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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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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6대 국왕
경순왕 | 敬順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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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후왕
낙랑군왕 | 樂浪郡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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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에 제작된 경순왕 어진[1]
출생 897년[2]
신라 금성
(현 경상북도 경주시)
퇴위 936년 1월 13일[3]
고려 개경 개주 정궁 천덕전
(현 경기도 개성시)
사망 978년 5월 18일[4][5] (향년 81세)
고려 개경 추정
(현 경기도 개성시)
능묘 경순왕릉(敬順王陵)
재위기간 신라 제56대 국왕
927년 음력 11월 ~ 936년 1월 13일[A] (8년 2개월)
고려 제후왕
936년 1월 13일[A] ~ 978년 5월 18일[8] (42년 4개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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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傅)
부모 부왕 신흥왕
모후 계아태후
왕후 죽방부인[A]
낙랑공주 왕씨[10]
부인 왕씨
자녀 태자 마의태자[11]
왕자 김덕지[12]
왕자 영분공 김명종[13]
왕자 범공[14]
헌숙왕후
종교 불교
시호 경순대왕(敬順大王)[15]
효애대왕(孝哀大王)[16]
별호 김부대왕(金傅大王)[17]
골품 진골(真骨)
작위 상보(尙父)[18] 낙랑군왕(樂浪郡王)[19] }}}}}}}}}
파일:경순왕릉 묘비 후면.jpg
경순왕릉 묘비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평가5. 경순왕릉6. 설화에서7. 대중매체에서8. 기타9. 《삼국사기》 기록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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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임금이 말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더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김부대왕- 신라 왕실과 조정에서 고려에 귀부를 논의하다. #
경순왕이 태조께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지만 또한 칭찬할 만하다.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며 태조의 군사에게 항거하였다가 힘이 꺾이고 세력이 다하였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기록하여 귀순하였으니, 고려 조정에 공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푼 것이 매우 컸다. 옛날에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에 바친 일을 두고 소자첨(蘇子瞻)이 그를 충신(忠臣)이라 하였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것보다 한참 더 크다. 우리 태조께서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 역시 번성하였지만,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올랐으며 계승한 이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응보가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경순왕(敬順王) 신라의 멸망에 대한 논평. #

신라의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임금. 휘는 부(傅), 시호는 경순(敬順).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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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11월, 후백제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 침략하여 경애왕 박위응을 살해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형제인 김부(金傅)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935년 12월(양력 936년 1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경순왕은 '정승'[20]에 임명되고, 지위는 고려의 태자보다 높여졌으며, 녹봉으로 1,000석을 받고 신란궁(神鸞宮)을 하사받았다. 고려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경주 지역을 식읍으로 주면서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했다.

975년 제5대 경종(景宗)은 경순왕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장인이 된 그의 '정승' 지위를 '상보'로 승격시키면서 도성령[21]에 임명하고 식읍 2,000호를 늘려줬다. 이에 따라 경순왕의 최종 지위는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식읍 10,000호"가 되었다. 978년 음력 4월 사망했으며, 시호를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했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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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무의미한 저항을 펼쳐 백성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임금이다.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는 나라의 왕좌에 적국에 의해 끌어앉혀진 사람이니만큼, 나라에 망조가 든 것은 경순왕 본인의 책임이라고 볼 수도 없다.[22] 여기서 "무의미한 저항"이란 곧 고려에 대한 저항이었지, 후백제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다. 자신들을 무력으로 집어삼키려 했던 후백제에게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저항하면서 귀순 전까지 버텨냈다.[23]

경애왕 시대에는 적어도 영남 동부에 대해선 지배력이 미치고 있었고, 진흥왕(제24대)과 문무왕(제30대) 때부터 역사가 내려오는 서라벌 방어 6기정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서라벌 함락 사건으로 이 부대들은 거진 해체 국면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영남 일대 잔존 호족들마저 후백제군에게 초토화되거나 고려에게 귀부하고 말았다. 그러니 경순왕 입장에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

고려와 연합해서 후백제를 저지했던 것이나, 경애왕 때 병장기 만드는 시설과 숙련된 군인까지 통째로 날려버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병력을 육성하여 고려와 연합해 후백제를 막아낸 걸 보면 확실히 조직력과 운영 능력 그리고 군사적 수완은 보통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즉, 견훤이 계획적으로 해체한 서라벌 방어 부대들을 어떻게든 가능한 선에서 다시 조직해냈다는 뜻이다.

고려에 투항할 때도 그나마 신라 왕실이 가장 가치가 높을 시점을 골라 투항했다. 고려는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를 상대로 승리하여 공산 전투의 치욕을 갚고 후삼국 통일의 승기를 잡은 반면, 후백제는 935년 견신검의 반란으로 부왕 견훤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3개월만에 고려로 탈출하여 귀순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큰 혼란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경순왕은 이러한 한반도 정세를 명확히 파악하고 936년 고려에 항복하여 왕건에게 이왕삼각이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주었으며, 그 대가로 서라벌인들의 일신을 보전하게 한다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으니[24] 이를 보면 경순왕은 외교적인 안목 또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는 하지만 고려 초기 왕족들간의 권력 분쟁을 종결시키고 중시조가 된 국왕이 경순왕의 사촌누이인 신성왕후의 손자인 고려 현종이고, 그 이후 고려 왕들은 전원 그의 직계 후손인만큼 고려 왕들에게 신라 왕실의 혈통을 물려주는데 성공하기도 했고. 왕건은 강릉 쪽으로 진출할 길목에 고려 부대들을 박아두었는데, 이는 경순왕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잠재력을 보여준 경순왕은 후한의 헌제나 고려의 공양왕과도 같이 열심히 노력은 해봤으나 결국 현실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망국을 피할 수 없었던 사례라 할 수 있으며, 때를 잘 만났다면 신라를 다시 일으켰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를 통틀어서 망국의 군주들 중에서는 그나마 무탈한 여생을 보냈다. 신하들에게 암살당한 위만조선우거왕, 패망한 후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고구려의 보장왕과 백제의 의자왕 · 풍왕, 요나라로 끌려간 뒤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아예 사라져버린 발해대인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된 태봉궁예와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한 것으로 점쳐지는 후백제의 신검[25], 유배지 삼척에서 사사당한 데다가 자신의 일족들까지 학살당한 고려의 공양왕, 그리고 비록 본인은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는 했어도 이민족 일본에게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기는 걸 지켜봐야 했던 대한제국순종 등과 대비해보면 더욱 그렇다. 일족이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들과 손자도 신라의 중신을 지냈으며 증손자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이후에는 왕으로 추존까지 되는 대영웅이고 증손녀는 신라의 왕후가 되어 이후 신라 왕들에게 본인의 혈통을 물려준 금관가야구형왕 및 그래도 목숨과 어느 정도 세력을 부지한 채 달아나 다시 마한건마국에서 군주를 한 단군조선준왕 정도가 그나마 그와 비견될 만할 듯하다.[26]

5. 경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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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설화에서

경순왕은 민간에서 자주 '신'으로 모셔지는 왕 중 한 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괜히 저항했다가 백성들에게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망국의 왕이라는 한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속적으로 신으로 섬겨지기 좋은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일제강점기까지도 각지에 경순왕을 모시는 사당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경상도와 충북 일대, 경기도 일부 지역에 경순왕 사당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시골을 돌아다니다 보면 경순왕 사당과 이를 모시는 무당들이 가끔 보인다. 무속이나 민간 설화에서는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김부대왕'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으며, 그 아들인 마의태자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설화에서 나타나는 경순왕, 김부대왕의 모습을 살펴보면,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이나 조상신의 형태로 자주 묘사되며, 미륵불상 관련 설화도 있는데,[27] 특이하게도 경순왕은 문무왕처럼 호국룡 설화 역시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어 형산강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경주와 포항의 경계 지역에는 형산과 제산이 있는데, 과거에는 그 두 산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남천, 기계천 등에서 나오는 물로 지금의 안강읍 지역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물난리가 잦아 치수가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용으로 승천하여 그 산을 갈라야 했다. 그 때문에 왕이 기도를 드려 승천을 했는데, 이 때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누군가가 승천한 왕을 용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천한 왕이 뱀처럼 보여 사람들이 모두 다 큰 뱀이라고 불렀으나, 유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 한 명만이 뱀이 아니라 용으로 불러주었고, 그제서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산이 갈라지고 물이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물이 빠져 나간 뒤에 생긴 들판을 그 어린 아이의 이름을 빌어 '유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으로 강동면 유금리가 존재하는데, 유금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동시에 왜구들을 퇴치하기도 한다. 원래 울릉도 근처에는 여러 들이 많았는데, 왜구가 터를 잡고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에 경순왕은 자신이 죽어 용이 되어 이를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용이 된 경순왕은 왜구들이 터를 잡은 섬들을 쳐서 없앴다. 그러던 중 울릉도를 파괴하려고 하자 하늘에서 울릉도는 한반도의 수구맥이니 치지 말라고 해서 울릉도를 빼고 모두 박살냈다고 한다. 실제로 울릉도 주변에 해산[28]이 꽤나 자리잡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있었던 지진 등의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일지도 모른다.[29]

7. 대중매체에서

경순왕의 정확한 출생일은 불명이지만 신라 왕 재위 시점에는 20대~30대 정도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왕위 계승권 1순위인 김씨라는 설정 때문인지 대중매체에서 중노년의 나이로 묘사되는 재현 오류가 자주 일어난다.
파일:경순찡.png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신귀식[30]이 연기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버티려고 해도 하도 심각한 상황이라 결국 나라를 고려에 바친 군주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서라벌 침공 때 견훤을 도와준 신라의 유염과 김응겸이 "김씨 왕가의 가장 큰 어른이다"라며 그를 새 왕으로 권하였고 마지못해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31] 견훤이 서라벌을 떠난 뒤 공산 전투 이후 바로 "우리 동맹국은 고려지 백제는 아니오. 내가 비록 중신들의 권유로 이 자리에 올랐지만 이 황좌를 탐낸 적은 한 번도 없소이다"라며 그를 왕으로 만들어준 견훤에게 협조했던 유염과 김응겸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처형하는 모습이 그나마 진정한 왕 같은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 장면.
{{{#!folding 신라 조정에서의 대화 대본 [펼치기·접기]
경순왕: 우리를 구하러 오던 고려군이 전멸을 했다고 하오이다.
유염: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게 당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옵니다. 고려는 백제의 적이 아니옵니다.
마의태자: 그러나 고려가 우리 신라를 구하러 오다가 저리된 것은 사실이옵니다.
경순왕: 그렇고 말고…역시 고려는 우리 신라의 맹방이올시다. 저들은 의리를 다하였고 동맹국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였소이다.
신료1: 폐하, 극히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백제는 이 서라벌에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거두어 가 버렸사옵니다. 역시 고려만이 우리의 맹방임이 다시 한번 드러났사옵니다.
김웅겸: 그러나 고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전멸을 했소이다. 그나마 백제의 왕이 우리 신라의 황실을 보전하게 해 주었소이다.
마의태자: 보전이라니요? 저들이 없어도 우리는 사직을 이을 수 있소이다. 저들은 우리가 합법적으로 뫼신 폐하를 시해하였소이다. 또한 황후마마를 자진케 하셨소이다. 박씨든 김씨든 저들이 간섭할 일이 아니었소이다.
유염: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망발이시오이까, 태자마마? 백제가 없었으면 어찌 지금의 폐하께서 계실 수 있겠사옵니까?
경순왕: 이보시오, 유염공?
유염: 예, 폐하.
경순왕: 내 비록 부끄럽게 백제왕에 의해 황제에 올랐으나 이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났던 사람은 아니외다. 지금은 김씨나 박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년 신라의 사직이 중요한 것이었소이다.
유염: 폐하, 그 무슨…….
경순왕: 그러나 우리의 천년 사직은 백제군에 이 서라벌이 짓밟힘으로써 더욱 비틀거리게 되었소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마지막 자존심과 존립의 명분마저 무너졌어요. 그래서 짐은 결심을 했소이다.
모두들: ……?
경순왕: 역시 백제는 우리의 우방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것을 말이오. 밖에 근위군사들 있는가? 대령하라.
대답소리와 함께 근위병들이 도열해 들어선다. 유염이 긴장한다. 김응겸도 긴장한다. 모두들 긴장한다.
경순왕: 사직에 먹칠을 하고 황통을 부정한 자는 용서할 수 없도다. 내 비록 더러운 도움을 받아서 왕위에 올랐으나 남은 체면은 지키기로 하였노라. 저 유염과 김응겸을 하옥하라.
유염: 폐하, 이럴 수가 있사옵니까? 신에게 이럴 수가 있사옵니까?
김웅겸: 폐하…….
경순왕: 뭣들 하는가? 저 역적들을 당장 하옥하고 날이 밝는 대로 도성 밖으로 끌어내서 목을 배라.
마의태자: 어서 끌어내지 않고 뭘하는가?
유염: 폐하, 폐하…이럴 수는 없사옵니다, 폐하…….
마의태자: 무엇을 하느냐? 어서 끌어 내거라, 어서!
- 태조왕건 162화, 역적 유염과 김웅경에게 일갈하는 경순왕 대본. }}}
사실 드라마에서처럼 즉위하자마자 견훤에게 협조한 세력들을 처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순왕 초기 고려는 그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한달 가량이나 실종됐다가 혼자 겨우 살아서 도망쳐나오고 휘하의 장수 여덞과 본대 병력을 모조리 잃으며 고창 전투 이전까지 후백제에 주도권을 완전히 내준 상태였기 때문. 따라서 극중에서처럼 즉위하자마자 친 후백제 신하들을 숙청하면 당연히 한창 기세등등하던 견훤이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다시 서라벌로 와서 책임을 크게 물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참에 신라를 후백제에 합병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극의 전개를 위해 시기를 앞당긴 것이며, 후백제와 모의하여 경애왕을 끌어내리고 그에 따라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하는 유염과 김응겸의 작중 역할이 끝났으므로 퇴장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그 외에는 대부분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는 것을 논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대하는 아들 마의태자와 갈등을 빚는 장면도 덤. 고려에 항복을 결정하는 마지막 대전 회의에서 "차라리 전 백성과 신하에게 자결을 요구하라"라며 반대를 하는 마의태자에게 "신라를 망친 것은 백성과 신료들의 죄가 아니라 황실의 죄이니 이제 와서 백성이나 신료들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할 수는 없다"며 고려에 항복하는 장면은 명장면.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한 이후로는 경순왕까지 3명이 한 자리에 3자 대면을 하는 장면도 있다.[32]
*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성우 겸 배우 이도련[33]이 연기하였다. 다만 작품이 다르고 담당하는 배우가 달라져서 그런지 캐릭터 묘사도 조금 더 괄괄하고 강단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34] 다만 큰 어르신이라는 상징성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극중의 비중은 "지방 세력가 A" 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상징성과 위엄 때문에 존재감은 상당하며, 신명왕후의 사위이다보니 그와 대립하는 장화왕후왕규에게 경계를 받기도 한다.[35]

8. 기타

  • 조선 왕조 말기에 들어와 후처 낙랑공주 왕씨 소생들인 경주 김씨 일문들에 의해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정비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박씨로, 낙랑공주를 후비(後妃) 왕씨라 기록하고, 공주 왕씨(公主 王氏)는 누락하고 있는데, 사실 낙랑공주는 신라가 멸망한 뒤에 시집왔으니 신라의 왕후는 아니다. 다만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그 지위가 정승공(正承公) 및 낙랑군왕(樂浪郡王)이라는 작위에 봉작되었기 때문에 낙랑공주는 신라 국왕의 왕후가 아닌 고려의 제후왕인 낙랑군왕의 왕비가 된다.
  • 한국사 역대 임금 중에서는 조선 후기의 영조와 더불어 대단히 장수했다. 비록 신라 국왕으로서의 재위기는 8년에 불과하나 고려 제후로서는 42년 동안 봉임되었으며, 고려 제5대 대왕인 경종의 치세기간인 978년에 사망해 천수를 모두 누렸다.
  • 1934년 간행된 《신라삼성연원보》는 그의 첫째 부인으로 송희부인(松稀夫人) 석씨(昔氏)를 등장시켜 슬하에 14남 3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역사학계와 신라계 김씨들은 위보로 간주하고 있다.출처
  • 먼 옛날 진평왕(제26대)이 옥황상제에게서 받았다는 천사옥대[36]를 고려에 항복한 직후인 937년에 창고에서 꺼내 태조 왕건에게 바쳤다. 중국의 전국옥새처럼 신라에서 일종의 천명을 상징하는 물건이란 의미가 있었던 듯 하다.
파일:W0OIQn1.jpg
* 어진눈썹 모양이 상당히 특이한데, 당나라 시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혹은 불화에 가깝게 여러 차례 이모되면서 불화의 전형적인 표현 양식을 띠었을 수도 있다.
  • 어진이 남아있지만 경순왕을 상보로 삼은 제서는 경순왕의 외모에 대해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한 외모였다고 한다.출처
  • 신라의 마지막 국왕이라서 나라가 망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신라는 견훤경애왕을 살해하고 아직 신라에게 충성을 바치던 경남북 일대 호족 세력들을 초토화한 시기에 돌이킬 수 없이 끝장나 있었다. 경북 서북부 일대가 그나마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 지역 호족들이 믿고 바라던 주군은 이미 왕건이었지 경순왕은 아니었다. 따라서 경순왕이 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은 항복을 왕건과 견훤중 누구에게 하느냐 또 언제 항복할 것이냐 뿐이었다. 경순왕은 그 상황에서도 견훤이 왕건을 한참 정신 못 차리게 밀어붙이던 시기에는 최대한 견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노력했는데 이는 정말 대단한 판단력과 자제력이 아닐 수 없다. 최대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하여 서라벌의 백성과 신료들을 보전한 훌륭한 임금으로서, 평화롭거나 나름 신라가 여력이 있었을 때 즉위했더라면 명군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으며, 사실 통상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경순왕의 치적만 보면 명군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37] 게다가 후기 신라 왕들의 최대 약점인 수명마저도 무려 81세로 타고난 양반이라 정말로 조건이 아쉬운 명군이였다는것은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9.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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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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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경순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경순왕이 즉위하다.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一年冬十一月 전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장사지내다
一年冬十一月 아버지 이찬 효종을 추존하고, 어머니를 왕태후로 삼다
一年冬十二月 견훤이 들에 쌓아놓은 곡식을 태우다
二年春一月 김상흥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다
二年夏五月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二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왕충에게 쫓겨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가다
二年冬十月 견훤이 무곡성을 함락시키다
三年夏六月 천축국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오다
三年秋七月 견훤에 맞서 출정한 홍술이 전사하다
三年秋七月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三年冬十月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四年春一月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다
四年春一月 태조고창군에서 견훤을 크게 이기다
四年春二月 태조가 승리 보고를 하자, 왕이 만나기를 청하다
四年秋九月 동쪽 바닷가의 주군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五年春二月 태조가 왕을 찾아가다
五年秋八月 태조가 왕과 신료들에게 물품을 보내주다
六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김불이유에 보내 조공하다
七年 당 명종이 고려에 책명을 주다
八年秋九月 노인성이 보이다
八年秋九月 운주 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十八年冬十月 항복을 반대하던 왕자가 개골산에 들어가다
十八年冬十一月 태조가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장녀 낙랑 공주를 왕에게 시집보내다 → 신라의 멸망
十八年冬十二月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삼다.
十八年 태조가 왕과 혼인 관계를 맺다
高麗 景宗 四年 경순왕이 죽다. 시호를 경순(敬順)(또는 효애(孝哀)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이하, 경순왕과 상관없지만 삼국사기 경순왕 항목에 추가로 적혀 있는 기록이다.

신라사의 시대 구분
高麗 仁宗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38]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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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정확히 말하면 현재 존재하는 어진은 고려 초의 원본을 베낀 것이다. 2007년에 5점의 어진이 존재함을 확인했다.기사[2]삼국사절요》에 따르면 김효종과 김계아의 혼인 시점은 897년이므로, 경순왕은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났을 것이다. 이 영향인지 족보류에는 897년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더 이른 연대의 사서에는 정확한 탄생 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897년이라는 시점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시대의 《삼국사절요》 편찬자와 족보 편찬자들이 임의로 진성여왕(제51대)의 말년에 비정한 것이므로 섣불리 신뢰해서는 안 된다.[3] 음력 935년 12월 12일, 율리우스력 936년 1월 8일. 《고려사》 기록.[4] 음력 4월 4일, 율리우스력 5월 13일[5] 978년 4월까지는 《고려사》 <경종 세가>에 기록되어 있으나,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4일이라는 기록은 경순왕이 죽고 약 900년이 지난 조선 영조 때 경기도 연천 장남면에 세운 신라 경순왕의 릉(新羅敬順王之陵) 묘비에만 전해지므로, 신빙성은 높지 않다. 양력으로 계산하면 그레고리력으로 978년 5월 18일에 사망한 것이 된다.[A] 음력 935년 12월 12일, 율리우스력 936년 1월 8일[A] [8] 음력 4월 4일, 율리우스력 5월 13일[A]고려사》에 "羅王太后竹房夫人"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죽방부인은 태후, 즉 경순왕의 모후(母后: 군주의 어머니) 또는 전대 군주의 아내이지 경순왕의 아내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고려사》를 오역함에 따라 비롯된 결과라는 설도 있는데, 조선 제5대 문종 1년에 완성된 《고려사》는 고려를 기준으로 신라 경순왕을 선대 군주로 보고, 그의 왕후인 죽방부인은 경순왕의 태후(太后)라 기록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문종은 경순왕의 후손이 아닌 것은 물론 신라와 고려는 아예 다른 나라여서 경순왕의 아내를 태후라고 부를 위치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왕비로서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조선 말기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부터이고, '죽방'(竹房)이라는 명칭은 인명이 아닌 "대나무 방" 정도의 의미로, 신라시대 관서 중 '방'(房)은 주로 여관이 근무하던 곳을 부르던 명칭이었고, 여성 인명을 사서에 표기하지 않게 된 고려시대의 특징을 고려하면 그녀가 기거하는 공간을 뜻하는 명칭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굳이 현 군주의 생모가 아니어도 전임 군주의 아내가 '태후'라는 명칭을 쓴 흔적도 《삼국사기》에서 발견된다.[10] '신라경순왕전비'는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낙랑공주를 후비(後妃)라 적었다.[11] 서열은 장남. 삼국사기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갔다고 적혀있으므로 후손이 절손되었다.[12] 서열은 차남. 김덕지는 1561년 고암 양자징이 찬한 후손, 하서 김인후의 <가장>에 경순왕의 왕자로 기록하고 있다. 울산 김씨의 시조.[13] 서열은 삼남. 경주 김씨 영분공파의 파조이다. 묘소는 경주시 도지동에서 동방동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14] 서열은 막내아들. 휘는 전해지지 않았다.[15] #[16] 《삼국사기》 기록.[17] 《삼국유사》 기록.[18] 975년 음력 10월에 책봉. 책봉고명은 《삼국유사》《고려사》에 인용되었으며, '상보'는 고려에 귀순할 때 받은 '정승공(正承公)' 지위를 승격한 지위로 파악된다. 책봉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고려에서는 상보 지위 또한 작위의 일종으로 여겼음이 확인된다.[19] 상보로 책봉되기 이전에 봉작되었음이 확인되나, 정확한 봉작 시점은 알 수 없다. 상보 책봉고명의 본문에는 '낙랑왕(樂浪王)'으로 표기되었으나 《삼국유사》에서 생략하지 않은 해당 고명의 시행문을 통하여 정식 봉호는 '낙랑군왕'이었음이 파악된다.[20] 《삼국사기》에는 '정승공(正承公)', 《삼국유사》에는 '정승(正承)', 《고려사》에는 '정승(政丞)'으로 표기되었다. 상보책봉 고명에는 '낙랑왕정승(樂浪王政承)'으로 표기된 점으로 보건데, 고려에 귀순할 당시에는 '정승공(正承公)'이었으나, 후일 낙랑군왕에 봉작되면서 '낙랑군왕·정승(政承)'으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사》의 '정승(政丞)'은 오기(誤記)로 여겨진다.[21] 령(令)은 지금 말로 '장관(長官)'을 의미하므로, 도성령은 '도성(都省)'의 장관이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도성은 어사도성(御事都省)이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약칭으로 여겨지는데, 어사도성이 982에 개설되고 995년에 상서도성으로 개칭된 것인만큼 975년 시점에는 실재하는 관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都'의 원래 의미대로 "모든 관부"라는 표현으로 짐작된다. 특히, 경순왕보다 먼저 '상보'로 존대받았던 견훤이 '모든 신하보다 높은 지위'(位百官上)였음을 감안하면, 모든 신하보다 높은 지위라는 의미로 '상보'와 함께 제수된 명목상의 관직으로 볼 수 있다.[22] 사실 이미 전 왕인 경애왕을 끝으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였다.[23] 후백제가 신라를 작정하고 삼키려고 했으면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처럼 분전하거나, 못해도 고려로 일단 망명한 이후 후백제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경우 순순히 항복하고 도시를 넘긴다면 목숨을 보존해 주는 것은 물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총독으로 삼는 등 후대하겠노라는 오스만 측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제국과 운명을 함께했다.[24] 다만 왕건에게 우대 받은 건 경순왕 및 경순왕과 가까운 직계 일족들 뿐이었다. 그 나머지 서라벌의 신라 조정에게 여전히 충성하던 진골들은 전부 향리 신세로 떨어져야 했으며, 고려 정부로 가장 마지막에 편입된 기존 신라 조정의 구성원들은 상당한 상대적 차별을 당해야 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서라벌 진골 및 그 후예들의 불만은 결국 신라부흥운동으로 터지고 만다. 그렇다 해도 당시 신라의 처지를 보면 이들의 목숨을 당장 부지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경순왕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조선에서는 고려 왕족의 후손들이 부흥운동조차 못할 정도로 왕씨 몰살을 당했다.[25] 《삼국사기》에는 신검을 부추겼던 능환 등은 곧바로 처형되고 신검의 동생인 견용검, 견양검은 강주로 유배갔다가 몇 년 뒤 처형되었지만 신검은 다른 사람들의 강압에 의해 임금이 된 것이라 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관직을 하사했다고 나와있다. 이로 인해서 화병이 난 견훤이 사망했다는 기록은 덤. 다만 학계에서는 이후 신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점과 신검을 살려둘 경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실제로도 고려사 말미에 세 형제 모두가 고려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이설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은연 중에 숙청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태조 왕건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신검이 벌판 어딘가에서 처형당해 죽는 영상과 더불어 나레이션으로 기록되지 않게 적당한 시기에 죽였을 거라고 언급하며, 최종 방영본에서는 잘렸지만 대본에는 신검 삼형제를 모두 제거하라는 왕건의 대사가 있다.[26] 다만 패서 호족들이 전반적으로 신라 왕실에 우호적이었던 건 안승의 사례와는 무관하다. 안승의 보덕국은 신라에 포함되었다곤 하나 반란을 일으킨 탓에 진압되어 서라벌, 익산 이남 옛 백제 고지 분산 배치 탓에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이후에 이들이 패서계 호족과 연락을 취한 사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덕국 흡수를 신라 왕실이 고구려 흡수의 명분으로 나름 내세웠을 개연성은 있는 것과 이 사항은 별도다.[27] 미륵불상 관련 설화에선 경순왕의 딸이나 마의태자도 자주 나타난다.[28] 이 해산 중 물 밖으로 끄트머리가 빠져나온 것이 독도다. 그 외에도 물 속에서 올라오다 끝나는 봉우리는 여러 개가 있다.[29] 이 설화는 문무왕의 설화로도 나타난다. 다만 경순왕의 설화에서는 포항 근처의 산을 쳐서 형산강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와 승천 중 상술된 유금이와 유금이들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이야기도 같이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다.[30]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류정현 역,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김윤환 역.[31] 견훤은 대체 김씨는 뭐를 하길래 박씨가 왕이 되어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도록 놔뒀냐고 갈궜는데 견훤과 내통했던 유염과 김응겸이 욕심없고 유순한 분이라 그렇다며 변호하자 견훤도 더는 갈구지 않고 넘어간다.[32] 견훤의 뜻에 찬성하여 왕건에게 후백제 정벌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 장면이 경순왕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다.[33]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능달 역,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일해재단 이사장 최순달 역.[34] 사실 이건 유천궁이나 유긍달 등 지방 세력가들도 비슷하다. 전작에서는 주인공인 왕건의 조력자들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광종의 조력자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35] 왕규는 그를 나라를 도둑질 하려는 무리 편에 서 있다며 디스했고 장화왕후 역시 그 옛날 신라를 들어 바쳤으면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며 디스한다.[36]고려사》에서는 성제대(聖帝帶)라고 썼다.[37] 어찌되었든 군주로써 자기가 처한 조건에서 국가에게 최선의 결과를 산출해 냈으므로.[38] 다만 무엇에 논했지는 알수없다. 인종시기 일어난 무언가를 논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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