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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전쟁 Kosovo War Lufta e Kosovës Косовски рат[1] | |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 | |
기간 | |
1998년 2월 28일 - 1999년 6월 11일 | |
장소 | |
코소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 |
원인 | |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의한 코소보 자치주의 자치권 박탈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의 분리독립 요구 | |
결과 | |
NATO의 승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244호 체결 2000년 불도저 혁명 발발 코소보에 유엔 관리 체제 도입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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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살리 체카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자히르 파야지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쉴레이만 셀리미 [[틀:깃발| ]][[틀:깃발| ]][[하심 사치|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라무시 하라디나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아김 체쿠 [[틀:깃발| ]][[틀:깃발| ]][[웨슬리 클라크| ]] | ]][[틀:깃발| ]][[틀:깃발| ]] 아뎀 야샤리†[[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드라골류브 오이다니치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블라스티미르 조르제비치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스레텐 루키치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네보이샤 파브코비치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블라디미르 라자레비치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고란 라도사블레비치 | ]][[틀:깃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전력 | |
[[틀:깃발| 17,000~20,000명 [[틀:깃발| ]][[틀:깃발| ]][[북대서양 조약 기구| ]] 항공기 80기 전투기 1,031기 군함 및 잠수함 30척 이상 | ]][[틀:깃발| ]][[코소보 해방군| ]][[틀:깃발| 군인 85,000명 경찰 20,000명 SAM 100기 화포 1,400문 항공기 240기 장갑차 및 전차 2,032대 [[세르비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세르비아인 준군사조직 불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러시아 의용군 불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우크라이나 인민자위대 불명 |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
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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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계 코소보인 8,676명 사망 및 실종 세르비아인 및 비 알바니아인 1,641~2,500명 사망 및 실종 롬인 445명 사망 및 실종 중국인 기자 3명 사망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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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hite 코소보 전쟁 관련 사진자료}}} | |
전장으로 진격하는 코소보 해방군들 | NATO에 의해 폭격당한 유고슬라비아의 제2의 도시 노비사드 |
난민캠프에서 카메라를 보며 인사를 하는 세르비아인 및 비알바니아인 어린이들 | 폭격당한 노비사드에서 배를 타고 다뉴브 강을 건너는 피난민들 |
NATO 공군의 공습에 대항한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의 대공포 사격 | 우글레비크(Ugljevik) 외곽에서 격추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군 소속 MiG-29의 잔해물 |
견해에 따라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로 보기도 하며, 별개의 전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2. 배경
본래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서 세르비아의 영토였으나(세르비아의 성지) 오스만 제국과 벌인 1차 코소보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가 오스만 제국측으로 기울고 이후에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말의 대 튀르크 전쟁을 계기로 18세기와 19세기 코소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세르비아인들은 북쪽으로 이주하고 빈 영토를 알바니아인이 채우면서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1815년 세르비아가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발한 발칸 전쟁 이후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코소보를 차지한 세르비아와 그 뒤를 이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강력한 세르비아화 정책을 실시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형제애와 통일"을 표어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유고슬라브인'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을 위해 코소보의 세르비아화 정책을 중단하고 유고슬라비아 내 비슬라브 민족이었던 알바니아인들의 권리도 존중했으며 1974년에는 코소보를 연방 내 자치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죽고,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유고 내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집권하면서 세르비아인의 성지라는 이유로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이러한 세르비아 측의 자치권 박탈에 분노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은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초반에는 자치권 회복을 요구하는 주장이 많았으나 나중에 유고 내 연방 국가들이 분리독립을 선포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됐다.
이브라힘 루고바를 비롯한 구 코소보 자치주의 알바니아계 의원들을 주축으로 한 분리주의 국가 코소바 공화국의 수립과 1995년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하심 사치(Hashim Thaçi)[4] 등 일단의 급진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코소보 해방군이 결성되어 무장 투쟁에 돌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문제는 독립군인 코소보 해방군의 실체도 독립군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 마피아, 알바니아 마피아까지 연계된 현지 범죄조직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코소보 해방군이 결성되고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은 미 국무부로부터 인신매매와 마약 거래를 일삼는 위험한 범죄조직, 즉 도적(Bandit)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무장조직의 자금줄은 크게 부자(개인,국가,정보조직등)의 후원과 마약류로 나뉜다.
코소보측 핵심 지도자였던 하심 사치라는 사람부터가 범죄조직의 수장이다.# 하심 사치가 이끄는 이 범죄조직은 무기 밀수, 매춘, 차량 강탈, 장기매매등을 해왔으며 심지어 코소보 전쟁 뒤에 알바니아 북부의 장기 암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세르비아 포로들을 살해했다.# 코소보를 옹호해온 서방마저도 자신의 편이라지만 파도 파도 괴담인 하심 사치에 대해 결국 현직 코소보 대통령 신분의 그를 기소하게 된다# 사실 이 사람은 총리 시절에도 범죄조직의 영향을 계속 받아온 인물이였다.#
그러던 1998년 3월 코소보 해방군은 코소보 지역을 순찰 중인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하였고 이에 세르비아 중심의 신 유고 연방 정부가 군대를 코소보로 파견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코소보 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 신 유고 연방군은 코소보 해방군을 비롯하여 비무장 알바니아인들을 대량학살하였고 이에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코소보 해방군이 합세해 신 유고 연방군에 저항했다. 결국 코소보는 세르비아 주축의 신 유고 연방군과 코소보 해방군 간 전투와 보복이 거듭되는 전쟁터가 되었다.
3. 서방의 개입
이탈리아 아비아노 공군기지에 이륙하기전 활주로로 이동하는 F-117 나이트호크 |
1999 - 코소보 전쟁과 인종 청소에 관한 다큐멘터리 |
유고슬라비아군 주둔지에 떨어지는 미군 B-52 폭격기의 융단폭격 |
베오그라드가 폭격 받는 영상 |
술집으로 개조한 배 뒤쪽 갑판에 놓인 소파에 푹 파묻혀서, 나는 가까이 다가온 유고슬라비아의 해안을 보고 있었다. 코소보 전투는 끔찍스러운 상처를 매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녁을 먹는데 종업원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어둠 속에서 긴 불꽃이 이어지더니 연기 기둥이 솟아올랐다. 죽음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NATO의 함선에서 쏘아올린 미사일이 세르비아에 떨어진 것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Bernard Ollivier, 1938–)
베르나르 올리비에(Bernard Ollivier, 1938–)
이러한 코소보에서의 전쟁상은 국제사회와 서방세계를 다시금 경악시켰다. 같은 해 6월 미국과 유럽연합은 코소보 전쟁에 대한 개입("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개입방안")을 선언하고 신 유고 연방군의 코소보 철수와 학살 중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 해방군의 주요 거점지들을 함락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사용을 결정하였다.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독일 연방군도 참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첫 해외파병 기록을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러나 전쟁의 예상은 미국과 NATO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원래 NATO의 계획은 3-4일, 아니 길어도 1주일 폭격으로 세르비아를 회담장으로 끌어내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몬테네그로와는 달리 폭격을 당해도 세르비아가 버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작전 중 초기 상당 기간이 악천후라 제대로 된 폭격작전이 힘들었고, 설상가상으로 F-117 나이트호크가 격추되는 망신까지 당했다. 한편 코소보 전쟁 당시 그 파일럿과 그를 격추시킨 사람이 서로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http://www.bbc.com/news/world-europe-20209770 F-117기 격추 후 파일럿 구출작전은 노 맨 레프트 비하인드 4부(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당시 파일럿 본인이 나와 정황을 설명한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단, 파일럿과 격추시킨 사람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작전 중반 이후 기상이 좋아지면서 공습량도 증가했으나 여전히 세르비아는 버티기로 일관했다. 설상가상으로 북마케도니아에 주둔하던 미군 3명이 순찰 중 유고군에 생포, 유고-세르비아 방송에 초췌한 모습으로 그대로 공개되어 NATO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NATO군은 알바니아에 처음에 1천명, 나중에 8천명을 더 상륙시켰고 4월 말에는 영국군 4만명이 코소보에 파견되었다.
또한, 선전 방해 및 유고슬라비아군의 통신 체제 파괴를 위해 벌인 나토의 세르비아 방송국 폭격에 대해 프랑스가 미국에 크게 반대하면서 서방 주요국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겨났다.
자세한 내용은 나토의 세르비아 방송국 폭격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렇게 되자 미국은 핀란드 대통령과 함께 미국 외교관을 특사로 러시아에 파견하여, 다시 옐친을 압박했다. 당시 러시아는 암울한 시기라 국력이 밀렸던 옐친은 이번에도 미국이 원하는대로 밀로셰비치를 압박해 회담장으로 끌어냈으며, 6월 종전이 이루어졌다. 이 경우에도 러시아군이 종전 직후 세르비아의 후견인으로 파견되어 코소보에서 UN군과 함께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옐친은 NATO군의 알바니아 상륙에 대해서 3차 세계대전을 경고하는 등 나름의 불쾌함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있었고 최소한의 명분은 보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종전 다음날 러시아군이 통보 없이 세르비아에 진주한 것은 좀 논란거리가 되었다.
공습은 총 78일간 실시되었고, 코소보 지역에 주둔하던 세르비아 제3군단의 안전한 철수가 보장되었다. 이 와중에 NATO는 자신들이 폭격 동영상까지 공개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것과 달리 상당수의 기갑차량과 항공기가 생존해 세르비아로 철수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는 세르비아 측이 공습에 대비해 상당량의 디코이들을 만들어 노출시킴으로써 폭격의 피해를 줄인 것도 한 몫 했다.# 이후 폭격 성과에 관해 논란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미국의 중국 대사관 폭격 사건으로 인해 중국 대사관 직원 3명과 코소보 난민들(100여명)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중국인들이 미국을 비판할 때 심심치 않게 언급될 만큼 중국 내에서의 파장이 상당했다. 중국 내에서는 이 사건이 오폭이 아니라 미국의 고의적인 공습이라고 믿는 경우가 상당하다. 사건 자체는 미국의 배상과 중국의 반미 시위에 대한 미국 재산 피해에 대한 상호 배상으로 종결되었다.
4. 결과
평화 협상의 내용은 문제점이 많았다. 세르비아 군경(軍警)이 코소보 자치주에서 철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에 세르비아군의 국경감시 임무는 유지하기로 합의를 봤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코소보와 알바니아 사이의 국경선은 여전히 세르비아군이 전담 관리하되 코소보 자치주 내의 치안권은 UN군에게 넘긴다는 이야기에 불과했다.사실 이 내용은 공습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 '랑부예'에서 열려다 결렬된 최후협상 과정에서 논의됐던 사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최후협상 막바지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돌연 세르비아군의 국경감시 임무포기까지 요구하는 바람에 밀로셰비치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것조차 미국이 일부러 코너로 몬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내부에서는 밀로셰비치에 대한 규탄과는 별도로 미국 등 서방권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쁜 편이고, 반대급부로 친러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세르비아 군경의 코소보 학살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외의 의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항목 참조.
1999년 미국 사회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The Lexus and the Olive Tree)》에서 "맥도날드가 진출해 있는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라는 자본주의에 의한 평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전쟁은 그 반례로 꼽힌다. 세르비아도 맥도날드가 진출해 있었고 나토 측 폭격으로 일부 세르비아 맥도날드 지점도 파괴당했다.
해당 전쟁으로 인해서 그 지역을 떠난 난민이 많다. 인근의 중립국인 스위스가 알바니아-코소보에서 이주한 난민들을 많이 받아 주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는 코소보 난민 출신의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제르단 샤치리와 그라니트 자카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나란히 골을 넣으며 스위스의 역전승을 이끌고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쌍두 독수리 세레모니를 펼쳐서 나란히 징계를 받았다. 국민감정을 떠나 스포츠와 정치는 어떻게든 분리가 되어야 페어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이다. 상황이 전혀 다르지만 기성용이 한일전에서 골 넣고 한 원숭이 세레모니를 일본에서 문제삼은 적이 있었다.
또 세르비아에서 열린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간의 유로 2016 예선 I조 경기에서, 전반 41분 알바니아계의 코소보 독립 문구가 적힌 깃발이 드론에 달려 경기장에 난입하자, 세르비아 선수가 이를 치우던 중 알바니아 선수들과 충돌이 발생, 세르비아 관중들의 폭행 난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경기를 치를 수 없게 되자, 원인을 제공한 알바니아의 책임을 물어 세르비아에게 3:0 몰수승을 선언한 반면, 경기장 관리 미숙으로 세르비아에게도 승점 3점 삭감, 예선 2경기 홈 무관중 징계를 내리고, 양 팀 모두에게 벌금 10만 유로 징계도 내렸다. 하지만 알바니아가 이에 CAS에 항소하면서 결과는 알바니아의 0:3 몰수승으로 반전되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승점 3점이 또 감점되면서 유로 예선에 참가한 모든 국가 중 제일 먼저 탈락을 확정지었다.
당연히 전쟁의 결과로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고 친미국가 겸 친서방국가가 되었다. 코소보 사람들이 USA나 NATO를 외치거나, 코소보에 주둔하는 나토군이나 미군들에게 커피를 준다거나 꽃을 주는 영상들이 유튜브에 존재하며, 심지어 클린턴의 이름을 딴 도로도 있고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가면 성조기와 유럽 연합기가 걸려져 있을 정도다.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 가면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알바니아에 미군을 진주시키기로 한 것을 기념하여 조지 W. 부시 대로도 있고 부시 동상이 엔베르 호자 동상보다 더 크게 제작되어 있기도 하다.
코소보 전쟁은 서구의 지식인 사회를 양분시켰다. 일반적으로 서구가 일으키는 대외전쟁에 비판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이 예외적으로 코소보 전쟁만은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공습이 시작되고 1년후, 온건 진보파 지식인의 거두로서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였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담론"의 주창자였음에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NATO의 공습을 지지하여 서구 지식인 사회에 센세이셔널한 충격을 주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당시 NATO의 공습을 '인도적 개입’이며, 새로운 세계질서 정치의 시작이라고 봤다. 일어날지도 모를 끔찍한 인권 침해 상황을 국제사회가 앞서 막았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과 크리스토퍼 히친스 역시 당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미국의 코소보 전쟁 개입과 NATO의 공습을 지지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당시 서구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의 담론을 살펴보면 극우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아돌프 히틀러로, 대세르비아주의는 나치즘으로, 고통받는 소수민족 알바니아인은 유대인으로, 사태해결을 위한 장기적이고 외교적인 노력은 뮌헨 협정으로 쉽게 등치되었고 인종청소라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서구 사회가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겨우 3년전에 끝난 보스니아 전쟁이 서구의 소극적인 대응 속에서 막대한 희생을 낳았던 점을 돌이켜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반면, 또 다른 진보파 지식인 놈 촘스키는 공습이 오히려 발칸 반도의 민족갈등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국제법을 무시한 당시 NATO의 공습은 잘못된 선례로서, 앞으로도 인권침해는 자주 일어날 것인데 그 때마다 외부적인 무력개입을 일삼는다면 국가간 무력행사를 막을 법 질서는 무너지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연극 관객모독으로 유명한 페터 한트케는 당시 NATO 공습을 반대하고 세르비아와 밀로셰비치에 동정적인 시선을 보냈다는 이유로 이후 수십년간 '인종청소 옹호자'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 외에도 당시 나토 공습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이 대거 희생되었음과 공습의 명분인 인종청소의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는 이유로 반전주의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는 코소보 전쟁을 줄곧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한편 이 전쟁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러시아간 우호적 교류 관계에 금을 내기 시작한 전쟁으로 평가받는다("The Kosovo War became the great divide in the US–Russian relationship."). 본래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이제 NATO는 러시아 견제용이 아니라 범유럽적인 안보기구'이기 때문에 NATO의 확장이 러시아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빌 클린턴의 꾸준한 설득에 넘어가 NATO와 1997년 협력 및 안보에 관한 기본협정(Founding Act on Mutual Relations, Cooperation and Security)을 체결하면서 NATO의 확장을 용인하였다.
당시 체결한 협정에 따르면 NATO와 러시아는 영구적 합동 본부(Permanent Joint Council)를 운영하면서 상호협의하에 의사결정해야 하고 러시아와 NATO는 공동 군사 훈련도 같이 해야 하고 모스크바내에 NATO와 군사연락임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고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군사 훈련을 제한하여야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수행사항이 많았다. 이게 제대로 준수되기만 했다면 NATO와 러시아간 관계도 어느정도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코소보 전쟁으로 인하여 러시아는, NATO가 NATO 가입국에 위협을 가한 사실이 없는 세르비아를, 그것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를 폭격함으로써 러시아를 적대한다고 판단하였고 이후 NATO와의 협력관계에 소극적이 되고 만다.#
5. 미디어에서
- 팰콘 4.0 Allied Force에서 발칸반도 전장이 이 전쟁을 다룬다.
- 더 헌티드(2003)에서 베네치오 델 토로가 연기한 에론 할램(전 델타포스 오퍼레이터, 중사)이 이 전쟁에 참가한 후 PTSD에 시달린다.
6. 관련 문서
[1] Kosovski rat[2] 비전투요원[3] 사실상 알바니아 마피아와 연계된 범죄조직으로 본다.[4] 최초의 코소보 공화국 총리이며 2014년까지 재직한 이후 2016년부터 대통령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에 전범혐의로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