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8:39:06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프랜시스 코폴라에서 넘어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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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공상 예술부문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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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지휘자)
파블로 세라노
(조각가)
에우제비오 샘페레
(조각가)
오르페온 도노스티아라
(합창단)
안토니오 로페즈 가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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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루이스 가르시아 베를랑가
(영화 감독)
에두아르도 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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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니에메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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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타피에스
(화가)
1991년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소프라노)
테레사 베르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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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알프레도 크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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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르 로렌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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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사엔스 데 오이사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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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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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바바라 헨드릭스
(소프라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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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마이야 플리세츠카야, 타마라 로조
(발레리나)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 감독)
밥 딜런
(싱어송라이터)
엘 시스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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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라
(건축가)
리카르도 무티
(지휘자)
라파엘 모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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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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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영화 감독)
누리아 에스페르트
(배우)
윌리엄 켄트리지
(화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감독)
피터 브룩
(연극 연출가)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엔니오 모리코네, 존 윌리엄스
(영화 음악가, 공동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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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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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1971년1972년
오슨 웰스 잉마르 베리만 마르셀 카르네 존 포드 찰리 채플린
1972년1982년
아나톨리 골로브냐 빌리 와일더 알레산드로 블라세티 루이스 부뉴엘 프랭크 카프라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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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1983년
마이클 파웰 사티야지트 레이 킹 비더 세자르 자바티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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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존 휴스턴 페데리코 펠리니 타비아니 형제 루이지 코멘치니
1988년1989년1990년1991년
요리스 이벤스 로베르 브레송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얀초 미클로시 마리오 모니첼리
1991년1992년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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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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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1998년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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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2001년2002년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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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Academy Award for Best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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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29년)
제2회
(1930년)
제3회
(1931년)
제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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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1933년)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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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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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벌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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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밀고자)
프랭크 카프라
(천금을 마다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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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소동)
제11회
(1939년)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제15회
(1943년)
프랭크 카프라
(우리 집의 낙원)
빅터 플레밍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존 포드
(분노의 포도)
존 포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윌리엄 와일러
(미니버 부인)
제16회
(1944년)
제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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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1946년)
제19회
(1947년)
제20회
(1948년)
마이클 커티즈
(카사블랑카)
레오 맥캐리
(나의 길을 가련다)
빌리 와일더
(잃어버린 주말)
윌리엄 와일러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엘리아 카잔
(신사협정)
제21회
(1949년)
제22회
(1950년)
제23회
(1951년)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존 휴스턴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
조셉 L. 맨키위즈
(세 부인)
조셉 L. 맨키위즈
(이브의 모든 것)
조지 스티븐스
(젊은이의 양지)
존 포드
(말 없는 사나이)
제26회
(1954년)
제27회
(1955년)
제28회
(1956년)
제29회
(1957년)
제30회
(1958년)
프레드 진네만
(지상에서 영원으로)
엘리아 카잔
(워터프론트)
델버트 만
(마티)
조지 스티븐스
(자이언트)
데이비드 린
(콰이 강의 다리)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제33회
(1961년)
제34회
(1962년)
제35회
(1963년)
빈센트 미넬리
(지지)
윌리엄 와일러
(벤허)
빌리 와일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로버트 와이즈
제롬 로빈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데이비드 린
(아라비아의 로렌스)
제36회
(1964년)
제37회
(1965년)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토니 리차드슨
(톰 존스의 화려한 모험)
조지 큐커
(마이 페어 레이디)
로버트 와이즈
(사운드 오브 뮤직)
프레드 진네만
(사계절의 사나이)
마이크 니콜스
(졸업)
제41회
(1969년)
제42회
(1970년)
제43회
(1971년)
제44회
(1972년)
제45회
(1973년)
캐럴 리드
(올리버!)
존 슐레진저
(미드나잇 카우보이)
프랭클린 J. 샤프너
(패튼 대전차군단)
윌리엄 프리드킨
(프렌치 커넥션)
밥 포시
(카바레)
제46회
(1974년)
제47회
(1975년)
제48회
(1976년)
제49회
(1977년)
제50회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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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 2)
밀로스 포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존 G. 아빌드센
(록키)
우디 앨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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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1979년)
제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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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1982년)
제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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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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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
리처드 애튼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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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1984년)
제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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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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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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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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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1992년)
제65회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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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맨)
올리버 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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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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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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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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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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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회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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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제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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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제76회
(2004년)
제77회
(2005년)
제78회
(2006년)
제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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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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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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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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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제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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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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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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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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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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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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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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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1972년)
제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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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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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

폴커 슐뢴도르프
(양철북)
밥 포시
(재즈는 나의 인생)
구로사와 아키라
(카게무샤[3])
}}}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Francis Ford Coppola
파일:코폴라 프로필.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39년 4월 7일 ([age(1939-04-07)]세)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신체 182cm
가족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부모 카르마인 코폴라, 이탈리아 코폴라
배우자 엘레노어 코폴라
자녀 지안 카를로 코폴라, 로만 코폴라, 소피아 코폴라
조부모 프란체스코 페니노
형제자매 형 오거스트 코폴라[4], 여동생 탈리아 샤이어[5]
손자 지아 코폴라, 로미 마스
학력 호프스트라 대학 (학사)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석사)
직업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제작자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Letterboxd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여담4. 작품들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영화감독.

윌리엄 프리드킨, 피터 보그다노비치와 함께 미국1970년대를 풍미했던 거장 감독이다. 이 시기 그는 〈대부 3부작〉 중 1, 2편, 〈컨버세이션〉, 〈지옥의 묵시록〉 등을 감독하며 그 자신의 명성을 드높였다.

2. 생애

이탈리아계 미국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마인 코폴라'는 음악가로 훗날 〈지옥의 묵시록〉의 지휘자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굳이 아버지를 거론하지 않아도 코폴라 가문 자체가 예술 관련 명문가로 널리 알려졌다. (딸인 소피아 코폴라는 감독, 조카인 니콜라스 케이지는 배우이며, 친척도 대부분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

놀랍게도(!) 로저 코먼이 발굴한 로저 코먼 사단 중 일원으로서 1963년 코먼이 제작한 호러 영화 〈디멘시아 13〉에서 감독과 각본으로 데뷔했다. 학생 시절부터 리더십이 강해 대학 연극부를 이끌었으며, 각본을 잘 쓰기로 유명해 영화사들의 시나리오를 봐주는 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배우들을 통제하는 데 능수능란하여 기대를 받다가 독립 장편 영화 〈레인 피플〉로 차츰 이름을 알렸고, 곧 〈대부〉 프로젝트에 고용됐다. 영화사는 그를 재능 있는 신인 정도로 여겼으나 코폴라는 특유의 정치술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자기 입맛대로 영화를 만들었고, 그렇게 대부 시리즈는 역사에 남을 성공을 이루어낸다. 그 뒤로 〈컨버세이션〉, 〈지옥의 묵시록〉 등 황금종려상을 2회나 수상하며 70년대를 자신의 시대로 만들었다.

고전 그리스 비극에 일가견이 있으며 인물간의 신화적 갈등(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을 변주하는데 탁월하고 어릴 적부터 극단에서 짬을 쌓은터라 배우들 연기 연출에 도가 텄다. 명실상부 블록킹 (연기 동선) 연출의 대가이며, 실내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힘의 대결, 심리적 표현을 영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에 있어선 1970년대의 1인자였다.

메이킹 영상을 보면 알 파치노를 앉혀놓고는 똑같이 따라하라며 직접 연기를 시연하기도 하고, 대배우들 앞에서 전혀 기 죽지 않은 채 자신의 뜻대로 컨트롤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게리 올드만과 영화를 찍을 때는 올드만이 고집을 피우자 일부러 스탭들 보는 앞에서 고래 고래 모욕을 줘가며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옥의 묵시록〉을 찍을 때는 말론 브란도가 말을 안 듣는 것은 기본이고 체중까지 수십 키로를 넘겨서 현장에 등장하자 묘안을 짜낸 것이 어둠 속에 그를 파묻어 버리고 자기 멋대로 독백하는 것을 찍어 명장면으로 만들어내는 등, 거물 배우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결과물을 뽑아내는 데에는 장인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사업가 기질과 정치적 능력이 특출나 영화사의 입김을 감당해내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선택과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교과서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이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고 거대한 현장을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있고, 예술적인 능력 이외에도 영화 제작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판단력이 뛰어났다. 물론 거장으로 인정받아 전권을 부여받은 〈지옥의 묵시록〉 제작 당시에는 과도한 야심 덕분에 스스로 죽을 맛을 보기도 했다.

집안인 코폴라 가문 자체가 영화 집안으로 아내는 영화 제작자, 딸인 소피아 코폴라도 배우이자 영화 감독이며 그녀의 오빠인 로만 코폴라도 뮤직 비디오 감독이자 영화 감독이다. 조카인 니콜라스 케이지(이 이름은 예명)와 크리스토퍼 코폴라[6]도 영화인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 영화에 자주 나오는 제이슨 슈워츠먼도 코폴라의 조카이며, 손녀인 지아 코폴라도 2013년 연출데뷔를 하였다.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사업가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혈연과 인맥을 중시하면서 이런 저런 사업을 많이 벌린 편이다. 가족들 대부분을 영화계에 입성시켰고 노인이 된 현재는 자신의 이름을 딴 포도주 농장을 경영하며 편안히 살고 있다.

그 밖에도 영화 '대부'에서 여동생 탈리아 샤이어마이클 콜레오네의 여동생 코니 콜레오네로 출연하고[7] 친딸 소피아도 마이클의 딸로 출연하는데 아기였을 때 연기는 그럭저럭 넘어갔으나, 어른이 되어서 출연한 대부 3부는 그녀의 발연기가 영화의 평가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로 인해 소피아 코폴라는 각종 타블로이드에서 아버지와 비교되는 일이 많자 연기를 포기하고 사진촬영을 비롯 이런 저런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다 영화감독으로 전업하고 처녀 자살 소동으로 데뷔하였다.[8]

〈대부〉(1972) - 〈컨버세이션〉(1974) - 〈대부 2〉(1974) - 〈지옥의 묵시록〉(1979) 이라는 4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작품상을 2번,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2번[9]이나 받는 등 화려한 1970년대를 보냈지만, 〈지옥의 묵시록〉 이후 코폴라의 영화들은 1970년대의 빛나는 작품들과는 다르게 매우 평범한 수준이다. 물론 〈대부 3〉를 비롯해 영화를 계속 만들기는 하지만, 주로 기획이나 제작에 더 많이 참가하고 있다. 물론 이후에도 기획 프로필을 보면 은근히 인지도 있는 영화가 많다. 그리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992) 나 〈럼블피쉬〉, 〈아웃사이더(영화)〉 등의 우수한 작품을 감독했다. 더불어 제작자로서 여러 영화도 제작, 기획했는데 〈슬리피 할로우〉나 지퍼스 크리퍼스 시리즈 같은 영화 제작, 기획도 맡았으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를 조지 루카스와 함께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1997년 제작된 맷 데이먼, 클레어 데인즈, 대니 드비토 주연의 〈레인메이커〉 이후, 2000년대부터 만든 영화들은 평가들이 매우 안 좋다.

2007년 마틴 스코세이지가 〈디파티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을 때,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함께 시상자로 나와서 감독상을 받는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라고 멘트를 했다.

더불어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포도주 제조용 포도 농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포도주를 판매하고 있다. 한국에도 정식 수입 중이며, 대형마트나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도 쉽게 구입이 가능하다.[10] 2013년에 해당 사업 관련해서 한국을 찾았는데 인터뷰 사진 하나 남기지 않아서 팬들도 소식을 몰랐다. 인터뷰도 영화 매체가 아닌 비즈니스 언론에서 진행했다. 이외에도 리조트, 레스토랑들도 운영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신작 연출은 맡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기존 연출 작품들에 대한 애정은 깊은지, 현재도 간간히 자신이 연출한 작품들의 재편집판을 내놓고 있다. 2019년에는 '지옥의 묵시록'의 또다른 감독판[11]인 파이널 컷을 내놓았으며, 2020년에도 대부3의 재편집판인 'THE GODFATHER CODA: THE DEATH OF MICHAEL CORLEONE'를 개봉했다. 트레일러 영상에서 아직도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상

3. 여담

  • 코엔 형제는 코폴라가 연출한 피니안의 무지개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
  • 대부 제작 이야기를 그릴 〈프란시스 앳 더 갓파더〉에서 오스카 아이작이 연기한다. #
  • 키가 182cm로 〈대부〉의 콜레오네 가족을 연기했던 배우들보다 장신인데, 그 배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그들보다 더 작아보인다. 이는 배우들이 죄다 키높이를 신었기 때문이다.
  • 2019년 경부터 사람들이 기억하던 푸근하고 살집있는 모습과 달리 굉장히 수척한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닌가 걱정 어린 여론이 있었으나, 코폴라 본인 스스로 건강을 위해 비만 클리닉을 다니며 체중을 감량한 것이라고 한다. 64 lb(29.0299 kg) 정도 감량했다고.#1#2
  • 지옥의 묵시록〉 촬영 중 지나친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무려 100 lb(45.3592 kg) 넘게 줄어들었고, 탈수증으로 병원에 실려가야만 했었다.#1#2
  • 2024년 4월 12일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가 세상을 떠났다.#1#2 둘은 1963년 2월 2일 결혼해 엘레노어 코폴라가 사망할 때까지 평생 해로했다.

4. 작품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장편 연출 작품
(다큐멘터리 영화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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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width=200> 파일:1963 디멘시아 13 로고.png ||<bgcolor=#CF51BF><width=200> 파일:1966 유아 빅 보이 나우 로고.png ||<bgcolor=#8BB5E7><width=200> 파일:1968 피니안의 무지개 로고.png ||
파일:1969 더 레인 피플 빗 로고.png 파일:1972 대부 1 로고.png 파일:1974 컨버세이션 로고.png
파일:1974 대부 2 로고.png 파일:1979 지옥의 묵시록 로고.png 파일:1982 마음의 저편 로고.png
파일:1983 아웃사이더 로고.png 파일:1983 럼블피쉬 로고.png 파일:1984 코튼 클럽 로고.png
파일:1986 페기 수 결혼하다 로고.png 파일:1987 병사의 낙원 로고.png 파일:1988 터커 로고.png
파일:1990 대부 3 로고.png 파일:1992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로고.png 파일:1996 잭 로고.png
파일:1997 레인메이커 로고.png 파일:2007 유스 위드아웃 유스 로고.png 파일:2009 테트로 로고.png
파일:2011 트윅스트 로고.png 파일:2024 메갈로폴리스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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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 시리즈 -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1970년대 그의 전성기를 열어줬으며, 또한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1990년(1편), 1993년(2편) National Film Registry 등재 작품.
  • 지옥의 묵시록 - 흥행에서 성공은 했으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코폴라 자신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도 비평쪽에선 호평받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며 리덕스가 나오는 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 National Film Registry 등재 작품.
  • 럼블피쉬 - 젊은 시절의 맷 딜런미키 루크가 출연했다. 흑백 영화인데 주인공인 모터사이클 보이가 흑백 색맹이라서 그렇다. 니콜라스 케이지도 나오며 제법 호화 캐스팅이지만 흥행은 별로 좋지 않았다. 1천만 달러로 만들어서 290만 달러를 버는데 그쳤다.
  • 아웃사이더 - 럼플피쉬에 출연했던 맷 딜런이 다시 출연하였으며, S.E. 힌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수작으로 평가 받으며 미국 현지에서 크게 성공하여 현재까지 권장 영화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브랫 팩 군단의 시초를 만들어 냈다.
  • 마음의 저편 - 평가는 그럭저럭이었지만 흥행에서는 대참패를 거둬 코폴라에게 타격을 준 영화. 제작비가 2,600만 달러[12]였는데 북미에서 겨우 63만 달러를 벌었다. 덕분에 코폴라는 파산 지경에 몰렸고, 이후의 영화들 중에는 이때 생긴 빚을 갚기 위해 찍은 것이 많다.[13]
  • 페기 수 결혼하다 - 캐슬린 터너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1986년작. 영화 평가는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제작비 1,800만 달러로 들어 흥행수익이 4,100만 달러를 기록하여 지옥의 묵시록 이후 오랜만에 흥행 성공하였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여우주연상(캐슬린 터너), 촬영상, 의상상 3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 터커 - 작품에 대한 평가는 좋았지만 흥행에서는 참패한 1988년작. 자동차 회사를 새롭게 세워 획기적인 차량을 만들어냈으나 포드와 GM같은 대기업의 횡포로 몰락해 비참하게 사라진 실존인물 프레스턴 터커(1903~1956)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영화부문), 전미 비평가 협회상 남우조연상,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수상작.
  •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 드라큘라를 로맨스 영화로 만들었다. 게리 올드만이 악역으로 출연했지만 로맨틱한 악역으로 출연했다. 평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14] 게리 올드만은 자신 특유의 캐릭터 해석력으로 색다른 분위기와 말투로 사람을 홀릴 듯한 그만의 드라큘라를 창조해냈다. 4000만 달러로 만들어져 2억 1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 - 1996년작. 로빈 윌리엄스조로증 환자로 분한 작품. 느와르나 대하극 위주의 감독의 이력으로서는 독특한 성격의 작품(코미디, 가족물)이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로튼토마토 신선도 19%)
  • 레인메이커 - 1997년작으로 법정 드라마이다. 간만에 괜찮은 수작이 나왔다는 평이나 90년대 이후 코폴라 감독의 작품 이력이 그렇듯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 유스 위드아웃 유스 - 코폴라 최초의 디지털 영화. 루마니아에서 촬영한 영화이다. 팀 로스가 주연으로 나온다. 미국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프랑스와 유럽권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스미 시게히코,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가 그들의 대담을 기록한 책 '영화장화'에서 해당 작품에 대해 호평을 하기도 했다.
  • 테트로 - 2009년작으로 럼블피쉬처럼 흑백 영화인데 이것도 실패하였다. 5백만 달러로 만들어서 263만 달러를 버는데 그쳤다.
  • 트윅스트 - 2011년에 제작된 호러영화. 700만 달러로 만들어진 저예산 호러물...이며 미국 흥행 집계도 안될 정도로 쫄딱 망했다. 저예산 호러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평작 수준에는 들어가지만 감독 커리어에서는 엄청난 졸작으로 악평받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 일본 등의 작가주의 비평계에선 호평을 받아 카예 뒤 시네마 2012년 베스트 영화 3위, 하스미 시게히코가 뽑은 2012년 베스트 영화에 선정되었다.
  • 메갈로폴리스 - 연출을 맡으며, 9.11 이전 뉴욕의 이야기를 그린다. 20년 동안[15] 준비해온 프로젝트로, 지옥의 묵시록보다도 훨씬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지옥의 묵시록 뺨칠 정도로 제작에 엄청난 난항을 겪었는데, 제작비 문제 때문에 기획 이후에도 한참동안 실제로 촬영되지 못하다가 겨우 드라큘라 등의 성공 덕에 여유가 생긴 코폴라가 제작을 재개했더니 바로 9.11 테러가 터지는 바람에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장기간 제작이 중단되었으며, 제작이 재개된 후에도 또다시 제작비 문제가 발목을 잡아 투자사를 찾지 못해 코폴라가 사비로 그 대부분을 충당하는 등 제작과정 자체가 웬만한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했다. 어쨌든 이 우여곡절 끝에 2023년 3월에 촬영이 마무리되었으며, 2024년 9월 27일에 정식 개봉할 예정이다. 애덤 드라이버, 포레스트 휘태커가 출연한다. 이런 와중에 코폴라가 엑스트라 여배우를 성추행하려 했다는 의혹으로 악재가 터졌다. 코폴라와 프로듀서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는 상태.

5. 관련 문서



[1]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본인과 조지 루카스가 제작한 작품이다.[2] 1964~1974의 최고상의 명칭. 현재 황금종려상과 동일한 상[3]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본인과 조지 루카스가 제작한 작품이다.[4] 대학교수로 차남이 니콜라스 케이지이다.[5] 장남이 제이슨 슈워츠먼이다.[6] 니콜라스의 친형. 다만 감독이나 연기보다는 San Francisco Art Institute 에서 영화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있다. 1980년대 국내에 개봉한 실비아 크리스털 주연 영화 '드라큐라의 미망인'을 감독했다.[7] 그 외에도 록키 시리즈에서 록키의 아내 애드리안 페니노를 연기했다.[8] 이후 도쿄를 배경으로 스칼렛 요한슨, 빌 머레이가 주연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아카데미 감독상에 여성으로서는 처음 지명되었다. 다만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지 커스틴 던스트, 엠마 왓슨과 작업한 영화들의 평은 미묘한 편이다. 그래도 2017년작 매혹당한 사람들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해 반등에 성공했다.[9] 황금종려상 2회 수상을 기록한 감독은 2023년 기준으로 9명에 불과하다. 알프 셰베리, 빌레 아우구스트, 에밀 쿠스트리차, 이마무라 쇼헤이, 다르덴 형제, 미카엘 하네케, 켄 로치, 루벤 외스틀룬드 등 면면이 쟁쟁하다.[10] 비슷하게 〈대부 2〉의 비토 콜레오네가 자신의 가게에서 생산한 올리브유를 팔기도 한다.[11] 첫 감독판으로 2001년판인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가 나온 바 있으나 미완성 장면이나 호흡이 느려서 지루한 장면까지 전부 억지로 우겨넣은 것 때문에 평가가 되려 원본보다 좋지 못했다. 비판을 의식한 것인지 파이널 컷에선 그러한 장면들이 아예 삭제되거나 그럭저럭 개연성 있게 편집된 편.[12] 참고로 원래는 제작비가 200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엄청 뛰어오른 것이다. 코폴라는 지옥 같은 지옥의 묵시록 촬영 이후, 쉬어가는 느낌으로 소품이던 이 영화를 찍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특유의 도전 의욕이 발생하여, 당시 새로운 매체이던 비디오로 영화를 촬영할 것을 결심하고, 이때의 시행착오로 제작비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영화 자체가 흥행과 거리가 멀었고, 영사 방식 등의 문제로 결국 기록적으로 망했고, 이후 코폴라의 경력 내내 발목을 잡았다.[13] 대표적인 예가 대부3. 대부는 2편까지만 찍을 것이라 계획했지만, 경제적 사정이 너무 안 좋자, 결국 다시 손을 댔다. 나중에 자기 입으로 여러차례 "대부3? 돈 때문에 찍었어요. 그래서 망한거에요 ㅋ" 라며 자조하기도 했다.[14] 다만 호러물을 로맨스물로 바꿔버렸다고 엄청 까이기도 했다.[15] 각본을 80년대에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나 촬영이 2023년에야 마무리 된 걸 생각하면 사실상 40년간 준비해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