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23대 황제 엘라가발루스 ELAGABAL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섹스투스[1]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 Sextus Varius Avitus Bassianus |
출생 | 204년 |
로마 제국 시리아/로마 | |
사망 | 222년 3월 11/12일 (향년 18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18년 5월 16일 ~ 222년 3월 11일 (3년 227일) | |
전임자 | 마크리누스 |
후임자 |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
부모 | 아버지 :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 어머니 :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
배우자 |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 아퀼리아 세베라 안니아 파우스티나 |
종교 | 시리아 토착 종교(태양신 엘라가발, 바알[2] 숭배)[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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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23대 황제이자 세베루스 왕조의 제3대 황제. 서기 1세기 네로 이후 로마인에게 최악의 불명예 3종 세트[4]를 모두 받고 몰락했다.네로 이후, 최악의 폭군으로 유명한 콤모두스조차 달성하지 못한 트리플 크라운 달성을 한 황제답게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공인된 사람이다. 공식 이름은 안토니누스이지만, 살아 생전부터 아비투스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하며, 로마 귀환 이후에는 그가 제사장으로서 섬기던 고대 시리아와 로마의 태양신 엘리오가발루스 (또는 헬리오가발루스, 엘리가발)에서 따온 별칭이 통상 인칭으로 불리어, 엘라가발루스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 이 외에도 로마인들에게 불린 또 다른 별칭이자 통칭은 가짜 안토니누스[5], 아시리아 놈 안토니누스, 사르다나팔루스[6]가 있었다고 하며, 사후에는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 로마 서민들이 지어준 티베리누스도 있었다. 동시대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 제국 사람들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보통 아비투스, 엘라가발루스, 가짜 안토니누스로 많이 불렀고, 비꼬는 투로 부를 때는 아시리아 놈, 사르다나팔루스, 몰락한 이후에는 보통 가짜 안토니누스, 엘라가발루스 혹은 티베리누스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카라칼라의 이종 사촌 누이의 아들이며,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황제 근위대장인 마크리누스가 황제가 되자 외할머니이자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가 이에 복수하기 위한 패로 쓰면서 졸지에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카라칼라의 숨겨진 자식’이 되면서 황제에 올랐다.
오늘날까지 서구권과 대중들에게 장난꾸러기 4차원의 황제, 미치광이로 불리는 괴짜 황제이자 인간이 할 수 있는 기행의 끝을 보여준 막장 암군이자 폭군, 역사상 최초의 트랜스젠더 등으로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본명은 '섹스투스[7]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Sextus Varius Avitus Bassianus). 황제로서 공식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로, 공식 석상에서는 '안토니누스'(Antoninus)로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부르는 이름인 엘리오가발루스, 헬리오가발루스가 더 유명하다. 원래 '엘라가발루스'(Elagabalus)라는 명칭은 이름이 아니라 별명으로 뜻은 태양신 엘라가발 신의 성소를 관리하는 자였는데, 로마인들은 새 황제를 엘라가발루스 또는 헬리오가발루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했다.
즉위 이후 온갖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킹메이커인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에게 버림받고, 재위 4여년 만에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측근들과 함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이때 그 시신은 팔, 다리가 잘려 무거운 돌과 함께 묶여 티베리스 강으로 연결되는 하수구로 버려졌다. 암살 사건 자체가 사실상 단죄된 사건인 탓에, 원로원에게 공식적으로 단죄되지 않았을 뿐이지 어머니 소아이미아스와 함께 공공의 적으로 규정돼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2. 생애
2.1. 다양한 별명들
공식적으로 안토니누스[8]로 불린, 엘라가발루스는 본명으로 불릴 경우에는, 그가 친아버지라고 주장한 카라칼라처럼 바시아누스로 불렸다.[9] 하지만 그는 엘라가발루스로 더 많이 불렸다. 엘라가발루스의 뜻과 유래는 다음과 같았다.-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 후기 라틴사가들이 오역해, 잘못 적은 까닭에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로 종종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당대부터 이 사람을 집약해 표현한 별명이다. 당사자 본인이 무척 만족스러워 했던 지칭으로 오늘날 통칭이 됐다. 시리아의 에메사[10] 일대에서 현지 토착 아랍인들이 믿는 태양신 엘라가발 신의 성소를 관리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별명은 그리스인들이 이 신앙을 믿은 아랍인 신도들을 엘라가발로스(Ἐλαγάβαλος Elagábalos)로 불렀던 것이 그 시작이 됐다. 이 단어가 다시 2세기 후기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된 뒤에 레반트 일대 이외 지역 출신 로마인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에메사 왕가을 뜻하는 지칭이 됐다. 참고로 엘라가발 신은 아랍어 "Ilah al-Jabal"("إله الجبل")가 라틴어화된 것으로, 고대 아랍 일대 신화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산의 신"을 의미하는 아랍어인 에메세네 신의 표현이며, 바알의 에메사식 표현으로 현지 아랍풍의 바알 숭배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이 별명 외에도 엘라가발루스는 살아생전부터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역대 로마 황제 중 별명이 많은 황제 중 한명인데, 모든 별명이 부정적 의미가 강했고, 이 모든 별명이 생전과 사후 본명보다 더 많이 불렸다. 그 별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 : 후대 라틴사가들이 엘라가발루스를 적는 과정에서 생긴 오역이 굳어진 별명이다. 후대 라틴사가들이 이렇게 적은 이유는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 숭배 속에서 태양신 헬리오스에 대한 언급을 한 엘라가발루스의 발언 등 때문에 혼동을 겪었던 것이 컸다.
- 가짜 안토니누스(Ψευδαντωνῖνος, False Antoninus) : 말 그대로 "진품과 구별된다."는 의미로, 짝퉁 안토니누스 또는 짭 안토니누스을 뜻한다. 엘라가발루스가 재위 1년도 되지 않아 정체가 들통난 이후부터 제국 동방에 주둔 중인 시리아 속주, 카파도키아 속주 내 로마군 병사들이 "가짜놈에게 속았다."고 분통을 터트리며 부른 것이 유래가 됐다. 병사들의 입소문을 시작으로, 사건을 담당한 관료, 원로원에게도 널리 쓰였고 제국 전역의 로마인들이 부른 또 다른 통칭이 됐다.[11] 이는 로마 엘리트 사이에서도 엘라가발루스의 정통성 문제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단어라서 엘라가발루스가 죽은 뒤에는 엘라가발루스, 헬리오가발루스 못지 않게 사랑받는(?) 멸칭이 됐다. 참고로 동시대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엘라가발루스가 죽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가 된 이후부터는 공문서상 통칭 비슷하게 불린 이름이 됐다고 한다. 따라서 디오는 엘라가발루스, 가짜 안토니누스, 사르다나팔루스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면서, 엘라가발루스 치세를 기술했다.
-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 : 생전부터 엘라가발루스, 헬리오가발루스, 가짜 안토니누스와 나란히 로마인들에게 애용된 별명. 사르다나팔루스는 그리스 작가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아시리아, 아랍인의 대표격 인명이 사르다나팔루스였는데, 이 멸칭이 엘라가발루스의 별명이자 통칭 비슷한 멸칭이 된 케이스. 후대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트라키아 놈(트라쿠스, 트락스),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아랍 놈(아라부스)으로 불린 것과 같은 멸칭으로, 로마인들이 엘라가발루스를 아시리아나 파르티아, 페르시아의 현지 아랍인과 같은 족속이라고 희화화하면서 부른 단어다. 로마인들이 엘라가발루스에게 이런 멸칭을 지어준 이유는 3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번째 이유는 그가 라틴어는 아예 못 하고, 그리스어도 아시리아, 레반트 식의 아랍 사투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벌인 할례와 돼지고기 금식 선언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사르다나팔루스는 옷차림이나 목소리·버릇 등이 여자와 똑같았으며 옷감을 짜고 옷을 만드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데 딱 엘라가발루스가 하는 짓을 연상시켜서다.[12] 이 외에도 엘라가발루스가 하는 것들이 다른 지역 로마인들이 아닌 동방 출신 로마인들이 보더라도 현지 토착 아랍인들과 비슷해, 이렇게 불리게 됐다고 한다.
- 티베리누스(Tiberinus) : 단어 그대로 티베리스 강 사람. 얼핏보면 명군인 티베리우스와 비슷하게 들려 꽤 괜찮아 보이지만, 이를 조금 더 쉽게 해석하면 "죽어서 티베리스 강에 사는 물고기 밥이 된 사내"를 뜻한다. 그래서 이를 들은 세베루스 왕조의 시리아 여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 하면서도, 모든 로마인들이 엘라가발루스를 흑역사 이상으로 생각함을 알고 불평조차 못 했다고 한다. 엘라가발루스의 시신이 조각나서 로마 옆의 티베리스 강에 물고기 밥으로 던져진 뒤,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 로마 서민들이 통쾌하다고 자찬하면서 지어준 것인데, 후일 세베루스 왕조와 시리아 여인들을 위해 엘라가발루스의 넋을 위로해주겠다며 지어준 멸칭으로 널리 쓰였다. 이 멸칭은 모후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최측근 히에로클레스도 공유해 싸잡아 불린 단어였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즉위 이후에도 공식 석상에서 가짜 안토니누스, 사르다나팔루스와 나란히 쓰였다.
2.2. 즉위 전까지의 삶
본명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Sextus Varius Avitus Bassianus)이며,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사이에서 203년경에 태어났다. 엘라가발루스의 아버지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사계급 출신으로 뒤에 원로원에 들어간 인물이라고 하며,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총독에 있던 중 병사했다.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13]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이자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딸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조카였으며,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이종사촌이었다.엘라가발루스의 외가는 오랫동안 시리아에서 살던 제사장 집안으로 고대 시리아와 로마에서 태양신으로 숭배된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 엘리가발) 신을 모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 마르켈루스를 여읜 엘라가발루스는 어머니 소마이미아스와 함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북쪽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에메사[14]에서 성장했고, 어린 시절부터 외가의 가업인 엘라가발루스 신을 섬기는 대사제 교육을 받았다. 바로 아래에는 이름 미상의 남동생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어머니 소아이미아스가 그녀의 애인 간니스와의 사이에서 얻었는지 불명확하다.
2.3.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엘라가발루스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시리아의 대사제 딸로서 어린 시절부터 명민하고 강인했으며,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니 율리아 돔나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한 이후 로마에서 살았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라는 남성과 결혼해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 자매를 낳았다.카라칼라가 215년 파르티아 원정길 도중 암살된 뒤, 황실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다. 카라칼라의 이모였던 율리아 마이사는 언니 율리아 돔나, 조카 카라칼라와 함께 로마를 떠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동행했는데, 원정 도중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율리아 돔나 역시 얼마 안 가 그곳에서 곡기를 끊고 자살했다. 이때 새로 즉위한 마크리누스는 마이사를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뒤 강제로 시리아에 남아 있도록 조처했다. 따라서 마이사는 졸지에 언니와 조카를 잃고 로마에 있었던 모든 재산을 마크리누스에게 사실상 빼앗기게 되었다.
빈털터리로 추방된 마이사는 두 딸과 함께 시리아 속주에 있었던 고향 에메사에 머물렀다. 이때 그녀는 자기 가문과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는데 이때 큰딸 소아이미아스의 애인 간니스가 꾀를 내어 소아이미아스의 외아들, 즉 마이사의 외손주였던 아비투스[15]를 반전의 카드로 사용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 간니스가 낸 꾀는 간단했다. 카라칼라가 외사촌 소아이미아스와 통정해 낳은 아들이 아비투스이고, 그동안 카라칼라와 소아이미아스가 이를 숨겼다는 논리였다. 이는 마땅한 반전카드가 없었던 마이사에게 모든 것을 올인한 마지막 도박에 가까웠지만, 이 꾀를 바탕으로 마이사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로마군 내에서 암살된 카라칼라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고, 일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에 대해 좋은 기억과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마이사는 간니스를 통해 얻은 계략 아래, 태양신의 대사제로 있었던 14살짜리 외손자 바리우스 아비투스(엘라가발루스)가 실은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병사들이 확신을 가질 타이밍 즈음, 모든 재산을 털어 마련한 자금을 시리아 주둔 군단들에게 막대한 후원금이라는 명목으로 기부하여 군심을 사로잡았다. 이후 동방 주둔 병사들이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것을 믿는 시점이 고점에 다다를 무렵, 마이사는 소문의 주인공인 외손자 바리우스 아비투스와 함께 시리아 군단들을 방문해 아비투스를 깜짝 공개했다. 카라칼라의 5촌 조카인데다가 시리아 피가 흐르고 외모도 많이 닮아, 병사들은 이를 본 순간 “카라칼라의 친아들”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손자”라는 소문을 더욱 믿고 마이사와 아비투스를 지지했다.
2.4. 즉위와 안티오키아 전투
율리아 마이사의 계획대로 동방 주둔 군단병들은 눈 앞에 나타난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진짜 카라칼라의 숨겨둔 아들이라고 생각했으며 소문이 아닌 진실로 확신했다. 따라서 동방군은 14살 소년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고 부르며 황제로 추대했다.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황제로 추대되자, 이 소식을 접한 마크리누스 황제는 이를 하찮은 반란으로 간주해 그 위협을 과소평가하면서 반란 진압 준비를 시작했다고 동시대 로마 관료이자 사가였던 헤로디아누스는 전한다.그렇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혈통이라는 소문의 후광은 대단하여, 마크리누스 황제 아래에서 3군단 갈리카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한 근위대장 울피우스 율리아누스가 마크리누스 쪽 장교들을 제거하고, 프라이토리아니의 주전력을 전부 이끌며 엘라가발루스를 내세운 3군단에 투항해 합류했다. 이렇게 되자, 마크리누스는 로마 원로원에 전령을 보내 "황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카라칼라)와 근친상간하여 낳았다는 아이는 가짜 안토니누스"라고 말하면서, 가짜 안토니누스 비난 성명을 의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마크리누스는 대가 끊긴 세베루스 가문의 이름을 내세운 율리아 마이사와 엘라가발루스 모자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어서 그는 거액의 현금을 즉시 제2군단에 지급해 충성을 호소했다. 따라서 첫 교전 이후, 마크리누스는 패전 뒤 체포된 근위대장 율리아누스의 잘린 머리를 연회에서 선물받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마크리누스는 군사적 무능함을 드러내며, 아무런 군경력도 없는 간니스가 이끈 엘라가발루스군에게 패배했다. 이 일에 관해, 동시대의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이며 역사가였던 디오 카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간니스는 군대 경험이 전혀 없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마을 앞 통로를 점령한 뒤 군대를 질서있게 배치해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그러한 큰 도움은 모든 상황에서 똑같이 행운이었다. 그것은 실제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이해를 줬기 때문이다.
디오 카시우스
마크리누스에게 더 치명상이 된 것은 그가 이끈 군대가 로마 제국의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프라이토리아니였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218년 6월 8일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패배한 마크리누스는 이탈리아로 도주해, 그곳에서 다시 군대를 꾸리고자 했다. 그는 로마에서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다 밀었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났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려고 기다리던 중 칼케돈에서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 역시 시리아 국경에 있는 제우그마에서 파르티아로 달아나려다가 체포되었다. 포로가 된 마크리누스는 감시를 받으며 남쪽으로 이송되다가, 카파도키아 지방의 아르켈라이스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아들 역시 제우그마에서 체포된 직후, 18살의 나이에 살해되었다.디오 카시우스
그러나 마크리누스에게 승리를 거뒀음에도 새 황제는 1년 뒤에야 로마로 귀환했다. 엘라가발루스는 승리 이후 처음에는 안티오키아에서, 그 다음에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니코메디아에서 몇 개월을 보냈다. 이는 불명확한 정통성과 원로원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생각하면 명백한 실책이었다. 따라서 주변에선 그에게 로마로 서둘러 귀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엘라가발루스는 이런 조언을 건넨 이들을 멀리했고, 외조모였던 율리아 마이사 역시 엘라가발루스가 승리 직후 로마 원로원에게 황제로 인정받았으니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엘라가발루스는 올바른 조언을 건넨 이들 중 몇 명을 마크리누스파 인사로 몰아 처형하거나 자살을 강요해 죽였다. 여기에는 어머니 소아이미아스의 애인이며, 세베루스 왕조 재건의 1등 공신이었던 간니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간니스는 당대의 원로원 의원이었는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뇌물을 좋아했으며 군대 경험이 전혀 없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고는 해도,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거나 음모를 마구 꾸미지 않아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왕조, 자신의 애인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모두에게 올바른 소리를 하면서도, 본인의 힘을 키우지 않고 지지세력을 끌어모으는 재주가 탁월한 꾀주머니였다고 한다. 따라서 황제의 외조모였던 율리아 마이사는 간니스를 매우 신뢰했고, 그를 중용하려고 했다. 이는 엘라가발루스도 비슷했다. 그는 간니스가 자신을 친아들처럼 생각한 "양아버지이자 보호자"로 여김을 좋게 생각했고 이를 감사하게 여겼으며, 어머니와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는 점도 좋아해 그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주고 결혼식까지 진행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로 인정받은 뒤 엘라가발루스는 간니스가 평소처럼 옳은 소리로 조언을 하자, "간니스가 나를 허수아비로 여긴다."라며 로마에 귀환하기 전 그를 체포해 죽였다. 이는 외할머니인 마이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흥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율리아 마이사의 반대와 걱정대로 간니스 처형은 종국적으로 율리아 마이사, 엘라가발루스 모두에게 비극이 되었다. 왜냐하면 디오 카시우스가 지적한 것처럼, 간니스의 존재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사후, 카라칼라와 게타의 골육상쟁 속에서 자발적으로 따른 권세가들이 줄어든 세베루스 왕조 안에서, 간니스는 진심을 다해 충언을 아끼지 않을 자였다.[16] 더 큰 문제는 그가 엘라가발루스에게 처형된 이유가 황제의 발표나 의심과 달리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다. 간니스는 엘라가발루스를 옹립한 이후에도 힘을 키우지 않았고, 자신을 더욱 낮추면서 새 황제 지지세력 포섭에 힘을 쏟고 있었다. 더욱이 간니스는 로마 귀환을 준비 중인 황제에게 양아버지이자 보호자로서, "절제되고 신중한 언행을 하셔야 합니다."라고 바른 소리를 했다가 그 자리에서 붙잡혀 목이 달아난 터라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간니스를 체포한 병사들은 디오의 표현처럼 그 누구도 간니스를 죽이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죽이기를 망설였다고 한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던 간에, 엘라가발루스는 간니스가 자신에게 쓴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죽였다. 따라서 모든 권력은 자연스럽게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율리아 마이사가 여제라는 호칭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가 원한 결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권력의 전면에 나오면서 모든 리스크를 가지고 가겠다고 생각한, 그녀의 또 다른 딸인 율리아 마마이아와 같은 바보가 아니었고, 이런 행동을 좋게 생각한 아우구스타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마이사는 형부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조카인 카라칼라로부터 본인과 두 딸이 황족의 지위를 얻었어도 본인의 혈통과 사회적 배경상의 한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는 둘째 딸 율리아 마마이아와 같이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아우구스타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엘라가발루스가 간니스를 죽이고, 이후 카파도키아 총독 술라까지 마크리누스 지지자로 의심해 자살을 강요해 죽인 이상, 마이사는 모든 짐을 떠맡아야만 했다. 따라서 마이사는 이후 로마 원로원의 불만 속에서도 무리해서 세나쿨룸을 만들어야만 할 정도로 제 스스로 독이 될 결정을 계속해서 밀어붙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친구들로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원로원 내 조력자들의 냉소적인 반응으로 이어지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17]
훗날 괴물이자 기이한 폭군이며, 암군으로 불릴 엘라가발루스의 치세는 이렇게 피비린내를 풍기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219년 봄, 엘라가발루스는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이모 율리아 마마이아 등과 함께 니코메디아를 떠나 로마로 향해 움직였다.
219년 여름, 로마에 입성한 새 황제는 로마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소년 황제는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색 비단 겉옷을 입었지만, 볼에 연지 화장을 하고 머리에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또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찼으며 손목 등에도 각종 장신구를 착용했다. 이때 헬레니즘 군주 또는 동방의 파르티아 군주를 퍼포먼스하는 듯한 황제의 모습보다 로마 사람들을 더 충격에 빠뜨린 것은 황제 행렬과 함께 로마에 입성한 거대한 원뿔형 검은 돌이었다.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상징하는 이 돌덩어리는 여러 문화를 접했던 로마인들에게까지도 낯설고 지나치게 괴이했는데, 바리우스 아비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돌을 신성시하면서 팔라티누스 언덕 위에 있는 신전에 안치했다. 이때 북을 치고 심벌즈를 치는 악사들의 동방 음악에 맞춰 생전 처음 듣는 시리아 여인들의 노래가 계속 들렸고, 팔라티노 황궁에서는 로마인들이 난생 처음보는 “음란하고 낯선 성행위” 의식까지 벌어졌다.
로마 입성 전, 엘라가발루스는 강직하고 절제력이 뛰어난 법률학자이자 수사학자였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 등을 추방하고, 마크리누스 황제의 내정 안전 방안을 지지한 트라키아 총독 클라우디우스 아탈루스 파테르쿨리아누스, 시리아 총독 파비우스 아그리피누스 같은 저명한 제국의 주요 장군과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한 터라 로마 원로원은 엘라가발루스 시대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에 입성한 엘라가발루스는 등장 직후, 아예 에데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태양신의 신체를 로마로 옮겨오고 수도 한복판인 포로 로마노에 태양신 신전을 건립하면서 이를 강요했다.[18] 이때 그는 동방 출신 로마 황제라는 부분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관료들을 추가로 색출해 처형하고, 카파도키아 총독 술라[19]와 같은 인사들에게 죄를 덮어 씌워 자살을 명령했으며, 로마 시민들에게 바알을 믿게 하고, 황궁으로 동방의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다.
2.5. 태양신
엘라가발루스의 즉위 이전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부터, 로마 제국 전역에서는 태양 숭배가 폭발적으로 증가 중이었다. 이는 로마군 및 속주 일대의 주민들 사이에서 유행해, 서방 방어선 일대 로마군들 사이에서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 미트라는 군신 마르스처럼 그 인기가 대단했다. 어느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지, 서기 2세기부터 로마 속주의 각 지역에는 미트라교의 신전인 '미트라에움'이 건설되었고, 로마 제국 안에서도 변방 중 변방이었던 브리타니아 지방에선 현재까지도 세 곳의 미트라에움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따라서 220년 말, 엘라가발루스가 이를 내세워 자신이 받들고 있었던 엘라가발 신을 로마 판테온의 주요 신으로 내세워 봉헌하고, 엘라가발을 '정복되지 않는 신 중의 최고의 신, 태양신 엘라가발'로 선포하며 자신을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 엘라가발을 대리하는 최고 제사장이자 사제로 선포한 것은 얼핏 이런 흐름에 편승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에 관해 로완, 수잔 소렉 같은 이들은 동시대 사람 헤로디아누스의 기록, 디오의 기록 등을 토대로 엘라가발루스의 태양신 숭배를 로마 제국의 종교개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학자들이 이렇게 엘라가발루스의 태양신 봉헌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학자들의 공통된 평가처럼 엘라가발루스의 조치는 미트라교의 태양신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른 조치였다.
실제 로마인들은 이런 엘라가발루스의 태양신 숭배를 이단으로 해석해 좋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엘라가발루스가 말하고, 강요한 태양신은 로마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치솟고 있었던 미트라교 숭배자들에게, 유일신을 믿는 제국 내 유대인과 기독교도에게도 무척 생소한 에메사 일대의 태양신 엘라가발(엘라가발루스)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엘라가발루스는 바알 숭배도 결합해서 숭배했기 때문에 그 색채가 로마인들에게 기묘하면서도 이상하게 보였다. 그 결과, 엘라가발루스와 그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종교정책은 로마와 각 속주 주민들 모두에게 지지받지 못했고, 그 잡음을 4년 내내 일으켰다.
이 사건에 대해 당대의 원로원 의원으로 엘라가발루스의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와 친분이 있었던, 디오 카시우스는 새로운 로마 종교의 축제를 주관하고 판테온의 최정점에 엘라가발을 올린 엘라가발루스가 대사제로서 자신의 경건함과 도덕성을 부각하고자, 스스로 할례를 받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로 맹세한 것을 기록했다. 더 큰 충격은 이 기괴하고 이해가지 않을 행사를 치르는 동안, 황제가 북, 피리, 심벌즈 반주에 맞춰 엘라가발 제단을 돌며 춤을 추고 이를 디오와 원로원 의원들에게 강제로 지켜보게 한 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은 면전에서 황제의 기괴하고 야한 성교 행위, 춤사위, 할례 의식 등을 보며 큰 충격에 빠졌다.
이렇게 괴상한 행동 못지 않게 충격적인 것은 엘라가발루스의 종교 행사에 늘 난잡한 행위와 기행, 흥청망청 돈을 쓰는 행동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로마 거리에서 정설처럼 떠돈, 서기 1세기 중반의 칼리굴라의 기행이 진짜 실행된 모습이었다. 과거 칼리굴라는 자신이 하지 않거나, 그저 농담식으로 던진 말이 암살된 뒤 정적과 호사가들에게 사실처럼 소개돼 미치광이, 변태 등으로 회자되어 최근까지도 욕을 먹었는데, 엘라가발루스는 칼리굴라가 했다는 행동을 진짜 벌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종교 개혁 조치로 좋게 포장한다고 해도 엘라가발루스의 종교정책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다. 로마 사회는 보수적이었던 터라, 그 파장은 더 컸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이를 신의 대리인이자 스스로 자신이 믿는 신이 보여야 할 모범적인 행동으로 여겨 개의치 않았다. 되려 이런 비방에 대해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욕하거나, 때론 비방으로 여겨 일부 속주 총독들에게는 자살을 강요하기도 했다. 설상가상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인들에게 논란이 생긴 행동을 몸소 보여주며, 모든 로마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엘라가발루스의 화려한 종교 행사 뒤엔 늘 온갖 음식이 무료로 분배되어, 하층민과 무산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것으로 사태가 수습될 리 만무했다. 로마인들은 1년도 안 되어 엘라가발루스를 미치광이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인들의 반응이 좋지 않음에도, 온갖 퍼포먼스를 벌이며 로마 시내를 충격의 연속으로 몰아갔다. 로마의 전통 종교에서 가장 신성시해온 베스타의 불, 마르스의 방패, 로마 여신의 상징물, 개선장군들의 봉헌물 등을 제멋대로 각각의 신전과 국고 등에서 빼온 다음 엘라가발을 모신 엘라가발리움으로 옮긴다거나, 6마리의 백마를 값비싼 금 장신구와 화려한 장식품으로 치장해 마차를 끌게 하고 사람을 태우지 않은 뒤, 황제와 측근들이 주변을 호위한다거나, 엘라가발루스가 신을 마주했다고 외치며 말 고삐를 잡고 마차 앞과 뒤를 달리는 기행을 벌인다거나, 자신이 신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이를 대리한다고 떠드는 등 온갖 이해못할 행동을 보여줬다. 이렇게 4년 내내 기행이 반복되니 동시대의 로마인들은 토착 종교에서 말하는 태양신과 황제가 주장하는 엘라가발이 같느냐는 의문과 궁금증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황제와 세베루스 가문이 상종못할 이상한 종자라며 조롱까지 퍼부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즉위 직전부터 로마군 안에서 태양 숭배가 일반 병사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어, 이를 두 눈으로 직접보지 않은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소란이 적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 시대 이후 아우렐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역시 병사들의 미트라 신, 태양신 숭배를 생각해 이를 자신들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의 이런 태양신 숭배와 로마 전통을 훼손한 부분은 짧은 치세에도 불구하고, 세베루스 왕조가 근위대와 경비대에게 조롱거리 내지 무시받는 이유가 되었으며, 후임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군권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되었다.
2.6. 난잡한 사생활과 끝없는 기행
이 사르다나팔루스[20]는 합당하다고 생각해 신(神)들에게 합당할 형태의 결혼으로 동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많은 여성들과 결혼했고, 법적 승인 없이 더 많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연인과 동침해야 할 때, 그들의 행동을 본받고 싶었고, 무분별하게 교제함으로써 방탕한 공범자를 얻고자 했다. 이에 그는 자기 몸을 사용하여 능히 사람이 말하거나 들을 수 없는 많은 이상한 일을 행하고 허락했다.
디오 카시우스
디오 카시우스
A rational voluptuary adheres with invariable respect to the temperate dictates of nature, and improves the gratifications of sense by social intercourse, endearing connections, and the soft colouring of taste and the imagination. But Elagabalus (I speak of the emperor of that name) corrupted by his youth, his country, and his fortune, abandoned himself to the grossest pleasures with ungoverned fury, and soon found disgust and satiety in the midst of his enjoyments. The inflammatory powers of art were summoned to his aid: the confused multitude of women, of wines, and of dishes, and the studied variety of attitude and sauces, served to revive his languid appetites. New terms and new inventions in these sciences, the only ones cultivated and patronized by the monarch, signalized his reign, and transmitted his infamy to succeeding times. A capricious prodigality supplied the want of taste and elegance; and whilst Elagabalus lavished away the treasures of his people in the wildest extravagance, his own voice and that of his flatterers applauded a spirit of magnificence unknown to the tameness of his predecessors.
아무리 욕망에 충실하다 해도, 이성을 지닌 존재라면 자연이 정해준 법칙을 항상 존중하면서,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할 때도 사교와 애정, 심미와 상상력을 통해 색을 덮어씌우기 마련이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라 불린 그 황제는 젋음과 출신과 행운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나머지 무한한 쾌락에 몸을 맡겼고, 이내 그것들에 질린 나머지 싫증을 내게 되었다. 그런 황제를 위해 온갖 기교와 쾌락이 동원되었고, 여자와 포도주와 미식과 교태와 다양한 음식 소스만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것들을 개발한 것만이 엘라가발루스가 열정적으로 투자한 유일한 분야이자 업적이며, 이것이 그가 후세에 오명을 남긴 이유였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6장에서(#)
아무리 욕망에 충실하다 해도, 이성을 지닌 존재라면 자연이 정해준 법칙을 항상 존중하면서,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할 때도 사교와 애정, 심미와 상상력을 통해 색을 덮어씌우기 마련이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라 불린 그 황제는 젋음과 출신과 행운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나머지 무한한 쾌락에 몸을 맡겼고, 이내 그것들에 질린 나머지 싫증을 내게 되었다. 그런 황제를 위해 온갖 기교와 쾌락이 동원되었고, 여자와 포도주와 미식과 교태와 다양한 음식 소스만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것들을 개발한 것만이 엘라가발루스가 열정적으로 투자한 유일한 분야이자 업적이며, 이것이 그가 후세에 오명을 남긴 이유였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6장에서(#)
엘라가발루스는 짦은 생애 동안 해괴한 행동과 장난을 벌여놓은 황제로 유명하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그의 통치 자체가 전부 우스갯짓이었다는 평가까지 있게 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세계상식백과》에서는 그를 "장난꾸러기 황제"라는 타이틀로 소개했는데, 그가 한 행각들을 보면 장난 수준으로 넘기긴 힘든 여러 가지 기행들이 적지 않다.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만찬 초대는 아무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만찬이래야 기껏 섬찍한 맛을 보는 게 고작이고 운이 없으면 심술에 걸려 목숨을 빼앗기는 수도 있었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 젊은 황제는 운수 나쁘게 뽑힌 신하를 어떤 방법으로 골려줄까를 생각하면서 소일했다.
그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뚱뚱한 7인을 만찬에 초대하는 일이었다. 초대객은 공기를 넣어 부풀린 의자에 앉았지만 이내 노예들이 그걸 터뜨려 버리기 때문에 뚱보들은 식사중 마룻바닥까지 가라앉곤 했다. 손님들에게 유리나 대리석 혹은 상아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는데 손님들은 예의를 지키느라고 그걸 먹는 체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음식이 나온다 해도 손님들은 고깃국물 속에 든 거미나, 과자 속에든 사자똥을 찾아내기 일쑤였다. 너무 잘 먹고 잠에 떨어진 사람은 일어나 보면 사자와 표범, 곰들이 가득찬 방에 누워 있곤 했다. 졸도하지 않은 사람만이 동물들이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서기 218년부터 222년까지 재위했던 엘라가발루스 황제는 동물을 너무 좋아하여 종종 그의 마차를 개나 숫사슴 또는 사자나 호랑이에게 끌게 했다. 또 국가의 거창한 식전(式典)에 나체의 여인이 끄는 1륜차를 타고 등장하는가 하면 노예들을 시켜 거미줄이나 개구리, 전갈 혹은 독사를 수집하게 해서 신하들에게 선물로 보내곤 했다.
한번은 그에게 매우 재미있어 보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찬 초대객들에게 장미꽃잎 소나기를 퍼부어 보자는 것이었다. 꽃잎을 너무 퍼부어댔기 때문에 몇 사람이 질식해 죽었다.
황제의 낭비벽으로 국고가 바닥났다. 그는 장대한 목욕탕을 지으라고 명령한 뒤 한번 목욕하고는 부숴 버리게 하기도 했다. 로마는 황제의 그 같은 생활에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친위대 병사에 의해 살해되어 티베르강에 던져졌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출처 : 《리더스 다이제스트 세계상식백과》 498P "장난꾸러기 황제"
여기 쓰여진 본문과 같이 온갖 기행을 저질러서 화제가 되었다. 일례로 연회에 초대한 손님들에게 유리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으며, 제대로 된 음식에는 쓰레기나 말똥을 섞고 거미를 넣어 그걸 보고 손님들이 아연실색하는걸 보며 비웃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하나 노예들에게 거미줄처럼 수집하기 어려운 것을 구해오라고 명령하는 건 물론 개구리, 전갈, 독사 등 위험하거나 비호감인 것들까지 수집하게 하는 등 별의별 임무를 다 시켰고 이렇게 수집한 것을 자신에게 충언을 한 신하들이나 자신이 아니꼽게 본 신하들에게 선물로 보내 놀라자빠지는 걸 보고 즐거워했다. 한때는 행사 때 꽃잎을 마구 퍼부었다가 몇 명이 질식사했고,[21] 사제로 사는 동안에는 반드시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베스타의 여제사장을 강간하는 등 하여튼 별의 별 기행으로 로마인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그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뚱뚱한 7인을 만찬에 초대하는 일이었다. 초대객은 공기를 넣어 부풀린 의자에 앉았지만 이내 노예들이 그걸 터뜨려 버리기 때문에 뚱보들은 식사중 마룻바닥까지 가라앉곤 했다. 손님들에게 유리나 대리석 혹은 상아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는데 손님들은 예의를 지키느라고 그걸 먹는 체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음식이 나온다 해도 손님들은 고깃국물 속에 든 거미나, 과자 속에든 사자똥을 찾아내기 일쑤였다. 너무 잘 먹고 잠에 떨어진 사람은 일어나 보면 사자와 표범, 곰들이 가득찬 방에 누워 있곤 했다. 졸도하지 않은 사람만이 동물들이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서기 218년부터 222년까지 재위했던 엘라가발루스 황제는 동물을 너무 좋아하여 종종 그의 마차를 개나 숫사슴 또는 사자나 호랑이에게 끌게 했다. 또 국가의 거창한 식전(式典)에 나체의 여인이 끄는 1륜차를 타고 등장하는가 하면 노예들을 시켜 거미줄이나 개구리, 전갈 혹은 독사를 수집하게 해서 신하들에게 선물로 보내곤 했다.
한번은 그에게 매우 재미있어 보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찬 초대객들에게 장미꽃잎 소나기를 퍼부어 보자는 것이었다. 꽃잎을 너무 퍼부어댔기 때문에 몇 사람이 질식해 죽었다.
황제의 낭비벽으로 국고가 바닥났다. 그는 장대한 목욕탕을 지으라고 명령한 뒤 한번 목욕하고는 부숴 버리게 하기도 했다. 로마는 황제의 그 같은 생활에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친위대 병사에 의해 살해되어 티베르강에 던져졌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출처 : 《리더스 다이제스트 세계상식백과》 498P "장난꾸러기 황제"
당시 베스타의 여사제들은 공연 등이 열리면 언제나 특등석을 배정받고, 지나갈 때 누구나 경외를 표현해야 할 정도로 로마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22] 물론 그만큼 규율도 엄격해서, 베스타의 여사제들이 강간이 아닌 걸로 순결을 잃으면 보통 생매장했으며, 상대 남자는 무조건 때려 죽였다.[23] 보통은 10살 이전에 사제 생활을 시작해서 40대 때 은퇴하면 사제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엘라가발루스의 출신지인 레반트에서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신의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여사제가 남성 신도와 성관계를 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 관습을 적용시킨 것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게 레반트의 전통이었던 만큼 그곳에서만 통하지 로마 시에서는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안하고, 황제라며 제멋대로 베스타의 여사제 같은 고위 성직자를 모욕하는 짓을 벌였으니 당연히 로마인들의 증오를 받았다.[24]
또한, 다섯 번이나 결혼했다가 이혼하기도 했으며, 특히나 그의 게이 성향, 그것도 바텀이었다는 사실때문에 로마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놓고 황제에 대한 경멸을 표시했다. 아예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황제 본인이 '짐을 여자로 만들어주면 제국의 절반을 주겠노라'라고 포고령을 내린 것이 와전된 듯하다.
엘라가발루스는 아침부터 밤까지 여성 및 남성들과 난교를 하다가 만족을 못해, 밤마다 황궁 밖을 나가 홍등가를 돌며 창녀들과 만남을 갖고, 때론 그녀들의 자리를 차지해 홍등가의 손님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고, 아양을 떨었다고 한다. 따라서 거리에서 도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원로원 의원, 근위대 병사, 관료, 부자들은 이를 수소문해 사실인지 확인했는데, 엘라가발루스가 진짜 이런 미친 짓을 벌이자 아연실색하고 부끄러워 했다.
당시 로마의 관념에서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기독교화 이전에도 로마는 동성애를 굉장히 싫어했던데다가[25], 만약 하더라도 로마 시민은 탑을 할지언정 바텀은 안 되는 존재였다.[26] 군대에서 동성애를 하다 걸리면 행한 자는 로마 시민에게 탑을 한 죄, 당한 자는 강제로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로마 시민이면서 바텀을 한 죄로 사형에 처한다고 딱 규정해놓았을 정도였다.[27] 그런데 그 로마 시민의 수장인 황제라는 자가, 그것도 대놓고 남들 보는데서 여장을 하고 짙은 화장을 한 뒤 동성애 상대에게 여자 역할을 하면서 아양을 떨곤 했으니 경멸의 대상을 넘어 대다수의 로마인들에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으리라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애초에 현대 이전에는 로마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여자 역할을 맡는 남자는 사회적으로 철저한 멸시의 대상이었다. 동성애에 관대했던 고대 그리스조차 이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물론 모든 로마 황제가 동성애 자체와 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네로는 로마 사회에서 거세시킨 미소년 스포루스를 남첩으로 둔 것으로 유명한 양성애자였고, 갈바는 인생 말년 제위에 오를 당시, 자신의 해방노예를 애인으로 삼고 남첩도 뒀으며, 오현제 중 한 명인 네르바 역시 당대부터 동성애자이자 소아성애자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 주제에서 가장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도 남자 애인(안티노우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전임 트라야누스는 남색가로 유명했는데, 이 황제는 물론 이성애자였다. 단지 청년들을 거느리고 왁지지껄한 회식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즐기는 버릇 탓에 의심받은 케이스였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이성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카프리 섬에 칩거할 때 남색을 즐겼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은둔생활 탓에 이 소문이 풍자시나 서민들의 안줏거리 농담으로 돌아 그 내상이 상당했다. 어릴 때부터 워낙 금욕적이고 엄격한 데다가 동성애를 굉장히 싫어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설령 농담이나 풍자시라고 해도 용서 못한다"며 원로원 내에 있었던 유포자를 모욕준 뒤 자살시키고, 이후에도 걸렸다하면 극대노한 뒤 바로 반역죄에 준하는 강력한 처벌을 단행했다.
-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본인이 남자 역할을 맡아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낮고 자신보다 어린 남성들을 여자로 간주하여 교제를 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흔하지 않아서 대부분은 말 그대로 풍자시나 오해 등이 진실로 왜곡된 케이스였다. 기독교화 이전의 로마 성문화는 의외로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과 많이 비슷해서 같은 남성이라도 사내다운 사내와 사실상 여자나 다름없는, 즉 육체적 성별만 남성이지 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사내라 볼 수 없는 남자로 나뉘어 있다고 보고, 후자를 여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 여기지 않았다. 즉 '사내다운 사내가 남성성이 주체가 안되면 천한 미소년을 여자로 간주해서 원나잇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정도의 인식이어서, 상대에게 당하는 동성애는 절대적으로 금기였다는 것이다.
2.7. 히에로클레스와 조티쿠스
엘라가발루스는 남녀의 연인 관계에 있어 매우 부도덕한 측면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누명을 쓰고 피살되거나 추방되었다. 따라서 디오 카시우스나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같은 원로원 귀족들은 그 증오심을 표출했다. 엘라가발루스는 향년 18세의 나이까지 총 5번 결혼했는데, 여러 이유로 결혼과 이혼 과정에서 황후로 낙점된 이들의 가족과 그 친구들을 추방하거나, 자살을 강요하고, 처형하여 모두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엘라가발루스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율리아 마이사에게 황후로 낙점된 안니아 파우스티나가 엘라가발루스와 결혼할 당시, 마이사와 엘라가발루스는 파우스티나의 남편인 이탈리아의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 전직 집정관 폼포니우스 바수스를 붙잡아 이유없이 처형했다. 안니아 파우스티나 이전에 한번, 이후에 다시 한번 강제로 결혼한 아퀼리아 세베라 역시 본인과 그 가족 모두 심한 고초를 겪었다. 아퀼리아 세베라는 베스타 여신의 여사제로 살다가 엘라가발루스에게 강간을 당하고 협박 속에 결혼했다. 그래서 신부의 아버지였던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는 딸의 명예가 실추되고, 로마의 전통이 손상됨을 따졌다. 그러자 엘라가발루스는 격렬하게 반발하는 아퀼리우스 사비누스와 오래된 로마 귀족 가문인 아퀼리우스 가문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신부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장교는 황제가 사용하는 시리아어(혹은 시리아 방언이 섞인 그리스어)를 잘 몰랐다. 하여 죽이라는 명령을 추방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는 목숨은 건진 채 이탈리아를 떠났고 더 큰 화를 피했다. 따라서 이를 본 헤로디아누스, 디오,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 동시대 로마인들은 황제를 미치광이보다 못하다고 깠다. 이 외에도 엘라가발루스는 무언가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리면, 주변을 의심해 총독, 관료, 장교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거나 자살을 강요했다. 한 예로 엘라가발루스는 동방 주둔 병사들이 자꾸 "가짜 안토니누스에게 속았다."라며 항명을 하자, 죄없는 카파도키아 총독 술라가 소문을 퍼트린 주범이라고 의심했다. 그래서 술라는 황제의 의심을 받고 자기 변호도 못한채 자살을 강요받아 죽었다.이런 강요된 결혼 및 이혼, 마구잡이 자살 강요보다 더 문제를 일으킨 것은 엘라가발루스의 남자 애인들이었다. 엘라가발루스는 남자 애인 2명과 삼각관계를 유지하다가, 모든 혼란을 유발시키고 국정을 파탄내 로마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디오는
"이 여자(엘라가발루스)의 남편은 카리아의 전 노예이자 전차 기수인 히에로클레스였다."
라고 말하면서, 엘라가발루스가 히에로클레스의 정부, 아내, 여왕이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고 적었다. 비방이 아닌 사실이었는데, 로마인들은 과거 어떤 황제도 하지 않은 이런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젊은 귀부인들이 하는 화장, 분장, 가발을 쓰고 다니면서 자신을 남성을 존칭해 부르는 칭호 대신 "부인", "여사님"이라고 불릴 때 좋아하면서, 비위를 맞춘 이들에게 막대한 하사금을 줬다. 히에로클레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카리아 출신 그리스인으로, 매력적인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미남이었다. 그는 옛 프리기아 출신의 고르디우스라는 기병대 장교의 친구이자 애인이었으며 제자였다고 한다. 이 고르디우스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친척으로 추정되는데,[28] 엘라가발루스는 고르디우스의 친구, 애인, 제자이며 아나톨리아 지방 카리아 출신의 해방노예였던 히에로클레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어느 날, 엘라가발루스는 전차 경주를 관람하려고 갔다가 그곳에서 잘생기고 건장한 금발머리의 전차기수 히에로클레스를 봤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히에로클레스는 전차 경주 도중 황제 앞에서 넘어졌고, 이때 엘라가발루스는 자신 앞에서 넘어진 히에로클레스에게 홀딱 빠져 사랑에 빠졌다. 이는 히에로클레스가 연출한 장면이 아닌 사고 때문이었는데, 엘라가발루스는 히에로클레스의 멋진 금발머리와 잘생긴 외모, 멋진 몸매에 홀딱 매료돼 그를 이 경기 직후 남편이며 정식 애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따라서 히에로클레스는 이후 황제의 총애 속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고, 곧 세상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엘라가발루스의 히에로클레스 사랑은 동시대 로마인의 공통된 표현에 따르면 괴기하면서도 혼란스럽고 난잡했다고 한다. 그래서 히에로클레스의 힘은 막강해졌고, 두 사람은 애인이면서도 서로 여자 애인들과 난교 파티를 벌이고 서로 부부로 있으면서 엘라가발루스가 여성 분장을 하고 아양을 떨었다고 한다. 따라서 히에로클레스의 어머니는 아들의 벼락출세 덕분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고, 히에로클레스는 전직 집정관의 모든 특권을 받아 귀족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히에로클레스에 만족하지 못했다. 하여 그는 제국 전역에서 자기를 만족시킬 건장하고 잘생긴 동성 애인을 찾았다. 엘라가발루스는 이 과정에서 매일 같이 자신의 눈앞에 띤 원로원 의원, 군인, 시종, 일반 남성들에게 성희롱을 하고 유혹했는데, 이때 황제의 면전에서 이 치욕을 당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자괴감 속에서 잠시 은퇴한 뒤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 어쨌든 엘라가발루스는 히에로클레스 못지 않은 새로운 애인을 찾았는데, 그의 눈에 띤 이는 당대 로마의 운동선수였던 아우렐리우스 조티쿠스였다.
디오 카시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것을 차용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모두에 따르면, 엘라가발루스는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도시인 스미르나(튀르키예의 이즈미르) 출신이었던 운동선수 아우렐리우스 조티쿠스에게 폭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엘라가발루스는 그를 황제 침실 수행원(쿠비쿨라리우스)에 임명해, 지근거리에 두고 매일 같이 그를 불러 잠자리를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조티쿠스가 아름다운 몸을 가진데다가 매우 큰 성기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는 자신과 여러 여자 애인들과 난교를 할 때 매일 만족을 준 조티쿠스에게 Mageiros(요리사)라는 별명을 지어줬고, 히에로클레스와 동성 연인임을 선포한 상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또 조티쿠스에게 자신의 친할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의 모든 이름과 영예를 내리고, 시리아 귀족의 지위와 로마 귀족의 지위까지 모조리 선물로 줬다.
이렇게 되자, 팔라티노 황궁 안은 율리아 마이사 vs 히에로클레스 vs 조티쿠스 세력 사이의 알력이 벌어졌는데, 엘라가발루스는 삼각관계를 유지했고, 남자 애인끼리의 경쟁을 유발해 그 질투심 속에서 자신이 사랑받음을 즐겼다고 한다. 따라서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히에로클레스는 엘라가발루스가 자신에게 불충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물리적 폭력까지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엘라가발루스는 히에로클레스를 사랑하면서도, 조티쿠스에게도 열렬한 사랑을 표현했다. 그래서 엘라가발루스는 조티쿠스를 데리고 목욕을 하러 갔으며, 조티쿠스가 운동선수로서 컨디션 조절차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스케줄에 맞춰 하룻밤을 정성스레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이를 안 히에로클레스는 황제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운 나머지 몰래 마약을 조티쿠스에게 먹였다. 그 결과, 약에 취해 황제의 요구를 받아주지 못한 조티쿠스는 완전히 총애를 잃어버렸다. 따라서 조티쿠스는 엘라발루스에게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든 명예를 박탈당하고,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었다. 이때가 서기 221년인데, 이는 반강제로 황제에게 끌려가 남자 애인이 되었던 조티쿠스 본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다. 따라서 디오 카시우스는 잘생기고 좋은 몸을 가진 이유로 황제의 남색 대상이 된 조티쿠스가 추방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엘라가발루스와 히에로클레스가 모두 몰락할 때 면죄부를 받고 목숨을 구한 배경이 되었다고 했다. 조티쿠스는 엘라가발루스에게 잠시 총애를 얻었을 당시 모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엘라가발루스의 호의를 이용해 얻은 좋은 집안 출신의 미녀를 아내로 두며 살아남았다고 한다.
따라서 서기 221년, 모든 경쟁자를 물리친 히에로클레스는 더 큰 권력을 얻고 과거의[29] 클레안데르 이상의 권세가가 되었다. 여기에는 황제의 모후 소아이미아스도 가세해 이들의 난잡한 사생활과 그로 인한 혼란은 심화되었다. 따라서 섭정인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의 친구이며, 정권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디오 카시우스와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은 그 끔찍함과 혐오감을 표출하면서, 일찌감치 엘라가발루스 정부와 손절하기에 이르렀다.
2.8. 몰락
일찍이 이전 황제들에 관한 소문을 진짜 벌인 일로 인식하여 까기도 했고, 다른 직업으로 활동한 막장 폭군 황제들까지 경험했던 로마인들에게조차 엘라가발루스의 정신나간 행동은 꿈 속에서나 경험할 법한 충격 그 자체였다. 등장부터 로마인들에게는 지긋지긋한 패배자였던 페니키아인들의 복장으로 도배된 이들이 근위대장, 고위 관리, 시종들이 되어 보이질 않나, 개국 이래 섬겨온 로마의 판테온 통치자인 유피테르 신과 국가 여신 로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시리아 촌구석에서나 숭상하는 엘라가발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현지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만들려고 한 조치까지 강요받자, 로마인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로마 시와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은 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왕조를 로마인이 아닌 시리아인으로 여기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엘라가발루스의 명령에 따라 매년 한여름마다,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는 엘라가발룸으로 불린 태양신 신전으로 페니키아 복장의 사람들이 검은 돌을 6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로 운반할 때마다 안줏거리 소재처럼 나오게 했다.로마인들은 엘라가발루스의 치세 내내 다른 부분에서도 큰 충격을 연이어 받았는데, 그것은 엘라가발루스가 유일신을 믿는 다른 로마 내 소수종교들도 하지 않은 방법으로, 모든 로마 내 종교행사에서 엘라가발 신을 신 중의 신으로 만들고, 로마인들의 자부심이었던 전통적인 로마 신들을 모두 엘라가발의 노예이자 시종으로 만든 결정이었다. 심지어 로마 제국에서 일찍이 예민한 문제로 생각한 유대교와 기독교까지 엘라가발 신에 대한 강제 숭배를 하도록 했다고 하니,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와 상관없이 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왕조라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럼에도 엘라가발루스는 자신과 에메사 가문이 숭상하는 엘라가발 신을 위해 노력했고, 모든 종교행사에 황제가 참석해 엘라가발을 위한 희생제까지 매일같이 올리도록 명령했다. 이는 고대 기록인 《엘라가발루스의 생애》에도 언급되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엘라가발루스는 온갖 마술사들을 불러와 매일 희생제를 올리게 하고, 희생된 어린이들의 장기를 검사했으며, 자신만의 고유 권한으로 희생자들을 고문하곤 했다."
고 한다.따라서 민심은 최악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나마 동방 출신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헤로디아누스나 디오 카시우스 같은 인사들도 엘라가발루스를 싫어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중 세베루스 왕조에 꽤 호의적인 원로원 중진 인사로 율리아 마이사와의 친분 때문에 엘라가발루스 시대때 승승장구했던 디오는, 자신의 책에 대놓고 엘라가발루스를 "이 '여자'"로 지칭하면서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했고, 자신이 직접 본 것을 소상하게 적으면서 그 혐오감을 대놓고 드러냈다.[30]
이렇게 엘라가발루스는 1세기 중반의 칼리굴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가 했다고 주장되었지만 실제 하지 않았던 기행을 모두 했다. 이는 칼리굴라가 그의 정적들과 후대의 수에토니우스가 했다고 주장한 것만으로, 재평가가 된 현대까지도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런 행동을 실제로 한 엘라가발루스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막장으로 치닫게 되니 반 세베루스 왕조의 움직임과 그 강도는 갈수록 심해졌다. 로마의 관료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아프리카 속주에 본적을 둔 이탈리아 혈통의 세베루스 왕조를 시리아인들로 생각했고, 속주 행정과 지역 방어 등에서 갈수록 역할이 커지고 있었던 각 지역의 로마 군단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재위 1년밖에 안 된 218년부터 엘라가발루스를 옹립시킨 동방의 로마군과 세베루스 왕조의 근거지 중 하나인 시리아 속주에서 연이어 '가짜 안토니누스' 이야기가 돌았고,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거짓말에 제대로 속았다면서 모반의 움직임이 끝없이 벌어졌다. 특히 시리아 속주에 주둔 중인 제3군단 갈리카는 아예 황제와 세베루스 왕조에 넌더리를 냈고, 군단장 베루스를 황제로 세우려고 시도했다. 이는 바로 옆의 제4군단과 지중해 동부를 책임진 해군까지 비슷했다.
221년 여름이 되면 눈치 빠른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를 따르는 원로원 내 세베루스 왕조 골수 지지세력이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을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내리게되었다. 엘라가발루스는 즉위한 지 4년여 만에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아 민심을 완전히 잃었고, 시리아에서는 동방 군단들이 음모가 발각되는 중에도 계속 새로운 황제를 옹립시키며 반항했다.(겔리우스 막시무스, 베루스) 또한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지지 철회 움직임은 서방쪽 군단들에게까지 퍼지면서 전 로마군의 반발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반란들이 싱겁게 진압되기도 했고, 모든 군대가 돌아선 것도 아니긴 했으나, 한 번 완전히 잃어버린 군심은 이후 세베루스 왕조가 다시는 군통수권과 군대의 지지를 온전히 얻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와중에도 엘라가발루스의 끝없는 기행과 여성 편력, 남성 편력 등은 그 강도가 갈수록 심해졌고, 세베루스 황실과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 내에서도 모르는 이들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황제의 모후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로마인들에게 욕을 먹는 종교정책과 기이한 엘라가발 신 숭배를 적극 권장했다. 엘라가발루스 본인은 동성간의 성행위를 즐기기 위해 여성 역할을 하면서 매일 같이 자신을 침대 위에서 만족시키지 못한 남자 애인들을 버리는 행동이나 로마 엘리트들을 상대로 성희롱을 하면서 모멸감을 주는 행동들을 일삼았고,[31] 할례를 행하고, 돼지고기를 멀리하겠다는 선언까지 하면서 세베루스 왕가와 시리아계 에메사 왕가 모두의 위상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대책을 강구할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낀 율리아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의 모후 소아이미아스와 함께 정권 유지에 집중하면서도 엘라가발루스와 소아이미아스를 쳐낼 궁리를 했다. 우선 마이사는 동방군, 서방군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장군을 강제 소환하여, 억지로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안티오키아누스는 일반 사병에서 원로원 의원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그 전문성을 기반으로 레누스 강, 다누비우스 강 전선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었으며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 등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군율을 다 잡은 존경받는 훈련가였다. 그리고 마이사는 콤모두스 황제 시절부터 노련한 군인이었던 발레리우스 코마존도 근위대장으로 임명해 군심을 다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명성있는 장군을 둘이나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에 올려도, 황제가 저 모양이다보니 수습이 될 수가 없었다.
결국 마이사는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생존을 위해, 엘라가발루스와 큰딸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녀는 외손주를 찾아가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로마 최고의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황제의 책무보다 대사제의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라고 구슬린 뒤 둘째 딸 마마이아의 아들, 즉 자신의 또 다른 외손자이자 엘라가발루스의 이종사촌 동생이었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황제의 양자로 삼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율리아 마이사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엘라가발루스와 소아이미아스는 정권 유지를 위한 꾀 정도로 생각했다. 특히 아무 생각도 없었던 엘라가발루스는 외할머니에게 제대로 속아서 외사촌 알렉산데르를 양자로 입적한 후 아예 카이사르로 삼아 황태자로 만들었다.마이사의 또 다른 외손자였던 알렉산데르는 어렸지만 본래부터 착실한 성격이었고 차분한 아이였다. 무엇보다 알렉산데르는 자신의 사촌 형이 하는 짓을 따라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인들과 원로원, 군부는 자연스럽게 알렉산데르를 지지하게 되었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엘라가발루스는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다. 그는 매일같이 잠을 설치며 긴장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자기 사촌동생을 암살하기로 했다. 그런데 암살 사주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자객에게 시키는 것이 당연한 법인데, 엘라가발루스는 사태 파악을 못하고 이런 짓을 근위대장에게 시켰다. 떳떳하지 않은 짓을 비선실세류가 아닌 공식 경로로 시키기에는 황제의 혈통적[32] / 카리스마적[33] 권위가 모두 부족했다[34]
2.8.1. 암살
"그는 도피를 시도했는데, 18세였을 때 발견되어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궤짝에 넣어 어딘가로 도망쳤을 것이다. 이때 그를 껴안고 꼭 붙들던 어머니도 함께 죽었다. 그들의 머리가 잘리고 그들의 몸은(옷이) 벗겨진 후 먼저 도시 여기저기에 끌려다니다가, 그후 어머니의 시체는 여기저기에 버려지고, 그자의 시체는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디오 카시우스, 《역사》 중 엘라가발루스의 암살 이야기 일부
디오 카시우스, 《역사》 중 엘라가발루스의 암살 이야기 일부
근위대장 2명과 근위대는 새로 등장한 알렉산데르가 워낙 정상인이고, 로마인다운 정체성을 가진 터라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따라서 암살 명령을 받은 근위대장 발레리우스 코마존과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알렉산데르 암살을 명령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엘라가발루스는 이때 어린애들도 하지 않을 멍청한 행동을 또 벌였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나간듯한 황제에게 불만투성이였던 근위대를 배려한 근위대장들이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도, 황제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시켜 병영에 알렉산데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소문이라며 돌게 한 것이었다. 이에 병사들은 근위대장들이 자신들에게 어린 알렉산데르를 죽이라고 명령하자마자, "두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좀 해봅시다"라며 격렬하게 반발하더니 결국 따르겠다는 시늉을 한 다음,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곧바로 움직였다.
서기 222년 3월 11일, 엘라가발루스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근위대 병사들을 만나겠다고 한 다음, 요청대로 로마 시 옆에 위치한 근위대 병영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 엘라가발루스는 외사촌 알렉산데르와 자신의 어머니인 소아이미아스를 공개적으로 소개하면서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카라칼라의)진짜 아들인 짐이다. 짐은 내년에 더 운이 좋을 것이다! 제군은 알 것이다. 옆에 있는 알렉산데르는 짐에게 진실 어린 사랑을 받아 함께 집정관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고, 이제 짐이 건재해야만 어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란 존재하고 안전할 수 있도다."
이는 엘라가발루스가 자신과 모후를 지지하고, 알렉산데르를 불신임해 현장에서 없애달라는 요구였다. 병사들은 도리어 하나둘 알렉산데르를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들은 장교, 병사 상관없이 엘라가발루스 연설과 호소를 듣다가 실소했고, 비웃다가 일부 병사들이 엘라가발루스가 음란하고 짐승 같다고 하면서 제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근친상간을 하는 짐승이라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황제 모자가 모두 애인을 두고 있고 부도덕하고 음탕하다고 떠들면서 맞지 않냐고 비난했다. 일부는 황제의 연설을 똑같이 흉내내면서 에메사 억양이 강해 아랍어와 같은 그리스어 발음을 어눌한 라틴어 발음과 섞어 조롱했다.
이에 당황한 엘라가발루스와 소아이미아스는 불충을 행하며, 근위대 병사답지 않은 행동을 벌인 이들을 모조리 체포해 즉시 죽이라고,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두 근위대장은 완전히 손을 놓고,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와 떨어져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옆에 인질처럼 있는 어린 알렉산데르를 보호했다. 이 장면은 신호였는데, 그 순간 맨 앞 장교들이 이때 이렇게 일제히 외쳤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신격 세베루스의 유일한 손자!"
맨 앞 장교에 이어 근위대의 각 대대장들과 백인대장들, 그리고 전 병력이 똑같이 일제히 알렉산데르를 더 크게 지지하면서, 재차 이렇게 외쳤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엘라가발루스와 소아이미아스 주변은 곧 벌어질 상황을 직감하고, 두 사람을 급히 마차에 태웠다. 이와 동시에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가 혹시 모를 상황을 우려해, 엘라가발루스에게 인질처럼 끌려온 알렉산데르를 게르만족 경호대에게 맡기며 경호를 지시하고, 알렉산데르와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를 근위대 병영 안에 마련된 안가로 대피시켰다. 이런 가운데 근위대 전체가 하나된 마음으로 엘라가발루스와 소아이미아스를 죽이자고 외치면서,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추격했다.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흐르자, 엘라가발루스 모자의 시종과 측근들은 제 몸을 희생하면서 시간을 벌였다. 두 사람은 급히 팔라티노 황궁로 도망쳤고,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는 근위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엘라가발루스는 첫 등장부터 구제불능 부적격자였기 때문에, 설령 그가 정통성이 대단하다고 한들, 씨알도 먹힐 예기가 아니었다. 황제로부터 명령을 받은 두 명의 근위대장들은 알렉산데르 암살을 결행하기 위해 움직였다가, 집단 태업도 파업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분노한 전 근위대 병사들에게 가장 먼저 살생부 명단에 오를 위기에 처했다. 엘라가발루스의 근위대장 중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본인 스스로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게타, 그리고 율리아 돔나에게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엘라가발루스 모자를 이렇게 제거하면, 알렉산데르 치세가 불안해진다는 위기를 직감했다. 따라서 그는 본분에 최선을 다했다. 안티오키아누스는 3월 11일 황궁으로 쳐들어가 정원을 뒤지고 있었던 근위대 대대장들, 백인대장들과 병사들에게 "엘라가발루스를 죽이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반드시 생포한 뒤 원로원과 시민 앞에 세워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근위대 병사들은 그렇게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었고, 일단 잡고 보자는 생각으로 황궁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는데 주력했다.
반면 발레리우스 코마존은 트라키아 주둔 로마군 병사 시절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데다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의 콤모두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한 후 군단장을 거처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집정관까지 겪은 인물답게 능수능란하게 행동했다. 그는 안티오키아누스와 달리 일단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잡고 보자는 식으로 행동했고, 병사들을 히에로클레스 등을 생포하는 작전에도 투입시켰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행동은 코마존이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였던 만큼, 자신의 직위를 모두 활용해, 원로원 동료 의원들과 이후 조치까지 의논한 일이었다. 그는 젊을 적부터 친분 있던 동료들에게 원로원 소집을 부탁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옹립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코마존은 소집된 원로원에게 세베루스 왕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지원했다고 밝혔고, 여러 증거를 내보이면서, 자신과 동료 안티오키아누스 모두 엘라가발루스가 로마 제국을 망치는 것을 막은 일을 상기시켰다.
어찌되었던 간에 엘라가발루스가 알렉산데르를 죽이겠다고 소문을 퍼트리고 명령까지 내린 일은 화근이 되었다. 분노한 근위대장 2명과 근위대 병사 전체는 거꾸로 암살 명령을 내린 엘라가발루스 황제와 모후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를 살해했다. 디오 카시우스가 남긴 글에 따르면, 엘라가발루스는 도피를 시도했고 상자 안에 숨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지다가 발견된 뒤, 어머니와 꼭 붙잡고 있는 채로 울며 불며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화장실에 숨었다가 어머니와 함께 발견되었으며, 비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엘라가발루스가 모후 및 총신과 함께 어떻게 죽었던지 간에, 그의 최후는 매우 비참했다.
이때 엘라가발루스 모자와 측근들이 얼마나 로마인들의 증오를 받았던지 이 세 명의 시신은 로마 건국 당시부터 사용되어 온 전통적이고 잔혹한 방법으로 다뤄졌다. 살해당한 황제와 모후, 총신의 시신은 발가벗겨진 채, 로마 시내에서 질질 끌려다니다가 병사들 손에 머리가 잘렸다. 이후 머리는 온 시내를 돌아다니며 조롱을 받았고, 사지는 잘린 뒤 난도질당했다. 이후 로마인들은 세 사람의 육체 중 온전히 남은 몸통을 티베리스 강의 더러운 하수구에 버렸다. 로마에서 고인을 향해 "티베리스 강에 던져버려라"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또 이런 처벌을 당했다면, 엘라가발루스가 로마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기억 속에서 잊고 싶었던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최후였다. 엘라가발루스 모자와 측근들의 시신이 로마 옆 티베리스 강에 던져지자, 로마 원로원, 근위대, 로마인 모두 통쾌하고 시원하다며 엘라가발루스에게 손수 '티베리누스'라는 멸칭을 지어주고, 그와 세베루스 왕조의 시리아 사람들을 조롱했다고 한다.
엘라가발루스를 살해한 직후, 근위대 병사들의 황제 살해와 그 측근 세력의 학살을 방치하는 척 하면서, 이를 지휘한 발레리우스 코마존,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구국 영웅의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곧 악몽이 됐다. 영악하고 비열했던, 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본인 권력과 지위를 온전히 지키고자, 두 근위대장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코마존의 친구들인 마리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등의 원로원 의원들은 율리아 마이사의 이런 행동을 역이용해, 2일 동안 진행된 비밀 회동 속에서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을 분명히 반대했다.
하지만 율리아 마이사는 포기하지 않았고, 기어이 용감한 군인, 인망 있고 훌륭한 장군이며 전직 집정관으로 찬사받으면서 소방수 개념으로 엘라가발루스의 근위대장에 낙점된 안티오키아누스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자신에게 몰릴 정치적 부담을 뒤집어 씌운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손에 안티오키아누스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다음, 자결하는 방법으로 희생됐다. 안티오키아누스는 황궁 정원 수색 작전 중 명령한 일이 두 아우구스타에게 포섭된 병사들 일부에게 모함받았고, 자결형으로 목숨을 잃은 뒤엔 엘라가발루스 지지자라는 불명예까지 떠안았다. 반면 율리아 마이사는 코마존을 건들지 못했다. 애초부터 코마존은 율리아 마이사가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거물이었고, 코마존은 엘라가발루스가 온갖 기행을 벌일 때마다 브레이크 역할을 하면서 원로원 동료들을 추방 형태로 망명하게 한 다음 보호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 터라 원로원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마존은 현직 근위대장으로서 도의상 부하들의 과격한 행동에 책임을 진다며 그 직에서 물러났다.
2.9. 사후 이야기
엘라가발루스의 몰락은, 프라이토리아니와 원로원 모두에게 함량미달의 미치광이를 없애고, 다시 한 번 세베루스 왕조에게 기회를 준 배려에 가까웠다. 따라서 원로원은 세베루스 왕조의 새로운 황제였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권위와 정통성을 배려해, 새 황제를 인정하는 자리에서는 형식상 엘라가발루스를 네로, 도미티아누스, 콤모두스처럼 대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엘라가발루스는 100% 기록말살형이 통과될 황제였음에도 대외적으로는, 공인된 폭군/암군으로 규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통과만 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기록말살형이 통과되도록 명령이 하달되었다. 즉, 신원 복구도 없었고 법적 통과만 되지 않았을 뿐 명령을 통해 기록말살형에 완전히 처해졌다. 이는 과거의 네로와 비슷한 케이스였는데, 엘라가발루스와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원로원에게 '공공의 적'으로 정식 규정되어 공식 석상에서 그 이름을 입밖에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었다.엘라가발루스의 단죄는 이전 황제들 중 칼리굴라 암살과 많이 비슷하지 않느냐는 이미지가 있다. 허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존속 중인 상황에서 4여 년만에 암살된 칼리굴라는 원로원에 의한 기록말살형도, '공공(국가)의 적' 선포도 없었던, 국가 원수 피살 사건 내지 변란으로 인한 현직 황제 암살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와 세네카의 악의적인 주장과 달리, 요세푸스와 디오 카시우스가 말하듯이, 칼리굴라 암살의 진상이 원로원과 근위대 일부의 공화정체 복구와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소멸을 목적으로 한 국가체제 변혁 시도였던 것이 컸다. 물론, 칼리굴라 암살은 암살 주동자의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고 하지만, 칼리굴라 암살 사건은 엘라가발루스의 몰락처럼 극적이고 통쾌한 몰락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던, 국가 비상사태였다. 동시대의 대 플리니우스, 요세푸스와 엘라가발루스 시대를 경험한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 모두 이런 점에서 그들이 경험한 네로, 도미티아누스 또는 엘라가발루스와 칼리굴라 암살 사건은 그 모양새가 달랐음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35] 즉, 로마인들에게 엘라가발루스의 몰락과 사후 처리 방법은 폭군이나 암군 암살이었고, 칼리굴라 암살은 카라칼라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급박하고 정상적이라면 벌어질 이유가 희박한 사건에 가까웠으며, 실제 모양새도 비슷했다. 다만, 칼리굴라는 카라칼라와 달리 사후 신격화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숙부 클라우디우스 1세와 당시 원로원 모두 칼리굴라와 원로원 간의 냉랭한 관계를 생각해 신격화와 같은 조치는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엘라가발루스는 암살 후에도 암군으로 인정되었으며 국가 차원에서 함량 미달의 폭군 내지 금지어가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카라칼라 때와는 달리 "암살범들은 범죄자이자 국적이다. 당장 처벌하라"라는 이야기도 없었고, 죽은 황제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지지자들의 보복 언급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인들과 원로원 내부에서는 정통성이 부정되는 가짜 안토니누스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고 하니, 얼마나 로마인들에게 악몽같은 암군이었는지 고대 기록의 언급만으로도 단번에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이유로 엘라가발루스 피살 사건은 칼리굴라때와 달리 신원 복구와 암살자들에 관한 어떤 처벌도 없었고, 새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엘라가발루스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의 신원 복구를 원로원이나 근위대 앞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신 수습도 없었고, 형식적인 간이 장례식도 치러주지 않았다. 당연한 말인데 무덤조차 마련되지 않았으며, 로마 전체를 돌아다니며 조롱받은 엘라가발루스 모자와 측근들의 시신은 모두의 환호 속에 티베리스 강에 수장되었다. 이는 똑같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도미티아누스가 간이 장례를 거쳐 아버지, 형, 조카가 묻힌 플라비우스 가문의 공동묘지에 매장되고, 과거 네로가 친가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개인 묘지에 묻히도록 인간적 배려의 기회는 부여받은 것과 매우 상반된 태도였다. 당연한 말인데, 기록말살형은 커녕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칼리굴라와 카라칼라는 정식 장례식 직후 추모식을 거행한 뒤, 절차에 따라 영묘에 안장되었다. 이는 암살 직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조치로 신원이 복구된 콤모두스도 비슷했다. 콤모두스는 간이 장례 후 매장되었다가, 신원 복구 후 정식장례를 거쳐 영묘에 매장되었다.
어쨌든 엘라가발루스는 죽은 뒤, 과거 네로 이후 로마 황제들 중 기록말살형, 탄핵, 국가의 적이라는 3번의 정통성 부정을 모두 받고 몰락했다. 로마 원로원과 근위대는 엘라가발루스가 통과시킨 모든 조치를 원상복구시켰으며, 세나쿨룸을 통해 황실 여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엄중히 경고했다. 또한 제국 전역의 공공 건축물과 동판 등에서 엘라가발루스의 이름과 표식 등을 완전히 지웠고, 동상과 조각상들의 경우에는 머리 부분을 헤라클레스나 유피테르 같은 신들의 얼굴로 완전히 교체해 재설치했다.
따라서 자신과 세베루스 왕조의 안위에 신경을 쓴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마마이아는 내심 불만이 있음에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 원로원이 세나쿨룸 등을 폐지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원로원과 근위대 그리고 세베루스 왕가 모두 엘라가발루스와 모후 소아이미아스, 측근들의 시신 수습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인데, 엘라가발루스 암살 이후, 그의 측근과 이들의 연줄로 관직을 차지한 이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반역자 처단 조치에 따라 국가의 적에게 협력한 죄목으로 그에 준하는 처벌을 받았다. 원로원과 근위대는 엘라가발루스의 치세때 고용된 관료, 시종, 경비병, 근위대 병사 및 장교를 색출했고, 원로원 인사들 중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의석을 받은 이들을 찾아내 강제 퇴역 또는 추방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죽였다. 여기에 더해 살해당한 이들 역시 티베리스 강에 시신이 던져지며, 대역죄인의 취급을 받았다.
그렇지만 엘라가발루스의 4년 치세는 당시 세베루스 왕가와 시리아 여제들의 생각과는 달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13여년 내내 병사들의 온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되었고, 세베루스 왕조의 한계와 정통성을 손상시킨 후유증을 제대로 남겼다. 왜냐하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세베루스 가문에 입양될 당시, 엘라가발루스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 형태로 세베루스 가문 사람이 된 엘라가발루스의 외사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손자'라는 타이틀을 받고, 엘라가발루스와의 연관성을 단절한 뒤 황제로 인정받았다.
3. 평가
200여 년 전의 황제였던 칼리굴라의 경우, 그와 관련된 소문, 풍자시, 비방 내용 등이 후대에 사실처럼 알려진 탓에 기행의 미치광이이자 사치와 낭비벽이 심한 폭군이라는 안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엘라가발루스는 소문으로 일어날 법한 일을 진짜로 벌이고 막장짓을 제대로 벌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로마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는 암군으로 유명한 칼리굴라보다 더 형편없는 황제가 엘라가발루스다. 이를 증명하듯 역사가들 역시 로마 제국의 77명의 황제들 중에서 엘라가발루스를 최악으로 꼽고 있고, 설령 칼리굴라가 그 소문대로 했다고 해도 엘라가발루스는 거의 콤모두스와 최소 동급의 최악이라고 말하고 있다.[36].재위기간 내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무를 소홀히 하고, 거기에 온갖 심각한 장난과 기행을 밥먹듯이 해서 별의 별 민폐는 다 주었기에 황제로서는 정말 최악의 인물이었다. 단, 미성년자였고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패로 사용되면서 대사제 일을 하다가 옹립된 탓에 로마사 전체에서도 까이는 콤모두스처럼 최악이라고 욕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가 문제가 된 것은 정무 소홀만이 아니라 4차원 같은 정신세계에 해괴한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마술사나 가수나 배우 같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예능인의 직종이었으면 되레 유쾌하다는 말은 들을지언정 욕은 많이 먹지 않았을 텐데, 문제는 그가 어리긴 해도 로마의 황제였다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재위기간 내내 먹고 놀기만 했으며, 얌전히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온갖 기행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인들의 황제 로망을 실현시킨 인물이었다. 그 오랜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도 이런 황제는 정말 드물며, 제국은 엘라가발루스와 같은 인물을 다시 가지려면 그가 죽은 이래로 무려 700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 인물도 엘라가발루스의 바로 뒤 후계자와 이름이 같은 알렉산드로스 2세였다.
다행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그의 치세 중에 로마 제국이 갑자기 엉망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외부적으로는 카라칼라가 한바탕 주변 정리를 해놓은 덕택에 제국의 국방 시스템이 안정된 상태에 있었고, 또한 실무는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가 맡고 있었는데 그녀는 야심가라는 평은 들었지만 내치 만큼은 꽤 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위기간이 겨우 4년밖에 안 되었으니 온갖 기행으로 로마를 놀라게 했을지언정 내치와 외치로는 중대한 실책이 적은 것도 당연했다. 따라서 콘스탄티우스 2세 ~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 살았던, 최고위 관료 출신의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동시대나 후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엘라가발루스 황제를 신랄하게 비난하지 않고 있다.[37] 그렇지만 이는 엘라가발루스의 치세에만 한정된 이야기일 뿐이고, 그 후임이었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치세까지 포함하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왜냐하면 알렉산데르가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세베루스 왕조의 평판을 끌어올렸다고는 해도, 세베루스 왕조는 엘라가발루스가 남긴 그 난장판의 이미지를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황제가 어려도, 군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며 엘라가발루스가 남긴 시리아인이라는 나쁜 꼬리표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로마군의 시험대에 올랐을 당시, 생각 이상으로 어이없게 몰락한 이유들 중 하나가 되었다.
4. 기타
- 보면 알겠지만 얼굴선이 상당히 고운 편이고, 카라칼라와 게타의 외가 친척답게 은근 비슷한 외모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초기에 군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석조 흉상을 토대로 복원한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얼굴
- 특이한 성적 지향으로 인해 엘라가발루스는 19세기 미술에서 많은 소재가 되었고, 트랜스젠더의 시초격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위 그림은 엘리가발루스가 연회에서 대량의 꽃을 동원했다가 사람이 질식하는 사태가 났다는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위에서도 나와있지만, 장미는 화가가 임의로 변경해서 그린 것이고, 원래 저기서 동원된 꽃은 제비꽃이었다.
- 기행만 저지른게 아니라, 고대 기록을 보면 희생제에서 어린이를 바쳤다고 한다. 또 마음에 안 드는 멀쩡한 총독이나 관료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인 일도 벌였다. 물론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언급된 어린이까지 희생제 제물로 바쳤다는 주장은 의심을 받는데, 뒷 내용인 관료나 총독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인 것은 사실이라서 반만 맞는 주장치고는 꽤 신빙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어린 아이를 희생제에 바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한 점은 로마인들 중 희생제를 통한 제례 의식을 치른 이들에게도 최악이었고, 잔혹했던 것은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 엘라가발루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명의 오토코노코 동인지가 나오기도 했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여자로 나오는데, 시스템 상으로 트랜스젠더를 구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양성애자 여자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 로마인에게는 최악의 폭군 및 암군으로 기억되지만, 엘라가발루스의 취향은 이후의 로마 황제와 동로마 황제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엘라가발루스는 특유의 미적 감각이 대단했는데, 그는 로마에 온 뒤 티레의 특산품인 페니키아식의 붉은 빛을 띤 자주색 옷을 자주 입었다. 이는 그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이모 율리아 마마이아도 비슷해, 그들 역시 아우구스타 칭호를 세습하는 모양새로 여자 황제처럼 군림하며, 이 색을 애용했다. 이에 더해서 후임자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역시 본래 아랍계였고, 고향이 티레였기 때문에 (티레 풍의 페니키아 의상을 입지 않았을 뿐,) 본인의 고향을 대표하는 진홍색 계열의 보라색을, 이전까지의 보라색을 대체하여 애용하고 독점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을 거쳐 중세 이후에도 황제의 색은 엘라가발루스가 선호한 티레 특유의 진홍색 계열 보라색이 되었다.
[1] 어감은 이상하지만 뜻은 ‘여섯 번째 아들’, ‘육남’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첫 번째 아들’, ‘장남’, ‘맏이’라는 뜻을 지닌 그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가이우스, 루키우스, 마르쿠스와 함께 고대 로마 시대 당시 흔했던 이름이다.[2] 시리아 에메사 왕가는 바알 사제이자, 토착 태양신 엘라가발을 믿고 숭배한 사제들이었다.[3] 보통의 선대, 동시대, 후대 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 전통 다신교의 수호자이며 수장답게, 로마인의 전통과 관습을 수호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였거나, 4~5세기 이후처럼 기독교를 믿었다.[4] 기록말살형, 국가의 적, 탄핵[5] 여기서의 안토니누스는 카라칼라의 공식적인 성인 안토니누스를 의미한다. 즉, "엘라가발 너는 카라칼라의 아들도, 세베루스 왕조의 일원도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6]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이름[7] 어감과 달리 로마에서는 후기 로마 제국 시대까지 꾸준히 대중적 인기를 누린 개인 이름이었고, 유력 귀족이나 평민 가문들 사이에서는 크게 사랑받아 가문을 이끌 장남이나 장손에게만 허용해 지어준 이름이었다. 뜻은 여섯째이며 건국 당시부터 내려온 남성 개인 이름이다. 아우구스투스의 본명인 옥타비아누스가 여덟째인 것처럼 자식이 많으면 독립적인 이름보다는 그냥 "몇 째야."라고 부르는 게 그 사람의 이름이 된 것이다.[8] 본래는 오현제로 유명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개인 성씨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의 코그노멘이다. 그러다가 이 세습황가가 무너진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가 스스로 이 성씨를 정치적으로 획득한 이래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에게는 정치적 정통성을 상징한 제호가 됐다. 카이사르, 플라비우스와 비슷한 경우인데, 안토니누스는 이중 4세기 이래 정통성을 위한 플라비우스와 유사하다고 하겠다.[9] 두 사람 모두 전체 이름 안에 바시아누스가 들어간다. 바시아누스는 에메사 왕가에서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의 혈육들이 사용한 이름 중 하나였다.[10] 오늘날의 홈스[11] 218년 말부터 로마군이 소규모로 항명을 할 때부터 널리 쓰여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이름이 됐다.[12] 여담으로 사르다나팔루스의 최후는 자살이라고 한다.[13] 한 집안 내의 같은 인명을 대(大) / 소(小) 등으로 구분할 때의 '소'(Minor, The Younger, The Junior) 아이미아스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소아이미아스(Soaemias)였다. 종래의 로마인 이름에는 없던 이름과 성인데, 본토박이 라틴-이탈리아인이 아닌 레반트(시리아)인이라 그렇다.[14] 오늘날의 시리아 홈스[15] 훗날의 엘라가발루스[16] 마리우스 막시무스로 대표된 세베루스 왕조의 핵심 인사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생각해보면, 간니스를 죽인 것은 자살골 그 자체였다.[17] 이런 속사정 때문에 율리아 마이사는 사후에도 로마 원로원과 이후 황실 여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았다. 이는 엘라가발루스의 몰락 이후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몰락 이후 율리아 마마이아가 원로원에 의해 기록말살형을 당하고, 모든 지위가 박탈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18] 물론 이 때문에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라는 별명이 생겼다. 여기서 접두사 '헬리오'는 태양을 뜻한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가벼운 원소인 헬륨도 예전에는 태양에만 존재하는 물질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헬리오'라는 접두사에서 따온 것이었다.[19] 종신독재관 술라의 마지막 후손이다. 이 사람이 엘라가발루스에게 살해된 뒤, 술라 가문은 멸문되었다.[20]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엘라가발루스가 라틴어는 아예 못하고 아시리아, 레반트식의 아랍 사투리로 그리스어만 말하는 것을 차용해 로마인들이 지어준 멸칭이었다.[21] 혹은 연회에 꽃잎을 너무 많이 동원하는 바람에 시종들 몇 명이 질식사했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때 쓰인 꽃잎의 출처는 제비꽃이었으나, 한참 이후 시대에 화가인 알마 타데마가 이를 그릴 땐 장미로 바꿔 그렸다고 한다(...). 덤으로 엘라가발루스는 제비꽃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었다고.[22] 이것 외에도 초호화 생활이 보장되었고, 심지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남자 못지않은 발언권을 지녀서 자신의 재산을 마음대로 물려줄 수 있었으며, 석방과 사면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그 시대상을 감안하면 투표권이나 참정권만 없었지, 여자의 몸으로 어마어마한 권리를 누린 셈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베스타의 여사제들이 엄청난 권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엘라가발루스의 행위는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23] 심지어 단순히 유혹만 해도 사형이었다.[24] 조금 앞선 시기의 도미티아누스의 치세때는 당사자들은 물론이요. 주변 인물들까지 방조죄로 생매장형이 집행되었다. 물론 도미티아누스 황제 자체가 법을 엄하게 적용한 것으로 알려진 황제이긴 했지만.[25] 《로마 제국 쇠망사》의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It was expected and socially acceptable for a freeborn Roman man to want sex with both female and male partners, as long as he took the penetrative role. The morality of the behavior depended on the social standing of the partner, not gender per se. Both women and young men were considered normal objects of desire, but outside marriage a man was supposed to act on his desires only with slaves, prostitutes (who were often slaves), and the infames. Gender did not determine whether a sexual partner was acceptable, as long as a man's enjoyment did not encroach on another man's integrity.[26] 그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20대 초반에 불과했을 때, 술라의 숙청을 피해 비티니아에 망명해있으면서 일어난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정계 활동 내내 약점이 된 적이 있었다.[27] 물론 이건 로마 군단병의 기준이긴 했지만, 다른 문화권의 군대도 처벌 수위는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의 친척 조카가 부하 군단병을 동성강간하려다가 그 병사에게 살해당하자, 자신의 친척 조카를 죽인 그 병사를 처벌하기는 커녕 군단병으로써 마땅한 일을 했다며 그 군단병에게 오히려 상을 내렸다.[28] 이런 배경 때문에 고르디아누스 1세는 엘라가발루스 시대때, 명예로운 경력을 초고속으로 지내고 귀족 반열에 올랐으며, 그 가족들도 엄청난 부를 단기간에 축적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사업 성공과 문예 후원 등으로 기반이 탄탄해 히에로클레스 덕은 아니었을 테지만.[29] 콤모두스 시대의[30] 이 여자라고 적은 이유는 대놓고 동성애를 하는 건 그렇다 치고 동성애 상대 앞에서 여장을 하고 여성처럼 애교를 부리는 등 누가 봐도 여자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행동에 크게 간섭하지 않는 오늘날에도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은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데 1,800년 전에 어땠을지는 뻔한 일이다.[31] 가장 유명한 것이 엘라가발루스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성희롱한 일화인데,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 막시미누스가 느낀 모멸감은 상당했다고 한다.[32] 엘라가발루스는 전임 카라칼라 황제의 이모의 외손자였으며, 창업자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는 처갓집 사람이었기에 그와는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다. 그렇다고 그 처갓집, 즉 율리아 돔나 / 율리아 마이사의 집안이 아우구스투스의 처가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가문(클라우디우스 가문과 리비우스 가문) 혹은 콤모두스의 외가인 안토니누스 가문처럼 대단했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세베루스 왕조 존속 당시 시리아계 에메사 왕가는 로마인들 기준으로는 평민들이 보더라도 "아~ 그래요?"라고 할 정도로 정체불명의 토착신을 모시는 듣보잡 향토 집안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엘라가발루스의 외가는 저 동쪽 구석 시리아의 신관(지방 귀족격) 집안인데다가 친가는 그보다 더 무명이라서, 시리아 현지에서도 끗발을 날리지 않았던 집안이었다.[33] 혈통 및 세습과 상관없이 본인이 찬탈하거나 쟁취하거나 했어도 이곳 저곳에서 총독과 사령관을 지낸 백전노장인 경우가 이 경우였다. 엘라가발루스 이전의 황제들 중 이런 경우는 아우구스투스, 베스파시아누스, 트라야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정도였고, 이들의 카리스마 혹은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의 위상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34] 당장 콤모두스 황제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원로원과 군대, 로마인들이 속 터진다고 열을 내도, 막장황제였던 콤모두스는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혈통적인 정통성이 완벽했고, 그 후광에는 혈연적으로 연결된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로 이어진 명군들의 정통성까지 있었다. 여기에 더해 매부 폼페이아누스가 콤모두스 암살 직전 정계 은퇴를 했지만 둘째 누나 파딜라 내외처럼 끝까지 콤모두스 갱생을 시도한 이들이 있었던 터라, 막장 명령을 내리더라도 또 설령 반역 생각이 있더라도, 엘라가발루스처럼 자살골로 이어질 확률은 희박했다.[35] 오늘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재평가되면서, 로마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기록말살형 조치는 원로원의 분풀이로 해석되고 있다.[36] 칼리굴라는 암군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행한 이탈리아와 로마 일대에서의 항구 건설, 도시 경제 발전이나 수도교 건설 등은 요세푸스의 증언이나 현대 사가들의 연구처럼, 로마 제국의 경제와 재정, 곡물 수급 문제 등을 해결하거나 성장하는데 있어 기여했다는 호평이 있을 정도로 의외로 대단했다. 여기에 더해 칼리굴라의 조폐 발행 장악 조치나 황제 측근 세력 육성, 마우레타리아 속주 편입, 켈트족의 신관들인 드루이드 문제에 대한 개입 등은 과거와 달리, 그 평가가 높아지고 있어 칼리굴라를 암군으로 보는 것조차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37] 감안해야 될 부분이 있다면, 빅토르는 다른 황제들을 평가할 때 엄격한 도덕성을 강조하면서도 유독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에게는 이중적인 면모를 취할 정도로, 자신의 고향이었던 아프리카 속주에서 기원한 세베루스 왕조에 관해서는 유독 호의적이었다.[38] 반드시 성 확정 수술을 받아야만 트랜스젠더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남성인 자에게 she라는 대명사를 쓰는 이유만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합리적인 조치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