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 크로즈비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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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 빙 크로즈비 Bing Crosby | |
본명 | 해리 릴리스 크로즈비 주니어 Harry Lillis Crosby Jr. |
출생 | 1903년 5월 3일 |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 | |
사망 | 1977년 10월 14일 (향년 74세) |
스페인 마드리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가수, 배우, 코미디언 |
장르 | 전통 팝, 이지 리스닝, 보컬 재즈 |
활동 | 1925년 ~ 1977년 |
신장 | 171cm |
모교 | 곤자가 대학교 |
배우자 | 딕시 리 (1930년 ~ 1952년, 사별) 캐스린 그랜트 (1957년 결혼) |
자녀 | 게리 크로즈비 (1933~1995) 필립 크로즈비 (1934~2004) 데니스 크로즈비 (1934~1991)[A] 린지 크로즈비 (1938~1989)[A] 해리 크로즈비 (1958~) 메리 크로즈비 (1959~) 너새니얼 크로즈비 (1961~) |
종교 | 가톨릭 |
링크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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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빙 크로즈비의 캐주얼한 무대 매너와 감미롭고 여유로운 노래 스타일은 두 세대의 팝 가수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를 당대의 가장 성공적인 엔터테이너로 만들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아이콘으로 읽는 미국 문화] 미국을 대표한 목소리 빙 크로스비
미국의 가수, 배우, 코미디언.
대중 문화 역사상 최초의 멀티 엔터테이너이자 ‘대중 문화’라는 말을 정립시킨 인물로 20세기 역사상 가장 영항력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이다. 빙 크로즈비는 역사상 가장 크게 성공한 영화배우[3]이자 동시에 역사상 가장 크게 성공한 음악가로 대중문화 초창기를 형성한 대표적인 슈퍼스타로 꼽힌다.
빙 크로스비는 1930년대 대중 음악계를 휩쓸며 역사상 최초의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연예인이 되었으며, 1940년대에는 영화배우와 가수로써 활동했고, 라디오로도 성공하여 라디오와 영화, 음악으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3중 헌액자가 되었으며, 그가 형성한 대중 문화는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가수로서는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BBC 선정 세기의 목소리 5위와 White Christmas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앨범이라는 것에서 설명이 끝나며, 배우로서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공로상이라 할 수 있는 세설 B. 드밀 상을 수상한 것으로 끝난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프랭크 시나트라도 해보지 못한 업적이며, 드밀 상을 받은 또 다른 인물들이 그레고리 펙, 커크 더글러스, 존 웨인 등과 같은 대배우들이고, 또 그들이 배우로서만 집중적으로 활동했던 것을 고려하면 가수, 코미디언, 배우를 겸업한 빙 크로즈비야말로 대단하다고 말 할수 있다.
또한 라이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의 미국인에 연예인으로써는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등과 함께 당당히 선정되었으며, 1948년에는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4] 연예인으로써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을 넘어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혔다는 점에서 초창기 연예계의 위상을 높인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2. 상세
1927년 <Whispering>으로 유명한 폴 와이트먼 악단에 입단했다. 당시 폴 와이트먼은 '재즈의 왕'이라 불리는 거물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그의 악단에는 빅스 바이더벡, 타미 돌시를 비롯한 뛰어난 연주자들이 많았다. 그런 인물들과의 공연은 경력을 막 시작한 빙 크로즈비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처음에 크로즈비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리듬 보이즈>라는 보컬 트리오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뛰어난 바리톤 목소리와 푸른색의 큰 눈을 가진 잘생긴 외모 덕분에 그는 트리오 중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31년, 리듬 보이즈는 폴 와이트먼 악단을 떠나 거스 아른하임 오케스트라에 합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솔로 음반들을 내기 시작했으며 많은 곡이 히트를 거뒀다. 빙 크로즈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인기 가수였던 루디 밸리가 말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빙 크로즈비의 <I Found A Million Dollar Baby>를 듣고나서 자신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출현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에 크로즈비는 대표적으로 <Stardust> , <The Day You Came Along>, <Thanks> 등의 노래를 녹음했으며 1940년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인 <White Christmas>[5]가 가장 유명하다. 친동생인 밥 크로즈비 역시 유명한 가수 겸 배우였다.[6]최초의 멀티미디어 스타이며, 최초의 미국 국민 가수, 아니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던 가수였다. 그 당시 음반 차트를 보면 1930년대에는 그냥 빙 크로즈비가 음반 시장을 독식했었다. SP 음반을 내기만 하면 1등 찍던 시절이고 프랭크 시나트러 이전에는 빙 크로즈비가 있었다. 그러나 빙 크로즈비 전엔 이러한 류의 가수나 엔터테이너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전부터 레코드를 내는 가수들은 존재했지만, 배우로써도 활발히 활동하면서 대중음악계에서 압도적 인기를 끌며 한 시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아가 그 이후 시대에서도 회자될 만한 가수는 빙 크로즈비가 최초였던 것이다.[7] 그래서 빙 크로즈비를 최초의 멀티미디어, 현대적 스타라고 부르는 것이다. 과언이 아니라 진짜 빙 크로즈비가 현대적 셀러브리티의 원조인 것이다. 밥 호프는 이보다 조금 늦게, 프랭크 시나트러는 10년 정도 뒤다.[8]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동시대 영국의 앨 보울리나 조금 늦게 등장한 프랭크 시나트러, 페리 코모 같은 가수들부터, 현재의 마이클 부블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크루닝(Crooning)이라고 부르며, 부드럽게 속삭이듯이 노래하는, 트레디셔널 팝의 주요 창법이며, 빙 크로즈비가 개발함으로서 이전 세대의 빌 머리[9] 류의 오페라틱한 창법이 사장되었다. 이는 1950년대 초 테너 마리오 란자[10]의 미국 시장 대성공으로 다시 컴백하긴 한다만 마리오 란자는 빌 머리 류의 팝 오페라틱이 아닌 진짜 테너였기에 달랐다.
연기 실력도 뛰어나 배우로도 상당히 성공한 사람인데, 멀티미디어 스타라는 말답게 가수와 배우 겸업하는 스타라는 개념을 거의 최초로 보인 사람이다. 193-40년대에도 인기 배우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인기가 폭발했으며, 1위 수성을 하던 시절도 있었을 정도다. 명장 리오 맥캐리가 자주 기용하던 배우였는데, <나의 길을 가련다>(1944) 같은 경우 크로즈비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음향이나 영상 기술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데, 우선 크로즈비의 성공 자체가 마이크의 발명과 큰 관련이 있다. 크로즈비의 창법인 크루닝은 목소리 톤을 중시하는 창법인데, 마이크의 등장은 발성에 신경쓰지 않고도 톤을 살리는 창법에 큰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이런 발전이 겹쳐 악단이 아닌 가수가 중심이 되는 음악 산업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빙 크로즈비는 그런 변화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남게 되었다. 여기다 미국 최초로 오픈릴 테이프를 이용한 라디오 방송 제작 체제를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후 라디오 방송을 하던 도중 기술자 존 T. 멀린과 함께 사비를 털어서 오픈릴 테이프 녹음기를 샀는데 혜안은 제대로 적중해, 오픈릴 테이프가 방송국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 멀린과 함께 텔레비전 생방송을 위한 비디오테이프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얼리 어댑터적인 면모가 강했던 인물.
1974년 1월에 진균증을 앓고 폐가 손상되어 잠정 은퇴했다. 1977년 3월 패서디나에서 열린 쇼를 녹화하며 복귀했으나, 도중에 악단석에서 떨어져 디스크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한 달간 입원하게 됐다. 그러나 데이비드 보위와 합작을 하고 라이브를 하는 등 본격적으로 복귀에 시동을 걸었으나, 그 해 10월 13일 마드리드에서 프로골퍼 마누엘 피녜로 등과 골프를 하고 클럽을 나오다가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망 전 마지막 유언은 "이봐. 정말 멋진 게임 아니었냐?" 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아내에 따르면 그는 평소에 좋아하던 운동인 골프를 하다가 숨졌으며, 행복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3. 평가
역사상 최초의 멀티 엔터테이너이자 대중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선배격 되는 인물이다. 특히 최고라는 타이틀은 깨질 수 있어도[11] 최초라는 기록은 깨지지 않으므로 영원히 멀티테이너라는 단어에 첫 번째로 뽑힐 것이다.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준 연예인, 미국 여론 조사 선정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위인 등의 여론조사 기록또한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그가 1930-40년대 연예계를 대표하는 인물임과 동시에 연예계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이라는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프랭크 시나트라가 스탠다드 팝으로 대표되는 근현대 미국 대중문화를 정의했다면, 빙 크로즈비는 대중문화라는 개념 자체를 창시한 인물로써 대중음악과 영화계 양면에서 불멸의 전설로 인정받고 있다.
4. 출연작
<rowcolor=#ffffff>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1930년 | 킹 오브 재즈 (King of Jazz) | 리듬 보이즈 | [12] |
리칭 포 더 문 (Reaching for the Moon) | 빙 | 노래 한 곡 부르는 게스트 출연 | |
1931년 | 남녀 공학의 고백 (Confessions of a Co-Ed) | 리듬 보이즈 | |
나는 항복한다 (I Surrender Dear) | 빙 크로스비 | 단편 첫 주연 단편 영화 | |
원 모어 찬스 (One More Chance) | 빙 뱅스 | 단편 영화 | |
1932년 | 드림 하우스 (Dream House) | 빙 파셋 | 단편 영화 |
빌보드 걸 (Billboard Girl) | 빙 크로스비 | 단편 영화 | |
더 빅 브로드 캐스트 (The Big Broadcast) | 빙 혼즈비 | 장편 첫 주연 | |
1933년 | 블루 오브 더 나잇 (Blue of the Night) | 빙 크로스비/잭 스미스 | 단편 영화 |
씽, 빙, 씽 (Sing, Bing, Sing) | 빙 크로스비 | 단편 영화 | |
대학 유머 (College Humor) | 프레드릭 댄버스 교수 | ||
투 머치 하모니 (Too Much Harmony) | 에디 브론슨 | ||
플리즈 (Please) | 빙 크로스비/호워드 존스 | 단편 영화 | |
고잉 할리우드 (Going Hollywood) | 빌 윌리엄스 | ||
1934년 | 단지 자연 (Just an Echo) | 빙 크로스비 | 단편 영화 |
위아 낫 드레싱 (We're Not Dressing) | 스티븐 존즈 | 노먼 타우로그 연출 J. M. 배리 원작 레이 멀랜드, 캐롤 롬바드, 에설 머먼 출연 | |
쉬 러브 미 낫 (She Loves Me Not) | 폴 러턴 | ||
히어 이스 마이 하트 (Here Is My Heart) | 재스퍼 폴 존스 | 아킴 타미로프 출연 | |
1935년 | 미시시피 (Mississippi) | 톰 그레이슨 | 조앤 베넷 출연 |
투 포 투나잇 (Two for Tonight) | 길버트 고돈 | 조앤 베넷 출연 | |
1936년 대방송 (The Big Broadcast of 1936) | 빙 크로스비 | 잭 오키 주연 카메오 출연 | |
1936년 | 애니씽 고스 (Anything Goes) | 빌리 크라커 | 루이스 마일스톤, 에설 머먼, 아이더 러피노 출연 |
리듬 온 더 레이지 (Rhythm on the Range) | 제프 로라비 | 프랜시스 파머, 루실 글리슨 출연 | |
페니즈 프롬 헤븐 (Pennies from Heaven) | 래리 풀 | 루이 암스트롱 출연 | |
1937년 | 와이키키 웨딩 (Waikiki Wedding) | 토니 마빈 | 앤서니 퀸 출연 |
더블 오어 노씽 (Double or Nothing) | '레프티' 보일런 | 마사 레이와 주연 테오도르 리드 감독 | |
1938년 | 닥터 리듬 (Doctor Rhythm) | 의사 빌 램센 | 오 헨리 원작 |
싱 유 시너스 (Sing You Sinners) | 조 비베 | 도널드 오코너, 프레드 맥머리 출연 | |
1939년 | 파리 허니문 (Paris Honeymoon) | 럭키' 로튼 | 아킴 타미로프 출연 |
이스트 사이드 오브 헤븐 (East Side of Heaven) | 데니 마튼 | 투자한 작품 | |
스타 메이커 (The Star Maker) | 래리 얼 |
- 1940 Road to Singapore - 자쉬 말런[13]
- 1941 Road to Zanzibar - 척 리어든[14]
- 1943 그들이 나를 숨겨주었다 - 목소리 출연[15]
- 1944 나의 길을 가련다 - 찰스 "척" 프랜시스 패트릭 오맬리 신부
- 1945 성 메리의 종 - 오맬리 신부
- 1946 Road to Utopia - 두크 잔슨/주니어 후튼[16]
- 1948 황제원무곡 - 벌절 스미스[17]
- 1949 아서 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 - 행크 마튼/보스 경[18]
- 1950 Mr. Music - 폴 메릭[19]
- 1950 Riding High - 댄 브룩스[20]
- 1951 Here Comes the Groom - 피트 가비[21]
- 1952 Road to Bali - 조지 카크런[22]
- 1952 당신만을 - 조든 블레이크[23]
- 1954 갈채 - 프랭크 엘전[24]
- 1954 화이트 크리스마스 - 밥 월러스
- 1956 Anything Goes - 빌 벤슨[25]
- 1956 상류 사회(High Society) - C.K. 덱스터-헤이븐
- 1960 페페 - 본인
- 1966 Stagecoach - 조사이어 분[26]
5. 여담
- 한때 그레이스 켈리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미국 야구 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광팬으로, 1946년부터 죽을 때까지 지분의 무려 25%를 소유 했었다고 한다. 경기를 볼 때면 너무 긴장해서, 1960년 월드 시리즈 당시에는 가족이랑 유럽 여행을 가고 집에서 필름으로 녹화 시켜 경기 결과를 알고서야 직접 볼 수 있었다. 결과는 7차전에서 파이리츠의 빌 매저로스키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7차전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여 파이리츠가 우승했다. 그리고 1971년에도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하여 크로즈비가 살아있는 동안은 4번, 파이리츠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2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 자기가 직접 야구 경기를 보면 파이리츠가 진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텔레비전 방송을 집에서 녹화해 나중에 시청하는 버릇이 있었다. 1960년대까지 MLB는 방송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않아서 많은 경기들이 로스트 미디어가 되었는데, 전술한 1960년 월드 시리즈의 명경기는 크로스비가 녹화한 필름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영상 자료이다. 2010년에 크로스비 자택의 와인 저장고에서 필름이 발견되기 전에는 완전히 소실됐다고 알려져 있었다.
- 또한 골프에도 관심이 많아서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미국 골프 협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밥 존스 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리고 위에 내용에서도 나와있듯이 죽기 직전까지 골프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고, 마지막 유언으로는 "이봐, 정말 멋진 게임 아니었나?"를 남기기도 했다.
-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로 알려져 있다.
- 2000년 한 조사에서 그는 역사상 가장 영화 티켓을 많이 판매한 남배우 역대 3위로 선정되었는데 무려 10억 7790만 개를 팔았다고 한다. 그의 위에는 11억 6830만 개를 판매한 클라크 게이블과 11억 1400만 개를 판매한 존 웨인 뿐이었다. 이 아래에 동시대의 전설적인 배우들만 해도 제임스 스튜어트, 케리 그랜트, 헨리 폰다 등이 있으니 가수를 겸업 하면서 이런 판매량을 올린 빙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 라스트 네임으로 잘 불리지 않는 인물 중 하나이다. 보통 미국인들은 성인 라스트 네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나, 빙 크로스비는 이름인 '빙'으로 주로 불린다. 이후 대중 음악계의 왕좌를 차지한 가수들이 대부분 라스트 네임으로 불린 것을 생각하면(예를 들어 프랭크 시나트라는 시나트라로, 마이클 잭슨은 잭슨으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27] 동생 밥도 상당히 성공했던 편이라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인다.
- 사망 6주 전에 두 세대 뒤의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요절하자 관련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경마도 했었다. 1937년부터 델 마 서러 브레드 클럽의 일원이었고, 캘리포니아와 아르헨티나에 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를 기리는 차원에서 델 마 경마장에서는 빙 크로즈비 스테이크스라는 이름의 경기를 개최하고 있다.
[A] 샷건으로 자살.[A] [3] 역사상 티켓 판매량 3위이다. 이는 동시대의 쟁쟁한 배우들인 제임스 스튜어트나 캐리 그랜트 등을 넘는 수치이다.[4] 이는 당대 유명 대통령들과 재키 로빈슨, 월트 디즈니 등을 모두 합친 것이다.[5] 대니 케이(Danny kaye) 주연의 크리스마스 영화로 잘 알려졌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제일 많이 팔린 싱글 음반이다. 무려 5000만 장을 팔았다고. 빙 크로즈비의 위력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노래가 유명해서 크로즈비의 레코드가 많이 팔린 게 아니고, 당대 최고 스타(프랭크 시나트러는 엘비스 프레슬리급의 신드롬을 일으켰으나 아직 크로즈비의 위치에 오르진 못했다. 40년대까진 그래도 크로즈비이 더 우위였다. 록 음악으로 치면 1964년 당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킨 직후의 비틀즈와 당시 이미 전대미문의 레전드였던 엘비스 프레슬리와의 관계가 비슷하다.)였던 크로즈비가 취입했기에 이 노래가 캐럴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참고로 2위는 3000만 장으로 꽤 압도적인 차이다. 앨범의 경우 마이클 잭슨의 Thriller가 6600만 장으로 압도적인 1위다.[6] Bob Crosby. 1913 ~ 1993. 1950년대 가장 인기있는 미국 연예인 중 한 명이었으며, 1960년 친형과 함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헌액 분야는 텔레비전과 라디오.[7]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음악계 최초의 슈퍼스타가 프랭크 시나트러라고 알려져있었으나, 실제로 최초로 압도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는 빙 크로즈비가 원조이다. 프랭크 시나트러는 조금 뒤 시대이며, 20세기 내내 활동하며 말년까지 노익장을 과시하였고, 스탠다드 팝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우리나라에서 전설로 유명한 것.[8] 공교롭게도 밥 호프와는 1903년 동갑이자, 영화도 같이 찍은 적이 있는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9] Bill Murray.[10] Mario Lanza.[11] 대표적으로 야구의 타이 콥. 그가 사망할 때인 1961년까지는 사람들 모두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것에 대해 타이 콥이라고 여겼으나 훗날 세이버메트릭스의 창안, 홈런이라는 기록의 가치 등이 높게 평가되며 현재는 베이브 루스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타이틀에 부정하는 이 없이 올라와있으나 역대 최초의 올타임 레전드 선수로는 사이 영 등을 제외하면 타이 콥이 가장 자주 언급된다. 지금 시점에서도 멀티 엔터테이너의 대명사는 프랭크 시나트러이지만 당시에는 빙 크로즈비가 최고로 여겨졌으며, 동시에 최초의 멀티 엔터테이너라는 점은 지금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다.[12] 2013년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영화 등재.[13] Road to 1/7. 도러시 러무어, 밥 호프 이후 시리즈까지 일괄 출연. 찰스 코번, 앤서니 퀸 출연.[14] Road to 2/7. 유나 머클 출연.[15] 밥 호프, 도러시 러무어, 오토 프레밍어 출연.[16] Road to 4/7.[17] 빌리 와일더 연출/공동 대본. 조운 폰테인 출연.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래머폰 소재.[18] 테이 가넷 연출.[19] 찰스 코번, 로버트 스택 출연.[20] 프랭크 캐프러 연출.[21] 프랭크 캐프러 제작/연출. 제인 와이먼, 프랜쵸우 토운 출연. 루이 암스트롱, 도러시 러무어 본인 역.[22] Road to 6/7.[23] 제인 와이먼, 에설 배리모어, 내털리 우드 출연.[24] 조지 시튼 연출. 그레이스 켈리, 윌리엄 홀든 출연.[25] 도널드 오코너 출연. 시드니 쉘든 대본.[26] 밴 헤플린 출연.[27] 예외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빙처럼 퍼스트 네임 엘비스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