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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01호 | |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 | |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법천사지길 50-15(부론면 법천리 594)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 |
<colbgcolor=#315288>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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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1] 인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있는 지광국사 해린의 승탑.과거에는 '법천사 지광 국사 현묘탑'이라고 불렸으나 2010년도에 문화재청의 명칭 일제정비 사업[2]으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졌고, 1962년에 국보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본래 이 승탑은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3]를 지냈던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解麟)[4]이 고향인 법천사에서 입적을 하자, 문종이 슬퍼하면서 장례를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입적한 이후에 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승탑이 이 문화재이다. 지광국사가 입적한 후에 15년이 지나서 탑비가 세워졌다는 기록으로 미뤄보아 1070년에서 1085년 사이로 추정된다.이 승탑은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 등으로 역대 고승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부도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이후 사찰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지금까지 빈 터로 남아있으며, 경내에는 승탑과 탑비, 당간지주 등 석조물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1. 수난의 역사
그러던 1911년에 이 탑의 운명이 뒤바뀌는 일이 벌어졌으니, 당시 어떤 일본인이 땅 주인에게서 이 탑을 사서 서울에서 몇 사람을 거친 뒤에 일본 오사카까지 반출이 된 것이었다. 이를 안 당시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5년에 다시 환수해 경복궁에 갖다 놓은 것이다.[5]여기서 끝이었다면 다행이겠지만, 6.25 전쟁 와중에 유탄 폭격을 받아서 12,000개가 넘는 조각으로 나눠지고야 말았다. 이후에 복구 논의가 있었지만, 묵살이 된 채[6] 방치가 되었다가 이 때, 월남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이 방한하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경복궁과 경회루를 둘러보던 중 부서졌던 이 탑을 봤고, 이에 노발대발한 이 대통령의 노기를 풀고자 부랴부랴 복원에 나섰던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이 승탑의 모습(본 문서 맨 상단의 사진)이었다.
2.2. 보존처리사업과 고향으로의 귀향
1957년에 일시적으로 복원했던 이 탑은 이후에도 경복궁에 그대로 남았는데, 반출이 된 이후 5년 동안 여러 곳 즉, 원주에서 서울(여기서도 몇 군데 옮겨진 것 같다.), 오사카를 지나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오면서 훼손이 심해졌고, 상술하다시피 6·25 전쟁에 파손되어 방치되다가 복원을 했다만 당시 복원에 대한 기술이 부족했는지 주먹구구식으로 했었고, 심지어 당시 복원 재료로 썼던 모르타르(시멘트와 모래와 물의 혼합물)의 탈락과 그로 인한 추가 훼손 등으로 인해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전할 때도 옮기지 못한 채 그 위치 그대로 있었고, 이러한 탑의 훼손 문제는 국정감사에서도 지적을 할 정도였다.결국, 2016년에 제대로 된 보존처리사업을 시작해 해체되어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원 보존처리센터[7]로 옮겨져 5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탑의 사자상이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 확인되었고, 1957년에 복구하던 과정에서 뒤바꿨던 부재들이나 방향, 탑의 원 재료 등을 찾아내서 복원 작업을 펼치고 기록으로 남겼다.관련 기사
한편, 원주시와 지역 시민단체들은 탑의 고향 환수를 요구하는 운동을 여러차례 펼쳤고, 문화재위원회에서도 몇 차례 회의를 거쳐서 원 위치로 옮기는 것으로 정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최종적으로 확정이 된 것은 없었고, 오히려 원래 절터에 남았던 탑비마저 보존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8]이라 실제로 탑이 원래 위치에 옮기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결정된다고 한다.관련 기사
2021년 1월 20일 보존작업이 완료됐고 2023년 5, 6월 회의를 거쳐 탑의 원래 소재지인 원주 법천사지로 옮기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8월 1일, 탑을 33개의 부재로 해체한 후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석(塔身石)을 제외한 31개가 먼저 임시로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으로 옮겨졌다. 유적전시관에서도 한동안은 복원하지 않고 부재 상태로 전시하다 최종적으로 원래 있던 자리에 둘지, 계속 유적전시관에 둘지 결정되면 그때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결국 2023년 12월 하중 문제로 전시관 복원으로 결정. #
마침내 2024년 11월 12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복원을 마치고 공개했다.#
3. 외부 링크
- 두산백과: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 한국어 위키백과: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이승만은 망가진 '미인석탑'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 경향신문: '미인박명' 지광국사탑, 1만2000개 산산조각에서 본 얼굴 찾은 5년의 수술 기록
4. 국보 101호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67)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경복궁 경내에 있다가 보존처리를 위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으며, 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사자상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오다 탑과 함께 옮겨졌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탑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탑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5. 여담
5.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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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59호 | |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 |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 선종 2년(1085년) |
<colbgcolor=#315288>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
위의 탑과 세트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현재도 법천사지에 있으며,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9] 이것도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법천사 지광 국사 현묘탑비'라고 불렸다.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지광국사탑은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중이며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1] 사적 46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그 곳에는 국보 제59호로 지정된 지광국사탑비가 남아있다. 탑비에 대해서는 후술되는 내용 참조.[2] 기존의 명칭들이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왜곡이 되었고, 지정명칭 관련 통일된 기준이 없어 혼란스러웠던 것을 국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명칭 부여 기준을 마련한 것으로 2010년~2012년까지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들의 명칭들을 현재에 맞게 고쳤다.[3] 해당 문서의 4번 문단.[4] 984~1067,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61976&ref=y&categoryId=33382[5] 어찌보면, 데라우치가 좋게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그렇치 않다. 당시 그의 생각은 일본이나 조선이나 하나였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상관은 없었지만, 자신이 총독인 이상 조선의 문화재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조선 총독 재임 기간에 상당히 많은 석조물들이 원 위치에서 일본으로 가려던 중에 그에 의해서 서울 경복궁으로 강제 배치되었고, 지금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어차피 당시 일제는 조선 지배를 계속 할거라 생각하고 문화재 강탈을 유럽만큼 하진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6] 당시 어려웠던 나라 사정은 둘째치고, 문화재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없었다. 현, 문화재청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문화재관리국'이 설치가 된 것이 1961년이었고, 그 전에는 1946년 미군정 시절 '구황실사무청'으로 출발해 1955년에 바뀐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 다른 하나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직된 문교부(현, 교육부)의 문화국 교도과로 출발해 1955년에 바뀐 '문화보존과'가 있었다.[7]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8] 관련 기사를 보면, 비석 곳곳에 위험이 된데다가 보존처리센터로 이동 시에도 불안전하다고 해서 현장에서 보존처리를 한다고 한다.[9] 날짜를 보면, 탑과 탑비의 지정 기간이 같은데, 자세한 건 국보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