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01:42:26

6.25 전쟁/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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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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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정적 결과
1.1. 인명 피해1.2. 정치적 영향1.3. 한국의 문화적 영향
1.3.1. 서울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3.2. 경기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3.3. 경상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3.4. 전라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3.5. 충청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3.6. 강원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3.7. 제주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1.4. 북한의 문화적 영향
1.4.1. 평양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4.2. 개성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4.3. 원산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1.4.4. 금강산의 거대 사찰
1.5. 분단 고착화1.6. 전쟁 범죄
1.6.1. 북한군에 의한 유명 인사 납북, 인민재판과 학살1.6.2. 한국 정부의 산하 단체에 의한 학살
1.7. 경제적 영향
1.7.1. 북한 공업기반 파괴1.7.2. 지역간 불균형의 단초
2. 긍정적 결과
2.1. 현대식 전면전 경험2.2. 신무기 개발에 미친 영향2.3. 대외관계 변화2.4. 영토 변화2.5. 사회 변화
3. 해외에 끼친 영향
3.1. 일본의 경우3.2. 스페인의 경우3.3. 중국의 경우3.4.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clearfix]

1. 부정적 결과

1.1. 인명 피해

파일:6.25전쟁사망자.jpg
한국군 및 유엔군 인명 피해
구분 전사 부상 실종/포로
772,608 175,801 554,202 42,605
한국군 621,479 137,899 450,742 32,838
유엔군 151,129 37,902 103,460 9,767
출처: 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육·해·공군 전/사망·실종자·부상자 현황
구분 육군 해군(해병 포함) 공군
613,136 579,492 9,011 138
전/사망 137,899 135,858 1,903 138
실종자 24,495 - - -
부상자 450,742 443,634 7,108 -
출처: 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피난민 현황
구분 1951. 3. 현재(가) 1951. 5. 현재(나) 1953. 4. 현재(다)
6,514,582 5,758,435 2,611,328
서울 128,400 - 40,219
경기 1,729,516 1,661,312 804,030
충북 700,300 270,051 156,713
충남 760,477 802,572 275,932
전북 329,032 414,103 326,331
전남 523,125 577,737 156,929
경북 1,383,208 575,292 229,089
경남 558,496 521,414 440,415
강원 330,800 987,160 161,311
제주 71,228 148,794 20,359
출처: 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인명 피해현황(1950. 6. 25 ~ 1953. 7. 27)
구분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총계 990,968 244,663 128,936 229,625 84,532 303,212
서울 129,908 29,628 8,800 34,680 20,738 36,062
경기 128,740 39,728 7,511 25,479 16,057 39,965
충북 70,003 24,320 3,409 12,658 6,312 23,304
충남 75,409 23,707 5,561 20,290 10,022 15,829
전북 91,861 40,462 14,216 15,364 7,210 14,609
전남 193,788 14,193 69,787 52,168 4,171 53,469
경북 97,851 35,485 6,609 21,061 7,584 27,112
경남 72,306 19,963 6,099 32,417 1,841 11,986
강원 130,777 17,122 6,825 15,483 10,528 80,819
제주 325 55 119 25 69 57
출처: 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파일:attachment/k20_09010397.jpg
전쟁 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을 합쳐서 약 300만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다. 베트남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도 한국전쟁은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높다. 그 대부분이 1950년의 남은 6개월 동안 발생했다. 지역별 인명피해로는 서울특별시/경기도 지역(특히 북부지역)이 제일 많고 그 다음엔 강원도 지역, 나머지는 비슷하다. 그 이후 전투는 고지쟁탈전 위주라 사망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SBS에서 한국전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확인된 사상자만 600만이라고 방송하기도 했다.[1]1950년대 당시 남북한 합쳐 한반도의 인구는 3천만 명으로, 한반도 인구 중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잡아도 10% 정도. 과장을 섞자면 간신히 북한군으로부터 막아낸 지역 경상북도(지금의 대구 포함),경상남도(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나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당시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지, 친척을 잃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다만 인명 피해는 남한보다는 북한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남한의 경우 전쟁 초기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본 뒤에는 인명 피해의 대부분이 군병력으로 국한됐고 그나마도 고지쟁탈전 위주라 장기간 지속되면서 병사들의 피를 말리기는 하지만 사상자는 정작 많지 않았다. 더욱이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인구도 많아서 전후 인구가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전쟁 전 남한의 인구는 2,050만 명인데 1955년에는 100만 명이 더 늘어났다.

반면 북한은 기존 사망자도 미 공군의 폭격 등으로 인해 남한에 비해 많았던데다 월남민이 워낙 많아서 실제 감소의 규모는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심각한 편이었다. 가뜩이나 인구가 남쪽의 절반도 안 돼서 사람이 부족한 마당에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오히려 남쪽보다 더 크니 이는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 큰 부담이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전쟁 중반부터 포로의 일괄송환과 휴전에 목을 맨 반면, 정작 침략당한 이승만은 오히려 강경하게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 된 것도 실상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던 시기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이 1950년 10월~12월 사이에 3~4만 명의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데, 이를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설립하고 반미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신천군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체는 미군이 절대 아니다.

당시 미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자세한 설명은 신천·재령군 봉기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국군과 미군도 북한으로부터 수복한 북한 및 남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와 공산당, 제5열에 대한 공포심과 복수심으로 인해 상당수 주민을 학살하였다. 의도하지 않은, 혹은 의도한 학살사건들이 여럿 있으며,이와 관련해서 알려진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거창 양민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전남 나주 경찰부대 학살사건 등이 유명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학살의 규모는 전국구로 벌어졌으며, 그 정도는 생각 이상으로 매우 잔인했다. 공산주의와 공산당, 전쟁 중에 악질적인 행위인 피난민을 이용하여 후방에 침투해 교란작전을 펼치는 제5열에 대한 공포심과 복수심, 궁지에 몰릴대로 몰리던 당시의 전황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또한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박남식의 회고록 '실낙원의 비극'에는, 장군들이 시찰을 오면 사단장이 근처 피난민촌에서 민간인을 납치한 다음 처녀성 검사를 하고 성상납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

1.2. 정치적 영향

정치적으로는 휴전 이후 김일성과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 탄압하는 대의명분을 얻으면서 양측의 권력이 공고화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파, 남로당파, 연안파 등 조선로동당 내부의 다른 파벌들을 거의 숙청하여 북한 지도부를 종전의 연립정권 형태에서 김일성의 직계인 만주파가 정권을 독식하는 구조로 바꿔버린다.

한국에서는 휴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였다. 특히 남한에서는 휴전 이전부터 발췌 개헌이 전쟁시의 혼란상을 이용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북한은 현재까지도 독재가 진행 중이고 남한에서도 1987년 6.29 선언 이전까지 독재가 이루어졌다.

한반도의 국민적 차원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 그대로 전쟁을 겪었던 장년층들은 물론 그 이후에 중년층, 그리고 현재의 한국 청년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6.25 직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징병제가 실시되는 주요한 계기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 때문에 한국군의 규모를 약 10만명 선에서 제한을 두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전황이 UN군과 한국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한민국 국회는 1951년 5월에 징병제를 부활시켰고, 1953년 7월 전쟁이 끝날 시점에 58만 명. 그리고 이후 60만 명 수준을 계속 유지하다가 2020년대에 이르러서야 50만 명대로 감축하는 추세이다.

그 이전에는 모병제였다. 하지만 법을 다시 고치기 전까지 모병을 받은 게 절대 아니라, 가택수색을 하거나 거리 가두모집으로 청년들을 끌어다가 군대에 닥치고 넣었던 시절이었다. 이러다 보니 민심도 흉흉해지고 갑자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국민들의 불만도 커졌다. 국회가 징병제를 부활한 이유는 이런 식으로 징집을 하지 말고 제대로 선별해서 징집하라고 한 것. 물론 남북대립이 징병제 도입의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나, 남북분단이 없었더라도 징병제 자체는 높은 확률로 도입되었을 것이다. 이미 한국의 위쪽에 중국소련이 있었으니까. 다만 지금에 비해 병력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징병제도 지금보다는 널널하게 운영되었을 것이다. 또한 징병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이 든 세대들이 빨갱이란 말이라면 그야말로 과민할 정도로 반응하는 이유기도 하다.

대한민국 육군이 공군, 해군, 주한미군에 비해 휴가, 외박에 좀 더 보수적인 이유도 당시에 출타자가 지나치게 많아(농번기 휴가) 초기 대응에 실패한 데서 나온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남침 징후 등을 좀 더 빨리 포착할 수 있게 되었고 교통 환경도 개선되면서 많이 나아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이 지난 뒤인 1949년 8월 병역법이 만들어지면서 징병제가 자리 잡았다. 이 법에 따라 1950년 1월 첫 번째 징병 검사가 이뤄졌다. 그런데 그 검사를 끝으로 징병제가 없어졌다. 남한의 최대 원조국이었던 미국이 대한민국의 무장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5년 8.15 광복 뒤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한에 들어온 미군은 3년 동안 군정을 편 뒤 이승만 정부에게 정권을 넘겼다. 그러면서 남한의 군 병력 규모가 10만 명을 넘지 않도록 했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 대해 군사행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징병제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병력 10만 명을 쉽게 넘길 수 있다고 본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압력을 넣었다. 정부는 마지못해 징병제를 폐지해야 했다.

남한이 다시 징병제로 돌아가게 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8월 대구 징병사무소. 신병들은 짧은 군사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으로 갔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정부는 전시 동원체제를 갖추면서 징병제를 다시 들였다.

전쟁의 혼란 속에 제 발로 스스로 군대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길에서 지나가는 남자를 강제로 데려가고, 집을 뒤져 데려가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모인 국민방위군이 70만 가까이 됐다.

하지만 이들을 통솔하던 일부 군 간부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문제였다. 병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과 군복을 빼돌려 암시장에 내다 팔아 배를 불렸다. 그로 말미암아 5만 명(일설에는 12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잃은 사람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의 80%가 신체적, 정신적 상처 탓에 전투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이 비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이승만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다독거리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문제의 국민방위군 간부 5명은 총살형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도 많은 사람이 그때의 비극을 쉽게 잊지 못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징병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김재명, 병역 징병제냐 모병제냐, 65~66.

1.3. 한국의 문화적 영향

전통적인 풍속, 가치관, 문화, 무예, 민속놀이 등등 수많은 문화는 조선, 고려, 삼국시대부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고 195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것이 6.25 전쟁을 기점으로 리셋되어 버린다. 지금 우리가 어렴풋이 인식하는 한국 전통문화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50년대 이전 한국 전통문화를 세부적으로 살핀다면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였다고?”라고 느낄 것이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전통 문화재가 파괴, 소실, 행방불명되었으며, 전국 산간 지역의 수많은 사찰들이 미군과 한국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중에 파괴된 바 있다. 전쟁상황에 따른 혼란상과 미미했던 전통 보존 의식이 겹쳐 문화계와 예술계의 생지옥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북한은 전쟁 후반 폭격까지 겹쳐 전통 건축물은 물론, 산골의 전통마을과 암자, 절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싸그리 증발해버린다. 전통 문화재를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더욱 마음 아픈 전쟁이다. 전국에 있던 비석, 기록, 회화할 것 없이 소실된 것이 많으니, 한국사 연구에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 현재까지 그 피해는 통계를 낼 수가 없다. 너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전국에 있던 산지 사찰 역시 빨치산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우려로 방화,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절에 있는 안내 표지판마다 6.25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그 정도를 알만하다. 특히 38선 주변 강원도, 경기도의 절은 그 피해가 더 심했는데, 108곳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던 금강산 지역에서는 3곳 빼놓고 모든 절이 폭격당해 엄청난 양의 국보급 자료와 유물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북한군 게릴라 토벌에만 신경 쓴 나머지 해인사 폭격 명령까지 내려왔으나 이 때 공군 조종사였던 고 김영환 장군이 이를 거부하고 설득 작업에 들어가 폭격을 막았다. 이때 이승만은 도리어 김 장군을 사임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장군은 이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또 빨치산 토벌로 유명한 차일혁 총경도 문화재 보호에 공이 있는데,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에 차일혁 총경은 고민하다가 화엄사의 문짝을 떼어내 태워서 빨치산이 숨을 수 없게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지를 발휘한 덕택에, 전후에 조계종에서 차일혁 총경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 총경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불복종한 것과 1953년 9월 사살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여 화장한 유골을 수목장시켜준 것이 화근이 되어 휴전 후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전전하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공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58년 8월 9일, 가족들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차 총경은 2011년에야 6.25 때의 공적이 인정되어 뒤늦게 경무관으로 추서되었다.

게다가 조선의 역대 왕들의 어진들을 위시한 왕실 유물들 4천여점이 공산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공산군의 공격이 아닌 전후인 (1954년) 관리부재로 인한 화재로 단 546점의 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렸으며, 전체 48축의 어진 중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어진은 겨우 5축만 남아 현재 얼굴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조선의 왕은 겨우 6명밖에 없게 되었다.[2][3] 다만 당시에도 어진이 남아 있던 왕들은 대부분 숙종 이후의 왕들이었다고 하지만...[4][5]

이 밖에도 이성계의 활 등 수 많은 국보급 유물이 전쟁통에 파손되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문화재를 적은 블로그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백의민족 풍습도 크게 쇠퇴했다. 흰 옷은 염색과 표백으로 색을 유지하는데, 염료는커녕 끼니를 이어가기도 힘들어진 탓에 해외로부터 원조받은 옷[6]을 그대로 입다 보니 옷 색깔에 큰 관심을 두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문화재 보존에 관한 논문###

1.3.1. 서울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서울도 한국전쟁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다. 서울 일대의 한옥을 비롯한 여러 무형문화재 보유자, 궁궐, 관아와 일제강점기에 조사하여 작성된 여러 문서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문서들과 조선왕조 어보, 어책 등이 폭격으로 불타거나 파괴되고 서울 지역의 여러 전통문화를 이어나가던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사망과 실종 ,고궁에 보관되던 왕실의 물건들이 전쟁 중 도난과 실종되어 사라졌으며 중앙청 서고에 보관되던 일제강점기 서울에 주둔한 일제의 기록들이 불타거나 도난되었다.

1.3.2. 경기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한국전쟁 당시 서부전선과 중부전선 일부를 방어하던 경기도는 한강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지역 모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중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의 사찰 중 한국전쟁 당시에 피해를 입은 사찰은 현재까지 공식적으로는 모두 57곳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이 사찰 57곳 중 무려 39곳이 전소되거나 폐허로 변하였으며, 파주시에 있었던 봉암사와 용인시의 석성산 자락에 위치하였던 금수암 등의 6개의 사찰들은 모두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폐사지로 남아있다. 특히 이 중 경기도 사찰의 28% 정도가 한국전쟁 당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다.[26] 연천 심원사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 보개산 전투로 일부 훼손이 된 상태에서 한국군이 주둔하면서 부대원들에 의해 전각들이 해체되어 화목으로 사용되며 불타 사라졌다. # 이외에도 확인되지 못한 암자나 작은 소규모 사찰까지 합하면 추정 피해 사찰만 120여 곳에 다다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3.3. 경상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낙동강 방어전 및 빨치산 토벌 등으로 적지 않은 문화재들이 소실되긴 했지만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전쟁에 직접적으로 휩쓸리지 않았던 관계로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문화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31]

1.3.4. 전라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한국전쟁 당시 육지로는 가장 남쪽에 있었던 전라도 지역에서도 많은 양의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전라남도 지역은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문화재를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등 상당한 양의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지역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들도 대거 사망하였다.

전라도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사찰들의 피해가 컸는데, 특히 전라북도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직접적인 전투에 의한 피해보다는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에 근거지를 둔 빨치산들과 이를 토벌하려는 한국 군대와 한국 경찰들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한 피해가 크다. 빨치산의 활동 범위가 산악 지역인만큼 그 지역 산사들의 피해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시되었다. 이 지역의 피해는 41개 사찰에 이르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해 사찰 41개 중 가해주체가 확인된 곳은 28개 사찰로 이 중 내장사를 비롯한 26개 사찰은 한국군 및 경찰에 의하여 전소 또는 일부 소실되었고, 완주 운문사는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전소 후 폐사되었으며, 임실 도통암은 빨치산과 북한군에 의하여 전소되었다. 전남 지역의 피해 사찰 41개 중 증심사, 수인사, 상백운암, 중백운암, 하백운암, 송천사, 용흥사, 대원사, 일림사 등 9개 사찰은 전쟁 발발 이전에 여순사건과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이미 일부 피해를 입었다. 또한 전쟁 발발 이후 피해를 입은 28개 사찰 중 도갑사 등 전라북도 지역은 강원도 및 서울·경기 지역에 비하여 전소 비율이 높이 나타나는데 이는 빨치산의 근거지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한국 군경에 의하여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당시 피해를 입은 사찰들 중 8개 사찰은 전후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폐사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게 된 일들을 통계내자면, 전라도에서 4개 사찰을 제외한 24개 사찰이 모두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찰이다. 거기다가 가해 주체가 확인된 27개 사찰 중 빨치산에 의한 피해는 금곡사와 정수사 등 2개 사찰이고 나머지 25개 사찰은 한국 군경에 의하여 작전상 소각되었다.

1.3.5. 충청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1.3.6. 강원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강원도 지역 사찰 중 한국전쟁 당시에 피해를 입은 사찰은 25곳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피해사찰 25곳이 전소되거나 폐허로 변하였다. 이중 14곳은 복구되지 못하고 폐사로 남아 있다. 건봉사, 신흥사, 낙산사, 명주사, 백담사, 월정사, 상원사 등 상당수의 사찰은 모두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찰들이다. 특히 월정사와 상원사의 경우는 전투 중에 소실된 것이 아니라 공비퇴치를 이유로 한국군에 의해 전소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1.3.7. 제주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제주도의 경우는 이미 한국전쟁 이전인, 1948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진행된 제주 4.3 사건당시 중산간 초토화작전 과정에서 수많은 사찰과 문화유산 방화가 저질러졌다. 특히 한국전쟁 중인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소실된 사찰과 문화재의 수조차 통계내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제주도 지역의 피해가 큰 이유는, 당시 빨치산들을 소탕하지 위해서 산기슭 인근에 있던 사찰들을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피해 사찰은 현재까지 확인된 수만 35개소로, 모두 군경 토벌대에 의한 방화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증언되고 있다.# 이 중 10개 사찰은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폐사지로 남아있다.

1.4. 북한의 문화적 영향

1.4.1. 평양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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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철교의 붕괴 모습
파일:일제강점기 평양 거리2.jpg
일제강점기 2층 한옥으로 구성된 평양 시가지
파일:대동강변의 고상누각.jpg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고상 한옥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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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이어지는 복층 한옥 상점
파일:평양 시내 일제강점기당시 시가지.jpg
한국전쟁 이전의 일제강점기 평양시내 모습
파일:폭격으로 사라진 평양시가지.jpg
평양시내의 소이탄 폭격 직후 모습
북한에서 가장 문화적 타격이 컸던 도시이다.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이자, 고려조선에서도 수도 다음가는 존재감을 과시했던 평양은 무려 3차례의 융단폭격을 받아 건물 상당수가 피해를 입는다.[67] 위 사진에서 보였던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평양의 수천채의 한옥들과 2000년 고도 평양에 있던 귀중한 문화재는 상당수가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살아남은 일부유물들을 제외하면 평양에 있던 고구려 고분의 황금 유물, 금제 장식, 여러 국보급 유물들과 건축물, 민속 등 모든 유산들이 그냥 증발하였다. 특히 평양은 '소이탄', '네이팜탄' 등의 포탄으로 집중폭격이 이루어져 거의 도시가 사라진 것과 같이 변하였다. 그나마 건축물의 경우에는 남아있는 자료를 토대로 복원을 하기는 했지만 원본과 다른 경우가 허다할 것이고 유물의 경우에는 나중에 발굴 조사를 하고도 못 메꾼 것들이 태반이다.

* 평양의 문화적 피해 유산 통계[a] (현재는 상당수가 소실또는 손상되거나 실종되어 확인 안 되는 유물들이 태반이다.)
* 평안도 일대의 국보급 유물을 모아놓았던 평양박물관과 그 안의 소장품들[69]
* 평양성 - 대동문, 칠성문, 평양성 외성, 평양성 중성, 평양성 내성, 평양성 북성, 을밀대, 부벽루, 전금문[70]
* 풍경궁
* 조선 초기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평양시내의 수천채의 고상가옥과 여러 한옥들.
* 영명사, 안국사를 비롯한 평양시 내외 인근의 50여채의 크고 작은 암자와 사찰들.
* 동명왕릉
* 광법사
* 고구려 고분등의 고분
* 외부는 한옥으로, 내부는 르네상스 식으로 지어졌던 구 평양역
* 대동강철교
* 평양 일대의 고구려 고분
* 평안감영과 선화당
* 숭령전과 숭인전
* 최승대
* 평양객사 대동관과 평양행궁
* 평양민속박물관 [71]
* 평양냉면 전수자 [72]
* 평양향교[73]
* 평양시청
* 평양 자혜의원[74]
* 용곡서원[75]

1.4.2. 개성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한국전쟁 당시 가장 빠르게 북한군에게 점령당한[76] 도시였으며 고려의 500년 수도였던 개성시 또한 피해가 적지 않았다. 전쟁발발 직후부터 평양시, 해주시, 원산시, 함흥시가 가장 먼저 미군UN군에 의해서 폭격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개성에 있던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과 실종되었다. 한반도에서 지어져 남아있던 목조 건축물인 성문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개성 남대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유적도 나중에 복원이 되기는 했다만 역시 원형과 다른 경우가 많다.
  • 개성의 문화적 피해 유산 통계[a]

1.4.3. 원산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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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OSB1952.jpg
1950년 여름 경 1952년 항공사진
도시가 아예 증발해 버렸다. 원산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똑같은 꼴을 당했는데 차이점이라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원자폭탄 한 방에 그렇게 된 반면 원산은 3년 동안 지속적인 폭탄 세례로 그렇게 되었다.

미군은 종전하는 그 날까지 쉬지 않고 1년 365일 연중무휴로 계속 폭탄을 때려부었는데 하늘에서는 전투기로 폭격하고 바다에서는 군함으로 함포사격을 가해 2중으로 포탄 공격을 감행해 도시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전쟁 이후 원산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은 1953년 이후에 만들어진 건물들이다.

1.4.4. 금강산의 거대 사찰

원나라 황실부터 조선 왕실까지 대대로 비호를 받던 금강산의 100여개의 거대 사찰과 암자들. 단 한 곳, 보덕암을 제외하고 모두 폭격을 받았다. 그나마 표훈사, 정양사는 일부 건물이라도 남았지만 장안사, 신계사, 유점사와 같은 큰절은 각각 승탑 한기, 석탑, 종을 제외한 모든것이 사라져버렸다.임진왜란도 버틴 국보 이상급 건축과 유물들이 6.25는 버티지 못했다.

1.5. 분단 고착화

종북주의자들은 6.25 전쟁이 통일 전쟁이라고 헛소리를 하지만 6.25 전쟁은 그나마 전쟁 전에 있었던 비공식 민간 교류도 금지될 만큼 한반도 분단을 심화시켰고 남북이 서로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되어 대화와 협상을 통한 통일 가능성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미 전쟁 전에도 탈북은 막혀가고 있었고, 서신 왕래도 북한에서 편지를 검열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했지만 전쟁으로 아예 가족이 있더라도 모든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남북통일 문서에서 보듯 2023년 60대 이상마저 60% 정도만 남북한의 주민이 한민족이 맞다고 할 정도로 북한 사람을 이민족 취급하는 정서가 생겼다. 비록 전쟁 당시 평양 등을 국군이 점령하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한다든지, 이들을 '단군의 후예'라고 하고 이북 출신이 한국 정계에 관여하기도 하고 북한 주민을 같은 민족으로 대하려는 시도도 많았지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유명한 이승복의 희생을 기리면서 '오랑캐'라고 북한의 세력을 이민족으로 지칭하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설문조사상 루마니아인몰도바인에게 느끼는 것보다 민족의식이 약하다고도 할 수 있다.

분단을 겪은 독일의 경우 서독과 동독 사이에 상호비방하는 면과 소규모 무력 충돌은 있었으나 6.25 전쟁같이 대규모 전쟁은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서 독일분단 기간 내내 공식 및 비공식적인 인적·물적 교류가 가능하였고 이산가족 상봉과 상대방에 대한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런 점이 통일을 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그러나 한반도의 경우 김일성의 공산화 야욕과 권력욕으로 인한 남침으로 인해 제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갔던 6.25 전쟁은 남북 서로 간의 적대감을 증폭시킴으로써 남북 왕래를 못하게 만들었고 이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6. 전쟁 범죄

6.25 전쟁은 그 어느 전쟁보다도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했던 전쟁이었다. 남북의 민간인 사망자 중 약 10% 정도가 국가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로 추정되며, 양쪽이 벌인 광범위한 폭력과 보복은 전쟁이 끝나고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깊고 넓은 상처를 남겼다.

한편 전쟁 중의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말이 많은데, 남북 양 측은 서로 상대편의 학살을 비난하며 이를 이데올로기 대립에 이용한 바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기의 충격으로 이에 관련한 문학 작품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반공 문학. 그나마 대한민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으로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비판 대상에 올라 정부와 사회각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서고 있고 피해보상도 해주고는 있지만 북한은 아직도 독재 체제라서 그런 거 없다.

주체가 누구냐를 떠나서 이러한 학살 문제는 결국 당시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몰아넣었다. 때문에 전후 문학에는 단순히 반공 문학뿐만 아니라 한국군과 북한군의 사이에서 휘둘려야 했던 민중의 고통을 논하는 작품 또한 많다. 전란의 혼란상으로 인한 사회의 황폐화는 몽실 언니 등의 작품, 한국군과 인민군의 학살로 인한 민중의 공포와 트라우마는 소문의 벽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1. 북한군에 의한 유명 인사 납북, 인민재판과 학살

북한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손진태, 박열, 정인보, 이광수 등 수많은 정치, 경제, 문화, 학술계 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당시 유력한 중도파 국회의원으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조봉암이 있었는데 조봉암 빼고 모두 납북당하여 중도파는 조봉암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한국 정치의 커다란 손실로 평가된다. 물론 북한은 이것까지 전부 염두에 두고 있었고, "모시겠다"는 명분으로 이 사람들을 데려갔다.

납북된 중도파 정치인들(특히,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은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철저히 금기시당해 왔다. 제1공화국 정부 시기 동안 조소앙은 아예 '북한의 간첩'이라고 규정되었을 정도. 그의 가족들 또한 대한민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소위 연좌제의 굴레를 받으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다행히도 나중에 훗날 체제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이후 1989년에 복권되었지만... 참고자료

현대사 연구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5.30 총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중도파 세력들이 다수 점유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중도파 의원들 상당수가 납북당해 이승만과 친일 세력들에게 정계의 커다란 입지를 주는 빌미를 마련했다'며, '6.25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이 극단적 반공국가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현대사의 비극으로 정의하고 있다.

납북자의 88.2% (84,659명)가 6.25 전쟁 발발 이후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되었으며, 그 중 80.3% (77,056명)가 자택이나 자택 인근에서 납치되었다. 납북된 한국 인사 중에는 법조인이 190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언론인이 226명이었다.[81] 또한 이러한 납치의 기획은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전쟁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생산된 북한 당국의 문서에서도 확인이 된다.[82][83]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저명인사 외에도 북한군은 반공 인사, 경찰관, 공무원 및 그 가족을 대량 학살하였다. 최근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재발견되고 있으나 이는 오랜 세월 체제 경쟁과 냉전으로 인해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40년 넘게 묻혀있던 사건이 한꺼번에 발굴되면서 갑자기 많이 언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개전 3일 만에 벌어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과 전남 영광군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영광군 학살 사건)(이 학살 규모는 약 5000여 명의 규모[84]가 피해를 입었을 정도로 북한군에 의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 그리고 경남 산청에서 북한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20~40대 연령층대의 젊은 사람들 대상으로 학살을 벌인 것# 등이 대표적이다.[85] 또 9.28 북한군 후퇴 와중에 벌어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경우 대전형무소 단 한 곳에서만 약 7,000여구의 시신이 수습될 정도였다.[86] 이 밖에 광주형무소 학살 사건 등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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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처형할 때 대중을 동원한 공개 재판의 형태를 취할 때가 많았는데 이를 ‘인민재판’이라고 하였다. 이 '인민재판'이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마녀사냥’과 비슷한 의미로 현재까지도 흔히 쓰이고 있다.

북한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을 때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빈농계층과 기타 하류층의 젊은이들은 계급 해방되는 사회주의 세상[87], 좀 노골적으로 언급하면 그동안 자신들이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밑에 오고 자신들은 출세하는 세상이 오는 줄로 알고 북한군 밑에서 한자리 꿰찬 다음[88] 심지어 과거에 원한이 없었더라도 친일파, 지주, 경찰, 공무원, 서북청년단 등의 동네의 세력가들을 반동으로 몰고가는 증오심을 부추기는 선전을 받으며 인민재판에 회부해 처형하는 데에 적극 앞장섰는데, 이는 서울 지역에서 인민재판이 행해진 여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문제는 세력가들 중의 상당수가 주변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소에 민심을 얻어놓은 세력가는 인민재판을 받았어도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살아남는 정도였다고 한다. 보스니아 내전처럼 작년에 추수를 도와준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든다는 일이나 레바논 내전처럼 13세기 동안 공존한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를 죽인다는 식의 일도 많았다.

북한군 낙오병이나 북한군에 협조했던 동조자들은 자신이 처형했던 사람들의 주변인들에게 그대로 보복당하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도망쳐 빨치산이 되어 게릴라 전투를 수행하다가 죽거나 감옥에 가게 되었다. 결국 같은 동네나 이웃 동네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씻을 수 없는 불신과 증오의 상처를 남기게 된 것이다. 이같은 가혹한 인민재판과 학살, 그에 따른 반목으로 인한 한 마을의 비극은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전쟁 초 북한군이 남진하고 있을 때는 북한군 지휘부의 승인으로 지역 동조자 또는 내무서(북한에서 경찰서를 부르는 말), 정치보위부 등 치안기구가 담당하여 인민재판을 행했으며 북한군이 자체적으로 나서서 저지른 짓도 많다. 즉 개전 초부터 이들은 학살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

국군과 미군 포로 상당수는 북한군에 의해 직접 학살되고 시체도 마구 훼손된 경우가 흔했다. 국군의 경우 간부나 이북 출신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고문당한 뒤 처형당했다고 한다. 부상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북한군이 저지른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을 참고하라. 1952년에 발간된 대한민국통계연감에 따르면, 북한군은 한국과 북한 지역에서 12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

북한군이 군기가 엄정해서 점령지 주민들에게 신사적으로 대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유대인을 살려준 친위대나 정복지를 약탈안한 추축군처럼 개별적인 특수사례로 국한된다. 전쟁 전 기간으로 이를 넓혀 적용하면 말 그대로 코미디가 된다. 전쟁 초반부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전면패주 중에 조직적으로 자행한 학살은 국군이 개전 초에 패닉과 공황으로 저지른 학살보다 더하다. 즉 아무리 북한과 일부세력에서 한국군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려해도 이미 북한이 저지른 짓이 너무 커 1:1 커버조차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개전 초기 국군이 공포와 패닉에 질린 상태라 하더라도 잘못한 건 덮을 수가 없는 것을 포함해서이다.

미군은 어느 동네를 가건 초콜렛이나 과자, 스팸 등 먹을 것을 마구 뿌려댔기에 매너에 관계없이 인기가 좋았고 인민군은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직접 학살은 아니지만 결국 관련된 사람들을 죽게 만든 명백한 잔학행위로는 점령한 한국지역에서 군인을 충원하기 위해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징병해서 끌고 간 것도 있다. 물론 제1차 모집 때는 순수 지원자만 받았지만, 지원자가 원하는 숫자만큼 나오지 않아서 곧바로 강제동원으로 전환했다.

실제로 서울 함락 직후에 실시한 1차 의용군 참가 궐기대회의 지원자 수는 단 406명이었다. 북한군이 소백산맥을 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한 제2차 모집부터는 강제징집에 가택수색까지 합쳐진 것이라서 이미 말만 의용군이지 자기 의사로 북한군이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중에서는 인민재판에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대신 집안의 아들이나 집안의 친척, 사촌들 까지 의용군으로 참가하겠다고 하여 반강제로 가게된 사례들이 많았다. 북한의 낙동강 전선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속하게 붕괴된 것은 바로 이런 병사들이 전세가 안좋아지거나 후퇴를 시작하자마자 한국으로 줄줄이 탈영 또는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국군에 편입되거나 반공 포로가 되어 그대로 남한에 남게 된다.

미군의 화력에 의한 북한군의 병력 소모가 엄청나다 보니 이를 보충하기 위한 한국에서의 의용군 징병은 엄청난 수에 달했고, 그러다 보니 낙동강 전투시에 북한군의 1/3이 남한 출신 의용군일 정도로 많았다. 북한군이 허겁지겁 패주하고 병력을 상실하면서 점령지에서 많은 숫자의 젊은이들을 징집해갔으며, 1.4 후퇴 당시 서울이 재함락되었을 때가 가장 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으니 필사적으로 북한군과 싸워 물리친 후에 전장을 청소하다가 북한군 옷을 입고 신음하는 동생을 발견하는 일이 낙동강부터 백마고지까지 다반사였다는 것. 이렇게 된 것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월남민도 대거 나오면서 인력이 부족해진 북한이 한국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서라도 수를 채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2010년에 출간된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 저, 돌베개)은 농촌 공동체 내에 잠재해 있던 갈등이 전쟁 상황에서 폭력적이고 무제한적으로 표출되었을 때 어떤 참극이 일어나는지를 다루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례는 모두 촌락 내 혹은 촌락간 상호 학살이다. 저자는 진도군 현풍 곽씨 동족마을, 영암군 영보리,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당진시 합덕면, 금산군 부리면 해평 길씨 동족마을을 선정하여 일가친척, 혹은 이웃들이 서로를 죽고 죽인 비극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를 살피고 있다.

2011년 출간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박경철 저, 리더스북)에는 남자들이 떠나고 여자들만 남은 마을에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윤간하여 그 결과로 태어난 한 아이의 기구한 운명에 관한 실화가 등장한다.

1.6.2. 한국 정부의 산하 단체에 의한 학살

20세기까지 한국사회에선 그저 아무말도 않고 가슴 속에 묻어야 했던 참혹한 사건들이, 노무현 정권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설치되고 위원회에서 6.25 전쟁 당시의 자행된 학살기록을 발굴하게 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외신에서도 보도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으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2010년 12월 31일 폐쇄됨에 따라 더 이상의 자료조사가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아래는 한국정부의 산하 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판명된 사건들이다.

1.7. 경제적 영향

이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의 경제는 박살났다고 보면 된다. 안 그래도 1940년대 전반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조선총독부가 물자 공출와 인력공출을 강제하면서 물자가 빼돌려지면서 경제가 안 좋았었고 또한 8.15 광복 이후로도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무능한 통치로 인해 물가가 폭등, 경제적인 혼란이 가중되어 고물가가 1948년까지 지속되었고 1949년이 되어서야 겨우 수습과정에 들어서면서 경제재건 과정에 들어왔는데 전쟁으로 인해 산업시설이 대규모로 파괴되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실제로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한국은행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1975년 기준 GDP 통계에 따르면 고작 67$에 불과했고, 이는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370$도 되지 않는다.[90]

그래서 전쟁 이후로도 국가경제는 이승만 정부가 했지만 국가 경제는 미국의 원조금과 현물 지원을 받아, 그리고 국제지원 물자와 미군부대 불하 물품을 민간에서 유통하며 굴러가는 식이었다. 원조식량이 풀리면서 농업이 피해를 입었다는 말도 이전 버전에 적혀 있었지만, 당시 농업생산력으로는 전국민이 기아를 면치 못했다. 농촌에서조차 수입 밀가루가 있어도 굶는 판이었다.[91]

GDP 감소 수치 자체는 무시할 만했다. 1950년 한 해 동안에만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이후 다시 늘어난다.

6.25는 국가경쟁력과 발전역량을 밑바닥을 떨어뜨릴 만큼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인적 피해만 300만 이상에 물적으로는 전력 74%, 남한 공업의 60%, 건물 660,100동, 전선 60,766km, 교량 9,312km가 파괴되었다. 해방 후 시점, 당장 식량생산을 위한 비료부터 북한으로부터 들여와야 했을 정도로 빈약한 공업기반을 가진 남한 지역의 경우, 그나마 남아있는 물적 인프라를 날려먹고 사실상 맨땅에 헤딩으로 다시 시작한 셈.[92]#

하지만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일본 우익들이 내세우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하는[93] 직접적이고도 효과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를 참고.

1.7.1. 북한 공업기반 파괴

남한과 다르게 북한은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해 엄청난 폭격에 시달렸다. 미군이 주축인 UN군의 막강한 공군 전력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북한군이 보일 만한 곳이라면 무조건 공격 대상으로 삼아서 폭격을 박아댔다. 2층 건물 이상이면 닥치고 폭격을 뿌려대니 남아날 재간이 없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북한은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할 정도. 바다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 해군력이 빈약한 북한으로서는 미군의 함정이 대놓고 돌아다니는데도 막을 도리가 없었고 역시나 폭격이 날아왔다. 다만 B-29네이팜탄을 몇백 톤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북한군에게 직접적으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 왜관-다부동 전투 융단폭격 같은 사례도 있다.

사실 한반도에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일제강점기의 여러 곳에 공장들이 남북에 1940년도 기준으로 4:6비율로 거의 온전히 남아있었다. 그런데, 제공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한 북한에겐 평양 폭격이나 원산 포위전 등이 굉장히 치명적이었고, 원산의 경우 공군뿐 아니라 해군도 같이 폭격을 실시하는 바람에 원산은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그 순간까지 말 그대로 불지옥이었다. 이 당시에 미국의 폭격기사령부는 폭격기 수를 2차 대전 이후로 크게 줄이지 않는 등 막강한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기간은 길었고 땅은 좁았으며 이런저런 난항을 겪었던 2차 대전 때와는 달리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때에는 폭격 교리와 장비도 완성 이후 테스트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보다 훨씬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일본에서의 공습피해를 생각해 보면, 전쟁기간 중 상대적으로 북한에 훨씬 심한 폭격을 가했을 것이다.

전쟁 후 평양시엔 멀쩡한 건물이 2채밖에 없었고[94] 원산에는 함포사격까지 겹쳐서 남은 건물이 없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해당 문서의 사진을 보면 달 표면마냥 크레이터밖에 없다. 자료에 따르면 미 공군은 전쟁이 시작된 그 주에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부산으로 몰렸을 때에 이미 전략폭격 목표를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공군은 계속 하늘을 날았으며, 전선고착 이후에는 철도와 저수지에 대한 폭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료들의 근거들은 미군의 작전 보고서와 그 사진들이다.

이러한 폭격 때문에 북한 정부는 굴을 파고 지하에 공장, 시장 등등 모든 생활 기반들을 마련하여 버텼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월맹군과 비슷하게 산 듯. 이는 KBS에서 방영한 10부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중 7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평양과 원산 등에 있는 대규모 공업단지들이 한국와는 다르게 모두 파괴됨은 물론 평양과 원산은 아예 허허벌판이 되었다. [95] 그리하여 전쟁 직후 소련과 공산권 위성국가들은 한국에 필적할만큼 북한에 대규모의 지원을 펼쳤고 대한민국이 1960년도까지 연평균 5% 성장에 머물 때 1960년도까지 연평균 20% 성장을 해서 대체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특히 70년대 초까지는 북한 경제의 황금기로 한국에 비해 상당히 잘 살았다. 70년대에 비데를 호텔에 설치하고 컬러TV를 보급했다. 월남인사의 회고록에는 평양에서 동유럽산 캐비아와 와인을 맛볼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경공업 투자를 등한시하고 비날론을 고집한 경제에서 그런 호황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형제국가를 우대하는 내부 무역과 원조, 차관에 의지한 것이기에 공산권이 무너지고 북한이 신용불량국가가 된 뒤에는 죄다 끊겼다. 게다가 고난의 행군의 단초가 되는 병크 중 상병크인 주체농법을 1970년 초부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북한/경제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1.7.2. 지역간 불균형의 단초

또한 6.25 전쟁은 오늘날 서울 공화국으로 일컫어지는 지역간 불균형의 단초가 되었다. 우선 분단으로 인해 평양이나 함흥 평안권이나 함경권 등 북부지방의 지역권들과 단절된 상태에서 6.25 전쟁 이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덜했던 동남권과 전후 복구가 빨랐던 수도권 위주로 경제가 돌아가게 되고, 경제 개발 시기에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한 성장 거점 개발 방식이 채택되면서 경부축에서 벗어난 지역인 호남과 강원권은 경제 개발에서 소외되었다.[96] 이들 지역에서 유출된 인구가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 공동화가 가중되기에 이르렀다.

군사적 측면에서의 서울 공화국 현상은 비단 수도권&동남권 위주의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만이 아니라, 현재의 휴전선에서 서울이 너무나도 가까워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서울을 방어하는 데 고밀도의 군사 배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2. 긍정적 결과

사실 이것도 전쟁이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다기 보다는, 전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북한에서는 6.25 전쟁과 그 전쟁 이전의 안 좋은 점을 모두 이용한 최악의 사회상이 펼쳐졌다. 가령 신분이 낮은 사람만을 출세시켜서 이들에게 숙청을 맡겨서 독재 기반을 공고히한다든가, 6.25를 빌미로 사회가 더욱 군국주의적으로 변하고, 과거에는 생각도 못했던 지역별 이동을 막아 남한 출신 좌익이 지역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적화통일의 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강요받으며 지역별 폐쇄성이 강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특히 평안도 같은 지역은 새로 개척된 곳이라 신분 차별이 적었다고 하는데, 북한 정권은 전쟁 전 분단 직후에도 빈부격차 같은 어떻게든 이간질할 거리를 찾아내서 권력 강화에 몰두하며 그 지역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좌익과 우익의 분포가 과거에는 경상도가 좌파가 많고, 평안도가 우파가 많다는 것이 북한과 남한으로 갈라지고 정치 성향에 따라 월남과 월북이 이어지며 정치 극단화가 심화되었다. 상업이 조선에서 가장 발달한 부류의 도시에 속하던 평양은 북한에 의해 분단 전에는 '비문화적이고 기형적인 상업도시'였던 곳으로 폄하되었다.

신분 차별의 경우에도 문벌의 경우 1800년대 초반 홍경래의 난이나 그후 갑오개혁 등을 통해 타파하려는 노력이 강했고, 그 결과 왕실과 연줄이 있기는 했어도 변방 함경도 출신 보부상 이용익이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인 탁지부에서 가장 높은 대신 등을 맡기도 했다. 아예 과거제 폐지 같은 강경한 조치도 이미 존재했다. '양반' 같은 명칭이 단순한 대명사가 된 것도 6.25 전쟁 이전이다. 일제강점기에도 형평운동처럼 백정 등을 중심으로 신분차별 타파의 노력이 이어졌다. 심지어 카스트의 인도에서도 IT분야나 정치 분야 등을 중심으로 계급해체 노력이 있듯, 거상 임상옥의 노력처럼, 영국처럼 과거의 신분 제도는 있기는 하나 아예 비틀즈 같이 노동계급이라도 귀족보다 잘 나갈 정도로 돈이 중요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경우 고위 신분이 오래도록 견제를 심하게 받아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발언이 가능하고, 국왕에게 계란을 던져도 벌금만 낸다. # 머슴의 경우 아예 60년대가 되면서 산업화로 도시에서 노동자로 변모하며 사라진 것이다.

지역별 문화도 분단 이전엔 많이 섞여가 북한 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황해도 이남의 본관을 갖고 있었고, 유한양행의 유일한처럼 조상은 경상도 출신인데 경제적 기회를 찾으며 조상이 건너간 평안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일을 하던 사례도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은 함경도 출신 아버지, 충청도 출신 어머니 밑에서 강원도에서 태어나서는 '경성'이 된 서울과 평양에서 일했다. 심지어 600년전에도 이미 함경도 태생의 태조 이성계는 황해도에서 태어난 신덕왕후를 왕비로 삼고, 신덕왕후 자체도 모계는 고구려계 성씨인 경상도 진주가 본관인 진주 강씨 집안이었다. 이제는 1930년대의 현대그룹의 정주영 마냥 함경도, 금강산, 서울 등지를 넘나들며 일을 하는 것이나, 백석처럼 평안도 사람이 경상도 통영을 사랑하는 시를 짓거나,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라는 시처럼 함경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에게 사투리를 가르쳐준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심지어 남한에서는 '~니?'라고 묻는 식의 함경도쪽 문화를 접한 사람은 영화의 영향으로 조선족 문화냐며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2.1. 현대식 전면전 경험

6.25 전쟁은 한국군, UN군의 방어 승리로 마무리되어 대한민국이 세워진 이후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전면전 경험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97] 주변국 중 중국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라는 실전경험이 있고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실전경험이 있는데 반해 한국은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우익세력의 광복군이나 좌익세력의 의용군으로서 활동했을 뿐[98] 별다른 전면전 경험이 없었다.

물론 한중일의 이러한 현대전 경험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현대전을 경험은 해봤다는 역사적 의의만 있을 뿐 반백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21세기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소리다. 애초에 1940-1960년대 실전 경험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군인의 전력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99]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국공내전, 베트남 전쟁 등을 경험한 한중일, 북한, 대만의 군인들이 모두 나이가 들어 퇴역하거나 사망한 시점에서 진정한 의미로 현대 전면전 경험을 가진 동아시아 국가는 없다고 봐야 한다. 현대 북한도 도발 경험만 많을 뿐 전면전 경험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나마 대한민국과 북한이 연평해전연평도 포격전으로 21세기에 실제로 피가 튀기는 실전 경험을 가진 동아시아 국가가 된다. 21세기 중국, 일본, 대만은 이러한 국지전 수준의 실전 경험조차 없다.[100]

그럼에도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전의 경험을 통해 한국군은 적지 않은 전훈과 전술 교리 체계를 얻을 수 있었고, 또한 국내에서 실전 경험을 보유한 지휘관들이 한국군 창립 멤버로 자리잡아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손원일 제독이 대표적으로, 손 제독과 한국전쟁 덕에 해군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급성장을 이루어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북한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특히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군이 얻은 군사경험은 '수비전'으로서 많이 축적되었기에, 오늘날엔 북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강대국 중국조차도 미군을 고려치 않고 한국군만 상대한다 하더라도 한국이 산악지대에 전개시킨 포병대, 기갑부대를 뚫으며 진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막대한 출혈을 고려해야만 할 정도로 한국군의 실전능력의 상승을 가져왔다.수당전쟁의 재림

2.2. 신무기 개발에 미친 영향

치프틴 전차 개발일지를 보면 한국전쟁에서 전차에 비관통임에도 생각보다 큰 데미지를 입힌 중형곡사포에 대한 대비책이 대두돼 영국은 2세대 MBT에서 장갑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독일과 프랑스는 공산권의 위협을 눈으로 확인함으로 인해 협력하여 레오파르트 1AMX-30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또한 넓은 부각으로 인한 좋은 사격각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전쟁 중 만족스러워하여 서방측은 부각에선 너나 할 것 없이 소련, 나아가 러시아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설계를 고수하고 있는 중이다.[101] 대한민국 또한 부각이 부족해지면 유압 현가장치를 이용해 확보하는 것을 K-1 전차부터 적용하여 구릉이 많은 지형에 적합한 전차 설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장진호 전투 등 혹한에서 전투를 벌인 경험 등이 쌓여 한국의 무기는 다양한 기후와 지형에서 높은 신뢰성을 보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개발되었으며, 아직도 북한과 대치 중이고 잊을만하면 전쟁 위기가 발생하는 안보특성상 방산업체들이 대량 생산을 전제로 하게 되어 규모의 경제가 한국 방산기업들의 패시브로 자리잡는 이유가 되었다. 이 점은 K-9 자주곡사포를 필두로 한 한국 무기의 해외수출 흥행의 가장 큰 강점이 되어, 마침내 유럽에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서방국가들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까지 국가 간 전면전을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무기 생산을 한국만큼 대량으로 해본 경험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 앞으로도 한국 방위산업체들의 해외수출에 큰 강점이 될 것이다.

2차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에 끼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세계사에서의 한국전쟁의 인식과 달리 항공 분야에서는 이 전쟁이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다. 2차대전 말기에서야 개발된 제트기가 전면전을 치룬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항공우주 박물관을 가면 한국전쟁을 안 다루는 곳이 없다. 미국의 F-86, 소련의 MiG-15가 맞붙으면서 모두 양측의 제트기 스펙이 엇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만 현대 항공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사일 기술의 부재로 제트기의 도그파이트가 주로 벌어졌고, 미사일 기술의 발전은 훗날 벌어진 금문도 사건에서 이루어진다.

2.3. 대외관계 변화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지원병을 파병보내 한국의 여러 우방국들이 생겨났다. 튀르키예타흐신 야즈즈 소장이 이끄는 1개 사단 + 1개 여단의 부대를 파병하여 미국과 영국 이외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으며 전사자도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았다.[102]

프랑스의 경우는 몽클라르 장군이 자신의 계급을 중령으로 강등시켜가면서 기어이 참전했으며 그 휘하 부하들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총검돌격을 불사하면서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티오피아의 경우 셀라시에 황제가 자신의 친위대를 보내면서까지 대한민국을 지원했다. 하지만 후에...

그 외에도 뉴질랜드마오리족이나 여러 나라 또는 부족 사람들이 남한을 돕겠다고 서로 발벗고 나섰다. 전쟁범죄로 인하여 군대를 사용할 수 없는 서독이나 이탈리아, 일본은 기뢰제거 중 자위대원이 순직하거나 의료 또는 물자를 지원해서라도 대한민국을 도와줬다. 스페인의 독재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은 2차대전 이후 파시즘 성향으로 세계 정가의 개천민으로 추락한 스페인의 위상을 반공을 빌미로 올리기 위해 파병을 제안했지만 거부되었다. 또 대만장제스 총통도 대규모 파병을 제의했지만 확전이 우려되어서 거절당했다. 특히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이 전쟁 이후, 단순한 혈맹국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이런 양국간의 믿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문서화되어 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36,000명[103]이 넘는 전사자와 병기, 물자 손실을 내고 상당히 많은 전비를 써야 했지만 8.18 도끼만행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사건, 1993년 1차 북핵 위기 같은 남북간 전쟁 위협이 고조될 때마다 한국과 협력을 강화, 안전보장을 약속하고 실제 군사적 행동으로도 보여주면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아울러, 태평양 전쟁 당시 육군지원용의 호위항공모함이나 가졌던 최약체 제7함대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함대가 된 계기로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이는 남침 목적 실패에 따른 북한 입지 축소, 중소 갈등과 더불어 남침 가능성을 현저하게 줄이고 경제적 대결 패러다임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그 결과 체제 대결에서 북한은 남한에게 참패, 사회주의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다.

2.4. 영토 변화

전쟁 전후의 남한이 실효지배하는 영토 크기를 비교해보면 기존 38선이 그어졌던 때보다 약 3,900km2[104] 증가하였다.[105] 또한, 휴전선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에 철책의 범위도 줄어들고 주요 고지를 확보하여 38선 바로 북쪽에 고지가 있던 때보다 도발의 위험도 줄어들었다.

물론, 개성시, 연백 평야, 옹진 반도를 상실하면서 서해에서 북한의 입김이 강해졌고, 개성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광역시에 해당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도시 규모에서만 보면 이 전쟁으로 인하여 남한 측이 손해를 봤다.[106] 개성은 그냥 도시가 아니라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기 때문에 조선왕조 500년을 거치면서도 큰 규모를 유지해왔었고, 당시 대전광역시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107] 이로 인해 이승만은 상징성 높은 도시인 개성을 잃은 것을 상당히 분통해하여 개성의 반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내비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반면 북방 5도를 지켜내어 최소한의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고, 서부 전선에서도 개성을 잃기는 했으나 연천군포천군을 확보함으로써 남북 경계가 북쪽으로 올라갔을 뿐 아니라 임진강한탄강을 온전히 자연 방어선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서울 및 수도권 방어가 용이해졌으며, 동부 전선에서는 고성군, 인제군, 양구군, 양양군, 화천군, 철원군북한강 상류 지역을 비롯한 강원도 북부를 수복하여[108] 수도권의 홍수와 가뭄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고 이 땅은 전술적 가치도 높은 땅이여서 전쟁 당시도 이 곳의 고지에서 가장 격렬한 공방이 있었고 지금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지역을 지켜내고 있다.

2.5. 사회 변화

20세기까지 식민지배를 겪은 국가들이 독립 후 겪은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구체제의 견제, 그중에서도 전근대적 지주들의 텃세가 있었다. 역사의 고금을 막론하고 새로 출범한 정권은 민심을 얻기 위해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시도하려 하지만, 지주들이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사회 개혁에 제동을 걸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개발이 정체되어 그에 따른 사회 혼란이 가속화되다가 소수의 권세가들만 국가의 모든 부를 움켜쥐어 양극화가 극대화되는 끝에 내전까지 발발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최빈국 대부분이 이런 양상을 거쳐 혼란한 상황에 빠져있는 실정이다.

반면에 한국은 6.25 전쟁과 그로 인한 피난, 양대 진영간의 학살과 반목을 겪으며 오랜 기간동안 뿌리내렸던 시골 공동체와 계급관계, 지주-소작인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특히나 양반-상민-천민의 계급의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내재되어 왔다가[109] 6.25 전쟁을 통해 해체되었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신분적 주종관계와 경제적 종속관계는 300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으로 분해되었다. 비록 사농공상이 변질되어서 특정 직업을 숭상하는 풍조는 아직도 남아있긴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처럼 지주들이 경제 개발에 대한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일은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인 지배 구조의 해체는 기존의 일제 치하에서 성장해온 지주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면서 과거의 지주 세력이 한국 정치, 재계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국가체계가 완전히 리셋되었기에 휴전 이후 재건한 사회체계와 정부조직의 힘으로 초토화된 서울경기권을 계획 도시로 빨리 재건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또한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 만든 사회 및 경제기반도 모두 파괴되어 한국은 비록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사람들 인식에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특히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다른 국가들은 이전 식민제국이 만든 기형적인 경제기반에만 의존하는 바람에 자체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함정에 빠진 것에 비해, 전쟁으로 모든 국가기반이 박살난 한국은 오히려 일제가 남긴 기형적인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정상적이면서도 급속도의 경제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와 6.25를 통해 두번이나 국토 전체가 초토화된 트라우마와 아픈 기억으로 인해 전후 대한민국의 방향을 결정한 엘리트 집단, 심지어 엘리트 집단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위치인 노동 단체, 학생 단체 및 사회적 약자 조직들조차도, "실패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모두 죽는다. 다시는 이 나라가 망하게 해선 안된다."라는 강력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됐다. 그로 인해 한국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극단의 효율성을 취하게 되었으며[110], 체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일단 갈등은 덮고 좌우·상하 없이 대동단결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단결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민족이 되었다. 그것이 대한민국을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70년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군사강국으로 거듭나게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나라는 가난했지만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와 경제적 종속 관계가 없어졌으므로 누구든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해서 출세하고 가족을 먹여살리면 된다는 정서가 한국 사회에 널리 깔렸고, 이것이 높은 교육열과 맞물려 전쟁 이후 고도 성장을 이끈 것이다.

한국과 대만은 상대적으로 균등한 소득과 부의 분배로 인해 유리한 초기 조건을 형성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이 가능하였다는 점[111]을 고려해보면, 이 전쟁이 비록 하향평준화를 불러왔지만, 실력주의 사회(meritocratic society)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난민들로 인하여 한반도 전체에 인구 대이동이 발생한 결과,각 지역의 문화가 섞이고 전후 사회 환경에 맞춘 새로운 문화가 태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식문화가 6.25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타 지역에 정착하여 만들어낸 여러 냉면변형이 좋은 예다. 메밀을 구할 수 없는 부산에서 태어난 밀면을 비롯하여 해주냉면이 변화한 경기도 양평군의 옥천냉면, 서울식 냉면이 저렴한 식재료를 사용하여 변화한 칡냉면 등이 그러한 예다. 그 이외에도 북한~중부지방의 요리였던 만두의 전국적인 확산, 주한미군을 통하여 나온 가공육류가 기존 한국요리와 결합한 부대찌개, 강원도 속초 지역으로 피난온 피난민들이 만들어낸 오징어순대 등도 6.25 전쟁이 낳은 문화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다.

3. 해외에 끼친 영향

3.1. 일본의 경우

"조선전쟁은 구제의 신이다!"
도요타 에이지 전 토요타 회장의 회고록에서
"운 좋게 6.25 전쟁이 일어나 일본 경제 재건이 빨라졌다."
아소 다로 전 총리, 재무대신.
6.25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국제적으로는 태평양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전후복구에 전념하던 일본은 6.25 전쟁을 계기로 미국에게 대량의 보급물자 생산 및 수송을 발주받은 덕에 불황을 조기에 벗어나 경제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소독약만 팔아서 떼부자된 사람들도 존재했을 정도다.[112]

또 일본에서 차출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막기 위해 1954년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警察豫備隊)가 신설되었다. 처음부터 군대가 아니였고 이를 계승한 자위대는 지금도 형식상 군대가 아니다. 아예 6.25 전쟁 중에 미군은 구 일본군의 해군 조직 일부를 미군의 지휘 아래 참전시켰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고, 당시 미국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예 순한 양으로 개조하려던 계획을 완전히 리셋하고 공산권에 대응하는 태평양 방파제로서 키우게 만든 전환점이 바로 이 전쟁이다.

물론 일본이라는 국가는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메이지 유신 이래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완성된 근대 국가였기에 한국전쟁이 없었다 해도 이미 자체적으로 전함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공업과 경제 수준은 아시아에서 독보적이었다.[113] 패망한 일본이 6.25 전쟁 특수 하나로 경제대국이 되었고, 심지어 6.25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은 없었다는 해석은 지나친 비약이다. 6.25 전쟁이 아니었어도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세계 역사의 전면에 금방 모습을 드러낼 역량을 가지고 있는 국가였다.[114] 애초부터 동아시아의 공산화방지 명목으로 경제, 기술 지원으로 최단기간동안 빠르게 복구시킬 의도도 있었지만 재건 자체는 시간문제였기에 경제대국으로 복귀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6.25 전쟁이 그 정도를 최소 10년 이상 크게 앞당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사실 종전 후 일본이 다시금 잠정적 적대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의 공업력을 상당히 제한시켰고 상업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계약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군정령으로 발표된 '집단기업군 해체'였다. 경제민주화 문서 내 이론 사례 참고.

오죽하면 1990년대 말,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불황이 크게 생기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이 다시 일어난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한겨레21 기자가 일본에서 들러 취재하다가 들른 술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일본 회사원들까지 보았다고 할 정도. 하지만 일본 경제학자들은 지금은 그때와 다르기에 한반도에 전쟁이 나봐야 극히 일부만 이득을 보고 일본 전체적인 호황은 어렵고 되려 대포동 쇼크 이래로 이젠 탄도 미사일 같은 걸 갖춘 북한이 전쟁 확대 및 마지막 도발로서 일본에 쏴대면 일본이 전쟁에 휘말려 크나큰 피해를 당할 가능성도 높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북한도 바보가 아니고 이들도 6.25전쟁 당시 일본이 한국과 미국의 막강한 병참기지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이 북한을 적대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북한 성격상 핵이나 생화학무기를 탑재한 미사일을 일본 열도에 쏴제껴서 대규모로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와 지소미아 협정을 맺은 중요한 이유다.

현재,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도 6.25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조선특수(朝鮮特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특수(朝鮮特需)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에서 전쟁 관련 물자를 구입하였는데, 이런 미군의 특수로 일본의 경제가 호황을 맞게 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일본경제기획청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일본이 조선특수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약 40억 달러로 당시 일본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일본의 전쟁특수는 중공군 참전 덕을 톡톡히 보았는데, 중공의 참전이 없었다면 1950년에 1년도 안 끌고 끝났을 전쟁이 1953년까지 끌게 됐다. 중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욕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욕망으로, 자기들 손으로 일본을 되살려놓은 셈이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마오쩌둥은 일본에게 "일본이 중화민국과 싸워서 힘을 빼준 덕분에 우리 공산당이 대륙을 먹을 수 있었다. 고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115] 뭐야 그럼, 은혜갚기인가?[116]

요약하자면, 패전으로 다 망한 일본이 6.25 전쟁 때문에 경제대국이 되었고, 심지어 6.25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경제대국 일본은 없다는 일부의 과격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6.25 전쟁이 아니었어도 일본은 원래도 패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세계 역사의 전면에 금방 다시 모습을 드러낼 역량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다만, 6.25 전쟁이 크게 경제발전을 촉발시킨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2020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의하면 당시 일본은 6.25 전쟁 휴전으로 인한 경제적 특수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미국에 경제적 배려를 요구했고 이에 미국은 수용하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3.2. 스페인의 경우

일본과 대만만큼은 아니지만 지구 반대편 이베리아반도의 국가인 스페인국도 이득을 봤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지배하는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안토니우 살라자르 총리가 지배하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단 2개뿐인 파시즘 국가였다.

그나마 포르투갈은 미국의 마셜 플랜의 지원도 받고, 국제연합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한 상태였으나 스페인은 스페인 내전 당시 보인 야만적인 전쟁범죄와 전후 대규모 숙청과 탄압으로 인해[117]국제사회에서의 위상 및 이미지가 불가촉천민 수준으로 떨어져 연합국에게 경제제재를 당하고 세계 각 국에서 수교 거부를 선언하는 등 완전히 왕따를 당하는 신세였다.[118]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배하고, 1년 뒤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강력한 반공주의 기조를 내세우는 스페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스페인은 국제 외교가에서 복권되어 1955년 국제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

3.3. 중국의 경우

한편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한 뒤 1년 내에 중국 국민당 치하의 타이완 섬을 점령하여 중국의 완전한 통일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래서 1950년 5월 국부군 양대 거점지 중 하나인 하이난 섬을 정복하고 최후로 10월에 대만 침공과 중국 완전 통일을 계획했지만, 공격 개시 넉 달을 남겨두고 김일성이 한국으로 쳐 들어가는 바람에 미국이 달려와서 대만 해협에 항공모함을 박아버렸다. 정확히는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려고 제7함대를 배치시켰는데 대만까지 작전 가능 범위가 닿은 것이다. 게다가 대만 침공에 사용하려던 병력과 장비도 북한군이 잘 나가던 초반부가 지나면서 전황이 영 안 좋게 돌아가자 북한을 돕기 위해 전용되었고 이들은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차츰 소모되었다. 그나마 미군과 UN군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제법 활약하면서 중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올라가기는 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장제스 정권에 학을 뗀 친중파 미국관료들이 중공을 승인해서 중국을 유고슬라비아처럼 만들려던 계획이 틀어졌다는 카더라도 있다. 즉 1950년도에 될 상임이사국 지위를 1970년 넘어서야 획득하고 미, 소 사이에서 3세계의 대장으로 결정권자의 역할을 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포기할 게 많았으니, 만약 중공이 북한을 방치하고 6.25 전쟁에 참전치 않았더라면 이미 대만까지 점거하여 벌써 완전한 중국통일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더 빨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어 현재보다 더 빨리 강대국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25 전쟁이 없어도 당시 조건으로는 중공이 대만까지 쳐들어가기 어려웠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중공군은 이미 전에 진먼현 상륙작전에서 패배했던 바가 있다. 이후 전력을 가다듬고 다시 준비하긴 했는데... 해군력 부족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상대인 국민당군 역시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119] 진먼 전투 때에도 일단 목제 범선 같은 거라도 타고 바다를 건너서 상륙하는 것 자체까지는 가능했다. 만약 해군력을 제대로 갖춘 미국이 개입한다면 중공군은 상륙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냥 해상에서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인 학살극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였다는 건 대만 문제에 개입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6.25 전쟁이 없이 계획대로 대만을 공격한다고 가정했을 때 최악의 경우, 중공군 정예부대가 미 해군에 의해 해상에서 섬멸당하고, 그 빈틈을 타서 국민당군이 대륙수복을 시도할 수도 있게 된다. 한반도 전쟁 덕분에 중국은 미국이 동북아 정세에 개입할 의사가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승산이 전혀 없는 해상이 아니라 그나마 싸워볼만한 육상에서 미국과 겨루게 되었으며, 무리한 대만 공격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주장이다.[120]

6.25 전쟁 당시 UN군에 대해 겉으로 보기엔 대등 혹은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오른 면이 있었으며, 이는 후에 중국이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대만에서 빼앗아 오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침략자 북한 편을 들었던 것 때문에 침략자로 규정되어 몇십년 간 서방을 위시한 국제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은 면도 있다.

또한 국공내전 당시 생포한 국민당 포로 출신들을 전장에 투입하여 정리했고 UN군에게 잡힌 중국군 포로들 중 국민당군 출신들은 거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의 1당 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원래 북한을 밀어주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간도의 지배권을 북한에게 넘겨주려다 북한이 전쟁에서 지자 중국에 줘버렸다는 설도 있다. 또한 국민당 포로들은 다시 이득을 보려고했던 장제스에 의해 중화민국군으로 다시 참전한다. 후에 이것 때문에 한국이 대만에게 단교 후에도 꼼짝 못하는 이유가 된다.

대만이나 중국 양안 모두 어쨌든 6.25 전쟁에 병력을 파병했다. 중국은 인민해방군 120만명을, 대만 역시 대만국적의 화교들 중심으로 200명을 파병했다. 인민해방군은 10만명이 전사하고 대만군 역시 40명이 전사했다.

3.4.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역시 6.25 전쟁의 숨은 수혜국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소련은 크렘린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려는 유고슬라비아를 손보기 위해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유고슬라비아와 인접한 동유럽 위성국들을 앞세워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할 계획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으로 이러한 계획이 무산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정권은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1] 이건 농담이 아니고, 간단하게 기본적인 통계에서 현재까지 통계로 집계된 모든 세계각국의 군병력과 남북한의 군병력 및 민간인 사상자를 합치면 정말로 600만에 근접한 통계가 나오며, 통계의 불확실성을 생각해보면 높으면 높았지 낮을 순 없다.[2] 그 중 영조철종은 화재에서 얼굴이 멀쩡한 어진을 구해냈으며, 태조 이성계는 다른 곳에 어진이 남아 있었고 일제시대에 어진을 찍은 사진도 존재했고, 세조는 원본 어진은 소실되었지만 어진을 모사한 김은호가 남긴 초본이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 고종순종은 어진 외에도 사진 자료가 풍부하니 논외.[3] 물론 왕릉을 발굴해 유골을 조사하여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하면 대부분의 임금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있겠으나[121] 이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4] 숙종 이전 어진들은 태조 3축, 세조, 원종 각각 2축(모두 김은호의 모사본 1축 포함)들밖에 없었다.[5] 사실 어진 소실에는 임진왜란이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슷한 사례로 신라와 고려의 문화재는 여몽전쟁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소실되었다. 특히 역사서가 소실된 것은 뼈아픈 일이다.[6] 이 당시 미국에서는 '불우한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뜨개질한 옷을 보냅시다'류의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a] 1950년 당시 행정구역을 바탕으로 작성[8] 한국전쟁 당시 시가전으로 여장과 기와지붕이 무너지거나 파괴되었으며 기단과 주초석에 총알이 박히기도 하였다.[9] 광해군임진왜란보신각을 재건한 이후로 조선 후기까지 계속해서 이 자리를 유지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다.[10] 한국전쟁 당시 고지전으로 인해서 북한산 비봉 정상에 위치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에도 많은 양의 총알이 박히게 되었다.[11]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워진 이후 그 자리를 유지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많은 건물이 헐렸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본전마저 폭격으로 사라지게 되었다.[12] 한국전쟁 당시 시가전으로 인해서 덕수궁 내의 기단에 총알이 박히거나 일부 건물이 훼손되었다. 특히 중화전은 포격으로 지붕이 무너졌다.[13]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덕수궁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군은 석조전 내의 여러 대한제국 황실 가구들을 외부로 유출해 이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석조전을 복원할 때 대한제국 시절 가구들을 새로 제작해야 했다.[14]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건 경복궁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중앙아시아 유물들을 전시하던 만춘전은 폭격으로 무너졌고, 경복궁 향원정 뒤에 위치하였던 취향교도 폭격으로 무너졌다.[15] 일제강점기에 건춘문 옆으로 옮겨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기단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무너졌으며 기단에 총알이 박혔다.[16] 한국전쟁 당시 경복궁 내에 보관되다가 폭격으로 완전히 박살나서 현재까지 복원 중이다.[17] 한국전쟁 당시 포격과 총탄으로 인해서 파괴되거나 무너져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18]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한국군의 폭격으로 외관만을 남긴 채 판파되었다.[19] 한국전쟁 이전까지 외국 공사관 건물들 중에서 가장 웅장했지만,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해 지하층과 전망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20] 해방 후 대한민국 청사로 사용되던 중앙청은 1950년 9월. 북한군의 방화로 내부가 그을리고 내부에 소장된 문서들이 모두 불타 소실되었다.[21] 한국전쟁 당시 종묘에 있던 신주, 위패조선왕실제사용품들이 도난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 곳에서 보관되던 조선왕실 책자죽간,조선왕조 어보, 어책 등의 유물들이 미군유엔군에 의해서 도난되었다.[22] 창경궁 내부에 보관되던 조선 왕실의 토지 자료 및 가계도, 대한제국 시절의 외교문서 일부가 도난되거나 휴지가 되어 찢어졌다.[23] 일제강점기와 대한제국 시절에 세워졌던 병원 본관과 여러 서류 및 자료가 폭격으로 모조리 사라졌다.[24] 당시 서울역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되어진 천장돔과 중앙홀의 유리가 모두 깨져서 복원 당시에 어려움을 겪었다.[25] 언더우드관을 비롯해 아펜젤러관, 스팀스관, 언더우스상에는 총알이 박히고 유리가 깨져 황폐화되는 피해를 입었다. 현재도 언더우드상에는 총알이 박혀서 파손된 부위가 많이 남아있다.[26] 출처: 조계종 총무원 조사(2000)[a] [28] 한국전쟁 당시 산성의 성벽을 일부 헐어다가 검단산에 군부대를 임시로 만드는데 사용하였으며, 신남성의 경우는 아예 지뢰를 매설하고 군부대를 배치하면서 2020년 기준, 현재까지 군기지로 사용되고 있다.[29] 정문인 장안문은 문루가 반파되고 옹성과 성벽에는 무수한 총알 자국이 생겼다. 휴전 후 그나마 남아있었던 반쪽 문루마저도 홍예와 함께 무너져 버렸는데, 1962년 홍예를 수리하고 1976년 화성 복원 사업 때 온전히 복원됐다. 창룡문은 더욱 심하게 파괴되었다. 팔달문화서문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현재는 장안문과 창룡문 모두 복원된 상태.[30] 한국전쟁 당시 정자각이 완파되며 소실되었다.[31] 물론 경주의 문화재들도 여몽전쟁, 임진왜란 때 많이 소실된 바 있다.[a] [33] 부안 실상사는 변산 4대 사찰 중 하나이자, 4대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었으며 최남선이 관광을 올 정도로 유명하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한국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 #[34] 한국에 얼마 남지 않은 2층 대웅전으로 구성된 대사찰이었지만,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북한군이 점령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중 하나인 '둔산 지구'를 소탕하기 위해 한국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35] 한국전쟁 당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구역이 전소되어 소실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대웅전, 관음전, 칠성각, 진묵전, 요사채, 명부전, 나한전, 삼성루, 천왕각, 동루, 서전, 일주문, 상운암 등이 있었으며 태조 어진을 잠시 모셨을 정도로 큰 대찰이었다.[36]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폭격에 의하여 완전히 소실되었다. 소실되기 이전에는 큰 법당 한 채, 작은 법당 한 채, 상량전, 산신당,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주변에 크고 작은 암자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37] 완주 송광전투 당시 송광 자위대가 송광사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찰 담이 무너지거나 송광사 건물에 총탄 자국이 남기도 하였다.[38] 본래 쌍봉사, 곡성 태안사와 더불어 손꼽힐만큼 큰 대찰이었지만, 북한군 유격대가 겨울에 이 곳에서 머물렀다가 갔다는 이유로 한국군이 방화하여 일주문과 천왕문만을 남긴 채 20동이 모두 소실되었다.[39] 장흥 보림사, 쌍봉사와 더불어 손꼽힐 정도로 큰 대찰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40] 1951년 1월 12일에 한국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의 일부로, 천왕문을 제외한 절 전체가 모두 소각되어 1957년 재건되었다.[41] 한국전쟁 이전에는 1938년에 매곡선사가 대웅전을 보수하고, 명부전과 요사를 새로 지어올리는 등 여러 보수를 거쳐오며 보존되었지만, 한국전쟁 때인 1951년에 전부 불타 없어져서,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모두 다시 복원한 것이다.[42]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불을 질러 소각되었다. 다만 대웅전에 모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은 스님들이 빼내어 보존되었다.[43]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한국군에 의해 오백전을 제외한 증심사의 전 구역이 소각되었다. 당시 증심사에서 보관되던 금동석가여래입상(당시 국보 제211호)과 금동보살입상(당시 국보 제212호)은 광주경찰서 금고로 옮겨 보관되고 있었으나 전쟁 중에 유실되어, 국보 지정도 해제됐다. 현재는 복원된 건물들을 제외하면 오백전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보살입상, 칠층석탑만이 남아있다.[44] 선운사의 말사로 지어져 임진왜란을 버텨냈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소각으로 칠성각, 첨성각, 보광전의 당우가 불타 소실되었다.
"강천사가 소실된 것은 1950년 12월 20일쯤이죠, 당시 11사단 20연대 1중대가 순창군 금과면과 순창군 팔덕면의 치안을 담당했는데, 이들이 강천사에 불을 질렀죠. 의용경찰이 있었는데도, 강천사에 불을 지른 것은 군인들이었어요. 당시 이 지역 역시 낮에는 한국군이 있었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있었습니다."
강천사의 아랫마을인 순창군 팔덕면 신기마을에 사는 김병관(80)의 증언이다. 순창과 담양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강천산은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회문산과 가깝다. 또 산악지대로 연결되어 있어 당시 강천사 인근의 빨치산은 주로 가마골을 근거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건물들이 불타 소실되었고 5층석탑이 원형을 잃었다.
[45] 구암사는 내장산과 백양사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 역시 회문산과도 그다지 멀지 않아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빨치산들은 세력이 약화되고 한국군과 경찰의 토벌이 강화되자 구암사를 근거로 저항했다. 하지만 한국군과 경찰은 강하게 몰아붙여 많은 빨치산을 토벌했고, 이 과정에서 구암사와 그 아랫마을은 모두 경찰에 의해 타 버렸다. 구암사가 소각된 뒤 많은 빨치산들이 죽어 한동안 구암사 근처에 시신들이 남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구암사 아랫마을에 사는 공필순 할머니(95)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중략) 경찰들이 토벌하러 와서 구암사에 불을 질러버렸어. 그리고 올라가서 많은 빨치산들을 죽였어. 내가 한참 뒤에 올라가 보니 빨치산들 해골이 여기 저기 보였어! 얼매나 무섭던지!" 라고 증언한 바 있다.[46] "1952년 봄 대대적으로 빨치산 토벌을 했는데, 이 때 마을이 비행기로 폭격 돼 마을이 다 탔어요. 인근에 있는 안심마을도 그랬고. 비행기로 폭격한 시간이 대략 점심 때 였는데, 휘발유통을 떨어뜨린 후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휘발유통에 불이 붙어 확산됐습니다. 만일사가 빨치산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알려진 뒤에 들어온 경찰들이 불을 지른 것이죠." (한국전쟁 당시 경찰들이 만일사를 방화하는 것을 직접 본 박만선의 증언) 빨치산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바로 회문산은 현재 휴양림으로 개발되어 있는데, 휴양림 안에는 당시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자리에 빨치산들의 활동공간을 모두 복원해 놓았다. 회문산 아래 쪽에 위치한 만일사는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모두 탔기 때문이다. 소각될 당시 만일사에는 법당, 칠성각, 요사채, 화장실 등이 있었다. 법당은 매우 오래된 건물이어서 남아 있었다면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 역시 엄청나게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불상은 철불이었는데 겉모양은 갸름했다. 이 밖에 쇠부처님 세 분이 있었고, 40여 개가 넘는 불상이 있었다. 만일사가 소각될 때 절에는 5~6명의 스님을 포함해 안노장 스님이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화재로 인해 입적, 마을 사람들이 스님을 화장시켰다고 전해진다.[47]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백양사 내 8개의 암자 중에서 가장 큰 암자이자 대표암자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사찰 소각작전으로 불타 사라졌다.[48]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사찰하면 대부분 들어갈 정도로 대표적인 피해 문화재.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에도 절의 중심부가 일부 불타기는 하였지만 어느정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폭격으로 송광사 내의 중심구역, 즉 대웅전 일대가 모두 박살나게 되었다.[49] 본래 백련암 등으로 불리며 조선 말기까지 중수를 거듭한 사찰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때 빨치산 토벌작전 당시의 폭격으로 모두 불타 사라졌다. 현재는 다시 복원하여 선수당, 요사, 일주문,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천왕문, 우화루 등이 있다.[50] 본래 100여 동에 이르는 건물이 있었던 대찰이었으나 여순사건으로 일부 건물이 방화되어 무너지고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불각 9동', '요 25동', '누문 31동', '도합 65동'에 이르는 건물들 중 70여 동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어 현재 20동밖에 남아있지 않다.[51]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사찰 외곽지역의 건물들이 파괴되어 사라졌다.[52] 전쟁 중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도갑사에 폭격이 가해저 명부전과 해탈문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을 남기고 사찰 내부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전소되거나 파괴되었다.[53]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사찰 전체가 불타거나 무너져 사라졌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모두 재건된 건물들이다.[54] 다른 절들처럼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소각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전투의 영향으로 절 내부에 총탄세례가 오갔으며 현재도 화승당 앞에 남아있는 범종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5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광양 폭격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 복원되었다.[56] 여순사건 당시에 이미 피해를 받은 상태로 한국전쟁이 직격타를 날려서 3개의 사찰 모두 완전히 소실되었다.[57] 전라북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빨치산에 의하여 소실된 절로, 현재는 새롭게 바뀌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a] [59] 서산대사가 이 절을 중건하고 1899년에는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의 능을 수축하고 이 절을 목조의 원당으로 삼을 정도로 컸으나, 한국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60] 1948년 선림원터에서 우연히 출토된 804년의 신라범종이다. 발굴 이후 옛 국보 416호로 지정된뒤 월정사 칠불보전 내부에 보관도중 1.4 후퇴 당시 청야전술로 칠불보전이 타버리면서 소실되어 조각 29개와 종을 거는 걸이인 현가쇠, 탁본자료를 남기고 소실되었다. 현재 조각과 현가쇠, 탁본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복원품과 소실전 사진과 함께 전시 중이다.[61] 일제강점기 서울역보다 크게 지어져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 도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62]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강원도 북쪽 지역을 대표하는 31본산 중의 하나로 신흥사백담사, 낙산사 등을 관할했으나... 1951년 5월 10일, 당시 금강산 줄기를 따라 후퇴하는 북한군의 중간 집결지였던 이유로 건봉사에 동해바다 쪽에서 미군 전폭기 3-4대가 집중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으로 건봉사의 가장 핵심인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사명대사 유물과, 옛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권46'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건봉사는 1951년 6월 이후에도 한국군의 최전방 주둔기지가 되면서 모든 목재 구조물이 겨울철 난방용으로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되어갔다. 더구나 사찰 주변이 치열한 접전지가 되어 절을 포함한 작전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는 미군의 B-29 중폭격기의 융단 폭격을 받아 모조리 불타고 불이문과 능파교만 남아있게 되었다.[63]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미군이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할 목적으로 주요 보급로에 대대적인 폭격과 함포사격을 가해 양양 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실되었다. 1000칸이 넘는 주요 전각, 정취보살상과 같이 수 백년 동안 사찰을 대표해온 문화재들도 이때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석탑과 담, 동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전소 및 소실되어 사라졌으며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대부분의 문화재가 사라졌다.[64] 한국전쟁 당시 폭격과 한국군의 방화를 거치며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다.[6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건물들이 소실되었으나 8각 9층 석탑만 무사히 남아있다.[66] 한국전쟁 당시 모든 전각들과 석탑은 사라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유물은 '양구 심곡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및 복장유물' 뿐이다.[67] 2채밖에 안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평양에 성한 집이 초가집 2채밖에 없었다"고 할 수준이라고 김일성이 과장한 것이다. 실제로는 60~70% 수준이라고 평가되는데 그래도 엄청난피해를 입은 것이다.[a] [69] 일제강점기에 평안도의 중심인 평양시에 많은 양의 도굴품과 문화재를 전시했는데 해방 후 이러한 유물들이 지하수장고를 제외하면 평양박물관과 수장고가 거의 폭격으로 불타고 내부 유물까지 소실된 것. 당시 평양박물관에는 낙랑의 유물들과 고구려, 연해주의 유물들까지 전시되고 있었다. 특히 '낙랑 채화칠협' 이라는 유물은 남아있었다면 국보급 유물이 되었을 것이다.[70] 보통문이 없는 이유는 소이탄 폭격을 피해서 살아남았기 때문.[71] 일제강점기에 평양과 평안도 지역의 여러 민족 자료를 정리하였던 문서와 사진들이 많이 소실되었을 것이다..[72] 1940년도까지 평양에서 500년 이상 전승된 평양냉면 전수자들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사상자가 많이 나왔을 것이다.[73] 한국에서 대성전이 팔작지붕인 3개의 향교 (나머지 2군데는 나주향교와 성균관) 중 하나였으나 소이탄 공격으로 불타 소실되었다.[74] 이 자혜의원이 있던 자리가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궐이자 이궁인 풍경궁이 있던 곳이다.[75] 당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이후로 이곳에서 보관되던 유교 책판과 유교 서적들도 모조리 불타 소실된걸로 추정된다.[76] 완전한 점령까지 채 5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a] [78] 일제강점기에 이미 약탈훼손으로 많은 양의 고려고분이 도굴되거나 파괴되었는데 전쟁으로 또 피해를 입었다.[79] 다만 고려청자 등의 유물들은 한국전쟁 직전에 서울로 옮긴 상태라, 국보급 유물들의 일부만 남아있었다. 물론 남아있던 국보급 유물들도 1950년 이후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80] 이 중 관덕정은 살아남았지만, 남쪽 정자 6칸은 모두 소실되었다.[81] 이미일, <6·25전쟁 중 한국 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과제>[82] 1949년 8월 5일〈연천주재지사업보고서〉"…반동분자들을 분열,와해시키고 납치함으로써 국토완정의 결정적 역할을 높일 임무…"[83] 1950년 8월 17일〈북조선 군사위원회 결정사항 제18호〉"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은 각 부 각 청의 요구에 맞추어 북조선의 농업 및 산업 현장으로 50만명을 후송하도록 한다."[84] 이 사건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51년 2월, 변진갑 의원이 국회에서 조사하고 밝히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5만 6천여명이 학살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1951년 4월 국회속기록의 변진갑 의원 발언을 보면 3만 8000여명으로 줄었다. 뒷날 참여정부 시기 발족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직권 조사를 해본 결과, 1만명 이상은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학살규모는 과장되어 있을 지언정 커다란 규모나 잔학성면에서는 분명 존재했던 사건이었다.[85] 이 밖에도 북한군은 전라도 지방에서 학살을 특히 많이 자행했는데, 뒷날 대검찰청 공안부에서 작성한 '좌익사건 실록'에 따르면, 제일 큰 사건으로 강조되는 사건이 전북 옥구군 미면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역 좌익들이 이틀에 걸쳐 600여 명에 가까운 주민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86] 대전형무소 (대전 산내) 학살은 인민군이 들이닥치기 이전 군경에 의해 3차례나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또 대전형무소(대전 산내) 같은 장소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87] 정작 사람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도 구분을 못했기에 그냥 자신에게 유리해보이면 사회주의 같은 걸로 우기는 경우도 많았다.[88]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골라서 출세를 시켰다. 그렇게 하면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권력의 압도적인 단맛에 남들을 더 적극적으로 짓밟는 것이 가능했다. 서울에서는 문맹이 재판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89] 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 학살 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assacres_in_South_Korea 다만 피를 보려고 저지른 게 아니라 고위층 비리가 비참한 결과를 낳은 것. 고난의 행군[90] 더구나 2023년 기준으로 세계 195개국 중 1인당 GDP가 370$ 미만인 나라는 이 통계에서 최하위를 차지한 부룬디(292$) 1개국밖에 없다.[91] 40~50년대 미국의 무상원조, 그리고 60년대 들어 미국이 유상원조로 바꿔간 것은 미국의 국제정책에 의한 것이고, 7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공여도 크게 줄이게 되고 그것이 율곡사업의 동인이 되었다. 미제나 일제를 제 값주고 사기엔 돈도 없으니 국내 생산기반도 허접하지만 한 번 해보자 할 만하다 싶어 만들어보자 한 것.[92] 통계로 본 6.25전쟁.박동찬.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2014, 내부부 통계국.1955, 국가기록원[93] 정확히는 일본의 근대화 덕에 “지금”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이라는 주장에 반박하는 근거가 된다.[94] 멀쩡한 건물 중 하나는 문화재인 보통문이니 실제로 멀쩡한 건물은 1채뿐이었다.[95] 이 때문에 북한은 오늘날까지도 방공망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96] 그나마 강원권은 탄광 등으로 어느정도 호황을 누렸으나 탄광이 폐광되면서 다시 낙후되었다.[97] 실제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군 파병을 요청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현대전 경험 보유'였다. 저때는 휴전하고 20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는 걸 감안하자.[98] 그마저도 우익은 장제스 산하, 좌익은 마오쩌둥 산하에 있어 중국의 힘 아래 있는 게 마찬가지였다.[99] 이런 역사책에서나 존재하는 전쟁의 경험으로 현대 군인들이 노련해진다고 주장한다면 실전 경험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 러시아, 영국과 같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전쟁 기술 보유국이다.[100] 그나마 중국이 2020년대 인도와의 국경 분쟁에서 연장을 동반한 폭행으로 사상자를 낸 사례가 있기는 하다. 일단 중국군과 인도군이 충돌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총기나 미사일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진압방패와 죽창을 들고 방진 짜서 싸우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국지전으로 쳐야할지는 미지수.[101] 다만 소련이 바보라서 부각을 포기한 건 아니고, 전차 체급을 줄일 겸 방어력도 겸사겸사 늘리려고 부앙각을 적당히 맞춘 거였다. 마침 우랄산맥 서쪽 영토와 동유럽 지형은 평야가 많아서 부각에 신경쓸 필요가 적었던 것도 한몫했다. 애초에 서유럽은 한국전쟁의 경험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구릉지와 산지가 많은 지형 특성상 대부분 전차의 부앙각에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102] 전쟁 도중 환갑을 맞을 정도로 노장이었던 타흐신 야즈즈 소장은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제대했으며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쿠데타 때문에 쫓겨났다. 그리고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1971년 작고.[103] 2위인 영국은 약 1,100여명으로 2위에서 마지막 순위까지 합쳐도 미국을 넘지 못한다. 재한유엔기념공원에만 가봐도 캘리포니아 주 전사자만 해도 다른 국가 전체를 합친 것과 엇비슷할 정도인데, 타 주 또한 사상자가 이와 대부분 비슷하다.[104] 제주도의 크기가 대략 1,800km2인 것을 감안하면 제주도의 2배 이상 증가하였다.[105] 1949년 남한 영토 93,634km2, 1954년 97,534km2. 96,929km2는 남쪽 비무장지대를 제외한 면적이다.[106] 거기다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수도인 서울과 가까운 곳이다. 즉 전쟁 전보다 서울은 최전방에 가까워져버렸다.[107] 다만 전쟁 직전에는 도발로 인해 인구순위가 10위권으로 추락했다.[108] 더 나아가 원산 이남까지 밀고 가기 위해 일단 고성군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전쟁 초기보다 동부 전선이 상당히 올라가자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UN군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전과 같이 개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을 것이지만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며, 싸워서 쟁취한 강원도 북부 지역이 다시 북한의 영토가 되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109] 일단 법적인 신분제는 식민지가 되기도 전에 갑오개혁을 통해서 폐지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법률적인 의미에서였고, 실제 대중 사이에는 정서적으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몇 천년 동안 유지되었던 신분제가 법 하나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도 공부만으로 신분 상승을 한다는 개념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 남북한이 서구에 비해 양반 같지 않은 직업을 차별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심하며 연예인 같은 직종도 간신히 딴따라 같은 누명에서 벗어났다. 남한에서는 고고학 교수가 현장 발굴하던 시절 공부안하면 저렇게 된다며 멸시하는 말을 듣고, 북한에서는 건설부대에 정치적 하류층만 복무하게 하며 심하게 부려먹는다. 인도도 법적으로로는 카스트 및 남녀차별, 인종차별 등 여러 사회적 차별을 헌법으로 금지하였지만 대중 사이에서는 정서적으로 여전히 계급 의식이 많이 남아있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110] 그래서 좌파 지식인들조차 효율을 위해서는 권위주의 독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가지게 되었고, 기득권조차 국민들과 자신을 분리하여 특권층처럼 군림하기 어려운 뭐라 형언하기 힘든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복합적인 정치환경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광복 직후 미 군정의 한국인들 상대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특유의 집단주의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111] Dani Rodrik, Getting Interventions Right: How South Korea and Taiwan Grew Rich, December 1994[112] 의리없는 전쟁 초반에도 야쿠자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는데 뭐 껀수 없나?'하고 잡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베트남 전쟁 때 비슷한 방식으로 떼돈을 벌어먹었다.[113] 일본은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에 세계 3위의 해운국이었다.[114] 독일이 근처의 전쟁 없이도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것도 이 두 추축국이 미국의 원조와 주변국들의 견제만 이겨내면 자체적으로 복구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바이다.[115] 중일전쟁에서 피흘리며 일본과 싸웠던 세력은 대부분 국민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 중국에서 사골처럼 계속 만들어지는 드라마 소재가 중일전쟁이다. 국민당이 치른 전쟁을 공산당이 자기들 치적으로 내세우는 것이다.[116]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했을 것이다. 물론 중일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일본이 만주국으로 만족하라는 국제연맹의 권고안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고, 이렇게 되면 조선의 식민지배는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대공황에 대한 그릇된 타개책이었으므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군국주의로 가지 않았다면 무수한 실업자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당이 쫓겨난 대만은 유명한 친일 국가이다.[117] 당시 프랑코 정권의 숙청이 얼마나 심했나면 게슈타포 장관이자 슈츠슈타펠 전국 지도자인 하인리히 힘러도 경악했을 정도.[118] 얼마나 왕따가 심했냐면 마닐라 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스페인 영사관 내부까지 처들어와 건물 내부에 있던 사람들을 학살하고 방화까지 저질렀음에도 스페인은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119] 원래도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는데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일본 제국 해군하고 싸우다 전력의 대부분이 날아갔다.[120] 다만, 6.25 전쟁보다는 명분성이 떨어지고 국민당이 보여줬던 실책 때문에 미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6.25 전쟁만큼 높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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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성종중종의 경우는 능이 임진왜란 때 도굴당하고 시체가 불살라져서 얼굴을 복원할 방법이 영영 없어져 버렸으며, 정종의 경우는 도굴은 되지 않았으나 능이 북한(개성시)에 있기에 능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