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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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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권 「왕돈등전(王敦等傳)」 99권 「환현등전(桓玄等傳)」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왕돈 · 환온 환현 · 변범지 · 은중문 왕미 · 장창 · 진민 · 왕여 · 두증 · 두도 · 왕기
조약 · 소준 · 손은 · 노순 · 초종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2><width=33%> 101권 「유원해전(劉元海傳)」 ||<-2><width=33%> 102권 「유총전(劉聰傳)」 ||<-2><width=33%> 103권 「유요전(劉曜傳)」 ||
유원해 유총 유요
104 · 105권 「석륵전(石勒傳)」 106 · 107권 「석계룡전(石季龍傳)」
석륵 석계룡
108권 「모용외전(慕容廆傳)」 109권 「모용황전(慕容皝傳)」
모용외 모용황
110권 「모용준전(慕容儁傳)」 111권 「모용위전(慕容暐傳)」
모용준 모용위
112권 「부홍등전(苻洪等傳)」 113 · 114권 「부견전(苻堅傳)」 115권 「부비등전(苻丕等傳)」
부홍 · 부건 · 부생 부견 부비 · 부등
116권 「요익중등전(姚弋仲等傳)」 117 · 118권 「요흥전(姚興傳)」 119권 「요홍전(姚泓傳)」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홍 요홍
120권 「이특등전(李特等傳)」 121권 「이웅등전(李雄等傳)」
이특 · 이류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전(呂光等傳)」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전(慕容垂傳)」 124권 「모용보등전(慕容宝等傳)」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전(乞伏國仁等傳)」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126권 「독발오고독발이녹고독발녹단전(禿髪烏孤等傳)」
독발오고 · 독발이녹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전(慕容徳傳)」 128권 「모용초전(慕容超傳)」
모용덕 모용초
129권 「저거몽손전(沮渠蒙遜傳)」 130권 「혁련발발전(赫連勃勃傳)」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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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기원2.2. 위구르 제국2.3. 동투르키스탄으로의 이동과 이슬람화2.4. 초원의 지식인들2.5. 티베트 불교와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2.6.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 (18세기 후반~19세기)
2.6.1. 신장성 건성
2.7. 현대
2.7.1. 위구르 민족주의2.7.2. 성스차이 스탈린주의 정권2.7.3. 위구르 공산주의
3. 황백혼혈4. 현황 및 인권 침해5. 한족과 갈등6.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7. 기타

1. 개요

위구르어: ئۇيغۇر مىللىتى (Uyghur Milliti, Уйғур миллити), ئۇيغۇرلار (Uyghurlar, Уйғурлар)
우즈베크어: Millati uygʻur(Миллати уйғур), Uygʻurlar(Уйғурлар)
터키어: Uygur milleti(Uygur Türkleri), Uygurlar
영어: Uyghurs
중국어: 维吾尔族(Wéiwú'ěrzú, 웨이우얼쭈)
위구르는 중앙아시아, 동시에 중국의 서북부에 있는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 계통의 유목민으로서 본래 몽골 초원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나 서쪽으로 이주한 뒤 다양한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겨온 민족이다.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중심 으로도 러시아 일부 지역 및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에도 소수의 위구르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미국, 캐나다, 독일 등 서구권 국가들로 망명중인 위구르족들도 많이 있다. 언어는 위구르어를 사용한다

2. 역사

2.1. 기원

위구르는 중국 기록상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연맹으로서 약 6세기경 분화되었다. 본래 서돌궐이 지배하는 땅에 살았으나 서돌궐과의 충돌 후 동북방 셀렝게 강 유역으로 이주한 뒤, 이후 꾸준한 돌궐제국의 적국으로 상대하였으나 번번히 패퇴하였고 돌궐제국의 토벌에 못 이겨 일시적으로 당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기도 했다. 당나라, 설연타와 연합해 동돌궐을 630년 멸망시켰고 이후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받으며 지내다가 당나라에 멸망했던 돌궐이 부활하자(돌궐 제2제국) 돌궐에 다시 복속되거나 당나라가 지배하는 하서회랑으로 도주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740년대에 돌궐 제2제국이 내분으로 혼란에 빠지자 바스밀, 카를룩 부족과 연합해 돌궐을 무너트리고, 위구르의 수령 쿠틀룩 보일라가 쿠틀룩 빌게 퀼 카간으로 즉위해 위구르 제국을 건국한다.

2.2. 위구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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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는 한자로는 회골이나 회흘, 회홀 등으로 쓰는데, 중당시대에 꽤나 강성한 국가였다. 대표적인 것이 741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세웠다가 848년 키르기즈인의 침공으로 멸망한 위구르 제국(위구르 칸국). 안록산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를 지원해주는데 단순히 반란군을 격퇴하는 것뿐 아니라 수복한 낙양을 약탈하고, 심지어 칸이 당나라를 방문했을 때 칸을 맞이해준 당나라 황족인 옹왕(후의 당나라 덕종)이 보는 앞에서 당나라 장수들 더러 춤을 춰보라고 협박하고, 장수들이 거부하자 칸이 직접 매질을 해 죽여버릴 정도로 당나라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1] 위구르에 바치는 어마어마한 비단 등 조공 때문에 당나라 사람들의 허리 펼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다.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민 국가들은 자신들의 말과 중국의 비단을 거래하는 이른바 견마무역을 통해 이득을 얻었는데 원래 말과 비단의 환율은 1대1이었으나 위구르는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 환율을 1대40, 1대50 등으로 멋대로 올려버리면서 당나라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2.3. 동투르키스탄으로의 이동과 이슬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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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제국키르기스족에 의해 840년 멸망했다. 그러나 키르기스족도 위구르 제국을 대체할만한 제국을 세우지는 못했고 많은 위구르 유민들은 원 거주지인 몽골 고원 지방에서 현 거주지인 동투르키스탄으로 대이주하여 천산 위구르(고창회골)를 세웠으며 타림 분지 현지에 거주하는 인도유럽어 계통 백인인 토카리아인들이랑 혼혈하여 지금의 위구르인을 형성하였다. 다만 간쑤 지방에 남은 위구르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하서 위구르(하서회골)를 형성했다. 이들은 혼혈이 별로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몽골로이드의 모습을 유지하였고 이들이 황색 위구르 또는 위구족이라고 불리는 유고족이다. 고창회골의 위구르인들은 불교-기독교 경교-텡그리 신앙을 신봉하다 튀르크계 국가 중 가장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한 카라한 칸국의 영향으로 인해 다른 튀르크계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11세기 경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타림 분지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위구르인들은 기존의 신앙을 유지하였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것은 몽골 제국의 성립과 분열로 차가타이 칸국이 성립된 이후부터인데 1300년대 초 테베크 칸의 치세 대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한 차가타이 칸국은 주변의 불신자들에게 이슬람을 강요하기 위한 성전을 자주 벌였고 고창회골 또한 차가타이의 성전 대상 중 하나였다. 차가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이 분열된 이후부터는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스탄 칸국)의 공격을 받아 고창회골은 멸망하고 타림 분지의 위구르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16세기 초반으로 가면 동투르키스탄 동쪽 끝 투르판과 쿠물의 위구르인들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타림 분지 전체가 이슬람화 된다.

2.4. 초원의 지식인들

위구르인들은 위구르 제국 시절부터 소그드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마니교를 믿던 소그드인들의 영향을 이들도 불교, 기독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에 대해서 실용적인 관점과 폭넓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역을 중시하던 소그드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위구르인들 중에서 다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많았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에서 투르크어 사전을 편찬하며 볼가 강부터 타림 분지까지의 투르크어족 문학과 언어를 집대성한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위구르인은 아니었으나, 위구르인들의 교육 시스템의 수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서하, 요, 서요, 몽골 제국 전역에서 위구르인들은 지식인 관료층으로 활약했으며, 러시아에서부터 고려까지 몽골인들을 대신하여 외교관으로 활약했다.[2]
위구르인들은 유목민들이 제국을 건설할 때 핵심적인 통치기술들을 제공하는 "초원의 지식층 Steppe Intelligentsia"으로서 몽골에 봉사했다. 위구르인 타타통아는 칭기즈칸의 새 제국에 위구르 문자[3]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조세 기록에서 처음으로 관인을 사용했다. 위구르인들은 몽골 황자들의 가정 교사였으며 제국 전역에서 다루가치로서 그리고 다른 공식적인 지위에서 복무했는데 많은 위구르인들이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다.
- 제임스 A. 밀워드, 유라시아의 교차로 신장의 역사

특히 원나라는 몽골족 제일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을 크게 4등분하여 신분을 나눴는데 1등은 당연히 몽골인이었고 2등은 색목인, 3등은 거란족여진족 등으로 이루어진 한인, 4등은 남송 치하에 있던 한족들로 이루어진 남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구르족은 2등인 색목인으로 분류되었다. 원나라 인구 중에서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5%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부족한 숫자를 메우기 위해 색목인들을 많이 등용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문해율이 높고 몽골어를 잘 하는 편이었던 위구르족들이 몽골 제국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몽골 제국에서 활약하게 된 위구르인 중 고려에 시집을 간 몽골 공주들이라던지 다루가치들을 따라 고려에 온 사람들도 많았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 아비가 바로 이 위구르족을 말하는 것이고 쌍화(雙花)는 위구르식 군만두인 삼사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에 정착한 위구르인 중 적지 않은 수가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당시 시대상황상 고려에 그대로 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룡(張舜龍)과 경주 설씨의 시조 설손(偰遜)[4] 등이 있고 고려사를 보면 우왕이 1387년에 김비(金鼻)의 집에 가서 딸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김비 역시 회회인 즉, 위구르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에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이 1279년에 충렬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고 충혜왕이 위구르족들에게서 베를 주고 그 이자를 취하였으며, 소를 도축하여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들도 찾아볼 수 있다.
예조에서 종묘에 배알한 뒤에 조하(朝賀)하는 의식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중략) 다음으로 승도(僧徒) 및 회회인(回回人)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가 꿇어 엎디어 ‘예(禮)를 마쳤다. ’고 아뢰고, 통찬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 통찬이 ‘국궁하라.’ 창하여,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굽히고, 그 사이에 전하는 안으로 들어간다. 풍악이 그치고, 통찬이 ‘평신하라.’ 창하면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펴고 통례문은 문무 여러 관원들을 나누어 인도하여 차례로 나간다.
-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9월 27일 갑술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왕세자와 문무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의식대로 행하고,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근정전에 나아가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왜인·야인(野人)과 귀화(歸化)한 회회인(回回人)과 승인(僧人)·기로(耆老)들이 모두 조하에 참예하였다.
-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1일 경인
예조에서 계하기를, "신부(新婦)가 시부모에 첫 인사를 드리는 날은, 오로지 기세를 보이기에만 힘을 써서 수레와 말과 종과 수종꾼이 찬란하게 문을 메우고, 술과 안주를 성대히 장만하여 이고 들고 가는 하인의 수가 30여 명에 이르며, 신랑집 역시 거기에 맞춰 치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 심히 많아서, 가난한 사람은 빚을 내기까지 하므로 그 폐가 적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찬품(饌品)은 오성(五星) 두 가지, 떡 두 가지, 삼미탕수(三味湯水) 세 가지로 모두 일곱 쟁반에 불과하게 하고, 유모(乳母)는 1명, 시비(侍婢) 2명, 노자(奴子)는 10명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겠나이다."하고, 또 계하기를,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 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 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4월 4일 임술

이렇게 고려시대~조선시대에 걸쳐서 위구르족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거주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와서도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유지하며 예궁(禮宮)이라 불리는 모스크를 짓고 조정에서 이슬람교 예배를 올리는 대조회송축을 거행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1427년에 예조에서 위구르족들의 의관이 조선 사람들과 이질적이라 조선 사람들이 위구르족과 혼인하기를 부끄러워 하고 이왕 조선에 와서 살기로 했으면 조선 사회에 동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억지로 조선 사회에 동화시켜버렸다.[5]

2.5. 티베트 불교와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

타림 분지 북쪽의 위구르인들은 천산 산맥과 이식쿨 호로 이주한 키르기스인들과 동화되었다. 천산 산맥 북부에는 몽골계 오이라트 부 유목민들이 정착했다. 알탄 칸이 자신이 이끄는 내몽골 부족들과 함께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하자 이웃한 오이라트인들도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하는데, 이 때부터 동투르키스탄은 톈산 산맥을 경계로 북쪽의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 유목민들의 준가리아와 무슬림 농민들이 주가 되는 타림 분지로 나뉘게 되었다.

15세기에 이슬람 수피 교단의 일파였던 낙슈반디야 교단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수피 스승이 제자에게 사후에도 영향과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며 교단주의 영향력을 절대화했으며, 수피승들은 더 이상 산 속이나 사막 한가운데서 묵상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샤리아를 엄격히 준수하도록 만들어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며 과거의 수피 성직자들과 다르게 정치에 적극 관여하였다. 다시 말해서 수피 교단 지도자가 정치에 대놓고 개입하였다. 당시 타림 분지는 모굴리스탄 칸국에서 갈라져 나온 동모굴리스탄 칸국과 야르칸드 칸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동모굴리스탄 칸국을 다스리던 차가타이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을 지도하며 차가타이 칸국의 실권을 장악한 호자 가문[6]이 칸국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호자 가문의 구성원들은 곧 칸국의 권력을 놓고 아파크 호자가 이끄는 백산당과 이스하키 호자가 이끄는 흑산당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고 여기서 아파크 호자의 백산당이 패하면서 아파크 호자는 남쪽 티베트로 도망쳤다.

아파크 호자는 라싸로 가서 티베트를 다스리던 달라이 라마 5세 아왕롭상갸초에게 백산당이 다시금 동모굴 칸국의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달라이 라마 5세의 겔룩파 티베트 불교 역시 낙슈반디야 수피 교리와 비슷하게 "종교 지도자들이 세속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교리로 무장하며 경쟁자들을 밀어내던 야심가였다. 종교는 다르지만 삶의 방향이 흡사한데 따른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달라이 라마 5세는 아파크 호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에게 아파크 호자를 도와 동모굴리스탄 칸국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 때 티베트 불교 승려로 수행했던 갈단 칸은 이를 칼같이 받아들여 1678년 12만 명의 병력으로 타림 분지 서부를 침공하여 백산당과 연합하여 흑산당을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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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출신이던 갈단 칸은 환속 후에도 항상 삭발 상태를 유지하고 다녔다 한다. 티베트인 호위병, 카자크 사절과 같이 있는 갈단

갈단 칸은 아파크 호자와 그의 후손들을 달라이 라마 5세의 윤허 하에 타림 분지의 칸으로 임명한 후 준가르 칸국의 봉신으로 삼았다.[7] 갈단 칸은 1680년 야르칸드를 약탈하던 키르기스인들을 격파하고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요새와 오아시스 농장을 건설했으며, 카자흐 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준가르는 1705년 모굴리스탄의 뒤를 이어 야르칸드 칸국마저 멸망시켰으며 이로서 동투르키스탄 전역이 준가르 지배 하에 들게 되었다. 준가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 타림 분지의 각 도시들은 매년 은 12만 냥에 해당하는 공물을 준가르의 칸에게 바쳐야 했다.

2.6.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 (18세기 후반~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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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예실콜노르 전투에서 호자 형제의 위구르군을 격파하는 청군을 그린 그림.

위구르인들은 막대한 공물을 그것도 불신자인 준가르의 칸에게 바쳐야 하니 죽을 맛이었고, 준가르인들은 위구르인들에게 공물을 걷으러 갈 때마다 성상납까지 강요했다고 한다. 결국 견디다 못한 타림 분지 동쪽 투르판과 쿠물의 위구르인들은 동쪽의 청나라에게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였던 강희제는 준가르를 제국의 서쪽 국경을 위협하는 적으로 보고 있었고 투르판과 쿠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96년 준가르와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맨 처음 청나라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한 투르판과 쿠물은 쿠물 칸국이라는 이름으로 청의 봉신국으로서 자치를 허용받았고 이후로도 준가르와의 전쟁이나 야쿱 벡의 예티사르 반란 등 신강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전쟁에서 청나라 편으로 활약하였다. 쿠물 칸국은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중화민국의 속국으로 남아있었으나 1930년 마지막 칸인 마크수드 샤가 사망한 이후 국민정부가 칸국을 폐지하면서 멸망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준가르와의 전쟁 끝에 1759년, 청나라는 준가르 칸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정복한 옛 준가르 칸국 영토에 "새로운 강역"이란 뜻의 신강(新疆, 신장)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지역의 부족장을 베그(伯克, بەگ)로 임명하여 무슬림 주민을 통제하였다.

준가르를 정벌한 이후 청나라는 과거 몽골족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선례를 생각해서 준가르 칸국의 준가르인 남성들과 남자아이들은 전부 학살하고 여성과 여자아이들 노약자들은 전부 노예로 만들어 청나라 각지로 분배한 이후,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인과 중원에 사는 한족과 근처 감숙성 일대에 살던 회족들을 모두 이 공백지로 불러 사민 정책을 실시했다. 사민 정책 외에도 팔기군둔전제 개념으로 정착시키거나 범죄자를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처럼 중범죄자들을 이 곳으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 준가리아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족이 그 예시. 또한 유목민 세력이 신장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여, 신장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했다. 이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인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인과 카자흐인들이 함께 살았으며, 청나라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즉 동투르키스탄 전체는 위구르인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인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의 압제로부터 위구르인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힘들다.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인들은 멸종한 상태이며[8] 만주인들은 이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땅인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귀속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준가르 칸국이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준가르 칸국의 충성하는 낙슈반디야 교단에 소속된 위구르인들이 청나라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다. 아팍 호자의 증손자이자 '호자 형제'라는 별명을 가진 부르한 웃딘 호자와 칸 호자 형제는 위구르군을 이끌고 청군에 맞서 싸우지만 패배하여 서쪽의 카슈가르와 옐켄까지 밀린다. 1759년 여름, 마지막 근거지인 카슈가르에서 도주한 호자 형제는 인도로 도망가기 위해 무리 4,000명을 이끌고 파미르 산중으로 도망갔다가 청군에 잡혀 목숨을 잃었다.

호자 형제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무슬림 위구르인들은 비무슬림 청나라 만주족의 지배에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원나라 때 위구르인들이 요직을 차지했던 것과 다르게 청나라 때 신장은 청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위구르인들이 몽골인이나 한인에 비해서 많이 하대받았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지배 기간 동안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긴 했으나 과거 준가르 지배 시절 그럭저럭 돌아갔던 무역 체계가 무너지면서 위구르 인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다. 중세시대 지식인들로 유명했던 위구르인들은 준가르인들의 잔인한 수탈과 청나라 시절 무역 붕괴의 영향으로 문해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상술했다시피 신장 지역은 청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고, 청나라 조정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이 아니면 이 지역을 지키는 청군의 봉급을 제대로 지불할 수 없었다. 청나라가 국력이 쇠퇴하자 보조금이 삭감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것. 하미에서는 만주 팔기군 일부가 위구르인들을 괴롭히고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와중에 위구르인 만여명이 학살당했다. 회족들(한족계 무슬림들)도 신장 인근의 감숙성에서 수피 지도자 마명심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감숙성과 섬서성 역시 가난한 변방으로 전락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청나라의 지배 동안 이곳에서는 무슬림들에 의해 무려 42차례의 봉기가 일어난다. 1820년에는 '호자 형제' 부르한 웃딘 호자의 손자인 자한기르 호자(جهانگیر خوجا‎)가 파미르를 넘어 진격하였다. 1826년, 자한기르는 그를 따르는 백산당의 무리를 이끌고 카슈가르를 함락하고 옐켄, 호탄 등의 도시를 정복하고 한족들과 회족(...)들을 노예로 납치하였다. 청나라의 팔기군은 파미르 산중에서 자항기르를 1827년 처형하는 등 분전했지만 신장의 한족 상인 대부분이 살해당하며 행정이 마비되는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32년 청나라 조정은 코칸드 칸국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제공하며 정기적으로 보조금을 제공해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만 했다.[9]

태평천국의 난 이후 한족 농민들도 자체적으로 총과 대포로 무장하게 되면서 운남성과 신장성, 감숙성에서 회족과 한족 간의 유혈 충돌이 증가했다.[10] 1862년에는 신장과 인접한 감숙-섬서성 회족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이 지역의 팔기군 요새들은 교통과 보급이 끊어졌다. 위기의식을 느낀 신장의 만주족 관료들은 의심이 가는 회족과 위구르인들의 발뒤꿈치를 자르는 잔인한 형벌을 가했는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회족들이 1864년 대거 반란을 일으켰다. 호탄의 위구르인들이 회족들의 반청 봉기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위구르인들도 각지에서 팔기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 반란은 단일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여러 세력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팀킬이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자항기르의 일족에 성전 호소에 영향을 받아 코칸드 칸국에서 넘어 온 야쿱 벡 (ياقۇب بەگ, Yaqub Beg)(야쿠브 베그라고 읽히기도 한다. 타지크인으로 추측된다. 이 아팍 호자의 후예를 군주로 세워 카슈가르를 근거지로 다른 세력들을 평정하고 위구르인 뿐만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을 믿는 여러 민족을 모아 일곱 도시의 나라라는 뜻의 예티샤르(카슈가리아 왕국)를 세운다. 예티샤르는 카슈가르(قەشقەر, Qeshqer)[11], 야르칸트(يەكەن, Yeken)[12], 호탄(خوتەن, Xoten)[13], 아크수(ئاقسۇ, Aqsu)[14], 쿠차(كۇچار, Kuchar)[15], 코를라(كورل, Korla)[16], 투르판(تۇرپان, Turpan)[17] 등을 아우르는 이슬람 세력의 통일국가였다. 1872년에는 러시아 제국[18], 1873년에는 오스만 제국[19], 1874년에는 영국[20]에게 독립 국가임을 인정받았다. 이 와중에 러시아는 만주, 몽골처럼 동투르키스탄을 식민지로 만들려 획책하였으며 파병하여 굴자(غۇلجا, Ghulja)[21]지역을 강점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위구르인들과 회족들은 종족성 다양성에서 보듯이 단결이 안되었고, 이런 종족 간 증오심 외에도 이슬람의 교파 간 문제 때문에 서로를 공격하는 팀킬도 자주 벌어졌다. 예를 들어 둥간족(회족)과 위구르족은 종교는 같았지만 자주 살육극을 벌였다. 그리하여 이런 반란들은 모두 청나라에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2.6.1. 신장성 건성

청나라는 처음에는 이 지역을 포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흠차대신 좌종당이 이 지역을 포기한다면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며 원정을 강행하였다. 오스만, 러시아, 영국은 야쿱 벡 정권에 최신 무기를 지원했으나, 무능하고 단순한 야쿱 벡의 상대는 바로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을 진압하면서 수많은 실전을 겪은 역전의 노장으로 회민 반란군을 전멸시키지 않고 용서하고 포섭하는 정책으로 조기 진압한 좌종당이었다. 야쿱벡은 샤리아를 엄격히 적용하는 탈레반식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같은 무슬림인 회족들은 탄압하는 앞뒤가 안 맞는 정책을 펼쳤다. 회족 뿐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화 정책으로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사이에서도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현지에서 신망을 잃고 있었다. 원래 튀르크인은 모든 종교에 관대했던 유목민이었고 정체성을 이슬람에 두지만 이슬람 원리주의는 경기를 일으키는데 거기에 돌직구를 던졌으니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22] 좌종당이 이끈 청나라 원정군은 야쿱 벡에 반발하던 위구르인 토후들 특히 하미(쿠물)의 술탄의 지원을 받아 둔전을 하면서 현지 기후에 적응하는 훈련을 하며 식량을 넉넉하게 보급받았다. 1876년, 하미(쿠물) 근방의 둔전에서 훈련을 마친 좌종당 군은 야쿱 벡이 청나라와 외교 협상을 벌이겠답시고 어리석게도 발포 중지 명령을 내린 틈을 타서 위구르의 중심도시 위륌치을 탈환했다.

야쿱벡은 영국의 중재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강화하려 했으나, 좌종당 군은 야쿱벡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신장 전역이 러시아나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여 협상을 무시하고 투르판을 함락시키며 계속 진군하였다. 위구르인들의 독립 정권이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는 내몽골의 몽골인들도 러시아의 입김을 받아 동요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청의 입장에선 반드시 막아야 했다. 오늘날에 중국이 소수민족의 독립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은 중화주의 때문이지만, 청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소수민족 독립은 중화제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야쿱벡은 추격하는 청나라군을 피해 중앙아시아 깊숙히 도주하던 중 홧병을 얻은 탓인지 급사했다. 이것으로 야쿱 벡의 예티사르 왕국은 청군에게 멸망하고, 야쿱벡의 미성년자 아들들은 청나라에 잡혀 거세후 환관이 되었다. 내가 고자라니 이리하여 신강은 다시 청나라의 영역이 되었다(1876년)으나, 1871년 러시아 제국이 이미 신장 북서부의 이식쿨 호수와 일리 강 일대의 광활한 영토를 장악한 이후였다. 청나라는 러시아 제국이 점거한 신장 영토를 돌려받기를 원했으나 러시아 제국에서 대가로 막대한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쿨자 남부 일대만을 간신히 돌려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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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간 신장 북서부 지역은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의 동부 영토로 귀속되었다.

야쿱 벡의 예티사르 반란 이후 좌종당은 이 일대에 자주 반란이 일어나는 이유가 동북 지역이나 다른 번부들과 마찬가지로 당국의 직접적인 행정력이 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직접통치를 할 수 있는 행정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신강 일대를 정복한 이후 준가리아 일대를 준부(準府), 또는 천산북로(天山北路), 타림 분지 일대를 회부(回府), 또는 천산남로(天山南路)라고만 명명할 뿐, 중국 본토에 직접통치를 위한 직성을 둔 것과 달리 별다른 행정기관을 두지 않았는데 1884년 준부와 회부를 통합해 신강성(新疆省)을 설치한다. 신강성은 1912년 청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 때까지 내려오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전환된다.

좌종당은 전략과 전술 방면에서는 뛰어난 인재였을지는 몰라도 양무운동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처럼 수구 유학자라는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는 위구르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무가치한 적폐로 간주하고 위구르인 아이들에게 유교 경전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서당들을 신장 각지에 설치했는데, 해당 학교들은 언어 소통 문제로 당연히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 좌종당이 설치한 기숙 학교에서 공부한 아이들은 위구르어를 잊어버려서 부모랑 대화할 수가 없었다 하며, 위구르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가능한한 터키인이나 러시아의 볼가 타타르인 교사들에게 맡기거나 아니면 차라리 전통 위구르 학교에 몰래 보내는 편을 선호한 것. 좌종당이 설치한 서당들은 20년동안 간신히 한문을 읽을 순 있지만 한어 작문은 거의 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졸업생들만 양산하자 좌종당의 뒤를 이어 신장을 통치한 양쩡신은 유학 학교들의 지원금을 무자비하게 삭감하며 사실상 서당들을 폐교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2.7. 현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하면서 군벌시대에 들어섰으나 위구르는 여전히 중화민국/북양정부의 영역으로써 양쩡신, 진수런, 성스차이 등 한족 군벌에게 통치당하게 된다. 이시기 위구르 민족주의가 태동하였는데 위구르라는 이름은 원래 동투르키스탄튀르크인을 총칭하는 의미로써 현재 위구르족은 과거의 위구르와는 혈연적으로 많이 다르다. 위구르라는 이름도 러시아의 튀르크어 학자인 세르게이 말로프(Сергей Малов, 1880년 ~ 1957년)가 제안해 위구르 제국의 이름을 붙여 후대에 붙인 이름이다. 위구르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고 터키인과 러시아 타타르인 교사들을 신장으로 초빙하면서 이슬람 학문과 서구의 최신 학문을 동시에 배우며 튀르크 민족주의를 확립해나갔다.

2.7.1. 위구르 민족주의

청나라의 지배 기간 동안 위구르인들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은 마드라사를 중심으로 꾸란하디스에 나오는 아랍어 문구와 페르시아어 시문을 단순 암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대게 꾸란과 하디스에 나오는 아랍어 문구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우라고 때리니까 기계적으로 암송할 뿐이었으며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작문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러시아 제국과 신장의 교역이 점점 증가하고[23] 러시아 제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과 신장에 거주하는 무슬림들 사이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러시아 제국에서 부를 쌓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무슬림 볼가 타타르인들을 본 카슈가르의 부유층 상인 후세인 무사바요프와 바우둔 무사바요프는 문화적 충격을 받고 1885년 신장에서 최초로 서구 학문과 이슬람 신학을 현대적으로 가르치는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후세인은 초등학교 설립 이후에도 교사들을 꾸준히 러시아의 카잔으로 보내 연수를 시키고 카잔과 이스탄불의 교과 과정을 신장에 도입하였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인 꾸란 암기 뿐만이 아니라 언어와 문학, 산수, 역사, 지리, 자연, 예술, 체육, 러시아어와 아랍어 회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세인은 자비를 털어 잠재력 있는 학생들을 외국으로 유학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15년 한족 군벌 양쩡신이 후세인이 설립한 카슈가르의 신식 이슬람 학교들을 폐교시키고 로도스 섬에서 온 그리스계 터키인 교사 아흐마드 카말을 체포하자 카슈가르의 지역사회가 크게 동요했다. 다행히 카슈가르의 회족들이 위구르인들과 한족 군벌 사이를 중재하여 교과 과정에 중국어를 추가한다는 조건 하에 폐교를 막을 수 있었다. 이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서구 교과 과정에 중국어 수업 과정이 추가된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신장 전역에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에는 쿨자에서 러시아 타타르인 상인이 무슬림 여학생들에게 투르크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열였다. 그 이전의 신장의 전통적인 마드라사에서는 12세 이하의 여학생들에게만 기초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그쳤었다. 1920년대부터는 투란[24]이라는 이름의 위구르어 문예지가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들에게도 근대 교육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2.7.2. 성스차이 스탈린주의 정권

1928년 6월 11일, 국민혁명군국민당의 2차 북벌을 통해 장쭤린을 축출하고 베이징을 점령하는 것을 본 군벌 양쩡신중화민국/국민정부에 대한 복종을 타전하면서 산하에 들어간다. 얼마 안가 1928년, 양쩡신의 부하였던 진수런이 양쩡신이 국민당의 사주로 살해된 틈을 타서 집권했다. 진수런은 양쩡신과 다르게 현실 감각이 전무했다. 골수 중화주의자였던 그는 좌종당이 야쿱 벡을 공격할 때 협력한 위구르인 칸들과 벡들의 특권을 철폐하고, 동시에 위구르인 농민들의 재산을 함부로 뺏어 한족들에게 분배하고 항거하는 위구르인들을 마구 처형했다. 진수런의 학정에 대항해 봉기한 위구르인들은 회족 군벌 마중잉을 소환해 진수런으로 하미를 해방시키고 진수런이 보낸 후속부대마저 대패시켰다. 신장 전역에서 진수런의 학정에 대항한 봉기가 일어났다.

무능한 진수런은 같은 한족들에게도 버림받아 1933년 4.12 디화 정변으로 축출되었고 쿠데타 세력은 신강성 최대의 무력을 가지고 있던 육군군관학교장 성스차이를 변방독판으로 추대했다. 1933년 마중잉과 함께 싸우던 위구르인 지도자 니야즈 호자와 마흐무드 무히티는 소련의 사주를 받고 돌연 마중잉을 절교하고 성스차이 편으로 돌아섰으며, 그 대가로 소련과 성스차이의 지원을 받아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세우고 헌법을 제정, 독립을 선언한다. 위구르인들의 지지까지 얻은 성스차이는 쿠데타 세력을 모조리 숙청해버리고 신강의 지배자로 등극한다. 성스차이와 협력하던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이듬해 위구르인들에게 배신당했다 생각하며 폭주하던 마중잉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지도부는 1937년부로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성스차이에게 숙청당했다.

성스차이는 국민당 정부에 의해 신장성장에 임명되었으나, 신장 국경을 맞댄 소련의 힘이 커지자 소련에게 접근했고, 중국인으로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근처인 산시성에 본거지를 둔 중국 공산당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민을 이곳에 연락담당으로 머무르게 하기도 했다. 이 당시 성스차이는 국민당-소련 사이에서 반독립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위구르를 "동투르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합병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만약 소련에 위구르가 합병됐다면 소련의 일부로 있다가 1991년 소련 해체 때 옆동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과 함께 독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스차이 그 자신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이었지만, 신장성 곳곳에 스탈린 초상화와 자신의 초상화를 함께 걸어놓게 하는 등의 노골적인 아첨 행각으로 엄청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중 독소전쟁이 벌어지고 소련이 전쟁 초반부 나치 독일에 대패하자, 그는 갑자기 반공을 외치며 소련인 고문과 마오쩌민을 처형하고 추축국인 일본에 접근했다. 그러다가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이후 부활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할 것 같자 다시 소련에 접근했다. 그래서 스탈린에게 "잘못했으니까 다시 꼬붕짓 할테니 한번만 봐주셈"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성스차이의 배신 행위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소련은 그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고, 화가 난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농업부장에 임명하는 형식으로 신장성장에서 해임했다. 그가 신장에서 얼마나 해먹었는지 50개의 트럭에 온갖 사치품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결국 친소련 군벌 통치하에 있던 동투르키스탄은 국민정부로 귀속된다.

2.7.3. 위구르 공산주의

신장에서는 거리와 교통 문제로 공산품을 중국 해안 대도시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영토에서 철도로 운송하는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더 저렴했다. 덕분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중국 화폐보다 루블화가 신장에서 더 많이 통용되었는데, 국민당 정권은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소련과의 무역을 갑자기 금지시키고 중국 본토와 똑같은 화폐만을 사용할 것을 강제했다. 이 와중에 한족 상인들의 농간이 개입하여 신장에서는 반년도 안 되서 물가가 열 배 가까이 폭등하고 위구르인,카자흐인,키르기스인들의 민간 경제가 붕괴되었다.

때마침 소련에서는 다시금 신장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리 강 유역의 카자흐인들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원해주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국민당 한족 경찰들이 군마로 쓸 말을 징발하겠다고 카자흐족 마을로 별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이후 국민당 군인들이 해당 마을의 카자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집결하자 카자흐인들은 오히려 이들을 패배시키고 쿨자를 점령했다. 쿨자의 경찰서를 검색하는 와중에 국민당 경찰 본부 우물에서 훼손된 무슬림 시신 200여구가 발견되었고 이에 자극받은 위구르 공산주의자들이 합세하면서 카자흐, 키르기스, 위구르 민족이 힘을 합쳐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세워 다시 독립을 선언하였다. 성스차이의 실각 이후 다시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싶어한 소련에서는 공군을 동원해 신장성 내 국민당 시설과 기지를 폭격했으며, 우루무치 근방의 국민당 군이 대패하면서 이 지역은 곧 다시 명목상이나마 독립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중 공산주의자는 엄연히 소수에 불과하였고, 위구르인 농민 대다수는 동투르키스탄 군과 싸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 협력하지도 않았다. 이를 노리고 국민당에서는 일부러 칭하이성의 회족 군벌 마부팡 휘하의 회족과 한족 혼성군 10만여 명을 우루무치로 파견하여 동투르키스탄 군과 대치시켰다. 같은 무슬림들끼리 싸우기 머뭇거리는 상황이 길어지고 동투르키스탄 군은 결국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하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내부에서는 정치적 장래를 둘러싼 내분이 생긴다. 종주국이었던 소련마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연대를 위해 위구르를 버리자 1949년 임시 정부의 주석이었던 부르한 샤히디(بۇرھان شەھىدى‎, Burhan Shahidi)는 중국 공산당과의 연합을 선언했고[25], 부주석이었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ئەيسا يۈسۈپ ئالپتېكىن‎, Isa Yusuf Alptekin)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에 반대해 터키로 망명했다. 이로서 동투르키스탄은 중국령이 되었고, 1955년부터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심 도시 디화는 소련의 눈치 때문에 우루무치(위구르어로는 위륌치ئۈرۈمچى)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3. 황백혼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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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인이 기원은 황인이지만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백인계통의 종족인 토하라인 및 소그드인, 페르시아계 종족들을 동화시켰기 때문에 그 흔적이 남아 투르크멘인, 우즈벡인과 함께 황백혼혈 종족으로 손꼽힌다. 완전히 백인의 외모를 한 터키인[26]에 비하면 훨씬 더 동아시아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 쉽게 말해 중동과 동양이 섞여 보이는 외모라 말할 수도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터키인 아버지 사이에서 난 알레이나 일마즈 자매가 위구르인과 많이 닮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위구르 미인들은 서양적 외모를 한 위구르인들이 대표적으로 부각되어서 그렇지, 사실상 아래의 이미지에 나온 위구르 인물들의 얼굴만 봐도 매우 동양적이게 생긴 사람들이 매우 많다.[27] 이러한 서양적 특징이 많이 나타나는 위구르족 연예인들을 보면 서양적 특징이 많이 보이는 우즈베크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서양적이게 생겨서 눈에 잘 띄이는 위구르 연예인들을 보고서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대표적인 수도격인 도시가 오늘날에는 우루무치이지만 위구르인 대다수가 카슈가르[28]와 호탄 출신이고 옛부터 위구르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와 남부는 타지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과 연결되어 있다. 위구르인들의 외모는 우즈벡인과 비슷한 사람도 있지만 북방계 아시아인의 외모를 한 키르기스인들과 비슷한 사람도 있으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완전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알고보면 대부분 타지크족이다. 위구르족과 우즈벡인들은 문화와 언어에 조금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위구르인을 우즈벡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위구르인들의 평균적인 외모는 우즈벡인에 비하면 더 동양적으로 생겼지만 튀르크 및 몽골인들과 더 많이 섞여 황인화가 진행된 카자흐인이나 키르기스인들에 비하면 더 중동인같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0년대, 위구르족들이 중국 연예계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 현재 광고 모델로 위구르족 배우들이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디리러바[29]구리나자와 같은 톱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들도 있다. 또한 타고난 신체조건이 좋아 스포츠계에 많이 투신하고있다. 중국 농구 국가대표팀 소집때마다 최소한 한두명은 끼어있으며, 축구쪽에서도 2017년부터 미라흐멧잔 무제페르가 위구르계 최초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되기 시작했다.

4. 현황 및 인권 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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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구분포. 파란색은 위구르, 빨간색은 한족, 노란색은 카자흐족이다.

위구르인은 중화인민공화국 안에서 인구가 좀 되는 주요 소수민족 중에서는 가장 한족과 인종문화적으로 이질적이며 독립하고자 격렬히 저항해온 민족으로 언젠가 중국의 지배가 흔들릴 경우, 가장 먼저 독립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민족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2000년 기준으로 신장의 인구 구성비는 위구르인 835만(45%), 한족 749만(41%), 카자흐인 125만(7%), 기타 8%의 비율이다.[30]

같은 투르크계 국가인 터키는 내부 혼란에다 인구의 최소 10-15%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이 반란 일으켜 바쁘고, 특히 서아시아 끝에 붙어있어서 위구르와 거리가 너무 멀고 중국에 국력도 한참 밀려서 설령 돕고자 해도 유의미하게 돕기는 힘들다. 마찬가지로 계통상 친척 민족인, 소련에서 독립한 인근 투르크계 ~스탄 국가들은 역시 국력이 중국에 비하면 약체에다가 몇몇 나라는 내부의 혼란까지 심해져 도울 형편이 안 된다. 또한 주변 이슬람 국가중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파키스탄마저 친중 정책의 일환으로 위구르 독립운동 단체를 테러단체로 명시하고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기 때문에 외국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어 보인다.

물론 중국 정부로서는 소수민족 지역 중 가장 열심히, 과격하게 독립운동을 하는 민족이라 가장 골치 아픈 곳이기는 하다. 2009년 7월 5일부터 이곳에서 위구르족의 대규모 독립 시위가 발생해 진압한다고 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2008년 티베트 사태의 재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사건으로, 중국은 2008년과 마찬가지로 강경진압으로 일관하였고, 위구르족의 대응은 점차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으로 격화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미얀마의 로힝야족이 있다. 터키에서는 이를 심하게 비난했고 보복으로 중국인에 대한 폭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심하게는 파키스탄에서 탈레반이 중국의 위구르 탄압에 대한 보복이라면서 중국인 관광객 여성 한 명을 죽인 적이있었다. 알 카에다는 중국 정부를 규탄하며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애초에 위구르인들의 주 종교가 이슬람이므로 이슬람 과격파인 알 카에다의 개입의 여지는 있어 왔다. 인도파키스탄의 갈등이 고조되는 카슈미르와 붙어 있는 점도. 결국 7월 19일 중국의 발표로만 사망자 197명, 부상자 1,721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망명 위구르인 조직인 '세계위구르회의'는 중국 당국과 한족의 공격으로 살해당한[31] 위구르인은 최대 3,00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러시아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유라시아 연합에 상당부분 영향을 끼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만큼은 중국과 러시아가 미묘한 관계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도와 이들 지역에 매장된 수많은 자원들은 러시아가 서방 쪽으로 기우려는 동유럽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집중할 가능성을 높여준다.[32] 참고로 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보다 경제규모가 큰 국가. 과거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이들과의 경제통합은 경제블록간 주도권 다툼이 가열되는 국제 외교환경속에서 러시아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33] 2015년 1월 공식출범을 앞둔 유라시아경제연합은 그 출범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러시아는 2014년 4월 창설 준비위원국(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총리 회담을 마친 후 "모든 부분에 대해 사실상 합의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는 사실상 러시아가 EEU(유라시아경제연합)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회원국 간 통합과정을 진척시켜 EU와 비슷하게 단일통화를 쓰는 수준에까지 이르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중국 역시 구상하고, 또 야심차게 추진하는 신(新) 실크로드 경제권과 경쟁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데,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은 신(新) 실크로드 벨트와 유라시아 경제연합의 존재는 두 나라를 껄끄로운 관계에 놓이게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2014년 3월 1일 중국 윈난성 쿤밍역에서 위구르족 무장단체에 의한 칼부림 사건[34]이 일어났다. 신장 분리주의 테러 단체에서 자행된 이 사건은 10명의 남성과 1명의 10대 여성이 1m의 위구르 전통 장칼을 휘두르면서 발생하였다. 당시 역을 지키던 경찰은 예상 못한 터라 곤봉으로만 무장하고 있어서 경찰도 2명이 사망하였다. 10명의 테러리스트들은 결국 출동한 무장경찰들한테 사살되었고 1명의 10대 여성 테러리스트는 생포되었다. 이 사건에 따라 29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17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위구르족 역대 테러 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2014년 7월 31일, 중국 당국은 저명한 위구르족 경제학자 일함 토티 중국 민쭈(민족)대학 교수를 '국가 분열죄'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토티 교수는 신장자치구의 독립을 요구하는 동투르크스탄 외부 세력과 신장의 독립운동을 고취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9월 18일, 이틀 간의 공판이 마무리됐는데, 중국 당국은 공판이 열린 신장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시 법원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AP통신은 공판을 참관하려는 서방 외교관들이 중국 공안에 막혀 법원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고 전했다. 유엔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중국 정부의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제히 토티 전 교수의 석방을 촉구했다.

2014년 9월 23일,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정책을 비판하던 위구르족 저명 경제학자인 일함 토티 전 중앙민족대학 교수가 '국가 분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AFP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발하며 23일 낸 성명에서 "토티 전 교수와 같은 시민사회 지도자는 중국 내 민족 갈등의 근원을 해결하는 필수적 역할을 한다"며 "이들이 평화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이런 가혹한 선고는 중국 내 위구르족의 인권을 신장하려는 토티 전 교수의 평화로운 노력에 대한 응징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유럽연합도 성명을 내고 "이번 판결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라며 토티 전 교수를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류샤오보와 마찬가지로 이들이 석방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프랑스의 한 기자가 위구르족 문제를 중국 당국의 소수민족 탄압으로 보도하자 중국은 서방 측이 중국에만 이중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이 기자의 보도 비자 갱신을 거부하고 추방했다. 기사

2018년 11월 6일, 유엔 인권이사회(UNHRC)에서는 중국에 대한 정례검토를 실시했다. 몇몇 국가들은 특히 신장 자치구에 있는 위구르족 수용소를 비롯한 재교육 수용소를 비난하면서 수감자들이 수용소에서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비인간적 처사와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중국은 수용소들은 단순 “교육” 시설에 불과하다고 답했다. 비터 윈터는 수차례에 걸쳐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공론화해왔으며, 이에 따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미발간 기사, 사진, 영상을 제공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위구르족 수용소, “학교”인가, 감옥인가? – 비터 윈터 독점 기사 및 사진∙영상

위구르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레비야 카디르가 있다. 위구르의 독립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이다.

2017년 12월, 매장량 10억t급의 역암(礫巖) 유전[35]이 발견됐다. 기존에도 유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이 양이 어마어마한 것. 3등급 석유의 매장량만 12억4천만t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 중 5억t은 매장이 확인되어 주변 각국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구르족 무슬림에 대한 박해는 2000년대 파룬궁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탄압 이후 중국 공산당 최악의 선전 재앙에 해당한다. 도대체 이들을 왜 박해하는 것일까? 2018년 11월 6일에 진행된 중국에 대한 정례인권검토(UPR)에 따르면, 약 백만 명의 위구르족이 교육을 통한 교정 수용소에 억류돼 있으며 중국 공산당(CCP)에게 있어서는 2000년대 대규모 파룬궁 박해 이후 최악의 선전 재앙에 해당한다. 중국 외교관 및 중국 외교부 차관은 위구르족 박해에 대한 각 국가의 비난을 차례로 들어야 했다. 중국인들은 왜 위구르족을 박해하는가? 위구르족은 왜 박해받는가

2019년. 프랑스 국영방송 F24는 상세히 보도했다.# 또, 22개국의 유엔 대사들이 중국에 대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 재교육 수용소 철폐를 촉구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터키는 위구르족 인권 실태 파악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한다.# 9월에는 익명의 동영상들이 등장해서 충격을 주었다.# 10월에 미국이 위구르족 탄압을 대한 제재를 가했다.# 대상은 위구르자치지역 인민정부와 감시카메라 제조업체 등 총 28개 중국정부 기관 및 기업을 제재리스트에 올렸다

위구르 전통 묘소들도 파괴되고 있다.#

정치범 수용소에 남편이 갇힌 위구르족 무슬림 여성들을 감시하기 위해 한족 남성들을 할당해 배치하고 있다는 폭로가 나왔다. 심지어 일부는 여자와 잠자리까지 같이한다고..

2020년 2월에 문건이 추가로 나왔다.#

5. 한족과 갈등

중화인민공화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류 민족인 한족과는 사이가 영 좋지 않은 편으로 중국인들은 위구르인의 이슬람 문화가 한족들의 생활과 너무 달라서 중국 내에서도 한족과 마찰을 빚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위구르인들은 무슬림 민족 중에서 매우 세속적인 편에 속한다. 신장 위구르 지역 지하 자원 개발의 이익이 일방적으로 한족에 돌아가다시피 하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라 봐야 한다.

문화면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중화문화보다는 거의 대부분 중앙, 서아시아 이슬람권 및 터키 문화권에 가까운 편이라 현지에서도 보면 중국 땅이면서도 중화풍의 분위기보다는 중동, 투르크 및 이슬람 분위기가 있는 문화유적들이 많아 보이는 편이다. 얼핏보면 중국 내 무슬림가(街)나 이슬람촌을 연상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 한족 문화와 괴리감이 크다. 하지만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위구르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역사 왜곡을 대놓고 주입시키니 세속주의적인 위구르인들도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한족들은 중화문명보다 이슬람 율법사상을 따른다는 걸 트집 잡아 이들을 영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또 라마단 등 이슬람 금식기간에도 이들이 이슬람 문화를 따르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중화민족의 단일화 정책에 따라 한족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거나 통혼 혼혈을 장려하였으며,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나 술을 먹는 것을 강요받기도 하였다.

요리 및 음식에 있어서도 돼지고기 소비가 많은 중국이지만 위구르 지역에서는 이슬람 율법사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여타 이슬람 국가처럼 돼지고기와 술을 입에 대거나 먹지 않는다.[36]

그 외에도, 워낙 뭉쳐 살다보니, 타 민족과 시비가 붙는다 하면 우르르 모여들어 위협한다거나[37], 좀도둑질을 당했다거나, 바가지를 씌운다는[38] 체험담 위주의 괴담이 일부 나돌고 있다.[39] 물론 체험담이기 때문에 100% 신뢰하는건 권장하지 않으나, 그만큼 인식이 나쁘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이슬람 생활과 문화가 위구르족에게서 분리독립 요구와 테러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하여 위구르인들에게 이슬람 문화를 금지하며 한족처럼 세속화를 강요한다.[40] 그러다보니 이 금지조치가 위구르인들한테 심한 반발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도 이런 이슬람 문화 금지조치에 비난을 한다. 하지만 이럼에도 중국 정부는 세속화만이 위구르인의 독립 요구와 테러를 막는다며 세속화 원칙을 고집하고 있다. 위구르인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경제적, 세속적 요구까지 다짜고짜 테러리즘으로 몰아가는 셈이다.

2017년 들어 중국 정부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통제가 엄청나게 강해져서 비밀수용소가 들어선 이후 위구르인이 구금되어 공산주의 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분리주의, 극단주의, 테러리즘 등 이른바 '3대 악' 을 배격할 것과 중국에 대한 애국심 등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세뇌.## 심지어 이런 세뇌교육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도 나왔을 정도. 또 지하철을 탈 때 실명을 등록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이에 대해 AP통신 기자는 지구상에서 경찰의 감시가 가장 심한 곳이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2019년 12월 5일 국민일보기사한국일보 기사에 의하면 사실상 위구르 동화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사직서를 써서라도 빠져나가려고 하나 받아주지 않고 이주 정책으로 이주한 한족들 역시 이주를 허가해 주지 않아서 강제로 묶여있는 상황이다. 특히 2019년 홍콩에서 정치 위기가 터진 이후에는 감시도 심해지고 불안도 심해진 상황이다.

6.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

파일:나무위키+유도.png   1933년부터 이듬해인 1934년까지 존재했던 나라에 대한 내용은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 문서를, 1945년에 존재했던 나라에 대한 내용은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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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인들이 만든 동투르키스탄의 깃발. 터키 국기를 파란색으로 바꾼 디자인을 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20140518070118522.jpg

2014년 중국 공안 당국이 테러모의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한 위구르인들.

위구르 독립운동 단체는 약 50개가 있다. 무장단체들도 약 50개의 크고 작은 조직들이 있다. 현재는 위구르의 대모(代母) 레비야 카디르(رابىيه قادىر)가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중국 정부에서 반동분자로 찍혔으며 국외로 추방당한 상태다.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만큼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파일:external/www.jamestown.org/Terrorist_Video__Beijing_Olympics.jpg
파일:external/en.people.cn/FOREIGN201607200912000057747663802.jpg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 대원들

파일:external/www.longwarjournal.org/Abdul-Haq-al-Turkistani.png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 수장인 에미르 압둘 하크 알 투르키스타니. 중국 정부에게서 제거 1호 대상이다. 2010년 2월 15일에 중국군의 무인기 공격으로 사망한 줄 알았지만 부상만 당했지 생존하였고 2014년 6월에 치료를 끝내고 등장해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특히 위구르 무장단체들 중 가장 큰 조직인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ast Turkestan Islamic Movement, ETIM)은 중국에 대해 폭력적인 무장투쟁독립을 전개하고 있어 중국 정부의 골칫거리다. 위구르 관련해서 사건 터졌다 하면 이 단체가 항상 관련되어 있다. 특히 ETIM은 군세에서 열세라는 것을 알고 게릴라전, 폭탄 테러, 독극물 투여, 암살로 중국을 괴롭힌다. 그러다보니 중국 정부는 ETIM을 테러단체이자 국가의 주적으로 정하고 군대와 경찰,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ETIM을 멸망시키려고 애를 쓴다. 게다가 이 ETIM은 문제가 있는 것이 동투르키스탄이 정교일치의 신정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주장하는 명백한 이슬람교 광신도 집단이다. 또한 악명 높은 이슬람 국제테러단체 알 카에다와도 친분이 있고, 시리아 내전에도 크게 개입해 지하디스트 세력과 함께 전투력을 키우고 활동하고 있다. 그들과 거래도 하고 무기, 자금지원을 받고 있어 국제 사회에서 독립군으로 인정 못 받고 테러단체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다에시하고는 사이가 나쁜데 이는 다에시가 전세계 무슬림들의 동의도 없이 칼리프 국가를 선포한 것이 샤리아에 위반되는 일이라며 다에시의 칼리프 국가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터키에서도 같은 투르크 제족에 속한 투르크 민족이라 연민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지, 투르크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중국과 전쟁을 벌여 동포들을 해방시켜야 되느니 하는 격언들을 쏟아내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터키와 중국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현 에르도안 정부가 범 투르크 주의라 하여 중앙아시아 투르크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맹주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신경쓰는 사람이 많기도하다. 일례로 터키 극우파의 위구르 문제와 관련한 반중시위에 엄한 한국인들이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린치를 받기도 했다. # 다만 터키는 중국, 위구르와 거리가 너무 멀고 중국에 비하면 국력이 한참 약소국이라 만약 터키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한다고 해도 실제로 큰 도움을 주기는 힘들다.

카자흐스탄 등 옆동네 튀르크계 독립국가들은 국민 개개인들은 반중감정이 대단히 심하고 친척민족인 위구르인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각국 정부 차원에서는 중국과 적당히 친하게 지내려는 정책을 펴고 있어서[41] 역시 위구르의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티베트 독립운동에 비해서는 덜 알려져있고 지원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42] 애초에 이슬람과 연관된 위구르 독립운동은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이 큰 서방 입장에서 지지하고 지원하기가 껄끄럽다. 그나마도 위구르 독립운동을 지원하거나 지지하는 세력및 단체는 터키를 비롯한 튀르크계 국가의 범튀르크주의자들, 이슬람주의 세력들과 반중 세력, 인권운동 관련 단체들이 전부다.

그리고 설령 어떻게든 독립을 한다 하더라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 한족의 비율은 절반 가까이 된다. 게다가 현재 한족들은 위구르인들보다 소득 수준도 높고 사이가 안 좋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며, 상황이 독립 이전보다 훨씬 더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43]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독립하려면 적어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수준의 엄청난 우여곡절이 필요할 것이다.[44]

7. 기타

한국(恨)이라는 감정과 매우 흡사한 감정 표현을 위구르도 가지고 있고, 명절에 그네타기와 한국의 씨름과 흡사한 위구르식 씨름놀이, 널뛰기를 한다고 한다.

서울 용산구국립중앙박물관에 위구르의 유물 컬렉션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승려이자 도굴꾼이었던 오타니 고즈이가 투루판과 둔황 막고굴 등지에서 약탈한 문화재로 이 중 일부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흘러들어가서 현대까지 남아있는 것. 일제시대, 한국전쟁은 물론 (본의는 아니었으나) 문화대혁명 등 중국의 지속적인 문화 파괴 정책을 피해 살아남은 훌륭한 유산이다. 이걸 중국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위구르족이 독립한 후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도 있다.

참고하자면, 이 오타니 유물은 위구르 이전의 토하리인들의 유물이다. 이들은 위구르인들에게 전쟁에서 흡수되었지만 위구르와 다른 종족이라 아주 엄격히 보자면 위구르족이 이 유물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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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모든 위구르인이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중국인으로써 중국에 충성을 바치는 성향의 위구르족도 적지 않다. 2015년 1월에 재신망(財新網)에서 발표된 중국 인민해방군 장성 인사에서 위구르 출신인 할무라트 압두라흐만(哈里木拉提·阿不都热合满/خالمۇرات ئابدۇراخمان/Xalmurat Abduraxman)[45] 대교가 소장으로 진급했다. 사진은 대교 시절의 사진. 1961년생으로 기술통 출신이다.

유명 농구선수(포인트 가드) 아딜잔 술레이만(阿的江/ئادىلجان سۇلايمان/Adiljan Sulayman)이 바로 위구르인이다.

2019년 12월 15일 세계적인 축구 클럽 아스날의 스타 플레이어 메수트 외질이 위구르 독립 운동에 대해 '위구르 전사들'이라고 지지하는 글이 적힌 위구르 깃발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터키계 독일인인 그의 행동을 본 중국은 예정되어 있던 아스날과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 중계를 취소하였다.

위구르와 카자흐스탄 접경지역의 사막지대, 즉 커라마이(克拉玛依/قاراماي رايونى/Karamay) 시의 동북쪽 일대는 별도로 유명 미스터리 스팟이기도 하다. 흔히 "魔鬼城(Mogui Cheng, 마귀의 도시)" 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악마의 도시"라는 섬뜩한 별명을 갖고 있는 암석사막인데,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서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소리가 들려 온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산들바람이 불 때에는 온 사방에서 마치 수백만 개의 작은 방울들이 가볍게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때로 이것은 리드미컬하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기분 좋은 경쾌한 느낌을 준다. 그러다가 날씨가 나빠져서 거친 바람이 불게 되면 분위기는 급변한다. 거센 바람으로 모래와 흙먼지가 피어올라 시야를 어둡게 가려 버리고, 잔잔한 방울 소리 같았던 정체불명의 소리는 이제는 수십만 마리의 호랑이들과 코끼리들이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 여성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 아기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듯한 소리가 섞인 듯한 괴음으로 바뀌게 된다. 평화롭고 조금은 신비롭기까지 하던 관광명소 사막이 일순간에 레알 악마들의 무도회라도 열리는 듯한 공포스러운 장소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 관련 웹 포스트(영어)

중국 위안화에 "중국인민은행"을 뜻하는 위구르어가 적혀 있다. 한어병음, 몽골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좡족어 순이다. 영문 위백 이미지

음식은 튀르크계 음식들이 있는 중앙아시아와 비슷하며, 일부는 터키, 아제르바이잔,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과 비슷한 점을 가진 요리도 있다. 특히 라그만이나 오시(플로브), 빵은 중앙아시아와 비슷하다.


[1]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옹왕은 위구르를 극렬히 증오하여 나중에 황제가 됐을 때 그들과의 동맹 맺기를 거부하다가 신하의 간절한 조언으로 겨우 위구르와 동맹을 맺었다.[2] 고려시대 원 간섭기 시절 역관들이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언어가 바로 위구르어였다. 조선 초기에도 역관들에게 위구르어를 교육시켰다 한다.[3] 몽골어를 기록하기 위해 차용되었으며 내몽골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다.[4]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설장수다.[5] 사실 명나라가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이슬람을 탄압하는 바람에, 조선에 상주하던 위구르인 공동체는 다른 위구르인들과 연락과 교통이 모두 끊어진 상황이었다. 어차피 몇 세대 이후에는 동화가 필연적이었는데 조정에서는 그 과정을 좀 더 빠르게 한 것이라고 봐야한다.[6] 호자 가문은 스스로를 무함마드의 후손이라고 선전했으나 진실은 저너머에...[7] 쫓겨난 흑산당은 이후 아파크 호자와 백산당을 배신자로 선전했으며 지금의 위구르 독립 운동 세력에게도 아파크 호자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준가르 토벌을 명목으로 한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켰기 때문. 또한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빌붙었다는 점 때문에 위구르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슬람 교리는 초창기 부파 불교와는 약간은 융화가 가능해도 티베트 불교와는 융화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 이와 별개로 신장 현지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했기 때문에 아파크 호자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며 카슈가르에 있는 아파크 호자의 묘는 중요 문화재로서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8] 오늘날 신장에 남아있는 오이라트인들은 준가르인들의 후손이 아닌 칼미키야에서 이주해 온 오이라트인들의 후손이다.[9] http://egloos.zum.com/harmless/v/2444093[10] 1850년대 운남성에서는 회족 광부 수천여명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가 한족 광부들과 군인들에게 집단 학살을 당한 것을 계기로 청나라 전역에서 회족을 집단학살할 계획이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11] 지금의 카스지구(喀什地区) 카스(喀什).[12] 지금의 카스지구(喀什地区) 사처(莎车).[13] 지금의 허톈지구(和田地区) 허톈(和田).[14] 지금의 아커쑤지구(阿克苏地区) 아커쑤(阿克苏).[15] 지금의 아커쑤지구( 阿克苏地区) 쿠처(库车).[16] 지금의 바인궈런몽골자치주(巴音郭楞蒙古自治州/ᠪᠠᠶᠠᠨᠭᠣᠣᠯ ᠮᠣᠩᠭᠣᠯ ᠥᠪᠡᠷᠲᠡᠭᠡᠨ ᠵᠠᠰᠠᠬᠤ ᠵᠧᠦ) 쿠얼러(库尔勒).[17] 지금의 투루판(吐鲁番).[18] 당시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거주지역 대부분을 석권, 위구르와 국경을 맞댄 주변국이었다.[19]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슬람 세계 전체의 지도자격인 칼리프를 겸직해 이슬람의 종주국과 같은 나라였고 위구르인과 마찬가지로 튀르크계여서 큰형님이나 다름없었다.[20] 지금의 인도파키스탄이 당시 영국령으로, 위구르와 국경을 맞댄 주변국이었다.[21] 일리(ئىلى, Ili)라고도 한다. 지금의 이리카자흐자치주(伊犁哈萨克自治州/ىله قازاق اۆتونوميالى وبلىسى) 일대.[22] 2019년 터키의 집권당과 대통령 에르도안이 이슬람 원리주의자이지만 세속주의를 철폐하지 못하는게 이때문이다.[23] 양쩡신 지배 시기부터 성스차이 지배 시기까지의 신장은 중국보다는 러시아, 소련과의 교역이 더욱 활발했다.[24] 전통 페르시아 문학에서 나오는 고귀한 이란과 적대시하는 추악한 야만인들의 국가, 그러나 페르시아 문학을 받아들인 튀르크인들은 투란을 재해석하여 오히려 강건한 유목 튀르크 제국이라며 이상화했다[25] 물론 말이 연합이지 사실상 항복 선언이지만.[26] 얼굴의 이목구비는 백인이지만 체형이나 골격은 동양인과 많이 비슷하다[27] 다만 백인의 이목구비는 남아있는 편이다.[28] 타지키스탄과 바로 인접해있다.[29] 중국 20대 여성들이 가장 성형하고 싶은 얼굴에 선정되기도 했다.[30] 1950~60년대에는 위구르족이 절대 다수였으나, 한족들이 유입되어서 비율이 바뀌었다. 특히 우루무치는 한족이 무려 75%에 이른다고 한다. 다만 한족 다수 지역은 톈산 산맥 이북의 중가리아 일대이며 위구르족의 본거지인 타림 분지 일대에선 위구르족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31] 물론 한족 민간인들의 공격은 중국 정부가 대상자들을 처벌한다.[32] 이미 구 동구권 각국은 러시아에서 멀어지고 EUNATO에 가입했거나 가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냉전 이후 구 동구권 국가에서 줄곧 친러 국가였던 나라는 벨라루스뿐이다.[33] 참고로 카자흐스탄에는 러시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와 여러 군사훈련 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도 러시아의 공군 기지가 있다. 타지키스탄에는 7,000명의 러시아 병력이 주둔 중이다.[34] 사실 쿤밍역 테러는 궁극적으로 분리주의 운동이라기 보다는 중국 당국에 의한 단속을 피하고자 한 분리주의 단체 소속 위구르인들이 동남아시아로의 탈출조차 실패하자 성전(지하드)이라는 명분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쿤밍기차역 혹은 버스터미널에서 죽자는 식으로 일으킨 테러였다고 한다.#[35] 미국과 브라질에서 발견된 기존 역암 유전보다 매장규모가 훨씬 크다![36] 물론 이슬람권 지역도 특히 위구르 같은 유목민족 출신이었던 지역의 경우에 따라서 술을 마시거나 제조하기도 한다. 애초에 돼지고기인 거 알고도 맛있게 먹는 나이롱 이슬람교인들 생각보다 널렸다[37] 인구 자체는 한족이 많지만 위구르족은 종교가 구심점이 되는지라 결집력이 좋다.[38] 2012년 뉴스로 공개된 체가오(切糕, 절고) 사건을 빌미로 이슈화 되었다.[39] 민족 갈등은 덮어 감추려는 중국 정부 때문에 뉴스는 적은 편이다.[40] 예를 들면 수염을 기르거나 히잡을 머리에 쓰는 행위. 최근에는 이슬람 종교행사의 핵심인 라마단 의식도 금지되었으며 무함마드 등 이슬람과 관련된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 주는 것도 금하고 있다.[41] 중앙아시아 각국은 대부분 친러에 비교적 가까운 나라들이고, 러시아와 중국은 따지고 보면 사이가 좋지만은 않지만 더 강력한 공통의 적이 있어 국제정세상으로는 적당히 협력하는 편이다.[42] 비폭력 저항인 분신자살의 인상과 종교에 따른 세계 및 중국의 사회적 인식에 따른 목소리가 크기 때문인지, 오히려 공산당과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가는 티베트보다 이쪽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다.[43] 왜냐하면 신장 위구르 지역은 유전이 존재하는 데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 지역까지 자신들의 영향을 손쉽게 펼쳐나갈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국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탈환을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지역은 한족과 위구르족만 사는 게 아니라 회족,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우즈베크인, 사리콜리인와키인(두 민족은 중국 내에서 타지크인으로 분류됨.) 등과 같은 이슬람 혹은 중앙아시아계 민족들이 살기 때문에 갈등이 더더욱 커질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의 중앙아시 5도 이러한 민족간 갈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바 있다.[44] 물론 그리스인터키인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만으로 서로를 구별할 수 있을 만큼 혈통, 문화적으로 엄청나게 섞여 살아왔기 때문에 한족과 위구르족의 관계와는 동일선상에 놓기 힘든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45] 표준중국어 발음으로는 하리무라티 아부더러허만(병음: Hālǐmùlātí Ābùdōurèhémǎ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