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에 개최된 원예박람회에 대한 내용은 1993 슈투트가르트 엑스포 문서 참고하십시오.
역대 엑스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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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부에노스 아이레스 엑스포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취소 ■ 의정서 이전 박람회 ■ 등록박람회 ■ 인정박람회 |
<colcolor=#fff> 1993 대전 세계 박람회 1993 大田 世界 博覽會 The Taejon International Exposition, Korea 1993[1] | |||||||
<colbgcolor=#ef382c> 이칭 | 대전엑스포 '93 (大田엑스포 '93) Taejon Expo '93 | ||||||
BIE 구분 | 인정박람회 | ||||||
행사 기간 | 1993년 8월 7일 ~ 11월 7일 | ||||||
개최국 | [[틀:깃발| | ]][[틀:깃발| ]][[대한민국| ]]||||||
개최지 | 대전직할시 대덕연구단지 도룡지구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엑스포과학공원) | ||||||
전시 면적 | 902,479.339㎡(273,000평) | ||||||
주제 | 새로운 도약에의 길 (The Challenge of a New Road of Development) | ||||||
마스코트 | | 꿈돌이 | ||||||
주제가 | 그날은 - 코리아나 | ||||||
참가국 |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 ||||||
입장객 | 14,005,808명[2] | ||||||
개회 선언 |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 | ||||||
주최 | 대전세계박람회조직위원회 | ||||||
홈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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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징3. 인기 및 파급력4. 유치 과정5. 역대 조직위원장6. 전시관
6.1. 도약관6.2. 롯데환타지월드6.3. 미래항공관6.4. 번영관6.5. 북한물산관6.6. 소재관6.7. 시도관6.8. 우주탐험관6.9. 이매지네이션관6.10. 인간과 과학관6.11. 자기부상열차관6.12. 자동차관6.13. 자연생명관6.14. 자원활용관6.15. 재생조형관6.16. 전기에너지관6.17. 정보통신관6.18. 정부관6.19. 조폐문화관6.20. 주거환경관6.21. 지구관6.22. 테크노피아관6.23. 한국IBM관6.24. 한국후지쯔관6.25. 대전관6.26. 한빛탑6.27. 엑스포 아트홀
7. 대전 엑스포 참가국 및 국제전시관(폐막 후 모두 철거 및 철수)7.1. 참가국 및 전시출품국(1993년 당시 기준, 가나다순)
8. 그 외9. 폐막 이후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clearfix]
1. 개요
엑스포남문광장(엑스포시민광장) 방향으로 바라본 행사 당시의 풍경으로, 1993년 8월 7일(개장 당일)의 모습.[3][4] |
서울 올림픽이 열린 지 불과 5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된 대규모 국제 행사이다.[6]
2. 상징
3. 인기 및 파급력
위 영상에 등장한 자동차 로봇, 사물놀이 로봇은 첨단 로봇보다는 애니매트로닉스에 가깝다. |
세계 108개국과 33개 국제 기구, 대한민국의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다. 정부와 민간이 합쳐 1조 8천억 원을 들였고, 대한민국 국민 3명 중 1명 꼴인 1450만 명이 관람하여 대박을 쳤다. 덧붙여 대기업들이 주요 전시장을 후원했다. 대표적으로 럭키금성그룹이 테크노피아를, 삼성이 우주탐험관을 지원했다. 이 엑스포 하나 한다고 조차장인 대전조차장역에 엑스포역이라는 임시승강장까지 놓았는데도 사람이 꽉 찼을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 당시에는 밤이 되면 밤마다 레이저 기둥을 쏘아 올리는 건 기본이었다. 화려하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게다가 당시 12시 넘어서는 심야 영업 규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던 중이었으나 엑스포와 유성온천을 두고 있는 대전 유성구는 관광특구로 지정되어서 그런 규정에 해당되지 않았으므로, 12시쯤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노는 사람들까지 몰려와 유성구 지역은 다음날 새벽까지 말 그대로 난장판을 이뤘다. 당연하지만 엑스포 기간 동안 내내. 이들은 당시 유성의 궁동 지역을 '압구'궁동으로 부르기도 했다.[10]
1990년대에 지리적으로 대전에 가까운 지역을 넘어 전국의 국민학교[11]를 다닌 사람들은 많이들 가봤다. 또한 이듬해(1994년) 졸업반이었던 나이층의 학생들[12]은 이곳에서 졸업 앨범용 사진을 촬영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특히 개최지인 대전은 정도가 너무 심했는데, 특히 엑스포 회장에서 바로 걸어서 10분, 5분 거리에 위치한 대덕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대덕중학교, 대덕고등학교는 소풍 장소 50% 이상을 이 엑스포과학공원과 근처 국립중앙과학관으로 배정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엑스포가 열린 1993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약 7년 동안 엑스포 주변으로 소풍만 8번을 간 경우도 있을 정도. 바로 앞에 있는 대덕중학교의 경우 소풍을 가면 꼭 엑스포장으로 갔는데, 당시 소풍을 가면 사복을 함께 지참하였고, 아침에 엑스포장에 들어가면 가지고 간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둔산동으로 가서 놀다가 귀가 전에 다시 들어와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귀가하는 식이었다. 물론 다시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 다음날 엉덩이에 불 나는 학생도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 최초로 서울특별시가 아닌 지역에서 개최된 세계구급 행사로서, 방송 3사에서 전야제를 생중계하고 그밖에도 지상파 뉴스에서 꾸준하게 소식을 다루었다. 영화배우 소피 마르소가 방한하여 국제관 프랑스 부스에 방문한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특히 당시는 평일 낮방송 정파 시간이 있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방송이 나가지 않았는데, 엑스포 기간에는 방송 시간이 앞뒤로 30분 연장되어[13] 해당 시간에는 지상파 3사가 모두 엑스포 관련 뉴스와 콘텐츠 등을 방송했다.
당시 꿈돌이안내에서 운영되던 인터랙티브 키오스크는 Windows 3.1 기반이었으며, 터치스크린을 장착하고 있었다. [14]이를 통해 개별 전시관 방문을 예약할 수 있었는데, 이는 2000년대에 등장한 여러 테마파크에서 개별 어트랙션에 대해 실시하는 예약 제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약을 하기 위해 개장하자마자 사람들은 꿈돌이안내소로 우르르 달려갔다. 예약 제도를 실시하지 않는 전시관들도 있었는데 여기는 개장하자마자 전력질주로 뛰어서 줄을 서야 했다.
4. 유치 과정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노태우 정부는 바로 그해 말 새로운 업적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박람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올림픽을 개최한 개발도상국이 대규모 박람회 개최를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는 루트를 따라가기로 한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후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벤치마킹한 것. 중국도 일본의 사례를 다시 벤치마킹해서 2008 베이징 올림픽과 2010 상하이 엑스포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다만 일본과 중국은 등록엑스포를 개최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열린 인정엑스포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그래서 정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무역산업박람회'를 1991년 개최하려고 하지만, 유례 없는 대규모 행사를 위한 예산 배정에 대해 야당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결국 개최를 반대하던 측에서 내놓은 조건이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으라는 것. 당연히 "공인을 받을 리가 없지"라는 생각에 그러한 조건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과정에서 개최 연도가 2년 뒤인 1993년으로 늦추어졌다.
문제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는 엑스포 개최와 관련하여 1999년까지 엑스포 개최를 공인하지 않겠다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해놓은 상태였다. 즉, 각 국가에서 경쟁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그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회원국들을 압박[15]하는 한편으로 행사의 부실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직위원회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가 저예산의 신개념 엑스포[16]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즉, 앞으로 시행될 저예산 엑스포인 인정박람회의 원형으로서 대전 엑스포를 어필한 것이다.
물론, 모라토리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다. 특히 당시 국가 재정이 어렵던 미국[17]이 대표적인 국가였으며, 그러한 점을 각국 대표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다녔다. 오명 대전엑스포조직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전에 유럽에서 열린 몇 번의 엑스포들에서 미국관이 큰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은 엑스포를 "미국을 알아주지 않는 행사"라고 바라봤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1993년 2월에야 대전엑스포 참가를 결정하게 되는데, 단기간에 쓸 만한 전시관을 만들었다. 당시 SBS 8 뉴스 보도를 보면 단신으로 "오명 조직위원장이 미국 대표를 만나, 이 자리에서 미국 대표는 성공적인 엑스포 개최를 약속했습니다."란 내용이 나온다. 지금 보면 왜 저런 단신뉴스가 헤드라인에 올라왔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 반면, 당시 한국으로부터 금전적으로 많은 신세를 졌던 소련은 한국의 엑스포 개최를 반대하는 쿠바 대표를 조용히 구석으로 데려가 찬성하기 싫으면 기권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기권한 국가를 빼고는 모두 찬성하여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는 데에 성공했다.
당초 개최 장소로는 안산시가 유력했으나, 지방 균형 발전 차원에서도 그렇고 이왕이면 전국에서 1시간 내[18]에 당도할 수 있는 곳에서 박람회를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는 점, 그리고 마침 '대전에는 다른 곳으로 이전한 공군 기지의 활주로가 있으니 그 활주로에 천막을 치고 전시회를 열면 예산이 절약될 것 이라는 생각으로 대전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활주로에 천막치고 박람회를 개최하지는 않았다. 덧붙여 그 공군 기지는 지금 대전의 중심인 둔산신도시 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엑스포 개최 기간에는 한참 공사 중이었다. 참고로 그곳에 있었던 공군 기지는 다름 아닌 공군교육사령부로 1988년에 경남 진주로 이전.
저예산 신개념 엑스포의 원형이 될 것을 천명하여 국제박람회기구를 설득했지만, 결국 종합 엑스포의 규모를 가진 전문 박람회[19]가 되어버렸다. 즉 오늘날 인정박람회의 최대 전시 규모인 25만 ㎡의 두 배이자 여수 엑스포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만 ㎡의 전시 공간 규모로 완성된 것이다. 대전 엑스포가 인정박람회가 된 것은 소규모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해서라기보다는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기 위한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속아서(?) 한국 유치를 지지해준 인사들은 건설 현장을 방문해서는 전시관의 반은 걷어버려야 한다거나 하면서 분노했다는 듯. 대전엑스포 행사장 중에서 한빛탑이 있는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서측에는 한국의 기업들 전시관이 들어서 있고 우측에는 각 나라별 소형 전시관들이 몰려 있는 건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전시 부문을 빼면 딱 인정박람회 규모에 맞추긴 했다.
북한은 결국 불참했는데 이는 엑스포 개최 1년 전 제기된 미국의 북한의 핵 개발 문제 제기, 1993년 팀 스피릿 한미합동훈련 재개 및 북한의 NPT 탈퇴로 인해 남북관계가 급격히 나빠진 것이 크게 한 몫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초청 시도했던 것으로 외교문서에서 드러냈다. #
5. 역대 조직위원장
6. 전시관
편집은 가나다순. 2020년 기준 한빛탑과 전기에너지관, 정부관[20]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어 사라졌다. 전기에너지관과 정부관은 리모델링, 번영관은 대전컨벤션센터로 재건축되었고, 미래항공관은 제주도로 해체 이전하였다.6.1. 도약관
국내 5개 참가사가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시관으로 당시 금강제화, 동아오츠카, 유한킴벌리, 데이콤 등이 있었다. 금강제화는 금강제화 전시관을, 유한킴벌리는 숲속의 극장을, 동아오츠카는 포카리수족관을, 데이콤은 데이콤관, 유호 I.B.E.는 파이워터시스템관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폐막 이후 옛 정부관 건물로 자리를 이전하였다.
현재 도약관이 있던 자리에는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아이호텔 건물이 세워져 있고 일부분은 대전컨벤션센터의 부지로 들어가 있다.
6.2. 롯데환타지월드
자세한 내용은 환상의 오디세이 문서 참고하십시오.6.3. 미래항공관
대한항공이 제공하였으며 격납고처럼 생겼다. 입구에는 '창공-91'이라는 지금은 반쯤 흑역사가 되어버린 자체 개발 항공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민항기 시뮬레이터를 체험해 볼 수 있었으나, 단 두 명만 탈 수 있는 구조상 선택받은(!) 어린이들만 조종사 시트에 앉아볼 수 있었고, 메인쇼로는 360도 원통형으로 생긴 슬라이드 영상물이 상영되었는데, SK의 이매지네이션관 프리쇼(메인쇼 전에 보여주는 일종의 전채요리)와 비슷했지만 이매지네이션관의 경우 이음새가 없는 스크린이고 이곳의 스크린은 이음새가 있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전시관에는 당시 계열사였던 한진중공업 철도 차량 부문[21]에서 제작한 새마을호 동차에 쓰인 실물 크기의 대차 모형도 전시되어 있었다.
상설관으로 건립되지 않았으나, 대한항공 측에서 건물을 버리긴 아까웠는지 폐막 후 제주도의 정석비행장에 해체 이전(!)하여 정석항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대한항공은 도우미들의 교육 및 운영도 맡았다.
현재 사이언스콤플렉스와 기초과학연구원 부지 사이 도로가 과거 미래항공관의 자리였다.
6.4. 번영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제공한 전시관으로 국제전시구역 입구에 있었던 무역전시관이었다. 행사 종료 이후 KOTREX라는 이름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이 건물에서 감동의 골마로 유명한 EVER 스타리그 2004 결승전이 열렸다.
이후 소유권이 KOTRA에서 대전관광공사로 넘어가며 대전무역전시관으로 이름이 한번 더 변경되었다가 2019년 연말에 철거되었고 대전컨벤션센터 제2전시장으로 재건축되었다.
6.5. 북한물산관
도약관 옆에 위치해있는 전시관으로 북한의 물자 및 물품들을 한 곳에 전시하였던 곳이며 대전엑스포조직위원회가 특별히 개설한 전시관이었다. 당연히 북한은 대전엑스포에는 불참하였고[22], 위원회 측에서 꾸민 곳이다.
6.6. 소재관
포항종합제철(現 포스코)이 제공하였다. 당시 기술로는 상당히 잘 만든 3D 효과 홍보 영화 '환상적인 소재의 세계'(영상)가 주요 볼거리로, 이 영상은 나중에 대전MBC에서 과학 다큐멘터리만 만들었다 하면 주야장천 자료 화면으로 우려먹었다. 또한 지금 영화관에서 3D화하여 틀어주는 2D 영화와는 다르게, 초장부터 자극적인 3D 효과를 노리고 만든 것이라서 쇳물이 공중에서 눈앞으로 떨어지거나 벌겋게 달궈진 철도 레일이 눈앞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장면에서는 기절하는 관객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소재관도 삼성그룹의 우주탐험관이나 LG의 테크노피아관만큼은 아니지만 입소문이 나서 상당히 인기가 높았다.
폐관되기 전까지는 과학공원 행사가 있을 때만 행사장으로 이용되었다.
현재 엑스포타워의 C 게이트 진입로 앞 공터가 과거 소재관이 있었던 위치였으며, 아직까지는 신세계백화점의 임시 야외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6.7. 시도관
국내 15개 시·도[23]에서 제공하였다. 각 시도별로 부스를 만들고 홍보했다. 상설관이 아니므로 폐막 후 바로 철거.
현재 이 위치에는 대전교통문화연수원의 야외체험장이 마련되어 있다.
6.8. 우주탐험관
삼성물산이 제공한 전시관이다. 공간을 도약('트위스터 점프'라 명명했었다.)해서 우주여행을 하는 체험형 영상물[24]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전시관 주변에는 태양계의 행성들을 조각해둔 유성공원이 있었는데[25],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명왕성도 어엿히 태양계 행성의 일원으로 함께 하고 있었다. 신기전의 복원에 삼성그룹의 지원이 있었는데, 우주탐험관 건립을 비롯한 삼성그룹의 엑스포 지원 사업의 일환이었다. 거기에 미래형 주거 공간인 '휴먼테크'의 장에서는 이불과 시트 없이도 따뜻한 침실이 있었다.
물론 출구에는 삼성답게 HD TV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8분마다 240명이 입장할 정도로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지만 전시관 내부를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인원의 흐름을 조절하는 등 나름대로 운영을 잘했다는 평가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노피아관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곳이라 개최 초기인 8월엔 4-5시간씩은 줄을 서서 봐야 했다. 당시 우주탐험관의 선장 로봇 '스타파인더'의 목소리는 성우 장정진이었다.
그러나 엑스포 폐막 이후에도 테크노피아관 등처럼 한동안 같은 영상물을 우려먹기 식으로 상영하고 시설물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있는 바람에 관람객들의 원성이 잦았다고 한다. 2003년경 폐관 이후 철거 이전까지 천장 구조물이 떨어지고 녹이 슬고 지하에 물이 차는 등 거의 흉가를 방불케 했다.
옆에 있던 자동차관도 같이 폐관하자 자동차관 전시물로 쓰던 차를 우주탐험관 건물 안에 배치했다. 거의 창고 수준. 대표적으로 세피아 EV, 시발자동차[26], 세피아 컨버터블, 스포티지 랠리카 등이 알려져 있다.
우주탐험관이 있던 자리는 현재 기초과학연구원의 부지로 들어가있으며 행정동인 A동 북쪽 공터가 우주탐험관 자리였다.
2024년 현재 기초과학연구원 측에서 이 땅에 연구동을 추가로 짓고 있다.
6.9. 이매지네이션관
선경그룹(現 SK그룹)이 제공하였다. 대한항공관의 메인쇼와 비슷하지만 이음새 없는 스크린의 슬라이드 쇼가 프리쇼로 제공되었고, 메인쇼로는 제트추진연구소의 협조로 만들어진 옴니맥스 애니메이션 행성으로의 여행이 상영되었다. 선물 코너에서는 SKC가 배급하던 패키지 게임을 판매했다.
폐관되기 전까지는 돔 영상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돔 아이맥스관이었다. 행성으로의 여행이 그대로 상영되고 있었다. 미국 월트 디즈니 월드나 서울랜드에 모양이 비슷한 조형물이 있다. 실제로 엑스포장 설계시 존치 구역은 테마파크화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올랜도 디즈니 엡콧 설계를 참고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의 기초과학연구원 B,C동 사이 중앙 로비가 이매지네이션관이 있었던 곳이다.
6.10. 인간과 과학관
대우((주)대우)가 제공하였다.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입체 아이맥스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대우전자가 개발한 HDTV 등 당대 최첨단 가전제품들을 전시했다. 1999년 대우그룹의 부도로 휴관하였으며, 2018년이 돼서야 철거되었다.
지금 이 위치에는 엑스포타워의 VIP, 호텔 이용객용 지상주차장이 있다.
6.11. 자기부상열차관
현대그룹(현대정공[27])이 제공하였다. 현대정공(현재의 현대로템)이 개발한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약 3㎞에 이르는 궤도를 이동하는 것이었다. 자기부상열차가 40인승이라 많은 관람객을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된 자기부상열차가 한국의 여름 날씨(장마 등 호우)에도 불구하고 무사고 운행하였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전시관 안에는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컨셉트카 HCD-2(은색)가 전시되어 있었다.
엑스포 폐막 이후 관리비 부담을 이유로 한동안 운행을 중단하였으나 2011년 신형 열차로 교체되어 국립중앙과학관 표를 소지한 예약자에 한해 탑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전엑스포 재건축 사업 및 운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모두 폐지되어 철거되었다.
자기부상열차관이 있었던 곳에 현재는 기초과학연구원의 IBS과학문화센터가 들어서 있다.
6.12. 자동차관
기아자동차(現 기아)가 제공하였다. 시뮬레이터 시설을 통해 서울 하늘을 시속 400㎞로 날아다니는 미래의 자동차 '멘트로스'를 체험할 수 있었다. 가장 특징적인 전시물은 로보트카 애니매트로닉스였는데 세피아가 로봇으로 변신하면서 "지구는 후손으로부터 여러분들이 빌린 것입니다"라고 설명을 했다. 변신이라고 해서 오늘날의 트랜스포머 같은 수준은 아니고, 얌전히 엎드려(?) 있던 세피아 자동차가 갑자기 일어서면서 차 바닥 안에 숨겨져 있던 로봇 형상이 보이는 정도. 엑스포 이후에도 영구적으로 운영될 예정으로 건설되었으나 모 기업인 기아그룹이 1997년에 부도나면서 한동안 닫혔다가 2004년경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전교통문화연수원이 들어섰다. 자동차관과 별도로 서문에서 관람객들 대상으로 자동차 정비 서비스도 제공하였다.
그러나 자동차관 철거 이후 전시했던 차량들은 우주탐험관 창고에 방치해 놓았다가 우주탐험관 철거 이후 소재관에 있었던 상태 좋은 프라이드와 함께 엑스포공원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해당 사실은 2015년 한 보배드림 유저가 최초로 폭로했다. 기아자동차에 따르면 대전관광공사와 협의하여 기증한 것을 회수하여 사내에서 별도로 보존할 것이라고 하였다. 2023년 현재 차량들은 전부 회수되었으며, 반면 같이 전시된 봉고나인, 삼륜차 T-2000, 브리사, 포텐샤는 대전교통문화연수원으로 옮겨졌다. 다만 안타깝게도 스포티지 생산 2호차는 사고로 앞부분이 파손된 채로 폐차장에 방치되어 있다가 결국 폐차되었다고 한다.[28] 그리고 세피아는 폐차 얘기가 도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철거된 자동차관 자리 역시 기초과학연구원 부지로 편입되었고, A동 북측 주차장으로 사용중이며 추후 새 연구동을 신축할 계획이다.
그리고 2024년 현재 실제로 새 연구동을 짓는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6.13. 자연생명관
한국담배인삼공사(現 KT&G)가 제공하였다. 관람객들은 동물에 관한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는 극장과 식물에 관한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각각 나누어서 입장하였는데, 각각의 영화가 끝나면 전동장치에 의해 객석이 반 바퀴 돌아서 두 극장의 객석이 하나의 극장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의 극장에서는 생명에 관한 주제를 담은 영상물을 대형 스크린에서 관람하게 된다.
현재 기초과학연구원의 C동(인지 및 사회성연구단)이 들어서 있는 곳이 예전 자연생명관의 자리였다.
6.14. 자원활용관
상공자원부에서 제공하였다. 대전 엑스포의 주무 부서인 상공자원부에서 직접 납시어 건립한 전시관으로, 타 전시관의 모범이 되기 위한 규모(그래봤자 정보통신관의 1/2 정도)와 전시물을 갖추었다. 가장 인상적인 전시물은 태양에너지가 지구에 도달하여 풍력 등 각종 에너지가 되는 것을 형상화한 로봇 조형물인 에너지 코스모스이다. 수력을 상징하는 부분에서는 물도 쏟아지고, 태양 부분은 빙빙 돌고, 태양전지판이 들렸다 내려갔다 했다.
에너지 절약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기라든가, 에너지 퀴즈 등 풍부한 전시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헨들을 돌리거나 페달을 밟는 인력 발전기 종류가 이름만 달리한 채 곳곳에 산재해 있었는데,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엑스포 재창조 사업 이전에는 에너지관리공단으로 이관되어, 에너지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무료로 개방되고 있었다. 전시물들도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위에서 언급한 에너지 코스모스가 빙빙 돌거나 물을 쏟아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만든 전기로 철도 모형을 움직이는 전시물이 있는데, 움직이기 매우 힘들다.
2016년경에 기초과학연구원 공사로 인해 철거되었는데, 부지 내의 북쪽에 공터로 남아있었다가 연구원 측에서 건물을 새로 짓고 있다.
6.15. 재생조형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라는 엑스포의 부제를 살린 전시관. 4만여 개의 폐유리병으로 만든 지름 30m, 높이 15m의 원뿔형 구조물로, 내부에는 백남준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기초과학연구원 D동이 있는 곳이 과거 재생조형관의 자리였다.
6.16. 전기에너지관
한국전력공사가 제공했고, 시공은 계룡건설산업이 맡았다. 3D 아이맥스 영화가 상영되었고, 보통 영상물이 메인쇼인 곳은 전시물이 많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은 편이었는데 이곳은 전시물들도 매우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전시물만으로도 관람객이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상영물을 보지 않을 관객들은 길게 대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유연성 있는 운영을 하였다.
이곳도 기절 관객이 발생한 곳 중 하나이다. 사실 3D 효과는 소재관보다 전반적으로 떨어졌지만, 영화 극초반에 등장하는 원시인이 횃불을 관객에게 들이대며 위협하는 장면이 있어서, 입체 안경을 쓰고 있으면 불 막대기가 자기 얼굴 앞으로 휙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이 있다.
공기업인 데다 규모도 있는 만큼 폐관되기 전까지 비교적 꾸준히 관리되어 왔으며 이름도 예전 그대로 유지되어 왔었다. 덕분에 이명박 정부가 역점을 두었던 사업인 원전 수출 사업에 대한 전시물도 업데이트되어 있고, 내부 전시관에 흐르도록 되어 있는 물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엑스포가 폐회된 지 15년이 지난 2008년, 300만 번째 관람객 기념 행사까지 열었다. 다만 관람객 수가 적은 것은 사실이고, 행사가 끝난 지 오래 된 것도 사실이라 시설이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지는 않아 낡은 느낌이 있다. 2011년 8월, 영상관에서는 국내 창작 3D 애니메이션인 SEED LIGHT를 3D 아이맥스 영화로 상영하고 있었다. 내용은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면 있다.
엑스포 전시관들 중 정부관과 함께 현재에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둘뿐인 건물이며, 정부관이 대전이스포츠경기장으로 리모델링된 것과 달리 현재도 같은 성격의 전시관으로 열심히 활용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미래에너지움이라는 이름의 전시관으로 리모델링되었으며 한국에너지공단 대전충남지역본부 사옥 겸 홍보관으로 사용 중이다.
6.17. 정보통신관
한국통신(現 KT)이 공기업[29]일 당시 본때(!)를 보여주고자 만든 당시 최대의 전시관. 국내에서 유일무이하게 지어졌던 옴니무버 다크라이드이기도 했다.
두 개의 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주된 전시관은 정보통신주제관, 보조 전시관으로서 첨단통신전시관이 있었는데 첨단통신전시관에는 당시로서는 정보통신의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하이텔 체험 시설이 있었고, 남극 세종과학기지와 연결되는 컬러정지 화상전화까지 설치됐다.
정보통신관은 총길이 405m에 이르는 순환 궤도에 설치된 155대의 궤도차가 무한 루프식으로 돌아가고, 관람객들은 궤도차를 타고 통신 발전의 역사를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궤도차는 무한히 계속 들어오고, 느리나마 끊김 없이 연속적으로 관람객을 소화하는 구조로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는 물론 362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하여 최다 관람 전시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멀티미디어 극장에서는 여러 개의 슬라이드와 영사기를 이용해 여러 개의 화면으로 나누어 상영했다.
당시 한국통신이 공기업이었던지라 폐막 후에도 전시관의 운영을 지원해왔으나 1997년 외환 위기 사태 이후 적자가 누적된 채 시설물 리모델링이 안 됐고, 관람객 수도 줄어 2000년 9월에 운영 중단을 결정하여 10월 1일부터 쭉 휴관 상태였다. 이에 엑스포과학공원 측이 KT에 수차례 기부 채납을 요청했으나 전부 흐지부지되어 결국 2010년 엑스포과학공원 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되고 잔디가 심어져 야영장 부지가 되었다가, 그마저도 재창조 사업 때 사라졌다. 그 부지에 게시된 대전시 측의 철거의 변을 들어보자면, 이미 당시 정보통신관에 설치된 전시물들은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카카오톡은커녕 올레톡 같은 것도 전시되어 있지 않은 데다 하이텔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얼마 안 가서 과거가 되어 버렸고, 그나마 하이텔 서비스의 명맥을 잇던 파란마저도 사라져버렸다.
현재 이 위치에는 스튜디오큐브 미술센터동이 들어서 있다.
6.18. 정부관
국무총리비서실이 주관하여 중앙정부가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전시관으로서 대전엑스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주제관이었다. 길다란 복도 양편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은 대한민국이 폐허더미 속에서 당시의 번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과 미래의 비전을 관람객에게 보여주었다.
후에는 첨단과학관으로 바뀌었으며,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의 홍보관으로서 각 연구기관의 연구 성과나 소개 내용 등이 전시되어 있다가, 2015년 10월에 폐관되었다. 다만 철거되지는 않았으며, 지방 e스포츠 상설경기장 건립 사업을 유치함에 따라 500석 규모의 상설 e스포츠 경기장으로 리모델링되어 2021년 9월에 재개장하였다.
6.19. 조폐문화관
한국조폐공사가 운영했던 화폐 전문 전시관으로 당시 존재해 있을 때는 500원, 100원, 50원 순의 동전들을 쌓은 모습을 본덨던 전시관이었다. 국제전시장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박람회 폐막 후 철거되었다.
현재 스마트시티 아파트 203동이 있는 곳이 과거 조폐문화관 자리였다.
6.20. 주거환경관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제공한 주택 및 주거관련 전시관이며 전시장 모습도 새둥지에 있는 알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주거공간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국제전시장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박람회 폐막 후 철거되었다.
철거 이후 이 위치에는 스마트시티 아파트 202동이 세워졌다.
6.21. 지구관
쌍용그룹이 제공하였다. 입구와 실내를 정글처럼 꾸며놓은 것이 인상적. 새 소리도 들리고 벼락도 치고 그랬다. 당시 세계 최대 크기의 아이맥스 영화 초록 약속이 상영되었는데, 쌍용그룹에서는 엑스포 기간이 끝난 뒤 이 영상물을 세계 각지에 판매해서 수익을 얻을 계획이었다. 2002년에는 쌍용그룹이 워크아웃을 당해 사실상 해체되었고, 내부 장비의 임대 기간이 지나버려서 영화를 상영하거나 할 수는 없어서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휴관하다가, 2015년 10월 기준으로 철거되었다.
현재의 사이언스콤플렉스 C 게이트 북쪽과 기초과학연구원 C동 사이에 지구관이 있었고, 지금은 도로가 깔려있다.
6.22. 테크노피아관
럭키금성그룹이 제공하였다. 우주탐험관이나 자동차관과 마찬가지로 체험형 영상물(테크노피아로의 여행)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500년 후의 평화로운 미래인 테크노피아를 관찰하다 보니 느닷없이 악의 세력이 그곳을 침입하기에 쌍둥이 비행체 트윈스호(!)에 탑승하고 적을 무찌르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사물놀이 로봇이나 기술의 상징 금성사답게 HD TV, 반도체 속 한반도, 가상현실 체험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프리쇼 구역에는 PC의 내부를 표현한 오브제들이 있었는데, GS80586이라고 씌여 있는 칩도 있었다. 이외에도 LG그룹의 과거를 조명할 수 있는 럭키치약, 하이타이 같은 생산품도 실물 혹은 홀로그램(!)이 복도에 전시되어 있었다. 우주탐험관 등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알찼던 전시관.
당시 대기 시간을 기준으로 삼성그룹의 우주탐험관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전시관 중 하나였는데, 지금으로 치면 4DX 어트랙션이다. 한국에서 4DX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게 이보다 16년 후인 2009년 아바타가 상영되면서부터니 그 당시에는 최첨단 유흥 시설이었던 셈. 다만 유원지 어트랙션 타입이었던 삼성 우주탐험관에 비해 테크노피아관은 현재의 극장형 4DX에 가까운 형태였는지라 상대적으로 1회 수용 인원이 적으면서도[30], 한빛탑 근처의 바로 눈에 띄는 곳에 있어 관람객들이 붐벼 테크노피아관의 대기는 악명이 높았다. 시골의 할머니도 알 정도였고, 반드시 테크노피아관은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관람객이 많았다. 덕분에 개장 초기인 8월엔 오전 9시 개장과 동시에 서문과 남문부터 테크노피아관으로 옛 미국 서부의 들소 떼마냥 질주하는 초등학생과 인솔교사 무리들을 볼 수 있었고[31] 오후 1시~2시 정도에는 행사 요원이 와서 줄을 잘랐다. 더 이상 줄 서봤자 폐장 시간 전까지 못 보니 포기하고 다른 거 보러 가라고. 자르던 곳도 테크노피아관 근처가 아닌 까마득한 한빛탑 근처였다. 우주탐험관은 그래도 근성으로 줄을 서면 1회 수용 인원이 좀 더 많기 때문에 한창 때에도 5시간 정도 기다리면 관람할 수 있었다.
"테크노피아로의 여행" 전체 영상[32] 3D 그래픽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Boss Film에서 만들어 온것이다. 이 회사는 에이리언 3, 배트맨 리턴즈 등의 영화들의 특수 효과를 담당하기도 했다. 해외 1990년대 그래픽 데모릴에서도 자주 보이는 걸 보면 어느 정도 CG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영상인 듯. 테크노피아관뿐만 아니라 실제로 엑스포에서 활용된 영상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기술력을 뽐내기 위해 제작한 거라 1990년대 초반 전 세계의 3D 아트 디렉터들이 총 출동했다.
폐관 전까지는 시뮬레이션관으로 운영되었으며, 영상물은 가끔씩 교체되어 왔다. 물론 테크노피아와는 별 관계가 없는 영상물들이다.
기초과학연구원의 정문에서 들어오는 진입로가 과거 테크노피아관 자리 중심부를 관통한다.
6.23. 한국IBM관
한국 IBM이 제공하였다. 국제전시구역 내 전시관으로서 폐막 직후 철거되었다. 컴퓨터에 관한 내용보다는 자연 보호에 관한 내용이 주였다. 참가형 전시 공간인 '싱크 파티'에서는 터치스크린 소프트웨어 <갈락티파스>, 교육용 소프트웨어 <재미있는 가나다라>와 같은 당대 미발표 소프트웨어들을 체험해 볼 수 있었다.
VIP들에게는 동서게임채널 패키지 게임 할인권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전시관 내부에 동서게임채널이 배급하는 게임(브레인 박사의 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구역이 있었다.
현재 대전컨벤션센터 제1전시장이 있는 위치가 IBM관이 있었던 곳이다.
6.24. 한국후지쯔관
일본 기업인 후지쯔의 한국 법인 한국후지쯔가 제공한 전시관. 당시 후지쯔가 개발한 뉴로 컴퓨터를 이용한 뉴로 저글러라는 로봇이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본 다음, 3D 입체 영화를 관람하고 나오게 되어 있었다. 국제전시장 구역에 있어서 폐막 후에 철거되었다.
후지쯔관이 철거된 이후 이 자리에는 대전방송의 새 사옥이 들어서며 방송국 땅이 되었다.
6.25. 대전관
대전직할시(현 대전광역시)가 세운 전시관. 이곳에서는 대전의 역사와 미래를 알려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엑스포 당시 다른 전시관에 비하면 공기 취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건물 외형은 동부네거리에 있었던 대전탑[33]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며, 시공은 계룡건설산업이 맡았다.
이후 자동차관과 동시에 철거되었고, 현재 이 자리에는 대전교통문화연수원 본관이 있다.
6.26. 한빛탑
한화[34][35]가 제공하였다. 그래서 저 가운데에 세로로 '한 빛 탑 한 화 그 룹'이라고 적혀 있던 글자가 있었는데 이후에 글자는 떼어내졌다.
경주시 첨성대의 모양을 기초로 한 엑스포의 중심 건물로서 높이는 93m, 들어간 벽돌 수는 1993개이다.[36] 사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뾰족 고깔에 도넛을 끼워둔 모양으로 첨성대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외벽을 잘 보면 첨성대의 계단식 회색 벽돌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2024년 지금 시각으로 보면 별 거 없지만, 1990년대에만 해도 미래를 향하는 상징 같은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보이는 미래를 상징하는 각종 화려한 조형물들과 더불어 투명 강화 유리 바닥으로 된 고공 전망대 같은 건 그 당시엔 정말 희귀한 경험이기도 했다.[37] 이런 상징성 때문에 은근히 인기를 누렸던 곳 중 하나이다.
원래는 60m 높이의 건축물이 될 예정이었으나, 지역에서는 최소 200m(!)를 요구하였고 그 절충안이 엑스포 개최 연도인 1993년을 상징하는 93m. 디자인과 관련해서도 말이 있었는데, "감히 백제의 땅인 대전에 신라 유물인 첨성대라니!" 하는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 조직위원장의 설득으로 어찌어찌 해결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미디어 파사드예시 운영을 하므로 시간만 잘 맞춰서 가면 야경과 어우러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이후 2021년 6월 9일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장기화로 지친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한빛탑 전망대가 무료로 개방되었다. # 현재 대전관광공사에서 운영중이며 전망대에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
6.27. 엑스포 아트홀
엑스포 전시장의 부대시설 중 하나였던 극장이었다. 처음엔 엑스포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으며, 이후 엑스포아트홀로 한 차례 변경된 이후 CMB에서 인수했던 적이 있다. 엑스포 폐막 이후에는 어린이 뮤지컬 등의 중규모 공연 위주로 사용되었으며 2010년대 초반에 문을 닫은 후 몇 년간 방치되다가 2018년 경에 철거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엑스포타워와 대전신세계 Art & Science가 들어서있다.7. 대전 엑스포 참가국 및 국제전시관(폐막 후 모두 철거 및 철수)
대전 엑스포에는 1993년 개최 당시 주최국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108개국이 참가하였고 이외 UN, IOC 등의 국제기구가 참가하였다.대전 엑스포 국제관은 1993년 8월 7일에 공식 개막하여 엑스포 폐막일인 11월 7일까지 운영해 오다가 행사가 끝난 후에는 전시관이 모두 철거 및 철수하였으며, 전시물들은 모두 본국으로 보내졌다.
국가별로 독립된 전시관이 있으며 이 중 일부 국가는 대륙별 공동관을 통해 공동 참가를 했다.
당시 국제전시관이 모여있던 자리에는 현재 골프존 조이마루하고 KCC 웰츠타워, 대전 롯데시티호텔, 스마트시티 201동 등이 들어서있다.
7.1. 참가국 및 전시출품국(1993년 당시 기준, 가나다순)
7.1.1. 독립 전시관
- 나이지리아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덴마크
- 독일
-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 모형 제작 등은 고합그룹이 후원했다.
- 루마니아
- 말레이시아
- 모로코
- 몽골
- 미국
- 바티칸 교황청
- 베트남
- 벨기에
- 불가리아
- 브라질
- 브루나이
- 사우디아라비아
- 스리랑카
- 스웨덴
- 스위스: 초등학생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관이었는데 5개의 스크린을 이용한 다채로운 스위스의 모습을 보여줬다. 주로 스위스에 대한 고정관념(알프스, 시계 공업 등)을 깨고 스위스의 산업을 알리기 위한 내용으로 전시를 진행했다. 무엇보다 이 관에서는 네슬레 마일로를 판매했다. 더웠던 여름에 시원한 음료를 제공하는 전시관 컨셉이 제대로 먹힌 사례.
- 스페인
- 슬로바키아
- 영국
- 오스트리아
- 이란
- 이집트
- 이탈리아
- 인도
- 인도네시아
- 일본
- 자메이카
- 중국
- 체코
- 칠레
- 캐나다
- 콜롬비아
- 태국
- 파나마
- 파키스탄
- 페루
- 포르투갈
- 폴란드
- 프랑스
- 핀란드
- 헝가리
- 호주
7.1.2. 아시아 공동관
7.1.3. 아프리카 공동관
7.1.4. 중동 공동관
7.1.5. 중남미 공동관
7.1.6. 카리브 공동관
7.1.7. 남태평양 공동관
7.1.8. 독립국가연합 공동관
7.1.9. 발트 공동관
7.1.10. 국제기구
8. 그 외
- 대전엑스포는 이름은 엑스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테마파크에 가깝다. 당시의 엑스포 내에는 손님들이 탑승하여 즐길 수 있는 어트랙션, 이른바 놀이기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4D 씨어터와 다크라이드[39], 애니매트로닉스 극장까지 운영했다. 반면 대전엑스포가 내놓은 놀이공원은 꿈돌이랜드라고 따로 있었지만 퀄리티는 낮은 편이었고 2012년에 철거되었다. 꿈돌이랜드 위치에는 기초과학연구원 생활관 이외에는 아직 공터로 남은 공간이 많은데, 과거 블랙홀특급이라는 롤러코스터 선로가 통과했던 터널 구조물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과거 꿈돌이랜드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 엑스포 개최 시기를 포함한 1993년 여름은 1980년과 함께 한반도 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서늘했던 여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여름에 이상 저온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게 이때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그야말로 열지옥이 펼쳐졌다.
- 당시 상설전시구역은 월트 디즈니 월드의 EPCOT Center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체험형 영상물들도 그 업그레이드형들이 많았고, 각 대기업들이 경쟁심에 서로 첨단 어트랙션을 도입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EPCOT Center보다도 더 많은 첨단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폐막 후 관리 비용 문제가 커졌다.
- 각 전시관의 내용물에 광고 기획사들이 깊이 관여하였다. 이전에는 그와 같은 전시관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각 전시관 건설을 맡게 된 기업들은 결국 광고 기획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대전엑스포를 통해 축적된 이들의 경험치는 백화점 기타 상점의 상품 디스플레이의 고급화에 기여하였다. 즉, 오늘날 여러 상점들의 내부 인터리어/디스플레이는 대전 엑스포의 결과물이라는 것.
- 당시 연예계에 첫 발을 들였던 씨름 선수 출신 강호동이 대전 엑스포 개막일 다음날인 1993년 8월 8일 행사장 내 놀이마당에서 8시간 동안 악수 많이 하기 부문으로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하기도 했다. 당시 엑스포 행사장의 하루 입장객이 20만 명일 정도로 인파가 엄청나서 기록 도전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데다, 중간 휴식 없이 거의 1초에 한 번씩 악수를 해야 기록 경신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체력도 요구되었는데, 강호동은 이미 5회씩이나 천하장사로 등극했던 씨름선수였고,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에 기네스북 기록 경신이 예측되었다. 결국 강호동은 무사히 제한 시간 8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28233명과 악수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기사 링크 참고로 이 기록은 이듬해에 바로 깨졌다.
- 1993년 8월 10일에 한총련 국토순례단 소속 대학생 1백여 명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토록 하라고 촉구하는 대국민 서명을 벌이기 위해 서문과 남문을 통해 행사장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57명이 연행되었다. 참고.
- 1993년 8월 13일에 독일관에서 운영 식당 부채 문제로 인해 독일인 주방장 토마스 피카스키(당시 37세)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독일인 4명과 통역 도우미 1명을 인질로 잡고 흉기 소동을 일으켰고, 이에 공수단 1개 중대가 출동하여 두 시간 동안 대치하는 살벌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자칫하면, 대전 엑스포 흥행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던 것. 다행스럽게도 피의자 토마스 피카스키는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당시 대전서부경찰서 박봉관 민원실장의 중재를 요청했고, 이에 박봉관 민원실장이 현장에 도착하여 흉기를 버리고, 투항하도록 설득하여 사건은 해결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노쓰바하 디터 독일관장은 박봉관 민원실장에게 기념 메달을 전달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참고.
- 엑스포 전시장 내부를 돌아다닌 전기자동차는 한국전기연구소가 개발한 6인승 승합차 5대와, 기아자동차가 시설 참가한 기아 프라이드(물론 전기로 움직인다.) 4대, 기아 베스타(이것도 전기!)[40] 6인승 오픈카 3대였다.
- 한빛탑을 포함하여 볼거리가 풍부했던 몇몇 전시관들은 엑스포 당시에 관람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개장 후 30분만 늦게 가도 2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우주탐험관 같이 인기가 매우 좋았던 체험관의 경우 7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 각 전시관의 어트랙션들의 경우 외국의 기술을 수입해 온 것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국민 교육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일단 엑스포라는 행사 자체가 한국 자랑이 아니라 세계의 문명을 전시한다는 취지로 개최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번지수 잘못 잡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각 전시관을 건설하는 데 기업별로 200억~300억을 투자하였다. 폐막 후 신문 기사에 의하면 삼성그룹의 경우 우주탐험관 방문자 1인당 3만 원의 투자(라고 쓰고 손실이라고 읽는다.)를 한 셈이라고 한다.
- 전시관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도 버스 한 대에 전시품을 채워서 참가하였다. 사실 이때의 한국이동통신은 한국통신(현 KT)의 자회사였다. 모회사의 전시관인 정보통신관이 이미 있었고 그 전시관에는 이동통신과 관련된 것도 있었으니 따로 전시관을 낼 필요까지는 없었던 듯하다. 지금 SK텔레콤의 위상이라면 버스 한 대로 때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이때는 경부고속철도 차량 최종 선정 직전이었기 때문에 최종 후보였던 TGV와 ICE의 홍보 활동이 치열했다. 대전엑스포도 예외는 아니었고, 프랑스관에 가면 TGV의 목업과 홍보전시물을, 독일관에 가면 ICE의 목업과 홍보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었다.
- 1993년 8월 16일에 방영된 SBS 월화 드라마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 51회에 엑스포 행사장이 주 배경으로 나왔다. 축약본
엑스포 기간에 추석이 끼는 바람에 귀성길과 엑스포 관람 차량이 겹쳐서 역대 최악의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대전이 무려 17시간이 소요되었다. 참고로 느린 기차의 대명사 격으로 쓰이는 비둘기호가 당시 서울-부산 소요 시간이 약 12시간이다. 이 당시 비둘기호는 길 가다 선로 옆에 콘크리트 구조물만 있으면 다 정차했다 해도 될 정도로 느렸는데 이보다 짧은 거리인데도 약 5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10시에 서울에서 출발하면 다음날 새벽 3시에 대전에 도착하는 것. 당연히 비둘기호는 진작에 부산에 도착했다. 다만 이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많이 없어서 영남권과 호남권, 충청권 모두 경부/중부고속도로의 서울-대전 구간을 함께 이용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로, 이후에 논산천안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고속도로가 많이 생기고 고속철도와 저가 항공사들이 생기는 등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이런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 대회 준비 과정에서 700여명의 엑스포 도우미를 선발하여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었다. 비록 의미는 다소 변질되었으나, 오늘날 흔히 쓰는 도우미라는 단어의 시초가 이것이다. 도우미라는 단어로 인해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에서 둘째 며느리의 배역명 도우미(김희정 분)가 탄생했다. 배우 채시라가 명예 도우미로 대전 엑스포 홍보대사로 활약했다. 도우미 선발기준은 키 160㎝ 이상, 나이 만 18세 이상(1975년 이전 출생자)~만 30세 이하(1963년 이후 출생자)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미혼 여성이 해당되며 스튜어디스에 준한 규정을 적용해 선발했다. 폐막 후 이들은 특기를 살려 스튜어디스,[41] 아나운서, MC, 예절 강사 등이 되거나 주부가 됐고, 2005년에 일부 도우미 출신 100여 명이 '93대전엑스포 도우미동우회' 결성을 통해 재결합하여 10여년 간 대전사이언스페스티벌 등지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활발히 했다가, 현재는 자연 해체되어 대전 지역 모임만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다.(조선일보 기사, 충청투데이 기사)
- 행사장에서 북동쪽으로 약 3~4㎞ 떨어져 있는 전민동에 '엑스포타운'이라는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 엑스포 당시 행사 요원 숙소 겸 국내외 대전 엑스포 방문객의 숙박 시설로 썼다. 또한 엑스포타운은 '첨단 아파트'[42]라고 내세웠던 대전 엑스포 출품작이다. 엑스포타운은 외국 기업이 설계하고, 국내 유명 건설사[43]들이 시공하였다. 엑스포가 끝난 이후에는 1994년 2월에 '엑스포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미리 분양을 받아둔 일반인들이 입주를 시작하였고, 엑스포타운은 현재 평범한 대단지 아파트이다.
- 당시의 고속도로는 톨게이트 진입 시 자신의 목적 톨게이트를 직접 말하여 표를 받는 시스템이었다. 엑스포 당시 톨게이트가 신설되어 각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전 엑스포 한 장 주세요~" 하면 대전 엑스포 톨게이트 티켓을 검표원이 직접 주었다. 이후에는 통행권으로 바뀌었고, 하이패스가 도입됨에 따라 요금소를 무정차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 전시장을 도는 모노레일과 곤돌라가 있었다. 곤돌라는 위에 있는 사진들에서도 보이는 대로이고, 모노레일은 전시장을 빙 도는 순환선이었다. 역들 중 은하수역이 세계관 구역에 있었는데, 폐막 이후에는 다 철수한 세계관 구역만 휑뎅그렁하니 빈땅이어서 은하수역에 정차하면 꽤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다가 적자로 운행이 중지되어 2000년 경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모노레일이 먼저 철거되었으며 곤돌라는 몇 년 간 더 방치되다가 엑스포 재개발 사업 직전에서야 비로소 철거되었다. 곤돌라의 양 끝 탑승장이 있던 곳은 지금의 엑스포타워가 세워진 곳, 그리고 대전교통문화연수원 본관과 야외체험장 사이의 위치였다.
- 서울 말고 대전 엑스포에도 독일에서 기증한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44] 엑스포가 끝난 이후에도 공원에 전시 중이었다. 2018년 서울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이 워낙에 큰 파장을 일으켜서 그렇지, 대전의 베를린 장벽도 무개념한 사람들의 낙서로 인한 훼손이 심했다. 결국 해당 조각은 철거되었다.
- 당시 일반 입장권이 7000원이었다. 영화 티켓도 14,000원씩 받는 지금 생각하면 싸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과자 가격이 100원대, 짜장면 한 그릇이 2천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비싼 편이었다. 이 당시 식당에서 파는 백반 1인분이 1500원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2020년 현재 물가로 환산하자면 3만 원쯤 된다.
- 개최 기간 동안 KBS에서 소출력 방송인 '엑스포 FM 방송'을 운영했었다. 주파수 90.5㎒로 방송되었으며 하루 15시간 방송되어 KBS 2FM 프로그램 8시간[45] 자체 프로그램 7시간을 편성했다. 엑스포 FM 방송은 엑스포가 폐막된 뒤 폐국되었으며 이후 이 주파수는 대전국악방송이 쓰고 있다.[46]
9. 폐막 이후
엑스포 기간이 끝나고 나서, 엑스포과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름만 바뀐 채 운영해왔으며, 심지어 6차 과정 교과서에 표지 사진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참 기이한 일인데, 더 골 때리는 건 개막하기도 전인 1993년 5월 발매된 사이버 포뮬러 비디오판 5~8화에서 원래는 홋카이도 서키트였던 것을 대전 서키트로 번역한 것. 그만큼 대전 엑스포 자체가 당시 얼마나 큰 관심사였는지 엿볼 수 있다.대전시에서 폐부지를 개발 사업 관련으로 118억에 매입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18억에 남은 부대시설을 매각했다고 한다. 엑스포 재창조 사업으로 2014년 11월부터 철거한 후 그 자리에 스튜디오 큐브가 준공되었고, 신세계컨소시엄의 대전신세계 Art & Science, 엑스포타워, 기초과학연구원 본원이 들어섰다.
엑스포 폐막 이후에도 1997년 외환 위기 이전까지는 휴가철 때 종종 찾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나 IMF 외환위기 이후로 거의 망했다. 국제전시장 재개발 계획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가 되거나 지지부진하고, 간간이 몇 안 되는 방문자가 있지만 대부분이 와서는 실망하는 게 다반사. 화려했던 1993년 당시를 기억하던 사람이라면 폐허에 가까운 지금 모습을 보고 더더욱 슬퍼진다. 2023년이 넘어간 시점으로는 30년이 넘은 낡은 시설이고 현재는 아예 폐쇄하고 철거한 시설도 몇 된다. 그리고 테크노피아관의 프리쇼 구역으로 가면 전시 당시 쓰였던 몇몇 오브제나 전시 시설(거대한 키보드 등)이 수년째(?) 짱박혀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과학공원 안의 랜드마크인 한빛탑은 전망대 기능으로서 근근이 돌아간다. 입장료 없이 엘리베이터 위의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
개최 당시 한빛탑을 중심으로 동쪽의 국제전시구역만은 엑스포 폐막 후 철거하고 상설전시구역의 전시관들은 정비를 거친 후 계속하여 운영함으로써 국민 과학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역대 엑스포의 경우 폐막 후 대부분의 시설물을 철거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주요 전시관들을 모두 영구 시설물로 건축하는 이와 같은 시도는 나름대로 참신한 시도였다. 실질적으로는,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 3개월만 쓰고 무너뜨릴 시설물에 200억을 투자한다고 하면 누가 납득했겠는가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실 엑스포 행사장 바로 옆에 지금도 있는 국립중앙과학관이 그 당시에도 있었고 중앙과학관은 그 당시에도 학생들 수학여행의 단골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두 부지는 자기부상열차를 통해 이어졌기에 충분히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따라 주무 부처인 상공자원부는 행사 폐회 후 상설전시구역 위탁운영권을 대교그룹 계열 (주)엑스피아월드(현 대교D&S)에 넘겼고, 관리 기관 '대전엑스포기념재단'도 신설했다.
구 국제전시구역은 원래 재단 측이 국제교류센터로 개발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민간 상업 시설로 바꾸고 한국토지공사에 파는 바람에 결국 대전컨벤션센터와 대전MBC, TJB, 골프존 조미마루, 오피스텔, 스마트시티, 초등학교 분교장 등이 입지하여 엑스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어차피 국제전시구역은 철거가 쉽게 가건물로 설계되어 있기도 했고, 대전컨벤션센터의 국제 규모 전시 행사(MICE) 기능이 그 시절 국제교류센터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단/조직위 측이 오판했던 것은 민간 참여 전시관들의 유지 보수 비용이었다. 조직위 추산 1,400만 명의 관람객이 엑스포 기간 동안 다녀갔으니 대한민국 인구의 1/3은 이미 이 전시장들을 관람해버렸고, 엑스포 폐회에 따라 당연히 엑스포의 열기는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즉 이미 한번 본 컨텐츠로 채워진 어트랙션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설들이 수익성을 가지려면 다른 테마파크들이 그러하듯 전시물의 지속적인 업데이트가 필요했으나 현실적으로 엑스포 회장의 전시물들은 한국통신(현 KT)을 비롯해 한전, 주공, 조폐공, 코트라 등 공기업은 물론 삼성이나 대우, 현대 등의 당시 유수의 기업들이 당시 돈으로 200~300억 원을 투자하여 전시관 하나씩을 '겨우\' 지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체를 중견 재벌 대교그룹이 민간기업임에도 재단의 규제만 받은 채 위탁운영하게 되었으니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다. 위탁운영 조건으로 이익 재투자와 연간 70억 신규 투자 의무, 신규 시설 재단 기부 등이 끼어 있었다.
물론 엑스피아월드 측도 국내 최초로 번지점프 시설을 공원 내에 설치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엑스포과학공원의 관리를 맡아야 할 대전엑스포기념재단이 공원 운영과 상관없는 인사들을 채용하며 이들에게 봉급을 거하게 주는가 하면, 주무부처인 통상산업부가 공원 관리와 재단 감독에 신경을 안 쓴 탓에 전시관이건 각종 부대시설이건 서서히 낙후되기 시작했다. 엑스피아월드조차 재투자를 안 하고 수익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국민 과학교육의 장'이란 본연의 임무를 퇴색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KT(정보통신관)나 한전(전기에너지관), 정부부처(정부관, 자원활용관)는 그 특성상 지속적으로 시설 유지에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이미 200~300억의 비용을 지출한 민간기업들에게... 그것도 외환 위기 사태로 공적자금으로 연명하거나 공중분해된 그들로부터 전시관 유지 관리와 관련한 지원을 기대하기는 요원한 노릇이었고, 이 때문인지 엑스포 시절 상영물/전시물을 사골마냥 우려먹거나 문을 닫는 전시관들도 점차 늘었다. 참고.
어쨌든 격감하는 관람객 수에 1997년 외환 위기가 겹쳐 경영은 더욱 어려워지고 노사 분규까지 발생한 끝에, 결국 엑스피아월드는 엑스포과학공원의 운영권을 반납했다. 이후 대기업 혹은 해외 매각, 사이버파크 조성 등의 논의만 하던 중 1999년 1월 산업자원부에서 대전광역시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대전엑스포기념재단은 해체되었다.
대전광역시청에서는 엑스포과학공원을 관리하기 위해 1999년 9월 지방공사 '대전엑스포과학공원'이란 법인으로 설립하게 되는데, 대전의 보물단지[47]로서 대전광역시청이 인수하긴 했지만, 중앙정부에 비해 재정 상태가 상대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던 대전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고, 운영사 측은 시설 관리와 입장권 판매만 할 뿐 개별 기업 소유인 전시장 보수에 손댈 권한이 없으며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운영사도 1년에 50억여 원의 적자를 내면서 결국 2008년 행정안전부의 청산명령을 받기에 이른다.
안타까운 사실은 대교 같은 중견기업이 아닌 삼성에버랜드와 호텔롯데 월드사업부(롯데월드) 같은 대기업 계열사라든가, 서울랜드 같은 테마파크 운영 경험이 있는 회사에서 개발을 모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대교그룹 계열 엑스피아월드에 위탁한 후 그냥 그 시설 그대로 운영을 했으니 잘 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개 기업에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게, 위탁운영사에 쓸데없는 규제를 걸며 운영에 일일이 간섭한 대전엑스포기념재단과 이 재단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산업자원부도 똑같이 책임이 있다.
대전엑스포과학공원 법인은 청산명령을 받기는 했으나, 사업권은 대전컨벤션뷰로와 통합한 신규법인 대전컨벤션공사(현 대전관광공사)로 계승되어 한동안 운영되었다. 다만, 엑스포 재창조사업이라는 이름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현재 운영되고 있는 전시관은 다음과 같다.
엑스포 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철거된 시설은 다음과 같다. 박람회 폐막 후 바로 이전하거나 철거된 전시관은 취소선 처리.
도약관- 이매지네이션관(현 돔영상관)
- 테크노피아관(현 시뮬레이션관)
- 우주탐험관
- 자원활용관(현 에너지관)
조폐문화관- 인간과 과학관
- 지구관
- 자동차관
- 바디월드
- 꿈돌이토방
- 꿈돌이동산
롯데환타지월드북한물산관미래항공관: 제주도로 이전. 정석항공관으로 운영 중이다.- 자연생명관
- 정보통신관
- 재생조형관
시도관주거환경관한국후지쯔관한국아이비엠관- 자기부상열차관
- 번영관(대전무역전시관)
- 음악분수, 한빛광장
- 소재관
- 대전관
- 꿈돌이동산 사계절썰매장/수영장
- 정문광장 지구본 조형물
- 엑스포 아트홀
현재 엑스포과학공원의 운명을 두고 대전광역시청은 절치부심을 거듭하는 중이다. 관심 있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재창조 사업을 위한 설명회를 개최하는 한편으로 상설전시관의 경우에도 필요하면 철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고, 파라마운트 글로벌 사의 투자를 받아 부지를 완전히 철거하고 영화 테마 타운(실질적으로는 합천영상테마파크 비슷한 곳)을 건설하려는 계획도 밝힌 바 있다. 2012년 7월에 롯데그룹에서 테마파크 롯데월드 어드벤처를 비롯해 워터파크, 쇼핑센터를 결합한 사업계획서를 대전광역시청에 제출하여 사업 승인이 났다. # 가칭 대전 롯데월드로 불리는 이 시설은 2013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2016년에 개장을 목표로 사업이 진행 중인데 기존 엑스포 시설을 거의 모두 철거하고 재개발에 들어가는지라 대전 시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아, 대신 2015년 1월 신세계그룹이 사업권을 따내 2018년 개장을 목표로 했지만 연기되어 2019년에 대전 사이언스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착공되었다. 관련 기사. 다만 이쪽도 알력이 없진 않은 듯하다.
2013년 6월에는 엑스포 부지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의 핵심인 기초과학연구원 및 부속 중이온가속기 건립이 결정되었다. 관련 기사 롯데월드는 토지 형질 변경에 막혀 진행이 흐지부지되는 듯. 재개발 계획 중 과학 산업 진흥 시설 외 유락 시설은 없나 싶었는데, 스튜디오 큐브는 꺾이지 않은 채로 재개발 부지에 세워지는 걸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2015년 1월 공사 과정에서 동쪽 부지에서 조선 시대 주거지 터와 농작물 토층, 자기 파편 등 문화유적이 출토되면서 과거 엑스포 준비 과정에서 생긴 부실 표본조사 문제가 제기되자, 문화재청 심의 후 시행사인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시굴조사를 맡기면서 건설에 차질이 생겼으나 4월 들어 유적의 중요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 아래 공사가 속개되었다.
현재 최종적으로 영구 보존하기로 한 엑스포 당시의 건물은 다음과 같다.
- 한빛탑
- 대전엑스포기념관-대전통일관
- 첨단과학관(옛 정부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진행하는 지방 e스포츠 상설 경기장 건립 사업에 활용.
- 전기에너지관: '미래에너지움'이라는 이름으로 변경 후 한국에너지공단 대전충남지역본부 사옥 겸 홍보관으로 활용.
- 미래항공관: 제주 대한항공 정석비행장으로 해체 이전.
이제 한빛탑 정도만 빼면 한 시대로 저물어간 엑스포장이지만, 대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이다 보니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SBS 국민의 선택에서 대전광역시의 랜드마크로 선정되어 방영되었다. 2012 여수 엑스포는 전라남도의 랜드마크로 선정. 참고로 옛 대전 엑스포 부지에 세워진 대전 사이언스콤플렉스의 타워 이름도 대전 엑스포 타워이며 엑스포가 개최된 연도인 1993년의 의미를 담아 193m로 지어졌다.
엑스포 남문주차장의 경우 넓은데 오는 사람은 드물어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충남, 대전 지역의 전의경 훈련에 사용되기도 했다. 흔히 볼 수 없는 크고 아름다운 주차장 부지에서 주민들의 민원 걱정 없이 훈련할 수 있는 곳은 엑스포밖에 없었다고... 근데 대전에는 기동중대 1개, 방범순찰대 5곳뿐이라[48] 타 중대는 진압 검열 때 빼고는 거의 못 온다. 크고 넓고 인적이 드물어 훈련에는 최적의 장소였지만 날이 더워질수록 엄청나게 힘들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넓은 부지가 모두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여름에는 극도로 뜨거워지고 그늘 자체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설을 철거한 자리에 세워진 국내 최대의 영화/드라마 세트장인 스튜디오 큐브가 개장되었다. 첫 대관 타자는 1987. 이후 블랙 등 연이어 이 시설에서 촬영할 작품들이 이어지면서 스튜디오 큐브가 영상업계에서 어떤 반응을 끌어모을지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세트장인 만큼 일반인들에게는 통상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하며, 견학 예약을 하면 촬영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스튜디오 큐브는 세운 지 6개월 만에 물이 새서 방수 공사를 했다거나[49] 운영이 지역 친화적이지 않아서 빈축을 산 모양. TJB 보도
방문기(2012년 12월경)
도우미로 활약했던 여성들은 폐막 이후에도 30년 넘게 지난 현재까지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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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3년 당시 대전의 영문 표기는 Taejŏn이었다. 이후 2000년 7월 로마자 표기법이 바뀌어 오늘날과 같은 Daejeon이 된 것. 여기에서는 당시 공식 명칭을 따라 부호를 제외한 Taejon으로 적는다.[2] 내국인: 95.2%, 외국인: 4.8% 조선일보 1993년 11월 6일자 신문[3] 지금은 엑스포다리가 자전거, 보행자 전용 교량이지만 과거에는 차량 통행이 가능했다.[4] 추가로 사진 하단에 노란색과 파란색의 트레일러가 줄줄이 연결된 차량은 코끼리열차로, 엑스포 이후 서울대공원에서 운행하다가 2012년에 전기 코끼리열차로 변경되었다.[5] 실질적 주제는 부제 쪽인 것 같다는 의견도 있지만, 서울 올림픽에 이어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미래상을 보여주는 자리였기에 새로운 도약이라는 주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6] 중간에 설악산에서 열린 1991년 제17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있었고 올림픽처럼 정부 지원이 많이 들어갔지만, 이건 보이스카우트 전용 행사였다.[7] 오른쪽에 있는 노란 캐릭터다. 왼쪽에 있는 남자아이는 한꿈이로,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바뀐 후에 생긴 마스코트다. 꿈돌이 역시 대전광역시 마스코트로 편입되었고, 2010년대까지는 한꿈이가 주력으로 사용되었으나 여러 매체를 통해 꿈돌이가 다시 인지도를 얻으면서 현재는 다시 꿈돌이가 대전의 메인 마스코트로 활약하게 되었다.[8] 1986년 아시안 게임은 민주화 이전에 열린 행사였고 1988년 올림픽은 6월 항쟁을 거쳐 6.29 선언 이후 다시 군부 출신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열렸다.[9] 등록엑스포가 아니라는 한계는 있으나 올림픽 이후 개최한 엑스포로써 각국의 경제 부흥을 세계에 공포한 대회라는 점에서 전대의 1970 오사카 엑스포, 후대의 2010 상하이 엑스포와도 비슷한 포지션이다.[10] 이 당시 서울의 최고 번화가 중 하나였던 압구정동에서 따왔다.[11] 이 당시는 아직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이었다. 초등학교로 바뀐 건 1996년의 일이다.[12] 1987년생(유치원생), 1981년생(국민학교 6학년), 1978년생(중학교 3학년), 1975년생(고등학교 3학년).[13] 평일 오전 10:00~10:30, 오후 5:00~5:30.[14] 당시만 해도 인터랙티브 키오스크는 거의 오버 테크놀로지로 취급되었다.[15] 엑스포에 참가하는 각국은 자신들의 전시관을 자신들의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한국이 참가한다면 한국관은 한국 정부 예산으로 짓는다. 모든 경기장을 개최국의 예산으로 건설하는 올림픽 등과는 다르다.[16] 1988년 개정 규약에 규정되고, 1996년부터 시행된 인정박람회이다. 2012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여수 엑스포는 인정박람회다.[17] 당시 미국 의회가 미국의 대전 엑스포 참가 예산을 배정하는 데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세계박람회기구에서도 탈퇴했다.[18] 말은 1시간 내인데 도서 지방을 제외해도 경기 김포, 강원 속초, 전남 해남, 부산에서는 2020년대에도 1시간 내 도달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고속도로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걸린 시간이 약 2시간이다.[19] 일정 주제에 한정되는 전문 엑스포가 종합 엑스포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는 5년 주기의 World Expo와 그 사이의 International Expo로 나뉘어진다.[20] 그나마도 정부관은 엑스포과학공원 역사전시실과 대전이스포츠경기장으로 계속 사용중이긴 하지만, 해당 구역 이외의 계단실이나 엘리베이터 등 자투리 공간은 폐허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21] IMF 사태 이후 현대정공, 대우중공업의 철도 차량 사업 부문과 통합되어 한국철도차량으로 출범하였고, 지금의 현대로템이 되었다.[22] 그나마도 북한이 처음 참가한 엑스포는 17년이 지난 2010 상하이 엑스포이다. 북한은 원래 엑스포에 잘 참가하지 않는다.[23]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경기, 강원,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충남, 충북, 제주. 참고로 울산이 경남에서 분리된 시기는 1997년이며,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한 시기는 2012년이다.[24] 현재의 4DX보다는 유원지에 있는 어트랙션형 영상 기기였다.[25] 지금은 엑스포과학공원 정문으로 이전.[26] 물론 진품은 아니고 레플리카이다.[27] 현재는 현대로템과 현대모비스로 분리되어 있으며, 모두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이다.[28] 사진에서는 뒷부분만 나와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앞부분이 찌그러진 것이 보인다.[29] 당시는 공기업이었지만 2002년 민영화와 함께 사명을 KT로 바꾸고, 2009년 자회사인 케이티프리텔(KTF)을 합병하여 유무선을 아우르는 거대 통신사가 됐다.[30] 1일 7,000명 수용이 가능했고 관람 소요 시간은 최대 45분. 우주탐험관의 경우 1일 1만 6,000명. 관람 소요 시간은 30분.[31] 남문은 엑스포다리를 건너와야 하니 동선 및 거리상 서문보다 불리했다. 그래서 보통 학교 단체 관람객들은 국립중앙과학관 앞 도로에서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서문 앞에 줄 서 있다가 입장하자마자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32] 성우는 박기량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은 오세홍과 박은숙이 목소리를 맏았다.[33] 1971년 박칠성이 설계하고 한진건설이 세워 대전시에 기부채납하였으나, 엑스포가 열리기 전인 1990년에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며 철거되었다. 철거 이후 대전탑에 설치되었던 조각상은 가양 비래 근린공원으로 이동되어 전시 중이며, 동부네거리에 대전탑의 축소 모형이 건립되어 있다. 관련 기사[34] 당시 계열사 제일화재도 대회 기간 중 'EXPO 보상 서비스센터'를 운영했다.[35] 참고로 한화그룹 창업주와 2대 회장이 천안 출신인데다 대전에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전R&D센터, 대전사업장(군수사업장), 한화솔루션 중앙연구소, 한화 이글스, 베이스볼 드림파크, 갤러리아 타임월드 등 충청권에서 벌인 사업이 상당히 많아 충청권 향토기업 취급을 받고 있다.[36] 물론 벽돌만으로 지은 건 아니고 시멘트 블록이나 철근 콘크리트 등이 많이 쓰였다.[37] 개장 초기 남산서울타워에 외부 전망대가 있긴 했지만 투명 바닥은 아니었다.[38] 1993년 11월 마스트리히트 조약 발효 이후 유럽연합(European Union)으로 출범.[39] 정보통신관의 궤도전시장. 한국의 유일한 옴니무버 다크라이드였다.[40] 이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선보인 전적이 있다.[41] 선발 방식이 동일해서 도우미 출신들은 바로 특채되었다.[42] 그 당시 파격적이었던 비디오폰, 홈 오토메이션 등을 각 세대별로 설치하였기에 첨단 아파트라고 했다.[43] 대우건설, 롯데건설,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44] 엑스포 당시 독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45] 현재까지도 KBS 2FM은 대전을 비롯한 비수도권에 송출하지 않고 대전 지역에서는 98.5㎒와 102.1㎒(청주시)로 1FM과 2FM을 합친 단일 채널로 운영하여 2FM의 일부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이후 2001년 이후 2FM의 광고 방송 시작으로 굿모닝 팝스를 제외하고 1FM을 편성하여 2FM의 프로그램을 라디오로 들을 수 없었다. 이후 DMB인 U-KBS MUSIC이 2FM을 릴레이하여 DMB로 들을 수 있고 2016년부터 KBS 제2라디오의 일부 시간대에 방송하고 있다.[46] 당시 국가적으로 밀어주던 행사들은 이런 전용 라디오 방송이나 기간한정 인쇄 매체 등도 완비되어 있었다. 1991년 제17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때도 일간신문(!)이 찍혀나왔고, 2000년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EM) 때는 이 기간 동안 KBS에서 영어 라디오 방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후 이 기능은 TBS(서울)의 영어방송과 TBN(제주)의 중국어 방송으로 넘어간다.[47] 당시 대전직할시청 부시장을 하던 박성효가 그러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나라당 후보로서 대전광역시장에 당선되지만 결국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낙선.[48] 기동중대 2개, 방범대 1개가 더 있지만 대전이 아닌 기타 지역에 배치돼 있다.[49] 단순한 건물 하자가 아니라 부실공사가 의심될 정도라고 한다.[50] 이 문서와 관련된 이유는 엑스포 행사기간 때만 임시로 운영하려고 만든 역이기 때문이다. 대전조차장역 안에서 사용된 역이다. 자세한 내용은 엑스포역(대전) 문서 참조.