서 19세기식 역사적 예수론이 큰 약점을 지녔는데, ㄱ. 종교적 개인주의 ㄴ. 성전에 대한 적대감 ㄷ. 탈교권주의 ㄹ. 이완된 율법 해석 등의 요소는 (비록 '이완된 율법 해석'은 19세기 계몽주의보다 훨씬 오래된 오해이지만.) 19세기 계몽주의가 '1세기 유다인' 예수를 통해 정당화하고자 한 자신의 이상향이다. 오늘날 예수 연구에서는 다음 명제를 매우 중요시한다: "나자렛 예수는 유다인이다."[149] 요한복음을 사실 기록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단순화해서는 안된다. " 공관 복음서의 저술 방식과 의도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역사 비평적 방법에 대해 새로이 반성하고, 또 요한의 자료들을 더욱 차분히 연구한 결과,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예전의 양자택일을 버리게 되었다. 요한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해답이 전에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라는 뜻이다. 우선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많은 사실을 요한도 전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 여러 기적, 그 가운데에서도 빵의 기적이 특히 이러한 부분에 속한다(1,19-51; 2,13-21; 6,1-21).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도 전체적으로 마찬가지다(12─21장). 요한복음서와 공관 복음서의 해당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요한 역시 교회 전통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전하고자 하였으며, 또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러 사항과 관련해서, 역사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독창적 요소들이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곧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유다 지방이나 로마 제국의 제도와 관계되는 사항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저자가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는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은 기원후 66-72년에 벌어진 유다 독립 전쟁 이후에는 없어져, 요한 복음서와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 것들이다. 이로써 요한이 자기의 작품을 예수님 역사의 실제적 상황과 관련지으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서는 단순히 역사와는 관련이 없는 신학적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요한복음서 입문)[150] 감람산 중턱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던 도중 선택한 12제자 중 한 명인 이스카리옷 유다가 입을 맞추는 신호를 보내 배반하게 되어 잡히게 된다.[151] 양손과 양발의 못 자국, 사망 직후 확인 사살을 위한 왼쪽 허리에 난 롱기누스의 창자국도 재생된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152] 무덤에 관한 기록은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153] 게리 하버마스의 조사에 의하면 약 75%의 학자들이 동의한다.[154]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155] 로핑크는 요한 복음서의 완성 연대가 가장 늦음에도 불구하고, 21장은 최초의 예수 발현에서 유래했다고 본다.[156]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 것이다. '루카는 이런 언급을 하고도 베드로에게의 최초 발현을 안 다룬 애매한 태도를 왜 보였는가?' 로핑크는 예루살렘 발현을 중시하는 루카에게 이 '갈릴래아 발현'을 넣을 자리가 없었다고 본다. 즉 호수에서의 발현을 예루살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157] (편집자 주석) 베드로.[158] 즉 '빈 무덤'을 발견하고 그 기대 때문에 '예수 발현'을 체험한 게 아니라, 갈릴래아 일행과 예루살렘 일행이 각각 별개로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것이다.[159] H. S. Reimarus. et. al, "Brief Critical Remark on the Object of Jesus and His Disciples As seen in the New Testament", London & Edinburgh: William & Norgate, 1879. <국내 번역서. 타이센, "역사적 예수">[160] H. J.Holzmann, J. Klausner 학자 주장[161] 이와 관련하여는 '이기천, 예수 부활의 역사성 연구,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신학과 신약신학 전공, 2009. 2'에 잘 소개되어 있으며, 해당 논문은 예수의 부활을 지지하는 논문이나, 국내 논문 중에서는 예수의 빈 무덤 및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서 긍정설과 부정설을 모두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162] 더구나 로핑크의 재구성에 의하면 베드로를 포함한 갈릴레아 일행은 예수 발현을 체험했을 때 '무덤이 비어있다'는 걸 몰랐으며, 예루살렘 귀환 후에야 알았다.[163] 뮌헨 대학교 신약 주석학 및 성서 해석학 교수.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의 제자로, 독어권 성서 주석학계의 거인이다.[164] 1992년 5월 28일, 독일 Bayern 방송국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톤 켄테미히가 뮌헨 신약학자 요아힘 그닐카에게 묻는다」(Jesus, der Christus. Anton Kentemich befragt den Müncher Neutestamentler Joachim Gnilka)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대담. 번역은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6쪽[165] 이 초월적 경험이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해 죄를 대속하여 돌아가셨지만, 메시아로서 죽음의 권세를 누르고 부활하셨다. 이를 믿는가?"라는 물음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는 데 있어서의 밑바탕이었다. 이런 초월적 기적이 밑받침되지 않아 망한 사례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꼽을 수 있다.[166] "예수가 부활했다"는 명제는 역사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받아들였다"는 명제는 역사학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학계의 지지를 받기에 역사적 예수를 논할 때는 이런 표현이 쓰인다.[167] 크로산은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리스도교 회의주의자이다. 다만 '유대인 예수'에 주목하는 근래 학계의 흐름과는 떨어져있다. 비록 크로산의 저술들은 읽어볼 만한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다수설을 대변하는 학자는 분명히 아니다.[168] J. D. Crossan,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Harper Sanfrancisco), 1995, 124-127[169] M. A. Powell, "예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 192[170] 전후 맥락과 별 상관 없는 사건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에, 진술의 사실성을 더하는 부분으로 해석된다.[171]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지나치게 회의론적인 주장 때문에 같은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비판을 여러 번 받아왔고, 그가 주장하는 '비종말론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예수'는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계의 다수론(종말론적인 유대인 예수)과 거리가 있다.[172] 참고: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4), 195쪽.[173]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4), 197쪽.[174] 때문에 빈 무덤이 제자들의 자작극이라면, 서로를 불신하여 신앙심으로 다시 뭉치지는 못했을 것이다.[175]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176] (논문 내 주석)R. Penna, I ritratti originali di Gesù il Cristo. Inizi e sviluppi della cristologia neotestamentaria. I. Gli inizi (Studia sulla Bibblia e il suo ambiente), Milan, san Paolo, 1996. pp. 180-181 참조.[177] (논문 내 주석) D. Marmuerat, "Cequ'ils n'ont pas dit de Pâques", MB 25 (marsavril 2000), pp. 31-35(p.32).[178] (논문 내 주석)R. Pesch, "La genèse de la foi en la résurrection de Jésus. Une nouvelle tentative", dans M. Nenzerath, A. Schmid et J. Guillêt èds. La Pâque du Christ, Mystère de salut. Mélanges F. X. Durrwell (Lectio Divina 112), Paris, Cerf, 1982, pp. 51-74(p.54)에서 인용.[179]
십자가에서 사망에 이르는 주요 원인이 양손이 고정된 것에 비해 몸무게에 의해 가슴 근육이 내려앉아 횡격막이 상승하여 질식하게 되는 점임을 고려하면 6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이며, 심지어 2-3일 동안 생존하는 사례도 존재하였다고 한다. 그 외 기타 원인으로 탈수 및 출혈로 인한 저혈량 쇼크도 있을 수 있다.
[180] O'Collins. et. al, "Focus on Jesus: Essays in Christology and Soteriology", Fowler Wright Books. p. 169, 1966 (ISBN 0-85244-360-9)[181] Michael Baigent, "The Jesus Papers: Exposing The Greatest Cover-Up In History", HarperSanFrancisco, 2006 (ISBN 978-0-06-082713-7)[182] 의학 지식이 부족했던 당시 관점으로는 이를 부활한 것으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183] 인도의 종교자인 미르자 굴람 아마드(Mirza Ghulam Ahmad)https://www.alislam.org/library/books/Tadhkirah.pdf[266] 및 미허바바(Meher Baba)[267], 역사학자인 Holger Kersten[268][184] 토마스 행전에서는 사도 토마스가 예수님과 함께 주후 47년경 탁실라(Taxila)의 군다포르(Gundafor)왕의 궁전을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85] 인도 무덤에 대한 반박 자료 참조 Historia animae utilis de Barlaam et Ioasaph (spuria): Einführung 2009 3110210991 "...Jahrhunderts, in dem auf die Barlaam-Parabel vom König und seinem weisen Ratgeber[186] Edwards et al, "On the Physical Death of Jesus Christ".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255 (11): 1455–63, 21 March 1986 (doi:10.1001/jama.1986.03370110077025)[187] "거의 모든 수사본에는 9-20절이 계속되지만, 주요 수사본들에서는 마르코 복음서가 8절로 끝을 맺는다. 9-20절은 2세기에, 다른 복음서들에 들어 있는 부활하신 분의 발현과 승천 이야기와 또 그분의 분부를 새롭게 종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종합에는 그리스도와 부활 이후의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요소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이 긴 끝맺음도 마르코가 직접 썼다는 것이 2세기부터 인정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여러 교부가 의심을 품기도 하였다. 아무튼 마르코 복음서가 이렇게 갑자기 8절로 끝나는 것이 놀라워, 많은 학자들은 이 복음서의 끝부분이 일찍이 소실되어, 이 9-20절의 말로 대체되었다고 여긴다. 사실 복음서 저자가 8절에 이어 결론을 기록하였는지, 그랬다면 부활하신 분의 몇몇 발현을 이야기하였는지, 아니면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갈릴래아 발현의 전통을 참조하라는 것만으로(7절) 충분하다고 여겨 8절로 마무리를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성경』 마르코 16장 주석)[188] (책 속 주석)오늘날 대체로 복음서의 거시적 텍스트(Makrotext) 안에서 14,28과 상응하는 16,7을 마르코의 편집으로 보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마르코가 입수한 수난사화에 상응하는 문장이 들어 있었으리라 추정되는데, 케뤼그마에서 유래했을 이 문장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베드로(또는 케파?)에게 나타나셨다." GNILKA, Mk II 338-339 참조.[189] Gregory W. Dawes, "The Historical Jesus Question", 334쪽, 2001[190] Rush Rhees, "The Life of Jesus of Nazareth", 2007[191] Ehrman, Bart, "How Jesus Became God. The Exaltation of a Jewish Preacher from Galilea, Harperone", 2014, 국내 번역서 <바트어만,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갈라파고스 출판사, 2015>[192] Bermejo-Rubio, Fernando, "The Process of Jesus' Deification and Cognitive Dissonance Theory", Numen, 2017[193] Komarnitsky, Kris, "Cognitive Dissonance and the Resurrection of Jesus", The Fourth R magazine, 2014[194] 허호익, "예수그리스도 바로보기", 한들출판사, 2003, p526쪽 셀수스의 주장 재인용[195] βᾰσίλειᾰ. 흔히 '나라' 혹은 '왕국'으로 번역되지만, 조금 더 엄밀한 번역은 '다스림', '왕권', '왕정'에 가깝다.[196]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 마태오의 복음서 23장 27절.[197] 그대로 버려두어라. 그들은 눈먼 길잡이들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 - 마태오의 복음서 15장 14절.[198]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민족적 유다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원론적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이다. 물론 그렇다고 유다인이 안 중요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순전히 개인주의적 구원의 관점에서 "내"가 구원되느냐 마느냐엔 유다인 여부가 상관 없는 문제인 게 맞지만, 논리적으로 이 구원은 유다인이라는 뿌리에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올리브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 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같이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생각이 날 때에는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로마 11,17-18, 공동번역 성서)
[199]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마태 15,24, 공동번역 성서)
물론 이는 이방인의 구원이 유다인보다 더 불리하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자세한 건 후술.
[200]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요한 4,22, 공동번역 성서)[201] 원래는 과월절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예수 이후에 이는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파스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202] hymeis este to phōs tou kosmou. ou dynatai polis krybēnai epanō orous keimenē[203] 근동-희랍에서 도시Polis는 단순 거주지가 아니라 사회적 개념이었다.[204] 요한 18,36("내 왕국basileia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basileia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공동번역 성서)을 오독하여 하느님 나라를 온전히 내세적이기만 한 개념으로 착각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맥은 바실레이아가 현세에 효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다스림basileia은 이 세상에 속하는 수많은 바실레이아들과 다르므로 정치적 혁명이나 반란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205] 1992년 5월 28일, 독일 Bayern 방송국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톤 켄테미히가 뮌헨 신약학자 요아힘 그닐카에게 묻는다」(Jesus, der Christus. Anton Kentemich befragt den Müncher Neutestamentler Joachim Gnilka)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대담. 번역은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7쪽[206] (책 속 주석) 그리스어 성서 번역에서 이스라엘이 자주 "엑클레시아", "주님의 엑클레시아" 등으로 일컬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명 23,1.2; 판관 20,2; 3열왕 8,14.22.55; 1역대 13,2 등. 히브리어 해당어는 대개 "카할"이다.[207] (책 속 주석) 스키토폴리스만이 요르단 서쪽에 있었는데, 역시 열 도시에 꼽혔다.[208] (책 속 주석) 에즈라 묵시록 13,49.[209] (책 속 주석) 참조: 시리아어 바룩 묵시록 72,3-6. 그러나 3,716 이하는 이방인 세계에 대해 열려 있다.[210] 영어권 가톨릭 성서학계의 학술 주해서로, 미국 가톨릭 성서학의 황금 세대인 레이먼드 브라운, 조셉 피츠마이어, 롤랜드 머피로부터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2022년판은 한국어판으로도 번역 중이다.[211]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같은 책 132쪽.[212]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132-133쪽.[213] 샤를르 페로, 《예수와 역사》, 박상래 옮김(서울: 가톨릭출판사, 2012 개정 1판), 297쪽에 인용된 것을 발췌함.[214] (책 속 주석)참조: I. De La Potterie, "La confessione messianica di Pietro in Mc 8,27-[math({33}^{n})], in II Messianismo', Atti della XVIII settimana biblica dell'ABI, Paidia, Brescia 1966, pp. 59-77; R. Pesch, "Das Messiabekenntnis des Petrus(Mk 8,27-30). Neuverhandlung einer alten Frange", in Biblische Zeitschrif'' 17(1973), pp. 178-195; 18(1974), pp. 20-31[215] (책 속 주석)참조: K. Schubert, Jésus à la lumière du Judaisme du premier siècle, Cerf, Paris 1974, p. 157[216] 참고: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3쪽[217] Stephen P. Ahearne-Kroll, Mark in 《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for the Twenty-Century》, Bloombury Publishing Plc, 2022[218] 고대 세계에서 신전 제사는 왕권에 속해 있었으며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다.[219] AD 55/56 추정.[220] "바오로 이전의 전승으로 보이는 여러 요소를 가진 이 찬가는 아마도 분명히 전례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29쪽.[221] (책 속 주석)참조: 호세 1~3장; 이사 62,5; 에제 26장 그리고 시편 45에 관한 타르굼의 독서는 이 시편을 하느님과 그의 신부인 시나고구에 적용시키고 있다.[222] 병행구: 마르 2,19-20; 루카 5,34-35[223] 병행구: 루카 14,15-24[224] 단, 성경에서 '믿음'πίστις이란 "명제에 동의하기"란 의미가 아니다. 다시말해서 '믿음'이란 특정 명제를 내면으로 동의하고 끝내는 개념이 아니라, 이 명제를 (혹은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여 자기 자신을 맡겨서 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의인(義認)된다 vs.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논쟁은 전제부터가 틀린 것이다. 야고보서가 '행동'이라 표현하는 것을 바울로 서간은 '사랑'이라 표현한다. 따라서 다음 두 구절은 똑같은 개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라 5,6, 공동번역)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공동번역)
[225] 23ho kyrios Iēsous en tēi nykti hēi paredideto elaben arton 24kai eucharistēsas eklasen kai eipen· touto mou estin to sōma to hyper hymōn· touto poieite eis tēn emēn anamnēsin. 25hōsautōs kai to potērion meta to deipnēsai legōn· touto to potērion hē kainē diathēkē estin en tōi emōi haimati· touto poieite, hosakis ean pinēte, eis tēn emēn anamnēsin. 26hosakis gar ean esthiēte ton arton touton kai to potērion pinēte, ton thanaton tou kyriou katangellete achri hou elthēi.[226] 공동번역, 개역성경, 가톨릭새번역에서는 능동태("..라고 하신 말씀")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신적수동태(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기 위해 수동태로 말하는 유다인 문화의 화법)이다. 즉 예수의 화법에서는 시나이 율법을 입법한 주체로 분명히 하느님을 전제하고 있다.[227] 이건 율법학자들도 했다.[228] 복음서 텍스트 자체와 반대되는 오독이다.[229] 성경의 언어에서 '사람의 아들'과 '사람'은 유의어이다. 때문에 공동번역 성서는 이 구절에서 '사람의 아들'을 '사람'으로 의역한 것이다.[230] 사실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이 완전히 쫓겨나진 않았다. 때문에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의 예루살렘 함락 때도 이 지역에서 무슬림들과 공존하던 토착 유대인계 시민들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시오니즘 운동 당시에도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방으로 이주한 유대계 유럽인이 예루살렘시에 여전히 거주하던 아랍인 유대교도를 만난 기록도 있는 등, 이스라엘 내부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이 꽤 적지 않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31]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예시1] "어떠한 사법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종교적 연원에 대한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 종교의 영향이 깊고도 지속적이었기 때문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장 오랜 기간 종교법 체계를 운용해 왔으며, 현대 사법 체계에 미친 영향도 확연하다. 서양 사법 제도의 기본적 기관, 개념, 가치는 11, 12세기의 종교 의례, 예배,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죽음, 죄와 벌, 용서와 구원에 대한 태도를 비롯하여 신과 인간,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레이먼드 웍스Raymond Wacks, 『법』)[예시2]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 독일을 막론하고 도시사의 주요 문헌에서는 시대를 코뮌 이전 시기와 코뮌 시기로 구분한다. 즉 도시 공동체(Stadtgemeinde)의 형성을 시대 구분의 결정적인 전기로 간주한다. 시기적으로나 발전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나, 위에 언급한 지역들에서 도시와 시민을 둘러싼 기본적인 공통 토대가 존재했다고 전제되며, 그것들을 결합시켜 주는 요소가 중세 성기(盛期)의 코뮌 형성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대변하는 학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고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 막스 베버(Max Webver)이다. 그는 심지어 코뮌 운동의 전개에서 유럽의 발전을 결정짓는 혁명적 변혁을 포착했으며, 그 변혁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서양의 사회 체제, 문화, 사고방식의 발전은 없었으리라고 단언했다. 역사적으로 다른 많은 국가들과 시대에도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던 대도시들은 있었으나, 코뮌과 같은 공동체의 형태를 유지하며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던 시민의 존재는 중부와 서부 유럽 지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크누트 슐츠 지음, 박흥식 옮김, 『중세 유럽의 코뮌 운동과 시민의 형성』 21쪽)[234] 물론 그리스도교의 영향만은 아니다. 지리적인 부분 및 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반발로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235] 물론 이러한 인간 중심적 견해가 극단적으로 나간 데에도 그리스도교가 근저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기계적 자연관은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를 낳았으며, 불신자에 대한 종교 전파 와중에 은연한 선민사상이 스며들어 백인의 의무류의 발상이 등장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의 public theologist들 사이에서도 생태주의와 인권 운동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가 주된 관심거리이도 하다.[236] 물론 데이비드 흄이나 스피노자 처럼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237] 비즈니스나 연애 같은 사교 집단으로서의 교회 다니는 케이스, 사후 불확실성에 따른 일종의 보험 케이스, 모태 신앙같이 지인이 다니니 같이 다니는 케이스 등[238] 제7일 안식일 재림교회와 같이 영원한 지옥을 부정하는 교회도 있다.[239] 사도 바오로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선민사상을 진작부터 경계하여 자신이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240] 예수가 가르치는 하느님의 나라는 천국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을 열심히 전해서 세상을 구원받게 하라는 사명과 함께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가 대우받는, 신의 정의로운 통치가 실현되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세한 건 천국/그리스도교 참조.[241] 그리스도교적 수사, 비유를 사용한다든가.[242] 이 구절들은 복음서의 원저자가 한 말이라기보다는, 그의 저자들이 마무리를 하며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243] Storr, Anthony. Feet of clay. Simon and Schuster, 1997[244] 당시의 표현을 현대 한국어로 옮기면 개새끼에 가장 가까운 말이다.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에 살고 있던 아담하와를 타락시킨 게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자.[245] (책 속 주석)F. HAHN, Christologische Hoheitstitel: Ihre Geschichte im Frühen Christentum, FRLANT 83 (Göttingen 1963[math({/}^{4})]1974) 77.[246] (책 속 주석)한 랍비계 전승에 따르면 예수는 여호수아 벤 페라햐의 제자였다고 하는데, 전혀 근거가 없다. 이미 年代상 이유로도 지탱될 수 없다. 예수를 얀나이 왕 때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이 전승에 관한 비판은 이미 Klausner, Jesus 25-9에도 나온다. 요한 7,15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예수가 공부한 적이 없다는 비난을 한다.[247] 저자의 국내 번역 출판물로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예수 왜곡의 역사>, <성경 왜곡의 역사> 등이 시리즈로 출판된 바 있다.[248] 이는 현대 가톨릭에서도 그대로다.[249] 가톨릭과 달리 정교회에서는 기혼자도 사제가 될 수 있고 성공회에서는 사제가 된 이후에도 결혼할 수 있다. 또한 가톨릭에서도 동방 예법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에서는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기혼자를 사제로 서품할 수 있다. 하지만 수도자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모두 독신으로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한다.[250] 예수에게 다른 아내가 없고 에클레시아(교회)에게 다른 남편이 없듯이, 지상 인간의 부부 생활도 그래야 한다는 것.[251] 가톨릭이 특히 강조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이혼에 부정적이다. 혼인성사 참조.[252] (책 속 주석)참조: 호세 1~3장; 이사 62,5; 에제 26장 그리고 시편 45에 관한 타르굼의 독서는 이 시편을 하느님과 그의 신부인 시나고구에 적용시키고 있다.[253] 병행구: 마르 2,19-20; 루카 5,34-35[254] 병행구: 루카 14,15-24[25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셀레우코스 왕조의 동전에 남은 군주들의 초상과 공화정 로마인들의 흉상 등에 남은 가지각색의 당대인 모습을 보더라도, 남성들은 깔끔하게 면도하고 있다.[256] 그리고 동방 교회들의 성직자들이 근동의 이해에 따라, (그리고 기존 헬레니즘 문화권의 남성상을 거슬러) 수염을 풍성하게 기르면서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콘이든 동방의 성직자이든 수염이 풍성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근동 문화의 이해는, 역사적으로 AD 1세기 이스라엘의 남성상에 상대적으로 가까울 것이다.[257] 동시대 인물인 독일의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실제로 대표작이기도 한 자화상에서 본인의 얼굴을 예수의 모습에 가깝게 묘사했다.[258] 단, 중동=아랍이 아니며 예수가 태어나고 살았던 레반트 지역은 그리스,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등의 남유럽 백인과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고 겉모습도 비슷하다.[259] 여증은 예수의 초상 외에도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된 것은 이교도의 영향이며, 예수가 못 박혀 죽은 것은 1자형 기둥”이라는 주장을 하는 등, 19세기에 유행했던 설들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역사학에서는 예수의 초상 및 십자가 문제에 대해서 19세기의 주장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260] Y DNA 하플로그룹 분석에 따르면 그리스와 터키-레반트 지역은 거의 민족적으로 차이가 없다.[261]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외모가 실레노스 판박이 아니냐고 평한다.[262] 척의 길이에 따라 다르지만 약 182cm에서 216cm정도의 키가 나온다.[263] 링크 내용은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 예수게이 이름 언급된 화에 실제로 달린 악플 캡처.[264]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단 이스라엘과 달리 로마 제국의 후손은 이탈리아만 있는 게 아니고, 이탈리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지 오래됐다.[265] 유다이아 속주를 계승했다는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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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Korbel, Jonathan; Preckel, Claudia (2016). "Ghulām Aḥmad al-Qādiyānī: The Messiah of the Christians—Peace upon Him—in India (India, 1908)[267] Meher Prabhu Lord Meher, "The Biography of the Avatar of the Age", Meher Baba, Bhau Kalchuri, Manifestation, Inc. 1986, p. 752[268] Reinhard Feldmeier Die Bibel: Entstehung - Botschaft - Wirkung 2004 Page 164 "In Deutschland war es vor allem Holger Kersten, der mit seinem Buch »Jesus lebte in Indien« (zuerst 1984, Neuauflage 1993)23 die These vom Indienaufenthalt Jesu populär machte. Die bereits oben angesprochene »Lücke im Leben Je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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