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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The Cathedral Church of Virgin M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명동대성당 | 明洞大聖堂 | |
기본 정보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명동2가) |
종교 | 가톨릭 |
교구 | 서울관구 서울대교구 |
지위 | 주교좌성당(Cathedral) |
주임사제 |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2023~현재) |
수석 부주임사제 | 나창식 안드레아 신부(2024~현재) |
홈페이지 | 공식 홈페이지 |
건축 역사 | |
건축가 | 외젠 코스트 신부 빅토르 루이 푸아넬 신부 |
착공 | 1892년 5월 8일 ([age(1892-05-08)]주년) |
완공 | 1898년 5월 29일 ([age(1898-05-29)]주년) |
축성 | 1898년 5월 29일 ([age(1898-05-29)]주년) |
건축 정보 | |
양식 | 네오 고딕(고딕 리바이벌) |
면적 | 1,668 m2 |
전체 길이 | 69 m |
전체 너비 | 28 m |
종탑 높이 | 45 m |
언어별 표기 | |
라틴어 | Ecclesia Cathedralis Myeongdong Cathedralis Ecclesia Immaculatae Conceptionis Mariae Virginis in Myeongdong |
영어 | Myeongdong Cathedral Cathedral Church of Virgin M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in Myeongdong |
프랑스어 | Cathédrale de Myeongdong Cathédrale Notre-Dame de l'Immaculée Conception |
스페인어 | Catedral de Myeongdong Catedral de la Virgen María de la Concepción Inmaculada |
대한민국 사적 제258호 | |
서울 명동성당 서울 明洞聖堂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천주교 / 성당 |
지정일자 | 1977년 11월 22일 |
소유자 (소유단체) | (재)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 |
관리자 (관리단체) | 명동성당 |
<colbgcolor=#7a0039> 명동성당 본당[1] |
명동성당 내부[2] |
[clearfix]
1. 개요
명동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 건축 양식은 네오 고딕을 따르고 있다.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무염시태, 無染始胎)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고, 줄여서 '명동대성당', '명동성당'으로 부른다. 1898년(광무 2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유적지로 사적 제258호에 지정되어 있다. 중림동 약현성당, 답동성당, 계산성당, 전동성당, 공세리성당 등과 더불어 구한말에 지어진 대표적 고딕 양식 성당으로 분류된다.
2. 역사
2.1. 성당의 건설
성당이 있는 명동 언덕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으로 '명례방'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전례가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김범우 토마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 예식을 드렸다. 포도청 당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했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그 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해인 1886년부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나서 새로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 이 명동성당이다.
건축 당시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명동성당의 언덕 아래에 왕실의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永禧殿)이 있어서 풍수상 곤란하다."라며 반대해서 건축이 지연되었다. 또한 성당을 짓는 실무 기술자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귀국해버려서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프와넬 신부는 건축 당시 명동성당, 전동성당, 안성성당을 설계 및 감독하였다.
2.2. 일제강점기
<colbgcolor=#7a0039> 일제강점기 명동성당 |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민간 쇠붙이 생필품이나 철로 등과 마찬가지로, 군수품으로 쓴다며 종탑의 종을 공출당할 뻔했다. 이때는 가톨릭 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자에게 금속품을 일제에 헌납할 것을 장려하던 시절이다. 이에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는 종을 치는 끈을 거두고 종탑을 폐쇄했다. 그래서 종은 무사했지만, 대신에 성당 제대 앞에 있던 철재 영성체 난간(제단과 신자석을 분리하는 분리대)이 뜯겨져 목재로 교체해서 지금에 이른다. 6.25 전쟁 때는 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위기를 모면했다. 전쟁 당시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은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국 가톨릭에 제안했다. 하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 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 그 후 1947년, 1973년, 2009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colbgcolor=#7a0039> 이재명 의사 의거비 |
2.3. 해방과 민주화 운동 시기
<colbgcolor=#7a0039> 1959년 3월 명동 일대를 촬영한 사진. 멀리 명동성당이 보인다. |
2.4. 교황의 방문
1984년 명동성당은 성당 건립 이래 가장 큰 손님을 맞는다.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행사 당일인 5월 6일 대회장에 가기에 앞서 오전 8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성당 오른편에 있는 명례방 집회 성화와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이벽 세례자 요한ㆍ이승훈 베드로ㆍ김범우 토마스 성화, 교황 방한 기념 부조를 축복했다. 이어 제대 앞에 마련된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한국 천주교회와 한민족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2014년 사목방문차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을 방문하였다. 교황은 명동성당 내 꼬스트홀에서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진 후 대성전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하면서 남북한의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기원했다.
3. 시설물
자세한 내용은 명동성당/시설물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역대 주임신부
순서 | 이름 | 재임기간 | 순서 | 이름 | 재임기간 |
1대 | 백규삼(장 마리 귀스타브 블랑)[4] | 1882~1890 | 2대 | 정가미(카미유 외젠 두세) | 1890~1892 |
3대 | 박도행(빅토르 루이 푸아넬) | 1892~1926 | 4대 | 우일모(마리 피에르 폴 빌모) | 1926~1942 |
5대 | 이기준 토마스[5] | 1942~1950 | 6대 | 장금구 요한 금구 | 1950~1957 |
7대 | 양기섭 베드로 | 1957~1962 | 8대 | 이종순 라우렌시오 | 1962~1963 |
9대 | 신인식 바오로 | 1963~1964 | 10대 | 황민성 베드로 | 1964~1965 |
11대 | 이계중 요한 | 1965~1968 | 12대 | 이문근[6] 요한 | 1968~1971 |
13대 | 최석우 안드레아 | 1971~1972 | 14대 | 김몽은 요한 | 1972~1978 |
15대 | 경갑룡 요셉 | 1978~1982 | 16대 | 김수창 야고보 | 1982~1986 |
17대 | 김병도 프란치스코 | 1986~1988 | 18대 | 정의채 바오로 | 1988~1988.9 |
19대 | 조순창 가시미로 | 1988.9~1994 | 20대 | 장덕필 니콜라오 | 1994~1999 |
21대 | 백남용 바오로 | 1999~2003 | 22대 | 이성만 토마스 | 2003~2004 |
23대 | 박신언 라파엘 | 2004~2010 | 24대 | 여형구 미카엘 | 2010~2013 |
25대 | 고찬근 루카 | 2013~2018 | 26대 | 조학문 바오로 | 2018~2023 |
27대 |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 2023~현재 |
5. 접근성 및 교통
명동의 최동단이기 때문에 4호선 명동역보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이 가깝다. 명동에서 올 때는 오르막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걸어오는 경우라면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서 오는 편이 더 낫다.5.1. 교통
5.1.1. 도시철도
명동(우리금융타운)역 | |||||
4호선 (424) |
명동성당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철도역으로, 8번 출구와 가까이 있는 옛 계성여자고등학교 후문 쪽으로 와서 옆길을 이용하면 빠르게 갈 수 있다. 그 길로 가다보면 '명동성당 지름길' 이라며 간단한 안내 표시도 나온다. KTX나 ITX-새마을, ITX-청춘, 무궁화호 같은 일반열차를 이용해 서울역과 신용산역, 용산역에서 환승해 갈 수 있다.
을지로3가(신한카드)역 | |||||
2호선 (203) | |||||
3호선 (330) |
고속버스로 서울고속버스터미널(경부·영동선), 센트럴시티터미널(호남선) 및 시외버스로 서울남부터미널 그리고 SRT를 이용해 수서역에서는 3호선을 이용해 을지로3가역 12번 출구로 나갈 수 있다. 고속터미널에서 올 때, 143번이나 401번을 이용해 롯데영프라자 정류장에서 내리는 대안경로가 있다.
5.1.2. 버스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dddddd><tablebgcolor=#ffffff,#1f2023> 남대문세무서.서울백병원/서울백병원.국가인권위.안중근활동터/남대문세무서.국가인권위원회/을지로2가/명동입구.롯데영프라자/명동역(02001·02002·02140·02141·02142·02149·02150·02153·02158·02159·02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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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례
미사와 시간 전례, 세례/견진/성품/혼인성사와 여러 신심 행사는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 모두 대성당에서 봉헌된다. 정기적인 미사는 대부분 명동성당 소속 사제가 주례하나, 주교좌성당 답게 대축일 혹은 교구 행사에 서울대교구 주교단 집전으로 봉헌되기도 하며 가톨릭평화방송에서 중계한다.미사 | 시간 |
주일미사 (일요일) | 07:00, 09:00(영어), 10:00(아미쿠스 주일학교), 11:00 12:00(교중), 16:00, 17:00, 18:00 19:00(청년), 21:00 |
주일미사 (토요일) | 18:00, 19:00 |
평일미사 | 07:00, 18:00, 19:00 (월요일은 19시 미사 없음) |
성지미사 (월~토) | 대성당 10:00 |
성무일도 | 시간 |
아침기도 | 평일 07:40 |
낮기도 | 평일 11:45 |
저녁기도 | 평일 17:20 |
고해성사는 성당 뒤편 영성센터(舊 계성여고 교정)에 있는 상설 고해소에서 진행된다.
고해성사 | 시간 |
토요일 · 주일 | 10:00~20:00 |
월요일 | 13:00~17:00 (성직자, 수도자만 가능) |
화~금 | 11:00~20:00 |
유아세례 | 시간 |
매월 첫째 주일 | 13:30 (직전 금요일까지 접수) |
6.1. 미사 강론
보통 미사의 강론은 그 미사의 주례 사제나 공동집전 사제가 한다. 그러나 명동성당의 주일에는 다른 본당에서는 볼 수 없는 강론 전담 사제가 있다. 명동 성당은 사제도 많고 주일 미사가 많으며 여러 활동이 바쁘게 돌아간다. 모든 사제가 각자 강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강론 전담 사제를 두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에 그렇게 한다. 주일 미사 강론 전담 사제는 명동 성당 사제들(주임, 수석부주임, 부주임, 보좌)이 돌아가면서 담당한다.미사 집전 사제와 강론 담당 사제가 다르면 강론 담당 사제가 복음 봉독과 강론만 하고 퇴장한다. 즉 강론 담당 사제가 써 준 강론을 미사 집전 사제가 대신 읽는 게 아니라 강론을 쓴 강론 담당 사제 본인이 직접 강론을 한다.
7. 21세기 명동성당 개발 계획
<colbgcolor=#7a0039> 명동성당 개발 관련 《조선일보》 기사[7] |
2015년 1월까지 진행되었었던 1단계 사업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업무공간으로 활용되는 교구청 신관이 지하 4층~지상 10층으로 증축되었고[9], 초기 명동성당의 경사로가 복원되었으며 주차장 등으로 쓰이던 상당 진입부가 광장으로 조성되었고, 대신 교구청 신관 지하에 주차공간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차량으로 인해 혼잡해보이던 명동성당 진입부 부분이 상당히 깔끔하게 바뀌었다. 암튼 공사 전 우려했던 것에 비해 반응은 좋은 편으로[10], 교구 사무 공간이 증축되고 지하 상가가 새로 생겼다. 사실 상가라고는 하나 내부가 광장처럼 넓고, 서점과 카페 위주로 입점하여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1단계 공사가 진행되면서 역시나 이런저런 문제점이 발생했다. 부지 전체가 아니라 대성전만 문화재라서 대성전보다도 오래된 주교관이 문화재가 아닌 것, 땅 파는데 대성전 안 무너지도록 고려 제대로 했는지 논란, 조선시대 유적 + 근대유적 다 묻혀 있는데 무시하고 부숴버린 등. @ 이에 대해 시공사인 대우건설에서 서울대교구와 협의없이 공사 진행의 편의를 위해 진행하다 생긴 문제라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2단계 사업단계에서는 교구청 신관이전으로 여유공간이 생긴 교구청 별관 수선이 이루어 졌다. 현재는 3단계 사업단계로, 계성여자고등학교의 이전으로 생긴 빈 공간에 교구 업무타운 조성과 대강당 증축 등이 추진되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 4단계는 1960년대 지어진 가톨릭회관 하부 일부를 수선하고 교육관을 철거하게 된다. 그 후 선교센터를 구축하고 수선한 가톨릭회관 하부 필로티에 쌈지공원이 생길 예정이다.
이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이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사제인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이제 명동성당에 오면 솔직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 성지가 더 이상 아니다.
원형을 지키기는커녕 집회와 시위를 막으려고 넓은 길을 좁혀서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화단까지 조성해 놓고,
상업시설까지 들어와 죽 치고 있는 게 너무 꼴 보기 싫다!! 자본주의의 때가 껴도 너무 끼었다.
자꾸만 보수 개신교 대형 교회의 모습을 벤치마킹 하는 것 같다."
원형을 지키기는커녕 집회와 시위를 막으려고 넓은 길을 좁혀서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화단까지 조성해 놓고,
상업시설까지 들어와 죽 치고 있는 게 너무 꼴 보기 싫다!! 자본주의의 때가 껴도 너무 끼었다.
자꾸만 보수 개신교 대형 교회의 모습을 벤치마킹 하는 것 같다."
8. 논란 및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명동성당/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9. 기타
<colbgcolor=#7a0039> 《가톨릭튜브》에서 제작한 명동성당 종 관련 영상 |
-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천주교 성당답게 삼종 기도를 바치는 오전 6시, 낮 12시, 오후 6시에 종을 울린다. 대성전 종탑에 종이 걸려 있는데 현재 걸려 있는 종은 2001년에 새로 설치한 종이며 역대 명동성당의 종 중에서 세 번째로 달린 종이라고 한다. 첫 번째로 설치돼 사용됐던 종은 성당이 지어졌던 1898년부터 1965년까지 있었고 두 번째로 설치돼 사용됐던 종은 1965년에 명동성당 교우들의 정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두 번째 종은 현재는 성당 서쪽 문화관 천장에 달려있다. 현재 종탑에 걸려 있는 세 번째 종은 1년에 단 하루만 울리는데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때만 실제로 타종하며[11] 평상시에는 녹음해둔 종소리를 시간에 맞춰서 방송으로 울린다. 실제 타종을 주님 성탄 대축일에만 하는 것은 건물의 안전 때문이라고 한다. 종을 칠 때 퍼지는 진동과 음파가 자칫 건물의 벽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에 실제 타종 횟수가 적은 것이다.
- 2002년에는 성당 내부 기둥에 벽걸이 TV를 설치해, 전례 중 제단에서 진행되는 여러 장면을 성당 구석에서도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전에는 기둥 때문에 제단(주례석, 독서대, 제대 등)을 보기 어려웠으나, 모니터가 설치된 뒤로는 이러한 불편함이 사라졌다.
-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하나 있는데 랜드마크로서의 상징성도 더 높지만 그 정류장을 코앞에 끼고 있는 중앙극장에게 그 정류소 명칭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극장 문서 참조.
- 한국 최초의 본당인 만큼 사실상 속인적 본당으로 간주되어 신자들의 거주지와 상관없이[12][13] 교적이 2만 개 넘게 소속되어 있으며[14], 1년에 한두 번 정도 모집하는 평범한 본당들과 달리, 2월과 8월을 제외하면 매월 예비신자 교리반을 모집한다. 사실 예비신자 교리반 이수는 꼭 거주지 관할 본당이 아니어도 큰 문제가 없긴 하다. 세례를 받고 나서 주소지 관할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면 되니까. 명동성당은 다른 성당과 다르게 기존 신자의 예비신자 교리 청강을 막고 있다. 천주교 군종교구 신병교육대 성당 급의 영세율을 나타낸다. 그리고 견진성사 교리반도 1년에 2회(상반기, 하반기) 모집한다.
- 명동성당 영어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경우, 교적에 상관없이 참석할 수 있다.[15] 한남동 국제성당과 다른 점은, 국제성당은 교적 제도 자체가 없지만 명동성당은 스스로의 교적을 가진다는 점이다. 교적과 상관없이 명동성당에서 영어미사를 드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신자는 교적을 본인 관할 성당에 둬야 하고 판공성사는 본인의 교적이 등록된 관할 성당에 내야 한다.
- 최초의 성당인만큼, 최초의 스테인드글라스도 가장 먼저 설치됐다. 프랑스 툴루즈의 제스타 공방에서 제작되어 설치된 것인데,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많은 것이 깨져 수습한 뒤 1898년 성당 축복식에 맞춰 설치했다. 그 후 명동대성당이 6.25 전쟁으로 크게 파손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도 마찬가지가 됐지만 오랫동안 손을 대지 못했다. 그 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한 것을 계기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수하고 복원했다.
- 2019년 11월 기준 명동성당에 교적을 둔 세대수는 총 19,367세대이고 이 가운데 교무금을 책정한 세대수는 2,947세대로, 교무금 책정률은 약 15%정도이다.
- 대성전이 부제/사제 서품식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협소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제/사제 수품 예정자가 최소 수십 명이라 각 수품자의 가족, 친지, 출신 성당 소속 신자들 등 수많은 인원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은 대부분 잠실실내체육관, 올림픽공원에서 열린다(…) 그래서 2011년부터 총 4단계에 걸친 대대적인 종합개선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각 수품자의 부모만 현장 참석을 허용하고 나머지 인원은 참석을 불허하여, 원칙대로 명동성당에서 서품식이 열렸다. 또한 주교 서품식이나 수도회 사제 서품식[16]은 종종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 현재 장궤틀이 없다. 무릎 꿇는 행위를 칭하는 '장궤'는 보통 때의 미사 중에는 두 차례 행하며(자세한 내용은 미사/성찬 전례 문서의 무릎 꿇는 행위를 보존해야 문단 참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주님의 수난기' 봉독 중에도 한 차례(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급하는 대목) 행한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중에는 매우 자주 하며, 그 외에도 미사 밖의 여러 신심 행사는 물론 개인적인 기도를 바칠 때도 장궤를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나라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유독 한국 천주교는 새로 짓는 성당은 물론이고 기존 성당에 있던 장궤틀도 없애고 있는 추세다. 신자 수에 비해서 성당 규모가 작다 보니, 좌석 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장궤틀을 아예 없애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실 현재 많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장궤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새로 짓는 성당 중에는 아예 장궤틀이 없는 곳이 많고, 상징적으로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에 장궤틀이 없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중림동 성당이나 혜화동 성당처럼 장궤틀을 뜯어내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곳도 있고, 이문동 성당처럼 새로 지으면서 장궤틀을 갖추는 곳도 있다.
- 명동성당에 있는 성물방은 가톨릭출판사 및 바오로딸 등 기타 업체에서 관리하고 있다. 대성당 옆 건물에 있는 성물방 하나와 가톨릭회관 1층에 있는 성물방 하나는 가톨릭출판사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나머지 성물방들은 기타 업체, 출판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미사 직후에 잠깐 성당 평신도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평범한 동네 성당 성물방과 다르게, 이쪽은 별도의 상근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카드 결제 가능.
- 명동의 랜드마크이다 보니 천주교 신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17]
[1] 사진 출처.[2] 사진 출처.[3] 명동성당에서 있던 일은 아니지만 10.26 사건 이후 YWCA 위장결혼식 사건도 바로 앞에 있는 빌딩에서 있었다.[4] 제7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명동성당을 짓던 중, 1890년에 사망하였다.[5] 명동성당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6] 여러 성가를 작곡한 작곡가이며, 영화 포화속으로의 모티브가 된 이우근 학도병의 형이기도 하다.[7] 《조선일보》.[8] 명동관광특구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계획이라는 이유로, 상당수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9] 십자가가 있는 첨탑보다 낮게 지어야 하다보니 10층으로 결정되었다[10] 재개발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래 비판과 견해에도 후술되어 있듯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상업적인 장소로 전락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11]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중 대영광송 때는 제대 뒤에 있는 제대종을 친다.[12] 그러나 2015년부터는 명동성당 근처가 거주지가 아니면 명동성당으로의 교적 이동이 쉽지 않다고 한다. 역으로 명동성당 근처에 사는 사람이 다른 성당에 교적을 두는 것 또한 매우 어렵다. 2018년 12월 기준 명동성당에 문의한 결과, 일반성당과 마찬가지로 명동성당 주변에 주소지를 둘 경우에만 교적이동이 가능하며, 그 외의 경우는 명동성당에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하고 세례받고 나서 교적을 명동성당에 잔류시키기를 희망하는 경우만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수료 후에는 원하면 주소지 근처 성당으로 재배치된다). 다른 대성당도 마찬가지로, 부산교구 남천성당의 경우 해당 성당 근처에 사는 사람만 교적을 둘 수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내에서는 대성당 관할지역에 살지 않는 한 일반적인 미사를 목적으로 대성당에 갈 일이 별로 없다. 같은 이유로 다른 성당들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그쪽에 교적 넣기가 쉽지 않다.[13] 반면에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경우 정동ㆍ서울시청 근처가 아니라도 서울통근권에 살고 있다면 해당 주교좌성당에 교적을 두는 것이 자유롭다. 한국 성공회의 경우 본인의 선택에 따라 집 근처 본당에 교적을 둬도 되고 주교좌성당에 교적을 둘 수도 있는 것이다.[14] 명동의 주민등록 인구가 1만 명 선이다(…)[15] 원래 어느 나라의 어떤 성당이든 교적과 상관없이 미사는 참석할 수 있다.[16] 대표적인 곳이 한국외방선교회.[17] 무종교인들 중에서도 건축양식에 관심있는 이들이 특히 명동성당을 많이 찾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